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4 (5/13)

“그런데 매니저님은 진짜 어려 보이시네요. 아까 나이 듣고 놀랐어요. 저보다 세 살이나 많다니.”

운전대를 돌리며 김강우가 인섭에게 말을 건넸다. 인섭이 어색하게 웃으며 그런가요, 하고 중얼거렸다. 한국으로 오고 난 뒤 동양인이라 동안이라는 말은 이제 하지 못하게 되어 못내 안타까운 것이었다.

“그런 말 많이 들으시죠?”

“아주, 가끔 듣습니다.”

“술집 같은 데 가면 민증 검사당하지 않으세요?”

뒤에서 책을 읽던 이우연이 짧게 웃었다. 둘이 술을 마시러 갔다가 그 비슷한 경험을 몇 번이나 한 터다. 이우연의 웃음소리를 들은 인섭의 얼굴이 붉어졌다. 목덜미까지 발긋하게 열이 오른 모습을 본 이우연이 책을 덮었다.

“얼마나 남았나요?”

“두 시간 정도 남았습니다.”

이우연의 물음에 김강우가 내비게이션 화면을 확인하고 얼른 대답했다.

“배고프지 않으세요?”

“네. 슬슬 출출한 거 같습니다. 다음번에 나오는 휴게소에 세울까요?”

“아니요. 조금 더 가시다가 충주 쪽으로 빠지세요.”

“국도로 말씀이신가요? 거기로 나가면 한참 돌아갈 텐데요.”

“제가 길 알려 드릴게요. 국도 나가서 좀 가다 보면 괜찮은 한정식집이 있습니다.”

옆에 있던 인섭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근처에 두 사람이 몇 번 갔던 한식당이 있었다. 두 사람이 지방으로 드라이브 갈 때 종종 이용하는 데이트 코스였다.

“시간이 괜찮은가요?”

“넉넉합니다.”

인섭은 시간을 계산해 보고 대답했다. 뒤에 있던 이우연이 나직이 웃었다.

“매니저님은 모르시는 게 없네요.”

김강우가 감탄 어린 투로 중얼거렸다. 인섭이 별거 아니에요, 하고 소심하게 부정하며 얼굴을 붉혔다. 두 사람 사이의 사적인 정보를 가져와 누군가에게 유능하다고 칭찬받는 상황이 부끄럽기만 했다.

“아마 저에 대해 저보다 잘 알고 계실걸요.”

이우연이 맞장구치자 인섭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대표님이 일 정말 잘하신다고 옆에서 잘 보고 배우라고 하더라고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인섭은 황송하다는 듯이 말했다.

차가 국도로 빠지고 나서 인섭은 열심히 방향을 알려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적한 곳에 자리한 한식당 앞에 도착했다.

“자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가게에 들어서자 이우연을 알아본 주인이 친절한 얼굴로 응대했다. 늘 그렇듯이 가장 안쪽에 자리한 방으로 주인은 자리를 잡아 주었다. 인섭이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사이 김강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들렀다 갈게요. 알아서 주문해 주세요. 전 아무거나 잘 먹으니까.”

“네. 천천히 오세요.”

이우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삼 인분으로 부탁드립니다.”

그날그날 들어오는 식재료로 반찬을 만들기 때문에 별다른 주문은 필요하지 않았다. 물을 가져다준 주인이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는 방문을 닫았다.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오랜만이라 피곤하겠군요.”

이우연이 컵에 물을 따르며 말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강우 씨가 운전도 잘하시고.”

운전병 출신이라 운전 솜씨가 좋다는 김 대표의 칭찬이 헛된 말은 아니었다.

“물 드세요.”

이우연이 인섭에게 물을 따라 건넸다. 결명자를 우린 물이었다. 인섭은 쌉싸래한 맛이 나는 물을 조금씩 나누어 마시면서 이우연을 흘끔 쳐다보았다. 언제쯤 어제 그 일을 꺼낼지 차 안에서도 계속 고민했다.

“……!”

이우연이 손을 뻗었다. 인섭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몸을 뒤로 젖혔다. 이우연이 잠시 멈칫하다가 인섭의 목덜미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인섭이 눈을 살짝 아래로 내리깔고 대답했다. 이우연은 불안한 듯 움직이는 인섭의 긴 속눈썹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느긋하면서도 집요한 시선이었다. 인섭은 그의 눈이 닿는 곳마다 살갗이 따끔거리는 느낌이었다. 아무런 말도 없었다. 인섭은 컵을 집어 들었다.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얼른 김강우가 돌아오길 바라며 문 쪽을 흘깃 쳐다보았다.

“인섭 씨.”

혀 위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달콤한 아이스크림 같은 음성으로 이우연이 인섭을 불렀다.

“요즘 잠은 잘 자요?”

“네. 잘 잡니다.”

“그런데 얼굴이 왜 그래요.”

짐짓 나무라는 투라서 인섭은 조금 당황했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점원이 기본 찬을 가져와 상에 올리기 시작했다. 화장실을 갔던 김강우도 돌아와 인섭의 옆에 앉았다.

“어제 잠을 좀 설쳐서 그런가 봐요. 오랜만에 출근할 생각하니까. 하하.”

인섭이 어색하게 웃으며 평범한 직장인의 고뇌처럼 포장해 둘러댔다.

“저도 어제 잠을 설쳤어요. 긴장돼서.”

김강우가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끼어들었다.

“그러세요?”

이우연은 네가 자거나 뒤지거나 관심 없으니 닥쳐도 된다는 말 대신 다정하게 대꾸해 주었다.

“네. 워낙 대배우님이시니까. 사실 지금도 잘 안 믿깁니다. 너무 잘생기셔서 앞에 있는데도 현실감이 없으세요.”

인섭은 젓가락으로 나물을 집어 제 입에 넣고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김강우의 말에 동조했다.

“다른 연예인분들 보면 저는 평범해 보일 겁니다.”

이우연이 겸양의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저희 매형도 연예인이었잖아요. 아니, 대표님.”

김강우가 얼른 말을 바꿨다.

“대표님도 잘생기셨어요. 지금도 모델 같으시잖아요.”

인섭이 얼른 김 대표를 칭찬했다.

“이럴 때 내 칭찬을 해야죠. 매니저님.”

이우연이 언뜻 표정을 굳히자 인섭이 당황해서 찬양의 상대를 바꿨다.

“이우연 씨는 물론 당연히 엄청 잘생기셨습니다.”

“어디가 그렇게 잘생겼는데요?”

이우연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추궁했다.

“다…?”

인섭이 진심을 다해 대답했다.

이우연 그 빌어먹을 놈은 하다못해 손톱까지 예쁘다며, 김 대표가 짜증 섞인 투로 토로했었다. 누구보다 이우연의 몸 구석구석을 잘 아는 인섭도 동조하는 바였다. 이우연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하네요.”

“그런데 거울 보면 본인 잘생긴 거 아시지 않아요? 모를 리가 없는데. 딱 하루만 그렇게 생겨 봤으면 좋겠다.”

김강우가 솔직하게 부러움을 토로했다. 인섭은 얼른 또 강우 씨도 잘생기셨어요, 하고 상대를 칭찬했다.

이우연은 물을 마시며 사귀는 사람을 앞에 두고 다른 남자 칭찬을 일삼는 괘씸한 연인을 지그시 응시했다.

점원이 음식을 하나씩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와. 여기 진짜 맛있네요. 태어나서 먹어 본 음식 중에 제일인 거 같아요.”

찬을 맛본 김강우가 찬사를 늘어놓았다.

“입맛에 맞으시니 다행이네요.”

인섭을 위해 이우연이 알아낸 한식당이었다. 김강우가 마음에 들건 말건 이우연에게는 손톱만큼도 중요하지 않았다.

“매니저님은 입맛에 안 맞으세요?”

김강우가 인섭을 보며 물었다.

“아니요. 잘 맞아요.”

“그런데 왜 그렇게 못 드세요. 이것 좀 드세요.”

김강우가 매운 갈비찜을 인섭에게 건네주었다.

“…고맙습니다.”

인섭은 고기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매운 것은 더더욱.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호의로 준 찬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컵에 물을 가득 따라 놓고 먹을 준비를 하는데 이우연이 젓가락을 내밀었다.

“내가 먹어도 되죠?”

인섭이 어, 하는 사이에 이우연이 갈비찜을 덜어 갔다. 이우연은 굉장히 깔끔한 성격이었다. 전골이나 찌개를 같이 나눠 먹는 한국 문화를 썩 좋아하지 않아 그런 류의 음식점은 가지도 않았다. 그런 그가 다른 사람의 반찬을 가져가서 먹는 모습을 인섭은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김강우가 제 앞에 놓인 갈비찜을 이우연에게 밀어 주었다.

“여기 많이 있어요. 다 드세요.”

“아닙니다. 강우 씨 많이 드세요.”

이우연이 도로 반찬을 김강우에게 밀어냈다. 그러고는 인섭이 좋아하는 반찬들을 골라서 그의 앞으로 몰아주었다.

“많이 먹어요.”

“네. 많이 먹고 있습니다.”

인섭의 대답을 듣고도 이우연은 인섭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원래도 입이 짧지만 요즘 들어 부쩍 더 먹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 맞다. 매니저님 미국에서 오셨다고 했죠. 그럼 한국 음식 입에 잘 안 맞으시겠네요. 고생 많으시겠어요.”

김 대표에게 대충 언질을 들어 뒀는지 김강우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에요. 이젠 익숙해졌습니다.”

저를 걱정해 주는 말에 인섭이 배시시 웃어 보인다. 이우연은 말없이 젓가락을 움직였다.

“나중에 저 미국 놀러 가면 매니저님 집에 놀러 가도 돼요?”

김강우의 스스럼없는 성격은 김 대표를 연상시켰다. 처남이 아니라 그의 친동생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닮아 있었다.

“아, 저기….”

인섭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미국으로 언제 돌아가게 될지 몰랐다. 아예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다. 인섭이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물거리자 이우연이 끼어들었다.

“매형 돈 많으시잖아요. 호텔비 내 달라고 하세요.”

“에이, 아무리 친해도 이젠 남인걸요.”

오늘 처음 본 남에게 재워 달라는 말을 하는 주제에 잘도 지껄인다고 생각하며 이우연은 물을 마셨다

후식으로 나온 수박을 먹으면서 김강우는 시답잖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인섭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얼굴로 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살짝 벌어진 인섭의 입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우연은 재킷 주머니에 넣어 둔 담배를 꺼냈다.

“담배 피우세요?”

김강우의 물음에 이우연이 담배를 입에 물며 가끔요, 하고 대답했다.

“최근에 안 피우셨잖아요.”

최인섭이 설핏 입매를 찌푸리며 말했다.

이우연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웃었다. 빨고 싶은 건 따로 있지만 주인이 빨게 두질 않으니 방법이 없었다. 당분간은 인섭이 제 정액을 먹을 거 같지도 않고.

“제가 담배 피우는 거 싫어요?”

이우연은 하고 싶은 말 대신 다정하게 다른 질문을 던졌다.

“싫은 게 아니라…. 건강에 안 좋으시잖아요.”

진심으로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이우연이 바로 담배를 집어넣었다.

“매니저님 말씀대로 할게요.”

김강우가 와아, 하며 경탄에 찬 눈으로 인섭을 보았다. 이우연 급의 배우가 어려 보이는 매니저의 한마디에 피우려던 담배를 집어넣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사실 매니저님이 이 회사의 숨겨진 실세라든지?”

“잘 보셨네요.”

김강우의 농담을 이우연이 거들었다.

“인섭 씨 알고 보면 엄청 무서운 분이시거든요.”

“아닙니다. 그게 무슨….”

인섭이 바로 반박했지만 김강우는 이미 이우연의 말에 오오, 하며 넘어가 버린 후였다.

“전에 한번 술자리에서 시비가 붙은 적이 있거든요. 인섭 씨가 나서시니 일시에 정리가 되더군요. 이후로 전 인섭 씨 말씀은 절대로 거스르지 않아요.”

“무술 유단자, 뭐 이런 건가요? 숨겨진 고수처럼?”

김강우가 흥미진진한 무협지를 읽는 소년처럼 상기된 얼굴을 했다.

“글쎄요. 본인은 그런 말씀은 통 안 하셔서.”

“아니에요! 이우연 씨가 농담하시는 겁니다. 얼른 아니라고 말해 주세요.”

인섭이 식은땀을 흘리며 이우연에게 정정을 요구했지만 소용없었다.

“강우 씨도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김강우가 바짝 군기가 든 이등병 같은 자세로 대답했다. 인섭은 울상을 하고 아니라고 반박했지만 이미 김강우의 뇌리에는 최인섭 고수설이 콱 박히고 말았다.

“어디서 배우신 거예요? 아, 이런 건 비밀로 하시는 건가.”

“배운 적 없어요.”

“안 배웠는데 스스로 터득하신 거예요?”

“아닙니다. 정말….”

인섭은 이우연을 돌아보았다. 그는 눈을 반쯤 내리감은 채 물을 마시고 있었다. 소년 같은 얼굴로 미소를 띠고.

인섭은 한숨을 삼켰다. 저럴 때의 이우연은 말려 봤자 소용이 없었다.

“슬슬 일어날까요.”

이우연이 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인섭이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차 시동 걸어 두고 기다리겠습니다.”

김강우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대답했다. 인섭은 한숨을 내쉬며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로 걸어갔다. 주머니에서 가글을 꺼내 입을 헹구고 손을 씻었다. 그러고는 거울에 비친 얼굴을 확인했다.

숨겨진 고수라니.

희멀건 낯짝을 보고도 어떻게 그런 말을 믿을 수 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차라리 정말 숨겨진 능력을 지닌 초능력자라면 강영모를 찾아가 함부로 입을 놀렸다간 큰일이 날 거라고 경고라도 날려 줄 텐데.

“그러면 정말 좋겠다….”

“뭐가 좋아요.”

중얼거린 혼잣말 뒤에 들려온 목소리에 인섭은 화들짝 놀랐다. 이우연이 화장실 문을 닫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금방 나가려고 했습니다.”

이우연이 그래요? 하고 대답하며 화장실 문을 잠갔다. 딸깍, 하고 울리는 금속성 소리에 온몸의 근육이 일시에 긴장했다.

“식사는 맛있게 하셨어요?”

“덕분에 잘 먹었습니다.”

“평소보다 못 드시는 거 같던데. 입맛 없어요?”

인섭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우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여름이라 그런 거 같습니다.”

“그럼 여름 끝나고 나면 다시 올까요?”

이우연의 말에 인섭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혹시 일부러 여기 오려고 일찍 출발하신 건가요?”

평소보다 이른 출발 시간이었다. 의아하긴 했지만 인섭은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순순히 그의 말을 따랐다.

“아니요.”

이우연이 한 발 다가오며 말을 잇는다.

“인섭 씨 조금이라도 일찍 보고 싶어서 일찍 만나자고 한 건데.”

폐쇄된 좁은 공간에 둘만 있으니 슬슬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느낌이었다. 인섭은 이우연의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우연이 웃으면서 그런 인섭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김강우 씨, 마음에 들어요?”

인섭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잘은 모르겠지만, 좋은 분 같습니다.”

“인섭 씨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네요.”

“제가 아니라 이우연 씨 마음에 들어야죠.”

“제 마음에 든 매니저는 이미 한 분 계셔서요.”

“감사합니다. …저는 나가 보겠습니다.”

인섭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우연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그렇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온몸의 털이 곤두설 만큼 의식되었다. 아까처럼 혼자 의식하고 김칫국을 마실까 봐 민망했다.

“그러세요.”

이우연이 한발 뒤로 물러서 주었다. 인섭은 그에게 닿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옆을 지나갔다. 잠겨 있는 문을 열려고 손을 뻗은 순간, 이우연이 먼저 문고리를 움켜쥐었다.

“잠시만요.”

나직한 음성이 인섭을 불러 세웠다. 발에 족쇄가 감긴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또 어디에 머리카락이 붙어 있습니까.”

인섭이 애써 침착한 척 제 목덜미를 더듬으며 물었다.

“뭐 하나만 물어볼게요.”

이우연의 음성이 바싹 뒤로 붙어 섰다. 인섭은 감히 뒤돌아보지도 못하고 고개만 몇 번 끄덕였다.

“미국에서는 어땠어요?”

“네?”

선뜻 이해되지 않는 질문에 인섭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아슬아슬하게 닿을 거리에 서 있는 이우연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미국에서는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져서요. 식생활이라든가.”

아까 김강우가 했던 말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한국계라서 한식은 종종 먹었습니다. 아직 매운 건 좀 어렵긴 하지만 괜찮습니다. 많이 익숙해졌어요.”

“다른 건 불편하지 않아요?”

인섭은 고개를 내저었다.

“불편한 거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왜….”

뭔가 떠올렸는지 심기 불편한 기색으로 이우연은 낮게 혀를 찼다. 그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선선히 웃으며 말을 잇는다.

“그래요. 마음에 걸리거나 문제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요. 내가 다 해결해 줄 테니까.”

다감한 말투였지만 해결해 준다는 말이 유독 서늘하게 다가왔다. 마치 그런 것이 있으면 모조리 없애 버릴 것만 같았다. 인섭은 역시 강영모에 관한 얘기는 절대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럼 저는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이우연은 손수 문을 열어 주었다. 인섭이 나가고 나가 이우연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흔적도 없이 스러졌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주차장에 도착하자 김강우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김강우 씨야말로 수고 많으셨어요. 첫 출근인데 피곤하시겠네요.”

오늘 하루만 열 개의 무대 인사를 돌고 올라온 것이다.

“아닙니다. 제가 체력 하나는 정말 좋습니다.”

그 말을 증명하듯 김강우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 하나 없어 보였다. 김강우는 여러모로 인섭을 보조하기에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럼 내일 뵙죠. 스케줄은 인섭 씨가 알려 주실 겁니다.”

“네. 아까 핸드폰으로 이번 주 일정 다 보내 주셨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김강우가 싹싹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내일 봬요.”

최인섭도 벨트를 주섬주섬 풀며 차에서 내리려고 했다.

“형님은 댁이 어디세요? 제가 이 차로 데려다 드릴게요.”

인섭을 무림 고수쯤으로 여기는지 김강우는 아까부터 인섭을 꼬박꼬박 형님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렇게 부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뭐라고 불러 드릴까요? 형은 너무 격식 없는 거 같은데.”

이런 쪽으로는 면역이 없는 인섭이 도와 달라는 눈으로 이우연을 바라보았다.

“그냥 아까처럼 매니저님이라고 불러요.”

이우연이 대답했다.

“그건 또 너무 거리감 느껴지잖아요. 얼른 친해져야죠. 그냥 형님이라고 할게요. 그리고 저한테 말 놓으세요. 제가 세 살이나 어린데.”

“네. 천천히 놓겠습니다.”

인섭이 어색하게 웃는 낯을 하고 대답했다.

“제가 차로 데려다 드릴게요. 그래도 되죠?”

김강우가 이우연을 보며 물었다.

“회사에서 지급해 준 차지 제 차는 아닙니다. 마음대로 쓰셔도 돼요.”

이우연의 대답을 들은 인섭이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회사 차니까 절대로 사적인 일에 쓰시면 안 됩니다. 이우연 씨 스케줄 끝나면 바로 회사로 반납하시는 게 좋습니다. 아무래도 큰 차라 세워 둘 곳도 마땅치 않으니까요.”

인섭의 진지한 충고에 김강우가 입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죽이 척척 잘 맞는 둘은 보며 이우연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저는 여기서 걸어가면 됩니다. 강우 씨 차 반납하고 돌아가세요.”

걸어갈 거리는 아니었다. 착해 빠진 인섭이 일부러 김강우를 배려해서 하는 소리였다.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이우연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봬요.”

김강우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우연이 차에서 내리고 최인섭이 뒤따라 내렸다. 차가 출발하고 나자 이우연이 인섭의 어깨를 두드렸다.

“잠시 올라오실래요? 드릴 거 있어요.”

“지금요?”

“싫으면 그냥 가셔도 돼요. 억지로 권하는 거 아니니까.”

“아, 아닙니다. 그런 건 아닙니다.”

인섭은 하는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도 인섭은 이우연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조마조마했다. 자고 가라고 하면 뭐라고 하지. 내일 김강우가 차를 가져올 텐데, 어떻게 둘러대야 할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채연서와의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아직도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저….”

말을 건네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먼저 성큼 내린 이우연이 인섭에게 따라 내리라고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인섭은 엉겁결에 이우연을 따라 내렸다.

이우연이 현관문 비번을 눌렀다. 삐리릿,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인섭은 손끝을 움칫 움츠렸다.

“여기서 잠깐 계세요.”

이우연이 현관문의 스토퍼를 내리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뜻밖의 상황에 인섭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우연이 갈색 종이봉투를 들고 바로 나왔다.

“저번에 녹음한 오디오 북이에요. 가편집본이긴 한데 최대한 빨리 좀 달라고 부탁드렸더니 어제 받았네요.”

이우연이 봉투를 내밀었다. 인섭은 두 손으로 봉투를 받아 들었다.

“인섭 씨. 그때 제가 책 읽어 드리니까 바로 잠드시더라고요. 어제 못 주무셨다면서요. 혹시 도움이 될까 해서요.”

“아, 네…. 감사… 합니다.”

최인섭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김칫국을 너무 많이 마셔 배가 부른 기분이었다.

“그,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인섭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우연이 현관문에 기대어 인섭 씨, 하고 그를 불러 세웠다. 인섭이 봉투를 끌어안은 채로 뒤돌아보았다.

“내가 뭐 해 줬으면 하는 거 있어요?”

“네?”

“원하는 거 있으면 말해 봐요.”

이우연은 다정했다. 적어도 자신에게는 꾸며 낸 다정함을 보여 주진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인섭은 눈을 깜빡이며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지나치게 단것을 먹으면 속이 울렁거리고 현기증이 일었다. 지금 눈앞의 이우연이 그랬다. 지나칠 만큼 다정했다.

“…없습니다.”

인섭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평소와 다른 이우연의 태도에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자꾸 좋지 않은 생각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생각나면 말해요. 언제든 상관없으니까.”

“감사합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인섭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봉투를 열어 보았다. 이우연의 말대로 시디가 들어 있었다. 착잡한 기분이었다. 그가 자신을 생각해 챙겨 준 선물이니 마땅히 기뻐야 하는데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아 미안했다.

하필 그 장면을 본 다음 날이라니….

“아니야.”

인섭은 고개를 내저었다. 사람의 호의를 그런 식으로 호도하는 것은 비겁한 행위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정류장으로 가던 길에 인섭은 이우연에게 문자를 보냈다.

「선물 감사합니다. 잘 들을게요. 우연 씨도 혹시 원하시는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 답 문자가 왔다.

「내 꿈 꾸세요, 그럼.」

인섭은 우두커니 서서 이우연에게서 온 문자를 읽어 보았다. 다디단 문자를 곱씹을 때마다 가슴 부근에 뜨끔한 통증이 퍼졌다.

“방송국 처음 와 보신 건가요?”

인섭의 물음에 방금까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김강우가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릴 때 매형, 아니 대표님이랑 온 적 있는데 커서는 처음이네요. 신사옥은 처음이기도 하고요. 엄청 좋아졌네요.”

오늘은 방송국 스튜디오 촬영이 있는 날이었다. 보통 매니저는 대기실에서 기다리거나 차에서 대기했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김강우를 위해 방송국 견학을 하는 중이었다.

“연예인 많이 볼 수 있겠네요.”

인섭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돌도 볼 수 있어요?”

“네.”

“와, 죽인다. 형님은 너무 자주 보셔서 아무렇지도 않으시죠?”

인섭은 사실 다른 연예인은 잘 알지 못했다. 누가 인기가 좋은지, 누가 예쁜지, 혹은 누가 요즘 대세인지도 몰랐다. 연예인을 자주 봐서 익숙해진 게 아니라 이우연 외에는 관심이 없는 터였다.

“아무래도 그렇죠.”

인섭은 대충 둘러댔다. 사실대로 털어놨다가는 스토커 매니저로 보이기 딱 좋았다.

“그래도 좋아하는 배우나 아이돌 보시면 기분 좋으시죠?”

“…네. 그렇죠.”

매일 보고 있었다. 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목하 열애 중이었다.

“좋아하는 연예인 보면 어떻게 하세요?”

“속으로 좋아합니다.”

“저도 그렇게 할게요. 어! 저기, 저기!”

대답하기 무섭게 김강우가 호들갑을 떨며 로비를 가로질러 걷는 아이돌을 가리켰다. 인섭은 얼른 김강우의 손을 내려 주며 어색하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김강우가 활짝 웃으며 사과했다. 솔직하고 밝은 성격이었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었다. 김 대표가 가장 아끼는 처남이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았다.

“형님 목마르지 않으세요? 제가 커피 사 드릴게요.”

인섭은 카드를 내밀었다.

“이거로 결제하시면 됩니다. 회사에 청구하면 되니까.”

“네. 알겠습니다. 뭐로 드실래요?”

“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면 됩니다. 저쪽으로 오시면 벤치 있어요. 거기로 오시면 돼요.”

인섭이 야외 정원에 놓인 벤치를 가리켰다. 김강우는 카드를 받아 들고 콧노래를 부르며 사라졌다.

인섭은 밖으로 나가 벤치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피곤이 밀려들었다.

이우연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친절하고 다정하게 굴었다. 게다가 김강우까지 같이 다녀 이상한 사진을 찍힐 염려도 없었다. 객관적으로 평화로운 상황임에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채연서 씨를 왜 만난 겁니까. 제가 모르는 사정이 있는 건가요. 어째서 저한테 말씀하지 않으세요. …갑자기 이렇게 다정하게 해 주시는 이유는 뭔가요.

묻고 싶은 것들이 쌓여 갔다. 하지만 막상 이우연을 보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사람을 용감하게 만드는 줄 알았는데 정반대였다. 가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을 갖게 되자 욕심의 크기만큼 두려움이 자라났다.

인섭은 한숨을 쉬다가 손을 움켜쥐었다.

“…물어보자.”

혼자 아무리 고민해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인섭은 핸드폰을 꺼내 결심이 흐트러지기 전에 이우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스케줄 끝나고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스튜디오 촬영 중에는 핸드폰을 꺼 둘 테니 나중에야 문자를 확인할 것이다. 이우연에게서 어떤 대답이 나올지 몰라서 두렵긴 해도 그래도 지금보다는 나을 것이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인섭은 문득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

저만치 떨어져 있던 상대와 눈이 마주쳤다. 인섭은 얼른 눈을 피했지만 이미 그쪽도 인섭을 알아본 후였다.

“이게 누구야.”

강영모가 반갑다는 듯이 손을 번쩍 들었다. 담배를 피우러 나온 것인지 한 손에는 담뱃갑이 들린 채였다.

“안녕하세요.”

인섭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대본을 옆구리에 끼고 강영모가 인섭에게 걸어왔다.

“이우연이 방송 있나 보지?”

“네.”

“여기 출연 금지 아니었나?”

강영모가 돌돌 만 대본을 손바닥에 탁탁 내리치며 말했다.

“거기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습니다.”

“그럼 뭘 들었어?”

“…….”

인섭이 말할 리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강영모는 능글능글 웃으며 인섭을 괴롭혔다.

“그럼 내가 들은 재미있는 얘기 해 줄까. 내가 아는 기자가 몇 있거든.”

인섭은 그대로 자리를 뜨고 싶었다. 하지만 이 사람과 마무리를 지어야 할 얘기가 있었다.

“무슨 얘기 말씀이십니까.”

인섭이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묻자 강영모가 의외라는 듯이 눈썹을 휘어 올렸다.

“이우연이 그전에 그렇게 여자를 많이 만나고 다녔다던데.”

“그러신가요.”

알고 있던 사실이다. 흠 없고 완벽하다고 알려진 배우 이우연에게 그나마 붙는 꼬리표가 여자였다.

“요 근래에는 뚝 끊겼다고 하더라고.”

“그러시군요.”

요 근래가 언제부터인지 인섭은 알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왜일까.”

강영모가 대본으로 인섭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웃었다.

“그 이유를 저한테 물으셔도 저는 대답해 드릴 수 없습니다. 회사 방침이기도 하지만 정말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 몰라. 너는 알잖아.”

인섭은 속으로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동안 강영모를 다시 만나면 그에게 해 줄 말을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시뮬레이션했었다.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강영모가 뭐? 하고 되물었다.

“이런 식으로 지레짐작하시는 거 이우연 씨께 매우 실례되는 일입니다. 이우연 씨가 지금 사귀는 분께도 마찬가지고요.”

“채연서? 채연서가 실제로 누구랑 사귀는지….”

거기까지 말해 놓고 강영모도 주변을 살폈다. 제아무리 강영모라도 한 방송국의 드라마 본부장을, 그것도 차기 사장으로 거론되는 사람을 적으로 돌릴 만큼의 배짱은 없는 것이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데.”

강영모가 주변을 의식한 듯 아까보다 목소리를 낮추었다.

“네. 다들 알고 계십니다.”

인섭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이우연 씨랑 사귀고 계시잖습니까.”

“어쭈. 비루먹은 개처럼 부들부들 떨던 새끼가 많이 컸다. 이우연이가 잘나가니까 네가 뭐라도 된 것 같냐?”

강영모가 대본으로 인섭의 이마를 툭툭 찔렀다. 공교롭게도 그 사건 이후로 강영모는 출연한 작품마다 결과가 썩 좋지 않았다. 뚜렷한 하향세를 타기 시작한 것이다. 흥행 보증 수표였던 그가 출연하는 작품마다 말아먹는다는 국밥 배우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열등감으로 변질된 오만만큼 위험한 감정은 없었다. 강영모를 싫어하긴 해도 절대로 그 부분만큼은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인섭은 생각했다.

“저는 그냥 별 볼 일 없는 사람입니다.”

인섭은 최대한 상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노력했다.

“이우연 씨가 뭐가 부족해서 저 같은 사람이랑, 그것도 남자랑 그렇게 되겠습니까. 이우연 씨가 그동안 만난 분들 생각하면, …저 같은 건 말이 안 되지 않나요.”

이상했다. 거짓말을 하는데도 사실을 말하는 기분이었다. 인섭은 떨리는 손을 마주 잡았다.

“그리고….”

인섭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저도 진지하게 만나는 분 있습니다.”

인섭의 말에 강영모가 피식 조소를 흘렸다. 그가 담배를 꺼내 입에 문 다음 불을 붙였다. 그러고는 담배 연기를 인섭의 얼굴에 후욱 불어 내며 얄밉게 빈정대기 시작했다.

“내가 잠깐 혹할 뻔했거든? 근데 방금 그 말 때문에 신빙성이 바닥이 됐어. 진지하게 만나는 분? 그래. 사진 있어? 사진이라도 보여 줘 봐.”

“…….”

인섭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강영모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흐흐, 웃음을 흘렸다.

“시발. 누굴 병신으로 아나. 아주 그냥 사람을….”

강영모가 대본을 치켜들었다. 순간 인섭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있습니다. 증거.”

“뭐?”

“얼마 전에 기사가 났습니다. 이우연 씨가 다친 고양이의 병원비를 내 줬다는.”

“그 꼴같잖은 홍보 기사? 요즘 기자 새끼들은 얼마 받고 그런 삼류 구닥다리 소설을 써 주냐.”

인섭이 고개를 내저었다.

“동물 병원 직원분이 직접 올린 글을 바탕으로 쓴 기사입니다. 지금도 그 글은 찾아볼 수 있으실 겁니다. 이게 그 기사이고요.”

인섭은 얼른 기사를 찾아서 강영모의 앞으로 내밀었다. 강영모가 눈가를 찌푸린 채 기사를 대충 훑었다.

“이게 뭐 어쨌다는 건데.”

“그 고양이를 데려간 사람 중 하나가 접니다. 다른 사람이 제가 만나는 분이고요. 기사에 적혀 있는 대로요.”

죄송합니다. 윤아름 씨. 정말 죄송합니다. 이 죗값은 반드시 치르고, 은혜 역시 기필코 갚겠습니다.

인섭은 속으로 사죄의 말을 재차 되뇌었다.

“그리고 이게 그 고양이 사진입니다.”

인섭은 얼마 전에 동물 병원에 가서 존과 같이 찍은 사진을 보여 주었다. 강영모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인섭은 사진을 넘겨 윤아름이 끌어안고 있는 다른 고양이 사진도 보여 주었다. 그녀의 얼굴이 나오는 건 아니었지만 누가 보더라도 고양이를 끌어안은 손은 여자 것이었다.

“이제 괜한 오해는 푸셨으면 좋겠습니다.”

인섭이 커다란 눈으로 강영모를 직시했다. 눈이 마주치자 강영모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타악.

그는 손에 든 대본으로 있는 힘껏 인섭의 얼굴을 후려쳤다. 몇 번 더 반복해서 그는 대본을 휘둘렀다. 인섭은 일부러 피하지 않고 그의 화풀이를 받아 주었다.

“병신 같은 매니저 주제에! 니까짓 게 나를 가르치려고 들어?”

눈앞이 시큰할 정도로 아팠지만 인섭은 입술을 질근 깨물고 참았다. 다행이다. 이렇게 화를 낸다는 것은 이렇다 할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러니 분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다.

“이우연이라고 언제까지 잘나갈 줄 알아? 바닥으로 떨어지는 거 한순간이야. 그 새끼라고 천년만년 주연 배우일 줄 아냐고!”

둘둘 만 대본이 얼굴을 정통으로 후려쳤다. 코피가 터졌다. 인섭은 코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두 손을 모으고 묵묵히 서 있었다. 강영모는 피가 묻은 대본을 근처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두고 보자고.”

강영모는 그대로 씩씩거리며 사라졌다.

인섭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시큰거리는 코를 막았다. 이걸로 강영모가 조금이라도 의심을 거두는 계기가 된다면 좋을 텐데.

그렇게 되면 다행이지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윤아름에게 미안했다. 이름을 말한 것도 얼굴을 보여 준 것도 아니었지만, 그녀의 호의를 이용한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자신 때문에 좋지 않은 일에 휘말릴 뻔한 이우연에게 미안했다.

저 같은 거랑 이상하지 않느냐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무의식중에 속마음을 내뱉은 것이다. 이우연의 옆에 설 때 어울리는 건 고사하고 그에게 폐가 되는 건 아닌가 늘 전전긍긍하게 된다. 어느 날 이우연이 자신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하면 대체 왜 그러냐는 의문보다는 그렇구나, 하고 스스로 납득해 버릴 것 같았다. 이런 초라한 감정을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손가락 사이로 주르륵 코피가 흘러내렸다. 인섭은 얼른 고개를 들었다가 저쪽에서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강우와 눈이 마주쳤다.

“……!”

온몸의 피가 발아래로 사악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던 걸까.

“죄, 죄송합니다. 말리려고 했는데 대표님이 무슨 일 생기면 함부로 끼어들지 말라고 거듭 당부하셔서….”

적잖이 당황했는지 김강우도 평소답지 않게 어두운 낯빛을 하고 말을 더듬었다. 인섭이 굳은 채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김강우가 괜찮으세요? 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습니다. 걱정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파리하게 질린 인섭은 간신히 대답했다.

“아니에요. 형님이 뭐가 죄송해요. 강영모 저놈 대체 왜 저래요. 왜 형님이 여자 친구 있다는 말에 저러는 거예요? 미친 거 아니에요?”

다행히 직전의 이야기는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밀려드는 안도감에 힘이 풀린 인섭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김강우가 커피를 내려놓고 와서 인섭을 얼른 일으켜 세웠다.

“병원 가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119 부를까요?”

인섭의 건강 상태에 대해 미리 언질을 들었는지 김강우가 놀라서 물었다. 인섭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긴장이 풀려서.”

긴장이 풀리자 눈물이 비죽 솟았다. 인섭은 무릎에 고개를 묻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절대 울지 말라는 이우연의 말이 떠오른 터다. 그리고 저보다 어린 김강우 앞에서 이런 일로 울고 싶지 않았다.

“정말 괜찮으세요? 맞으신 데 잘못된 거 아니에요? 이럴 줄 알았으면 동영상이라도 찍어 놓을걸.”

누가 볼세라 얼른 눈물을 닦고 인섭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님 죄송해요. 제가 말렸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잘하셨어요.”

강영모 성격에 누가 끼어들었으면 일이 더 커졌을 게 분명하다. 차라리 화풀이를 한 번 당하고 넘어가는 게 낫다.

“강우 씨.”

인섭이 진지하게 부르는 음성에 김강우가 네, 하고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보셨다시피 강영모 씨랑 이우연 씨, 사이 안 좋아요. 저번에 드라마 촬영하면서 일이 좀 있었습니다. 회사에서도 많이 신경 쓰고 있습니다.”

아무리 신경을 써도 오늘처럼 방송국에서 마주치는 일은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강영모와 마주친 게 이우연이 아니라 자신이라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인섭은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대표님도 그 말씀 하시더라고요. 강영모 저 사람 특히 조심하라고.”

김강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덧붙였다.

“혹시라도 이우연 씨랑 부딪치게 되면 끼어들 생각 말고 본인에게 전화하라고 하셨고요. 죄송해요. 신신당부하셔서 그렇게 하긴 했는데 저도 기분이 너무 안 좋아요.”

“아닙니다. 제가 괜히….”

멎었던 코피가 다시 흘러내렸다. 인섭은 얼른 고개를 뒤로 젖혔다.

“많이 다치신 거 아니에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정말 괜찮아요.”

인섭이 웃어 보였다. 김강우가 쩔쩔매며 휴지로 인섭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이우연 씨가 한 말, 다 농담이라는 거 이제 믿으시겠네요.”

인섭의 말에 김강우가 어휴, 하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지금 그런 얘기가 나와요. 그리고 전 형님이 일부러 져 주신 거 다 알고 있어요. 강영모 지가 연예인이면 단가.”

김강우가 씩씩거리며 인섭의 편을 들었다. 솔직하고 성품이 착한 청년이었다. 인섭은 김 대표가 왜 김강우를 처남 중에 가장 아끼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인섭이 김강우를 보며 입을 뗐다.

“네. 뭐든 말씀만 하세요.”

“오늘 강영모 씨하고 있었던 일 이우연 씨께는 비밀로 해 주세요. 대표님께도 마찬가지고요.”

김 대표의 귀에 들어가면 이우연도 알게 될 확률이 컸다.

“그렇지만….”

“정말 별거 아니에요. 강영모 씨 원래 스태프들하고도 다툼이 잦아요. 이런 일로 걱정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인섭이 커다란 눈을 하고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김강우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인섭은 고개를 숙였다.

“부탁드립니다.”

“형님, 이러지 마세요.”

김강우가 얼른 인섭을 일으켜 세웠다.

“이러시면 제가 너무 나쁜 놈 된 거 같잖아요. 안 그래도 아까 보고만 있어서 미안해 죽겠는데.”

김강우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알겠어요. 형님 말씀대로 할게요. 매형한테도 말씀 안 드리는 게 양심에 찔리긴 하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그냥 달려들어서 말릴걸.”

“정말 감사합니다.”

“대신 형님도 제 부탁 들어주셔야 해요.”

“부탁이요?”

인섭이 손수건으로 코를 막은 채로 눈을 치떴다. 김강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뭐, 어려운 건 아니고요.”

김강우의 시원한 눈매에 웃음이 걸렸다.

“맛있게 드세요.”

고기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점원이 장신의 남자를 힐긋힐긋 곁눈질했다. 뭔가 한마디 더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점원은 바로 문을 닫고 나갔다.

“제가 굽겠습니다.”

김강우가 얼른 집게를 집어서 고기를 불판 위에 올렸다.

치지지직. 고기 익는 소리만 방에 울려 퍼졌다.

“…네가 여긴 왜 있냐.”

창백한 낯을 하고 침묵을 지키던 차 실장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회식에 참석한 건데 이유를 물으시면.”

이우연이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그러니까 매니저 회식에 네가 왜 있냐고.”

“그러는 대표님도 여기 계시네요?”

이우연이 김 대표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나도 네 매니저 했었잖아. 임시지만.”

“그리고 대표님은 물주고.”

차 실장이 김 대표를 돕는답시고 얼른 한마디 거들었다.

“맞아, 물… 뭐?”

김 대표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차 실장을 노려보았다.

“그럼 사원들이 노는 자리에 사장님을 껴 주는 이유가 따로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쯧쯧.”

“우리 회사 애들이 나랑 노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데.”

“대표님도 참 순진한 구석이 있단 말이야. 그 말을 믿고.”

“아닙니다. 전 대표님이랑 노는 거 정말 좋아합니다.”

인섭이 소심하지만 진중한 목소리로 두 사람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하. 그래. 나랑 노는 거 좋아해서 이우연이를 이 자리에 데려왔구나.”

김 대표가 소주병을 비틀어 따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인섭이 고개도 들지 못하고 대답했다.

“왜 형님한테 그러세요. 여기 같이 오자고 한 건 전데.”

김강우가 얼른 김 대표의 공격을 막아 주었다.

“그래. 강우야. 인섭이 데려온 건 잘했는데….”

김 대표가 소주잔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이우연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쟤는 대체 왜 온 거냐고.”

“저도 한잔하고 싶어서요.”

이우연이 소주잔을 슬쩍 내밀었다. 김 대표는 이를 부득 갈며 잔에 가득 소주를 부어 주었다.

“…너무 많이 드시지 마세요. 내일 인터뷰 있습니다.”

인섭이 조용조용하게 이우연에게 말을 건넸다. 이우연이 대답 대신 빙긋 웃으며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이우연은 오늘 인섭에게 문자를 받았다. 스케줄이 끝나면 시간을 좀 내 달라고.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이우연은 뛰듯이 방송국 복도를 걸었다. 처음이었다. 거리를 둔 후 인섭이 먼저 만나자고 한 것은.

이우연은 웃으며 대기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의자에 앉아 있던 인섭이 저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인섭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저만 두고 매니저님들끼리만 비밀 회동한다 하니까, 궁금해서 잠이 와야 말이죠.”

이우연이 소주잔을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흡사 소주 광고 포스터에서 튀어나온 듯한, 그림 같은 자태였다.

“비밀 회동이면 비밀로 하게 냅두지. 그걸 왜 따라오냐고.”

먹고 죽으라는 듯이 김 대표가 이우연의 소주잔에 다시 소주를 가득 부어 주며 투덜거렸다.

“얼마나 중요한 얘기를 하실지 궁금해서.”

이우연이 소주를 다시 단번에 삼켰다.

인섭은 감히 그와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제가 먼저 할 말이 있으니 시간을 내 달라고 해 놓고 내일로 미뤄 달라고 했으니 이우연을 볼 면목이 없는 것이다.

“매형이 수고한다고 한잔 사 주신다고 하셔서 제가 인섭이 형님도 부른 거예요.”

김강우가 구운 고기를 인섭의 앞접시에 놓으며 말했다.

김강우는 오늘 있었던 일을 함구해 주는 대가로 인섭에게 술자리에 같이 가자고 부탁했다. 두 번째 매형, 그러니까 차 실장에게서 인섭을 잘 챙겨 주라는 연락을 받기도 했거니와 인섭과 한번 따로 술자리를 갖고 싶기도 했던 터다. 그래서 오늘 마침 두 매형과 일이 끝나면 한잔하기로 했던 것을 떠올리고 인섭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

당연히 흔쾌히 수락할 거라고 생각했던 인섭이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승낙한 것이 의외였고, 이우연이 따라온 것은 더더욱 의외였지만.

“술자리는 사람 많을수록 더 좋잖아요. 안 그래요?”

이우연의 본모습을 알 리 없는 김강우가 속 편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사람 나름이지.”

차 실장이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꿍얼거리면서 소주를 마셨다.

“환자가 술 마셔도 돼요?”

이우연이 짐짓 걱정하는 투로 물었다.

“상처 소독하는 거야. 소주는 괜찮아. 약주란 말이 괜히 있냐. …인섭 씨. 뭐 쓰는 거야.”

“소주의 효능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

수첩에 글자를 적어 넣던 인섭이 펜을 움켜쥔 채로 대답했다.

“나 다치면 의사랑 상의도 없이 소주 먹이시겠네.”

이우연이 손가락으로 인섭의 수첩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복용량 같은 게 있는 건가요?”

인섭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모두들 웃음을 터트렸다.

“꼭 의사한테 처방받은 대로만 복용시켜야 해요.”

이우연만 웃지 않은 채로 그렇게 말해서 인섭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인섭이 큰일이네. 저렇게 순진해서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헤쳐 나가려고.”

“걱정 마세요. 저랑 잘 헤쳐 나가면 되니까.”

최인섭의 인생에서 가장 험난한 암초 역을 맡은 이우연이 해사하게 웃으며 대신 대답했다. 김 대표가 못 볼 꼴을 보았다는 듯이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일은 어때. 할 만해?”

차 실장의 물음에 김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 할 만해요. 저 오늘 연예인도 엄청 많이 봤어요.”

“연예인이 뭐 별거냐. 다 똑같은 사람이지.”

차 실장이 김강우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한참 어린 처남을 바라보는 시선에 애정이 묻어났다.

“저 사실 아직도 이우연 배우님 보면 신기해요. 너무 잘생겨서.”

김강우가 손으로 슬쩍 입을 가리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너무 잘생기긴 했지. 쓸데없을 만큼.”

김 대표가 고기를 전투적으로 씹으며 맞장구쳤다. 이우연이 가볍게 웃으며 술을 마셨다. 부드러워진 분위기에 처음엔 좌불안석이었던 인섭도 마음이 놓였는지 앞에 놓인 소주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형님은 주량이 어떻게 되세요?”

“나? 그냥 몇 잔. 잘 못 마셔.”

인섭의 대답에 김강우를 제외한 사람들이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둘이 말 놔? 언제부터?”

“오늘부터 놓기로 했어요. 그죠? 형님.”

“응.”

오늘 술자리 동참과 더불어 김강우는 제게 말을 놔 달라는 부탁도 곁들였다. 천천히 말을 놓겠다고 했던 인섭은 하는 수 없이 오늘부터 김강우에게 반말을 하게 되었다.

“둘이 많이 친해졌나 보네.”

이우연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소주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의 잔이 빈 것을 보고 김강우가 얼른 술을 채워 주었다.

“센스도 좋고, 성격도 좋으시고, 인섭 씨랑 잘 맞고. …좋은 매니저 구해 주셔서 감사해요. 대표님.”

이우연의 눈이 가느스름하게 휘었다. 김 대표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입 막기 편하다는 이유로 진창에 어린 전 처남을 끌어들인 게 아닌가 하는 후회가 더럭 찾아온 것이다.

“…강우 좋은 애다.”

차 실장이 이우연을 보며 침중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죽이지 말라는 말은 차마 김강우 앞에서 할 수는 없었다.

“방금 제가 한 말이 그건데요. 누가 뭐랍니까.”

“에이, 과찬이세요.”

김강우가 웃으면서 고기를 구웠다. 그는 고기가 익는 대로 사람들에게 적당히 나누어 주었다.

“형님은 안 드세요?”

인섭의 앞에 쌓인 고기가 하나도 줄지 않은 걸 보고 김강우가 물었다.

“어, 나는….”

인섭이 젓가락을 쥔 채로 적당한 말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면 돌아오는 반응은 대다수 비슷했다. 이 좋은 걸 왜? 고기를 안 좋아한다는 게 말이 돼? 진짜 맛있는 고기를 안 먹어 봐서 그런 건 아니고?

건강 때문에 기름진 음식을 피했는데 점점 그러다 보니 어느새 입맛이 그렇게 변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설명하자면 심장 문제부터 꺼내야 해서 인섭으로서는 편치 않은 주제였다.

“인섭 씨 고기 안 좋아해요.”

이우연이 인섭의 말을 대신했다.

“네? 고기를 안 좋아해요? 채식주의자, 뭐 그런 거예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먹을 수 있긴 해.”

인섭이 상추 세 개를 겹쳐 고기를 얹자 이우연이 인섭의 손을 이끌어 제 입에 쌈을 넣게 했다. 당황한 인섭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지만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을 상황이었다.

“네 손으로 싸 먹어. 멀쩡한 손 놔두고 뭐 하는 짓이야.”

아무리 김강우의 입을 틀어막을 수 있다 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애정 행각을 벌이는 이우연의 꼬락서니에 김 대표가 눈을 부라렸다.

“원래 남이 싸 주는 쌈이 제일 맛있는 거 모르세요?”

이우연이 웃으며 맞받아쳤다.

“배우님 이번에는 제가 싸 드릴까요?”

김강우가 눈치도 없이 상추에 고기를 얹으며 묻자 이우연의 웃음이 가늘어졌다. 옆에 있던 차 실장이 새파랗게 질려 굶주린 제비 새끼처럼 입을 떡 벌렸다.

“나! 나! 나 줘!”

“그래! 현규 주자. 우리 현규.”

김 대표가 김강우의 손에 들린 쌈을 차 실장의 입에 욱여넣었다.

“다른 매형도 싸 드리세요. 섭섭하시겠네.”

“아, 그래야겠다.”

김강우가 이번에는 김 대표에게 쌈을 싸서 건넸다. 김 대표는 오늘따라 이우연이 유독 미워 보인다고 생각하며 상추쌈을 우걱우걱 씹었다.

“다른 거 시켜 줄까요.”

이우연이 메뉴판을 펼쳐서 인섭에게 건넸다.

“괜찮습니다.”

“저녁도 별로 안 먹었잖아. 요즘 통 못 먹어서 어떡해요.”

이우연의 걱정 어린 말투에 김강우가 진심으로 감동했는지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배우님 보면 정말 신은 불공평한 거 같아요. 저렇게 잘생기셨는데 어쩜 성격까지 좋으실까요.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니에요?”

“…되게 공평할걸, 그거.”

차 실장이 오이를 오독오독 씹으며 중얼거렸다.

“아니에요. 다른 연예인들은 매니저한테 막 소리 지르고 그러더라고요. 벌써 몇 번이나 봤어요. 오늘도….”

무심코 말을 흘리던 김강우가 아차 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술을 마시던 이우연이 김강우에게 시선을 옮겼다.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인섭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덕분에 대화의 맥이 끊겼다. 인섭이 나가자 자연스럽게 대화는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그래서 희연 씨는 그놈이랑 아직도 만나는 거야?”

“에이, 누나 그 형이랑 헤어진 지가 언제인데요. 다른 사람 만나요.”

“줄기차게 만나긴 하는구나.”

“남자들이 이상하게 누나 따라다니면서 미친놈처럼 목매잖아요. 저는 진짜 이해 안 되지만. 어, 죄송해요. 두 분한테 그런 건 아닌데.”

“됐어. 그때 우리가 미친놈이었던 건 맞으니까.”

“맞아. 미친놈이었지.”

김 대표와 차 실장이 서로의 잔에 소주를 채웠다. 동병상련의 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두 사람은 마주 보며 잔을 비웠다.

“강우 너는 만나는 사람 없어?”

“얼마 전에 헤어졌어요.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주세요. 아이돌도 좋고.”

“떽. 연예인 만나지 마. 연예인하고 사귀는 거 아니야.”

차 실장이 어린애를 훈계하듯 엄한 표정을 지었다.

“듣는 연예인 섭하게.”

이우연이 장난스럽게 한마디 던졌다.

“하긴, 연예인은 대체로 연예인끼리 만나겠죠? 배우님도 채연서 씨 만나는 것처럼.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방송국에서 채연서 씨 지나가는 거 봤어요. 진짜 예쁘시더라고요. 요정 같으시던데.”

“그래요?”

이우연이 지구 반대편 아프리카에 사는 기린의 짝짓기 이야기라도 듣는 듯이 무관심한 얼굴로 대꾸했다.

“두 분이 진짜 잘 어울리세요. 선남선녀.”

김강우가 손가락을 치켜들며 말했다.

“하긴, 제 애인이랑 제가 잘 어울리긴 하죠.”

이우연의 말에 김 대표와 차 실장의 낯빛이 흐려졌다.

“불쌍한 인섭이.”

차 실장이 저도 모르게 한숨처럼 내뱉은 한마디에 김강우가 귀를 쫑긋 세우며 물었다.

“형님이 왜요?”

“아, 그러니까, 그게…. 인섭이가 사귀는 사람 때문에 마음고생을 좀 하는 거 같아서.”

어디 한번 들으면서 네놈도 마음고생해 봐라, 하는 심정으로 차 실장은 얼른 뒷말을 덧붙였다.

“얼른 헤어져야 할 텐데 말이야.”

“헤어져요? 여자 친구랑 진지하게 만나는 중이라고 하시던데요?”

김강우의 말에 술이 목에 걸린 김 대표가 쿨럭쿨럭 기침을 시작했다.

“뭐? 여, 여자 친구?”

차 실장이 김 대표의 등을 두드려 주며 되물었다. 김강우가 어물거리면서 네, 하고 대답했다. 혹시 자신이 말실수를 한 건가 덜컥 겁이 난 것이다.

“허허. …그래. 애인이랑 오래 만나는 거 같긴 하던데.”

김 대표가 이우연의 눈치를 살피며 얼른 김강우가 내뱉은 단어를 고쳐 주었다.

“오래 만나셨어요? 얼마나요?”

“얼마쯤 됐으려나.”

정확한 기간을 알 리 없는 김 대표가 말끝을 늘이며 이우연을 흘끗 쳐다보았다.

“햇수로 삼 년이요.”

이우연이 냉큼 대답했다.

“그럼 그 여친이랑 결혼하겠네요. 형님 같은 사람이 결혼 상대로 참 좋은데. 볼수록 괜찮은 분 같아요. 절대 한눈 안 팔고 속도 안 썩일 거 같지 않아요?”

이우연이 글쎄요, 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의외로 속 엄청 썩일 수도 있죠.”

이우연의 의미심장한 한마디에 김 대표와 차 실장이 안절부절못하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에이, 설마요. 형님처럼 착한 사람은 제가 살면서 못 봤어요. 사람 자체가 선하더라고요.”

이우연이 대답 없이 짧게 웃었다. 그때 화장실에 갔던 인섭이 돌아왔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싸한 것을 눈치채고 인섭이 눈을 껌뻑이며 물었다.

“무슨 얘기 중이셨어요?”

이우연이 인섭이 안쪽 자리로 들어갈 수 있도록 몸을 뒤로 젖히며 대꾸했다.

“인섭 씨, 뒷담.”

“…죄송합니다.”

인섭이 우두커니 서서 대뜸 사과했다.

“뭐가 죄송한데요?”

“제가 잘못한 게 있어서 그런 말씀 하셨을 테니까요.”

제 욕을 했다는 사람에게 사과부터 하는 인섭을 모두들 황망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우연은 느릿하게 웃음을 삼켰다.

“농담이에요. 앉기나 해요.”

이우연이 엉거주춤하게 선 인섭의 손목을 잡아서 제 옆에 앉혔다.

“이 세상에 욕할 인간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놔두고 인섭 씨 욕을 하겠어.”

차 실장이 침중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그가 가장 욕하고 싶어 하는 대상이 맞은편에 앉아 있는 터다. 이우연이 웃으며 테이블 옆에 달린 벨을 눌렀다.

“저 배 안 고픈데요.”

인섭이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안주가 아니라 술 시키려고요.”

“술? 남았는데?”

김 대표가 테이블에 놓인 소주를 가리켰지만 이우연은 본 척도 하지 않았다.

“부르셨어요?”

점원이 유독 들뜬 표정으로 문을 열며 물었다.

“같은 걸로 열 병이요.”

이우연이 테이블에 놓인 소주를 가리키며 말했다.

“뭘 그렇게 한꺼번에 시켜. 미지근해지게.”

“미지근해질 틈 없이 마시면 되죠.”

이우연이 점원에게 웃으면서 부탁드릴게요, 하자 점원이 후다닥 술을 가지러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점원이 술병을 쟁반에 얹어 나타났다.

테이블 옆에 빼곡히 놓인 술병을 김 대표와 차 실장이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점원이 나가자 이우연은 소주병을 들어 뚜껑을 돌렸다. 그러고는 테이블 구석에 엎어 놓은 맥주 컵을 집어 들어 소주를 콸콸 따르기 시작했다.

“강우 씨.”

“네?”

“우리 같이 일하고 나서 처음 갖는 술자리네요.”

“네. 그러게요.”

“반가워요.”

이우연의 눈웃음이 진해졌다. 언뜻 다정해 보이는 그 좆같은 웃음에 김 대표와 차 실장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이우연이 소주가 가득 담긴 컵을 김강우에게 건넸다.

“야, 애한테 무슨 술을 이렇게….”

차 실장이 말리려고 했지만 김강우는 괜찮다며 술잔을 덥석 받아 들었다.

“매형도 참. 저 어린애 아니에요. 이 정도로는 취하지도 않으니까 걱정 마세요.”

“그게 아니고….”

김 대표도 김강우를 말리려는 사이에 이우연은 이번에 인섭에게 잔을 건넸다.

“생각해 보니 인섭 씨하고도 제대로 된 술자리 갖는 건 처음이네.”

“그런가요.”

인섭이 술잔을 다소곳이 받았다. 이우연은 가득 술을 부었다. 그나마 양심이 있긴 한지 인섭에게 준 잔은 소주잔이었다.

“나도 따라 줘요.”

이우연이 맥주잔을 가져와 내밀었다. 김강우가 신나서 소주를 가득 채웠다.

“다들 왜 이래. 내일 스케줄 있어. 정신들 차려.”

김 대표가 정색했지만 이우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첫 잔은 원샷입니다.”

광고주가 봤으면 계약하자고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매달릴 만큼 산뜻하고 쾌활한 목소리로 이우연이 외쳤다. 하지만 차 실장과 김 대표는 보았다. 이우연의 눈가에 스친 비열한 웃음을.

“한잔 더 하실래요?”

“아, 모태여….”

김강우가 혀 꼬부라진 말을 중얼거리다가 그대로 테이블에 쿵 이마를 박았다.

“강우야, 괜찮냐?”

김 대표가 얼른 김강우를 일으켜 세웠지만, 완전 취해 버린 김강우는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하고 입맛만 다실 뿐이었다.

“갔어요?”

같이 술을 마셔 놓고 눈빛 하나 변하지 않은 이우연이 물었다.

“그래! 갔다. 완전 맛탱이가 가 버렸네. 됐냐?”

김강우의 뺨을 두드리던 차 실장이 버럭 소리 질렀다. 이우연이 쉿, 하고 소리를 낮추라는 시늉을 했다. 아까부터 눈이 가물가물하던 인섭이 어느새 이우연의 어깨에 고개를 대고 잠들어 있었다.

“깨우지 마세요. 간신히 재웠는데.”

이우연이 낮은 목소리로 차 실장을 을렀다.

“걔 재워서 어쩌려고.”

“어쩌긴 뭘 어째요. 당연히….”

이우연이 제 시커먼 속내를 털어놓기 전에 인섭이 번뜩 눈을 떴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맞은편에 앉은 김 대표와 차 실장을 발견하고 대뜸 고개를 조아렸다.

“죄성합니다.”

혀가 살짝 꼬인 발음으로 인섭이 두 사람에게 사과했다.

“뭐? 무슨 말이야.”

“인섭 씨. 뭐가 죄송해.”

“부족한 저를 믿고 일을 다시 맡겨 주셨는데 제가 일도 잘 모타고….”

“무슨 소리야. 인섭이 네가 일을 얼마나 잘하는데.”

“다 제 잘못입니다. 고양이도 못 하는데 운전도 모타고…. 심지어 전 후레놈이에요.”

알아듣지 못할 말에 들어본 적 없는 욕설까지 더해지자 두 사람은 당황했다. 그러자 인섭이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당혹감은 배가 되었다.

“인섭 씨. 울지 마. 잘못한 거 없으니까, 응?”

휴지를 건네주려는 차 실장의 손을 이우연이 단호하게 내리쳤다. 그러고는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인섭의 얼굴에 뒤집어쓰게 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울지 말라고 했지. 얼른 그쳐.”

이우연의 말에 인섭이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귀하고 소중한 보물을 누가 볼세라 감추는 사람처럼 이우연이 옷깃을 여미어 인섭의 얼굴을 가렸다.

“…설마 우리가 인섭이 보는 게 아까워서 그러는 건 아니지?”

김 대표가 썩은 얼굴을 하고 물었다.

“아까워서 그러는 거 맞아요.”

이우연이 인섭을 제 품에 기대게 하며 무심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보통 사람이 저러면 눈꼴시고 말 텐데, 왜 쟤는 이렇게 무섭냐.”

차 실장이 팔에 오소소 돋은 소름을 쓸어내렸다.

“우연 씨, 미안해여.”

인섭이 이우연의 품에 안긴 채로 중얼거렸다.

“나한테 미안한 짓 했어요?”

이우연이 다정하게 인섭의 등을 쓸어내리면서 물었다. 인섭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등을 쓸어내리던 손이 멈칫했다. 김 대표는 테이블에 놓인 빈 병을 조심스럽게 치우기 시작했다.

“무슨 짓 했는데.”

이우연이 물었다. 인섭은 훌쩍거릴 뿐 이렇다 할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이우연이 인섭의 어깨를 붙들어 세웠다. 대체 무슨 짓을 했느냐고 추궁하려던 이우연의 표정이 그대로 멈추었다.

인섭이 멍하니 이우연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커다란 눈을 한 번 껌뻑이더니 인섭이 배시시 웃었다.

“이번 영화 좋았습니다.”

“…….”

“처음 편지를 쓰며 보여 주신 표정도 좋았고, 마지막에 그 편지를 읽으시던 장면도 좋았고. …다 좋았습니다.”

인섭의 술주정에 김 대표와 차 실장은 눈 둘 데를 몰라 했다. 영화에 대한 칭찬일 뿐인데도 이상하게 사랑 고백을 엿듣는 기분이었다.

“너무너무 좋아서 또 보고 싶었는데….”

인섭이 한숨을 푸욱 내쉬다가 이우연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좋은 영화 찌거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셔씁니다.”

그러고는 다시 훌쩍훌쩍 눈물을 흘린다.

“다음에도 또 좋은 작품 찍어 주세여. 상도 마니마니 받으시고요.”

인섭의 어깨를 쥔 이우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고는 그대로 인섭을 끌어안아 제 품에 가두었다. 이우연이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삭이려는지 느리게 숨을 내뱉으며 천천히 인섭의 등을 쓸어내렸다. 한참을 그러고 나자 훌쩍이는 울음소리가 잦아들더니 인섭은 이내 잠이 들고 말았다.

우연이 인섭을 안고 일어서려 하자 김 대표가 얼른 이우연의 팔을 붙들었다.

“어디 가.”

“집에요.”

“…설마 죽이려는 건 아니지?”

“내가 얘를요?”

이우연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김 대표는 인섭을 끌어안은 방금 네 얼굴이 사람 서넛은 죽이고도 남을 표정이었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죽이긴 뭘 죽여요. …시발, 내가 얘 때문에 죽게 생겼는데.”

한숨과 욕설이 섞인 덧붙은 뒷말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애틋해, 김 대표와 차 실장은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일 스케줄 미뤄 주세요.”

“뭐? 미루긴 뭘 미뤄. 너 자꾸 일 그딴 식으로 할래?”

김 대표가 벌컥 소리를 내지르자 이우연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낮게 혀를 찼다. 그 짧은 몸짓에 담긴 살벌한 저의를 김 대표는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이우연은 인섭의 몸을 추켜 안은 채 나직하게 속삭였다.

“말씀드렸잖아요. 간신히 재웠다고.”

“저 앞에서 세워 드리면 될까요?”

“네.”

택시 기사가 룸미러로 그의 얼굴을 힐끔거리며 확인했다.

“혹시 그 텔레비전에 나오는 배우….”

“많이 닮았나 봐요. 그런 소리 종종 듣네요.”

이우연이 기다렸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택시 기사가 그러면 그렇지 하는 얼굴로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하긴, 배우면 이런 동네에 살 리가 없긴 하죠. 돈을 얼마나 많이 벌겠어. 우리 같은 일반 서민들이랑 다르지.”

모르는 사람하고 영양가 없이 나누는 대화 따윈 딱 질색이었다. 그가 웬만해선 택시를 타지 않는 이유였다. 이우연은 잠든 인섭의 머리를 제게 기대게 하고는 그렇죠, 하고 무심한 투로 대답했다.

“근데 총각도 어지간한 배우 뺨치게 생겼네. 연예인 한번 해 보지 그래.”

“연예인을 아무나 하나요. 이 앞에서 내려 주세요.”

인섭이 사는 빌라 앞을 가리키며 이우연이 지갑에서 돈을 꺼냈다.

“하, 다시 봐도 그 배우랑 똑같이 생겼네. 아니, 더 잘생긴 거 같은데!”

거스름돈을 세며 기사가 감탄 어린 표정을 지었다.

“거스름돈은 가지세요.”

한마디도 더 섞고 싶지 않았다. 이우연은 잠든 인섭을 둘러업고 택시에서 내렸다. 몸이 흔들리자 인섭이 잠기운이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집이에요.”

다정한 목소리에 안심했는지 인섭이 도로 이우연의 등에 얼굴을 대고 잠들었다. 이우연은 인섭의 몸을 한 번 추슬러 올리고 걸음을 옮겼다.

빌라 입구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남자가 이우연을 발견하고 눈가를 좁혔다.

“어, 연예인이다.”

이우연은 딱히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꾸벅 숙이고 옆을 지나갔다.

“나 사진 좀 찍어 주면 안 되나? 친구들한테 연예인 봤다고 자랑 좀 하게.”

남자가 이우연의 앞을 가로막아 서며 주머니를 뒤적였다.

“나중에요.”

이우연은 짧게 대꾸했다.

“에헤이. 나중에 또 언제. 연예인 보는 기회가 흔한 것도 아닌데.”

이우연은 나직이 웃었다. 짜증이 치밀었다. 등 뒤에 있는 인섭이 아니었다면 상대의 목을 꺾어 버리고 싶을 만큼.

“어, 얘 501호 아니야? 걔랑 아는 사이야?”

“…….”

화를 참는 이유는 간단했다. 대체로 귀찮아지기 때문이었다.

“501호랑 어떻게 아는 사이야? 둘이 친해?”

후줄근한 차림의 남자가 이우연의 등에 업힌 인섭을 보며 관심을 보였다. 이우연은 무심히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완전 꽐라 됐나 보네. 얘는 안 그렇게 생겨서 엄청 잘 놀고 다니네. 연예인하고 어울리기도 하고. 하긴 원래 얌전하게 생긴 애들이 뒤로 호박씨 많이 까잖아.”

이우연에게 동조를 바라는지 남자가 안 그래? 하고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이우연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런데 귀찮아지는 이유들이 아무래도 좋은 순간이 생긴다. 경기 도중 사고를 일으킨 날도 그랬다.

그날은 아침부터 유독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날이 유난히 무더웠고, 경기가 생각대로 잘 풀리지 않았고, 저를 보며 비웃던 놈의 얼굴이 유독 좆같이 생기기도 했다. 차가운 수건으로 땀을 식히고 물을 마시다가 문득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참아 내야 할 이유를 도무지 떠올릴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상대편 라커 룸으로 찾아가서 저를 비웃던 놈의 머리통을 헬멧으로 후려갈길 때도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저 그러고 싶을 뿐이었다.

가끔은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귀찮아지는 뒷일보다 당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이 중요한 순간이, 잡생각이 사라지고 머릿속이 말끔하게 정리되는 그런 순간이 오게 된다.

“앞으로 501호랑 친해져야겠다. 나도 연예인 친구 하나 가져 보게.”

담배로 누렇게 변색된 이를 드러내며 남자가 히죽거렸다.

“그러지 말고 같이 사진이나 한 방 찍자. 어이, 너도 일어나 봐.”

남자가 인섭의 팔을 무례하게 툭툭 치며 이우연 옆에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우연은 탄식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아무래도 좋을 것 같았다. 이 빌어먹을 새끼를 떨쳐 낼 수 있다면.

인섭을 안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때였다. 업혀 있던 인섭이 이우연의 옷자락을 움켜쥔 채로 등에 얼굴을 비볐다. 어리광을 부리는 듯한 그 짧은 몸짓에 일순 온몸에 들어간 힘이 탁 풀리고 만다.

이우연은 눈을 내리깐 채로 정말이지, 하고 속말을 중얼거렸다.

“카메라 보고 웃으라니까.”

남자가 이우연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나중에 찍어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이 친구 때문에 아무래도 좀 곤란하네요.”

이우연이 등에 업힌 인섭을 눈짓으로 가리킨 후 말을 이었다.

“아니면 좀 더 좋은 자리에서 만날 기회를 갖는 것도 좋겠죠.”

이우연의 말에 남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래. 친한 연예인이랑 술 마시는 자리 있으면 불러. 너 정도면 아는 연예인 많을 거 아니야. 아나운서나 아이돌, 배우나 뭐 그런 거.”

이우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미끄러지는 인섭의 몸을 추어올렸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건넸다. 남자는 신이 나서 제 번호를 찍어서 돌려주며 신신당부했다.

“나중에 꼭 불러. 알았지?”

이우연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띤 채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남자의 옆을 지나갔다. 3층쯤 올라갔을 때, 인섭을 한 팔로 지탱하면서 이우연은 핸드폰에서 남자의 번호를 삭제했다. 5층까지 쉼 없이 올라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인섭을 침대에 눕히고 나서야 이우연 작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아이처럼 순한 얼굴을 하고 잠든 인섭을 보며 이우연은 침대 위로 몸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한참을 들여다봐도 깬 기척은 보이지 않았다.

이우연은 그제야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고 집 안을 둘러보았다. 이전에 왔을 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풍경이었다. 책상으로 가서 책장을 눈으로 대충 훑고 컴퓨터를 켰다. 패스워드가 걸려 있었다.

이우연은 망설이지 않고 제 생일을 두드렸다. 바로 바탕 화면이 열렸다. 인섭이 비밀번호를 걸어 두면 열에 아홉은 이우연의 생일이었다. 통장 비밀번호나 집 현관 번호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알아내면 어쩌려고요, 하고 물으면 인섭은 말없이 배시시 웃을 뿐이었다. 멍청하고 귀엽기로는 세상 누구도 따를 자가 없었다.

저장 파일을 둘러보고 인터넷 사용 기록을 확인했다. 포털 사이트와 팬 카페, 팬 사이트가 전부였다. 포털 사이트에 로그인 설정이 되어 있었다. 이우연은 일말의 가책 없이 인섭의 메일함에 들어가 목록을 살폈다. 대수롭지 않은 스팸 메일들이 전부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보낸 메일함과 휴지통까지 살폈다.

특별한 건 없었다.

이우연은 컴퓨터를 끄고 침대맡으로 다가왔다. 눕혀 놨던 자세에서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인섭은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그의 재킷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꺼냈다.

가장 먼저 그 여자와 주고받은 메시지 내역을 확인했다. 고양이 사진에서 시작해 고양이 칭찬과 고양이 안부로 이어지는 특징 없는 내용들이 오갔다. 이우연은 끈질기게 스크롤을 위로 올려 모든 메시지를 읽었다.

이성 간의 긴장감이나 수작이 느껴지는 내용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통화 내역도 마찬가지였다. 일과 관련된 통화를 제외하고 며칠에 한 번 미국에서 걸려 오는 게 전부였다.

가여울 정도로 빈곤한 인섭의 인간관계를 확인하고 이우연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침대 옆에 앉아서 곤히 잠든 인섭의 뺨을 쓸어내렸다. 얼굴에 닿는 손길에 얼핏 잠이 깼는데도 인섭은 눈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작게 웃는다. 그러고는 이우연의 손에 얼굴을 비비적대며 어리광을 피웠다.

“누군지 알고 이렇게 예쁘게 굴어요.”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속에서 천불이 났다.

요즘 계속 인섭을 집에 끌어들이지도 않고, 그의 집에도 가지 않았다. 인섭이 요구한 사항이기도 했지만, 일부러 거리를 둔 것도 사실이었다.

어느 순간 불안이 자신을 집어삼켜 이성이 끊어질지 몰랐다. 불안을 다스리는 방법을 몰랐다. 잘 보여도 모자랄 판에 미친놈처럼 굴어 인섭에게 버림받는 일만큼은 막고 싶었다.

좋은 사람처럼 미소를 짓고 상냥하게 굴었다. 인섭이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고, 그가 하라는 대로 했다.

하지만 그것도 슬슬 짜증이 나던 참이었다. 인섭이 커다란 눈을 우물거리면서 저를 올려다볼 때마다 그의 바지를 끌어 내려 뒤에서 박아 버리는 상상을 했다. 벌써 머릿속으로는 몇 번이나 발정 난 개처럼 달려들어 붙어먹었는지 모른다.

이우연은 나직이 웃으며 입고 있던 셔츠의 단추를 모두 끌렀다. 셔츠가 바닥에 떨어졌다. 단단하게 모양이 잡힌 근육이 드러났다. 풀 데 없는 욕구를 모조리 운동에 쏟아붓고 있는 요즘이었다. 시즌 때보다 몸이 좋은 지경이었다.

이우연은 허리를 굽혀 인섭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주고 인섭의 셔츠를 잡아 올렸다. 부드럽고 가느다란 몸은 술에 취해도 그리 무겁지 않았다. 쉽게 윗옷을 벗겨 냈다. 옷가지를 침대 아래에 던져 버리고 이우연은 침대에 한쪽 무릎을 얹었다.

허리를 굽혀 인섭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드러난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콧대와 뺨, 입술로 미끄러져 내려오면서 이우연은 인섭의 바지를 벗겨 냈다. 셔츠와 마찬가지로 바지를 벗기는 데도 큰 수고가 들지 않았다.

아랫입술을 빨면서 이우연은 인섭의 브리프 위를 주물렀다. 몇 번 주무르지도 않았는데 금세 속옷이 들릴 만큼 반응이 왔다.

이우연은 아예 침대로 올라갔다. 속옷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부드러운 살덩이가 한 손에 잡혔다. 인섭은 피부가 좋았다. 본인은 얼굴의 주근깨 때문인지 절대 수긍하지 않았지만, 피부의 결이 남달랐다. 얼굴뿐만 아니라 몸, 심지어는 성기까지 그랬다. 우둘투둘하게 돋은 혈관조차 없이 매끄럽게 빠져 있었다. 손에 감기는 맛이 죽여줬다.

이우연은 문득 일전에 드라마 뒤풀이 자리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데뷔 십삼 년 차인 박재호는 가정적인 이미지로 유명한 배우였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그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한순간의 실수로 결혼을 하게 된 과정을 술술 털어놓기 시작했다.

떠오르는 차세대 인기 배우였던 박재호에게 여자가 줄을 선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를 따라다니는 팬도 제법 많았는데 개중 한 명이 눈에 띄었다고 한다. 얼굴도 예쁘장했지만 촬영장마다 나타나는 열성을 보여 줬기 때문이다.

안면을 트게 된 팬들과 몇 번 자리를 가졌는데 그게 화근이 되었다. 어느 날 그 예쁘장한 팬과 단둘이 술자리를 했고 다음 날 호텔에서 홀딱 벗은 채로 잠에서 깬 것이다. 옆에는 그 여자가 시트로 몸을 가린 채로 울고 있었다. 여자는 당신이 자신을 호텔로 끌고 와서 그런 짓을 했으며, 만약 책임지지 않으면 당장 기자를 불러서 이 사실을 알리겠다고 했다. 그리고 부모님과 오빠가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박재호는 어떤 기억도 나지 않았지만,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여자와의 결혼을 발표했다.

‘한참 주가 올릴 때 그랬으니 배역이 들어오겠어? 그때 결혼만 안 했어도 지금 이우연이 맡은 배역 내가 했다.’

그는 글라스에 소주를 가득 부어 단번에 들이켜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마누라가 그러더라. 사실 그날 아무 일도 없었다고. 그냥 오빠가 너무 좋아서 그랬다고. 하, 십 년 전 일인데도 그날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 어쩌자고 애를 셋이나 낳아서 빼도 박도 못하잖아.’

박재호는 안주로 나온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으며 후배들에게 조언의 말을 덧붙였다.

‘남자가 제일 조심해야 할 게 뭔지 아냐. 손끝, 혀끝, 좆 끝이야. 도박하지 말고, 말조심하고, 아랫도리 간수들 잘해라. 한순간에 훅 가니까. 괜히 팬이니 뭐니 하는 애들 만나서 술 마시지 말고.’

이우연은 인섭의 아래를 부드럽게 주무르며 이야기 속의 여자가 부럽다고 생각했다.

눈물 몇 방울 흘렸다고 평생을 책임져 준다니. 그런 걸로 인섭이 제 인생을 책임져 준다면 세상 누구보다 더 가엽고 처량하게 울어 줄 자신이 있었다.

“으응….”

인섭이 얼핏 앓는 소리를 냈다. 술에 취한 사람을 붙들고 하는 취미는 없었다. 하지만 여자 친구 운운하는 소리를 듣고도 넘어가 줄 만큼의 아량도 없었다.

일부러 인섭을 술에 취하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집으로 데려와 숨기는 것이 있는지 샅샅이 뒤졌다.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었지만, 한번 드리운 의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

귀두 끝을 엄지로 슬슬 문지르자 슬슬 자극이 느껴지는지 인섭이 흐트러진 숨소리를 내뱉었다. 술기운과 흥분으로 발긋하게 달아오른 몸, 구석구석이 미치도록 예뻤다.

이우연의 입가에 비스듬한 미소가 걸렸다.

내일 아침에 인섭이 눈을 뜨면 최대한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일 것이다. 데려다주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당신이 나를 끌어안았다고, 그래서 정말 어쩔 수 없이 박은 거라고.

놀란 인섭은 어쩔 줄 몰라 할 테지.

아.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입고 있던 바지 버클을 끄르는 중에 인섭이 잠결에 갈증을 호소했다.

“…물.”

“목말라요?”

인섭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우연은 바지를 벗어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고 브리프 차림으로 냉장고로 걸어갔다. 생수 통을 꺼내고 냉장고 문을 닫으려던 그는 멈칫 시선을 돌렸다. 냉장고 안에 가지런히 놓인 반찬 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을 닫았다.

침대로 돌아온 후 그는 인섭을 안아 일으켰다. 생수 통을 입가에 대 주자 인섭이 입술을 벌렸다. 얕게 흘러들어 오는 물을 인섭은 새처럼 조금씩 나누어 마셨다. 하지만 됐다 싶을 만큼 마신 후에도 이우연은 물통을 물리지 않았다. 결국 미처 삼키지 못한 물이 인섭의 턱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인섭이 쿨럭 기침을 하며 눈을 떴지만 이우연은 여전히 물통을 인섭의 입술에 대고 기울였다.

“……?”

인섭이 의아한 눈으로 이우연을 올려다보았다.

“깼어요?”

짧은 질문에 인섭은 대답 대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인섭 씨 집이에요.”

이우연이 생수 통을 침대 아래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인섭은 그제야 제가 벗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어, 하고 놀라서 시트를 잡아끌었다. 이우연은 인섭의 손에 들린 시트를 빼앗아서 아무렇지도 않게 침대 밖으로 내던졌다. 술기운 때문에 반응이 느린 인섭이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이우연을 바라보았다.

“이 집에 그 여자 들락거려요?”

“네?”

인섭은 무슨 말을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때 가느다란 손목이 이우연의 눈에 들어왔다. 다른 년이 해 준 음식까지 처먹었으면서도 여전히 툭 부러질 것 같은 손목이었다.

이우연은 인섭의 손목을 한 손에 움켜쥐고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그의 눈은 웃고 있지만 푸르스름한 예기가 일렁였다.

“어떻게 여기….”

인섭이 멍한 얼굴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인섭 씨 술에 취해서 내가 집으로 데려왔어요.”

인섭이 어눌한 발음으로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했다.

“부탁 하나만 해도 돼요?”

“말씀하세요.”

인섭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동그란 머리통을 그 여자 앞에서도 열심히 흔들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목구멍까지 열이 치솟았다.

이우연은 인섭의 핸드폰을 머리맡에 두고 속삭였다.

“자지 박아 달라고 해 볼래요?”

“……!”

갑작스러운 상스러운 요구에 인섭의 낯이 대번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우연이 손을 뻗어 인섭의 구멍을 더듬으며 음탕한 말들을 청했다.

“여기 구멍에 넣고 싸 달라고 해 봐요. 보지로 좆물 먹고 싶다고.”

“무, 무슨 말씀이세요. 갑자기….”

당황한 인섭의 눈가에 붉은 기가 번졌다.

“듣고 싶어서 그래요. 네?”

달콤한 목소리로 꼬드기며 이우연은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하나만 까닥하면 윤아름과 통화가 연결된다. 다시는 그 여자와 만나는 일 없도록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윤아름은 천성이 따뜻하고 다정한 인간이었다.

몇 번 만나지도 않은 최인섭이 그 새벽에 불러내서 도움을 청했을 때도 싫은 기색 한 번 하지 않을 만큼, 길에서 떠도는 고양이를 자처해 집에서 돌보면서 진심으로 기뻐할 만큼, 그런 와중에 생색 한 번 내지 않을 만큼 좋은 사람이었다.

최인섭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 뒷담을 했다는 사람에게 이유도 묻지 않고 사과를 하고, 사실인지 거짓인지 모를 친구의 일기장을 믿고 몇 년을 걸려서라도 복수를 해 주려 하고, 그 복수마저 실패해 제 발등을 찍어 버린 후에도 근본부터 썩어 빠진 남자에게 진심으로 대해 주려는 착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두 사람을 보고 있으면 속이 뒤틀릴 만큼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나 그동안 인섭 씨가 하라는 대로 다 했잖아. 이번엔 인섭 씨 차례예요. 인섭 씨가 하는 야한 말 듣고 싶어요.”

이우연은 예의 바른 신사처럼 인섭의 손을 입에 가져다 대고 차례대로 입을 맞추었다. 술기운에도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아챘는지 인섭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이우연의 입가에 민틋한 미소가 걸렸다. 필요하다면 인섭과 섹스 비디오를 찍어서 광화문 대형 스크린에 상영할 수도 있었다.

“부탁할게요.”

“안 됩니다.”

인섭이 고집스럽게 고개를 내저었다.

“뭐가 안 돼. 왜 안 되는데.”

이우연의 물음에 인섭이 누가 들으면 어떡해요, 하고 울먹거린다. 술기운에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와중에도 인섭은 이우연의 스캔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이거 꿈이니까.”

개 같은 수작이었다. 열 살 먹은 아이조차 속아 넘어가지 않을.

“…꿈이요?”

눈물이 엉킨 속눈썹을 들어 보이며 인섭이 되물었다.

“네. 꿈이니까 내키는 대로 굴어요. 인섭 씨가 어떤 짓을 해도 아무도 모를 겁니다.”

이우연은 달콤한 목소리로 인섭의 타락을 부추겼다.

최인섭은 성에 무지했다. 스스로 자위도 해 본 적 없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감도는 좋아서 성교를 할 때마다 자지러질 만큼 느꼈다. 실제로 기절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박아 주면 박아 주는 대로 질질 쌀 정도였다. 그런 주제에 해 달라는 말을 먼저 하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가끔은 인섭을 엉망으로 만들고 싶었다. 제가 발을 딛고 선 진창까지 끌어내리고 싶은 잔인한 욕구가 치솟았다.

이우연을 한참 올려다보던 인섭이 입술을 물었다가 놓으며 그럼, 하고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이우연은 손가락을 핸드폰 위에 얹었다.

“…주무시고 가세요.”

실소가 터져 나왔다. 지금 이걸 아무도 듣지 못하는 상황에서 하고 싶은 말이라고 내뱉은 건가.

“유혹하는 거예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이우연의 물음에 인섭은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고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피곤하시잖아요.”

인섭이 마신 술은 고작해야 소주 반병이었다. 아니, 반병도 되지 않았다. 나중에는 마시는 술보다 흘리는 양이 더 많았으니까. 기껏 그 정도로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취해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주제에.

“…지금 내 걱정 할 마음이 듭니까?”

이우연의 물음에 인섭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친다. 술기운이 발긋하게 오른 눈이 이우연을 직시했다. 그러고는 처음 키스를 하는 소년처럼 형편없는 솜씨로 입을 맞춘다.

“당연히, 항상 듭니다.”

“…….”

김강우가 오해해서 말을 잘못 전달한 걸지도 모른다. 아니, 저 같은 것과 하는 연애는 때려치우고 제대로 된 인간과 정상적인 교제를 하기로 했을 수도 있다.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지금도 의심과 믿음이 머릿속에서 난잡하게 교차했다.

시발,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그냥 최인섭과 죽도록 하고 싶었다.

이우연은 인섭의 입을 벌리게 하고 깊게 혀를 박았다. 물러서려는 혀를 감아서 빨아 올렸다. 작은 입 속에서 두 사람의 혀가 엎치락뒤치락 뒤엉켰다. 인섭이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그 작은 경련에 아랫도리가 터질 만큼 흥분되었다.

이우연은 인섭의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집어넣어 그를 바싹 끌어안았다.

“너 때문이야.”

이우연은 인섭의 뺨에, 이마에, 볼에, 콧등에, 되는대로 입을 맞추며 열에 들뜬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 때문이야, 참았는데, 시발, 내가 어떻게 참아 줬는데, 네가 그따위로 예쁘게 구니까.

“……!”

이우연은 한 손으로 인섭의 팬티를 끌어 내리고 그 위에 엎드리듯 누워 자위를 처음 배운 소년처럼 제 성기를 허겁지겁 문질렀다. 뿌옇게 젖은 단단한 귀두가 찌걱거리며 인섭의 살덩이를 눌러 댔다. 부드러운 살의 표피가 힘없이 밀려나며 무게를 더해 갔다.

이우연은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듯이 인섭의 뺨을 한껏 물어서 혀를 굴렸다. 오랜만에 맛본 그의 살결이 다디달아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우연은 이를 사리물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내새끼의 사타구니에 자지를 문지르면서 이렇게까지 흥분할 수 있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인섭 씨…, 인섭 씨….”

술 냄새가 나는 입술을 빨면서 이우연은 몇 번이고 인섭의 이름을 불렀다. 인섭이 대답하려고 입술을 오물거릴 때마다 이우연은 허리에 힘을 주어 성기를 마찰시켰다.

“아, 응, 흐…읏.”

작게 벌어진 인섭의 입술에서는 간신히 앓는 소리만 새어 나왔다. 그조차 아깝게 느껴져 이우연은 인섭의 입술을 허겁지겁 집어삼키듯 빨아 댔다. 처음에는 숨만 헐떡이던 인섭이 어떻게든 이우연의 움직임에 맞춰 주려고 한껏 입을 벌리고 혀를 움직였다.

이우연은 인섭의 엉덩이를 움켜쥐어 다리를 벌리게 해서 사타구니를 문질렀다. 단단하게 부푼 살덩이가 벌름거리는 구멍에 닿았다.

눈이 마주쳤다. 이우연이 묻기도 전에 인섭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 근래에는 손끝만 닿아도 여염집 규수처럼 선을 긋더니, 꿈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제 나름의 선정을 내비친다.

그게 이우연을 미치게 만들었다.

희뿌옇게 젖은 살덩이의 끝이 푹, 하고 잠겨 들었다.

이우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턱을 치켜들었다. 끄트머리만 삽입했는데도 발끝까지 저릴 만큼 느껴졌다. 정강이에 힘을 주어 허리를 앞으로 밀었다. 성기가 단번에 빠듯하게 벌어진 틈을 파고들었다.

“아!”

인섭의 몸이 뒤로 젖혀졌다. 이우연은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아래가 이어진 채로 이우연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새가 날갯짓을 하듯 파닥거리는 인섭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인섭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옅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

너무 좋았다. 그 보잘것없는 반응이 너무 좋은 나머지 무서울 정도였다.

어떻게 하면 인섭을 제 곁에 계속 붙들어 둘 수 있는 걸까. 뭘 해 주면 되는 걸까. 어떻게 하면 좋은 걸까.

불안과 황홀감에 목이 졸리는 기분이었다. 이우연은 인섭의 머리카락을 물어뜯고 귓불에 입을 맞추며 간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좋아해요. 알고 있어요?”

인섭이 고개를 끄덕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러다 갑자기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와르르 쏟아진다. 이우연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인섭이 울면서 제 아래서 헐떡이는 모습에 좆이 터질 것 같았다.

“인섭 씨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줄게요.”

뭐든 해 주고 싶었다. 이우연은 주인의 애정을 갈구하는 개처럼 인섭의 턱을 핥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어요?”

네가 원하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주겠다는 상투적이고 병신 같은 표현이 입에 맴돌았다.

인섭은 울음을 터트렸다. 이우연은 머리가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인섭의 울음에 흥분하는 동시에 안타까움에 심장이 저릿했다.

“울지 말아요. 인섭 씨. 왜 울어, 응?”

“…무서워서….”

인섭은 딸꾹질을 하며 몸을 떨었다.

“꿈이니까 괜찮아. 무서워할 거 없어요.”

이우연은 인섭의 몸을 바싹 끌어안고 그를 얼렀다.

인섭은 욕심이 없었다. 아니, 제 욕심을 드러내길 극도로 꺼려 하는 성격이었다. 무엇을 원하는지, 뭘 갖고 싶어 하는지 말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까 말해 봐요. 다 들어줄게.”

한 번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인섭이 탐욕스럽게 뭐든 원했으면 한다. 그 탐욕을 이용해서라도 인섭을 붙들고 싶었다.

훌쩍거리던 인섭이 저는, 하고 어렵게 입을 뗐다.

“보통 사람… 처럼….”

인섭이 두 손을 뻗는다. 그러고는 이우연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말을 이었다.

“평범하게, 해 주셨으면 좋겠… 습니다.”

인섭의 눈초리를 타고 눈물이 툭 떨어졌다.

“…….”

발정 난 짐승처럼 밀어붙이던 이우연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인섭은 눈을 크게 뜨고 이우연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젠장.”

이우연이 욕설을 내뱉은 후 성기를 끄집어냈다. 그러고는 인섭의 것과 제 것을 한데 그러쥐고 문지르기 시작했다.

“아, 자, 잠깐…. 흣.”

성기를 쥔 손에 힘줄이 불거져 나왔다. 이우연의 입에서 짐승 같은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섭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정액이 이우연의 손을 적셨다. 인섭의 정액을 뒤집어쓴 제 성기를 손으로 문지르며 이우연은 이를 낮게 사리물었다.

“씨발.”

욕설과 함께 뜨거운 정액이 인섭의 배 위에 뿌려졌다. 몸에 남은 정액을 쥐어짜려는 듯 이우연은 몇 번 더 손에 힘을 주어 정액을 털어 냈다.

“하아….”

숨을 몰아쉬며 인섭을 내려다보았다. 인섭은 느릿하게 눈을 두어 번 껌뻑이더니 그대로 기절하듯 잠이 들고 말았다.

사정을 했는데도 개운하기는커녕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분이 더러웠다. 이우연은 바닥에 떨어진 셔츠를 집어서 손을 대충 닦아 내고는 인섭의 옆에 몸을 털썩 뉘었다.

이마에 손을 얹은 채로 눈을 감았다.

인섭의 대답을 듣는 순간, 뒤통수를 세게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차라리 별을 따 달라고 하지 그랬어요.”

보통 사람처럼, 평범하게.

무엇이든 해 주고 싶지만, 결코 제대로 해낼 수 없는 하나였다.

***

창가에 걸터앉은 소년이 책을 읽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햇살에 비쳐 반짝거렸다. 몰래 훔쳐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에 열이 올랐다.

소년이 읽던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쪽을 돌아본다. 눈이 마주치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이대로 심장이 고장 나서 큰일이 나지는 않을까 두려울 정도로.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천천히 숨을 내쉬자 심장 박동이 차츰 제자리를 찾아간다.

좋아해요, 알고 있어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다가와 입을 맞춘다. 화들짝 놀라 눈을 뜨자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원하는 대로 다 해 줄게요.

애처롭게 매달리며 남자가 속삭인다.

인섭은 눈을 깜빡였다. 그가 보여 주는 끝 간 데 없는 다정함에 목이 콱 막혔다. 뭐라고 말을 걸고 싶은데 입이 딱 붙은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꿈이니까 괜찮아.

꿈이라는 단어에 저도 모르게 아아, 하고 납득하고 만다. 납득과 함께 자괴감이 몰려든다.

다 들어줄게.

남자가 꿈결처럼 속삭인다. 너무도 다정했다. 너무나 다정해서 덜컥 겁이 날 정도로.

가지지 못할 것에 욕심을 내면 어떤 결말을 맞을지 숱하게 읽은 동화책을 통해 배웠다. 그래도 갖고 싶었다. 두 손을 뻗어 남자를 끌어안았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보통 사람처럼, 평범한 연인같이….

삐삐삐삐삐.

날카로운 알림음에 눈을 떴다. 습관처럼 협탁을 더듬었지만 핸드폰이 손에 닿지 않았다. 가느스름하게 눈을 뜨고 핸드폰을 찾으려던 인섭은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

인섭은 바로 으, 하고 눈가를 찌푸렸다. 누군가 머리통에서 쿵쿵 뛰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한참을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고 있던 그는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어제의 기억이 토막토막 이어졌다.

‘오랜만에 이렇게 한잔하니 기분이 좋네요.’

이우연이 웃으며 술을 건넸다. 그렇게 말하는 유독 목소리가 다정하고 친절했기에 인섭은 그가 주는 대로 덥석덥석 받아 마셨다. 취기가 돌 무렵 그만 마시겠다고 말을 꺼내려 했지만, 이우연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달큼한 웃음을 지으며 술잔을 채웠다. 그렇게 그 뒤의 기억은 증발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기억을 이어 보려고 애를 써도 안개처럼 흐릿하기만 했다.

“아. 알람.”

인섭은 아직도 베개 안에서 삐빅거리고 있는 핸드폰을 찾아서 알람을 껐다. 그러다 김 대표와 차 실장에게 온 여러 통의 문자를 발견했다.

김 대표 : 「무사하니?」

김 대표 : 「인섭아. 별일 없지? 별일 없는 거지?」

차 실장 : 「살아 있어? 괜찮은 거야?」

차 실장 : 「인섭 씨. 깨어나는 대로 전화해라. 언제든지 상관없다.」

차 실장 : 「인섭 씨….」

최인섭은 일단 김 대표에게 무사히 집에 들어왔으며 걱정 끼쳐 드려서 죄송하다는 문자를 보냈다. 그러고 바로 차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 뒤에 차 실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실장님. 아침부터 죄송합니다.”

<아니야. 전화 잘했어. …괜찮은 거지?>

“네. 괜찮습니다.”

인섭은 대답해 놓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제 제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기억이 없는데 무슨 실수라도 했습니까?”

김 대표와 차 실장이 번갈아 문자를 보낸 것을 보면 자신이 술김에 사고를 친 게 분명했다.

<인섭 씨가 무슨 실수를 해?>

차 실장이 황당하다는 어투로 되물었다.

“어제 별일 없었습니까?”

<별일은 무슨. 바로 잠들었는데. 아, 맞다. 일 잘 못해서 죄송하다고 울긴 했지.>

“못 볼 꼴 보여 드려서 죄송합니다.”

인섭의 얼굴이 대번에 달아올랐다. 술 마시고 우는 성인 남자라니. 시각 공해에 가까운 꼬락서니였다.

<걱정 안 해도 돼. …어차피 제대로 보지도 못했으니까. 그런데 저기 말이야.>

차 실장이 말끝을 늘어트렸다.

<이우연은 지금 뭐 해?>

“댁에서 주무시고 계시지 않을까요?”

<어? 집에 갔다고?>

차 실장의 목소리에서 당황이 묻어났다.

인섭은 혹시나 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우연의 물건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어제 이우연이 이곳에 왔다면 지금쯤 당연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을 것이다.

<웬일이래. 그런 기색이 아니었는데.>

차 실장이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중얼거리는 사이 다른 전화가 걸려 왔다. 화면을 확인하니 김 대표였다.

“대표님께 전화 왔는데 제가 나중에 다시 전화 드려도 될까요?”

<됐어. 별일 없으니까 다시 전화 안 해도 돼. 나중에 봐.>

차 실장이 흔쾌히 전화를 끊었다.

“여보세요.”

<인섭아. 너 괜찮아?>

김 대표의 다급한 목소리에 인섭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괜찮습니다.”

전화기 너머의 김 대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별일 없어서 다행이다.>

인섭은 눈을 껌뻑이다가 저어, 하고 말문을 열었다.

“제가 어제 그렇게 많이 취했었나요.”

차 실장은 괜찮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많이 취하긴 했지.>

김 대표가 쩝, 입맛을 다시며 대답했다. 인섭의 얼굴이 다시 새빨갛게 익었다.

“죄송합니다. 어제 너무 오랜만이라서 제가 실수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신 것은 몇 번 되지 않았다. 술에 취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기억을 잃기 때문이었다.

“평소에는 이렇게 마시지 않는데….”

거기까지 말한 인섭은 입을 다물었다. 뭔가 이상했다. 이우연은 제가 술에 약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늘 주량을 염두에 두고 술을 마시게 했다.

그런데 어제의 이우연은 마치 작정한 사람처럼 인섭의 술잔이 비기 무섭게 술을 따라 주었다. 얼른 마시라고 재촉하거나 강권하지는 않았지만, 술잔을 비울 때까지 물끄러미 인섭을 바라보며 웃었다.

<괜찮아, 괜찮아.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김 대표의 관대함에 인섭의 민망함은 배가 되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매니저가 돼서 담당 배우도 챙기지 못하고….”

인섭의 말에 김 대표가 으잉? 하고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이 반문했다.

<이우연이랑 같이 있는 거 아니었어?>

차 실장과 같은 반응이었다. 아무래도 자신은 이우연과 술자리에서 같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네. 어제 같이 일어나기만 하고 이우연 씨는 본인 댁으로 돌아가신 거 같습니다.”

<같이 일어난 게 아니라…. 하하, 그럴 거면 굳이 왜 스케줄을 조정해 달라고 한 거지.>

“스케줄이요?”

<아. 이우연 오늘 스케줄 취소했어. 그렇지 않아도 그거 알려 주려고 전화했다.>

이우연은 좀처럼 술에 취하지 않았고, 취한다 하더라도 숙취를 느끼지 않는다는 사람이었다.

인섭의 안색이 덜컥 어두워졌다.

“어제 이우연 씨, 몸을 가누지 못하실 만큼 드신 건가요?”

<엄청 잘 가누던데.>

김 대표의 대답에 인섭의 얼굴이 한층 더 수척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케줄을 취소했다면 무슨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다.

이우연에게 가야 했다. 인섭은 침대에서 황급히 내려왔다가, 문득 지끈하고 올라오는 통증에 어, 하고 눈가를 찌푸렸다.

<왜 그래? 어디 아파? 혹시 어제 누구한테 맞았다거나 그랬어?>

김 대표가 숨도 쉬지 못하고 다다다 질문을 쏟아 냈다.

“네? 아, 아닙니다.”

인섭은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기엔 지나치게 말끔한 상태였다. 그런데 무시하기엔 아래에서 미묘한 통증이 올라왔다.

집으로 올라오다가 계단에서 넘어졌나.

인섭은 뺨을 긁적이면서 김 대표에게 차분하게 말을 건넸다.

“이우연 씨 상태는 제가 가서 확인하고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뭐 하러 확인해. 숙취도 없고 피로도 못 느끼는 새끼를.>

“그런데 스케줄을 취소하셨잖아요. 어디 편찮으신 게 분명합니다.”

<섭아, 섭아, 인섭아.>

김 대표가 한숨이 가득한 음성으로 인섭을 불렀다.

<우리끼리니까 솔직하게 까놓고 말해서, 이우연 걔가 술 마시고 아플 만큼 인간적인 구석이 있는 놈으로 보이냐?>

“…그래도 혹시 모르잖습니까.”

<그래. 혹시 몰라서 아플 수도 있겠지만, 오늘은 아니야. 더더군다나 그 정도 마시고는.>

이우연은 건강했다. 그의 타고난 건강함은 피부, 치아, 모발, 심지어는 눈까지 포함되어 시력 검사표가 의미 없을 정도로 시력이 좋았다. 면역력 또한 남달라서 겨울에 감기 한번 걸리는 일이 없었다.

한번은 드라마 촬영 중 촬영 팀은 물론이고 배우 중 절반이 앓아누울 만큼 심한 독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나머지 절반이라고 무사한 게 아니었다. 역병처럼 퍼지는 독감에 하나둘씩 쓰러져 결국에는 한동안 촬영을 미루어야 했다. 그중 이우연 혼자만 독야청청 완벽한 컨디션을 유지했다.

인류 건강의 미래는 이우연의 혈청 연구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김 대표의 농담을, 도저히 웃어넘길 수 없는 일화였다.

“그런 분이 이유도 없이 갑자기 스케줄을 취소할 리가 없으시잖아요.”

<이유가 없긴. 당연히….>

거기까지 말한 김 대표는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지 숨을 천천히 삼킨 후, 인섭을 달랬다.

<아무튼 걱정할 거 없어. 걔는 아주 멀쩡하니까.>

“저녁 스케줄까지 취소하신 겁니까?”

낮에는 인터뷰가, 저녁에는 새로 들어가는 드라마 작가와의 미팅이 잡혀 있었다.

<응. 둘 다. 하여튼 너도 오늘은 피곤할 텐데 푸욱 쉬어라.>

“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인섭은 통화를 마치고 이우연에게 문자를 보냈다.

「일어나시면 연락 주세요.」

전화를 할까 하다가 혹시 잠들어 있을까 싶어서였다. 조금 기다려도 답은 오지 않았다.

인섭은 바로 샤워를 시작했다. 이우연이 멀쩡히 술자리에서 걸어 나갔다는 말을 들었지만 걱정되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찾아가서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안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충 옷을 입고 머리를 말리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이른 오전이었다. 인섭은 달려가서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문밖에 서 있던 이우연이 후드를 내리며 낯을 찌푸렸다.

“말 진짜 안 듣네. 누군지 알고 그냥 엽니까.”

“죄송합니다. 다음부터 주의하겠습니다. …괜찮으세요?”

인섭의 물음에 이우연이 별 해괴한 소리를 들은 표정을 지었다.

“어제 많이 드신 거 같아서요.”

“저 숙취 없는 거 아시잖아요.”

“어제 어떻게 된 겁니까?”

“인섭 씨 많이 취해서 제가 여기까지 데려다줬어요. 저는 바로 돌아갔고.”

이우연이 산뜻하게 웃으며 현관문을 닫았다. 하지만 인섭은 그의 설명을 듣고도 가슴 한구석에 남은 찜찜함을 떨쳐 낼 수 없었다. 평소의 이우연이라면 그냥 집에 돌아갈 리 없었다.

“술자리에서 제가 실수한 건 없었습니까.”

인섭이 조심스레 묻자 이우연이 말없이 미소 지었다. 인섭의 가슴에 덜컥 불안이 퍼졌다.

“혹시 제가 나쁜 말 같은 거 했나요?”

못난 모습을 보여서 이우연이 제게 정이 떨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우연이 하하, 짧게 웃었다.

“나쁜 말도 할 줄 알아요? 기회 되면 듣고 싶네. 자, 이거.”

이우연이 손에 든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해장국 포장해 왔어요. 이건 숙취 해소 음료.”

“죄송합니다. 제가 챙겨 드려야 하는데.”

인섭이 황송해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봉투를 받아 들었다.

“잘 챙겨 먹어요.”

“…같이 안 드세요?”

그러고 보니 이우연은 신발도 벗지 않은 채였다.

“운동하러 가던 길이었어요.”

본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트레이닝복에 운동화 차림이었다. 그의 놀라운 체력에 경외심마저 들었다.

“그리고 오늘 오전 스케줄 취소했어요. 술 냄새 풍기면서 인터뷰할 수는 없잖아요.”

술 냄새는커녕 상큼한 과일 향이 묻어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인섭이 아무 말 없이 올려다보자 이우연이 고개를 슬쩍 기울인 채 물었다.

“술 냄새 나요?”

“아, 아닙니다. 좋은 냄새 나십니다.”

이우연이 움직일 때마다 시트러스 향의 샴푸 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의 집에서 샤워를 할 때 사용해 본 제품이라서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우연의 집에서 샤워를 한 지도 제법 오래되었단 생각이 들었다. 괜한 것을 떠올렸다는 생각에 인섭은 고개를 숙였다. 이우연의 시선이 느껴졌다. 한 손에 든 해장국 봉투에서 열기가 올라왔다.

이우연이 그리고, 하며 입을 뗐다.

“오후 스케줄은 저 혼자 갔다 올게요.”

“네?”

“어차피 작가님 만나는 건데 굳이 매니저 동행할 필요는 없잖아요.”

인섭은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분명히 아까는….

“오늘 스케줄 모두 취소하신 거 아니었습니까?”

인섭의 물음에 이우연의 눈에 긴 웃음이 걸린다.

인섭은 배우로서의 이우연을 좋아했다. 그가 나오는 작품은 모두 보았고, 같은 작품을 수십 번 돌려 본 적도 있었다. 그래서 가끔, 의도하지 않았는데 이우연의 표정을 정확히 읽을 때가 있었다.

“누가 그러던가요. 대표님이?”

“네. 아까 통화했습니다.”

“헷갈리셨나 봐요. 어제 술자리에서 한 얘기라.”

이우연의 눈웃음이 진해진다. 인섭은 그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박에 알아챘다. 그리고 그 사실을 자신이 알아챘다는 것을 그 역시 눈치 챘다.

당혹스러웠다.

“그러신가 봅니다. 나중에 제가 다시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래요.”

이우연의 손이 불시에 다가왔다. 인섭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어깨를 굳혔다.

“거품.”

손끝에 묻은 치약 거품을 보여 주며 이우연이 웃었다. 인섭은 따라 웃으려고 했지만 딱딱하게 굳은 입가엔 어색한 경련이 일 뿐이었다.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현관을 나서려던 이우연이 뭔가 생각났는지 아, 하고 몸을 돌렸다.

“어제 갑자기 왜 보자고 한 거예요?”

“그냥….”

“그냥?”

이우연이 장난스럽게 인섭의 다음 말을 재촉했다.

“…같이 저녁 식사나 할까 했습니다.”

“먹고 싶은 거 있어요?”

그렇게 묻는 음성이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럽다. 인섭은 간신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내일까지 생각해 둬요.”

인섭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현관문이 닫혔다. 해장국이 담긴 비닐 봉투가 툭, 바닥에 떨어졌다.

인섭은 봉투를 도로 주워서 식탁에 올려 두었다. 조금 지나서 문자 수신음이 울렸다. 김 대표였다. 오늘 저녁 스케줄은 종전과 다름없고 자신이 착각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우연 혼자 작가를 만나면 될 것 같다는 첨언이 붙었다.

인섭은 멍한 얼굴로 문자를 반복해 읽었다.

“…….”

처음이었다. 이우연이 본인의 스케줄에 대해 작정하고 거짓말하고, 그걸 자신이 알아챘음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모른 척한 것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뜨끈한 해장국이 식을 때까지, 인섭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근래에 그렇게 술 많이 마신 거 처음이에요. 어제 하루 종일 시체처럼 누워 있었어요.”

옆에 앉은 김강우가 재잘재잘 말을 이었다.

“저 그날 매형한테 업혀 들어간 거 있죠. 누나한테 뒤지게 혼났어요. 우리 누나 진짜 무섭거든요. 형님은 그날 집에 잘 들어가셨어요?”

“…….”

“혹시 속 안 좋으세요?”

김강우가 아무 말도 없이 멍한 인섭을 보며 물었다.

“아, 아니. 괜찮아.”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병원 안 가 보셔도 돼요?”

김강우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며 물었다. 아무래도 인섭의 건강 상태에 대해서 단단히 언질을 받은 모양이었다.

“정말 괜찮아.”

인섭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제 스케줄 취소돼서 다행이에요. 안 그랬으면 진짜 죽었을 거예요.”

김강우의 얼굴에 다시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인섭은 그러게, 하고 힘없이 맞장구쳤다.

“그나저나 배우님은 체력 진짜 좋으시네요. 아무리 하루 지났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 드셨으면 힘드실 텐데. 얼굴이 반짝반짝 빛나는 거 봐요.”

김강우가 무대에 선 이우연을 가리키며 진심으로 탄복했다.

“저 사실 술로는 누구한테도 져 본 적이 없어서 그날 자신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절대로 배우님하고 술 안 마시려고요. 우리 과 선배들보다 더 지독해요. …진짜 괜찮은 거 맞으세요?”

김강우기 유난히 힘이 없어 보이는 인섭에게 걱정스레 물었다.

“미안해. 나도 오랜만에 마신 거라서 숙취가 오래가네.”

“숙취 음료 사다 드릴까요?”

“그 정도는 아니야.”

“혹시 필요하심 말씀하세요. 바로 사다 드릴게요.”

귀찮은 기색도 없이 김강우가 싹싹하게 웃었다. 인섭도 그를 따라 웃었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었다.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일 도와준 것도 고맙고.”

“뭘요. 당연히 같이 해야죠.”

오늘은 이우연의 팬클럽에서 영화관 대관을 신청해 팬미팅에 가까운 무대 인사를 진행 중이었다. 평상시 무대 인사보다는 신경 쓸 일이 많아서 아침부터 정신없는 인섭을 김강우가 옆에서 열심히 거들었다.

“배우님은 옷발이 진짜 잘 받으시네요. 어깨 운동은 뭐 따로 하시는 거 있나.”

김강우가 무대에 선 이우연과 제 어깨를 번갈아 보며 중얼거렸다.

짙은 회색 슬랙스에 베이지색 니트를 받쳐 입은 이우연의 어깨는 오늘따라 유난히 넓어 보였다. 시선을 느꼈는지 이우연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인섭은 불에 덴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시선을 떨구었다.

“배우님이 이쪽 쳐다보시는데요?”

“그, 그래?”

인섭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잘못한 게 없는데 이상하게 눈을 마주치기가 힘들었다.

어젯밤에 이우연과 통화했다. 일은 무사히 마치셨느냐는 물음에 이우연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인섭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우연의 입에서 나오는 태연한 거짓말을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스케줄을 굳이 속일 이유가 없었다. 자신에게 말하지 못할 비밀이라도 있는 걸까.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좋지 않은 방향으로 생각이 굴러갔다.

대체 이우연은 왜 거짓말을 한 걸까. 혹시 말하지 않은 것들이 또 있을까.

…그날의 일을 묻는다면 사실대로 말해 줄까.

속이 좋지 않아.

인섭은 우울한 낯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럼 오늘 여러분이 가장 기다리던 시간입니다.”

사회자가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좌석 번호를 추첨해서 이우연 씨의 친필 사인이 담긴 사진과 선물을 드릴 건데요. 그중에는 이우연 씨의 애장품도 있으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앉아 계신 좌석 번호를 잘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애장품이란 단어에 객석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는 팬들도 여러 명이었다.

“이따가 저거 올려 드리면 되죠?”

김강우가 박스를 가리키자 인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무대 인사는 팬 서비스 차원에서 참석한 것이었다. 그래서 선물도 모두 소속사에서 준비했다. 이우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기 사진에 사인을 열댓 개 했을 뿐이다.

“근데 이외네요. 배우님 저런 걸 좋아하시나.”

김강우는 상자 옆에 삐죽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대형 곰 인형을 보며 의아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우연은 스타의 애장품을 나눠 주는 행사 따위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왜 내가 쓰던 물건을 남한테 주죠? 기분 더럽게.’

당연히 어떤 애장품도 이우연의 손에서 나오게 할 수 없었다. 이번 행사를 위해 곰 인형을 주문한 것도 인섭이었다.

“많이 이상한가?”

인섭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곰 인형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상한 건 아닌데 배우님 이미지하고는 안 어울려서요. 저런 거 집에 안 두실 거 같은데.”

“…….”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우연의 집에는 가구를 제외하고는 책과 음반이 전부였다. 팬들이 주는 선물도 원체 안 받았지만 인형 같은 건 더더욱 질색했다. 먼지 쌓여서 더럽고 귀찮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래도 인형 선물 받는 팬들은 좋겠네요. 제가 좋아하는 아이돌이 저거 주면 저 매일 껴안고 잘 거 같아요.”

“그러면 좋겠다.”

“당연하죠. 좋아하는 연예인한테 받는 거면 종이 한 장이라도 기뻐할걸요.”

김강우의 말에 인섭은 안도했다. 되도록 받는 사람이 기뻐했으면 하고 바랐다.

사회자가 좌석 번호를 호명할 때마다 객석의 희비가 갈렸다. 선물은 이우연이 광고하는 제품들로 채운 선물 박스와 친필 사인이었다. 제법 고가의 제품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박스를 받는 팬들의 입이 모두 귀에 걸렸다.

“마지막으로 이우연 씨의 애장품이 남아 있는데요.”

인섭이 곰 인형을 안아 들고 무대로 올라갔다. 커다란 곰의 크기 때문에 인섭의 몸이 포옥 가려져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객석에 앉아 있던 팬들이 술렁거렸다.

“오빠, 그거 누구한테 선물 받은 거 아니에요?”

앞에 앉아 있던 팬이 샐쭉한 표정으로 외쳤다. 뼈 있는 한마디였다. 이우연은 평소 팬에게 선물을 받지 않기로 유명했다. 열애설이 난 지금, 곰 인형의 출처로 의심되는 상대는 단 한 명뿐이었다. 마이크를 건네받은 이우연이 예의 커피 향이 날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직접 구입한 건데요.”

이우연이 손을 뻗어 곰 인형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불면증이 좀 있거든요. 그래서 얘 없으면 잠을 못 자요. 항상 옆에 두는 녀석인데.”

인섭은 얼른 곰의 궁둥이에 달린 태그를 뜯어냈다.

“받기 싫으시면 내가 다시 데려가야겠다. 제일 아끼는 애 데려온 건데.”

이우연이 정말 사랑해 마지않는 상대를 바라보는 애틋한 눈을 하고 말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제가 데려갈게요, 제가 잘 키울게요, 저 주세요, 하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인섭은 이우연에게 넘기려고 곰 인형을 그에게 슬쩍 밀었다. 하지만 이우연은 곰의 머리만 문지를 뿐 절대로 인형을 건네받지 않았다. 결국, 인섭이 쩔쩔매며 곰을 끌어안은 채 무대에 서 있어야 했다.

“이 곰 인형을 받으실 분은 이우연 씨가 직접 뽑으시는 걸로 하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에 이우연의 눈웃음이 길어졌다.

졸라 귀찮게, 시발.

인섭은 옆에 선 이우연의 눈에 스친 생각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었다.

인섭은 초조한 표정으로 사회자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다 이우연과 눈이 마주쳤다. 인섭은 얼른 곰 인형의 뒤통수에 고개를 묻었다.

“인섭 씨 같은 거 골랐네요.”

이우연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곰 인형을 고른 게 누구인지 아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좀 더 생각해서 고르겠습니다.”

적당히 그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나 음반을 사는 게 나았을까 하는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아니에요. 마음에 들어요.”

이우연이 곰의 팔을 끌어다가 제 뺨에 비비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좌중 사이에서 저 곰을 반드시 내가 가져야겠다는 살벌한 눈빛이 오갔다.

이우연은 곰 인형의 팔을 붙들고 웃으며 서 있었다. 제 손이 잡힌 것도 아닌데 인섭은 괜히 얼굴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이우연 씨 성함으로 삼행시를 가장 멋지게 짓는 분께 오늘의 선물은 돌아갑니다. 이우연 씨가 골라 주시면 됩니다.”

“하하하.”

이우연이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디서 저딴 머저리 같은 걸 사회자라고 데려와서.

이우연의 눈에 어린 살기를 읽은 인섭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자, 그럼 분위기 좀 풀어 볼 겸….”

사회자의 시선이 곰 인형을 들고 서 있는 최인섭에게 닿았다.

“거기 곰돌이 들고 계신 분?”

“네?”

인섭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극장에서 일하는 학생이구나.”

“…매니저입니다.”

인섭이 조그만 대답을 듣지 못했는지 사회자는 마이크를 불쑥 들이밀었다.

“그럼 학생이 먼저 해 볼까요? 제가 운은 띄워 드리죠.”

“어….”

인섭은 삼행시가 뭔지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그를 보며 이우연은 웃음을 삼켰다.

“자아, 이!”

“이…?”

인섭이 사회자의 말을 따라 하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니, 따라 하는 게 아니라 이로 시작하는 말을 만들어야죠. 학생, 어디 다른 나라에서 살다 오셨나?”

“죄송합니다. 다시 해 보겠습니다.”

여기저기서 너무 귀엽다, 하는 숙덕거림이 들려왔다. 커다란 눈을 가진 앳된 청년이 저보다 큰 곰 인형을 끌어안고 쩔쩔매는 모습이 사람들의 시선을 끈 것이다.

이우연의 속에 슬슬 불쾌감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삼행시고 지랄이고 인섭의 손에 들린 곰 인형을 빼앗아 적당히 던져 버리고 나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 시작합니다. 이!”

사회자가 운을 띄워주었다.

“이우연 씨는….”

인섭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뒷말을 이었다. 이우연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우!”

“우, 우리 회사의….”

인섭이 음성이 잘게 떨렸다. 제가 하고 있는 게 맞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불안한 눈동자가 이우연과 김강우, 사회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자, 마지막 글자. 연!”

“…연예인입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삼행시를 마친 인섭은 곰 인형을 움켜쥔 채 고개를 숙였다. 커다란 얼음이 밀고 지나간 듯 썰렁해진 극장 안에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인섭의 얼굴에 피가 몰렸다. 삼행시가 뭔지 몰라도 자신이 망쳐 버린 게 분명했다. 이대로 곰 인형이랑 사라져 버리면 좋겠는데….

그때였다.

이우연이 팔로 얼굴을 가린 채 어깨를 들썩였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쏟아졌다.

“하하.”

이우연이 몸을 아예 반대편으로 돌린 채 웃기 시작했다. 인섭은 눈을 껌뻑거리며 그런 이우연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아하하하하.”

기분 좋게 흘리는 가벼운 웃음소리가 아니었다. 이우연이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도저히 참기 힘들다는 듯이.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팬들도, 매니저도, 심지어 이우연 본인조차도.

이우연의 진귀한 웃음은 그렇게 한참 이어졌다.

“뭐로 할 거예요?”

“네?”

“이름.”

인섭이 곰 인형을 고쳐 안으며 모르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이름 지어 줘야죠. 화초한테도 지어 주는 이름인데, 왜 얘한테는 안 붙여 줘요.”

이우연이 곰 인형의 귀를 장난스럽게 잡아당겼다.

‘이우연 씨는 우리 회사의 연예인입니다’라는 희대의 망작 삼행시로 이우연을 한참 동안 웃게 만든 최인섭은 결국 오늘의 승자가 되고 말았다. 이우연이 아끼는 곰 인형을 다른 사람이 아닌 매니저가 갖게 되자 팬들은 차라리 잘됐다며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심지어 오늘 이우연의 웃는 모습은 벌써 이우연 희귀 짤로 인터넷 검색 순위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중이었다.

“얘 마음에 안 들어요?”

“아닙니다. …테디라고 하겠습니다.”

곰 인형에게 붙일 수 있는 가장 흔한 이름이었다. 이름을 들은 이우연이 마뜩잖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수컷인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흰색 털을 가진 흔하디흔한 곰 인형이었다. 인형의 성별까지는 생각해 본 적 없는 것이다.

“나 말고 다른 수컷을 집에 들이게요?”

인섭은 황급히 뒤를 돌아 뒤따라오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했다.

“내가 그런 것도 확인 안 하고 개소리했을까 봐?”

“아, 아닙니다. 테디가 마음에 안 드시면 곰순이로 하겠습니다.”

이우연의 눈빛이 한층 험악하게 빛났다.

“역시 여자가 더 좋은 겁니까?”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날이 서 있었다. 지금 이게 장난을 하는 건지 진심인지 몰라 인섭은 곰 인형의 팔만 초조하게 만지작거렸다.

“안 되겠다.”

이우연이 인섭의 품에 안긴 곰 인형을 강탈했다.

“얘는 내가 키울게요.”

“……!”

이우연이 곰을 옆구리에 끼고 걷기 시작했다.

“이름은 뭐가 좋을까.”

이우연이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땡, 하는 알림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이우연이 인섭에게 먼저 타라고 손짓했다. 인섭은 엘리베이터 구석으로 가서 섰다. 6인승 엘리베이터라 곰 인형 하나와 두 사람이 타자  가득 찬 느낌이었다. 이우연이 지하 4층 버튼을 눌렀다.

“피터라고 해야겠다.”

“네?”

“얘 이름이요. 피터.”

인섭의 영어 이름이었다. 한 번도 불러 본 적 없지만 이우연이 모를 리 없었다.

“오늘부터 나랑 살자. 피터.”

인섭은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서 엘리베이터 바닥 무늬를 눈으로 좇았다.

“어떤가요. 피터는 나랑 살고 싶어 하는 거 같나요?”

이우연이 곰 인형을 제 앞에다 끌어다 놓고 나긋하게 웃었다.

“피, 피터도 당연히….”

곰 인형의 입장을 대변해 주는 건데, 스스로를 3인칭으로 칭하는 기분이 들어 인섭은 얼굴에 열이 올랐다.

“당연히 이우연 씨 집에서, 잘 지낼 겁니다.”

인섭이 고개를 숙인 채 얼른 곰 피터요, 하고 덧붙였다. 웃고 있던 이우연의 눈에 언뜻 차가운 기운이 스쳤다. 그러고는 불쑥 묻는다.

“인섭 씨 나한테 상 받으라고 했던 거 기억나요?”

“제가요?”

“저번에 같이 술 마신 날, 저한테 상 꼭 받으라고 울며불며 협박하셨잖아요.”

“제가요?!”

인섭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제가 어떤 추태를 저질렀는지 기억하지 못해 이우연의 말을 반박할 수도 없었다.

“제가 상 못 받으면 그렇게 부끄럽고 서러워요? 울 만큼?”

“아,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받지 말까요?”

“안 받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상과 별개로 우연 씨는 훌륭한 배우입니다.”

“그럼 주는 것도 받지 말까요?”

이우연이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주면 받으세요.”

인섭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때 지하 4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나 상 받으면 뭐 해 줄 건데요?”

부모의 칭찬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이우연이 물었다. 인섭이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말씀하시면 들어 드리겠습니다.”

“내가 뭘 요구할 줄 알고.”

“뭐든 들어 드리겠습니다. 가능하면, 다.”

이우연의 눈매에 가늘게 길어진다.

“그래요. 그럼 트로피 갖고 프러포즈해야겠다. 한 입 갖고 두말하지 마세요. 피터가 증인이니까.”

“…하하.”

실없는 농담에 인섭은 계면쩍게 웃어 버렸다. 곰을 끌어안고 앞서 걷던 이우연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으십니까.”

“아까 그거, 생각나서요. 우리 회사 연예인.”

“죄송합니다. 그런 거 해 본 적이 없어서.”

인섭은 오늘부터 집에 가서 삼행시 공부를 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제 소중한 애장품을 다시 뺏어 왔잖아요.”

소장한 적도 없는 애장품을 이우연은 더없이 소중한 듯이 품에 끌어안았다.

“이러고 있으니 평범한 연인 같아 보이겠군요.”

“누가요?”

이우연이 인섭과 저를 번갈아 가리켰다.

인섭은 차마 어디가, 어떻게, 어째서 그렇게 보이느냐는 질문을 할 수 없었다.

“남자 친구가 보통 이런 선물 많이 해 주잖아요. 쓸모없고 부피만 차지하는 거.”

“…제가 도로 가져갈까요?”

인섭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지만 이우연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좋네요. 평범한 거.”

평범이란 단어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외모와 목소리, 직업까지 뭐 하나 비범하지 않은 게 없었다. 심지어 곰 인형을 옆구리에 낀 이우연은 평범은커녕 화보에서 걸어 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옆에 선 자신은….

인섭은 유리문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우울함에 눈을 내리깔았다.

“어디로 갈까요?”

이우연이 유리문을 열어 주며 묻는다.

“생각해 두라고 했잖아요, 어제.”

“…….”

인섭은 정말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내도록 이우연이 제게 한 거짓말에 대해 고민하느라 저녁 식사는 생각하지도 못한 것이다.

인섭의 표정에 스친 당혹감을 읽은 이우연이 쓰게 웃었다.

“…강우는 먼저 갔나요?”

인섭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무대 인사가 끝나자마자 김강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먼저 내려가 이동하기 편한 곳에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겠거니 생각했다.

“그럼 데이트하는데 셋이 가요?”

이우연이 스마트 키를 꺼내 버튼을 누르자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승용차의 헤드라이트가 번쩍였다. 오늘 이우연이 밴이 아니라 굳이 제 승용차를 몰고 이곳에 온 이유를 깨달았다.

이우연이 차의 뒷문을 열고 곰 인형을 쑤셔 넣은 뒤,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인섭은 주변을 살피고 잠시 주저하다가 조수석에 올라탔다. 운전석에 탄 이우연이 안전벨트를 끌어 내리며 물었다.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오랜만에 낙지볶음 먹으러 갈까요?”

“…….”

이우연의 제안에 인섭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이전의 악몽이 떠오른 것이다.

“농담이에요.”

이우연이 차의 시동을 걸며 인섭을 채근했다.

“얼른 생각해요. 내비 찍어야 하니까.”

“네. 생각하겠습니다.”

냉큼 돌아온 인섭의 답에 이우연이 설핏 입매를 찌푸렸다.

“왜 이렇게 딱딱하게 굴어요. 직장 상사랑 밥 먹으러 가는 신입 사원도 아니고. 나만 오늘 데이트 기대한 건가?”

좁은 주차장 코너를 솜씨 좋게 돌면서 이우연이 장난스럽게 묻는다.

“…저도 많이 기대했습니다.”

인섭은 옷자락을 구깃구깃 쥐락펴락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사실 지금은 저녁 식사에 대한 기대보다는 어제 이우연이 제게 한 거짓말이 몇 배는 더 신경 쓰였다.

차라리 솔직하게 지금 다 물어볼까.

인섭은 이우연을 흘끔 쳐다보았다.

“할 말 있어요?”

시선을 느꼈는지 이우연이 단도직입 묻는다.

어제 본 이우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느스름하게 웃던 눈과 그린 듯한 미소가 걸린 입술.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탐색하듯 저를 바라보던 차가운 눈동자.

“…아닙니다.”

인섭은 고개를 돌렸다.

“나는 있는데.”

이우연이 운전대를 돌리며 말했다. 그때, 오른쪽에서 빠져나오던 차량이 깜빡이를 켜지도 않고 끼어들었다. 이우연이 브레이크를 밟으며 인섭의 몸이 앞으로 쏠리지 않게 팔로 막아 주었다.

“괜찮아요?”

“네, 괜찮습니다.”

아슬아슬하게 충돌은 피했지만 이우연의 얼굴에 짜증이 일었다. 게다가 당연히 차를 뒤로 빼 줘야 할 상대는 요지부동이었다.

이우연은 운전석으로 손을 내서 차를 뒤로 움직이라고 손짓했다. 그러자 상대 운전자가 클랙슨을 신경질적으로 울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이우연이 하, 하고 짧게 웃으며 운전대를 움켜쥐었다.

“먼저 가라고 하세요.”

인섭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시비가 걸리면 전후 사정이야 어떻든 불리한 것은 늘 연예인 쪽이었다. 매니저이기 이전에 인섭은 이우연이 나쁜 일에 휩쓸리는 것 자체를 보고 싶지 않았다.

이우연이 한숨을 내쉬며 차를 뒤로 빼 주자 상대 차는 기다렸다는 듯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이우연은 기어를 다시 D에 옮기고 운전대를 돌렸다.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감사합니다.”

“뭐가 감사해요?”

이우연이 별소리를 다 듣는다는 표정을 짓는다.

“저 때문에 양보해 주신 거잖아요.”

인섭은 좆같이 운전하는 새끼들 때문에 되도록 운전대를 잡고 싶지 않다던 이우연의 말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우연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웃음을 참는 건지, 화를 참는 것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치미는 감정을 삭이는 것만은 확실했다.

“맞아요, 인섭 씨 없었으면 모르는 척 뒤에서 박아 버렸을 거예요.”

이우연에게 얼마 전 안전 운전 공익 광고 제의가 들어왔다. 공익 광고는 거의 대부분 모델료를 받지 않기 때문에 이미지 증진의 목적만을 가졌다. 연예인으로서 최상의 이미지 메이킹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광고는 김 대표가 단칼에 거절했다. 벤츠 살해범에게 그런 광고를 맡기는 것은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운전하면 본성이 나온다는 말이 사실인가 봐요. 진짜 좆같은 것들이 한둘이어야 말이죠. 수고하십니다.”

주차 정산소 앞에서 차 유리를 내리고 이우연이 인사를 건넸다. 방금 좆같은 것들 운운하던 목소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상냥한 목소리였다.

정산을 마치고 이우연은 운전석 유리를 올렸다.

“제가 운전할까요?”

인섭이 불안스레 이우연을 바라보며 묻는다. 이우연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요. 인섭 씨 옆에 있는데 내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요.”

한결 기분이 좋아 보였다. 살짝 열린 차창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이우연의 머리카락을 흩트려 놓았다. 눈이 마주치자 이우연이 싱긋 웃어 보인다.

“이제야 똑바로 보네.”

“네?”

“오늘 하루 종일 눈 안 마주치고 피했잖아요. 나 상처받았는데.”

산뜻한 목소리로 이우연이 제가 받은 상처를 피력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인섭을 보면서 이우연은 지금이라도 눈물을 흘려 볼까 고민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잠시 전화 좀 받겠습니다.”

인섭이 양해를 구하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이우연은 힐끔 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했다.

“여보세요. 최인섭입니다.”

<인섭아. …혹시 이우연이랑 같이 있니?>

“네! 이우연이랑 같이 있어요! 대표님!”

이우연이 옆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전화기 너머에서 낮은 탄식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신가요?”

<기사 봤어?>

“무슨 기사요?”

인섭이 놀라서 되물었다. 이우연이 제 핸드폰을 말없이 인섭에게 건넸다. 인섭은 얼른 포털 사이트로 들어가 사회면을 먼저 확인한 뒤, 연예면을 쭉 훑어 내려갔다.

“어….”

「채연서 교통사고로 입원」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