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지찬은 부랴부랴 쫓기듯 집에 들어와 샤워하고 마신 캔맥주 한잔에 모든 피로가 다 풀린 듯했다. 그 기분에 취해 원래 주량에 한 캔을 더 오버하고 나니 그대로 잠에 빠져 버렸다.
누구 하나 뭐라 할 사람 없는 즐거운 주말인데도 출근 시간 딱 맞춰 눈을 뜬 것을 보면 습관이란 게 참 무서웠다. 그래도 지찬에겐 평화롭고 나른한 주말이었다.
까치집을 지은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나 굴러다니는 캔맥주를 치우고 나니 식다 못해 쉰내가 날 것 같은 치킨이 눈에 보였다. 맥주 맛에 취해 손 하나 대지 않고 잠들어버려 포장 그대로 묵직했다.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아 본 지찬은 아리송한 고갯짓으로 잠깐 고민하다 냉장고에 처박아버렸다.
‘뭐 별일 있겠어. 상해 봤자 설사 두어 번 하고 나면 괜찮겠지.’
배를 긁적이다 창밖을 바라보니 오랜만에 쨍하게 맑은 하늘이었다.
“음, 오랜만에 등산이나 가 볼까.”
삼십 대에 들어서면서 건전한 취미를 가져 볼까 해서 재미를 붙인 게 등산이었는데, 이마저도 몇 번 또 안 가다 보면 도로아미타불이었다.
사실 상사가 좋아한단 이유로 몇 번 억지로 끌려 나갔다가 재미를 발견한 운 좋은 케이스지만 말이다.
날씨가 우중충해서, 날씨가 더워서, 비가 와서, 기타 등등 피곤하단 이유로 미뤘더니 배에 살이 다시 붙는 느낌이었다.
‘건강한 노후를 보내려면 자기 관리는 필수인데.’
그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 * *
바스락, 낙엽을 밟는 신사의 구두가 험한 산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힘든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가볍고 나른한 걸음으로 가파른 산에서 내려오던 한성이 멈춰서 절벽 낭떠러지 아래를 바라봤다.
내리쬐는 햇볕이 뜨겁지도 않은지 정장에 매끈한 구두까지 챙겨 신은 한성은 험난한 산속에서 이질적인 존재처럼 비쳤다.
남쪽과 서쪽의 경계에 있는 산이라 자주 찾지는 않는 곳이었다. 근처는 인간들에겐 느껴지지 않겠지만, 늘 신수의 힘이 경계하고 보호하는 구역이기 때문에 백호의 힘까지 필요하지 않은 곳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던 그곳에서 낯선 기류가 느껴져 둘러보러 온 참이었다. 낯설지만 어딘가 익숙한 느낌, 하지만 전혀 느껴 보지 못했던 그런 것.
한성이 산에 도착했을 땐 이미 그 기운은 사라지고 없었다. 작은 움직임이라도 찾아보려고 했지만, 그 기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제 레이더에 걸리는 건 반려의 움직임뿐이었다.
멀리서 보이는 작은 인영. 모자를 쓰고 조심스레 내려가는 뒷모습이었지만, 그에게서만 맡을 수 있는 향기와 오묘한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한성은 여유롭게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산 아래를 바라보다 그대로 뛰어내렸다. 바람을 밟는 듯 가벼운 착지에 주변을 둘러본 한성이 옆으로 난 산길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막 걸어 내려오던 지찬과 부딪힐 뻔하자 재빨리 몸을 틀어 휘청이는 그의 몸을 잡아주고 옆에 섰다.
“어?”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고, 그 필연이 계속되면 운명이라던데…… 우린 운명이 맞는 것 같지 않소?”
느닷없이 튀어나온 검은 형체에 심장 터질 만큼 깜짝 놀란 건 둘째치고, 우악스럽게 잡아챈 손길에 또 한 번, 그리고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듯한 목소리와 말투에 세 번. 모두 기함할 일이었다.
잔인한 건 봐도 갑자기 훅훅 튀어나오는 귀신 영화는 못 보는 지찬에겐 간이 콩알만 해질 일이었다.
그리고, 꼭 귀신의 속삭임처럼 느껴지는 한성의 목소리가 어찌나 듣기 싫은지.
기분 좋은 주말 오전의 한가로운 취미 생활까지 방해받은 기분이었다.
“진짜 우연 맞아요?”
살짝 찡그린 얼굴로 쳐다보자 예상외의 차림으로 서 있는 한성이 보였다. 아무리 낮은 산이라고는 하지만 꼭 맞게 차려입은 슈트라니.
“그 차림으로 여길?”
“산책 좀 하느라.”
‘대체 어떤 미친놈이 산길 산책을 정장 차려입고 한답니까.’
피식 웃는 한성의 옆모습에 내심 속마음이라도 들킨 것처럼 민망해졌다.
그리고 그 한성의 옆으로 하얀 무언가가 갸웃갸웃하고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아주 작은 새였다. 꼭 애완 새처럼 하얗고, 빛 고운 작은 새.
고개를 살짝 틀어 한성의 어깨를 보니 주먹보다 더 작은 새 한 마리였다. 그 꼬리의 끝에는 붉은 깃털이 촘촘하게 박혀 언뜻 보면 꼭 작은 불길 같았다.
작고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지찬의 표정이 풀어지고 있었다. 노파에게 면박이나 주던 또라이 같더니, 작은 생명체가 겁도 없이 어깨를 타고 오를 정도면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니지 않을까 하고 조금이나마 마음의 경계가 풀어지는 듯했다.
“무엇을 그리 보는 게냐.”
“이 아이, 키우시는 건가요? 케이지 없이 이렇게 데리고 다녀도 괜찮아요? 엄청 얌전한가 봐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새의 작은 움직임에 지찬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런 지찬의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한성이 다가오는 손끝을 바라보다 제 어깨 쪽으로 오는 걸 보고 고개를 돌린 찰나.
“우왁!”
한성이 산새가 모두 떠나갈 듯 비명을 질렀다. 덩달아 놀란 지찬은 손을 거두고, 얌전히 앉아 있던 하얀 새는 가볍게 퍼덕이며 공중으로 섰다.
온갖 오두방정은 다 떨면서 어깨를 털어 대는 한성의 모습에 지찬의 얼굴이 어두워져 갔다.
‘내가 미쳤다고 저런 놈을…….’
또라이에서 이상한 놈으로 한 단계 다운해 주려던 마음의 틈이 다시 ‘세상에 다시 없을 신박하게 정신 나간 놈’으로 상향조정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은 동물치고 겁도 없는지, 그런 그의 옆에서 우아한 날갯짓으로 떠 있는 작은 새를 바라봤다.
거뒀던 손을 살짝 올려 손가락을 내밀자 그 위에 가볍게 앉았다. 그 모습을 보며 지찬은 다시 신사의 모습을 한 멍청이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렇게 놀라면 새가 위험하잖아요. 키우는 새 아니었어요?”
“저놈이 위험한 게 아니라 네가 더 위험해져. 당장 버려. 그거.”
어제부터 정말, 노파에겐 개라고 하질 않나. 작은 새에겐 저놈이라니.
마치 더러운 거라도 보는 듯 인상을 찌푸린 채 손을 휘휘 내젓는 한성을 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한심한 눈초리로 남자를 바라보던 지찬이 고개를 돌릴 때였다. 손가락 위에 가벼운 존재에서 무언가 사라락 스치는 느낌에 옆을 보던 찰나, 갑자기 나타난 사내의 모습에 지찬이 손을 털며 뒷걸음질 쳤다.
“으악! 뭐, 뭡니까!”
작고 하얀 새는 온데간데없고, 험상궂은 장정 하나가 지찬의 손을 잡고 웃고 있었다.
“반가워. 백호의 반려.”
묵직한 음성이 귓가를 관통하는 듯 온몸이 저렸다. 잡힌 손을 털어 내고 뒷걸음질 친 채로 두 남자를 바라보고 선 지찬의 눈동자가 작게 떨리기 시작했다.
방금 그 목소리에서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짧고 강하게 스쳐 지나가는 두려움과 알 수 없는 본능의 경고였다.
무조건 도망가라고.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는 지찬의 손을 낚아챈 건 다름 아닌 한성이었다.
“그쯤 하지. 여기까진 무슨 일인가.”
지찬의 앞을 한성이 가로막고 섰다. 등 뒤로 자신을 숨기는 듯한 행동에, 잡힌 손에, 그리고 경계심이 가득한 한성의 굳은 목소리가 뒷걸음질 치던 지찬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네 반려가 나타났다고 소문이 파다해서 말이지.”
“내 반려와 네놈이 무슨 상관이라고.”
“인사하러 왔지. 우리 백호 잘 봐주세요. 하고 말이지.”
“인사는 집어치우고 신력이나 줄여. 아직 인간이다.”
잘 봐 달라는 말을 하며 한성의 앞에서 몸을 기울여 지찬을 바라보는 남자의 목소리가 여전히 몸을 울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기분은 마치 커다란 스피커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온몸을 관통하는 파동이 잔물결처럼 퍼져 나갔다.
심지어 오장육부까지 뒤집어 놓듯 울리는 그 느낌에 헛구역질까지 나왔다. 저도 모르게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참으려고 잡혀 있는 손에 힘이 실렸다.
“흠, 그래? 내 인사가 너무 성급했나 보네.”
“어. 아주 무례해.”
“알았어. 미안해, 진짜 기뻐서 달려온 거야. 궁금하기도 했고.”
“연회 얼마 안 남았잖아.”
“응, 근데 네가 반려에게 옴짝달싹 못 한다기에 그만, 맘이 급했어. 미안.”
덩치가 큰 사내는 뜻밖에 한성에게 약한 모습을 보였다. 온몸을 울리던 이상한 파동이 사라지고 나자 남자의 목소리는 편안했고, 그 느낌 또한 동네 아저씨 같은 분위기로 바뀌었다.
한성은 대답하지 않고 뒤에 선 지찬을 돌아봤다. 신력의 파동은 인간에게 맞지 않아 몸에 무리가 올 수 있었다. 조급하고 성미가 급해 뇌까지도 모두 근육으로 꽉 차 있을 것 같은 주작에겐 그런 생각의 여유조차 없었겠지.
“괜찮은 건가?”
지찬의 하얗게 질린 얼굴이 혼란스러워 보였다.
“저자는 네가 아직 백호인지도 모르는 거야?”
“그만 떠들어.”
“비밀도 아니잖아. 반려는 최대한 빨리 각인할수록 네게도 좋은 거라고.”
“하아…….”
점점 미간이 구겨지는 지찬의 얼굴은 관심도 없는지 주작은 계속해서 백호를 위한단 마음에 주절주절하고 있었다. 그런 눈치 없는 모습에 한성이 이마를 짚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전 이만 가 볼게요.”
“자, 잠…….”
“한성아.”
가타부타 다른 말 없이 그대로 등 돌려 산을 내려가는 지찬의 뒷모습을 보던 한성이 뒤따르려 했지만, 뒤에서 부르는 주작의 목소리에 미간을 잔뜩 구기고서 뒤돌아봤다.
“네 반려가 먼저 나타나 제일 늦은 날 도와주려 했다는 건 이해할게. 근데 더 이상의 관심은 지나쳐. 여긴 내 구역이고, 반려 역시 내 사람이다.”
“알아. 그리고 청룡의 반려도 나타났어. 조심하라고 일러 주고 싶어 왔어. 알잖냐. 청룡이 얼마나…… 위험한지.”
작은 텀을 주고 말을 끝낸 주작의 시선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한성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쥔 손에 힘이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