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60)

40화

지찬은 한성을 데리고 번화가 쪽으로 나왔다. 처음엔 낯설어 따로 떨어져 걷다가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곳으로 가자 한성이 손을 휙 낚아채 꼭 쥐고 걸었다.

힐끔거리는 시선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어쩐지 그 커다란 손깍지에 낀 손을 내칠 생각도 못 했다.

“이런 장터는 너무 오랜만이군.”

“장터라뇨. 번화가.”

“아, 번화가.”

“제발 노인네 티 좀 내지 마요.”

“아, 우리 반려 님은 나를 너무 홀대하는…….”

“바깥에 있을 땐 그냥 이름으로 불러요.”

내뱉는 말마다 딴지를 거는 지찬의 목소리에 한성의 입이 살짝 삐져나왔다. 힐끔 돌아본 얼굴이 뾰로통하여지자 지찬이 남모르게 웃음을 삼켰다.

아무래도 말투부터 좀 바꿔야 하지 않을까, 집에 돌아가면 그가 말하는 네모난 상자라도 함께 보면서 자연스러운 말투로 고치게 시도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다 화려하게 치장한 휴대전화 가게로 들어갔다. 말끔하게 정장을 입은 사내가 앞으로 나와 친절하게 인사를 하고 매장 안으로 지찬과 한성을 이끌었다.

“핸드폰을 하나 사려고요.”

“아, 생각하셨던 모델은 있으신가요?”

“아뇨. 딱히, 그냥 전화나 메시지만 잘되면 상관없을 것 같긴 한데…….”

애플리케이션을 자유자재로 다룰 것 같지 않은 한성을 떠올리며 말끝을 흐리자 직원이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어떤 분이 쓰실 건가요?”

“여기 이 사람이요.”

지찬의 말에 옆에 직원은 멀뚱히 서서 매장 안을 빙 둘러보는 남자를 바라봤다. 한국에선 쉽게 볼 수 없는 장신에 옷 위로도 쉽게 그려지는 탄탄한 몸을 가진 남자는 얼굴마저도 수려했다.

모델이거나 배우 정도 되려나. 화려한 외모에 비해 면바지와 티셔츠 한 장 걸친 남자의 차림새는 역시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는 공식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는 모습이었다.

“그러시면 원래 쓰시던 기종은 어떤 건가요?”

“없어요.”

매장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그냥 입 다물고 있으라는 지찬의 나지막한 경고에 대답하려던 입술이 살짝 달싹이다, 치고 들어오는 지찬의 말에 금세 입을 다물었다.

“손이 좀 커서 너무 작은 건 좀 그렇고, 화면이 좀 큰 거로요.”

그러고 보니 나이를 그만큼 먹었으면 시력은 괜찮으려나, 하고 한성을 돌아보자 억울한 표정이 보였다.

“나 시력은 좋아. 그대의 작은 솜털 하나까지, 읍!”

“제발 좀 닥쳐요.”

이럴까 봐 매장에 들어오기 전에 입 다물고 있으라고 경고를 했던 건데, 금세 제 생각을 읽고 억울함을 토로하는 한성의 입을 손으로 막은 채 이를 갈았다.

한성의 말에 어색하게 웃던 직원이 이번에 새로 나온 모델이라며 핸드폰 하나를 들고 와 가격대와 요금제 따위의 이야기를 즐비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그중에 제일 싼 요금제로 해달라고 부탁을 하고 지찬의 명의로 핸드폰을 샀다.

어차피 핸드폰이 다 거기서 거기인지라 기본적인 사용법은 집에 가서 알려 주면 되겠다 싶어 서류 작성을 끝내고선 손에 들려 주는 쇼핑백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한성의 볼멘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이건 그대와 다른 게 아닌가.”

“다르죠. 제 것은 쓴 지 3년이 넘어요. 이건 최신 모델이래요.”

“나도 같은 거로 하고 싶은데…….”

“에? 이미 샀는데? 진작 말하죠.”

“말도 못 하게 하고선.”

입이 댓 발 나와 퉁퉁거리는 한성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한성은 진심이었던 것 같았다.

“최신 모델이 더 좋은 건데.”

“상관없이 난 그냥 그대와 같은 게 좋은걸.”

“커플 핸드폰?”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단어에 지찬의 귓가가 빨개졌다. 기왕 사는 거 좋은 거로 해주고 싶었던 마음에 산 건데, 한성은 같은 것을 공유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이, 이미 샀는데요. 고장 나면 그땐 같은 거로 바꿀게요.”

별걸 다 커플로 하재, 괜히 쑥스러운 마음에 뒷덜미를 긁적이며 걸었다. 그러자 한성이 쇼핑백을 휙 낚아채 다른 손에 끼고선 지찬의 손을 움켜쥐었다.

“지찬아.”

“네, 네?”

갑자기 들려오는 제 이름에 지찬이 화들짝 놀랬다. 이름을 불러 달라고 한 건 저였는데 그 이름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진다.

‘지찬아…… 반려 님. 하아…….’

잠자리에서나 낮은 한숨과도 같은 뜨거운 속삭임으로만 들어서 그런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저 목소리로 듣는 이름이 이렇게 부끄러울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대낮 길거리에서 대체 무슨 음란한 생각 중인 게야.”

“아, 아니거든요. 그냥 갑자기 떠오른 것뿐인 거든요. 왜, 왜 불렀어요.”

아닌 게 아니라는 티가 확 나게 말까지 더듬으며 말하는 지찬을 보던 한성이 빙긋 웃었다. 귀여운 아이. 농을 칠 때마다 반응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시도 때도 없이 건들고 싶어졌다.

“옥가락지나 하나 나눠 낄까?”

이건 농이 아니고 진심이었다.

“뭐, 옥가락지요?”

그래도 반려고 앞으로 일생을 함께해야 하는데 혼례는 치르지 못하더라도 무언가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요즘 옥가락지로 커플링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진심이었는데, 지찬은 또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단칼에 잘라 버렸다. 대체 과거와 지금이 얼마나 달라졌길래 옥가락지의 의미가 이리도 퇴색된 건지.

“그럼 금지환은 어떠하냐. 여름에는 끼질 않는다 하여 옥가락지를 생각한 건데.”

하긴, 예전보다 기교가 뛰어나 금으로 만든 가락지도 많이들 끼는 듯했다. 과거에야 옥이야 금이야 워낙 귀하기도 했고, 궁중에선 특히나 계절 따라 끼는 고리의 장식품의 종류도 달랐지만, 현대에는 조금 더 보급화가 된 것 같았다.

제 손에 얌전히 잡혀 있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바라보며, 금보단 옥 반지가 더 잘 어울릴 것도 같았는데, 하고 생각에 빠져 있는데 지찬이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고개를 돌린 게 눈에 들어왔다.

“왜 그러는 게야?”

평소 같았으면 핀잔을 주고도 남았을 아이가 고개를 돌린 채 길만 정직하게 걷고 있었다. 한 걸음 더 앞서서 지찬의 앞으로 서니 발갛게 익은 얼굴이 보였다.

“어디 아픈 거야?”

“아뇨.”

여름 끝물이라고는 하지만, 혹시 더위를 먹은 게 아닌가 걱정이 된 한성이 손을 들어 지찬의 이마를 만지자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아니라, 그냥…… 조금 쑥스러워서요.”

지찬의 알 수 없는 말에 한성이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가락지를 나눠 끼자고 한 게 부끄러웠던 건가, 현대와 많이 동떨어진 제 말이 창피했던 걸까.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전혀 생각을 못 했는데, 반지를 나눠 끼자니까…… 조금, 뭐랄까. 진짜 부부…… 같기도 하고…….”

지찬도 가벼운 연애는 스치듯 몇 번 했었지만, 누군가와 어떤 물건 같은 것을 나눠 낀다는 것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동안 반려가 어떻고, 사방신이 뭐고 하는 폭풍 같은 일상을 지내다가 갑작스레 정말 ‘반려자’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오묘한 게 가슴께에서 자꾸 거품 같은 것이 몽글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보다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정확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자꾸만 붉어지는 얼굴을 가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 지찬을 바라보는 한성의 눈빛에서 행복이 넘쳐났다. 그리고 아주 충동적으로 입을 막고 있던 손등 위에 입술 도장을 찍었다.

그 느낌에 잠깐 넋을 놓고 있던 지찬이 한성의 얼굴을 밀쳤다.

“그, 그, 뭐 하는 거예요!”

“너무 예뻐서.”

“길거린데!”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내 앞에 있는 네가 너무 어여쁘고 눈부시다는 거야.”

주변의 시선을 느낀 지찬이 고개를 푹 숙이고 한성의 손을 잡아끌어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요즘 같은 세상엔 길거리에서 해괴한 짓 하면 그게 다 SNS에 떠서 망신당하기 일쑤라고요.”

“천 년 가약을 맺은 반려끼리 애정이 담긴 일을 하는 것이 뭐가 해괴한 짓이란 말이냐.”

“그 사람들이 알겠어요? 우리가 천 년 가약인지 청년 뜨악인지!”

“라임이 좋구나.”

“와, 라임은 또 어디서 주워들었데?”

“나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

“아는데 왜 안 하느냐고요.”

“아는 것과 활용하는 것은 다르지.”

“됐어요. 됐어. 빨리 오기나 해요! 힘도 센 게 왜 자꾸 버티면서 걸어요!”

“거리가 좋지 않으냐. 바람도 좋고, 그대가 원하는 세상 속에 나와 있는데.”

한성을 끌어당기며 종종걸음을 옮기던 지찬이 문득 멈춰 섰다. 어느새 쏠렸던 시선들은 온데간데없고, 다들 각자 갈 길 가느라 바쁜 사람들 틈 속에 섞여 있었다.

“북적이고 정신이 없긴 하지만, 한 번씩 이리 나와 걷는 것도 좋을 것 같구나.”

작은 목소리로, 네 얼굴에 활기가 도니 나도 참 좋다. 하고 속삭인 한성의 목소리에 심장이 저릿했다.

한성과 자신이 언제까지고 이렇게 사람들 틈 속에 섞여 들어도 어색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십 년, 이십 년, 그리고 혹은 몇백 년이 흐르고 나면 자신도 진짜 이방인이 되어 이 틈 속에서 너무도 낯선 존재로 서 있으면 어떤 기분일지 생각하니 조금 씁쓸해졌다.

“불안한 것은 당연해. 낯설지 않게 종종 오자꾸나. 네가 한참이나 어리니 세상 이야기를 내게 알려 주면 되지 않으냐. 그럼 나도 너를 따라 낯설지 않게, 세상과 어울려 보마.”

한성의 든든한 말 한마디가 마음을 따뜻하게 울렸다.

이렇게 뜬금없이, 갑작스레 두려워지고 투정 부리고 싶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닐 텐데, 그런 제 마음을 수없이 겪어 왔을 한성도 마찬가지로 두렵고 혼란스러웠던 나날들이 있었을 텐데 말이다.

지금은 제 손을 꼭 잡고, 든든하게 뒷배가 되어주겠다며 믿음직하게 서 있으니 그마저도 미안하고 고마웠다.

“나오길 잘했네요.”

“응.”

“고마워요.”

“나도 고맙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 단둘뿐인 것처럼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 우뚝 선 채로 서로를 바라보는 이 짧은 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유치한 생각도 했다.

한성의 손을 살짝 잡아끌었다.

“여기서 키스하면 정말 큰일 나겠죠?”

“난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아서요.”

“그럼, 잠깐 가리면 되지 않느냐.”

한성이 손을 들어 지찬의 얼굴을 감싸자 갑작스러운 바람이 휘몰아쳤다. 오직 한성과 지찬이 있는 곳만 마치 폭풍의 눈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돌풍 같은 거센 바람에 모두 눈을 가린 채 소리를 지르고 아우성을 치는 동안 그들은 아주 짧은 입맞춤을 나누기 시작했다.

아랫입술을 빨아 당기고서 말랑한 혀가 입안으로 파고들었다. 입속을 헤집고 고른 치열을 훑다 지찬의 혀를 옭아매고 뒤섞였다.

한 손은 여전히 깍지를 낀 채 늘어뜨리고, 다른 손으로 서로의 얼굴을 부여잡은 채 짧은 키스를 마무리했다.

마지막으로 윗입술을 살짝 베어 물고 떨어진 한성이 지찬의 입술을 엄지로 쓱 닦아 냈다.

“힘을 이런 데다 써도 괜찮아요?”

“내 힘인데 어디다 쓴들.”

“벼락 맞을 것 같은데.”

지찬과 한성은 서로 키득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거센 돌풍이 언제 왔다 갔느냐는 듯 멀쩡해진 주변 공기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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