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60)

39화

한참을 품속에 안겨 있던 지찬의 숨소리가 고르게 바뀌고 나서야 한성이 천천히 몸을 빼내었다. 혹여라도 작은 움직임에도 깰까 걱정이 되긴 했지만, 그의 안에 성기를 파묻은 채 있으려니 다시 발기할 것만 같아 최대한 숨소리도 낮춘 채 움직였다.

“으응…….”

움찔거리며 투정 부리듯 잠결에 뱉는 소리에 한성이 조금 굳었다. 몸을 일으켜 하얀 나신 위에 이불을 덮어 올려 주었다.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지쳐 보이는 얼굴을 한번 쓸어주고서야 욕실로 움직였다.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을 들고 와 땀에 찌들었던 지찬의 몸 구석구석을 닦아주고, 찔끔찔끔 새어 나오는 정액을 바라보며 지금이라도 빼내야 할까,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많이 고단했던지 세상이 뒤집혀도 모를 만큼 깊이 잠에 빠진 지찬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혹시라도 손가락을 넣었다가 불편해서 깨면, 그것도 미안하니까.

게다가 체력적으로 숨은 찼지만, 가라앉지 못하는 열기는 매끄러운 피부만 봐도 벌떡벌떡 일어나곤 했다.

지찬의 고백을 들었을 땐 정말 물불 안 가리고 다시 한번 더 잡아먹고 싶은 욕심이 컸지만, 눈꼬리에 잠을 대롱대롱 매달고 올려다보는 그 나른함에 못 이겨 그냥 꼭 안고 있는 거로 대신했다.

곱게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 올려 덮어준 뒤, 한성은 이불 위로 옆에 나란히 누워서 지찬을 바라봤다.

둥근 이마를 따라 하늘로 솟은 예쁜 콧대, 그리고 짧지만 빼곡하게 들어찬 속눈썹. 열매처럼 빨갛고 도톰한 입술이 하염없이 바라만 봐도 좋았다.

전생과는 다른 모습, 다른 성격이지만, 아이의 본질은 다르지 않았다.

유약한 것 같으면서도 언제나 올곧게 정직한 곳을 바라볼 줄 아는 그 마음이 어찌나 예쁜지, 그저 바라만 봐도 가슴 밑에서 몽글거리는 이상한 기분에 괜히 지찬의 오뚝한 코끝을 문질렀다.

손가락 끝으로 콧대를 쓸어내리다 도톰하고 말랑한 입술 위를 톡톡 건드렸다. 그리고 며칠 사이 살이 빠진 볼을 손등으로 조금 어루만지며 안타까운 표정을 했다.

그때 코를 찡긋거리며 옆으로 돌아눕는 지찬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대로 금방 눈을 뜨고 바라볼 것 같은 모습에 한성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한쪽 팔을 접어 베고 정면으로 지찬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니 다디단 잠이 몰려왔다. 스르륵 내려와 눈가를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을 조금 넘겨서 쓸어주고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지찬의 손을 잡았다.

“내가 곁에 있으니, 부디 고운 꿈만 꾸거라.”

그리고 한성도 오랜만에 눈을 감았다.

* * *

지찬은 잠에서 깨는 느낌이 들자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기분 좋은 풀 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얼마 만에 달게 잔 건지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묵직한 무게도 어쩐지 안정감이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한성이 곁에 있다는 것은 눈을 뜨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곁에서 함께 있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정말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힘들었던 정사 후라 그랬을까. 알 수는 없었지만 만족스러웠다.

천천히 눈을 떠보니 코앞에 한성의 잠든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이었다. 늘 항상 깨어 있던 모습만 봤던 기억이 있다. 두 눈을 감고 곤히 잠에 빠진 얼굴을 보고 있자니 괜히 가슴속 어디에선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몽글몽글하게 피어오르는 느낌이었다.

손을 움직여 한성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려고 했지만, 묵직하고 커다란 한성의 손에 잡혀 있어 빼내지도 못한 채 한숨만 푹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저는 이불에 얌전히 쌓여 있는 것에 비해 한성은 여전히 나체로 이불을 깔고 잠들어 있었다. 아직 여름이라고는 하지만, 집 안이 그렇게 더운 편은 아니라 혹시 춥진 않을까 걱정되었다.

감기도 여름 감기가 더 괴롭고 지독했다. 지찬은 손을 살짝 빼내 제가 덮었던 이불을 반대로 걸쳐 주고 한성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주었다.

먼저 까무룩 잠들었던 것 같은데 제 몸은 역시나 보송하게 깔끔했다. 욱신거리는 몸은 전날의 격한 정사가 있었음을 알려 주었지만, 더러운 흔적 하나 없었다. 매번 이렇게 제 몸까지 닦아주고 잠든 모습을 바라보면서 한성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곤하게 자는 모습을 보니 쓸데없이 또 눈물이 나오려 했다.

반려.

끊임없이 말해주는 나의 반려 님, 이라는 단어에 담긴 의미. 조금씩은 알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그 의미가 조금씩 제게 와닿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당신도, 내 반려 님.”

고개를 살짝 움직여 굳게 다물고 있는 한성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한성의 입꼬리가 너무도 기분 좋은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한 번 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말을 하는 한성을 보여 지찬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뭘요.”

“방금 했던 거, 한 번 더.”

그리고 입술을 쭉 내미는 모습을 보고는 웃음이 터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쭉 빠져나온 입술을 손가락으로 툭 치고선 침대 옆에 잘 개 놓은 옷을 찾아 입기 시작했다.

허리와 엉덩이가 뻐근한 게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다리 한쪽을 들다 멈칫하고 침대에 주저앉았다. 한성도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자리에 앉고는 그런 지찬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어딜 가시려고.”

“아침이니까요.”

옷을 주섬주섬 입는 지찬을 보며 다시 집에 가려는 건가 싶어 살짝 마음이 조급해졌다. 부부도 이런 부부가 없을 거였다. 정사가 끝난 후 헐레벌떡 집으로 가 버리는 부부 사이라니.

정을 통하고 냉큼 사라지는 서방님의 뒷모습을 보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에 한성의 눈매가 찡긋하고 구겨졌다. 뭔가 뒤바뀐 것 같은데.

“아침인데 어딜 간단 말이야.”

“혼자 있는 집도 아닌데 그럼 발가벗고 주방에 가요?”

“주방에?”

“네. 배고파서, 밥 안 먹어요?”

마치 당연한 일을 묻듯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모습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니. 배고파.”

“그럼 옷 입고 내려와요.”

지찬은 두어 걸음 걷다 멈춰서 허리를 집으며 ‘아얏’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다시 걸어 나갔다. 문이 닫히고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나자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

머리를 어지럽게 헝클이며 웃는 한성의 미소가 꽤 행복했다.

문밖을 벗어난 지찬의 얼굴은 이미 터질 것처럼 홧홧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언제부터 깨어 있던 걸까, 이미 소용없는 걱정을 하면서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두 손으로 비비며 1층으로 내려갔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목소리가 들리고 환한 거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삐걱거리는 계단 소리를 들은 재순과 해가 고개를 돌려 지찬을 바라보자 두 여자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반려 님 일어나셨어요? 배고프시죠?”

“배, 배고프시겠다아. 야, 약과라도? 아니지. 바바밥 드세요!”

일어섰다 앉았다 약과를 들었다 놨다 하며 허둥대는 모습을 보자 전날 욕실과 침실에서 야릇한 신음을 지른 장본인이 바로 저였다는 걸 깨달았다.

방음도 안 될 텐데 뭘 믿고 그렇게 바락바락 소리를 지른 건지, 뒤늦게 후회해 봤자 별 소용은 없었다.

“잠시 여기 앉아 계세요. 금방 밥 준비할게요.”

한성을 피해 내려왔는데, 더 난감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머쓱해진 지찬이 뒷덜미를 문지르며 어색하게 웃자 재순이 빠른 걸음으로 주방에 들어갔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가끔가다 실수하는지 ‘어머, 어머’ 하는 재순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왜 그러고 서 있어?”

그때 뒤에서 한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옷은 따로 갈아입질 않은 건지 가운을 여민 채로 나온 한성이 멀뚱히 서 있는 지찬을 향해 물었다.

“아, 지금 앉으려고요.”

그제야 몇 발자국 걷던 지찬이 욱신거리는 허리를 다시 부여잡았다. 그 모습에 해가 두 손으로 얼굴을 잡고는 한성을 윽박질렀다.

“세상에! 반려 님을 얼마나 못살게 괴롭힌 거래!”

부끄러운 소리야 이제는 부부의 연처럼 닿은 분들이시니 그렇다 치지만, 지찬이 허리를 부여잡는 모습을 보니 저번에 목 언저리에 붉게 씹어 놓은 게 생각이 났다.

딱 봐도 제일 멀쩡한 한성이 범인이었다. 겨우 돌아온 반려 님을 괴롭히다니! 두 눈에 번쩍 안광이 스쳤다. 그리고 잔소리를 늘어놓으려던 찰나, 한성의 목에 붉게 나 있는 자국을 발견했다.

“아…… 반려 님도 한 성깔 하셨지.”

“그거 속말이 튀어나온 것 같은데요. 해님.”

“아차!”

뒤늦게 입을 가렸지만, 헤헤 웃는 해를 보며 누구도 나무랄 수가 없었다. 악의가 없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기에 그저 귀여운 실수로만 보였다. 달보다 해가 더 강적인 것 같다.

지찬이 뻐근한 허리를 부여잡고 소파에 앉자 한성이 냉큼 옆에 다가왔다. 자연스레 지찬의 허리에 둘린 한성의 손이 조물조물 허리를 주무르는 걸 잊지 않았다.

소파에 기대어 한성의 커다란 손을 느끼고 있자니 해의 입가가 실룩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은데 대체 어떤 부분에서 웃음을 자아내는지 의아했다.

두 손으로 얼굴을 부여잡다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리기 위해 입을 가리는 해가 지찬의 시선을 느끼고서는 우물쭈물 부끄러운 듯 말을 건넸다.

“두 분이 사이가 좋아 보이셔서, 너무 좋아요.”

반려와의 사이가 좋으면 좋을수록 수호하는 방위의 시너지가 좋아진다. 다행히 이쪽의 사방에 있는 신들이 반려와의 사이가 잉꼬같이 어여쁜 사이라 대체로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그동안 이단아처럼 반려도 맞이하지 않고 제힘만 축내며 허송세월하는가 싶던 백호까지 이렇게 고운 반려를 맞아 사이가 좋아 보이니 해는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어제 반려가 사라진 일만 생각하면 아찔하고 눈앞이 캄캄해 주마등까지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한성의 힘을 믿고, 한성을 믿었지만 불안함은 떨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무사히 돌아온 반려의 모습에 주저앉을 정도로 시름을 덜었던 기억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아, 혹시 다리미 있을까요?”

“그건 왜?”

문득 가방 안에 구겨 넣고 온 정장을 다려야 한다는 게 떠올랐다. 길고 긴 휴가도 끝이 났고, 다시 치열하게 살아왔던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치열하게 살아왔던, 이라. 그 생각에 지찬의 얼굴에 설핏 미소가 스쳤다.

어쩐지 한성과 같이 있으면 조금 여유로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내 전전긍긍하며 아등바등 살아왔던 지난날이 마치 꿈처럼 다가왔다.

물론, 다시 월요일이 시작되면 똑같은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 말이다.

배웅해 주는 그곳에서 출근하고, 따뜻한 온기가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설레는 일이었다.

“정장을 좀 다려야 할 것 같아서요. 근처엔 세탁소도 보이질 않고.”

“그건 제가 할게요. 일단 아침부터 드시고, 옷 내려 주시면 제가 해드릴게요.”

아침상을 준비한 재순이 다가왔다. 안 그래도 뱃속에서 밥 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통에 주방엘 가 볼까 고민하던 차였는데 반가운 소식이었다.

해는 이미 약과로 배가 빵빵하게 불렀다며 소파에 드러누운 상태로 한성과 지찬만 일어서서 자리를 옮겼다.

제 손을 타지 않고 따뜻한 밥상이 차려져 있는 것을 본 지찬이 뒷덜미를 긁적이며 뻘쭘하게 자리에 앉았다.

“다음엔 저도 좀 도울게요.”

“아녜요. 저도 돈 받고 하는 일인걸요. 제 일을 빼앗아 가시면 전 뭘 해 먹고 살아요. 그렇죠, 한성 님?”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부담 갖지 말라고 말하는 재순을 보고 수저를 들었다.

“그런데, 제가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그냥 재순이라고 하세요.”

“그러기엔 제가 아직 어려서.”

“그럼…… 이모?”

“그럼, 이모님…… 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나야 좋죠.”

“저도 그냥 지찬이라고 부르셔도 괜찮아요.”

“알았어요. 아직 낯설죠? 나도 우리 아이 또래라 생각하고 지찬 군이라고 부를게요.”

그녀가 살아온 세월이 무색하리만치 웃을 땐 곱게 파인 주름이 보기 좋았다. 나이가 들면 살아온 흔적이 남는다더니 남에게 해 한번 끼치지 않고 무던하게 살아왔을 그녀의 과거가 보이는 것 같았다.

좋은 엄마, 좋은 아내, 그리고 좋은 여자, 좋은 사람이라는 게 말투와 온화한 표정에서 느낄 수 있었다.

지찬과 재순이 하는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한성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제 가족들과 조금씩 거리를 좁혀 가는 지찬이 내심 기특하고, 고맙기도 했다. 낯설고 무섭고 세상에 이질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견디지 못하는 이들이 있었다.

신들 사이에서 상전되는 이야기엔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반려들의 생을 일축해 놓았지만, 실상은 그러지 못한 경우가 왕왕 있었다.

갑작스레 바뀐 환경 탓에 그리고 전혀 다른 존재라는 것에 대한 공포심과 두려움은 인간이 견디기엔 너무 큰 무게이기도 했다.

“아, 참. 한성. 핸드폰 있어요?”

“으음?”

배가 고팠던지 열심히 수저를 놀리던 지찬이 문득 고개를 들어 한성을 바라봤다.

이제 다시 회사에 출근하게 되면 연락을 할 방법이 딱히 없었다. 그렇다고 한성이 저를 내내 쫓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아니. 오히려 쫓아다니면 일에 방해만 되고 좋은 것도 아니었다.

급하게 연락을 취해야 한다거나 하는 일이 생길 경우엔 새를 불러다 쪽지를 발에 묶어 날릴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요즘 같은 시대에 말이다. 짹짹, 보다 말을 더 잘하는 새들을 잠깐 떠올렸다가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 몰려 있는 곳에서 새와 대화하는 모습을 보이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이상한 사람 되기에 십상이었다.

“핸드폰이요. 전화나 문자, 보낼 수 있는 네모난 물건.”

“아, 뭔지는 알지만 쓰진 않아.”

“왜요?”

“어려워서.”

“그럼 밥 먹고 같이 사러 나가요. 연락할 방도가 없어요. 나도 이제 내일부터 출근해야 하는데.”

“출근?”

“네.”

“왜?”

“네?”

너무 당연히 왜라는 물음이 나오자 지찬은 할 말을 잃었다.

“돈이 필요한 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대와 내가 앞으로 먹고사는 데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쌓여 있는걸.”

“아니, 돈이 문제가 아니고.”

“그럼?”

“그럼 평생 당신 옆에서 노닥거려요?”

“그럼 나야 좋지.”

“아…….”

여태까지 아득바득 일궈 놓은 자리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나는 그냥, 내 인생을 열심히 살아 보고 싶은 건데.’

사실, 지찬도 돈이 궁할 정도로 궁핍하게 살아오진 않았다. 가족들의 사망 보험금도 단 한 푼도 건들지 않고 통장에 고이 모셔 두었으니까 말이다. 굳이 쓸 곳도 없었을뿐더러 최소한의 금액으로 살아가도 불편함이 없었다.

월급도 꼬박꼬박 나오고, 중식과 석식 식대까지 모두 처리해 주는 터라, 옷이 해지면 가끔 계절별로 한 벌씩 사는 게 전부였다.

“몇 년만 더 다니고 싶어요.”

어차피 지금보다 더 나이 먹게 되면 늙지 않는 저를 이상하게 여기는 모습에 그만두기 싫어도 그만두어야 할 날이 올 테니까 말이다.

그 전까지는. 그냥 나도 그 세상에 속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자신의 시간은 정지했지만, 세상은 계속해서 돌고 돌 테니까.

그것을 벌써 방관자처럼 가만히 앉아 지켜볼 엄두는 나질 않았다.

지찬의 생각을 이해하는지 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따로 하고 싶은 일은 없는지 생각해 보는 시간도 필요할 것 같구나.”

한성의 욕심 같아선 제 옆에 가만히 앉아 떠 주는 밥과 퍼 주는 사랑만 고이 받으며 살기를 바랐지만, 그도 그의 인생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대신, 세상에 나가 자신이 정말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받는 순간에 너무 큰 상처를 받지 않았으면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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