소설리스트

43화 (43/60)

43화

1층에서 신나게 술 마시고 있는 현무와 해의 뒤에 숨어 기다려 봤지만, 어쩐지 내려오는 소리가 없었다.

상의는 벗은 채로 어깨까지 물려서 불그스름한 흔적을 가지고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창피하긴 했지만 일단 살아남는 게 문제였다.

“뭐야,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짐짝처럼 들려서 올라간 지찬이 허겁지겁 헐벗은 꼴로 뛰어 내려오자 현무와 해의 얼굴이 뜨악해졌다.

“미쳤나 봐요. 한성이 드디어 미쳤어.”

“에엑?”

“진짜 잡아먹을 것처럼 막 깨물더라니까요.”

“이상하다. 한성 님 원래 주사는 없으셨는데.”

“아니야. 아니라고요. 진짜 눈이 이래서 다가오는데 완전 짐승 눈빛이었다니까요?”

“키야, 한성이 짐승이긴 하지. 그 녀석이 밤에도 짐승이구나핫!”

이미 술이 알딸딸해진 현무가 쓸데없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해도 키득키득 웃으며 별로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무서운 일을 겪은 지찬 혼자만 답답해 죽을 맛이었다. 여기 있어 봤자 어차피 보호도 못 받을 것 같고, 아직도 내려오지 않는 걸 보니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걱정도 됐다.

너무 힘껏 차 버려서 아픔에 혼절한 건 아닌가? 사람의 급소도 거기고, 신이라도 별다를 게 없는 건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지찬이 몸을 숨기든 말든 상관없이 술잔 부딪치기 바쁜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그는 슬쩍 일어나 이 층으로 향했다.

어쩌면 그 어둠 속에서 몸을 숨기고 제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도 있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그에게 한 짓이 있으니 살아 있는가 확인 겸.

불을 켜지 않은 이 층 복도를 걷는데 삐걱거리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려왔다. 마치 공포 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컴컴한 복도의 끝에 다다르면 뭐가 있을지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 내가 이렇게까지…… 망할 호랑이 같으니라고.”

문 앞에 서서 손잡이를 잡긴 했지만, 선뜻 힘을 주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만약 거기가 아파서 죽어 가고 있으면.

눈을 질끈 감고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끼익’ 비명을 지르는 문소리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얼굴을 겨우 비집고 볼 수 있을 정도만 열어 방 안을 살폈다.

바로 보이는 침대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아까 제가 빠져나온 그 상태 그대로인 것 같았다.

눈만 요리조리 돌려서 어둠 속을 살펴보자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한성이 눈에 들어왔다.

지찬은 헉, 하고 놀란 숨을 삼키고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달려가 한성의 몸을 흔들었다.

“어, 어쩌지. 한성, 한성 씨. 일어나 봐요.”

진짜 죽은 건가? 겨우 그거 때문에? 아니, 물론 거기 차면 아프긴 하지. 거기 차여서 죽었던 사람이 있던가? 신도 그렇게 죽을 수 있나?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미동도 없는 한성의 몸을 흔들며 눈물이 핑 돌려는 찰나에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가슴팍에 귀를 대고서 심장이 잘 뛰고 있는지 확인해 보자 쿵, 쿵, 쉴 새 없이 잘 뛰고 있었다. 오르락내리락 고르게 숨을 뱉으며 잠들어 있던 것이었다.

한성이 무사하단 사실을 확인하자 맥이 탁 풀렸다.

“아, 진짜. 오늘 사람 여러 번 놀라게 하네.”

옆에 주저앉은 채 한성의 코를 세게 비틀었다. 그런데 그 순간 한성이 끙, 하고 몸을 뒤척이더니 커다란 팔로 지찬을 휙 낚아챘다.

맨바닥에 얼떨결에 함께 눕게 된 지찬은 혹시 한성이 깨어 있는데 장난치는 게 아닌가 싶어 힐끔 돌아봤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잔뜩 긴장하던 몸이 한순간에 풀려 버리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다시는 같이 술 마시나 봐라.”

그리고 따스한 한성의 품에 파고들어 잠을 청했다.

* * *

‘쿨럭, 쿨럭…… 하아, 하윽.’

등을 돌린 채 한참이나 기침을 뱉은 남자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는 손을 들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휘청거리는 몸을 감당하지 못하면서도 서 있는 게 위태로워 보였다.

‘제발, 나 좀…… 진운 씨.’

옆에 있는 작은 탁자에 손을 짚고서 어깨를 들썩이는 모양을 보니 울음이 터져 나온 모양이었다. 탁자 위엔 널브러진 약병과 쏟아져 나온 수많은 알약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손으로 약을 한 움큼 잡아 바닥으로 집어 던지고, 그 옆에 있는 이젤을 쓰러뜨렸다.

‘이깟 거 계속하면 뭘 해요. 계속 아프잖아. 아프기만 하잖아!’

어두웠던 방 안에 조금씩 형태가 드러나자 바닥엔 찢어진 종이들로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다. 부러진 연필, 쏟아진 물병, 그리고 물감까지. 여러 색으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단아.’

뒤에서 낯선 남자가 지쳐 있는 남자를 불렀다.

‘또 이런 거야? 많이 아팠어?’

‘언제까지 이래야 해요? 나 그만 아파도 되잖아. 그만해도 되잖아!’

‘미안해. 이무기의 힘으론 아픔을 누르기엔 역부족인가 보다. 더 큰 힘을 찾을게. 조금만 기다려. 응? 아파도 조금만 참아 봐. 내가 황룡이 되면, 네 아픔 모두 낫게 해줄게.’

‘싫어, 싫어, 싫어! 그냥…… 그냥, 나 좀 죽게 내버려 둬요. 제발…….’

진운의 품에 안긴 채 울음을 터뜨린 단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절박하게 외쳐도 돌아오는 답은 ‘조금만 더.’

‘당신이 힘을 갖겠다고 다른 신수 죽이는 것도 이젠 싫어. 그냥 우리 둘만 행복할 수 없어요?’

‘그러기 위해서 하는 거야. 단아, 단아…… 내가 정말로 신이 되면, 우리 영원히 행복할 수 있어.’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고. 울먹이는 단을 끌어안은 진운의 눈동자에도 고통이 스며들었다.

‘대신 아파 줄 수 없어 미안해. 자꾸만 견뎌 달라고 해서 미안해…… 널 찾아내서 미안해. 널 사랑해서…… 정말 미안해.’

꼭 껴안은 채로 숨죽여 우는 두 사람의 모습이 갑자기 흔들렸다.

“……찬아, 반려 님.”

순식간에 잠에서 깬 지찬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무슨 꿈을 꾸기에 그러는 게야.”

“한성……?”

여전히 바닥에 누워 있는 제 몸을 흔들며 깨운 한성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꿈이기엔 생생했고, 왜 하필 단과 청룡이 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아프다던 단이 종종 생각나곤 했지만.

“왜 여기서 잠들었어?”

“네?”

“아니, 여기…….”

“아, 어제 기억을 못 하신다?”

“어…… 아니, 그게…….”

“산 채로 잡아먹겠다고 으르렁거리던 것도 싸악 잊으셨다?”

잠에서 깨자마자 왜 바닥에서 자고 있냐고 하는 한성의 물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이놈의 호랑이를.

“내가? 그대를? 산 채로?”

“네. 네가요. 나를. 산 채로.”

막 나가도 상관없었다. 어제 제게 한 짓에 비하면 이 정도는 당연히 봐줘야 하는 게 아닌가.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여기 보여요? 볼이랑 어깨?”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자고 일어나고도 자국이 사라지지 않은 어깨를 들이밀며 따졌다. 그 자국을 보고서 입을 다문 한성이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기억은 나는데, 나는 진짜로 그대를 산 채로 잡아먹는다고는 안 했어.”

“맞아요. 진짜로 잡아먹는다고만 했었죠.”

“그럼, 난 진짜로 잡아먹으려고 했던 거지 산 채는 아니…….”

“그 진짜로 잡아먹는 게 뭔데요?”

“합환주…….”

“어제 당신 눈빛은 그게 아니었다니까!”

긁적긁적. 난감한 듯 턱을 긁으며 아무 말이 없는 한성을 노려보고선 지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침대가 아닌 딱딱한 바닥에서 잠을 잔 탓에 온몸이 뻐근했다. 목을 돌리고 어깨를 팡팡 두드리고선 아빠 다리를 한 채 팔짱을 끼고 한성을 바라봤다.

무릎을 꿇은 채 제 앞에 있는 모습이 처량해 보였지만, 이런 모습에 봐줄 수는 없지.

“술을 마시고 자제가 안 되면, 못 마신다고 미리 말을 했어야죠!”

“원래 주사는 없었는데…….”

“원래 없던 주사가 갑자기 생겼겠어요?”

“그대가 있어서 자제를 못 했나 봐.”

“내 탓이란 거예요?”

“어.”

허, 기가 막혀 웃은 지찬이 한성을 잔뜩 노려봤다. 뻔뻔하게도 제 탓이란다. 따박따박 말대답을 하는 거로도 모자라서 이젠 자기 탓이라니.

“그래요. 내 탓이라 이거죠? 그럼 당분간 각방 씁시다?”

“뭐?”

화들짝 놀라 커다란 몸을 움찔 떠는 한성을 보고 더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내 탓이라면서요.”

“아니, 우리 합방 한지 얼마나 됐다고 각방이라니. 너무하지 않으냐.”

“나 때문에 자제를 못 하시겠다면 나를 안 보면 되는 거 아니에요?”

“반려 님…….”

끼잉, 하고 꼬리가 달렸다면 탁, 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바닥을 내려쳤을 게 분명한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번뜩 스치는 생각에 핸드폰을 찾아 시간을 확인했다.

“헉, 지각!”

휴가 끝내고 첫 출근인데 곧 출근 시간 임박이었다. 지찬은 한숨을 푹 내쉬고선 팀장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한성이 몸을 틀어 침대맡에 선 지찬을 강아지 같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네, 팀장님. 저 거래처 좀 들렀다 들어갈게요. 네, 아. 네네. 이 대리한테 들었습니다. 네. 들어가서 보고드리겠습니다. 네. 네, 이따 뵙겠습니다.”

분명 지각인 건 눈치챘겠지만, 몇 년을 다니면서 근태 문제로 속썩여 본 적이 없는 지찬이라 눈감아준 게 분명했다.

대충 씻고 제가 휴가 동안 트러블이 있었다는 거래처를 들렀다 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원래는 회사에 들어가 없던 동안 진행된 업무 파악이 먼저이긴 했지만 말이다.

제가 갈 땐 특별한 불만 같은 게 없던 곳이었는데, 이 대리와 마찰이 있던 건지 그걸 또 수습할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첫 출근부터 이러다니.

뻐근한 목을 돌리고서 욕실로 들어가는데 한성이 지찬의 바짓자락을 붙잡았다.

“왜요?”

“출근하는 게야?”

“해야죠.”

“진짜, 각방…… 쓰게?”

“써야죠.”

“그대는 너무 냉정해.”

흥, 콧방귀를 끼고 욕실로 들어갔다. 세면대를 바라보고 서자 어깨에 물린 자국이 조금은 연해져 있었다. 붉게 달아오른 흔적을 한번 쓰다듬고 피식 웃었다.

‘저렇게까지 풀 죽을 줄은 몰랐는데, 내가 너무 심했나?’

무서웠던 건 사실이었지만, 별다른 일도 없었고 그가 자신을 나쁜 의도로 해칠 거라고는 생각되진 않는다. 그저, 그 자제가 안 되는 밤일이 세상 무서울 뿐.

물론 제가 도발을 한 거긴 하지만 정신을 잃을 정도 밤새 관계를 나누고 난 지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다시 제어 안 되는 저 짐승 밑에 깔린다고 생각하니 절로 몸이 부르르 떨려 왔다.

‘그러지 말고, 이참에 교육 좀 해봐?’

이를테면 호랑이 조련. 시도 때도 없이 발정 난 호랑이를 얌전하게 만드는 특별 교육 같은 거 말이다.

영원히는 아니어도 몇십, 몇백 년을 살아야 하는데 그 사는 동안 계속 이렇게 절륜한 호랑이에게 시달리면 삐쩍 말라비틀어질 것 같기도 했다.

상상을 해보니 그 모습도 웃겼다.

이따 회사에 복귀하고 나면 호랑이 조련에 대한 검색이라도 해볼 생각을 하면서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오랜만에 입는 것 같은 정장을 껴입고서 나서는 지찬에게 재순이 달려와 토스트 하나를 건네줬다.

“안 일어나길래 아침 먹을 정신 없을 것 같아서 토스트 만들었어요. 먹으면서 가.”

“아, 감사해요.”

원래 아침은 안 먹긴 했는데, 그동안 한성 집에서 챙겨 먹은 게 금세 습관이 된 건지 안 그래도 꼬르륵하고 배 속을 울리는 느낌에 가면서 뭐라도 사 먹어야 하나 고민하던 터였다.

막 만들어 따끈한 토스트와 작은 우유 하나를 건네주는 재순을 바라보고 지찬은 쑥스럽게 웃었다.

이런 느낌, 정말 오랜만이다.

누군가 아침을 챙겨 주는 게 정말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정말 고맙습니다.”

“내일부터는 깨워 줄게요. 아침 먹고 가야 든든하게 일하죠.”

선하게 웃는 그 모습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한참 뾰로통해 있던 한성이 지찬의 앞에 와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녀와.”

어쩐지 쑥스러운 마음에 현관까지 배웅해 주는 재순과 한성을 향해 조심스레 인사를 건넸다.

“그럼…… 다녀올게요.”

“조심히 다녀와요. 지찬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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