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60)

23화

바라만 보던 정자에 올라 주변을 둘러봤다. 이곳에서 보는 풍경 또한 장관이었다.

고즈넉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것이 이 공간에 가장 많이 신경을 썼다던 한성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다른 공간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시공을 초월해 과거에 떨어진 사람처럼 말이다.

시원한 그늘에 앉아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자꾸만 헝클어지는 머리카락을 다시 쓸어 넘기고 저 너머에서 새로 탄 음료 두 잔을 들고 오는 한성을 바라봤다.

늘씬하게 쭉 뻗은 다리는 성큼성큼 걸어 지찬에게 순식간에 다가왔다.

용맹하고 의로운 호랑이라고 했던가. 겁이 많기도 했던.

사람의 모습이니 매번 호랑이라고 생각은 들지 않지만, 과연 그의 본체는 어떤 모습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어깨를 넘어 등에 새겨진 각인은 아까 집에서 샤워할 때 확인하려 해도 한계가 있었다.

뭔가가 넘실거리는 것 같긴 한데 반쪽짜리 모습이라 애매하기만 했다. 그저 용 꼬리 같기도 했으니까.

앞의 모습은, 한성의 등허리와 허벅지. 확인하려면 벗기는 수밖에 없겠지만, 뭘 또 굳이 벗겨 가며 확인을…….

“아련하게 날 바라보기에 무슨 생각 중인가 했더니, 날 벗길 음란한 생각뿐이었던 게야?”

“아니거든요.”

어쩐지 분위기가 좋다 했다. 생각하려면 한성이 오기 전에 끝냈어야 했는데, 그게 말이 쉽지 그런 거 일일이 따져 가며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냔 말이다.

아무튼 제 속마음을 읽는 하등 쓸모없는 능력은 진짜 귀찮고 성가셨다.

“저기 보이나?”

웃는 낯으로 잔을 건네주고 지찬이 바라보고 있던 곳을 향해 손을 뻗었다. 지찬도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려 봤지만 무얼 말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저기, 처마에 매달린 풍경.”

그제야 아까부터 은은하게 소리 내고 있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종 끝에 매달린 추의 모양새가 마치 구불거리는 용을 닮기도 했다.

“아, 예쁘네요. 저거, 용인가요?”

“나야.”

“백호? 그럼 저게 실제 모습이랑 같은 건가요?”

“응, 조금 단순하게 표현되긴 했지만, 날 빼닮았지.”

“가까이 가서 볼래요. 가끔 절에 가면 붕어 모양으로 된 풍경은 많이 봤는데, 백호가 달린 건 처음 봤어요. 하긴, 꽃이나 부엉이 같은 걸 달아서 인테리어 소품으로도 쓰니…… 까.”

처마에 가까이 다가가자 설핏 부는 바람에 매달린 추가 뱅그르르 돌다 천천히 멈춰 섰다.

그리고 지찬은 한참을 서서 풍경 종을 바라봤다.

세월의 흔적이 보이는 종은 늘 신경을 써서 관리한 것인지 세월의 바람에 한참이나 맞선 것 같지만 단정하게 바랜 빛을 뽐내고 있었다.

“네게 꼭 보여 주고 싶었어.”

“음, 정말 예쁘네요. 정말 오래된 종인가 봐요.”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구불구불하게 얽혀 있는 백호를 어루만졌다.

자세히 보니 용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긴 했다. 용과 흡사한 형상이긴 했지만, 비늘이나 뿔 따위는 없이 호랑이 무늬가 새겨졌다.

구불거리는 모습으로 마치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이 기백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한참이나 구경하고 섰는데도 한성에게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없었다. 의아한 마음에 뒤를 돌아보니 언제부터였는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한성의 시선이 낯설었다.

“왜요?”

“이것을 만들어준 이가 있어. 아주 솜씨가 좋은 자였지.”

“아, 그래요? 굉장히 오래전에 만들어진 것 같은데…… 이 정도면 유물 아니에요?”

반은 농담으로 흘리며 웃었지만, 한성은 웃지 못했다.

“이상하구나.”

“왜요?”

‘그것을 만들어준 이가 바로 너인데, 그 앞에 선 너는 아무것도 모르고 웃기만 하는 것이. 못내 쓸쓸하다.’

한성은 입 밖으로 나오려는 말을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날 쓰다듬는 것 같아 몸이 동한달까? 볕도 좋은데 그대가 좋아하는 저곳에서 사랑이나 나눠…….”

“틈만 나면 이놈의 호랑이가!”

정강이를 걷어차려고 몸을 틀어 발길질했다. 이번엔 옆으로 피해 버린 한성 때문에 균형을 잃은 지찬이 크게 휘청였다.

그는 그런 지찬을 재빨리 잡아채고 품에 꼭 껴안았다.

“놔요!”

“조금만, 이러고 있자.”

귓가에 와 닿는 한성의 목소리가 어쩐지 가라앉은 것 같았다. 방금까지 실없는 소리를 내뱉던 사람이 낼 만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안겨져 한성의 한쪽 어깨에 턱을 올린 채 내려다보는 그의 등이 오늘따라 쓸쓸해 보였다.

빠져나오려고 힘을 주다 말고 팔을 들어 한성을 마주 껴안았다. 맞닿은 가슴에서 서로의 고동 소리가 쿵, 쿵, 울렸다.

바람이 한차례 머리카락을 간질이고 지나가자 흔들리는 풍경이 맑고 청아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고운 소리에 저절로 눈이 감겼다. 아주 오래전, 한성에게 풍경을 만들어준 사람 때문에 그럴까. 분명 그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이렇게 오래도록 간직한 것이리라 생각했다.

한성이 지찬을 안은 팔에 힘을 더 줘 힘껏 끌어안고선 놔주며 한걸음 물러났다.

다행히도 한성의 얼굴은 아까와 별다르지 않았다. 담백한 포옹이 끝나고, 한성이 지찬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정자로 갈까?”

“왜, 왜요!”

괜히 뜨끔한 지찬이 말을 더듬자 한성이 쿡, 웃었다.

“왜 놀라는 게야. 날도 좋으니…….”

“이, 변태 호랑이야!”

“차나 한잔하자는 게 그리도 못마땅한 게냐.”

“아…….”

“우리 반려 님 속은 어찌나 엉큼한지, 내가 당해 낼 재간이 없구나. 그렇게 원했으면 그냥 말로 해도 된다. 난 늘 준비되어 있어.”

지찬은 설레발을 친 사실에 부끄러워 도망가듯 앞장서서 걸었다. 잡힌 손 때문에 한성을 이끌 듯이 가게 된 모양이었지만 그거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하하, 이리도 급한 게야.”

“입 다물어요!”

얼굴이 벌게진 채 소리를 질러 봤자 통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한성의 웃음소리만 더 커졌다.

얌전히 따라온 한성이 정자에 오르자 잡고 있던 손을 잡아당겨 지찬을 돌려세웠다.

“이렇게나 부끄러워하면 나도 참기 힘들어.”

“뭐가…….”

“뭔지는 그대가 제일 잘 알고 있지 않으냐.”

“자꾸 장난치지 말아요.”

“내 말이 농으로 들리나?”

“저 골려 먹으려고 그러는 거 다 알거든요.”

뾰로통한 지찬의 말에 한 걸음 더 다가온 한성이 고개를 비스듬하게 돌려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농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까.”

“뭐, 증명씩이나…….”

“난 그대가 곁에 있으면, 이 다디단 향기에 취해 있고 싶어.”

지찬은 바라보는 시선이 부끄러워 괜히 반걸음 물러나 제 팔을 들어 냄새를 맡았다.

“별 냄새 안 나는데.”

“나만 맡을 수 있지. 그대의 향기는 오로지 나만. 다른 누군가가 그대의 다디단 향기를 맡는다고 상상만 해도 참을 수 없어.”

“못 참을 것도 많네. 차 마셔요. 마시자고 온 거잖아요.”

이상해지는 분위기를 바꿔 보려 가볍게 말을 던진 지찬이 다시 몸을 돌려 아까 자리에 내려놓았던 잔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여전히 잡혀 있는 손은 놓아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찌나 꽉 잡고 있는지 손에 빨간 자국이라도 생길 것 같았다.

“한성…….”

손 좀 놓아 달라고 부른 건데 한성은 작게 속살거리는 듯한 지찬의 목소리에 겨우 잠재워 놨던 열기가 오르는 걸 느꼈다.

한 번 하고 나면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아 참아 보려고 꾹꾹 애써 눌러 담았는데 또 이렇게 예기치 못한 상황에 자꾸만 아래가 불끈거린다. 주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꾸만 끓어오르는 음심이 가끔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한번 맛본 것은 아는 맛이기 때문에 자꾸만 욕구가 생긴다고도 했으니까 말이다.

지찬의 몸을 한번 탐하고 살결을 맛보고 나니 자꾸만 몸이 동한다.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짐승의 본능 같은 거였다.

“손 좀 놔요. 손 붙들고 차를 어떻게 마셔.”

“차는 좀 이따 마시고, 나랑 할 게 있어.”

“뭐요?”

“섹스.”

거침없는 한성의 말에 당황한 지찬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안 나는 모양이었다. 서서히 목 끝부터 얼굴 위로 달아오르는 모양새가 귀여웠다.

“나만 보면 그 생각밖에 안 들어요?”

“응, 자꾸 만지고 싶고, 입 맞추고 싶고, 안고 싶고. 좋아하는 이의 몸을 탐하고 싶은 것은 당연한 게 아니냐.”

말이라도 못 하면.

매번 느끼는 거지만 가끔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오는 말엔 어쩔 줄을 모르겠다.

“아직 대낮이거든요.”

“사랑에 낮과 밤이 어디 있다고.”

“손, 손님이 찾아오실 것 같은데?”

“현무나 해는 바빠 오늘은 오지 않을 거야.”

“늘 불시에 찾아오는 것 같던데요.”

“그게 걱정인 게야? 이곳은 문지기가 허용해야 들어올 수 있어. 오늘은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일러 두면 되지.”

“그래서 진짜 하려고요?”

“그럼 가짜겠어? 이봐. 난 벌써 달아오르고 있다고. 그대의 오밀조밀한 입이 움직이는 것만 봐도 미칠 것 같은데.”

“아니, 하지만…….”

“말이 너무 길어질 것 같으니 시작하면서 얘기를 나눔세.”

당장에라도 옷을 찢어버릴 것 같은 기세로 다가오는 한성을 바라보던 지찬이 화들짝 놀라 자유로운 한 손으로 옷을 부여잡았다.

‘그걸 하면서 어떻게 얘기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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