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집으로 돌아온 지찬이 얼굴을 감싼 채 현관 앞에서 무너졌다.
‘그대를 정말 보내기 싫어서 그래.’
그리고 뜨겁게 오갔던 입술과 타액, 무언가를 갈구하듯 제 허리를 움켜잡는 팔의 느낌. 등줄기를 저릿하게 타고 올라온 흥분과 안도감.
그리고 그 너머의 무언가가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목덜미를 감싸고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면서 입안을 휘젓던 그 느낌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중간에 한성을 밀어내지 않았다면 또 제정신이 아닌 듯 일을 치렀을 게 뻔했다.
‘어쩌자고 그러는 거냐, 설지찬. 왜 이렇게 익숙해지는 거야.’
무릎을 세운 채 주저앉은 지찬이 팔을 뻗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여전히 열이 오르는 목덜미를 문지르며 일어섰다. 현관 앞의 센서 등이 다시 반짝 켜지고, 아무도 없는 빈방이 지찬을 마주했다.
생각할 틈도 없이 부딪쳐 오는 한성을 피해 달아나고 나니 머리가 어지럽게 돌아갔다.
이대로 늙지도 않고 살아간다면, 회사와 이곳 모두를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은 괜찮겠지만,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자신을 보는 주변의 눈초리가 어떨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았다.
곁에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외국에 나가 있는 제 친구라도 한국에 돌아온다면.
그리고 그 녀석이 죽을 때까지 나 홀로 늙지도 않고 세상을 겉돌게 된다면…….
“진짜, 엄청난 일을 저질러 버린 거네. 하…….”
더는 누군가를 먼저 떠나보낼 자신이 없는데.
그래서 현무의 반려가 제게 그런 소리를 했던 걸까.
앞으로 수없이 마주할 죽음들.
과연 그걸 견뎌 낼 자신이 있을까 모르겠다. 그렇기에 한성을 믿고 의지하라는 소리겠지.
이미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전에 반려의 인생을 살아 냈을 그들에게 묻고 싶었다. 당신네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런 불안감과 기시감, 세상을 겉돌며 숨겨 왔을 ‘자신’을 어떻게 견뎌 냈는지 말이다.
어쩌면 지찬은 어제부터 세상에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지찬은 복잡한 마음을 뒤로한 채 자리에 누웠다. 그곳에 있을 땐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겠더니, 지금은 시계 초침 소리만 째깍째깍 귓가를 서성인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어. 하지만 네 시간은 움직이지 못한 채 계속 같은 초침을 반복하는 거야.’
마치 악마의 속삭임이 제 품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 * *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한참을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었다. 온몸이 녹진하게 처져 있는 와중에 어쩐지 바깥이 조금 소란스러운 기분이었다.
딩동, 톡톡, 톡톡톡.
벨이 한 번 울리고 문가를 무언가로 치는 듯 톡톡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거슬렸다.
‘이른 아침부터 대체 누구야.’
겨우 몸을 일으킨 지찬이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자 어느새 오전 열 시가 가까웠다. 주말이고 휴일이고 매번 7시쯤 칼같이 기상했었는데, 정말 피곤하긴 했는지 오랜만에 늦잠을 잔 거였다.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지찬이 까치집을 진 머리를 털며 현관문을 열었다. 하지만 바깥엔 아무도 없었다.
“뭐야, 아침부터 누가 장난을 치는 건가.”
옛날에 꼬마들이 자주 하던 벨튀를 요즘도 하는 녀석들이 있나 싶어 복도 쪽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바라봤지만, 진짜 작정하고 벨만 누르고 튄 건지 개미 새끼 하나 보이지 않았다.
다시 문을 닫으려고 하는 그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반려 님, 나오셨다. 반려 님! 여기요. 여기!”
분명 저를 부르는 소리 같은데 주변을 휘휘 둘러봐도 그림자 하나 발견할 수가 없었다. 미간에 주름이 진 채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후비자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참, 밑에 좀 보세요!”
그 말에 발밑을 바라보자 웬 다람쥐 네 마리가.
“꺄! 반려 님! 인사드리러 왔어요! 백호 님께 달려가니 이미 집으로 돌아가셨다고 하셔서, 아니, 그나저나 왜 그곳에 머물지 않으시고.”
“야이, 이 다람쥐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일단 반려 님께 인사를 먼저 드려야지. 야야, 빨리 제대로 서 봐.”
“아유, 밀지 좀 말아 봐!”
“원래 할아버지가 오셔야 하는데 이젠 늙으셔서 먼 길은 못 오세요. 대표로 저희가 대신 왔어요. 그나저나 키가 엄청 크시네! 한성 님보단 조금 작은가?”
눈이 마주치자 소란스럽게 떠드는 작고 앙증맞은 다람쥐 네 마리를 바라보고 있자니 지찬은 두통이 밀려왔다.
‘아, 이게 뭐지. 꿈인가.’
이마를 짚으며 문을 닫으려 하자 자기들끼리 아웅다웅하던 다람쥐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발밑으로 우다다 달려왔다.
“아니, 아니, 잠깐만요! 야! 인사 안 드리니까 반려 님 화나셨잖아. 눈치 좀 있어 봐라! 어이구!”
“반려 님, 죄송해요. 조용히 하고 제대로 서 보라니까!”
“저희 반려 님께 인사 제대로 안 드리고 가면 할아버지한테 혼나요!”
“인사드리겠다고 우겨서 겨우 나온 건데, 힝.”
금세 풀이 죽어 쪼르르 서 있는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지찬은 왜 이들의 말을 알아듣고 있는 건지, 이들은 다람쥐 말로 얘기를 하는 건지 아니면 사람의 말로 떠드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설령 사람의 말로 떠든다고 한다면 지나가는 사람이 보고 해괴한 모습에 기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봤지만, 사람의 기척은 없었다.
“하, 별일이 다 있네.”
피식 웃는 지찬의 모습에 화가 조금 누그러졌다고 생각하는지 다람쥐들이 해맑게 웃었다.
‘아, 웃는다니. 다람쥐가? 미쳤네. 설지찬.’
“무슨 일들이세요.”
겨우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물었다. 다람쥐에게 말을 걸다니, 살다 살다 별일을 다 해보는 중이었다.
“인사드리러 왔죠! 반려 님이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와! 경축! 경축!”
“방정맞게 뛰지 좀 말아 봐, 정신없어. 누가 얘 데려왔냐?”
“네가 데려가자며!”
아무래도 정상적인 대화가 이어질 것 같진 않았다. 아침부터 도심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다람쥐, 그것도 무려 네 마리씩이나 집 앞에서 방방 뛰고 있는 모습을 보면 이 동네에서 얼굴을 들고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아, 예.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엔 한성 집에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제가 지금은 일이 좀 바빠서…… 아침부터 제가 굉장히 바쁘네요. 하하.”
평소처럼 말하다 주변 눈치를 보면서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남들이 보면 애먼 동물한테 말 걸고 있는 또라이로 보일 게 뻔하니까.
머리는 까치집을 지은 채 방금 자다 일어난 모습이 확실하지만, 다람쥐들은 눈치가 없는지 알아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바쁘신데 찾아왔나 봐. 그러게 그냥 백호 님 집에서 기다리자니깐.”
“백호 님도 반려 님이 언제 오실지 모른다고 했잖아.”
“설마 두 분이 벌써 싸우신 거예요? 어제 초야 치르시고 벌써 그러시면 안 돼요!”
다시 또 끝없는 수다가 시작됐다. 남모르게 한숨을 내뱉은 지찬이 다리를 굽혀 앉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안 싸웠어요. 제가 정말 일이 있어서…….”
“아, 그럼 집을 옮기시려고! 맞아. 보금자리를 옮기시려면 이것저것 필요하죠. 이를테면 도토리라든가!”
“야! 그건 네 얘기고! 이 뚱뚱보야!”
“누구보고 뚱뚱보래! 앞니만 툭 튀어나온 게!”
“뭐? 앞니? 넌 안 튀어나왔냐? 넌 앞니도 튀어나오고 배도 튀어나왔잖아!”
“자, 잠깐. 그만요. 그만하시고, 도심은 위험하니 조심히 돌아가세요.”
하하, 어설프게 웃어주고 다시 일어서자 투덕거리던 다람쥐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지찬을 바라봤다. 이렇게 조용히 하고 바라보면 귀엽긴 한데…….
그나마 조금 눈치가 있는 한 마리가 상황 정리를 하고 인사 후에 다 같이 어디론가 재빠르게 달려갔다.
지찬은 그들의 뒤꽁무니가 사라지기도 전에 현관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멍하니 방으로 들어와 털썩 주저앉았다. 내 이놈의 호랑이를 그냥.
자연스럽게 핸드폰을 들어 연락하려니, 번호도 모른다.
한성이 핸드폰을 쓰기는 할까. 의문이 들었다. 그럼 대체 어떻게 연락을 하고 살아야 하지? 찾아가는 수밖에 없나.
“하…….”
긴 한숨을 내뱉으며 머리를 쓸어 넘기자 타이밍 좋게 핸드폰 벨이 울렸다.
딱 하나밖에 없는 친구. 찬영이었다.
“이 시간에 웬일이냐.”
-살아 있나, 마이 브로!
“브로 좋아하네. 죽었을까 봐 전화했냐?”
-에이, 왜 이러실까. 형이 바빠서 삐쳤어요? 우쭈쭈.
“아, 징그럽게! 밥은 먹고 사냐?”
-다 먹자고 하는 짓인데 안 먹으면 무슨 재미겠냐. 넌 어때. 치킨집 잘 다니고 있냐?
“치킨집 아니라니까.”
-아, 여기 물 나랑 안 맞아. 빨리 한국 돌아가고 싶다. 별일 없는 거지?
“당연하지. 제수씨도 잘 지내고?”
-응. 이젠 아주 외국 사람이여. 그 오지랖 어디 가겠어?
“제수씨 성격 하난 끝내주잖아.”
-끝내주지. 하하, 그래서 내가 반했잖냐. 아얏, 왜 꼬집어. 지찬이? 어. 잘 지낸대.
찬영의 목소리 뒤로 그의 와이프 지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길고 긴 연애를 끝으로 결혼에 골인한 두 사람은 지찬도 서로 잘 알고 있는 사이였다. 오지랖이 넓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만큼 정이 많아 여러모로 잘 챙겨 줬던 지연은 지찬이 찬영 다음으로 아끼는 사람이기도 했다.
-지찬이 잘 지내는지, 밥은 잘 먹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물어봐. 넌 왜 전화해서 쓸데없이 치킨집 얘기를 하고 있어.
-아, 왜! 나도 내 나름의 표현이거든? 야, 지연이가 자꾸 나 혼낸다.
“넌 혼나도 싸, 인마.”
오랜만에 통화해도 어색하지 않고 즐겁기만 했다.
이렇게 어지러운 상황을 얘기하면 과연 이들의 반응은 어떨까.
안색이 퍼레져서 당장에라도 비행기 표를 끊고 날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지연과 찬영의 성격이라면 분명 그러고도 남았을 거다.
‘그보다, 믿어주긴 할까. 나도 나를 못 믿겠는데.’
어쩐지 씁쓸해져 고개가 숙여지는데 앉은 자리 뒤에서 아까부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창문에 누가 돌멩이를 던지는 듯한 타격 소리.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리던 지찬의 얼굴이 굳어졌다.
“저건 또 뭐야.”
-어? 왜? 무슨 일 있어?
참새, 종달새, 직박구리, 까치까지.
“아, 아니. 아니야. 내가 지금 좀 바빠서, 나중에 전화할게.”
-야, 무슨 일인데 그래?
“아니. 별일 아니야. 진짜 어디 가야 할 데가 있어서 그래.”
응, 응. 알았어. 대충 건성으로 대답을 끝낸 지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부터 무슨 소리가 들리나 했더니 이젠 종류별로 새들이 모여 와 창가에 매달려 있었다.
창문을 부리로 톡톡 두드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 전 정신없던 다람쥐들이 생각났다.
창가에 다가가 문을 열자 새들은 살짝 날아오르다 다시 열린 창틀에 내려앉았다.
“안녕하시오.”
“반려 님께 문안 인사드리러 왔소이다.”
‘귀엽게 고개 갸웃거리면서 묵직하게 말하지 마세요…….’
지찬은 손을 들어 눈을 가린 채 풀썩 주저앉았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나고 기가 막히고.
“우리도 생에 반려 님을 처음 맞이하는 거라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소.”
“한성 님께선 다음에 다 같이 인사를 나누라고 하셨지만, 어찌 그럴 수 있겠소. 서방의 반려 님이 새로이 태어나셨는데.”
“맞소이다.”
직박구리. 폴더에서만 많이 봤지, 실물로 보면서 대화를 하고 있을 줄이야.
그는 다시 일어나 찬찬히 새들을 훑어보다 뒷덜미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한성한테 가야겠네. 이러다 온 동네 동물 다 모여들게 생겼어.’
“저, 그…… 일단, 고맙습니다. 찾아와 주셔서 감사하긴 한데, 도심지라 위험하지 않으실까요. 제가 한성에게 갈 테니 나중에 그리로 찾아와 주시는 게…….”
“부담 느끼지 마시오. 우리도 지나가는 차, 반려 님께 인사나 드리고자 들른 것이니.”
‘부담을 어떻게 안 느껴요.’
당장 이마를 부여잡으며 한숨을 내쉬고 싶지만, 앞에 쪼르르 앉아 있는 새들 앞에서 할 짓은 아닌 것 같아 꾹 참았다.
온 동네방네 동물을 부르는 청년이라고 소문나게 생겼다. 이러다 산에 있는 멧돼지나 고라니까지 찾아올 것 같은 위기감이 느껴졌다.
“네, 그, 인사받았으니 이제 갈 길 가셔도 됩니다. 하하.”
“그럼, 다음에 뵙지요.”
푸드덕.
“으아, 진짜. 아.”
혹시나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던데, 입방정이라도 잘못 떨면 동네방네는 물론이고, 저 뒷산 어느 언저리 나무에 붙어 있는 장수풍뎅이까지 ‘반려 님이 어떻다더라’ 이러쿵저러쿵 입방아에 오르내릴까 신음만 삼켰다.
“이런 거라고는 말 안 해줬잖아. 망할 호랑이야.”
지찬은 한동안 주저앉아 일어날 수가 없었다. 문득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또 어느 순간엔 너무 어이가 없어 한참을 넋 놓다 두 눈도 비벼 보고 새끼손가락으로 귀도 파봤지만.
열린 창문은 그대로였다.
내가 헛것을 보고 헛것을 듣는 건 아니겠지.
이번에야말로 한성의 핸드폰 번호를 얻어 오겠노라 다짐하며 나갈 준비를 했다. 없으면 사서 쥐여 주기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아니면, 정말로 그 집에 들어가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