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한참을 주방에서 복닥거리던 이들이 투명한 유리병에 담긴 술과 술잔을 들고 나왔다. 술병을 고이 모시고 나올 때는 어디 진귀한 보석이라도 품은 듯이 미소가 귀에 걸려 있었다.
“그게 귀한 술이에요?”
“그럼요! 이게 얼마나 귀한 술인데요.”
해가 방실방실 웃으며 대답하는 모습을 보며 병 안에 든 내용물을 보자 튼실한 삼 한 뿌리가 술독에 빠져 있었다.
“와, 엄청나네. 이거 뭐예요? 인삼?”
“인삼에 비교할 수가 없죠. 이름하여 산삼주!”
“산삼이요?”
“네, 그것도 자연 100년근 산삼이에요. 한성 님이랑 저쪽 산에서 망자 산책하다가 발견했어요.”
“와, 자연산 산삼을 눈으로 보는 날이 다 있네요.”
신기한 듯 지찬이 병에 가까이 붙어 구경하자 해의 표정이 의기양양해졌다.
“멋있죠? 담근 지 3년이 지났으니까 맛도 풍미도 아주 뛰어날 거예요. 여태 이걸 언제쯤 먹어야 좋을까 고민했는데, 반려 님이 오셨으니 합환주로 딱 맞죠!”
아마, 겸사겸사 저 술이 고팠던 게 분명했다. 하지만 저렇게들 좋아하는데 술은 못 마신다고 하기에도 뭐하고 그냥 어설프게 웃고 있었다.
담근 술은 다른 술보다 알코올이 더 세게 느껴져서 소주 반병에 취하는 지찬도 한두 잔이면 넋을 놓게 했다. 전에 회사 과장님이 집에 초대해 과실주라며 주던 것을 맛있다고 넙죽 받아먹었다가 정신을 잃은 이후부터는 담근 술은 절대 입에도 대지 않았었는데.
어디서 구한 건지 예쁜 도기 술잔에 조금씩 따라 한성과 지찬에게 건네줬다.
“원래는 표주박을 반으로 갈라 거기에 드셔야 더 맞지만, 없으니까 이렇게라도 해요.”
눈빛을 반짝반짝 빛내며 어서 마시길 기대하는 듯이 바라보는 현무와 해의 눈빛에 지찬이 한성을 바라봤다.
한성은 그저 어이가 없는지 술잔을 가만히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한 잔 정도는 괜찮으냐?”
“아, 네. 한 잔 정도는 뭐. 맥주도 4캔까지는 마셔요.”
잔을 들어 냄새를 맡아 보니 향긋하고 알싸한 냄새가 풍겼다. 요란하지 않게 잔을 부딪치고 고개를 돌려 한 잔 쭉 들이켜니 달곰하고 처음 느껴 보는 향긋한 풍미가 입안에 확 퍼졌다.
“와, 달아요. 설탕 같은 거 넣고 담그신 건가요?”
“아뇨. 원래 산삼주는 그렇게 달콤해요. 맛있죠?”
쓰읍, 입맛을 다시는 해를 보며 저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하고 술을 탐내는 모습을 보니 뭔가 이질적인 기분이 들었다. 나이야 한참 많겠지만 뭔가 나쁜 짓을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입술을 닦으며 잔을 내려놓는 지찬에게 해가 손안에 꼭 쥐고 있던 말린 대추를 건네줬다.
“여기요. 대추 물고 한성 님이랑 나눠 씹으세요.”
“에?”
이거 너무 야매 아니에요? 물으려다 대추를 냉큼 가져가 입에 무는 한성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으응.”
입에 물고 턱을 치켜들며 어서 오라는 듯 재촉하는 모습에 지찬의 한쪽 입꼬리가 실룩였다. 아, 다들 보는 앞에서 이런 낯부끄러운 짓이라니.
겨우 한 모금 정도나 되는 술 한잔이었지만, 서서히 얼굴이 달아오르고 있음이 느껴졌다.
“어서요. 반려 님.”
앞에서 빤히 기다리고 있는 이들을 둘러보다 입술을 감쳐 물고 한성을 쳐다봤다. 안 그래도 입안이 온통 술로 진동을 해서 무언가 먹고는 싶었는데, 이런 걸 원한 건 아니었다.
합환주라고 들떠서 올 때만 해도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에 없었는데.
천천히 한성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반쯤 삐져나온 대추를 물었다. 너무 가까워서 입술이 닿는 느낌도 들었지만, 최대한 빨리 베어 물고 뒤로 빼야겠다는 생각에 앞니에 힘을 주는데 금세 잘라 먹은 한성이 더 바싹 붙어 대추를 지찬의 입안으로 밀어 넣고 혀를 감아 왔다.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뒤로 도망가는 지찬의 뒷덜미를 잡아 더 진하게 입을 맞추는 한성의 힘을 이길 수가 없었다.
뜨악한 지찬과 현무, 해의 표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작정 들이대는 한성의 가슴팍을 때리다 귓불을 붙잡아 비틀자 겨우 떨어져 나갔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아차. 한성 님 술 못 드시지.”
소파 끝으로 뒷걸음질 쳐 도망 온 지찬이 해의 말에 황당한 표정으로 한성을 바라봤다. 저도 지금 술기운이 올라와 홧홧한데 불난 곳에 기름을 붓듯이 달려드는 통에 온몸이 화끈거렸다.
그런 지찬을 바라보는 한성의 눈빛이 조금 풀려 있었다. 그는 픽, 웃고는 벌떡 일어나 지찬을 어깨에 둘러메고서 커다란 보폭으로 2층 계단을 올랐다.
“으악!”
“가만히 있어.”
찰싹.
바둥거리는 지찬의 엉덩이를 따끔하게 때리고선 유유자적하게 방으로 향했다. 등 뒤에서 해와 현무가 ‘우린 시끄럽게 술이나 마실 테니 걱정하지 말고 해!’ 따위를 소리치는 것을 들으며 짐짝처럼 덜렁 들려와 침대에 내동댕이쳐졌다.
“아얏, 한성. 왜, 왜 그래요.”
아무리 술이 약해도 그거 한 잔에 이렇게 눈빛이 풀릴 수 있을까? 싶었지만 아마 두 눈으로 보고 있는 한성을 보니 그런 부류도 있구나 싶었다.
그런데 고삐 풀린 망아지, 아니, 호랑이처럼 저를 침대에 던지고서 기세등등하게 다가오는 저 모습을 보니 정말 무서웠다.
“내가 무서워?”
“이, 이렇게 달려드니까 그렇죠! 정신 좀 차려 봐요.”
“내 정신은 멀쩡해.”
“눈이 안 멀쩡해!”
“내 눈도 멀쩡해. 네가 잘 보여. 어여뻐. 붉게 달아오른 뺨을 한 입 베어 물고 싶어.”
그러고는 입을 벌려 지찬의 볼을 진짜로 깨물었다.
“아야! 아, 미쳤나 봐!”
“맛있어. 계속 맛보고 싶어.”
“또 깨문다고요? 싫어!”
“맛만 볼게. 그 입술도 반짝 윤이 나는 게 탐스럽다.”
또 성큼 다가오는 한성의 모습에 ‘으아악!’ 소리를 지르며 지찬이 데구루루 굴러 침대 밖으로 도망쳤다.
방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붙잡자마자 어디선가 바람이 제 허리를 휘감고 뒤로 끌어당겼다. 고요한 방 안에 바람이 휘몰아쳐 가구와 액자가 덜컹거리는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이끌려온 지찬은 다시 한성의 아래에 털썩, 눕혀졌다.
“어디 가.”
“아, 아니.”
“날 두고 어딜 가시나.”
“물 좀 마셔요. 술 좀 깨야 할 것 같은데?”
“안 취했어.”
“당신 눈 풀렸다고!”
그 말에 흥, 하고 비웃던 한성이 지찬의 손목을 결박한 채 입술을 베어 물었다. 아까처럼 이를 세우지 않고 입술로만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하으…….”
어찌나 열정적으로 문대고 빨고 있는지 타액으로 질척거리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렸다. 상의를 들추고 가슴을 지분거리면서 목 아래로 점점 내려가며 빨아 대는 통에 통증을 동반한 흥분이 몰려왔다.
힘 조절을 못 해 살짝 잡아 비트는 것도 아플 정도로 짓누르고 있었다.
“앗, 아파요.”
“조절이 안 돼.”
“안 되면 하질 말아야지!”
“그건 싫어.”
또박또박 말대답은 잘하는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그가 자주 쓰던 옛날 말투가 아니었다.
“아니, 왜 취하면 말을 더 잘하는 건데!”
“비밀.”
“별것이 다 비밀이네! 비켜요!”
“내가 싫어?”
“아니이.”
왜 또 그런 표정으로 묻고 난리람. 누가 당신이 싫다 그랬나.
“그럼?”
“아, 아프게 하니까 그렇죠. 팔도 좀 풀어줘요.”
“그래? 그럼 됐어.”
다시 고개를 숙여 티셔츠를 말아 올려 살결을 탐하는 한성을 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되긴 뭐가 됐다고! 아우, 힘은 또 왜 이렇게 세!”
“대추 맛있었어?”
“맛도 못 봤거든요. 짐짝처럼 어깨에 들려 오다 입에서 떨어졌어요.”
“난 맛있었는데.”
하이고, 그랬어요? 우쭈쭈, 라고 해줘야 할 판이었다. 배와 옆구리를 물고 빨고 핥다가도 갑자기 고개를 들어 뜬금없는 질문을 반복하는 모습을 보며 지찬은 속으로 혀를 찼다.
신도 주정을 부리다니.
“음, 근데 대추보다 네가 더 맛있어.”
아, 더 높은 신이시여. 이 주정뱅이 신 좀 어떻게 해주세요.
어떻게든 진정시켜야 할 것 같아서 이를 악물었다가 처연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한성, 나 아파…… 응? 좀 놔줘요.”
“많이 아파?”
목소리 톤이 살짝 높아졌다. 취한 와중에도 아프다고 하니 놀란 모양이었다. 그리고 금세 힘을 풀어 지찬의 손목을 놓아주자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빠져나왔다.
“자꾸 도망가면, 진짜로 잡아먹어버릴 거야.”
으스스한 한성의 말에 지찬이 어깨를 살짝 떨었다. 살짝 오르던 취기는 저 멀리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한성의 말투가 너무 진심인 것 같아서 식은땀이 흘렀다.
“술 깨면 해요. 응? 지금은 진짜 잡아먹을 것 같아서 무섭단 말이야.”
“진짜 잡아먹을 거야.”
침대에서 빠져나온 지찬이 뒷걸음질 치며 방문 쪽으로 다가가자 한성이 눈빛을 빛내며 천천히 다가왔다.
어느새 어두워진 방 안에 한성의 안광이 형형하게 빛났다.
저거 분명 진심이다. 어떤 식으로든 잡아먹을 게 분명해. 지금 잡히면 내일은 없을지도 몰라.
별별 생각이 다 드는 와중에 한성의 입꼬리가 비뚤게 한쪽만 삐죽 올라갔다.
“지찬아.”
“이름은 기억하네요.”
“그럼, 내 반려인데. 근데 자꾸 어딜 가는 거야. 왜 도망쳐?”
“다 알면서 왜 물어요.”
“몰라. 몰라서 묻는 거야.”
“술 좀 깨 봐요. 나 진짜 무서워요.”
흐응, 콧소리를 내며 코앞까지 다가온 한성이 고개를 삐뚤게 기울고서 지찬을 바라봤다.
“매번 내가 다가가면, 너는 도망가기 바쁘군.”
그 말에 지찬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랬지, 늘 도망가기 바빴지. 술에 취한 한성에게 직접 들으니 어쩐지 미안해졌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말이겠지.
취기에 얼마나 애가 달았으면 이런 말을 할까.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과 그 전은 조금, 아니, 많이 달랐다.
“미안해요.”
지찬의 고개가 떨궈졌다. 그 틈을 타 한성의 손이 지찬의 상의를 벗겨 내고 천천히 어루만졌다. 옆구리를 쓰다듬으며 지찬의 어깨에 고개를 올려 이빨로 콰득 문 한성이 기분 좋은 듯이 쿡쿡 웃었다. 그 아픔에 지찬이 살짝 몸을 떨었지만, 그 외에 다른 반응은 없었다.
“미안해요. 오늘까지만 도망칠게요.”
그 말에도 정신없이 지찬의 어깨를 핥고 바지를 벗기려는 한성을 보고는 무릎을 올려 세게 찼다.
“윽!”
다행히 평소라면 먹히지 않을 발길질이 취기에 통한 듯했다. 휘청거리는 한성의 몸을 밀어버리고 지찬은 1층으로 내달려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