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8 (9/13)

‘저거 이우연 아니야?’

‘설마. 이우연이 이런 데 혼자 있겠어?’

‘누구든 너무 잘생겼다. 여자 친구 기다리는 건가.’

주변의 숙덕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입국 게이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비행기가 지연되는지 도착 예상 시간이 계속 미뤄지고 있었다.

얼마 만이더라.

미국으로 인섭을 보러 갔다 온 이후로, 다시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간 전화 통화만 간간이 이어졌다. 인섭이 마음을 바꾸고 오지 않겠다고 하는 건 아닌가 싶어 초조해하던 차에 한국으로 들어오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날로 바로 비행기 티켓을 끊어 보냈다.

미국에서 인섭은 안온하고 다정한 가족들 사이에서 제가 가진 행복을 누렸다. 그걸 뒤로하게 만든 게 자신의 이기심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도저히 포기가 되지 않았다.

게이트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짐을 밀고 나오는 인섭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약간 겁을 먹은 듯이 커다란 눈을 하고 주변을 둘러보는 모습에, 배 아랫부분이 저릿했다. 소리를 내서 부를까 하다가 관뒀다. 저를 찾는 인섭의 모습이 이상하게 마음에 든 것이다.

‘……!’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긴 했지만, 인섭은 단번에 이쪽을 알아본 듯이 눈이 커진다.

‘인….’

이름을 부르려다 그대로 멈추었다. 인섭이 활짝 웃었다. 하얀 얼굴에 천진한 웃음이 번졌다.

저벅저벅 걸어가서 인섭의 손에 들린 짐을 빼앗다시피 낚아채고 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어….’

인섭의 당황이 느껴졌지만 그대로 차를 세워 둔 곳까지 갔다. 빠른 걸음이 나중에는 거의 뜀박질로 바뀌었다. 짐을 트렁크에 대충 쑤셔 박고 인섭을 조수석에 태웠다. 운전석에 오르자마자 인섭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입을 맞추었다. 그제야 살 것 같았다. 당황한 듯 굳어 있던 인섭이 조그만 입술을 벌려 키스에 응했다. 젖은 입 속을 정신없이 핥고 빨았다. 부드러운 입술을 비비며 새어 나오는 숨을 만끽했다.

좋아.

인섭이 숨을 할딱이며 제 팔을 붙들었다. 매달려 오는 그 미약한 무게에 머리가 돌아 버릴 것만 같았다.

좋아, 좋아 너무, 계속…. 네가, 좋아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인지하지 못할 만큼, 달큼한 순간이 이어졌다.

입에서 피 맛이 올라왔다. 쉴 새 없이 빨아 대 부르튼 인섭의 입술의 작게 갈라진 틈에서 피가 배어났다. 그제야 입술을 뗐다.

눈이 마주쳤다. 상기된 뺨과 흐트러진 머리카락, 부르튼 입술, 당황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커다란 눈.

얼빠진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지독히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어서 와요.’

그렇게 말하며 인섭의 등을 끌어안았다. 작고 따뜻한 몸을 끌어안고 그 온전한 존재를 누렸다.

숱한 악몽 속에서 인섭을 몇 번이나 잃었다. 이제 겨우, 다시 찾은 것이다.

‘인섭 씨.’

‘네.’

인섭이 담담하게 부름에 응해 온다.

전보다 살짝 살이 오른 뺨이 앳된 생명력으로 가득하다. 기꺼이 고개를 숙여 인섭의 뺨과 귓불, 눈꺼풀,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인섭의 가슴에 기대자 규칙적인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렸다. 절대로, 다시는, 잃지 않을 것이다. 몇 번이고 다짐하며 눈을 감았다.

그날의 악몽이 다시금 떠오른다.

서늘해지던 몸, 생명력을 잃어 가던 눈, 아무리 손으로 막으려고 해도 흘러나오던 피가…. 

“우연 씨….”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언뜻 눈가를 찌푸렸다.

“우연 씨, 우연 씨.”

누군가 어깨를 흔들었다. 눈을 뜨자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 작달막한 얼굴이 보였다.

“괜찮으세요?”

왜 그렇게 묻는지 연유를 알 수 없어 한참 동안 상대를 바라보았다.

“안 좋은 꿈을 꾸시는 거 같아서…. 괜히 깨운 거면 죄송합니다.”

대답 대신 손을 뻗어 인섭의 몸을 당겼다. 한 품에 들어오는 몸에 코를 묻고 한껏 숨을 들이켰다.

“…악몽 꾸셨어요?”

“모르겠어요.”

작은 창문, 비좁은 침대, 책이 빼곡하게 꽂힌 책상이 이곳이 어디인지 일깨웠다. 인섭의 자취방이다. 그제야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인섭이 엉거주춤하게 이우연의 등에 팔을 둘러 도닥도닥 두드리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예요?”

이제는 잠기운이 완전히 가신 눈을 구부리고 웃으며 이우연이 물었다.

“제가 악몽 꿀 때마다, 어머니가 이렇게 해 주셨는데. …저는 좋았거든요.”

하지 말까요? 인섭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이우연은 인섭의 허리를 끌어안고 어린아이처럼 매달렸다. 인섭이 다시 조심스럽게 등을 도닥였다.

장마철의 눅눅한 습기처럼 폐에 들러붙어 있던 불안이 잦아들었다. 비좁은 침대 위에서 이우연은 인섭의 허리를 빈틈없이 끌어안았다. 잠옷 사이로 인섭의 살냄새가 느껴졌다. 인섭은 늘 좋은 냄새가 났다. 샴푸나 비누 같은 인공적인 냄새가 아닌 본인의 몸에서 느껴지는 향이었다.

그 냄새를 맡고 있으면 왠지 모를 허기를 느꼈다.

“…아!”

잠옷 사이로 손을 집어넣자 인섭이 몸을 퍼뜩 세웠다.

“저기, 손이….”

척추를 따라 등을 쓸어 올렸다. 부드러운 살갗이 손에 감기듯 쓸린다.

“우연 씨, 손 좀….”

“넣어 달라고요?”

이우연이 엉뚱한 대답을 하며 인섭의 헐렁한 잠옷 바지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말캉한 살덩이가 만져졌다.

“아, 잠깐…, 읏.”

잠들기 전에 몇 번이나 손으로 훑어 줬던 탓에 한껏 예민해진 살덩이가 금세 부풀어 올랐다. 이우연은 인섭의 잠옷 바지를 그대로 끌어 내렸다. 인섭이 다리를 오므린 채 몸을 옹송그렸다.

“다리 좀 벌려 주세요.”

이우연이 인섭의 등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인섭이 고개를 내저었다. 섹스를 그렇게나 많이 했는데 인섭은 매번 처음 섹스를 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가련하기도 해서, 가학심을 불러일으켰다.

“인섭 씨 예쁜 자지 보고 싶어서 그래요.”

인섭의 무릎에 입을 맞추며 버릇없는 아이처럼 졸랐다. 인섭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다리를 벌려 준다.

시발.

욕을 삼키며 이우연은 굶주린 개처럼 달려들었다. 손끝 하나 대지 않았는데 단단하게 성난 살덩이를 인섭의 아랫도리에 문지르며 감각에 몰두했다. 인섭이 이우연의 팔을 붙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간청했다.

“저녁에 너무 해서 아래가, 부어서….”

“알아요.”

열흘간 이어지는 스케줄이 끝나자마자 인섭의 집으로 찾아왔다.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신발을 벗기도 전에 바지부터 내렸다. 선 채로 두 번이나 사정한 다음, 침대로 데려가 두 시간 넘게 인섭에게 박아 넣었다.

손을 뻗어 인섭의 아래를 더듬었다. 열감이 느껴지는 구멍에 손끝이 닿자 움찔하고 오므라지는 게 좆같이 사랑스러웠다.

“안 넣을게.”

구멍을 손으로 문지르며 인섭을 살살 달랬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인섭은 이우연에게 매달리다시피 안겼다.

이우연은 한 손으로 인섭의 뒷머리를 받쳐 제게 기대게 한 다음, 연신 구멍을 더듬었다.

“…넣지 마세요.”

“응.”

이우연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인섭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입 안에서 살을 씹다가 이를 세워 혀를 굴리자 금세 울혈이 생겼다.

“…자국….”

“괜찮아요. 금방 지워져.”

인섭은 살성이 약했다. 멍이 들거나 상처가 생기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이우연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우연은 반대편 목덜미를 덥석 물었다. 조금만 힘을 주어 빨자 울혈 자국과 함께 잇자국이 새겨진다.

“우연 씨….”

인섭이 미약한 힘으로 이우연의 팔을 붙들었다.

인섭이 제 이름을 불러 주는 게 좋았다. 본인은 아는지 모르겠지만, 인섭은 제 이름을 부를 때마다 조금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이 못내 사랑스러워서, 이우연은 인섭이 저를 부른 소리를 들어 놓고도 일부러 못 들은 척하곤 했다.

“우연 씨….”

이우연이 못 들은 척 인섭의 어깻죽지를 쭉쭉 빨자 이번엔 조금 더 큰소리로 이름을 부른다.

“응.”

이우연이 대답했다.

“…그런 데는 보입니다.”

“그럼 안 보이는 데는 해도 돼요?”

인섭이 생각하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우연은 웃으며 인섭의 옷자락을 젖혔다. 아까 성교 도중 찍어 둔 자국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이우연은 거리낌 없이 인섭의 젖꼭지를 빨았다.

“아! 자, 잠깐. 거긴….”

“다른 데 남겨도 된다면서요. 여기는 안 보이는데. 설마 여기 남한테 보여 주고 다닐 건 아니죠?”

발긋하게 솟은 돌기를 잇새에 넣고 혀로 굴렸다. 인섭은 그때마다 끙끙대며 몸을 뒤챘다. 체온이 높은 몸에 금세 땀이 뱄다. 체향이 짙어졌다. 이우연은 인섭을 뒤에서 끌어안고 허리를 바싹 붙였다.

“안 할게요.”

낮게 속삭이고 인섭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단단한 성기를 엉덩이 사이에 넣고 허리 짓을 하자 인섭의 등이 잘게 떨렸다. 뒤통수에, 귓불에, 어깨에, 뺨에, 정신없이 입을 맞추었다.

인섭의 호흡이 흐트러지고 살갗이 점점 붉게 물들어 간다. 성기 끝에서 흘러내린 쿠퍼액이 구멍을 적셔 살덩이를 비빌 때마다 질척이는 소리가 울렸다.

이우연은 인섭의 어깨를 뒤에서 꽉 끌어안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인섭 씨, 인섭 씨, 좋아해요, 인섭 씨, 너무….

앓는 소리처럼 이어지는 고백에 시트를 움켜쥔 인섭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아슬아슬하게 벌어졌다가 오므라지는 틈새로 남자의 성기가 구애하듯 슬근슬근 닿았다 떨어졌다.

“…괜찮아요.”

기어들어 가는 듯한 인섭의 목소리에 이우연이 네? 하고 되물었다.

“넣으셔도…, 아!”

뒷말까지 기다리지 않고 이우연은 인섭의 둔덕 살을 움켜쥐고 제 성기를 박아 넣었다. 살짝 열감이 느껴지는 점막에 아랫도리가 삼켜지는 느낌에 이우연은 입술을 사리물었다. 이우연의 단정한 얼굴이 성욕으로 흐트러졌다. 호흡을 가다듬고 있자 인섭이 조금 겁먹은 듯한 눈을 하고 뒤를 돌아본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이우연은 확인한다.

한 번도 남을 해쳐 본 적 없는, 해치지 못할 인섭의 무해함을.

팔에 힘을 주고 허리를 강하게 밀어 올렸다.

“읏.”

인섭이 그대로 무너지듯 침대에 눕는다. 이우연은 발정 난 개처럼 달려들어 인섭에게 제 성기를 쑤셔 넣었다. 인섭이 헐떡이면서도 제 움직임에 맞춰 주려고 애썼다. 사랑스러웠다. 뭐든 해 주고 싶었다. 어떻게든 최인섭에게 속하고 싶었다.

“인섭 씨, 인섭 씨….”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인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우연은 인섭의 몸을 돌려 다리를 벌리게 했다. 아랫도리를 깊게 맞물리게 한 후, 열과 흥분으로 붉게 달아오른 인섭의 뺨에 허겁지겁 입을 맞추었다.

인섭이 이우연의 부름에 응하듯 팔을 뻗어 목을 감싸 안았다. 이우연은 미친놈처럼 허리 짓을 했다. 단단하게 성이 난 좆을 인섭의 몸에 쑤셔 넣을 때마다, 잔인한 욕구가 들끓었다.

어릴 때 읽은 연쇄 살인자를 분석한 책 중 기억에 남는 구절이 있었다. 살인자 중 제법 많은 수가 살인은 저지르는 행위에 성적 흥분을 느낀다는 부분이었다. 그중 칼을 쓰는 부류는 상대에게 칼을 찔러 넣을 때마다, 성기를 삽입하는 듯한 착각을 느낀다고 했다.

과연 이게 정상적인 감각일까.

눈앞이 흐려질 만큼 아찔한 욕구에 목구멍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숨이 막혔다. 혼란스러웠다. 나중에는 제가 인섭의 안에 박아 넣는 게 무엇인지 구분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인섭 씨…, 인섭 씨.”

눈물이 고인 커다란 눈이 몇 번이고 부름에 답했다. 그렇게 확인받고 나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이우연은 길게 사정했다.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은 후에야, 축 늘어진 인섭의 몸을 추슬러 끌어안았다.

“인섭 씨.”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인섭 씨. 괜찮아요?”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지만 인섭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우연은 인섭의 몸을 뒤집어 바로 눕혔다.

“정신 차려 봐요.”

인섭은 가끔 성교 도중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혼절하곤 했다. 이우연은 인섭의 뺨을 손등으로 톡톡 두드리며 인섭을 불렀다. 그때 배 부근에서 미지근한 느낌이 퍼졌다.

“……?”

손을 뻗어 확인한 순간, 이우연은 숨을 멈추었다. 시트가 흠뻑 젖어 있었다. 온통 피였다.

“인섭 씨!”

이우연이 인섭을 불렀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과 어느새 차갑게 식은 몸뚱이가 사태의 심각성을 일깨웠다.

“갑자기, 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우연은 시트로 인섭의 몸을 감싸 주고 다급하게 119에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탁, 눈앞에서 문이 닫혔다.

“보호자는 밖에서 기다리셔야 합니다.”

수술실 문이 닫혔다. 이우연은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봐야 했다. 대체 무슨 일인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인섭이 흘린 피로 흥건했다.

‘사랑합니다.’

인섭이 그렇게 말했을 때, 자신은 뭐라고 대답했더라.

‘유사 감정이라도, …괜찮습니다.’

이우연은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밀려드는 수치심과 자괴감에 숨이 막혔다.

제가 가진 마음이 인섭의 것과 같은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자신의 감정은 늘 탁하게 흐려진 채였다. 상대를 향한 연정에서조차 더러운 찌꺼기를 걸러 낼 수 없었다.

그런데 감히, 이걸 네가 가진 감정과 유사하다고 해도 되는 걸까.

“최인섭 씨 보호자분.”

이우연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트를 든 의사가 피곤한 얼굴로 설명을 시작했다.

“환자 히스토리는 다 확인하고, 검사를 해 봤는데 아직까지 큰 문제는 없습니다. 지금 상태를 좀 지켜보다가 일반 병실로 옮기면 될 거 같네요.”

“피를 그렇게 많이 흘렸는데 괜찮습니까?”

이우연의 물음에 의사가 별스러운 얘기를 들었다는 듯이 눈을 치떴다.

“피라니요?”

이우연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피에 젖은 수건이 묵직하게 늘어진 채였다.

“손 다치셨어요? 응급실 가서 치료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의사의 물음에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수건을 풀어냈다. 붉은 선혈이 뚝뚝 흘러내렸다.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머리가 찢어질 듯이 아팠다. 속이 좋지 않았다. 목구멍에 칼이 박힌 것처럼 뜨거워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 순간.

“…괜찮으세요?”

고개를 들자 인섭의 커다란 눈과 마주친다. 조심스럽게 저를 살피는 상냥함에 온몸의 신경이 짓눌린 것처럼 저려 온다.

매번 너는 나를 어리고 약한 것처럼 대했다. 이런 순간에조차, 너에게 매달리고 싶게끔.

“…나는 괜찮아요.”

그렇게 대답하자 인섭의 눈이 감긴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괜찮다. 괜찮을 것이다.

의사도 큰 문제는 아니라고 했다. 어쩌다 한 번 있는 발작일 뿐이다. 할 수 있는 모든 검사를 다 하고 치료를 받으면….

깊숙한 곳에 억지로 쑤셔 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기억이 살아난다. 칼에 찔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인섭은 구급차 안에서 심장이 두 번이나 멈추었다. 제세동기를 사용할 때마다 그 가느다란 몸이 펄떡이며 경련했다. 제가 보는 앞에서 인섭은 두 번이나 죽었던 것이다.

통제를 잃은 손이 벌벌 떨렸다.

무서웠다. 이대로 인섭을 잃을 것 같아서, 인섭이 없는 그 시간을 다시는 버텨 낼 자신이 없어서 너무도 두려웠다.

…나는 전혀 괜찮지 않아요.

차마 내뱉지 못할 말을 삼키며 피에 젖은 두 손을 마주 잡았다.

툭, 툭, 툭.

차가운 감촉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들어 위를 확인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인섭이 새로 이사한 집 앞이다.

“…….”

이우연은 그제야 제가 환자복을 입고 있음을 알아챘다. 언제부터 비를 맞은 것인지 환자복이 흠뻑 젖어 있다. 이우연은 멍하니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텅 비어 있는 손이다.

현실이다.

눈을 감으면 꿈을 꾸었다. 아니, 과거의 기억이었다. 어김없이 그 속에서 매번 인섭을 잃었고 자신의 손은 피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나중에는 현실과 꿈이 뒤엉켜 손을 확인해야만 제가 어디에 발을 딛고 서 있는지 알 수 있었다.

“…….”

언제 여기까지 온 거지.

고민하는 사이 속눈썹에 엉킨 빗물이 툭, 떨어졌다.

그리고 제가 여기 서 있는 이유를 깨닫고야 만다.

이제는 현실과 꿈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주제에, 제가 가진 감정에 감히 사랑이란 이름을 붙여도 되는지 모르는 주제에, 제가 괴물인지 사람인지 구분도 못 하는 주제에….

보고 싶어.

최인섭이, 자신 같은 것에게도 몇 번이나 좋아한다고 말해 주던 그가, 생명력으로 가득한 그의 눈이, 하얀 얼굴에 퍼지던 그 웃음이, 네가….

너한테만큼은 버림받고 싶지 않아서.

불쑥 치밀어 오르는 선연한 감정에 숨을 삼켰다.

이우연은 현관문 앞으로 다가갔다.

비가 쏟아졌다.

***

탕탕탕.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인섭은 몸을 일으켰다. 방의 불을 켤 새도 없이 달려가는 바람에 박스에 발끝을 부딪쳤지만 인섭은 그대로 달려가 현관문을 열었다.

“……!”

갑작스럽게 열린 문에 문을 두드리던 남자가 놀라서 어깨를 흠칫 젖혔다.

“…대표님. 아… 안녕하세요.”

인섭이 어색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초인종 고장 난 거 같은데.”

“…네. 그런 거 같습니다.”

“뭐 하고 있었어?”

“잠깐, 그냥…, 바로 짐 싸겠습니다.”

당황한 인섭이 횡설수설하며 몸을 돌렸다. 김 대표가 인섭의 팔을 붙들었다. 순간, 김 대표는 적잖이 놀랐다.

“거의 다 쌌습니다. 조금 정리만 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인섭은 변명했다. 김 대표는 붙들고 있는 인섭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원래도 마른 체형이었지만, 며칠 사이에 놀랄 만큼 인섭은 살이 빠져 있었다.

“미국으로 갈 준비 다 해 뒀습니다. 꼭 갈 거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잔뜩 주눅 든 인섭의 눈을 마주한 순간, 김 대표는 차 실장이 제게 한 말이 떠올랐다.

‘대표님은 결정적인 순간에 이우연 편이지. 계산기 두드려야 하는 입장이라 그럴 수밖에 없는 거 알지만, 그래도 인섭이 너무 미워하지 마. 걔가 잘못한 게 뭐가 있어.’

인섭이 잘못한 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무의식중에 인섭에게 선을 그어 행동한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인섭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중에도 이우연이 요구했을 때를 제외하곤, 퇴원하던 날에 한 번 찾아간 게 전부였다. 차 실장이 사람이 그러면 안 된다고 잔소리를 했지만, 이우연을 챙기느라 바빠서 어쩔 수 없다고 둘러댔다.

이우연의 부탁으로 인섭을 만났을 때도 그랬다. 제 아들과 헤어지라고 봉투를 내미는 회장 사모님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일부러 냉정한 태도로 봉투를 건넸다.

인섭은 봉투를 열어 티켓을 확인하고는 물었다.

‘…이우연 씨가 보내신 겁니까?’

‘그래. 차 실장이 준 건 이코노미라며. 몸도 안 좋은데 퍼스트로 가야지.’

인섭은 티켓을 돌려주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집주인분이 외국에 계셔서 연락이 닿는 대로 이사할 예정이었습니다.’

인섭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정리하는 데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 도와줄게.’

인섭은 고개를 내저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인섭의 태도는 차분하고 의연했다. 김 대표는 티켓을 다시 인섭에게 밀어 넣었다.

‘그래. 그럼 걱정 안 하게 이건 가져가. 어차피 돌려줘도 환불도 못 하니까.’

인섭은 묘한 표정으로 티켓에 찍힌 출발 날짜를 바라보았다. 김 대표는 일부러 촉박한 날짜의 티켓을 끊어 그에게 건넨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인섭을 정리하는 편이 이우연을 위해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 인섭에 관한 배려는 뒤로 미뤄 둔 게 사실이다.

“짐은 거의 다 정리했고, 집주인분께 연락만 하면 되니까….”

인섭은 쩔쩔매며 고개를 숙였다. 마치 제가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처럼 죄스러워했다.

최인섭 역시 힘들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 끙끙 앓았을 인섭을 생각하자 김 대표는 입맛이 지독히 썼다.

“너 이사했는지 안 했는지 확인하려고 온 거 아니야. 뭣 좀 물어보려 하는데 연락이 안 돼서 온 거지.”

인섭이 그제야 고개를 든다.

“죄송합니다. 요즘 거의 핸드폰은 안 봐서…. 전화 온 줄 몰랐습니다.”

김 대표는 착잡한 심정으로 앙상하게 마른 인섭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그날은 인섭이 얇은 긴팔 셔츠를 입고 있어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김 대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이우연한테 연락 온 거 있어? 전화나 문자나, 뭐 편지 같은 거라도.”

“이우연 씨요? 왜요? 무슨 일 있습니까?”

인섭이 놀라서 되물었다. 금세 커다란 눈이 불안으로 가득해졌다.

“사고 친 건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김 대표는 일단 최인섭을 달랬다.

…사고 친 건 아니지만, 걱정은 해야 했다.

김 대표는 이틀 전, 대학 병원의 연줄을 이용해 이우연을 입원시켰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김 대표는 보호자용 침대에 누워 이우연을 감시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이우연은 맡은 바 충실하게 환자 역할에 임했다. 이우연은 침대에 걸터앉아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아니면 눈을 감고 누워서 시간을 보냈다.

가끔 혼자 멍하니 제 손을 내려다보는 모습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해도,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평온한 나머지 슬슬 좀이 쑤실 정도였다.

결국 김 대표는 오늘 오전에 허리 마사지를 받으러 가겠다고 병실을 나왔다. 보조 침대에서 사흘간 잠을 자는 건 확실히 그 나이에 무리였던 것이다.

‘혼자 있을 수 있지?’

‘정 걱정되시면 묶어 놓고 가시든가요.’

책을 읽던 이우연이 고개도 들지 않고 내뱉는 비아냥거림에 방심했다. 그게 실수였다.

병실로 돌아와 보니 이우연이 사라진 후였다. 바로 이우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벨 소리가 침대 옆에서 울렸다. 캐비닛을 확인하니 입고 온 옷도 그대로였다. 환자복을 입고 돌아다닐 이우연을 생각하자 아찔해졌다. 김 대표는 이우연의 집에 그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에, 바로 인섭의 집으로 차를 몰고 왔다.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갑자기 사라져서 말이야.”

“입원이요?”

인섭의 눈이 퍼뜩 커진다.

“진짜 아파서 입원한 게 아니라, 보여 주기식. 걔 시상식에서 그냥 나왔잖아. 아프다고 둘러댔으니 입원이라도 해야지.”

“정말 어디 아프신 건 아니시죠?”

“음, 아픈 데는 없어.”

정확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입원하면서 전체적인 검진을 했을 때, 몸에는 별다른 이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걔는 항상 소프트웨어 문제니까. …그래도 일단 소속사 대표니까 걱정은 해야지.”

말을 하면서도 김 대표의 눈은 집 안을 훑었다. 이우연이 혹시 이 안에 있는 건 아닌가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연락 없으셨습니다.”

김 대표의 눈에 실망한 기색이 스쳤다.

“그럼 이우연한테 연락 오거나 걔 만나면 나한테 연락 줄 수 있을까? 잡아 두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으니까, 최대한 빨리.”

인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머리를 스친 생각에 김 대표를 불러 세웠다.

“저기, 대표님.”

“왜? 혹시 아는 거 있어?”

“채연서 씨한테 연락해 보셨나요?”

김 대표가 별스러운 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으로 채연서? 하고 되물었다. 인섭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걔한테 내가 왜?”

인섭은 조금 당황했다. 김 대표가 이런 식으로 대놓고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는 건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었다.

“아, 아직 기자들 때문에 만나기 힘드시겠네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채연서를 이우연이 왜 만나. 그쪽에서 만나자고 빌어도 만나 줄 생각 없어. 사람을 바보를 만들어도 아주 유분수가 있지. 피차 계약서까지 쓰고 하는 일인데, 아마추어도 아니고 진짜.”

투덜거리는 김 대표를 보면서 인섭은 눈을 두어 번 껌뻑였다.

“…그 후에 다른 일이 또 있었나요?”

“그 후라니?”

“기사 뜬 이후에 말입니다.”

김 대표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채연서가 그 이후로 또 사고 치면 그게 인간이냐.”

두 사람이 합의해서 만난 건데, 김 대표가 왜 채연서만 비난하는지 인섭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이우연만 중간에서 나가리지. 에휴, 내가 괜히 욕심부려서 미안해 죽겠네.”

인섭은 나가리라는 단어의 뜻을 찾아내려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비슷한 단어인 아가리밖에 떠올리지 못했다.

“…나가리라는 게 무슨 뜻인가요?”

“파투 났다고. 파투 몰라?”

인섭이 여전히 눈만 껌뻑이자 김 대표는 최대한 쉽게 단어 뜻을 설명해 줬다.

“일이 진행되다가 도중에 흐지부지됐다고. 비유하자면 낙동강 오리알 신세. 뭐, 그렇게 잘생긴 오리알은 없다만.”

“이철환 본부장님께서 이우연 씨께 화를 많이 내셨나요?”

“이 피디가 우연이한테 화를 왜 내? 너 기사 본 거 맞아?”

인섭은 당황했다. 정확히 기사를 읽은 건 아니었지만, 기사 내용은 알고 있었던 터다.

“이우연 씨가 채연서 씨랑 사진이 찍혀서….”

거기까지 말하자 김 대표의 표정이 와장창 구겨졌다.

“이우연이 무슨 사진을 찍혀? 너 그동안 어디 인터넷 안 되는 산간 오지에라도 있다 왔어? 아까부터 왜 자꾸 딴소리야.”

“…….”

인섭은 인터넷 연결은커녕 티브이도 켜지 않았다. 핸드폰을 보면 이우연의 기사를 찾아볼 것 같아서 일부러 핸드폰도 꺼 둔 채 지냈다. 하루에 한 번 켜서 제게 온 연락을 확인한 게 다였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에 인섭의 표정이 굳었다.

“하….”

인섭의 당황한 표정을 본 김 대표가 제 이마를 짚었다. 이우연이 했던 얘기가 어떤 건지 대충 머릿속에서 아귀가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다.

김 대표가 인섭아, 하고 나직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네.”

인섭이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연이가 너 특별하게 생각하는 건 알고 있지.”

“…알고 있습니다.”

김 대표의 말에 인섭은 또 죄인이라도 된 듯이 안색이 창백해졌다. 혹시라도 이우연에게 폐가 될 말이라도 나올까 봐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걔가 너한테는 잘해 줬잖아.”

“이우연 씨 배려에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인섭은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우연이가 너 한국으로 오기 전부터 걱정 많이 했다. 너 감기라도 걸린 기색이면 다음 날 스케줄 취소해 달라고 개난리를…. 아무튼, 내가 여기까지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네 건강 검진도 회사에서 해 주는 게 아니라 우연이가 개인적으로 예약해서 했던 거야. 너한테는 회사에서 병원이랑 결연을 맺어서 무한정 공짜라는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했다지?”

“…네.”

인섭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세상에 그런 미친 병원이 어디 있겠니.”

“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인섭이 금세 기가 죽어 사과했다.

김 대표는 굳이 그렇게까지 인섭을 속여야 하냐는 말에 이우연이 했던 대답이 떠올랐다.

‘최인섭은 그렇게 안 하면 안 돼요. 내 돈은 죽어도 안 쓰려고 하거든요. 방구석에 가둬 놓고 평생 내 돈만 쓰면서 살게 하고 싶은데, 예쁜 새끼가 쓸데없이 고집만 세서.’

“건강 문제도 그렇고 어차피 너는 미국에 가족이 있으니, 언젠가 미국으로 가는 게 맞겠지. 너한테도 그게 좋을 테고….”

최인섭이 옆에 있으면 이우연은 안정되어 보였다. 동시에 인섭은 이우연에게 가장 큰 위험 요소이기도 했다. 소속사 대표로서 인섭이 미국으로 가 버리는 게 가장 깔끔한 결말이었다. 지금 회사는 이우연이 없으면 돌아가지 않을 만큼, 이우연이란 배우의 이름 석 자가 가진 가치는 매우 컸다.

“그런데 있잖아, 인섭아.”

김 대표는 언젠가 우연히 이우연의 집 근처를 지나다가 편의점 앞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본 적 있었다.

이우연은 검은색 후드 점퍼 모자를 깊게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특유의 널찍한 등판 때문에 한눈에 그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김 대표는 차를 세웠다. 이우연의 앞에 앉은 인섭이 뭔가 곤란한 듯 쩔쩔매고 있는 게 보인 터다. 저놈이 또 사람을 괴롭히고 있구나 싶어 한 소리 해 줄 요량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인섭의 손에 들린 대본이 보였다. 이우연의 상대역을 대신해 주는 모양이었다. 얼굴이 벌게진 채로 로봇처럼 더듬더듬 대사를 읽어 가는 인섭을 앞에 두고 이우연은 소리 내어 웃고 있었다.

김 대표는 제 눈을 의심했다. 조금은 짓궂게 눈을 빛내며 소년처럼 웃는 그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우연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신 후, 다음 대사를 읽어 달라고 인섭의 다리를 툭툭 치며 졸랐다. 인섭이 새빨간 얼굴로 별 대수롭지 않은 대사를 읽어 주자 이우연은 또 웃음을 터트렸다.

웃을 대목도 아니었고, 웃기지도 않았다. 그런데 진심으로 유쾌한 표정으로 웃는 이우연을 보는 순간, 저게 진짜 연애 중이구나 하는 실감이 들었다. 왠지 멋쩍고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김 대표는 그대로 다시 돌아가 차를 몰고 사라졌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그 어떤 사견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만 알아 줬으면 한다.”

“…네.”

인섭이 바짝 긴장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이우연이 천하의 빌어먹을 개새끼지만 말이야.”

이 바닥에 있으면 별별 인간을 다 만나게 된다. 하지만 개중 이우연은 본 적 없는 쌍놈이라고 김 대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름날 밤 편의점 앞에서 인섭에게 장난을 치며 짓궂은 소년처럼 웃던 이우연과, 인섭의 병실에서 부모를 잃은 아이 같은 표정으로 앉아 있던 이우연, 그리고 인섭이 좋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던 이우연을 도무지 못 본 척할 수 없었다.

“걔가 너한테는 그렇게 나쁜 짓 안 했을 거다.”

“…….”

인섭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김 대표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는 접었던 우산을 다시 폈다.

“그럼 난 이만 먼저 간다. 혹시라도 이우연한테 연락 오면 꼭 알려 주고.”

“네. 알겠습니다.”

인섭이 배웅하려는지 현관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김 대표가 그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감기 든다. 들어가라.”

“대표님!”

인섭이 막 돌아서려는 김 대표를 불러 세웠다.

“왜?”

“이우연 씨 연락되면 저한테도 알려 주시면 안 될까요. 다,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걱정돼서 그렇습니다.”

“네가 나중에 직접 연락해 봐.”

“…괜히 번거롭게 해 드리면 안 될 거 같아서요.”

인섭이 황급히 고개를 숙인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앞으로 저한테 연락하지 말라고 이우연이 매몰차게 전화를 끊던 모습을 김 대표도 옆에서 봤던 것이다.

“이우연이 그렇게 무서워?”

“아, 아닙니다.”

“너 처음 쓰러져서 입원했을 때, 이우연한테 무서워서 알리지도 않았다며.”

“…폐 끼쳐 드리기 싫어서 그랬습니다.”

김 대표는 이우연이 인섭에게 섭섭해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차 실장은 다리 부러져서 입원했을 때, 삼 일 밤낮을 나한테 병 수발 들게 했어. 소변 통까지 비우게 시켰다고. 이우연한테 폐 좀 끼치면 어때. 아니, 둘 다 왜 그렇게 서로 무서워하냐? 이우연은 그날 밤새 너 기다려 놓고 아무 말도 못 하고. 왜들 그래.”

“네? 밤새 기다리셨다고요?”

인섭의 물음에 김 대표는 아차 싶었다. 너무 아는 척을 한 것이다. 더 이상 얘기를 했다간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다고 실토해야 할 상황이었다.

“아니, 이번에 너 쓰러졌을 때 밤새 병실에 있었다며. 아, 아무튼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인간관계에서 예의 차리는 것도 적당히 해야 좋지. 너무 차리면 정 없어 보인다.”

김 대표는 얼렁뚱땅 둘러대고 말을 맺었다.

“…알겠습니다.”

“나는 이만 가 볼 테니까, 들어가라.”

김 대표가 얼른 손을 흔들었다. 인섭은 더는 그를 붙들지 못하고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김 대표는 검은색 장우산을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인섭은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핸드폰을 찾아 전원을 켰다. 인터넷 창을 켜고 이우연의 이름을 검색했다. 그와 관련된 기사 수십 개가 주르르 떴다. 모두 오늘 올라온 기사였다. 헤드라인만 읽어도 상황을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인섭은 그중 하나를 클릭했다.

“…….”

숨도 쉬지 못하고 집중해서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다음 기사도 읽었다. 그다음 기사도, 다다음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기사에도 이우연이 채연서와 찍힌 사진이나 그에 관련된 내용은 없었다.

건강 문제로 시상식 도중 퇴장한 이우연의 불성실함과 다른 남자와 사진이 찍힌 채연서와의 문제를 엮은 기사뿐이었다.

인섭은 채연서의 이름을 검색했다. 선글라스에 모자를 쓴 그녀가 어떤 남자와 끌어안은 채로 키스를 하는 사진과 호텔에 나란히 들어가는 사진, 같이 호텔에서 나와 차를 타는 사진들이 검색되었다. 사진 속의 남자는 누가 봐도 이우연이 아니었다. 눈이 달렸다면 헷갈릴 수 없는 사진이었다.

“…….”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대체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이우연이 채연서를 만난 게 아니라면, 왜 그는 자신에게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던 걸까.

자신이 헤어지자고 해서 홧김에? 아니면, 채연서가 아닌 다른 여자가 있다는 뜻일까?

뭔가 생각 날 듯 말 듯, 사고가 뒤엉켰다.

어디서부터 어긋났을까.

인섭은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얼마 전부터 이우연은 분명 제게 화가 나 있었다. 평소답지 않은 차가운 태도 때문에 몇 번이나 화가 났는지 물을 정도였다. 그때마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자신에게 되묻곤 했다.

‘할 말 없어요?’

그게 언제부터였지.

강영모가 사무실로 찾아왔고, 건물을 빠져나오기까지는 평소와 크게 다름없는 태도였다. 집까지 데려다준다고 하며 차에서 대화를 나누다가 급 기분이 나빠져 대화가 줄었다.

…정말 고양이 때문일까.

인섭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 말이 이우연의 심기를 건드렸을지는 몰라도, 관계를 뒤흔들 만한 계기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뭐가….

“……!”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인섭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닥치는 대로 상자를 뜯기 시작했다. 열 개쯤 뜯고 나서야 책을 포장해 둔 상자를 찾을 수 있었다. 가지런히 정리해 둔 책을 모두 끄집어냈다. 간신히 박스 바닥에 있던 책 한 권을 찾아냈다.

<무진기행>.

이우연은 책을 읽던 도중에 손에서 놓게 되면 종이 귀퉁이를 작게 접는 습관이 있었다. 북마크를 두고 왜 매번 그렇게 하냐고 묻자 그는 웃으며 대꾸했다.

‘어차피 책일 뿐인데 무슨 상관이에요.’

인섭은 떨리는 손으로 소설의 종장을 찾아 펼쳤다. 그리고 천천히 앞으로 책장을 넘겼다. 한 장, 두 장, 그리고 세 장.

“…….”

정확히 결말 부분에서 세 장 앞 종이 귀퉁이가 작게 접혀 있었다.

김 대표가 말한 그가 밤새 기다렸다는 날은 제가 첫 번째로 입원했던 그날이었다. 이우연은 그날 자신의 방에 있었던 것이다.

늦은 시간에 전화를 걸었을 때, 잠기운 하나 없던 그의 목소리도 차갑던 그의 태도도 단박에 이해되었다.

‘인섭 씨가 나를 버리고 간다고 해도 케이크 상자를 갖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게요.’

‘할 말 없으면 케이크라도 갖고 왔어야지.’

머릿속에 이우연의 음성이 교차했다. 그때는 이해되지 않았던 그의 말들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 갔다. 인섭은 그제야 이우연이 제게 거짓말을 추궁하지 않고 사실을 얘기해 주길 기다린 이유를 깨달았다.

하와이에서의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이우연은 그날 밤새 책을 읽어 주었다. 자신이 거짓말하는 것을 알면서.

“…….”

손에 들린 책이 미끄러지듯 바닥에 떨어졌다.

이우연은 자신을 믿으려고 그렇게 발버둥을 쳤는데, 자신은 그를 의심하려고 애만 쓴 꼴이었다. 그가 자신을 배신했어야만 하는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속이 뒤집혔다. 인섭은 그대로 화장실로 달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게워 낼 것도 없었다. 침 섞인 시큼한 위액만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위를 불쏘시개로 쑤시는 것처럼 아팠다.

눈앞이 흐려졌다. 생리적인 고통 때문만은 아니었다.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아도 소용없었다. 남은 수분을 모두 쏟아 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언젠가 끝이 날 거라 생각했다. 버려지는 쪽은 당연히 자신이 될 거라 여겼다. 이우연에 대한 제 마음은 한결같다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변한 건 자신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에 대한 욕심이 커져서 결국엔 짓눌려 버린 것이다. 그는 끝까지 본인이 한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결국 제 못난 마음이, 이우연을 버린 것이다.

인섭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대체 왜 그는 제가 하지도 않은 일을 부정하지 않았던 걸까. 아니, 부정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정이 떨어지는 게 당연하다. 그는 최선을 다해 자신을 믿으려고 애썼는데, 자신은 다른 사람의 말에 휘둘려 이우연을 포기해 버린 것이다.

뚝뚝 떨어진 눈물이 바닥을 적셨다. 후회와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숨을 쉬기 힘들 만큼 가슴이 답답해졌다. 피가 발밑으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삽시에 온몸이 차가워졌다. 머리와 심장이 이어진 것처럼 쿵쿵 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인섭은 가까스로 일어나 화장실 선반에 둔 약통을 찾아 약을 삼켰다. 약 기운이 돌 때까지 욕조에 걸터앉아 숨을 골랐다. 시간이 지나자 몸 전체로 피가 도는 느낌이 돌아왔다. 흥건하게 젖은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려 손등에 떨어졌다.

스트레스를 우습게 보지 말라던 의사의 충고가 떠올랐다. 정말 이러다가 언젠가는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연애하는 데 목숨 걸 필요가 있나요.’

“…….”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눈앞이 번쩍였다.

이우연이 제게 건넸던 말들이 기억 사이로 쏟아졌다.

아침은 먹었어요? 요즘 잠은 잘 자요? 평소보다 못 드시는 거 같던데. 잘 챙겨 먹어요.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 감기 기운은 아닌 거 같은데, 어디 아픈 건 아니죠? 몸은 좀 어때요?

밥은, …잘 챙겨 먹어요?

통상적인 인사가 아니었다. 그가 했던 모든 말에는 진심이 스며 있었다.

‘아프면 안 돼요.’

유독 진지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가 제게 했던 부탁이었다.

그것이 이우연이 자신을 버린 이유였다.

엄청난 물보라를 일으키며 지나가자 옆 차선의 차가 신경질적으로 클랙슨을 울렸다. 평소였으면 창문을 열어 죄송하다고 사과했을 텐데, 지금은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빨리 가야 하는데….

인섭은 초조하게 운전대를 움켜쥐었다.

이우연이 제게 거짓말을 한 이유를 깨닫자마자 인섭은 바로 김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우연 어디 있는지 알아냈어?’

통화가 이어지자마자 김 대표가 다급하게 물었다. 걱정하지 말라던 그의 말이 영 빈말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아직 모릅니다. 혹시 이우연 씨 찾으러 어디 어디 가 보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전에 살던 집이랑 새로 이사 간 집 다 찾아봤어.’

‘연락은 아예 안 되시나요?’

김 대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참아 두었던 신세 한탄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핸드폰도 두고 갔으니 내가 지금 환장하지. 걔 혹시라도 사고 칠까 봐 내가 딱딱한 보조 침대에서 사흘을 자면서 감시했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 말이라도 한마디 하고 사라지면 어디가 덧나냐고. 지금 이런 상황에서 환자복 입고 돌아다니면 기자들이 뭐라고 물어뜯을지 뻔한데, 아주 미쳐 버리겠다. 핸드폰이랑 지갑이랑 다 두고 사라졌어. 내가 아주 늙는다, 늙어.’

‘차 키는요?’

인섭의 물음에 김 대표가 당황한 듯 차 키? 하고 되물었다. 그러더니 이내 뭔가를 뒤적이더니 차 키는 없다! 하고 기쁜 목소리로 외쳤다. 도보로 움직이는 건 아니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인섭을 일단 김 대표와 전화를 끊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가 갈 만한 곳을 떠올리다가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인섭은 다시 김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차를 빌려 달라고 부탁했다.

김 대표는 바로 인섭의 집으로 페라리를 몰고 왔다. 본인의 차 중 가장 빠른 차니까 얼마든지 사용하라며. 평소였으면 거절했겠지만, 인섭은 두말없이 차 키를 받아 들었다.

액셀을 밟자 육중한 소리를 내며 차체가 앞으로 나아갔다. 쏟아지는 비에 전방 확인이 어려울 정도였다. 그럼에도 인섭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이우연이 그곳에 있을 거란 확신은 없었다. 그저 단 한 번 언급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곳 외에는 떠오르는 장소가 없었다.

제발 이우연이 그곳에 있길.

서울에서 오는 내내 같은 기도만 반복했다.

제발, 제발, …제발.

국도를 빠져나와 얼마 지나지 않아 호숫가 근처의 별장이 보였다. 별장 앞에 세워진 차가 눈에 들어왔다. 이우연의 차였다.

인섭은 차를 내던지듯 주차하고는 우산을 들고 밖으로 뛰어나왔다.

별장에 있는 걸까?

일단 안을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에 인섭은 몸을 돌렸다. 하지만 굳게 잠긴 문을 발견하고 다시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비가 땅을 뚫을 기세로 쏟아졌다. 우산을 들고 서 있는 자체가 버거울 정도였다.

“우연 씨!”

소리 내어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빗소리에 가로막혀 허무하게 스러질 뿐이었다.

차만 여기에 세워 두고 혹시 다른 곳으로 간 걸 아닐까. 아니면….

빗물에 술렁이는 호수 표면이 보였다. 엄습하는 불안감에 인섭은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멀리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히 이 근처에….

“……!”

인섭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인섭은 그대로 호수 앞 벤치로 달려갔다. 벤치에 이우연이 앉아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호수를 내도록 바라보며.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던 걸까. 그의 환자복이 흠뻑 젖은 채였다. 커다란 우산을 앞으로 내밀어 그의 몸을 가렸다.

“…감기 드십니다.”

인섭의 말에 벤치에 앉아 있던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이우연은 몹시 당혹스러운 듯 입매를 찌푸렸다. 그러고는 제 손을 내려다보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동에 인섭은 더럭 걱정이 되었다.

“괜찮으세요?”

인섭이 물었지만 이우연은 꼼짝하지 않고 손을 뚫어지게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불쑥 한숨을 내쉬고는 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어쩐 일이에요. 여긴.”

이우연이 그제야 입을 뗐다.

“우연 씨 찾으러 왔습니다.”

“차에 추적 장치라도 달아 뒀어요? 아님, 다시 내 스토커로 전직하기로 했나?”

“…전에 하셨던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영화 시사회를 앞두고, 이우연은 인섭을 끌어안은 채 잔뜩 들뜬 소년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었다.

‘이대로 우리 어디로 가 버릴까요, 그때 같이 갔던 호수도 좋았는데.’

그가 했던 말을 떠올린 후에는, 다른 곳을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인섭은 즉시 차를 몰아 강원도까지 달려온 것이다.

인섭의 대답을 들은 이우연이 작게 웃었다.

“대표님이 보냈어요?”

이우연이 고개를 들었다.

처음 눈을 마주쳤을 때 보였던 당혹감이나 동요는 찾아볼 수 없다. 감정을 솜씨 좋게 갈무리한 단정한 얼굴이었다.

“제가 찾으러 온 겁니다.”

“쓸데없는 짓 했네. 잠깐 바람 쐬러 온 건데. 바로 올라가려던 참이었어요.”

이우연이 웃는다. 상냥하게 웃는 낯, 어디에서도 다정함은 찾을 수 없다.

“거짓말하셨던 거, 알고 있습니다.”

“무슨 거짓말?”

이우연이 되묻는다. 태연한 표정이었다.

“채연서 씨와 만나셨다고 하신 말씀…, 아니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 기사 봤습니다.”

이우연이 아아, 하고 눈가를 접어 웃는다.

“나는 사진 같은 거 안 찍혀요. 병신들이나 찍히지.”

“…제가 오해했습니다.”

“무슨 오해? 인섭 씨 오해한 거 없어요. 나 여자 만나서 씹질한 거 맞으니까.”

이우연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 원래 그런 놈이잖아요. 내 뒷조사 해 봤으니 잘 알 거 아니에요. 안 그래요?”

“일부러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하하. 뭐가 일부러예요. 내가 인섭 씨한테 안 질릴 줄 알았나 보군요. 남자 구멍에 박는 게 뭐 대수라고 나 같은 개새끼가 여태껏 신의를 지킬 거라고 생각해.”

잔인한 말을 느긋하게 늘어놓는다. 인섭에게는 익숙한 모습이었다. 화면 속에서 내도록 봐 온 배우의 얼굴이었다.

“죄송합니다.”

인섭은 고개 숙여 사과했다.

“죄송할 게 뭐가 있어요. 내가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걸.”

“…죄송합니다.”

인섭은 고개를 숙인 채 다시 한번 사과했다. 수천 번, 아니 수만 번을 사과해도 부족했다. 인섭은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이우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울로 올라가면 바로 미국으로 가세요.”

이우연의 차가운 음성이 깨끗하게 감정을 밀어냈다.

옆을 지나가려는 이우연을 인섭이 붙들었다. 들고 있던 우산이 바람에 날려 그대로 바닥을 뒹굴었다. 차가운 비가 얼굴에 들이쳤지만, 인섭은 이우연을 붙든 손에 힘을 주었다.

“제가, 자, 잘못했습니다. 오해해서…. …이우연 씨 믿지 않아서 그런 식으로 비겁하게 굴었습니다.”

이우연을 붙든 인섭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우연이 인섭의 손에 제 손을 겹쳤다.

“인섭 씨.”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이었다.

대체 얼마나 여기에 오래 앉아 있었던 걸까.

인섭은 가까스로 눈물을 참았다.

“나도 너 믿은 적 없어. 그러니까 일일이 그런 거에 사과할 필요 없어요.”

인섭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우연은 허리를 굽혀 바닥을 구르던 우산을 집어 들었다. 그가 우산을 받쳐 주며 말을 이었다.

“솔직하게 말할게요. 이젠 그냥 지쳐요.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생각하면서 신경 쓰는 것도, 평범한 기준에 맞춰서 노력해야 하는 것도. 그냥 전처럼 편하게 살고 싶어졌어요.”

이우연이 천천히 숨을 골랐다.

“미국으로 돌아가요.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았잖아. 나랑 천년만년 사랑놀이할 것도 아니고. 같이 있다가 사진이라도 찍혀서 기사라도 나면 어쩌려고요? 내 인생 책임져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이성적이고 모두 옳은 말이었다. 반박의 여지조차 없었다.

인섭은 이우연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뺨을 타고 빗물이 흘러내렸다. 이우연이 선선하게 웃는다.

“솔직히 슬슬 인섭 씨랑 하는 것도 질려 가던 차였어요. 몇 번을 해도 섹스도 좀처럼 안 늘고, 종종 통나무에 박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아픈 사람 붙들고 섹스하는 것도 번거롭고.”

이우연이 인섭의 옷깃을 고쳐 주었다.

“인섭 씨도 그러니까 내 눈치 보지 말고 살아요. 개도 키우고 고양이도 키우고,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평범하게. 나는 이제 그런 흉내 내는 거 지겨워서.”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호수를 바라보던 눈과 같았다.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없이 죽음처럼 잔잔한, 깊은 눈빛이다.

꿈에서 보았던 모습과 같으면서도 전혀 달랐다. 꿈속의 이우연은 제 불안이 만들어 낸 허상이었고, 눈앞의 그는 제 나약함이 빚어낸 현실이다.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목소리가 울음에 젖어 작게 떨렸다.

“그럼 어떤 말을 해야 할까요.”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면 안 됩니까.”

이우연이 가볍게 웃으며 솔직하게라, 하고 낮게 되뇐다. 그의 눈에 섬뜩한 예기가 어린다.

“나는 다른 사람이 어떤 식으로 상식이나 감정을 예단하는지 몰라요. 그래서 대충 흉내 내는 것뿐입니다. 내 감정이 당신이 가진 것과 같은지도 모르는데, 뭘 솔직하게 말해 보라는 겁니까?”

“…같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인섭은 잘게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했다.

같지 않아도 좋다고. 유사 감정이라 해도 그것만으로 족하다고.

하지만 제가 그를 점점 더 욕심내어 일을 그르친 것이었다.

“인섭 씨가 나를 좋아하는 이유가 미필적 고의 때문이라고 했던가요.”

“…….”

우산 아래로 처들어오는 물기 가득한 바람이 인섭의 뺨을 스쳤다. 미필적 고의라는 단어에 마음이 수런거렸다.

“미필적 고의로 인섭 씨가 좋아졌는지도 모르겠어요. 신경에 거슬렸다면 잘라 버리면 그만이었을 텐데. 당신이 처음부터 특별했던 걸지도 모르죠. 그런데 말했듯이 거기서 끝이 아니에요. 미필적 고의가 아니라 확정적 고의로 나는 당신 주변의 소중한 것들을 해치고 싶거든요. 이게 어떻게 비슷한 감정입니까?”

이우연의 음성이 점점 거칠어진다.

“친구나 가족, 심지어는 네가 키우는 풀 한 포기조차 꼴 보기 싫다고. 시발, 알아듣겠어? 더 솔직하게 말해 줄까? 그냥 가둬 놓고 어디도 나가지 못하게 하고 싶어. 싫다고 울어도 그냥 강간하고, 네가 돌아갈 집에 불 질러 버리고, 네가 좋아하는 사람, 너를 좋아하는 사람들 따위 다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다고.”

이우연의 눈에 시뻘겋게 화기가 스민다.

“그런데 같지 않아도 괜찮아?”

“저는….”

그때 인섭의 눈에 이우연의 어깨가 들어왔다. 내리는 비에 온통 젖어 물이 고스란히 흐르는.

이우연의 손에 들린 우산은 인섭에게 온통 치우친 채였다.

심장이 와락 구겨지는 느낌이었다.

“어차피 비슷하게 흉내 낸 연애였는데 질릴 때도 됐잖아요. 당장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뭐가 그렇게 대단한 연애라고….”

이우연은 말을 끝까지 맺지 못했다. 뺨에 인섭의 손이 닿았다가 떨어진다. 때렸다고 할 수도 없을 만큼 미약한 힘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이우연이 멍하니 인섭을 바라보았다.

“그때, 이렇게 하라고 하셔서…. …죄송합니다.”

인섭이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울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죄송합니다. 유사한 감정이라도 괜찮다고 했다가, 제가 욕심내서, 그래서 힘들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다….”

눈물이 맺힐 새도 없이 쏟아져 내렸다. 이우연의 손끝이 움칫 떨렸다.

인섭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세 살까지도 살지 못할 거라 했습니다. 그 후에는 일곱 살, 다음에는 열 살을 넘기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이식 수술을 받는다고 해도 살 수 있을지는, 의사도 장담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평범하게 살고 있지만, …저도 알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잘 압니다. 항상 살 수 있는 날보다 죽을 날을 가깝게 느꼈던 터라…, 어느 날 갑자기 죽을 수 있다는 게 어떤 건지 알고 있어요.”

인섭이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범벅이 된 커다란 눈이 하염없이 이우연을 바라본다.

“죄송합니다.”

어릴 때는 아픈 게 무서웠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항상 의연하게 모든 것에 맞서는 사람들이었기에 두려움은 늘 제 몫이라 여겼다.

그날까지는 그랬다.

열 살 생일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하루 종일 침대에 누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열 살을 넘기지 못할 거라는 의사의 말이 사실은 너무도 무서웠던 것이다.

자정이 지나고 나서 아직 자신이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한 후 침대에서 나왔다. 목이 말라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중에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 식탁에 앉아 어머니는 울면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을 하루라도 더 사랑해 줄 수 있게 주님께서 허락해 달라고.

그날 처음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죽음은 제 것이지만 그에 대한 두려움은 온전히 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 이후로 인섭은 아무리 아파도 그걸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우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항상 괜찮다고 말했다. 그럼 그도 괜찮을 거라 믿었다. 그는 전혀 괜찮지 않았는데….

“아파서, 이런 몸이라서, …미안해요. 우연 씨까지 그런 마음 갖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죄송합니다.”

이런 순간에조차 인섭은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오롯이 제 잘못을 빌었다.

“미안해요. 잘못…, 했어요. 제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우연의 손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우연 씨 말이 맞아요. 언제 죽을지 모르고, 대단한 연애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인섭이 이우연에게 매달리듯 손을 뻗었다.

“대단하지 않은 연애니까, 죽기 전까지 그것만이라도 하면 안 되는 건가요.”

감정이 허물어진 듯 인섭은 눈물을 쏟아 냈다.

온통 젖은 이우연의 어깨를 본 순간, 그날 밤새 제게 책을 읽어 주었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가 좋았다.

자신을 보며 짓궂은 소년처럼 웃던 그가, 가볍게 입을 맞출 때 기분이 좋은 듯 옅은 웃음을 흘리는 그가, 눈을 낮게 내리깐 채로 책을 읽던 그가, 제 안부를 물어 주던 그가, 너무 좋았다.

제가 가진 감정과 오롯이 같지 않다 하더라도 그가 보여 주는 감정들이 못내 좋아 견딜 수 없었다.

인섭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이우연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제가, 아픈 게 싫으신 거면…, 건강할 때까지만 옆에 있을게요. 어디가 아프거나 또 쓰러지거나 죽을 거 같으면, 그 전날에, 갈 테니까, …갈게요.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와락 끌어당겨졌다.

남자의 단단한 팔에 몸이 갇혔다.

“가지 마.”

이우연이 인섭의 젖은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로 말했다.

“가지 마. 인섭아.”

이우연이 떨리는 손으로 인섭의 등을 끌어안았다.

“제발, 부탁이니까, 가지 마. …죽지 말아요.”

그 어떤 꾸밈도 없는 날것의 본심을 이우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토해 냈다. 인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 몸을 가리고도 남을 만큼 커다란 남자가 어리고 약한 존재처럼 느껴져서, 그를 안심시키고 싶어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요. …괜찮지 않아서, 인섭 씨 없으면, 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미안해요.”

남자의 너른 어깨가 울음으로 흔들렸다. 인섭은 그럴수록 그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고 눈물을 버텨 냈다.

안개에 싸인 호수가 비에 젖어 들었다.

밀려드는 그의 감정에 가슴이 빠듯하게 땅겼다. 깊은 물에 잠기는 기분이었다.

인섭은 눈을 감았다.

손을 잡고 가는 중에도 이우연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 인섭을 확인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인섭은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호수에서 별장까지는 멀지 않은 거리였다. 우산을 쓰는 게 의미 없을 만큼 흠뻑 젖어 버린 상태라 두 사람은 그대로 걸어왔다.

별장의 현관은 굳게 잠겨 있었다.

“차로 가야 하지 않을까요?”

인섭이 물었다. 그의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김 대표에게 현관 비밀번호를 물으려면 차로 가야 했다. 아까 급하게 달려오느라 핸드폰도 차에 두고 내린 것이다.

이우연은 대답하지 않고 현관 도어록의 캡을 열고 비밀번호를 눌렀다. 옆에서 그가 누르는 번호를 본 인섭은 눈을 껌뻑였다. 비밀번호가 인섭의 생일 네 자리였다.

“제가 얼마 전에 인수 받았어요. 그 김에 번호도 바꾸고.”

이우연이 문을 열어 주며 설명했다. 인섭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일단 대표님께 연락을….”

말을 마치기 전에 이우연의 입술이 먼저 다가왔다. 차가운 입술이 맞물렸다. 이우연이 인섭을 끌어안고 한껏 열중한 얼굴로 입을 맞췄다.

오랜만이었다.

인섭은 눈을 감고 입술을 벌렸다. 다급한 호흡이 넘나들고 젖은 옷 사이로 체온이 닿았다.

“…미안해요.”

이우연이 먼저 입술을 떼고 사과를 중얼거린다. 사과의 이유를 알지 못해 인섭은 동그랗게 눈을 떴다.

“감기 들면 안 되는데.”

이우연이 인섭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비를 흠뻑 맞은 터라 쌀랑한 실내의 온도에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목 끌어안아 볼래요?”

인섭은 그가 시키는 대로 이우연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우연이 인섭을 번쩍 안아 들었다.

“…걸을 수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이우연은 인섭을 안은 채로 욕실로 걸어갔다. 그는 인섭을 욕조에 내려놓은 후에 온수를 틀고 커다란 타월을 가져와 덮어 주었다.

“잠깐 있어요. 온도 좀 올리고 올 테니까.”

인섭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순간 욕조 밖으로 나갈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무릎을 모으고 몸을 웅크리고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이우연이 환자복 상의를 탈의한 채 욕실로 들어왔다.

“왜 아직도 그대로예요.”

이우연이 욕조 가장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네?”

“옷 입은 채로 씻는 재주도 있어요?”

이우연의 놀림에 인섭은 허둥지둥 옷을 벗으려 했다. 그러다 문득 이우연의 몸에 눈이 갔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전체적으로 살이 빠진 듯했다. 타고난 뼈대와 근육 때문에 날카로운 느낌을 줄 뿐 체구는 그대로라 꽉 짜인 근육의 형태가 돋보였다.

인섭은 셔츠 아래의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전보다 더 볼품없이 앙상해진 몸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왜 그러세요.”

인섭이 셔츠를 움켜쥔 채로 꼼짝하지 않자 이우연이 묻는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섭이 셔츠 앞자락을 움켜쥔 채로 대답하자 이우연이 상반신을 기울였다.

“어디 아파요?”

그의 걱정스러운 표정에 인섭은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더는 이우연을 쓸데없는 문제로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제가 너무 볼품이 없어서요.”

인섭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이우연이 피식 웃더니 욕조 안으로 들어왔다.

“예뻐요.”

이우연이 인섭의 셔츠 단추를 직접 끌러 주며 말을 이었다.

“너무 예뻐서, 가끔 화가 날 정도예요.”

인섭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셔츠를 모두 벗겨 내자 웃고 있던 이우연의 눈매가 그대로 굳었다.

“왜 이렇게 말랐어. 밥 안 먹었어요?”

“머, 먹었습니다. 삼시 세끼, 다 챙겨 먹었어요.”

“그런데 왜…. 정말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 이럴 게 아니라 병원으로….”

인섭이 이우연의 팔을 붙들었다.

“병원 다녀왔습니다. 검사도 받았고요. 위염이라고 했습니다. 먹기는 먹는데, 다 토해서….”

이우연이 낮게 한숨을 내쉰다. 인섭은 더럭 겁이 나서 이우연을 붙든 손에 힘을 준 채로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약 먹고 쉬면 괜찮습니다.”

이우연의 손이 인섭의 뺨을 감싸 쥐었다.

“아픈 거 인섭 씨 탓 아니에요. 왜 자꾸 사과해요.”

“…죄송해서요.”

이우연이 인섭의 얼굴을 당겼다. 순순히 인섭은 눈을 감고 그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물기 어린 입술이 몇 번 가볍게 쪽쪽 와 닿았다가 떨어졌다.

인섭은 시선을 느끼고 눈을 떴다. 이우연이 인섭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섭 씨.”

나직한 부름이다. 병실에서 그만두자고 말했을 때와 같은 목소리다. 술렁이는 불안감에 인섭은 일순 숨을 멈추었다.

“정말, 괜찮겠어요?”

뭐가 괜찮은 건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노력해도 메꾸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요.”

이우연은 제 결핍을, 인섭을 볼 때마다 깨달았다. 그건 평생 느껴 본 적 없는 수치를 불러일으켰다.

“그건 앞으로도 인섭 씨를 괴롭게 할 겁니다.”

이우연이 숨을 삼킨 후 말을 이었다.

“나랑 있으면 자꾸 신경 쓸 일 생기고, 나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아플 테고, 나 같은 새끼한테 기대지도 못할 텐데.”

“아닙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제가 더 잘하겠습니다.”

이런 순간에조차 제가 더 잘하겠다고 말하는 인섭의 대답에 이우연의 단정한 얼굴이 일그러진다.

행동과 감정은 늘 계산해서 가장 결괏값이 좋은 걸 택하면 그만이었다. 그 계산에 이타심은 들어가지 않지만, 가끔은 겉보기 그럴싸하게 타인을 배려하는 방향을 선택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섭에게만은 그러지 못했다. 뭐가 최선인지, 아직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며칠 사이에 뼈가 드러날 정도로 마른 인섭의 몸을 보는 순간, 새파란 면도날로 심장을 저미는 느낌이었다.

호숫가에 앉아 계속 같은 모습을 떠올렸다.

인섭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생명력이 넘치는 뺨을 하고 밝게 웃는 모습을, 계속, 계속, 계속, 끊임없이, 몇 번이고 되새겼다. 그러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일어나 다시 인섭의 집으로 찾아가 문을 두드릴 것만 같았다.

고장 난 비디오처럼 같은 화면만 곱씹고 있는 중에 우산을 들고 나타난 인섭을 보는 순간, 이번에야말로 제가 완전히 미쳐 버렸다고 생각했다.

“미안해요. 인섭 씨.”

커다랗고 맑은 인섭의 눈을 마주하자 죄책감과 욕심이 일시에 들끓었다.

이우연은 고개를 숙였다.

놔주는 게 옳았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인섭이 좋았다. 너무 좋아서, 사실 지금도 제 손바닥을 확인하고 싶어서, 무서워서 견딜 수 없었다. 이 모든 게 꿈이고 또 한 번 인섭을 잃을까 봐, 미칠 듯이 두려웠다.

“…인섭 씨가 좋아요.”

이우연이 고통스럽게 제 마음을 고백했다.

“너무 괴로워서, 인섭 씨가 좋은데, 이게 정말 좋아하는 마음인지도 모르겠어요. 나는 다른 사람이랑 다르니까…, 그래서 미안해.”

인섭이 이우연을 끌어안았다.

“사랑해요.”

명확하게, 조금의 망설임 없이 인섭이 이우연의 두려움에 대답했다.

“저는 이우연 씨를 사랑해요. 그러니까 이우연 씨도 저를….”

이우연이 인섭의 뒷덜미를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숨결이 뒤섞이고 혀가 엉켰다. 부드럽게 감기는 입술을 이우연은 한껏 맛보았다. 인섭은 이우연의 팔뚝을 붙들고 열심히 그의 움직임에 응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키스가 멈추자 두 사람 모두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가까스로 떨어진 입술 사이로 인섭이 아까 미처 하지 못한 말을 이었다.

“…저를 사랑해 주세요. 부탁입니다.”

이우연은 짧게 숨을 삼켰다.

어째서일까.

자신을 사랑해 달라는 말을 들었는데 한껏 사랑받는 기분이 들었다.

“부탁… 들어주세요.”

“응.”

이우연이 인섭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기대며 짧게 대꾸했다. 뼈가 두드러지는 인섭의 어깨를 뺨을 문지르며 이우연이 말했다.

“그럼 내 부탁도 하나만 들어줘요.”

“네. 말씀하세요.”

“인섭 씨는 나 말고 누구와 만나도 진심이 될 수 있잖아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섭이 바로 반박했다. 이우연은 가볍게 웃으며 인섭의 등에 손을 둘렀다.

“가족들 좋아하죠?”

너무도 당연한 질문에 인섭은 조금 뜸을 들이다가 네, 하고 대꾸했다.

“차 실장님이나 대표님, 조 대리, 사무실 사람들, 윤아름도 좋아하고. 윌이랑 윤아름이 키우던 개도 그렇고.”

“…우연 씨.”

“아이작, 로이스, 존, 아서. 모두 인섭 씨가 좋아하는 것들이죠.”

이우연은 제가 갖지 못하는 평범한 감정들을 나열했다. 그런 것들이 아쉬운 적은 없었다.

자신에게는 그 대상이 그저 하나이고 유일할 뿐이었다. 인섭의 사소한 행동과 작은 몸짓, 평범한 말들이 제게는 그런 것들을 대신했다. 인섭이 사라진다면 제 감정은 모두 쓸모없는 것들이 되고 말 것이다. 이기적이고 구질구질하다고 욕을 먹어도 상관없었다.

자신에겐 최인섭만이 전부였다.

“나는 너 아니면 안 되니까, …그러니까, 내가 죽을 때까지만 나랑 살아 줘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인섭이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우연이 인섭의 가느다란 몸을 꽈악 끌어안았다.

“나 명줄 좆같이 긴데. 인섭 씨 오래 살아야겠네요.”

“…그럴게요.”

인섭은 이우연의 목에 매달려 대답했다.

이우연은 말없이 인섭의 등을 쓸어내렸다. 손을 타고 젖은 살갗의 감촉이 전해졌다. 너무 좋았다. 이우연은 인섭의 허리를 답삭 끌어안고 숨을 삼켰다. 이미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가 꺼덕꺼덕 인섭의 허벅지에 닿았지만, 이우연은 모른 척 눈을 감았다.

“…저어, 우연 씨.”

“네.”

“저, 저도, 좋아해요.”

뭘 좋아하느냐고 묻기도 전에 인섭이 이우연의 배에 제 아랫도리를 슬쩍 문질렀다. 인섭의 성기가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저도 섹스… 좋아해요. 잘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인섭이 몇 번 더 사타구니를 비벼 댔다. 애처로울 만큼 형편없는 유혹이었다. 이우연은 웃음을 터트렸다.

“무리할 거 없어요. 괜찮으니까.”

인섭이 저를 배려해서 하는 짓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인섭의 서툰 행위조차 너무 사랑스러워 좆이 터져 버릴 것 같이 흥분됐지만, 이우연은 평연한 낯을 꾸몄다.

“무리하는 거 아닙니다.”

이우연에게 안겨 있던 인섭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이우연의 손을 제 가슴에 가져다 댔다. 도드라진 유두가 이우연의 손가락 끝에 걸렸다. 인섭은 아랫입술을 깨문 채 이우연의 손가락에 제 가슴을 문질렀다. 이우연은 홀린 듯이 그런 인섭을 올려다보았다.

인섭이 이우연의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젖은 바지를 벌려 그 안에 이우연의 손을 집어넣었다. 손가락 사이로 음모가 스치고 반쯤 발기한 살덩이가 쥐어졌다. 인섭은 이우연의 손에 자위라도 하듯 허리를 움직였다.

귀두 끝에 손가락이 걸리자 아, 하고 인섭이 신음을 내뱉는 순간.

“시발.”

이우연이 몸을 일으켰다.

욕조의 물이 넘쳐흘렀다.

“하아.”

인섭이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침대에 누웠다. 인섭을 침대에 눕힌 이우연은 그의 젖은 바지와 속옷을 끌어당겨 벗겼다. 그러고는 제 바지도 벗어 바닥에 내던졌다.

이우연이 인섭의 위에 몸을 기울였다. 인섭은 팔을 벌려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예쁘게 굴어요.”

이우연이 인섭의 눈가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욕실에서 두 사람은 근 삼십 분을 뒤엉켜 서로를 애무했다. 인섭은 이우연의 손에 이미 두 번이나 사정했다. 평소였으면 이제 그만하자고 뒤로 뺄 만도 한데, 전혀 그런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좋아서요.”

인섭은 솔직하게 제 마음을 고백했다.

이우연이 눈을 내리감고 인섭의 입술을 길게 물었다. 키스가 시작되었다. 몇 번 혀를 놀리지 않았는데 인섭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깊게 입 속을 빨아 주자 인섭은 작게 숨을 할딱였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인섭의 가슴을 이우연의 커다란 손이 덮었다. 손바닥 살갗 안쪽으로 맥이 느껴졌다. 살아 있는 감각이다.

“인섭 씨.”

이우연이 하도 빨아 대서 살짝 부르튼 인섭의 입술을 혀로 핥으며 그를 불렀다.

“…네.”

열기 어린 순진한 눈동자가 부름에 응했다. 이우연은 숨을 몰아쉬었다. 아랫배가 더러운 욕구로 저릿저릿 떨렸다.

“나 한 발 빼고 싶은데.”

욕실에서 사정한 건 인섭뿐이었다. 이우연은 열심히 인섭의 몸을 만져 주고 그를 절정에 이르게 했다.

이우연의 말에 인섭이 고분고분 다리를 벌렸다. 이우연은 한쪽 다리를 세워 인섭의 무릎을 오므리게 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가만히 있어요.”

목소리는 정중했지만 그의 눈은 이미 욕망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인섭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우연이 몸을 일으켜 세우고 인섭의 다리 한쪽을 들어 올렸다. 갑작스럽게 훤히 드러난 아랫도리에 인섭의 눈이 퍼뜩 커졌다.

“아프게 안 할 거니까….”

이우연이 말을 채 끝내지 않고 인섭의 발목을 빨았다. 잇새에 넣고 혀를 굴리고 입술을 비볐다. 한 손으로는 제 성기를 움켜쥐고 문질러 댔다. 이우연이 빠듯한 숨소리를 내며 인섭의 발목 안쪽의 움푹 팬 부근을 빨며 이를 세웠다. 인섭의 발가락이 움칫 오므라들었다. 이우연의 성기가 이미 질척거리는 소리를 내며 손바닥 안에서 마찰되고 있었다.

“인섭 씨….”

이우연이 인섭을 불렀다. 대답할 필요 없는 부름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인섭은 대답을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은 외설적인 욕구를 담아 인섭을 내리찍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으로 강간당하는 기분이었다.

“인섭 씨, 하아….”

이우연이 인섭의 다리를 붙들고 살을 질겅이며 성기를 추어올렸다. 폭력적인 시선이 고스란히 인섭의 벗은 몸을 범했다.

이우연이 말한 메꾸지 못할 틈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몸이 오싹 떨렸다. 도저히 그 시선을 버텨 낼 수 없어서 인섭은 붉어진 얼굴을 돌렸다.

“고개 돌리지 말고 내 얼굴 봐요.”

목소리는 상냥했지만 그 속에 담긴 고압적인 욕구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인섭은 천천히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우연이 성기를 쥔 손을 떼고 인섭의 다리를 제 어깨에 걸쳤다. 흡사 가위처럼 맞물린 하지가 비벼지기 시작했다.

“아….”

인섭은 너무나 부끄러웠다. 머릿속으로 떠올려 본 적도 없는 이런 외설스러운 행위에 도무지 적응할 수가 없었다. 인섭이 옆으로 허리를 틀려고 하자 이우연이 손바닥으로 그를 지그시 눌렀다. 그러고는 성기를 사타구니 틈에 밀어 넣고 허리 짓을 시작했다. 마찰뿐인 유사 성행위였지만 그가 힘으로 추어올릴 때마다 머릿속이 하얗게 번쩍일 만큼 강렬했다.

인섭은 시트를 움켜쥔 채로 이우연을 올려다보았다. 눈을 떼지 말라는 요구를 잊지 않은 것이다.

“하하.”

이우연이 가볍게 웃었다.

아래가 맞닿을 때마다 인섭이 겁을 먹은 것처럼 흠칫흠칫 몸을 움츠렸다. 그런 주제에 끝까지 눈을 떼지 않는다.

“나 같은 새끼가, 해 달라고 하는 대로, 다 해 주면, 어떡해, 씹. 버릇 나빠지게.”

이우연이 음절을 끊어 내듯이 뱉으며 허리를 움직였다.

아이의 버릇은 부모가 망친다고들 했다. 하지만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망가진 채였기에 딱히 부모의 영향은 없었다. 그런데 인섭이 관대하게 대할 때마다 제 안의 뭔가가 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약하고 어리석어졌다. 그게 싫지만은 않았다.

“나 버릇없어지면, 인섭 씨가 책임질 거예요?”

이우연의 장난스러운 물음에 인섭은 눈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인다. 좆같이 사랑스러웠다.

이우연은 이를 사리물었다. 간신히 억누른 잔인한 욕구가 고개를 들었다. 일부러 인섭에게서 손을 떼고 침대에 팔을 세운 채 몸을 지탱했다.

“어떻게, 책임질 건데.”

이우연의 물음에 인섭은 손을 뻗어 그의 팔을 끌어당기며 대답했다.

“저한테는 하고 싶은 대로…, 하셔도 됩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우연은 뜨거운 숨을 삼켰다. 세상 누구보다 소중하게 여기고 싶은 마음과 잔인한 욕구가 한데 뒤엉켰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느끼지 못할 감정이었다. 손바닥 가득 인섭의 온기가 잡혔다. 느껴지는 온기만으로도 머리가 핑 돌 만큼 발정했다. 이우연은 인섭의 샅에 발기한 좆을 문지르며 인섭의 얼굴을 핥듯이 응시했다. 보는 것만으로 하루 종일 사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섭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작게 숨을 헐떡이던 인섭이 입술이 벌어졌다. 열이 오른 듯 평소보다 색이 진해진 입 속의 점막이 이우연의 눈에 들어왔다.

“입 벌려 볼래요?”

이우연의 요구에 인섭은 순순히 아기 새처럼 입을 벌렸다. 이우연은 한계까지 부풀어 오른 성기를 인섭의 얼굴에 대고 용두질했다. 인섭은 영문을 몰라 입을 벌린 채 조금 두려운 기색으로 눈을 껌뻑였다. 그 단순한 움직임에 발끝이 찌릿하게 저릴 만큼 꼴렸다.

퍽, 하고 희뿌연 정액이 터져 나왔다. 인섭의 입 속이 뿜어져 나온 정액으로 젖었다. 몇 번 더 손을 추어올려 정액을 쥐어짜 냈다. 인섭의 입술과 턱을 타고 정액이 흘러내렸다.

입 안으로 들어온 정액을 삼켜야 하는지 뱉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해 인섭이 설핏 눈가를 찌푸렸다.

“삼키지 말고 입 벌려요.”

인섭은 눈을 두어 번 슴벅이다가 그가 시키는 대로 입을 벌려 보였다. 이우연은 인섭의 입에 토정해 놓은 흔적을 낱낱이 확인했다.

“그거 알아요? 인섭 씨는 구멍이 다 핑크색이라 입 속까지 꼴려요.”

“……!”

인섭이 입을 다물려고 하자 이우연이 턱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 혀가 입 안을 휘젓자 정액이 맞물린 입술 사이로 비어져 나왔다. 혀로 성교하는 기분이었다.

이우연은 인섭의 몸에 올라탄 채로 얼굴을 들어 올린 채 키스했다. 인섭의 턱 아래로 정액이 뚝뚝 흘러내렸다. 이우연은 인섭의 안에 사정하는 걸 좋아했다. 가느다란 다리 사이로 흘러내리는 정액을 즐겨 감상했고, 부끄러워하는 인섭을 잡아 두고 뒤처리를 하는 것도 좋았다. 인섭이 정액을 뱉어 내지 못하게 입술을 떼지 않자 그의 목울대가 꿀꺽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맛있어요?”

이우연이 입술을 떼고 물었다. 인섭은 눈썹을 찌푸린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우연은 웃으며 침대 밖으로 걸어 나갔다. 한 손에 생수를 들고 나타난 그는 인섭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물 마셔요.”

인섭은 생수 통을 받아 들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이우연은 고개를 내저었다.

“먹여 줄게요.”

인섭은 하는 수 없이 입을 벌렸다. 아까 이우연에게 들은 말 때문인지 최대한 입 속이 보이지 않도록 조금만.

“그럼 흘리잖아. 조금 더 벌리세요.”

“…….”

평범한 말을 저렇게 하는 것도 재주일 텐데.

인섭은 이우연이 시키는 대로 입을 조금 더 크게 벌렸다. 차가운 물이 입 속으로 들어왔다.

인섭이 물을 모두 마시고 나서야 이우연도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모습을 인섭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다.

이우연은 생수 통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다시 침대로 올라왔다.

“이리 와요.”

앞으로 뻗어진 팔에 인섭은 고개를 댔다. 이우연은 인섭을 제 몸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어깨부터 허리 아래까지 이어지는 부분을 쓸어내렸다. 소중한 존재를 보듬는 듯한 그 다정한 손길에 인섭은 나직하게 숨을 토해 냈다.

입술이 다시 맞물렸다. 부드럽게 쪽, 하는 소리를 내며 입술이 물러갔다.

“처음 키스했을 때 생각나네요.”

이우연이 인섭의 뺨에 연신 입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왜 이 좋은 걸 여태 안 했는지, 그런 생각을 했는데.”

“그러셨습니까.”

인섭의 얼굴이 발그스레하게 달아올랐다.

“인섭 씨는 무슨 생각 했었나요?”

“…숨이 막혀서, 아무 생각도 못 했습니다.”

싫다는 인섭을 붙들고 억지로 범하고 입을 맞추었다. 첫 키스가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파렴치하게 기뻐하기도 했다. 이우연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 쓰게 웃었다.

“그때 내가 진짜 개시발 새끼처럼 굴긴 했죠.”

지금도 그렇지만. 장난스럽게 덧붙은 말에 인섭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인데.”

이우연은 인섭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인섭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상대의 감정을 허물어트렸다. 이우연은 말없이 인섭을 끌어당겨 다시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인섭을 침대에 눕히고 제가 그 위에 올라탔다. 가볍고 장난스러운, 방금 전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관능적인 몸짓이었다.

이우연은 고개를 숙여 인섭의 가슴을 빨았다. 도드라진 유두를 입에 넣고 굴리자 인섭이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인섭은 자극에 유독 약했다. 익숙해질 만도 한 행위에도 어쩔 줄 몰라 하며 끙끙 앓아 댔다. 그게 이루 말할 수 없이 귀여워서 이우연은 일부러 인섭이 소리를 낼 때까지 자극을 멈추지 않았다.

“응…, 읏.”

인섭이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버티는 것을 이우연은 알아챘다. 그럴수록 혀로 집요하게 젖꼭지를 문지르며 이를 세워 질근질근 자극했다.

“…흣.”

인섭이 허리를 뒤틀며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우연의 단단한 배에 인섭의 반쯤 일어선 성기가 닿았다. 인섭이 미약하게나마 몸을 비비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이우연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자지 빨아 줄까요?”

거절당할 걸 예상하고 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빨아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인섭이 생각하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네. 부탁드립니다.”

세상에서 제일 예의 바르게 펠라를 부탁하는 제 연인을 보며 이우연은 웃음을 삼켰다. 허락까지 받았으니 기꺼이 인섭의 다리 사이에 고개를 파묻었다.

인섭의 살결은 부드러웠다. 자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우연은 인섭의 허벅지를 붙들어 벌리고는 부드러운 살덩이를 단번에 삼켰다.

“아…!”

젖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우연은 인섭의 엉덩이를 움켜쥐고 그의 성기를 제 혀에 문질렀다. 인섭이 연신 달뜬 소리를 내며 몸을 뒤틀었다. 몇 번 빨아 주지도 않았는데 벌써 성기 끝에서 물이 질질 새어 나왔다. 시큼한 맛이 입 안에 맴돌았지만 그것마저 좋았다. 이우연은 삼 일 굶은 개처럼 인섭의 자지를 핥으며 흥분했다.

“아, 응…, 으.”

이내 인섭이 숨을 헐떡이며 이우연의 어깨를 밀어냈다.

“저, 가, 갈 것…같….”

이우연은 놓아주지 않고 인섭이 사정할 때까지 힘을 빼지 않았다.

“우연 씨, 잠깐, 아…!”

인섭이 사정하는 순간 이우연은 물고 있던 성기에서 입을 뗐다. 뿜어져 나오는 정액이 그의 깎아 놓은 듯한 얼굴을 적셨다. 뜨끈한 액체가 흐르는 느낌에 이우연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웃었다.

“괘,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이우연은 대충 손으로 얼굴을 문질러 정액을 닦아 냈다.

“죄송합니다. 제가….”

인섭이 이우연의 얼굴에 묻은 정액을 닦아 내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이우연이 인섭의 손을 붙들고 혀로 핥았다. 손가락 끝에서 팔꿈치까지, 긴 궤적을 남기며 핥으며 이우연은 인섭을 직시했다. 단정한 남자의 얼굴이 잔인한 정욕으로 물들었다. 발정기 수컷처럼 그의 흥분에는 분노가 섞여 있었다. 바로 사정을 한 직후인데도 인섭은 아래로 피가 몰리는 것을 느꼈다.

“인섭 씨.”

정중하게 노크하듯 이우연이 인섭을 불렀다. 침대 위에서 이런 식으로 부를 때마다 그가 음란한 요구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긴장감으로 인섭의 입술이 바싹 말랐다.

“인섭 씨.”

이우연이 인섭의 팔 안쪽을 씹으며 다시 이름을 불렀다.

“…네.”

“나 인섭 씨 아래 빨고 싶은데.”

이미 아래라면 한차례 빤 후였기에 그가 요구하는 게 무엇인지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었다.

“싫어?”

이우연이 슬쩍 눈을 치뜨며 묻는다. 인섭은 말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우연은 그를 다시 침대에 눕혔다. 허벅지가 붙들리고 허리가 위로 치켜 올라갔다. 자세에 수치심을 굴욕감을 느끼기도 전에 쾌감이 들이닥쳤다.

“아….”

혀가 내밀하게 오므라진 틈을 파고들었다. 인섭은 시트를 움켜쥐었다. 이우연이 인섭의 다리를 제 어깨에 걸치고 혀를 움직였다. 춥춥 소리를 내며 집요하게 틈을 벌리는 축축한 살덩이에 인섭은 눈을 질끈 감았다. 질척이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인섭은 이어질 상황에 대한 기대감에 아랫배가 근질거렸다. 인섭은 밭은 숨을 몰아쉬며 허리를 뒤틀었다.

이우연이 낮게 웃었다.

“인섭 씨, 그거 알아요?”

그가 손가락으로 구멍의 주름을 슬슬 문질러 펴면서 말을 이었다.

“좆 빨아 줄 때보다, 지금 더 느끼는 거.”

“……!”

인섭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증거로 손끝 하나 대지 않았는데 성기가 꺼덕꺼덕 일어선 채였다.

“좋아요?”

이우연이 묻는다.

“…네.”

인섭은 순순히 대답했다.

“오늘따라 정말 왜 이렇게 예쁘게 굴지.”

그가 인섭의 엉덩이 살을 씹으며 중얼거렸다. 수줍음이 많은 인섭이 침대에서 이 정도로 솔직하게 나오는 건 이전에 없던 일이었다.

“이우연 씨가 좋아서요….”

인섭이 또 제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저를 올려다보는 발갛게 젖은 눈매가 이우연의 욕구를 뒤흔들었다.

“하아, 시발, 미치겠네.”

이우연이 초조하게 혼잣말을 삼켰다. 오늘은 절대 넣을 생각이 없었다. 인섭을 무리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셔도 돼요.”

인섭이 이우연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렇게 말했다. 이우연이 쓰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제가, 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인섭이 조그만 목소리로 제 욕망을 밝혔다. 이우연의 눈에 언뜻 이채가 스쳤다.

“뭘 하고 싶으세요?”

이우연이 인섭의 구멍을 문지르며 다시 물었다. 명확하게 인섭의 입으로 직접 자신을 원한다는 말을 듣길 원했다.

“…성교하고 싶습니다.”

“앞서 한 것도 성교잖아.”

타액에 젖어 질척거리던 구멍에 얕게 손가락을 비비듯 문지르며 이우연이 말했다. 손가락 끝이 구멍에 침범할 때마다 인섭의 가느다란 몸이 바르르 떨렸다.

잔상처럼 흐트러지는 움직임에 이우연은 눈을 가늘게 떴다.

예뻤다.

오르내리는 가슴과 피가 몰려 발그스름하게 물든 성기,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눈망울, 시트를 쥐었다 폈다 반복하는 손가락, 무릎에서 이어지는 발목까지의 선.

뭘 찾아내도 다 예쁘게만 보였다.

“…삽입 섹스요.”

인섭이 구체적인 단어를 입에 올렸다. 솔직하게 굴려고 작정했는지 눈썹 부근까지 발갛게 달아올랐으면서도 꼬박꼬박 대답하는 모습이 집어삼키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의, 의사 선생님께 여쭤봤습니다. 이우연 씨도 보셨던 주치의 선생님께요. 괜찮다고 하셨는데…. 우연 씨가 싫지 않으시면… 아!”

인섭의 몸이 일순 굳었다. 뭉툭한 성기 끝이 인섭의 구멍을 벌리며 침입했다.

“내가, 이걸 싫어한다고?”

두꺼운 귀두가 아슬아슬하게 벌어진 틈에 걸렸다.

“시발, 미치지 않고 그럴 리가.”

이우연이 한 번 더 허리를 박았다. 가까스로 벌어진 구멍이 성기를 머금었다. 반쯤 성기가 삽입된 상태로 이우연이 매트에 팔을 뻗어 엎드린 후 숨을 몰아쉬었다. 끝까지 박아 넣고 싶은 걸 참아 내느라 그의 팔뚝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선생님께서 성생활 때문에, 심장에 무리가 갈 확률은 거의 없다고 하셨…, 읏.”

인섭의 몸이 흔들리며 눈이 퍼뜩 커졌다.

“내 좆 넣은 채로 딴 놈 얘기 하지 마세요.”

이우연의 눈빛이 질투로 번들거렸다. 아까보다 깊게 박힌 성기 때문에 인섭의 이마에 식은땀이 고였다.

“하아, 천천히 움직일 테니까….”

이우연이 손바닥으로 인섭의 이마를 쓸어 올린 후 입을 맞춰 주었다. 그의 말대로 성기가 천천히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이우연이 인섭의 목덜미를 슬근슬근 깨물며 성기를 비볐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남자는 인내심을 발휘해 움직였다. 젖은 뱀이 아래를 천천히 파고드는 것만 같아 인섭은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냥…, 아, 읏.”

인섭이 이우연의 등을 끌어안았다. 무서웠다. 아래서부터 먹혀들어 가는 생경한 감각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우연이 인섭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이마에 맺힌 땀이 인섭의 입술에 툭 떨어졌다.

“다, 너, 넣으셨….”

“아직 다 안 들어갔어요.”

인섭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는 이우연에게 매달리다시피 입을 맞추며 제발이요, 하고 부탁했다. 제발 넣어 주세요, 부탁드려요, 빨리…, 아, 제발.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이우연은 인섭의 엉덩이를 쥔 채로 남아 있던 성기를 그대로 한 번에 박아 넣었다.

“아!”

인섭이 자지러지는 신음을 냈다. 성기를 문 내벽이 바르르 경련하고 구멍이 빠끔거리며 맥동했다. 단순한 반응이 아니었다.

일시에 긴장했던 인섭의 몸이 이내 축 늘어졌다. 처음 겪는 인섭의 반응에 처음엔 조금 당황하던 이우연은 이내 긴 웃음을 그렸다.

“이젠 싸지도 않았는데, 갈 줄 아시는군요.”

“……!”

이우연이 간신히 넣었던 성기를 빼낸 다음 힘껏 박아 넣었다. 인섭이 커다란 눈을 홉뜨고 이우연의 팔을 붙들었다.

“뒤로 넣어 주는 게 좋아요?”

이우연이 물었다. 짓궂은 질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인섭이 저속한 말을 해 주길 바랐다.

“네, 좋아, … 좋아해요.”

인섭이 이우연을 끌어안은 채로 대답했다. 아래에서 흔들리는 몸을 내려다보며 이우연은 재차 물었다.

“혼자 할 때, 뒤에 만져 본 적 있어요?”

“…저번에 한 번.”

예상을 깬 대답이 돌아왔다. 인섭이 혼자 뒤를 만지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좆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우연이 이를 사리물며 사정감을 눌렀다.

“혼자 구멍 만지면서, 자위했어? 내 생각 하면서?”

“…흣, 네, 이우연 씨 생각…, 하면서, 읏, 응.”

다리에 힘을 줘 치받을 때마다 인섭의 가느다란 몸이 리드미컬하게 흔들렸다.

“하아, …널 어떻게 밖에 내보내. 예쁘기만 하면 됐지, 이젠 좆같이 야해져서. 다른 사람한테 웃어 주지 마. 진짜 돌아 버릴 거 같아.”

“…저도.”

인섭이 이우연에게 매달린 채 흔들리며 말을 이었다.

“저도, 싫어요. 이우연 씨, 저한테만, …해 주세요. …다른 사람은 만나지 마세요.”

“걱정 마세요. 앞으로도 네 구멍에만 박아 줄게요.”

부드러운 살갗에 땀이 배어났다. 진해진 체향이 정액 냄새와 뒤엉켜 남자를 자극했다.

이우연은 인섭에게 키스했다. 두 사람의 혀가 외설적으로 얽혔다. 어린 짐승이 내는 듯한 앓는 소리가 이어졌다. 철벅철벅, 허벅지가 부딪치고 뼈가 닿았다.

“인섭 씨, 인섭 씨…, 하, 너무 좋아.”

이우연이 인섭의 엉덩이를 제 사타구니에 당기며 뇌까렸다. 머리가 저릿저릿했다. 단순한 성적 쾌감이 아니었다.

인섭의 표정, 숨소리, 신음, 몸짓.

모든 신경이 인섭에게 쏠렸다.

“저도, 거기 닿아서, 좋아…, 아! 응, 흐으, 읏.”

성기의 뭉툭한 끝이 같은 지점을 찔러 올릴 때마다 인섭은 자지러지는 신음을 냈다. 구멍이 오므라들었다가 풀어지기를 반복했다.

“하아, 응…, 우연 씨….”

인섭이 이우연을 불렀다. 우연 씨, 우연 씨…. 성기가 깊게 안으로 들어오면 인섭은 이우연의 이름을 불렀다. 무아지경이었다. 이우연은 인섭과 눈을 마주치며 응, 하고 대꾸했다.

“…미안, 해요, 더 노력해서 잘할 테니까….”

인섭이 울먹거렸다. 아까 이우연이 했던 말이 못내 신경 쓰인 모양이었다. 오늘따라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온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더 잘하지 마.”

이우연이 낮게 인섭을 을러대며 말을 이었다.

“난 니가 숨만 쉬어도 발정하니까, 잘하지 마. 그럴 필요 없어, 아까 다 병신 같은 개소리였으니까, 씹할.”

인섭의 커다란 눈에 맺힌 눈물이 아롱져 떨어졌다.

“너는, 그런 얼굴을 하고…, 자지를 씹어 먹을 것 같은 보지를 해서, …사람을 환장하게 하지.”

인섭이 울먹거리며 이우연의 목을 끌어안고 얼굴을 비볐다. 그 몸짓이 뜻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얼마든지 원하시는 대로 하셔도 돼요.’

광기 어린 열기가 머릿속을 침범했다. 젖은 몸이 무너지듯 인섭의 위로 겹쳐졌다. 이우연은 처음 성에 들뜬 소년처럼 인섭에게 마구잡이로 제 몸을 부딪쳤다. 콱콱 박아 올릴 때마다 성기가 타들어 갈 것 같은 감각이 전류처럼 몸의 중심을 타고 올라왔다.

지금 당장 죽어도 좋을 것 같은 쾌감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좋은 것은.

“…우연 씨, 좋아, …좋아해요, 너무, 좋아…, 아.”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주제에 연신 제 마음을 고백하는 인섭의 모습에 심장에 왈칵 피가 몰렸다.

“우연 씨, 하아, 우연 씨….”

인섭이 울면서 매달렸다. 이우연은 입술을 짓깨물었다. 제가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랑해요.”

인섭이 어떤 거리낌도 없이 제 마음을 드러냈다.

지금 당장 죽고 싶었다. 이우연은 인섭의 몸을 붙들고 그 안에 파정했다. 인섭의 엉덩이를 힘껏 손에 쥐고 벌어진 틈을 뜨끈한 정액으로 가득 채웠다. 곧이어 인섭이 몸을 떨며 사정했다.

두 사람 모두 가쁘게 숨을 몰아쉬다가 눈이 마주치자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다급하게 입을 맞추었다. 젖은 입술이 비벼지는 소리가 멈추었다. 인섭은 열기에 흐려진 눈으로 이우연을 올려보았다. 이우연이 인섭을 추어올려 눈높이를 맞췄다. 시선이 맞물렸다.

이우연은 인섭의 동그스름한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쓸어내릴 때마다 인섭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눈을 깜빡였다.

“가끔 나는,”

커다란 까만 눈이 어떤 의도도 없이 상대를 비춘다. 이우연은 인섭의 눈을 볼 때 양극의 감정을 느꼈다. 온몸이 오싹 떨릴 만큼 사랑스러우며….

“인섭 씨가 무서워요.”

…발끝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기분.

가져 본 적이 없기에 몰랐다. 소중한 상대가 이토록 두려운 존재가 되리라는 걸.

이우연이 그렇게 제 감정을 밝히자 인섭은 조금 당황한 듯 표정이 굳어지다가 이내 입을 뗐다.

“…괜찮아요. 저도 가끔 이우연 씨가 무섭습니다.”

솔직한 고백에 이우연은 웃음을 터트렸다.

“고맙네. 가끔 무섭다고 해 줘서. 나 같은 새끼한테.”

“아, 아닙니다. 이우연 씨가 왜….”

이우연이 이번에는 인섭을 숨도 쉬지 못할 만큼 꽉 끌어안았다.

“…나 니가 왜 이렇게 좋지.”

이전에도 했던 말이었다. 혼잣말 같은 고백에 인섭은 그때 가만히 얼굴을 붉히기만 했다.

“제가 이우연 씨를 그만큼 좋아해서, …그런 거 같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확실하게 답하고 싶었다. 이우연은 미묘한 표정으로 그런 인섭을 한참 동안 내려 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나랑 같이 살래요?”

갑작스러운 청에 인섭은 놀랐는지 굳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우연은 제가 일을 망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최소한 근사한 저녁 식사라도 하면서 물어야 했는데. 이우연은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인섭에게 잘 보이려고 준비했던 슈트도 트로피도 없었다. 심지어 벌거벗은 채였다.

“미안해요. 못 들은 걸로 하세요. 제가 괜한 말을 했네요.”

“…괜한 말씀이십니까?”

인섭이 되물었다. 그러고는 다시 말을 잇는다.

“우리 관계에서 누군가 뭔가를 잃는다면 그건 이우연 씨가 될 겁니다. 전 우연 씨가 쌓아 올린 것들을 망치고 싶지 않아요. 그런 것들이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인섭의 시선이 이우연에게 매달리듯 얽힌다.

“가끔은 그런 것들은 뒤로 두고 싶다는 이기심이 들어요. 그냥, 그렇게 이우연 씨께 욕심이 생겨요.”

그 무엇에도 더럽혀질 것 같지 않던 무구한 눈동자에서 자신에 대한 욕심을 확인한 순간, 이우연은 빠듯한 충만감을 느꼈다.

“인섭아.”

이우연이 인섭을 불렀다. 존칭이 아닌 이름으로 부르는 건 드문 일이었다. 인섭은 얼굴에 뜨끈하게 열이 올랐다. 이우연에게 꽉 끌어안겨서만은 아니었다.

“난 너만 있으면 돼.”

그렇게 말해 놓고야 이우연은 깨달았다.

최인섭이 자신 그 자체를 바라 주길. 배우 이우연이 아닌, 학교에서 유일한 동양인 쿼터백도 아닌, 그냥 이우연이란 인간을.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손에서 식은땀이 났다. 제가 얼마나 뻔뻔한 걸 바라는지 알아챈 터다. 이우연은 인섭의 사랑스러운 눈을 앞에 두고 칼끝을 마주한 것처럼 긴장했다.

“…저 가끔 혼잣말해요. 한국에서 혼자 지낸 시간이 길어서. 아니, 미국에서도 자주 그랬어요. 친구가 별로 없었거든요. 그리고 밥도 잘 못 만들고…. 아프면 침대 밖으로 나가기 싫어해요. 그리고… 아침에 잠도 많은데.”

거기까지 말해 놓고 인섭은 그래도 괜찮나요? 하고 묻는다. 어처구니없을 만큼 사랑스러운 고백에 잔뜩 긴장한 제가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우연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우리 집에서 사람 몇 죽여 없앤다 해도 괜찮아요.”

“…안 합니다.”

“개도 키워도 되고.”

“…….”

“고양이도, 풀도. 뭐든 키워요. 미국에서 지내도 괜찮아요. 인섭 씨 좋을 대로 해요. 나는 인섭 씨만 있으면 되니까.”

인섭은 구물거리면서 이우연의 가슴에 제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고는 작은 목소리로 고양이 한 마리만 키울게요, 하고 대꾸했다.

이우연은 인섭의 둥그스름한 머리를 끌어당겼다. 하나를 쥐었을 뿐인데 모든 걸 가진 기분이었다. 숨을 한껏 들이켰다. 그 풍요로운 충만감에 저절로 눈이 감겼다.

“…졸리세요?”

인섭의 물음에 이우연은 응, 하고 대꾸했다. 인섭이 이우연의 가슴을 도닥이며 주무세요, 한다. 마치 어린애를 재우듯.

이우연은 눈을 두어 번 껌뻑였다가 다시 길게 감았다. 겹쳐진 심장 소리가 부드럽게 자신을 달랬다.

거짓말처럼 의식이 부드럽게 수면에 잠겼다.

***

창가에 앉아 책을 읽다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또다. 시선이 마주치자 소년은 불에 덴 듯이 놀라며 얼굴을 숙였다. 천적을 발견하고 굴로 제 몸을 숨기는 작은 동물 같은 몸짓이다.

이름이 뭐였더라. 꼭 저 같은 이름을 가졌었는데….

[무슨 책을 읽고 있어?]

대답 대신 웃으며 제가 읽던 책의 표지를 보여 줬다.

[항상 어려운 책을 읽고 있더라. 넌 참 특별한 거 같아. 우리 사촌도 풋볼 팀 주장이었지만, 난 걔가 책을 읽는 걸 본 적이 없는데.]

관심도 없는 얘기를 주절거리는 상대를 보며 그래? 하고 되물어 준다. 대체로 사람을 상대하는 건 늘 지겨웠다.

[오늘 밤에 알렉스 집에서 파티 있는 거 알지?]

[물론.]

[누구랑 같이 갈지 정했어?]

자신이 누구와 사귀는지 뻔히 알면서도 여자는 뻔뻔하게 제 팔을 붙들어 은근슬쩍 가슴에 댔다.

[미안. 오늘 선약이 있어서.]

[나도 같이 갈 상대 정도는 있어.]

새치름하게 쏘아붙이는 목소리에 웃음이 났다.

시발. 있건 말건 나랑 무슨 상관인데.

[선약이 없었으면 너에게 같이 가자고 했을 텐데. 아쉽네.]

마음에도 없는 말에 여자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너만 좋으면 나는….]

관심도 없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상대가 뭐라고 떠들어 대는지 어떤 감흥도 일지 않았다. 팔짱을 낀 채로 그럴듯한 미소를 지으면 그만이니까.

아, 오늘 저녁 메뉴가 뭐였더라.

[…네 생각은 어때?]

[생각해 볼게.]

다시 웃었다. 웃는 자체는 좆같았지만 효과가 가장 좋았기에 자주 웃는 편이었다.

[그래. 생각해 보고 연락 줘.]

고개를 끄덕이고 읽던 책의 귀퉁이를 접어 덮었다. 아까 그 소년이 이쪽을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아하. 그런 건가.

하긴 얘 정도면 이 반에서 제일 예쁘다고 할 정도는 될 테니까. 그런데 저런 것도 여자에 관심을 갖긴 하는구나. 좆도 제대로 세우지 못하게 생겨서는.

조그만 게 여자 위에 올라타서 끙끙거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자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불쑥 치솟는 잔인한 욕구에 돌아서려던 여자를 불렀다.

[생각이 바뀌었어.]

[뭐가?]

[오늘 파티 나랑 같이 가자.]

책상에 앉은 소년의 얼굴에 삽시에 실망감으로 어두워졌다. 아주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파티는 예상대로 지루했다. 나중에 나타난 여자 친구와 이번 데이트 상대가 뒤엉켜 싸운 걸 제외하면.

싸울 정도로 사람을 좋아하다니. 얼마나 비생산적인 지랄인지.

피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모퉁이를 도는데 앞서 달려오던 누군가와 부딪쳤다. 동시에 바닥에 책이 떨어졌다. 중얼거리듯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상대는 책을 줍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눈을 장식으로 달고 다니냐고 발로 걷어차고 싶었지만, 같이 책을 주워 주었다.

‘감사합….’

상대의 커다란 눈이 얼어붙었다.

겁을 먹은 듯한 커다란 눈도 그랬지만, 흰 피부에 있는 주근깨 때문에 전체적으로 어려 보이는 인상이었다.

‘안 다쳤어요?’

웃으며 물었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어디 다친 건 아니죠?’

다치면 귀찮아진다. 어머니는 제가 사람을 다치게 하는 데에 신경 쇠약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으니까.

상대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머리통이 흔들리는 멍청한 모습이 재미있었다.

‘이 책, 재미있어요?’

손에 책을 든 채로 물었다. 그렇게 물으면 또 고개를 끄덕일 거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소년은 고개를 내젓지도 끄덕이지도 않고 얼어붙은 듯이 서 있기만 했다.

커다란 눈이 자신을 바라보았다. 작은 동물을 대하는 기분이었다. 어릴 때부터 작은 동물이 싫었다. 조금만 힘 조절을 잘못해도 책임져야 할 일이 생기는 터다.

‘읽고 재미있으면 나중에 빌려줘요.’

책을 건네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아, 피터.

몇 걸음 떼지 않고 소년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유명한 동화에 나오는 토끼의 이름과 같았다.

딱 저 같은 이름이네.

피식 웃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금세 기억 속에서 소년의 이름을 지웠다. 평생이 가도 저런 것과는 인연이 없을 테니까.

유난히 햇살이 따스한 오후였다.

잠결에 눈을 뜨자 누군가 등을 도닥였다.

“더 주무세요. 계속 못 주무셨잖아요.”

“그런 게 재미있어요?”

“네?”

“난 별로 재미없던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이 다시 의식 속으로 잦아든다. 잠꼬대하신 거예요? 하는 물음 뒤에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잔물결이 찰랑이는 듯한 소리였다.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누구지.

이름이 뭐였더라. 기억이 날 듯 말 듯, 잠이 밀려들었다.

분명 딱 저 같은 이름을….

“……!”

눈을 뜬 순간, 흐릿했던 수면과 현실의 경계가 명확하게 갈렸다. 창밖은 어느새 어둑어둑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인섭 씨.”

이우연은 인섭을 불렀다. 침대 옆은 텅 빈 채였다. 대답 대신 고요한 침묵이 돌아왔다.

바로 손을 내려다보았다. 말끔한 손을 확인하고도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시트를 걷어 침대 아래까지 확인했다.

어제 벗어 놓은 옷이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제 머릿속에 남은 기억이 모두 꿈일 수 있다는 사실보다, 이 모든 게 현실일 수 있다는 게 더 무서웠다.

옷을 걸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방 밖으로 나갔다. 욕실을 확인했다. 텅 비어 있었다.

“인섭 씨.”

이우연은 인섭을 불렀다. 여전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 층은 물론, 일 층으로 내려가 모두 확인해도 마찬가지였다. 인섭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

눈앞이 까맣게 흐려졌다.

어디에 간 거지. 내가 또 뭔가 잘못한 걸까. 어떻게 했어야 하는 걸까. …더는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여기저기서 끊어 붙인 듯한 생각이 이어졌다. 잊고 있던 날카로운 두통이 관자놀이를 찔렀다. 이건 누군가의 행동이나 감정을 흉내 낼 수도 없었다. 오롯이 제가 가진 것만을 내비쳐야 했다.

동전 몇 푼 가지지 못한 주제에 보석이 갖고 싶어서 안달 내는 비렁뱅이가 된 기분이었다.

이우연은 이마를 누른 채로 숨을 몰아쉬었다.

일단 어떻게든 찾아야 했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 옷장을 열고 대충 맞는 옷을 꺼내 입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던 차 키를 주워서 일 층으로 내려가던 중에 이우연은 멈칫 걸음을 멈췄다.

위에서 들려오는 아주 작은 소음을 느낀 것이다. 3층은 테라스였다. 옥상 정원을 꾸미겠다고 김 대표가 온갖 나무들을 가져다 놓았다가, 무성하게 자라는 잡초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아예 손을 놓아 버린 곳이었다. 그리고 테라스 한편에는 세탁실과 창고가 있었다.

계단을 올라갔다. 미묘하게 들리던 소음이 조금씩 명확해졌다. 그렇지만 심장을 바싹 당긴 긴장감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몇 개 되지 않는 계단을 오르는 와중에도 손바닥을 몇 번이나 확인했는지 모른다.

테라스 문 앞에서 멈칫 멈추어 섰다.

문을 여는 순간, 이 모든 게 꿈이고 다시 처음부터 인섭을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까스로 붙든 이성이 아득해졌다.

처음으로 정상이 아닌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평범했다면, 이런 비참한 박탈감은 느끼지도 않았을 텐데.

눈이 가려진 채 까마득한 어둠을 걷는 기분이었다.

천천히 손을 내밀어 문고리를 돌렸다.

조금씩 열리는 문틈 사이로 물 냄새가 훅 끼얹어졌다. 얼마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게 호수를 뒤덮은 안개 냄새라는 걸 깨달았다.

시트를 몸에 두른 인섭이 세탁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제가 온 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호숫가를 바라보며.

물가에 인 물안개가 하얀 꽃처럼 사방에 만개했다. 땅거미가 진 어둠을 물기를 머금은 꽃이 흐릿하게 밝혔다. 바람이 이끄는 대로 흐르는 안개를 인섭은 찬찬히 바라본다.

한 번도 풍경을 보며 아름답고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그걸 보며 인섭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길 바라는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 깨셨어요?”

인섭이 그제야 이우연을 발견했는지 고개를 돌리며 웃는다. 하얀 얼굴에 번지는 웃음이 눈에 아로새겨졌다.

아름다웠다.

인섭이 속한 세계가, 그가 발을 딛고 선 풍경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옷이 젖어서 세탁기 돌리던 중이었습니다. 더 주무시라고 혼자 나온 건데.”

인섭이 시트를 추슬러 올리며 말했다.

이우연이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서 있자 인섭의 얼굴에서 웃음이 걷힌다.

“괜찮으세요?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니죠?”

걱정 어린 시선이 저를 붙든다. 그 평범하고 다정한 감정에 도리 없이 사로잡힌다.

몇 번이고 너는, 나를 약하고 어리석게 만들어 사랑했다. 그게 못내 좋아 견딜 수 없었다.

“…괜찮습니다.”

이우연이 고개를 들었다.

테라스 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물기를 머금은 바람이 몸을 감싸 안았다.

사위의 어둠이 물러갔다.

이우연은 숨을 내뱉고 걸음을 내디뎠다. 그렇게 인섭이 속한 풍경으로, 한 발자국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숱하게 남은 평범한 날 중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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