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ide story 02 (12/13)

“아, 맞다. 우유.”

장 볼 리스트를 적어 놓은 종이를 확인하던 인섭이 외쳤다. 우유를 진열해 놓은 코너를 방금 지나친 것이다.

“제가 갔다 올게요. 기다리세요.”

인섭의 말에 이우연이 같이 가요, 하고 웃었다.

“카트 무겁잖아요. 어차피 코너만 돌면 바로인데요.”

주말이라 그런지 평소에는 한가하기 짝이 없는 마트가 북적였다.

“그럼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인섭이 고개를 끄덕이고 얼른 우유를 진열해 둔 곳으로 걸어갔다. 평소에 마시던 제품을 찾아 유통 기한을 확인한 후 집어 들었다.

“됐다.”

인섭은 커다란 우유를 안아 들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진열대 모퉁이를 막 돌려는 순간.

“저기요.”

어디선가 들려온 한국어에 인섭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고 말았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혹시 이우연 씨 아니세요?”

여자 두 명이 이우연의 옆으로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글라스를 쓴 이우연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진열대에 있는 상품을 고르고 있었다.

“어? 아닌가?”

“맞는데. 완전 똑같이 생겼잖아. 다시 한번 물어봐.”

여자가 이번에는 이우연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우연이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혹시 이우연 씨 아니세요?”

[누굴 말씀하시는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이우연이 웃으며 영어로 대답했다.

“웬일. 목소리 들었어?”

“대박이다.”

“이우연 아니면 어때. 살면서 저런 남자랑 언제 말 섞어 보겠어.”

여자 둘이 꺅꺅거리며 이우연을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이우연은 과자를 카트 안에 담고 다음 코너로 유유히 사라졌다.

“혼혈이겠지? 얼굴 좀 자세히 볼걸.”

“하긴 이우연이 왜 이런 곳에 있겠어. 대체 어디로 간 걸까. 이우연 없으니까 드라마랑 영화 보는 맛이 안 나.”

“내 말이. 그 정도 얼굴에 그 정도 연기되는 주연급은 이우연 원 앤 온리였는데.”

“채연서 때문에 진짜 뭔 일이니. 아까운 배우 하나 사라지고. 다시 생각해도 짜증 난다.”

“우리나라 연예계의 대손실이지. 저번에 뜬 기사 봤어?”

재잘대는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인섭은 여자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에야 코너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우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다음 코너에도 마찬가지였다.

“어….”

혹시 아까 그 여자들이 들을까 봐 이우연의 이름을 부를 수도 없었다. 인섭은 다급한 얼굴로 주변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때 갑자기 차가운 것이 인섭의 뺨에 닿았다.

“……!”

인섭이 화들짝 놀라 돌아보자 이우연이 맥주 캔을 흔들어 보였다.

“아…, 어….”

이우연이 인섭의 손에 들린 우유를 빼앗아 카트에 넣고는 다 샀어요? 하고 물었다. 인섭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갈까요?”

인섭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차에 장 본 물건들을 실으면서 이우연은 인섭에게 물었다.

“가다가 아이스크림 가게 들를까요?”

장을 보는 건 고용인들을 시켜도 충분했다. 하지만 인섭은 이우연 씨 친척분께 최대한 신세 지지 않도록 하자며, 장을 보는 일 같은 건 자신이 하겠다고 했다.

이우연은 처음엔 귀찮았지만, 장을 보고 나서 드라이브를 하거나 잠깐 어딘가에 들러 시간을 보내는 게 마음에 들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아이스크림이요?”

“저번에 먹으러 갔던 곳이요.”

아이스크림 같은 단 음식은 질색이었지만, 인섭이 아이스크림 진열대 앞에서 강아지처럼 눈을 빛내며 고민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어 종종 들르곤 했다.

인섭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차장을 빠져나오면서 이우연은 라디오를 켰다. 얼마 전에 약물 과다로 죽은 여가수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인섭이 좋아하는 곡이었다. 볼륨을 높여 주었다. 평소였으면 곡에 대해 한마디 했을 인섭이 입을 다문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늘 저녁은 뭐로 할까요?”

저녁이 되면 모든 고용인이 집 밖으로 나갔다. 저녁 식사 준비는 두 사람의 몫이었다.

이우연의 물음에 인섭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인섭 씨.”

“아, 네. 죄송합니다. 잠시 딴생각하느라. 뭐라고 하셨나요?”

“저녁이요. 뭐 먹고 싶은 거 있냐고요.”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인섭의 성의 없는 대답에 이우연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차를 도로변에 세웠다.

“왜 그래.”

이우연이 물었다. 인섭이 눈을 껌뻑이다가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고 대답했다.

“솔직해지기로 했잖아요.”

두 사람 사이의 약속이었다.

서로의 사생활을 지켜 주되 묻는 말에 솔직하게 대답할 것.

인섭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몸이 조금 안 좋아요, 하고 대답했다. 이우연의 큼직한 손이 인섭의 이마를 짚었다.

“열이 조금 있네요.”

이마 전체를 뒤덮은 손이 한참 동안 머물러 있다가 멀어졌다.

“왜 얘기 안 했어요.”

“…아까는 괜찮았습니다.”

이우연이 운전대를 잡았다. 차를 다시 출발시키고 그는 오던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세요?”

“병원이요.”

“괜찮습니다. 그냥 조금 피곤해서 그렇습니다.”

“아플 때는 내 말 듣기로 했잖아요.”

이것도 약속이었다.

아플 때는, 어떤 경우라도 이우연의 말에 따를 것.

인섭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우연이 인섭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잠깐 눈 붙여요, 하고 말했다.

인섭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아까보다 열이 조금 올라갔네요.”

체온계를 확인한 이우연이 언뜻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인섭은 죄송해요, 하고 사과했다.

“미안한 줄 알면 얼른 나아야지.”

이우연이 물수건을 인섭의 이마에 덮어 주었다. 병원에서 받은 진단은 가벼운 감기였다. 약 먹고 하루 푸욱 자고 일어나면 나을 거라고 의사는 덧붙였다.

계절이 바뀔 무렵이면 인섭은 감기를 앓았다. 같이 살게 되면서 알게 된 사실 중 하나였다. 인섭은 유독 아플 때 어리광이 심해졌다. 손이 많이 갔지만, 이우연은 기꺼이 인섭을 돌보았다.

“…너무 자주 아픈 거 같아서 죄송해요.”

“나도 아픈데요, 뭘.”

“어디 편찮으세요?”

그 와중에도 인섭이 놀라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이우연은 인섭을 도로 눕히고 제 머리를 툭툭 두드리며 여기, 하고 웃는다.

“인섭 씨는 이런 나랑 살아 주니까, 평생 병간호하는 셈 쳐요.”

이우연은 시트를 고쳐 덮어 주고 의자를 가져와 인섭의 침대 옆에 앉았다.

“책 읽어 줄까?”

인섭이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우연은 그럼 잘래요? 하고 다시 물었다. 인섭은 네, 하고 대답하며 눈을 감았다.

아래 속눈썹과 위 속눈썹이 맞물리는 모양을 보며 이우연은 가만히 숨을 삼켰다. 열이 오른 뺨이 잘 익은 복숭아처럼 발긋했다.

아픈 사람에게 욕정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이우연은 제가 얼마나 파렴치한 놈인지 깨닫곤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섭의 숨소리가 고르게 흩어졌다. 이우연은 가만히 그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픈 얼굴까지 예쁠 필요는 없을 텐데.

이우연은 물수건을 갈아 준 후, 어제 읽던 책을 가져와 다시 의자에 앉았다.

“…몇 시예요?”

약 기운 때문에 가물가물한 눈을 감았다 올리며 인섭이 물었다.

“음, 8시 넘었어요.”

창밖에 이미 어스름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이우연이 손바닥으로 인섭의 이마를 짚었다. 열은 내렸네, 하는 안도 섞인 중얼거림이 들렸다.

“뭣 좀 먹을래요?”

“생각 없어요.”

“생각 없어도 먹어야 약을 먹죠. 잠깐 있어요.”

이우연이 읽던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인섭이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이우연이 의아한 눈을 하고 돌아보았다.

“…같이 내려갈래요.”

이런 것이었다.

이우연은 인섭의 어리광이 몹시 달가웠다. 그는 시트로 인섭을 둘둘 말아 번쩍 안아 들었다.

“안 떨어지게 내 목 끌어안아요.”

인섭은 시키는 대로 이우연의 목에 제 팔을 둘렀다. 아래층까지 내려갈 때까지 인섭은 이우연에게 얌전하게 매달려 있었다.

이우연은 인섭을 소파에 내려놓았다.

“여기서 얌전히 기다려요.”

이우연은 주방으로 가서 수프와 차를 끓여 왔다. 인섭은 수프를 반 그릇쯤 비우고는 도저히 못 먹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럼 차라도 마셔요.”

“…속이 안 좋아요.”

“토할 거 같아?”

“더 먹으면….”

이우연은 하는 수 없이 트레이를 물렸다. 시트째 인섭을 끌어안고 가만가만 그의 등을 도닥였다.

“내일 부모님 집에 데려다줄까요?”

“아니요. 저번 주에 갔다 왔는걸요.”

인섭이 커다란 눈을 접으며 웃어 보였다.

웃을 때 그려지는 곡선이 사랑스러웠다. 너무 예뻐서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다가 이우연은 항복을 선언하듯 혼잣말을 뇌까렸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 줄까.”

인섭이 원하는 거라면 뭐든 해 주고 싶었다.

시트 안에서 꼼지락거리던 인섭이 그럼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하고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정말 이거면 돼요?”

“네.”

이우연이 헛웃음을 삼켰다.

인섭이 요구한 건 이우연의 영화였다. 그것도 첫 번째로 찍은 독립 영화.

“나 좋아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취향 참 특이하시군요.”

이우연이 리모컨을 들어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영화가 시작되었다. 같이 영화를 보는 게 조금 부끄러운 듯, 꿈틀거리던 인섭은 어느새 넋이 나간 듯한 얼굴을 하고 화면을 응시했다.

마치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 소년 같은 눈이었다.

이우연은 인섭을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길지 않은 영화였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자 인섭은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다.

“저게 재미있어요?”

본인이 찍어 놓고도 참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영화였다.

“네. 저는 좋아해요.”

인섭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까보다 안색이 훨씬 좋아 보였다.

한국에서 떠나온 뒤, 암묵적으로 두 사람은 이우연의 일에 관련된 얘기는 서로 피했다. 이우연이 나온 작품을 같이 보거나, 그의 활동 계획에 대한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영화 몇 번이나 봤어요?”

“모르겠습니다. 세어 보지 않아서. 오십 번은 넘게 본 거 같은데….”

이우연이 가볍게 웃었다.

“내가 그렇게 좋아서 어떡해요.”

“…그러게요.”

인섭이 작은 목소리로 맞장구쳤다. 그러고는 수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저 영화 대사 영어 번역 제가 했습니다.”

“인섭 씨가요? 그때 한국에 있었나요?”

이우연이 의아함을 내비치며 물었다. 시기상 전혀 맞지 않는 데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인섭이 고개를 내저었다.

“나중에 팬 카페에 취미 삼아 대사를 번역해서 올렸었는데, 김정아 감독님이 메일을 보내셔서 제가 번역한 영어 스크립트를 사용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본인이 하신 것보다 훨씬 좋다고요. 그래서 나중에 교체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김정아 감독의 괴팍한 성격을 생각한다면 그러고도 남았다.

“돈은 받았어요?”

“아니요. 어차피 제가 좋아서 한 일이라 안 받겠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그런 기회 오면 적은 돈이라도 받아요. 귀한 시간 공짜로 쓰라고 있는 거 아니니까.”

인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받은 건 있어요.”

“뭘 받았는데.”

“…그때 이우연 씨가 사용하던 대본이요.”

인섭이 조그맣게 웃었다. 이우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불편한 심기를 알아챈 인섭이 더럭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화나셨어요?”

이우연이 아니, 했다가 다시 말을 바꿨다.

“응, 조금.”

“죄송해요. 제가….”

다음 말은 불시에 다가온 입술에 가로막혔다. 이우연이 인섭의 입술을 애무하듯 가볍게 물었다가 놓았다. 열이 오른 점막이 부드럽게 들러붙었다가 떨어졌다.

“가끔 네가 너무 예쁘게 굴어서 화가 나.”

이우연이 코끝이 인섭의 코에 닿았다. 각도를 달리해서 다시 입술이 겹쳐졌다. 처음에는 부드럽게 시작했던 입맞춤이 조금씩 깊어졌고 급기야 인섭의 몸이 소파에 쓰러졌다.

“하아….”

인섭이 가쁜 숨을 몰아쉬자, 그 위에서 제 무게를 더한 이우연이 옅은 미소를 짓는다.

“얼마나 좋아요?”

“네?”

“내가 얼마나 좋냐고.”

그렇게 물으면서 이우연은 제가 갈 데까지 갔다고 생각했다. 진심으로 이런 게 궁금해지다니. 더 이상 떠올릴 만한 유치한 말도 이젠 없었다.

“하늘만큼 땅만큼 이딴 건 집어치우고.”

“……!”

그 대답을 하려 했는지 인섭이 조금 흠칫했다. 이우연은 일부러 인섭의 가슴을 묵직하게 누르며 얼른, 하고 대답을 요구했다.

인섭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이런 얘기 기분 나쁘실 수도 있는데….”

이우연이 흠, 하고 입가를 당겨 웃었다. 어디 해 보라는 듯이 고개를 까닥거렸다.

“어머니가 항상 얘기하신 게 있었어요. 친부모님도 분명 사정이 있을 거라고. 절대 미워하지 말라고요. 열 달 품어 낳은 아이를 버리고 다시는 보지 못하니, 그걸로 받을 수 있는 벌은 다 받은 거라고 하셨어요.”

최인섭을 키운 부모다운 말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최근에는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냥… 저를 아예 잊으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이렇게 잘 살고 있는데 계속 과거에 매인 채 사시는 건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까만 눈에 순수한 선의가 어린다. 제가 죽어도 갖지 못할 것이었다. 이우연은 그렇군요, 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이우연 씨는 그러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

“만약, 만에 하나, 저랑 헤어져도 저를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우연 씨가 불행하길 원하는 건 절대 아니지만, 그냥…. 그러지 않으면 불공평하니까….”

인섭은 지금 앞으로도 계속 이우연을 잊지 않을 거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우연은 하, 짧은 숨을 내뱉었다. 텅 비어 있다고 믿은 곳에 믿을 수 없을 만큼 충만한 감정이 차올랐다. 숨이 막혔다.

“내가 너랑 헤어져 줄 것 같아?”

이우연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인섭이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그때가 인섭 씨한테는 일생일대의 기회였는데.”

이우연의 입술이 가볍게 인섭의 입술을 물었다가 놓으며 말을 이었다.

“…니가 걷어찬 거니까,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어.”

이우연은 알고 있었다. 앞으로도 제 입으로 헤어지자는 말을 할 날은 절대 오지 않을 것임을.

인섭이 팔을 들어 이우연의 목을 끌어안았다.

“…절대 후회 안 해요. 되게 잘 찬 거 같은데요.”

귓가에 작게 들리는 속삭임에 이우연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소파에 누워 입을 맞추고, 쓸데없는 말들을 나누다가, 영화 두 편을 같이 보았다. 마지막 영화를 보면서 인섭은 잠기운이 가득한 눈으로 언젠가 공부를 더 해서 우연 씨가 나온 작품을 모두 번역해 보고 싶다고 꿈결처럼 중얼거렸다. 이우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냥 인섭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인섭이 김 대표의 전화를 받은 건,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나서였다.

“네?”

<아파트랑 빌라 어느 게 편하냐고.>

“무슨 말씀이신지 잘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인섭은 제가 알지 못하는 관용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신중하게 대답했다.

<이우연이 전에 살던 아파트랑, 사 놓고 쓰지도 않고 팔아 버린 빌라. 둘 중 어느 쪽이 지내기 나을 거 같은지 골라 봐.>

부동산 투자를 고민하시는 건가.

인섭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사생활 보호에는 후자가 나은 거 같은데, 투자 가치를 따지면 전자가 낫지 않을까요?”

<오케이.>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김 대표는 그러고 전화를 끊었다. 인섭은 조금 당황했지만, 김 대표가 많이 바쁜가 보다 하고 이해하고 넘겼다.

하지만 그다음 전화가 온 건, 그로부터 삼 일 뒤였다.

<세단이랑 SUV 중에 운전하기 뭐가 편해?>

“네? 아, 글쎄요.”

이건 아무래도 관용적인 표현은 아닌 거 같았기에 인섭은 잠시 생각하다가 SUV가 나은 거 같아요, 하고 대답했다.

<벤츠? BMW?>

“…운전해 보니 벤츠가 조금 더 편했던 거 같습니다.”

<좋아. 알겠다.>

전화를 끊으려던 김 대표를 인섭이 얼른 대표님! 하고 불렀다.

<왜?>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시죠?”

김 대표는 주기적으로 이우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살살 달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 욕을 퍼붓기도 했다. 돌아올 것도 아니면서 그 큰돈을 한국에 왜 풀고 갔냐고, 차라리 빌라 판 돈을 내가 가져야 했다는 술주정까지 이어졌다. 결국 통화의 마무리는 대체 언제 한국으로 올 것이냐는 말이었다.

<응, 없는데? 왜애?>

그렇게 되묻는 김 대표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발랄했다.

“아닙니다. 다들 잘 지내시죠?”

<그러어엄. 아주 잘 지내지. 하하하. 나중에 보자.>

김 대표가 쾌활하게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인섭은 한참 고민하다가 그날 저녁 볼일을 보고 돌아온 이우연에게 김 대표의 얘기를 꺼냈다.

“대표님께 전화가 왔었습니다.”

“그래요?”

이우연은 재킷을 벗으면서 관심 없다는 투로 대꾸했다.

“이것저것 물어보셔서 대답해 드리긴 했는데…, 한국으로 들어가실 건가요?”

고민하다가 인섭이 내린 결론이었다. 이우연이 넥타이를 풀다가 조금 의외라는 듯이 입가를 당겨 웃었다.

“싫어요?”

“아니요. 언젠가 당연히 들어가셔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연하죠. 그냥….”

“그냥?”

“…자주 못 보는 게 아쉬워서요.”

이우연의 표정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지금 들은 개소리가 어느 집 개소리냐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자주 갈게요. 돈 열심히 모아서 최대한 자주….”

“시발, 뭔 개소리를 그렇게 길게 해요.”

이우연이 인섭의 턱을 들었다.

“나 너 없으면 미치는 거 알면서 그래?”

“…….”

“나랑 떨어져 있으면 좋겠어요?”

“아닙니다. 절대 그런 게 아니에요. 당연히…, 제가 한국에 같이 있으면 아무래도 신경 쓰실 일이 많아질 테니까.”

이우연이 인섭을 번쩍 안아 들었다. 침대로 걸어가 그를 눕히고는 말을 이었다.

“인섭 씨가 싫으면 어디에도 안 가요.”

제가 출연한 작품을 번역해 보고 싶다는 인섭의 말에, 이우연은 한국으로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욕심 없는 인섭이 뭔가 하고 싶다는 뜻을 밝힌 건 드문 일이었다.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김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분간 비밀로 해 달라고 했는데, 그걸 참지 못하고 신나서 인섭에게 티를 낸 모양이었다.

“네가 싫으면 지금이라도 다 취소할 테니까.”

“…같이 가요.”

인섭이 이우연의 옷자락을 움켜잡았다.

“같이 가고 싶습니다. 우연 씨랑 가고 싶어요. 여기도 좋지만, 저는….”

인섭은 제가 배우 이우연의 커리어를 망쳐 버렸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우연은 그런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인섭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마트에서 봤던 사람들의 대화가 잊히지 않았다.

그래서 이우연이 한국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결론 내렸을 때, 자신이 여기 남아야 하는 상황이 와도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아쉽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끔찍하게 싫었다. 이우연과 떨어져 있는 건, 이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저도 우연 씨랑 같이 가고 싶어요. 그렇지만, …저 때문에 원치 않으시는데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도 싫습니다.”

이우연은 제 일에 별다른 애착을 보이지 않았다. 배우를 시작한 계기도 알기에, 인섭은 그에게 다시 일을 하라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배우 이우연을 좋아했지만,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이우연 그 자체였다.

“그러니까 우연 씨가 원하시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인섭이 똑바로 이우연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인섭 씨도 아시다시피 나는 딱히 바라서 뭔가를 행동하거나 하지 않아요.”

이우연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냥 적당히 편한 대로 나한테 이로운 결과를 계산하고 선택할 뿐이에요. 배우를 선택한 것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별다른 미련도 없는 게 사실이에요.”

“…….”

역시 자신이 생각한 그대로였다. 인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인섭 씨가 좋아해 준다면, 나는 하고 싶어요. 이런 이유로는 안 되나요?”

이우연은 제가 가진 것 중 인섭이 좋아하는 게 있으면 뭐든 내주고 싶었다. 이런 것이라도 좋아해 준다면, 얼마든지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이우연의 물음에 인섭이 고개를 저었다. 이우연이 인섭을 꽉 끌어안았다.

“많이 다를 겁니다.”

“…….”

“전보다 일도 줄었을 테고, 반응도 다를 거고, 악플도 훨씬 많이 달리겠죠.”

찍던 영화를 엎고 발을 뺀 건, 배우로서 최악의 선택이었다.

“스토커로서 속상할 일 많을 텐데, 괜찮겠어요?”

장난기 섞인 물음에 인섭은 눈에 힘을 주고 대답했다.

“기사나 댓글 같은 거 절대 안 볼게요.”

이우연은 인섭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고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웃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인섭 씨 차는 뭐로 골랐나요?”

주차장에 세워진 벤츠 G63을 보며 인섭은 끄응 앓는 소리를 삼켰다. 김 대표가 차를 고르라는 말을 했을 때, 당연히 다른 사람이 탈 차를 고르라는 말인 줄 알고 벤츠를 택했다. 그런데 이우연의 입에서 인섭 씨가 탈 차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이다.

펄쩍 뛰면서 절대로 못 받는다고 했는데, 김 대표는 이미 계약을 마치고 차 대금까지 완불한 상태였다.

‘네 차니까, 책임지고 고장 날 때까지 몰아.’

차 키를 넘기는 김 대표의 눈에는 인섭의 발목을 벤츠로 묶어서 절대로 도망가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이걸 어떻게 타라고.”

그냥 SUV도 아니고 최고급 지프형 AMG 모델이었다. 보기만 해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번쩍이는 차를 보는 인섭의 눈에 수심이 그득했다.

이우연이 한국으로 돌아오자 가장 기뻐한 사람은 김 대표였다. 주가가 다시 큰 폭으로 오를 거라며 그는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렸다.

김 대표는 두 사람이 살 집을 직접 알아보고 골라 주었다. 판교 근교에 마련된 주택은 사생활 보호가 확실한 독립 주택이었다. 김 대표는 조부님이 쥐고 있었다는 금싸라기 땅에 건축 면적만 150평짜리 저택을 리모델링해서 이우연에게 건넨 것이다. 그걸 보고 차 실장은 세기의 사랑 납셨다고 비아냥거렸지만, 김 대표는 미래를 위한 큰 투자라고 반박했다.

이우연이 웃는 얼굴로 집을 둘러보다가 보기보다 작네요, 라는 망언을 하지 않았다면 김 대표는 하루 종일 행복했을 것이다.

차 실장은 김 대표의 똥 씹은 얼굴을 보며 배를 잡고 깔깔대고 웃었다. 시끄러우니까 그만 나가 달라는 이우연의 말을 듣기 전까지.

“하아….”

인섭은 주차장에 세워진 차를 보고 다시 깊은 한숨을 몰아쉬고 게이트에서 지문을 인식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정원을 지나 현관을 열고 들어가니 막 샤워를 마친 이우연과 맞닥트렸다.

“갔다 왔어요?”

허리에 수건을 두른 이우연이 물었다.

“네.”

인섭은 눈 둘 데를 몰라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마트에서 사 온 커피 여과지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같이 가자니까.”

“운동하실 시간이라서 그냥 혼자 갔다 왔습니다.”

이우연은 일어나면 일단 지하에 있는 체력 단련실에서 두 시간가량을 보냈다.

“필요한 거 다 써 둬요. 장 보러 갑시다.”

“오늘요?”

“왜요? 약속 있어요?”

이우연이 눈이 설핏 가늘어졌다. 인섭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옷 갈아입고 올 테니까 같이 나가요.”

“…알겠습니다.”

이우연이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들어갔다. 인섭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그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이우연이었다.

그전과는 많이 다를 거라는 점은 알았다. 인섭도 각오했던 바였다. 하지만 달라져도 너무 달라진 것이다.

한국으로 온 뒤, 이우연은 근 한 달 동안 아무 일도 없이 집에서만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시차 적응을 하고 계시구나 생각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자 적응이 필요한 시기니까, 하고 믿었다. 하지만 이 주, 삼 주, 한 달이 지나도록 이우연이 아무런 활동 없이 집에만 있자 초조함은 극대화되었다.

정말 아무도 찾아 주지 않으면 어쩌지. 사람들이 모두 이우연 욕을 하거나 손가락질하고 있는 건 아닐까. …지금이라도 인터넷 기사에 댓글을 열심히 달아야 하나. 그간 무서워서 일부러 인터넷도 보지 않고, 티브이도 켜지 않았는데….

“인섭 씨.”

이우연이 인섭을 불렀다.

“네?”

“장은 내일 보러 갈까요?”

드디어 약속이 생긴 걸까?

인섭이 얼른 그러겠다고 대답하려는데, 이우연이 책을 들고 나왔다.

“이거 읽어 봤어요?”

얼마 전에 제가 주문해 둔 좋아하는 프랑스 작가의 신작이었다. 인섭이 고개를 내젓자 이우연이 웃으면서 소파를 가리켰다.

“같이 읽을까요?”

“…알겠습니다.”

인섭은 조금 풀이 죽은 채로 소파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재미없어요?”

인섭을 뒤에서 끌어안은 채로 책장을 넘기던 이우연이 물었다. 인섭이 화들짝 놀라서 아니요, 하고 대답했다. 이우연이 책 페이지의 모퉁이를 접은 후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집중 안 되면 야한 짓이나 할까요.”

인과 관계가 없는 앞뒤 말을 당연하다는 듯이 붙이며 이우연은 인섭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벌렸다. 따끈하게 열이 오른 입 속에 손가락을 넣어 문지르며, 그가 인섭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했어요.”

“…에?”

“책에 통 집중을 못 하던데.”

이우연이 인섭의 목덜미를 잘근 이로 씹었다. 그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 말고 다른 연놈 생각하는 거면, 당장 그 생각 집어치우는 게 좋을 거예요.”

“…….”

인섭이 고개를 저었다. 이우연은 그제야 인섭의 입에서 손가락을 뺐다.

“그럼 무슨 생각 했어요.”

“…조금 고민했습니다. 미래 계획 같은 거….”

이우연이 인섭의 입가에 묻은 침을 닦아 주며 어떤 계획, 하고 뒷말을 재촉했다.

“학기 중이라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과외 같은 거라도 해서 돈을 벌게요. 회화 수업은 어떻게든 가능할 테니까, 일단 그렇게 돈을 벌겠습니다.”

“…….”

이우연은 열심히 미래 설계를 프레젠테이션 중인 인섭을 흥미로운 표정으로 응시했다.

“그러니까 우연 씨는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에는 들어가지 않으셔도 돼요. 기다리면 기회는 반드시 옵니다.”

“그렇겠죠.”

“절대로, 절대로 이상한 역할이나 작품은 맡지 마세요.”

인섭이 재차 다짐을 받아 내듯 눈에 힘을 준다.

아, 어쩌면 이렇게….

“안 맡을게요. 그런데 영영 마음에 드는 역할 못 맡으면 어쩌지?”

이우연의 물음에 인섭이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놓으며, 세상에 둘도 없이 단호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제가 돈은 어떻게든 벌 테니까, 걱정 마세요. 이우연 씨는 훌륭한 배우니까 절대로 본인의 가치를 낮추실 필요 없어요.”

…말 한마디 한마디를 사람 좆 꼴리게 할 수 있는 걸까.

이우연은 그럴게요, 하면서 인섭의 어깨에 제 이마를 댔다. 아까부터 발기한 성기가 욱신거렸다.

“인섭 씨.”

이우연이 응석 부리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네.”

“나 인섭 씨 좆 빨고 싶은데, 그래도 되나요?”

주제가 인생 얘기에서 갑자기 껑충 건너뛰자 적잖이 당황한 인섭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가 안 팔리는 배우라서, 싫어요?”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아요.”

인섭이 두 손을 내젓고는 제 뜻이 진심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바지의 버클을 끌러 내렸다.

이우연이 눈에 긴 웃음이 걸렸다. 진심으로 인섭이 사랑스러웠다. 그는 인섭의 어깨를 눌러 소파에 앉히고는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팬티까지 내리고 다리 잡아 벌려 주세요. 구멍도 보이게.”

“제, 제가 모셔다드릴까요?”

드디어 이우연이 캐스팅 약속이 잡혔다고 슈트를 챙겨 입은 날, 인섭은 저도 모르게 들떠서 그렇게 묻고 말았다.

“금방 올 건데요, 뭘.”

“그래도 매니저가 있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사람이 옆에 없으면 한물갔다고 누군가 숙덕대지 않을까 인섭은 너무 걱정되었다. 이우연의 모양 좋은 눈에 웃음이 스쳤다.

“차 실장님 오시기로 했으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인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돼요?”

이우연이 넥타이를 고르며 물었다.

“아니요. 긴장 안 됩니다. …저기 그거 말고 저 옆에 넥타이가 이 슈트에는 더 잘 어울리십니다.”

인섭이 조심스럽게 다른 넥타이를 권했다. 이우연은 인섭이 골라 준 넥타이를 들어서 목에 걸고 매듭을 묶었다.

“모양 좀 봐 주실래요?”

인섭은 넥타이의 모양을 잡아 주고 이우연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잔뜩 긴장한 인섭을 보는 이우연의 눈에는 희미한 웃음이 머문 채였다.

“그럼 갔다 올게요.”

현관 앞에서 이우연이 인섭에게 인사했다.

“우연 씨.”

인섭이 그를 불러 세웠다. 그러고는 있는 힘껏 안아 주며 생각해 뒀던 말을 꺼냈다.

“잘될 거니까, 긴장하지 말고 잘하고 오세요.”

“네.”

이우연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고분고분 대답했다.

“피디님하고 작가님께 인사 잘하시고요.”

어디 신인 배우를 내보내는 1인 소속사 대표라도 되는 듯한 대사였다.

“잘 보이도록 노력할게요. 고마워요.”

이우연이 인섭의 뺨에 입을 맞추고 그대로 현관을 나섰다.

인섭은 긴장으로 떨리는 제 손을 내려다보다가 뺨을 두어 번 철썩철썩 내리쳤다.

“잘될 거야. 분명히 이우연 씨가 캐스팅될 거니까.”

…안 되면 어쩌지.

인섭은 고개를 내저었다. 캐스팅 미팅을 가기도 전에 이런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건 절대 금물이다.

인섭은 청소를 시작했다. 잡생각이 들 때는 몸을 움직이는 게 제일 좋았다. 청소를 마치고 존을 쓰다듬으면서 인섭은 제가 이우연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지 고민했다.

“맞아!”

인섭이 갑자기 일어서자 존이 화들짝 놀라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미안해, 존. 나 잠깐 나갔다 올게.”

그는 존의 등을 열 번 도닥이고 지갑과 자동차 키를 챙겨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차를 몰고 시내로 가서 케이크와 꽃, 풍선을 산 다음 집으로 돌아왔다.

종이에 글자를 정성스럽게 써서 붙이고 케이크에 초를 꽂아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포장해 온 꽃다발과 함께.

결과가 어떻게 되든 그를 축하해 주고 싶었다. 인섭은 소파에 앉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이우연을 기다렸다. 어찌나 초조한지 존의 꼬리를 만지작거리는 손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인섭은 케이크에 초를 붙이고 꽃다발을 든 채, 이우연을 기다렸다.

현관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던 이우연이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이거….”

인섭이 꽃다발을 건넸다. 이우연이 흠, 하고 입술을 한껏 끌어 올린 채 웃었다.

“수고 많으셨어요.”

인섭이 두 팔을 벌려 이우연을 꽉 안아 주었다. 이우연은 고개를 숙여 인섭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한껏 숨을 들이켰다. 이우연이 그러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인섭은 마른침을 삼켰다.

“…괜찮습니다. 앞으로 더 잘될 거니까요.”

“고마워요. 정말 힘이 되네요.”

제 연인의 상냥한 위로에 더할 나위 없이 감동한 목소리로 이우연이 대답했다.

“촛불 끄면 돼요?”

이우연의 물음에 인섭이 잠깐만요, 하고 폭죽을 가져왔다.

“하하하. 폭죽까지 터트리시게요?”

“받은 건 다 해야죠.”

인섭이 케이크를 사며 받은 폭죽의 끈을 제 몸에서 최대한 떨어트린 채 잡아당겼다. 펑, 하는 소리와 작은 종이 가루가 공중으로 날아간 순간.

“냐아!”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던 고양이가 놀라서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존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인섭이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테이블에 착지한 존의 앞발이 리모컨을 누른 건 그와 동시였다.

<오늘 오후 논현동의 한 스튜디오에서 KNY사의 새 드라마 ‘당신이 바라 마지않는 전부’ 제작 발표회가 열리는 현장에 나와 있습니다. 당초 이 작품은 조윤영 작가의 작품으로 화제를 모았는데, 거기에 2년 만에 컴백한 이우연 씨가 남자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폭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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