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60)

1화

“혹시 신을 믿나?”

“……네?”

“아, 믿든 안 믿든 그건 상관없어. 어차피 정해진 운명이니까, 거부할 순 없을 테고.”

“……네?”

“남자라 좀 의외긴 하네.”

거래처에 앉아 새로 나온 메뉴 설명을 하던 지찬의 옆으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깔끔하게 정돈된 수트에 선이 굵은 얼굴로 내려다보는 남자의 눈빛은 마치 상품을 고르는 듯, 세심하게 지찬을 관찰 중이었다.

“저 죄송하지만, 누구…… 신지?”

당황하는 지찬과 맞은편에 앉은 점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여전히 바쁘게 지찬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고 있었다.

“남자랑 자 본 적 있나?”

“네?”

“산책 중에 마주칠 줄은 몰랐네. 그렇게 찾아도 안보이더니.”

산책치고는 과한 차림새처럼 보였지만, 이미 제정신이 아닌 남자라고 판단한 지찬은 입을 다물었다.

영업 거래처이긴 하지만 지찬 자신이 갑의 처지도 아닐뿐더러 괜히 소문이 잘못 나면 겨우 입사한 회사에서 댕강 목이 잘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찬은 사회생활의 경력을 살려서 최대한 친절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사람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그럴 리가, 분명 네게 그 ‘향기’가 난다고.”

지찬은 향기고 나발이고 이미 저 수려한 외모를 옵션으로 달고 있는 주둥이에서 나온 단어들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도 제 나이 서른둘이면 어느 정도 사회생활은 해봤다고 자부할 만한데, 아마도 인생에서 세 번째로 가장 큰 위기이지 않나 싶었다.

“아, 그 향기라면 저기 아르바이트생에게 프라이드 주문 넣으세요. 손. 님.”

지찬은 친절하게 손바닥을 펴 카운터의 아르바이트생을 향해 돼먹지 못한 남자의 시선을 돌리려 애썼다.

멀쩡하게 가게 점장이 앞에 있고, 카운터에 아르바이트생까지 있는데도 왜 자신이 정신 나간 진상 손님까지 처리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남자의 시선이 오로지 본인에게만 박혀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다.

팔짱을 낀 채 바라보던 남자가 한쪽 손을 들어 턱을 쓰다듬고 있었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모습이 꼭 ‘다음에 투자할 곳은 어디더라’ 같은 중요한 일을 고민하는 능력 좋은 사업가의 느낌이 물씬 풍겨 왔다.

“널 프라이드라고 주문을 해야 가질 수 있는 건가?”

그 주둥이는 그 완벽한 외관을 무시한 채 떠들고 있었지만.

“……아뇨. 저 말고요. 프라이드 치킨이요.”

날렵하게 솟은 콧대와 유려한 라인의 매끄러운 입매, 그리고 오로지 한곳으로 고정된 날카롭지만 어딘지 기묘한 느낌의 눈빛.

외모로만 봐서는 지찬과 비슷한 연령대지만, 어쩐지 그에게서 풍겨 오는 느낌은 사뭇 달랐다.

‘하…… 애초에 게이도 아닌 내가 왜 이런 미친놈 겉모습을 뜯어보고 있는 거야.’

그때 앞에 선 남자의 짙은 눈썹 한쪽이 살짝 움찔거렸다.

“난 상관없어. 네가 남자든, 게이가 아니든.”

“뭐, 뭐요?”

“우린 운명이라는 뜻이야. 흠. 보아하니 바쁜 것 같고, 인간들은 이걸 현생이라고 부르나. 현생이 바쁜 것 같으니 나중에 다시 찾아오지.”

“현생?”

‘사이비? 현생? 전생, 현생. 그 현생인가? 운명이라니!’

지찬의 머릿속이 과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넋을 빼놓고 자신을 바라보는 지찬을 보며 세상 가장 시크한 미소로 등을 돌린 채 걸어가는 한성은 자신이 떠올린 단어에 내심 뿌듯해하는 중이었다.

얼마 전, 인간들의 작은 상자(요즘은 커다란 네모의 틀로 바뀌었지만) 속에서 나오는 걸그룹에 빠져 허덕이던 거북이가 하는 말을 유심히 들었었다.

‘우리 챠챠 덕질 해야 하는데, 현생이 너무 바쁘다! 인간들의 세계는 왜 이렇게 바쁘게만 도는 거냐? 응? 한성아!’

생긴 것답지 않게 울부짖던 거북이를 보며 혀를 찼던 그때를 떠올리며, 인간들의 인생을 현생이라고 이해했다. 아마 제 반려도 그런 상황이었겠지.

“근데 덕질은 무슨 뜻이지. 덕 덕(德)에 차례 질(秩)을 써서 덕을 쌓는다는 뜻인가. 요즘 세상은 별 해괴한 방식으로 글을 조합하는군.”

고개만 갸웃 틀어진 한성이 순간, 제 몸을 감싸고 사라진 바람을 느끼려 눈을 감았다. 그리고 비릿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떤 애송이가 감히 백호의 구역에서 노는지 구경이나 가야겠군.”

그리고 천천히 떠진 눈동자엔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의 냉기가 느껴졌다.

* * *

지찬은 점장이 끝끝내 손에 들려 준 치킨 한 마리를 들고 터덜터덜 집으로 걷고 있었다. 괜찮다고 사양하는데도 자꾸 들이밀면 그도 마음이 약해 거절할 방도를 모른다.

치킨 회사에 다닌다고 무조건 치킨만 먹고 사는 건 아니지만, 사실 지찬은 닭 요리를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튀기고 볶고 끓이든 어떤 식으로 조리를 하든 말이다.

주변에선 치느님 예찬에 적당히 리액션만 맞춰 주는 정도지 이렇게 찾아 먹을 정도는 아니란 거다. 그래서 이런 호의가 때론 굉장히 부담스럽기도 했다.

“하아…….”

그래도 공짜로 생긴 안주에 캔맥주나 몇 캔 사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고선 집 근처 마트에 들렸다.

찌는 듯한 더위에 어울리지도 않는 정장까지 껴입는 바람에 지친 하루였지만, 그래도 뿌듯한 하루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직장인에겐 더할 나위 없는 불타는 금요일 저녁이기도 했고 말이다.

마트의 시원한 냉방 시설에 감탄하면서 즐겨 마시는 캔맥주 서너 개와 주말 동안 먹을 식재료를 고르던 와중이었다.

어디선가 실랑이하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몇 시간 전에 봤던 그 남자가 나이 지긋하게 든 노파와 투덕거리고 있었다.

“아, 글쎄. 안 된다니까.”

“왜요! 나도 이제 좀 먹고 싶다니까!”

“어허, 안 된다고 했지. 이빨 다 빠져서 뭘 먹겠단 게야.”

“진짜 너무하세요! 저도 다 컸어요!”

“겉만 늙으면 뭘 해. 한참 멀었어.”

“딱 한 번만요. 네? 제가 살날이 남아 봤자 얼마나 남았겠어요.”

“얼마 안 남았으니 오래오래 살라고 말리는 거야. 거기 일찍 가서 뭐해. 볼 것 없어.”

기가 막힌 건 노파가 오히려 그 남자에게 말을 높이고 있다는 거였다. 파를 집어 들다 굳어버린 모양새로 지찬이 바라보고 있자 그 시선을 느낀 남자의 고개가 돌려졌다.

그리고 그 남자의 손엔 달콤한 초콜릿이 들려 있었다.

순간 지찬의 머릿속에서 드라마 한 편이 재생되고 있었다.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자에게 존댓말 하는 노파, 그리고 어린아이처럼 초콜릿을 요구하는 노파…….

치매 걸린 노모인가. 괜히 아까 일로 껄끄러운데, 더 껄끄러운 장면을 봐버린 것 같아 기분이 정말 언짢아졌다.

‘더는 저자와 엮이고 싶지 않은데.’

게다가 치매 걸린 노파보다 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남자이지 않던가.

지찬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고, 그 모습을 보던 한성이 피식 웃었다.

“다시 만나는구나.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라 하더니. 역시 너와 나는 운명이 맞는가 보구나.”

“아…… 네.”

지찬은 집어 든 파를 옆구리에 끼고 있던 장바구니에 끼워 넣었다. 그러다 그의 옆에 있던 노파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것보다 그 옆의 것이 더 싱싱한데.”

“그렇다는구나. 그리고, 이자는 개다. 오해하지 말거라.”

“개라뇨. 진짜 서운합니다. 백호 님.”

“어허, 개를 개라고 하지. 지금 개가 아닌데 개라고 할까. 그리고 저이는 내 반려다. 앞으로 네가 신경 써야 할 인간이니 잘 새겨 보아라.”

개라니, 지찬은 노파의 말에 담았던 파를 도로 빼내는데 들려온 폭탄 발언에 다시 한번 더 굳어졌다.

아무리 치매 걸린 노파라지만, 개 취급이라니 생각보다 더 미친놈이 분명했다.

“어허, 아니래도.”

“드디어 반려를 찾으셨군요.”

노파는 늙은 겉모습과 달리 천진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진심으로 기뻐하는 듯했다. 정상적이지 못한 관계를 설명할 길이 없어 지찬은 그대로 등을 돌렸다.

초복이 지났음에도 복날에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런가. 기가 빨리는 기분이었다. 서둘러 집에 가 샤워를 하고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싶어졌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한성이 웃으며 노파에게 말을 건넸다.

“자네는 노파의 모습을 참으로 좋아하는군.”

“나이를 먹은 만큼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뿐입니다.”

“자네가 일부러 노파의 모습으로 날 골려 먹는 걸 모를 줄 알고?”

그 말에 노파의 얼굴이 해맑게 짓궂은 웃음을 띠며 한성의 손에 들린 초콜릿을 뺏어 들었다.

“그러는 백호 님이야말로 제 본체의 모습을 두고 놀리시지 않습니까?”

“흠, 개로 보이니 개라고 하는 것을 어찌 내게 그러느냐.”

“백호 님께서 개가 좋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못생긴 그 돌덩이에 비하면 개가 훨씬 귀엽지 않으냐.”

그리고 한성이 노파의 손에 들린 초콜릿을 다시 잡아챘다.

“그리고, 개는 초콜릿을 먹으면 오래 못 산다는구나. 며칠 전 네모난 상자에서 보았다.”

“그러니까요! 저는 원래 개가 아닌데 자꾸 개라고 하시면 어찌합니까!”

억울한 노파의 외침에도 한성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재빠른 걸음으로 계산대에 선 지찬의 뒷모습을 쫓고 있을 뿐이었다.

“다 너를 위해 그러는 것이다. 오래오래 살아야 하지 않느냐. 내가 생을 다 할 때까지, 너도 함께.”

“개가 아니라니까요오. 한성 님.”

한성은 계산을 끝내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트 밖으로 빠져나가는 지찬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신이라는 놈들은 꽤 성가신 일을 좋아하는구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