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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17/60)

17화

지찬이 엎드린 채 파들거리는 몸을 웅크리자 한성이 부드러운 몸으로 등을 도닥여 줬다.

그 작은 손짓에도 예민해진 몸은 식을 줄을 몰라 움찔 떨려 왔지만, 그것도 잠시 노곤한 느낌에 금방 수마에 곯아떨어졌다.

눈을 조금 덮는 머리카락이 흠뻑 젖어 달라붙은 모양새를 보고 넘겨 주는 한성의 손끝이 조금 떨렸다. 혹시나 깊은 잠이 들었다가 제 손길에 지찬이 깰까 조심스러운 마음이 컸다. 팔로 지탱해 젖은 머리카락을 넘겨 주고 동그란 뒤통수에 눈길이 갔다.

참 정갈하고 곱다. 동그라니 예쁘다. 머리카락 한 올마저도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짧은 머리카락이 투박하지도 않고 너무 어여뻐서 이상하게도 마음이 시큰거렸다.

그리고 자꾸만 내려앉는 시선 끝엔 어깨부터 시작된 각인이 일렁이듯 지찬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제 반려라는 표식이기에 마음 뿌듯하기도 하면서, 문양 따위가 지찬의 몸을 휘감은 모습에 괜스레 샘도 났다. 그 생각에 한성은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단 생각을 하며 피식 웃어넘겼다.

제 증표이면서도 그것에 질투한다니, 아이러니하기도 했다.

아직도 손가락 사이를 흘러내리는 이 고운 머리카락처럼 제 품 사이를 자꾸 빠져나가려는 지찬이기에.

‘아주 조금만 더, 아주 조금 더. 길 잃은 그대의 마음이 내 쪽으로 한 걸음만 더 다가와 주기를.’

한성은 신이 아닌 지찬에게 간절하게 기도하면서 눈을 감았다.

* * *

“으응…….”

자는 모양새가 불편해 자세를 바꿔 보려고 움직여 봤지만 어쩐지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욱신거리는 뒤와 뻐근한 온몸이 마치 무언가에 묶인 것처럼 답답했다.

베개에 얼굴을 비비며 다시 한번 자세를 바꾸려고 시도해 봤지만, 겨우 다리 한쪽 바둥거리는 게 전부였다.

“으응…….”

다시 한번 불편한 느낌을 눌러 담아 소리를 내자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몸에 걸쳐진 묵직한 무언가가 뒤로 끌어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음, 깼나.”

낮게 깔린 한성의 목소리가 뒤통수 뒤에서 들려왔다. 갑갑했던 몸은 아마도 한성의 팔과 다리에 묶여 있어서 그런 듯했다.

“뭐, 예요…….”

“더 자.”

밤새 소리를 지른 탓인지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몸도 목도 제 것 같지 않은 느낌에 낯설었지만, 등 뒤에 달라붙어 올가미처럼 저를 감고 있는 덩치 커다란 한성도 낯설었다.

어제 무슨 일이 있던 거지. 눈을 여러 번 깜빡이다가 펑, 하고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제야 맨살끼리 맞닿은 온기가 적나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프고 꼼짝도 못 하겠는데도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어 이미 마음으론 저 방문 밖을 수백 번도 뛰쳐나갔을 게 분명했다.

“가긴 어딜 가. 이제 반려 님은 내 반쪽이나 다름이 없는데.”

“멋대로 속마음 읽지 좀 말아줄래요.”

“쉽지 않아. 자꾸 그대에게 집중하게 되니 들리는걸.”

“말이나 못 하면…….”

등 전체를 감싼 한성의 온기에서 쿵쿵거리는 고동 소리까지 전해져 왔다.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이었다. 감싸 안고 맞닿은 살은 단단하기 그지없었지만, 어쩐지 부드럽고 포근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배고플 텐데 밥을 좀 가져올까?”

“일어나야죠.”

“아플까 그러지.”

“저 그렇게 약골 아닙…… 윽.”

한성의 팔을 밀어내고 일어나 앉으려고 몸을 일으키자 모든 뼈마디가 비명을 질러 댔다. 엉덩이는 뭐가 삐져나온 것처럼 얼얼하고, 온몸의 관절과 근육들이 찢어질 듯 아파 왔다.

‘세상에 이렇게 망할 것이었으면 이 호랑이가 가든 말든 상관 안 했지!’

뒤늦은 후회를 해봐도 어차피 벌어진 일. 속마음으로 욕만 했다. 욕만.

그 덕에 한성은 엉거주춤하게 일어나지도 눕지도 못한 지찬의 모습을 보며 큭큭댔다.

“그런 아픔은 푸는 방법이 있긴 한데, 도와줄까?”

“뭔데요?”

“운동은 운동으로 풀라고 했는데, 그럼 우린 섹스를 한 번 더…… 윽.”

“와! 벌건 대낮에 못 하는 말이 없네!”

지찬은 아까보다 더 벌게진 얼굴로 한성을 노려봤다. 반항의 의미로 주먹을 가슴팍에 내려쳐 봤자 별 느낌 없을 것도 다 알고 있었다.

‘요망스럽게 아픈 척하는 신 나부랭이라니. 내가 다신 뒤를 허락하나 봐라!’

“앞은 허락해 주려나.”

“주둥이 못 다물어요?”

퉁명하게 소리를 질러 봤지만, 몸이 자유롭지 않으니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찌르르 울리는 허리에 얼얼한 엉덩이 때문에 일어나려다 실패한 후 무릎을 굽혀 웅크린 듯 엎드려 있는 게 최선이었다.

끙끙거리는 지찬의 모습이 못내 귀여운지 맨살을 만지작거리다가 손등을 여러 차례 맞은 한성이 일어나 밥을 가져오겠다며 나갔다.

지찬은 한성이 나간 사이에 브리프라도 챙겨 입어 보려고 아주 조금씩 움찔거리며 침대 끝으로 움직였다.

중간중간에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인가 싶어 한숨이 절로 나오긴 했지만, 계속 알몸으로 있으려니 취하고 있는 자세가 너무 민망해 포기할 순 없었다.

겨우 자리를 옮긴 지찬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바지와 브리프를 향해 손을 뻗어 작은 신음을 삼키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반려 님, 내가 입혀드릴까?”

“끙…….”

진짜 타이밍, 정말 싫다.

작은 밥상을 들고 온 한성이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으며 건네는 말에 지찬의 얼굴이 다시 한번 벌게졌다.

뻗고 있던 팔에 힘을 빼 늘어뜨리고 침대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으, 진짜!”

느끼기엔 천근만근 같은 몸뚱이를 가볍게 들어 침대 머리맡에 기대게 한 한성이 밥상을 침대 위에 올려 두고 수저를 쥐여 줬다.

“하…… 기왕 옮겨 준 거 그쪽처럼 가운이라도 입혀 주든가!”

알몸으로 빠져나가서 언제 가운을 챙겨 입은 건지 브라운 색상의 가운으로 여민 한성의 꼴을 보자니 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나만 알몸이야, 왜!’

“가리면 볼 수 없잖아.”

지찬은 부글거리는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어 애가 탔다.

“아직 보진 못했겠군, 그대의 몸에 내가 새겨진 걸.”

“새겨져요?”

“반려의 증표로 이곳부터 이 뒤에까지.”

한성의 손이 오른쪽 어깨를 지나 등을 쓸어내리고 다시 옆으로 미끄러지듯 내려와 다시 심장 부근에 있는 상처까지 쓰다듬었다.

“나를 담고 있어.”

가슴 아래로 시선을 내리자 정말로 못 보던 것이 제 상처를 덮고 있었다.

문신도 아니고, 새하얀 빛무리 같은 것이 일렁거리는 모습에 넋을 놓고 바라봤다. 어깨를 살펴보고 가슴 밑을 손으로 매만지자 그냥 맨 살결만 만져졌다.

“이게, 각인 때문에 생겨난 거라고요?”

“응, 이젠 정말로 내 반려가 되었다는 뜻이지.”

“뭐, 막, 신이라는 게 내 의사는 묻지도 않고 문신을 새겨?”

“나도 있으니 노여워 마시게. 어차피 일반인에겐 보이지도 않아.”

말을 끝으로 가운을 걷어 제 증표를 보여 주는 한성의 모습에 지찬이 들고 있던 수저를 툭 떨궜다.

왼쪽 허벅지를 감싼 문양이 등허리까지 빼어나게 수놓여 있었는데, 투명하고 하얀 빛줄기가 일렁이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탄탄하게 올라붙은 한성의 엉덩이와 조각난 등 근육까지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니, 잠깐. 그게 왜 시선을 사로잡아.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재빨리 생각을 없애려고 했지만, 가늘게 떨리는 한성의 어깨를 보니 소용이 없는 듯했다.

뒤를 돌아 가운을 젖힌 채로 웃음을 참는 한성의 모습을 보다 지찬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마음에 드는 것 같으니 나도 기쁜데, 반려 님.”

“아니거든요.”

“등 근육이 더 좋은가? 아니면 엉덩이?”

장난기 가득한 한성의 목소리가 이어져 나왔다. 그러고는 그 상태로 팔을 돌려 제 등허리부터 엉덩이까지 쓰다듬다 부러 찰싹 소리 나게 때렸다.

“아! 아니라고요.”

그 모습에 기겁한 지찬이 움찔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렇게 마음에 들면 직접 만져 봐도 되는 것을, 뭐 그리 부끄럽다고.”

“진짜, 이 망할 호랑이가!”

저를 놀리는 것을 알지만, 괜히 발끈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발끈함과 동시에 후회가 밀려 들어왔다.

‘왜 자꾸 말리는 거지.’

“아, 그럼 혹시 앞쪽이 더……? 돌까? 돌아?”

한성이 얼굴과 상체를 앞으로 돌리는 시늉을 하자 왜 말리고 자시고 간에, 지금 당장 기가 막히게 뻔뻔한 호랑이를 말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밥상 던지는 수가 있어요!”

최후의 일갈을 내뱉었다. 낮일 테니 분명 재순이 차려 준 밥상일 텐데 함부로 엎을 순 없는 노릇이지만, 말로나마 협박해야 속이 조금 시원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음이 급하다니 나도 몸이 달아오르는 것 같은데.”

“무슨 소리예요?”

“어찌나 빨리 하고 싶으면 밥상까지 던지겠다고, 응?”

한성이 뒤돌아 지찬을 바라보자 아까보다 얼굴이 더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지찬의 두 눈은 약간 불안한 듯 흔들렸다. 그는 견디질 못하고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귓불이 빨갛게 익어 가고 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고르지 못한 숨이 튀어나왔다. 그런 자신의 반응에 놀란 지찬이 손을 들어 입을 가린 채 고개를 더 돌려 버렸다.

이것도 반려의 기운 때문인 건가.

이상하게 간지럽고 화끈거리는 게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아니면 어제 치른 정사의 여운이 계속 남아 있던 걸까.

방금까지 엉덩이가 아파 꿈쩍도 못 하겠더니, 지금은 몸이 뭐라도 아는 듯 허벅지가 살짝 조여졌다.

‘이게 무슨 일이야.’

지찬이 혼란스러워하는 사이에 한성이 다가와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잡아떼었다.

“미안하지만, 밥은 조금 이따 먹자.”

“네?”

“가뜩이나 말라서 많이 먹여 두고 싶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겠어.”

“뭐, 뭐가요.”

손아귀에 잡힌 지찬의 손목을 들어 안쪽을 혀로 날름 핥아 올리자 몸이 가늘게 떨렸다.

“달다, 지찬아.”

“읏…….”

어찌나 다디단지 목덜미에 제 코를 박고, 매끈한 살결에 입술을 박고, 그 아래엔 제 것을 박아 넣어 모든 걸 송두리째 흔들어버리고 싶었다.

한번 갖고 나니 시도 때도 없이 탐하고 싶어졌다.

“그대가 내 속을 읽지 못하는 게 얼마나 천만다행인지 몰라.”

“난 억울한데요.”

피식 웃은 한성이 상을 들어 아래로 치웠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이마와 코, 볼에 차례대로 입술을 찍고, 정작 입술 앞에선 시선을 들어 지찬을 바라봤다.

억지로 내리눌렀던 마음이 한 번에 펑 터진 것처럼 내리눌러지지 않았다. 조금만 더 아낀다는 마음에 참고, 참고, 또 참으며 주변을 맴돌았던 그 시간.

그 시간이 허무하게도 한번 손에 잡히기 시작하니 끝을 모르고 원하게 돼버렸다.

이런 자신의 집착과 질척한 욕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을 알면, 지찬은 과연 어떤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될지 겁이 났다.

길을 따라오라며 조심히 어루만지고 한없이 다정한 눈으로 지켜보겠노라 다짐했지만, 어찌나 이 반려의 향기가 다디단지…….

마치 향긋한 꿀단지처럼 목 언저리에 코를 박고 숨을 쉬고 있자면, 온 세상에 지찬과 단둘만 남은 한가로운 낙원처럼 느껴졌다.

“네가 마치 내 세상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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