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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14/60)

14화

햇빛 강렬한 한여름 담장 아래에서 이른 아침에나 맡을 수 있던 상쾌한 향기가 지찬의 뒤를 감쌌다.

가볍고 부드럽게 허리로 미끄러지듯 들어오는 팔에 안기게 된 지찬이 고개를 돌려 한성을 바라봤다.

등을 돌리려고 했지만, 꽉 잡은 팔은 더 이상의 움직임을 허락하지 않았다.

“무얼 하고 있던 게야.”

“집에 가는 중이었죠.”

“왜 벌써.”

“계속 있을 수도 없는 거니까요.”

“흐음…….”

무슨 생각인지 숨을 크게 내뱉으며 안은 팔에 힘을 더 주던 한성이 고개를 살짝 내려 지찬의 어깨에 턱을 걸쳤다.

등 뒤에 매달린 덩치 커다란 존재가 조금 더웠지만, 어쩐지 지금까지 봐 왔던 한성의 분위기와는 다른 느낌이라 조금만 더 그대로 있어줘야 할 것 같았다.

“아, 그나저나 혹시 아이 못 보셨어요?”

“……어떤 아이?”

지찬은 어느새 힘이 풀어진 한성의 팔을 치우고 돌아서서 손으로 아이의 키를 가늠해 보며 말을 했다.

“요만한 아이인데 혼자 있더라고요. 빨간 니트에 청바지 입고 있던…….”

“……아니, 보지 못했다.”

지찬이 걸어왔던 담장 길 끝을 바라보던 한성이 조금 굳은 얼굴이 되었다. 그런 옆얼굴을 따라 시선이 닿는 곳을 바라보자 머리 위에 묵직하게 한성의 손이 올라왔다.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머리를 쓰다듬는 커다란 손이 낯설었다.

“왜요?”

“그냥, 반려 님 정수리가 귀여워서.”

지찬은 그 말에 한성의 손을 머리 위에서 떼어 냈다. 자신도 남자치고 작은 키가 아닌데 남의 정수리가 귀엽다니, 한성과 함께면 여러모로 자존심이 상했다.

“됐거든요. 전 이제 갑니다.”

“음, 데려다주질 못할 것 같으니 조심히…….”

“아, 뭘 데려다줘요! 해준다고 해도 거절입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탈탈 털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혹시나 아이를 발견하지 않을까 주변을 둘러보긴 했지만, 여전히 아이의 붉은 티셔츠 끝자락도 보이질 않았다.

‘터가 별론가.’

이 동네가 이상한 게 틀림없었다.

한성은 거칠게 머리카락을 휘저으며 걷는 지찬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고 섰다.

그러다 불어오는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반대편으로 등을 돌렸다.

저 멀리 끝에 지찬이 말했던 빨간 니트의 아이가 담장 끝에 몸을 숨기듯 숨어 있는 모습을 보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나른하게 걸어가는 한성의 발걸음마다 아이의 몸이 움찔움찔 떨리다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별로 위험해 보이지 않는 영혼이라 뒤를 쫓는 건 그만뒀다. 이미 지친 상태이기도 했다.

“너를 해치려는 게 아니야. 이곳에 오래 머물러 봐야 네게 좋을 게 없다.”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하는 한성의 목소리만 빈 거리를 메웠다.

* * *

지찬은 단 하룻밤 만에 돌아온 집 현관에 서서 적막이 가득한 집안을 바라봤다.

아주 잠깐, 찰나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낸 것뿐인데.

계단을 내려가며 들렸던 재잘거리는 해의 목소리, 그리고 이따금 대답하던 한성의 낮은 목소리가 환상처럼 머릿속에서 흩어졌다.

그리고.

‘다녀올게.’

다녀올게라는 말은 ‘다녀왔어?’라고 맞이해 줄 누군가가 있는 사람에게만 허락된 말이 아닌가.

그 말이 어쩐지 기분 좋기도, 또 부럽기도 했다.

십여 년을 이런 적막함과 고요 속에서 살아왔는데도 뜬금없이 나타난 새로운 일상에 다시 낯선 감정이 요동쳤다.

지찬은 하루 만에 차갑게 식어버린 집이 어색해 창문을 모두 열고 이불을 세탁기에 집어넣었다. 텔레비전 소리나 세탁기가 돌아가는 소리라도 있어야 이런 고요함에 잠식되지 않았다.

가끔 찾아오는 열병같이 마음의 빈자리를 이렇게라도 소음을 만들어 채워 넣었다.

답답한 단추를 풀어 벗어 던지고 티셔츠를 찾으러 들어가다 방 앞에 놓인 거울에 시선이 멈췄다.

가슴을 가득 채운 붉은 흔적이 잠깐 잊고 있던 어젯밤의 일을 떠오르게 했다. 그는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면서 괜히 가슴을 문질러 대다 유난히 흔적이 집중된 자리를 쓰다듬었다.

손끝으로 만져지는 기다란 흉터.

약 같은 기운에 취해 정신이 없는 와중에 한성은 제게 묻지도 못하고 상처를 흔적으로 덮으려고 애쓴 것 같았다.

‘이게 애초에 덮는다고 덮어지는 흉터일까.’

손끝으로 상처를 따라 쓰다듬던 지찬은 멍한 표정으로 한참을 서 있었다.

고요했던 일상을 자꾸만 이렇게 뒤흔드는 존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했다. 이미 없는 것에 익숙해진 후인데, 또다시 무언가가 비집고 들어와 버리면, 그게 사라지고 난 지금처럼 이 고요함과 적막함은 예전 같은 일상이 되어버리기 힘들어진다.

그렇다고 한성을 아예 멀리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은 반려였다.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해야만 했다. 이미 그들의 세계에 발을 담가 버렸다. 위험한 상황에서도 자신 때문에 각인하지도 못하는 멍청한 신의 반려.

‘한성 님은 이미 오래전부터 무리하고 계세요…….’

사방신으로 제 구역을 수호한다는 의미는 알겠지만, 정확히 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른다. 그러니 당연히 그가 어떤 무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하지만, 어쩐지 아까 잠깐 만났던 한성의 지친 표정에서 조금은 그 무게를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어두운 방 안에선 방문 너머에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만 희미하게 공간을 채워 가고 있었다.

* * *

“한성 님, 다녀오셨어요? 어디 다치신 데는 없는 거죠?”

현관문이 열리자 해가 쪼르르 달려 나와 한성의 안색을 살폈다.

“응, 조금 피곤하구나.”

“올라가서 쉬세요. 나머지는 제게 맡기시고요.”

“부탁하마.”

조금 지친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가는 한성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해의 얼굴이 굳어졌다.

가끔 능력을 한계까지 끌어 올리고 오는 날엔 힘들어하긴 했지만, 유독 지쳐 보이는 안색이 자꾸 눈에 밟혔다.

한성의 목소리에 뒤늦게 주방에서 나온 재순도 한성의 뒷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성 님, 따뜻한 차라도 올려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좀 쉴게요.”

자꾸만 늘어지는 발을 억지로 끌어당겨 방으로 들어온 한성은 그대로 침대에 무너졌다.

한성은 팔을 들어 눈을 가린 채 한숨을 쉬었다.

원래 망자를 볼 줄 아는 이였을까. 지금까지 지켜봤을 땐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방금 보았던 망자인 어린아이를 지찬이 본 것에 대해서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를 일이었다.

백호는 죽음을 관장하는 신 중의 하나다. 서쪽에서 길을 잃고 있는 망자를 위험하지 않게 안내해 주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점점 길을 잃고 헤매는 망자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간혹 서쪽의 구역을 넘어 혼란을 일으키는 폭주한 신수를 사냥하는 일 역시, 그의 몫이었다.

망자든 신수든 자신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 폭주하는 일은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 위험한 일이었다.

힘이 없었던 자신을 탓했다. 그래서 신이 되길 간절히 바랐었다.

그리고 결국엔 신이었지만 한성 역시 그들과 다를 게 없이 폭주할 뻔도 했었다.

아마 그때 해와 달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 역시도 무고한 이들에게 상처를 남기는 최악의 신, 타락의 신으로 낙인찍혔을 게 뻔했다.

“후…….”

답답함이 가시지 않아 한숨을 내리 쉬어 보지만 막힌 듯 가슴을 옥죄는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지막에 보았던 아이는 그냥 두었지만, 언제 또 폭주할지는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일단 지친 몸과 바닥난 힘을 보충하는 게 먼저였다.

* * *

‘도와주세요. 제발, 제발.’

지찬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눈을 떠 봐도 빛이라곤 한 줄기도 없는 깜깜한 공간이었다. 어디선가 아이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들려왔다.

제발 도와 달라고, 제발.

몸을 일으켜 세웠지만, 도저히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벽인지도 분간이 가질 않았다. 손을 들어 더듬더듬 앞을 휘저어 봐도 그저 어두운 허공에 손짓이었다.

한 발씩 발을 떼어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걷다 보니 웅크린 인영이 눈에 보였다.

제 눈이 어둠에 익숙해진 것인지, 또는 그 웅크린 작은 몸뚱이가 희미하게 빛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순간 그 앞으로 강렬한 빛이 눈을 찌르고 끼익, 하는 커다란 소음과 함께 쾅! 하고 폭발하는 소리가 웅크린 아이의 몸을 때렸다.

미동 없이 앉아 있는 아이와 미끄러지듯 달려와 강렬하게 부딪쳐 박살이 난 차는 전혀 다른 세계처럼 보였다. 갑작스러운 사고 목격에 지찬은 털썩 주저앉았다.

“이, 이게 뭐야…….”

그리고 어둠은 걷히고, 어둠보다 더 어두운 밤길, 한적한 도롯가로 변해 있었다. 비는 억수같이 쏟아져 내렸고, 매캐한 연기를 내뿜는 차는 한눈에 봐도 멀쩡한 곳 없이 잔뜩 찌그러져 있었다.

‘도와주세요. 제발…… 엄마, 형아…….’

소름이 돋아났다. 아이는 여전히 그 앞에 전혀 다른 세계의 존재인 것처럼 물 한 방울 묻지 않고, 미동 없이 앉아 있기만 했다.

지찬이 떨려 오는 손을 들어 바라보자 어느 순간은 젖어 들다, 또 어느 순간은 투명해지기를 반복했다.

얼굴을 쓸어내리자 빗물이 가득했다가도 또 한순간에 따가운 비는 몸을 때리지 않았다.

‘꿈인가, 왜 하필 꿈도 이런 꿈을.’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앞을 바라보자 아이는 다시 속삭였다.

‘엄마…… 형아…… 나 무서워.’

가슴이 욱신거려 왔다.

‘무서워, 나도.’

다리가 후들거려 일어서길 포기한 지찬이 손을 짚어 기어가듯 아이에게로 천천히 향했다. 순간적으로 퍼붓는 폭우가 얼굴을 때리다가도 한순간 고요해지길 반복했다.

웅크려 앉은 아이에게 점점 가까워지자 붉은 니트를 입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까 마주쳤던 그 아이다.

사정없이 떨려 오는 손을 들어 아이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자 흠칫하고 떨리는 모습에 조금은 안도했다.

‘너도 무섭구나. 내가 지금 무서운 것처럼, 너도.’

그리고 손에 닿는 니트가 축축했다.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어깨를 짚었던 손을 들어 손바닥을 돌려 보자 제 손 역시 붉은 물로 흥건했다.

쏴아아.

비가 아이의 몸과 지찬의 몸을 아프게 때렸다. 도로를 적시는 어둡고 붉은 물이 계속해서 주변으로 퍼졌다.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지찬을 바라보는 아이는, 낮에 봤던 그대로 새하얗게 질린 모습이었다.

‘무서워요…… 혼자는 무서워요…… 엄마…… 형아…… 어디 있어요.’

* * *

“헉, 허억,”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어둠이 아니라 익숙한 천장이었다. 지찬은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리고 일어나 어두운 방을 둘러봤다. 잠깐 잠들었다고 생각한 게 그새 날이 저물었는지 바깥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스위치를 눌러 방의 불을 켜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도 이 감정은 어떻게 가려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이게 뭐야…….”

‘대체 나한테 왜 그래.’

다시 사정없이 떨려 오는 몸을 일으켜 티셔츠를 찾아 입고 집을 나섰다. 난생처음 혼자가 무서웠다.

그 아이는 대체 누굴까, 손을 적실 만큼 피로 흥건했던 그 니트의 감촉이 잊히질 않았다.

울부짖진 않았지만 애달프게 누군가를 찾던 아이의 감정이 작은 떨림을 통해 느껴졌다.

운동화를 구겨 신고 나서서 기억을 되짚어 한성의 집으로 향했다.

악몽의 여파인지 으슬으슬한 몸의 떨림이 계속 이어졌다. 공원을 가로질러 걸음을 옮기는 데도 익숙한 향기가 따라붙지 않았다.

산책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혼자 바쁜 것처럼 걸어가는데 불어오는 바람 한 점에도 그동안 익숙하게 맡아 온 풀 향기가 전혀 나지 않았다.

‘이게 뭐야. 언제든 내 근처에 있었다는 건가, 왜 지금은 없는데.’

“망할 호랑이. 이상한 세계로 끌어들여선 이상한 꿈까지 꾸게 하고서, 자기는 그렇게 지친 표정으로 가 버리면 그게 끝인 줄 아나!”

이건 절대 집에 혼자 있기 무서워서 가는 게 아니다. 이 이상한 악몽과 낮에 봤던 아이는 분명 한성과 관련이 있을 게 분명하니까.

반려고 뭐고 엮이는 건 좋은데, 이게 이런 식으로 이상한 꿈을 꾸는 거나 귀신일지도 모르는 아이를 보는 거는 전혀 협의 사항에 없던 일이었다.

물론, 협의한 사항이랄 것도 없었지만 이런 게 있으면 미리 말을 해줘야 하지 않은가.

어떻게 걸어왔는지도 모를 만큼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성의 집 앞이었다. 철옹성 같은 대문을 바라보고서 초인종을 찾아봤지만, 눈에 띄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묵직했던 문이 스르르 열리기 시작했다. 꼭 지찬이 앞에 서 있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이.

으스스하진 않았지만, 꿈 때문인지 발걸음이 잠깐 주춤거렸다. 하지만 목덜미를 파고드는 이상한 소름에 재빨리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성의 집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현관문을 열자 거실을 서성이던 해가 종종걸음으로 지찬에게 달려왔다. 아까와는 다르게 해의 표정이 아주 어두워져 있었다.

“바, 반려 님!”

“아…… 연락도 없이 찾아와서 죄송…….”

“한성 님 좀 살려 주세요! 흐앙……!”

“네?”

흙빛처럼 어두운 얼굴로 달려와 이내 울음을 터뜨리며 한성을 살려 달라고 하는 해의 모습에 지찬의 심장이 쿵,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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