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60)

8화

다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아까와는 다르게 문이 열려도 느껴지는 이상한 감각은 없었다. 거침없이 나가는 한성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주춤거리며 밖으로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 밖으로 발을 내딛자 묵직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다행히 그 망할 정기 나눔의 의식 덕분인지 울렁거린다거나 그대로 고꾸라질 정도로 못 견딜 만큼 힘들진 않았다.

다만, 이곳이 일반적인 느낌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게 느껴졌다. 이건 동물적인 본능이었다.

마치 발걸음은 구름을 걷는 듯했지만, 온몸을 내리누르는 묵직한 압박감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돌덩이를 지고 있는 것 같았다.

“후, 나만 이렇게 느끼는 거죠?”

“응, 아마 조금 힘들 거야. 정식으로 각인한 반려가 아니라 임시방편을 썼기 때문에…….”

“이런 연회는 자주 열리나요?”

“아니야. 드물어. 서로 좋은 사이들은 아니라서, 이런 모임을 모두 달가워하지 않아. 나도 마찬가지고.”

푹신한 카펫이 깔린 복도를 걸어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문 앞에 섰다.

“미리 말해두지만, 청룡이든 그의 반려든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아. 공식적인 자리이기 때문에 별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지켜 준다면서.”

한성은 그 대답에 지찬을 돌아봤다.

“난 그쪽 하나만 믿고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잘 지켜요. 무슨 일 생기면 다 망할 호랑이 탓할 테니까.”

‘키스까지 하고, 이런 해괴한 곳까지 날 끌어들였으면 책임져야지.’

지찬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나저나 요즘 신들은 전부, 굉장히…… 세속적이네요. 이 문을 열면 어떤 모습이 나올까 벌써 기대됩니다.”

동양의 사방신이 최고급 호텔의 초호화 스위트 룸이라니.

지찬은 문을 열자 갑자기 차원 이동이 돼서 나무가 우거진 숲이 나타나는 건 아니겠지, 하는 작은 긴장감을 가지고 문이 열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다행히도 나무가 울창한 숲은 나타나질 않았다. 어쩌면 그게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호텔 스위트 룸까지 와서 숲으로 차원 이동이라니, 억울하잖아. 빌리는 돈이 얼만데.’

지찬은 신들에게도 인간들의 돈이라는 게 필요할까 싶다가도 방금 제가 타고 온 외제 차를 떠올렸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안을 들여다보자 저번에 봤던 산적 같은 남자가 알은체를 하며 다가왔다.

“여, 어서 와. 또 만나네요. 백호의 반려.”

“예. 또 뵙습니다.”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끝낸 지찬이 한성을 돌아봤다. 허리를 휘감는 손길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얼결에 에스코트받듯 안으로 들어간 지찬의 등 뒤로 닫히는 문소리가 심장을 쿵, 하고 울렸다.

이제는 진짜 예전으로 되돌릴 수 없는 곳에 발을 담갔다는 게 실감이 났다.

* * *

뭐가 뭔지도 모르게 자꾸 휩쓸리듯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다가와 인사를 건네는 이들도 있었고, 힐긋 쳐다보며 자기네들끼리 쑥덕거리고 쉽게 다가오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어딘가,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봤을 법한 재벌 집 자제들의 파티가 이런 모습이었던 것 같다.

사방신과 반려들이 연회의 주인공이었지만, 못지않게 신과 신수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이례적인 연회이기에 사방신을 흠모하는 낮은 신들이 많이들 와 있었다.

그들의 사회나 인간의 사회나 별다를 게 없었다. 강한 자에게 숙이는 고개와 굽어지는 허리의 각도는 힘에 비례하는 것 같았다.

지찬은 어색하게 인사를 받으며, 희미하게 웃어주었지만 달갑지 않은 분위기였다.

‘반려 님, 어서 오세요.’

‘반려 님, 너무 축하드립니다.’

‘이제 백호 님도 안식이 멀지 않으셨어.’

‘반려 님, 반려 님.’

아까 백호가 불러 주던 것과 똑같은 말인데도 기분이 달랐다. 게다가 신의 영역이라 그런지 계속해서 몽롱하고 숨이 가빠 오는 게 좋은 컨디션은 아니었다.

“반려 님의 존함이 어찌 되시어요. 소개 좀 해주세요. 요즘 저희 사이에서 얼마나 유명하신지 모르시죠?”

누군가의 말 한마디로 눈치만 보던 신들이 조금씩 모여들었다.

인간의 형태를 한 ‘신’으로 불리는 자들.

하나둘씩 모여들어 신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하다는 ‘사방신의 반려’를 보는 것이다.

그중에도 강하고 현명하며 냉정한 신, 백호의 반려.

“아…….”

“음…….”

지찬과 한성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러다 지찬이 한성을 바라보고 그냥 입을 다물었다. 입을 여는 것에도 이렇게나 힘이 들다니, 어색하게 웃고 있는 입가마저 파르르 떨릴 지경이었다.

지찬은 어디 도망갈세라 허리를 꼭 붙들고 선 한성에게 의지하게 되는 무게가 조금씩 많아지고 있었다.

“음…….”

한성이 미간을 구기며 고민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프라이드?”

그러자 한성의 입이 열리기만 기다리고 있느라 조용했던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프라이드래, 프라이드. 요즘은 이름도 해괴해.”

“프라이드 님이라고 불러야지! 백호 님 들으시면 화내실지도 몰라. 쉿!”

“그런데 프라이드,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것 같지 않아요?”

“인간 세상에서 먹는 그거 있잖아.”

“아휴! 주책아, 백호 님 귀에 들려! 조용히 해!”

몽롱한 와중에도 귀에 속속 박히는 주변의 대화에 지찬의 눈썹이 꿈틀했다.

“망할…… 호랑이, 후…….”

그러다 그가 어지러움에 고개를 흔들며 눈을 깜빡깜빡 느리게 떴다.

휘청이지 않게 허리를 두른 팔에 힘을 더 꽉 주던 한성이 지찬의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고개를 숙여 귓가에 나지막하게 물어 왔다.

“왜 그러느냐. 많이 안 좋은 건가.”

“아…… 이 구역이 원래 이래요? 아까부터 계속 몽롱하고…… 이상…… 한데…….”

귓가에 한성의 숨결이 다가오자 지찬의 등골이 쭈뼛하고 가시가 돋아난 것처럼 예민해졌다. 꼭 술 마신 것처럼 계속해서 흐려지는 눈앞이 이상할 정도였다.

“나도 반려는 그대가 처음이라…….”

그걸 누가 모르냐고.

술 한 잔도 입에 대질 않았는데도 취기를 느끼는 곳이라니, 숨을 크게 들이쉬면 쉴수록 머릿속에 새하얀 안개가 낀 것처럼 몽롱함과 나른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허리춤에 닿은 한성의 손끝부터 뜨거운 열기가 조금씩 번져 가고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한성.”

주변에 몰려 있던 존재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눈빛들에는 금세 두려움이 가득했다.

목소리가 들려온 뒤를 바라보자 노란빛 머리카락의 남자, 얼마 전 보았던 청룡의 반려가 보였다. 그 옆에 있는 자라면 당연히 청룡일 터였다.

“우리가 인사를 나눌 정도의 사이는 아니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뒤도 돌아보지 않은 한성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피식 웃는 청룡의 웃음소리에 허리춤을 감싸 잡은 한성의 손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지찬은 무언가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뒤를 돌지 않는 한성 때문에 청룡의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등 뒤를 적시는 차가운 기운이 소름 돋게 했다.

그의 덕분일지, 몽롱했던 나른함이 조금 깨어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역하게 올라오는 어지러움이 몸 전체를 잠식했다.

한성에게 몸을 의지하고 있음에도 휘청이는 다리를 어쩌질 못했다.

다시는 신의 영역에 올 일 따위는 없어야 할 텐데, 소주 열댓 병은 먹은 것 같이 환장하게 짜증 나는 기분이었다.

휘청이던 지찬을 두 손으로 끌어안고 안색을 살피던 한성이 입매를 굳게 다물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는지 안아 들고서 작게 속삭였다.

“고개 돌리지 말아라. 저자에게 반려 님의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으니.”

그러나저러나 한시라도 이곳을 나가고 싶은 지찬은 순순히 고개를 한성의 가슴팍에 기대 눈을 감았다.

남자한테 안겨서 나가는 꼴이라니, 딱 죽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지금 당장 죽을 것만 같으니 일단 살고는 봐야 했다.

“반려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해 네 숨결을 섞었구나. 그것이 미약과 다름없는 것을 알고 하진 않았을 테고…… 멍청하다 해야 할지, 똑똑하다 해야 할지, 그 덕에 반려의 각인이 오늘 이루어지겠군.”

지나쳐 가는 한성의 뒤에 청룡의 비아냥이 쫓아왔다. 순간 움찔했지만, 한성은 재빨리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그 곁에 뒤늦게 사태 파악을 한 주작이 따라가며 문을 열고 있었다.

* * *

순식간에 내려와 차에 태워졌다. 한성의 뒤를 쫓아오던 주작이 방장산 할아범이 어쩌고 하던 소리를 들었지만,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았다.

34층만 벗어나면 될 줄 알았던 감각이 호텔 아래로 내려와 차에 태워지는 순간까지 여전했다.

조금 지나면 사라질까, 멀어지는 정신을 붙잡으면서도 닿는 손길이 이상하게도 아찔했다.

“후…… 뭐, 잘못된, 겁니까.”

“아니, 음…… 응. 그대에게 좋은 소식은 아닐지도 몰라.”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아까 청룡의 말이 맞는다면…….

한성이 몸을 기울여 등받이를 살짝 눕혀 주자 훨씬 편안했다. 대신 귓가와 목을 간지럽히던 한성의 머리카락에 자신도 모르게 움찔댔고, 뜨거운 숨이 내뱉어졌다.

조금씩 거칠어지는 숨소리에 운전대를 잡은 한성의 마음도 급해졌다. 방장산 할아범의 말만 덥석 믿고 정기를 나누어 데려간 거였는데, 애먼 사람만 잡게 생겨 버렸다.

만약에 알았다면, 데려가지 않았을 텐데 후회가 밀려왔다.

‘아니, 만약에, 아주 만약에. 알았다고 한들 데려가지 않았을까…….’

핸들을 움켜잡은 한성의 손에 힘이 실렸다.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서 수습을 하는 게 제일 먼저였다.

주작이 방장산 할아범에게 지혜를 빌리러 갔지만, 중요한 얘기는 쏙 빼먹고 알려 준 여우 노인네가 썩 못 미더워지기 시작했다. 음흉한 구석만 없으면 딱 좋은데 말이다.

아마도 한성 자신을 아낀다는 핑계로 반려를 각인시킬 아주 빠른 방법을 알려 줬을 게 뻔했다.

그것이 이렇게 제 숨결로 인한 흥분의 효과로 얻는 각인이라면, 한성은 소용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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