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맛 좋은 음식을 먹고 기분 좋게 올라간 빈방 안이 낯설었다.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 싶긴 했지만, 새벽이었고 온몸이 무거울 정도로 나른했다. 겨우 하루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을 겪은 것 같아서 아무리 생각해도 헛웃음만 나왔다.
일단 자고 날이 밝으면 맛있는 음식에 대한 감사 인사를 하고 서둘러 돌아가야겠다. 오랜만에 집밥다운 집밥을 먹었으니 해줄 건 없지만, 감사하다는 인사만큼은 해야겠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곳에서 사는 유일한 인간이라고 하니 궁금하기도 했다.
어떤 인연으로 한성과 함께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성이 그에 대해 말할 때 지었던 웃음은 거짓이 아닌, 의뭉스럽거나 장난스러움이 아닌, 정말 순수하게 기쁜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엄청난 미인은 아닐까, 음식 솜씨도 좋고, 어릴 때부터 인연이 닿아 함께 생활했다니 남다른 감정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여기까지 생각하던 지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질투라도 하는 거냐. 내가 뭐라고.’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지만, 자는 사이에 제 몸뿐만 아니라 깨끗한 시트와 이불로 바꿔 갈았는지 한참을 뭉개고 있었지만, 바스락거리는 느낌이 꽤 산뜻하게 느껴졌다.
한성이 자는 사이에 손수 시트를 갈고, 몸을 닦…….
‘더는 생각하지 말자.’
침대에 벌러덩 누운 지찬이 조금 높은 천장을 멍하니 바라봤다.
성격이 그런 건지 손님방이라 일부러 꾸미질 않았던 건지 아주 단출하게 침대와 옷장, 수납장뿐인 공간과 별다른 기교 없는 새하얀 벽지가 낯설었다.
담백했다. 한성처럼.
“하…… 무슨 생각의 끝이 자꾸 그놈이야.”
옆으로 돌아누워 바스락거리는 베개 끝을 조금 만지작거리다 보니 어느새 잠이 들었다.
지쳤던 모양인지 정말 달게도 잤다. 약 효과 때문에 반나절을 잠들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회복이 덜 됐던 것 같았다.
그리고 어렴풋했지만, 지찬은 온통 새까만 공간에서 무언가 아이처럼 기뻐하던 작은 빛을 만났다.
‘드디어 만났어! 드디어!’
환희에 가득 찬 음성이 검은 공간을 잔뜩 울렸다. 우습게도 그 작은 빛 덩어리가 귀엽고 안쓰러워 손을 뻗어 봤지만 닿지는 않았다. 아마 그렇게 잠이 깼던 것 같았다.
눈을 뜨자마자 손을 들어 올린 채 멍하니 손끝만 바라봤다. 닿았다면 정말 따뜻하고 몽글거렸을 것 같은데, 조금 아쉬웠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니 이미 해는 중천에 떠 있는지 커튼 뒤가 환하게 밝았다.
* * *
뒷머리를 긁적이며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리밟는데 어린아이와 한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몇 계단 내려가 보니 거실의 소파에 색동저고리를 입은 여자아이와 한성이 마주 앉아 있었다.
다리가 닿질 않아 동동거리며 발을 놀리던 아이가 지찬과 눈이 마주치자 폴짝 내려와 달려오기 시작했다.
“반려 님! 반려 님 깨어나셨네요! 몸은 괜찮으세요?”
마치 아는 사이인 것처럼 친근하게 계단까지 올라와 지찬의 아래에서 고개를 바짝 들고 묻는 아이의 눈매가 동그라니 몹시 귀여웠다. 어디서 봤더라.
“아, 네. 괜찮아요.”
설마 이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인연이 닿아 집안을 관리해 준다던 인간인가. 그러기엔 요즘 시대와 맞지 않은 낡은 색동저고리가 눈에 밟혔다. 그리고 그런 맛좋은 음식을 했다기엔, 너무 어린아이였다.
“그러면 이제 각인은 하신 건가요? 어제 초야를 치르신 거죠? 한성 님은 말씀을 안 해주세요!”
한 발 한 발 내려가는데 아이는 부산스럽게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지찬의 주변을 배회했다.
“해야, 그만하고 이리 오너라. 계단에서 그리하면 다쳐.”
한성이 소파에 앉아 말을 건네 봤지만, 해라고 불린 아이는 여전히 지찬을 아래위, 앞뒤, 살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해.
그러고 보니 공원에서의 강아지가 떠올라 멈칫하고 그새 뒤로 선 해를 바라보는데, 갑자기 등 위의 티셔츠가 훌렁 위로 올라갔다.
“각인!”
“엇!”
소리치며 지찬의 티셔츠를 위로 걷어 올린 해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각인의 증표가 없어요!”
바짝 당긴 어린아이의 힘이었지만 지찬은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하필 뒤를 돌아보려던 찰나에 티셔츠가 잡혀 다리가 꼬이고 말았다.
계단의 난간을 잡을 새도 없이 그대로 고꾸라질 뻔했지만, 어느새 다가온 한성이 지찬의 휘청이는 몸을 바로잡아줬다.
“해야, 그리하면 위험하대도.”
“각인의 증표가 없어요! 등 뒤에 있어야 하잖아요!”
한성의 꾸짖는 말투에도 억울한 표정으로 지찬의 등 뒤를 손가락질하며 말하던 해가 이내 시무룩해졌다.
“죄송해요. 반려 님. 저도 모르게 흥분해서…….”
“아니, 아뇨. 괜찮아요.”
“어디 다치진 않은 게냐.”
허리춤을 단단하게 잡은 한성이 지찬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물어 왔다.
“안 다쳤어요.”
아무래도 해는 크게 실망한 모양이었다. 동그란 눈이 아래로 축 처지면서 터벅터벅 작은 몸짓으로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이 지찬의 잘못이 아닌데도 괜히 미안해졌다.
“내려오셨어요?”
그 소란에 나온 것인지, 주방에서 나온 사람은 마흔은 족히 넘어 보이는 여자였다. 푸근한 인상에 나긋나긋한 말투로 지찬에게 알은체를 했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전 이 집안의 일을 맡아 하는 신재순이라고 해요. 밤에 식사는 맛있게 했어요?”
“아, 너무 맛있었습니다. 정말, 진짜 그렇게 맛있는 집밥은 너무 오랜만이라. 너무 감사합니다.”
지찬이 계단을 내려와 꾸벅 인사하자 재순이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네요. 한성 님이 제대로 안 차려 줬을까 봐 내심 걱정 많이 했는데.”
푸근한 인상만큼 순한 얼굴로 호호 웃는 모습에 지찬이 머리를 긁적이며 따라 웃었다.
“언제든지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얘기하세요. 요리하는 걸 무척 좋아해서 지찬 군이 부탁한다면 정말 기쁠 것 같아요.”
엄마뻘이라기엔 나이 차이가 많은 건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푸근한 느낌을 받은 지찬의 얼굴이 편안하게 풀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성의 입가에도 알 듯 모를 듯 미소가 지어졌다.
“지찬 군, 배고프죠? 금방 밥 차려 줄게요. 아차, 해님. 약과 준비됐는데, 지금 싸드릴까요?”
고개를 살짝 틀어 거실에 앉아 있는 해를 바라보던 재순의 고개가 갸웃 틀어졌다. 그 좋아하는 약과 얘기인데도 시무룩해서 한 뼘이나 나와 있는 입술은 들어갈 줄을 몰랐다.
“어머, 해님 무슨 일 있으세요?”
“재순 씨…….”
그렁그렁한 눈으로 재순을 바라보던 해가 급기야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한성 님이 아무래도…….”
“한성 님이요?”
한성을 언급하며 울먹거리는 해를 바라보다 재순이 다시 고개를 돌려 한성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의아한 건 한성과 지찬도 마찬가지였다. 아까 그 일이 저렇게 서러울 일이었을까,
“한성 님이…… 고…….”
“고……?”
“고자 같아요. 흐아앙!”
“어머, 해, 해님.”
재순은 수십 년을 이들과 함께 살았지만, 해가 내던진 낯선 단어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한성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은 채 고개를 돌렸고, 지찬은 그 말의 뜻을 깨닫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초야를 치르고 각인의 증표라는 것이 생겼을 거로 알았던 모양이었지만, 그게 없으니 해로써는 한성의 본능적인 무언가가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 사라진 게 아닌가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먹이가 눈앞에 있는데도 왜 먹지를 못해요! 한성 님이 드디어 모든 것에 해탈하신 게 분명해요. 그렇다고…… 반려도 못 안는 고자가 되다니요! 으앙!”
“어머…….”
재순의 품에 안겨서 엉엉 우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 현관 쪽에서 누군가 박장대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발 한 짝을 벗지도 못하고 한 발만 거실에 밀어 넣은 채 쭈그려 앉아 온몸을 들썩이며 웃는 남자가 보였다.
“하, 거북이 넌 왜 온 거냐.”
“아하하, 미치겠네. 진짜, 해 때문에 내가…… 크흑.”
말을 끝까지 내뱉지도 못하고 배를 부여잡은 채로 다시 웃음이 터진 남자는 한성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웃어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