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한성이 문밖에서 받아 온 것은 작은 호리병이었다.
“약이야. 먹고 한숨 자면 괜찮아 질게야.”
약을 건네받은 지찬은 잠시 머뭇거렸다.
‘정말 괜찮겠지?’
하기야 지금처럼 홀딱 벗고 민망한 일을 계속하는 거에 비한다면 훨씬 나을 터였다. 이미 되돌리긴 늦었다.
작은 호리병에 담긴 소량의 액체를 입에 머금고 나니 독특한 향취가 느껴졌다. 약이라니 묻고 따지지도 않고 한입에 꿀꺽 넘기고 나자 손아귀에서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톡, 하고 손에 들렸던 호리병이 떨어지고 지찬은 침대 위에 나동그라졌다.
그리고, 이마 위로 올라오는 한성의 따뜻한 손을 느끼면서 정신을 잃었다.
스르륵 무너지는 지찬의 몸을 붙잡고 조심스레 침대에 눕혀 준 한성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신없는 하루였다. 지쳐 보이는 지찬의 얼굴을 바라보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겨 주는 손길이 작게 떨려 왔다. 그리고 가슴 아래로 이어진 흉터에 손을 갖다 댔다.
쿵, 쿵, 쿵.
살결에 닿기만 해도 고동 소리가 손끝을 타고 울렸다. 이게 지찬의 심장인지, 제 손끝에 머문 심장인지 알 수는 없었다.
지찬도 정신이 없던 와중이라 상처에 신경이 쓸 겨를이 없던 게 분명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이 흉터가 얼마나 그에게 마음의 큰 상처인지를 알고 있다. 신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작은 의문이 들었다.
길게 그려진 상처 주변이 유난히 붉다. 의외로 뼈대가 얇아 조금 마른 것처럼 보이는 지찬의 몸에, 크진 않지만 무게가 무거웠을 상처에 자꾸만 입술이 가고 손이 갔던 게 이렇게 붉은 꽃잎처럼 자국이 남았다.
이불을 덮어준 뒤로도 한성은 한동안이나 지찬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
* * *
지찬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반나절이 훌쩍 지난 후였다. 개운하고도 나른한 느낌이 온몸에 느껴지고, 몸에 닿는 푹신한 이불의 감촉이 좋아서 눈을 감은 채 한참을 음미하고 있었다.
제 몸에 단단하게 두른 낯선 팔의 느낌을 깨닫기 전까지 말이다.
눈을 뜨고 끔뻑끔뻑거리고 있자니 어두운 방 안의 물체가 조금씩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더 잠을 자 두는 게 어떻겠느냐. 아직 한밤중인데.”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음성에 고개가 녹슨 기계처럼 돌아갔다. 옆으로 누운 지찬의 뒤를 꼭 끌어안고 나지막하게 말을 건넨 한성이 손을 들어 이마의 열을 재고는 숨을 후 내쉬었다.
“다행히 열이 오르지는 않는구나. 혹시 배가 고프진…….”
“……누구세요?”
그 말에 살짝 움찔한 한성이 벌떡 일어나 앉아 지찬의 몸을 바로 눕혔다.
얼떨떨한 표정의 지찬을 내려다보는 한성의 얼굴이 근심에 휩싸였다.
“내가 누군지 기억이 안 나는 게냐.”
“누구신지…… 제가, 누구죠?”
얼결에 심각해진 지찬의 얼굴에 더 심각해진 한성이 고민하는 듯 허공을 바라보다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그대는 내 반려야. 어제 우리 각인까지 끝마치고 행복한 신혼을 보내기만 하면 된 거였는데…….”
‘어허, 통탄할 일이로다’ 하고 혀를 차는 한성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어제도 우리 뜨거운 밤을 보냈는데, 기억을 못 하는 게냐? 그럼 기억나게 다시 해보는 게…….”
언제 닦았는지 뽀송뽀송하게 마른 지찬의 가슴을 지분거리는 한성의 손길이 느릿하게 아래로 향했다.
“으악! 미친 호랑이야!”
지찬은 금세 얼굴색이 바뀌면서 바둥거리며 소리를 빽 질렀다.
기억이 안 날 리가 없었다. 민망해서 던져 본 거였는데 뛰는 지찬 위에 나는 한성이라는 걸 몰랐다.
“뜨거운 밤은 무슨! 내가 언제 그쪽이랑 뜨거운, 뜨, 뜨거운 밤을 보냈다고! 내 허락 없이 각인 안 한다면서요! 나 기절했을 때 한 거 아니야?”
어느새 위로 올라탄 한성의 몸을 밀어내면서 소리를 지르자 한성이 미소 짓고 있었다.
“아, 기억이 나는 건가. 아쉽군.”
입맛을 쩝 다신 한성이 옆으로 내려오자 지찬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 바람에 훌러덩 내려간 이불은 제 역할을 하지도 못하고 바닥으로 스르륵 떨어져 나갔다.
아쉽긴 뭐가 아쉬워. 뻔뻔하기 그지없는 한성의 얼굴을 획 노려보니 한성도 여전히 상체는 탈의한 모습 그대로였다. 그렇다면 자신은…….
“으악!”
아래를 내려다본 지찬이 발가벗은 제 몸에 화들짝 놀라선 양팔을 교차해 가슴을 가렸다. 그러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양손을 아래로 재빨리 내렸다.
“오, 옷 좀 줘요! 뭐 보기 좋다고 그냥 벗겨 놔!”
“내 반려의 몸인데 당연히 보기 좋…….”
“주둥이 좀 닥쳐요. 제발.”
지찬이 온 힘을 다해 발로 한성을 밀어버렸다. 슬쩍 밀리며 뒤로 물러난 한성이 옆에 준비해 둔 옷가지를 들고 왔다.
“옷을 벗기긴 했어도 워낙 격렬했던지라 그대의 흔적이 묻어서 세탁을…….”
“아, 알았으니까 그만 좀 조용히 하고 그냥 아무 옷이나 내놔요. 벗고 있는 취미는 없다고요.”
한성의 손에 들린 옷가지를 빼앗듯이 가져간 지찬이 주섬주섬 티셔츠에 팔을 밀어 넣었다. 한성의 옷인지 저보다 한두 사이즈 더 큰 옷에 괜히 쫀심이 상했다.
그냥 말 그대로 ‘쫀심’이었다. 쓸데없는 자존심.
편안한 티셔츠와 반바지를 걸친 지찬이 벌떡 일어서자 현기증이 몰려왔다. 휘청이는 몸에 한성이 재빨리 다가왔지만, 지찬이 손을 들어 그를 저지했다.
“그렇게 보호가 필요한 사람 아니거든요. 그냥 잠깐 어지러운 거니까.”
“약 때문에 조금 어지러울 수도 있다는구나. 열이 나기도 한다던데, 다행히 열기를 조금 뺀 상태여서 열은 오르지 않았던 것 같아.”
“네. 컨디션 괜찮아요. 옷은 다음에 받으러 올게요.”
“가겠다고?”
“가야죠. 여기서 그쪽이랑 살갑게 붙어서 같이 잘 순 없잖아요.”
“손님방이니까 여기서 쉬어. 그대가 아플까 봐 옆을 지킨 것뿐이야.”
지찬이 입을 삐죽였다.
‘예, 예. 그러시겠죠.’
잠들기 전에 일이 자꾸만 생생하게 기억이 나서 더 퉁명스러워지는 중이었다. 창피함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를 몰라서 더 그런 것 같았다.
지찬이 어색하게 서 있는데 타이밍도 좋게 뱃속에서 아우성치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아침 이후로 무언가를 먹은 기억이 없었다. 배고프고 현기증이 날 만도 했다.
그 모습에 아래로 내려오라는 말을 남기고 한성이 방을 나갔다.
“후…….”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리면서 침대에 주저앉은 지찬이 뻐근한 고개를 돌렸다. 눈치 없게도 계속해서 꼬르륵거리는 배를 문지르며 다시 일어섰다.
뭐든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밥까지 굶어 가며 집에 간다고 고집부리는 건 제 손해라고 생각했다.
방문을 열고 나가자 복도식으로 길게 늘어진 끝에 계단이 있는 걸 확인했다.
밋밋하기도 하고, 옛것의 느낌이 나는 듯한 길을 지나 계단을 내려가자 널찍한 주방이 바로 옆에 있었다.
고소하게 풍겨 오는 음식 냄새가 아우성치는 배 속의 위장을 더 날뛰게 하는 것 같았다.
어느새 편안한 차림으로 갈아입고 가스레인지 앞에 선 한성이 보였다. 식탁엔 정갈하게 놓인 반찬 몇 가지와 밥공기 두 개가 마주 보고 놓여 있었다.
뻘쭘하게 들어선 지찬의 인기척을 들었는지 뒤돌아본 한성이 앉으라고 고갯짓을 했다. 끓고 있는 찌개를 퍼 담아내고는 자신도 자리에 앉아 밥 먹을 채비를 했다.
이쯤에서 호랑이도 인간의 밥을 먹는가, 따위의 의문은 집어넣었다. 깊게 고민할수록 해답 따위는 없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진실이고 해답일 터였다.
맛은 꽤 좋은 편이었다. 사실 그는 요리에 재능이 없어 겨우 라면이나 끓여 먹고 사는 처지라 반찬은 모두 시장 안에 있는 반찬가게 솜씨였다. 나름 맛 좋은 가게였는데, 이곳 반찬에 비하면 맛집이라고 말하기 뭐한 수준이었다.
“이걸 다 그쪽이 했어요?”
“아니, 일하는 분이 계셔.”
‘이런 곳에서 살림을 봐주는 분이면, 사람이 아닌 건가. 아, 설지찬. 자꾸 의문을 갖지 말자.’
“사람, 그대와 같은 인간이지. 어릴 적부터 인연이 닿아 이 집을 관리해 주고 있지. 이따 날이 밝으면 볼 수 있을 게야.”
“아…… 맛있네요. 솜씨가 굉장하세요.”
“들으면 기뻐하겠군.”
설핏 미소 짓는 얼굴은 자신이 칭찬을 받은 것처럼 즐거워 보였다.
“그나저나, 자꾸 그쪽이라고 하면 너무 섭섭한데. 아까처럼 이름을 불러…… 윽.”
맞은편에 앉은 한성의 정강이를 냅다 후려 차니 그가 아픈 듯 찡그렸다. 조금 미안하기도 했지만, 지금 제가 민망한 기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거였다.
정기를 나누면서 불렀던 이름에, 열기에 들떠 정신을 못 차리던 상황까지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근데, 그쪽, 아니. 한성. 내 이름은 알아요?”
“음…….”
그때처럼 살짝 고민하는 듯한 뉘앙스로 말꼬리를 흐리던 한성의 입이 벙긋 벌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지찬이 일갈했다.
“프라…….”
“프라이드라고 한 번만 더 해봐.”
정신이 없어서 그땐 대꾸를 못 했지만, 반려를 프라이드라고 소개하는 미친놈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생각나니 더 열이 뻗쳤다.
밥숟가락을 식탁에 탁 내려놓으며 인상을 바락 쓰자 한성이 시선을 피하고 물을 마셨다.
“설지찬, 모르지 않을 텐데요.”
“프라이드가 더 귀엽지 않나?”
‘알면서도 그랬다. 이거지?’
“그럼 그쪽도 계속 그쪽 하든가!”
“반려 님, 서운한데…….”
제가 한 짓은 생각도 못 하고 한성이 정말 서운한 얼굴을 했다.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지찬은 여전히 한성을 날카롭게 노려보고 있었다.
“다음에 또 프라이드라고 소개하기만 해봐요.”
“화내지 마시게. 지찬, 설지찬. 나의 반려 님.”
이름을 부르는 입술에 잠깐 넋이 나갔다. 살짝 내리깔았던 한성의 눈이 다시 정면의 지찬을 향해 올곧게 바라봤다.
지찬은 귓가가 간지러운 느낌에 뒷머리를 긁적였다. 괜히 부르라고 했나, 아차 싶은 순간이었다.
이상하게 저 눈빛과 자신을 부르는 저 입술과 목소리가 자꾸 어딘가를 간질거리게 했다.
기묘한 신의 힘일까, 아직 남아 있는 부작용일까,
작은 심장의 파동은 애써 무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