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인섭은 한숨을 내뱉었다.
괜찮은 거겠지. 냉랭하게 대하거나 스킨십을 피하거나, 만나지 말자는 말은 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이우연은 너무나 다정하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인섭은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지만, 내내 속이 좋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연애는 생각보다 많은 용기를 요했다.
이우연을 따라 한국으로 오기로 결정했을 때, 기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아니, 많이 두려웠다. 복수를 결심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때보다 몇 배는 무서웠다. 그때는 모든 걸 끝내면 괜찮아질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한국행은 달랐다. 모든 게 끝났을 때, 과연 자신이 그 후를 감당할 수 있을까.
“…괜찮아.”
인섭은 떨리는 손으로 이우연의 재킷을 움켜쥐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이우연을 처음 본 순간을 떠올렸다.
잘 왔다, 오느라 고생했다, 오랜만이다. 이런 말조차 없이 그는 인섭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어디로 가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주차장에 세워 둔 차에 타자마자 이우연은 키스를 퍼부었다. 누군가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할 만큼 열렬하고, 다급하고, 애틋한 키스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 거의 두 시간이 지나 있었다. 키스를 멈추고 눈이 마주쳤을 때, 이우연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웃음을 보는 순간, 잊고 있었던 두려움이 왈칵 밀려들었다.
이 연애가 끝난다면 나는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멍청하다고 비웃음당할 일이겠지만, 인섭은 한국에 오기 전에 수십 권의 연애 이론서를 읽었다. <오래 연애를 지속하는 법>, <행복한 연애론>, <이별 없는 연애>, <이 책만 읽으면 당신도 연애 박사> 등등.
책에 밑줄을 긋고 외워 둬야 할 부분은 따로 정리까지 하며 공부했다.
주체적인 사람일수록, 서로의 사적인 영역을 존중해 줄수록 연애 기간이 길다는 통계 결과를 보고 인섭은 동거가 아닌 자취를 결심했다. 연애에 부정적인 결과를 미치는 선택은 무조건 피하고 싶었다. 이우연이 몇 번이나 동거를 권했지만, 그랬다가 안 좋은 결말을 앞당길 것만 같아 고집스럽게 고개를 내저었다.
한국으로 와서 다툼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가끔 이우연은 이해하지 못할 이유로 화를 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의 애정을 의심해 본 적은 없었다. 그 역시 그럴 거라고 믿었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온전하지 못하더라도 그 마음에 그릇된 거짓은 없다고 생각했다.
“노력하면, 좋아질 거야.”
인섭은 스스로를 달래는 말을 되뇌었다.
문제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더 열심히 공부를 해 두는 건데.
인섭은 시무룩한 얼굴로 엘리베이터 계기판을 올려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운동 겸 걸어 올라가자는 생각에서였다. 비상구 문을 여는데 주머니에서 벨 소리가 들렸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는 순간, 인섭은 눈을 부릅떴다. 윤아름이었다. 그녀는 좀처럼 전화를 거는 일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최인섭입니다.”
얼른 전화를 받았다. 혹시 고양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바로 받으시네요. 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네.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세요?”
인섭은 일부러 천천히 계단을 오르며 대답했다.
<애들 입양처가 결정됐어요. 아서랑 아이작, 두 마리 다요.>
“정말요? 어떻게요?”
‘아버지 아무래도 애들 안 보내려나 봐요. 저 결혼할 상대도 이렇게 까다롭게 사람 고르진 않으실 거 같은데….’
얼마 전에 윤아름이 보낸 문자 내용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에 깜짝 놀라 물었다.
<모르는 사람한테는 도저히 못 보내겠다 싶었는지, 본인 아는 분 중에 고르고 골라서 애들 프로필 돌리고 직접 연락하셔서 결정하셨나 봐요. 심지어 혼자 가정 방문까지 다 하셨더라고요. 아서랑 아이작이랑 같은 집으로 가게 됐어요.>
“잘됐네요. 정말 잘됐습니다.”
<아버지가 직접 고르셨으니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로이스는 존이랑 조금 더 지내다가 보내신대요.>
“감사합니다. 아버님께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인섭은 허공에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문제는요.>
윤아름이 한숨을 포옥 내쉰 후에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애들 보내기 싫어서 계속 현실 부정하시다가 오늘에서야 이 사실을 말씀하셨다는 거예요. 당장 내일 데리러 온다는데.>
“네? 내일이요?”
<우리 아버지 어쩌면 좋을까요. 오늘도 하루 종일 애들 끌어안고 방에서 안 나오시네…. 아무튼, 그래서 말인데요. 오늘 시간 되세요?>
“오늘이요?”
<네. 애기들 얼굴 보셔야 할 거 같아서요. 입양 받기로 하신 분들이 귀농하셔서 지방에서 올라오시는 거래요.>
오늘 아니면 아서와 아이작을 다시 보기 힘들다는 얘기였다. 고양이 구조와 입양을 윤아름이 하겠다고 나서긴 했지만, 인섭은 전적으로 책임감을 느꼈다.
“알겠습니다. 오늘 갈게요.”
<선물 사 오지 마세요. 절대로. 아버지가 뭐 사 오면 밥 안 주신대요.>
고양이를 보러 갈 때마다 양손이 묵직하게 선물을 사서 갔었다. 윤아름의 어머니께 반찬까지 받은 터라 뭐든 보답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럼 이따 봬요. 저 내일 보낼 물건 좀 정리하러 갈게요.>
고맙다는 인사를 끝으로 인섭은 통화를 마쳤다. 인섭은 계단 복도로 난 창가를 보았다. 데이트를 하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다음에 해야겠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아쉬움을 삼켰다. 이우연에게 식사 얘기를 꺼내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전에도 약속을 미뤘는데 또 한 번 미룰 수는 없을 테니까.
집으로 가는 길에 도서관에 들러 연애 서적을 빌려야겠다고 다짐하며 인섭은 계단을 올랐다. 사무실로 들어서니 조 대리가 인섭에게 알은척을 했다.
“인섭 씨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대리님.”
“번거롭게 매번 오셔서 어떡해요. 저야 인섭 씨 얼굴 보니까 좋지만.”
조 대리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인섭에게 이우연의 스케줄 표를 건넸다.
“변경된 사항 있나요?”
이우연 급의 배우는 한 달 전에 거의 모든 스케줄이 정해진다. 사이사이 인터뷰나 사소한 일이 추가될 수는 있지만, 굵직한 행사는 그 전에 모두 잡히는 것이다.
“다음 주 목요일 오전 행사 미룬 거 외에는 없네요.”
“목요일이요?”
인섭은 제가 잘못 기억하는 건가 싶어 수첩을 꺼내 확인했다. 저번 주 목요일 오전에도 스케줄을 미뤘던 것이다.
“네. 우연 씨가 당분간 목요일 오전은 계속 스케줄 잡지 말아 달라고 하셨어요. 무슨 일 있으세요?”
“저도 들은 바가 없어서 확인해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운동 시간을 옮긴 것인가.
인섭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수첩을 주머니에 넣었다.
“오늘은 스케줄 일찍 끝나셨나 봐요. 어디 좋은 데 안 가세요?”
“오늘은….”
대답을 하려던 인섭은 입구 쪽에서 들리는 소란에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보안 직원이 난색을 표하며 남자를 막아섰다.
“왜 안 돼? 뭐가 안 되는데?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도 보러 왔어? 이우연 불러 달라고 하는 건데 뭐가 안 돼!”
인섭의 낯빛이 창백하게 변했다.
“강영모 아니에요? 저 사람이 왜 이우연 씨를 찾지?”
조 대리가 질색하며 인섭에게 속삭였다. 바싹 얼어붙은 인섭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어떡하지. 왜 저 사람이 여기 있는 거지. 일단 이우연에게 사무실로 내려오지 말라는 연락을, 아니 연락하면 바로 내려올 텐데….
인섭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강영모와 눈이 마주쳤다.
“어! 너!”
인섭을 알아본 강영모가 섬뜩하게 눈을 빛내며 다가왔다. 인섭이 주춤하며 물러서려고 했지만, 이미 강영모가 지척으로 다가온 후였다.
“이우연 어디 있어. 당장 데려와.”
“지, 지금 여기 안 계십니다.”
인섭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눈앞이 번뜩였다. 강영모가 인섭의 머리통을 세게 내리쳤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헉하고 숨을 삼켰다.
“여기 없긴. 차 서 있는 거 보고 올라왔는데.”
“먼저 집으로 가셨습니다.”
최대한 차분하고 침착하게 대응했다. 강영모가 인섭의 손에 들린 재킷을 빼앗아 펼쳤다.
“니 옷이야? 니가 입고 다니기엔 너무 큰 사이즈 아니야?”
“…….”
“좋게 말하니까 너 지금 내가 우습냐?”
강영모가 사납게 소리치며 인섭의 얼굴에 재킷을 집어 던졌다.
“이러시면 경찰 부를 겁니다.”
조 대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강영모를 막으려고 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경찰? 불러. 시발, 경찰 부르면 누가 더 좆같아질 거 같은데?”
인섭이 조 대리를 향해 고개를 내저었다. 경찰이 개입하면 일만 더 시끄러워질 뿐이었다.
“안쪽 회의실로 모시겠습니다.”
일단 강영모와 이우연을 마주치지 못하도록 해야 했다. 덜덜 떨리는 손을 뒤로 숨기며 인섭은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강영모가 피식 웃음을 삼켰다.
“이우연 부르라고. 자꾸 같은 말 하게 하지 마라.”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시면 대표님께 연락드려서….”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강영모가 손을 치켜들었다. 놀란 인섭이 어깨를 움츠리자 강영모가 키득거리며 그의 뺨을 툭툭 밀어내듯 건드렸다.
“쫄았냐? 그러게 니가 왜 나대. 김 대표는 매니저 교육 안 시키냐?”
강영모의 악명을 알기에 사무실 사람들 중 누구도 함부로 나서지 못했다.
“길게 더 말 안 한다. 가서 이우연 데려와라.”
처음에는 툭툭 건드리던 손길이 조금씩 거세졌다. 찰싹, 찰싹, 기분 나쁘게 내리치는 소리가 사무실에 울렸다. 인섭은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전에 맞은 것처럼 아프지는 않았지만 모멸감이 밀려왔다.
“무슨 일인지 우선 저한테 말씀하시면 됩니다.”
인섭은 눈물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울 수 없었다. 더더군다나 이우연의 매니저로서 어떻게든 일을 무마시켜야 했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여기에서 이러시면 강영모 씨께도 좋지 않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인섭이 꿈쩍도 하지 않자 강영모의 입매가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의 눈에 옆 책상에 놓인 커피가 들어왔다. 강영모가 인섭을 밀쳐 내고 커피를 집어 들었다. 놀란 인섭은 눈을 질끈 감고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예상했던 상황은 닥치지 않았다.
주변이 지나치게 조용했다. 숨 막힐 것 같은 고요에 인섭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달큼한 커피 향이 진동했다. 커피를 뒤집어쓴 이우연이 서 있었다. 커피를 뒤집어쓰고도 이우연은 얼굴을 찌푸리거나 화도 내지 않았다. 누군가 컷, 하고 외치면 영화나 광고의 한 장면이라 해도 믿을 만큼 정적인 광경이었다.
인섭과 눈이 마주쳤지만 이우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의 턱을 타고 흘러내린 커피가 옷깃을 적셨다. 인섭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우연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괜찮으십니까? 이러지 마시고 화장실로…!”
이우연이 인섭의 턱을 쥐고 고개를 기울이게 만들었다.
“맞았어요?”
나직한 음성이 심장을 퍼뜩 뛰게 만들었다. 인섭은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와 상황이 비슷했다. 아니, 더 심각했다.
“아닙니다. 안 맞았습니다. 저는 괜찮으니까….”
남자의 손등이 인섭의 뺨에 닿았다. 인섭은 숨을 삼켰다. 달짝지근한 커피 향이 나는 손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맞은 거 같은데.”
이우연의 시선이 강영모에게 닿았다. 강영모가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이우연을 노려보았다.
“보면 어쩔 건데. 위아래도 없어? 선배를 봤는데 인사도 안 해?”
“안녕하세요.”
높낮이 없는 단조로운 음색에 상대에 대한 날카로운 적의가 드러났다. 강영모가 시발, 하고 욕을 내뱉으며 손에 든 컵을 내던졌다.
“너 때문에 안녕 못 하시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하루아침에 이철환이….”
“몇 대 맞았어요?”
강영모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우연이 불쑥 물었다. 이우연의 시선은 못 박힌 듯 강영모에게 꽂혀 있었다.
“뭐라고?”
“몇 대 맞았어요? 아팠을 텐데.”
그제야 강영모는 이우연이 자신이 아닌 인섭에게 말을 건네고 있음을 알아챘다. 강영모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일그러졌다.
“몇 대 맞았으면 어쩔 건데. 몰래 따라와서 뒤에서 벽돌로 내리치기라도 하려고?”
최인섭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말이 빠르게 도는 곳이었다. 사실 여부와는 관계없이 자극적인 소문일수록 빠르게 퍼져 나갔다. …무엇보다 괜한 소문도 아니고 사실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강영모의 입을 틀어막아 밖으로 끌고 가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이우연은 여유로운 낯으로 주변을 둘러볼 뿐이었다.
“뭘 찾는 건데.”
“벽돌 대신할 게 있나 해서요.”
이우연이 처음으로 강영모의 말에 대답했다. 술렁이던 사람들이 일시에 숨을 죽인 채 제 귀를 의심했다. 예의 바르고 상냥한 이우연의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이 아닌 것이다.
인섭은 기절할 지경이었다. 잊고 있었다. 강영모의 입이 아니라 이우연의 입을 틀어막는 게 우선이라는 사실을.
“그런데 선배님은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무슨 생각.”
“제가 선배님을 벽돌로 내리쳤다면서요. 범인은 잡힌 거 아니었나요?”
“일면식도 없는 조선족 새끼가 이유도 없이 다짜고짜 내 머리를 왜 내리쳐. 게다가 자백은 뜬금없이 왜 하러 가고.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돼.”
“그럼 이유가 있으면 내리쳐도 되는 겁니까.”
어린아이가 제 궁금증을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어떤 의도 없이 드러내는 순수한 무구함이 오히려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이 새끼가 지금, 그걸 말이라고…. 됐어. 그건 그거고, 너 이철환 본부장한테 뭐라고 했어.”
“아무 말씀도 안 드렸는데요.”
“그런데 왜 다짜고짜 지금 방영 중인 드라마를 조기 종영하라는 지시가 내려오는 건데!”
이우연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머리에서 커피가 아직도 툭툭 떨어졌다.
“드라마 조기 종영하게 되셨어요? 안타깝네요. 좋은 작품이었는데.”
정말 진심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고는 묻는다.
“그런데 왜 제가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까와 같은 질문이었다.
“당연히 네가 무슨 수작을 부렸으니까 이철환 본부장이 그딴 결정을 내린 거잖아!”
강영모의 목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이전보다 눈에 띄게 수척한 얼굴이었다. 출연한 드라마와 영화마다 족족 실패해 이번 작품은 특히 심혈을 기울여 촬영 중이라는 후문이 돌았다. 극 중 역할에 맞춰 십여 킬로그램 감량하는 수고까지 들인 것이다.
그랬음에도 시청률이 연일 최저를 기록했다. 시청률에 울고 웃는 게 방송계였다. 조기 종영은 피디나 작가에게도 큰 상처였지만 주연 배우에게도 씻을 수 없는 오욕이었다. 특히 자존심이 센 강영모 같은 배우에게는 절대로 넘길 수 없는 수치였다.
“제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데요.”
이우연이 웃으며 조금 전과 별반 다름없는 질문을 돌려주었다. 인섭은 오싹 소름이 돋았다. 마치 고장 난 기계를 앞에 둔 기분이었다.
“시발 아까부터 무슨 개수작이야. 네놈 아니면 누가 그런 짓을 해. 착한 척 가식 떨지 마, 새끼야. 네놈 속 시커먼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내가 이 바닥 십오 년 차야. 너 같은 새끼, 딱 보면 알아. 너 어제 채연서 찾아갔잖아. 가서 혓바닥 놀렸을 거 아니야.”
연인을 위해 병문안을 온 이우연이란 기사 제목이 여기저기에 걸렸다. 강영모 역시 모를 리 없었다.
“그러니까 제가 선배님 뒤통수도 벽돌로 치고, 드라마도 조기 종영하게 만들었다는 말씀이시죠?”
“그래!”
이우연이 아아, 하고 고개를 느리게 주억거렸다. 그러고는 왜요? 하고 묻는다. 강영모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우연에게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보자 보자 하니까…!”
“제가 이다음엔 무슨 짓을 저지릅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이 미친 새끼야.”
“보면 아신다면서요. 그래서 저 찾아오신 거 아닙니까? 제가 했다는 증거는 없지만요.”
이우연이 선량해 보이는 미소를 보였다. 실제로 커피 향이 나는 미소였다. 말문이 막힌 강영모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눈을 부라렸다.
“증거도 없이 그냥 제가 한 거 같은 생각이 들어서 여기까지 오셔서, 제 사람을 때리신 거 아니었나요?”
제 사람이라는 표현에 인섭은 머리털이 쭈뼛 곤두섰다. 그렇지 않아도 강영모는 이우연과 자신의 사이를 의심했던 것이다. 어떻게든 빨리 이 사태를 끝내야 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두 분 다….”
“넌 빠져. 어디 좆 병신 같은 새끼가 자꾸 끼어들어!”
강영모가 인섭을 밀쳐 내며 우악스럽게 소리 질렀다. 이우연이 하, 짧게 쓴웃음을 삼켰다. 그의 손에 힘줄이 도드라지는 모습을 본 인섭이 얼른 이우연에게 매달렸다.
“안 됩니다.”
인섭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러지 마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이우연은 인섭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제 멱살을 잡은 강영모의 손을 가볍게 뿌리쳤다.
“새끼야. 너 당장 따라와.”
강영모가 씩씩거리며 사무실을 나갔다. 따라나서려는 이우연 앞을 인섭이 가로막았다.
“제가 나가서 대화하고 오겠습니다. 우연 씨는 여기서….”
이우연은 아무런 대답 없이 인섭의 옆을 지나갔다.
“와 씨. 강영모 개또라이라는 소문은 들었는데, 상상 초월이네.”
“미쳤나 봐요. 시청률 낮아서 드라마 조기 종영된 걸 왜 우연 씨한테 난리래.”
“열폭이죠. 그런데 이우연 씨는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성인군자가 따로 없네요. 나 같으면 가만 안 뒀을 텐데.”
사람들이 그제야 참았던 말들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인섭 씨 괜찮아요? 어떡해요. 대표님이 전화를 안 받으시네. 차 실장님도 그렇고. 경찰에 전화해야 해요?”
조 대리가 전화기를 손에 든 채 어쩔 줄 몰라 하며 인섭에게 물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경찰에는 연락하지 말아 주세요. 대표님께 연락해 주시고요.”
인섭은 얼른 이우연의 뒤를 쫓아 나갔다.
“이우연 씨.”
이우연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인섭이 있는 힘껏 끌어당겼다.
“안 됩니다.”
“뭐가 안 돼요?”
“화나셨잖아요.”
사람들은 이우연의 차분한 태도를 칭찬했지만, 인섭만큼은 알 수 있었다. 이우연의 눈에 어린 스산한 분노를.
“그렇게 보여요?”
이우연이 웃으며 물었지만 그의 눈은 전혀 웃지 않았다.
“뭐 해! 새끼야. 빨리 안 오고.”
강영모가 이우연에게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이우연은 웃는 얼굴 그대로 강영모에게 고개를 돌리며 걸음을 옮겼다.
이우연이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엘리베이터 센서에 댔다. 엔터테인먼트 회사 건물을 신사옥으로 옮기면서 김 대표가 특별히 신경 쓴 게 주차장이었다. 지독한 자동차광인 그는 지하 3층 전체를 본인의 전용 주차장으로 사용했다. 지하 3층은 카드를 소지해야만 갈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을 여닫거나, 심지어는 층을 누르는 것도 모두 카드가 필요했다. 즉, 카드를 소지한 사람에게는 완벽한 밀실이 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물론 이우연은 카드를 소지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강영모가 먼저 들어갔다. 따라 들어가려는 인섭을 이우연이 가볍게 밀어냈다.
“선배님이랑 잠깐 얘기 좀 하고 올게요.”
“같이 가겠습니다.”
인섭이 고집스럽게 이우연의 소맷자락을 움켜쥐었다.
“인섭 씨.”
이우연의 음성이 나직이 인섭을 을렀다. 인섭은 시선을 떨군 채로 고개를 내저었다.
“안 참을 거였으면 아까 거기서 안 참았지.”
“…….”
인섭은 소매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 손을 놓으면 이우연은 영영 놓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 저 새끼가 인섭 씨한테 한 번만 더 손대면 못 참을 거 같아서 그래요.”
이우연이 인섭의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 놓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니까 인섭 씨는 여기서 기다려요. 금방 올 겁니다.”
마지막 손가락을 떼어 툭 던지듯 밀어내며 이우연이 웃었다. 스르륵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틈으로 인섭의 울먹거리는 눈이 보였다. 이우연은 끝까지 눈을 마주치다가 완전히 문이 닫히고 나서야 몸을 돌렸다.
“하이고. 대단한 충심 나셨네. 저렇게 절절하게 따라다니는데 한번 해 줘라. 아니, 알고 보면 이우연의 짝사랑인가? 그때도 그래서 뒤에서 나 내리친 거 아니야?”
강영모가 낄낄거리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이우연은 카드 키를 댄 채로 지하 3층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짜 그날 선배님을 뒤에서 때린 게 저라고 생각하십니까?”
“너 말고 누구겠어.”
이우연이 아아, 하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얼마간 생각하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우연이 말끄러미 강영모를 직시했다. 평생 나쁜 짓이라고는 저질러 본 적 없는 순수한 소년 같은 눈빛이었다.
“정말 그렇게 믿으시는 분이, 저랑 단둘이 있고 싶던가요.”
이우연은 가지런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으며 강영모에게 다가갔다.
인섭은 거의 패닉 상태였다. 뭘 해야 하는지,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전화벨이 울렸다. 김 대표였다.
<나 지금 연락받았다. 가는 중이야. 이우연 어디 있어? 걔 지금 뭐 해? 강영모가 왜 찾아온 거야? 둘이 무슨 일이야?>
통화가 이어지자 김 대표가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쏟아 냈다.
“지금….”
인섭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엘리베이터 계기판의 숫자를 확인했다.
“내려가고 있습니다.”
<어딜 내려가? 너랑 같이 안 있어?>
인섭은 반대편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가 기다리지 못하고, 비상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인섭아. 부탁이다. 지금 걔 말릴 수 있는 거 너밖에 없어. 아니 앞으로도 너뿐일 거다.>
“제가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
인섭은 통화를 마치고 1층으로 와서 엘리베이터 계기판을 확인했다. 지하 3층에 멈춰 있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심장에 욱신거리는 통증이 스쳤다. 인섭은 계단 난간을 붙들고 호흡을 골랐다. 혹시 몰라서 주머니에서 약을 꺼내 삼켰다.
몸에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인섭은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무리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우연과 관련된 일에는 몸이 먼저 움직였다. 항상 그랬다.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비상구 문을 열려다 멈칫 손을 떨었다.
그날 골목길에서 봤던 광경이 떠올랐다.
인간적인 감정을 찾아볼 수 없던 차갑기 그지없던 남자의 눈빛.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문을 열면 어떤 광경이 펼쳐질지, 이우연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를 선택한 이상 모두 감내해야 할 몫이었다.
인섭을 숨을 길게 삼킨 후, 문고리를 잡고 비틀었다.
“씨발, 개새끼가 진짜!”
거칠게 욕설을 퍼부으며 문을 여는 남자의 힘에 밀려 인섭은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뭘 봐. 시발, 눈 안 깔아!”
강영모가 인섭에게 위협적으로 손을 치켜 올리더니 뭔가 생각났는지 썅, 하고 그대로 계단을 올라가 버렸다. 인섭은 멍한 얼굴로 강영모의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벌떡 일어섰다.
왜 그 생각은 하지 못했던 걸까.
인섭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었다.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는데.”
이우연이 귓가에 대고 있던 핸드폰을 내렸다. 인섭은 달려가 그의 팔을 붙들었다.
“어, 어디 다치신 데 없으십니까.”
“내가 왜 다쳐요.”
“강영모 씨가, 아까 저기로….”
멀쩡히 걸어 나오는 강영모를 보는 순간 인섭은 제가 얼마나 멍청했는지 깨달았다. 이우연이 다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반대로 그가 해를 입을 수도 있는 건데.
“잠깐 얘기만 한다고 했잖아요.”
“…….”
“얼마 뒤에 영화제 시상식 있어서 참았어요. 인섭 씨가 나 상 받으라며.”
농담처럼 하는 말이었지만 진심이 실려 있었다. 인섭이 창백하게 굳은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이우연이 마뜩잖은 듯이 혀를 찼다.
“많이 놀랐어요? 어디 다친 데는….”
이우연은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인섭이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은 것이다.
“인섭 씨!”
인섭은 그대로 울음을 터트렸다. 맺히기 무섭게 떨어지는 눈물이 바닥을 적셨다. 인섭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안도감인지 공포인지 모를 감정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왜 울어요? 혹시 어디 아파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괜찮….”
대답을 하다가도 울음이 터져 나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인섭은 한참을 흐느끼며 고개를 묻었다.
“죄송합… 니다. 울음이 안 그쳐서….”
이우연이 인섭을 번쩍 안아 일으켰다. 인섭이 버둥거리자 이우연이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가만히 있어요.”
“거, 걸을 수 있습니다. 잠깐 놀라서 그런 겁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이우연은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눌렀다. 검은색 커버를 씌워 놓은 차에 불이 들어왔다. 얼마 전에 어렵게 구했다며 김 대표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했던 롤스로이스의 팬텀 EWB 모델이었다. 이우연은 커버의 뒷부분만 걷어 뒷문을 열고 인섭을 앉혔다. 본인도 인섭의 옆에 앉고 문을 닫았다. 삼면이 막힌 주차 공간과 커버 덕분에 차 안은 완벽하게 밀폐된 공간이 되었다.
“이리 와요.”
이우연이 인섭을 제 앞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성인 남자가 두 다리를 쭈욱 뻗고도 남을 만큼 뒷좌석 공간이 여유롭기로 유명한 세단이었다. 이우연은 인섭을 제 무릎에 앉혀서 아이를 대하듯이 다정하게 울음을 달랬다.
“울지 마요. 인섭 씨. 괜찮으니까.”
인섭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한번 터진 울음은 쉬이 멈추지 않았다.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맺힐 새도 없이 흘러내렸다.
이우연은 예전부터 누군가 우는 모습도, 우는 소리도 싫어했다. 가장 나약한 감정을 드러내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건,
“흑…, 죄송합니다.”
인섭의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발갛게 열이 오른 눈 밑, 촉촉하게 젖은 긴 속눈썹, 잘게 떨리는 입술.
우는 모습만 봐도 발기할 만큼, 인섭은 예쁘게 울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놀라서 그런… 겁니다. 금방 그치겠습니다. …흑.”
아랫도리만 저릿한 게 아니었다. 인섭이 울 때마다 숨을 쉬기 곤란할 만큼 가슴이 저렸다.
시발. 머리만 고장 났으면 됐지.
이우연은 한숨을 내쉬며 인섭의 어깨에 고개를 댔다. 그러고는 인섭의 등을 꽉 끌어안고 울지 말아요, 하고 나직하게 인섭을 얼렀다.
인섭이 작게 끄덕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우연은 인섭의 등을 쓸어내려 주며 울음이 그치길 기다렸다.
한참을 히끅거리던 인섭의 울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완전히 울음이 멈추고 난 뒤에도 인섭은 민망함에 얼굴을 들지 못했다.
“다 울었어요?”
“…네.”
“그렇게 강영모가 무서워요?”
“아닙니다.”
인섭은 고개를 내저었다. 강영모에 대한 감정은 두려움보다는 꺼림칙함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우연과 강영모가 얽히는 것이 싫었다. 그로 인해 이우연의 인생이 어긋나게 될까 봐 두려웠다.
“겁이 그렇게 많아서 어떡해.”
이우연이 놀리듯이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인섭은 항의해 봤지만, 엉엉 운 직후라 설득력을 가질 순 없었다. 이우연은 연신 인섭의 등을 쓰다듬었다.
“…이우연 씨가 안 다치셔서 다행입니다.”
진심으로 제 걱정을 해 주는 상대를 이우연은 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인섭이 저를 걱정하는 쓸데없는 말은, 몇 번을 들어도 좋았다. 제가 나약하고, 부족하고, 보살핌을 받아야 할 존재처럼 느끼게 해 주었다. 그렇게 자신이 평범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옷 다 버리셔서 어떡합니까.”
온통 커피로 얼룩진 니트를 보며 인섭이 눈썹을 찌푸렸다.
“어떡할까. 인섭 씨가 빨아 줄래요?”
“네. 제가 빨아 드리겠습니다.”
인섭이 얼른 고개를 들며 말했다. 이우연과 눈이 마주쳤다. 인섭은 눈을 한 번 깜빡인 후에야 제가 단어 선택을 잘못했음을 깨달았다.
“…세탁해 드리겠습니다.”
얼른 정정했지만 이우연의 눈이 가늘어진 후였다.
“강영모가 인섭 씨 건드리는 거 보는 순간, 죽여 버리고 싶었어요.”
인섭이 데이트를 생각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이우연은 김 대표 방으로 찾아가 잠긴 책상 서랍을 부수어 자동차 키를 꺼냈다. 사무실로 내려가면서 이우연은 다시 한번 창밖을 확인했다. 맑은 하늘이었다. 날씨가 좋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날씨는 기상 현상일 뿐이니까.
그래도 인섭이 날씨가 좋아서 데이트를 계획했다는 것은 좋았다. 이우연은 경쾌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왔다.
그러나 사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잠시 제 눈을 의심했다. 강영모가 인섭의 뺨을 툭툭 건드리며 장난감 다루듯 하고 있었다. 그대로 강영모에게 걸어갔다. 그 자리에서 놈의 대가리를 반으로 갈라 버리고 싶었지만 그건 나중의 즐거움으로 미뤄 둘 생각이었다.
“그런데 참았어요.”
인섭에게 끼얹은 커피를 몸으로 막은 것은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커피를 뒤집어쓰고 난 다음에 이우연은 잠시 숨을 골랐다. 머릿속이 냉정하게 정리되었다. 강영모를 지금 당장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 따윈 생각해 낼 수 없었다. 적당히 강영모의 머리통을 내리칠 의자를 골라잡으려던 찰나에 인섭과 눈이 마주쳤다.
“…참았어요, 간신히.”
거의 울 것 같은 눈으로, 울음을 참으며 저를 붙들던 눈동자. 네가 원하면 몇 번이든 붙들려 주겠다고 생각했으니까.
이우연은 인섭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울음으로 번진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잘하셨습니다.”
인섭이 머뭇거리다가 이우연의 머리에 손을 얹고 살살 문질렀다. 덜덜 떨면서 맹수의 머리를 쓸어내리는 어린아이 같았다. 이우연은 웃음을 삼켰다.
“그러니까 세탁 말고 다른 걸로 해 주세요. 부탁할게요.”
이우연이 인섭의 입술을 엄지로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인섭의 얼굴은 물론이고 목덜미까지 붉게 물들었다.
“바, 밖에서는….”
“여기 아무도 안 와요. 보이지도 않고.”
이우연이 차 열쇠를 꺼내 문을 잠갔다.
“들어올 사람도 없어요.”
“…….”
이우연이 언뜻 표정을 굳히며 싫어요? 하고 묻는다.
“아,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인섭은 고개를 숙이며 말끝을 흐렸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밖에서 만지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 이후 거의 처음이었다. 당연히 거절해야 했다. 그게 매니저로서의 본분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우연이 자신을 원한다는 사실이 그저 기쁠 따름이었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멍청해질 수 있는 걸까.
자괴감을 곱씹으면서 인섭은 이우연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정말 밖에서 안 보입니까?”
인섭이 불안한지 눈을 아래로 내리감은 채로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걱정 마요.”
누가 보면 눈깔을 파 버릴 테니까.
이우연은 뒷말은 삼키며 인섭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인섭이 천천히 입술을 벌렸다. 이우연은 인섭의 입에 검지를 넣었다. 입 안을 휘저어 주자 인섭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더 큰 거 들어갈 건데, 손가락으로 힘들어하면 어떡해요.”
언뜻 다정한 걱정처럼 들리는 말에 진득한 욕구가 묻어났다. 이우연은 인섭이 입을 다물지 못하게 턱을 한 손에 쥐고는 손가락 개수를 늘려 입 안을 쑤셨다.
인섭의 턱을 타고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이 흘러내렸다. 이우연은 인섭의 손을 잡아끌어 제 바지에 가져다 댔다. 기대감으로 단단하게 성이 오른 살덩이가 옷 위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빨아 주세요.”
이우연이 인섭의 손을 성기에 문지르며 정중하게 부탁했다. 인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우연이 손가락을 빼자 인섭은 좌석 아래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대체 차 한 대를 사는 데 왜 그 돈을 쓰냐는 구박에, 앞좌석과 뒷좌석 간의 거리가 세단의 가치를 말해 주는 거라고 핏대를 세우던 김 대표의 주장이 떠올랐다.
“가치 있긴 하네요.”
“네?”
“아니에요. 계속해요.”
이우연이 인섭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인섭이 결심을 굳힌 듯 손을 뻗으려는 순간, 핸드폰 벨 소리가 정적을 깼다. 깜짝 놀라 굳어 버린 인섭 대신 이우연이 인섭의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내 받았다.
“네. 대표님.”
<이우연…!>
“안 죽였습니다. 안 죽일 거고요. 이후로 전화하시면 마음 바꿔서 죽일 겁니다.”
이우연은 김 대표가 뒷말을 잇기 전에 통화를 마치고, 핸드폰 전원을 꺼 버렸다.
“계속해요.”
“제가 대표님께 전화….”
“안 해도 됩니다. 그 정도면 안심하실 거니까.”
절대 안심하지 않을 것 같다는 말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우연은 인섭의 뺨에 제 아랫도리를 대고 문지르며 나직하게 말했다.
“여기 빨아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옷을 세탁해 드린다는 거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구음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지만, 애초에 제 의도가 그게 아니었음을 밝혀야겠다는 생각에 인섭은 이우연의 말을 반박했다.
“옷 말고 자지 빨아 주세요.”
이우연이 상스러운 요구로 인섭의 반박을 받아쳤다. 오랜만에 듣는 노골적인 단어에 인섭은 얼굴을 붉혔다.
인섭이 떨리는 손으로 이우연의 바지 지퍼를 내렸다. 조용한 차 안에 맞물린 금속이 벌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미 반쯤 일어선 살덩이가 속옷 위로 제 존재감을 피력했다.
인섭은 천천히 속옷을 헤집어 살덩이를 끄집어냈다.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질 수 없는 크기였다. 두 손으로 살덩이를 쥐고 고개를 숙이자 남자의 체향이 확 다가왔다. 알 수 없는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처음이었다. 그의 성기를 빨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인섭은 제가 가진 음탕함을 이우연에게 들킬까 봐 두려웠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였다.
그때, 이우연이 인섭의 머리카락에 깊숙이 손을 찔러 넣었다.
“인섭 씨.”
보채는 듯한 한마디에 머뭇거리던 인섭이 이우연의 성기를 입 속에 가만히 머금었다. 이우연이 아, 하고 탁한 신음을 내뱉었다.
인섭은 혀를 움직여 살덩이의 끝을 문질렀다. 머리카락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맛있어요?”
이우연이 인섭의 귓불을 만지작거리다가 묻는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붉어진 인섭의 목덜미가 그를 만족시켰다. 이우연은 인섭의 머리를 바싹 당겨, 성기를 깊게 물렸다.
“인섭 씨 이거 좋아하잖아.”
아까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커진 성기가 인섭의 혀에 문질러졌다. 인섭은 어떻게든 입을 벌려 열심히 움직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흘러내린 침이 이우연의 체모를 적셨다.
“그렇게 맛있어요? 침을 질질 흘릴 만큼?”
인섭은 고개를 내저으려고 했지만, 머리통을 단단히 붙든 손이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
“다 줄게요. 마음껏 먹어요.”
이우연이 흐트러진 숨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입 속에서 점점 무게를 더하는 성기 때문에 인섭은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비릿하고 시큼한 체액이 혀에 흘렀다. 솔직히 좋다고 하기 힘든 맛이었다. 그런데 계속 맛보고 싶다는 알 수 없는 욕구가 치솟았다.
인섭은 이우연의 허벅지에 손을 얹고 그의 성기가 더 깊숙하게 들어올 수 있도록 목을 열었다. 가까스로 이우연의 성기가 인섭의 입 속에 모두 들어갔다.
“하아, 시발.”
이우연이 나직하게 욕을 내뱉었다. 거칠게 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참아 내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이우연은 인섭의 머리통을 잡고 난폭하게 추삽질을 시작했다. 인섭의 목구멍 끝에 살덩이가 닿았다. 무아지경이었다. 불덩이가 혈관을 타고 솟아올라 심장을 태우는 기분이었다.
밀려가던 인섭의 뒤통수가 운전석 등받이에 닿았다. 발정기가 온 짐승처럼 이우연은 허리 짓을 수차례 반복했다. 눈물이 어린 눈으로 인섭이 저를 올려다보았다. 빠듯한 호흡에 눈썹까지 붉게 열이 올라 있었다. 천진하고 순수한 눈동자가 초조한 욕망으로 흐려진 채다.
할 수만 있다면 평생 인섭의 입에 좆질을 하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드는 얼굴이었다.
“뭘 믿고 그렇게 야하게 굴어서 사람을… 씹.”
이우연이 치밀어 오르는 욕을 참으며 이를 낮게 물었다. 터질 것 같은 살덩이가 인섭의 입 안에서 뜨겁게 맥동했다.
“하아, 인섭 씨.”
인섭이 부름에 대답하듯 눈을 감았다 떴다. 그 별것 아닌 몸짓에 이우연은 머리가 핑그르르 돌았다. 죽을 것 같았다. 아니, 이대로 죽어도 좋았다.
“읏….”
이우연은 인섭의 머리통을 제 사타구니에 바싹 끌어당겨, 그대로 사정했다. 단단한 허벅지 근육이 팽팽하게 땅겨졌다.
“……! ……!”
이우연은 인섭의 머리통을 쥐고 몇 번 더 그 안에 정액을 쥐어짜듯 쏘아 냈다. 금세 인섭의 볼이 불룩해졌다. 이우연이 손을 뻗어 인섭의 뺨을 꾸욱 누르며 나긋하게 말했다.
“삼켜요.”
인섭은 눈을 반쯤 내리감고 정액을 삼켰다. 가느다란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모습을 이우연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완상했다. 그 와중에 미처 삼키지 못한 정액이 인섭의 턱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끝내주는 광경이었다.
이우연이 헐떡거리는 인섭을 끌어안아 시트에 앉히고는 흘러내린 정액을 닦아서 입술에 문질렀다.
“아깝잖아요. 흘리지 말고 먹어 줘요.”
곤란한 듯 눈썹을 설핏 찌푸리지만 인섭은 그가 시키는 대로 입술에 묻은 정액을 순순히 핥아 먹는다.
“인섭 씨 개 같아요.”
“네?”
갑작스러운 욕설에 인섭은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주인이 주는 먹이 받아먹는 개 같다고요.”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개에 비유당한 인섭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고개를 돌렸다. 문득 뭔가 떠올랐는지 이우연이 낮게 혀를 차며 인섭의 턱을 쥐어 저를 바라보게 만들었다.
“앞으로 내 것만 받아먹어요. 누가 먹이 준다고 해도 따라가지 말고.”
농담을 하는 건가.
인섭은 잠시 고민했지만, 이우연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기 때문에 결국엔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요.”
이우연이 인섭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개에게 하는 것처럼 칭찬했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조금씩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우연의 기다란 손가락이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유독 이우연은 인섭의 귓불에 집착했다. 차 안의 공기가 점점 더워지는 기분이었다.
“나, 나가 봐야 할 거 같습니다.”
인섭이 눈을 돌리며 말했다. 이우연이 바짝 얼굴을 대며 왜요? 하고 물었다.
“다른 분들이 걱정하고 계시니까 가서 말씀도 드리고, 오늘 일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헉.”
이우연이 아래로 손을 뻗어 인섭의 고간을 움켜쥐었다.
“이러고 나가게요?”
살짝 힘을 받기 시작한 살덩이를 쥐고 문지르며 이우연이 물었다.
“남자 좆 빨면서 세우고. 어떡해요. 인섭 씨.”
이우연이 진심으로 걱정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뭐?”
이우연이 재차 물으며 손에 힘을 주어 살덩이를 주물렀다. 인섭은 어떻게든 그의 마수를 피하려고 몸을 비틀었지만, 이우연의 입가에 걸린 미소만 점점 진해질 뿐이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아까 그것 때문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변명을 늘어놓는 인섭의 고개가 점점 수그러들었다.
이우연에게 밖에서는 손대지 말아 달라고 해 놓고, 남자의 그곳을 입으로 빨면서 흥분한 자신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공과 사도 구분하지 못해서….”
인섭은 솔직하게 사과했다.
이우연은 제 손안에서 쪼그라든 인섭의 성기를 내려다보며, 군침을 삼켰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귀여울 필요는 없을 텐데.
“공과 사, 구분하라고 한 적 없어요.”
이우연은 허리를 굽혀 인섭의 입술에 혀를 대고 쪽쪽 빨아 당겼다.
“그만, 아….”
인섭의 만류에도 이우연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혀를 움직였다. 쪽, 쪽, 가볍게 이어지던 입맞춤이 조금씩 깊어졌다. 이우연의 뜨거운 호흡이 더해지고, 입술이 맞물리고 혀가 점막을 범하듯이 탐했다.
아.
인섭은 짧게 탄식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이우연은 키스에 능숙했다. 그건 배운다고 알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혀가 밀려드는 속도와 입술이 물리는 각도, 얼굴과 머리통을 쥐며 쓰다듬는 악력까지. 괜히 키스의 교본이라는 제목으로 이우연의 게시물이 나도는 게 아니었다.
인섭은 이우연과의 키스가 좋았다. 애정을 확인받는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가장 좋은 건, 키스할 때 가끔 눈을 뜨면 볼 수 있는 이우연의 열중한 얼굴이었다. 그는 탐욕스럽게 상대를 원했다. 그 결핍과 갈구를 확인할 때마다 인섭은 아랫도리가 오싹오싹 떨렸다.
“하아….”
모자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떠 보니 이우연이 인섭의 위에 아예 올라타듯 앉아 있었다. 그의 눈이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이우연이 축축해진 입술을 혀로 핥고는 눈가를 설핏 좁혔다.
“아, 정액 맛.”
“……!”
“인섭 씨 거는 맛있는데, 내건 영 별로란 말이지.”
이우연이 인섭의 위에 몸을 바싹 엎드렸다. 그러고는 인섭의 목덜미를 맛보듯이 핥았다. 뜨거운 숨이 목덜미에 닿자 인섭의 몸에 열이 올랐다.
밀어내야 하는데.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슬아슬하게 코가 닿을 거리에서 이우연의 얼굴을 마주하니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번엔 인섭 씨 정액 먹고 싶어요.”
“네?”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인섭이 대답했다.
인섭이 밀어내지도 못하고 이우연의 옷자락만 움켜쥔 채로 바들바들 떨자, 이우연은 짧게 숨을 내뱉었다.
“싫으면 안 할게요. 진심이에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한계였다.
이우연은 아까부터 인섭의 가랑이를 벌려 그 안에 성기를 쑤셔 박고 좆물을 싸는 상상만 하고 있었다. 싫다고 울어도 강제로 엎드리게 해서 몇 번이고 범하고 싶었다. 정액을 가득 싸서 인섭의 납작한 배를 불룩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아, 그….”
이우연은 인섭의 배를 무심코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인섭의 커다란 눈에 물기가 비치고 긴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좌석 시트를 짚은 이우연의 팔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인섭이 원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래가 터질 만큼 흥분되었다.
“저는….”
인섭이 가까스로 입을 뗀 순간.
“이우연!”
저 멀리서 이우연을 부르는 낯익은 목소리에 인섭이 흠칫 어깨를 굳혔다. 이우연은 시발, 하고 욕을 내뱉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인섭은 어느새 옷자락을 여미고 몸을 일으켰다.
“이우연! 어디 있어! 야 이 새끼야!”
목소리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 잠깐 있어요.”
이우연이 차 밖으로 나가려 하자 인섭이 잠깐만요, 하고 다급하게 그를 붙들고 옷차림새를 고쳐 주었다.
“…됐습니다.”
이우연이 인섭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차 밖으로 나갔다.
“왜 부르십니까. 대표님.”
차 앞으로 걸어간 이우연이 김 대표에게 말을 건넸다.
“야! 너!”
김 대표가 황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인섭은 차 안에서 몸을 웅크린 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
“왜 거기서 나와! 설마….”
김 대표가 기겁하며 다음 말을 이었다.
“트렁크에 뭐 실었어!”
“안 죽였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왜 사람을 못 믿고 굳이 찾아와서 귀찮게 합니까.”
“너 같으면 네 말을 믿겠냐?”
“하긴.”
그렇게 말한 이우연이 아무렇지도 않게 제 두 손을 내밀었다.
“보세요.”
“뭘 봐?”
“피 묻어 있는지.”
“…….”
이우연이 됐죠? 하고 물으며 손을 거두었다. 김 대표는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아아, 하고 장탄식을 날렸다.
“내가 제명에 못 죽지. 조 대리한테 전화 받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제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나 딱 한 번만 너 죽여 보면 안 되냐?”
“안 돼요.”
이우연이 활짝 웃으며 대꾸했다. 김 대표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다가 눈을 사납게 번뜩였다.
“강영모가 여길 왜 왔어? 무슨 얘기 했어?”
“별 얘기 안 했어요. 오해가 있는 거 같기에 잘 해결했습니다.”
‘정말 그렇게 믿으시는 분이, 저랑 단둘이 있고 싶던가요.’
그렇게 말했을 때, 강영모는 순간 움찔했지만 이내 담배를 입에 물고 지껄였다.
‘벽돌도 없는데 뭐로 내리치려고?’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이우연의 눈매에 긴 웃음이 걸렸다.
아. 정말 모르는구나.
만약 강영모가 뭔가 알고 있다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벽돌로 사람 대가리를 깨 버린 인간이 연장 탓을 하겠는가.
“무슨 오해를 풀어? 어떻게?”
강영모는 대화가 통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본인이 편할 대로 믿고, 편할 대로 생각하는 유형이었다. 그런 상대를 그 짧은 시간에 설득시켰다는 말을 김 대표로서는 선뜻 믿기 어려웠다.
“잘.”
이우연이 간결하게 설명을 끝냈다.
“자세히 설명해!”
김 대표가 화를 이기지 못하고 벌컥 소리 지르자 차에 있던 인섭은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그 역시 알고 싶은 내용이었기에 다시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제가 직접 벽돌로 내리친 게 아니라 걔들을 사주한 거라고 믿는 거 같아서 그냥 내버려 뒀어요.”
“그럼 오해가 풀린 게 아니잖아.”
“어차피 사주한 증거도 없잖아요. 해결했다고 했지 오해를 풀었다고 한 적은 없는데요.”
“…….”
김 대표는 할 말을 잃었다.
증거가 없는 게 당연했다. 사주한 게 아니라 직접 내리쳤으니까.
인섭은 자신의 편이 선인(善人)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악인과 악인의 싸움은 정의로운 판단이 어렵기 때문에 심적으로 힘들다는 것도.
“그건 그렇다 치고. 드라마 종영은 무슨 얘기야. 왜 그 인간이 너한테 와서 그걸 갖고 지랄을 해.”
강영모는 이 바닥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배우였다. 아무리 성질이 더럽다고 해도 단순히 열등감 때문에 그 패악을 부리겠다고 여길 찾아오진 않았을 것이다.
“무슨 얘기긴. 시청률이 안 나와서 종영한다는 당연한 얘기죠.”
“…….”
“제 말이 틀렸어요? 시청률 20만 넘어도 방송국 사장 할아비가 와서 지시해도 조기 종영 못 해요.”
바꿔 말하자면 이번에는 누군가의 지시가 있었다는 뜻이었다. 김 대표는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너 어제 병원 찾아간 거랑 관련 있냐?”
이우연은 비스듬히 웃으며 김 대표를 바라보았다.
“대표님은 이럴 때 보면 눈치가 빠르다니까요. 전에 인터뷰하는 곳까지 따라와서 제가 카메라 부숴 버린 기자 새끼 기억나요? 열애설 눈속임이라고 기사 냈던.”
“그 인간이 왜.”
“세정에서 얼마 전에 문성 일보 문화부장 데려갔어요.”
세정은 강영모가 속한 엔터테인먼트였다.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신문사 고위 간부를 스카우트하는 일은 흔했다. 문화부 기자 출신만큼 언론 플레이에 능한 사람이 없는 터다.
“그 기자가 그쪽 라인이에요. 강영모 빨아 주는 기사는 다 걔가 썼더라고요. 세정 연예인 기사만 전문으로 쓰는 소속 기자라고 봐도 무방해요.”
회사마다 소속 기자라고 불려도 좋을 만큼 우호적인 기사를 써 주는 기자 한두 명은 있었다. JN엔터테인먼트도 마찬가지였다. 일이 생기면 친한 기자에게 먼저 기삿거리를 주는 건 당연했다.
“그럼….”
“세정에서 내 뒤 밟을 일이 뭐가 있겠어요. 강영모가 시키지 않고서. 채연서랑 사고 나서 기사 썼다는 기자 이름 보니까 그 새끼더라고요.”
인섭은 이우연이 갑자기 병원으로 가겠다고 한 순간을 떠올렸다. 전화기 너머에서 김 대표의 입에서 기자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그는 기사를 확인했었다.
“정말 네가 강영모 드라마 조기 종영하라고 이철환 본부장한테 말한 거야?”
“그렇게 말한 적 없어요. 일개 배우가 드라마를 어떻게 조기 종영시킵니까.”
잔뜩 긴장했던 인섭의 어깨가 느슨하게 풀렸다. 그래도 제 편이 상대편보다 조금 덜 악한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물론 기자 새끼가 강영모랑 연관 있을 거 같다는 말은 했지만.”
“뭐?”
“왜요? 사실이잖아요.”
그날 이우연이 병원에 간 이유는 간단했다. 채연서는 배우였다. 몸이 재산인 상대에게 사고 당일만큼 불안을 부추기기 좋은 날은 없었다.
과일 바구니를 건네며 이우연은 적당한 걱정을 늘어놓았다. 본인의 교통사고 경험담을 털어놓으며, 영영 팔을 쓰지 못할 수도 있었다는 얘기도 곁들었다. 다친 곳이 얼굴이 아니라 천만다행이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채연서의 낯빛이 어두워질 무렵에 같이 사고가 나서 기사를 썼다는 기자 얘기를 꺼냈다. 채연서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하필 그분이네요.’
알은체를 하자 채연서가 어떻게 아는 사이냐고 물었다.
‘저도 좀 문제가 있어서 고소 진행 중이거든요. 기억나시죠? 저랑 채연서 씨 거짓 열애설 운운하는 기사 썼던 기자.’
‘계속 말씀하세요.’
거짓 열애설이란 단어에 누워 있던 채연서가 몸을 일으켰다. 이우연은 짐짓 진지한 낯을 하고 말을 이었다. 강영모와 이우연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방송국 내에서도 소문이 파다했다. 이번 일에 강영모가 연관되어 있고, 그로 인해 당신이 큰일을 당할 뻔했다는 생각을 그 여자의 뇌리에 심어 주는 일은 어린애 팔을 비트는 것보다 쉬웠다.
“종영 결정한 건 이철환 본부장이지 제가 아니에요.”
당장 이렇게 즉각적인 보복이 날아들 거란 예상은 이우연도 하지 못했다. 역시 배우에겐 어떤 것보다 얼굴을 크게 다칠 수도 있다는 공포가 가장 크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더불어 이철환과의 스캔들까지 더하니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것이다.
“너야 그렇다 쳐도 그 기자한테 채연서 뒤를 밟으라고 강영모가 시켰다는 증거는 없잖아.”
“없었는데 이걸로 확실해졌네요. 본인이 찔리는 게 없으면 여기까지 찾아왔겠어요?”
“증거도 없는데 심증으로 그랬다는 거야? 만에 하나 강영모가 시킨 게 아니었으면 어쩌려고.”
“개똥 같은 드라마 하나 종영한 게 뭐 대수라고요.”
최인섭은 절망했다.
아아. 우리 편이 상대편보다 조금 더 악랄하구나.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냐?”
김 대표의 말에 이우연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까지 할 일이었어요, 저한테는. 받은 대로 돌려줘야죠.”
“…그 이상 준 거 같다는 생각은 안 들어?”
“네. 안 들어요.”
이우연이 천사같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새끼가 따라붙는 바람에 요즘 제 사생활이 아주 개좆같아졌어요. 아니, 사생활이 아예 없었죠.”
인섭은 흠칫 숨을 삼켰다. 이우연이 말하는 사생활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터다. 일을 시작한 이후로 두 사람은 개인 시간을 거의 갖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강영모 때문이었지만, 기자와의 사건도 불안을 증폭하는 데 한몫한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대가리를 반으로 갈라놔도 시원치 않아요. 사실, 그것도 많이 봐준 겁니다. 솔직히 저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내 손 더럽히는 쪽이 더 취향이거든요.”
말도 안 되는 궤변이었지만, 김 대표도 반박하지 못했다. 이우연치고 신사다운 복수를 한 건 사실이었다.
“우연아….”
김 대표가 한숨을 섞어 이우연을 불렀다.
“왜요.”
“강영모하고는 이제 얽히지 말자. 부탁이다. 요즘 안 그래도 시국이 뒤숭숭해서 기침만 해도 죽을 병 걸렸다고 기사 나는 시즌이잖아.”
인섭 역시 그 말을 듣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발 마주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이걸로 모든 게 끝이길,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걱정 마세요. 알아듣게 타일러서 보냈으니까.”
“뭐라고 타일렀는데.”
이우연이 주머니에서 USB를 꺼내 보였다.
“앞으로 한 번만 더 이런 일 생기면, 이거 방송사에 보내고 인터넷에 올리겠다고 했어요.”
“그 USB에 뭐가 들어있는데?”
“모르겠는데요?”
이우연의 대답에 김 대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까 사무실 나오기 전에 조 대리님 책상에 놓인 거 가져와서 저도 몰라요. 뭐가 들었는지.”
“그런데 왜….”
그 한마디에 강영모가 순순히 떨어져 나갔는지 김 대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인섭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처럼 선하게 살아온 사람은 이런 거 봐도 아무렇지도 않잖아요. 강영모 같은 새끼는 밤잠 설치는 거고.”
“…우리?”
이우연과 우리라는 범주에 묶인 김 대표는 벌레를 백 마리쯤 생으로 삼킨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고 볼 일이에요.”
“…….”
어떻게 하면 쟤는 저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걸까. 김 대표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이우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차 안에서 이우연의 발언을 듣고 있는 인섭도 왠지 모를 수치심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얼마나 지은 죄가 크면 입 한 번 뻥긋 못 하고 꺼지겠어요. 시간 나면 여기에 실제 증거를 채워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인섭은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강영모와 있었던 일은 비밀에 둬야겠다고 다짐했다.
“대체 어떤 성장 과정을 거치면 너 같은 놈이 되는 거지? 어릴 때 큰 충격 받았니? 머리를 다쳤다거나. 아주 불행한 사고를 겪었다든가.”
“하하하.”
이우연이 유쾌하게 웃으면서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웃음이 나오냐?”
“아니. 저희 어머니도 그걸 궁금해하시던데. 원래 이렇게 태어난 걸 어째요.”
“말을 말자.”
한숨을 내쉬던 김 대표가 반쯤 벗겨진 차 커버를 보고 이우연을 찌릿 노려보았다.
“그나저나 내 차에서 뭐 하고 있었던 거야.”
인섭이 숨을 삼키며 시트 아래쪽으로 몸을 숨겼다. 밖에서 보일 리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이우연은 커버로 가려진 차체를 힐끔 돌아보고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고 반대편 손가락을 그 사이에 집어넣어 보였다. 그 상스러운 손동작에 김 대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 차 하루만 쓸게요.”
“뭐? 네놈이 양심이 있냐!”
“없으니까 부탁드리죠. 저 차 안 갖고 왔는데 이 꼴을 하고 어떻게 집에 갑니까.”
이우연이 커피 범벅이 된 옷을 들어 보였다. 김 대표는 아아,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전생에 내가 뭔 죄를 지어서. 나라를 팔았나?”
“전생에 나라 팔고 현생에 돈 버시니 참 좋으시겠어요.”
“닥쳐! 미친 새끼야!”
“미친 새끼가 돈 많이 벌어다 드리잖아요. 좀 참으세요.”
커피를 뒤집어쓰고도 화보에서 걸어 나온 듯한 꼬락서니를 한 남자를 보던 김 대표는 문득 머리를 스친 생각에 얼굴을 굳히고 입을 뗐다.
“나 하나만 물어보자. 그동안 지내 온 정을 생각해서 솔직하게 대답해 줘라.”
그동안 지내 온 정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려다가 이우연은 차 뒷좌석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인섭을 생각해 그냥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김 대표가 침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트렁크에 뭐 들었냐.”
이상하다. 분명히 그때까지는 기분이 좋았는데.
인섭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기억을 되짚었다.
‘이제 그만 올라와도 돼요.’
주차장을 벗어나자 이우연이 뒷좌석 아래에 웅크린 인섭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우연은 시트까지 말끔하게 클리닝해서 돌려준다는 조건으로 김 대표의 차를 빌렸다.
‘괜찮을까요?’
‘뭐가요?’
‘그런 일이 있었는데…. 사람들 얘기도 나올 거고요.’
김 대표가 사무실로 올라가 사람들을 입단속시키겠지만, 말이 새어 나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니, 이미 새어 나간 후일 가능성이 크다.
‘안 괜찮으면 뭐 어쩌겠어요.’
이우연은 남 일 얘기하듯 가벼운 투로 대답했다. 김 대표는 이우연이 연예인으로서 가진 가장 큰 장점은 외모도, 피지컬도, 목소리도 아닌 멘탈이라고 믿었다. 연예인 활동을 오래 하다 보면 마음에 병이 오기 마련인데, 이우연은 그런 면에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걱정됩니다. 나쁜 말 들으실까 봐.’
인섭이 조심스럽게 말하자 운전대를 쥔 이우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앞만 보고 한참을 운전하던 그가 이윽고 불쑥 입을 뗐다.
‘미안해요.’
예상하지 못한 이우연의 사과에 인섭은 조금 당황했다.
‘아닙니다. 매니저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잘못 알고 계시네요. 인섭 씨는 내 매니저가 아니라 연인이에요. 그래서 미안한 겁니다.’
인섭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연인이란 단어에 방금까지 잊고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뒷좌석에 앉아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렇게 새빨개진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을 때, 룸미러로 자신을 보고 있는 이우연과 눈이 마주쳤다.
‘…사고 납니다.’
‘사고 안 날 정도로만 볼게요.’
이우연의 말에 목구멍 안쪽이 간질간질해지면서 다시 얼굴에 열이 올랐다. 우습게도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우울했던 기분이 거짓말처럼 풀렸다. 채연서의 병문안을 간 이유를 그의 입으로 들은 터다. 묻지 않았지만, 그때 둘이 만났던 것도 분명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괜한 의심을 했다. 좋지 않은 방향으로 혼자 상상하고 결론짓는 나쁜 버릇은 얼른 고쳐야 할 텐데.
인섭이 열심히 자기반성을 할 무렵 이우연이 불쑥 입을 열었다.
‘오늘 날씨가 좋네요.’
다소 뜬금없는 말에 인섭은 눈을 껌뻑거리다 그러네요, 하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가 한강을 가로지른 대교를 지나고 있었다. 그렇게 춥지도 덥지도 않은 대기에 어울리는 청명한 하늘이었다.
‘일단 집으로 가야 할 거 같아요. 샤워도 하고 옷도 갈아입어야 하니까.’
손수건으로 대충 닦긴 했지만, 이우연의 옷과 머리카락에 말라붙은 커피 얼룩이 그대로였다.
‘네. 저는 그럼 거기서 집으로 걸어가겠습니다.’
인섭의 말에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간다고 했어야 하나. 인섭이 잠시 고민하는 사이, 이우연이 룸미러로 뒷좌석을 보며 물었다.
‘어디 가려고요?’
그렇게 묻는 목소리가 미묘하게 낮았다.
‘이따가 아서랑 아이작 보러 가기로 했습니다. 내일 두 마리 다 입양 간다고 해서요.’
‘아. 고양이.’
이우연이 짧게 대꾸했다. 그러고는 운전석 창에 팔을 얹고 말없이 앞을 보며 차를 몰았다.
원래는 이우연에게 같이 시간을 보내자고 할 생각이었다. 약속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인섭은 괜히 미안해졌다.
‘나머지는요?’
이우연이 불쑥 물었다.
‘네?’
‘나머지 두 마리는 누가 데려갑니까?’
‘존과 로이스는 아직 안 정해졌습니다.’
‘내가 키울까요?’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한 인섭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이우연은 느리게 웃었다.
‘하긴, 좋은 주인 만나야지.’
혼잣말처럼 내뱉은 한마디에 인섭은 왠지 모르게 심장이 싸해졌다.
‘아닙니다. 이우연 씨도 좋은 주인이 되실 겁니다.’
이우연이 동물을 좋아하지 않아도 일단 키우겠다고 하면 책임감을 갖고 돌볼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면 좋겠군요.’
이우연이 가볍게 가속 페달을 밟으며 말했다. 이후로 이우연은 인섭을 집 앞에 내려 줄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고양이를 보러 간다고 해서 기분이 상한 걸까. 아니면 고양이를 키우겠다는 말에 바로 찬성하지 않아서 그런 걸까.
인섭은 샤워를 하고 나와 머리를 말리며 내내 아까 나눈 대화를 곱씹었다.
아니면 뭔가 따로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을까.
고민해 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우연은 하고 싶은 걸 참는 성격이 아니었다. 늘 본인의 감정에 솔직했다. 그런데 요즘은 한 발 뒤로 물러서서 벽을 치는 느낌이었다. 마치 제 감정을 숨기려는….
“아니야.”
인섭은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불안해지면 자꾸 부정적인 방향으로 사고가 흐르는 게 문제였다.
인섭은 옷을 입고 나서 이우연에게 문자를 쓰기 시작했다.
「잘 들어가셨나요? 괜찮으시면 오늘 로이스와 존의 사진을 찍어서 보내 드리겠습니다.」
문장을 완성하고 보내려는 찰나, 윤아름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여보세요.”
<인섭 씨. 지금 어디세요?>
“지금 집에서 나갈 참이었습니다.”
<그럼 이십 분 뒤에 나오세요. 콩이 데리고 병원 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에요. 차 가지고 갈 거니까 집 앞으로 나오시면 돼요.>
“아닙니다. 걸어가면 금방인데요.”
<어차피 가는 길이잖아요. 이따 봬요.>
인섭이 거절의 말을 늘어놓기 전에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윤아름은 다정한 만큼 군더더기가 없는 성격이었다. 그녀의 성격을 반의반만 닮아도 좋으련만.
인섭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이우연에게 보낼 문자를 다시 읽어 보았다.
고양이 사진을 보낸다는 문장을 지울까. 끝나면 잠깐 보자는 말을 덧붙일까. 아까 그 옷을 세탁해 드리겠다는 말을 할까. 아니, 괜히 또 이상한 쪽으로 분위기가 흐르면 어쩌지.
차에서의 기억이 떠올라 버린 인섭은 입을 손으로 가린 채 얼굴을 붉혔다. 한참 동안 핸드폰 화면을 보며 끙끙거리다가 결국 썼던 문장을 모두 지우고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잘 들어가셨습니까?」
메시지를 보내 놓고 인섭은 오도카니 서서 답을 기다렸다.
이우연은 쉬는 시간에 책을 읽거나 영화를 감상했다. 핸드폰을 손에 쥐고 시간을 보내는 타입이 아니었다.
“…….”
그래도 별다른 일이 없는 이상 답은 바로바로 돌아왔는데.
인섭은 핸드폰을 내려다보다가 포기하고 신발을 신었다. 이십 분 뒤에 내려오라고 했지만, 상대방을 기다리게 하는 것보다 자신이 기다리는 편이 나았기 때문이다.
계단을 내려가는 중에도 인섭은 핸드폰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역시 화가 난 걸까.
자신이 윤아름을 만나는 것을 이우연이 썩 반기지 않는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고양이를 보러 가는 것도 최소한으로 하고, 불필요한 연락은 하지 않았다.
사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인섭은 윤아름의 가족과 만나는 게 좋았다. 자신을 볼 때마다 밥은 먹었냐고 묻는 윤아름의 어머니도, 언뜻 무서워 보여도 다정한 마음을 가진 아버지도, 상냥하고 재치 있는 성격을 가진 윤아름도 모두 좋았다. 시끌시끌한 그들을 보면 자연스럽게 미국에 있는 가족들이 떠올랐다. 같이 식사를 하고 있으면 가족들과 함께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마냥 좋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인섭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로이스와 존의 거처만 정해지면 더 이상 윤아름과 연락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한국에 돌아온 것은 전적으로 이우연 때문이었다. 그와의 관계가 흔들리는 어떤 이유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쓰리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오롯이 혼자 만든 인간관계였다. 준 것보다 받은 게 많은 감사한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모두 정리하고 나면 자신에게 남는 건 결국 이우연 하나뿐이었다. 만에 하나 이우연과 헤어지게 되면 결국 자신에게 남는 건 아무것도 없겠구나, 하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좋은 생각 하자. 좋은 생각.”
인섭은 부정적인 방향으로 사고가 닿기 전에 주문을 걸듯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콩이를 만나는 거니 하얗고 몽글몽글한 털에 코를 묻고 꽉 끌어안아 줘야지. …윌, 보고 싶다. 눈물 날 것 같아. …안 돼, 좋은 생각. 좋은 생각.
한 계단씩 내려갈 때마다 나쁜 생각은 꾹꾹 밟으면서 인섭은 걸음을 옮겼다.
“어. 501호.”
낯익은 목소리에 인섭은 고개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어디가? 이 시간에? 그렇게 쫙 빼입고.”
계단을 올라오며 담배를 피우던 남자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말을 걸었다.
“약속이 있어서요. 안녕히 계세요.”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남자를 지나쳐 내려갔다. 인섭은 눈앞의 남자가 거북했다. 고양이 문제를 제외하고라도 말을 섞는 자체가 불편했다.
“연예인 친구 만나러 가나?”
연예인 친구라는 단어에 인섭은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앞에 연예인 차 서 있던데. 네 친구 아니야?”
“아, 네. 감사합니다.”
“야! 다음에 나 꼭 불러라. 알았지?”
인섭은 얼른 인사하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2층쯤 내려갔을 때 숨이 차서 가슴에 지근거리는 통증을 느꼈다. 낮과 비슷한 증상이었다. 천천히 숨을 깊게 몰아쉬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통증이 사라졌다.
정기 검진 일까지 조금 남긴 했는데. …언제 한번 시간을 내서 병원에 가 봐야 할 것 같았다.
인섭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무슨 일이지? 전화도 하지 않고. 서프라이즈 같은 건가. 지금 오면 잠깐 얼굴 보는 게 전부일 텐데. 고양이 조금만 보고 와서 같이 커피나 한잔하자고 할까. …뭔지 모르지만 일단 기쁘다.
일 층에 내려오자마자 인섭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우연이 탄 차는 눈에 띄지 않았다.
“어디 계신 거지.”
인섭은 핸드폰을 꺼냈다. 이우연에게 전화를 걸려는데 누군가 뒤에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
하마터면 핸드폰을 그대로 떨어트릴 뻔했다.
“뭘 그렇게 놀래. 사람 처음 보냐?”
전혀 뜻밖의 인물이 거기 서 있었다. 인섭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상대를 보다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까 봤는데 무슨 인사를 또 해. 됐어, 됐어.”
강영모가 손을 내저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뭘 어떻게야. 너희 사무실에 물어봤지. 흠, 아까 맞은 데는 좀 괜찮고?”
평소답지 않은 그의 말투에 인섭은 께름칙함을 느꼈다.
“네. 괜찮습니다.”
집 앞까지 찾아와 굳이 이런 걸 묻는 남자의 진의가 의심스러웠다. 사과를 하려면 자신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커피를 뒤집어쓴 이우연을 찾아가는 게 마땅했다.
“마음에 걸려서 말이야. 아까는 내가 좀 흥분을 해서. 너도 알잖아. 배우한테 작품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이야.”
인섭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라면 이해할 줄 알았다. 그래서 말인데, 잠깐 어디서 조용히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지금은 좀 곤란할 거 같습니다.”
지금이 아니더라도 강영모와는 언제 어디서건 조용히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왜? 어디 가려고?”
“선약이 있습니다.”
“누구 만나는데?”
인섭이 우물쭈물 대답하지 못하자 강영모가 아하, 하고 웃었다.
“여자 친구 있다고 했지. 내가 그때 괜한 오해를 했었네. 미안하게 됐어.”
“…….”
점점 더 불안해졌다. 여자 친구가 있다는 한마디에 대본으로 코피가 날 때까지 사람을 때리던 사람이 이제 와서 사과라니.
“그럼 잠깐만 얘기하고 가면 되겠네. 한 5분이면 되니까.”
강영모가 비싸 보이는 시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5분이면 되는 겁니까.”
“더 시간 내라고 붙들어도 못 내. 지금도 바쁜 시간 쪼개서 온 거라고.”
인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강영모와 대화를 하고 싶은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지만, 계속 이렇게 있다가는 윤아름과 마주쳐서 그녀에게 폐를 끼칠 것만 같았다. 윤아름은 은인이었다. 그녀에게 해가 될 만한 일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 몇 대 맞을 수도 있겠지만, 차라리 그렇게 해서라도 빨리 얘기를 끝내는 게 나았다.
“카페로 자리를 옮길까요?”
“미쳤어? 인간들 바글바글한 카페에서 얘기를 어떻게 하냐. 매니저 한다는 녀석이 생각이 그렇게나 없어.”
강영모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주차장 입구를 턱짓했다.
“잠깐 저기서 얘기하면 되겠네. 따라와.”
강영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인섭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의 뒤를 따라갔다.
어둑한 주차장에서 강영모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서 있었다.
“한 대 피울래?”
인섭이 작게 기침을 하는 모습을 보고도 강영모는 대단한 관용이라도 베풀 듯이 담뱃갑을 내밀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인섭은 조금 뒤로 물러서며 대답했다.
“어른이 주면 잔말 말고 받아야지.”
인섭은 하는 수 없이 강영모가 불까지 붙여 준 담배를 받아 들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요즘 많이 힘들지? 예전에 봤을 때보다 얼굴이 말이 아니네.”
“괜찮습니다.”
“이 바닥 일이 그렇지. 박봉에, 야근에. 안 그래?”
“…아닙니다.”
“아니긴. 돈 제대로 받으면 이런 곳에서 살고 있겠어? 하긴, 매니저 월급 모아서 서울에서 집 사기는 평생 불가능하겠다. 그치?”
인섭은 말없이 담배를 만지작거렸다. 강영모가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의도를 알 수 없어,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너 이우연하고 많이 친하지?”
“네?”
인섭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전에도 비슷한 질문을 들었던 터다. 여자 친구가 있다는 말을 믿지 못해서 찾아온 걸까.
인섭은 마른침을 삼키며 강영모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친하냐?”
“…….”
이건 또 무슨 함정일까. 인섭은 잠시 고민하다가 적당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제가 아직 부족해서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누가 그렇게 대답하라고 시키디? 그러니까 내 말은….”
강영모가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선이 진한 그의 얼굴에 음영이 드리워졌다.
“큰 거 한 장이면 되겠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강영모가 참나, 하고 담배 연기를 뱉으며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얘가 어울리지 않게 밀당을 하네. 그래, 그럼 두 장. 이만큼 주는 사람 없어. 두 장이면 되지?”
인섭은 제가 관용적인 표현에 약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일단 대충 넘기고 나중에 꼭 확인하곤 했다. 그런데 강영모 같은 사람을 상대할 때는 적당히 넘어갈 수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뭐가 두 장이라는 말씀이신가요?”
인섭이 신중하게 물었다. 말뜻을 되묻는 자체만으로도 몹시 화를 내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 터다.
“순진하게 생겨서 욕심은. 뒷정리 잘해서 물건만 잘 챙겨 갖고 나오면 세정에 실장 자리 줄게. 너도 알다시피 세정에서 실장 자리 꿰차려면 이 바닥에서 십 년을 굴러도 힘들어.”
무슨 물건을 갖고 나오라는 얘기인지 도통 알 수가 없어 인섭은 눈만 껌뻑거리다가 타들어 간 담배에 손을 데고 말았다.
“……!”
화들짝 담배를 떨군 인섭을 보며 강영모가 피식 웃음을 삼켰다.
“그렇게 좋냐? 하긴, 네가 언제 이런 제안 받아 보겠냐.”
인섭은 화끈거리는 검지를 엄지 끝으로 문지르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말씀은 감사한데, 저는 잠깐 임시로 도와 드리는 겁니다. 이번 달까지만 할 예정이라 매니저 일은 계속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럼 더 잘됐네. 어차피 나올 테니 물건 갖고 나오는 데 거리낄 것도 없잖아. 안 그래?”
“…무슨 말씀이신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강영모가 답답하다는 듯이 눈썹을 찌푸렸다.
“이우연이 갖고 있는 USB 가져오고, 당연히 자료 백업해 둔 거 있으면 책임지고 완벽하게 지워. 그리고 일단 그 안에 무슨 내용이 들었는지 알아 갖고 와.”
인섭의 커다란 눈에 당혹감이 스쳤다.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는 USB의 주인인 조 대리만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얘기를 강영모에게는 할 수 없었다.
“이제 좀 알아듣는 눈치네.”
강영모가 담배를 입가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이우연의 말대로였다. 강영모는 나쁜 짓을 많이 저지른 듯했다. 심지어 이우연의 예상보다 더 죄질이 안 좋은 모양이었다.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가 아니라, 밤이 되기 전에 여기까지 쫓아온 걸 보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인섭은 얼른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로 대답했다. USB를 가져갈 생각도 없었지만 가져갈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이우연이 강영모를 상대로 한 거짓 협박이 다 들통나고 말 것이다.
“이우연한테 들은 게 없다고?”
강영모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네. 없습니다.”
강영모가 손에 든 담배를 바닥에 내던졌다.
“하루에 열여덟 시간을 붙어 있는데, 그걸 모른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지껄여.”
금세 강영모의 목소리가 험악해졌다.
“얼마 생각하고 있는지 그냥 까놓고 말해. 귀찮으니까.”
“아닙니다. 정말 저는 아는 게 없어서 도와 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최대한 이 문제에는 관여하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게다가 슬슬 윤아름이 도착할 시간이었다. 조금 더 지체했다가는 강영모의 성격상 그녀에게 피해가 갈 확률이 컸다.
“아니면 우리 사무실 연습생 중에 괜찮은 애 하나 소개시켜 줄까? 특별히 원하는 애 있으면 한 번 하게 해 줄게.”
강영모의 입가에 저열한 웃음이 걸린다. 얼마간의 시간을 두고 그의 말뜻을 이해한 인섭은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그런 건 전혀 원하지 않습니다.”
“그럼 뭘 원하는데. 그냥 금액 부르라니까.”
아무리 거절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만큼 절실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무리 말씀하셔도 도와 드릴 수가 없을 거 같습니다. 저는 선약 때문에 이만 가 보겠습니다. 오늘 들은 얘기는….”
인섭은 헉, 하고 숨을 삼켰다. 등에 날카로운 극통이 퍼졌다. 강영모는 양손으로 인섭의 멱살을 움켜쥔 채로 벽에 밀어붙였다.
“오늘 들은 얘기는 뭐? 못 들은 걸로 하겠다고?”
강영모의 눈에 핏발이 섰다. 목에 닿은 그의 손이 소름 끼치도록 차가웠다. 등에서 올라오는 숨 막히는 고통에 인섭은 기침을 하며 강영모의 손을 뿌리치려고 버둥거렸다. 강영모가 힘을 주어 인섭을 몇 번 더 벽에 있는 힘껏 들이박았다.
“사람이 좋은 마음으로, 어? 시발, 어디 좆같은 새끼가, 니까짓 게 뭐라도 되는 줄 알아!”
강영모가 인섭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인섭의 가슴 부근을 발로 걷어찼다. 인섭이 밭은기침을 내뱉었지만 강영모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너 같은 거 쥐도 새도 모르게 매장시켜 버릴 수 있어. 이 업계에 다시는 발도 못 붙이게 할 줄 알아!”
인섭이 가슴을 움켜쥐고 몸을 웅크렸다.
“쇼 그만해라. 그 정도 맞고 안 죽는다. 새끼야.”
강영모가 구둣발로 인섭의 이마를 툭툭 걷어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숨소리가 심상찮게 변하는 인섭을 보고 그의 표정이 굳었다.
“야. 야. 일어나. 일어나 보라니까.”
강영모가 인섭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억지로 몸을 세웠다. 새하얗게 질려 식은땀으로 흥건한 인섭의 얼굴을 확인한 그가 이런 썅, 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야! 너 왜 그래? 나 때문에 그런 건 아니지? 설마 그거 맞고, 시팔.”
강영모가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꺼냈다. 그사이에 인섭이 무너지듯 바닥에 쓰러졌다.
“하필 재수가 없으려니까.”
어디론가 전화를 걸려던 강영모가 멈칫하고 인섭을 내려다보았다.
“흐으…, 하아….”
가슴을 움켜쥐고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이 얕게 호흡하는 인섭의 모습에 그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차장 안에 CCTV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그는 인섭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마지막 기회야. 잘 들어. USB 가져온다는 대답만 하면 바로 병원에 전화해 줄 거야. 아니면 넌 여기서 혼자 뒤지는 거고.”
인섭이 고개를 내저었다. 고여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바닥에 떨어졌다.
“그럼 나도 널 도와줄 수 없을 거 같네. 오매불망 충성하는 이우연에게 도와 달라고 해 보든가.”
강영모가 인섭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멀찌감치 내던지고는 그대로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흐으….”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진 후에야 인섭은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숨을 들이켜려고 해도 가슴이 답답해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약통을 주머니에서 꺼내 뚜껑을 여는데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몇 번이나 헛손질을 했다. 간신히 뚜껑을 열었지만, 약이 바닥에 와르르 쏟아졌다.
“읏….”
약을 주우려다가 인섭은 그대로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 누군가 억지로 목구멍에 커다란 공을 쑤셔 넣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졌다.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눈앞의 모든 광경이 흐릿해졌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직감이 들었다.
이우연에게 연락을 해야 했다. 그 생각뿐이었다. 이 근방까지 왔을 윤아름에게 연락을 해서 도움을 청하는 게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이번만큼은 최선이 아닌 이우연을 택하고 싶었다.
인섭은 저 멀리 떨어진 핸드폰을 향해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몇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인데 닿을 수 없는 곳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오늘 날씨가 좋네요.’
이상하게 그렇게 말하던 이우연이 떠올랐다. 풋풋하고 간지러운 웃음을 머금은 눈과 설핏 들뜬 듯한 목소리가….
벨 소리가 들렸다. 전화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 의식이 점점 멀어져 갔다. 어디선가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와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어둠이었다.
병실은 특유의 냄새를 가졌다.
그건 오랫동안 병원 생활을 해 본 사람만이 갖는 기억이었다. 혹자는 소독약 냄새와 약 냄새가 뒤섞인 청결한 냄새를 기억했고, 혹자는 오물 냄새와 병자의 몸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를 기억했다. 인섭에게는 그 무엇도 아닌 꽃 냄새였다. 병원을 무서워하는 아들을 위해 어머니는 병실에 항상 꽃을 가져다 놓곤 했던 터다. 의식이 돌아올 때마다 꽃향기를 맡으면 이번에도 살아 있구나, 하는 안도가 먼저 들었다.
“…….”
이번에는 꽃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눈을 뜨고도 한참 동안 이곳이 어디인지 생각해야 했다.
“인섭 씨. 정신이 들어요?”
인섭이 깬 기척을 알아챈 윤아름이 보조 의자에서 일어섰다.
“여기 병원이에요. 인섭 씨 쓰러져 있는 거 발견해서 제가 구급차 불렀어요. 전화 걸었는데 받지는 않고, 벨 소리가 주차장에서 들려서 가 봤더니 쓰러져 계시더라고요.”
“…죄송합니다.”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서 인섭은 저를 부르는 윤아름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뭐가 죄송해요. 아파서 쓰러진 사람이 사과를 왜 해요.”
“콩이는요?”
윤아름의 목소리 뒤에 개가 짖는 소리도 들렸었다. 윤아름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이 와중에 콩이를 찾아요? 걔는 아버지가 와서 아까 데리고 가셨어요. 안 그래도 아버지가 인섭 씨 눈 뜨면 연락하라고 했는데 문자 한 통 넣어 드려야겠다. 아버지도 걱정 많이 하셨어요.”
윤아름이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보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괜히….”
“괜찮다니까요. 아, 아버지께 전화 왔다. 잠시 통화 좀 할게요.”
윤아름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
“네. 아버지. 아직 정확한 검사 결과는 안 나왔는데 의사 말로는 스트레스성이래요. 걱정 마세요. 당연히 괜찮을 거예요.”
통화를 하는 중에 눈이 마주치자 윤아름이 싱긋 웃어 보인다. 괜찮을 거라는 말이 누구를 위한 위로인지 인섭은 바로 깨달았다.
“이따가 다시 연락드릴게요.”
통화를 마치고 나자 윤아름이 인섭을 보며 말을 잇는다.
“스트레스성 질환은 현대인이라면 다들 하나쯤 갖고 있잖아요. 저도 공부하느라 요즘 위염을 달고 살거든요.”
아마 의사에게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인섭은 애써 모른 척해 주는 그녀의 다정한 배려가 고마웠다.
“정말 감사합니다.”
인섭은 자신을 걱정해 주는 상대에게 진심을 다해 인사했다.
“그래도 일은 당분간 쉬시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이번 달까지만 할 생각입니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돈도 좋지만 건강이 최우선이에요.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마무리할게요.”
돈 때문에 일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 사정을 일일이 설명할 수 없었다.
“가족분들께는 연락 안 하셔도 돼요?”
인섭의 가족이 다 미국에 있다는 사실을 전에 한번 얘기한 적이 있었다.
“…걱정 끼쳐 드리고 싶지 않아서요.”
쓰러진 사실을 부모님이 알게 된다면 당장 미국으로 돌아오라고 할 것이다. 다른 문제에는 한없이 자상하고 여유로운 부모님이었지만, 아들의 건강과 관련된 문제에는 몹시 단호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모님을 또다시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제 가 보셔도 됩니다. 많이 늦었는데, 얼른 돌아가세요.”
“다음 보호자랑 교대해야죠. 어떻게 환자를 두고 그냥 가요. 이 기회에 인섭 씨 여자 친구분 뵙겠네요.”
그녀가 장난스럽게 던진 말에 인섭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미묘한 침묵 뒤에 숨은 진의를 알아챈 윤아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자 친구분은 안 부르세요?”
“…못 오실 거 같습니다.”
이우연을 불렀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도 한번 연락은 해 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나중에 알게 되면 더 서운해하실 수도 있잖아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알리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인섭이 정색하며 고개를 내젓자 윤아름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아까보다 몇 배는 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이게 괜히 제 쓸데없는 생각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아니라고 말씀하셔도 되고, 절대로 어디 가서 말할 생각도 없지만….”
그녀답지 않게 서두가 장황해서 인섭은 일순 긴장했다.
“사귀시는 분, 혹시 연예인이신가요?”
“……!”
바로 부정해야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다. 당혹감으로 희게 질린 인섭의 얼굴을 본 윤아름이 바로 뒷말을 덧붙였다.
“걱정 마세요. 어디 가서 얘기할 것도 아니고, 그리고 누구인지 궁금하지도 않고요.”
그녀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제가 뭔가 그런 티를 냈습니까.”
항상 조심하고 조심했는데 저도 모르게 무의식중에 그런 티를 내지는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아니요. 전혀요. 그냥 전부터 그런 건 아닐까 하고 혼자 생각했어요. 제가 눈치는 좀 빠른 편이라.”
전에 인섭이 한번 윤아름의 집 앞으로 찾아온 적이 있었다. 좀 늦은 시간이었는데 직접 얼굴을 뵙고 드릴 말씀이 있다 해서 윤아름은 적잖이 의아해했다. 집 앞 카페에서 만난 인섭은 자신이 윤아름 씨의 호의를 이용해서 나쁜 행동을 했다며 사과했다. 사정이 있어 모든 상황을 말씀드릴 수 없지만, 누군가에게 윤아름 씨가 고양이를 안고 있는 사진을 보여 드리며 자신이 사귀는 상대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한 번도 자신의 사진을 보낸 적이 없어 윤아름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어떤 사진이냐고 물었다. 인섭은 덜덜 떨면 로이스의 사진을 내밀었다. 정확히 말하면 윤아름이 로이스를 안고 있어서 그녀의 손이 나온 사진을.
직접 뵙고 사과드리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찾아왔다고 인섭은 고개를 숙이며 몇 번이나 사과했다.
얼굴도 아니고 손만 보여 준 건데, 심지어는 이름도 알려 주지 않았으니 굳이 찾아와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고 지나갈 일이었다. 그런 일을 사과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인섭을 윤아름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마나 덜덜 떠는지 사과를 받는 자신이 인섭을 괴롭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때도 윤아름은 기분 나쁘다기보다 굳이 여자 친구가 있다는 사람이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먼저 들었다. 그러다가 좀 특수한 상황이겠거니 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고 넘겼다. 그런데 이번 일까지 겹치자 머릿속에 남아 있던 의문이 아귀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다만….”
윤아름이 한숨을 내쉬며 인섭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다정한 얼굴에 수심이 언뜻 스쳤다.
“오지랖일 수도 있겠지만, 좀 걱정되긴 하네요.”
처음에 그를 봤을 때는 책을 읽는 취향에 관심이 가서 말을 걸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 다른 의미로 마음이 쓰였다.
최인섭은 천성이 다정하고 선량한 사람이었다. 몇 마디 나눠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이 세상을 얼마나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인섭의 커다랗고 말간 눈은 순진무구한 동물을 연상시켰다. 아무런 의도 없이 사람을 대하는 그 태도 때문에 특히 그랬다.
연예부 기자 일을 하면서 윤아름은 수많은 사람을 만나 왔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 많이 일어나는 업계였다. 그곳에서 이런저런 일을 겪고 퇴사까지 결심한 윤아름으로서 인섭이 걱정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일하면서 선배한테 들은 우스갯소리가 있어요. 이쪽 일 하면서 연예인이랑 못 사귀어 본 사람은 이류, 연예인이랑 사귀어 본 사람은 삼류라는.”
“일류는요?”
“이쪽 일 안 하는 사람이죠.”
윤아름의 농담에 인섭이 힘없이 웃었다. 연예인이랑 사귀는 거 아니라는 말은 이미 몇 번이나 들어온 터다.
“사실 아무한테도 말 안 했던 건데, 저도 일 그만두기 전에 사귀던 사람이 배우였어요.”
“…….”
인섭이 눈을 크게 홉떴다.
“인터뷰하다가 몇 번 연락 주고받고, 차 마시고 술 마시다가 눈 맞고. 되게 흔한 스토리였죠. 결말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갑자기 연락이 끊어졌어요. 작품 들어가면 연락 뜸해지는 건 다반사라 크게 신경 안 썼는데, 어느 날 그 사람 결혼 소식이 연예계 일면에 뜨더라고요. 전 그때만 해도 내가 언제 그 사람이랑 결혼 날짜를 잡았지 했다니까요. 기사 클릭해 보고 딴 사람이랑 하는 거 알았지만.”
가벼운 투로 말했지만, 전혀 그럴 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많이 힘드셨겠습니다.”
“네. 많이 힘들었어요. 열심히 운동해도 잘 안 빠지던 살이 한 달 만에 10kg이 쭉 빠졌을 정도니까요. 역시 맘고생 다이어트가 최고라더니.”
어떤 위로를 건네야 할지 몰라서 인섭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입을 뗐다.
“그런 사람과 결혼하지 않으셔서 다행입니다. 더 좋은 분 만나실 겁니다.”
윤아름은 기자 생활을 하며 사람이 어떤 식으로 제 의도를 포장하는지 숱하게 지켜봐 왔다. 방금 최인섭의 말에는 어떤 가식도 거짓도 섞여 있지 않았다. 순수한 감정이 커다란 눈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당연하죠. 그놈보다 못한 놈 만나기가 더 힘들걸요. 그러니까 주변에 좋은 놈 있으면 소개시켜 주세요.”
“네. 찾아보겠습니다.”
진지하게 대답하는 인섭을 보며 윤아름은 웃음을 터트렸다. 어떤 농담도 그냥 넘어가는 법 없이 진지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그것이 최인섭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고맙습니다. 힘든 얘기인데 일부러 저한테 해 주신 거.”
어떤 의미로 윤아름이 본인의 좋지 않은 연애사를 드러냈는지 인섭은 알 수 있었다.
“그냥 조금 걱정돼서요. 이런 상황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와 주지 못하면 힘들잖아요. 미안해요. 아픈 사람 붙들고.”
“아닙니다. 저야말로 자꾸 폐만 끼치고.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갚긴요. 빨리 나으셔서 갚아야죠.”
“네. 빨리 나아서 갚겠습니다. 아, 병원비부터 갚겠습니다. 계좌 번호 문자로 보내 주세요.”
“뭐가 그렇게 급해요. 설마 인섭 씨 병원비 떼먹고 도망갈 계획 있어요?”
“없습니다. 절대 없어요.”
“그럼 퇴원하고 갚으세요.”
진지한 표정으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인섭의 모습에 윤아름은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인섭은 혹시 제가 무슨 실수를 하지 않았는지 조심스럽게 윤아름을 살폈다.
“인섭 씨 혹시 강아지 같다는 말 들은 적 없어요? 난 왜 인섭 씨가 고개 끄덕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지.”
“몇 번….”
그렇지 않아도 오늘 이우연도 그 비슷한 말을 하긴 했다. 인섭 씨, 개 같아요, 라고. 그 말을 하며 웃던 이우연의 눈매가 떠올랐다. 불현듯 그가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우리 콩이가 인섭 씨를 많이 좋아하나 봐요. 동류를 알아보나.”
“저도 콩이 좋아합니다. …동류는 아니지만.”
인섭이 작게 덧붙인 말에 윤아름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흡사 말하는 강아지를 바라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쑥스러움에 고개를 돌리던 인섭의 눈에 벽에 걸린 시계가 들어왔다.
“들어가 보세요.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어떻게 혼자 두고 가요. 아직 검사 결과 나온 것도 아닌데.”
“결과 나오려면 아마 내일이나 돼야 할 겁니다. 아는 친구 부르겠습니다. 그리고 아서랑 아이작, 오늘이 마지막이잖아요. 저 대신 잘 지내라고 인사 좀 전해 주세요.”
“당연히 잘 지낼 거예요. 그래도 친구분 오실 때까지 제가 있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연락하면 금방 올 겁니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녀가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하자 인섭이 그녀를 재촉했다.
“그러면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셔야 해요. 아셨죠?”
인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검사 결과 나오면 알려 주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윤아름이 병실을 나가기 전에 영 내키지 않는지 한 번 더 뒤를 돌아보았다. 인섭은 얼른 가 보라고 손짓했다. 얼마 뒤 병실 문이 닫혔다.
인섭은 한숨을 길게 쉬며 침대에 도로 누웠다. 강영모에게 맞은 배가 욱신거리며 쑤셨다. 환자복을 들춰 보자 불그스름하게 멍이 남았다.
넘어졌다면 안 믿겠지.
이우연에게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까마득하기만 했다. 그러다 문득 머리를 스친 생각에 침대 옆에 있는 옷장을 뒤져 핸드폰을 찾았다. 혹시 이우연에게 연락이 와 있지는 않을까 했던 것이다.
“바쁘신가….”
잘 들어갔느냐는 문자에도 답이 없었다. 인섭은 망설이다가 이우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최인섭입니다. 내일 병원 진료가 있는 날인데 제가 깜빡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내일은 출근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대표님하고 강우한테는 제가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모레 뵙겠습니다.」
김 대표와 김강우에게도 차례대로 문자를 보냈다. 두 사람에게 바로 비슷한 내용이 답이 돌아왔다. 일은 신경 쓰지 말고 검사 잘 받고 푸욱 쉬라고.
하지만 이우연에게는 이번에도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많이 바쁘신가.”
인섭은 핸드폰을 도로 캐비닛에 두고 손으로 심장 부근을 꾸욱 눌러 보았다. 아까 같은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인섭은 몇 번 더 심장 부근에 손을 대고 숨을 깊게 들이켰다가 내뱉었다.
오래 살지 못할 것이란 말은 숱하게 들었다. 그래서 어릴 때는 신을 믿지 않았다. 신이 존재한다면 처음부터 자신을 이렇게 불량품으로 만들었을 리 없다고 생각한 터다. 그런 아들의 생각을 알면서도 어머니는 구태여 믿음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잠들기 전에 항상 아들의 머리맡에서 같은 기도를 했을 뿐이다.
‘주님. 제게 이 아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진심 어린 기도를 들으며 자란 아이는 점차 신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불량품인 자신을 이토록 사랑해 주는 부모님을 만나게 해 주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인섭은 가끔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했다. 주변 사람들의 안녕과 평온을. 자신을 위한 부탁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지금도 받은 것이 이토록 많은데, 더 욕심을 내었다간 벌을 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인섭은 두 손을 모으고 오랜만에 자신을 위한 기도를 시작했다.
“건강하게 살고 싶습니다. 오래오래, …이우연 씨랑 같이.”
마지막에 덧붙인 말이 욕심 사납게 들릴까, 인섭은 일부러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솔직한 마음이었다.
아까 쓰러질 때,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보다는 다시는 이우연을 만나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먼저였다.
‘인섭 씨.’
인섭은 이우연이 제 이름을 불러 주는 순간을 좋아했다. 본인은 의식하는지 모르겠지만, 이우연은 인섭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눈가를 살짝 접어 웃곤 했다. 보일 듯 말 듯 한 그 눈웃음을 알아챈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우연에 관한 것이라면 뭐든 알아내려고 잠도 자지 않고 그의 뒤를 따라다닌 적도 있었다. 누구보다 그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요즘은 자신이 아는 이우연의 모습이 극히 일부였음을 깨달아 가는 중이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그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설레고 행복했다. 독점욕과도 맞닿아 있는 감정이었다.
첫사랑이었다. 하지만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던 풋풋한 그런 감정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그의 인생에 속하고 싶었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선명한 욕심이었다.
배 부근이 사르르 아파 왔다. 인섭은 손으로 배를 문지르며 자리에 누웠다. 약 기운 때문인지 눈가가 슬슬 무거워졌다.
강영모는 어떻게 해결하지. 내일 검사 결과가 좋지 않으면 어쩌지. 이우연은 왜 문자를 보내지 않는 걸까. 보고 싶은데, 무서워….
여러 가지 생각들이 의식 너머로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어렴풋이 시선을 느끼고 어라, 하고 눈가를 찌푸렸다.
“깼어요?”
머리맡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서 눈을 떴다. 보조 의자에 앉아 있던 이우연이 웃는다.
“어….”
너무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병원에서 연락받았어요. 몸은 좀 괜찮아요?”
평상시와 다름없는 차분하고 조용한 음성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우연만 바라보았다.
“어쩌다 그랬어요.”
“아, 그게, 그러니까…. 너, 넘어져서….”
차마 강영모에게 맞고 쓰러졌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이렇게 자꾸 쓰러져서 어떡해요.”
“죄송합니다.”
“아픈 게 인섭 씨 잘못은 아니잖아요.”
이우연이 흐트러진 시트를 고쳐서 덮어 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조금 귀찮긴 하네요.”
“…….”
“뻑하면 아프고, 계속 신경 써야 하고.”
시트를 덮고 있는데도 몸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섹스도 마음대로 못 하는 것도 짜증 나요. 신경 쓸 게 너무 많아.”
그렇게 말해 놓고 이우연은 자세를 고쳐 앉는다. 그가 인섭을 직시했다. 웃는 눈이었지만, 힐난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슬슬 물려요, 이런 거.”
머릿속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언젠가 이우연이 혹시 이런 말을 하지는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있었다. 아니, 사실 늘 해 왔다. 애초에 이우연은 자신에게 어울리는 상대가 아니었다. 자신은 동화 속의 주인공이 아니었고 현실은 동화도 아니었다.
“그만해요.”
같이 저녁이나 먹을까요? 하고 묻는 듯이 평연한 어투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간신히 입술을 움직였다.
“…제가 뭔가… 잘못했나요.”
“아니요.”
“그럼 왜 갑자기….”
이우연이 벗어 둔 재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우연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제, 제 건강 때문에 그런 거라면 노력하겠습니다. 식사도 더 많이 하고, 운동도 하고, 필요하면 다, 다른 치료도 받고요.”
상상 속의 모습보다 몇 배는 더 구질구질하게 남자를 붙들었다. 이우연이 눈을 내리깐 채로 나른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인섭 씨를 좋아하는 이유가 뭐인 거 같아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눈을 깜빡거리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모르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사실이었다. 이우연이 자신을 좋아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여자도 아니고,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것도 아니고,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뛰어난 재능도 잘하는 것도 하나 없었다. 그래서 불안했다. 이우연이 저를 좋아하는 이유를, 스스로도 납득하지 못해서.
“나도 모르거든요, 그 이유.”
이우연이 옷자락을 붙든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 냈다. 그의 아름다운 눈이 나뭇가지에 걸린 여윈 달처럼 구부러졌다.
“그러니까 싫어진 이유도 굳이 내가 알 필요가 있나.”
“우연 씨….”
이우연이 병실을 걸어 나갔다. 손목에 연결된 수액을 떼어 내고 맨발로 병실 밖으로 달려갔다. 이우연의 뒷모습이 보였다. 눈물이 빠듯하게 차오르고 숨이 막혔다.
그를 불러 세우고 싶었지만, 누가 들을까 봐 무서워서 차마 이름을 부르지도 못했다.
“잠깐만요, 저기, 잠깐….”
점점 이우연의 모습이 멀어졌다. 이대로 사라지면 끝이란 생각이 들었다. 복도 끝으로 이우연이 몸을 돌렸다. 그를 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
인섭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고 맥이 널뛰었다.
“하아….”
숨을 내뱉으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요한 병실에는 가습기의 진동 소리만 가득했다. 인섭은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가, 모든 게 꿈이었음을 깨달았다. 꿈이라는 사실을 자각했지만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괜찮아. 꿈이니까….”
인섭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 어릴 때도 악몽을 자주 꾸곤 했었다. 병원에 가기 전날이나, 방학이 끝나는 날. 불안은 악몽을 구체적으로 빚어냈다.
인섭은 시트를 끌어다가 어깨까지 덮으며 괜찮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꿈속에서 보았던 이우연의 표정과 눈빛, 목소리가 또렷하게 떠올랐다.
인섭은 캐비닛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새벽 두 시였다. 통화를 하기에 늦은 시간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꿈은 꿈일 뿐이라는 사실을 이우연의 목소리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지도 않았는데 달칵, 하고 통화 모드로 넘어갔다.
“여보세요.”
<…….>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인섭은 통화가 이어진 것인지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여보세요?”
<…듣고 있어요.>
낮게 깔린 이우연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늦은 시간인데….”
<늦은 시간이죠.>
이우연이 인섭의 말을 곱씹듯 되뇐다. 인섭은 조금 당황해서 바로 대답했다.
“주무시는 거면 나중에 다시 하겠습니다.”
<안 잤어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자다 깬 목소리가 아니라 명확하고 깨끗한 형태를 갖춘 음성이었다.
신이 내린 배우에게는 흔히들 세 개의 조건이 필요하다고 했다. 마스크, 연기력, 그리고 목소리.
특히 이우연의 목소리는 신의 축복을 받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상대의 감정을 필요한 만큼 휘저을 정도로.
<듣고 있어요. 말해요.>
자신이 전화기 너머에 있음을 이우연이 한 번 더 고지했다. 인섭은 핸드폰을 쥔 채로 천천히 숨을 삼켰다. 나약하게 굴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이우연의 음성에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우연 씨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했습니다.”
인섭은 천천히, 그러나 솔직하게 제 속내를 고백했다. 이번에는 저쪽에서 천천히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미치겠군. 혼잣말 같은 이우연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희미한 분노가 묻어나는 그의 음성에 인섭은 일순 당황했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요. 혹시 아직 복수가 끝나지 않은 게 아닌가, 하는.>
그가 제니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채고 인섭은 그런 거 아닙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가 왜 갑자기 이런 얘기를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만에 하나 복수하고 있는 거면 그만해도 돼요. 벌은 받을 만큼 받았으니까.>
“정말 아닙니다. 제가 왜 이우연 씨에게 그런 짓을 합니까.”
<그래요. 인섭 씨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어딘지 모르게 책망하는 듯한 말투에 인섭은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한 겁니다. 정말이에요.”
늦은 시간이긴 했다. 이 시간에 인섭이 먼저 전화를 건 적은 처음이었다. 혹시 대단한 무례를 저지른 것인가 싶어 덜컥 겁이 났다.
<목소리 듣고 싶은 거면 얌전히 집에서 내가 준 시디나 듣지 그래요.>
냉랭한 음성이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 연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지 않으려고 하는데 자꾸 꿈속에서 본 이우연의 모습이 떠올랐다. 인섭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참아 냈다.
오늘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강영모 일은 아직 해결한 상태도 아니었다. 그 인간의 성격이라면 이후에도 나타나 패악을 부릴 게 분명했다. 윤아름이 해 준 이야기도 신경 쓰였다. 연예인과 사귀고 있는 자신은 삼류였다. 삼류 중에서도 최악이었다. 만약 이우연의 결혼설이 발표되어도 그 주인공이 자신일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테니까.
무엇보다 가장 두려운 건 자신의 상태였다.
검사 결과가 나오지 않았지만, 어쩌면 다시 수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나? 그럼 언제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는 걸까. 수술은 성공할 수 있나? 성공하고 돌아와도 평범한 사람처럼 지내지 못할 수도 있는데, 그런 자신을 이우연이 기꺼워할까. 번거롭고 귀찮다고 여기지는 않을까.
마른 잎에 붙은 불처럼 불안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번져 갔다. 그래서 이우연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지금의 상황을 알지 못하니 다정하고 상냥한 위로는 기대하지 않아도, 특유의 짓궂은 농담이라도 걸어 주길 바랐다.
<더 할 말 없어요?>
이우연이 물었다.
“…늦은 시간에 괜히 불편하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주무세요.”
인섭은 우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 얼른 통화를 마쳤다.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사무실 건물 지하에서 이우연이 놀란 인섭을 다정하게 끌어안으며 달래 주던 게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갑작스러운 그의 태도 변화에 인섭의 서러움은 배가 되었다.
“울지 말아야지. 별일도 아닌데….”
전에는 이보다 더 심한 일도 많았다.
이우연에 관해 알아내려고 몇 날 며칠 그의 뒤를 따라다니다가 스토커로 오해받고 신고를 당한 적도 있고, 팬들에게 떠밀려 넘어져서 손가락에 금이 간 적도 있었고, 식비를 아끼려고 상태가 좋지 않은 빵을 먹었다가 식중독으로 쓰러진 적도 있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지금이 나았다. 머리로는 그 사실을 아는데 밀려드는 서러움은 도저히 어쩔 수가 없었다. 금세 환자복 소맷자락이 눈물로 흠뻑 젖었다.
세수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벨 소리가 울렸다. 이우연이었다. 인섭은 얼른 눈물을 닦아 내고 전화를 받았다.
“…말씀하세요.”
<울었어요?>
“아닙니다. 안 울었습니다.”
보일 리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인섭은 또 한 번 눈가를 닦았다.
<나 없는 데서 울지 마요. 나 돌아 버리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네. 알겠습니다.”
이우연과 약속한 일이었다.
<어디예요?>
인섭은 당황했다. 늦은 시간이었다. 뭘 하고 있었느냐가 아니라 어디 있냐는 질문을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인섭은 잠시 얼어붙었다가 가까스로 입을 뗐다.
“…자려던 참이었습니다.”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솔직히 말할 수도 없었다.
낮에 커피를 뒤집어쓴 이우연의 눈빛이 일시에 돌변하는 모습을 봤다. 이번 일을 이우연이 알게 되면 벽돌이 아니라 해머로 강영모를 내리찍을 게 분명했다.
인섭의 답을 들은 이우연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혹시 뭔가 알고 있는 걸까.
심장이 바싹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선고를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인섭은 무거운 침묵에 동조했다.
<책 읽어 줄게요.>
뜻밖의 말이 돌아왔다.
“지금요?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다며. 누워서 들어요. 핸드폰 스피커폰으로 돌려놓고.>
인섭의 거절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이우연은 지시 사항을 늘어놓았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여서 인섭은 하는 수 없이 이우연이 시키는 대로 핸드폰을 스피커폰으로 돌려놓고 침대 옆에 내려놓았다.
<음량 키우고.>
인섭은 얼른 볼륨을 최대한으로 올렸다. 6인실이 아니라 1인실에 입원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움직이는 기척이 들렸다. 책을 고르는 모양이었다. 책장 앞에 선 이우연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가 책을 골랐는지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한 문장을 채 읽기도 전에 인섭은 그가 어떤 책을 골랐는지 알 수 있었다. <무진기행>.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읽어 소설의 도입부를 통째로 외운 소설이었다.
<나는 그들이 시골 사람들답지 않게 낮은 목소리로 점잔을 빼면서 얘기하는 것을 반수면 상태 속에서 듣고 있었다.>
이우연의 우아하고 유연한 음성이 소설의 문장 사이에 유유히 흘러들어 갔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문장을 통째로 욀 만큼 좋아하던 소설이 낯설게 다가왔다.
이우연은 다정한 위로를 건네지도 달콤한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한 음성으로 책을 읽어 줄 뿐이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한다고 했던 책을 골라서.
간간이 책장을 넘기는 소리와 숨소리가 멎었다. 남자의 음성을 통해 해체와 결합이 반복되는 말들이 고스란히 귓가에 닿았다. 그러다 문득 왈칵 몰려드는 감정에 인섭은 어쩔 줄 몰라 시트를 움켜쥐었다.
<듣고 있어요?>
도중에 던져진 물음에 인섭에 네, 하고 대답했다. 다시 이우연은 책을 읽어 주기 시작했다.
더 이상은 좋아지지 않을 만큼, 충분한 마음이라고 생각했는데.
인섭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인섭은 컵을 들어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한 컵을 모두 비웠지만 갈증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서 테이블에 비치된 물통에서 물을 받아 왔다. 다시 물컵을 반쯤 비우고 나서야 그는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인섭은 몇 번이나 카페의 출입문을 힐끔거리며 확인했다. 긴장한 탓인지 손끝이 저릿했다.
“스트레스 받으면 안 되는데.”
인섭은 애써 좋은 생각을 하려고 노력하며 손을 쥐었다 펴는 걸 반복했다. 오늘 검사 결과를 들었다.
‘스트레스성입니다.’
차트를 한참 심각하게 들여다보던 의사가 내뱉은 말에 인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이네요.’
혹시 심장에 문제가 생겨 수술을 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하루 종일 안절부절못한 것이다. 하지만 인섭의 대답을 들은 의사의 표정은 차갑게 굳었다.
‘환자분은 지금 굉장히 잘못된 생각을 하고 계시네요.’
그때부터 의사의 폭격이 시작되었다. 의사는 스트레스가 심장 질환에 가져오는 문제와 인섭의 특수성, 현재의 몸 상태,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인섭은 두 손을 모으고 꾸중 듣는 학생처럼 의사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절대로 스트레스 받지 말아요. 알겠어요? 현대인에게 가장 어려운 숙제라는 거 알지만, 환자분은 특히 조심하셔야 해요. 본인이 얼마나 특수한 상황인지 제일 잘 알 거 아니에요. 두어 달은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지내봐요.’
‘그래도….’
‘굶어 죽는 거 아니면 일도 당분간 쉬어요. 학생이면 학교도 쉬고. 스트레스 요인을 있는 대로 다 피해요.’
그렇게 말하는 의사의 목소리가 얼마나 매섭던지 인섭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로도 의사의 매서운 연설은 근 십 분가량이나 계속되었다.
인섭은 입술이 바싹 마르는 느낌에 다시 물을 마셨다. 그러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 가져온 물건을 확인했다. 누가 보면 미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아까부터 계속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빼기를 반복했다.
“괜찮을 거야.”
인섭은 작게 중얼거리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지금 자신의 작태를 본다면 의사는 왜 본인의 말을 정반대로 행하냐고 노발대발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방법뿐이었다. 여기서 끝내지 않으면 분명히 앞으로도 계속….
도어 벨이 찰랑거리며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자를 눌러쓰고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짜증이 잔뜩 서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인섭을 발견하고 걸음을 옮겼다.
“너 미쳤냐? 아주 니가 제정신이 아니야. 감히 나를 오라 가라 해?”
강영모가 자리에 풀썩 주저앉으며 목소리를 낮춰 인섭을 위협했다. 주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이쪽으로 향했다. 강영모도 연예인이었다. 모자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해도 당연히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외모였다.
“5분도 안 걸립니다.”
인섭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테이블 아래에 마주 잡은 손끝은 달달 떨렸다.
“3분.”
강영모가 금빛으로 번쩍이는 롤렉스를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인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커피도 한 잔 주문해 와. 아메리카노 뜨거운 거.”
“커피 주문하면 시간 걸립니다.”
강영모가 이놈 봐라, 하는 표정으로 선글라스를 벗었다.
인섭이 강영모의 전화번호를 알아내서 전화를 걸었을 때, 강영모의 첫 반응은 놀라움이었다. 안 죽고 살아 있었네? 하는 이죽거림에 인섭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인섭이 약속 장소와 시간을 지정해서 나오라고 했을 때, 강영모는 자기가 거길 왜 나가냐고 소리를 빽 질렀다. 인섭은 그럼 마음대로 하세요, 후회하실 겁니다,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지금이었다.
“보기보다 맷집 있네. 하하하. 하긴, 맷집 없으면 이우연 그 새끼 밑에서 매니저 일 하겠냐.”
인섭은 강영모가 뭐라고 떠들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주머니에서 오늘 이 자리에 나온 목적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이게 뭐야.”
“USB입니다.”
강영모의 얼굴에 화색이 번졌다.
“하하하. 새끼. 보기보다 똘똘하네. 진작 이랬으면 피차 귀찮지 않고 얼마나 좋아.”
강영모가 웃으면서 테이블에 놓인 USB에 손을 뻗어 낚아챘다. 그러고는 주변을 둘러보고 인섭에게 나직하게 속삭였다.
“뒤처리는 다 했고? 이우연 컴퓨터나 그런 것도 다 확인했어? 확실해? 아니, 일단 내가 이 안에 든 내용부터 확인하고 나중에 연락할 테니까….”
인섭은 말없이 제 핸드폰을 내밀었다. 화면에서 재생 중인 영상을 보던 강영모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이게 뭔데.”
“USB에 담긴 영상입니다.”
“그러니까 이걸 왜…! 썅, 왜 이걸 가져왔냐고.”
주변의 시선을 느낀 강영모가 목소리를 낮췄다. 테이블 간격이 넓어 대화가 들리지 않겠지만, 강남 대로변에 있는 카페였다. 아무리 강영모가 안하무인이라도 이목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인섭의 핸드폰에는 강영모가 인섭을 쓰러질 때까지 구타하고 주머니를 뒤져 인섭의 핸드폰을 내던진 영상이 돌아가고 있었다. 인섭은 영상을 정지하고 강영모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 부탁을 들어주시지 않으면, 이 영상을 인터넷에 올리겠습니다.”
퇴원을 하고 집으로 올라가려던 인섭은 주차장에 약통을 떨어트린 걸 떠올리고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구석에 떨어진 약통을 찾고 바닥에 떨어진 약을 주워 담았다. 혹시 길고양이가 주워 먹으면 큰일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약을 다 담아서 자리에서 일어서던 인섭의 눈에 먼지가 뽀얗게 쌓인 남색 승용차 앞 유리 위에서 번쩍이는 붉은빛이 들어왔다. 인섭의 기억이 맞는다면 그 차량은 내도록 그 자리에 주차되어 있었다. 인섭은 차주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홍삼 세트를 사 갖고 돌아갔다.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너,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어제 운 좋게 바로 병원에 실려 가지 않았으면 위험했을 겁니다. 동영상 올릴 때 최대한 자세하게 모든 상황을 쓸 예정입니다.”
강영모가 헛웃음을 지었다.
“어디서 이 새끼가 사람을 협박해. 너 협박하면 그것도 범죄야. 알아? 어디 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나쁜 짓만 골라 배워서.”
“상관없습니다.”
인섭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죄짓는 부분은 벌 받겠습니다. 하지만 강영모 배우님도 대가는 치르셔야 할 겁니다.”
폭력을 행사해 사람이 다쳤으니 형사처벌은 당연했다. 하지만 최인섭이 말하는 대가는 그쪽이 아니었다. 그리고 강영모 역시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싸우는 장면이야 유야무야 넘어간다 해도, 쓰러진 사람의 핸드폰을 굳이 꺼내서 내던지고 도망가는 장면은 사람들이 절대로 그냥 넘기지 않을 것이다.
“대답은 바로 받아 가겠습니다. 약속한 시간 지나면 친구한테 영상 올려 달라고 말해 뒀습니다.”
“너….”
강영모의 각진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제가 바라는 건 간단합니다. 다시는 나타나지 마세요. 기자도 붙이지 마시고요. 그러면 다른 USB에 담긴 자료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확실히 약속드리겠습니다.”
거짓은 아니었다. 애초에 강영모가 걱정하는 USB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이번 일은 반드시 여기서 끝내야 했다.
인섭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1분 남았습니다.”
인섭은 초인종을 누르고 숨을 삼켰다. 사실 현관 비밀번호를 알고 있어서 그대로 누르고 들어가도 무방했지만, 한 번도 그렇게 들어간 적은 없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인섭은 한 번 더 초인종을 눌렀다. 집으로 찾아가겠다는 메시지를 보냈을 때 알겠다는 짧은 답변이 왔다. 그가 집을 비우고 어디에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에서 기척이 들리고 문이 열렸다. 열린 문틈으로 이우연의 무표정한 낯이 보였다.
“어쩐 일이세요.”
대단한 환영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모르는 사람을 대하는 듯한 태도에 인섭은 잔뜩 주눅이 들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전화를 할까 하다가 얼굴을 보고 싶어서 일부러 찾아온 것이다.
“무슨 말인데요.”
이우연은 여전히 문도 열어 주지 않고 비스듬히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아, 저기 그러니까, 어제 너무 늦게 전화한 거 사과드리고 싶고….”
인섭은 다른 사람 앞에서 말을 하는 재주가 없었다. 특히 많은 사람들 앞에 서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식은땀이 흘렀다. 지금은 이우연 하나만을 앞에 둔 상황인데, 마치 백 명을 앞에 둔 기분이었다.
“그리고요.”
이우연이 다음 말을 재촉했다.
“…안에 들어가서 말씀드리면 안 될까요.”
인섭이 가까스로 청한 말에 이우연은 그제야 문을 열어 주었다. 인섭은 집 안으로 들어가며 식은땀으로 젖은 손바닥을 등 뒤로 문질렀다. 몇 번이고 들어왔던 현관인데도 이상하리만치 낯설게 느껴졌다.
이우연은 거실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인섭이 머뭇거리고 서 있자, 이우연이 흘깃 고개를 돌렸다.
“뭐 해요. 거기 서서.”
“실례하겠습니다.”
인섭은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정리했다. 거실로 가자 담배 냄새가 자욱했다. 테이블에 놓인 재떨이에는 담배꽁초가 여러 개 보였다.
“다시 담배 피우세요?”
“네.”
굳이 숨길 필요도 없다는 듯이 이우연은 대답했다. 인섭은 주춤거리다가 소파 가장자리에 앉았다.
이우연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조용한 거실에 담배 필터가 타들어 가는 소리만 들렸다.
“할 말 있다면서요.”
“아, 네.”
인섭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작게 기침했다. 이우연의 미간에 설핏 주름이 잡혔다. 그는 담배를 재떨이에 꺾어 버리고 자리에서 일어서 창문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피우세요.”
“할 말이나 해 봐요.”
이우연이 다시 소파에 앉으며 대꾸했다. 이상했다. 마치 처음으로 돌아간 것처럼 그는 서먹하게 굴었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인섭은 점점 더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책 읽어 주신 거 감사드립니다. 다 읽느라 힘드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짧은 단편 소설이어도 혼자 속으로 읽는 것과 음독은 달랐다. 그 정도 분량이면 족히 한 시간은 걸리는 것이다. 특히 이우연은 자신에게 책을 읽어 줄 때, 평소보다 좀 더 느리게 문장을 음독했다.
“다 안 읽었어요. 세 장 남았으니까.”
인섭이 기억하는 건 소설의 도입부까지였다. 예상대로 이우연은 이후로도 계속 책을 읽어 준 모양이었다.
“아무튼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강영모 씨 일은, 이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거 같습니다. 피차 부딪치면 좋지 않을 거 같아서 이후로는 절대로 마주치는 일 없도록 하자고 연락받았습니다.”
“그 새끼는 원래 신경 안 썼는데요.”
“…네.”
인섭은 제가 매우 쓰고 있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른 건요.”
“네?”
“다른 할 말은 없어요?”
이우연의 눈이 몹시 집요하게 인섭을 훑었다. 잘못을 추궁당하는 기분이었다. 인섭은 생전 처음 사람을 협박하고 성공했다는 기쁨을 이우연과 나누려고 온 자신이 몹시 부끄럽게 느껴졌다. 인섭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없습니다, 하고 대꾸했다.
“할 말 없으면 케이크라도 갖고 왔어야지.”
이우연의 혼잣말에 인섭은 제가 결례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경황이 없어서 빈손으로 왔습니다. 어떤 맛으로 사다 드릴까요?”
이우연은 묘한 표정으로 인섭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쉰다.
“검진 결과는?”
이우연이 인섭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별 이상 없습니다.”
의사가 일이든 공부든 당분간은 쉬라고 했지만, 어차피 이번 달까지만 하고 일은 끝이었다.
“그렇군요.”
이우연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왜 그러시냐는 질문을 하기도 전에 이우연의 입술이 인섭의 입술을 덮었다.
집요한 키스였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침범한 혀가 끈질기게 인섭의 혀를 휘감아 올렸다. 숨을 쉴 틈조차 주지 않았다. 인섭이 모자란 숨을 들이켜려고 입술을 벌릴 때마다 이우연이 각도를 틀어서 입을 틀어막았다. 머리가 핑 돌았다. 인섭은 눈을 껌뻑거리며 이우연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때 봤던 그 눈이었다. 상대를 탐색하는 듯한 차가운 눈.
“……!”
인섭은 저도 모르게 이우연을 밀어냈다. 폭설처럼 밀어닥치던 키스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멈췄다. 이우연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인섭을 내려다보았다.
“아, 죄송합니다. 갑자기 좀 놀라서….”
인섭은 타액으로 흥건한 입술을 닦으며 변명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우연은 분명 눈치챘을 것이다. 자신이 잔뜩 겁에 질렸다는 사실을.
“미안해요. 허락받고 해야 했는데.”
말은 그렇게 해도 이우연이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알 수 있었다.
“지금부터 섹스하려고 하는데 괜찮아요?”
이우연이 셔츠 단추를 하나씩 툭툭 끌러 내며 물었다. 인섭은 고개를 내저었다.
“기자도 없고 여기는 밖도 아니고, 또 뭐였지. 인섭 씨가 요구했던 조건이.”
이우연은 셔츠의 손목 단추를 끄르며 생각에 잠긴 눈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게 아니라….”
아직 강영모에게 맞은 자리가 욱신거렸다. 멍도 남아 있었다. 다른 곳이었다면 넘어져서 그랬다고 둘러댈 수 있지만, 명치 아래는 도저히 무리였다.
“오늘은 조금 피곤해서요.”
이우연이 흐음, 하고 못마땅하다는 듯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뭘 했다고 피곤해요?”
병원에서 검사 결과를 듣자마자 인섭은 바로 퇴원했다. 집에 와서 자동차 블랙박스에 찍힌 어제 영상을 발견하고 강영모에게 연락하고 만나서 생전 처음 사람을 협박했다.
“…아침에 병원 갔다 와서 조금 피곤한가 봅니다.”
이 중 이우연에게 밝힐 수 있는 스케줄은 병원뿐이었다.
“그거 했다고 피곤해요?”
어딘지 탓하는 듯한 말투에 인섭은 움칠 숨을 삼켰다. 어제 꿨던 꿈이 떠오른 것이다.
“…마, 많이 피곤한 건 아닙니다.”
“얼마나 피곤한데?”
이우연이 소파에 손을 대고 몸을 기울였다. 셔츠 사이로 탄탄하게 조여진 근육이 보였다. 넓은 어깨 탓인지 남자가 몇 배는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조금….”
“섹스도 못 할 만큼?”
‘조금 귀찮긴 하네요. 뻑하면 아프고, 계속 신경 써야 하고. 무엇보다 섹스도 마음대로 못 하는 것도 짜증 나요.’
꿈속에서 들었던 이우연의 목소리가 현실과 겹쳐졌다. 그가 금방이라도 짜증을 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것만 같았다.
“다, 다른 건 할 수 있습니다.”
“다른 거?”
이우연이 입가에 비스듬한 미소가 걸린다. 평소처럼 짓궂게 놀리는 말투가 아니었다. 잔인함마저 엿보이는 차가운 눈이었다.
“입으로….”
인섭의 얼굴은 물론 귓불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제가 먼저 하겠다고 나선 것은 처음이었다.
“…….”
이우연은 아무런 대답도 않았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얼굴에 점점 열이 올랐다. 인섭은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가 무슨 말이든 해 주길 바랐다.
“하, 시발.”
이우연이 헛웃음을 삼키며 욕설을 내뱉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놀란 인섭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이우연을 올려다보았다.
“인섭 씨가 먼저 내 자지 빨아 준다고 한 거, 처음인 건 알아요?”
“…기분 상하게 해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이우연의 기분이 말끔히 풀릴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불쾌하게 여길 줄은 몰랐기에 인섭은 점점 풀이 죽었다.
역시 어제 밤늦게 전화를 건 게 실수였을까.
“그래요, 그럼.”
이우연이 소파에 걸치고 있던 다리를 내리고 몸을 세웠다. 그러고는 인섭에게 턱짓했다.
“빨아 봐요.”
차갑다 못해 고압적이기까지 한 태도에 인섭은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이우연과의 섹스는 다소 거친 면이 있어도 사랑받는다는 느낌에, 늘 기분이 좋았다. …너무 기분이 좋아서 무서워질 때가 종종 있었지만.
그런데 지금은 그런 감정이 전혀 들지 않았다. 당장, 지하 주차장에서 했던 행위와도 엄청난 온도 차이가 느껴졌다.
“싫어요?”
이우연이 묻는다. 인섭은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손을 뻗어 이우연의 지퍼를 내렸다. 속옷 사이로 이미 반쯤 일어선 성기가 제 모습을 드러냈다.
인섭은 입을 벌려 살덩이를 물었다. 입에 넣는 것만으로 성기가 꿈틀하며 무게감을 더했다. 몇 번이나 펠라티오를 경험했지만, 인섭은 아직도 그 방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더 기분 좋게 하는 걸까.
인섭은 평소에 이우연이 시키던 대로 혀로 천천히 귀두를 감싸며 입술을 오므렸다. 이우연의 손이 인섭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인섭은 용기를 내서 조금씩 입술을 움직여 남자의 살덩이를 빨았다. 성기가 단단해지는 게 느껴졌다.
기분 좋은 걸까.
인섭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우연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인섭을 움켜쥔 이우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
눈앞이 핑그르르 돌았다. 이우연은 인섭의 머리를 쥔 채로 세차게 허리 짓을 했다. 돌처럼 단단한 성기가 목구멍을 찔러 댔다. 인섭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 ――!”
이우연은 이를 사리문 채로 허리를 움직였다. 평소처럼 달뜬 숨소리를 내거나 인섭의 이름을 부르는 일도 없었다. 그저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인섭은 당혹스러웠다. 이우연이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딱딱하게 곧추선 성기가 혀와 입 안을 범했다. 인섭은 이우연의 다리를 붙들고 간신히 버텼다. 폭력적인 행위는 한참이나 지속되었다.
“……!”
이우연이 인섭의 머리통을 움켜쥐고 허리를 바짝 세웠다. 울컥, 목구멍으로 뜨끈한 정액이 흘러들어 왔다. 이우연은 몇 번 더 허리를 추어올려 인섭의 안에 정액을 흘려보냈다.
“켁, 쿨럭….”
이우연이 놓아주자마자 인섭은 기침을 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미처 삼키지 못한 정액이 기침을 할 때마다 침과 함께 섞여 나왔다.
인섭은 한참 동안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끝났어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이우연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네?”
인섭은 혹시 제가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되물었다.
“다 끝난 거냐고요.”
“…아, 네.”
인섭은 아직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멍한 얼굴로 이우연을 바라보았다. 이우연은 테이블에 올려 두었던 담뱃갑을 들고 담배를 빼어 물었다. 창가로 천천히 걸어가는 그의 궤적을 따라 연기가 흩어졌다.
창가에 선 이우연이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넓은 어깨에서 이어지는 근육이 뼈의 형태를 극적으로 부각시켰다. 엄밀히 따지면 지금 이우연은 영화 촬영이 끝난 비시즌이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여느 때보다 완벽한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어렴풋이 인상을 쓴 채 담배를 빠는 남자의 옆모습일 뿐인데도, 성인용 영화를 몰래 엿보는 듯한 죄책감을 느껴 인섭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뭐 하고 있어요.”
시선은 느꼈는지 이우연이 고개를 돌렸다.
“네?”
“볼일 다 끝났으면 가지 않고.”
예고 없이 시작된 영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후우.”
인섭은 우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잡지 촬영이 있는 날이었다. 스튜디오 촬영은 매니저의 손이 그나마 덜 가는 일이었다. 조용히 앉아서 대기를 하다가 필요한 게 있으면 즉각 가져다주면 끝이었다.
하지만 오늘 촬영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았다.
“거기, 서신아 씨 매니저분. 신아 씨 나와서 대기하라고 전해 주세요.”
“바로 슈팅 들어가나요?”
“그건 저희도 말씀드리기 힘듭니다.”
“…알겠습니다.”
매니저가 우울한 얼굴로 대기실로 달려갔다. 촬영 준비를 마치고 나온 여배우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바로 들어가면 돼요?”
“아니요. 여기서 조금만 대기해 주시면 됩니다.”
“뭐야. 바로 찍는다더니 뭘 또 대기예요. 실장님 말씀 똑바로 전하셔야죠.”
여배우의 호통에 매니저가 어쩔 줄 몰라 했다.
“죄송합니다. 촬영 현장이란 게 워낙 마음먹은 대로 가는 게 아니라서.”
현장 감독이 사과했지만, 분위기는 여전히 살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촬영 대기를 했다가 대기실로 돌아가길 벌써 여러 번이었다. 처음에는 생글생글 웃으며 기다리던 그녀의 얼굴에서 점점 짜증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그건 촬영을 기다리던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확실해요?”
“네. 포토그래퍼분이 워낙 완벽주의자로 유명하신 분이라. 아시잖아요.”
현장 감독이 능숙하게 상대를 달랬다.
“알겠어요. 너무 오래 기다릴 거 같으면 다시 들어갈게요.”
그녀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섰다.
오늘 촬영을 맡고 있는 작가는 세계적인 포토그래퍼 데이비드 알렌이었다. 악마와 계약한 작가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그는 혹독한 완벽주의와 환장할 만큼의 즉흥성으로 유명했다. 한마디로 제 성에 찰 때까지 셔터를 눌러 대는 타입이었다. 한 번에 오케이를 할 때도 있지만, 그게 몇 시간이나 계속될 때도 있었다. 한번 그와 작업한 모델들은 다시는 같이 일하지 않겠다고 이를 득득 갈다가도 결과물을 보면 그의 천재성에 혀를 내둘렀다.
이번 촬영은 올해 20주년을 맞는 W 잡지사의 창간을 기념한 자리였다. 한국 영화계를 이끌어 나갈 이십 대 배우 열두 명을 한자리에 불러 촬영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배우들의 소속사에서 모두 탄식했다.
한두 명도 아니고 그 정도 규모의 소위 잘나가는 배우가 모여 촬영을 하면 벌어질 일은 안 봐도 훤했던 것이다. 배우 간의 은근한 신경전까지 배려해야 하는 건 당연했고, 촬영 순서나 단체 촬영 시 위치까지 합당한 근거를 대서 정해야만 했다.
문제는 오늘 초빙한 포토그래퍼가 그런 것을 고려할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는 열두 명의 사진을 확인한 후 제가 원하는 순서대로 사람을 호명했다. 심지어 본인이 만족하기 전에는 다음을 외치는 법이 없었다.
잡아 놓은 일정이 밀리니 대기하는 배우들의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배우들과 동행한 매니저들의 피골이 상접해 가는 상황이었다.
“에휴. 차라리 단체 촬영을 먼저 하지. 이건 다 같이 죽자는 것도 아니고.”
“그러게요. 오늘 밤새워도 집에 못 가는 거 아니에요? 진짜 미치겠다. 거기도 난리죠?”
“당연하죠. 사흘 전부터 물만 마셨는데, 상태 어떻겠어요.”
“우리 회사 선배님이 배고픈 배우하고는 눈도 마주치지 말라던데.”
매니저들끼리 통하는 뼈아픈 농담을 하며 그들은 동병상련의 고통을 나눴다.
“그래도 그쪽은 괜찮죠? 이우연 씨야 워낙 성격이 좋으시니까.”
인섭을 알아본 한 명이 알은척을 했다.
“아, 네. 이우연 씨는 괜찮… 습니다.”
인섭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전혀 괜찮지 않았다. 아침부터 이우연의 기분은 매우 좋지 않았다. 늘 활기찬 김강우마저 눈치를 채고 입을 꾹 다문 채 운전만 했을 정도였다.
이우연이 별다른 행동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를 둘러싼 공기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서늘했다.
심지어 인섭은 어제 그런 일이 있었던 직후라 결국 그에게 오늘 한마디도 걸지 못했다.
“이우연 씨야 좋겠지. 본인 애인이랑 대기실도 같이 쓰는데.”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돈도 벌고 데이트도 하고, 완전 일석이조네요.”
“하하, 그러게요.”
인섭은 동조하는 와중에도 식은땀이 흘렀다.
준비된 대기실이 하나 모자라 두 명이 한방을 써야 하는데, 하필이면 오늘 촬영에 채연서도 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우연과 채연서가 같은 대기실을 사용하게 되었다.
인섭은 채연서를 그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녀 역시 연예인 사이의 연예인이었다. 목소리와 말투 눈빛, 태도 하나하나에서 사랑스러움이 묻어났다. 한 공간에 둘이 있는 것만으로도 그림이 되었다. 신이 서로를 위해 만들어 놓은 작품 같았다. 인섭은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확인하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무심코 저와 그녀를 비교한 자신에게 자괴감을 느낀 것이다.
무엇보다 비참한 건 이우연이 제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인섭은 촬영 상황을 확인하겠다고 말한 후 대기실에서 나왔다.
“정재민 씨 촬영 끝났다. 서신아 들어가겠네.”
“저는 그럼 가 보겠습니다.”
정재민의 매니저가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래도 촬영에 탄력이 붙는지 아까보다 개인 촬영 시간이 점점 줄고 있었다.
“그쪽도 슬슬 들어가 봐야 하지 않아요? 선남선녀 단둘이 대기실에 너무 오래 두는 거 아니야?”
“아, 그…. 지금 들어가 보겠습니다.”
짓궂은 농담에 얼굴이 벌게진 인섭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자리를 떴다.
채연서의 코디가 있었으니 두 사람만 두고 자리를 비운 건 아니었지만, 슬슬 들어가야 하는 타이밍인 건 맞았다.
대기실 앞에서 인섭은 조심스럽게 노크를 하고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인섭은 몇 번 더 노크를 했다. 역시 잠잠한 침묵만이 그를 응대했다.
“최인섭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인섭은 일부러 크게 소리를 내고 문을 열었다.
하지만 안에는 이우연도 채연서도 그녀의 코디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인섭은 일순 제가 방을 잘못 들어온 것인가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잠시만요.”
그때 파티션 안쪽에서 채연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섭은 당황해서 얼른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아무도 안 계신 줄 알고. 바, 바로 나가겠습니다.”
“아니에요. 다 입었어요.”
준비된 의상을 입은 채연서가 파티션에서 걸어 나왔다. 남색 오간자에 촘촘히 장식이 박힌 엘리 사브의 드레스는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별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한 벌에 몇천만 원을 호가하는 드레스가 그녀의 실루엣을 온전하게 드러냈다.
“어때요? 괜찮아요?”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웠다. 인섭은 가까스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밀려드는 자괴감에 숨이 막혔다.
“…이우연 씨는 어디 가셨나요?”
“담배 피우러 간다고 나가셨어요.”
인섭은 설핏 인상을 썼다. 이우연은 촬영 도중에 담배를 피우는 일이 없었다. 오늘 정말 기분이 좋지 않은 게 분명했다.
“마침 잘 오셨어요. 코디가 잠깐 볼일 보러 가서요.”
그녀가 몸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드레스 때문에 손이 안 닿더라고요.”
미처 올리지 않은 지퍼 때문에 등이 훤히 드러난 모습에 인섭은 당황해서 고개를 돌렸다.
“다른 분 불러오겠습니다.”
“이것만 올려 주시면 돼요. 괜히 번거롭게 다른 사람 부르지 마세요. 부탁드릴게요.”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 모습에 인섭은 차마 두 번 거절할 수 없었다. 최대한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인섭은 채연서의 곁으로 다가갔다.
“거기 단추부터 채우시면 돼요.”
“…네.”
첩첩산중이었다. 작은 매듭에 좀처럼 단추가 들어가지 않아, 몇 번이나 손이 미끄러졌다.
“죄송합니다.”
인섭의 사과에 채연서가 웃음을 터트렸다.
“괜찮아요. 천천히 하세요.”
인섭은 떨리는 손으로 단추를 채워 갔다.
“혹시 이우연 씨 오늘 기분이 안 좋으세요?”
“네?”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인섭이 놀라 되물었다.
“저번에 만났을 때와 좀 분위기가 달라서요.”
“…두 분이 만나셨나요?”
채연서가 고개를 돌렸다. 조금 짓궂은 미소가 그녀의 눈에 어렸다.
“어디 가서 그렇게 대답하시면 안 돼요.”
“아, 죄송합니다.”
사실이야 어쨌든 이우연과 채연서는 현재 사귀고 있는 상태였다. 제 실수에 사과를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아린 것은 어쩌지 못했다.
언제, 어디서 둘이 만났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되고, 그럴 수도 없었다.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이우연 씨가 오늘 유독 말이 없으셔서요.”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컨디션이 좀 안 좋으신 거 같습니다.”
“걱정이네.”
그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사소한 한마디였다. 지나가는 듯이 툭 내뱉은.
하지만 인섭은 그 속에 담긴 상대를 향한 분명한 호의를 읽었다.
일순 목까지 가득 찬 감정에 인섭은 숨을 삼켰다.
질투.
눈앞이 아찔할 만큼 느끼는 감정이었다. 처음이었다. 날카로운 감정이 심장을 할퀴고 지나가는 느낌에 인섭은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우연의 곁에서 그에게 호의를 표하는 여자를 그간 보지 못한 게 아니었다. 은근한 호의가 아니라 노골적인 호의를 건네는 사람도 여럿이었다. 그때마다 마음이 수런거리지 않았다면 거짓이겠지만, 맹세코 지금처럼 강렬한 질투를 느껴 본 적은 없었다.
“……?”
채연서가 의아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인섭은 제가 느낀 원색적인 감정의 이유를 깨달았다.
거기에는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 불순물이 뒤섞인 혼탁한 감정이 거세게 제 마음을 뒤흔든 것이다.
…이렇게나 나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해서는 안 되는데.
“죄송합니다.”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사과를 중얼거리고 인섭은 다시 지퍼에 손을 올렸다. 지퍼만 올리면 끝이었다.
그 순간 문이 열리고 이우연이 들어왔다.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오늘 처음으로 듣는 이우연의 음성이었다.
“채, 채연서 씨께서 도와 달라고 하셔서….”
인섭은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도 궁색한 변명을 하는 기분이었다. 이우연이 문을 닫았다. 쾅, 하는 소리에 심장이 덜컹거렸다.
이우연이 무서운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았다.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인섭은 당황했다. 왠지 모를 수치심에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였다. 상황을 살피지 않고 손을 움직인 건.
“아!”
채연서가 비명을 내질렀다. 인섭은 그제야 제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아, 아픈데.”
그녀가 이맛살을 찌푸린 채 뒤를 돌았다. 지퍼에 씹힌 살에 붉게 피가 몰려 있었다.
“죄송합니다. 바로, 잠시만….”
인섭은 얼른 지퍼를 내려 주려고 했다. 그러나 뒤에서 다가온 손이 그를 그대로 잡아채어 내던지듯 끌어냈다. 더러운 것을 떼어 내는 듯한 손길에 인섭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엄청난 힐난이 담긴 눈으로 이우연은 인섭을 노려보았다.
“가지가지 하는군요.”
인섭은 수치와 죄책감에 얼굴을 붉혔다.
절대로 일부러 저지른 일이 아니었지만, 방금까지 제가 가졌던 추한 감정 때문에 변명할 처지도 못 되었다.
“너무 혼내지 마세요. 실수하신 거예요. 아, 소희야. 잘 왔다. 이것 좀 봐 줘.”
뒤이어 들어온 채연서의 코디가 황급히 달려와 사태를 수습했다.
“어머, 언니 어떡해요. 많이 아플 텐데.”
“피 났어?”
채연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피는 안 났어요. 그래도 약은 발라야겠어요.”
코디가 파우치에서 연고와 밴드를 가져왔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인섭은 연거푸 사과했다. 무슨 말로도 부족했다. 촬영을 앞둔 배우의 몸에 상처를 내다니. 최악의 실수였다.
“괜찮아요. 어차피 가려지는 부분이니까. 가려지지?”
그녀가 코디를 보며 물었다.
“네. 가려지긴 하는데….”
코디가 곱지 않은 시선으로 인섭을 흘깃 쳐다보았다. 인섭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필요하신 조치는 제가….”
그때 문가에서 스태프가 노크를 하고 외쳤다.
“채연서 씨 준비해 주세요.”
“벌써요? 촬영 시간이 모 아니면 도라더니, 사실인가 보네.”
채연서가 거울을 보고 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아직도 덜덜 떨면서 고개도 들지 못하는 인섭의 어깨를 툭 치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괜찮아요. 나중에 애인한테 청구하지, 뭐.”
채연서는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해 보이고는 코디와 함께 대기실을 나갔다. 인섭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문득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표정이 사라진 이우연이 인섭을 바라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인섭은 제가 누구의 얼굴에 먹칠을 했는지 깨달았다.
“이우연 씨가 신경 쓰는 일 없도록 제가 사과드리고 수습하겠습니다.”
“너는,”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아랫입술을 깨문 채로 이우연은 한참 동안 숨을 삭였다. 날카로운 시선이 얼굴에 닿았다. 침묵에 실린 비난에 인섭은 몸이 바슬바슬 떨렸다. 한기에 심장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앞뒤 구분 못 하고 달려들어서 물어뜯고 보는 거. 안 좋은 버릇이라는 거 알고 있어요.”
이해하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며 이우연이 인섭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네? 읏….”
손목을 으스러트릴 것 같은 악력에 인섭은 비명을 삼켰다.
“인섭 씨가 나를 조금만 덜 좋아했거나, 조금만 덜 관대했다면 분명 그날 끝났을 테니까. 사실, 케이크 상자를 갖고 그대로 돌아오지 않는 게 당연했죠.”
인섭은 그제야 그가 하와이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갑자기 어째서?
“당신 기다리면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아야 한다는 거 아는데, 어제도… 하, 시팔.”
앞뒤가 안 맞는 말을 내뱉으며 이우연이 한 손으로 제 이마를 짚었다.
“우연 씨…. 괜찮으세요?”
이우연의 창백한 낯이 인섭의 눈에 들어왔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까지 맺혀 있었다.
“어디 아프신 건가요?”
인섭은 재차 이우연에게 물었다. 오늘 그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도 심기가 불편하겠거니 하고 간과한 자신이 못내 부끄러웠다.
이우연에 대한 걱정에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인섭은 꾹 참아 냈다. 여러모로 자신은 매니저로서 실격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먼저 이우연 씨 몸 상태를 확인했어야 했는데.”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이우연이 뭔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숨을 작게 삼켰다. 이우연이 다급히 인섭의 손을 놓아 버렸다. 그의 반응에 인섭은 덜컥 겁이 났다.
“많이 아프신가요?”
“…….”
이우연은 대답하지 않고 인섭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약을 꺼내 물 없이 삼켰다.
“병원으로 바로 모셔다드릴게요.”
“됐어요.”
이우연이 손으로 관자놀이 부근을 꾸욱 누르며 대꾸했다.
“촬영 팀에는 제가 설명하고 사과드릴 테니까, 병원으로….”
이우연이 다시 인섭의 팔을 쥐었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마치 깨질 듯한 유리 공예품을 다루는 듯한 손길로 이우연은 인섭의 손목을 다루었다.
“살면서 내가 저지른 짓에 후회한 적 없어요.”
“…….”
“인섭 씨 만나기 전까지는, 한 번도. 그러니까,”
이우연이 숨을 고르듯이 천천히 인섭의 손목에 남은 자국을 살핀다. 이우연의 긴 눈매에 한숨이 어렸다.
“너무 잘해 주지 마세요. 주제도 모르고 개처럼 물어뜯어 버리고 싶어지니까.”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말을 묻기도 전에 대기실 문이 열렸다.
“이우연 씨. 준비해 주세요. 바로 촬영 들어갑니다.”
이우연이 인섭의 손을 놓았다.
“갔다 올게요.”
이우연이 그대로 대기실을 나갔다. 시큰거리는 통증이 그제야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후회하고 싶지 않으니, 잘해 주지 말라니. 대체 무슨 뜻일까.
인섭은 자국이 남은 손목을 문지르며 이우연의 말을 한참 동안 곱씹었지만, 머릿속에 맴도는 것은 채연서에게서 저를 떼어 내던 이우연의 눈빛뿐이었다.
주제도 모르고.
아까보다 몇 배는 더 심한 자괴감이 몰려왔다.
“아이 씨, 미치겠네.”
차현규 실장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우산을 받쳐 든 채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오늘이 그날인 거 같아요. 매형.」
한 시간 전에 받은 문자에 차 실장은 부랴부랴 옷을 입고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는 처음부터 강우를 그 자리에 앉히는 것을 반대했다. 언제나 그렇듯 일을 벌이는 건 김 대표의 몫이었다.
“망할 영감탱이, 오기만 해 봐라.”
하필 때맞춰 중국으로 출장을 간 김 대표를 원망하며 차 실장은 애꿎은 담배만 뻑뻑 피워 댔다.
어리고 해맑은 전 처남을 그 망할개씹새끼 이우연의 로드 매니저로 부리는 게 그는 영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차 실장은 일을 시작하기 전부터 김강우에게 신신당부했다.
이우연과 절대 친해지지 말 것, 이우연 앞에서 인섭에게 쓸데없이 친한 척하지 말 것, 이우연에게 절대 관심 갖지 말 것, 혹시 트러블이 생기면 무조건 김 대표나 자신에게 먼저 연락하고 끼어들지 말 것. 그 외에도 외워야 할 주의 사항을 나열하자 김강우는 어째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며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 못 하겠으면 그냥 외워.’
나중에 주의 사항을 프린트해서 전해 주며 차 실장은 한 가지를 덧붙였다.
어느 날, 이우연이 웃으면서 욕을 하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자신에게 연락하라고. 암호명은 ‘그날’로 정했다. 그리하여 오늘 문자를 받은 것이다. 차 실장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소와 시간이 문자로 도착했다.
“이 녀석은 추워 죽겠는데, 대체 어디쯤 와 있다는 거야.”
늦여름 비였다. 차 실장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주변을 살폈다. 저쪽에서 김강우가 종종걸음으로 달려오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야! 너!”
“매애애형.”
김강우가 염소처럼 울며 차 실장에게 달려왔다.
“어떻게 된 거야. 이우연 그놈이 웃으면서 너한테 막 욕했어?”
“그러니까…, 그게요.”
김강우가 머뭇거리면서 말끝을 흐렸다.
“뭐라고 했는데?”
“욕한 건 아닌데요.”
김강우가 뒤를 흘끔거리며 목소리를 낮췄다.
“제가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요. 뭐랄까, 오늘따라 이우연 배우님 눈에서….”
“눈에서?”
“…욕이 나오는 거 같아요.”
“…….”
차 실장의 낯이 오래된 도토리묵처럼 굳었다.
“죄송해요. 매형들이 하도 주의를 많이 주셔서 예민해졌나. 아, 내가 진짜 왜 이러지. 괜히 매형 오라 가라 귀찮게 했나 봐요. 죄송해요.”
차 실장의 침묵을 전혀 다른 의미로 이해한 김강우가 민망한지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다. 잘 불렀어. 아주 자알 불렀어.”
차 실장이 김강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우연 눈에서 욕이 나오는 게 어떤 느낌인지 겪어 본 사람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이우연은 어디 있어?”
“저 먼저 차 빼러 간다고 하고 나왔어요. 형님이랑 같이 오실 거예요.”
“인섭이랑 같이 있는데 그렇다고?”
차 실장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우연 상태가 좋지 않다는 말에 당연히 인섭이 오늘까지 쉬겠거니 생각한 것이다.
“네. 두 분이 아무래도 싸운 거 같아요. 아니, 싸웠다기보다 배우님이 일방적으로 화를 내는 분위기지만. 분위기 완전 구려요. 촬영 때 무슨 일 있었나?”
차 실장은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사내 연애를 금지하는 것이다.
“알았어. 일단 차에 타자. 뼈에 철심 박아서 발목이 너무 시리다.”
“죄송해요.”
김강우가 차 문을 열었다. 차 실장은 조수석에 앉아 발목을 주물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섭이 조수석 문을 열었다.
“안녕. 인섭 씨.”
차 실장이 애써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예상치 못한 차 실장의 등장에 놀란 인섭이 눈을 크게 치뜬 채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어쩐 일이세요?”
“오늘 이 근처 볼일이 있어서 들렀다가 강우가 근처에 있다고 해서.”
“발은 좀 괜찮으세요?”
“응. 이젠 제법 걸어 다닐 만해.”
“다행입니다.”
인섭은 그 짧은 와중에도 진심으로 안도의 뜻을 내비쳤다.
어쩜 이렇게 심성이 고울 수가.
차 실장은 인섭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매번 감탄하곤 했다.
반면.
“…….”
오랜만에 보는 건데, 분명 눈이 마주쳤음에도 안부를 묻기는커녕 알은척 한 번 하지 않고 차 안으로 들어가는 개새끼도 있었다.
“오랜만이다. 이우연.”
“그런가요?”
이우연이 귀찮다는 듯이 대꾸했다.
“정말 괜찮으세요?”
차에 오르려는 이우연에게 인섭이 물었다. 이우연은 그런 인섭을 무시하고 자리에 앉았다.
“지금이라도 몸이 안 좋으시면 병원으로 가시는 게….”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세요.”
이우연이 인섭의 말을 썩둑 잘라 버렸다.
몹시 드물게도 차 실장은 방금 이우연의 의견에 동조했다. 쓸데없는 소리였다. 이우연이 아프다니.
“인섭 씨가 오늘은 뒤에 타지 그래.”
“아, 오늘은….”
인섭이 조수석과 뒷좌석을 번갈아 보며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차 실장은 애써 모르는 척했다. 이 개똥 같은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둘을 화해시키는 방법뿐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인섭은 하는 수 없이 조수석 문을 닫고 밴의 뒷문을 열었다. 최대한 이우연에게 멀찌감치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여기 앉아요.”
이우연이 제 옆자리를 턱짓했다.
“아닙니다. 여기도 괜찮습니다.”
“그 자리 벨트가 느슨해요.”
인섭은 안전벨트 버클을 잡아끌어 클립에 끼워 넣고, 벨트를 몇 번 흔들어 보았다. 이우연의 말대로 결합이 조금 느슨한 느낌이었다.
“괜찮은 거 같습니다.”
이우연이 불만스러운 눈으로 흘깃 쳐다보자 인섭이 금방 가니까 괜찮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오늘 일었던 일 때문에 이우연의 바로 옆자리에 앉기에는 민망한 터다. 그러자 이우연은 다시 권하지 않고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출발하겠습니다.”
김강우가 시동을 걸었다. 다시 차 안은 서늘한 침묵으로 가득 찼다.
“오늘 별일은 없었고?”
차 실장이 조심스럽게 대화를 시도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차 실장은 적잖이 놀랐다. 인섭이 대답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우연이 먼저 입을 연 것이다. 인섭은 그런 이우연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마치 실수를 하고 주인의 처분만 기다리는 강아지 같은 표정이었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구만.
차 실장은 짐짓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인섭 씨 어제 병원 검진 갔다 왔다며. 별 이상은 없지?”
최인섭은 환자라는 사실을 이우연에게 상기시키기 위한 질문이었다.
“네. 이상 없습니다.”
“…뭐 오늘 별다른 일은 없었지?”
“왜 자꾸 같은 질문을 반복하세요. 별다른 일 만들어 드릴까요?”
이우연이 책에서 시선도 떼지 않고 대답했다. 김강우가 차 실장에게 저것 보라는 식으로 얼른 눈짓했다. 차 실장이야 익숙한 개싸가지 말투라 놀랍지도 않았지만, 이우연의 정체를 알 리 없는 김강우는 아무래도 충격인 모양이었다.
“정중히 사양한다.”
차 실장이 퉁명스럽게 대꾸하고는 룸미러로 인섭을 흘깃 쳐다보았다. 아까부터 인섭은 쩔쩔매며 이우연만 쳐다보고 있었다. 반면 이우연은 그런 인섭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안전벨트를 걱정해 줄 정도면 헤어진 건 아닐 테고. 싸웠다고 하기에 최인섭 성격으로는 애초에 싸움이 성립되지도 않았을 테고. …그냥 지랄하는 건가?
차 실장은 자신이 몹시 설득력 있는 가설을 세웠다고 생각하며 온 마음을 다해 인섭을 동정했다.
쯔쯧. 어쩌다 저런 것에게 걸려서.
“라디오나 들을까요.”
어색한 침묵을 견디다 못해 김강우가 불쑥 외치며 라디오를 켰다. 오래전 유행가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시끄러워요.”
이우연의 짧은 한마디에 김강우는 시무룩한 얼굴로 다시 라디오 전원을 껐다.
“강우야. 라디오 말고 그 아래에 시디 있는데….”
“그건 안 시끄럽나요.”
이우연이 인섭의 말도 단칼에 걷어 냈다. 인섭은 잔뜩 풀이 죽어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옷자락만 만지작거렸다. 밴 안에는 이우연이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 들렸다.
이우연의 표현을 빌자면 정말 개좆같은 분위기였다. 마음대로 숨 쉬기도 눈치가 보일 지경이었다. 차 실장은 입을 다무는 편을 택했다. 괜한 말을 더했다가는 저 개썅놈이 더 포악해질 것을 아는 터다. 인섭 역시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문제는 김강우였다.
“저기, 오늘 비가 참 많이 오네요. 이럴 때 막걸리에 파전 먹으면 딱인데.”
이우연의 성격을 잘 모르는 그는 이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하고자 제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다.
“제가 아는 가게 중에 파전 진짜 맛있게 하는 곳 있거든요. 오늘 다들 거기로 한잔하러 갈까요? 같이 갈 사람 손!”
친구들끼리 감정이 상하는 일이 생기면 밤새 술이나 퍼마시면 그만이었다. 김강우 주변의 모든 분쟁은 그런 식으로 끝났다.
이우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인섭은 그런 이우연의 눈치를 살피느라 손을 들지 못했으며, 차 실장은 말없이 고개만 내저었다.
이번 작전은 실패라 생각했는지 김강우는 얼른 다음 작전으로 돌입했다.
“맞다. 형님은 그때 여자 친구랑 데이트 잘하셨어요?”
이우연의 기분이 안 좋아 보일 때는 무조건 인섭이 얘기를 꺼내라고 했던 조언을 떠올린 것이다.
“어?”
여자 친구란 단어에 인섭이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제 스케줄 일찍 끝난 날, 데이트하러 간다고 하셨잖아요. 잘 다녀오셨어요?”
“…그날 사정이 생겨서 못 했어.”
본의 아니게 이우연을 바람맞힌 것 같아 인섭의 목소리가 쪼그라들었다.
“하하하. 저 사실 어제 형님 못 나온다고 하셔서, 그날 찐하게 데이트해서 못 오신 건가 생각했다니까요. 형님도 역시 남자구나, 하고.”
“병원 검진 받느라 못 온 거야.”
김강우의 농담에 인섭은 얼른 제 행적을 밝혔다. 이우연은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지만 책장은 한 장도 넘어가지 않았다.
“그럼 그날 데이트 안 하시고 어디 가신 거예요?”
김강우가 능숙하게 차선을 변경하며 물었다.
“고양이 보러요.”
이번에도 대답이 돌아온 건 인섭이 아니라 이우연 쪽이었다. 김강우가 바로 알은척했다.
“아, 혹시 그때 말한 걔네들이요? 뭐더라, 아이실드? 아이봉? 그런 이름이었는데.”
“아이작. 아서.”
이번에도 이우연이 대답했다.
“맞다, 맞다. 거의 비슷하게 맞췄네요. 그런데 형님은 데이트 대신 고양이를 보러 가셨어요?”
“걔네 입양 가서 마지막 날이었거든….”
인섭은 말끝을 흐렸다. 마지막 날인데도 새끼 고양이들을 보러 가지 못한 데다 거짓말까지 하는 중이라 입맛이 썼다.
“몇 마리 더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두 마리 더 있어. 로이스랑 존.”
“혹시 사진 있으면 저한테 보내 주실래요? 우리 누나가 고양이 좋아하는데 물어보려고요. 예전에 둘째 매형이랑 같이 살 때 키우지 않았어요?”
“아니. 김 대표랑 같이 살 때.”
차 실장이 잘못된 정보를 바로 정정했다.
“아무튼 매형.”
김강우가 해맑게 웃어 보였다.
“형님. 저한테 사진 꼭 보내 주세요. 알았죠?”
“응. 바로 보내 줄게.”
인섭은 핸드폰을 꺼냈다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이우연이 책을 든 채로 인섭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우연 씨도 사진 보내 드릴까요?”
인섭은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쟤한테 고양이 사진을 왜 보여 줘?”
차 실장이 놀라서 물었다. 고양이든 뭐든 밀고 지나가라는 협박을 서슴지 않던 놈이 이우연이었다.
“전에 이우연 씨가 키우고 싶다고 하셔서요.”
“아서라. 이우연이 무슨 고양이야. 털 엄청 빠지고 오줌 냄새도 심해. 동물은 애정 없이 함부로 들이면 안 돼.”
차 실장이 혹시라도 애먼 고양이 팔자를 조질까 걱정되어 한마디 거들었다.
“애정 있는 건 들여도 돼요?”
그러자 이우연이 불쑥 물었다.
“…상대 의사도 잘 살펴야지.”
“아닙니다. 이우연 씨도 동물 키우시면 잘 키우실 겁니다.”
열심히 이우연을 편드는 인섭을 보며 차 실장은 차마 아무래도 저놈이 들이고 싶어 하는 게 고양이가 아니라 너인 거 같다는 말을 해 줄 수 없었다.
“아이, 자꾸 왜 저러지.”
그때 운전을 하던 김강우가 짜증 섞인 말투로 중얼거렸다.
“왜?”
차 실장이 시선을 앞으로 돌리며 물었다.
“저기 저 앞에 빨간색 아우디요. 계속 알짱거려서 차선 바꿨는데 또 앞으로 끼어들잖아요. 일부러 저러나?”
“생전 처음 외제 차 타서 신났나 보지. 냅둬. 네가 차선 바꿔.”
차 실장이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꾸했다. 연예인 매니저를 하면서 겪는 수많은 일 중 하나였다.
김강우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혀를 차며 깜빡이를 켰다.
인섭은 핸드폰 사진 목록에서 이우연에게 보여 줄 가장 귀여운 고양이 사진을 찾기 시작했다. 이우연은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 인섭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이상하게 이 차만 몰면 시비 걸려는 놈들이 있어요. 기분 탓인가?”
“아니야. 자주 있는 일이야. 그래서 항상 방어 운전, 으악!”
차 실장이 왁, 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김강우가 바로 브레이크를 밟자 밴이 굉음을 내며 도로에서 미끄러졌다. 갑자기 끼어든 아우디와 가까스로 충돌을 면한 것이다.
“하. 저 미친 새끼가.”
차 실장이 고개를 들면서 욕을 내뱉었다.
“강우야. 괜찮아?”
“네.”
간발의 차로 사고를 피한 김강우의 낯이 퍼렇게 질렸다.
“너희는 괜찮….”
뒤를 돌아본 차 실장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손을 뻗어 인섭의 몸을 지탱하고 있는 이우연과 눈이 마주친 것이다.
이우연이 제 안전벨트를 끄르고 인섭의 앞으로 몸을 숙였다. 인섭이 작게 신음하며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클립이 느슨했던 탓에 인섭이 급정거한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앞에 얼굴을 박은 모양이었다.
“고개 들어 봐요.”
이우연이 인섭의 얼굴을 감싸 쥐고 저를 보게 했다.
“괜찮습니다.”
인섭이 웃으면서 이우연을 안심시키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그의 하얀 손가락 사이로 피가 주르륵 흘러내린 것이다.
이우연이 입술을 으득, 사리물었다. 인섭이 얼른 코피를 닦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조금 부딪쳐서 코가 놀라서, 아니, 원래 코피 잘 납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인섭이 말하는 와중에도 뚝뚝 떨어진 코피가 그의 옷을 적셨다.
이우연이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차 실장은 전 처남이 맞아 죽는 것만은 막아야겠다는 생각에 얼른 팔을 들어 김강우를 보호했다.
“강우 잘못 아니다. 저 미친 아우디 새끼 잘못이야. 다 아우디가 잘못했어.”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차 실장은 웬일로 자신의 말에 순순히 수긍하는 이우연에게 안도했다. 그러나 앞에 선 아우디를 노려보는 이우연의 눈을 보자마자 손발이 차갑게 식기 시작했다. 비상사태였다.
“이우연! 안 돼. 절대 안 돼.”
이우연이 대답하지 않고 뒷문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인섭이 이우연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제가 나가서 말하겠습니다.”
코를 틀어막은 인섭의 손가락 사이로 아직도 코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이우연은 하, 하고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일단 제가 나가서….”
인섭은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이우연이 인섭이 앉은 시트의 등받이에 손을 얹고 상체를 기울였다. 그러고는 소맷자락으로 인섭의 피를 닦아 주었다.
“피 흘리는 사람은 한 명이면 족하잖아요.”
짧지만 강렬한 한마디였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불의의 사고를 낸 인섭은 제가 수습하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설 수가 없었다.
“그쪽도 가만히 계세요. 나오시면 아까 말한 별일 보게 되실 겁니다.”
이우연이 앞좌석에 앉은 두 사람에게 경고를 하고 차 밖으로 나갔다.
“이우연!”
차 실장이 다급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이우연은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밴과 함께 미끄러진 아우디가 비상 깜빡이를 켠 채 갓길에 서 있었다. 이우연은 아우디로 다가가 차 유리를 두드렸다. 조수석의 유리가 내려갔다.
“어머. 이우연이다.”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은 예쁘장한 여자가 이우연을 보고 알은척했다.
“저 모르세요? 저랑 예전에 맥주 광고 촬영 같이했었는데. 기억 안 나세요?”
이우연은 대답하지 않고 여자 옆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 오늘 진짜 재수 없네.”
오대오 가르마를 타고 은테 안경을 쓴 남자가 사납게 인상을 구기며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오빠는 참. 이우연 씨 신경 쓰지 마시고 저랑 사진이나 찍어 주세요. 나 친구들한테 자랑해야겠다.”
여자가 클러치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어디 아프신 건가요?”
이우연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쏟아지는 비에 젖은 머리카락에서 흘러내린 물이 그의 뺨을 타고 떨어졌다. 을씨년스럽고 구질구질해 보여야 마땅한 모습인데도 흡사 로맨스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핸드폰을 꺼내던 여자가 그런 이우연의 얼굴을 무심코 넋 놓고 바라보았다.
“뭐라고? 갑자기 뭔 소리야.”
“그런 거 아니면 운전을 왜 그렇게 하십니까.”
남자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
“와하하. 진짜 황당하네. 니 매니저가 갑자기 핸들 꺾어서 우리 차까지 미끄러졌잖아.”
“오빠아. 그건 아니잖아. 오빠가 먼저 칼치기 했으면서.”
여자가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키득거렸다. 면박을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남자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니, 그것도 못 피해서 이 사달이야. 운전하는 새끼 눈은 어디다 달고 다닌대. 하긴 딴따라 새끼 운전해 주는 놈이 뭘 배워 먹었겠냐.”
“그럼 나도 모델 했었는데 딴따라게?”
여자가 토라진 시늉을 하자 남자가 그건 아니지, 하고 손을 내저었다.
“너랑 쟤랑 같아? 너는 옷을 표현하는 아티스트잖아. 어딜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이우연이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턱 선을 타고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다 젖으셔서 어떡해요. 이걸로 닦으세요.”
여자가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자 남자의 표정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됐어. 어차피 다 젖었는데, 뭘 줘.”
남자가 여자의 손을 내리게 했다. 이우연이 물끄러미 남자를 응시했다.
“뭘 봐. 딴따라 새끼가.”
“…….”
남자는 이우연의 침묵을 제가 함부로 굴어도 된다는 권리로 해석한 듯했다.
“와, 저 새끼 싸가지 없게 지보다 나이 많은 사람한테 눈 똑바로 뜨는 것 봐. 너 군대는 갔다 왔냐? 연예인이 벼슬이야? 그래 봤자 얼굴에 분칠이나 하는 창놈 새끼가.”
이우연이 말없이 느릿하게 웃었다. 그가 화를 내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자 남자는 제 잔인함이 용맹함의 상징이라도 되는 양 한층 더 난잡한 말을 토해 냈다.
“하긴 그러니까 여기저기 다리 벌리고 다니는 갈보 년이랑 사귀지. 천생연분이야.”
남자가 낄낄거리며 조수석 유리창을 올렸다. 옆에 앉은 여자가 말이 좀 심한 거 아니냐고 투덜거렸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뭣도 아닌 승리감에 도취해 콧노래를 부르며 운전대를 잡았다.
그때 차 유리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운전석 쪽으로 걸어온 이우연이 유리를 내리라는 손짓을 하며 뭐라고 말했다. 거세게 내리는 빗소리 때문에 이우연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뭐, 왜!”
남자가 의기양양하게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이우연이 차 유리를 내리라고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왜? 차 유리 내려서 뭐 어쩌라고.”
비에 쫄딱 맞은 이우연을 보며 남자는 보란 듯이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값비싼 선물을 주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사 주고, 좋은 차에 태워 공을 들인 여자가 저를 두고 이우연에게 더 관심을 보이는 모습이 남자의 열등감을 자극한 것이다.
이우연은 몇 번 더 차 유리를 두드렸다. 꼴좋다. 남자는 무시하고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그때였다.
“……!”
콰직, 하고 운전석 유리에 금이 갔다. 남자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사람 머리통만 한 돌을 쥔 이우연이 무표정한 얼굴로 한 번 더 운전석 유리창을 내리찍었다. 이번에는 차 유리가 와장창 박살이 났다.
“으악!”
박살 난 유리창 안으로 비가 들이닥쳤다. 이우연이 돌을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너덜너덜한 차 유리를 맨손으로 뜯어냈다. 그러고는 안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남자를 보며 말했다.
“뭐라고 하신 겁니까.”
이우연의 목소리가 나긋하게 울렸다. 광고에서 들을 때마다 자존심이 상할 만큼 듣기 좋다고 생각하던 음성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들으니 방송에서 들은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무심코 목소리가 좋다는 생각을 했을 만큼.
“뭐라고 하셨는지 잘 안 들려서요. 크게 말씀해 보세요.”
“너, 이 미친….”
그제야 제정신을 차린 남자가 아랫입술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우연이 유리가 박힌 주먹을 훌훌 털어 내며 느슨하게 웃었다.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너 이러고 무사할 줄 알아! 내가 당장 인터넷에 이거…, 힉, 뭐 하는 짓이야.”
이우연이 남자의 얼굴에서 안경을 벗겼다.
“다치시면 안 되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는 질문은 필요하지 않았다. 이우연이 남자의 뒤통수를 움켜쥐고 그대로 있는 힘껏 운전대에 처박았다. 빠앙, 하는 클랙슨이 빗소리를 날카롭게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