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60)

36화

눈꼬리를 따라 내려앉은 한성의 입술이 지찬의 콧잔등 위, 뺨, 입술로 찍어 내려갔다.

그제야 눈을 마주친 한성과 지찬이 서로에게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많이 아팠지?”

“네. 마음이요. 마음이 더 아팠어요. 그러니까 이젠 안 아프게 해줘요.”

한성은 커다란 손을 들어 찢어진 이마 부근을 매만지다 그제야 생각이 난 듯 다시 약 상자를 뒤졌다.

“이게 소독하는 거라고 했던가.”

“한 번도 안 해봤어요?”

“어, 음…… 상처는 금방 낫는 편이거든. 힘으로 회복하면 더 빠르고.”

“나는 그런 옵션 안 붙나?”

반절의 힘을 나눠준 게 자신인데, 겨우 문신 같은 각인 하나 새겨지고 끝인가 싶어서 지찬이 이마를 찡그렸다.

기왕 오래 사는 거면 바람을 자유자재로 쓴다든지, 불을 사용한다든지 하는 그런 판타지다운 일들과 함께면 더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속사정을 듣고 있던 한성이 귀엽다는 듯 웃었다. 솜에 액체를 묻히고선 이마를 살살 쓸어 내는데 따끔한 통증에 지찬은 눈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아마, 그대가 느끼진 못했지만 가능한 무언가는 있을 게야. 모두 그러했거든.”

“어? 정말요?”

“응. 현무의 그 아이도 처음 발현된 게 화가 엄청 났을 때였어. 제 몸짓보다 커다란 얼음 덩어리를 하늘에서 내리꽂는데…… 그때의 살벌함이란, 아무도 잊지 못하지.”

“누나가요?”

“응. 그 덕에 현무가 꼼짝달싹 못 하고 잡혀 지내지.”

“와, 그거 좋네요.”

“그대가 부디 화낼 일은 없어야 할 텐데.”

“근데 어쩌다 그렇게 화가…….”

“그 뭐라더라, 소녀 그룹? 여자아이 여럿이 나와 저 상자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거에 한창 빠져서는 옆에서 떠드는 그 아이의 말을 몇 번 제대로 듣질 못했나 보더라고.”

“그럴 만했네요. 누나랑 잘 어울리는데요.”

신에 대한 말을 가감 없이 내뱉던 현무의 반려를 떠올리며 웃었다.

“나는 저 상자에 별로 흥미가 없으니 다행이구나.”

“또 모르죠.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고.”

“나는 그대만 바라봐도 아까운 시간인데.”

“치, 그래도 궁금하긴 하네요. 나도 어떤 힘일까.”

제 손바닥을 펴서 꼼지락거리는 모습을 보며 약을 바르기 시작한 한성이 웃음을 삼켰다. 아마 대대로 내려오는 반려의 힘이라면 그것뿐일 텐데.

미리 말을 해주어야 하나 생각하다 남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말한다 한들 그 힘이 바로 발현되는 것도 아닌 데다가 반려 스스로가 깨달아야 하는 힘이기 때문에 말을 아꼈다.

“여기엔 뭐 좀 붙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저기에 밴드 있네요.”

작은 상자를 열어 밴드 하나를 꺼낸 한성이 요리조리 둘러보다 가운데를 북 찢었다. 힘은 또 어찌나 무식하게 센지 질긴 밴드마저 두 동강이 나 버리는 모습을 보고 지찬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줘 봐요. 내가 찢을 테니까.”

“이렇게 약해 빠져서 상처에 붙긴 해?”

“한성이 쓸데없이 센 거거든요. 자기 힘이 센 것 같으면 좀 섬세하게 찢어야지.”

“그대 옷 벗길 땐 굉장히 섬세하게 벗기는 건데…….”

“쓰읍! 아, 진짜. 자요. 붙이는 건 할 수 있죠?”

뒤에 붙어 있는 종이를 발견하고는 전부 다 떼어 내자 힘없이 늘어지는 밴드가 자기들끼리 붙어 먹고 있는 모습을 보며 지찬이 속으로 혀를 찼다.

저걸 대체 어디에다 써먹어.

커다란 손끝으로 떼어 보겠다고 만지작거리는 모습에 기가 차서 지찬은 옆에 새로운 밴드를 다시 꺼냈다.

“됐어요. 그냥 내가 할게요. 잘 보고 배워요.”

“응.”

양쪽을 살짝 벌리고 상처 위에 붙인 밴드 종이를 하나씩 떼어 떨어지지 않게 잘 붙이는 모습을 바라보던 한성이 억울한 듯 중얼거렸다.

“운우의 정을 나눌 적엔 잘 써먹는데…….”

아, 진짜 이놈의 호랑이가!

세모 눈을 뜨며 노려보자 한성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지찬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정확히 어떤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한성이 말하는 패턴으로 봐서는 아마 밤일에 관계된 게 아닌가 싶었다. 아니, 확실했다.

지찬의 반응에 저렇게 장난꾸러기 같이 웃는 모습을 보면 백 퍼센트에 가까웠다.

“배는 고프지 않아?”

“아직은요.”

“며칠 사이에 부쩍 말랐어.”

“잘 모르겠는데.”

“뼈밖에 없잖은가.”

“알겠으니까 그 손 멈추시죠.”

슬금슬금 티셔츠 아래로 들어간 손이 옆구리를 타고 올라가 가슴께까지 닿는 느낌에 지찬이 한성의 어깨를 꼬집었다.

“나 좀 피곤한데, 자고 싶어요.”

“그럴까?”

반색하며 얼굴을 드는 한성의 모습에 의아했지만, 그도 피곤했으리라 생각하며 방으로 따라 올라갔다.

“하읏, 자, 잠깐……!”

“안 돼.”

“하아…… 그만, 해요. 으흥.”

“더 풀어야 한다니까.”

“아앗!”

“여기가 좋은 거야?”

“읏, 조, 좋아요. 하아…….”

“하, 미치겠군.”

엎드린 지찬의 위에서 마사지를 해주는 한성은 아주 죽을 맛이었다.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닐 테지만, 등 언저리를 누르며 지압을 해줄 때마다 터져 나오는 지찬의 신음에 저도 모르게 아래가 불룩 솟아올랐다.

몸이 뻐근하다는 지찬의 말에 제가 먼저 마사지를 해주겠노라 청한 것은 맞는데, 이렇게나 고역인 일이었다면 먼저 나서지도 않았을 게 분명했다.

무슨 마사지를 받으면서 내뱉는 신음이 이리도 야하단 말인가. 주먹을 꾹 쥐고 척추를 따라 누르는데 지찬이 고통에 찬 소리를 질렀다.

“아! 힘 조절 잘하라니까요. 또 무슨 생각 하느라 힘이 바짝 들었어요. 척추를 아주 반으로 쪼개 버리겠네.”

“지금 내 상태에서 힘 조절을 바라는 건 너무 큰 걸 바라는 게야.”

그건 또 무슨 소리래. 지찬이 고개를 돌려 한성을 바라보려 했지만 이미 내리눌러진 몸으론 그를 바라보기 어려웠다.

엉덩이 부근에서 아까부터 점점 크기를 키워 가는 단단한 것이 그 이유인가 싶어 슬며시 얼굴이 달아올랐다.

“시도 때도 없이 그렇게 발정해요!”

“야하게 신음을 뱉은 게 누군데!”

기가 막힌 지찬이 헛웃음을 뱉었다. 이젠 하다 하다 적반하장으로 소리를 지른다.

“무서워서 마사지도 못 받겠네.”

“무서운 마사지는 그만할까?”

지찬은 슬금슬금 위로 올려지는 티셔츠 느낌에 소리를 바락 질렀다.

“안 씻었어요!”

“그럼 씻겨 줄게.”

냉큼 내려가 욕실에 물을 받기 시작하는 한성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내가 못 살아, 정말.

또 저기에 날름 낚여 버리는 자신이 우스웠다.

쏟아지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지찬은 잠깐 까무룩 잠에 빠졌다. 들어 올려지는 느낌이 들면서 따뜻한 물 속으로 빠지는 기분이 들자 화들짝 놀라 앞에 있는 한성을 꼭 끌어안았다.

“놀란 거야?”

“꾸, 꿈인 줄 알고…….”

“미안, 곤히 자길래 씻겨서 눕혀 주려 했지.”

“꿈, 아닌 거죠?”

“응, 꿈 아니야. 무슨 꿈을 꿨길래 그러는 게야.”

“그냥, 그냥요.”

여전히 끌어안은 팔에 힘을 풀지 못한 채 한성에게 매달려 있는 지찬의 등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이게 꿈이라 한들, 내가 있지 않으냐.”

“네…….”

“내가 지켜 줄 테니 떨지 말거라.”

따뜻한 물의 온도와 한성의 향기, 그리고 익숙하게 코끝을 장악하는 욕실 냄새에 슬며시 눈을 떴다.

“좋지 못하게 잠을 깨워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따뜻하게 풀어지니까 좋네요.”

“씻겨 줄게. 편안하게 앉아 있어.”

거품을 내서 팔과 가슴을 따라 문지르는 부드러운 느낌에 눈을 감았다.

“이런 거에 자꾸 익숙해진단 말이지.”

“익숙해지거라. 가능하면 네 몸은 늘 내가 씻겨 주고 싶으니까.”

피식 웃은 지찬이 입을 열어 웅얼거리듯 말을 삼켰다.

“묘하네요.”

찰박이는 물소리에 순간적으로 핏물이 가득 찬 동굴 속이 떠올랐다. 속이 울렁거리는 게 영 좋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듯하고, 가만히 귀 기울이다 보면 그 아이가 자꾸 말을 거는 듯했다.

대체 뭘까.

눈을 떠 욕실 천장을 바라봤다. 눈을 뜨면 이곳은 따뜻한데, 왜 눈만 감으면 시린 동굴 같을까.

이래서야 잠들 수는 있을까, 겁이 났다.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지쳐 나가떨어지고 싶었다.

대충 몸을 문지르고 물을 퍼 올려 거품을 지우는 한성의 손을 잡았다.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한성에게 조용히 말했다.

“안아줘요. 아무 생각도 들지 않게 안아줘.”

순간 한성의 눈빛이 흔들렸다. 순간적으로 숨을 멈춘 듯한 그에게 다가가 다리 위에 올라타서 젖어 있는 바지 버클을 풀어헤쳤다.

눈을 감으면 어둠 속으로 끌려 들어갈 것 같았다. 두 눈 똑바로 뜨고 한성을 바라보고 싶었다. 어디든, 어느 곳에서든 온몸의 신경세포까지 그를 각인해서 언제든 함께라고 느끼고 싶었다.

천천히 속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자 움찔 떨리는 페니스가 만져졌다. 여태껏 제 손으로 한성의 것을 만져 본 적이 없던 낯선 이 느낌이 묘했다.

아직 단단하게 발기도 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잡히는 묵직함은 놀라울 정도였다. 이렇게 커다란 게 제 몸을 가르고 들어왔다는 건가.

“키스, 할까요? 아니면 정기라도.”

“반려 님.”

한성은 다가오는 지찬의 얼굴을 잡았다. 그리고 입술에 쪽, 짧은 입맞춤을 하고 떨어졌다.

“정기가 아니어도 충분히 그대를 정신없게 해줄 수 있어.”

“그것도 그렇지만, 너무 크니까 갑자기 겁이 나서요.”

순간 잡혀 있던 한성의 페니스가 단단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왜 그런 거로 자극을 받는 거야.

“원하신다면 반려 님 뜻대로.”

“어서요.”

“하지만, 정기는 나누지 않을 거야. 두 눈 똑바로 뜨고 날 봐. 이제부턴 언제 어디서든 그대와 함께이니까.”

지찬의 목덜미를 잡아 입술을 부딪쳤다. 말랑한 입술이 겹쳐지고 매끄러운 혀가 입안으로 파고들었다. 차마 감지 못한 눈에 마주치는 시선이 올곧게 따라붙었다.

‘맞아, 그랬지. 한성은 늘 직진으로 내게 따라붙었지.’

올곧은 마음이 항상 자신을 향해 있었다.

늘 도망가던 것은 자신이었다. 따뜻함이 두려워서, 익숙해지는 것이 무서워서.

이제는 꿈속을 도망치려고 한성에게 매달린다. 그런 자신을 알면서도 다정한 손길과 눈빛으로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나는 언제쯤 당신에게 올곧은 마음으로 달려갈 수 있을까. 무언가에 도망치지 않고 당신만 바라보면서 미래로 달려갈 수 있을까.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언제쯤이면. 이 두려움을 이기고 말할 수 있을까.’

입속을 헤집던 한성이 혀를 빨아 당기다 놓아주고선 아랫입술을 살짝 베어 물고 떨어졌다.

“그대의 마음이 어떤 식으로 돌고 돌아 헤매어도 나는 괜찮아.”

젖은 손으로 지찬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준 한성의 입술 위로 어쩐지 행복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대가 닿을 곳은 여기 하나뿐이니까. 난 그 길의 끝에 서 있어. 언제든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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