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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29/60)

29화

한성은 전부 이야기할 수 없었다.

이기적이었던 내가 고행길에 올라 아파할 무렵, 폭주하기 전에 날 막아준 아이들이라는 말뿐이었다.

그 아이를 잃고 헤맸던 이야기까지 지찬에게 늘어놓을 수가 없었다. 혹시나, 정말로 실망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앞섰다.

‘너를 잃고서 나는 그렇게 바보처럼 떠돌았다. 그 아이가 너고, 너 때문에, 아니, 바보 같았던 나 때문에 너를 잃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어리석게 아파했다……. 이 이야기를 네게 어찌 할까.’

전생의 기억을 모두 잃은 지찬에게 차마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다. 내가 다 기억하니.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더 낫다.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네게 알리는 것보다 지금의 너를 바라보는 것이 더 좋으니……. 이렇게 찬란한 너를 만났으니, 나는 이제 정말 되었다.’

한성은 지찬을 잡은 손에 힘을 실어 꼭 움켜잡았다.

“그랬구나. 달님이 싫어할 만했네요.”

“윽, 직접 들으니 마음이 아프구나.”

“과거는 과거죠. 달님도 지금의 한성을 싫어하는 건 아닐 거예요.”

“늘 내게 미련하고 바보 같다고 하지.”

“나는 조금 알 것 같기도 해요.”

“그럼 내게 살짝 귀띔 좀 해주거라. 미운털이 박힌 채 몇백 년을 살고 나니 온몸이 따끔거리는구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 소용없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렇게 쉽게 떠먹여 줄 순 없지.”

“고약해졌구나.”

“누가? 내가요?”

한성의 투정 어린 말투에 지찬이 코웃음을 쳤다. 여태 고약하거나 심보가 나쁘다는 말은 살면서 들어 본 적도 없는데, 망할 호랑이가 저보고 고약하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따지고 보면 아파서 허리도 못 펴던 저를 깔고 뭉개던 것이 더 고약한 짓 아닌가. 지금도 슬금슬금 올라오는 못된 손이 증명해 주고 있었다.

“혹시, 금지 명령이라도 내려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되는데요.”

“어떤 금지 말이냐?”

“한성이 내 몸을 만지는 것에 대한 금지요.”

“아…… 잔인하기 이를 데가 없구나.”

일단 나부터 살고 봐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 오래오래 살아야 한다는데, 만신창이 몸이 되어 살아갈 순 없으니까 말이다.

“오래 사는 만큼 체력도 좋아지면 참 좋으련만…….”

“표준이라고요!”

그 표준 커트라인이 너무 낮은 게 아니냐. 중얼거리면서 슬쩍 몸을 더듬는 한성이 한쪽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이것 봐라, 만져지는 게 아무것도 없지 않으냐. 살집도 없고, 여기는 뼈까지 만져지는구나.”

“그런 식으로 또 은근슬쩍 만지지 말고 옆에 떨어져 앉으시죠.”

“쳇.”

가져온 붉은 오미자차를 홀짝이고는 그대로 다리를 쭉 뻗어 기지개를 켜는 한성을 바라보다 지찬은 뒤뜰 너머에서 아른아른하는 그림자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기, 뭐 있는 거 아니에요?”

“음?”

“저기요. 저기. 뭐가 막, 있는 것 같은데.”

“아, 어쩐지 뭔가 느껴진다 했더니 녀석들이 왔구나.”

“자기 집이라면서 너무 안일하게 느끼는 거 아닙니까.”

“해로운 자거나 서방 구역의 자가 아니라면 느끼는 게지.”

어쨌든 해로운 무언가는 아니라는 한성의 말에 뒤뜰로 나가는 창문을 열어젖혔다.

아른아른하는 그림자들이 순식간에 후다닥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지찬이 갸웃하고 고개를 기울이며 사방을 살펴보자 각 나무와 풀더미 사이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아, 호랑이 생일이냐. 또 모였네. 그새 모여들었네.’

아니나 다를까, 다람쥐를 비롯해 청설모나 너구리, 토끼, 기타 여러 새 등등. 그중에 덩치가 큰 것은 고라니나 노루 종류까지.

곰 같은 녀석들이 온 게 아니라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지찬은 고개를 내밀며 맑은 눈동자를 빛내고 있는 그들을 둘러보다 문득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내가 저 가운데서 노란 치마 입고 앉아 있으면 백설 공주 되는 건가.’

붉은 리본으로 된 머리띠를 하고 앉아 있는 상상을 잠시 했다.

끔찍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세상에 그런 끔찍한 몰골이라니! 더는 생각하지 말자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어느새 뒤에 나와 있는 한성이 허리를 감싸 안고 피식 웃었다.

“그대를 보고 싶어 안달이 난 녀석들이 나뿐만이 아니구나.”

“그러게요. 꼭 거쳐야만 하는 일인가요? 그렇겠죠? 아니, 이미 왔으니까 어쩔 수 없으려나.”

하아,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이마를 짚었다. 산짐승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찾아와 주었으니 어찌 보면 참 고마워해야 할 일이었다.

한성의 집이 산과 근접한 곳이라고는 하나, 오는 길이 모두 산길은 아니었을 테니까 말이다. 참 대단한 열정들이었다.

‘그냥 내가 산으로 갈 걸 그랬나.’

쉬운 길을 놔두고 너무 어려운 걸음을 하게 한 것 같아 내심 미안하기도 했다.

“바, 반려 님.”

표정이 좋지 않은 지찬의 눈치를 살피던 짐승 중 하나가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한성, 음료 좀 가져와요. 여기서 함께 마셔야겠네.”

“어, 그러지.”

잔을 가지러 간 한성을 보다 지찬은 뒤뜰에 나 있는 쪽마루에 걸터앉았다.

조명 몇 개와 거실에서 나오는 불빛을 의지하며 제 앞으로 조금씩 발걸음 옮기는 이들을 바라보면서 피식 웃었다.

“고맙습니다. 이곳까지 먼 걸음 하셨네요.”

“아닙니다! 밤중에 결례를 끼친 게 아닌가, 괜히 송구스럽습니다.”

“아니에요. 저도 방금 깨어나서. 그나저나, 제가 산으로 가는 방법이 더 낫지 않았나 싶네요.”

“반려 님께서 어려운 걸음을 하시게 둘 수는 없지요! 어떤 분이신데요!”

표정을 풀고 한두 마디 건네기 시작하자 잔뜩 굳어 격앙돼 있던 목소리도 누그러졌다.

고맙다는 둥, 축하드린다는 둥의 이야기가 전부였지만, 가만히 앉아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별세계라도 온 것처럼 신기하기만 했다.

해가 사라진 뒤뜰에 시원한 바람이 한차례 쓸고 지나가자 맑은 풍경 소리가 울렸다.

어쩐지 마음을 가라앉혀 주는 그 고운 소리에 지찬이 눈을 감고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있자 한성이 옆에 와 앉았다.

“인사는 조금 나누었느냐.”

웅성거리던 목소리들이 잠잠해졌다.

“어찌 다들 그 모습들인 게야.”

“반려 님이 불편해하실까 봐…….”

“혹시 놀라실까 봐.”

“그 모습들로 말을 거는 것이 더 놀랄 일이라고는 생각하질 않는 게냐.”

한성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답을 하자 짐승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아!’ 하고 깨달음을 얻은 듯했다.

“무슨 말이에요?”

“보면 알 게다.”

그 말과 동시에 앞에 쪼르르 모여 있던 이들에게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하나둘,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어, 어?”

크고 작은 덩치에 상관없이 모여 있던 모두가 인간화가 되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지찬이 뒤로 휙 넘어갔다. 한성이 재빠르게 허리에 두른 팔 덕에 뒤로 넘어가는 우스운 꼴은 다행히 면했다.

“사, 사람으로 변할 수 있던 거였어요?”

“신의 권능 아래에선 가능합니다.”

신의 권능? 어리벙벙한 얼굴로 한성을 바라보자 그가 피식 웃으며 설명했다.

“이 집은 곧 나야. 서방의 중심이기 때문에 나 자체이기도 하지. 그래서 나의 울타리 안에 있는 자들이라면 이곳에선 모두 인간화가 가능해.”

“물론 저흰 이 모습이 익숙지 않아서 생각을 못 했습니다만, 반려 님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편이 더 편하시지요?”

“아, 인간으로 변하실 수 있는 거라면 제 집은…… 아, 여기서만 가능하다고 하셨지.”

영화나 만화에서만 볼 법한 장면을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감상하고 있으니 혼란스러울 만했다.

오붓했던 뒤뜰이 뭔가 북적거리는 민속촌으로 변해 버렸다.

산짐승들이라 그런가? 현대 의복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아, 저기 계시네. 등산복.

그게 아니라면 전부 옛 전통 의상들이 전부였다.

등산복은 그중에 패셔니스타에 속하는 건가. 알 수가 없다. 이 세계의 사람, 아니, 짐승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지찬이 픽,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이편이 좀 낫긴 하네요. 아깐 조금…….”

동물과 담소를 나누기엔 아직 레벨이 부족함을 느꼈다. 그 정도 레벨이 되려면 아직 한참을 지나야 하지 않을까.

“그나저나 이렇게들 계시는 것보다 안으로 들어가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인간의 모습으로 있으니 이젠 바깥에 벌서듯 서 있게 만드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아닙니다. 저희는 그냥 이곳이 좋아요. 인간의 집이 더 낯설기도 하고요.”

“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는 반려 님 얼굴 뵙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쁜걸요!”

“마음씨도 참 고우셔.”

속살거리는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이렇게 주목을 받으며 어떠한 집단 자체에 속해 본 적이 언제더라. 게다가 모두가 저를 우호적으로, 아니, 어찌 보면 거의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이 기분이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다.

“서쪽 주인의 반려가 된 것이니 부담을 느끼지 말라 하기도 어렵구나. 허나, 이리 찾아오는 일은 드물 터이니 너무 마음 쓰지 말아라.”

“알고 있어요. 나도 나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는 중이거든요.”

예전처럼 살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물론, 이렇게나 급격하게 변하는 일상이 거짓말 같아서 자기도 모르게 볼을 꼬집어본다든가 아침에 눈을 떠 다시 한번 비벼 본 적은 있지마는.

“아, 해가 온 모양이구나. 이야기를 나누고 올 테니 마저 인사하고 있거라.”

다시 안으로 들어가는 한성의 그림자를 뒤쫓아 바라보다 뜰에 가득 모인 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 다시 한번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혹시…… 더 오셔야 할 분들이 계시거나 하진 않나요?”

“산에서 벗어나길 어려워하는 이들도 있어서 저희가 대표로 왔습니다. 아마 반려 님을 더 찾아올 이는 없을 겁니다.”

그중에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모습을 가진 자가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편안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제가 나이도 한참 어릴 텐데요.”

“살아온 생과 상관없습니다. 반려 님이시니까요.”

“저희는 백호 님과 반려 님 가호 아래 사는 이들입니다. 그런 자들이 반려 님을 받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마음 쓰지 마셨으면 합니다. 오래 살아 세월을 바라볼 수 있는 것뿐이지, 백호 님의 보살핌 없이는 살아남기 어려우니 말이지요. 저희가 해드릴 것은 별것 없지만, 마음 둘 곳 없이 태어나야 하는 반려 님의 운명 속에서 미약하지만, 기댈 수 있는 가족처럼 생각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제 운명이요? 마음 둘 곳 없이 태어나야 하는 반려의 운명이라뇨? 반려의 운명이 따로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분명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등골을 타고 오르는 싸한 느낌에 지찬이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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