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너 줄 건 없어.”
“와, 진짜 너무하네. 안 주면 못 먹을 줄 아냐? 내가 타 마셔야지.”
“제가 타 올게요.”
일어서려는 지찬의 손목을 잡아 다시 앉힌 한성이 여전히 현무를 쏘아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대는 내 반려지, 저런 거 차나 타라고 곁에 두는 게 아니야. 손발이 있으면 알아서 마시겠지. 그냥 둬.”
“저런 거라네. 아이고, 오래 사니 이런 꼴이나 보고. 아이고!”
웃는 낯으로 구시렁거리면서 주방을 향한 현무가 사라지자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때 해와 닮았지만 조금 더 날카로운 인상의 여자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달입니다. 반려 님.”
“아, 예. 안녕하세요.”
작은 아이의 인사에 일어나 지찬도 같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자세를 바로 하고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달의 시선을 느끼고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달은 다시 해의 옆에 자리를 잡고서 지찬이 내준 오미자차를 홀짝였다.
“인사가 그것뿐이야?”
불퉁하게 입술을 내민 해가 달의 옆구리를 슬쩍 찌르자 고개를 틀어 쳐다봤다.
“수다 떨러 온 게 아니잖아.”
“그러니까아, 인사가 너무 짧잖아! 더 이야기할 건 없어? 이를테면 잘 부탁합니다! 라든지 말이야.”
“잘 부탁할 게 뭐가 있어. 한성이 어련히 해줄까. 물어뜯는 거를 보아 호랑이 성정이 포악해 걱정이 들긴 하지만.”
톡 쏘는 달의 말에 해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불퉁해졌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곳에 거의 오지 않아요. 옆 산 중턱 어딘가에 늘 있습니다. 오늘도 반려 님께 인사드리러 온 것이지 해처럼 한가로이 수다나 떨러 사방팔방을 돌진 않습니다.”
“아…….”
그러시구나. 어쩐지 대하기 어려운 달의 뾰족한 말투에 지찬이 머리를 긁적였다.
해는 정말 하늘에 해처럼 밝았다. 방긋 웃는 모습도 그렇고 동글동글한 눈매도 한몫했다. 하지만 달은 파리한 안색처럼 말도 표정도 뾰족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밤하늘의 달도 어찌 보면 참 푸근한데, 어두운 곳에서 늘 빛을 내어주는 고마운 존재 아닌가.
언젠가 커다란 보름달이 뜬 날, 엄마의 손을 잡고 집으로 향하던 어린 날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엄마, 달님이 꼭 날 따라오는 것 같아. 왠지 무서워.’
‘달님이 무서워?’
‘응, 자꾸만 날 쫓아오는 것 같아.’
‘아가야, 저 달님은 우리 아가가 걷는 길이 어둡지 말라고 길을 비춰 주는 거야. 우리 아가는 어두운 걸 무서워하잖아? 그런 걸 알고 우리 지찬이 무섭지 말라고 가는 길에 빛을 내어주는 거란다.’
‘정말? 그럼 고마운 달님이네?’
‘응, 앞으로도 우리 지찬이 무섭지 말라고, 달님은 창밖에서, 놀이터 위에서, 그리고 네 맘속에서 언제나 빛을 내어줄 거야. 달님은 무척 자상하거든.’
내 앞의 달님도 언제나 빛을 내어주는 자상한 신수임이 틀림없을 거다. 어둠 속에서 부끄러운 듯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달빛 조각을 내어주는 따뜻한.
사념에 잠긴 지찬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한성이 그새 제 마음을 읽은 게 분명했다. 어쩐지 순간 그 시절의 어린 지찬이 되어버린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코끝이 시큰거렸다.
‘조금 더 오래 살게 됐어요. 엄마, 우리 가족들의 몫을 내가 전부 받았나 봐.’
지찬의 표정이 굳어지는 걸 본 해는 안절부절못하였다.
‘달이 괜한 소리를 해서 반려 님이 화가 난 게 틀림없어!’
표정으로도 보이는 해의 얼굴에 지찬이 금세 표정을 풀었다.
“그래도 이렇게 찾아와 줘서 고맙습니다.”
나이가 서른이 넘으면 첫인상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진 않는다. 어떤 스타일의 사람인지 대충 파악이 가능하기도 하고, 특히나 영업팀에서 이골 나게 일을 하다 보면 그 정도는 어찌 보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
물론, 그 느낌에 모든 것을 걸어선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다음엔 제가 달님이 계신 곳에 가도 될까요?”
“어, 음, 네. 뭐…… 풍경이 좋습니다.”
살짝 당황한 달이 말을 조금 버벅대며 찻잔에 얼굴을 박은 채 웅얼거렸다. 은근히 쑥스러움을 타는 모양이었다.
* * *
해와 달, 현무, 그리고 심지어 현무의 반려까지 등장해 정신없는 시간이었다.
20대 후반의 여성이었는데 그녀의 시간이 멈춘 지 몇 해나 지났다고 한다. 손가락으로 세어 보다 지찬의 나이를 듣고는 제가 더 누나라며 방방 뛰었다.
현무에게 조금만 더 일찍 찾아왔으면 훨씬 젊은 모습으로 함께 하지 않겠느냐고 투정을 부리는 모습엔 서로 사랑이 가득했다.
현무도 한성과 비슷한 나이의 청년 같은 외모였는데 그가 훨씬 더 어려 보여 남들이 보면 제가 연상 누나 애인인 줄 안다며 한탄까지 했다.
갑작스레 떠들썩한 분위기가 어지럽고 낯설기도 했다.
조용히 약과를 먹으며 차를 홀짝이는 달과 그 옆에서 현무 반려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해, 그리고 그 모습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한두 번 들었을 말이 아닐 텐데도 허리를 감아 도닥이는 현무의 모습까지.
마치 한 가족 같은 단란함이 느껴졌다.
요란하게 왔던 손님들이 갈 때도 한참이나 요란을 떨다 사라졌다. 재순이 없어 슬프다더니 둘이 좋은 시간을 방해한 거 아니냐며 빨리 가자고 재촉하다가도 대화의 물꼬가 터지면 또 거기서 한참을 떠들어 댔다.
그리고 주방에 잠시 물을 마시러 갔을 때 현무의 반려가 다가와 조심스레 손을 잡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누나니까 말 편하게 할게, 괜찮지?”
“아, 네. 누나.”
“이제야 반려가 된 거라고 들었어. 나도 기껏해야 몇 해를 더 산 것뿐이지만, 앞으로 힘든 일도 많을 거야. 너도 알다시피 우리는 인간들보다 더 오랜 시간을 살아.”
“네.”
“인간의 수명은 아주 짧고 아쉽지.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죽음을 마주해야 할지 나도 아직 몰라. 하지만, 그런 것에 너무 빠져들진 마. 그건 너를 갉아먹는 일이니까. 한성 님을 믿어 봐. 너 자신을 아껴 줘.”
“그럴게요. 사실, 아직 실감이 나질 않아서…….”
“알아, 나도 그랬으니까. 한성 님이 널 많이 찾았어. 아주 많이 그리워하셨어. 그것만 알아주라. 나는 알아. 저분, 정말 널 많이 아껴. 몇 해 보지 못했지만 내가 느낄 정도면 말 다 했지. 워낙에 자기감정은 꾹 눌러 담고 사는 분이시라.”
“……네.”
사실 이해가 가진 않았다.
‘날 많이 찾았다고, 그리워했다고?’
반려를 찾고 그리워한 게 아니라 ‘지찬’이라는 말인가. 아니면 반려이기에 그립고 찾았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주절주절 떠들어 미안해. 나이가 드니까 자꾸 쓸데없는 걱정만 많아져서 그래. 네가 이해해. 그래도, 한성 님을 믿어줘. 응? 내가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사실 저 위의 신이 병신이지. 한성 님의 잘못은 아니잖아.”
가감 없이 툭 던져지는 신에 대한 살벌한 반응에 지찬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 신 별로 안 좋아해. 내가 바라보는 건 오직 현무 그이뿐이야.”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고 수줍게 웃으며 말하고선 지찬의 어깨를 톡톡 도닥이며 주방을 나갔다.
엄청난 걸 들은 기분이 들었다. 괜히 찔려 하늘을 올려다봤지만 높은 천장만 눈에 들어왔다.
이런 거로 벼락 맞는 건 아니겠지? 뭐 사실, 세상에 모든 인간이 신을 찾기도, 원망하기도, 또는 욕을…… 하기도 하니까.
그걸 전부 벼락을 내리려면 지금까지 남아 있는 자들은 몇 없을 거다.
그만큼 쩨쩨한 성격은 아니겠거니 생각한 지찬이 물 한 모금을 넘겼다.
모두 빠져나가고 한숨 돌리려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지찬이 바깥을 바라보자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배는 안 고픈가.”
“간식 열심히 주워 먹었는데요. 근데 왜 자꾸 나만 보면 밥 타령이래.”
“너무 말랐으니 그렇지.”
“대한민국 평균보다 건장한 대한의 남아거든요?”
“그 평균이 너무 야박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턱을 쓸어내린 한성이 지찬의 손목을 쥐었다.
한성의 손이 크기도 했지만 한 줌에 쥐어지는 손목은 대한민국 평균이라기엔 너무 얇지 않은가 생각했다. 평균이야 그들의 잣대고, 제 기준엔 한참이나 못 미친다. 그게 물론 지찬 한정이긴 했지만.
“허리나 가슴이 얇아 부드럽게 휘어지는 것은 좋긴 하지만, 아…… 물론 다리를 들어 올릴 때 너무 가벼이 들…….”
“잠깐, 지금 뭘 생각하면서 말하는 거예요?”
“오늘 아침?”
“미쳤나 봐! 틈만 나면 성희롱이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지찬이 얼굴이 벌게진 채 씩씩댔다. 떠들썩할 땐 모르겠더니 또 단둘이 남으니 허리 아래가 살금살금 간지러웠다.
괜히 침 한 번 삼키는 것도 신경이 쓰이고, 옆에 앉아 맞닿은 어깨나 팔이 뜨거웠다.
‘이러다 정말 이상해지지.’
“집에 갈게요.”
“날 두고?”
“여기 한성 집이거든요? 그럼 내가 데리고 갈까?”
“여기로 아예 집을 옮기는 것은 어떨까.”
“에?”
“이제 초야도 치렀겠다. 반려의 각인도 됐겠다. 우린 부부나 진배없거늘…… 나를 두고 어딜 간단 말이냐.”
“부…… 부…… 부부, 부부라니.”
당황해 부부라는 말을 더듬거리는 지찬의 빼꼼히 튀어나온 입술이 귀여운지 지켜보던 한성이 짧게 입을 맞추고 떨어져 나갔다.
팔로 입술을 가린 채 후다닥 뒤로 물러난 지찬이 그냥 보기에도 빨갛게 물든 얼굴로 한성의 정강이를 냅다 후려 차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괜히 2층에 올라왔다 싶었다. 생각해 보니 집에서 입고 있던 옷 그대로 나와 들고 나갈 짐 하나 없는데 너무 익숙하게 방으로 들어와 버린 것이다.
침대는 아침의 흔적들로 가득했다. 바닥으로 흘러내리기 직전인 이불과 그 위를 굴러다니는 오일, 그리고 얼마나 움켜잡았는지 알 수 있을 만큼 잔뜩 구겨진 시트까지.
두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리고 다시 문을 열자 한성이 앞에서 빙긋 웃고 있었다.
“짐이 없었네요. 착각했지 뭡니까…… 전 그냥, 안녕히 계세요.”
최대한 어물쩍 넘겨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가로막고 있는 한성 때문에 그마저도 실패했다.
한 걸음 한 걸음씩 거리를 좁혀 지찬에게 다가오는 한성의 존재감 때문에 마치 맹수 앞에 먹이가 된 것같이 뒷골이 서늘했다.
“정강이는 죄송해요. 아니, 자꾸 불시에 뽀뽀를 해대니까!”
“그럼 허락 맡고는 괜찮은가?”
“아, 그건……!”
“키스, 하고 싶은데.”
미쳐 버리겠다. 멀쩡하던 몸 전체가 심장이라도 된 듯 쿵쿵거렸다. 귀가 화끈거리고 머리 정수리까지 열이 오르는 걸 보면 보지 않아도 새빨개진 얼굴이 되어 있을 게 뻔했다.
대답이 없는 지찬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는 성큼 다가와 허리를 낚아채 끌어안고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보내기 싫었다. 어떤 식으로든 계속 붙잡고 싶었다. 이제야 겨우 품 안에 끌어안을 수 있게 된 건데, 집으로 다시 돌려보내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해졌다.
갈 수 없게 만들면 되지 않을까, 집을 통째로 날려 버리면 갈 곳이 없어 제집으로 들어오게 되진 않을까. 아니면 이대로 다시 일어나지도 못하게 실컷 안은 후에 재워 두고 집을 처분해 버릴까.
온갖 험한 생각을 하면서도 맞닿은 입술의 감촉이 세상에 다시 없을 황홀함을 느끼게 했다.
다시 한번, 지찬이 제 속마음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이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