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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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당장 너를 죽이면 안 되는 이유 세 가지만 대 봐.”

“돈, 인기, 얼굴, 연기력.”

이우연이 아무렇지도 않게 손가락을 꼽으며 이유를 나열했다.

“이 새끼야. 내가 세 개만 대라고 했지 네 개나 대라고 했어!”

“넷 중 편하신 대로 고르시면 되겠네요.”

김 대표가 테이블에 놓인 생수 통을 이우연에게 힘껏 집어 던졌다.

“사람이 왜 이렇게 폭력적이세요.”

이우연이 붕대를 감은 손으로 생수 통을 가볍게 받아 내며 김 대표를 비난했다. 김 대표는 눈알이 터질 것 같은 분노를 느끼며 소파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너, 지금, 내가, 하아….”

김 대표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한참 동안 숨을 고르던 그가 고개를 들고 이우연을 노려보았다.

“너 요즘 왜 그래. 미쳤냐?”

“원래는 정상이었던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야! 농담할 기분 아니야! 대체 왜 그래? 아무리 그래도 다른 사람 보는 앞에서 사람 때릴 만큼 막 나가지는 않았잖아! 이젠 인적 없는 곳에서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가 몰래 내리칠 성의조차 보이지 않는 거냐!”

“다음부터 성의 있게 할게요.”

“하지 마!”

김 대표의 목에 핏대가 섰다. 이우연이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생수 통 뚜껑을 비틀었다.

“그래도 여론 뒤집혔잖아요.”

이우연이 테이블에 놓인 노트북 화면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이우연이 도로에서 일으킨 전대미문의 폭력 사건은 다음 날 바로 대서특필되었다. 실시간 검색어 순위는 물론이고 온갖 사이트와 커뮤니티가 이우연의 이름으로 도배되었다. 소식을 들은 김 대표는 중국에서 바로 귀국했다. 사무실 전화는 물론이고 김 대표의 핸드폰에 불이 날 정도로 전화가 걸려 왔다.

김 대표가 처음 느낀 감정은 경악이었고 그다음은 이우연에 대한 분노, 이후는 그런 이우연의 본모습을 알고 재계약을 한 자신에 대한 수치였다.

한참 자책하던 그를 찾아온 건 차 실장이었다. 제가 같이 있었는데도 이런 일이 벌어져 할 말이 없다고 차 실장은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김 대표는 고개를 저었다.

‘부처님, 알라신, 하나님이 같이 있었어도 그 새끼는 안 돼.’

‘…역시 그렇죠?’

둘은 술 장에서 술을 꺼내 마시기 시작했다. 빈 병이 쌓여 갈 때, 김 대표는 침중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어떻게 키운 회사인데.’

그 한마디에 중년의 두 남자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한참을 꺽꺽 울며 내일 발표할 입장문을 쓰자고 서로를 다독일 무렵, 회사의 홍보 담당에게 문자가 왔다.

「대표닝 기사 화긴ㅇ. 빠니요.」

얼마나 다급했는지 문자는 오타투성이였다. 김 대표는 얼른 핸드폰으로 기사를 확인했다.

“‘시비가 붙어도 가만히 있어야만 하는 연예인들’, ‘묵묵히 참던 이우연 「크게 말씀해 보세요」 한마디.’, ‘이우연, 불같이 화를 낼 수밖에 없던 실제 상황 녹음 파일.’”

이우연은 담담하게 기사의 제목을 읽어 내려갔다.

“참 신기해요.”

이우연은 저에 관한 기사들을 쭈욱 훑으면서 남 일 보듯이 무심한 투로 말을 이었다.

“어떻게 사람들 생각이 이렇게 쉽게 바뀌지.”

불처럼 번지던 여론이 바뀐 건, 한 사이트에 올라온 글 때문이었다. 그날 그 차에 타고 있던 사람이라고 자신을 밝힌 글쓴이는 이우연이 화면으로 보는 것보다 잘생겼고 목소리는 좋지만, 성격은 더러운 거 같다며 정말 무서워서 죽을 뻔했다는 글을 남겼다. 밑에 달린 댓글들은 한목소리로 글쓴이를 조롱했다. 자작나무 타는 냄새가 진동을 하네, 구씹, 관종이 노잼 소설 쓰느라 수고, 등등.

그러자 글쓴이가 증거를 가져오겠다는 글을 남겼다. 사람들은 숱하게 많은 자작 글이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새 글이 올라온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 뒤였다. 그날 차에 있던 블랙박스 녹음 파일을 첨부해 올린 것이다.

그렇게 여론은 완전히 뒤집혔다. 시종일관 정중하고 나긋한 음성으로 응대하던 이우연이 제 여자 친구의 욕에 화가 났다는 포인트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든 것이다. 물론 이우연의 목소리를 듣고 그가 처음부터 졸라 빡쳐 있다는 사실을 김 대표와 차 실장, 그리고 최인섭만큼은 바로 알아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남자가 내뱉은 채연서에 대한 욕의 질이 너무 좋지 않았다. 채연서의 소속사에서도 명예 훼손으로 고소를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날 병문안을 와 준 이우연에 대한 답례인 셈이었다.

“다들 사고가 유연한가 봐요.”

김 대표가 이를 부드득 갈며 이우연을 노려보았다.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네요.”

“다행은 얼어 죽을. 여론 바뀌었다고 네놈 욕먹은 거 사라지는 건 아니야. 당장 이번 주말에 영화제 시상식 있는데 어쩔 건데.”

“어쩌긴요. 가서 상 받아야지.”

이우연은 이번 시상식의 유력한 대상 후보자였다.

“사람 코뼈 부러트린 새끼가 무슨 낯으로 레드 카펫을 밟아.”

이우연이 말없이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켰다. 얄미워서 죽이고 싶을 만큼 잘생긴 외모에 김 대표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영화제 불참해. 당분간 자숙하는 모습 보여야지. 네가 뭘 잘했다고 가서 상을 처받아, 처받긴.”

이우연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안경 벗겨 줬잖아요.”

“…….”

칭찬을 기다리는 미치광이를 김 대표는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주먹으로 가슴을 내리쳤다.

“아주 자알 하셨다. 그래. 잘하셨어.”

“잘했죠. 시발, 돌로 혓바닥을 찧을까 하다가 참았는데.”

섬뜩하게 빛나는 이우연의 눈에 김 대표는 일순 숨을 참았다.

“그냥 좀 참지. 그런 이상한 놈이 한둘이냐. 채연서랑 진짜 사귀는 것도 아닌데. …진짜 사귀는 거 아니지?”

“제가 대가리에 총 맞았어요?”

이우연이 송충이를 삼킨 듯한 표정으로 질색했다.

“그런데 대체 왜 그랬어.”

이우연은 정의로운 성격도 아니었고, 상관없는 타인을 위해 나서는 타입은 더더욱 아니었다. 김 대표는 아직도 이우연이 그렇게까지 화를 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우연이 이성을 잃고 날뛰는 경우는 오직….

“설마….”

“제가 사귀는 사람이 걔 말고 더 있습니까?”

“…….”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남자는 이우연을 모욕하려고 채연서를 욕했다. 정확히 말하면 ‘이우연이 사귀는 상대’를. 결과적으로 남자는 최인섭을 욕하게 되었고, 그게 이우연의 발작 버튼을 누른 것이다.

김 대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진열장에 장식해 둔 양주를 꺼내 왔다. 종이컵에 양주를 따라 두 컵을 연달아 마신 후, 그는 이우연에게 삿대질했다.

“내가 너 때문에 아주 돌아 버리겠다! 며칠 동안 잠을 한숨도 못 잤어!”

“약 드릴까요.”

“너나 처먹어.”

김 대표가 손짓을 했다가 문득 머리를 스친 생각에 눈을 번쩍 떴다.

“무슨 약 먹어? 이상한 약 먹는 거 아니지?”

요즘 들어 이우연이 유독 아슬아슬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인섭이 옆에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넘겨 버린 것이다. 김 대표는 제 안일함을 재차 반성했다.

이우연이 대답 대신 주머니에서 약봉지를 꺼내 건넸다. 병원에서 주는 약 봉투를 확인하고도 김 대표는 의심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내가 누누이 말했지만, 너 약 함부로 먹으면 큰일 난다. 예전에 김서혁이라고 내가 키우던 아주 잘나가는 애가 있었는데….”

“요즘 잠을 못 자서요.”

“먹어. 약 먹어. 잠을 못 자면 먹어야지.”

김 대표가 바로 말을 바꾸었다. 이우연이 불면의 경계에 들어서면 어떻게 되는지 직접 목도한 것이다. 꿈에서도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걱정 마세요. 최 원장님한테 처방받은 약이니까.”

최 원장이라면 김 대표가 이전에 직접 이우연을 끌고 간 병원의 의사이자 김 대표의 외사촌 동생이었다.

“병원 다시 다녀?”

“목요일마다 가요.”

“혹시 상담도 받니?”

“하하하. 아니요. 그런 거 소용없는 거 아시잖아요. 사실 약발도 잘 안 받아요.”

약 봉투를 다시 주머니에 넣는 이우연을 김 대표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굳이 병원에 갔냐는 의문이 그의 얼굴에 실려 있었다.

“보통 사람은 약 먹으면 병이 나아질 거란 기대를 갖잖아요. 저는 그 반대거든요.”

“그게 무슨 소리야?”

“어릴 때 병원 지겹게 다녔어요. 물론 갇힌 적도 있고요. 한국에 온 것도 그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이우연의 가장 무서운 점은 본인에게 일어난 끔찍한 일을 남 일 얘기하듯 무심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일부러 센 척을 하는 건가 싶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런 게 아니었다.

이우연은 중요한 일과 그렇지 않은 일에 대한 기준이 흐릿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었으면 호들갑을 떨었을 일에도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곤 했다.

김 대표는 이럴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어색하게 눈을 돌리며 그랬구나, 하고 맞장구쳤다.

“정신과 약은 보통 여기를 좀 눌러 주는 느낌으로 쓰거든요.”

이우연이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리며 설명을 이었다.

“잠도 잘 오고, 늘어지고, 사람이 느슨해지고, 뭐 그런가 봐요. 그런데 전 좀 특이하게 향정신성 계통 약발이 잘 안 받더라고요. 보셔서 아시겠지만.”

“…응, 잘 알지.”

김 대표는 인섭이 칼에 찔려 수술실에 들어갔을 때를 떠올렸다. 보통 한 대만 맞아도 몇 초 안에 잠이 든다는 수면제를 세 대나 맞고도 이우연은 한동안 지랄 발광을 했던 것이다.

“약 먹을 때마다 내가 여기가 아프다는 걸 인지하는 거죠.”

“그럼 좀 나아?”

“그럴 리가요. 기분 존나 더럽죠. 아무리 저라도 매일 아침 정상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는 게 기분 좋을 리 있겠어요?”

“그런데 왜 먹어. 약발도 안 받는데 몸에 좋은 것도 아니고.”

“새삼 염두에 두려고요.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거. 그래야 조금이라도 평범하게 굴 테니까.”

“…….”

김 대표는 눈을 슬쩍 비볐다.

노안인가. 이우연이 가여워 보이는 날이 오다니.

“플라세보 효과인지 모르겠지만, 전보다 조금 착해진 거 같기도 하고요.”

하지만 바로 보이는 이우연의 천사 같은 미소에 김 대표는 약해졌던 마음을 바로 다잡았다.

“플라세보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사람 콧대 부러트린 놈이 뚫린 입이라고.”

“하하. 그럼 그런 소리 듣고 가만히 있어요? 대표님은 그럴 수 있어요? 난 절대 못 하겠는데.”

“연애 한번 참 요란하게 한다. 누가 보면 생전 처음 연애하는 놈인 줄 알겠네.”

“처음인데요.”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해. 새끼야. 내가 그동안 본 것만 해도 몇 명인데.”

“그건 그냥 씹질이죠.”

이우연이 아주 간단하게 과거를 정리했다. 그러고는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얼른 불필요하고 상스러운 설명을 덧붙였다.

“물론 인섭 씨하고 하는 씹질이 최고지만.”

“으악. 듣기 싫어!”

김 대표가 질색하며 귀를 막는 시늉을 했다. 이우연이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로 웃었다. 어딘지 씁쓸해 보이는 그 모습에 김 대표는 차곡차곡 접어 두었던 오지랖을 슬쩍 펼쳤다.

“그렇게 애절하게 연애하는 새끼가, 싸우긴 왜 싸우냐.”

그날 차에 최인섭도 타 있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을 때, 김 대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정도는 인섭이 충분히 컨트롤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둘이 싸웠나 봐. 눈도 안 마주쳐. 인섭이는 옆에서 말 한마디 못 붙이고 쩔쩔매더라.’

하지만 덧붙은 차 실장의 설명에 김 대표는 바로 납득하고 말았다.

“안 싸웠어요. 내가 걔랑 어떻게 싸워요.”

“하긴 천사 같은 인섭이랑 싸움이 되겠어?”

“그 천사 같은 새끼 때문에 개빡친 것뿐이에요.”

이우연이 꽃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지옥에서 피는 꽃이 있다면 저렇게 생겼겠지. 김 대표는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지르며 되물었다.

“그 빡치는 일이 뭔데. 설마 인섭이가 헤어지재?”

“하아….”

이우연이 한숨을 내쉬며 손바닥으로 낯을 쓸어내렸다. 며칠간 온갖 악플을 다 받을 때에도 보이지 않던 표정이었다. 그러다 문득 이우연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눈에 형형한 살기가 스쳤다.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그의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상대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남을 살기가 흘러넘쳤다. 김 대표가 재빨리 눈을 옆으로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그럼 왜 그러는데. 그 착한 인섭이가 너한테 잘못했을 리는 없고. 네가 뭔가 대단히 잘못했겠지.”

이우연이 쓰게 웃었다.

“그 착한 새끼, 시발. 진짜 두 번 좋아했다가는 내가 제명에 못 죽겠어요.”

“…….”

얼른 두 번 좋아해서 제명까지 살지 말아 주라.

김 대표는 하고 싶은 말을 꿀꺽 삼켰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대표님. 신 변호사님 오셨어요.”

밖에서 조 대리가 조심스럽게 알렸다.

“신 변호사님? 합의 얘기는 다 끝났는데? 일단 들어오시라고 해.”

이미 이우연이 코뼈를 부러트린 남자와 거액의 돈을 주고 합의를 마친 것이다. 처음에 고소를 하겠다고 길길이 날뛰던 인간이 채연서 쪽에서 고소 얘기가 나오자 바로 꼬리를 내렸다. 이후로 이우연과의 합의는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제가 불렀어요.”

“왜? 설마 또 누구 때린 건 아니지?”

김 대표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계약서 작성해 둘 게 있어서요. 서류 정리할 것도 있고.”

“무슨 서류?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나 장난친 척 한 번도 없다.”

이우연의 공적인 일은 모두 김 대표가 처리하고 있었다. 재산이나 세금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이우연은 김 대표의 일 처리에 대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불만을 제기한 적이 없었다. 여기에 관해 차 실장이 놀라워하며 이우연에게 진심으로 김 대표를 믿는 거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이우연은 웃으며 대꾸했다.

‘돈으로 장난치셔도 상관없어요. 제가 알아채기 전까지는.’

물론 그전에도 잘 처리해 줬지만, 김 대표는 이후로는 10원의 오류도 나지 않게 철저하게 관리했다.

“알아요. 그것 때문에 부른 거 아니에요.”

“자리 피해 줄까?”

김 대표의 물음에 이우연은 고개를 내저었다.

“별일 아닌데요. 뭘.”

이우연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얼마 뒤 노크 소리가 들리고 변호사가 들어왔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변호사는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

“그때 말씀하신 계약서입니다. 한번 읽어 보세요.”

방심하고 웃고 있던 김 대표의 낯빛이 흙빛으로 변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몇 초 되지 않았다.

“인섭 씨. 오랜만이에요.”

“안녕하세요. 윤 과장님.”

인섭이 바로 몸을 돌려 윤재현 과장에게 인사했다.

“이우연 씨는 어디 계세요?”

인섭이 어색하게 웃으며 김 대표의 방을 가리켰다.

“꾸중 들으시나 봐요. 안 그래도 요 며칠 회사가 쑥대밭이었어요.”

인섭에게도 요 사흘은 지옥이었다. 강제 휴가를 받아 집에서 쉬면서도 쉬는 게 아니었다. 인터넷이 발칵 뒤집혀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우연을 욕하는 것만 같았다. 열심히 이우연 씨에게도 사정이 있을 거라는 댓글을 달고 다녔지만, 댓글로 욕만 배불리 먹을 뿐이었다.

이우연에게 찾아가고 싶었지만, 쓸데없이 친절하게 대하지 말라는 그의 충고가 떠올라 그럴 수도 없었다. 모두 제 탓인 것만 같았다. 이우연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차 밖으로 나가게 한 것이다. 이우연에게 미움받는 게 두려워 끝끝내 그를 말리지 못했다. 벌어진 일의 뒷수습은 모두 차 실장이 했다. 그날 촬영장에서 자신이 채연서에게 저지른 실수를 무마한 것도 이우연이었다.

결과적으로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매니저로서 실격이었다. 약속한 기한이 다음 주였지만, 냉정하게 하루라도 빨리 일을 그만두는 게 맞다. 알면서도 그만두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우연을 조금이라도 더 곁에서 자주 보고 싶은 욕심에,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여러모로 민폐구나.

“심려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인섭은 반듯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에이, 인섭 씨가 한 일도 아닌데 왜 인섭 씨가 사과를 해요. 그리고 솔직히….”

윤 과장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저 같아도 팼을 거예요. 자기 여자 친구를 그렇게 말하는데 참으면 그게 병신이지. 이우연 씨, 다시 봤어요. 같은 남자로서 반했어.”

인섭은 힘없는 목소리로 그런가요, 하고 대답했다. 여자 친구라는 단어에 저도 모르게 채연서를 떠올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 이런 감정이라니. 인섭은 스스로를 반성했다.

“그나저나 아까 나 찾았다면서요.”

“아, 죄송합니다. 여쭤볼 게 있어서요. 혹시 그때 제출한 여권은 언제쯤 돌려받을 수 있을까요.”

인섭은 그제야 윤 과장을 찾은 목적이 생각났다.

어제 미국에서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는 방학인데 언제쯤 올 수 있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제야 며칠 동안 정신이 없어 통화도 못 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후레놈.

인섭은 자신에 대한 욕설을 삼키며 죄송하다고 어머니께 사과했다. 그러고는 조만간 가겠다고 답했다. 방학이 끝나기 전에 하루라도 좋으니 가서 얼굴을 비춰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무슨 여권?”

“이우연 씨 외국 스케줄 때문에 필요하다고 하셔서 드렸습니다.”

“외국? 내가 알기로는 당분간 밖에서 스케줄 없을 텐데. 인섭 씨가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니에요? 누구한테 줬는데?”

“이우연 씨한테 드렸는데….”

“그래? 내가 뭐 잘못 알고 있나? 내가 대표님께 여쭤볼까요?”

“아닙니다. 제가 직접 이우연 씨께 여쭙겠습니다.”

괜히 말이 나올 수도 있으니 인섭은 이우연에게 직접 물어보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싱겁긴. 그런데 아까부터 왜 그 화분을 그렇게 쳐다보고 있어요?”

“이거 혹시, 강영모 씨가 보내신 건가요?”

인섭은 화분에 둘린 분홍색 리본을 가리키며 물었다. 거기에는 강영모의 소속사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맞아요. 그 강영모. 미친놈이 무슨 생각인지 사무실 주소로 화분을 다 보냈더라고요. 저번에 그 난리 친 게 부끄러웠나 보죠. 대표님이 소문 새어 나가면 안 된다고 하셔서 다들 가만히 있었지, 정말 아는 기자한테 찌르고 싶어 죽을 뻔했다니까.”

“절대 말씀하심 안 돼요.”

인섭이 덜컥 겁먹은 얼굴로 말하자 윤 과장이 고개를 내저었다.

“걱정 마세요. 대표님이 아주 단단히 일러두셨으니까. 그나저나 화분 하나가 뭐야. 돈도 많이 버는 인간이. 하긴, 그 인간 드라마 찍으면서 스태프들한테 밥 한 번 사 준 적 없다고 유명하더라고요. 저것도 아주 큰맘 먹고 보냈을 거예요.”

윤 과장이 커피를 후루룩 마시면서 말을 덧붙였다.

“뭐, 금방 죽을 거 같긴 하지만.”

“누가요?”

“저 화분이요. 강영모가 보낸 거 알고 아무도 물을 안 주거든요. 가끔 커피를 붓는 인간도 있죠. 나처럼.”

윤 과장이 웃으면서 마시던 커피를 화분에 붓는 시늉을 했다. 인섭이 화들짝 놀라자 그가 농담이에요, 하고는 껄껄 웃으며 지나갔다.

인섭은 한숨을 내쉬며 화분을 보았다. 윤 과장의 말이 거짓은 아닌 듯, 잎사귀 여기저기가 누렇게 떠 있고 흙은 바싹 마른 채였다.

“나쁜 놈.”

누가 들을세라 작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그 난동을 피워 놓고 화분 하나로 해결될 거라고 생각한 그 사고방식이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정말이지 강영모가 싫었다. 그가 보낸 화분도 싫었다. 자신은 그에게 더 화를 내야 마땅했다. 강영모는 공공연하게 이우연을 욕보였다. 자신의 애인이 욕을 먹는데도 인섭은 제대로 된 화 한 번 내지 못했다.

이우연은 심지어 실제로 사귀는 상대가 아닌데도 그렇게 화를 냈는데. 그에 비하면 자신은 부끄러울 만큼, 비겁했다.

“…나도 때려야 했나.”

인섭은 주먹을 쥐어 보았다. 어떤 위협도 느껴지지 않는 빈약한 주먹이었다. 인섭은 어울리지 않는 짓이라는 것을 바로 깨닫고 화분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래도 복수하고 싶었다.

인섭은 화분의 잎사귀를 잡았다. 확 뜯어 버리고 싶었다. 나쁜 놈이 보낸 나쁜 화분이니까.

“…….”

그래야 하는데, 그래도 화가 안 풀릴 텐데.

힘을 준 손이 부들부들 떨릴 뿐, 인섭은 잎사귀 하나 제대로 뜯어내지 못했다.

“인섭 씨!”

“헉!”

인섭은 갑자기 뒤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뭘 그렇게 놀라요. 나쁜 짓 하려다 들킨 사람처럼. 어머, 그건 뭐예요.”

조 대리가 인섭의 손에 들린 것을 가리켰다. 인섭은 창백한 얼굴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뿌리째 뽑힌 화초가 대롱대롱 들려 있었다.

“웬 화분이에요.”

이우연이 화분을 들고 우울한 낯으로 서 있는 인섭을 보고 한마디 했다.

“…제가 키우려고요.”

인섭이 시들시들한 화분을 끌어안은 채로 대답했다. 이우연의 단정한 눈썹이 슬쩍 위로 움직였다.

“곧 죽을 거 같은데 그냥 버리지 그래요.”

“다시 잘 돌보면 됩니다.”

인섭이 시름시름 죽어 가는 화초의 흙을 도닥여 모아 주며 대답했다.

“하다 하다 이젠….”

“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인섭은 이우연의 말을 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이우연은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엘리베이터에 탔다. 인섭은 얼른 그의 뒤를 따라 탔다.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애써 화젯거리를 찾으려던 인섭의 눈에 붕대를 감은 이우연의 손이 들어왔다.

“손은 괜찮으세요?”

“네.”

이우연이 짧게 대꾸했다.

“오늘은 제가 댁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강우는 먼저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많이 피곤해 보여서요.”

이우연이 인섭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바라보았다.

“인섭 씨는 안 피곤해요?”

“네. 저는 괜찮습니다.”

사실 인섭은 사흘간 거의 쉬지 못했다. 하루 종일 인터넷에 올라온 글과 기사를 확인하고 열심히 댓글을 다느라 컴퓨터 앞에서 떠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당사자 앞에서 그런 기색을 내비치고 싶지 않았다.

이우연의 손이 다가왔다. 인섭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우아한 손가락이 인섭의 콧대를 툭 두드렸다.

“코피는?”

“머, 멎었습니다. 그날 바로 멎었어요.”

사고가 있던 날, 인섭은 차에서 코를 움켜쥔 채로 안절부절못했다. 코피가 멈춰야 나갈 수 있는데, 멎기는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심하게 피가 흘렀다.

‘형님 병원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보다 못한 김강우가 차에 다시 시동을 걸며 물었다.

‘아니야. 괜찮을 거야. 그것보다 빨리….’

나가 봐야 할 거 같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쾅, 하고 유리가 박살 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클랙슨이 길게 울린 것이다. 차에 있던 김강우와 차 실장이 놀라서 밖으로 뛰어나갔다. 인섭 역시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일….’

인섭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우디 운전석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 이우연과 눈이 마주쳤다. 이우연이 손에 박힌 큼직한 유리를 뽑아내며 인섭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인섭의 뺨을 움켜쥐었다.

‘코피는?’

인섭이 대답하기 전에 차 실장이 인섭의 팔을 붙잡아서 강제로 차에 태웠다.

‘너는 코피 멈추기 전까지 절대로 나오지 마!’

차 문을 닫으면서 차 실장은 다급하게 외쳤다. 그나마 이우연이 거기에서 그친 것은 자신의 순발력 때문이었다고 차 실장은 거듭 말했다.

“지금은 완전 괜찮습니다.”

그날 인섭은 바로 정형외과로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다. 코피가 멎은 후에도 이우연이 괜찮은지 몇 번이나 물어 왔기 때문이다.

“그래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이우연이 인섭에게 차 키를 건넸다.

“대표님 차.”

“알겠습니다.”

사건 때문에 기자들이 끈덕지게 따라붙었다. 김 대표가 흔쾌히 차를 내주는 유일한 시기였다. 차 키를 누르자 흰색 벤츠에 불이 들어왔다. 인섭은 먼저 가서 화분을 뒤에 실었다. 혹시 화분이 넘어져 흙이 쏟아질까 봐 이리저리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아 주는 인섭을 보며 이우연은 쓰게 웃었다.

“인섭 씨는 참 다정하네요.”

“네?”

인섭은 뒤를 돌아본다는 게 머리를 들어서 그대로 차 문에 뒤통수를 박고 말았다. 이우연이 인섭의 뒤통수를 문질러 주며 말했다.

“하긴 세상만사 살아 있는 모든 것들한테 다정하시죠.”

“아, 아닙니다.”

이우연이 손을 거두고 조수석에 탔다. 인섭은 얼른 운전석에 앉아서 안전벨트를 맸다. 세상만사 모두에게 다정하지 않고, 이우연 씨에게 가장 다정하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이전과는 다른 이우연의 냉담한 분위기가 인섭을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이우연이 내비게이션을 켜고 주소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주소 입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무실에서 이우연의 집까지는 거짓말 조금 섞자면 눈을 감고 운전해도 갈 수 있을 정도였다.

“집으로 가는 거 아니에요.”

“호텔로 가십니까?”

기자들이 귀찮게 할 때마다 이우연은 호텔을 이용하곤 했다. 하지만 내비게이션에 찍힌 주소는 그가 자주 가는 호텔도 아니었다.

“가 보면 알아요.”

인섭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운전을 시작했다. 이우연은 턱을 괸 채로 창밖만 바라보았다.

“저…. 저는 이우연 씨께 가장 다정합니다.”

인섭은 용기를 내어 솔직하게 속말을 꺼냈다.

“그런가요. 몰랐는데.”

인섭은 마른침을 삼켰다.

계속 이런 식이었다. 화가 난 것 같은데, 그 이유를 말해 주지도 화를 풀지도 않는다.

“도착했습니다.”

이우연이 찍은 주소는 회사에서 가까워 얼마 걸리지 않아 도착했다. 부동산 같은 건 잘 모르는 인섭이 봐도 엄청나게 비싸 보이는 빌라 단지였다.

“좌측으로 가면 주차장 입구 있어요. 거기 잠시 세워 둬요.”

인섭은 이우연이 시키는 대로 차를 세워 두었다. 잠시 밖으로 나간 이우연이 관리 동으로 들어갔다 오더니 다시 차에 탔다.

“확인증 받아 오셨어요?”

“여긴 외부 차량은 아예 못 들어가서 그냥 등록시켰어요.”

외부 차량은 아예 들어올 수 없다는 점에서 이우연이 오늘 이곳으로 피신 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지정 주차인가요?”

“네. 저 왼쪽 네 번째 기둥부터 아무 데나 세우세요.”

인섭은 이우연이 가리킨 방향에 차를 세웠다. 널찍한 주차장에는 온갖 고급 외제차만 가득했다.

“대표님 집입니까?”

김 대표의 집은 여러 채였다. 인섭이 아는 것만 세 채였으니, 여기까지 더해진다 해도 놀랍지 않았다.

“아니요. 얼마 전에 제가 샀어요.”

이우연이 대꾸하며 안전벨트 클립을 끌렀다. 인섭은 놀라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이우연만 바라보았다.

“안 내려요?”

“아, 네.”

인섭은 허둥지둥 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뒷문을 열어 화분을 꺼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인섭은 고개를 숙였다.

이우연은 자신에게 이사에 관한 언급을 한 번도 한 적 없었다.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이었다. 그래도 이런 상황에 이러쿵저러쿵 그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우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인섭을 내려다보다가 붕대를 감은 손을 일부러 사이드 미러에 갖다 박았다.

“아.”

이우연이 반대편 손으로 붕대 감은 손을 감싸 쥐었다.

“괜찮으세요?”

인섭이 화분을 내려놓고 얼른 이우연 앞으로 달려갔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상처 덧나면 안 되는데.”

인섭이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며 이우연은 그러게요, 하고 대꾸했다. 그러면서 그는 차 열쇠를 일부러 바닥에 흘렸다. 인섭이 대신 열쇠를 주웠다.

“제가 집 안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러세요, 그럼.”

이우연은 인섭의 손에 들린 열쇠를 받아 들어 주머니에 넣었다.

두 사람은 주차장에서 빌라로 들어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이우연이 버튼을 눌렀다.

“2층까지밖에 없는데 엘리베이터가 있네요?”

인섭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돈 있는데 걸어갈 필요가 있나요.”

명료한 설명이었다. 심지어 건물 하나에 세대수가 하나였다. 완벽하게 독립된 구조의 빌라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빌라 현관까지 이어지는 공간이 인섭이 지금 사는 집보다 세 배는 컸다.

“들어와요.”

이우연이 빌라 현관을 열어 주었다. 인섭은 현관에 화분을 내려놓고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정리한 후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실례하겠….”

인섭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우연이 전에 살던 곳도 고급스러운 주상 복합 건물이었는데, 여긴 거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인섭은 멍한 얼굴로 집을 둘러보다가 이우연과 눈이 마주쳤다. 인섭은 합, 하고 입을 다물고 얼른 어른스러운 태도를 고수했다.

“집이 좋습니다.”

“좋겠죠. 비싼데.”

이우연이 거실과 이어지는 대리석 계단을 내려가 소파에 앉았다. 인섭은 화분을 계단 옆에 내려놓고 거실로 내려갔다. 안에 들어오자 한층 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거실과 연결된 테라스가 여느 단독 주택 정원만 한 크기였다. 테라스를 에워싼 나무 때문에 언뜻 숲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인섭은 처음 도시에 상경한 소년처럼 눈을 반짝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2층도 있네요. 언제 이사하신 거예요?”

“아직 짐 다 안 옮겼어요. 2층만 정리 끝났고.”

이우연의 말대로 일 층은 가구만 놓인 상태였다.

“짐 정리하실 때 말씀하세요. 도와드리겠습니다.”

“…….”

이우연은 시쳇말로 손끝에 물 한 방울 묻히고 싶지 않은 상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청소는 잘합니다.”

이우연의 침묵을 무능함에 대한 비난으로 받아들였는지 인섭이 얼굴이 벌게진 채로 변명했다. 이우연은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이어지는 한숨 소리에 인섭은 한층 더 어쩔 줄 몰라 했다.

“저, 그럼 시키실 일 없으면, 이만….”

“아까 피곤하지 않다고 했죠.”

이우연이 재킷을 벗으며 말을 이었다.

“여기 보는 사람도 없고, 밖이 아니라 안이고, 인섭 씨 오늘 피곤하지 않네요. 게다가 사람 팬 대가로 나는 내일 일정도 없어요.”

어느새 바싹 다가온 이우연이 인섭의 얼굴에 제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더 거절할 이유 있어?”

이우연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인섭은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멍 자국이 조금 남았던가. 뒤를 따라오는 차량이 없던 게 확실했나. 누군가 밖에서 카메라를 들고 대기하고 있으면 어쩌지.

옷자락을 쥔 인섭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우연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인섭을 똑바로 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저는….”

인섭이 고개를 든 순간 이우연이 사용하는 향수 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서늘한 향이 유독 달큼하게 느껴졌다.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사실 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이우연과 키스하고 싶었다. 아니, 차에 같이 탈 때부터 내내 그와 입을 맞추는 상상을 했다. 자신의 불순한 생각을 들킬까 두려워 인섭은 차를 세우자마자 집으로 가겠다고 말한 것이다.

“있으면 말해 보세요. 들어줄 테니까.”

이우연의 목소리는 교육받은 신사처럼 예의 바르고 정중했지만, 눈빛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성마르게 번들거리는 눈은 먹이를 앞에 둔 굶주린 짐승처럼 빛났다.

“…그럼 부탁드릴 게 하나 있습니다.”

인섭이 떨리는 목소리로 가까스로 말문을 열었다.

“아, 자, 잠깐…. 거긴, 안 돼, 읏.”

“뭐가 안 돼요.”

이우연이 인섭의 둔부를 움켜쥔 채로 차갑게 대꾸했다. 인섭이 몸을 비틀자 이우연이 인섭의 허리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뒤로 붙어먹자고 한 건, 인섭 씨예요.”

인섭은 명치에 남은 멍 자국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더는 이우연을 밀어내고 싶지 않았고 그럴 만한 여유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몸을 겹쳐서 관계를 확인받고 싶었다.

결국 인섭은 오늘은 뒤로 해 주실 수 있느냐는 말을 어렵게 꺼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우연은 인섭의 손을 잡아끌어 침실로 데려갔다. 그러고는 내동댕이치듯 인섭을 던지고 그의 바지와 속옷을 단번에 끌어 내렸다.

“그게 아니라….”

인섭이 울먹거리면서 변명하려 했지만, 이우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가랑이 벌려요. 지금부터 개처럼 할 테니까.”

“아!”

인섭이 비명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축축한 것이 엉덩이 사이를 핥기 시작했다. 피해 보려고 몸을 꿈틀거려도 소용없었다. 이우연이 둔부를 벌려 탐욕스럽게 그 사이를 핥아 댔다.

“거기, 안…, 하지 마세요, 제발….”

이우연의 혀가 구멍을 쑤시고 들어왔다. 인섭이 숨을 삼키며 몸을 떨었다. 아찔할 정도의 쾌감과 수치심이 번갈아 아래를 들쑤셨다. 인섭은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다리가 덜덜 떨려 인섭은 침대에 쓰러지듯 엎드리고 말았다.

“허리 올려.”

인섭이 고개를 내젓자 이우연이 베개를 가져와 인섭의 배 밑에 쑤셔 넣었다.

“…우연 씨, 이거 안 하면…, 안 하고 싶….”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인섭은 절박하게 이우연에게 부탁했다. 이우연의 손가락이 침으로 번들거리는 입구를 만지작거리며 속삭였다.

“인섭 씨, 여기 말랑거리는데….”

주름을 문지르며 이우연은 낮게 허리를 내린 채 물었다.

“집에서 보지 풀고 왔어요?”

“……!”

인섭의 얼굴이 대번에 붉어졌다. 이우연이 씨발, 하고 웃으며 인섭의 둔부를 움켜쥐고 벌렸다. 혀가 구멍을 범하듯이 벌어진 틈을 가로질렀다. 침이 흘러들어 오고 이우연의 거친 숨결이 닿았다.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이우연이 이를 세워 구멍을 질근거리며 씹어 댔다.

“아, 흣, 응, 하… 아!”

인섭의 입에서 연달아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이우연이 게걸스럽게 인섭의 샅을 입 속에 당겨 넣고 빨았다. 인섭은 거의 흐느끼듯 신음했다. 이우연의 타액이 인섭의 고환을 타고 흘러내렸다.

인섭은 너무 무서웠다. 오랫동안 하지 않아서 유난히 민감해진 몸은 이우연이 핥으면 핥는 대로 만지면 만지는 대로 반응했다. 단단하게 세워진 혀가 아래를 쑤실 때마다 인섭의 허벅지가 흠칫흠칫 떨렸다. 인섭은 시트를 움켜쥐고 울듯이 이우연에게 제발 그만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럴수록 이우연은 더 집요하게 구멍을 범했다.

“흑, 아, 아, 잠… 깐, 제발….”

이우연은 인섭의 청을 들어주지 않고 그대로 이를 세워 입구 주변을 물어 버렸다. 인섭의 가느다란 몸이 떨렸다. 시트에 금세 얼룩이 생겼다. 인섭의 둔덕을 벌려 경련하는 구멍을 내도록 지켜보는 이우연의 눈이 시커멓게 번들거렸다.

사정을 마친 인섭의 몸이 베개 위로 늘어졌다. 이전에 겪어 보지 못한 행위에 놀랐는지 인섭이 조그맣게 훌쩍거렸다.

“…죄송합니다.”

부끄러움에 인섭은 베개에 고개를 묻었다가, 눈물을 닦아 낸 후 이우연을 돌아보았다.

“오늘은 조금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인섭은 병원을 나오기 전에 의사에게 인생의 모든 용기를 끌어모아 물었다. 스트레스 요인 중에 섹스도 포함되어 있느냐고. 의사는 허를 찔린 듯한 표정으로 인섭을 보다가 대답했다.

‘심장병 환자 중 성생활로 심장에 무리가 생겨 죽을 확률은 1%도 되지 않습니다. 대단히 무리하지 않는 이상 1% 속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의사는 ‘대단히’에 힘을 주어 강조했다. 어지간하지 않는 이상은 괜찮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과 같은 거라면 심장에 무리가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뭘요.”

이우연이 인섭의 몸에 엎드리듯 제 몸을 겹치며 물었다.

“그거. …조금 살살.”

대답 대신 지퍼를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축 늘어졌던 인섭이 그 와중에 흠칫 긴장하자 이우연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울지 마요. 지금 아래 흐물흐물해서 넣어도 안 아플 테니까.”

남자의 거짓이 증명되는 데에는 3초도 걸리지 않았다.

“……!”

인섭이 다급하게 숨을 삼키며 허리를 퍼뜩 경련했다. 이우연이 인섭의 허리를 누르며 한 번 더 허리를 추어올렸다.

“아….”

“아직 좆대가리밖에 안 들어갔어. 힘 풀어요.”

인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간만의 삽입이라 모든 감각이 생경했다. 단단하게 성이 오른 살덩이가 천천히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인섭은 긴장을 풀려고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안에 들어오는 것이 남자의 성기가 아니라 팔뚝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압박감이 엄청났다. 전에 대체 이게 어떻게 안에 들어갔는지,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아.”

가까스로 뿌리 끝까지 밀어 넣은 이우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 숨을 토해 냈다.

“…시발, 돌겠네.”

이우연이 낮게 중얼거렸다.

“조금만 해 달라고?”

이우연이 인섭의 엉덩이를 움켜쥐고 강하게 허리를 박았다.

“아!”

인섭이 깜짝 놀라서 소리를 내질렀다. 부드럽기는커녕 남자는 평소보다 더 거칠게 좆을 삽입했다.

“그렇게 많이 했으면, 헐렁해질 만도 한데.”

잔뜩 부푼 성기를 뺐다가 도로 퍽, 하고 박으며 이우연이 이를 사리물었다.

“할 때마다, 처음처럼 조이면서, 하아…, 뭐? 조금만 해 달라고?”

퍽, 퍽, 소리를 내며 이우연은 몸을 치받았다. 오랜만의 섹스였다. 머릿속이 녹아 버릴 만큼 뜨거운 피가 온몸을 돌았다.

오늘 이우연은 인섭에게 손을 댈 생각이 없었다. 그럴 기분이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요즘의 자신은 아슬아슬했다. 그날도 자신을 찾아온 인섭의 입에 거칠게 좆질을 했다. 서툴고 형편없는 오럴에 머릿속의 피가 절절 끓었다. 어느 순간 이성이 툭 끊어져 발광하지 않도록 끈을 쥐고 있는 게 전부였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인섭에게 손을 댔다가는 어떤 참사가 벌어질지 몰랐다.

조용히 감정이 잦아들길 기다릴 생각이었다. 최인섭이라면 반드시 제게 케이크 상자를 들고 돌아올 것이라 믿었으니까.

그런데 사무실을 나오면서 다 뒈져 가는 화분을 끌어안은 인섭을 발견한 순간, 가까스로 붙들고 있던 이성이 툭, 하고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최인섭을 둘러싼 모든 것에 질투했다.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 하물며 인섭이 입고 있는 옷가지조차 꼴 보기 싫어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이젠 하다 하다 풀 쪼가리에 질투해 비참함을 느끼는 지경에 이르다니.

“하아, 아, 응… 하아.”

인섭이 시트를 흐트러트리며 신음을 내질렀다. 굴욕적이었다. 벌름거리는 인섭의 구멍에 이우연은 한껏 발기하며 굴욕감을 즐겼다.

“그렇게 좋아요?”

좆을 품고 있는 인섭의 엉덩이를 움켜쥔 채로 이우연은 바싹 마른 입술을 핥았다.

“아, 아아! 하…, 읏.”

인섭의 가느다란 몸에 단단한 좆을 쑤셔 넣으며 이우연은 한껏 발정했다. 인섭의 몸이 앞으로 밀려나려고 할 때마다 이우연은 손에 준 힘을 더했다.

“아파, 아, 조금, 살살… 하… 아.”

이우연이 인섭의 허리 아래로 손을 뻗었다.

“읏!”

“뭘 살살해요. 좆을 이렇게나 세우고.”

이우연이 인섭의 성기를 손에 쥔 채로 허리를 움직였다. 위에서 치받는 힘에 몸이 흔들려 성기가 자연스럽게 손바닥에 마찰되었다.

“응, 하, 응, 읏.”

이우연이 인섭의 목덜미를 물었다. 입에 힘을 주어 빨아 올렸다가 입을 맞추고 혀로 핥았다. 무아지경이었다. 이우연은 사람의 체향 따위에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누군가에게 감각을 집중해 본 적 없는 터다.

그런데.

“…응, 하…으, 아아.”

제 밑에서 처음 발정을 맞이하는 강아지처럼 끙끙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인섭이 몸을 뒤챌 때마다, 이우연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달큼한 체향에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너, 진짜, 맛있는 거 알아?”

이우연이 말 그대로 인섭을 집어삼킬 것처럼 허리를 박았다.

“냄새도, 살결도, 하아, 보지도 이렇게나 맛있어서, 응?”

이우연이 인섭의 성기를 움켜쥐고 목덜미를 빨아 올렸다. 목덜미를 타고 인섭이 흐느끼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런 몸으로 여자랑 할 수 있어요?”

갑작스러운 말에 인섭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이우연을 돌아보았다.

“여기로 더 느끼잖아요.”

이우연이 좆으로 인섭의 내벽을 문지르며 말했다.

“여자한테, 여기까지 문질러 달라고 할 수 있어? 엉덩이 위로 처올리고?”

인섭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왜 그가 이렇게 사납게 밀어붙이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 더럭 겁이 났다.

“안 해요, 그런 거…, 흑.”

이우연이 인섭의 성기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앞뒤로 전해지는 자극에 인섭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 흣, 응, 읏!”

질척거리며 내벽을 드나들던 성기가 작게 돋은 돌기를 집요하게 문지르자 인섭이 아아, 하고 발끝에 힘을 주었다. 아랫도리부터 올라온 날카로운 쾌감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숨이 찼다. 인섭은 헐떡이며 이우연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우연 씨, 나, 어떻게, 좀, 아, 아, 어떡해…, 나, 아래가, 너무…, 아!”

인섭은 저 스스로 허리를 흔들어 성기를 이우연의 손에 비비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는 듯, 어쩔 줄 몰라 했다.

“남자 자지가 그렇게 좋아?”

이우연이 인섭의 귓바퀴를 질근 씹으며 물었다. 인섭의 얼굴에 따끈하게 열이 올랐다. 이우연은 몇 번이나 난잡하고 추잡한 음담을 강요했다.

“말해 봐요, 어떤지.”

인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좋으니 어떻게든 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좋아요, 아, 읏, 응, 아…, 좋아….”

인섭은 욕을 하거나 나쁜 말을 하지도 않았다. 야한 말이라고 해 봤자 넣어 주세요, 정도가 전부였다. 그것도 하라고 시켜야 가까스로 하는 정도였다. 이우연은 인섭이 수치심에 젖어 눈물을 흘리며 상스러운 말을 내뱉을 때마다 짜릿해졌다. 순수한 인섭을 제가 있는 곳까지 끌어내린 듯한 저열한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빌어먹을 개새끼.

이우연은 속으로 자신에게 욕을 퍼부으며, 인섭을 몰아붙였다.

“남자 자지면 다 좋습니까?”

인섭이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그 바람에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시발, 좆같이 예뻐서.

이우연은 아래가 터질 것 같은 감각에 발끝에 힘을 주었다.

“그럼 누군 게 좋은지, 말해.”

이우연은 일부러 단단하게 부푼 귀두를 움찔거리는 내벽에 짓찧듯 박으며 물었다.

“우연 씨, 거, …좋아. 응, 읏.”

“생자지로 넣어 주니, 더 좋아요?”

인섭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응, 읏, 나, 아아!”

인섭의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이우연의 손바닥이 흠뻑 젖었다.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흥건한 사정이었다. 리드미컬하게 몰아치는 사정감에 구멍이 반복적으로 벌름거렸다.

“……!”

이우연은 인섭의 가랑이를 벌려 깊게 삽입했다. 가느다란 허벅지가 한 손에 잡혔다. 퍽, 퍽, 퍽, 단단한 뼈와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다.

“인섭 씨가 좋아하는 자지, 넣어 줄 테니까, 실컷 먹어요. …읏.”

순간 이우연의 호흡이 멈추었다. 끝나지 않을 것같이 이어지던 추삽질도 멎었다. 왈칵, 흘러들어 오는 뜨거운 감각에 인섭은 몸을 바르르 떨었다. 이우연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황홀경에 젖어 몇 번 더 허리를 위로 솟구어 올렸다. 안쪽 깊숙한 곳까지 닿은 정액이 내벽을 적셨다. 인섭은 무심결에 눈썹을 찌푸렸다. 몇 번을 해도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는 감각이었다.

이우연이 성기를 뺐다. 안을 흠뻑 적신 정액이 인섭의 허벅지를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이우연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점차 인섭의 호흡이 낮아졌다. 이우연은 땀이 밴 인섭의 등줄기에 입을 맞추었다. 오랜만의 정사에 녹초가 된 인섭은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그대로 늘어진 채로 이우연이 하는 대로 두었다.

“아.”

인섭이 놀라서 퍼뜩 몸을 일으켰다. 이우연이 다시 엉덩이 사이에 성기를 문지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이우연이 되레 뭐가 문제냐는 표정을 지었다.

“…끝난 거 아니었나요?”

“뭐가요.”

이미 배에 닿을 만큼 성이 난 남자의 성기가 인섭의 눈에 들어왔다. 심지어 아까보다 더 커져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인섭은 저도 모르게 주춤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이우연이 인섭의 허리를 쥐어 도로 제 앞으로 끌어다 놓았다.

“어떻게 할 겁니까?”

“네?”

이우연이 입고 있던 셔츠를 벗어 던지며 물었다.

“계속 개처럼 뒤로 할 건지, 아님 앞으로 할 건지. 인섭 씨가 정해요.”

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없었다. 인섭은 벌게진 얼굴로 한참을 어물거리다가 몸을 다시 앞으로 숙였다.

“읏.”

뒤에서 밀려드는 힘에 인섭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침대에 쓰러지듯 고개를 묻었다. 얼마나 몸이 흔들렸는지 무릎과 팔꿈치가 쓸려 따끔거릴 만큼 아렸다.

“힘들어요?”

인섭이 훌쩍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앞으로 해요. 다리만 벌리고 있으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우는 와중에도 인섭은 괜찮다며 다시 허리를 올리려고 했다. 이우연은 짜증을 삼키면서 인섭의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인섭의 다리를 벌려 제 허벅지에 얹고 좆을 깊게 찔러 넣었다. 구멍 틈으로 흘러내린 정액이 이우연의 음모를 적셨다. 틈 없이 바싹 들러붙은 하반신에서 찌걱이는 소리가 울렸다.

“아, 흣, 하아…, 아.”

개구리처럼 다리를 한껏 벌린 자세 때문에 수치심이 더해졌다. 인섭은 시트에 고개를 묻고 신음을 흘렸다. 빠듯하게 벌어진 구멍 사이로 단단한 성기가 쉴 새 없이 드나드는 바람에 내벽이 발갛게 부어 있었다.

“왜 할수록 조이는 겁니까?”

이우연이 각도를 달리해서 성기를 안으로 박아 넣었다. 인섭이 힉, 하고 숨을 삼키며 몸을 떨었다.

“찔러 주면, 찔러 주는 대로, 좋아서 씹구멍을 벌름거리는 주제에.”

이우연이 말을 끊어 뱉을 때마다 단단한 성기가 인섭의 안을 짓쳐 댔다. 벌써 몇 번이나 사정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만큼 지쳐 버린 몸은 오직 이우연이 주는 감각만을 느낄 뿐이었다.

“얼굴도 안 보이는데, 누구든 박아 줘도 상관없다는 건가요?”

“아니, 하읏, 그렇지…않…. 우연 씨만, 하아.”

인섭은 뒤로 하는 자세를 평소에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 얼굴을 볼 수 없어 무섭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물론 이우연은 모든 체위를 좋아했지만, 후배위를 즐겼다. 후배위가 가장 임신하기 유리한 체위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짐승의 교미는 번식에 목적을 두었다.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인섭과 섹스를 할 때마다, 짐승의 본능이 고개를 쳐들었다.

“아니면 임신하고 싶어? 그래서 뒤로 박아 달라고 하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 하, 응, 아!”

인섭이 풀썩 쓰러진 채로 흐느꼈다. 엉덩이만 치켜들고 범해지는 그 가련하고 예쁜 모습에 이우연은 미칠 것 같았다.

이우연은 주먹을 움켜쥔 채로 엎드려서 몸을 아래로 내리꽂듯 성기를 쑤셔 박았다. 관자놀이 부근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퍽, 퍽, 거칠게 몸이 맞닿은 인섭의 뽀얀 엉덩이에 발갛게 자국이 생겼다.

이우연은 인섭의 어깨를 물고 이를 세웠다. 등줄기를 타고 잇자국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허벅지도 마찬가지였다. 이우연은 인섭을 그대로 삼켜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물고 빨았다. 그래도 갈증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탐욕은 점점 더 정도를 모르고 밀어닥쳤다.

“나 너 임신시키고 싶어.”

아이 같은 건 질색이었다. 갖고 싶다거나 키우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인섭과 섹스를 할 때마다 이우연은 단발의 쾌락이 아닌, 존속되는 결과를 갖고 싶어졌다. 인섭에게 저를 영원히 각인시키고 싶었다.

“내 좆물로, 여기에.”

이우연이 인섭의 아랫배를 꾹 누르며 말했다.

“미안, 해요. 그런 거 못 해서…, 아, 응, 하아.”

인섭은 헐떡이며 울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한 번쯤은 상대의 정신 나간 발언에 화를 낼 법도 한데, 인섭은 늘 제 부족함을 사과했다.

사랑스러웠다. 그 애틋하고 아름다운 감정에 시커먼 욕구가 난잡하게 뒤섞였다. 한계까지 몰아붙여, 몇 번이고 애정을 확인받고 싶었다.

이우연은 이를 사리문 채로, 팔에 준 힘을 더했다. 몸을 지탱하고 있는 그의 팔뚝에 힘줄이 근육을 타고 존재를 드러냈다.

“저한테… 기대셔도 됩니다.”

인섭이 붕대를 감은 이우연의 손에 제 손을 얹었다. 그 와중에 이우연의 손을 걱정하는 것이다.

이우연은 몸을 기대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그저 인섭을 부스러뜨릴 듯이 끌어안고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빠르게 허리를 움직일 뿐이었다. 인섭은 성기가 시트에 눌린 채로 파정했다. 그러나 사정하는 동안에도 허리 짓은 거침없이 이어졌다.

“아, 가고 있, 제발…, 잠깐만…, 우연 씨…, 기분이, 읏.”

뿌연 정액이 흔들리는 인섭의 배에 문질러졌다. 사정 직후라 예민해진 몸의 감각이 극도로 끌어 올려졌다. 인섭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인섭의 우는 모습을 내려다보던 남자의 근육이 일시에 경직되었다.

이우연이 인섭의 구멍에 정액을 쌌다. 범람하듯 밀려드는 그 감각에 자신을 맡기고 이우연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인섭의 몸을 탐닉했다.

인섭은 가쁘게 숨을 내쉬며 베개에 고개를 묻었다.

이제 끝이겠지.

하도 울어서 빡빡하게 부은 눈을 껌뻑이며 인섭은 뒤를 돌아보았다. 이우연과 눈이 마주쳤다. 이우연이 몸을 천천히 일으키며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이제 시작이구나.

본능적으로 인 예감에 인섭은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떴을 때, 인섭은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이곳이 어디인지 깨닫고 얼른 몸을 일으켰다.

“아….”

인섭은 지끈거리는 허리를 부여잡고 숨을 고르며 주변을 살폈다. 이우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예전이었으면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시 잠들었겠지만, 낯선 공간에서 느끼는 본능적인 경계심 때문인지 그럴 수가 없었다.

인섭은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옷을 찾으려 했지만 속옷 한 장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시트로 몸을 둘둘 감고 인섭은 침실 밖으로 나갔다.

“우연 씨.”

인섭은 이우연을 불렀다. 무거운 적막이 서늘한 공기에 맞닿아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는 시트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고 다시 이우연의 이름을 불렀다.

“우연 씨.”

이번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인섭은 천천히 일 층을 둘러보았지만 이우연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아랫도리에서 찌르르하게 올라오는 통증 때문에 걷는 게 쉽지 않아, 금세 등에 식은땀이 배었다.

2층에 있는 걸까.

인섭은 계단을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불을 켤 필요도 없이 움직임을 감지하는 센서가 은은한 간접 조명을 비춰 주었다.

인섭은 복도를 걸으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복도 맞은편에 방문이 보였다. 노크를 하려는데 원래 열려 있던 문이 힘없이 밀려났다.

평소였으면 그냥 문을 닫고 돌아섰을 텐데, 2층은 정리를 끝냈다는 이우연의 말이 떠올랐다.

인섭은 벽을 더듬어 방의 조명을 켰다. 탁, 하고 빛이 번졌다. 갑작스럽게 환해진 탓에 인섭은 순간 눈을 찡그렸다.

“어….”

동시에 뒤에서 뻗어 온 손이 문을 닫았다.

“뭐 해요. 여기서.”

뒤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애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인섭은 순간 소름이 쭈뼛 돋았다.

“찾았는데 안 계셔서…. 죄송합니다.”

아무리 사귀는 사이라도 주인이 없는 집을 제멋대로 돌아다닌 건 무례한 행동이었다.

“어차피….”

이우연이 뭔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물건 같은 건 안 만졌습니다. 들어가지도 않았어요. 기분 나쁘시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그의 침묵을 전혀 다른 뜻으로 오해한 인섭이 얼른 다시 사과했다.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인섭의 어깨 아래로 시트가 흘러내렸다. 이우연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잠깐 나갔다 왔어요.”

그가 시트를 올려 주며 대답했다. 이우연의 손에 들린 약 봉투를 발견한 인섭이 깜짝 놀라 물었다.

“괜찮으세요? 혹시 손의 상처가 덧나신 겁니까? 아님 머리가 다시 아프신 건가요?”

매번 질리지도 않고 상대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인섭을, 이우연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커다랗고 말간 눈에 걱정이 가득하다.

이우연은 타인에게 관심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타인의 감정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인섭은 달랐다. 인섭이 내비치는 감정 하나하나가 매사 제 안의 있는 어떤 것들을 끄집어냈다.

“…어쩌죠.”

“네?”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이우연은 천천히 마른침을 삼키며 인섭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인섭을 가둬 놓고 내도록 보기만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인섭 씨가 내 걱정할 때가 아니잖아요.”

이우연은 인섭이 두르고 있던 시트에 손을 집어넣었다. 인섭이 놀라서 작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뻗었다.

“여기 약 발라야지.”

“……!”

차가운 손가락이 발갛게 부은 입구를 문질렀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손가락이 구멍을 벌리고 들어왔다.

“아, 저기….”

인섭이 허리를 뒤로 빼려고 했지만 이우연은 아예 인섭의 다리 사이에 제 허벅지를 끼워 넣어 바싹 몸을 가져다 댔다.

“마음 같아서는, 씨가 안쪽에 자리 잡을 때까지 두고 싶지만.”

이우연의 손가락이 구멍을 얕게 찔렀다. 다리에 힘이 풀린 인섭은 이우연에게 기대다시피 그를 붙들었다. 이우연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안에 고여 있던 정액이 흘러나왔다. 인섭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참아 냈다. 인섭의 가는 다리 사이로 흘러내리는 희뿌연 정액을 바라보던 이우연이 말을 이었다.

“일단 씻어야겠군요.”

그는 그대로 인섭을 안아 올렸다.

“나무네요.”

인섭이 욕조 벽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히노끼.”

“아…. 히노끼.”

인섭은 잘 모르지만 일단 이우연의 말을 따라 했다. 커다란 나무 욕조에서는 은은한 향이 배어 나왔다. 두 사람이 앉아도 넉넉할 정도의 크기였다.

인섭을 번쩍 안아 욕실로 데려온 이우연은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인섭이 제가 씻겠다고 아무리 말해도 이우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우연은 인섭을 씻기고, 받아 놓은 욕조 물에 인섭을 담갔다. 문제는 이우연도 옷을 벗고 욕조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인섭은 두 팔로 무릎을 끌어안은 채로 앉았다. 이우연에게 가슴에 남은 멍을 들킬까 걱정이 된 터다. 불행 중 다행으로 몇 번이나 엎드린 자세로 하는 바람에 가슴 부근이 붉게 쓸려 멍이 잘 보이지 않았다.

괜찮겠지.

인섭은 아래를 흘끔 보며 제 몸을 확인했다.

“왜 그러세요.”

이우연은 욕조 난간에 기댄 채로 눈을 감은 상태였다. 눈을 감고도 자신이 움직인 것을 알아챘다는 사실에 인섭은 깜짝 놀랐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섭은 몸을 웅크린 채도 대답했다. 이우연이 눈을 떴다. 그는 말없이 인섭을 빤히 쳐다보았다.

인섭은 괜스레 민망해져 얼굴을 연신 문질렀다. 자신이 시선을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우연이 모를 리 없는데, 그는 좀처럼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또한 웃어 주는 일도 없었다.

“…하실 말씀 있으세요?”

“아뇨.”

이우연은 짧게 대꾸하고 다시 고개를 뒤로 젖혔다. 인섭은 욕조 안에서 발가락을 꼬물꼬물 움직였다.

이상했다. 이우연의 태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섹스를 하고 나서 드라마틱한 변화를 원한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공기는 누그러질 줄 알았는데.

지금도 욕조에 같이 들어와 있긴 하지만, 어쩌다 같은 목욕탕에서 만나 나란히 앉은 회사 동료처럼 서먹하기만 했다.

…그때 입으로 해 줬을 때도, 기분이 안 좋아 보였는데. 역시 내가 많이 서툴러서 재미가 없는 걸까.

인섭은 시무룩한 얼굴로 말없이 욕조의 수면이 움직이는 모습만 바라보다가 입을 뗐다.

“손은 좀 괜찮으세요?”

“네.”

이우연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인섭은 아무래도 그의 손에 남은 상처가 마음에 걸렸다.

“다음에 그런 일이 있으면 매니저의 도움을 받으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그래서 본전도 찾지 못할 말을 하고 만 것이다. 이우연이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인섭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의 팔을 타고 흘러내린 물이 욕조에 똑똑 떨어졌다. 숨 막힐 것 같은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도움이 필요하면 그렇게 하죠.”

판에 박은 듯한 형식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더 이상의 대화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이우연은 다시 눈을 감고 욕조에 몸을 기대고 누웠다. 인섭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의 얼굴로 향했다.

살이 조금 빠진 건가.

인섭은 차분하게 그의 낯을 살폈다.

“내 얼굴 질린 거 아니었어요?”

이우연이 문득 입을 열었다.

“네?”

“그래서 뒤로만 한 줄 알았는데.”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인섭이 바로 반박했는데도 이우연은 웃지 않았다. 이전에 툭툭 내던지던 그의 농담은 가벼웠다. 짓궂음에 당황하긴 하더라도 이렇게 무섭지는 않았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인섭의 말에 이우연이 눈을 뜨고 천천히 턱을 당겼다. 일순 그 모습이 잔뜩 긴장한 것처럼 보여 인섭 역시 몸에 힘이 들어갔다.

“듣고 있어요.”

전화기 너머에서 제 존재를 알리던 그때와 같은 목소리다. 수증기로 가득한 욕실 안인데도 인섭은 이상하게 목이 바싹 말랐다. 손바닥으로 괜히 입가를 한 번 문지른 후 인섭은 말을 이었다.

“…고양이 때문에 그러신 건가요?”

“뭐?”

“저한테 화나신 이유요.”

아까 2층에 올라갔을 때 본 방에는 캣 타워가 설치되어 있었다. 인섭은 이우연이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고 했을 때, 바로 대답하지 못했던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생각해 보면 둘 사이의 분위기가 어색해진 것도 그쯤이었다.

“…….”

이우연의 표정이 미묘하게 가라앉았다. 인섭은 덜컥 불안해졌다.

“그때 바로 대답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이우연 씨는 동물 같은 거 별로 안 좋아하신다고 생각해서…. 하지만 우연 씨가 키우시면 잘 키우실 거라 생각합니다. 누구보다 책임감도 강하고, 성실하시니까요. 원하시면 제가 분양받는 거 다시 추진하겠습니다.”

이우연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이우연의 웃음소리가 욕실 천장을 타고 울렸다. 인섭은 이우연의 웃음소리를 좋아했다. 공기의 가벼운 흔들림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웃음소리를 들을수록 점점 주변 공기에 짓눌리는 것만 같았다.

“기껏 기다렸더니, 고양이라….”

“…….”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던 이우연의 얼굴에서 일시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인섭 씨는 나에 대해 아는 게 없네요. 그래서 나를 좋아하는 건가?”

“그게 아니라…, 앗.”

이우연이 인섭의 얼굴에 가볍게 물을 끼얹었다. 인섭이 얼굴에 흐르는 물기를 닦는 사이 이우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몸 좀 더 데우고 나와요.”

이우연이 목욕 가운을 몸에 걸치며 말했다.

“우연 씨. 그게 아니라, 저는….”

일어서려는 인섭을 이우연이 다시 욕조에 앉혔다.

“100까지 세고 나와요. 안 그러면 인섭 씨 임신할 때까지 이 집에서 못 나가게 할 테니까.”

농담이라고 치부하고 이우연을 따라 나가기에 그의 눈빛이 지나치게 매서웠다. 그가 가운 끈을 묶으며 그리고, 하면서 뒷말을 덧붙였다.

“여권은 이삿짐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나중에 시간 날 때 찾아 드리죠. 숫자 세요.”

이우연이 욕실을 나가고 난 뒤에 인섭은 커다란 눈을 허물듯 내리감았다. 뭔지 몰라도 또 한 번 모두 망쳐 버린 기분이었다.

“…바보 같아.”

인섭은 무릎에 고개를 댄 채, 천천히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사람이 움직이는 기척에 인섭은 눈을 떴다. 셔츠의 소매 단추를 잠그던 이우연이 잠에서 깬 인섭을 발견하고 고개를 돌렸다.

“깼어요?”

“…어디 나가세요?”

“잠시 변호사랑 상의할 일이 있어서.”

인섭이 자리에서 구물구물 일어났다.

“제가 태워다 드릴까요?”

“됐어요.”

이우연은 냉정하리만치 단호하게 거절했다. 인섭은 약간 시무룩한 얼굴로 시트로 몸을 감고 일어섰다.

“한숨 더 자도 돼요.”

“아닙니다. 저도 씻고 집에 가겠습니다.”

단추를 잠그던 이우연의 입매가 설핏 일그러졌다.

“집에 꿀단지라도 숨겨 뒀어요?”

“꿀단지요? 그런 건 없는데. 아, 저번에 회사에서 받은 선물 세트에 꿀이 있긴 했습니다. 필요하시면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이우연이 대답하지 않고 쳐다보기만 하자, 인섭이 어물어물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아니시면, 필요한 거 말씀하세요. 집들이 선물로 사 드리겠습니다.”

“집들이요?”

인섭은 아차 싶었다. 이우연의 성격상 이사를 했다고 집으로 사람을 초대할 리 없는 것이다.

“그, 그럼 이사 축하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축하해 주시게요?”

“당연히 해 드려야죠. 좋은 일인데.”

또다.

이우연이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자신을 쳐다보았다. 인섭은 혹시 엄청난 결례를 저지른 건가 싶어서 식은땀이 흘렀다. 자신이 미처 알지 못하는 한국의 이사 문화가 있을지도 모른다.

“좋은 일이 될지 확실히 정해지면 그때 받죠.”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인섭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우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반대편 소매의 단추를 잠그다가 영 엉뚱한 말을 불쑥 꺼냈다.

“주말에 시상식 있는 거 알고 계시죠?”

“불참하시는 거 아니었나요?”

인섭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물었다.

그 사건 이후로 모든 스케줄을 취소한 상태였다. 아무리 시작은 상대방이 했다고 하더라도 이우연이 폭력을 행사한 건 사실이니, 자숙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좋았다.

“대상 수상자가 불참하는 경우도 있나요.”

“…….”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러라고 할 수도 없었다. 인섭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안 좋은 말, 들으실 텐데….”

이우연이 재킷을 입다가 멈칫하고 인섭을 돌아보았다.

이런 일이 생기면 많은 사람이 이우연을 걱정한다. 특히 김 대표는 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걱정하곤 했다. 하지만 그 면면을 들여다보면, 이우연의 마음이 다쳤을까 걱정해 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회사에 말해서 기자분들께 최대한 협조 구하겠지만, 모든 기사가 우호적으로 나가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도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이우연은 인섭을 집으로 데려와 섹스하고 나면 기분이 나아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꽝이었다. 꾸역꾸역 밀어 두었던 불안이 욕구와 한데 엉켜 자신을 밀어붙였다.

결국 어제의 섹스는 평소보다 더 난폭해졌다. 그러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 사나운 욕구를 억제할 수가 없었다. 다정한 말도 입맞춤도 없는 짐승 같은 섹스였다. 그렇게 당해 놓고도 인섭은 자신을 평범한 사람처럼 대했다.

“…….”

눈이 마주치자 인섭이 슬며시 웃어 보인다.

이우연은 천천히 숨을 삼켰다. 억누른 화와 성욕이 뒤엉켰다. 반쯤 발기한 성기 때문에 아랫배가 쑤셨다.

“시상식 날, 끝나고 다른 데 가지 말아요.”

이우연은 몸을 반대편으로 돌리며 나직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할 말 있으니까.”

“무슨 말씀이요?”

인섭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할 말이 있으면 지금 해도 되는데, 굳이 그날로 미뤄 두는 점이 불길했던 것이다.

“중요한 말이요.”

“…….”

불길함이 한층 진해졌다.

창백해진 인섭의 낯을 보고도 이우연은 모른 척 말을 이었다.

“오늘 대표님 차는 제가 탈게요.”

“알겠습니다. 저는 버스 타고 가겠습니다.”

인섭이 얼른 고개를 들어 대답했다.

“내 차 타세요.”

“괜찮습니다. 이 기회에서 여기서 저희 집 버스 노선도 알아 두는 게….”

“그런 거 알아 둘 필요 없어요.”

이우연이 인섭의 말을 잘라 버렸다. 마치 여기에 다시는 올 필요가 없다는 듯한 말처럼 들려 인섭은 잔뜩 주눅이 들고 말았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사람이 무슨 버스예요.”

다시 다정한 배려가 돌아왔다. 인섭은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기분이었다.

이우연의 행동은 다정한데 눈빛과 말투는 여전히 차가웠다.

인섭이 조그만 목소리로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했다. 이우연이 자동차 열쇠를 넣어 둔 서랍을 열었다.

“바로 돌려 드리겠습니다.”

“천천히 줘도 되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아닙니다. 내일 아침에 주차장에 세워 두고 가겠습니다. 오히려 그편이 덜 신경 쓰입니다.”

인섭은 손을 내저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사는 아파트의 주차장은 비좁아서 좋은 차를 세워 두기 불안했다. 게다가 남의 물건을 빌리면 최대한 빨리 돌려줘야 한다고 아버지께 교육받아 온 것이다.

“그래요, 그럼. 나도 내 거 최대한 빨리 받고 싶으니까.”

이우연의 시선이 인섭의 뺨을 느릿하게 더듬었다. 어딘지 탐욕스럽게 느껴지는 시선은 점점 아래를 타고 내려갔다. 인섭은 고개를 숙였다. 시트를 몸에 두르고 있는 데도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머리에 열이 올랐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어제 어떤 식으로 저를 탐했는지 떠오른 것이다. 배 안쪽이 자릿자릿 울리고 구멍이 욱신거렸다. 이우연의 성기가 아직도 몸 안에 머무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인섭은 제 당혹을 감추기 위해 나오는 대로 떠들어 댔다.

“그, 그럼 제일 오래되고 싼 차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사고 나도 상관없는…. 걱정 마세요. 운전은 잘하니까, 사고는 안 나겠지만.”

이우연은 막 집으려던 벤츠 열쇠를 내려놓고 그 옆에 있는 것을 집어 들었다.

“자, 이거.”

이우연이 던진 열쇠를 인섭이 엉겁결에 한 손으로 받아 들었다.

“내 것에 흠집 나는 거 싫어합니다.”

“…….”

“그러니 흠 하나 없이 돌려놓으세요.”

이우연은 그대로 방을 나갔다.

“…….”

차 열쇠를 받았을 때 인섭은 설마 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와 키를 누르자마자 번쩍이는 은색 람보르기니를 보는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일부러 심술부리는구나.

이 차는 이우연이 가진 것 중에 가장 비싼 차였다.

인섭은 화분을 끌어안고 차 앞으로 걸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차를 그냥 두고 가고 싶은데,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인섭은 조수석 바닥에 화분을 잘 세워 두고 운전석에 올랐다. 흠집 없이 돌려놓으라는 이우연의 말이 생각나 인섭은 시동을 걸기 전에 꼼꼼하게 운전석 이곳저곳을 살폈다. 운전석 구조는 전에 몰아 봤던 페라리하고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안전벨트를 매고 시동을 거는 순간, 묵직하게 울리는 엔진 소리에 인섭은 화들짝 놀랐다.

촌스럽다고 비웃음당할 수도 있지만, 인섭은 스포츠카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특유의 화가 난 듯한 무거운 엔진 소리도 무섭고, 바닥에 아슬아슬하게 닿을듯 말 듯 한 차체도 불안하고, 액셀을 밟는 순간 순식간에 속도가 올라가는 엔진도 부담스러웠다. 여러모로 자신에게는 맞지 않는 차였다. 뭇 남성들의 드림 카를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표정으로 운전하며 인섭은 천천히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하아….”

아니나 다를까 주차장을 나오자마자 사람들이 흘깃거리며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졌다. 이우연이 옆에 있으면 모를까 혼자서 이런 차량을 몰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운전대를 쥔 손에서 식은땀이 났다. 예나 지금이나 다른 사람의 시선을 받는 건 어색하고 긴장되었다. 인섭은 방지 턱에 차가 긁히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운전하다가 빵, 하는 클랙슨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반대편에서 오던 차가 뒤로 빠지라고 손짓을 해 보였다. 인섭은 그제야 제가 일방통행으로 들어왔음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인섭이 차창을 열어 얼른 사과하고 차를 천천히 후진시켰다. 길가에 불법 주차해 놓은 차량 때문에 후진하는 게 쉽지 않았다. 가까스로 차를 길가에 세웠다. 반대편에서 오던 차가 아슬아슬하게 옆으로 지나갔다.

“불편하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인섭은 다시 창을 열어 사과했다. 그러자 반대편 차의 운전자도 창문을 열었다.

“그럴 수도 있죠. 차 좋네요.”

제 것도 아닌 것을 칭찬받자 인섭의 얼굴이 민망함에 금세 발갛게 달아올랐다.

“감사합니다.”

그때 인섭의 눈에 조수석에 앉은 여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녀도 인섭을 알아봤는지 알은체를 했다. 인섭은 엉겁결에 꾸벅 고개를 숙였다.

“좀 괜찮으세요?”

문장의 주어가 자신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인섭은 네, 괜찮으십니다, 하고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그럼 또 봐요.”

그녀가 가볍게 눈짓해 보였다. 반대편 차량은 바로 창을 닫고 사라졌다.

“…….”

인섭은 멍하니 운전대를 잡고 생각에 잠겼다.

집값이 비싼 고급 동네였다. 연예인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기도 했다. 당연히 그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운전대를 쥔 손이 차갑게 식었다.

왜 하필이면 채연서가….

그때 또 한 번 클랙슨이 울렸다. 남색 승합차가 뒤로 조금 더 물러나 달라고 손짓했다.

“죄, 죄송합니다.”

인섭은 얼른 사과하고 기어 박스의 후진 버튼을 황급히 누르고 핸들의 패들을 당겼다. 하지만 뒤로 움직일 거라고 예상했던 차가 앞으로 나아가자 인섭은 당황해서 얼른 브레이크를 밟았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람보르기니가 도로에 세워진 석제 볼라드를 박아 버렸다.

“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실수에 인섭은 패닉이 되어 황급히 차를 뒤로 빼려 했다.

“……!”

쾅, 하는 충격음과 우직, 하고 일그러지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이번에는 후방을 확인하지 않아 도로 벽에 그대로 범퍼를 박은 것이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인섭은 어떻게든 차를 빼야겠다는 생각에 핸들을 꺾었다가 차체 아랫부분을 아예 긁어 버렸다. 앞뒤 옆으로 화려하게 차를 박살 낸 인섭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괜찮아요?”

눈앞에서 펼쳐진 끔찍한 광경에 승합차 운전사가 놀라서 뛰어내려 왔다. 주변 사람들도 웅성웅성 모여들기 시작했다.

“괜찮으세요? 혹시 어디 아프신 거 아니에요?”

무면허나 음주 운전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운전석 창이 내려가고 새하얗게 질린 청년이 모습을 드러내자, 승합차 운전자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인섭이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로 간신히 말을 꺼냈다.

“경찰 좀… 불러 주세요.”

남자가 경찰서 문을 열고 들어서자 누군가 컷, 을 외쳐야만 할 것 같은 장면이 연출되었다.

“어, 어떻게 오셨습니까.”

경찰이 저도 모르게 긴장해 말을 더듬었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화분을 끌어안은 채 의자에 오도카니 앉아 있던 인섭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떻게 된 거예요.”

“죄송합니다. 제가 부주의하게 운전하는 바람에….”

잔뜩 풀이 죽은 인섭이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앞뒤 범퍼랑 조수석 쪽 문을 아예 갈아야 할 거 같다고 합니다. 확실한 건 공장에 가 봐야 아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바들바들 떠는 와중에도 인섭은 제가 아는 정보를 정확히 전달했다.

“누가 그런 걸….”

이우연의 언성이 높아지기 직전, 누군가 그의 어깨를 당겼다.

“네가 여긴 웬일이냐.”

차 실장이었다. 이우연의 눈매가 날카롭게 일그러졌다.

“그러시는 실장님은 웬일이세요.”

“웬일은. 인섭 씨한테 연락받고 왔지. 걱정 마. 누구 다친 것도 아니고 볼라드랑 차만 박살 난 거야. 보험사 불러서 다 처리했어.”

“그런데 왜 사람을 경찰서에 뒀습니까.”

“인섭 씨 자기가 온 거래. 기물 손괴죄로 잡혀 들어가는 줄 알았나 봐. 돈만 물어 주면 되는데. 그런데 누가 너한테 연락했어?”

이우연은 차 실장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차 실장은 속으로 개싸가지씹새끼라는 욕을 빠르게 다섯 번 반복했다.

“왜 저한테 전화 안 했습니까.”

이우연의 물음에 인섭은 고개를 한층 더 아래로 숙였다. 차주에게 먼저 연락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죄송합니다. 이런 일로 또 경찰서 오시면 곤란하실 거 같아서 연락 못 드렸습니다.”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 이유였다. 하지만 이우연의 살벌한 표정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 너한테 연락하겠냐. 아무튼 다 해결되었으니까, 나가자. 너 경찰서 오가는 거 사진 찍히면 좋을 일 하나 없어. 손끝만 베여도 죽을 병 걸렸다고 소문나는 동네잖냐.”

차 실장이 이우연을 끌어내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인섭 씨 얼마나 놀랐겠어. 사고 같은 거 한 번도 낸 적 없는 사람이 저렇게 비싼 차를 박았으니.”

이우연은 무표정하게 인섭을 내려다보았다. 인섭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개처럼 들러붙어서 좆질을 하며 인섭의 배 안 가득 정액을 싼 게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네 뒷구멍을 핥는 것만으로도 자지를 단단하게 세울 만큼 흥분하는 인간이 그까짓 수리비를 아까워할 거라고 생각하는지 이우연은 인섭에게 진지하게 묻고 싶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입힌 손해는 어떻게든 보상해 드리겠습니다.”

부품비에 엔지니어 공임비까지 더하면 거의 일억 가까이 깨질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우연에게는 유의미한 금액이 아니었다.

“어떻게 보상하실 건데요?”

이우연의 물음에 가장 많이 놀란 건 차 실장이었다.

“뭐? 야, 너 왜 그래. 돈도 썩어 문드러지게 많은 놈이 갑자기….”

차 실장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이우연의 차가운 눈이 차 실장의 얼굴을 스윽 훑었다. 최인섭 다음으로 이우연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차 실장은 본능적으로 살벌한 저 눈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닥치세요.

“…갚겠습니다. 어떻게든.”

인섭의 대답을 듣자 이우연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걸렸다. 그 모습을 본 차 실장은 한 손으로 소름이 돋은 반대편 팔뚝을 문질렀다.

“저, 여기서 그러지 말고 일단 일어나자. 다 끝났으니까.”

차 실장의 말에 인섭이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고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그 와중에 경찰관들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까지 하고 인섭은 경찰서를 나섰다. 이우연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인섭의 손에 들린 화분을 낚아챘다. 그 와중에 화분까지 챙긴 인섭의 빌어먹을 다정함에 그의 속이 회까닥 뒤집힌 것이다.

“제가 들겠습니다.”

이우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차 실장은 매너 있는 행동을 저렇게까지 싸가지 없게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이우연. 너 진짜 돈 받으려고?”

차 실장이 잔뜩 풀이 죽은 인섭을 힐끔거리며 물었다.

“실장님이 무슨 상관이세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인섭 씨한테 돈 받는 건 좀….”

“아닙니다. 제가 사고 낸 겁니다. 남의 물건 망가트렸으면 당연히 책임져야 합니다.”

인섭이 얼른 차 실장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우연의 눈이 새파랗게 벼려졌다.

“그래요. 남의 물건이니까 책임지셔야죠.”

“…알겠습니다.”

인섭이 다시 죄인 모드로 돌아가 두 손을 모으고 대답했다.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걸 보고도 이우연은 인섭을 달래 주거나 하지 않았다.

아. 단단히 빡쳤구나.

차 실장은 이우연의 심경을 대번에 파악했다.

“타세요.”

이우연이 제 차의 조수석을 열어 주었다.

“아닙니다. 여기서 집까지 걸어갈 수 있습니다.”

“누가 집으로 간대요? 병원 가서 검사할 겁니다.”

“안 다쳤습니다. 정말입니다.”

누가 봐도 인섭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멀쩡한 상태였다.

“인섭 씨가 의사예요?”

그러거나 말거나 이우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인섭의 의견을 묵살했다. 인섭은 하는 수 없이 이우연의 차에 올라탔다.

“먼저 가 볼게요.”

이우연이 차 실장에게 인사하고 그대로 차를 몰고 사라졌다.

…저걸 보면 그 토할 것 같이 다디단 애정은 그대로인데.

차 실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제주도의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상관 말아야지. 아휴.”

차 실장은 머릿속에 떠오른 장면을 떨치기라도 하려는 듯 손을 휘휘 내젓고는 차에 올랐다.

현관문 벨 소리가 들리자마자 차 실장은 얼른 인터폰을 켰다.

“누구세요?”

<실장님, 안녕하세요. 최인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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