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쾅.
조용하던 현관문이 부서져라 닫혔다. 이 더운 날씨에 달리기라도 했는지 지찬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얼굴이 발갛게 익어 있었다.
그에 비해 지찬이 올 걸 알기라도 했는지 여유로운 표정으로 현관 앞에 서 있던 한성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렇게나 내가 보고 싶었던 게야?”
“하아, 진짜, 망할 호랑이.”
어지간히도 힘이 드는지 허리가 꺾이며 숨을 내뱉던 지찬이 단어 하나씩 씹어 뱉어 냈다.
그리고 그의 손엔 여행용이라기엔 조금 작은 가방 하나가 들려 있었다.
대충 옷과 정장 몇 벌을 구겨 넣고 집을 나섰는데, 아니나 다를까 온 동네방네 길을 떠도는 개와 고양이가 지찬의 곁을 맴돌았다.
심지어 참새까지 그의 어깨나 머리 위에 올라탔다가 혼쭐이 나기도 했었다.
‘그만 내려오시죠. 하하…….’
처음엔 어색한 마음에 좋게좋게 말을 했지만, 이들은 아까 제집에 인사를 하러 온 동물들과는 다른지 별말 없이, 이를테면 그냥 짹짹 정도의 새소리를 지저귀며 근처를 배회했다.
대낮부터 피리 부는 사나이도 아닌 것이 온 동네 개와 고양이를 이끌고, 참새나 비둘기까지 전신줄에 앉아 그를 지켜보는 상황은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경악할 만했다.
‘세상에 저런 일이에 신고해 볼까?’라며 사진을 찍어 간 사람도 있었다.
지찬은 입술을 깨물고서 어느 골목에 멈춰 뒤를 쫓아 오던 그들에게 으름장을 놨다.
‘더 따라오면!’
그렇다고 협박할 만한 거리가 없었다. 대체 뭐라고 말한담. 인상을 찌푸리고서 제법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을 잔뜩 헝클었다.
‘반려 취소할 겁니다!’
그 말에 말도 안 통하는 개와 고양이가 비웃는 것처럼 등골이 싸했다.
‘아, 이건 아닌가. 하긴 취소하는 방법도 모르지. 젠장!’
‘그럼, 간식 캔이고 사료고 뭐고! 없어요? 나 아주 막, 도망가 버릴 거야?’
지금 당장 호랑이 놈한테 가서 이들을 그만두게 할 방법을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지찬을 향한 초롱초롱한 눈빛은 여전했다.
‘아이 씨!’
진짜 맹세컨대, 여태까지 살면서 욕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 본 적이 별로 없었건만, 평화롭던 일상에 끼어든 호랑이 한 마리 때문에 자꾸만 험한 말이 나오려 하고 있었다.
가방을 고쳐 잡고 그대로 뒤로 돌아 뛰기 시작했다. 따라오는지 아닌지 알 바 아니었다. 내내 걸으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고대로 받을 바에야 뛰어가면서 얼굴이나 가리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다.
앞에서 오던 사람들이 그런 지찬의 모습에 기겁하며 양옆으로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지기도 했다.
방금 있었던 그 일을 생각하며 지찬은 한성을 쏘아봤다.
저 여유로운 웃음을 보아하니 분명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알고 있었을 게 뻔한데 일언반구 하나 없이 집에서 유유자적했다는 사실에 너무 열이 받았다.
“시켰어요?”
“뭐를?”
“아, 거, 진짜! 다람쥐며 새며 온 동네 개나 고양이까지! 내가 얼마나 황당하고 창피했는 줄 알아요?”
“허어, 내 그리 가지 말라고 일렀거늘.”
“거짓말하지 말죠? 이거 아무래도 뒤에서 누가 시킨 것 같은데?”
“억울하구나.”
“와아! 진짜, 평생 직박구리나 다람쥐랑 대화하는 날이 올 줄이야. 그냥 한 번에 다 모이라고 해요! 동물 잔치도 아니고 이게 뭐야!”
“그래도 그 덕에 집에 들어올 마음이 생겼나 보구나. 그들에게 고마워해야겠는걸.”
“정강이 후려 차고 싶은 걸 참고 있으니 그 입 좀 다물죠.”
재미있다는 듯 웃던 한성이 손을 들어 지찬의 가방을 받았다. 그제야 신발을 벗고서 집안으로 들어온 지찬은 거실 소파에 앉아 입을 벌린 채 자신을 바라보는 해를 발견했다.
“아, 해님이 계셨네요.”
“바, 반려 님.”
그래도 신인데 제가 말을 너무 막 쏟아 냈나 싶어 뜨끔한 지찬이 머리를 긁적이자 동그란 해의 눈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였다.
“제대로 된 반려 님이 나타나셨어! 한성 님을 휘어잡다니!”
“에?”
“저, 진짜 한성 님께 저렇게 막 대하는 분 처음 봐요!”
“어?”
“너무너무 좋, 아니, 너무 신기해서요! 한성 님 앞으로도 많이 혼내 주세요! 아니, 반려 님이 많이 보필해 주셔요.”
해의 말을 듣고 있자니 알게 모르게 한성에게 막 대한 건 그녀가 아니었을까 잠시 고민을 했다.
둘이 무어라 떠들든 피식 웃던 한성이 가방을 가지고 이 층으로 올라갔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저 스스로 집안에 들어왔으니 기뻐할 일이니까 말이다.
지찬의 손을 잡아 이끌고서 소파로 간 해가 약과를 밀어주며 차를 내오겠다며 주방으로 사라졌다.
너무 황당해서 무작정 달려오긴 했는데, 이게 진짜 맞는 건가 싶었다.
정말 여기서 살아야 하는 거라면 지금 있는 집도 처분해야 하고 그곳에 있는 짐이라도 옮겨야 하니 말이다. 쉽게 결정지을 문제는 아니었던 거다.
그렇다고 계속 그곳에 머무르며 온갖 동물들에게 문안 인사를 받아 챙길 만큼 얼굴이 두껍지도 않았다.
완전 총체적 난국. 딱 그 말이 맞았다.
한숨을 크게 내쉬는데 어느새 내려온 한성이 지찬의 옆으로 와 앉았다.
“어찌 그리 숨이 무거운 게야.”
“댁이라면 안 그렇겠어요? 문안 인사 필요 없으니까 안 오게 하는 방법 없어요? 사방 각지에 모든 동물이 우리 집에 쳐들어올까 불안하다고요.”
“다들 기뻐서 그러는 게지. 그대가 이해해.”
“이해하고 말고, 하…… 일반인들에겐 전혀 이해할 범주를 떠난 상황이라니까요.”
“아, 그건 제가 해결할게요. 반려 님.”
시원한 음료를 내온 해가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엄청 기대들 하고 있었거든요. 그 전까진 반려 님 얼굴 한 번만 먼발치에서 바라보면 안 되겠느냐고 난리였어요. 이번에 각인 되자마자 한성 님의 힘이 돌아온 걸 느끼고 이때다! 하고 쫓아간 거죠.”
“각인 이전부터 제 존재를 알고 있었다고요?”
“아, 네…….”
말꼬리를 조금 늘이며 해의 눈이 한성을 향했다. 어쩐지 조금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긴 한데, 그 눈치를 왜 보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다들 많이 불안해하고 있었거든요. 언제쯤이면 반려 님을 맞이할까. 서방에 있는 모든 신수나 동물들은 한성 님을 믿고 있었지만, 그래도 밑바닥에 깔린 불안함까진 어찌할 순 없는 거였으니까요.”
해의 이야길 듣다 보니 그럴 만했다고도 느꼈다.
백호의 반려가 가장 늦게 나타났다고 했던가. 사방신 중에 동, 남, 북의 신들은 모두 온전한 힘을 찾아 안전하게 수호하고 있었지만, 서쪽은 한성이 무리해 가며 지켜 왔다고.
그래도 그의 힘이 강했던 게 다행이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사방의 균형은 이미 무너지고도 남았을 거라고 했다.
무리는 했지만, 다른 방위의 신들과의 힘에 균형을 맞춰 가며 지켜 온 한성의 힘은 대체 얼마큼일까.
문득 궁금해졌지만, 알 방법이 전혀 없었다. 그들의 힘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사용되는지조차 알지 못하니까 말이다.
“그럼, 정 오고 싶으시다면 이곳으로 와 달라고 해주세요. 당분간은 집에 못 돌아가겠네요.”
“유난을 떨어도 조금 이해해 주세요. 반려 님의 등장은, 뭐랄까. 마치, 구원자 같은 의미거든요. 저희에겐.”
구원자.
누가 누굴 구원한단 말인가. 신과 신수들에게도 구원이 필요하다니.
인간이 갖고 있지 않은 힘과 기나긴 명을 가지고 살면서도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는 게 문득 씁쓸해졌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한성을 향해 고개가 돌아갔다.
상념에 빠진 한성의 옆모습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찰나의 느낌이었을 뿐 시선을 느낀 한성이 부드럽게 웃는 낯으로 지찬을 바라봤다.
“그대는 나를 구원해 주러 온 천사지.”
“아…… 진짜.”
웩, 하고 소름 돋는 팔을 쓸어내렸다.
‘이건 좀 아니잖아요. 백호라는 신의 입에서 천사라는 말이 나올 줄이야. 여기 동양 아니었나요?’
“근데, 천사도 있어요?”
“아니.”
그럼 그렇지.
“그러면 저는 한 바퀴 돌고 올게요. 반려 님이 곤란해하시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죠.”
“아, 부탁드릴게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걱정하지 마세요. 이런 건 한 번에 불러 모아다가 아주 혼쭐을!”
“예? 아, 아니요. 혼을 내라는 게 아니라.”
“헤헤, 농담이죠.”
“그냥, 당분간은 여기 있을 거니까 이쪽으로 오시라고 전해 주세요. 여긴 그나마 뒤뜰도 넓으니 동물 모이기 딱 좋겠네요. 하아…….”
말하고 나니 동물들의 대모가 된 것 같은 이 찝찔한 기분은 뭘까. 한숨을 푹 내쉬고 해가 내어준 음료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팔랑팔랑 가벼운 걸음으로 현관 밖을 빠져나가는 해를 바라보다 문이 닫히고 지찬이 입을 뗐다.
“당분간 신세 좀 질게요.”
“신세라니, 여기가 그대의 집인걸.”
“하, 곧 있으면 휴가도 끝인데 회사까지 따라다니진 않겠죠?”
“누가? 내가?”
“아…… 그쪽도 있었네. 뭔가 엄청나게 꼬리가 늘어난 기분이 드네요.”
“내가 그대 곁에 있으면 아무도 오지 않을 텐데.”
살짝 벌어진 거리를 바짝 당겨 앉아 지찬의 허리에 자연스레 손을 두르는 한성이 귓가에 속삭였다.
“그건 그거대로 귀찮거든요.”
“명색이 내가 그대의 반려인데 어찌 그리 매몰차게 구는 게야. 엊그제는 잡아먹을 듯이 날 덮쳐 놓고선.”
“내가요? 와, 얼씨구나 하고 깔아버린 게 누군데.”
“낮에 부리는 투정도 좋지만, 역시 밤 투정이 나는 더 좋구나. 애달프게 조르며 감겨 오던 다리가 어찌나 날 목마르게 하던지.”
“신은 고소 못 하나요? 성희롱으로.”
“밥은 먹은 게야?”
“말 돌리지 말라고. 안 먹었어요.”
입씨름으론 당해 낼 재간이 없을 듯했다. 아예 철판 깔고 저 저질 농담에 맞장구라도 쳐 줘야 하나 싶었다.
그러기엔 아직 부끄러운 게 더 크다. 단둘이 남아 일부러 툭툭 던지듯 아무 말이나 내뱉었지만, 일분일초가 멀다 하고 다가와 허리고 어깨고 자꾸 쓸어 대는 손길에 잊으려고 애썼던 그와의 낯 뜨거웠던 일들만 떠올랐다.
왜 자꾸 둘이 남으면 에로틱으로 변질하는 건지, 여기에 머문다고 마음먹은 게 잘하는 짓인지 걱정이 됐다.
하루빨리 재순 씨가 와야 할 텐데.
“내일이면 다시 올 거야. 나와 있으면 무서운가?”
“네.”
잠깐의 텀도 없이 즉각적으로 나온 대답에 한성의 미간이 조금 구겨졌다.
어떤 식으로든 자꾸 넘어가게 될 것 같아서 무서웠다.
너무 익숙해져 버릴까 봐. 앞으로 손에 꼽을 수도 없을 만큼의 세월을 한성과 살아가야 할 테지만, 혹시 이건 잠깐의 꿈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외로움에 지쳐 만들어 낸 허상 같은 것.
그리고 꿈에서 깨어나면 다시 혼자라는 사실에 더 절망하게 되는 희망 고문 같은 그런 종류의 꿈 말이다.
한성은 웬일로 조용히 지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손을 꼭 쥐고서 잡아당겼다.
“집안 구경 좀 해보겠느냐. 네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떨리는구나.”
그 말에 이미 알고 있는 주방이나 2층 생각보단 저 바깥의 뒤뜰이 궁금해졌다.
“그럼, 뒤뜰 구경 좀 시켜 주세요.”
“그래.”
커다란 접이식 문을 열어 밖으로 나가자 여름에 맞지 않게 시원한 바람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차르르 흩날리는 버드나무 줄기와 단정하게 손질을 해둔 소나무 여러 그루의 짙은 녹음만 바라봐도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앞에 나와 있는 슬리퍼를 신고 천천히 걸었다. 아까부터 잡고 놓지 않는 한성의 따뜻하고 커다란 손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감싸 오는 풀 향기가 어쩐지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이 집을 만들 때 제일 공을 들였던 곳이야.”
“정말 멋지네요. 저기에 앉아 차 한 잔 마셔도 요즘 말로 힐링 되는 공간일 것 같아요.”
“그렇지? 그대 마음에 들 거라 생각했어.”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한성의 말은 바람 소리와 함께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