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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19/60)

19화

욕실에서도 끈질기게도 달라붙는 한성의 손아귀에서 겨우 벗어나 다 식어버린 밥상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따뜻한 물에 몸을 풀고 나니 아래가 조금 욱신거리고 이질감이 느껴지는 것 말고는 썩 괜찮은 컨디션이었다.

주방 식탁에 앉아 국을 끓이고 밥을 새로 푸는 한성을 바라보다 뒷머리를 긁적였다.

재순이나 해가 있을까 쭈뼛거리긴 했지만, 일부러 자리를 피해 준 건지 넓은 집안엔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기지개를 쭉 켜고서 차가운 식탁에 엎어진 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다 그 전부터 들었던 의문을 꺼냈다.

“근데 신의 반려면 영원히 사나요?”

“……아니.”

“나는 그럼 그냥 내 명대로 살다 죽는 건가?”

“그것도 아니.”

“그럼요?”

“인간의 명치고는 오래 살겠지. 늙지 않고 마치 영원일 것 같은 삶을 살게 될 거야.”

“늙지도 않는다고요?”

“응. 그대의 시간은 어제부로 멈췄어.”

하, 짧은 웃음을 내뱉고 스르륵 몸을 일으켰다.

“나 왠지 엄청난 일을 저지른 것 같은데…….”

“엄청난 일이지.”

“한성은 영원히 살잖아요. 그러면 내가 죽고 나면 다시 또 다른 반려가 나타나나요?”

달그락거리던 소리가 멈췄다. 반찬을 내오고 김이 올라오는 국과 밥을 차례대로 식탁에 놓은 한성이 자리에 앉아 작은 한숨을 짓는 듯 입을 달싹였다.

“신이라고 영원히 살지 않아.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영원불멸의 삶이 아니다?”

“그건 오직 천신에게만.”

“그럼 나도 한성도 언젠가는 죽는단 말이죠.”

“일단 먹으면서 들어.”

수저를 들고 국을 퍼 입에 담자 한성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 같은 신에게 반려는…… 안식을 준다고도 하지. 그대가 내 곁에 오면서 나의 시간은 움직이기 시작했어.”

“내 시간은 멈췄는데, 당신의 시간은 움직인다고?”

“반려를 맞이하면, 안식의 시간이 움직여.”

“그 안식이라는 게 죽음을 말하는 거예요?”

“응, 우리에게 영원이라는 건 없어. 나 역시도 언젠간 죽게 될 테고 그대는 나와 같이 ‘인간의 삶’치고 오랜 시간을 살다 함께 안식에 들 거야.”

“나는 당신이 죽어야만 죽을 수 있다는 말인가요.”

“그렇진 않아. 자의로 죽을 순 없지만, 타의로 인해 생명이 꺼질 수도 있어. 하지만, 내 곁에 온 이상 그리 두진 않을 거야.”

“다른 신, 모두가 경계하는 청룡이 날 죽이려 들면, 난 죽을 수도 있다는 거네요.”

한성의 이마가 와락 구겨졌다.

“그럴 일은 없어. 그렇게 만들지도 않을 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예를 들자면요. 나도 알아야 조심하고 살지.”

“좀 먹어. 이야기하느라 식사를 방해한 것 같은데.”

어쩐지 말을 돌리려 하는 듯한 뉘앙스에 지찬이 들고 있던 수저를 내렸다. 한성 역시 밥 생각이 없는지 수저를 든 손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한성, 한 끼 안 먹는다고 안 죽어요. 그런데요. 말하기 불편하거나 싫어도 나한테는 알려 줘야지. 나는 그쪽의 반려라면서, 아무것도 모르고 당신이 말하는 영원과 가까운 삶을 살 순 없잖아요.”

“응.”

“정리해 보자면, 내 시간은 멈췄고, 안식의 시간에 맞춰 살다 별일 없으면 같이 안식에 든다. 뭐 이런 거잖아. 인간의 시간이 멈추고, 신의 반려로써 산다는 뜻이려나. 한성도 나도 죽음의 끝은 있지만, 그게 타의로 인해 더 빨라질 수도 있다는 거고.”

“우리 반려 님은 똑똑한걸.”

한성이 빙긋 웃었다. 지찬은 어쩐지 씁쓸해지기 시작했다.

저 호랑이는 제 죽음을 당겨 온 반려가 정말 반가울까.

나는 내 죽음의 시간을 멀리 던져 버린 저 호랑이가 원망스러워지진 않을까.

“글쎄…… 나는 그대가 정말 반가운데.”

“또 멋대로 읽는다.”

손가락을 톡톡 식탁에 두드리고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굳이 입을 열어 묻지 않았다.

‘그럼, 청룡은요. 그 용은 왜 무서운 건데.’

한성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저렇게까지 경계를 해야 할 이유가 있던 걸까. 성정이 조금 포악하려나, 아니면 욕심이 많은 자일까. 신들의 세계는 참 애매모호하다.

영원히 사는 삶인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란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살다 죽는다는 게 그들에겐 어떤 의미일까.

“굳이 따지자면 포악하고 욕심이 많은 자야. 안식을 원하지 않기도 하지. 제 반쪽의 힘을 위해선 반려가 필요했지만, 안식은 싫었던 게지.”

지찬을 바라보던 한성의 눈동자가 허공을 향했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그의 모습에 지찬은 가만히 앉아 그를 지켜봤다.

“내 자리를 이을 다른 사방신이 나타나면 우리의 시간이 끝나는 거야. 나는 그것에 미련이 없어. 당연히 흘러가는 이치라고 생각해. 늘 고여 있는 것은 언젠간 썩게 마련이거든. 그리고 난 그대가 내 곁에 와 줬기 때문에 더는 바랄 게 없어.”

“한성도 누군가의 뒤를 이은 건가요?”

“……응. 청룡, 그자는 더 높은 곳에 오르길 원해. 더 많은 힘을 원하지. 마치 새로운 ‘신’이 되겠다는 것처럼 말이야.”

찰나의 침묵 속에 한성의 눈이 흔들렸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한데, 자꾸만 거리를 둔다. 그게 지찬 자신과의 거리인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구나.”

“그래서 그자는 자신의 뒤를 이을지도 모르는 모든 이무기를 죽였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예상보다 스케일이 큰 미친놈이었다. 모두가 경계하고도 남을 위험인물임은 틀림없지만, 한성에게는 그것보다 무언가가 더 있는 것 같은 것은.

‘내 착각일까.’

“모든 이무기를요?”

“청룡의 경우엔 신이 될 수 있을 정도의 기운을 가진 이무기들이 모이는 곳이 있어. 신지(神地)라고 해서 기운이 강한 땅으로 모여드는 거지. 그곳에서 용이 되어 승천하는 이들 중에 가장 강력한 이무기가 다음 대의 청룡이 되는 게지. 신의 구역이라 누구도 함부로 하지 않았어. 그럴 생각도 못 했을 테고.”

“신이 될 힘을 가진 이무기가 잔뜩 모여 있었을 텐데, 그걸 전부 죽였다면, 청룡의 힘이 그렇게나 강하단 뜻인가요.”

“신수를 잡아먹어 힘을 빼앗았어. 금기나 다름없는 짓을 벌이고 다니는 거야.”

지찬은 왜 그런 자를 신은 가만히 두고 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리를 긁적이면서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한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지찬의 물잔에 물을 더 채웠다.

“신은 정의의 사도가 아니야.”

알수록 더 모호한 신의 세계다.

복잡한 머릿속을 털고 배고픈 위장을 달래려 밥 한 그릇을 모두 비운 지찬이 거실 소파에 기대앉았다.

소파 맞은편에 커다랗게 난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과거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낡은 정자 하나를 둘러싼 연못에 우거진 버드나무가 잔뜩 휘어져 바람에 날리는 모습은 꽤 보기 좋은 풍경이었다.

집이 넓은 줄은 알고 있었지만, 뒤편에 이런 고즈넉한 분위기를 가진 뜰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한성이 차가운 오미자차를 내주고 옆에 앉아 지찬의 시선 끝에 닿은 바깥을 바라봤다. 기다란 다리를 꼬고 앉아 소파에 기대자 맞닿은 어깨가 간질거렸다.

“오늘은 아무도 안 계시나 봐요.”

“휴가. 내가 며칠간 쉬다 오라고 했어.”

“그렇구나.”

“앞으로 몇 번이나 더 할지 모르는데, 그대의 신음을 남들에게…… 윽.”

지찬은 옆에 앉은 한성의 다리를 걷어찼다. 반사적으로 나오는 신음은 그냥, 그냥 반사적인 반응 같았다. 아프지도 않으면서 매번 타이밍 잘 맞춰 아픈 척은 최고다.

“뭘 더해요!”

“뭐긴, 그대는 저곳이 마음에 드나 보군. 잘 보이는 여기서 한번 할까.”

지찬 쪽으로 몸을 기울여 그는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거리에 다가왔다. 피한다고 옆으로 기울여진 게 꼭 덮쳐 주세요. 하는 것처럼 저 스스로 눕는 꼴이 되어버렸다.

두 팔꿈치로 지탱한 채 누워 버린 모양새가 되자 한성은 진심인지 다리 하나를 지찬의 다리 사이에 끼우고 올라탔다.

‘아직 욱신거리는데.’

얼굴이 금세 발개진 지찬이 다가오는 한성의 얼굴을 밀어내지도 못한 채 입을 달싹였다. 닿아 오는 입술의 열기가 뜨거워진다고 느낄 때쯤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한성 님! 각인 하셨……!”

또랑또랑한 해의 목소리가 중간에서 끊기고, 마치 못 할 짓을 하다 걸린 사람처럼 지찬이 한성을 있는 힘껏 밀어낸 채 벌떡 일어섰다.

“아…… 죄송해요. 저…… 갈까요? 하던 일 마저 하셔도 되는데.”

“그러게나 말이다. 해야, 참 중한 일을 하려던 참이었는데…….”

“아니에요! 뭐, 뭘 했다고.”

진심으로 아쉬운 듯 한숨짓는 한성의 정강이를 냅다 후려 찼다.

‘아, 진짜 이 짐승 어쩌지?’

슬금슬금 다가오는 해가 맞은편에 풀싹 앉은 채 지찬을 바라보더니 두 눈이 커다래지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와! 반려 님이다! 진짜 반려 님이 되신 거네요!”

“아쉽구나.”

“조용히 못 해요? 어린애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어!”

그 말에 한성과 해가 쿡쿡 웃었다. 사실 따지고 보자면, 제일 어린 건 지찬이었으니 말이다.

순간 깨달은 지찬이 민망해 목을 긁적이자 해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한성 님도 참, 반려 님의 목까지 물어뜯으셨네. 각인하랬지 누가 반려 님을 깨물래요!”

티셔츠엔 가려지지도 않는 목의 붉은 자국이 해의 눈엔 물어뜯은 거로만 보였나 보다. 오랜 세월을 살았지만, 아직 이런 행위를 이해할 만큼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 말에 귀 끝부터 목까지 발개진 지찬이 두 손으로 목을 감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휴, 덥네. 제가 차 가져올게요.”

“곧 달이도 올 거예요.”

“그래?”

걸음을 옮기던 지찬이 해를 돌아봤다.

“한 분 더 오세요?”

“네! 제 동생이요. 반려 님께 인사드리러 온다고 했어요.”

“달이 오는 것은 오랜만이로구나.”

해와 달이라, 귀엽고 예쁜 이름이었다. 지찬은 자신도 모르게 이름을 곱씹으며 주방으로 향했다.

뒤이어 따라온 한성이 꺼내 준 오미자 청으로 차가운 음료를 만드는 걸 거들다 거실로 나갔을 때는 뭔가 분위기가 왁자지껄하게 바뀌어 있었다.

“정말이라니까요! 한성 님이 반려 님 목을 이렇게! 막 물어뜯었더라고요! 혼 좀 내주세요!”

“막 울긋불긋하더냐?”

“못됐군.”

“네! 울긋불긋 멍이 들어선 어찌나 아파 보이시던지.”

“하하, 그건 물어뜯었다기보단, 음…… 물어뜯긴 한 거지만.”

“못됐어.”

어느새 온 것인지 현무가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해의 고자질에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그 옆에 해와 닮은 작은 여자아이는 뾰로통한 얼굴로 못됐다는 말만 내뱉었다.

주방 정리를 끝내고 뒤따라 나온 한성이 뒤에서 땅이 꺼져라 한숨 짓는 게 느껴졌다.

뭔가, 지금 이 순간 한성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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