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60)

4화

꿈인데 어떠하랴, 넋은 나갈 정도로 정말 어이없는 이야기였지만.

일단 한성을 내보내고, 잠을 자는 게 먼저였다. 그래야 이 속 시끄러운 스토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거라 굳게 믿었다.

‘오케이, 알겠어요. 뭐 초야를 치르든 뭐 어떻든, 까짓거 뭐 합시다. 꿈인데 내 똥꼬가 닳는 것도 아니고, 오케이, 오케이, 그러니까 일단 나가시고 저는 잠을 자야겠습니다.’

그렇게 그를 내보내고서 지찬은 이른 잠을 청했다. 일요일 새벽에 일어나 앉았을 땐 그냥 푹 잔 것처럼 상쾌하기만 했다. 역시나 꿈이었는지 백호인지 한성인지 하는 인물도 나타나지 않았다.

싱크대에 놓여 있는 대접이 의문스러웠지만, 잠결에 물이나 한 잔 마셨을 거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정말 별다를 게 없는 주말이었다. 침대에서도 빈둥거리고, 거실에 나와서 밀린 드라마와 개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하루를 보내는 그런 위화감 없는 주말.

꿈 한번 희한하게 꿨네 하며 웃어넘기고 다시 월요일이 찾아왔다. 지찬은 늘 그렇듯 몇 년을 입지만 아직도 어색한 정장을 꺼내입고 옷매무새를 다시 점검한 후에야 밖으로 나섰다. 영업 사원에게 차는 필수지만, 개인적인 이유로 운전하지 않는다.

그만큼 더 열심히 발로 뛰겠노라 약속하고 들어온 회사였다. 그랬기 때문에 지찬은 늘 남보다 더 일찍, 더 빨리, 더 많이 움직인다.

어느 날은 땀에 푹 절어 녹초가 되는 때도 있지만, 그만큼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라는 뜻 같아서 오히려 기분은 상쾌했다.

월요일 아침은 대중교통도 북적거린다. 만원 버스를 타지 않으려면 조금 더 서둘러야 했기 때문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새벽에 내려앉은 이슬이 공원에 널린 풀과 나무에서 아주 기분 좋은 향기를 끌어내 준다. 숨을 크게 쉬고 나면 폐 속까지 정화되는 듯한 그런 기분.

‘살아 있음에 감사하자. 살아 있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매일 버스 정류장을 가기 위해 집 앞 공원을 가로지르며, 곱씹는 말들.

“일찍 나가는구나.”

“앗! 깜짝이야!”

힘차게 걷던 발걸음에 방해꾼이 나타났다.

“당신, 뭡니까!”

“나야, 당연히 그대의…….”

“그, 그만! 아니에요. 됐어요. 그만 말해요. 왜, 왜 또 나타났어요?”

“나타난 게 아니고, 우연이 겹친 게지. 역시 우리는 운명인가 보구나.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고…….”

“필연이 계속되면 운명이다? 그만 말해요. 다 알겠으니까.”

시무룩해진 한성의 얼굴이 바닥을 향했다. 그리고 그의 발밑엔 사정없이 꼬리 치는 개 한 마리가 있었다.

“산책 나오셨나 봐요. 마저 하고 가세요. 그럼.”

한성을 지나쳐서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걷는 지찬의 등에선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꿈이 아니었어? 진짜? 왜, 왜 또 나타난 거야?”

늘 오가는 공원이 오늘따라 왜 이리 넓은지, 혹시 뒤따라오진 않을까 겁이 나서 돌아보지도 못하는 지찬은 엉키려는 스텝을 바로잡고 뛰듯이 걸음을 옮겼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의자에 주저앉은 지찬이 주변을 둘러봤지만, 다행히 뒤따라오지는 않는 듯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서 다시 머리를 부여잡았다.

“똥꼬 뭐냐! 아악!”

‘초야를 치르든 뭐 어떻든, 까짓거 뭐 합시다. 꿈인데 내 똥꼬가 닳는 것도 아니고, 오케이, 오케이.’

“그 상황에서 나 새끼는 왜 당연히 깔리는 쪽이었냐!”

잘 정돈된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자괴감에 빠져 있는 와중에 지찬이 타야 할 버스마저 그의 앞을 그냥 지나쳐 가 버렸다.

만만치 않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 * *

“한성 님, 곧 연회가 시작될 텐데 언제까지 그냥 두고만 보실 겁니까?”

이미 사라진 지찬의 흔적을 바라보던 한성의 발밑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생을 내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어찌 서두를 수 있겠느냐. 혼란이 깊으면 마음을 닫을까 겁이 나는구나.”

“하지만 늦으면 늦을수록 한성 님뿐만 아니라 반려 님도 위험해지십니다.”

그 말에 씁쓸하게 웃은 한성의 얼굴이 천천히 끄덕였다.

“알지…… 잘 알고 있지. 네가 걱정하는 마음은 잘 안다. 그런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어느새 한성과 같은 방향을 보며 앉아 있던 새하얀 개가 꼬리를 탁탁 치고 일어섰다.

“하루빨리 초야를 치르셔야 할 텐데…….”

“그러고 보니 연회가 언제더라…….”

“아휴, 내 이럴 줄 알았어. 연회가 언제인지 그새 또 까먹으신 게죠?”

“내가 요즘 공사가 다망하여…….”

“제가 그렇게 귀에 못이 박이게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어허, 까먹을 수도 있지. 그렇다고 이 나를 혼내는 게냐.”

“한두 번이 아니니 그렇잖습니까아. 빨리 반려 님이 오셔서 한성 님 뒤치다꺼리를 해주셔야 하는데……. 어휴, 전 이제 늙어서 힘도 없고, 기억력도 가물가물하고, 에휴…… 물론 한성 님보다야 낫지만…….”

“허허,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조깅하는 사람들이 보기엔 개한테 혼자 떠드는 잘생긴 미친놈이었지만, 그 둘은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 * *

상가 밖으로 나온 지찬이 답답한 듯 넥타이를 살짝 느슨하게 풀었다. 온종일 어찌나 정신이 없는지, 시간을 보니 점심도 잊은 채 일을 하고야 말았다.

한군데가 더 남았지만, 본사로 들어가지 않고 그냥 퇴근해도 될 듯싶었다.

“하, 덥네. 더워.”

“맞아요. 덥네요.”

뜬금없이 들리는 목소리에 옆을 바라보니 언제 와 있던 건지 이십 대 청년이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샛노랗게 염색한 머리에 피어싱까지, 지찬과는 전혀 접점이 없어 보일 듯한 아이였다.

“아, 네…… 그렇죠.”

당황했지만, 그냥 싱긋 웃어주고서 밥이나 먹어 볼까 싶어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반려, 맞죠?”

지찬이 멈춰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 동네, 뭔가 이상했다. 단체로 무슨 병에 걸린 게 아니라면 만나는 족족 이런 놈들하고만 엮이느냐 이거다.

“그쪽은 뭡니까, 청룡? 현무? 아니면 뭐, 새? 개?”

“의외로 까칠하네요, 형. 마음에 드네.”

“뭐요?”

“그냥 궁금해서. 반가워요. 난 청룡의 반려. 단이에요. 홍단.”

샛노란 머리 아래 새하얀 얼굴, 그리고 내민 마른 손. 흘긋 보았을 땐 잘 모르겠더니 이렇게 보니 키는 제법 커도 피죽도 못 얻어먹은 것처럼 창백한 얼굴이었다.

“미안한데, 난 반려 그런 거 아니에요. 원한 적도 없어요. 반갑다고 인사할 만큼 썩 좋은 기분은 아닙니다.”

내민 손을 가볍게 무시했다.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지 모르겠지만,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게 틀림없었다.

삼십 이년을 살면서 진짜 세상에 모든 것에 의문을 가질 만큼 힘들었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처럼 이런 느낌은 아니었다.

잊을 만하면 개든 호랑이든 나타나서 사람 일상을 뒤흔드는 게 짜증이 났다.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그래야 겨우 유지하고 있는 평화롭고 단조로운 일상이 깨어지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 청룡의 반려께선 여기까지 어인 일로.”

날이 잔뜩 선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울렸다. 허리를 감아 오는 손길에 흠칫 떨며 바라보니 한성이 옆에 와 있었다.

“그냥, 궁금해서 왔다고 했잖아요. 같은 반려로써.”

“같은 반려?”

지찬은 저리 치우라고 내쳐야 하는 게 맞는데도 순식간에 얼어붙은 분위기 때문에 망부석처럼 그대로 한성의 품에 안겨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닿아 있는 한성의 몸속 깊은 곳에서 으르렁거리는 울림이 느껴졌다.

꼭 잡아챈 손길 때문에 한성의 얼굴은 보이질 않아 확인할 수 없었지만,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작은 새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적대 관계. 그리고 날 선 경계심, 그리고 두려움.

자신보다 훨씬 작고 어린 청룡의 반려에게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대체 무엇을 두려워하는 걸까, 알 수가 없었다.

이빨을 드러내는 짐승이 그렇다. 제 구역을 보호하고 지켜 내려는 것, 그리고 두려움을 포장하고 숨겨야 할 때.

한숨을 내뱉은 지찬이 허리에 둘린 한성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르렁거리던 속울음이 사라졌다.

“알았어요. 가요. 가. 난 그냥 인사만 전하러 왔어요. 얼굴 도장.”

두 손을 들어 제스처를 취한 단이 어깨를 으쓱하고서 그대로 지나쳐 갔다.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멀어지고 사라질 때까지 그 상태 그대로 있던 지찬이 여전히 손을 잡고 있단 사실에 놀라 뿌리치려 할 때였다.

“무슨 해코지 당한 건 없는 게냐.”

“아, 됐어요. 무슨 해코지. 기다린 것처럼 나타난 주제에.”

손을 뿌리치고 한발 떨어지자 한성이 씨익 웃었다.

“이게 다 우연이 아니겠느냐.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고, 필연이 계속되면…….”

“운명! 운명! 아! 진짜, 운명하시겠네.”

“이제 인정하는구나.”

“아니라니까요.”

“그제 그대가 했던 약조는…….”

“으왁! 자, 잠깐! 그때는 내가 꿈인 줄 알고 한 말이고!”

“허허…… 사내로 태어나서 한 입 가지고 두말을 한단 말인가.”

“그야, 꿈인 줄 알았으니까요! 꾸, 꿈이 아니었다면 내가 그럴 리가!”

“세상이 많이 변했구나…… 이토록 거짓을……. 허어…… 통탄할 일이로다.”

“미치겠네.”

지찬은 말이 통하지 않는 한성을 바라보다 머리를 쥐어뜯었다. 방금까지 상처받은 짐승처럼 속울음을 내뱉던 사람은 어디 갔는지, 다시 세상천지에 둘도 없을 놈이 되어버렸다.

“그래, 우리 초야는 어느 날로 하는 게 좋겠소.”

“초야는 무슨 초야! 나, 난 여자가 좋습니다!”

지찬의 외침에 한성이 ‘흠……’ 하고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아직 고민되는 건 무리가 아니지. 연회가 코앞이라 좀 서두르려 했던 날 용서하시게. 내가 좀 성급했지.”

“아, 뭐라는 거야아아아아!!”

대낮의 상가라는 것도 잊고 지찬은 소리를 질러 댔다. 그러자 한성이 중요한 얘기라도 할 듯이 상체를 살짝 숙여 왔다.

“한데, 어차피 할 거면 그냥 빨리…….”

“당장 사라져! 망할 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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