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07 (8/13)

“저쪽에 차 세우면 돼.”

인섭이 김강우에게 차를 세울 곳을 정확히 알려주었다.

“사람 진짜 많네요. 저기에 바로 세우면 돼요? 아님 더 가야 하나?”

이런 공식적인 행사는 처음인 터라 김강우는 조금 긴장한 듯 보였다.

“진행 요원 앞에 바로. 일단 여기 세워 두고.”

인섭은 정차할 장소를 차분하게 알려 주었다. 앞서 밴에서 내린 여배우가 레드 카펫을 밟으며 사진 촬영 시간을 갖고 있었기에 정차를 하고 조금 기다려야 했다.

“시간을 두고 입장하는 게 예의라서.”

인섭이 김강우에게 친절하게 설명하며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오는 내내 이우연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저 묵묵히 창밖을 바라볼 뿐.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는데.

“도착했습니다. 곧 나갈 준비 하셔야 합니다.”

“그런가요.”

생각에 잠겨 있던 이우연이 이내 시선을 돌렸다. 인섭은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려 뒷좌석으로 갔다.

“잠시만요.”

인섭은 타이의 모양과 옷매무새, 헤어스타일을 모두 꼼꼼하게 살폈다. 손댈 곳은 보이지 않았다. 원래는 코디가 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이우연은 따로 코디를 두지 않는 탓에 이런 일까지 모두 매니저의 몫이었다.

“확인 다 했습니다.”

“어떤가요?”

이우연이 물었다.

“배우님 오늘 아주 그냥….”

김강우가 몸을 돌려 끼어들려다가 입을 합 다물었다. 이우연과 눈이 마주친 것이다. 이우연이 별다른 말을 하거나 매서운 눈빛을 보낸 것도 아니었다. 그저 스윽, 김강우를 일별했을 뿐.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말로 설명하기 힘든 위압감이 전해졌다.

“어떤 거 같아요. 인섭 씨.”

이우연이 다시 시선을 인섭에게 돌렸다.

“괜찮습니다.”

“그냥 괜찮은 정도예요?”

이우연은 제 외모가 어떠한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눈이 멀지 않은 이상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이우연은 본인의 외모를 활용하는 걸 거리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과시하는 타입은 전혀 아니었기에 인섭은 이우연의 질문이 의아하기만 했다.

“다른 옷으로 갈아입을까요?”

농담을 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여차하면 정말 차를 돌려 옷을 갈아입으러 갈 것 같았다. 인섭은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완벽하시니까….”

이우연의 표정이 그제야 풀렸다. 마치 그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이.

“다행이네요. 오늘은 완벽하고 싶었는데.”

항상 완벽해 보인다는 말을 하려다가 인섭은 입을 다물었다. 평범한 매니저가 할 법한 발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의해야지.

인섭은 얼른 정신을 가다듬었다.

“지금 이동하면 될까요?”

레드 카펫을 주시하던 김강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그래. 천천히.”

밴이 천천히 레드 카펫 앞으로 이동했다. 밴이 멈추어 서자 진행 요원이 차 문을 열어 주었다. 이우연의 모습이 언뜻 보이자 밖에서 비명 소리와 카메라 셔터 소리가 소나기처럼 퍼붓기 시작했다.

인섭은 저도 모르게 차 안쪽으로 몸을 움츠렸다. 이 순간만큼은 원치 않아도 오롯이 깨닫게 되었다. 자신은 죽는 날까지 카메라 앵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면.

“꺄아아아.”

“우연 오빠!”

“오빠. 너무 잘생겼어요!”

“이우연 씨. 여기 좀 봐 주세요.”

“이쪽이요. 이쪽!”

절대적인 환호와 폭력적인 관심 사이로 남자는 유유히 걸음을 내디뎠다.

슈트의 단추를 잠그던 이우연이 문득 뒤를 돌아본다.

“그럼 이따 봬요.”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지만,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인섭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번에는 드라마 찍으시는 건가요?”

“글쎄요. 아직 정확한 계획은 잡혀 있지 않아서요.”

“좋은 영화 대본 받으신 거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선배님이랑 같은 작품 찍고 싶어요.”

“기회가 되면 그렇게 해요.”

이우연이 팔짱을 끼고 선 채로 가볍게 웃어 보였다.

“정말요? 약속하셨어요! 저 진짜 선배님 연락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저 데뷔 때부터 선배님이랑 같은 작품 출연하는 게 꿈이었어요.”

“아하. 그러시군요.”

인섭은 이우연의 저 ‘아하. 그러시군요’가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네가 떠드는 말에 관심 없으니 꺼져 줄래?쯤 될 것이다.

“선배님 나온 작품도 다 봤어요. 영화 열한 작품도 DVD로 다 갖고 있고요.”

…열세 작품인데.

인섭은 말없이 테이블을 정리하며 생각했다.

“아하. 그러시구나.”

이우연의 목소리가 점점 낮게 가라앉았다. 잠시 인사를 하겠다고 들른 아이돌 출신 신인 배우는 대기실 앞을 떠나지 않고 벌써 오 분째 비슷한 말을 떠들어 대고 있었다.

“선배님 혹시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

이우연의 웃는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인섭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매니저가 나서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여기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네?”

“여기 전화번호 찍으세요.”

이우연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어머! 진짜요? 대박.”

상대가 얼른 이우연이 내민 핸드폰을 받아서 본인의 번호를 찍어서 돌려주었다. 이우연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벨 소리가 울리자 상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번호 저장할게요. 선배님. 나중에 연락드려도 되죠?”

“그러세요.”

이우연이 특유의 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나중에 봬요, 하고는 문을 닫는다.

“문 잠글까요?”

인사를 드린다거나 미리 대상 시상을 축하한다는 식으로 찾아온 사람이 벌써 두 손으로 꼽고도 남았다.

“됐어요. 어차피 이것도 일인데.”

이우연은 소파에 깊숙이 앉으며 재킷 단추를 끌렀다. 인섭은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이우연에게 물었다.

“아까 그거 강우 핸드폰 아닌가요?”

이우연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역시 김강우의 핸드폰이었다.

“아, 그래요? 몰랐네.”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강우한테 제가 따로 말해 놓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투였다. 그러고는 맞은편 자리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인섭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맞은편에 앉았다.

이우연은 턱을 괸 채로 인섭을 바라보았다. 바라보고,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필요한 거 있으신가요?”

“없어요. 지금은.”

담백한 대답인데도 이상하게 나중에는 필요한 게 꼭 생길 것 같다는 의도가 느껴졌다. 괜한 생각이겠지. 이우연의 시선 때문인지 인섭은 생각이 엉망으로 꼬이는 기분이었다.

“오늘 반응 좋으시더라고요.”

인섭은 애써 대화의 주제를 끄집어냈다.

“무슨 반응이요?”

“레드 카펫 반응이요. 유력한 베스트 드레서로 꼽히고 계십니다.”

이우연이 레드 카펫을 밟는 순간, 실시간으로 기사가 떴다. 가히 폭발적인 반응이었다. 수많은 댓글이 눈물로 넘쳐 났다. 예전에 인섭은 ‘ㅜㅜㅜㅜㅜㅜ’나 ‘ㅠㅠㅠㅠㅠㅠㅠ’의 의미를 알지 못해 야유를 퍼붓는 줄 알고, 열심히 그 밑에 이우연을 옹호하는 댓글을 달았었다. 이제는 그게 수많은 눈물의 표시임을 알고 있었다.

“보실래요?”

인섭이 핸드폰 화면을 이우연 쪽으로 돌리며 물었다.

“그걸 제가 왜 봐요.”

이우연이 테이블에 놓인 생수를 들며 픽 웃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였다.

“죄송합니다. 아까 하신 말씀 때문에….”

이우연이 오늘은 완벽해 보이고 싶다는 말을 했었다. 그래서 다른 때보다 훨씬 신경을 쓰는구나 싶었다.

“완벽해 보이고 싶긴 하죠.”

이우연이 제가 했던 말을 되뇌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우연이 고개를 들어 인섭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어색한 침묵이 다시 이어졌다. 인섭은 시선을 떨구었다. 이우연의 손에 들린 물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물통을 가볍게 테이블에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통에 든 물이 찰랑였다. 알 수 없는 갈증이 인섭의 목을 타고 올라왔다.

“오늘….”

이우연이 입을 떼려는 순간 대기실 문이 벌컥 열렸다. 인섭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함부로 들어오시면… 대표님?”

“그래. 대기실 안으로 함부로 들어오시면 대표님이지.”

김 대표가 씩씩거리며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소파에 앉은 이우연을 보고 눈을 부라렸다.

“니가 강우 전화기 갖고 있지! 왜 전화를 안 받아!”

“전화하셨어요? 몰랐는데.”

아까 김강우의 핸드폰을 꺼내면서 보였던 표정과 말투였다. 이우연은 거짓말에 능했지만, 본인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굳이 숨기지 않으려고 들 때가 있었다. 그때만큼 이우연이 얄미워 보이는 순간이 없었다.

“이 새끼가 어디다 구라를 쳐!”

김 대표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구라가 뭡니까, 구라가. 회사 대표님이 그런 상스러운 단어 쓰시면 어떡해요.”

상스러운 단어 선택으로는 대한민국 어딜 가도 뒤지지 않을 남자에게 지적당하자 김 대표가 강제로 소똥을 삼킨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너 상스럽다는 단어의 뜻을 알기나 하냐?”

“잘 몰라요. 외국인이잖아요.”

이우연이 어깨를 으쓱했다.

“외국인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 됐어, 너 당장….”

“인섭 씨.”

김 대표의 말을 이우연이 불쑥 가로막았다.

“네?”

“저 목마른데 음료수 좀 뽑아다 주실래요?”

“음료수요?”

인섭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테이블에 물과 음료수가 준비되어 있던 터다.

“캔 커피가 마시고 싶어서요.”

“캔 커피요?”

심지어 이우연은 캔 커피는 마시지도 않았다. 태어나서 마셔 본 캔 커피는 광고 중에 마신 게 전부며, 그 전부가 쓰레기였다고 말하곤 했다.

“네. 캔 커피요.”

“알겠습니다.”

인섭은 주머니의 잔돈을 확인했지만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여기.”

김 대표가 지갑에서 천 원짜리를 몇 장 꺼내서 건넸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커피도 뽑아 올까요?”

“…….”

김 대표가 인섭에게 애잔한 시선을 보냈다.

“싫으시면 다른 걸로 뽑아 드리겠습니다.”

“아니야. 괜찮다.”

인섭이 돈을 받아서 주머니에 넣다가 이우연을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 선호하시는 브랜드가 있으신가요?”

이우연이 좋아하는 캔 커피에 관해서는 알지 못했기에 정보 갱신이 필요했다.

인섭의 질문을 받은 이우연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이번에 알려 주시면 다음부터는 바로 기억하겠습니다.”

이우연이 한숨 섞인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무리 나라도 저렇게까지 하면 양심에 찔리는데….”

옆에서 그 말을 들은 김 대표가 양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하며 투덜거리다가 두 사람을 불안한 눈으로 번갈아 바라보는 인섭을 발견하고 지갑을 꺼내 들었다.

“자, 이거.”

이번에는 만 원짜리 지폐를 꺼냈다.

“다른 거 사다 드릴까요?”

“아니. 너 용돈…, 아니다.”

김 대표가 오만 원짜리 지폐를 서너 장 더 꺼내서 인섭의 손에 쥐여 주었다.

“맛있는 거 사 먹어라.”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대표님. 저 돈 있습니다.”

“그냥 마음이 쓰여서 주는 거야. 어른이 주시면 사양하지 않고 받아야지.”

“그렇지만….”

인섭이 오만 원짜리 지폐를 쥐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자 이우연이 예의니까 받으세요, 하고 가볍게 웃었다. 예의니 관습이니 하는 단어에 유독 약한 인섭을 설득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알겠습니다. 감사히 잘 받겠습니다.”

인섭이 김 대표에게 받은 돈을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자판기 지하 일 층으로 내려가면 있을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인섭은 꾸벅 인사를 하고 대기실을 나왔다. 계단을 내려오다가 인섭은 머리를 스친 생각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표님이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지. 분명 오늘 중요한 업무로 지방에 가신다고 하셨는데….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주머니에서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인섭은 발신인을 확인하고 얼른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기 소망 부동산이에요. 통화 가능해요?>

기다리던 전화였다.

“네. 가능합니다.”

인섭은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집주인이랑 통화를 해 봤거든. 근데 혹시 오늘 만날 수 있을까 해서.>

“네? 오늘이요? 오늘 귀국하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러니까. 오늘 귀국했는데 딸네 집이 제주도라고 내일 아침 거길 간다네. 허 참.>

부동산 주인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래서 말인데, 이따 오후에 잠깐 볼 수 있을까? 한 시간이면 될 텐데.>

“죄송합니다. 오늘은 중요한 일이 있어서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삼십 분도 안 돼? 정말 잠깐 보고 말 거야. 깐깐한 건 아닌데 독특한 양반이라 본인이 얼굴 보고 나서야 계약 허락하거든.>

“…오늘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하고 많은 날 중 하필 오늘이란 말인가. 안타깝지만, 다른 집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그 가격에 그 정도 입지에 그 정도 조건을 가진 집이 과연 나올지 의문이지만.

<에이, 그럼 안 되겠네.>

“신경 많이 써 주셨는데 죄송합니다. 다른 매물 나오면 연락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학생. 너무 기대는 말고.>

“감사합니다.”

인섭은 깍듯하게 인사하고 통화를 마쳤다. 올라갔던 기대감이 허물어지자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럼 당분간은 모텔에서 지내야 할 텐데.

인섭의 커다란 눈에 울적함이 가득 찼다. 어제도 위인지 아래인지 옆인지 모를 호실에서 밤새 야릇한 소리가 들려와서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한 것이다.

“힘내자.”

이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인섭은 애써 기운을 내고 계단을 내려갔다. 복도 구석에 세워진 자판기를 발견하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커피, 커피….”

일단 돈을 넣고 눈으로 캔 커피를 찾았다. 캔 커피의 종류만 여섯 개였다. 뭘 선택해야 할지 고심하는 사이 누군가 뒤에서 주먹으로 쾅, 자판기 버튼을 쳤다.

“어….”

인섭이 놀라서 뒤를 돌아보자 익숙한 얼굴이 능글맞은 미소를 지은 채 서 있었다.

“땡큐. 잘 마실게.”

강영모가 투출구에서 음료 캔을 집어 들며 말했다. 인섭은 입맛이 썼다. 언젠가 마주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볼 줄은 몰랐는데.

“안녕하세요.”

인섭은 불편함을 숨기고 공손하게 인사했다.

“음. 안녕 못 하시지. 누구 덕분에.”

“…….”

인섭은 대답하지 않고 자판기에 다시 지폐를 넣었다.

“내가 보낸 화분은 잘 받았어? 그거 비싼 건데 말이야.”

“…감사히 잘 받았습니다.”

결과적으로 화분은 인섭이 키우게 되었다. 나중에 분갈이를 하다가 흙 속에서 담배꽁초 여러 개를 발견하고 사무실 사람들이 얼마나 강영모를 싫어하는지 실감하게 되었다. 강영모에 대한 미움이라면 뒤지지 않겠지만, 인섭은 화초에게 해코지를 하진 못했다.

“이우연은 화분 받고도 인사 한마디 없어? 요즘 애들은 참 싸가지가 없단 말이야. 우리 때는 상상도 못 했는데.”

인섭은 고민하지 않고 모든 종류의 캔 커피를 하나씩 차례대로 뽑았다.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투출구로 차가운 캔이 떨어졌다. 인섭은 캔을 하나씩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더 이상 강영모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설마 이우연 여기 온 거야?”

걸음을 떼려던 인섭이 멈칫 멈추어 섰다. 이우연이 유력한 대상 후보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강영모는 이우연이 영화제에 참석한 게 몹시 의외라는 듯이 말한 것이다.

“오면 안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아아니. 안 될 이유는 없지.”

강영모가 오버해서 손을 내저었다. 그러고는 캔의 고리를 뜯어 음료를 한 모금 마시고는 빙긋 웃는다.

“그냥 선배로서 걱정이 좀 돼서 말이야. 괜찮겠어?”

이런 식의 대화 방식은 딱 질색이었다. 하지만 인섭은 싫은 티를 내지 않고 침착하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하고 되물었다.

“채연서랑 스캔들 난 거 말이야. 둘이 진짜 눈 맞았다며.”

인섭은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날 것 같았다.

“두 분 사귀시는 거 이미 뉴스랑 신문에 다 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니, 아니. 진짜로 맞았다고.”

강영모가 두 손을 맞잡아 소리를 내며 저질스러운 동작을 해 보였다.

“임신 4개월이라던데?”

저 얘기는 두 사람을 둘러싼 대표적인 헛소문이었다.

“더 이상 하실 말씀 없으면 가 보겠습니다.”

인섭은 뒤를 돌았다.

“그 사진 때문에 지금 이 본부장 눈 돌아갔을 텐데. 본인 바보 만들었다고 생각할 거 아니야. 그 양반 성격이 원체 불같잖아.”

“…무슨 사진 말씀이십니까.”

사진이란 단어에 인섭은 저도 모르게 당황해 목소리가 떨리고 말았다. 실수였다. 반응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호텔 들어가는 사진. 내가 잘 아는 기자가 있는데 걔 동기가 찍었다더라. 뭐 데스크에서 막아서 아직 기사는 안 올라온 모양인데, 터지는 거 시간문제라던데?”

“…….”

“이우연, 참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랑꾼이야. 하긴 그러니까 도로에서 그렇게 화를 냈겠지? 지 자식 밴 여자 욕을 하는데 가만있으면 병신이지.”

강영모가 음료를 마저 마신 후에, 빈 캔을 쓰레기통에 내던졌다.

“이제 둘이 빼도 박도 못하게 결혼 발표해야지. 이우연은 몰라도 여자 배우한테 호텔 들어가는 사진은 좀 치명적이잖아. 하하하. 오늘 수상 소감으로 채연서한테 프러포즈라도 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십니까.”

인섭은 기계적으로 대꾸했다.

“그런데 오늘 이철환 피디가 대상 시상자로 나올 텐데. 이우연 간이 큰 거야? 머리가 나쁜 거야? 둘이 투 샷으로 얼마나 많이 잡히겠어.”

오늘 채연서도 여우 주연상 후보였다. 톱 배우의 열애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얘깃거리였다. 그걸 카메라가 가만둘 리 없는 것이다.

“이철환 성격에 오늘 굴욕을 참고 있을 리가 없잖아. 당분간 작품 들어오지도 않겠네. 하하하.”

이철환은 평범한 드라마 본부장이 아니었다. 그 위력은 강영모가 몸소 겪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우연한테 대상 축하한다고 전해 줘라.”

강영모가 인섭의 어깨를 두드리고 사라졌다.

인섭은 멍하니 서서 눈을 깜빡였다.

왜 호텔에 둘이….

“아니야.”

인섭은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강영모의 말 따위에 흔들린 자신을 반성했다. 이우연이 그럴 리 없는 것이다. 별것 아닌 일로 자꾸 의심하는 버릇을 하루빨리 고쳐야….

인섭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사진….”

강영모가 이우연과 관련된 얘기만 떠들었다면, 온전히 무시했을 텐데 사진이란 단어가 유독 신경 쓰였다. 매니저는 만에 하나의 사태에도 대비를 해 둬야만 했다.

인섭은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꺼냈다. 연락처를 가진 기자는 있었지만, 이우연의 매니저가 전화를 걸어 사진의 유무에 관해 물어볼 수는 없었다. 이런 걸 물어볼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신호음이 가는 중에도 자신이 잘하는 짓인지 몰라 심장이 쿵쾅거렸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최인섭입니다.”

<어쩐 일이세요? 혹시 집 구하셨어요?>

인섭은 새집을 구하게 되면 존을 데려가고 싶다고 윤아름에게 말을 해 둔 상황이었다. 물론 윤아름과 그의 아버지는 단번에 승낙했다.

“아니요. 조금 시간이 더 걸릴 거 같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혹시 불편하거나 힘드시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목소리가 떨려요? 나쁜 일 있는 건 아니시죠?>

부탁을 한다고 운은 띄웠는데도 윤아름은 상대를 먼저 걱정했다. 그녀의 상냥함에 인섭은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름이 아니고….”

인섭은 심호흡을 했다.

“혹시 연락되시는 기자분 계시면 뭣 좀 여쭤봐 주실 수 있을까요?”

<음, 이우연 씨 관련된 거요?>

역시 그녀는 눈치가 빨랐다. 인섭은 얼른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매니저가 직접 기자한테 물어볼 수는 없겠죠. 뭘 여쭤봐 드리면 될까요?>

“혹시 지금 이우연 씨랑 관련돼서 보도 연기 내려온 기사 있는지만 알아봐 주실 수 있을까요.”

강영모의 말이 사실이라면 알고 있는 기자가 분명 더 있을 것이다.

<기사 여부만 알아봐 드리면 되나요?>

“네. 그것만 알면 됩니다. 부탁드립니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뭘. 난 또 인섭 씨 목소리가 꽉 잠겨서 무슨 일 났는지 알았네.>

“…자꾸 부탁만 드려서 죄송해요.”

<나중에 비싸고 맛있는 밥 사 주세요.>

“네. 정말 비싸고 맛있는 밥 사 드리겠습니다!”

인섭이 얼른 대꾸했다. 전화기 너머에서 윤아름이 그럼 연락드릴게요, 하고 웃음기 어린 인사를 건넸다.

통화를 마치고 인섭은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래도 한시름 던 기분이었다. 계단을 터덜터덜 올라가는 도중에도 인섭은 핸드폰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일단 김 대표님께 말씀드려야겠지. 확인되지 않았지만, 위험 요소는 모두 보고하는 게 옳았다. 대기실 앞에 서서 노크를 하려는데, 안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에는 여우처럼 약아빠진 새끼가 왜 이렇게 멍청하게 굴어!”

인섭은 얼른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행사 준비 때문에 주변이 시끄러워서 이쪽을 주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쩔 수 없잖아요.”

이우연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의 음성은 김 대표와 달리 차분했기에 문에 바싹 다가서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어쩔 수 없긴 뭐가 어쩔 수 없어.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내가 어떻게든 둘러댈 테니까 카메라 안 잡혔을 때 돌아가자.”

“가긴 어딜 가요.”

“네 커리어 생각은 안 해? 뭐 그렇게 대단한 연애라고 그렇게 유난을 떨어!”

인섭은 순간 피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하하하.”

이우연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인섭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알지 못해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눈만 껌뻑이고 서 있었다.

“할 말 다 하신 거 같은데 가 보셔야죠. 대표님.”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네 마음대로 해! 기사 떠도 수습 안 해 줄 테니까!”

김 대표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문이 벌컥 열렸다. 인섭이 숨을 틈도 없이 두 사람은 마주치고 말았다.

“……!”

김 대표의 얼굴이 당혹감이 스쳐 갔다. 그는 일단 문을 닫았다.

정말 이우연과 채연서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그래서 김 대표가 여기까지 찾아왔을까. 인섭은 머릿속이 어지러웠지만 묵묵히 서서 김 대표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잠시간의 침묵 뒤에.

“…수고해라.”

한숨 섞인 한마디와 함께 김 대표는 그대로 걸어가 버렸다. 인섭이 고개를 들었을 때, 김 대표는 이미 복도 끝으로 사라지고 난 뒤였다.

대기실 문 앞에서 인섭은 한참 동안 서 있다가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공과 사를 혼동해선 안 된다. 상황 파악이 우선이었다.

노크를 했다.

“들어오세요.”

이우연의 차분한 음성이 들렸다. 인섭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우연이 고개를 돌렸다.

“커피 사 왔어요?”

인섭은 주머니에 있던 캔을 모두 꺼내서 테이블에 조르륵 세웠다.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요.”

이우연이 잘 마실게요, 하고 그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인섭은 그런 그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입을 뗐다.

“우연 씨.”

“네.”

“어떻게 된 겁니까.”

“뭘요.”

이우연이 무표정한 얼굴로 캔의 고리를 뜯으며 물었다.

“…대표님과 나누신 말씀 들었습니다.”

커피를 입가에 가져가려던 이우연이 멈칫 고개를 들었다.

“별 얘기 아니었어요. 제 헤어가 이번에도 마음에 안 드시나 봐요.”

이우연이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의 입가에 예의 커피 향이 날 것 같은 웃음이 걸렸지만,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저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채연서 씨 기사 얘기….”

떨리는 손을 뒤로 감추고 인섭은 이우연의 대답을 기다렸다.

김 대표가 화를 내고 간 건 그 때문이 아니라고, 그냥 오해라고, 인섭 씨가 들은 얘기도 헛소문이라고. 이우연이 모두 부정해 주길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누가 그러던가요.”

이우연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인섭은 눈앞이 아득해졌다. 부정이 아니라 그 얘기를 어디에서 들었는지부터 물은 것이다.

“…아는 기자한테 들었습니다.”

기자들이 매니저한테 기사 내용을 확인하려고 연락하는 일이 종종 있었기에 인섭은 대충 둘러댔다. 괜히 강영모의 이름을 거론해 가뜩이나 좋지 않은 그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그렇군요.”

이우연이 짧게 대꾸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인섭은 그가 몹시 드물게 당혹감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아챘다.

“신경 쓰지 마세요.”

이우연이 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별일도 아니잖아요.”

이우연이 재킷의 단추를 잠갔다. 그의 움직임을 지켜보며 인섭은 그 자리에 말없이 서 있었다. 티브이 화면 속에서 연기하는 배우를 보는 기분이었다.

“…별일이 아닙니까.”

인섭이 멍하니 중얼거리자 이우연이 마뜩잖은 표정으로 낮게 혀를 찼다.

“이래서 말하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

“좋은 날인데 이게 뭐예요. 기분 잡치게.”

인섭은 하마터면 눈물이 툭 터질 뻔했다.

아. 정말 이 사람에게는 이 모든 것이 별일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

“사진이, …정말 사진이 있는 겁니까.”

사진이 있다면 매니저로서 어떻게든 이후의 상황에 대비해야 했다. 아무리 둘의 사이가 공표된 상황이라도 호텔을 들락거리는 사진이 나면 시끄러워지기 마련이니까.

머리로 그런 생각들을 하는 와중에도 어김없이 서글픔이 밀려왔다.

“있으니까 저러겠죠.”

“…….”

인섭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자신이 사귀던 남자의 결혼 소식을 기사를 통해 봤다던 윤아름의 얘기가 떠올랐다. 그나마 기사가 나기 전에 알게 되어 다행인 걸까.

그때 밖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이우연 씨, 대기 부탁드립니다’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우연이 한숨을 내쉬며 인섭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었다.

“이 바닥에서 이런 일 흔해요. 아시잖아요.”

부드러운 음성이었는데 마치 무지함을 꾸짖음 당하는 것처럼 들렸다. 부끄럽고, 비참했다. 인섭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인섭 씨.”

이우연이 인섭을 불렀을 때, 밖에서 또 한 번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갔다 와서 얘기해요. 그렇지 않아도 나 인섭 씨한테 할 얘기 있으니까.”

“…….”

인섭은 대답을 하려는데 목소리가 나와 주지 않았다. 몇 번 더 노크 소리와 이우연을 찾는 스태프의 음성이 이어졌다.

시상식은 생방송이었다. 지금 나가지 않으면 방송 사고였다.

“갔다 올 테니 기다려요.”

이우연이 인섭의 턱을 들어 올려 가볍게 입을 맞춘 후, 대기실을 떠났다. 인섭은 그가 나간 문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입술에 손을 가져다 댔다. 비현실적인 감각이 맴돌았다. 오랜만에 처음으로 그가 먼저 다정하게 입을 맞추어 준 것이다.

그때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에서 메시지 수신음이 들렸다. 인섭은 기계적으로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윤아름이었다.

「보도 대기 중인 기사 있다고 하네요. 내용은 안 물어봤는데, 필요하시면 알아봐 드릴까요? 별일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괜찮습니다. 별일 아닙….’

손가락을 움직이던 인섭은 입술을 깨물었다. 별일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답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왜 이우연은 채연서와 호텔에 갔을까. 왜 자신은 이우연에게 그녀와의 스캔들을 권했을까. …어째서 이 모든 일이 그에게는 별일 아닌 게 되는 걸까.

차라리 모든 게 오해라고 이우연이 말해 줬다면 기사가 떠도 믿었을 텐데. 그는 거짓말을 하려는 성의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이 바닥에서는 흔한 일이라고 자신을 달랬을 뿐.

인섭은 핸드폰을 쥔 채로 고개를 숙였다.

참았던 눈물이 터져 버렸다.

“사랑은, 봄에, 랄라라 아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가사를 흥얼거리던 김강우는 몸을 뒤로 쭈욱 뻗었다. 시계를 확인했다. 행사가 끝나려면 네다섯 시간은 족히 기다려야 했다.

“핸드폰은 괜히 빌려드렸나.”

심심함에 좀이 쑤셨다. 라디오 채널을 바꿔 보고 몸을 뒤척여도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근처 피시방에 가서 오락이나 한판 하고 올까.

그때 혹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차에서 떠나지 말고 늘 대기하고 있으라던 김 대표의 말이 떠올랐다. 김강우는 쳇, 하고 눈을 감고 다시 노래를 흥얼거렸다.

통장에 쌓인 돈을 생각하면 절로 노래가 나왔다. 차라리 누나에게 말하지 말고, 휴학을 한 다음 한 학기만 더 해 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노동 강도에 비해서 보수도 후하고, 눈 보신도 많이 하고, 매형들이 볼 때마다 용돈을 쥐여 주기도 하고, 밥도 사 준다. 객관적으로 매우 꿀 빠는 자리이건만, 왠지 계속할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이우연이 무서운 터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폭력을 행사하거나 갑질을 하는 것도 아닌데. 심지어 이우연은 자신에게 그 흔한 반말조차 한 적이….

“으악!”

김강우는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누군가 차 유리를 손으로 쾅 내리친 것이다. 그는 얼른 운전석 창을 내렸다.

이우연이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한창 시상식 도중이었기에 김강우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어디 있어.”

김강우는 처음에 제 귀를 의심했다. 이우연이 제게 다짜고짜 반말을 한 것이다.

“네? 뭐가요?”

“최인섭 어디 있냐고!”

김강우는 어깨를 움츠렸다. 이것도 처음이었다. 이우연이 소리를 지르다니.

“모, 모릅니다. 형님 어디 가신지는….”

이우연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내밀었다. 거기에는 인섭에게 받은 문자가 찍혀 있었다.

「강우에게 봉투 맡겨 뒀습니다.」

이우연이 문자를 받고 처음 든 생각은 ‘무슨 봉투’가 아니라, ‘왜 그걸 김강우에게’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결국 시상식 도중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기실로 달려갔지만, 최인섭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인섭의 전화기도 꺼져 있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결국 지하 주차장을 구석구석 뒤져 김강우를 찾아낸 것이다.

“아, 봉투.”

김강우가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이우연에게 건네주었다. 이우연이 빼앗듯이 봉투를 낚아챘다. 봉투에는 수표와 짧은 메모가 적힌 종이가 동봉되어 있었다.

「차 수리비입니다. 혹시 모자라면 더 보내 드리겠습니다. ps -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혹시 다른 내용이 더 있지는 않을까 싶어 종이의 뒷면까지 살폈지만 그게 끝이었다. 이우연은 헛웃음이 났다.

“인섭 씨가 뭐라고 했어요.”

“네?”

김강우는 되물으면서도 속으로 안도했다. 다행히 반말이 존댓말로 돌아온 것이다.

“뭐라고 하고 이걸 주고 갔냐고. 시발, 귓구멍에 좆 박았어? 왜 말귀를 못 알아 처먹어!”

김강우는 하마터면 울 뻔했다. 이번엔 반말에 상스러운 욕까지 덧붙었다. 혹시 몰래카메라를 찍는 건 아닐까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카메라나 스태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그냥 주시고 갔는데…. 시상식 끝나면 드리라고 하셨어요.”

“시발.”

이우연이 욕설을 내뱉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게 영화의 한 장면 같아서 김강우는 몰래카메라 가설을 아직도 버리지 못했다.

“다른 얘기는?”

하지만 희번덕거리는 이우연의 눈과 마주쳤을 때 이내 그 가설은 바로 폐기되었다.

“다, 다른 얘기는….”

뭐든 생각해 내야만 했다. 그래야 살 수 있다. 김강우는 본능적으로 깨닫고 마지막으로 본 인섭의 모습을 열심히 떠올렸다.

“봉투 전해 드리라고 하고, 그리고 음…. 아, 맞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으신 거 같았어요. 표정도 좀 어둡고 목소리도 힘이 없으셔서 어디 아프신지 여쭤봤거든요.”

“어디 아프대?”

이우연이 차창을 부여잡고 다급하게 물었다. 김강우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아프신 건 아니라고 했어요. 그냥 급한 볼일이 생겨서 먼저 들어가신다고만 했어요.”

“그 좆같이 급한 볼일이 뭔데!”

이우연은 초조함에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최인섭은 이런 식으로 무책임하게 사라질 사람이 아니었다. 설사 급한 일이 생겼다 하더라도 자신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을 것이다.

“모, 몰라요. 저는 모르는데….”

김강우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우연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꾹 눌렀다. 인섭의 마지막 모습을 본 게 이 병신 머저리 새끼라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때였다. 오토바이를 탄 배달원이 밴 앞으로 다가와 차 번호를 확인하고 헬멧을 벗었다.

“배달이요. 사인해 주세요.”

김강우가 얼른 운전석에서 내려 인수 사인을 하고 꽃다발을 받았다. 이우연을 알아본 배달원이 말을 걸고 싶은지 흘끔흘끔 쳐다보았지만, 이우연은 끝내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배달원이 떠난 뒤에야 김강우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꽃다발을 이우연에게 건넸다.

“…이거 형님이 드리라고 했는데.”

그게 또 무슨 개소리냐는 표정으로 이우연이 김강우를 노려보았다.

“시상식 끝나고 직접 드리려고 했는데, 못 드려서 죄송하다고 하시면서. 죄, 죄송합니다. 지금 생각나서….”

푸른색 수국과 흰색 줄리엣 장미로 만든 꽃다발은 이우연의 오늘 입은 의상을 고려한 색 조합이었다. 최인섭다운 발상이었다. 꽃다발을 받아 든 이우연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하하하.”

이우연이 웃기 시작하자 김강우는 마음이 좀 놓였다. 그래도 꽃다발을 받고 아무래도 기분이 조금 풀린 모양….

“시팔!”

이우연이 손에 든 꽃다발을 그대로 보닛에 내리쳤다. 꽃송이가 사방팔방 흩날렸다. 괴기스럽고 폭력적인 장면마저 화보 촬영으로 승화시키는 이우연의 모습에 김강우는 진심으로 공포를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첫째 매형이 했던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이우연을 보고 있으면 너무 잘생긴 것도 아주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사람을 아주 갖고 놀지. 시발.”

이우연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잇새로 중얼거렸다. 꽃다발의 꽃은 이미 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김강우는 아까운 꽃을 바라보다가 문득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차 키.”

“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차, 차에 꽂혀 있습니다.”

이우연이 운전석의 문을 열고 반만 남은 꽃다발을 조수석에 내던졌다.

“배우님. 어디 가세요?”

이우연이 차에 오르려고 하자 김강우가 깜짝 놀라 물었다. 시상식 도중이었다. 처음부터 불참했으면 몰라도 유력한 대상 후보가 도중에 사라지는 것은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지금 가시면 안 되잖아요.”

모르긴 몰라도 방송 사고 수준일 것이다.

“당연히 안 되죠.”

이우연이 순순히 대꾸했다. 그래도 일에 관해선 말이 통해 다행….

“그러니까 니가 최인섭을 붙들고 있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 아니에요.”

…다행이 아니었다. 말이 안 통했다. 벽을 보고 대화하는 느낌이었다. 김강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부, 붙잡아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우연은 김강우의 사과를 무시하고 운전석에 올랐다. 시동이 걸리는 소리에 김강우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닛에 매달려 보았다.

“제가 찾아볼 테니까, 배우님은 일단 들어가시는 게….”

이우연이 스윽, 시선을 돌렸다. 김강우는 알아챘다. 이대로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저를 밀고 지나갈 것이라는 사실을.

김강우가 주춤주춤 물러서자 이우연은 운전대를 돌렸다.

“배우님!”

문득 뭔가 떠오른 김강우가 이우연을 불러 세웠다. 이우연의 얼굴에 짜증이 가득했다. 이대로 한 번만 더 불렀다간, 정말 맹세코 너를 차로 쳐 버리겠다는 의지가 그의 눈에 넘실거렸다.

“생각난 게 있어서요. 고, 공항에도 한번 가 보세요.”

“공항?”

이우연의 눈동자가 얼어붙었다. 마치 들어서는 안 될 단어를 들은 표정이었다. 김강우는 더듬더듬 설명을 이어갔다.

“형님 오늘 캐리어 갖고 나오셨었거든요. 게다가 둘째 매형이 오늘 비행기 티켓을 주셔서….”

아까 탈의실에서 봉투를 주웠을 때, 본의 아니게 내용물을 확인한 것이다. 설명을 들은 이우연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요. 어차피 인섭 씨 여권도 없으니까.”

“여권도 같이 주셨는데….”

“그게 무슨 개좆같은 소리야!”

개좆이란 단어를 저렇게까지 정확한 발음으로 내뱉을 일인가.

김강우는 식은땀을 흘리며 복사본이요, 하고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복사본을 어떻게….”

이우연은 문득 인섭의 급여 문제 때문에 신분증 사본을 회사에 제출했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게 여권 복사본이었던 모양이다.

“…….”

이우연은 이를 사리물었다. 눈앞이 아득해질 만큼 화가 치밀었다. 인섭이 단순히 핸드폰을 끄고 잠적하는 것과 미국으로 가 버리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대체 왜, 라는 의문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지만, 일단은 최인섭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인섭 씨한테 연락 오면 어디 있는지 물어봐요. 나타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잡아 두고.”

“네! 알겠습니다.”

김강우가 바짝 군기가 든 태도로 대답했다. 이우연은 그대로 차를 몰고 사라졌다.

“하아….”

김강우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폭풍 같은 순간이 지나간 것이다. 다리가 덜덜 떨렸다. 자신이 뭘 본 것인지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이우연이, 천하의 이우연이 쌍욕에 반말에 저런 행동이라니….

바닥에 흩뿌려진 장미가 방금 전 상황이 꿈이 아니었음을 알려 주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김강우는 첫째 매형에게 이 상황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핸드폰을 찾으려고 주머니를 뒤지던 그는 이우연이 제 핸드폰을 들고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핸드폰은 주고 가셔야 형님 연락을 받든가 하죠.”

공중전화를 찾으려다가 그는 문득 이우연이 사라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통 매니저가 시상식 도중에 사라졌다고 저렇게까지 화를 내나? 시상식 도중에 뛰쳐나올 만큼? 돈을 떼어먹은 것도 아니고, 심지어 돈을 주고 갔는데도?

…만에 하나 잡히면 형님은 무사할 수 있을까.

등골을 타고 소름이 오싹 돋았다. 제가 괜한 사실을 알려 줬다는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지만, 이미 차는 떠난 뒤였다.

“학생 오늘 새집에서 첫날인데 좋은 꿈 꿔요.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하고.”

“네. 정말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중개인이 나가고 문을 닫고 나서 인섭은 숨을 길게 몰아쉬었다. 낯선 공간에 우두커니 서 있자 이제야 실감이 났다.

이우연이 대기실을 나간 뒤에 한참 동안 울기만 했다. 머리가 아플 때까지 운 다음에 내린 결론은, 자신이 먼저 매듭을 지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여러 단초가 있었다. 자신이 애써 외면했을 뿐이다.

이우연이 채연서를 만나고 그런 적 없다고 했던 것도, 취소된 스케줄을 가야 한다고 거짓말했던 것도, 채연서에게 실수한 자신에게 보인 싸늘한 반응도, 채연서가 사는 동네로 갑작스럽게 이사한 것도, 그리고 무엇보다 요즘 들어 냉랭해진 말투와 눈빛도, 모두 하나의 결론으로 이어졌다.

화가 난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감정이 식은 것뿐이었다. 꿈같았던 열애가 끝나고 현실로 돌아왔다.

인섭의 까만 눈동자에 우울함이 스몄다.

“잘한 거야.”

인섭은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갔다 와서 얘기해요. 그렇지 않아도 나 인섭 씨한테 할 얘기 있으니까.’

대기실을 떠나며 이우연에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굳이, 악역을 이우연에게 떠넘길 필요는 없었다.

직접 봉투를 건네면서 사과하고, 마무리를 지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지금은 이우연의 눈을 마주 보고 어른스럽고 담담하게 굴 자신이 없었다.

결국 김강우에게 봉투를 건네주고 캐리어를 갖고 밖으로 나왔다. 버스 정류장에 또 한참을 앉아 있은 후에야 깨달았다. 이제 자신이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부동산 중개인에게 전화를 건 것은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약속은 쉽게 잡혔다. 중개인의 말대로 집주인은 특이하긴 하지만, 까다로운 사람은 아니었다. 인섭의 얼굴을 보자마자 고개를 끄덕이고 계약서를 작성하자고 했다. 신분증도 복사본밖에 없다고 하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삿짐센터에 전화를 걸어 언제쯤 짐을 받을 수 있는지 묻자, 오늘 당장 괜찮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집에서 쫓겨 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계약에서 이사까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인섭은 박스가 여기저기 쌓인 집을 둘러보았다. 깔끔하고 좋은 집이었다. 집주인은 집세만 밀리지 않는다면, 원하는 만큼 있다가 원할 때 나가도 된다고 말했다. 그렇게나 바라던 집을 구하게 되었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이곳은 한국에서의 삶을 마무리하는 장소가 될 테니까.

부모님께는 뭐라고 말씀드리지. 학교는 어떻게 해야 하지. 존을 미국으로 데려가려면 준비도 해야 하고, 아직 윤아름 씨와 그 가족들, 차 실장님께 은혜도 제대로 갚지 못했는데….

다시 눈물이 솟았다. 인섭은 얼른 눈물을 닦아 내고 재킷을 벗었다.

마음이 괴로울 때는 몸을 움직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인섭은 창문을 열고 청소를 시작했다. 그렇게 근 두 시간을 쓸고 닦은 후에, 손에 닿는 대로 박스를 뜯었다.

“…….”

인섭은 할 말을 잃었다. 하필 하고 많은 박스 중에 이우연의 자료를 포장해 둔 박스를 뜯은 터다. 이우연의 인터뷰가 실린 잡지, 그가 출연한 영화 브로슈어, 포스터, DVD 등등. 온통 이우연투성이였다.

인섭은 박스를 닫았다.

이건 나중에 정리하자.

그 옆에 있던 박스를 뜯으니 이번엔 다행히 부엌 식기가 보였다. 인섭은 박스를 들어서 싱크대 앞에 두고 정리를 시작했다. 수납장에 냄비를 크기대로 포개던 인섭은 커다란 주물 프라이팬을 발견하고 멈칫 손을 멈추었다.

어느 날 이우연이 불쑥 가져온 프라이팬이었다. 대체 이걸 어디다 쓰냐는 물음에 그는 치약 광고에 나올 듯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도둑 들면 이걸로 후려치세요. 웬만한 대가리는 다 깨질 거예요. 연습해 볼래요?’

인섭은 기겁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결국 프라이팬은 한 번도 사용하지 못했다. 인섭은 프라이팬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싱크대에 올려 두었다. 박스 아래에서 이우연이 사용하던 식기가 나오자 인섭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옷부터 정리하자.

옷 박스를 찾는 건 쉬웠다. 가장 큰 박스를 뜯었다. 겨울옷이 담긴 박스였다. 인섭은 고민했다. 언제 이곳을 떠날지 모르는데 겨울옷까지 모두 꺼내는 게 맞는 건가 싶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옷을 하나둘씩 꺼내 옷걸이에 걸었다. 두 번 일을 하더라도 일단은 정리를 해 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차례대로 옷을 거는데 코트에 포개져 있던 뭔가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검은색 캐시미어 목도리였다. 인섭은 목도리를 집어 들었다.

작년 겨울에 유독 눈이 많이 내린 날이었다. 같이 심야 영화를 보고 오던 길에 바퀴가 펑크가 나서 차를 견인시켜야만 했다. 갑자기 내린 폭설에 택시도 잡히지 않아 둘은 결국 그날 집까지 걸어와야 했다.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는 인섭에게 이우연은 제가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둘러 주었다. 괜찮다고 몇 번이나 사양했지만, 이우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괜찮아요. 선물 개봉하고 싶어서 해 주는 거니까.’

하며 목도리를 리본 모양으로 매듭지어 버렸다. 한 치 앞도 제대로 볼 수 없을 만큼 퍼붓는 폭설 속에서 목도리와 모자로 얼굴을 가린 두 사람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날, 발목까지 쌓인 눈 위를 손을 잡고 걸었다. 잊을 수 없는 밤이었다. 인섭은 평생 이우연과 이렇게 걸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인섭은 목도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언젠가 돌려줘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주지 못했다. 그에게 사랑받는 느낌이 좋아서, 간직하고 싶었던 것이다. 인섭은 목도리를 잘 접어서 장롱 한편에 넣어 두었다.

옷 박스에서 이우연이 벗어 두고 간 옷을 다섯 벌쯤 발견하고 난 후에야, 인섭은 옷 정리를 그만두었다.

“하아….”

인섭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시트를 미처 깔지 못해 차가운 매트리스가 고스란히 뺨에 닿았다. 몸에 열이 오르는 듯 한기가 느껴졌다. 시트를 찾을까 하다가 관뒀다. 그것도 이우연이 직접 주문해서 가져온 시트였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자는 잠버릇 때문에 그는 시트의 감촉을 중요시했다.

어느 것, 무엇 하나, 이우연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국에서의 생활은 이우연 그 자체였다.

감은 눈이 뜨겁게 부풀어 올랐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읏….”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알고 있었다. 인섭이 읽은 연애서의 종장에는 늘 이별에 대처하는 방법이 실려 있었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미뤄 두다가 인섭은 날을 잡고 모든 연애서의 종장을 단숨에 읽었다. 하지만 수많은 책에 실린 단 한 줄의 내용도 지금의 자신에겐 위로가 되지 못했다.

눈물이 닦을 새도 없이 흘러내렸다. 스스로가 너무 한심하고 바보 같았다. 이우연이 저를 택해 준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 행운에 취해 오만한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한결같을 수는 없는 건데….

부모도 사정이 생기면 자신이 낳은 아이를 버릴 수 있는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상대에게 평생에 걸쳐 감정을 책임져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우연이 나쁜 게 아니다. 그를 원망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지금까지 누린 행복을 흠집 낼 수는 없었다.

상황이 달라지면 감정이 변하고, 깎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당연하다. 당연한 것이다.

…그래도 조금만 덜 당연하게 여겨 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인섭은 매트리스에 고개를 묻고 울음을 삼켰다.

좋은 의미로든 그렇지 않은 의미로든, 요 몇 년간 제 시간은 모두 이우연을 향해 있었다.

무서웠다.

이우연과 사귈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현실감이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이 되어 다가올 그의 부재가 두렵기 짝이 없었다.

심장이 욱신거렸다. 슬퍼서 느끼는 고통이 아니라 실질적인 고통이었다. 스트레스에 얼마나 취약한 몸인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인섭은 자리에서 일어나 약을 찾아 삼켰다. 하지만 지끈거리는 통증은 사라지지 않고 심장 부근을 짓눌렀다. 급기야 속까지 울렁거려 결국 화장실로 달려가 속에 것을 모두 게워 내야 했다.

입을 헹구고 돌아와 인섭은 다시 약을 먹어도 될지 복약 지도서를 찾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스트레스 요인에서 벗어나는 게 최선이라는 의사의 말을 떠올린 터다.

인섭은 침대에 누워 애써 다른 생각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이우연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때 자신이 이렇게 행동했으면 달라졌을까,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상황이 나아졌을까. 쓸데없는 후회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얼마간 그러고 있었을까. 눈물로 뒤엉킨 속눈썹을 들어 올린 것은 밖에서 들려온 소리 때문이었다.

문이 덜컹덜컹 흔들리고 있었다.

“…누구세요.”

자신이 이곳에 이사 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인섭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구세요?”

이번에는 아까보다 좀 더 크게 물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고 문만 재차 흔들렸다.

소름이 쭈뼛 돋았다. 옥탑방의 장점은 독립적인 구조라는 것이고, 단점 역시 독립적인 구조라는 점이었다. 도둑이 쉽게 들 수 있고, 든다 해도 이웃집에서 알아채기 힘들었다. 경찰을 부르려고 했지만, 핸드폰 전원을 꺼 놓은 상태였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켜는데 시간이 유독 더디 흐르는 기분이었다. 그사이에도 문이 몇 번이나 흔들렸다.

뭐든 해야 하는데….

주변을 둘러보던 인섭의 눈에 아까 올려 둔 프라이팬이 들어왔다. 인섭은 엉겁결에 프라이팬을 움켜쥐고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몇 번 더 문이 덜컹거렸다.

“누, 누구세요. 말씀하세요.”

도둑이 대답할 리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무서워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핸드폰 전원이 켜진 것이다.

일단 경찰에 신고를 하려고 핸드폰을 꺼내려던 순간, 흔들리는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인섭은 현관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문이 흔들리는 것과 동시에 현관문도 흔들렸다.

“하아….”

인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옥탑은 기상 조건에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면 현관문이나 창이 유독 많이 흔들렸다. 옥탑에서 살았던 게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그 기억을 싹 잊은 것이다.

인섭은 손에 든 프라이팬을 내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오후에 비 예보가 있었는데. …행사는 잘 끝났겠지. 대상은 받으셨을까. 검색해 볼까.

인섭은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마음이 약해지기 전에 다시 핸드폰 전원을 끄자고 결심한 순간, 벨 소리가 울렸다. 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했다. 김강우였다.

몇 번 울리던 전화는 바로 끊어졌다. 바로 메시지 창이 떴다.

「형님, 어디세요? 별일 없으신 거죠? 답장 좀 주세요.」

시상식이 끝나고 이우연에게 핸드폰을 돌려받은 모양이었다. 인섭이 멈칫하는 사이 다시 메시지가 도착했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시죠? 어디신지 알려 주심 제가 갈게요. 걱정돼서 그래요.」

“…….”

저 대신 고생하고 있을 김강우를 떠올리자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아무리 그래도 핸드폰 전원을 끄고 잠수하는 건 예의가 아닌데.

「대표님이나 실장님께 말씀 안 드릴 테니, 연락 좀 주세요. 아프신 건 아니시죠? 어디 계세요?」

답을 할 틈도 없이 연달아 메시지가 도착했다.

「답 좀 주세요. 어디 계신 거예요? 오늘 완전 난리였어요.」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전원 끄지 마세요. 어딘지 알려 주심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리고 저 오늘 죽을 뻔했어요. 배우님한테 엄청 혼났어요.」

쪽지와 돈만 두고 말없이 나왔으니 역시 김강우의 입장이 난처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강우에게는 일단 사과를 하는 게 맞았다.

인섭은 고민하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통화 연결음이 들렸다. 벨 소리가 이어졌다. 한 번, 두 번….

그러다 문득 기묘한 이질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김강우는 맞춤법이 엉망이었다. ‘ㅐ’와 ‘ㅔ’ 구분을 못 할 뿐만 아니라 띄어쓰기도 제멋대로였다. 게다가 문장 하나가 끝날 때마다 이모티콘을 두 개씩 사용하곤 했다. 그런데 지금 읽은 메시지의 맞춤법은 완벽하고 이모티콘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조금씩 달라도 메시지의 내용은 비슷했다.

어디세요? 어디 계세요? 어디 계신 거예요? 어딘지 알려 주세요.

…계속해서 현재 위치를 묻고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이 시간까지 이우연이 김강우의 핸드폰을 들고 있을 리가….

벨 소리가 들렸다. 인섭은 눈을 껌뻑였다. 핸드폰을 귀에서 뗐다. 착각이 아니었다. 밖에서 분명 벨 소리가 들렸다. 심지어 벨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

소름이 쭈뼛 돋았다. 인섭은 통화를 종료했다.

새 메시지가 도착했다.

「지금 집에 계신 거죠?」

인섭은 그대로 핸드폰을 놓쳤다. 자박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도망가고 싶은데 도망갈 수가 없었다. 발소리가 뚝 멈추고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이번에는 바람 소리가 아니었다.

“…누구세요.”

목소리가 떨렸다.

“문 열어요.”

이우연이었다.

어떻게? 대체 어떻게 알고….

“인섭 씨. 문 열어 줘요. 안 열면 어차피 부숴 버릴 거니까.”

그냥 하는 협박이 아니었다. 나직한 음성이 그의 의지를 내비쳤다. 인섭은 얼른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이우연이 옷에 묻은 비를 털어 내며 집으로 들어섰다.

“웬일로 기상 예보가 맞네요. 밤 되면 쏟아지겠어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여상한 태도였다. 인섭은 혹시 제가 맡긴 메모를 건네받지 못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가 이우연의 손에 들린 꽃다발을 보는 순간, 그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꽃 고마워요.”

이우연이 시선을 느꼈는지 반쯤 남은 꽃다발을 선반에 내려놓으며 빙긋 웃는다. 김강우에게 꽃 배달을 부탁했으니, 봉투를 받지 못했을 리 없는 것이다.

“오늘 이사하신 거예요?”

이우연이 집을 둘러보며 묻는다. 인섭이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살던 집이랑 비슷하네요.”

그의 말 때문인지 인섭은 이우연이 제가 살던 옥탑에 찾아왔던 날이 떠올랐다.

…완전히 다른 상황이지만, 비슷한 느낌이 드는 건 착각이 아니겠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인섭이 더듬거리며 묻자 이우연이 흠, 하고 입가를 당겨 웃는다.

“그게 궁금해요?”

“…….”

“인섭 씨 여권 복사본 받았다는 얘기 듣고 공항으로 갔어요. 하하, 공항에서 인섭 씨 찾는 거 진짜 두 번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우연이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린 듯 쓰게 웃었다.

“그런데 확인해 보니 외국인은 여권 사본만으로는 출국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하, 그럼 이걸 어떻게 찾아야 하나.”

이우연이 팔짱을 낀 채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언뜻 장난스러워 보였지만, 그의 눈빛은 촘촘하게 인섭을 훑었다.

“그래서 일단 집으로 찾아갔어요. 기다리면 오겠지 하고.”

이우연의 기다란 눈매가 가늘게 곡선을 그렸다. 서늘한 그믐달이 그의 눈에 걸린 듯했다.

“그런데 이사를 가 버렸네?”

“그게….”

인섭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사를 간 건 이우연 때문이 아니었지만, 공교롭게도 시기가 맞아떨어졌다. 지금 무슨 얘기를 한다 해도 변명일 수밖에 없었다.

“전원 꺼 버려서 위치 추적도 못 하고 돌아 버리는 줄 알았잖아요.”

감독은 배우의 눈빛 연기를 중요하게 여겼다. 흔히 똘끼라고 표현하는 부분이 있어야만 눈에 깊은 감정이 실린다고 했다. 감독들은 이우연의 눈을 특히나 좋아했다. 카메라 파인더로 볼 때 더 매력적인 눈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 대표는 똘끼가 아니라 광기라고 표현했지만.

이우연이 눈을 반짝이며 인섭을 직시했다. 광기가 충만한 눈이었다.

“통화 목록 조회했어요. 대한민국은 참 좋은 나라예요. 돈이면 안 되는 게 없으니. 심지어 빨라.”

이우연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마지막으로 통화한 상대가 부동산 사무실이라니.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아니, 인섭 씨 입장에서는 운이 나쁜 건가?”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돈으로 다 해결된다고 표현했지만, 여기까지 찾아오기까지 몹시 복잡한 과정을 거쳤을 게 분명했다.

“조금 번거롭긴 했죠. 새집으로 이사 가고 전화기 꺼 버리면 내가 못 찾을 줄 알았어요?”

이우연이 해사하게 웃으며 물었다. 인섭은 고개를 내저었다.

“나중에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나중에 언제?”

이우연이 허리를 굽혀 인섭과 눈을 마주치며 끈덕지게 물었다.

“신변 정리 마치고 미국 갈 준비 다 하고 나서?”

“…….”

정곡을 찔린 인섭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당분간은 이우연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어느 정도 정리를 끝낸 다음 연락할 생각이었다.

“그럴 거라 생각은 했지만, 하.”

이우연이 고개를 떨군 채 짧게 웃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비에 젖은 톰 포드의 슈트 때문인지 오늘따라 유난히 그의 외모가 돋보였다.

화면 속의 이우연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가끔, 아니 종종 그랬다. 그의 인생에 영원히 속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비현실감을 느꼈다.

그때, 이우연의 손이 스윽 다가왔다. 인섭은 숨을 삼켰다. 차가운 손이 인섭의 뺨을 그러쥐었다.

“막상 그렇다고 하니 기분 참 좆같네요.”

비에 젖은 손끝이 현실감을 일깨웠다. 인섭은 꿈에서 막 깬 듯한 멍한 눈으로 이우연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거예요?”

이우연의 손끝이 인섭의 뺨을 문지른다. 화가 난 기색도 짜증 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궁금하다는 얼굴이었다.

“…….”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당신이 다른 여자와 만나서 그랬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우연에게 그게 뭐 대수냐는 대답을 또 들을까 두려웠다.

“인섭 씨.”

이우연이 인섭을 불렀다. 인섭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작은 목소리로 네, 하고 대꾸했다.

“괜찮으니까 말해 봐요. 들어 줄 테니까.”

그렇다고 아무 말 없이 어린아이처럼 머리를 처박고 숨을 수만은 없었다.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인섭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게….”

대답을 하려고 고개를 든 인섭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우연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목소리만 듣고 있어서 그가 화를 내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다. 정중하고 다정한 음성이었으니까.

“무슨 일 있는 거예요? 걱정돼서 그래요.”

이우연이 다시 묻는다.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려 있었다. 이질적인 웃음이었다.

인섭은 그의 다정한 음성도 웃음도 눈빛도 모두 꾸며 낸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는 지금 그럴듯한 반응을 연기 중이었다.

“저는, 제가…, 그러니까….”

인섭의 머릿속은 더 엉망이 되었다.

이우연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어떤 게 그의 진심일까.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제가, 잘 몰라서, 이런 건 처음이라….”

인섭은 입가에 맴도는 말을 하나씩 천천히 뱉어 냈다.

“사, 사람마다 다르지만, 저는 이우연 씨가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이해가 안 돼요? 내가?”

인섭이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우연이 하, 짧은 웃음을 삼켰다. 그러고는 이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인섭과 눈을 마주친다.

“이해 못 하는 게 그렇게 큰 문제예요?”

이우연이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묻는다. 가끔 그럴 때가 있었다. 이우연과 대화를 나누지만 정말 벽을 앞에 두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죄송합니다.”

인섭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사과했다.

“나라고 너 다 이해하는 건 아니거든.”

봄바람처럼 보드라운 웃음이 뒤따랐다. 하지만 인섭의 손끝은 차갑게 식어 갔다. 그때 이우연이 뭔가를 발견하고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이것도 챙겨 왔어요?”

이우연이 가리킨 것은 강영모가 보낸 화분이었다. 인섭이 뭐라고 대답할 틈도 없이 이우연이 머리채를 잡아채듯 화초를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쨍강, 하는 소리와 함께 화분의 파편이 사방에 흩어졌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인섭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미안해요.”

이우연이 선선히 사과를 건넸다.

“나는 좆 빠지게 노력해서 여기 왔는데, 저 풀때기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 들어와 있는 게 시발 존나게 빡쳐서.”

이우연이 인섭에게 다가왔다. 그의 눈이 새카맣게 얼어붙어 있었다. 인섭은 그 눈을 본 적 있었다. 하와이에서 저를 추궁하던 그 눈빛이었다.

인섭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등 뒤로 싱크대가 닿았다. 이우연이 손을 뻗어 인섭의 몸을 그대로 가두었다.

“인섭 씨.”

인섭은 숨을 삼켰다.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몸이 달달 떨렸다.

“인섭 씨. 고개 들어 봐요.”

인섭은 이우연이 시키는 대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정말 왜 그랬어?”

“…….”

“왜 사람 병신 만들어 놓고 그렇게 간 거냐고. 응? 정말 그 이유예요?”

말해 봐요, 밀어를 속삭이는 연인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이우연이 인섭을 을렀다. 하지만 차분한 목소리와는 달리 싱크대를 짚은 이우연의 팔 위로 힘줄이 도드라졌다.

“이우연 씨가…, 이우연 씨 행동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저는 그런 거….”

“이해가 안 되는 인간하고, 애초에 연애는 왜 시작했어요.”

이우연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인섭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해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이우연이 저를 위해 보여 주는 노력으로도 충분히 만족했으니까.

“다른 이유는 없어요?”

인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우연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불쑥 묻는다.

“4783이 누구예요?”

“네?”

“4783. 오늘 부동산이랑 두 번 통화했잖아. 그사이에 통화한 사람.”

인섭은 기억을 더듬었다가 이우연이 말하는 4783이 윤아름의 전화번호 뒷자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인섭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누구야?”

이우연이 묻는다.

“…관련 없는 분입니다.”

“그건 내가 판단할 테니까, 누군지나 말해요.”

인섭은 고개를 내저었다. 두 사람의 일에 윤아름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정말 관련 없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인섭이 기겁하고 이우연에게 매달렸다. 전화를 걸려던 이우연이 인섭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런 거 아닙니다.”

이우연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인섭은 초조해졌다. 지금의 이우연이라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다.

인섭은 다급하게 손을 뻗어 이우연에게서 핸드폰을 빼앗았다. 불시에 핸드폰을 빼앗긴 이우연이 무표정한 얼굴로 인섭을 내려다보았다.

“주세요.”

이우연이 손을 내밀었다. 인섭은 핸드폰을 등 뒤로 감추었다.

“주세요. 인섭 씨.”

“이러지 마세요. 제발….”

“제발, 이라.”

이우연이 인섭의 말을 천천히 곱씹는다. 그러고는 인섭의 어깨에 제 얼굴을 묻고 중얼거렸다.

“저도 그럼 부탁할게요. 제발, 주세요.”

나직한 목소리가 어깨를 타고 전해질 때마다 인섭은 몸이 오싹오싹 떨렸다. 이우연이 응? 하면서 재차 묻는다.

인섭은 핸드폰을 꼭 쥔 채로 고개를 내저었다. 이우연이 하아,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가에 비스듬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윤아름은 여기가 마음에 든대요?”

“네?”

“4783. 윤아름 뒷자리잖아.”

“…알고 계셨습니까.”

“그때 동물 병원에서 봤어요. 병신도 아니고 모를 수가 있나요.”

윤아름이 비상 연락처로 본인의 전화번호를 적었고, 이우연은 그것을 한 번 흘깃 쳐다봤을 뿐이다. 그의 무서운 기억력보다, 인섭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음에도 자신의 반응을 확인하려고 모른 척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럼 왜….”

“얼마나 싸고도는지 한번 보고 싶어서요.”

이우연이 손을 뻗었다. 인섭이 반응할 새도 없이 핸드폰을 강탈해 갔다. 압도적인 힘의 우위였다. 핸드폰을 빼앗긴 것도 처음부터 모두 계산된 행동이었다.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이우연이 묻는다.

“그분은 상관없습니다.”

“얼굴? 얼굴은 내가 더 낫지 않나? 그럼 성격인가? 착해서 좋아요?”

“그런 거 아닙니다.”

“개도 키우고 고양이도 키운다고 했던가? 그래서 좋아요? 난 인섭 씨가 괜찮다면 코끼리라도 가져와 키울 용의가 있는데.”

느슨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놀림을 당하는 것만 같아 인섭은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기분 탓인지 아까보다 더 숨을 쉬는 게 힘들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절대 그런 게….”

“아님 그년이 나보다 잘해요?”

이우연의 웃음이 사라졌다. 아니 그 어떤 표정도 그의 얼굴에 머무르지 않았다. 감정이 증발한 듯한 눈빛이 차갑게 내리꽂혔다.

“자 보니까 좋든가요? 여자랑 하는 게 더 마음에 들어요? 하하, 윤아름은 알아요? 인섭 씨 어디를 찔러 줘야 질질 싸는지?”

“…그런 식으로 말씀하지 마세요.”

“그럼 어떤 식으로 말씀드릴까요?”

이우연이 싱긋 웃었다.

“인섭 씨. 사랑해요.”

“…….”

갑작스러운 사랑 고백에 인섭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세상에서 내가 당신 제일 사랑해. 누구를 데려와도 안 될 만큼 사랑해요.”

나직한 음성이 제 절절한 마음을 고백했다. 하지만 이우연의 표정에는 어떤 감정도 깃들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면 돼?”

“…….”

인섭은 숨을 삼키며 고개를 떨구었다. 눈앞이 어지러웠다. 정말 속이 좋지 않았다.

“이것도 싫어요? 그럼 어떻게 해 줄까?”

이우연의 물음에 인섭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 주면 좋을지 묻잖아요. 응? 고개 들어 봐요. 인섭 씨.”

인섭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 채 반응하지 않았다.

“왜? 뭘 해도 이젠 내가 싫어? 그래서 그래요? 하하, 그런데 어떡해요. 나 그래도 인섭 씨 놔줄 생각 없는데.”

잇새로 씹어 내뱉는 듯한 이우연의 말에 울컥 뜨거운 것이 인섭의 목구멍을 타고 치솟아 올랐다.

이우연을 원망한 적 없었다. 그저 그가 감정의 변화를 조금만 덜 당연하게 받아들여 줬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인섭 씨 안 놔줄 겁니다. 어떤 연놈이어도 안 돼. 절대로, 안 돼요.”

이우연이 다짐을 받아 내듯 내뱉었다.

“…왜요.”

“뭐?”

“왜 저는 안 되는 겁니까.”

눈앞이 흐려졌다. 눈물이 맺히기도 전에 흘러내렸다. 가슴이 아팠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너무 아팠다.

“저는, 왜, 다른 사람하고, …안 되는 겁니까.”

이우연 외의 사람은 한 번도 마음에 품어 본 적도 없었다. 그저 그냥 그가 좋았다. 객관적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좋아하는 마음은 어쩌지 못했다. 몇 년을 그와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몸을 겹쳐도, 매번 설레고 떨릴 만큼 점점 좋아졌다. 무엇보다 소중하고 사랑하는 상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섭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다른 사람과 몸을 겹치는 게 흔한 일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으면서, 제게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말하는 이우연의 이중적인 태도에 화가 났다.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이라도 내뱉어 그의 감정을 흠집 내고 싶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갖는 악의였다.

“그런 거 흔하잖아요. 이 바닥에서는 흔한 일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러니까…!”

그때 인섭의 눈에 이우연의 손이 들어왔다. 정확히 이우연의 손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가. 얼마나 손에 힘을 주고 버티고 있는지 핸드폰 액정이 박살이 난 상태였다. 깨진 액정이 그의 손가락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피가….”

고개를 든 인섭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우연이 저를 보고 있었다. 그의 일그러진 눈매와 꾹 다문 입술이 무엇을 뜻하는지 인섭은 알고 있었다.

“…….”

이우연은 말없이 인섭을 응시했다. 인섭은 자신의 성공을 직감했다. 이우연의 감정에 깊은 흠집을 낸 것이다.

“다른, 사람이 좋아요?”

상처받은 짐승 같은 눈을 하고 이우연이 물었다. 그의 손등을 타고 인 힘줄이 점점 거칠게 제 존재를 드러냈다. 그럴수록 손을 타고 흘러내리는 핏줄기가 굵어졌다.

“정말 다른 사람이 좋아졌어요?”

이우연이 묻는다. 감정을 억지로 삼켜 내듯 한 음절, 한 음절 천천히 그는 제 마음을 내뱉었다. 바닥이 그가 흘린 피로 작은 웅덩이를 이루었다.

“그러지 마세요. 피가 계속….”

인섭은 그의 손에 매달렸다. 뜨뜻한 피가 인섭의 두 손을 적셨다. 인섭이 이우연의 주먹을 펴게 하려 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인섭 씨.”

이우연이 인섭의 이름을 불렀다.

인섭은 제 악의가 가져온 결과를 마주했다.

자신을 버린 부모가 불행하길 원한 적도 없었다. 하루아침에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방에서 내쫓은 집주인조차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하물며 강영모가 준 화분조차 끝내 잎사귀 하나 뜯어내지 못했다.

“결국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좋아진 겁니까.”

이우연의 음성이 잘게 떨렸다.

인섭은 숨이 막혔다. 누구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상처 입혔다. 그리고 그 상처를 보고, 아직도 그가 제게 마음이 있음을 확인하고 안심했다. 제 추악함이 역겨울 지경이었다. 심장에 날카로운 금속이 박힌 것처럼 욱신거렸다.

“나를 이해할 수 없어서, 그래서 버리기로 했어요?”

이우연이 손에 힘을 주며 물었다.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인섭은 두 손으로 이우연의 주먹을 감싸 쥐었다.

“그러지 마세요. 상처가, 계속….”

다시 눈물이 터져 나왔다. 미칠 것 같았다. 인섭은 이우연의 상처를 쥔 채로 소리 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울지 말아요.”

결국 이우연이 인섭의 눈물을 닦아 주려고 움켜쥔 손에 힘을 풀었다. 인섭은 수건을 가져와 이우연의 손에 둘러 주었지만, 혈관이 찢어진 것인지 피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병원으로 가셔야 해요. 피가 너무 많이 납니다. 얼른 병원으로….”

인섭이 말을 마치기 전에 이우연이 인섭을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입을 맞추었다. 다급하게 달려드는 그의 몸짓은 흡사 물에 빠진 사람처럼 필사적이었다.

인섭은 이우연을 밀어냈다.

미약한 힘에 밀려난 이우연은 다시 인섭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인섭은 그를 다시 밀어냈다. 이우연은 거듭 거절당하면서도 인섭을 끌어안고 키스했다. 엉망이었다. 두 사람 모두 피투성이였다.

“…미안해요.”

인섭은 이우연에게 사과했다. 울음으로 목이 멨다.

“죄송…, 합니다….”

인섭은 연달아 이우연에게 사과했다. 이우연이 인섭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인섭의 조그마한 얼굴이 금세 피범벅이 되었다.

“왜 울어. 나한테 정말 미안한 짓 해서 그래요?”

이우연이 살갗이 너덜너덜하게 잘린 손으로 인섭의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다시는 안 하면 되잖아. 난 괜찮으니까….”

인섭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내저었다.

전혀 괜찮지 않았다. 이우연을 좋아하는 제 마음이 어떤 식으로 변질되어 상대를 상처 입히는지 알게 되었다. 이대로 묻고 넘어간다 해도, 몇 번이고 되살아날 잔인하고 추악한 감정이었다.

폐에 썩은 물이 차오르는 것처럼 숨이 막혔다.

“…죄송해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다시는 이우연을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상대를, 미워하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요. 제가…. 우연 씨, 미안해요.”

인섭은 제가 이우연에게 가진 마음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깨달았다. 사람의 감정이 깎이고 변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이우연만은 그러지 않길 바랐던 것이다. 빈틈없이 그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내도록, 그가 저만 사랑해 주길 원했다.

“버리려고 한 거 아닙니다. 우연 씨가…, 미워하고 싶지 않아서…, 다른 사람하고 만난 걸, 흔하다고 하셔서…, 저는….”

“무슨 말이에요. 다른 사람하고, 누가, 잠깐.”

심장에 뻐근한 중력이 느껴졌다. 숨을 쉬는 게 점점 힘들어졌다. 인섭의 몸이 휘청하고 꺾였다.

“인섭 씨.”

이우연이 인섭의 어깨를 붙들었다. 인섭은 미안해요, 하고 사과했다. 아니, 사과하려 했다.

“인섭 씨, 인섭 씨, 야! 최인섭!”

이우연이 다급하게 인섭을 불렀다.

인섭의 시야가 가물가물 흐려졌다. 정신을 차리려고 눈을 깜빡였지만 소용없었다.

“인섭 씨! 정신 차려요. 왜 이래. 갑자기, 너 왜 이런 거냐고!”

마지막으로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면 무섭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몇 배는 더 두려웠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모습이 이런 것이라니.

“인섭 씨!”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인섭 씨! 정신 차려 봐요.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시발, 인섭아! 제발!”

비명 같은 이우연의 목소리가 어둠 속으로 멀어졌다.

탁탁탁.

병원 복도를 걷는 발걸음이 유독 다급했다.

“죄송합니다. 지나갈게요.”

링거 폴대를 미는 환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황급히 복도를 가로질러 걸었다. 14층 맨 안쪽에 있는 병실에 도착하자 환자의 이름을 확인하고 병실 문을 열었다.

“인섭 씨, 어떻게 된….”

병실 안으로 들어선 윤아름은 어, 하고 눈을 깜빡거렸다. 침대 앞에 앉아 있던 남자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여긴 어쩐 일이시죠.”

이우연이 묻는다.

궁금해서 던지는 질문이 아니었다.

마치 제 영역에 들어온 침입자를 경계하는 날 선 짐승 같은 눈빛이었다. 윤아름은 조금 당황해서 횡설수설 말을 더듬었다.

“아, 저는 도서관에서 연락을 받아서, 응급실로 가니까 중환자실이라고 하고, 중환자실은 또 아니라고 하고. 간신히 찾았네요.”

화장기 하나 없이 편한 트레이닝 복장을 한 윤아름이 그제야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었다.

“인섭 씨는 좀 괜찮아요?”

“괜찮을 겁니다.”

이우연이 단호하게 대답했지만, 그의 눈빛에서 초조함을 엿볼 수 있었다. 인섭이 괜찮다기보다 반드시 괜찮아야 한다는 다짐처럼 들렸다.

“어….”

윤아름은 그제야 이우연의 셔츠가 온통 피투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디 다치신 거 아니에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우연이 매몰차게 대꾸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연예인 중 대중에 알려진 이미지와 사석에서 보이는 이미지 차이가 큰 사람이 있었지만, 이우연은 기자들 사이에서도 매너가 좋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저렇게 대놓고 사람을 무안 주는 타입이 아니었는데.

윤아름은 침대에 누워 있는 인섭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상황에 기분이 좋을 리는 없겠지.

생각해 보면 이우연은 제법 각별하게 인섭을 챙겼다. 그 새벽에 인섭의 연락을 받고 동물 병원에 달려왔을 때도….

머릿속을 언뜻 스치는 생각에 윤아름은 설마, 하고 눈가를 찌푸렸다. 별것 아닌 일을 오해하는 직업병은 얼른 고쳐야 했다.

“그런데 지금 여기 계셔도 되는 건가요?”

윤아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기사를 이우연이 모를 리 없었다.

“그건 상관하실 일이 아닙니다.”

이우연이 차갑게 선을 그었다.

확실했다. 이건 단순히 기분의 문제가 아니었다. 분명한 적의였다.

윤아름은 자꾸 머리를 드는 의심을 가까스로 누르며 최대한 차분하게 괜한 참견해서 죄송해요, 하고 대꾸했다.

“누구 연락 받고 여기로 오신 건가요.”

이번엔 이우연이 묻는다.

“병원에서 연락받았어요. 아무래도 저번에 보호자 번호 등록한 게 남아 있어서 연락 왔나 봐요.”

“저번이요?”

“네. 저번에 쓰러지셨을 때요. 자꾸 이렇게 쓰러져서 걱정이네요.”

윤아름은 전보다 훨씬 수척해 보이는 인섭의 얼굴을 보며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검사 결과는 나왔….”

윤아름은 이우연에게 고개를 돌렸다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침대의 난간을 쥔 채로 선 이우연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대낮에 명동 한복판을 걷다가 창졸간에 뺨을 얻어맞은 사람도 저런 표정은 아닐 것이다. 수치와 당혹, 분노가 뒤엉켜 어쩔 줄 몰라 하는 남자의 낯선 얼굴에 윤아름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봐서는 안 될 걸 엿본 기분이었다.

이우연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언제 쓰러졌습니까.”

“애들 입양 보내기로 했던 날이니까, 열흘 전이요.”

윤아름이 기억을 더듬어 대답했다.

“그때도 별일 아니라고 하시긴 했는데….”

윤아름이 말을 마치기 전에 침대에서 기척이 들렸다.

“인섭 씨. 정신이 들어요?”

윤아름의 물음에 인섭이 몇 번 더 눈을 껌뻑였다. 그러고는 멍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우연을 발견하고 중얼거렸다.

“손….”

“손 아파요? 의사 불러올까? 다른 데 아픈 곳은 없어?”

이우연이 숨도 쉬지 않고 물었다. 인섭이 천천히 고개를 내젓고는 대답했다.

“…괜찮으세요?”

그 순간 이우연의 표정이 기이하게 구겨졌다. 인섭이 무엇을 묻는지 깨달은 것이다.

“…나는 괜찮아요.”

“다행입니다.”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였다. 인섭은 다시 눈을 감았다. 잠이 든 모양이었다. 이우연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아름 씨.”

“네?”

윤아름은 깜짝 놀라 대답했다. 이우연의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그럼 그날 밤새 병실에 같이 계셨나요?”

“아니요. 친구분이 오신다고 해서 저는 돌아갔어요.”

“그렇군요.”

이우연이 생각에 잠긴 듯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윤아름은 결심한 듯 숨을 삼킨 후 입을 뗐다.

“낮에 인섭 씨가 전화로 이우연 씨 기사 얘기를 물어봤어요. …이우연 씨 걱정을 많이 하시는 거 같더라고요.”

“다른 얘기는 없었습니까.”

“네. 보도 대기 중인 기사가 있는지만 물어보셨어요. 내용은 이미 알고 계신 눈치였고요.”

목소리가 너무 좋지 않아서 이우연이 정말 큰 사고라도 일으킨 줄 알았다. 결과적으로 큰 사고를 일으킨 건 채연서 쪽이었지만. 아니, 시상식 도중 갑자기 사라졌으니 이젠 이우연이 더 문제가 되려나.

윤아름은 이우연을 흘깃 쳐다보았다. 이우연은 인섭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을 건넸다.

“무슨 일 생기면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여긴 제가 있을 테니 이만 돌아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윤아름은 발길이 미처 떨어지지 않았다. 사실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이우연의 상태도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단순히 기분이 나빠 보인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괜찮으세요?”

윤아름이 문을 나서기 전에 물었다.

“…괜찮을 겁니다.”

누구를 향한 질문인지도 구분하지 못할 만큼 이우연은 정신이 없어 보였다. 윤아름은 그에게 뭔가 말을 건네려다가 그만두었다.

윤아름은 최대한 조용히 병실 문을 닫고 나왔다.

흐릿하게 번져 있던 초점이 점점 또렷해졌다. 인섭은 몇 번 더 눈을 깜빡였다.

“깼어요?”

옆에서 들린 남자의 목소리에 인섭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창밖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몇 시예요?”

“여덟 시 막 지났어요.”

이우연이 시계를 확인하고 대꾸했다.

“하루 지난 건가요?”

“그런가 보네요.”

이우연도 그제야 하루가 지났다는 사실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손은 괜찮으십니까.”

이우연이 대답 대신 붕대를 감은 손을 보여 주었다. 인섭은 아직까지 이우연이 피 묻은 셔츠를 입고 있음을 깨달았다.

“여기 계속 계셨던 건가요?”

“네.”

“…손 아프실 텐데 죄송합니다.”

저를 걱정해 주는 인섭을 이우연은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불쑥 입을 뗐다.

“윤아름 씨 다녀갔어요.”

“윤아름 씨요?”

인섭은 당황해서 되물었다.

“보호자 번호로 등록되어 있어서 병원에서 연락이 갔다고 하더군요.”

“…….”

인섭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흐려졌다. 그러고 보니 아까 잠시 정신을 차렸을 때, 윤아름의 모습도 언뜻 보인 것 같았다.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발작으로 쓰러진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요?”

이우연의 물음에 인섭은 머뭇거리다가 죄송합니다, 하고 대답했다.

“뭐가 미안해요.”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인섭이 사과를 하는데도 이우연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두 손을 마주 잡은 채로 인섭을 응시할 뿐이었다.

“인섭 씨.”

이윽고 그가 침묵을 깼다. 인섭은 각오하고 있었다는 듯이 조금 긴장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윤아름이 좋아요?”

“……!”

인섭은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정신을 잃기 전에는 이우연이 내보이는 이기심에 화가 나서 일부러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지금은 그런 말로 이우연을 상처 주고 싶지도 않았고, 윤아름을 끌어들이고 싶지도 않았다.

“솔직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아니에요. 정말입니다. 윤아름 씨하고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냥 친구입니다.”

“그럼 나는 그냥 친구보다 못한 존재인가.”

이우연이 쓰게 웃었다.

“그게 아니라….”

인섭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무슨 말을 한다 해도 결국 변명밖에 되지 않을 상황이었다.

“강영모 씨가 사무실에 오셨던 날, 오후에 다시 저희 집 앞으로 찾아왔었습니다.”

이우연의 눈매가 설핏 가늘어졌다.

“강영모가 인섭 씨를 찾아갔다고요?”

“USB 때문에 신경 쓰여서 오셨는데, 조금 다툼이 있었습니다.”

얻어맞았다는 말은 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둘러댔다. 이우연은 묵묵히 인섭의 얘기를 들었다.

“그날 원래 몸 상태도 좀 안 좋았고, 그래서 발작이 일어났습니다. 고양이를 보러 가려고 약속했던 터라, 윤아름 씨가 우연하게 그 자리에 계셔서 병원까지 동행한 겁니다. 그뿐입니다.”

“그래요. 그뿐이군요.”

이우연이 인섭의 마지막 말을 곱씹듯 되뇌고는 묻는다.

“와서 뭐라고 하던가요.”

“네?”

“윤아름은 그뿐이라고 쳐도, 강영모는 아니잖아요. 뭐라고 했어요. 뭐라고 했는데, 인섭 씨가 쓰러지고 나서도 나한테 입 다물고 있었나요.”

목소리는 나긋했지만 이우연의 눈동자에 스치는 예기는 감추지 못했다.

“벼, 별 얘기 없었습니다. USB에 담긴 내용을 걱정하셨던 것뿐입니다. 잘 말씀드려서 돌려보냈습니다.”

이우연이 하, 짧은 숨소리를 내뱉었다.

“그 새끼가 잘도 평범하게 걱정만 하다 갔겠군요.”

이우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세요?”

“인섭 씨가 얘기해 줄 생각이 없는 거 같아서, 장본인에게 들으러 갑니다.”

인섭은 더럭 겁이 나 다급하게 이우연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별일 없었습니다. 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우연이 저를 붙든 인섭의 손에 제 손을 겹쳤다.

“그동안 인섭 씨가 거짓말해도 눈감아 준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예요.”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인섭의 손을 잡은 이우연의 손등에 힘줄이 불거진 채였다. 그가 화를 내지 않으려고 얼마나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건 아니에요. 강영모 그 개새끼가 너한테 손댄 걸, 어떻게 두고 넘겨.”

이우연이 인섭의 손을 떼어 내려 했다.

“안 돼요.”

인섭이 손에 힘을 주어 이우연의 옷을 잡아당겼다.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우연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인섭을 달랬다.

“그런 인간 무서워할 필요 없어요.”

“…아닙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인섭이 다급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초조함에 왈칵 제 마음을 쏟아 냈다.

“우연 씨가 그 사람이랑 엮이는 게 싫습니다. 그때는 무마되었지만, 이번에도 그런 일이 생기면….”

보통의 사람은 당연하게 구분할 수 있는, 인간성과 비인간성의 흐릿한 경계선 위를 남자는 걷는 것이다. 미필적 고의로 선을 넘지 않도록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이는 그 모습을 인섭은 안다. 다른 사람은 모른다 해도 자신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두려운 것이다.

그날 골목길에서 봤던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창백하리만치 깨끗한 피부에 튄 핏자국과 자신이 내리친 상대를 내려다보던 감정 없는 눈.

인간성과는 거리가 먼 그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인섭은 제가 사랑하는 남자가 영영 선 밖으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강영모 씨 때문에 쓰러진 거 아닙니다. 별거 아닙니다. 의사 선생님이 그냥 스트레스성이라고 했습니다. 스트레스만 받지 않으면 별일 없을 겁니다. 다른 데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습니다.”

인섭은 다급하게 제 상황을 설명했다. 정신 병원이든 감옥이든 갇히고 싶지 않다고 말하던 이우연이 떠올랐다. 한순간의 실수로 그가 노력해 온 것들을 모두 잃어버리는 것만은 절대로 원치 않았다.

“정말 다른 이유가 있는 거 아닙니다. 두 분이 엮여서 문제 생길까 봐, 화내실 거 같아서, 그게 무서워서 말하지 않은 겁니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스트레스만 안 받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인섭은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우연의 눈과 마주쳤다. 이우연의 단정한 눈에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들었다. 분노와 슬픔을 넘어선 참담함이 그의 눈에 가득 고였다.

이우연이 입을 꾸욱 다문 채 제 감정을 삼켜 냈다.

“…전혀 괜찮지 않아요.”

이우연이 제 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당신 죽을 뻔했어요.”

그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괜찮을 수도 있지만, 인섭 씨는….”

이우연이 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 모습이 마치 우는 것처럼 보여 인섭은 가슴이 욱신 조여 왔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인섭은 얼른 그렇게 말했지만 이우연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이해가 안 간다고 하셨었죠.”

초췌해 보이는 마른 뺨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그가 묻는다.

“내가 다른 인섭 씨 두고 다른 사람이랑 만나서, 그걸 흔한 일이라고 해서 이해가 안 간다고 했던가요.”

“…….”

인섭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미국으로 돌아가려고 한 거 아닙니까?”

이우연이 재차 대답을 요구했다. 인섭은 고개를 떨구었다. 침묵으로 그의 물음에 긍정했다.

“인섭 씨 말이 맞아요.”

이우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해하지 마세요. 나도 당신 이해 못하겠으니까. 흔한 일에, 고작 연애하는 데 목숨 걸 필요가 있나요.”

이우연이 인섭을 직시했다.

“그만해요.”

울림이 좋은 그의 음성이 병실에 나직하게 닿았다. 인섭은 멍하니 이우연을 바라보았다.

화를 내거나, 슬퍼하거나, 애달파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담담하게 인섭에게 이별을 고했다.

“저는….”

먼저 못 하겠다고 한 사람은 자신이었다. 그 사실을 알기에 인섭은 이우연을 붙들지도,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병원 수속은 대표님께 말씀드려서 신경 쓸 일 없도록 해 둘게요. 받을 수 있는 검사는 다 받으세요.”

“…….”

인섭은 머릿속이 창백하게 바랬다.

“먼저 갈게요.”

이우연이 재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병실 문을 열고 나가려는 그를 인섭은 무심코 불러 세우고 말았다.

“우연 씨…!”

인섭은 당혹감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막상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바다 한가운데에 사지가 묶인 채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뭐라도….

“인섭 씨랑 있으면 내가 평범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어요.”

이우연이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서 옅은 웃음기가 묻어났다.

“그런데 인섭 씨에게 괴물은 강영모가 아니라 나였네요.”

“아닙니다. 우연 씨, 절대로….”

“밥이랑 약 잘 챙겨 먹고, …쉬세요.”

이우연은 인섭이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병실 문이 닫혔다. 이전에 꿈속에서 봤던 이우연의 모습이 겹쳐졌다. 인섭은 내도록 닫힌 문을 바라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꿈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그때는 깰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끝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인섭은 설핏 인상을 찌푸리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피 칠갑을 한 바닥이 그날의 참상을 고스란히 보여 주었다. 인섭은 한숨을 내쉬고 걸레를 가져와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진득하게 굳은 핏자국은 좀처럼 잘 닦이지 않았다.

이렇게나 피를 많이 흘렸는데, 정말 괜찮은 걸까.

불쑥 고개를 든 생각에 인섭은 쓰게 웃었다.

이우연과 끝이 났다. 이번엔 정말 끝이었다. 병실에 있는 일주일간 이우연은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당연했다. 자신이 먼저 그러자고 했고, 이우연은 그걸 받아들인 것이다.

인섭은 바닥을 문지르던 걸레를 툭 내던졌다. 대충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웠다. 예전이었으면 청소부터 마쳤을 텐데, 도무지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코끝이 쌀랑한 느낌에 인섭은 시트를 가져왔다. 시트를 몸에 둘둘 두르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울고 싶은데 눈물이 나지 않았다. 감정이 바닥난 기분이었다. 인섭은 몸을 뒤척이며 자세를 달리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매일 차 실장이 찾아왔다. 읽을 책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와서 한참 동안 실없는 얘기를 떠들다 가기도 했다.

차 실장이 찾아온 지 사흘째 되는 날, 인섭은 더 이상 오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했다.

‘왜? 귀찮아?’

‘아닙니다. 아직 차 실장님 다리도 다 낫지 않으셨는데, 괜히 저 때문에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하나도 안 번거로운데?’

‘…이우연 씨가 부탁한 거 알고 있습니다.’

차 실장이 가볍게 웃었다.

‘내가 이우연이 가란다고 가고 가지 말라고 안 갈 사람으로 보여?’

인섭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난 인섭 씨 좋아하고 걱정돼서 오는 건데. 내가 그렇게 귀찮으면 안 오고.’

인섭은 얼굴이 벌게진 채로 고개를 내저었다.

‘저, 저도 실장님 좋아합니다.’

‘그래. 그러니까 괜한 데 신경 쓰지 말고 몸조리나 잘해.’

차 실장이 인섭의 어깨를 두드렸다. 인섭은 진심으로 그가 좋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툭툭 내던지는 그의 배려에 늘 마음이 따뜻해졌다.

차 실장은 이우연의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인섭도 묻지 않았다.

갑자기 입원하는 바람에 핸드폰도 챙기지 못해서 일주일 동안 인터넷도 하지 않았다. 티브이도 일부러 보지 않았다. 한국으로 와서 처음으로 보내는 이우연이 없는 시간이었다.

낮 동안에는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가끔 찾아오는 김강우나 윤아름이 말동무가 되어 주기도 했다. 하지만 밤이 되면 어김없이 이우연에 대한 생각으로 모든 시간을 소비했다.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인섭은 시트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로 몸을 벽 쪽으로 돌렸다.

‘…전혀 괜찮지 않아요.’

이우연의 목소리가 잊히지 않는다. 무슨 말이든 해야 했는데…. 아니, 어떤 말을 한다고 달라졌을까.

이우연은 여전히 그런 일들은 흔한 것이라 말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해 봐도, 그럴수록 비참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이우연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욱신거렸다. 심장에서 손끝까지 신경이 이어진 것처럼 숨을 내쉴 때마다 날카로운 통증이 혈관을 찔러 댔다.

인섭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약을 먹을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밥 생각은 없었지만 약 때문에 뭐든 먹어야 했다. 막 이사를 온 터라 냉장고가 텅 비어 있었다. 인섭은 외투를 집어 들었다. 간단히 죽이라도 사 올 요량이었다.

그때 주머니에 있던 봉투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오늘 김 대표에게 받은 봉투였다.

퇴원 수속은 김 대표가 밟아 주었다. 짐을 챙기고 나오려는 인섭에게 김 대표는 봉투를 내밀었다.

‘월급이랑 퇴직금 넣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받을 수 없어요.’

김 대표가 병원비를 모두 정산한 것을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 나오는 돈이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월급을 따로 챙겨 받을 수 없었다.

‘받아 둬. 월급 떼어먹으면 회사 노동청에 신고당할 수도 있어.’

김 대표는 인섭의 주머니에 억지로 봉투를 구겨 넣었다. 인섭은 저 때문에 회사가 신고를 당할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이거.’

김 대표가 내민 건 파란색 표지의 여권이었다.

‘이우연이 짐 정리하다가 찾았다고 하더라.’

인섭은 말없이 여권을 받아 들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는 터였다. 김 대표는 인섭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 후 병실을 나섰다.

미국으로 돌아가야겠지.

인섭은 여권을 내려다보다가 표지를 넘겼다. 한국에 처음 들어온 입국 도장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몇 장을 넘기자 하와이 입국 도장이 보였다. 그다음 장에는 미국으로 다시 입국했던 도장이, 그리고 몇 장 뒤에는 한국으로 재입국한 도장이 찍혀 있었다.

이우연과의 일대기가 몇 개의 도장으로 요약되었다. 인섭은 멍하니 마지막으로 찍힌 입국 도장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입국장에서 모자를 눌러쓴 채 저를 기다리던 이우연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슴이 욱신거렸다. 인섭은 얼른 여권을 접어 책상 안에 넣었다.

같이 넣어 둬야겠다 싶어서 인섭은 바닥에 떨어진 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손끝에 지폐가 아닌 단단한 종이의 감촉이 느껴졌다.

“……?”

인섭은 봉투를 열었다. 그 안에는 남색 종이봉투가 하나 더 들어 있었다. 열어 보지 않아도 그 봉투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인섭은 알 수 있었다. 제가 이우연에게 건네준 봉투였다.

남색 봉투를 열어 보니 역시나 자신이 은행에서 발행해 온 수표가 들어 있었다. 인섭은 핸드폰을 찾았다. 구석에 떨어져 있던 핸드폰을 충전하자 한참 지나고 나서야 전원이 들어왔다.

부재중 전화와 문자가 잔뜩 있었지만, 무시하고 김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 뒤에 통화가 이어졌다.

<여보세요?>

전화기 너머에서 조금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최인섭입니다.”

<어? 잠깐만.>

부스럭거리는 소리 뒤에 김 대표가 응, 말해, 하고 인섭의 다음 말을 재촉했다.

“봉투 지금 확인했습니다.”

<왜? 돈이 모자라?>

“아니요. 잘못 받은 돈이 있습니다. 남색 봉투에 든 건 제 게 아니라….”

<알아. 얘기 들었어. 차 수리비로 준 거라며. 그런데 이우연 그거 다 보험으로 처리했대. 들어갈 돈 없다고 받을 돈도 없다던데.>

“그래도 보험료가 많이 올라갈 텐데요.”

<인섭아. 내가 어디서 들은 얘기인데, 세상에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 부자 걱정이랑 연예인 걱정이라고 하더라. 너 지금 동시에 두 개 다 하고 있는 거 알지?>

“그래도 이 돈은 받을 수 없습니다.”

<정 그러면 위자료라고 생각, 악!>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갑작스러운 비명에 인섭이 놀라서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야. 아무것도. 하하. 운전 중인데 다리가 쥐가 나서. 하하하.>

김 대표가 웃음으로 둘러댄 후,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 돈은 네 돈이었으니까 그냥 네가 가져. 이우연 성격에 그 돈 받겠어?>

“그래도….”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나한테 돌려줄 생각 마. 그럼 또 나만 번거로워지니까.>

김 대표가 평소답지 않게 단호한 투로 말을 잘랐다. 인섭은 한숨을 삼켰다.

<밥은 먹었어?>

“지금 먹으려던 참이었습니다.”

<잘 챙겨 먹어라. 약도 잘 챙겨 먹고.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감사합니다. 대표님.”

<내가 지금 어디 가던 길이라서 길게는 통화 못 하겠다. 나중에 또 통화하자.>

인섭은 들어가세요, 하고 인사를 하고 통화를 마쳤다. 수표가 담긴 남색 봉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서랍장을 열어 넣어 두었다.

인섭은 약을 찾아서 입 안에 털어 넣고 수돗물을 삼켰다. 그러고는 도로 침대에 누웠다.

장도 봐야 하고, 청소도 해야 하고, 집 정리도 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 느끼는 엄청난 무력감에 인섭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차갑고 깊은 물속에 잠겨 드는 기분이었다.

이우연이 생각났다.

“목소리 들으니까 기분이 좀 낫냐?”

김 대표가 운전대를 쥔 채로 옆을 흘끔 보며 물었다. 이우연이 창가를 바라보며 글쎄요, 하고 대꾸했다.

“내가 일부러 스피커폰으로 목소리까지 들려줬는데, 말 한마디 잘못했다고 사람을 주먹으로 치질 않나. 너 그렇게 살면 안 돼.”

김 대표가 일부러 너스레를 떨었지만, 이우연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인섭이 이제 곧 미국으로 들어갈 거 같은데, 가서 얼굴이나 한번 보지 그래.”

이우연이 아예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감아 버렸다.

김 대표는 속이 바싹 타들어 갔다.

이우연이 시상식 도중 사라졌다는 전화를 김강우에게 받았을 때, 그는 직감했다. 망했다. 망해도 그냥 망하는 게 아니라 아주 개망한 것이다. 김 대표는 쏟아지는 기자들의 전화를 모두 수신 거부 해 버렸다.

이우연이 김강우의 핸드폰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계속 연락했지만 당연히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밤늦게야 이우연에게 전화를 받은 것이다. 병원으로 달려가니 이우연은 또 피 칠갑을 하고 앉아 있었다. 세상 오만 욕을 쏟아붓고 싶은 욕구를 꾹 참고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모르겠어요.’

이우연이 인섭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정말 아무것도 몰라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린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그 피는 대체 뭐야. …설마 누구 죽인 건 아니지?’

이우연이 대답 대신 제 손을 들어 보였다. 대충 수건으로 둘둘 두른 손의 상처를 보자마자 김 대표는 울고 싶어졌다. 결국 이우연의 등을 억지로 떠밀어서 응급실에 내려보내고 그는 병실을 지켰다.

김 대표는 침상에 누운 인섭을 보며 이쯤 되면 두 사람은 인연이 아니라 악연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치료를 받고 돌아온 이우연에게 차마 시상식이나 채연서 얘기를 꺼낼 수도 없었다. 만나면 제정신이냐고 쌍욕을 퍼부어 줄 생각이었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우연은 침대 앞에 앉아 인섭이 일어나길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 모습이 마치 버려진 개새끼처럼 보여서 김 대표는 핸드폰으로 눈에 좋은 영양제를 검색해야만 했다.

“오랜만에 같이 점심이나 먹을까?”

“됐어요. 바쁘신데.”

“언제부터 그렇게 내 생각을 해 줬다고 그래.”

이우연이 피식 웃었다.

“저 자살할까 봐 그러세요?”

김 대표는 뜨끔했지만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한 채 앞을 바라보았다.

“안 죽어요.”

이우연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기사가 뜨고 열심히 회사 입장을 정리해서 언론에 보내려던 차에 김 대표는 이우연에게 또 전화를 받았다. 자신은 집으로 갈 테니 병원으로 사람을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김 대표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옷 갈아입고 다시 가려고?’

그 짧은 시간에 무슨 일이 있겠냐고, 닭살 좀 그만 떨라고 타박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듣게 되었다.

‘끝났어요. 최인섭하고.’

덤덤한 목소리에 김 대표는 차마 너 혹시 인섭이 죽이고 나온 거냐는 질문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병원비는 제가 결제할 테니까 할 수 있는 검사는 다 해 주시고, 오늘 저녁에 차 실장님 좀 보내 주세요. 인섭 씨 혼자 있어요.’

전 재산을 넘겨서라도 최인섭과 평생 질척질척 엮이겠다고 한 게 엊그제였다. 갑작스러운 변심이 선뜻 믿기지 않았지만, 김 대표는 이우연이 원래 그런 놈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 하여간 절대 안 헤어질 것처럼 하더니. 네놈도 역시 어쩔 수….’

전화가 뚝 끊어졌다.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이우연은 받지 않았다. 대응 기사 때문에 바빠서 그날은 그렇게 넘겼다. 문제는 이우연이 그 뒤로도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흘째 되던 날 김 대표는 이우연의 집으로 찾아갔다. 거실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이우연을 보는 순간, 김 대표는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임을 깨달았다. 그는 이우연을 붙들고 간청했다. 병원에 가자고. 일단 병원에 가서 강력한 수면제 처방이라도 받자고 부탁했다.

이우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강제로 끌고 가려고 해도 며칠 동안 잠 한숨 못 잔 놈이 힘은 왜 그렇게 센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오늘 인섭이를 퇴원시키고 봉투를 대신 전해 주는 대가로 김 대표는 이우연을 데리고 병원으로 간다는 합의를 이루었다. 병원에서 수면제를 처방받고 나오는데 최 원장, 즉 김 대표의 사촌 동생이 그를 붙들었다.

‘형. 이우연 환자 지금 입원시키는 게 나을 거 같아. 저 상태로 계속 두면 큰일 날 수도 있어.’

예전이었으면 코웃음을 쳤겠지만, 이미 한 번 불면증이 심해진 이우연을 직접 목도한 바 있었다.

이우연은 스스로 차를 몰고 가서 사고를 일으켰다. 드라마 촬영을 도중에 중단시킬 수 없으니, 최인섭을 찾아갈 합당할 이유를 만들겠다는 이유 하나였다. 죽을 수도 있었다. 평생 영구적인 장애를 가지게 될 수도 있었다. 이우연은 그런 것들조차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 사실을 알기에 도저히 그를 그냥 둘 수 없었다.

“밥을 먹어야 약을 먹지. 빈속에 약 먹으면 속 다 버린다.”

김 대표는 이우연을 흘끔 쳐다보며 말했다. 그때까지 묵묵히 창밖을 보던 이우연이 고개를 돌린다.

“상태 어떤 거 같아요?”

“상태가 어떻긴. 아주….”

사흘 만에 이우연을 찾아갔을 때, 커튼을 다 쳐 놓고 소파에 앉아 있는 그를 본 순간 김 대표는 저놈 새끼 영어도 되는데 할리우드로 진출시키면 안 되려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살이 빠지고 눈매가 날카로워지니 본래 가진 선량한 인상에 퇴폐미가 더해져 오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것이다.

김 대표가 말을 잇지 못하자 이우연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다. 그것마저 그림이 되니 참 쓸데없이 잘생긴 놈이었다.

“상태 안 좋지. 거울 보면 안 보여? 그러니까 밥 먹고 약 챙겨 먹고 푸욱 자.”

“누가 제 상태 물어봤어요?”

“…인섭이 거는 말해 줬잖아.”

아침 일찍 인섭이 입원한 병원으로 가서 담당의랑 상담하고 검사 결과까지 모두 받아서 이우연에게 보고했다. 심지어 거기서 모자랐는지 담당의에게 따로 전화까지 걸어서 이것저것 확인까지 시켜 준 것이다.

“괜찮다면서 목소리가 왜 저따위냐고요.”

“궁금하면 네가 가서 직접 봐! 아니, 그렇게 유난을 떨 거면서 왜 헤어지고 난리야.”

김 대표가 바락 소리를 내질렀다.

연예인의 연애는 흔했다. 선남선녀가 모여 있는 바닥이니 시도 때도 없이 불꽃이 튀는 건 당연했다. 그만큼 이별도 잦았다. 김 대표는 가끔 이별로 슬퍼하는 소속사 애들을 불러내 술을 사 주고 밥을 사 주기도 했다. 회사에 소속된 연예인의 멘탈 관리도 대표의 몫이라고 여긴 터다.

그렇지만.

“당장 가서 다시 사귀어! 지금 최인섭 집으로 데려다줄 테니까.”

마약, 성범죄, 살인을 제외하고 톱 배우가 동성과 사귀는 것만큼 위험한 스캔들은 없었다. 회사 대표의 입장에서 이번 결별에 덩실덩실 춤을 춰야 마땅하겠지만, 이우연의 꼬락서니를 보자 김 대표는 저도 모르게 본심을 토해 내고 말았다.

이우연이 느슨하게 웃었다.

“다시 사귈 수 있으면 사귀죠, 제가.”

“그럼 가서 빌든가 뭐라도 해서 사귀면 되잖아. 분명히 네가 잘못했을 텐데!”

김 대표의 말에 이우연이 그러게요, 하고 중얼거린다. 그러고는 턱을 괸 채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우연은 헤어진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김 대표가 몇 번 물었지만, 그때마다 지금처럼 입을 다문 채로 다른 곳만 쳐다볼 뿐이었다.

속 터지는 새끼. …쓸데없이 잘생긴 새끼가 돈만 우라지게 잘 벌어 와서 내다 버리지도 못하고.

김 대표가 차마 내뱉지 못할 욕을 구시렁거리는 사이 차가 신호에 걸렸다. 차가 멈추어 서자 이우연이 불쑥 입을 열었다.

“저는 걔가 바람피우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뭐? 최인섭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네놈이라면 몰라도….”

김 대표는 말을 해 놓고 아차 싶었다. 상태 안 좋은 이우연을 굳이 긁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맞아요. 저 같은 쓰레기는 몰라도 최인섭이라면 당연히 그런 짓 안 하겠죠.”

웬일로 이우연이 선선히 김 대표의 말에 동조했다. 네놈에게도 일말의 양심이라는 게 있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그런데 계속 그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더라고요. 최인섭이 뭘 하고 있건, 누구랑 있건. 계속 누구랑 붙어먹는 장면이 떠오르는 겁니다.”

우아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하고 이우연은 아무렇지도 않게 저속한 말들을 쏟아 냈다.

“나중에는 걔가 누구한테 웃어 주기만 해도 속에서 쓴 물이 올라왔어요. 한번은 채연서 지퍼를 올려 주고 있는 걸 보고 하마터면 돌아 버릴 뻔했어요. 사람들 앞에서 최인섭 옷을 다 벗긴 다음 자지를 박아 넣어서 걔가 내 거라는 걸 매번 보여 주고 싶었단 말입니다.”

“…….”

아아, 우연아 정말이지 너는….

김 대표가 경멸 어린 시선을 보내자 이우연이 슬며시 웃는다.

“알아요. 저 미친놈인 거.”

“아는 놈이 그래.”

“아니까 그나마 안 하고 있잖아요. 강간, 폭력, 감금, 살인.”

김 대표는 얼른 방화, 하고 하나를 더 덧붙였다. 이우연이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맞아요. 다 불 질러 버리고 싶을 때가 있죠.”

“…….”

김 대표는 조용히 콘솔 박스에 놓인 라이터를 치웠다.

“저는 걔가 다른 사람한테 다정하게 구는 게 싫어요. 그 빌어먹을 정도로 착한 성격 덕분에 나 같은 씹새끼를 좋아해 준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요. 최인섭이 좋아하는 건 사람이든 동물이든 풀때기든 다 치워 버리고 싶다고요. 그냥 가둬 놓고 나만 보게 하고 싶어요.”

“…….”

김 대표는 정말 진심으로 이우연이 최인섭과 헤어져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쓰레기 같은 제가, 최인섭 미국에서 한국으로 데려올 때 결심한 게 하나 있어요.”

이우연이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갔다.

“다시는 인섭 씨 목숨이 위험하게 만드는 일 따윈 없을 거라고.”

인섭이 스토커의 칼에 찔려 죽을 뻔한 일은 이우연에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인섭이 미국으로 간 다음 이우연은 한동안 불면증으로 치료를 받아야 했을 정도였다.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본 김 대표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두 번이나 쓰러졌어요. 심지어 처음 쓰러진 날에, 걔는 내가 화낼까 봐 무서워서 말도 못 하고 있었대요. 하하하. 그날 새벽에 내 목소리 듣고 싶다고 전화 걸었는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

“목소리 듣고 싶은 거면 얌전히 집에서 내가 준 시디나 듣지 그랬냐고 했어요. 그래 놓고 난 밤새 최인섭 기다리면서 걔가 딴 년이랑 붙어먹는 장면이나 상상했다구요. 차라리 그랬으면 낫지. 겁도 많은 새끼가 밤새 혼자서 병실에 누워 있었을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아요. 시팔, 진짜.”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지 이우연이 잇새로 욕을 짓씹어 뱉었다.

“단순한 스트레스성이라면서 날 붙들더라고요. 자칫하면 죽었을 수도 있는데, 최인섭은, 그 순간에도 나를 걱정해요. 내가 저를 두고 다른 여자랑 만났다고 생각하면서, 나한테 말 한마디 독하게 하고 미안해서 펑펑 울더군요. 전에는 걔 우는 것만 보면 꼴렸는데, 이젠 미칠 거 같아요.”

앞뒤가 안 맞는 말을 내뱉으면서 이우연이 두통을 느끼는지 이마를 손바닥으로 꾸욱 누르며 눈가를 찌푸렸다.

“우연아….”

“난 인섭 씨가 너무 좋아요. 진짜 좆같이 너무 좋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우연이 뜨거운 쇠를 삼키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제 비틀린 연심을 고백했다.

“나는 걔 없으면 못 살 거 같은데….”

이우연은 눈을 감았다. 처음으로 신 앞에 제 죄를 고백하는 사람처럼 그는 수치를 억누르며 나직하게 말했다.

“…인섭 씨는 내가 있으면 못 살 거 같아요.”

“…….”

신호가 바뀌었다. 차가 움직이지 않자 뒤에서 빵, 하는 클랙슨 소리가 울렸다. 김 대표는 얼른 차를 출발시켰다. 차가 움직인 뒤 한참 지난 후에 시트에 고개를 깊숙이 기댄 채로 이우연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걔한테 다시 만나자고 해요.”

김 대표는 연애에 관해서는 어디 가서 빠지지 않을 만큼 경험이 많은 터라 후배들이 연애 상담을 청해 오면 청산유수로 줄줄 조언을 해 주곤 했다.

그런데 이건.

“…….”

이전에 이우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최인섭은 저와 헤어지면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겠지만, 자신은 그러지 못할 거라던.

“한숨 자라.”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할 수 있는 말은 결국 그뿐이었다. 김 대표는 조용히 운전대를 돌렸다.

“우욱….”

먹은 것이 많지 않아 멀건 위액만 흘러나왔다. 하지만 구역감이 가시지 않았다. 인섭은 몇 번 더 토악질을 한 다음, 가까스로 일어나 세면대에서 입을 헹궜다. 양치질을 하는 중에도 올라오는 메스꺼움을 참아야 했다.

며칠 전부터 계속 뭘 먹기만 하면 위 부근이 꽉 막힌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괜찮아지겠지 하고 넘겼는데 통증이 점점 심해져 급기야는 물만 마셔도 구토를 하는 수준에 이르러 다시 병원에 찾아갔다.

불행 중 다행으로 심장에 이상이 생긴 게 아니라, 심한 위염이라는 소견을 받았다. 먹는 걸 조심하고 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고 스트레스를 최대한 피하라는 의사의 지시를 들었다.

샤워를 하고 나온 인섭은 밖으로 나와 약 봉투를 찾았다. 한 번에 복용하는 알약의 개수만 해도 열 개가 넘었다.

손바닥에 놓인 알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인섭은 입 안에 털어 넣고 물을 따라 마셨다. 약을 삼킨 다음 침대로 가서 누웠다.

방 안은 여전히 엉망이었다. 그날 이후로 박스는 하나도 뜯지 않았다. 할 일이 많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인섭은 손끝 하나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태어나 처음 겪는 무력감이었다.

제니의 죽음을 알게 되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지금 제가 하는 일이라고는 씻고 식사를 챙기고 약을 먹는 일뿐이었다.

‘밥이랑 약 잘 챙겨 먹고, …쉬세요.’

마지막으로 병실을 나서며 이우연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밥을 먹어도 거의 다 토하고, 약은 독해서 먹기만 하면 비정상적으로 길게 수면을 취하고 있어서 몸 상태는 좋지 않았지만, 이우연이 한 말은 모두 지키고 있었다.

이렇게 오래 자도 되는 걸까 싶을 정도로 하루의 대부분을 잠으로 보냈다. 눈을 뜨면 이우연에 대한 생각이 밀려들어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흔한 일에, 고작 연애하는 데 목숨 걸 필요가 있나요?’

그렇게 말하던 이우연의 표정이 어땠었지.

인섭은 그의 얼굴을 떠올리려다가 그만두었다. 괴로웠다. 한 번 더 확인 사살을 당한 기분이었다. 죽을 만큼 괴로운데, 그보다 더 힘든 건 아직도 고스란히 남은 이우연에 대한 마음이었다.

시간이 약이다. 어떤 이별도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진다.

인섭은 책에서 읽었던 구절들을 기도문처럼 되뇌어 봤지만, 문제는 너무도 더디 가는 시간이었다.

눈을 감았다. 스멀스멀 약 기운이 밀려왔다. 몸이 물 위를 부유하는 기분이었다. 다시 속이 울렁이기 시작했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인섭은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달려갔다. 누구인지 묻지도 않고 그대로 문을 열었다.

“어….”

노크를 하려고 손을 들었던 윤아름이 놀라서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녀가 얼른 손을 내리고 웃어 보였다.

“아…. 안녕하세요.”

인섭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오늘 온다고 했었잖아요. 잊으셨어요?”

“내일 아니었습니까?”

인섭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윤아름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날짜를 확인시켜 주었다. 인섭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얼굴을 붉혔다.

“뭐 하시느라 시간 가는지도 모르셨어요.”

윤아름이 가볍게 타박하며 손에 든 봉투를 내밀었다.

“집들이 선물이요. 어머니가 갖다드리래요.”

그녀의 손에는 반찬이 들려 있었다. 윤아름의 어머니는 인섭이 미국에서 한국으로 공부를 하러 혼자 온 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 기회가 될 때마다 반찬을 만들어 보내 주곤 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너무 받기만 해서….”

“받기만 하긴요. 로이스 주셨잖아요. 아버지가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몰라요. 잘 때도 로이스 껴안고 주무실 정도예요. 심지어 샤워할 때도 로이스를 데리고 들어가려고 해서 어머니가 얼마나 구박하시는지 몰라요.”

로이스는 결국 윤아름의 집에서 키우게 되었다. 성묘는 분양이 어려우니 우리가 키우자며 분양 시도조차 하지 않은 윤아름의 아버지가 그렇게 선언했다.

“혹시 상황 안 되시면 존도 주셔도 된대요.”

존의 분양은 조금 늦추자고 윤아름이 먼저 권했다. 미국으로 데리고 가려면 해결해야 할 문제도 있기에 인섭은 순순히 그러겠다고 응했다.

“아닙니다. 존은 당연히 제가….”

인섭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멍,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밑을 내려다보니 하얀 털을 가진 강아지가 열심히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형아 본다고 신나서 달려왔는데. 그치?”

윤아름이 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인섭이 봉투를 내려놓고 쭈그리고 앉아 두 팔을 벌리자 콩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뛰어들었다. 인섭은 콩이의 등을 하염없이 쓰다듬어 주었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네. 괜찮습니다.”

“안색이 어째 더 안 좋아 보이시는데.”

그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인섭은 얼른 웃어 보이며 고개를 내저었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녀가 흠, 하고 입을 다물었다.

윤아름이 다시 병문안을 왔을 때 그녀는 혼자 병실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인섭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혼자 계세요?’

‘간병인이 필요한 정도는 아니라서 괜찮습니다.’

‘그게 아니라….’

뭔가 말을 하려던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방금과 같은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짓고.

“아무리 그래도 혼자 계시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스트레스 안 받으면 쓰러질 일 없어요. 일도 쉬고 있고.”

병원에서도 혼자였던 인섭이 퇴원한 후로도 혼자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윤아름은 하루에 한 번은 연락해 왔다. 별다른 내용도 없이 존의 사진이나 콩이의 사진을 보낼 때도 있었다.

“애인… 분은 많이 바쁘신가 보네요.”

“아, 네. 아무래도….”

인섭은 당황해서 허둥지둥 둘러댔다. 헤어졌다는 말조차 할 수 없었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제가 연예인과 사귄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기에 말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러웠다.

“차기작 준비 때문에 많이 바쁘실 겁니다.”

윤아름이 방 안쪽을 흘깃 쳐다보았다.

“…아직 티브이랑 인터넷 연결 안 하셨어요?”

“네. 짐 정리부터 해야 하는데 아직 어수선합니다.”

“짐 정리도 일인데 쉬엄쉬엄….”

그때 주인의 주의가 흐트러진 틈을 타서 콩이가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콩아! 이 멍충한 놈아! 발도 안 닦고!”

윤아름이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며 리드 줄을 잡으려 했지만, 이미 콩이는 저만치 달려 들어가 방을 누비는 중이었다.

“죄송해요. 쟤 미쳤나 봐.”

“괜찮습니다. 어차피 지저분해서 나중에 치우면 됩니다.”

인섭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안으로 들어갔다. 윤아름도 얼른 신발을 벗고 그를 따라 들어갔다. 여기저기 쌓인 박스를 보자 강아지의 흥은 평소보다 배가 되었다.

“콩이 너 누나 말 안 들을래? 당장 안 오면 간식 없어!”

간식이란 단어에 흥분한 강아지가 그대로 윤아름을 향해 내달렸다. 그 바람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던 박스가 우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박스 안에 있던 내용물이 와르르 쏟아지자 윤아름은 아이고, 하며 이마를 짚었다.

“괜찮습니다. 다시 담으면 돼요. 신경 쓰지 마세요.”

인섭이 손을 저으며 바닥에 널브러진 물건들을 주우려 허리를 굽혔다.

“……!”

바닥에 떨어진 물건의 정체를 확인한 인섭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트로피였다. 영화제 대상, 최우수 남우 주연상, 드라마 남자 최우수상, 드라마 대상, 등등.

어느 날 장식장 안에 조르르 놓인 트로피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인섭을 발견한 이우연이 다음 날 트로피를 상자에 담아 선물이라고 가져온 것이다. 인섭이 정색하며 안 받겠다고 했지만, 이우연은 막무가내로 인섭의 책장에 제 상패를 늘어놓았다.

인섭은 이우연의 이름이 떡하니 박힌 상패를 후다닥 주워 상자에 담았다.

“도와드릴게요.”

“아닙니다. 괜찮…!”

역시 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든 강아지가 상패를 하나 물고 방 안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야! 너! 혼난다!”

윤아름이 무서운 목소리로 꾸짖자 금세 기가 죽은 강아지가 그녀의 앞에 물고 있던 상패를 툭 떨어트렸다.

“여기….”

그녀가 인섭에게 상패를 건네다가 어라, 하고 눈을 깜빡였다. 인섭은 당황해서 그녀의 손에서 빼앗듯이 상패를 가져왔다.

“후, 훔친 거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게, 잠시 맡아 달라고 하셔서….”

그럴듯한 변명을 떠올리려 할수록 머릿속은 점점 엉켜 갔다. 상식적으로 제가 맡은 연예인의 상패를, 한 개도 아닌 수십 개를 매니저가 갖고 있다는 사실이 말이 되지 않았다.

인섭이 새파랗게 질린 채로 더듬거리고 있자, 윤아름은 바닥에 떨어진 상패를 마저 상자에 넣어 주었다.

“인섭 씨. 있잖아요.”

그녀가 던진 서두에 인섭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눈치챘을까. 이우연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는데. 이미 헤어졌다고 말할까. 아니, 그럼 사귀었다는 걸 인정하는 건데. …그냥 훔쳤다고 할걸.

인섭이 하얗게 질려 가고 있을 때, 윤아름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저 유학 가기로 한 거, 결정됐어요. 아마 다음 달 중순쯤에 미리 나가서 어학원 다니게 될 거 같아요.”

“축하드립니다.”

갑작스러운 주제였지만 인섭은 얼른 그녀에게 축하 인사를 했다. 일을 그만두고 언론학 공부를 하러 유학 준비를 한다는 얘기를 이전에 얼핏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걱정돼서 잠이 안 와요. 사실 아무한테 말 안 했는데, 제가 외국인 울렁증이 있거든요.”

“외국인 울렁증이요?”

“네. 외국인만 보면 긴장돼서 손에서 식은땀이 나요. 인종 차별 이런 게 아니라, 말이 안 통하는 상대 앞에 서면 되게 무섭더라고요.”

활달한 성격의 그녀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몰랐지만, 인섭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해합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으면 아무래도 상대를 대하는 게 어렵습니다. 하지만 분명 잘하실 겁니다. 괜찮습니다.”

인섭의 말에 윤아름이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섭 씨라면 그렇게 말해 줄 거 같았어요. 괜찮다고.”

윤아름이 바닥에 떨어진 상패를 마저 주워 상자에 넣었다.

“맞아요. 괜찮을 거예요.”

인섭은 그제야 그녀가 유학 얘기를 꺼낸 의도를 알아챘다.

괜찮을 거예요.

그건 윤아름이 듣고 싶은 말이 아니라, 그녀가 인섭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었다.

인섭은 고개를 숙였다. 그녀에게 모든 걸 털어놓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가 그럴 리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만에 하나 제가 털어놓은 얘기가 이우연에게 폐가 될까 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울고 싶어졌다.

“인섭 씨. 괜찮아요?”

인섭이 갑작스럽게 입을 다물자 윤아름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네.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모로.”

윤아름을 보면 미국에 있는 가족이 생각났다. 따뜻하고, 어떤 조건도 없이 남에게 선의를 베푸는 사람들이.

“뭘요. 비싸고 맛있는 밥 얻어먹을 건데.”

인섭은 작게 웃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좋은 사람을 좋아했다면 이렇게 가슴 아픈 일은 겪지 않았을까.

고민해 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전제 자체가 자신에게는 아예 성립되지 않는 터다.

인섭은 손을 뻗어 헥헥거리고 있는 털 뭉치를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등을 연신 쓸어내려도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어딘가 고장 나 버린 기분이었다.

“그럼 나중에 봬요. 식사 잘 챙겨 드시고요.”

“네. 어머니께 감사 인사 꼭 전해 주세요.”

윤아름이 나오지 않으려고 눈치만 살피는 강아지를 보고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콩이는 거기서 살아. 집에 가서 누나가 간식 혼자 다 먹어야겠다.”

윤아름의 말에 콩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달려와서 그녀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꼬리를 흔들었다. 인섭이 웃으며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쉬세요.”

윤아름이 떠나고 나자 인섭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간신히 참았던 구역질이 올라왔다. 한참을 쭈그려 앉아 있고 나서야 울렁거리는 속이 잦아들었다.

가까스로 고개를 드니 트로피를 넣어 둔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박스 앞으로 가서 안에 담긴 트로피를 꺼내 세어 보았다. 스물세 개였다. 돈을 줘도 살 수 없는 것들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반드시 돌려줘야 했다. 주는 김에 수표도 같이 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인섭은 핸드폰을 꺼냈다. 김 대표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멈칫 손을 움츠렸다. 본인만 번거로워진다고 단호하게 말하던 김 대표의 목소리가 떠오른 터다.

어쩌지.

인섭은 트로피를 내려다보았다. 이우연이 어떤 노력을 해서 받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인섭은 이우연의 이름을 목록에서 찾아냈다. 손가락 하나만 대면 통화가 이어지는데 좀처럼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식은땀이 흐르고 속이 울렁였다. 인섭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다음으로 통화를 미룬다면 영영 트로피를 돌려주지 못할 게 분명했다.

인섭은 입술을 사리물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통화 연결음에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놓칠까 봐 손에 힘을 꽉 주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

인섭은 그제야 제가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깨달았다. 상대가 안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는 것이다.

당연히….

<여보세요.>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인섭은 놀라서 헉, 숨을 삼켰다.

<전화 잘못 걸었나요?>

이우연의 물음에 인섭이 아닙니다, 하고 대답했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인섭은 숨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갑자기 전화드려서 죄송합니다. 통화 가능하신가요?”

<네.>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다름이 아니라 짐 정리를 하다가 이우연 씨 물건이 나와서 전화드렸습니다.”

<버리세요.>

그게 뭐냐고 묻지도 않고 이우연은 대꾸했다.

“트로피입니다.”

<트로피는 못 버려요? 분리수거하면 되잖아요.>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 돌아오자 인섭은 당황해서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주소 알려 주시면 택배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전화기 너머에서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피차 귀찮잖아요. 그냥 버리세요.>

귀찮다는 말에 인섭은 손끝이 움칫 떨렸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하는데 머릿속이 텅 빈 기분이었다. 간신히 잦아들었던 구역질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밥은….>

“네?”

<잘 챙겨 먹어요?>

그냥 예의상 던진 질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인섭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뚝 흘리고 말았다.

“네. 잘 챙겨 먹습니다.”

인섭은 허겁지겁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먹는 족족 다 토하긴 해도 삼시 세끼 모두 챙겨 먹고 있었다.

<몸은 좀 어때요.>

“별 이상 없습니다.”

자꾸 토해서 다시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았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다고 했으니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우연이 다행이네요,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심장에 누군가 뜨거운 물을 훅 끼얹은 느낌이었다.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그때 인섭의 눈에 트로피가 들어왔다.

“…그때 시상식 끝나고 하시려고 했던 말씀이 뭐였습니까.”

저도 모르게 불쑥 그렇게 묻고 말았다. 잠시간의 침묵 뒤에 이우연이 인섭 씨, 하고 부른다.

이름을 불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네.”

<나랑 사귀는 게 처음이라고 했던가요?>

“…네. 그렇습니다.”

모든 게 처음이었다. 손을 잡은 것도, 입을 맞춘 것도, 섹스도, 이런 열렬한 감정도 모두 그를 통해 배웠다.

첫사랑이었다.

<그럼 헤어지는 것도 나랑 처음이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럼 모르시는 거 같아서 알려 드리죠. 헤어지고 나면 이렇게 전화하면 안 되는 겁니다.>

“…아, 죄송… 합니다.”

인섭이 더듬거리며 사과했다.

<그리고 아까 물어보신 건, 기억 안 나는 걸 봐선 별말 아니었을 겁니다. 이만 끊을게요.>

그렇게 툭 통화가 끊어졌다. 인섭은 한참 동안 핸드폰을 쥔 채로 서 있었다.

이우연의 태도는 깔끔했다. 화를 내거나 언성을 높이지도 않고, 지극히 이성적이었다.

마치, 화면 속에 있는 사람처럼.

이젠 그는 영영 닿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걸, 인섭은 인정해야만 했다.

통화는 마친 이우연은 핸드폰을 옆에 툭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테이블에 놓인 트로피를 집어 들었다. 이번 영화제에서 받은, 아니 받았어야 할 대상 트로피였다.

이우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트로피를 그대로 내던지고 말았다. 날아간 트로피는 콰직, 소리를 내며 벽면의 티브이 액정에 박혔다.

“…이우연.”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본 김 대표가 허옇게 질려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아, 대표님.”

삼천만 원짜리 텔레비전을 단번에 박살 내 놓고도 이우연은 선선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식사하셔야죠.”

“너는 밥이…, 그래, 먹자.”

김 대표가 단번에 십 년은 늙은 얼굴을 하고 백화점 지하에서 사 온 음식을 식탁에 차렸다.

“잠은 좀 잤냐.”

“모르겠어요. 좀 잤나.”

이우연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나무젓가락을 경쾌하게 갈랐다. 탁, 하고 갈라지는 소리에 김 대표는 움찔 몸을 움츠렸다.

“하하. 안 죽는다니까요.”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 산뜻하기 짝이 없는 웃음이었지만, 김 대표의 눈에는 아슬아슬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갑자기 어떻게 돌변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것이다.

방금 전만 해도 그랬다. 대신 받아 둔 트로피를 전해 주니 이우연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입을 꾸욱 다문 채 트로피를 바라보았다. 상념에 젖은 이우연의 눈을 보고 있자니 왠지 마음이 짠해져서 같이 술이나 한잔하자고 하려던 순간, 최인섭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이우연은 무표정한 눈으로 핸드폰을 노려보았다.

‘…대신 받아 줄까?’

이우연은 대답 대신 버튼을 눌러 통화를 시작했다. 걱정과는 달리 다행히 차분하게 통화는 이어졌다. 그래도 약발을 조금 받는구나 싶어서 김 대표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안도도 잠시.

통화를 마치자마자 이우연은 테이블에 놓인 트로피를 집어 들어 그대로 티브이에 꽂아 버린 것이다.

…무서워.

김 대표는 최대한 이우연에게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서 젓가락을 갈랐다.

“대표님.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돼요?”

“응. 안 돼.”

김 대표가 저도 모르게 본심을 말했다가 아차 싶어서 얘기는 들어 줄게, 하고 얼른 말을 바꿨다. 식탁에는 내던질 만한 물건투성이였다.

“최인섭 미국으로 보내 주세요.”

“뭐?”

“비행기 티켓 좀 끊어 주세요. 왜 아직 한국에 있어.”

이우연이 샐러드에 드레싱을 부으며 말했다.

“…이것저것 아직 정리할 게 많겠지. 인섭이 인생이 너 하나 자른다고 딱 떨어지는 게 아니잖아. 여기서 만든 인간관계도 있을 테고, 학교도 그렇고.”

“그건 내 알 바 아니니까, 당장 미국으로 보내요.”

이우연의 손에 들린 젓가락이 힘없이 부러졌다.

김 대표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전의 이우연이 제 본모습을 능숙하게 갈무리했다면 지금은 어떤 전조도 없이 채널을 넘나드는 느낌이었다. 예를 들면, 스테이크를 썰다가 옆에 있는 사람을 칼로 푹 쑤셔 버린 다음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스테이크를 썰어 입에 넣을 것만 같은 모습이랄까.

“아, 알았어. 일단 최대한 빨리 정리 도와주고 티켓 끊어 줄게. 그러면 되지?”

김 대표는 포크를 찾아서 이우연에게 건네며 말했다.

“네. 부탁 좀 드릴게요.”

말이 부탁이지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김 대표는 손바닥에 인 땀을 실크 가공한 아끼는 바지에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대신 나도 조건이 있어. 안 들어주면 나도 니 부탁 안 들어줘.”

샐러드를 먹던 이우연이 고개를 들었다.

왜 쟤는 풀을 먹고 있는데도 육식 동물처럼 보이는 걸까.

김 대표가 고민하는 사이, 이우연이 턱 선이 고스란히 드러난 얼굴을 하고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이 슬쩍 눈짓했다.

“너 몸 상태도 안 좋고 여론도 그렇고 하니까, …입원하는 게 어때?”

이우연이 시상식 도중 사라지자 하루만 기다려 달라는 애원에도 불구하고 그날 저녁 채연서의 스캔들 기사가 올라왔다. 언론에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킬 그 엄청난 특종을 놓칠 리 없는 것이다. 기사는 폭발적인 조회 수를 기록했다. 인터넷은 이우연과 채연서에 관한 확인되지 않은 루머로 넘쳐 났다. 채연서가 이우연을 처음부터 데리고 놀았다더라, 처음부터 이우연이 매달려서 사귀었다더라, 채연서가 이우연 애를 가졌는데 다른 남자를 만난다더라, 등등.

김 대표는 소속사 대표로서 할 수 있는 모든 대응을 했다. 하지만 마른 짚 더미에 번진 불길처럼 소문은 쉽게 진화되지 않았다.

급기야는 소식을 전해 들은 이우연이 자살 소동을 벌여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왔다는 섬뜩한 루머까지 돌았다.

쓰러진 인섭을 데리고 병원에 갔으니 영 거짓도 아니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김 대표는 차라리 잘됐다, 쓰러진 매니저를 데리고 병원에 가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고 발표하려 했다. 하지만 이우연이 단칼에 잘라 냈다. 최인섭 이야기가 기사에 한 줄이라도 실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못 박은 것이다.

결국 이우연의 갑작스러운 시상식 퇴장은 해당 배우의 건강 문제로 인한 것이라는 입장을 재발표해야만 했다.

“며칠만이라도 입원하면 여론도 좀 잠잠해질 거고, 건강 문제라는 사실 확인도 되는 거니까.”

“정신 병원이요?”

이우연이 평연한 투로 묻는다.

“아니, 아니. 일반 병원. …물론 가서 불면증 얘기하고 신경 정신과 협진도 받을 수 있겠지만.”

이우연이 하하 가볍게 웃었다. 방금 샤워를 했는지 그의 머리카락에는 물기가 맺혀 있어 웃는 모습이 유난히 싱그러워 보였다.

“처음부터 정신과에 넣으셔도 돼요.”

“…….”

“아니, 그냥 계약 해지하셔도 되고요. 대표님 번거로우시잖아요. 아하, 아직 빨아먹을 게 더 남아서 안 되려나.”

김 대표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너는 말을 해도 꼭 그렇게…. 그래도 우리가 지내 온 세월 동안 쌓인 정이….”

없다. 정이 없었다.

김 대표는 얼른 주제를 돌렸다.

“아무튼 며칠만이라도 입원하자. 사람이 잠을 자야 살지. 너 그러다 쓰러진다.”

이우연이 음, 그런가요, 하고 남 일 얘기하듯 대답했다.

“…진짜 인섭이 미국으로 가 버리면 너 어쩌려고 그래.”

“아, 썅.”

이우연이 욕설을 내뱉으며 활짝 웃었다. 위아래로 보이는 가지런한 치아가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어쩌자고 이우연의 손에 포크를 들려 주었을까. 후회해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어쩌긴요. 콱 뒈지는 거지.”

“…….”

“농담이에요.”

이우연이 다시 남은 샐러드를 먹기 시작했다. 더 이상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 대표는 이우연의 눈치를 살피며 초밥을 집어 먹었다.

식사를 마친 이우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둘 다 부탁드릴게요.”

“뭘?”

“비행기 티켓이랑 병원.”

이우연이 약을 찾아서 삼킨 후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입원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던 참인데 잘됐네요.”

“왜? 왜 그런 생각을 해?”

이우연이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면 김 대표는 유독 불안했다.

“꿈이 뒤섞이는 느낌이라서요.”

“꿈이 뒤섞인다는 게 무슨 뜻이야. 혹시 환청 같은 게 막 들려? 아님 헛것이 보여?”

김 대표가 놀라서 질문을 쏟아 냈다. 혹시 그런 상태가 되면 지체 없이 병원으로 끌고 가라는 최 원장의 언질을 들은 터였다.

“…….”

이우연은 대답하지 않고 제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우연!”

평소 그답지 않은 행동에 덜컥 겁이 난 김 대표가 그의 이름을 외쳤다.

“광고 취소 들어온 건 없죠?”

“…응. 아직은.”

갑작스러운 일 얘기에 김 대표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번에 들어가기로 한 드라마는 넘겨요. 영화는 괜찮은 대본 있으면 받아만 두세요. 어차피 제작 들어가기까지 시간 걸리니까. 정 분위기 좆같으면 당분간 중국이나 일본으로만 돌아도 나쁘지 않겠네요.”

“그렇긴 하지.”

김 대표는 제가 속으로 생각해 뒀던 방향을 이우연이 술술 얘기하자 뭐에 홀린 사람처럼 그를 바라보았다. 제 입으로 병원에 입원해야겠다고 하는 사람치고 상황 판단이 지나치게 냉정하고 완벽했던 것이다.

“…너 괜찮은 거지?”

김 대표가 이우연을 조심스럽게 훑어보며 물었다.

“안 괜찮으면 어쩌겠어요.”

이우연이 팔을 뒤로 쭈욱 늘리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러고는 가 보셔야죠, 하고는 침실로 걸어가 침대에 누웠다.

“잘 거야?”

김 대표가 커튼을 닫아 주며 물었다. 이우연은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김 대표가 조용히 문을 닫고 방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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