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필로그 (10/13)

“이 집이 맞아요?”

“글쎄, 맞는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LA에서 모델 생활을 2년이나 했다면서요!”

“생활했다고 했지, 내가 영어 잘한다고 했어!”

고급 저택 앞에서 두 남자는 땀을 뻘뻘 흘리며 아웅다웅하기 시작했다.

“아니, 회사 대표라는 사람이 영어도 그렇게 못해서 어떡해요. 글로벌 회사로 키운다며!”

“회사 대표가 돈 많고 잘생겼으면 됐지, 영어까지 잘해야 해!”

“택시 기사가 엉뚱한 곳에 내려 주면 항의는 해야 할 거 아니에요!”

“그럼 너는 지도 안 보고 뭐 했는데!”

“핸드폰 배터리가 나갔는데 지도를 어떻게 봐요. 그러는 대표님도 집에 핸드폰을 두고 와서 이 고생이잖아요. 이우연한테 연락도 못 하고!”

“내가 핸드폰 놓고 오지 않게 좀 챙겨 주지 그랬어.”

“…한 대 쳐도 됩니까?”

“절대 안 되지.”

“어이구, 진짜. 내가 뭘 믿고 이런 사람 밑에서 일을 하겠다고….”

“지금이라도 믿지 마. 누가 믿으랬냐.”

차 실장이 가슴을 두드렸다. 지금이라도 큰길로 나가 택시를 잡아타서 도로 공항으로 가 버릴까 생각하던 차에, 뒤에서 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탁, 하고 문이 닫히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대표님? 하고 부른다.

최인섭이 차에서 내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듯했지만, 커다란 눈에 반가움이 가득했다.

“인섭아아아아!”

김 대표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인섭에게 달려갔다.

“인섭 씨. 오랜만이야.”

차 실장이 캐리어 두 개를 한쪽에 잘 몰아 두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인섭이 얼른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 바람에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갈색 봉투에서 오렌지가 와르르 쏟아졌다.

“아, 죄송합니다.”

인섭이 오렌지를 주우며 습관처럼 사과했다.

“두세요. 내가 주울 테니까.”

긴 팔이 스윽 뻗어 오며 그림자가 인섭의 뒤를 덮었다.

“…이우연.”

김 대표가 이를 부득 갈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오렌지를 줍던 이우연이 선글라스를 슬쩍 아래로 내리며 오랜만이에요, 하고 웃어 보였다. 적당히 그을린 피부와 흰색 반바지 아래로 보이는 쭉 뻗은 다리가 여지없이 사람의 시선을 빼앗을 모습이었다.

“이리 줘요.”

오렌지를 모두 주워 담은 이우연이 인섭의 손에 들린 봉투를 빼앗아 들었다. 인섭은 봉투를 넘기면서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김 대표와 차 실장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어쩐 일이긴, 쟤가 불러서 왔지.”

김 대표가 짜증 섞인 투로 이우연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공항으로 데리러 갔을 텐데.”

“그러게. 말씀하시지 그랬어요.”

이우연이 성의 없는 투로 맞장구쳤다. 김 대표는 하하, 웃으며 눈에 힘을 주어 이우연을 노려보았다.

김 대표는 분명 오늘 몇 시에 공항에 도착한다고 이우연에게 연락했다. 그때 돌아온 대답이 가관이었다.

<오늘이요? 안 되는데. 오늘 인섭 씨랑 마트 가는 날이라서요. 알아서 오세요. 주소 알려 드릴 테니까.>

오랜만에 본 이우연의 개뻔뻔한 얼굴에 김 대표는 열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내가, 너…, 빨리 문이나 열어.”

할 말은 많았지만 김 대표는 힘없이 손짓했다. 미국 남서부의 내리쬐는 태양 아래서 한 시간을 헤맨 탓에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타세요. 더 올라가야 하니까.”

이우연이 차의 트렁크를 열어 주었다. 캐리어를 싣고 두 사람은 차의 뒷좌석에 탔다. 차에 오른 이우연이 오렌지를 담은 봉투를 아무렇지도 않게 김 대표에게 넘기고 운전대를 잡았다.

“…제가 들까요?”

조수석에 앉은 인섭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 됐다. 얼른 가기나 해. 대체 어디가 너희 집이라는 거야. 한참을 찾았잖아.”

“잘 찾아오셨어요. 여기예요.”

이우연이 주머니에서 작은 리모컨을 꺼내 버튼을 눌렀다. 굳게 닫혀 있던 차단문이 열리고 저택과 이어지는 도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부터가 집이라고?”

이우연이 웃으면서 차를 출발시켰다. 높은 지대에 위치한 흰색 저택은 고급 부동산 잡지에서도 권두에 실릴 것 같은 호화로운 자태를 자랑했다.

“주차시켜 두고 올게요.”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입을 떡 벌린 채로 바다와 도시가 한눈에 들어오는 저택의 풍경을 감상했다.

“대표님. 이런 데 살려면 내가 얼마나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해요?”

“숨도 안 쉬고 백 년간 벌어서 한 푼도 안 쓰고 모아도 안 되지.”

“대표님 돈으로는 못 사나?”

“요즘 회사 경영 어렵잖아. 안 돼.”

김 대표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옆에서 듣던 인섭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여기 생각보다 렌트비가 별로 안 비싸요.”

“얼만데?”

“한 달에 오백 불이니까, 음, 육십만 원 조금 넘을 겁니다.”

“…….”

“……. …….”

두 사람의 얼굴에 그럴 리가, 라는 글자가 새겨졌다.

로스앤젤레스 근교에 위치한 팔로스 버디스는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부촌이었다. 태평양이 한눈에 보이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위치한 이 고급 저택의 렌트비가 오백 불이라고 한다면 지나가던 개가 웃을 정도였다.

“…하루에 오백 불이 아니고?”

그렇다고 해도 말도 안 되게 싼 가격이었다.

“이우연 씨 먼 친척분께서 소유하신 곳인데, 사정 때문에 잠시 비워 두셔서 싸게 들어온 겁니다. 집을 비워 두는 걸 싫어하신대요.”

“그 친척이라는 사람 얼굴 본 적 있어?”

김 대표의 물음에 인섭이 아니요, 하고 고개를 저었다.

“뭐 해요. 안 들어가시고.”

주차를 마친 이우연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웃었다. 높은 확률로 그 친척이 저놈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캐리어는?”

“일하시는 분이 안에 옮겨 놨어요.”

“와. 한 달에 60만 원 내고 이런 집에 살면서 고용인도 있고 좋겠다, 야. 나도 좋은 친척 생겨서 여기 살고 싶다.”

차 실장이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한 소리 내뱉었다.

“하하하. 두 분이 결혼하시면 되겠네. 김 대표님 아버지 부자시잖아요.”

이우연이 웃으며 현관을 열고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서자 또 다른 탄성이 터져 나왔다.

고급 대리석과 원목으로 조화를 이룬 인테리어는 얼마나 많은 돈을 정성스럽게 쏟아부었는지 일목요연하게 보여 주었다.

뭐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운 인테리어의 정점은 전면창으로 보이는 푸른 바다였다. 보자마자 세상에, 라는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오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차 실장이 김 대표의 옆구리를 찌르며 우리도 빨리 글로벌 회사로 성장해 이런 집에서 살아 보자고 졸라 댔다.

“회사는 잘되세요?”

이우연이 물었다.

“…니가 지금 그런 걸 물어볼 자격이 있냐?”

“자격 갖추고 말해야 돼요?”

“당연히 잘 안 되지! 그걸 말이라고 하고 있어.”

“그래요? 안타깝네.”

조금도 안타깝지 않은 표정으로 이우연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오랜만에 봤지만 여전히 사람을 빡치게 만드는 탁월한 재주가 있는 놈이었다.

“두 분 먼 길 오시느라 힘드셨을 텐데, 샤워부터 하실래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다시 거실로 나온 인섭이 공손하게 차가운 타월을 건넸다.

“…어쩌다가, 이런 게 저런 거한테….”

김 대표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타월을 받아 들었다.

“그래요. 샤워부터 하세요. 냄새나니까. 일 층에 있는 손님용 욕실 쓰시면 돼요.”

이우연이 상냥하게 웃으면서 재수 없는 말을 지껄였다. 저놈의 발언에 기분 나빠 해 봤자 에너지 낭비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은 두 사람은 순순히 욕실로 향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둘은 바다가 훤히 보이는 욕실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니, 아무리 풍경이 좋다고 해도 욕실 한 면이 다 창인 건 너무 심하지 않아?”

“어때요. 어차피 아무도 못 보는데.”

이우연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꾸했다.

“그래도 난 좀 부끄럽더라.”

“나도, 나도.”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인섭이 웃으면서 시장하지 않으세요? 하고 물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귀신같이 허기가 느껴졌다.

“그래. 밥이나 먹으면서 얘기하자.”

“금방 차릴게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인섭이 일어서자 이우연도 그 뒤를 따라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테이블에 음식이 차려졌다.

“와. 이걸 방금 요리한 거야? 인섭 씨 안 본 사이에 요리 솜씨가 늘었구나. 우리 때문에 너무 고생한 거 아니야?”

“아니에요. 요리하시는 분 따로 계시고, 데워서 차리기만 한 거예요.”

인섭이 얼른 손을 내저었다.

“…이런 집에서 요리하는 분이 따로 있는데, 한 달에 뭐? 유욱십?”

김 대표가 이우연을 향해 흰 눈을 뜨며 비아냥거렸다.

모든 활동을 그만두고 이우연이 미국으로 간다고 밝혔을 때, 김 대표는 당연히 펄쩍 뛰었다. 지금 물린 계약만 몇 개인데, 그걸 어떻게 그만둘 거냐고 소리 질렀지만 이우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야! 이 미친 새끼야! 당장 겨울에 들어가야 하는 영화도 있어. 그거 촬영 삼 분의 일이나 끝난 작품이라고! 계약 위반으로 손배 걸리면 얼마인 줄 알아? 심지어 내가 회사 입장에서 당장 너한테 소송 걸 수도 있어!’

그 말은 들은 이우연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되물었다.

‘얼만데요?’

‘뭐?’

‘그래서 다 얼마냐고요. 위약금, 손해 배상 청구금, 전부.’

‘…미쳤어?’

이우연이 꼬고 있던 한쪽 다리를 바로 하고 똑바로 앉아 김 대표를 직시했다.

‘미친놈이 책임감도 있고 좋죠.’

결국 이우연은 모든 위약금과 배상금을 물어 주고 사라졌다.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소리를 내지르는 김 대표에게는 강원도의 별장과 도곡동의 주상 복합 아파트, 차 다섯 대를 넘겨주고.

간판 배우였던 이우연이 사라지니 회사가 이전 같지 않은 건 당연한 결과였다. 매일 계산기를 두드리며 장부를 들여다보는 김 대표의 유일한 희망은 미국으로 간 이우연의 고생스러운 삶이었다.

대체 돈도 없이 미국으로 가서 어쩔 거냐는 물음에 이우연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고생해야죠, 하고 대꾸했던 것이다. 한국에서 벌어들인 돈을 고스란히 토해 놓고 간 걸 알기에, 김 대표의 꿈은 몹시 구체적으로 펼쳐졌다. 쥐와 바퀴벌레가 창궐하는 끔찍한 아파트에서 구질구질하게 사는 이우연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받았다.

그런데 다짜고짜 이런 삶이라니….

김 대표는 이우연을 힐끔 노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이우연이 예의 그 그림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분했다. 이우연은 한국에서보다 수천 배는 행복한 낯짝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놈은 연예인 물이 빠지기는커녕 적당히 그을린 피부 때문에 한층 고급스러운 매력을 풍겼다. 캘리포니아 해변의 태양이 마치 그를 향해 비추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여기 계신 고용인분들은 우연 씨 친척분께서 원래 전부터 고용하셨던 분들이라 따로 비용은 드리지 않아요.”

이번에도 인섭이 차근차근 설명을 해 주었다.

“그 친척분은 대체 무슨 눈먼 돈이 있어서 그렇게 친절하시대?”

“글쎄요. 아주 예전에 금광을 발견하시려다가 실패하고 유전을 찾았다는 거 같기도 하고.”

이우연이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드세요. 식기 전에.”

따지고 싶은 말이 한가득했지만, 더 이상은 허기를 모른 척할 수 없기에 두 사람은 식사를 시작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차 실장이 인섭을 보며 물었다.

“잘 지냈습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닌 듯 인섭은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건강해 보였다. 두 사람 모두 해안가의 햇빛 때문에 전보다 피부가 그을린 채였지만, 신기하게도 이우연은 남자다워졌다면 인섭은 훨씬 어리게 느껴졌다. 반짝이는 커다란 눈과 주근깨 때문인지,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두 분도 잘 지내셨죠?”

인섭이 두 사람의 안부를 물었다.

“누구 덕분에 뒷수습하느라 고생 좀 했지.”

이우연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지만 김 대표는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고 말을 이었다.

“저 진상이 오죽 깽판을 치고 갔어야 말이지.”

“…상황이 많이 심각했나요.”

인섭의 표정이 급 어두워지자 이우연이 테이블 밑으로 김 대표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김 대표가 신음을 삼키며 얼굴을 찌푸렸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이우연은 세상에서 더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인섭을 보며 말했다.

“문제 될 거 하나도 없어요. 정리 말끔하게 끝내고 온 거니까.”

인섭이 그래도, 하고 말끝을 흐렸다.

미국으로 오기로 한 뒤 인섭은 이우연과 약속한 것이 있었다. 인터넷으로 이우연의 이름을 검색하지 말 것. 연예인으로서의 이우연과 자신을 구분해 달라는 의미였다.

이우연의 기사를 읽고 팬 카페의 글을 보는 게 인섭의 하루 일과였지만, 약속한 이후로는 단 한 번도 그의 이름을 검색해 본 적 없었다. 분명 시끄러울 거란 예상을 했음에도 김 대표에게서 깽판이란 단어를 듣는 순간 마음이 묵직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인섭 씨.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신경 쓸 만한 일은 없어요. 괜히 그런 문제로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스트레스 안 받습니다.”

인섭이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이우연은 그런 인섭을 보며 가만히 눈웃음 지었다.

김 대표와 차 실장은 테이블 아래로 소름이 돋은 팔을 동시에 문질렀다. 몇 번을 봐도 좀처럼 익숙해지기 힘든 모습이었다.

“아무튼 이우연 너 죽도록 고생하는 모습 좀 보려고 먼 길 온 건데,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김 대표가 진지하게 턱을 괸 채 말했다.

“고생 많아요, 대표님. 아시잖아요. 저 빈털터리인 거.”

전형적인 미국 남부의 부잣집 도련님 같은 자태로 이우연이 스테이크를 썰며 받아쳤다.

“그래? 그럼 그 먼 친척분께 돈 좀 달라고 해 보지 그래?”

“너무 먼 친척이라 죄송해서요.”

“너무 먼 친척인데 이런 집을 거의 공짜로 빌려주고, 고용인 월급까지 잘도 내주셨네.”

“집을 오래 비워 두는 걸 워낙 싫어하셔서요.”

“왜 싫어하시는데.”

김 대표는 끈덕지게 물고 늘어졌다. 이우연이 그에게 계약 불이행을 조건으로 건넨 금액은 부동산 가치를 고려하면 수십억가량이었다. 계산기를 두들겨 봤을 때, 계약 해지로 인한 회사의 타격에 비하면 수지 타산도 맞지 않는 데다 괘씸죄까지 더해져서 그것의 열 배는 더 받아 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나마 참아 준 이유가 이우연이 맨손으로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그 설정이었건만. 맨손이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제가 바보였다.

두고 보자, 이우연. 내가 빈손으로 돌아가나.

김 대표가 눈을 희번덕 뜨며 이우연을 노려보았다.

“글쎄요. 왜 그런지 나중에 뵈면 물어보죠.”

“빈집으로 두면 귀신이라도 나온대?”

차 실장의 실없는 농담에 인섭이 얼른 아닙니다, 하고 말을 끊었다.

“귀신 없어요. 그런 거 절대로 안 나와요.”

그답지 않게 매우 단호한 목소리였다. 귀신이 나와서는 안 된다고 자기 세뇌를 하는 수준이었다. 이우연의 눈에 긴 웃음이 걸렸다.

“음, 실장님 말씀도 일리 있네요.”

“일리 있나요?”

인섭이 기겁하며 이우연을 돌아보았다.

“저번에 밤에 혼자 복도를 걸어가는데 사람 소리를 들은 거 같아서요.”

“자, 잘못 들으셨겠죠.”

“그때 일 층에 아무도 없었는데?”

“티브이 소리 아니었을까요?”

이우연이 입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내저었다. 인섭이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눈을 떨구었다.

“인섭 씨 오늘 문 꼭 잠그고 주무세요. 혹시 누가 문 열어 달라고 하면 열어 주지 말고.”

“…네.”

그 문을 두드릴 귀신같은 놈이 누구일지 안 봐도 훤했다.

“인섭이 방은 2층이야?”

“네, 2층…. 아, 아니. 저는 잠시 놀러 온 겁니다.”

인섭이 당황해서 주절주절 설명을 이어 갔다.

“여기 사는 게 아니라 오늘 우연히 놀러 왔는데, 오해하지 않으셔도, 아니, 그러니까 오해가….”

말을 할수록 꼬여 갔다. 급기야 인섭은 손에 든 포크를 떨어트렸다. 그의 동공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불안하게 흔들렸다.

이우연은 침착하게 떨어진 포크를 줍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김 대표가 움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새 포크를 가져와 인섭에게 건넨 이우연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제가 인섭 씨한테 같이 지내 달라고 부탁했어요. 두 분도 아시다시피 제가 그때 상태가 많이 안 좋았잖아요. 제 상황 아는 사람 중에 이런 부탁할 사람이 인섭 씨밖에 없어서요.”

누가 들으면 홀랑 넘어가고도 남을 언변이었다. 하지만 제주도 욕실에 갇혀 밤새 그 끔찍한 사태를 라이브로 들은 두 사람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얘기였다.

“불면증 때문에 일부러 조용한 곳으로 고른 거예요. 날씨도 따뜻하고, 바다도 보이고.”

이우연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이 집에서 인섭 씨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인섭을 바라보는 시선에 애정이 가득하다. 그가 이곳을 고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집은 정확히 말하면 이우연의 취향도 아니고 본인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이 집의 모든 것은 인섭을 위한 것이었다.

“…도움이 돼서 다행입니다.”

인섭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인섭의 목덜미까지 붉어지는 모습을 이우연은 즐겁게 감상했다.

“그럼 불면증은 다 나았어?”

김 대표가 불퉁하게 물었다.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완전히 나은 건 아니라서 앞으로도 인섭 씨 도움이 필요할 거 같아요.”

이우연은 거짓말과 진실을 적당히 섞어 말하며 포크를 움직였다.

“그쪽은 뭐 별일 없었어요?”

이우연의 물음에 김 대표가 조심스럽게 채연서 얘기는 들었지? 하고 운을 뗀다.

“무슨 얘기요?”

이우연이 되물었다. 아예 관심을 꺼 버린 건지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너랑 그렇게 되고 나서 몇 달 뒤에, 이철환 피디 와이프가 채연서를 고소하고 둘은 이혼 소송 하고, 그 와중에 이철환이랑 채연서 결혼 발표하고 막장 막장 그런 개막장이 따로 없었지. 오죽하면 아침 드라마 피디가 앞으로는 좀 더 리얼한 막장에 힘쓰겠다는 말까지 했다더라. 너 그때 그렇게 빠져나온 게 차라리 다행이다 싶더라고.”

“아, 그래요?”

이우연이 남 일 얘기하듯 지루한 표정을 지었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완전 대박은 얼마 전에 터졌지.”

“무슨 일인데요.”

이우연이 호응해 주자 김 대표가 말도 마라, 하고 신나서 말문을 열었다.

“얼마 전에 마약 관련 대대적으로 단속해서 줄줄이 들어갔어. 내가 그랬잖아. 분위기 심상치 않았다고.”

“아이고, 진짜 그런 거 하면 인생 조지는 거 알면서 왜들 그러는지 몰라.”

차 실장도 한 소리 덧붙였다.

“많이 들어갔어요?”

이우연이 반듯하게 나이프를 움직이며 물었다.

“아마 대한민국 연예계 역사상 가장 많은 마약 사범이 탄생한 해였을걸. 이름 없는 애들까지 해서 한 서른 명쯤 넘어갔으니까.”

“저희 회사에는 없죠?”

인섭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엄. 당연하지. 내가 그런 거 관리는 또 잘하잖아.”

김 대표가 으쓱하며 대꾸했다. 실제로 그는 주기적으로 소속 연예인들을 모아 두고 마약 관련 교육을 하기도 했다. 물론 이우연은 그때마다 번번이 핑계를 대고 불참했지만.

“다행이네요.”

인섭이 진심으로 안도하며 숨을 내쉬었다.

“하하하. 좋은 소식 하나 더 있잖아. 그 서른 명 중에 강영모 새끼도 포함되어 있다는 거.”

“네? 강영모 씨요?”

인섭이 기겁하며 되물었다.

“그래. 심지어 단순 약물 투약도 아니고, 투약한 상황에서 난교 파티까지 했다는 거야. 완전 미친 거지.”

“…난교가 뭔가요?”

인섭이 조그만 목소리로 묻자 이우연이 옆에서 떼씹이요, 하고 속삭였다. 인섭이 귓가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얼굴을 붉혔다.

“저런, 조심 좀 하지. 잃을 것도 많은 사람이.”

이우연이 테이블 끝에 놓인 소스 통을 가져오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번 일로 마누라한테 이혼 소송까지 당해서 소속사에서 방출되고, 인생 말아먹었지, 뭐. 하하하. 아 참, 남의 불행을 이렇게 좋아하면 안 되는데.”

김 대표가 제 입을 툭툭 치는 시늉을 했다.

“그런데 어쩌다가 걸린 거래요? 그냥 계속 수사하다가 얻어걸렸나?”

차 실장의 물음에 김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좀 의외긴 해. 심지어 지들끼리 엄청 보안 유지 잘해 온 멤버라던데. 언뜻 검찰청 다니는 선배한테 들은 소문이긴 한데, 누가 익명으로 제보를 했다나 봐.”

“제보요? 그럼 내부 고발인가.”

“그건 모르지, 뭐. 아무튼 누가 USB에 관련 자료를 싹 다 정리해서 검찰한테 우편으로 보냈….”

거기까지 말한 김 대표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시선이 이우연에게 멈췄다. 차 실장도 최인섭도 마찬가지였다. 세 사람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이우연은 유유자적 샐러드를 휘저으며 음, 이거 맛있네요, 하고 웃는다.

“…너야?”

“뭐가요?”

이우연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자료 넘긴 거.”

“하하하.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유쾌한 웃음소리가 울렸지만 아무도 따라 웃지 않았다.

“사람은 역시 착하게 살아야 해요. 그렇죠?”

이우연이 인섭을 보며 물었지만, 인섭은 차마 그렇다는 대답은 하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전에 제가 이우연을 오해하게 된 계기를 설명하다가 강영모의 이름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이우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끝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런 결말이라니.

…왠지 마음이 무거웠다.

“와인 좀 드릴까요? 좋은 거 있는데.”

“…줘. 얼른.”

이우연이 자리에서 일어서 와인 잔과 와인을 가져와 돌렸다.

김 대표와 차 실장은 맛있는 와인을 마시면서도 오롯이 그 맛을 음미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한테 여기까지 오라고 한 이유는 뭐냐.”

김 대표가 칙칙한 얼굴로 물었다.

“왜긴요. 오랜만에 보고 싶어서 불렀죠.”

이우연이 활짝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구나.”

“하아….”

“…….”

테이블에 앉은 사람 중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시 식사가 재개되었다. 평화로운 저녁이었다.

“안 피곤하세요?”

이우연이 차가운 병맥주를 건네며 물었다. 난간에 기대어 바다를 내려다보던 김 대표가 맥주를 받아 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지금쯤 오지 않을까 싶었다. 할 말 있으면 빨리해.”

이우연이 저를 보고 싶어서 불렀다는 말은, 팥으로 메주를 쒀서 땅에 심었는데 금이 열렸다는 말보다 믿기 어려웠다.

“대표님은 역시 눈치가 빨라서 좋아요.”

이우연이 맥주를 한 모금 마신 후, 말을 이었다.

“부탁 좀 드리려고요.”

“싫어. 안 해.”

김 대표가 무슨 부탁인지 듣지도 않고 이우연의 청을 거절했다.

“너무하시네.”

“너무하신 건, 너지. 이 쌍놈의 개새끼야.”

“하하하.”

욕을 먹고도 이렇게 청량하게 웃는 사람은 맹세코 이우연 외에는 없을 거라고 김 대표는 자신할 수 있었다.

“저번에 사 둔 빌라 좀 정리해 주세요.”

김 대표가 거절을 하거나 말거나 이우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목적을 밝혔다.

“뭐? 그걸 왜?”

김 대표는 이우연이 그 집을 남겨 두고 간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우연에게 받은 돈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집은 모른 척 넘어가 주었다.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오면 거기서 지내겠지 하는 마음에서였다.

“정리할 필요가 있어서요.”

“싫어. 내가 니 비서야? 미쳤다고 그걸 대신 정리해 주고 있어. 우리가 그런 사이야?”

김 대표가 정색하며 이우연을 아래위로 훑었다.

“그럼 대표님은 왜 오셨어요?”

“뭐?”

“저 보고 싶어서 온 건 아니실 테고. 뭔가 목적이 있으니까 오셨을 텐데.”

이우연이 병맥주를 까닥까닥 흔들면서 그게 뭘까, 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정곡을 찔린 김 대표는 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좋은 대본이라도 들어왔어요?”

“…….”

눈치 빠른 쌍놈의 개새끼.

김 대표가 이를 부득 갈며 맥주를 들이켰다.

“읽어나 봐. 어차피 시간 많잖아.”

“많죠.”

이우연이 난간에 기대어 섰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흩트려 놓았다. 눈을 가볍게 접어 웃으며 머리를 쓸어 올리는 모습이 광고의 한 장면 같아 김 대표는 무심코 넋을 놓고 바라보고 말았다. 이우연에게는 순간적으로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힘이 있었다. 그건 아무리 숙련된 배우가 노력한다 해도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여기 전망 참 좋은 거 같지 않나요?”

“뭐? …어. 아주 좋네.”

갑작스러운 전망 얘기가 당황스러웠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김 대표는 얼결에 맞장구쳤다.

“여기서 바다 보는 걸 좋아해요. 특히 해 질 녘에. 같은 풍경인데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아요.”

이우연답지 않은 감성적인 발언에 김 대표는 저녁에 먹은 스테이크가 잘못된 것인가, 심각하게 고민했다.

“해변을 산책하는 것도 좋아하고, 수영을 하진 않지만 모래사장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하기도 해요. 비 오는 날엔 소파에 앉아서 몇 시간이고 빗소리를 들으면서 책을 읽고.”

눈앞에 그 광경이 펼쳐지는 듯했다. 이우연의 눈에 웃음기가 머문다. 그제야 김 대표는 지금까지 말한 모든 문장의 주어가 이우연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래서 당분간은 아무 데도 못 갈 것 같아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도 믿지 못할 변모였다. 천하의 망종이라 생각한 그 이우연이 이토록 지고지순한 연애라니.

“잘 생각해. 이 바닥 잊히는 거 한순간이야. 눈에 안 보이면 대중들의 관심은 생각보다 금세 식어.”

이우연이 그런가요, 하고 웃는다.

“이런 생활 유지하려면 돈도 많이 필요할 거 아니야.”

한국에 남은 마지막 집까지 처분해 달라는 말을 들으니, 어쩌면 정말 이우연이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인섭에게 쏟아부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섭이는 여기에 두고 너만 오가면서 가끔 작품 활동만 해도….”

“대표님.”

이우연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깔렸다.

“인섭 씨 이삼 주에 한 번, 부모님 댁으로 가서 하루 이틀씩 자고 와요.”

이곳에서 인섭의 집까지 차로 두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부러 인섭의 본가에서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 집을 구했다.

“그럼 그날부터 저는 한숨도 못 자고요.”

“…….”

“나 걔 없으면 정말 안 돼요, 이제.”

이우연이 씁쓸하게 자조했다.

김 대표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진실인지 알 수 없어 함부로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었다.

“…그래. 그건 네 뜻대로 해. 그런데 굳이 왜 나한테 집을 팔아 달라 해.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냐.”

투정하듯 말이 툭 튀어 나가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우연이 그렇게 일을 정리하고 하루아침에 미국으로 가 버린 게 김 대표는 못내 서운했던 터다.

“그럴 리가요. 대표님 만만하게 생각한 적 한 번도 없어요.”

그렇게 말하는 이우연의 목소리가 더할 나위 없이 다정했다. 김 대표는 심장 한편이 찌르르 울리는 것을 느꼈다.

그래 너도 사람이 변하긴 하는구나 싶어서. 사랑을 하면 좋은 사람이 된다더니….

“저 대표님한테 존나 빡쳐서 고생시키려고 부른 거예요.”

“그래, 빡… 뭐?”

“채연서 나한테 붙인 거 대표님 생각이었잖아요. 시발, 설마 잊으신 건 아니죠?”

“…….”

“이미지 좆같아진 건 그렇다 쳐도, 그것 때문에 최인섭 스트레스 받아서 쓰러지고, 나랑 헤어질 뻔한 건 절대로 그냥 못 넘기죠.”

이우연의 손에 들린 맥주병이 난간을 통통 가볍게 두드렸다. 김 대표는 흘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여차하면 바다에 떨어져도 살 수 있으려나.

“여기서 떨어지면 죽어요. 살아도 병신 될 텐데 살아서 뭐 해.”

이우연이 김 대표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렇게 말하고는 꽃같이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역시 사람이 그렇게 쉽게 변할 리가 없지.

김 대표는 남은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차가운 맥주를 아무리 들이켜도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두 분이 무슨 얘기 하시는 걸까요?”

인섭이 테라스에 선 김 대표와 이우연을 보며 눈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이우연이 하하 웃는 모습이 보였다.

“대표님이 욕하나 보다.”

차 실장의 가능성 높은 추측에 인섭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걱정 마. 욕먹는다고 신경 쓸 놈도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만.”

인섭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이우연이 당분간 미국에 가서 지내자는 말을 했을 때, 인섭은 길어 봤자 한 달가량을 예상했다. 채연서 때문에 터진 스캔들도 있고 하니 그 정도 휴식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우연은 제게 매인 모든 계약을 정리하고 미국행을 택했다. 나중에야 그 사실을 듣고 인섭은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많은 위약금을 물어 줬을 게 분명했다. 그러자 이우연은 그럼 앞으로 자신을 책임져 달라고 했다. 인섭은 당연히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인섭은 한국에서 알게 된 교수님의 도움으로 논문을 번역하는 일을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는 돈이었지만, 두 사람이 생활을 하는 데 부족함은 없었다.

“두 분 사이가 나빠지실 거 같아서 걱정입니다.”

“…좋은 적도 없었으니까, 그건 정말 걱정 안 해도 돼.”

차 실장이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인섭의 기우를 위로했다.

“저기, 혹시 내일 특별한 계획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니. 별다른 일은 없어. 왜?”

“이 근처라도 같이….”

인섭이 말을 마치기 전에 발밑에서 냐앙, 하는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차 실장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얘는 갑자기 어디서 나온 거야? 고양이 키워?”

“네.”

인섭이 웃으며 자신의 발치에 엉겨 붙은 고양이의 머리를 문질러 주었다.

“그런데 어디 숨어 있다가 지금 나왔어?”

“겁이 많아서요. 예전엔 안 그랬는데.”

사람만 보면 좋아서 배를 드러내던 존이 많이 소심해진 게, 그때 그 사건 때문인 것 같아 인섭은 늘 마음이 쓰였다. 윤아름의 가족들을 잘 따라서 그런 줄 몰랐는데 집으로 데려오고 나니 사람만 보면 숨기 바빴다. 특히 이우연이 옆에 있으면 아예 다가오려고도 하지 않았다.

“존, 인사드려. 실장님이셔.”

인섭이 고양이를 집어 올려 차 실장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귀여워!”

차 실장의 눈에 하트가 그려졌다. 동물을 좋아하는 그가 고양이를 끌어안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존이 캬앙 울며 팔짝 뛰어 몸을 틀었다.

“괜찮아, 존. 좋은 분이니까….”

발버둥 치던 고양이가 인섭의 손에서 벗어나서 테이블 위로 몸을 날렸다. 하필이면 꽃병이 놓인 방향이었다. 화병이 와장창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존!”

“안 돼!”

인섭과 차 실장이 동시에 손을 뻗어 고양이를 낚아챘다. 간발의 차로 차 실장에게 잡힌 고양이는 놀라서 꼬리가 크게 부풀어 있었다.

“하아, 다치는 줄 알았네.”

차 실장이 인섭에게 고양이를 넘겨주었다. 인섭이 고양이를 품에 안고 다독이기 시작했다.

“괜찮아, 존. 괜찮아.”

“이놈, 그러다 다치면…. 헉, 인섭 씨!”

차 실장이 놀라서 인섭의 발을 가리켰다. 인섭의 슬리퍼가 붉게 번져 있었다. 꽃병이 인섭의 발 옆으로 떨어지면서 유리 조각에 살갗이 찢어진 모양이었다. 밖에서 소란을 들은 두 사람도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뭐 깨졌어?”

“아, 그게….”

차 실장이 안절부절못하며 인섭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이우연이 성큼 걸어왔다.

“괜찮습니다. 많이 다친 거 아니니까….”

이우연이 말없이 인섭의 품에 안긴 고양이를 집어 들어 차 실장에 짐짝처럼 넘겼다. 그러고는 인섭을 번쩍 안아서 아일랜드 식탁에 앉힌 다음 슬리퍼를 벗겨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많이 다친 거 아니에요. 그냥 살짝 긁힌 겁니다.”

인섭이 열심히 설명해도 이우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피가 흐르는 발을 꼼꼼하게 살피더니 손을 내밀었다.

“수건 좀 갖다주세요.”

“수건? 알겠어.”

김 대표가 황급히 욕실로 달려가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이우연은 인섭의 발을 수건으로 감싼 후에 그를 안아 들었다.

“병원으로 가요.”

“아닙니다. 그냥 밴드만 붙여도 됩니다.”

이우연이 말없이 인섭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인섭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 갔다 올게요. 얼마나 걸리지 모르니까 두 분은 주무세요. 깨진 건 안 치우셔도 돼요.”

이우연이 차 키와 카드를 주머니에 넣고 이번에는 인섭에게 말했다.

“제 목 끌어안아요.”

“네? 저기….”

인섭이 두 사람을 보고 당혹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약속했잖아요.”

이우연의 단호한 말투에 인섭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숙인 채로 그의 목을 안았다. 이우연은 그대로 인섭을 안고 사라졌다.

남겨진 두 사람은 당황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대표님, 방금 이우연 표정 봤어요?”

“어.”

“성격 좀 죽은 줄 알았더니 여전하네요. 얀마. 너 방금 죽을 뻔했어.”

차 실장이 아직도 꼬리가 부푼 채로 바들바들 떠는 고양이의 등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나저나 쟤 술 마셨는데 운전해도 되는 거예요?”

“싹 깼을걸.”

김 대표가 본 건 인섭의 상처를 살피던 이우연이었다. 언뜻 냉정한 태도였지만, 다친 사람보다 더 창백한 얼굴을 하고 손을 떨고 있었다.

“정말 안 치워도 되려나?”

차 실장이 바닥에 떨어진 유리 조각을 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치워야지. 저 쪼그만 고양이 놈이 밟으면 어떡해.”

차 실장이 고양이를 저만치 내려놓고는 그렇죠?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남자는 쭈그려 앉아 유리 조각을 하나둘씩 주워 담기 시작했다.

밤이 늦도록 이우연은 돌아오지 않았다.

“안 되겠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김 대표가 외친 말에 차 실장은 짜증스러운 듯 몸을 반대편을 틀었다.

“현규야. 일어나 봐.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지금 이 시간에 혼잣말하는 대표님이 제일 이상해요.”

차 실장이 시트를 얼굴 끝까지 끌어다 덮었다. 방도 많은데 굳이 자신들에게 부부 침실을 내준 이우연이 진심으로 짜증 나는 순간이었다.

김 대표가 옆 침대에서 뛰어내려 차 실장의 시트를 내렸다.

“이우연이 나한테 청담동 빌라 팔아 달라고 했거든? 쓸 데가 있다고. 분명 뭔가 꾸미고 있는 거 같지? 꿍꿍이가 있을 거야.”

“돈이 없나 보죠.”

“이런 집에 살면서 돈이 왜 없어. 생각해 보니 아까 얼핏 보니 차고에 차도 세 대더만. 그것도 죄다 비싼 차로만.”

그 와중에 자세히도 봤다 싶어서 차 실장은 헛웃음을 삼켰다.

“올라가 보자.”

“뭘 올라가요.”

“이우연 방, 한번 뒤져 보자. 뭐라도 나오겠지.”

“혼자 잘 뒤지세요.”

중의적인 뜻을 담은 말이었다. 김 대표가 손바닥으로 차 실장의 등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아! 왜 때려요! 진짜!”

“일어나! 같이 뒤지러 가자.”

“…그 말 진짜 기분 나쁘게 들리는 거 아세요?”

“몰라. 혼자 뒤지긴 싫으니까, 빨리.”

차 실장은 투덜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홀랑 깨 버려서 다시 눕는다고 해도 당분간은 잠들지 못할 것이다.

“이우연 방이 어딘데요.”

“몰라, 2층이겠지. 인섭이 방이 2층이니까.”

그럴듯한 추론이었다. 두 사람은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방문을 하나씩 열어 확인했다. 이우연의 방을 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방인가요?”

“맞네. 살풍경하고 정나미 없이 단정한 게 딱 이우연 방이네. 얼른 뒤지자.”

김 대표가 스탠드 불을 켜고 책상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차 실장은 하품을 하며 그 옆에서 같이 서류철을 확인했다.

“이러다 이우연 오면 어쩌실 건데요.”

“화장실 찾다가 잘못 들어왔다고 둘러대지.”

“참 잘도 믿겠네요.”

“대체 그 집을 왜 팔지? 무슨 일이 있어서.”

“이제 한국 안 들어오려나 보죠.”

“그럴 리 없잖아!”

김 대표가 빽 소리를 내질렀다. 차 실장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입으로는 시발시발 욕을 해도 김 대표는 이우연이 회사를 떠난 걸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우연에게 미련이 잔뜩 남은 것이다. 심지어 요즘은 술만 마시면 이우연 같은 놈은 앞으로 다신 못 찾을 거라고 꺼이꺼이 울며 진상까지 부렸다.

“꿍꿍이가 있다니까. 얼른 뭐든 찾아봐. 놈의 약점이라도 잡아야지, 억울해서 이대로 못 가.”

“네, 네. 그럽시다.”

적당히 장단만 맞춰 주자 싶었다. 책상 서랍을 뒤지던 차 실장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대표님.”

“왜?”

“저기 이상한 게 있는데요.”

차 실장의 떨리는 손끝이 침대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커다란 흰색 곰 인형이 놓여 있었다.

“아니 시발! 저게 뭐야!”

김 대표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깜짝 놀라 욕설을 내뱉었다.

“여기 이우연 방 맞아요?”

“맞아. 아까 책상에서 이우연 앞으로 온 우편물도 확인했어.”

“…그런데 왜 저런 게 있죠?”

“몰라. 무서워. 가서 확인해 봐.”

김 대표가 차 실장의 등을 떠밀었다. 차 실장이 기겁하며 손을 내저었다.

“싫어요. 갑자기 눈깔 막 돌아가면서 말하면 어떡해.”

“사탄의 곰이냐. 기껏 곰 인형인데 뭐가 무서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김 대표도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

이우연의 침대에 놓인 곰 인형.

강제로 호러 영화 열 편을 연달아 본 듯한 느낌이었다.

“얼른, 얼른 가서 봐봐. 혹시 인형 배에 뭐 숨겨 놨을지도 모르잖아.”

김 대표가 연신 등을 떠밀자 차 실장은 하는 수 없이 주춤주춤 침대로 다가갔다.

“얼른.”

김 대표가 손을 올리며 부추겼다. 차 실장은 큰맘 먹고 곰 인형을 들어 올렸다. 가뿐하게 들리는 무게에 차 실장의 표정이 한결 풀렸다. 몇 번 더 흔들어 보고 이리저리 확인해 봤지만, 아무런 특이점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냥 인형인데요?”

“그럴 리가. 배 만져 봐.”

배를 주물러도 손에 닿는 건 솜의 말캉말캉한 감촉이었다.

“…이우연 그 새끼 혹시 이상한 약 하는 거 아닐까요?”

차 실장이 몹시 그럴듯한 추론을 내린 순간, 일 층에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차 실장은 인형을 들고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어쩌죠? 하고 물었다.

“내려놔. 내려놔.”

김 대표가 황급히 손을 내젓고는 스탠드 불을 껐다. 차 실장은 곰 인형을 괴물 보듯 던져 버렸다. 방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2층 복도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김 대표는 침대에 앉힌 곰 인형의 리본을 고쳐 주고 차 실장과 함께 욕실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이제 어떻게 해요?”

“쉿.”

김 대표가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 안으로 들어오는 기척이 들렸다.

“내려 주셔도 됩니다. 걸을 수 있어요.”

인섭이었다.

“당분간은 무리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의사 선생님 말 잊었어요?”

이우연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침대 스프링이 끼익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제 방으로 가겠습니다. 우연 씨도 주무셔야죠.”

“오늘은 내 방에서 같이 자요. 자다가 화장실 가고 싶으면 나 깨워야지.”

김 대표가 차 실장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러고는 내 말이 맞았지, 하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런 상황에 저러고 싶을까. 차 실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실장님하고 대표님도 계신데 괜한 오해 사면 어떡해요.”

“오해라고 할 게 뭐가 있나요. 진짜 사귀는 사이인데. 아니, 이참에 그냥 얘기하죠. 나는 전혀 상관없는데.”

“안 됩니다.”

인섭이 펄쩍 뛰었다. 안 봐도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훤했다.

“저같이 평범한 사람은 상관없지만, 이우연 씨는 안 돼요. 절대 말씀하지 마세요. 부탁드립니다.”

마지막 덧붙는 말은 살짝 울먹거리기까지 했다. 이우연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어요. 인섭 씨가 싫다면 말 안 해.”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

“…조심했어야 했는데 다쳐서요.”

“인섭 씨 탓 아니잖아요. 고양이가 그런 거지.”

“존이 잘못한 거 아닙니다! 걔도 놀라서 그런 겁니다. 갑자기 실장님이 존을 만지려고 하셔서….”

이우연이 아하, 실장님 탓이구나, 하고 되뇌었다. 쭈그려 앉은 차 실장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며 공중에 손을 내저었다.

“실장님 잘못 아니에요. 제 탓이에요. 존이 원래 사람 무서워하는 거 아는데, …자랑하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앞으로 더 주의할게요.”

“알겠어요. 대신 오늘은 여기서 주무세요.”

“네.”

김 대표와 차 실장의 얼굴에 망했다, 라는 글자가 스쳤다.

“잠옷 갖다줄게요.”

이우연의 말에 둘은 쾌재를 불렀다. 놈이 나가기만 하면 일단 인섭에게는 어떻게든 둘러대고 방을 탈출하면 그만이었다.

“저기, 우연 씨.”

인섭이 방을 나가려던 이우연을 다급하게 불러 세웠다. 잠시간의 불온한 정적이 흘렀다.

“…오늘 고마웠습니다. 죄송하고, 그리고….”

인섭의 다음 말이 바로 막혔다. 뒤이어 무슨 상황이 벌어지는지 알 수 있었다. 가쁜 호흡이 넘나드는 소리가 생생히 들렸다.

욕실 안에 두 남자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하아…, 안 돼요.”

“먼저 키스한 건 인섭 씨잖아.”

“그래도 오늘은….”

“괜찮아요. 두 사람 다 일 층에서 자고 있어서 어차피 들리지도 않으니까.”

아냐. 듣고 있어. 완전히 잘 들려. 제발 그만해.

차마 외치지 못하는 절규가 두 중년 남자의 가슴에 맺혔다.

“그래도… 읏.”

살갗을 빨아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인섭이 헐떡이며 몇 번 더 이우연을 제지하려 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우연 씨. 안 돼요.”

“넣지는 않을게요. 그냥 비비기만 할 테니까.”

미친놈아! 거짓말하지 마! 저 비비기만 할 테니까 레퍼토리를 제주도에서 이미 몇 번을 들어서 결말이 어떤지 우리가 알고 하늘이 알고 인섭이도 아는데!

“…정말이죠?”

인섭아아아!

김 대표가 주먹으로 제 가슴을 내리치는 시늉을 했다.

“내 허벅지 위에 올라와서 다리 벌리고 앉아요.”

쓸데없을 만큼 구체적인 지시였다. 금속 지퍼가 벌어지는 소리와 옷가지가 벗겨지는 소리, 그리고 가쁜 숨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인섭 씨, 고개 돌려 봐요. 키스하고 싶으니까.”

“…으, 응.”

질척질척 젖은 마찰음이 숨소리에 뒤엉켰다.

“씨발, 진짜. 좆같이 예뻐 갖고.”

이우연이 분노 어린 욕망을 삭이는지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키스… 해 주세요.”

인섭이 이우연에게 졸랐다.

“가끔 보면 인섭 씨, 나 미치게 만들려고 작정한 사람 같아요. 하아.”

“우연 씨…, 흐읏, 좋아… 해요.”

“그럼 다리 더 벌려 볼래요?”

차 실장이 우울한 얼굴로 휴지를 떼어 침으로 적신 다음 김 대표에 건넸다. 김 대표는 말없이 휴지를 꾹꾹 뭉쳐 제 귓구멍에 쑤셔 넣었다. 둘 다 귀를 틀어막았지만 틈으로 들려오는 소음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이우연의 난잡한 음담패설과 신음, 침대 프레임이 삐걱거리는 소리, 인섭의 울음소리까지.

제주도의 악몽이 고스란히 겹치는 밤이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좋아해요. 우연 씨, 너무….”

숨을 헐떡이며 울면서도 몇 번이고 제 마음을 고백하는 인섭이었다.

길고 긴, 밤이었다.

“좋은 아침.”

로브 차림에 신문을 들고 나타난 이우연이 맞은편에 앉으며 인사했다. 거무죽죽한 낯빛을 한 두 남자가 고개도 들지 않고 멈칫 손을 멈추었다.

“잘 못 주무셨어요? 어째 두 분 다 피곤해 보이시네요.”

“그거야 네가…!”

버럭 외치려는 김 대표의 허벅지를 차 실장이 슬쩍 찔렀다.

“아직 시차 적응이 덜 돼서.”

“그럼 좀 더 주무시지 않고.”

이우연은 고용인이 가져다주는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펼쳤다.

새벽에서야 김 대표와 차 실장은 둘이 잠든 틈을 타서 방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탈진한 그들은 각자 아무 말 없이 침대에 누웠지만,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눈만 감으면 이우연의 목소리가 삼 방향 서라운드로 들리는 것만 같았다.

“식사하셔야죠.”

“몰라. 배 안 고파.”

“나이도 있으신데 그렇게 식사 거르시면 뼈 삭아요.”

김 대표가 손바닥으로 마른 뺨을 문지르며 우연아, 하고 그를 불렀다.

“네. 대표님.”

“너 미국인이잖아. 방금 그 말도 그렇고 평소 그런 표현은…, 대체 어디서 배우는 거냐.”

“여기저기?”

이우연이 신문을 넘기며 말을 잇는다.

“저는 남들보다 언어 같은 건 습득이 빠른 편이라서요.”

“…그래. 너 잘났다.”

김 대표가 한숨을 내쉬며 커피를 마시는데 발치에서 냐옹, 하는 작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이구, 어제 좀 봤다고 오늘은 와서 인사해 주네?”

차 실장이 손을 뻗어 만져 주자 고양이가 갸르릉 소리를 내며 손에 엉켰다. 그 모습을 본 이우연이 슬쩍 웃음을 지었다.

“걔 나한테는 한 번도 안 오던데.”

“당연하지, 인마. 고양이도 다 상황 판단해서 행동해. 누구처럼 앞뒤 안 가리고 저 좋을 대로 하지는 않지. 하물며 고양이도 이런데.”

차 실장이 고양이를 들어 무릎에 올리고는 우쭈쭈, 해 주었다.

“똑똑하긴 한 거 같더라고요.”

이우연이 손가락으로 고양이를 툭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전에 그게 인섭 씨 방, 침대 아래에 있었는데 그날 거기서 밤새 떡 쳤거든요.”

메이드가 커피를 채워 주자 이우연이 우아하게 웃으며 영어로 고맙다고 인사했다.

좋겠다. 저 사람은 한국말 몰라서. 귀가 깨끗한 채로 살 수 있잖아.

김 대표는 무심코 메이드를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고 말았다.

“그날 이후로 저희 둘이 방에 들어가면 알아서 나가더라고요. 참 똑똑하죠.”

이우연이 신문을 반듯하게 접었다.

“하물며 고양이도 그런데. 두 분은 참, 학습 능력이 없으신 건지.”

이우연의 혼잣말에 김 대표의 눈에서 불이 번쩍였다.

“너, 너, 알고….”

“몰랐어요, 전혀.”

이우연의 긴 눈에 수심이 어렸다.

“어떻게 제가 전 회사 대표님이 남의 성교를 몰래 엿듣는 게 취미라는 사실을 알았겠어요. 당연히 몰랐죠.”

“너어….”

“새벽에 두 분 몰래 나가실 때 잠깐 깬 거예요. 하하, 그때 알았어요. 인섭 씨는 당연히 모르니까 아는 척하지 마세요.”

“아는 척하기도 싫어!”

차 실장이 정색하며 소리쳤다.

“제 약점이라도 찾으시려고 한 거 같은데, 뭐 찾으셨어요?”

“그래! 그 곰 인형은 뭐야. 네 거 맞아?”

말도 안 되는 트집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김 대표는 되는대로 내뱉었다. 조금이라도 이우연을 수치스럽게 만들고 싶었다.

“제가 엄청 아끼는 애장품인데 모르셨어요? 곰 피터.”

“…….”

“얼마나 부드러운지 몰라요. 그 위에 인섭 씨 엎어 놓고 섹스도 몇 번….”

“아아아아.”

차 실장이 질색하며 일어나 개수대로 달려가 손을 씻었다.

“…할 리가 없죠. 제 동심을 어떻게 보시고.”

동심 따윈 지녀 본 적 없는 주제에 이우연이 잘도 떠들었다. 어젯밤부터 시달린 두 남자의 정신이 금세 너덜너덜해지고 말았다.

“…내일 갈 거야.”

김 대표가 불쑥 중얼거렸다.

“네? 어딜 가요?”

“내일 한국으로 간다고. 차 실장 비행기 티켓 좀 끊어라.”

“편도 티켓만 끊어 오신 거예요? 대표님, 저 진짜 좋아하는구나.”

“닥쳐! 네놈 얼굴 하루만 더 보고 있다가는….”

상대가 욕을 하건 말건 느긋하게 웃던 이우연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두 사람의 시선도 당연히 뒤로 움직였다.

“안녕하세요.”

계단에서 내려오던 인섭이 황급히 멈추어 서서 인사했다.

“왜 내려왔어요. 더 자지 않고.”

“아침 먹으려고요.”

“부르지 그랬어요. 갖다줬을 텐데.”

“아닙니다. 다 같이 먹고 싶어서요.”

인섭이 해맑게 배시시 웃었다. 김 대표와 차 실장은 아아, 하고 마음속으로 탄식했다. 더러워졌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이우연이 계단으로 가서 인섭에게 손을 내밀었다.

“거, 걸을 수 있어요. 크게 다친 것도 아닙니다.”

“그러다 덧나면 어쩌려고요.”

이우연이 인섭의 반론은 듣지 않고 바로 그의 팔을 움켜쥐었다.

“조심해서 내려와요.”

그렇게 인섭을 식탁으로 데려온 후, 이우연은 갓 짠 주스를 손수 인섭에게 가져다주었다.

“감사합니다.”

인섭이 인사하자 이우연은 웃으며 살짝 고갯짓했다.

“…오늘 가면 안 돼요?”

차 실장이 김 대표에게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인섭이 오늘이요? 하고 물었다.

“두 분 내일 가신대요.”

이우연이 짧게 상황 설명을 마쳤다.

“내일이요? 왜요? 며칠 더 있다 가시는 거 아니었어요?”

인섭의 얼굴에 금세 실망감이 스쳤다.

“자리를 오래 비워 둘 수는 없으니까.”

김 대표의 설명에 인섭은 수긍하면서도 눈동자에 가득한 안타까움은 어쩌지 못했다.

“며칠 더 있다 가면 뭐 하려고요.”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전혀 웃지 않는 채로 이우연이 물었다.

“그냥 여기 근방 안내해 드리려고 했습니다. 좋은 곳도 많아서, 천천히 구경하시라고.”

그러고 보니 인섭이 그 비슷한 얘기를 하려다 만 기억이 났다. 차 실장은 얼른 그럼 오늘 가면 되지, 하고 인섭을 달랬다.

“그럴까요?”

“어디 어디 데려가려고?”

“저쪽에 해변도 좋고, 랍스터 요리가 훌륭한 레스토랑도 있습니다. 유명한 영화 촬영지도 있어요. 그리고 선셋 포인트도 알아 뒀고요. 거기 트럭에서 파는 핫도그랑 레모네이드가 맛있거든요.”

인섭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오랜만에 사람을 만난 거라 잔뜩 들뜬 게 눈에 보였다.

“두 분 다 피곤하실 거예요. 아직 시차 적응도 못 하신 거 같은데.”

“…아,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인섭이 바로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네?”

“인섭이가 계획한 거, 가자고. 나는 괜찮아.”

김 대표가 의기양양하게 외치며 이우연을 흘끔 쳐다보았다.

어디서 남의 시차 적응을 배려해 주는 척해, 싸가지 없는 새끼.

예상대로 이우연의 표정이 굳었다.

“그 다리를 해서 어딜 가려고요.”

이우연이 바로 말을 바꿨다.

“발바닥이 아니라 발목 부분이 찢어진 거라 걷는 데 큰 지장은 없…. 그냥 집에 있을게요.”

인섭이 이우연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주인의 심기를 알아챘는지 차 실장의 무릎에 있던 고양이가 인섭에게 훌쩍 건너가 열심히 손등을 핥아 주기 시작했다.

인섭이 말없이 고양이를 쓸어내렸다. 이우연이 낮게 한숨을 내쉬고는 알겠어요, 하고 고개를 들었다.

“대신 내가 하라는 대로 하셔야 합니다.”

이우연의 단호한 목소리에 인섭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흐아아암.”

김 대표가 찢어져라 입을 벌리고 하품했다.

“피곤하세요?”

인섭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김 대표가 아아니, 하고 팔을 뒤로 쭉 뻗었다. 으드득, 하는 소리를 들으며 차 실장이 혀를 내찼다.

“그래도 이우연 말대로 코스는 하나만 선택하길 잘했네. 계획대로 움직였으면 대표님 지금쯤 죽었어요.”

이우연은 오늘 인섭이 계획한 대로 움직이는 건 무리니 딱 하나만 선택하라고 했다. 김 대표와 차 실장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다가 인섭에게 결정을 내려 달라고 부탁했다.

인섭은 망설임 없이 선셋 포인트가 있는 전망대를 골랐다.

“낮잠 잤는데 왜 이렇게 졸리지?”

김 대표가 어깨를 돌리며 투덜거렸다.

“이제 연세 생각도 하셔야죠.”

“뭐어. 내 나이가 어때서. 어디 가면 그래도 아직 서른 후반으로는 보거든?”

“그건 대표님이 돈을 내기 때문이에요.”

차 실장의 신랄한 구박을 받으면서도 김 대표는 꿋꿋하게 본인의 동안설을 주장했다.

“인섭아. 네가 보기에 내가 몇 살로 보이냐?”

“삼십 대 중후반으로 보이세요.”

“으하하, 봐라. 요즘 에스테틱을 바꿨더니 피부가 살아났단 말이지.”

“좋댄다. 노친네, 나잇값도 못 하고.”

차 실장이 놀렸지만 김 대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때 지나가던 노부부가 다가와 인섭에게 뭔가를 물었다. 인섭이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자세히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노부부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사라지자 김 대표가 인섭을 멀뚱하게 바라보다가 입을 뗐다.

“이우연은 그렇다 치고 난 네가 외국인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종종 잊는단 말이지.”

인섭이 조금 수줍은 듯 배시시 웃었다.

“문득 든 생각인데 둘 다 모국어는 영어 아니야?”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영어로 대화를 안 해?”

전혀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질문에 인섭이 당황한 듯 눈을 껌뻑거렸다. 그때 핫도그와 레모네이드를 들고 나타난 이우연이 뭐가요, 하고 묻는다.

“둘이 말이야. 왜 한국말로 대화하냐고. 영어가 더 편한 거 아니야?”

“그렇긴 하죠.”

이우연이 트레이에서 레모네이드를 꺼내 인섭에게 건네주며 대답했다.

“둘이 영어로 말해 봐라. 재미있겠다.”

“별게 다 재미있으시네요.”

이우연이 인섭의 옆에 앉으며 피식 웃어넘겼다. 인섭은 빨대를 입에 머금고 한 모금 마시면서 이우연을 흘깃 쳐다보았다. 시선을 느낀 이우연이 비스듬히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영어로 대화하고 싶으면 해도 돼. 나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으니까.]

“아, 아닙니다. 괜찮아요. 저는 이게 더 편해서…. 아니, 영어가 더 편한데 이우연 씨하고는 한국말로 대화하는 게 더 편합니다. 처음부터 그래서…, 뭔가 다른 사람 같고.”

횡설수설 변명하듯 중얼거리는 인섭의 얼굴이 빨갛게 익어 있었다. 이우연의 눈이 가늘게 변하는 걸 보면서 차 실장은 왠지 나쁜 예감이 들었다. 어제 들은 그 대사가 영어로 바뀔지도 모른다는.

차 실장은 무심코 구체적인 예를 떠올리고는 진저리쳤다.

“와, 이거 대박 맛있다.”

핫도그를 한입 베어 문 김 대표가 눈을 크게 부릅떴다.

“현규야. 너도 먹어 봐라. 응? 얼른.”

김 대표의 호들갑에 차 실장이 다진 고기와 칠리소스가 잔뜩 든 핫도그를 한입 물었다. 그의 눈도 번쩍 뜨였다.

“뭐야. 왜 이렇게 맛있어. 대박인데.”

“이거 우리 회사 앞에 상표권 내고 가져와서 차려 달라고 해 볼까? 요즘 엔터테인먼트 앞에 차리는 커피숍이 그렇게 잘된다던데. 핫도그도 팔고 커피도 팔고.”

즉석에서 사업 구상을 마친 김 대표가 흐뭇하게 웃었다.

“저 그 커피숍 분점 하나만 내주세요.”

차 실장도 진지하게 숟가락을 얻었다.

인섭은 두 사람이 핫도그를 맛있게 먹어 주자 기분이 좋아져서 작게 웃으면서 눈을 내리깔았다.

“안 먹어요?”

이우연의 물음에 인섭이 얼른 핫도그를 집어 들었다. 조그만 입으로 한입 베어 물자 칠리소스가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인섭이 냅킨을 들기 전에 이우연이 손을 뻗어 닦아 주었다.

“매번 이렇게 흘리네요. 입이 작아서 그런가.”

“제, 제가 닦을게요.”

인섭이 당황해서 냅킨을 뺏으려고 했지만 이우연은 그러거나 말거나 인섭의 입가를 꼼꼼하게 닦아 주었다.

맞은편에 앉은 두 사람은 일찌감치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린 채 핫도그만 우적우적 씹었다.

“강우는 잘 지내나요?”

인섭의 물음에 차 실장이 반색하며 대답했다.

“걔 요즘 배낭여행 중이던데. 혹시 이 근처 오면 연락해 보라고 할까?”

“아니요.”

이우연이 웃으면서 단호하게 잘라 냈다. 인섭은 나중에 메일이나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며 레모네이드를 쪼르륵 마셨다.

간간이 심상한 대화가 이어졌다. 그러는 사이 해가 조금씩 기울었고, 도로에서 올라오던 열기가 선선한 해풍에 식어 갔다.

“해 지기 시작하네.”

김 대표가 바다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태평양의 푸른 바다에 금색 빛 조각이 너울거리기 시작했다.

“저쪽에 보이는 아치 모양 기둥 보이시죠? 그 안으로 해가 들어갔을 때, 소원 빌면 소원이 이뤄진대요.”

“응? 저기 말하는 거지?”

김 대표가 절벽 아래로 보이는 돌기둥을 가리켰다.

“네. 그것 때문에 여기에 사람들이 해 지는 거 보러 많이 와요. 오늘 날씨가 좋아서 정말 다행입니다. 잘 보이겠어요.”

순수한 소년 같은 발상이었다. 유명한 레스토랑이나 술집이 아닌 이곳을 택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최인섭다웠다.

“좋아. 그럼 나도 소원 빌어야지. 뭐 빌지?”

“조국 통일 비셔야죠.”

“그건 군대 있을 때나 비는 소원이고. 음, 음. 뭐가 좋으려나.”

김 대표가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인섭이 차 실장을 보며 실장님은요? 하고 물었다.

“로또 단독 일등.”

차 실장이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해 떨어진다, 떨어져. 핸드폰 줘 봐.”

김 대표가 차 실장의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찍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두 남자가 나란히 서서 소원을 빌기 시작했다.

인섭도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로또 단독 일등이라는 짧고 굵은 소원을 빈 후, 차 실장은 고개를 들었다. 김 대표는 옆에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연달아 소원을 빌고 있었다.

어이구, 저 욕심 많은 영감탱이.

차 실장은 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돌리다가 이우연을 보고 말았다. 정확히 인섭을 바라보는 이우연을.

인섭에게서 한 발 떨어진 거리에서 이우연은 인섭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부서진 노을이 그의 뺨에 닿아 홍조를 드리웠다. 해풍이 머리카락을 흩트려 놓는 순간에도 이우연은 인섭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간절히 바라 마지않는 하나의 소원을 기도하는 사람처럼, 내도록 그렇게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그런 눈을 하고 있었던 걸까.

“…….”

봐선 안 될 것을 본 기분이 들어 차 실장은 얼른 다시 소원을 비는 척 눈을 감았다.

사실, 이우연이 인섭을 따라 미국으로 갔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우연이 인섭을 특별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 터다.

이우연에게는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인 배려나 다정함이 부족했다. 아니,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분명 그게 인섭을 힘들게 할 거라 믿었다.

입원했을 때, 혼자 병실에 오도카니 앉아 있던 인섭의 모습이 좀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자신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갈 때마다 인섭의 눈에는 희망과 실망이 동시에 교차했다. 그가 누굴 기다리고 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우연 곁에서는 누구든 그렇게 외롭게 방치될 거라 여겼다.

그런데 지금은.

“바람이 차네요.”

혼자 서 있던 인섭의 뒤로 다가간 이우연이 챙겨 온 카디건을 인섭의 어깨에 덮어 준다. 그러고는 옷자락을 여며 주며 묻는다.

“무슨 소원 빌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다 건강하고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빌었습니다. 아, 실장님이랑 대표님도 포함입니다.”

인섭이 발긋해진 뺨을 문지르며 얼른 덧붙였다. 전보다 몇 배는 더 행복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이우연이 저도 포함인 거죠? 하고 굳이 묻는다.

“네, 당연히…. 이우연 씨도….”

인섭이 어물어물 눈을 돌렸다. 인섭의 긴 속눈썹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천천히 미소 짓는 이우연을 보는 순간, 차 실장은 생각했다.

그래도 이만하면 됐지 않나, 하고.

“이만 슬슬 돌아갈까요.”

“그래. 해가 근데 진짜 금방 떨어지네. 바람도 엄청 불고.”

김 대표가 손바닥으로 팔뚝을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우연이 손을 내밀었다. 인섭이 당혹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왜요. 약속한 거잖아.”

이우연은 오늘 외출에 두 가지 조건을 걸었다. 하나는 계획 중 한 곳만을 선택할 것, 다른 하나는 이동 시에 인섭이 무조건 제 부축을 받을 것.

“안 잡으면 어깨에 메고 갈게요.”

인섭이 황급히 이우연의 팔을 움켜쥐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보조를 맞춰 걸었다.

“야. 저 사진 찍어서 이우연 약점으로 잡으면 어떻게 될까.”

김 대표가 낮은 목소리로 속닥였다.

“어떻게 되긴요. 강영모 꼴 나는 거지.”

“뭐? 나는 마약 한 적 없는데?”

“그렇게 인생 종 친다는 뜻이에요. 이우연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렇게 만들 거예요. 장담해요. 그러니까 허튼수작하지 마세요.”

김 대표가 쳇, 하고 투덜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차 실장은 담배에 불을 붙여 길게 한 모금 빨아 당겼다.

“빨리 와!”

김 대표가 뒤를 보며 재촉했다.

“알겠어요, 알았어. 갑니다.”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오렌지빛 햇살이 바다에 녹아들어 때 이른 밤바다를 깨우고 있었다. 완벽하게 달콤한 바닐라 스카이였다.

“며칠 더 계시면 좋았을 텐데. 정말 아쉽습니다. 다음에 또 놀러 오세요.”

인섭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툭 터트릴 것 같은 눈을 하고 배웅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고스란히 진심이라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다.

“알겠어. 내가 대표님 카드 훔쳐서 또 놀러 올게.”

“그때는 공항으로 마중 나가겠습니다.”

짐을 차에 다 싣고 나자 이우연이 운전석에 앉는다.

“타세요. 비행기 기다려요.”

두 사람이 나란히 뒷좌석에 앉았다.

“그럼 인섭아. 건강하고, 다음에 다시 보자.”

“두 분 다 조심히 가세요.”

인섭의 다리 상태를 걱정한 이우연은 저만 공항에 가기로 결정했다.

“그래. 인섭 씨. 잘 있어. 연락하고, 한국에 오면….”

뒷말이 이어질 틈을 주지 않고 이우연은 차를 출발시켰다.

“야! 인사도 아직 다 안 했는데!”

차 실장이 뒤를 돌아보고 손을 흔들어 준 후, 이우연을 노려보았다.

“그만하세요. 언제부터 그렇게 애틋하셨다고.”

“우리 친해. 몰랐냐?”

이우연이 하하, 웃으면서 운전대를 돌렸다.

“옆에 보세요.”

해안 도로를 따라 절벽이 내려다보였다. 자칫 태평양 바다에서 용왕님을 만날 수도 있는 죽음의 코스였다.

“…운전 똑바로 해.”

“제가 뭐라 했나요? 해안 도로가 예쁘니까 구경하시라고 한 건데.”

이우연은 글러브 박스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끼며 가볍게 웃었다.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운 자태였지만, 두 사람에게는 그저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일 뿐이었다.

“얼마나 걸리냐.”

“올 때랑 비슷하죠. 삼십 분?”

차가 시원시원하게 뚫린 도로를 달렸다. 한참을 달리던 중에 김 대표가 불쑥 말을 걸었다.

“나 빌라 안 팔아 준다. 니가 알아서 정리해.”

“저 바쁜데.”

이우연이 룸미러로 김 대표를 흘끗 보며 웃는다.

“바쁘긴 얼어 죽을. 너 집에서 놈팡놈팡 인섭이랑 놀고 있는 거 누가 모를 줄 알아. 젊은 놈이 일도 안 하고 아주 잘하는 짓이야.”

“젊으면 무조건 일해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어요?”

“그럼 다 늙어서 일해? 일하는 데에도 나이가 있는 거야. 아무튼 빌라 정리 안 해 줄 테니까, 네 말대로 쭈욱 쪼들리고 살아.”

차 실장은 김 대표가 괜한 심통을 부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우연이 한국으로 언젠가는 와 주길 바라는 것이다.

“잘됐어. 돈 없으면 네놈이 어쩔 거야. 차 팔고 집 팔고, 결국에는 일해야지. 흥.”

우리 대표님은 어쩜 이렇게 유치하실까.

차 실장은 속으로 혀를 내 차며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그림 같은 해안 도로가 이어졌다. 흐드러지게 핀 흰 꽃이 부서진 파도처럼 절벽을 장식했다.

“여기 참 예쁘다.”

저도 모르게 불쑥 나온 차 실장의 말에 이우연이 그렇죠, 하고 맞장구쳤다.

“웬일이냐. 네가 그런 말도 다 할 줄 알고.”

흔한 날씨 얘기에도 공감하는 법이 없는 인간이었다. 이우연은 별다른 말 없이 웃으며 운전대를 돌렸다.

차는 삼십 분을 채 달리지 않고 공항에 도착했다.

“어디로 가? 저쪽 터미널인데.”

차 실장이 이우연이 차를 튼 반대 방향을 가리켰다.

“제대로 가고 있어요. 걱정 마세요.”

차 실장은 미리 찾아 둔 터미널 번호를 인터넷으로 한 번 더 확인하고, 눈가를 찌푸렸다.

“아니야. 저쪽으로 빠졌어야 해.”

이우연은 대답하지 않고 차를 주차시켰다. 짐을 내리면서 김 대표는 저 고집불통 때문에 한참 걸어야 한다고, 투덜거렸다.

“티케팅 한 종이나 줘. 여기서부터는 둘이 알아서 갈 테니까.”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려고 했을 때, 웬일인지 이우연이 제가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차 실장은 뭔가 미심쩍어했지만, 한 푼이라도 이우연 돈을 뜯어내고 싶다는 김 대표의 열망에 결국 이우연이 티켓을 예약했다.

“따라오시면 돼요.”

이우연이 앞서 걸었다. 두 사람은 캐리어를 끌고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터미널이 아닌 라운지로 들어섰을 때,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조금씩 고개를 들었다.

“이우연, 여기 아닌 거 같은데.”

“맞는데요?”

짐을 붙이는 사람도 줄을 선 사람도 없었다. 김 대표와 차 실장은 덜컥 불안감이 엄습했다.

“너 지금 우릴 어디에 팔아넘기려고!”

이우연이 진심으로 짜증 어린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판다고 팔려요?”

“…그래도 팔지 마.”

이우연 앞으로 항공사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이우연은 두 사람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저분 따라가시면 돼요.”

“어딜?”

“비행기 타셔야죠. 수속 다 밟아 뒀어요.”

김 대표가 주변을 한 번 더 둘러보더니 눈가를 좁혔다.

“항공사 이름이 뭔데?”

“글쎄요. 따로 있나? 그냥 전세 내서 사용하는 거라, 잘 모르겠는데. 알아봐 드려요?”

“…전세? 뭘 전세 내? 비행기?”

이우연이 고개를 까닥거리며 대답했다.

“저희 집에서 사용 가능한 비행기가 있어서 말해 뒀어요. 가실 때는 편하게 가셔야죠.”

그렇게 말하는 얼굴이 얼마나 재수 없고 부내 나 보이던지, 김 대표는 진심으로 배알이 뒤틀려 참을 수가 없었다.

“돈 없다며! 가난하다며! 그래서 집 팔아 달라며!”

이우연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쓸 데가 있어서 팔아 달라고 했지, 언제 제가 돈 없다고 했나요?”

“빈털터리라고 했잖아!”

이우연이 아하, 하고 가느스름하게 웃었다.

“설마요.”

김 대표가 뒷덜미를 움켜잡았다. 차 실장이 얼른 그의 목을 주물러 주며 사태를 수습했다.

“그럼 우린 저분만 따라가면 되는 거지?”

“네. 알아서 다 해 드릴 거예요.”

김 대표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캐리어를 밀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차 실장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그 뒤를 따랐다.

입국장 안으로 들어서려던 김 대표가 불쑥 치미는 울화에 야 이우연! 하고 그를 불렀다.

“왜요?”

귀찮아 죽겠지만 이우연은 산뜻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럼 왜 부른 거야. 돈도 그렇게 많은데, 빌라 정리가 왜 필요해. 정말 나 엿 먹이려고 불렀냐?”

아이고, 우리 대표님. 한동안 또 소주 마시고 밤마다 울겠네.

차 실장은 안타까움에 혀를 쯧쯧 내 찼다.

“겸사겸사. 엿도 먹이고 보고 싶기도 하고.”

이우연은 앞뒤가 안 맞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그래애? 나는 너 이마아아안큼도 안 보고 싶었거든?”

김 대표가 엄지와 검지를 사용해 아주 작은 틈을 만들어 보이고는 비아냥거렸다. 그 유치한 작태에 이우연이 허리를 숙여 가볍게 웃었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김 대표의 앞으로 걸어왔다.

“뭐, 뭐. 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고.”

저도 모르게 잔뜩 긴장한 김 대표가 말을 더듬었다. 이우연은 손을 뻗어 김 대표의 손가락 사이를 좁혔다.

“이 정도?”

“응?”

“저는 이 정도쯤 보고 싶었는데.”

손가락 사이가 맞닿아 있었다.

천하의 둘도 없는 쌍놈. 꼴 보기 싫다는 말을 참 고급스럽게도 하네. 차 실장은 속으로 욕을 집어 삼키며 김 대표의 팔을 끌었다.

“갑시다. 대표님.”

“어, 으, 응.”

“잘 있어라.”

이우연이 손을 흔들었다. 자동 게이트로 들어서면서 김 대표가 있잖아, 하고 말문을 열었다.

“빌라 얼마면 팔릴까.”

“네?”

차 실장은 제 귀를 의심했다.

“쓸 데가 있겠지. 그러니까 팔아 달라고 하는 거잖아. 돈도 많은데. 안 그래?”

“…….”

아아, 김학승. 너랑 인간은….

“한국에서 믿을 만한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거 아니겠어? 하하, 짜식. 그래도 보고 싶다는 말도 할 줄 알고. 이우연이 많이 변했네. 사람 됐어.”

“…무슨 말씀이세요. 손가락 닿았어요.”

“아니거든? 이만큼은 떨어져 있었거든?”

김 대표가 현미경을 대고 들여다본다 해도 그 틈을 확인하기 힘든 만큼 손가락을 벌려 보이면서 우겨 댔다.

이우연은 회사의 간판스타였다. JN엔터테인먼트의 또 다른 이름은 이우연네 회사였다. 그를 동경해 더 좋은 조건을 걷어차고 JN으로 오는 배우까지 생길 정도였다. 이우연이 사라지고 나자 회사 상황이 나빠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김 대표가 이우연에게 집착하는 이유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좋은 조건으로 천천히 정리해 주고, 저번에 김 작가에게 받아 둔 대본이나 보내 줘야지. 후후.”

혼자 통통한 꿈을 꾸고 있는 남자를 보며 차 실장은 쓴웃음을 삼켰다.

“아무리 늦어도 올겨울에는 들어오겠지? 인기 밥 안 먹어 본 놈은 있어도 한 번 먹은 놈은 없으니까 말이야.”

가끔 드는 생각이지만 김 대표만큼 이우연을 믿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당하고도 재계약을 했겠지만.

올해는커녕, 인섭이 원하지 않는다면 그 바다가 보이는 집에서 영영 나오지 않을 거란 사실을 언제쯤 받아들이려나.

“글쎄요. 언제쯤 오려나.”

차 실장은 적당히 맞장구쳤다.

“내가 집을 빨리 정리해 주면 좀 더 빨리 오려나. 그럼 그냥 내가 집을 사 버릴까?”

“그 돈 차라리 저 주시는 건?”

“내가 호구냐?”

“…….”

“꼬드길 방법이 없을까? 그 새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야 말이지.”

차 실장은 이우연을 공략하기보다 최인섭을 공략하는 편이 빠를 거란 얘기를 하려다가 관뒀다.

어제 해가 지는 바다 앞에서 선 두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당분간은 거기에 둬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 거야. 온다. 반드시 온다아!”

김 대표가 어깨를 뒤로 젖히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새 흰머리가 늘어 희끗해진 뒤통수를 보자 차 실장은 마음이 시큰해졌다.

그래요, 대표님. 그동안 많이 힘드셨을 텐데, 잠시라도 달콤한 꿈 꾸셔야죠.

차 실장은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돌렸다. 닫힌 게이트가 눈에 들어왔다.

이우연이 달리고 있을 아름다운 해안 도로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그래. 이만하면 됐다.

차 실장은 콧노래를 부르며 캐리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내딛는 걸음이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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