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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26/60)

26화

지찬은 새 지저귀는 소리에 이마를 찡그리다 몸을 뒤척였다. 잠깐 잠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끊임없이 지저귀는 새 소리를 들으니 벌써 아침인가 싶었지만, 시간을 확인하니 아직 한밤중이었다.

물먹은 솜처럼 늘어지는 묵직한 몸을 뒤집으려다 침대 바로 옆 창문에서 소리를 질러 대는 통에 몸을 일으켰다.

오전이었다면 방 안을 가린 커튼 너머에라도 빛이 들어올 텐데, 마치 한밤중처럼 어둡기만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눈을 비비고 뻐근한 목을 돌리면서 창가로 다가가니, 새 한 마리가 창가에 달라붙어 뭐라 지저귀고 있었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 뒤뜰을 밝히는 조명 하나에 의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길이라도 잃었나, 혹시 알아들을 수 있을까 하고 귀를 기울여 봤지만, 그냥 새소리일 뿐 별건 없었다.

다람쥐나 새랑 대화 좀 나눠 봤다고, 지저귀는 새와 뭐라 말이라도 통할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자신이 우스웠다.

‘아, 이래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지찬을 발견하고 부리로 톡톡 창을 두드리며 삐륵삐륵, 울어 대는 소리에 창문을 열었다. 하지만, 다가오려던 새는 무언가에 화들짝 놀라 성급하게 날갯짓을 하며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때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한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벌써 일어난 거야.”

“아, 네.”

바깥을 아무리 살펴봐도 깃털 하나 보이지 않는 새를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다시 창문을 닫았다.

갑작스러운 기척에 놀라 달아났나 싶어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오히려 한성을 보고 나니 잊고 있던 허리 통증이 심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럼 밥이나 먹을까? 배 안 고파?”

“고파요.”

옷까지 착실하게 입혀진 모습을 확인하고 지찬은 한성을 따라 주방으로 내려갔다.

“근데 내 정기까지 다 빨아 먹는 거 아니죠? 왜 매번 나만 자꾸 기절하지.”

“밥을 안 먹어서 그래. 체력을 좀 길러야 하지 않을까?”

“국방의 의무를 다한 대한민국 남자거든요. 체력이라면 어디 가서 지진 않는데.”

한성의 뒤를 따르며 중얼거렸다.

‘그쪽 체력이 너무 무한정 아닌가.’

“그대의 반려 체력이 무한정이면 더 좋지 않아?”

앞서 걷던 한성이 뒤를 돌아 지찬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무한정이면 좋을 게 뭐가 있어. 나만 죽어나지.’

픽 웃어 보이고선 지찬은 한성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주방으로 들어가 휙 둘러보고는 한성을 다시 돌아봤다.

“주방 좀 써도 되죠?”

“당연하지. 그대의 집인데.”

“배가 고프긴 한데, 라면 있어요? 라면 먹고 싶네.”

“응. 두 번째 찬장에 보면 있어.”

“제가 또 라면 물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맞추거든요.”

“끓여 주게?”

“네, 몇 번이나 앉아서 받아먹으려니 미안해서요.”

“서 있을 수 있겠어?”

“괜찮거든요?”

한성이 다가와 허리를 끌어안고 귓가를 지분거렸다.

“이게 바로 그 ‘라면 먹고 갈래?’ 그건가?”

“틀리죠! 난 진짜 라면을 먹을 거라고요. 좀 앉아 있어요! 걸리적거리지 말고.”

호랑이의 기본 지식은 전부 텔레비전이 망쳐 놓는 듯했다. 라면 먹고 갈래가 언제 적인데.

싱크대 아래를 뒤져 보고 냄비를 하나 꺼내 들고선 물을 부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라면 물 맞춤은 1인용에 한정된 거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물이 찰랑거리는 냄비를 잠시 노려보다 싱거우면 졸이면 되지 싶어 그냥 가스 불을 켰다.

수저를 놓고 냉장고 안에 김치통을 꺼내 접시에 담아 올리고선 라면을 찾아 봉지를 뜯는데, 또다시 한성이 뒤에서 허리춤을 끌어안았다.

“왜요?”

“그냥, 좋아서.”

귀가 달아오른다. 한성의 목소리에도 무슨 힘이 있는 걸까, 나른하게 울려 퍼지는 이 목소리에 자꾸만 맥을 못 추겠다. 아니면 ‘좋다’라는 단어 때문일까.

“라면이 그렇게 좋아요?”

덤덤하게 받아치면서 끓는 물에 라면을 쏟아붓다 보니 지찬은 수프까지 통째로 집어넣는 실수를 하고야 말았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작은 한숨을 쉬면서 기다란 젓가락으로 스프를 건져 냈다. 평소엔 하지도 않는 실수인데, 이 모든 건 호랑이 탓이었다. 자꾸만 혼을 빼놓는 호랑이 탓.

“알면서 내 입으로 듣고 싶은 게야?”

“그냥 좀 앉아 있어요.”

“그대가 정말 좋아.”

뒤에서 안고 있던 한성의 얼굴이 지찬의 어깨로 파고들었다. 마치 응석 부리는 아이처럼 어깨에 얼굴을 비비면서 끌어안은 손이 티셔츠 속으로 슬금슬금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냥 내 곁에 있는 자체가 너무 좋아.”

“아…….”

“그대가, 내 곁에 왔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나는 더 바랄 게 없어.”

배를 쓰다듬고 서서히 올라가는 손바닥이 가슴을 지분거렸다. 욕실에서 끈질기게도 빨아 대던 유두가 작은 터치 하나에도 냉큼 솟아올랐다. 한성은 커다란 한 손으로 양쪽 유두를 지분거리면서 다른 손은 바지춤을 파고들었다.

“라면, 이따 먹을까?”

뜨거운 라면을 불어 먹고 있는 한성의 얼굴이 불퉁했다.

‘삐쳤네. 삐쳤어.’

하도 불 앞에서 지분거리길래 손등을 세게 꼬집었더니 그때부터 삐죽한 얼굴이었다.

배에서 꼬르륵거리며 밥 달라고 요동치는데 상황 구분도 못 하고 자꾸만 지분거리는 한성을 어떻게 잡아야 할까 고민이었다.

젓가락을 들고 있는 한성의 손등이 유난히 빨갛다. 붉게 올라온 모습을 보니 지찬은 또 내심 미안했다. 하지만, 자꾸 그런 식으로 귓가에 속삭이면서 더듬으면 저도 모르게 다시 매달리고 있을 것 같았다.

이러다 여기에서 나갈 땐 앙상하게 뼈만 남은 해골로 나가는 거 아닐까 문득 걱정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모든 정기를 다 빨려서 나가지도 못하고 시체처럼 누워 있을지도 몰라!’

“그 정돈 아닐 텐데.”

“또, 남의 생각 맘대로 읽네.”

삐죽.

늘 웃는 얼굴이거나 덤덤한 얼굴로 대하던 한성의 입이 삐죽하다. 못 보던 표정을 보니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나 드디어 미친 건가.’

“몇 살이에요? 아니, 연세가 어떻게, 아니. 아무튼…….”

“몇 살 같아 보이나?”

“원래 아재가 그런 소리 많이 한다던데.”

“나이를 세는 것도 잊고 살았어.”

“세세하게 아니어도 몇십? 몇백?”

“육백, 하고 십삼 년이 흘렀네.”

툭.

지찬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기껏 많아 봤자 백몇 살 정도로 생각했지, 육백 대를 넘어설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욕도 하고, 발로 걷어차기도 하고, 방금은 손등까지 꼬집고…… 또 무슨 짓을 했더라. 조상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지찬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근데 왜 이렇게 힘이 좋아!”

“중요한 게 그거였어?”

“아니, 아니죠. 그럴 리가.”

엉덩이를 들썩거리면서 소리 지른 지찬이 냉큼 다시 젓가락을 주워 앉았다.

“그럼, 육백 년 동안 반려가 없었단 말이에요?”

“응, 모든 사방신들이 그래. 나는 조금 젊은 편이지.”

“젊…….”

아, 젊구나. 신 중에 영계구나.

“영계, 난 영범이라고 해주면 안 될까. 아니면 햇범?”

“하아…….”

햇밤도 아니고, 무슨.

여태 써 왔던 어설픈 그의 사극 톤 말투도 어쩐지 이해가 갔다. 과거부터 현대까지 살아온 호랑이에게 말투를 완전히 뜯어고치기란 어려운 일이었겠지. 게다가 텔레비전도 그다지 즐겨 보는 편이 아닌 듯했으니까 말이다.

“신으로 살아왔던 모든 시간이 육백 년은 아니야. 나도 한낮 짐승에 불과했던 적이 있었지. 짐승이라고 불리기엔 힘이 너무 셌고, 신이라고 하기엔 나약하기만 했던.”

“신이 되기 위해 태어났다는 뜻인가요?”

“그렇다고들 하더군. 나를 지켜봤던 모든 이들이.”

“아…….”

“신이 되기 위해 태어난 짐승은 어디에도 없었어. 내가 처음이었다고.”

“그럼요? 다들 사방신이 되기 전엔 어떤 모습이었어요?”

“세상에 있는 짐승들로 태어나. 주작은 붉은 새로, 현무는 검은 거북이로, 청룡은 구렁이로.”

새삼 신기하기도 했다. 짐승으로 태어난 이들이 얼마나 많은 힘을 지니고 있으면 신의 반열에 오르는 걸까.

인간이 알지 못하는 그들의 세계에선 당연한 듯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신기하네요.”

“난 신이 될 그릇이 못 됐어.”

“왜요? 신이 되기 위해 태어났다면서.”

“신으로 살기엔 너무 이기적이었거든. 그래서 모든 걸 버리려고 했던 때가 있었지.”

“신은 이기적이면 안 되나요?”

“그 이기주의로 너무 많은 이들을 죽일 뻔했으니까.”

누군가를 다치게 했다는 것도 아니고 죽일 뻔했다며, 제 빈 그릇을 들어 싱크대로 가져다 놓는 한성의 뒷모습을 지찬은 쳐다봤다.

“아주 먼 과거의 일이었어. 나는 그때도 지금도 이기적이지만.”

식탁을 정리하고 묵묵히 설거지하던 한성이 금방 차를 준비하겠다며 나가 있으란 말에 지찬은 대답 없이 나와 소파에 앉았다.

신은 정말 이기적이면 안 되는 걸까. 중립을 지켜야 하는 그들의 사명감, 책임감, 의무. 뭐 그런 종류일까.

지찬이 만난 모든 신(이라고 해봤자 몇 없지만)과 신수들은 각자의 감정이 있었다. 그런 감정을 두고 중립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까. 감히 상상도 못 해본다.

어둠이 깔린 뒤뜰을 바라보다 문득 지금 이렇게 있는 순간들이 익숙해짐을 느꼈다. 십여 년 만에 느끼는 소속감이라는 게 참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아늑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넋을 놓고 있다 보니 한성이 옆에 와 앉았다.

“계속 얘기 좀 해줘요.”

“내가 얼마나 바보같이 이기적이었는지 말이야?”

“이기적이면 뭐 어때요.”

“듣고 까무러치면서 도망갈까 봐 그래.”

“이미 글렀거든요.”

그 말에 소리 내어 웃던 한성의 눈가가 깊어졌다.

“해와 달을 만난 그때가 가장 어리석었던 때였지. 그 아이들 덕에 내가 얼마나 멍청한 짓을 하려고 했는지를 깨달았어. 그래도 늘 의문이 들었지. 나의 생은 과연, 누구를 위해서일까.”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야죠.”

“그들을 위해 살아가려고 선택한 삶이었어.”

“누구를 위해서만 산다는 거 힘들지 않아요?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지찬은 한성에게 다그치듯 말을 늘어놓다 문득 저 자신에게 하는 소리 같아 입을 다물었다.

저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니까.

한성은 그런 지찬의 손을 붙잡고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아주, 오래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그 순간을 떠올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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