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불편하신 데는 없으세요?”
휠체어를 밀던 인섭이 차 실장의 기색을 살피며 물었다.
“괜찮아. 다리 부러진 거지 죽을 병 걸린 거 아니라니까. 다리 빼고 다 건강해. 하하하하.”
차 실장이 쾌활한 투로 대답했다. 본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피부는 삶아 놓은 깐 달걀처럼 반들반들 윤이 났다.
“좋아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그럼 그럼. 소화도 잘되고 두통도 사라지고. 아아, 살맛 나는 이 세상.”
차 실장이 쏟아지는 햇살을 음미하듯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인섭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갑자기.”
“그동안 뵙지 못해서 죄송해서요.”
“하하하. 이런 기회에 얼굴 한 번 보니 반갑긴 하다. 그래, 별일은 없고?”
“네. 별일 없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인섭의 목소리가 유독 힘이 없었다. 이우연의 열애설은 김 대표를 통해 들어 차 실장도 잘 알고 있었다. 이 바닥에서 눈 가리기용 스캔들은 흔했다. 계약 결혼도 있는 마당에 연애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인섭은 스캔들의 장본인과 연애 중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도 김 대표와 자신 둘뿐이었다. 아무리 보여 주기식 스캔들이라고 해도 신경이 강철로 만들어진 이우연과는 다르게 인섭은 속앓이를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 개… 아니, 이우연이 속 많이 썩이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폐만 끼치고 있는걸요.”
인섭이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얼마나 선량하고 아리따운 마음씨란 말인가.
차 실장은 촉촉이 젖어 드는 눈가를 재빨리 환자복 소매로 닦아 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알고 있었다. 본성을 드러낸 이우연이 매니저에게 얼마나 개같이 구는지.
“폐는 무슨. 김 대표에게 말해서 월급 많이 받아. 임시직이라고 대충 입 닦으려고 하면 나한테 말해. 내가 혼쭐을 내 줄 테니까.”
“아닙니다. 너무 많이 주셔서 죄송할 정도예요.”
인섭이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몸은 좀 괜찮아? 그러고 보니 얼굴이 좀 상한 거 같은데.”
다리가 부러진 환자보다 낯빛이 어두운 인섭을 보자 차 실장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어제 잠을 못 자서 조금 피곤한 거뿐입니다. 괜찮습니다.”
“어제? 뭐 하느라 잠을 못…. 아, 하하하. 그래, 잠을 못 잤구나. 날이 더우니 그럴 수도 있지.”
차 실장의 머리에 어제 김 대표가 보낸 문자가 퍼뜩 스쳤다. 본인의 카드를 빼내서 호텔 스위트룸을 예약한 이우연에 대한 욕이 한 사발이었다. 호텔 스위트룸을 누구와 이용했을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제 슬슬 바빠지겠네. 영화 개봉하잖아.”
차 실장은 얼른 말을 돌렸다.
“네. 모레부터 영화 홍보 시작돼서 바빠질 겁니다.”
“이번 영화 잘빠졌다며. 언론 시사회 반응이 좋던데.”
“정말 잘 나온 거 같습니다. 얼른 개봉해서 많은 분들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인섭의 목소리에 들뜬 기색이 여실했다.
“인섭 씨는 정말 이우연이 팬이 맞나 봐. 이우연 본인보다 어째 더 기대하는 거 같아.”
“네. 당연히 기대합니다. …팬이니까요.”
인섭은 제 입으로 이우연의 팬이라고 말하는 게 차 실장을 속이는 기분이 들어 미안했다.
“흠흠, 저기 말이야. 인섭 씨.”
차 실장이 헛기침을 하며 말문을 열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혹시 고민거리나 그런 거 있으면 나한테 말해도 돼. 형이라고 생각하고.”
인섭이 눈을 크게 치뜨자 차 실장이 민망한 듯 뺨을 긁적였다.
“미안. 형치고는 나이가 너무 많은가.”
“아닙니다. 그냥…. 형은 없어서 좀 신기한 느낌이라서요.”
“외동이지?”
“첫째예요.”
인섭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어디 가서 맏이 같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몸도 약하고 성격도 소심해서 도무지 그렇게 보이지 않는 터다.
“동생이 있었어? 몇 명?”
“세 명이요.”
“우아. 대가족이네. 동생들하고 사이좋을 거 같은데. 사진 없어?”
인섭이 핸드폰 사진첩에서 가족사진을 찾아 차 실장에게 보여 주었다. 차 실장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인섭과 핸드폰 화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귀엽죠?”
“하하하하하. …크네.”
머리 하나는 큰 형제들 사이에서 인섭이 가장 어려 보였다. 귀엽다는 표현은 동생들이 아니라 인섭에게 어울렸다.
“몸만 컸지 다 애들이에요. 모이면 얼마나 시끄러운지 몰라요.”
핸드폰 속 사진을 보는 인섭의 눈에 애정이 그득했다.
“가족들 안 보고 싶어?”
“…보고 싶어요.”
인섭이 주머니에 핸드폰을 도로 넣었다.
“미국이 한국보다 편하긴 하지?”
“네. 아무래도. 그래도 많이 적응했습니다.”
“학교 졸업하면 미국으로 돌아가는 건가?”
“아니요. 그건 아닌데…. 아직 정해진 건 없습니다.”
부모님께도 한국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을 뿐이다. 그 이후는 아직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 이곳에서 이우연과 같이 지내려면 자신도 제대로 된 일을 찾아야 했다.
“이것저것 생각 중이긴 한데. 걱정이네요.”
마지막 덧붙은 말에는 한숨이 섞여 있었다. 차 실장은 평생을 놀고먹어도 돈이 썩어 문드러질 만큼 많은 남자를 옆에 두고 참 쓸데없는 걱정 한다고 말해 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우연이라면 빨대를 꽂으라고 제 등을 스스럼없이 내밀어 골수를 한 모금 마시게 한 후, 몹시 비싼 값을 치르게 할 것 같다는 아주 그럴싸한 예감이 든 터다.
“방학 끝나기 전에 미국이나 한번 갔다 오지 그래.”
“나중에 상황 봐서 정하겠습니다. 이제 바빠져서요.”
인섭이 얼른 웃어 보였다.
“그럼 휴가 내고 친구들하고 어디 바람 쐬러 갔다 와. 내가 대표님한테 말해 둘게. 며칠은 괜찮을 거야.”
인섭이 말없이 가만히 웃었다. 차 실장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한국에서 연락하는 친구들 없어?”
인섭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명도?”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아니라, 아이고. 이 친구야.”
차 실장이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그런 건 좀 서투릅니다.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법도 모르고.”
“이우연하고 어울리잖아. 누구하고도 어울릴 수 있을 거야.”
차 실장의 진심 어린 농담에 인섭이 웃음을 터트렸다.
“진심이야. 마음만 먹으면 친구 백 명쯤은 만들걸.”
“그러면 좋겠네요.”
인섭이 천천히 휠체어를 밀었다.
“그럼 친구…가 이우연뿐이야?”
“아, 네…. 그러게요.”
인섭이 시선을 어물어물 내리며 대답했다.
“있잖아, 인섭 씨. 내가 이우연을 존나 싫어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이건 인섭 씨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이우연하고 대화가 돼?”
“…….”
인섭은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차 실장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벽 보고 대화하는 기분이지?”
“자주 그런 건 아닙니다.”
이우연은 공감 능력이 떨어졌다. 그걸 사람들 앞에서는 연기로 적당히 메꿨지만 제 성격을 아는 상대에게는 굳이 연기조차 하려 들지 않았다. 아주 사소하고 작은 부분에 대한 공감이 특히 부족했다. 이우연에게 몹시 미안한 얘기지만 인섭은 그때마다 외로움을 느꼈다. 평생 이 사람에게 이런 문제로는 공감을 얻을 수 없겠구나, 하고.
“외롭지 않아?”
머릿속을 꿰뚫어 본 듯한 질문이었다.
“…가끔은요.”
그래서 인섭은 저도 모르게 솔직한 본심을 드러내고 말았다.
“코 꿰기 전에 얼른 다른 사람을 만나야 할 텐데….”
“네?”
인섭이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아, 아니 내 말은…. 다른 친구도 만들라고. 나무가 튼튼하려면 잔뿌리가 많아야 하는 법이야. 인간관계도 마찬가지고. 잔뿌리 없이 뿌리 한 줄기만 있으면 아무리 굵고 단단해도 비바람에 뽑히는 법이야.”
인섭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너무 꼰대 짓 했나.”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아요. 저한테 이런 말씀해 주시는 분도 실장님뿐인걸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큰형이라고 생각하라니까. 매우 올드한 큰형.”
“감사합니다.”
인섭은 몹시 기분 좋았는지 목덜미까지 붉어졌다.
“그래. 형한테 고민 상담할 건 없고?”
괜찮다는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인섭이 주저주저하면서 손을 꼼지락거렸다. 차 실장이 말해 봐, 하면서 인섭을 재촉했다.
“강영모 씨 말입니다.”
“강영모?”
그날의 진실을 아는 사람은 김 대표와 차 실장, 그리고 최인섭뿐이었다. 그리고 강영모의 이름은 그 셋 사이에서 금기어였다.
“강영모가 왜? 무슨 일이야. 또 이우연이 문제 일으켰어?”
차 실장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병원에 입원한 뒤로 처음으로 그가 병자 같은 낯빛을 띠었다.
“아닙니다. 그런 거 절대 아닙니다. 그냥…. 그분이 연예계에 영향력이 큰 편이신가요?”
“그렇지. 연기도 잘하긴 하는데 소속사 대표가 강영모 처가 쪽 사람이잖아. 소속사가 워낙 크기도 하고.”
대답을 하면서도 차 실장은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강영모 씨가 이우연 씨랑 마주칠 일이 잦을까요?”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최대한 안 마주치게 신경 쓰고는 있어.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거야?”
인섭은 잠시 망설였다. 강영모가 제게 했던 말을 옮기면 본의 아니게 이우연까지 아우팅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아무리 차 실장과 김 대표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해도 이건 완전 다른 문제였다.
“네. 없습니다. 걱정돼서 여쭤본 것뿐입니다.”
인섭은 휠체어를 밀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차 실장의 얼굴을 보면서 태연하게 거짓말을 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 다행이다.”
차 실장이 잠시 한숨을 몰아쉬었다가 그런데, 하고 말을 이었다.
“혹시라도 말이야. 강영모랑 이우연 마주치는 일이 생기면 인섭 씨가 막아 줘. 일단 무조건 다른 데로 끌고 가. 이우연이 인섭 씨 말이라면 잘 듣잖아.”
인섭은 김 대표에게 다른 매니저를 써 달라고 부탁해 볼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랬다가 괜한 오해를 살 것 같고, 차 실장의 말처럼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면 이우연을 막을 사람은 자신뿐이란 생각에 그만두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인섭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도 정말 다행이다. 이우연 옆에 인섭 씨 같은 사람이 있어서.”
차 실장의 말에 인섭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오늘 새벽에 눈을 떴을 때, 인섭은 처음에 꿈을 꾸는 거라고 생각했다. 잠든 이우연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한참을 바라본 후에야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기했다. 그보다 먼저 눈을 뜬 건 처음이었다. 이우연의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샤워를 하고 머리를 제대로 손질하지 않고 잠든 터다.
평소보다 앳된 느낌이었다. 이우연은 가끔 소년처럼 웃었다. 본인은 의식하는지 모르겠지만 인섭에게 짓궂은 장난을 걸거나 농담을 던질 때 특히 그랬다. 그리고 그 모습이 몹시도 좋았다. 이우연이 제게 그렇게 웃어 줄 때마다 바보가 된 것처럼 머리가 어지럽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항상 그렇게 웃어 주면 좋을 텐데.
인섭은 멍하니 이우연을 보며 덧없는 바람을 삼켰다. 그리고 그 순간, 거짓말처럼 이우연이 눈을 떴다. 한참 동안 인섭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웃었다, 소년처럼.
잠결이었는지 이우연은 바로 다시 눈을 감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 뛰었다. 그 소리에 이우연이 깨지는 않을까 두려울 정도였다. 이우연이 보여 주는 무방비한 모습이 주는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얼마나 아끼는지, …그리고 자신이 그를 얼마나 아끼는지 또한.
‘정신 병원이든 감옥이든, 나도 갇히고 싶지 않으니까.’
피가 튄 창백한 얼굴과 소년처럼 웃는 이우연의 모습이 겹쳐졌다. 불안했다. 자신 때문에 그에게 또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그의 옆에서 행복하면 할수록 불안은 점점 커졌다.
“물론 인섭 씨 입장에서 이우연 같은 친구… 가 좋을 리가 없겠지만.”
“아,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우연이 못되게 굴면 그냥 버려. 친구… 따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으니까. 알았지?”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차 실장이 관계에 대한 조언을 몇 마디 더 하려는 찰나, 환자복에 넣어 둔 핸드폰 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잠깐만. 여보세요?”
차 실장이 전화 통화를 시작했다.
최인섭은 제 핸드폰을 꺼냈다. 호텔에서 떠나기 전 김 대표에게 이우연을 한 시간만 붙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밥 먹여서 보낼 테니 걱정 말고 볼일 보라는 답이 돌아왔다. 혹시 이우연이 사무실에서 떠나면 문자를 달라고 부탁해 뒀다. 다행히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이우연에게 중간에 전화가 한 통 걸려 오긴 했지만 받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전화를 받았다간 몰래 밖에 나온 걸 들킬 게 분명했다. 전화를 받지 못해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문자를 보내자 이우연은 일이 좀 늦어질 거 같으니 이따가 가겠다고 답을 했다. 예상보다 일이 순조롭게 풀려 다행이었다.
“이상하네. 병원 원무과에서 빨리 와 달라는데?”
차 실장이 의아한 얼굴로 통화를 마쳤다.
“원무과요?”
“응. 급한 일이라고 보호자가 최대한 빨리 오라는데. 이상하네. 급할 일이 없는데.”
“그럼 제가 갔다 오겠습니다.”
휠체어를 밀고는 이동하는 데 아무래도 시간이 걸렸다.
“미안하네. 한참 가야 할 텐데. 원무과 1층 안내 데스크 옆에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오는 김에 음료수라도 뽑아 올까요?”
“생수 한 병만 사다 줘. 돈은 내가 병실 올라가서 줄게.”
“괜찮습니다. 그럼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인섭이 자리를 떠나자마자 차 실장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비흡연자 앞에서는 아무래도 흡연이 불편했던 터다. 라이터를 찾는데 병실에 두고 나온 것을 깨닫고 에이, 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라이터에 불을 댕겨 건넸다.
“감사….”
“뭘요.”
“…….”
차 실장의 입에 문 담배가 뚝 떨어졌다.
“환자가 담배 피워도 됩니까?”
이우연이 바닥에 떨어진 담배를 주워 꺾어 버린 다음, 근처 쓰레기통에 던졌다.
“…네가 여기 왜 있냐.”
“와, 날씨 좋네요.”
이우연이 휠체어 손잡이를 쥐고 밀기 시작했다.
“네가 여기 왜 있냐니까. 묻는 말에나 대답해.”
“실장님 병문안 왔죠.”
초콜릿을 잘게 부순 듯한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차 실장은 소름이 오싹 돋았다.
“무슨 수작이야.”
“수작이라니요. 섭섭하게.”
차 실장은 유쾌한 성격 덕분에 주변에 사람이 많았다. 입원한 뒤로 회사 직원들뿐만 아니라 알고 지냈던 제법 많은 수의 연예인도 병문안을 왔다. 정작 이우연만큼은 병문안은커녕 괜찮으냐는 문자 한 통 보내지 않았다. 물론 그런 놈인 줄 알았기에 차 실장은 손톱의 때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병문안이랍시고 나타난 이 상황이 몹시도 껄끄러울 따름이었다.
“혹시, 원무과에서 전화 오게 만든 게 너냐?”
얼핏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차 실장이 입매를 찌푸렸다.
“네. 최대한 오래 붙들고 이것저것 설명하라고 부탁드렸죠. 덕분에 사진을 몇 번이나 찍어 줬는지 몰라요.”
이우연이 손가락으로 선글라스를 슬쩍 내려 보이며 웃었다. 그렇게까지 수고를 들여 인섭을 제게 떨어트려 놓은 속셈이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왜. 뭐가 궁금한데.”
“역시 실장님은 말이 잘 통해서 좋아요.”
이우연이 휠체어를 슬슬 밀면서 말을 이었다.
“인섭 씨가 갑자기 좀 이상해져서요.”
“대체 어디가?”
“뭔가 겁먹은 것 같아요. 원래 소심하긴 했지만, 이상할 정도로 무서워해서요. 눈도 잘 안 마주치려고 하고.”
“널 안 무서워하는 쪽이 이상한 거 아니야.”
차 실장의 퉁명스러운 구박에 이우연이 짧게 웃었다.
“제 어디가 무서워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일단 방금 니 웃음부터 무서워.”
차 실장이 귀신을 앞에 둔 사람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인섭 씨가 제 웃음소리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본인은 의식하는지 모르겠지만 인섭은 자신이 웃을 때마다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보곤 했다. 인섭의 홍조 띤 뺨과 살짝 벌어진 입술이 마음에 들어 이우연은 가끔 일부러 소리 내어 웃곤 했다.
“그럼 네가 못살게 굴어서 무서워하나 보다. 음, 확실해.”
차 실장이 몹시 유력한 가설을 세우고 스스로 납득했다.
“제가 못살게 구는 거 봤어요? 아, 들었구나.”
“…….”
제주도의 악몽이 떠오른 차 실장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기억을 떨쳐 내기라도 하려는 듯 차 실장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고는 용기를 긁어모아 가슴속에 담아 둔 말을 꺼냈다.
“너 그런 식으로 하다가 오래 못 간다.”
이우연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역시 부부는 일심동체라더니.”
“그게 또 무슨 헛소리야.”
차 실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대표님도 오늘 그 비슷한 소리 하시더라고요. 두 분이 미리 전화 통화해서 입 맞추신 건 아니죠?”
“사람 생각이 거기서 거기지. 뻔한 거 아니냐.”
이우연이 하하 웃으면서 휠체어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럼 인섭 씨가 뭐라고 했는지나 말해 줘요. 뻔한 소리는 이미 충분히 듣고 왔으니까.”
“별 얘기 안 했어. 요즘 일 때문에 이래저래 바쁘다는 정도?”
차 실장은 두루뭉술하게 둘러댔다. 인섭이 강영모 얘기를 꺼내긴 했지만 그걸 이우연 앞에서 할 수 없었다. 그랬다간 이우연이 인섭의 걱정을 덜어 주겠다며 예쁜 벽돌을 집어 들고 콧노래를 부르며 사라질지 모르는 것이다.
“다른 얘기는요?”
“없어.”
차 실장이 단호하게 대꾸했다.
“아까부터 지켜봤는데….”
병원 옆 공원은 8차선 도로를 건너 있었다. 도로 위를 가로지르는 육교 방향으로 이우연은 천천히 휠체어를 밀었다.
“바쁘다는 얘기를 왜 그렇게 한참 해요?”
“그럴 수도 있지. 야, 야, 야. 왜 육교로 올라가.”
이우연이 가볍게 콧노래를 불렀다. 녹음이 우거진 초여름이었다. 하지만 차 실장은 순간 스산한 한기를 느꼈다.
“산책하는 거죠.”
“산책을 왜 육교에서 하냐고.”
“높은 곳에서 경치도 보고 좋잖아요.”
“8차선 도로 볼 게 뭐 있다고!”
하필 주변엔 사람도 없었다. 차 실장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다리 수술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목발이나 휠체어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실장님. 안 그래도 보여도 저 진짜 노력 중이거든요. 그러니까 실장님도 도와주셨으면 좋겠네요.”
“내, 내가 뭘 도와.”
이우연이 대답 대신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교정이나 래미네이트가 아니고서 저렇게 가지런하고 예쁜 치아를 가진 사람은 연예계에서도 드물었다. 그의 단정한 외모를 돋보이게 하는 매력 포인트였지만 차 실장은 이우연이 이를 보이며 웃을 때마다 물어뜯길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인섭 씨랑 무슨 얘기 하셨어요?”
차 실장은 마른침을 삼키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우연의 눈에 해사한 웃음이 스쳤다. 뜨거운 태양이 정수리를 쪼개 놓을 기세로 내리쬐고 있었지만 이우연의 주변에는 청량한 바람이 부는 듯했다.
“아까 말했잖아. 그냥 요즘 바쁘… 윽.”
휠체어의 바퀴가 계단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렸다. 차 실장이 몸을 일으키려다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이우연이 차 실장을 뒤에서 끌어다 앉히고는 혀를 낮게 찼다.
“위험하잖아요. 다치시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누가 들으면 세상에서 차 실장의 안위를 가장 걱정해 주는 사람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네가 이러니까, 인섭이가…!”
“인섭 씨가 왜요.”
이우연의 눈이 번뜩였다. 지뢰를 밟았다. 더 이상 대충 둘러대기도 힘들었다. 차 실장은 한숨을 내쉬며 반쯤 포기한 투로 말했다.
“여기서 못 살겠다고 하더라.”
정확한 표현으로는 미국이 더 마음 편하다고 했지만 차 실장은 과장을 섞어 말했다.
“못 살겠다고요?”
이우연이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이 되물었다.
“당연히 살기 싫지. 가족하고는 멀리 떨어졌지, 친구는 한 명도 없지, 애인이란 작자는…. 쯧.”
차 실장이 못 볼 것을 봤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인섭 씨가 그래요? 여기서 살기 싫다고?”
이우연이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그래. 외롭고 힘들대. 뻔하지. 인섭이 다른 사람이랑 친하게 지내지도 못하게 하고, 너만 만나게 했을 거 아니야. 그래 갖고 관계가 지속이 되겠냐? 인섭이처럼 정 많고 사람 좋아하는 성격은 말라비틀어져서 죽어.”
외로움을 많이 타는 인섭의 성격은 이우연도 이미 알고 있었다. 가족들을 그리워한다는 사실 또한. 친구나 또래 집단에 가진 은근한 동경도. 하지만 여길 싫어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연애 한번 하기 어렵네요.”
이우연이 눈을 아래로 내리감은 채로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휠체어의 손잡이를 툭툭, 두드렸다.
차 실장은 제 공격이 먹혀들었다는 생각에 의기양양해져서 신나게 다다다 쏘아붙였다.
“인섭이가 백배는 더 어려울걸. 무엇보다 상대가 너잖아. 얼마나 불안하겠어. 무슨 생각하는지도 모르는 인간인 데다가 직업은 연예인. 최악의 조합이지. 상상만 해도….”
차 실장이 으, 하고 진저리쳤다.
“상상하지 마세요. 제가 머리에 총 맞지 않는 이상 차 실장님하고 사귀는 날은 안 와요. 아니, 총 맞아도 안 사귈게요.”
이우연이 싱긋 웃으며 차 실장을 깠다.
“그 총 나도 빌려줘. 내 머리에도 쏘게.”
“하하. 다행이네요. 서로 취향 아니니 평생 상처받을 일도 없고.”
“어휴. 불쌍한 인섭이. 어쩌다가 저런 걸 만나서.”
차 실장이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김 대표와 같은 말을 하는 차 실장을 이우연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실장님.”
“왜애. 또.”
“방금 한 말 거짓말 아니죠?”
차 실장이 뜨끔해서 무슨 거짓말, 하고 되물었다.
“요 며칠 별일 없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한국에서 살기 싫어졌다니. 영 이상하잖아요.”
“임계점이라는 것도 몰라? 마지막 한 방울이 떨어져서 한계를 넘은 게지. 아암. 인섭이 같은 애가 한번 확 돌아서면 무서운 거야. 어느 날 비행기 타고 확 가 버릴 수도 있는 거지. 감정의 시작은 미약해도 끝은….”
휠체어가 삐걱거리며 앞으로 미끄러졌다.
“끝은 뭐요?”
“…평화롭게 돌아가리라.”
차 실장이 병원을 가리켰다. 애써 침착해지려고 해도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우연이라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사람을 계단 아래로 밀어 버리고도 남을 놈이었다.
“땡.”
이우연이 해맑은 음성으로 오답을 알렸다. 휠체어의 무게 중심이 앞으로 확 쏠렸다. 죽는다. 차 실장은 사람 하나 잘못 들여서 이 사달을 불러일으킨 김 대표에게 욕을 퍼부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아래로 굴러떨어질 거라 생각했던 몸은 그대로였다. 뒤를 돌아보니 이우연이 차 실장의 어깨를 붙들고 있었다.
“제가 설마 실장님을 저 계단 아래로 밀어 버릴 거라고 믿으신 건 아니죠?”
“…….”
콱 믿었는데요.
“사람을 뭐로 보고.”
“뭐로 보긴. 그냥 너로 봤…. 하하.”
이우연이 더할 나위 없이 선량한 미소를 띤 채로 휠체어를 바로잡았다. 그가 휠체어를 밀며 육교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인섭 씨 저기 오네요.”
이우연이 가리킨 방향에서 인섭을 닮은 희끄무레한 형체가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저는 먼저 가 볼게요. 저 왔었다는 소리는 절대 하지 마시고요. 만약 말씀하시면….”
이우연이 차 실장의 어깨를 지그시 움켜쥐었다.
“또 병문안 올 겁니다.”
“…….”
차 실장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이우연이 만족스러운 답을 얻었는지 차 실장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쾌차하세요.”
발소리가 멀어졌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이우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제야 차 실장은 제 환자복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음을 깨달았다.
「호텔 로비예요. 금방 올라갈게요.」
문자를 보내자 얼마 뒤 바로 답 문자가 도착했다.
「네! 오십시오.」
문자에서 인섭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우연은 일찌감치 호텔에 도착해 있었다. 인섭이 엘리베이터를 탄 것을 확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자를 보낸 것이다.
엘리베이터에 탄 이우연은 카드를 대고 객실의 층을 눌렀다.
이곳에서 살고 싶지 않다, 라.
향수병이야 비행기 몇 번 태워서 미국에 갔다 오면 그만이지만, 이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이기도 했다.
이우연은 팔짱을 낀 채 반대편 팔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상대가 너라니 오죽 불안하겠느냐는 차 실장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이 영 틀린 건 아니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은 믿지 못할 인간이니까.
차라리 미국에서 당분간 같이 지내자고 할까. …아니지.
이우연은 낮게 혀를 찼다.
인섭의 불안을 달랠 좋은 방법이었지만 가장 위험한 방법이기도 했다. 사랑으로 충만한 인섭의 가족들은 쓸데없을 만큼 훌륭했다. 어리광이 심하고 외로움을 많이 타는 인섭이 기댈 상대는 자신 하나로만 한정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 자칫 가족들을 만나게 했다가는 미국에 눌러앉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어쩌면 좋을까.
어느새 엘리베이터가 해당 층에 도착했다. 복도를 걸으면서도 이우연은 계속 머릿속의 생각들을 곱씹었지만 이렇다 할 답은 나오지 않았다. 기분이 아주 개 같았다. 카드 키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 파드닥 놀라 소파로 가서 앉는 인섭의 뒷모습이 보였다.
“저 왔어요.”
이우연은 일부러 소리 내어 기척을 알렸다.
“네. 오셨습니까.”
테이블에는 인섭의 옷이 반듯하게 개어져 있었다.
“아까 세탁물을 가져다주셨더라고요.”
이우연의 시선이 제 옷에 닿자 최인섭이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요청을 하기 전까지는 세탁물을 가져오지 말라고 미리 일러둔 터였다. 룸서비스로 식사만 시켜도 숨기 바쁜 인섭이 직접 전화를 걸어 세탁물을 요청할 줄은 몰랐다.
가끔 쓸데없이 행동력이 좋단 말이지. 짜증 나게.
이우연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인섭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
“……!”
“감기 들게 옷을 왜 이렇게 입고 있어.”
이우연이 온다는 소리에 허겁지겁 옷을 갈아입은 모양인지 인섭은 배스 가운의 자락도 제대로 여미지 못한 상태였다.
“죄송… 합니다.”
이우연이 꼼꼼하게 가운 끈을 묶어 주자 인섭이 황송함에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그건 또 뭐예요.”
“뭐가요?”
이우연이 발을 가리켰다. 인섭은 그제야 제가 양말을 미처 벗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바, 발이 시려서 양말만 꺼냈는데….”
거짓말 대회에 나간다면 예선 문턱에도 가지 못하고 탈락할 사람이었다. 이우연은 인섭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허리를 번쩍 안아 들었다.
“이, 이제 나가야 합니다. 체크아웃 시간 되어 갑니다.”
“괜찮아요. 레이트 체크아웃 하면 되니까.”
이우연이 인섭을 안은 채로 침대로 데려가 눕혔다. 그러고는 말없이 인섭을 끌어안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이우연답지 않은 행동에 인섭은 저기, 하고 그를 불렀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요.”
인섭이 머뭇머뭇 이우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혹시 어디 아프신 건 아니시죠. …걱정됩니다.”
이우연의 체력이 어떤지 옆에서 지켜보고 겪어 본바,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최인섭이었다. 그런데도 힘들다는 한마디에 인섭은 의심조차 없이 이우연을 걱정했다.
어디 아프냐는 물음은 어머니에게조차 들어 본 기억이 없다. 이우연이란 인간이 얼마나 끔찍한 괴물인지 알면서도 인섭은 매번 스스럼없이 자신을 끌어안아 주었다.
“좀 피곤한가 봐요.”
“약이라도 드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병원에 가 볼까요?”
“이러고 있으면 괜찮아질 거 같은데.”
이우연이 인섭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인섭은 이우연의 낯을 살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우연이 인섭 씨, 하고 낮게 그를 불렀다. 인섭은 연약한 세공품을 다루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이우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많이 아프시면 말씀하세요. 병원 데려가 드릴게요.”
이우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짝짝이로 신은 인섭의 양말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가 지끈거릴 만큼 일었던 짜증이 일시에 누그러들었다. 웃음이 났다.
“아까 하던 얘기 계속할까요.”
“무슨 얘기 말씀입니까.”
“내가 인섭 씨 얼마나 좋아하는지, 돌아와서 마저 얘기하기로 했잖아요.”
“그, 그랬던가요.”
“실은 저 누가 머리 만지는 거 존나 싫어하거든요.”
머리를 쓰다듬던 인섭의 손이 멈칫한다. 이우연은 계속하라는 듯이 인섭의 손에 제 머리를 가져다 댔다.
“…싫어하신다면서요.”
“다른 사람은 싫어. 그러니까 계속… 만져 줘요.”
인섭이 다시 가만가만 이우연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이우연은 인섭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눈을 감았다. 자신의 감정이 평범한 사람이 느끼는 사랑인지 확신할 수 없다. 이 감정이 영원할 거라는 장담은 누구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인섭 씨.”
이우연의 부름에 인섭이 네, 하고 대답했다.
“여권 어디에 뒀어요?”
이건 머리카락 한 올조차, 누구에게도 줄 수 없다.
절대로.
“여권 가져왔어요?”
“네. 가져왔습니다.”
인섭이 갈색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신분증은요?”
“거기 다 넣어 두었습니다.”
이우연은 조만간 해외 화보 촬영을 나갈지 모른다는 핑계로 인섭의 여권과 신분증을 요구했다.
“다른 서류가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준비해 두겠습니다.”
의심 한 점 없는 맑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이우연은 슬며시 눈웃음을 지었다. 인섭은 이우연이 필요하다고 하면 제 심장을 내어주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아니, 심장을 주면서 가다가 넘어지지 말고 조심하라는 말까지 덧붙이겠지.
“혹시 필요한 서류 있다고 하면 그때 말씀드릴게요.”
이우연은 인섭이 건넨 서류 봉투를 챙기며 당분간은 금고에 넣어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인섭이 운전대를 돌리며 말했다. 오늘은 공식 일정이 아니었기에 밴을 이용하지 않고 이우연의 승용차를 운전하게 되었다. 조수석에 앉은 이우연은 창가에 기댄 채로 인섭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내 거 내가 보는데, 안 돼요?”
“밖에서 그런 말씀은….”
“여기 밖 아니잖아요. 차 안에 둘뿐인데 누가 들어요?”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혹시 모르니까요.”
인섭이 입술을 꾸욱 다물고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인섭의 불안과 스트레스에는 아무래도 자신과의 스캔들도 한몫하는 것 같다고 이우연은 생각했다.
“알겠어요. 인섭 씨 말대로 할게요.”
평소와 다르게 순순히 대답하는 이우연을 인섭은 의아하다는 듯이 흘깃 쳐다보았다.
“왜요.”
이번에는 이우연이 물었다.
“아니요. …아직도 피곤하세요?”
이우연은 웃음을 터트렸다.
시발. 진짜 좆같이 귀엽잖아.
“안 피곤해요.”
당장 차를 세워 인섭의 가랑이 사이에 좆을 꽂아 넣고 싶은 욕구를 누르며 이우연은 해사하게 웃었다.
“다행입니다. 걱정 많이 했는데.”
인섭은 백미러로 후방을 확인하며 차선을 변경했다.
“아, 나는 왜 인섭 씨가 내 걱정을 해 주면 이렇게 좋지.”
이우연이 조수석 시트에 비스듬히 고개를 기댄 채 말했다.
“걱정 안 하는 게 좋은 겁니다.”
짐짓 근엄한 척 대답했지만 붉게 물든 인섭의 목덜미가 셔츠 사이로 보였다. 이우연은 셔츠와 목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잡아당기면서 안 더워요? 하고 물었다.
“괜찮습니다. 운전 중에 위험하니 장난치지 마세요.”
인섭은 얼른 셔츠 칼라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장난이 아니라 수작을 거는 중이라고 말해 줄까 하다가 이우연은 손을 거두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시트에 기대 눈을 감았다.
“도착하면 깨워 드릴까요.”
“안 자는데.”
이우연이 눈을 뜨며 대꾸했다.
“주무세요. 또 피곤하시면 어떡해요. 오늘도 스케줄 두 개나 잡혀 있는데.”
배우는 작품에 들어가지 않으면 휴식기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스케줄이 없었다. 하지만 작품에 들어가거나 영화가 상영되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곤 했다.
“인터뷰 두 번 하는 건데요, 뭘.”
“어제 보내 드린 예상 질문은 읽어 보셨나요?”
인섭은 논문을 써도 좋을 만큼 자세하게 영화에 관한 해석과 캐릭터에 대한 설명을 적어 이우연에게 메일로 보냈다. 참으로 한결같은 매니저의 성실함에 이우연은 말없이 미소 지었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그걸 궁금해할 거라고 믿는 인섭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오늘 받게 될 질문은 뻔했다. 채연서와 어떻게 만났는지, 어쩌다 사귀게 되었는지, 그분에게 한 말씀 정도, 되겠지.
“네. 읽어 봤어요. 도움 많이 될 겁니다.”
“그럼 좋겠습니다. 한숨 주무세요. 이십 분 뒤에 깨워 드릴게요.”
잠이 오지 않았지만 인섭이 그러라고 하니 이우연은 도로 눈을 감았다. 이십 분 뒤 판교의 카페에 도착하자 인섭은 차를 세웠다.
“도착했습니다.”
조심스럽게 저를 흔드는 손길이 좋아서 이우연은 일부러 눈을 뜨지 않았다.
“우연 씨. 도착했는데. …주무세요?”
“네. 자고 있어요.”
이우연이 눈을 감은 채로 대답했다. 인섭이 그의 장난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이우연이 눈을 떴다.
“슬리핑 뷰티 깨우는 방법 몰라요?”
“…깨셨으면 얼른 가세요.”
뷰티(Beauty)가 여성을 가리키는 명사이긴 했지만 이우연에게 붙이는 것이 억지스럽진 않다고 인섭은 생각했다. 이우연이 웃으면서 안전벨트 클립을 끌렀다. 차에서 나가려던 그는 인섭이 움직이지 않자 고개를 돌렸다.
“같이 안 가요?”
“저는 차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카페 안에 있어요. 왜 차에서 기다려. 고생스럽게.”
“괜찮습니다. 얼른 다녀오세요.”
또다.
인섭이 미묘하게 선을 긋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우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 있으면 연락해요.”
“네.”
이우연이 차 문을 닫고 사라졌다.
혼자 남게 된 인섭은 한숨을 몰아쉬며 시트에 몸을 기댔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이우연을 의식하는 바람에 어깨가 뻐근할 정도로 아팠다. 밖에서 만지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긴 했지만 언제 갑자기 손을 뻗을지 몰라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그래도 이우연은 나름 약속을 지켜 농담을 툭툭 던지기는 해도 전처럼 저돌적으로 굴지는 않았다.
인섭은 문득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시작했다. 포털 사이트에서 시작해, 팬 카페, 커뮤니티 등을 차례대로 돌면서 이우연의 이름을 쳐서 나오는 게시물을 샅샅이 훑었다.
“다행이다….”
이상한 얘기는 눈에 띄지 않았다. 인섭은 안심하고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이우연의 기사를 찾아서 좋은 댓글에 공감을 눌렀다. 악플이 눈에 띄었다. 안티가 늘었다던 김 대표의 말이 사실이었다. 인섭은 하나하나 열심히 비공감을 눌렀다.
그러기를 얼마간. 어깨가 찌뿌듯해서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삼십 분가량이 지나 있었다. 보통 인터뷰는 한 시간이면 끝난다. 사진 촬영하는 시간까지 더해도 넉넉잡아 한 시간 반이니, 끝나려면 아직 사십 분은 남았다. 인섭은 카페 주변을 돌아보자는 생각에 안전벨트를 끄르고 차 밖으로 나갔다.
평일 낮이어서 카페는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인터뷰는 카페 별관을 빌려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근처에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던 인섭은 카페 주차장 옆에 세워진 검은색 차량을 보고 어라, 하고 눈가를 좁혔다. 번호판이 눈에 익었다.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분명 톨게이트를 나올 때 옆에 서 있던 차량이다. …아니, 이곳으로 들어오기 전 사거리에서도 봤다. 바로 뒤에서.
인섭은 망설임 없이 검은색 승용차로 다가갔다. 크게 숨을 삼키고 운전석의 유리를 두드렸다. 차의 유리가 내려가고 수염을 기른 남자가 뭐요, 하고 짜증 섞인 얼굴을 들이밀었다. 운전석 옆에 놓인 커다란 카메라가 인섭의 눈에 들어왔다.
“따라오신 거 알고 있습니다.”
“뭐라고?”
“어떤 목적을 갖고 따라다니시는지 모르겠지만, 이러시면 안 됩니다. 법에 어긋납니다. 찍은 사진은 지워 주십시오.”
“하, 진짜 뭐라는 거야. 당신 내가 누군지 알아?”
남자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삼켰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최인섭은 모릅니다, 하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당신 이우연 매니저지?”
“네. 그렇습니다.”
“나한테 이런 식으로 굴어서 좋을 거 하나 없어. 안 그래도 하루 종일 허탕이라 짜증 나 죽겠는데.”
허탕이란 단어에 인섭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진은 정식으로 인터뷰를 요청하시고 찍어 주시기 바랍니다.”
남자가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가 인섭의 머리 위로 훅 다가왔다. 인섭이 작게 기침하며 설핏 미간을 찡그렸다.
“이봐요, 매니저 양반. 거 되게 답답하게 구네. 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지? 정말 뭘 모르네.”
남자의 반팔 소매 아래로 오래된 문신의 푸른색 염료가 보였다. 말투도 그렇고 행색도 그렇고 평범한 기자는 아닌 것 같았다. 솔직히 무서웠다. 그렇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만약 이 남자가 강영모가 보낸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회사 통해서 정식으로 인터뷰 요청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시면 사진 촬영과 기사 게재는 불허합니다.”
남자가 이보쇼, 하며 인섭의 어깨를 툭툭 쳤다.
“뭔가 착각하나 본데 촬영 허가는 당신이 하는 게 아니야. 우리가 찍으면 찍는 거고, 말면 마는 거지. 회사에서도 이런 건 다 알면서 넘어간다고. 괜히 빡빡하게 굴지 마. 매니저 주제에 상황 파악이 안 되나.”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순해 보이는 인섭이 뜻을 굽히지 않자 남자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했다.
“맡고 있는 배우가 인기 있으니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그래 봤자 연예인 똥구멍이나 빠는 시다바리 새끼가.”
“다시는 이런 식으로 쫓아오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인섭이 떨리는 목소리로 정중하게 부탁했지만 남자는 담배꽁초를 인섭의 발치에 던지고는 이죽거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인기 있으니까 따라다녀 주지, 인기 떨어지면 국물도 없어. 나중엔 돈 주고 사진 찍어 달라고 통사정하는 게 이 바닥이야.”
“그럼 그건 그때 가서 부탁드릴게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인섭은 물론이고 남자도 놀라서 돌아보았다. 이우연이 아이스커피를 인섭에게 건넸다.
“기자님 계신 줄 알았으면 한 잔 더 사 올 걸 그랬죠.”
이우연이 손에 든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말투는 다정했지만 이우연의 눈빛에 스친 차가운 예기를 인섭은 알아챘다.
“…벌써 끝나셨습니까?”
“잠시 휴식 시간.”
인터뷰를 하면서도 이우연은 창문 너머로 살피며 인섭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인섭이 검은색 승용차 문을 두드리는 모습을 보자마자 인터뷰를 중지하고 바로 밖으로 나왔다.
“들어가셔도 됩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인섭의 말을 듣고도 이우연은 꿈쩍도 하지 않고 남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두 분이 무슨 말씀 중이셨어요?”
“매니저님이 오해가 좀 있으신 거 같네요.”
남자가 능글능글 웃으며 대꾸했다.
“아닙니다. 분명히….”
인섭이 말을 하려는데 이우연이 손을 들어 가로막았다.
“저희 매니저님이 실수한 게 있으면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말도 마세요. 생긴 건 안 그렇게 생겨서 얼마나 빡빡하게 구는지.”
“저희 매니저님이 일 관련해서는 좀 엄격하신 편이죠.”
이우연의 말에 남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제 좀 얘기가 통하나 싶은 것이다.
사실 이런 식으로 몰래 뒤를 쫓아다니면서 사진을 찍는 건 명백한 위법이었다. 하지만 대중은 연예인의 사생활을 원했고, 연예인은 제 생활을 소비함으로써 대중의 관심을 얻었다. 그 사이에서 악어새 같은 역할을 하는 게 파파라치였다. 사진이 풀리는 양이 곧 인기의 척도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소속사에서도 어느 정도는 눈감아 주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기자님도 제 스토커였던 진수미 사건 아시죠?”
“물론 알고 있죠.”
이우연의 스토커 사건은 연예계에도 경종을 울렸다. 사생 팬에 대한 법안을 발의해야 한다는 움직임까지 일었다. 칼로 사람을 찌른 상해 사건이었기에 형사 고발이 되었지만 이우연 측에서도 진수미를 사생활 침해와 협박으로 고소하고 대형 로펌까지 선임해 정신적 손해 배상까지 청구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며 그는 그 어떤 선처도 합의도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사건도 사건이었지만 이우연의 대처가 이 업계에서는 이례적일 만큼 혹독해서 기자들의 뇌리에 콱 박혀 버리고 말았다.
“아시겠지만 그 사건 이후로 저희 회사에서는 스토커에 대한 그 어떤 선처도 하지 않는다는 입장입니다.”
“…아, 네.”
남자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우연이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얘기가 잘 풀리나 싶었는데 점점 분위기가 이상해지고 있었다.
“그럼 이해해 주시리라 믿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이우연이 손에 든 커피를 인섭에게 건넸다. 그러고는 차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아니,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남자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우연은 메모리 카드를 꺼내 기자가 보는 앞에서 반으로 꺾어 버린 후 카메라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놀란 인섭이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야! 이게 얼마짜리인데!”
남자가 산산조각 난 카메라를 집어 들고 이우연을 노려보며 외쳤다.
“카메라값은 저희 회사에 청구하시면 됩니다.”
“지금 당신 나랑 뭐 하자는 거야!”
남자의 얼굴이 분노로 새빨갛게 달아올라 이우연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인섭이 남자를 말리려고 했지만 이우연이 인섭을 팔로 가로막았다.
“매니저님은 가만히 계세요.”
이우연의 음성은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온화한 눈에는 일말의 감정도 스치지 않았다.
이우연은 검은색 승용차가 따라붙은 것은 일찌감치 알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사진 몇 장 찍힌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그러나 벌레 같은 기자 새끼가 인섭에게 한 말은 듣고 넘길 수 없었다.
남의 똥구멍이나 빠는 새끼라는 모욕을 듣고도 인섭은 고개를 숙였다. 사실 인섭의 구멍을 빠는 쪽은 자신이건만.
이우연은 치밀어 오르는 웃음을 삼켜 냈다.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이우연이 인섭의 손에 들린 커피를 도로 가져와 한 모금 마신 후에, 말을 이었다.
“선처는 없다고.”
“너 미쳤지! 이 돌은 새끼야.”
김 대표가 책상을 내리치며 소리 질렀다.
“사무실 방음 공사 하셨다더니 잘됐나 보네요.”
이우연은 면전에서 욕을 먹고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옆에 선 최인섭만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내가 기자는 절대로 적으로 돌리지 말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어!”
“글쎄요. 한 열댓 번쯤.”
“그런데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김 대표가 노트북 화면을 이우연 앞으로 돌리며 소리쳤다. 거기에는 톱스타 이우연의 두 얼굴이란 제목으로 그의 오만한 행태를 고발하는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영화 개봉 앞두고 몰래 사진 좀 찍는다고 기자 카메라를 부수는 놈이 세상에 어디 있어! 이제 막 나가기로 결심했어?”
“막 나가긴요. 저는 대표님 말씀대로 한 것뿐인데요.”
느긋하게 웃는 이우연을 마주하는 순간 김 대표는 소름이 오싹 돋았다. 얘가 드디어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미쳤구나….
“연예면에서만 보자면서요. 이거 사회면 아닌데.”
“…죽고 싶지.”
이우연이 하하 가볍게 웃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마음 같아서는 카메라가 아니라 그 새끼 머리통을 부숴 버릴까 했는데 참았어요. 칭찬받아 마땅하지 않나요.”
김 대표가 이우연을 한참 노려보다가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그래. 이우연 네놈은 그렇다 쳐도, 인섭이 너는 뭐 했어.”
인섭이 드디어 제 차례구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인섭 씨가 무슨 죄예요. 다 내 잘못이지.”
이우연이 인섭의 말을 뚝 잘랐다. 본인의 잘못을 자처하고 있지만 김 대표를 바라보는 이우연의 눈빛은 살벌 그 자체였다.
“아닙니다. 제 잘못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어떤 질책도 달게 받겠습니다.”
인섭이 두 손을 모으고 사죄했다. 모두 강영모 때문에 제가 과잉 반응을 한 탓이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카메라값은 제 월급으로 지불해 주세요.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무급으로 일하겠습니다. 아니, 원하시면 자르셔도 됩니다.”
“자르긴 뭘 잘라요.”
이우연이 김 대표를 보며 말을 이었다.
“스토커 사건 때문에 생긴 트라우마 때문에 예민하게 반응했다고 기사 내보내세요. 그 이후로 상담받을 만큼 많이 힘들어했다고. 필요하시면 병원 기록 공개해도 전 상관없습니다. 사람들 약자 편에 서서 정의감 휘두르는 거 좋아하니까 금세 판도 뒤집힐 겁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에 인섭이 놀라서 눈을 깜빡거렸다.
“그 일 때문에 상담받으셨어요?”
인섭이 조그만 목소리로 묻자 이우연이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불면증 때문에 수면제 처방받으러 간 거예요.”
이우연에게 불면증이 있다는 얘기 또한 처음이었다.
“인섭 씨 미국에 있을 때 얘기예요. 걱정 말아요. 지금은 괜찮으니까.”
김 대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그렇게 해결한다 쳐도, 이건 어쩔 건데.”
김 대표가 스크롤을 내려 아까 그 기자가 새로 올린 기사를 보여 주었다. 이우연과 채연서가 사귀는 사람이 따로 있는데 작품 홍보를 위해 거짓 열애설을 퍼트렸다는 내용이었다.
“무슨 작품 홍보를 해요?”
“조윤영 작가 신작에 채연서가 여주인공 물망에 오르고 있단다.”
“그 중요한 얘기를 지금 해 주시네요?”
“나도 어제 들어서 알았어.”
“기자 말 틀린 거 없군요. 홍보는 잘되겠지.”
이우연이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꼬투리 잡히기 시작하면 골치 아파. 기자들 습성 몰라? 김해신 떨쳐 낸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거머리를 붙여 와. 게다가 넌….”
김 대표가 인섭을 흘긋 보고는 이우연에게 눈짓했다. 인섭이 파랗게 질린 채 손끝을 바들바들 떨며 서 있었다.
“인섭 씨.”
이우연이 최인섭을 부르자 인섭이 그제야 숨을 내쉬며 네? 하고 고개를 들었다.
“차에 서류 봉투를 두고 왔는데 가져다주실래요? 대표님이 오늘까지 제출하라고 하신 거라서.”
“무슨 서…. 앗.”
이우연이 입을 열려는 김 대표의 정강이를 테이블 아래로 걷어찼다.
“아. 맞다 맞다. 내가 오늘까지 갖다 달라고 했지. 인섭아 얼른 찾아서 가져다줄래?”
김 대표가 이우연을 거들고 나섰다.
“네. 알겠습니다. 뒷자리에 두셨나요?”
“아마 그럴 거예요.”
최인섭이 대표실을 나가자 김 대표가 시뻘게진 정강이를 문지르며 이우연을 노려보았다.
“새끼. 너 감정 실어서 찼지.”
“대표님한테 제가 무슨 감정이 있어요. 제가 가진 감정은 모조리 인섭 씨한테 가 있어요. 걱정 마세요.”
“…그래서 걱정이다. 이 새끼가 채연서 노리고 이런 기사 올린 건 분명한데, 너도 사귀는 사람이 따로 있는 건 사실이잖아.”
사실이 밝혀지면 불륜보다 이쪽이 몇 배는 더 타격이 컸다.
“인섭이한테 미안하지만…. 자를래? 어차피 잠시만 도와주기로 한 거고, 인섭이도 방학인데 놀아야지.”
이우연이 눈을 슬쩍 내리감고는 웃음을 삼켰다.
“대표님은 피도 눈물도 없는 분이시군요.”
“뭐?”
피와 눈물은 물론이고 싸가지까지 없는 인간에게 비난당하자 김 대표의 이마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불쌍한 인섭 씨. 선의로 도와주겠다고 나선 일인데 제 잘못도 아닌 걸로 부당 해고라니.”
“누가 그걸 몰라! 다 너 생각해서 하는 소리 아니야.”
“꼭 본인 생각만 하는 사람들이 그런 말을 서두에 붙이더라고요. 물론 대표님한테 하는 말은 아닙니다.”
“야, 너 진짜…!”
“대표님. 정말 제 생각 하시는 거면 인섭 씨 그냥 두세요.”
“지금은 좀 조심하는 편이 낫잖아. 그리고 인섭이 요즘 안색도 안 좋아 보이고.”
“알고 있습니다.”
이우연이 테이블에 놓인 생수 통을 집어 캡을 뜯었다.
김 대표의 말대로 요 며칠 인섭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잠을 통 못 자는지 눈 밑이 퀭해서 나타나곤 했다. 어디 아픈 거냐고 물으면 고개만 내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퀭한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다. 요즘 일 때문이 아니면 인섭의 얼굴을 볼 기회가 없었다. 잠시 틈이 나서 식사라도 같이 할라치면 인섭은 볼일이 생겼다고 집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이우연은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갈증이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알고 있는데…. 불안해서요.”
“뭐가 불안해.”
“인섭 씨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은가 봐요. 요즘 계속 붕 떠 있는 느낌이에요. 어떡합니까. 일이라도 시켜서 옆에 붙들어 둬야지.”
“너 생각보다 되게….”
“구질구질하다고요?”
“아니. 필사적이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구질구질한 거 같기도 하다. 천하의 이우연이.”
오는 여자 안 막고 가는 여자 더더욱 안 막았던 인간이었다. 그런 그가 인섭이 저를 만나 주지 않을까 봐 매니저라도 시켜야겠다고 말하는 이 상황이 김 대표로서는 쉽게 믿기지 않았다.
“어쩔 수 없죠. 감출 날개옷도 없는데.”
김 대표가 우울하게 혼잣말을 하는 이우연의 얼굴을 흘끔 쳐다보았다. 이마에서 코로 이어지는 선이 그린 듯이 우아하게 떨어졌다. 모델 생활을 통해 잘생긴 얼굴은 숱하게 봐 왔지만 맹세코 이우연처럼 비율이 완벽한 얼굴은 보지 못했다. 저게 나무꾼이라면 하늘로 올라가겠다고 나설 선녀는 좀처럼 없을 텐데.
“…있었으면 불 싸질렀을 거잖아.”
“임신도 못 시키는데 태우기라도 해야죠.”
그렇지. 얘는 도끼를 쥐여 주면 산신령을 베고 금도끼 은도끼부터 챙긴 다음, 사슴의 배를 갈라 그날 저녁으로 해치우고도 남을 놈이었지.
김 대표는 아주 찰나의 순간 인 동정심을 얼른 떨쳐 냈다.
“그래도 일단 지금은 인섭이랑 떨어지는 편이….”
“대표님.”
이우연이 나직이 김 대표를 불렀다. 평소처럼 이죽거리거나 화를 내거나, 얄밉게 웃는 낯이 아니었다.
“저 인섭 씨랑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지 보셨잖아요.”
이우연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건 그렇지만.”
김 대표가 착잡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까 이우연이 불면증이라고 에둘러 표현하긴 했지만, 그 모습을 두 번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럼 로드 매니저라도 둘래? 인섭이도 편하고 일석이조….”
“싫은데요.”
이우연이 단칼에 거절했다. 단둘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차로 오가는 때뿐이었다. 그 시간에 누군가를 끼워 넣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너 때문에 늙는다, 늙어.”
김 대표가 머리를 감싸 쥐고 앓는 소리를 냈다.
“조심할게요. 걱정 마세요.”
“너 같으면 걱정이 안 되겠니?”
“대표님은 제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저 같은 새끼랑 재계약하셨죠. 나 같으면 절대 안 했을 텐데.”
얼마 전 이우연과 계약 기간이 끝났다. 그가 시장에 나왔다는 소문이 돌자마자 이곳저곳에서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엄청난 계약금을 불렀다. 정작 이우연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대표님이 원하시면 재계약하시든가요.’
다리를 꼬고 앉은 이우연이 던진 말에 김 대표는 작년에 이우연이 벌어다 준 돈을 열심히 계산했다. 결국 차 실장의 만류에도 김 대표는 새 계약서와 보드카 한 병을 들고 이우연을 찾아갔다.
“대표님은 사람이 좋은 거예요, 학습 능력이 없는 거예요? 음, 둘 다인가.”
이우연이 생수를 마시며 자기비판인지 김 대표의 욕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기독교 신자인 김 대표는 주먹을 움켜쥐고 속으로 반야심경을 외기 시작했다.
그때 이우연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못 찾겠다고요? 아니에요. 제가 내려갈게요. 괜찮아요. 뭐가 미안해.”
이우연이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상대를 달래는 모습을 김 대표는 기가 찬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저 갈게요.’
입 모양으로 김 대표에게 인사를 한 이우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김 대표는 악귀를 내쫓듯이 얼른 꺼지라고 손을 내저었다.
문득 이우연이 뭔가 떠올랐는지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노트북을 들어 아까 김 대표가 보여 준 기사의 스크롤을 끝까지 내렸다.
“뭐 하는 거야.”
김 대표의 물음에 이우연이 손가락으로 노트북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 이우연이 가볍게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김 대표는 대체 뭘 본 건지 확인했다가 소름이 쭈뼛 돋았다.
거기에는 기사를 쓴 기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마지막으로 어디에서 보신 거 같아요?”
“글쎄요. 서재였나.”
이우연의 말에 인섭이 책상을 샅샅이 살폈다. 이우연도 옆에서 있지도 않은 서류를 찾는 시늉을 했다.
“서류 봉투에 두신 거죠?”
“네. 아마.”
인섭이 책상 옆에 놓인 책장을 뒤적거렸다. 이우연은 가만히 서서 인섭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무슨 서류입니까?”
“세금 관련 서류예요.”
“그럼 꼭 찾아야겠네요.”
인섭은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쳐 두었다. 이우연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호텔에서 휴가를 즐긴 뒤 인섭은 스케줄이 끝나면 부리나케 제집으로 돌아갔다. 아무리 이우연이 잠시만 올라가자고 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우연은 인섭과의 약속을 지켜 주었다. 그 결과 일주일째 인섭에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 퇴근길에 김 대표가 사무실로 호출을 받고 이우연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분명 시간이 길어질 테니 어떻게든 인섭을 집으로 끌고 갈 심산이었다. 사무실에서 차를 몰고 집에 오는 내내 인섭의 낯빛이 좋지 않자 그는 끌고 올라갈 결심을 한층 더 굳혔다. 저런 낯짝을 한 인섭을 혼자 재우고 싶지 않았던 터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난 후, 이우연은 혹시 같이 올라가서 서류를 찾아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인섭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머뭇거렸다. 이우연은 괜찮다고 혼자 찾겠다며 쓸쓸하게 웃어 보였다. 뒤돌아서서 세 걸음쯤 걸었을 때, 인섭은 이우연의 이름을 불렀다. 결국 인섭은 제 발로 이우연의 집으로 걸어 들어오고 말았다. 역시 배우는 연기력이었다.
“여기도 없는데요. 혹시 일하시는 분께서 치워 두신 거 아닐까요?”
“그러실 수도 있겠네요.”
인섭이 시간을 확인하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지금 전화 드리기엔 너무 늦었고. 음….”
인섭은 다시 책상을 뒤지기 시작했다. 꼼꼼하게 책장을 보던 인섭이 이번에는 책상 서랍을 열어 그 안까지 살폈다.
“이 박스는 뭐예요?”
인섭이 책상 아래에 있던 종이 상자를 가리켰다.
“오래된 서류 모아 두는 박스일 겁니다.”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인섭이 책상 아래로 몸을 숙이고 박스를 열었다. 이우연은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둥그런 등을 보고 있자니 웃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마치 굴에 들어간 토끼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만 놀려야겠다 싶었다.
“인섭 씨.”
“네? 앗…!”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든 인섭이 책상에 머리를 쿵 부딪쳤다. 이우연이 얼른 책상 아래로 몸을 숙였다.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좀 부딪친 거뿐입니다.”
“어디 봐요. 괜찮은지.”
이우연이 손을 뻗어 인섭의 얼굴을 움켜쥐고는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이우연이 책상 앞을 가로막아 인섭은 졸지에 책상 아래에 갇히고 말았다.
“이제 안 아픕니다.”
인섭은 얼른 책상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이우연의 숨이 머리에 닿아 고개를 돌리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었다. 지나치게 거리가 가까웠다.
“다쳤으면 어떡해요.”
이우연이 진지한 눈으로 인섭의 머리통을 꼼꼼히 살폈다. 책상 아래서 마주한 이우연의 어깨는 한층 더 넓어 보였다.
“안 다쳤습니다. 그만 보셔도 돼요.”
괜스레 혼자 의식한 기분이 들어 인섭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우연이 순순히 손을 뗐다. 하지만 자리를 비켜 주진 않았다.
눈이 마주쳤다. 이우연이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인섭을 직시했다.
“…서류 찾아야죠.”
“다시 발급받으면 돼요.”
“네? 분명 오늘까지…….”
이우연이 인섭의 입술을 머금었다.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 마치, 첫 키스를 하듯이. 젖은 입술이 맞물렸다가 떨어지면서 살갗이 비벼지는 소리가 났다.
“오늘 자고 갈래요?”
이우연이 눈을 반쯤 내리감은 채 물었다. 코끝이 아슬아슬하게 닿았다.
“내일 스케줄 일찍 시작해서….”
“그러니까 자고 가요. 왜 왔다 갔다 해. 번거롭게.”
인섭은 고개를 내저었다. 며칠 전 본 그 이상한 기자가 집 앞을 지키고 서 있을 것만 같았다.
“기사 때문에 신경 쓰여서 그래요? 그거 내 얘기가 아니라 채연서 얘기예요. 알잖아요.”
인섭의 낯빛이 다시 어두워지자 이우연은 다정하게 그를 얼렀다.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습니다.”
인섭은 자신의 상상력이 얼마나 훌륭한지 근래 몸소 느끼는 중이었다. 특히 나쁜 시나리오를 상상하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사진 찍혀도 아침 스케줄 때문에 자고 갔다고 하면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 안 할 겁니다. 흔한 일이에요.”
이우연은 진실한 목소리로 새빨간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배우 활동을 하면서 매니저를 제집에 들인 적은 맹세코 인섭을 제외하고 한 번도 없었다. 그나마 차 실장이 건네줄 서류가 있어 딱 한 번 현관까지 들어온 게 전부였다.
“그래도 혹시 모릅니다.”
인섭은 이상하게 생각할 한 사람을 알고 있었기에 성급히 이우연의 말에 동조할 수 없었다.
“…고양이 밥도 줘야 하고요.”
인섭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다른 변명을 들이댔다. 설핏 눈가를 좁혔던 이우연은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이내 미소를 머금었다.
“고양이들은 좋겠어요. 인섭 씨가 이렇게나 신경 써 줘서.”
“아, 아닙니다. 가끔 사료랑 물이나 주는 것뿐입니다.”
“아마 고양이들은 인섭 씨 없으면 굶어 죽을 거예요.”
“네?”
그 무슨 끔찍한 소리냐는 표정이었다.
“원래 인간이 한번 밥을 챙겨 주기 시작한 고양이는 어지간해선 혼자 밥을 못 찾아 먹는다고 하더군요. 몰랐어요?”
“네. 몰랐는데…. 어제도 너무 늦어서 못 줬는데 어떡하죠.”
지금이라도 당장 고양이가 굶어 죽기라도 하듯이 인섭이 안절부절못했다. 이우연이 인섭의 손을 잡아서 일으켜 세웠다.
“그러니까 인섭 씨가 끝까지 잘 챙겨 줘야겠네요. 어디 가지 말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우연이 만족스러운 듯이 눈가를 사르르 접었다. 인섭이 한국을 떠나지 않을 이유를 하나쯤 늘려 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그럼 늦기 전에 얼른 가세요. 고양이들이 기다릴 테니.”
이우연은 의자에 걸쳐 둔 재킷을 집어 들어 인섭에게 손수 입혀 주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태도 변화에 인섭은 조금 당황하며 재킷을 입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쭈뼛거리며 인사하는 인섭을 보며 이우연은 간신히 억눌렀던 욕구가 불쑥 치미는 것을 느꼈다.
딱 한 입만 먹어 보면 좋을 텐데.
이우연은 문가에 기대어 선 채로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고양이들한테 내 안부 전하고.”
“네. 꼭 전할게요.”
중요한 사명이라도 띤 얼굴을 하고 인섭은 현관문 밖으로 사라졌다. 멀어지는 발소리를 듣던 이우연은 셔츠의 단추를 끌러 내렸다.
좀처럼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밤이었다.
“손님. 도착했습니다.”
택시 기사의 말에 선잠을 자던 인섭이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죄송합니다.”
“많이 피곤하셨나 보네요.”
인섭은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를 꺼내 건넸다. 잔돈을 건네받고 인섭은 택시 기사에게 반듯하게 인사했다.
“안전 운전 하세요. 감사합니다.”
택시에서 내려 인섭은 집으로 올라갔다. 현관을 열고 안에 들어서자마자 다리가 풀렸다. 며칠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있었다. 자다가도 혹시 무슨 기사가 올라오지 않았는지 퍼뜩 일어나 핸드폰으로 이우연의 이름을 검색해 보곤 했다. 별일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도 마음은 놓이지 않았다. 점점 강박증 환자처럼 불안이 심해질 뿐이었다. 가장 힘든 건 이우연 앞에서 태연함을 가장하는 일이었다.
오늘도 김 대표가 기자가 악의적으로 쓴 기사를 보여 주었을 때,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이우연의 집까지 차를 몰고 가는 내도록 기사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강영모가 기사를 봤을까. 혹시 그가 이 기사를 빌미로 이상한 루머를 퍼트리는 건 아닐까. 그걸 이우연이 알게 된다면….
이우연이 자고 가라는 제안을 했을 때도 흔들리지 않은 게 아니었다. 내일은 지방 스케줄이라 새벽 일찍부터 운전을 해야 했다. 한 시간이라도 더 잘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제 나약함 때문에 주변 사람이 다치는 일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정신 차려야지.”
인섭은 뺨을 두어 번 두드리고는 몸을 일으켰다. 당장 침대에 들어가고 싶은 유혹을 참아 내고 고양이 사료와 물을 챙겨 들었다. 한번 인간이 먹이를 챙겨 준 고양이는 좀처럼 스스로 밥을 찾아 먹지 못한다는 이우연의 말이 떠올랐다. 앞으로는 아무리 늦어도 반드시 고양이 밥은 챙겨야겠다고 다짐하면서 계단을 올랐다.
옥상으로 가는 계단을 반쯤 올라갔을 때 사람의 기척이 들렸다. 이 시간에 사람을 만날 거라 예상하지 못한 인섭은 화들짝 놀라 몸이 굳고 말았다.
“어. 501호.”
“안녕하세요.”
주인집 아들이었다. 마흔이 훌쩍 넘어 보이는 남자는 볼 때마다 늘어진 티셔츠에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지금도 매캐한 담배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사람을 인상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인섭은 눈앞의 남자가 유독 어렵고 꺼려졌다.
“이 시간에 어딜 가?”
“옥상에 잠시….”
인섭은 얼른 사료를 뒤로 숨기며 대답했다. 계단이 어두워서 다행이었다.
“옥상? 거길 왜?”
인섭은 잠시 고민하다가 담배 피우러 갑니다, 하고 대답했다. 자꾸 거짓말하는 기술만 늘어서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사람을 속이면 큰 벌을 받을 텐데.
“담배? 쪼그만 게 무슨 담배야. 보기보다 까졌네.”
주인집 아들이 히죽거리면서 던진 말에 인섭은 네? 하고 되물었다. 까졌다는 표현이 무슨 말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은 터다.
“혹시 그동안 담배꽁초 안 치운 게 너야?”
“아닙니다. 저는 피… 우면 바로바로 다 치웠습니다.”
사실 피우지 않았어도 보이는 대로 담배꽁초는 모조리 치워 두었다. 혹시라도 고양이들이 삼키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였다.
“야. 그런데 너 혹시 고양이 같은 거 키우냐?”
“네? 아, 아니요.”
인섭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거짓은 아니었다. 로이스가 옥상 구석에서 새끼를 낳은 뒤 터를 잡았고, 인섭은 가끔 먹이를 챙겨 주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제가 먹이를 주는 탓에 남에게 피해가 될까 싶어서 항상 뒤처리는 말끔히 해 두었지만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래. 그럼 앞으로도 꽁초는 잘 치워 둬라.”
그가 인섭의 어깨를 툭 치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인섭은 옥상으로 얼른 뛰어 올라갔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고양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인섭은 사료 그릇을 꺼내서 사료를 부었다.
“로이스. 로이스.”
인섭은 사료를 담은 비닐 봉투를 흔들며 어미의 이름을 불렀다. 이러면 로이스가 새끼들을 데리고 어디선가 나타나곤 했다. 고양이를 들먹거린 주인집 아들의 말 때문에 고양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으로 가슴이 수런거렸다.
“로이스….”
어디선가 고양이가 냐옹, 하고 우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어미와 새끼들이 나타나 쪼르르 걸어오고 있었다.
“걱정했잖아. 얼른 이리 와.”
인섭은 그릇에 사료를 가득 부어 주었다. 빈 그릇에는 물을 담아 옆에 냈다. 새끼 고양이들이 작은 혀로 열심히 물을 마시는 모습을 흐뭇하게 보던 인섭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로이스 너는 왜 안 먹어.”
사료는커녕 근처에도 오지 않고 멀찌감치 떨어져 서 있던 어미 고양이가 냐앙, 하고 작게 울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인섭이 어미 고양이의 곁으로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고양이가 인섭의 손을 피하면서 냐앙, 하고 울었다. 평소답지 않은 행동에 인섭은 설핏 눈가를 찌푸렸다가 제 손을 확인하고 숨을 삼켰다.
“어디 다쳤어? 웬 피야.”
인섭은 어미 고양이의 몸을 번쩍 안아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상처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인섭은 뒤를 돌아 새끼 고양이들을 확인했다. 존이 보이지 않았다. 간혹 뒤늦게 식사에 합류하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도무지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존은 어디 있어?”
어미 고양이가 대답이라도 하듯 냐아앙, 하고 길게 울었다. 인섭은 고양이를 내려놓았다. 어미가 제 뒤를 따라오라는 듯이 앞서 걷기 시작했다. 인섭은 어미 고양이를 따라갔다. 육중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에어컨 실외기 앞에서 멈춘 고양이가 인섭을 올려다보았다. 실외기 틈새로 줄무늬 털이 보였다.
“존. 왜 또 거기 들어가 있어.”
가장 약하고 몸집이 작은 존은 새끼들 사이에서도 항상 뒤처지곤 했다. 식사를 할 때도 밀려 따로 사료를 챙겨 줘야 할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인섭은 존에게 가장 마음이 쓰였다.
“존. 밥 먹자. 이리 나와.”
인섭은 놀라지 않게 다정한 목소리로 새끼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얼른 안 먹으면 네 형들이….”
말을 하던 인섭은 멈칫 입을 다물었다.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던 존의 몸이 바닥에 늘어진 채라는 걸 깨달았다. 인섭은 틈 사이로 손을 뻗어 새끼 고양이의 몸통을 잡았다. 뭉클하고 뜨끈한 감촉에 인섭은 눈가를 찌푸렸다. 가까스로 고양이를 끄집어냈다.
“…….”
보고 있는 도중에도 인섭은 제가 뭘 보는지 한동안 깨닫지 못했다. 하얗고 보드라운 털이 온통 젖어 검붉은 물에 젖어 있었다.
“…피.”
피투성이 작은 몸을 붙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옆에서 어미 고양이가 가늘고 긴 울음소리를 내며 인섭에게 몸을 비볐다. 머릿속이 창백하게 굳었다. 속이 울렁거려 토기가 올라왔다. 피에 젖은 몸이 미약하게 오르내리며 얕은 숨을 토해 냈다. 어떻게든 해야만 했다. 인섭은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꺼냈다.
“전화를, 911, 아니 119에, 이 시간에 동물 병원이….”
인섭은 얼른 24시간 동물 병원을 검색했다. 그나마 가까운 곳을 찾아 전화를 걸었지만 무슨 영문에서인지 통화가 되지 않았다. 다른 곳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해서 일단 통화를 끊고 다시 검색을 하려 했다. 하지만 피 때문에 손에서 미끄러진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졌다.
인섭은 얼른 도로 주워 들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인섭은 제 뺨을 세게 후려쳤다. 울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져야 했다.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이대로 존이 죽을 수도 있었다.
인섭은 제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떠올렸다. 그는 침착하게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흰색 승용차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도로에 멈췄다. 그 안에서 나온 남자가 살벌한 얼굴을 하고 성큼성큼 걸어 불이 켜진 상가의 문을 열어젖혔다.
“인섭 씨.”
이우연의 부름에 구석에 앉아 있던 인섭이 고개를 들었다. 창백한 얼굴에 튄 피를 본 순간 이우연의 눈앞이 시큰한 통증으로 번뜩였다. 이우연은 그대로 달려가 인섭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거 무슨 피예요, 누가 그랬어요, 어딜 얼마나 다친 거예요.”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당황한 인섭이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그의 목덜미는 물론이고 속눈썹까지 피가 엉겨 붙어 있었다. 인섭을 마주한 이우연은 이를 사리물었다. 참담했다. 불에 달군 쇳덩이가 속을 들쑤시는 기분이었다.
“왜 여기에 이러고 있어. 병원에 가야지!”
이우연이 인섭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인섭이 다급하게 이우연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아닙니다. 제가 다친 게 아니에요.”
“뭐?”
“제가 아니라, 존이….”
인섭이 바싹 마른 입술로 말을 이었다.
“존이 다쳐서 데려온 겁니다. 제 피가 아니에요.”
“존이라면…, 고양이?”
“네.”
이우연은 하, 하고 짧은 숨을 삼켰다.
분명 집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인데 인섭에게서 전화가 걸려 오지 않아서 한참을 기다리던 이우연은 결국에 제가 먼저 전화를 걸었다. 평소였으면 몇 번이고 전화를 하고도 남았을 상황이었지만 인섭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일부러 느슨하게 굴었던 것이다.
몇 번 신호음이 울리고 나서 인섭이 전화를 받았다. 잘 준비를 하던 중일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차 소리가 들렸다.
<어디예요.>
이우연의 물음에 인섭이 떨리는 목소리로 나중에 다시 걸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이우연은 옷을 입고 차 키를 챙겨 들고 나가며 다시 인섭에게 전화를 걸었다. 인섭이 뭐라고 하기 전에 이우연은 주소 찍어 보내요, 하고는 통화를 마쳤다. 과속 딱지를 수십 개 끊을 각오를 하고 미친놈처럼 밟아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다.
그제야 이우연의 눈에 동물 병원이란 글자가 보인다. 얼마나 제정신이 아니었는지 주변 따윈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다행이네요.”
이우연의 혼잣말에 인섭이 손을 움칫 떨었다. 이우연은 인섭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아… 안녕하세요.”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이우연은 고개를 들었다. 모자를 눌러쓴 여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이우연의 시선은 인섭에게 향해 있었다.
“윤아름 기자님이요. 저번에 말씀드렸던….”
“오랜만에 뵙네요. 지금 기자는 아니지만.”
“네. 오랜만입니다.”
이우연은 무미건조하게 대답한 후에도 여전히 인섭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왜 저 여자가 이곳에 앉아 있는지 설명을 해 보라는 눈빛이었다.
“검색한 동물 병원이 전화를 받지 않아서, 이 시간에 문을 연 병원을 몰라서 저번에 받은 전화번호로 연락드렸습니다. 집도 근처시고….”
“그렇군요.”
이우연은 무감하게 대꾸했다. 무서운 상황에 맞닥트리면 눈물만 뚝뚝 흘리며 얼어붙어 버리는 최인섭치고 더할 나위 없이 이성적인 판단을 내렸다. 만약 자신을 불렀다면 오가는 시간은 둘째 치고 이 시간에 문을 여는 동물 병원 따윈 없다고 인섭을 단념시켰을 것이다. 동물 병원이 애초에 몇 시까지 하는지 따위, 염두에 둔 적이 없으니까.
“…여기까지 태워 주셨습니다.”
딱히 알고 싶지 않은 사실까지 인섭은 덧붙였다.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요. 갑자기 이 시간에 전화를 받아서 놀라긴 했지만.”
이우연의 감사 인사에 윤아름이 웃으며 겸양했다.
“죄송해요. 제가 아는 사람 중에 동물을 키우는 분이 윤아름 씨밖에 없어서….”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윤아름이 손을 내저었다. 그녀의 운동복에도 피가 묻어 있었다.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은 그녀의 상냥한 성격이 이우연을 짜증 나게 만들었다.
“인섭 씨가 많이 놀라신 거 같아서 걱정이에요. 계속 손 떠시는 거 같던데….”
“괘, 괜찮습니다.”
인섭이 잘게 떠는 손을 얼른 뒤로 감추며 대답했다. 이우연은 정수기에서 물을 떠서 인섭에게 건넸다.
“물 좀 마셔요. 약은 있어요?”
인섭이 고개를 내저었다. 조그만 목소리로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컵을 받아 드는 인섭의 얼굴은 아직도 피투성이였다. 이우연은 제 손바닥으로 인섭의 얼굴을 쓸어내려 피를 닦아 주었다.
“얼굴이 이게 뭐예요. 세수라도….”
인섭이 얼른 이우연의 손을 내리게 했다.
“제가, 닦을게요. 이우연 씨 손에 피 묻습니다.”
이우연은 갈 곳 없어진 손을 바라보다가 쓰게 웃었다. 윤아름이 손수건을 얼른 꺼내서 인섭에게 건넸다.
“이것도 사은품으로 받은 거니까 쓰고 버리셔도 돼요.”
“감사합니다.”
“다른 손수건도 이전에 받으셨나 보네요.”
이우연의 날카로운 지적에 인섭이 그게, 하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때 수술실에서 수술복을 입은 수의사가 걸어 나왔다.
인섭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우연은 먼저 수의사에게 다가가 차분하게 고양이의 상태를 물었다.
“수술은 잘 끝났습니까?”
“어? 아, 네. 잘 끝났습니다.”
이우연을 알아본 수의사가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대답했다.
“부러진 뼈 때문에 생긴 출혈로 위험할 뻔했습니다. 아마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났을 거예요.”
의사의 설명에 인섭이 하얗게 질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회복실에 있습니다. 한 2주 정도는 입원해야 할 거 같은데. …이우연 씨 맞으시죠?”
수의사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네. 맞습니다.”
이우연은 대답하면서 제 옆에 선 인섭의 얼굴을 살폈다. 그렁그렁 눈물이 가득 고인 눈이 간신히 울음을 참고 있었다.
“퇴원할 때 데리러 오면 되는 건가요?”
이우연의 물음에 수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마 한동안은 집에서 케어를 계속해 주셔야 할 겁니다. 그런데 애기 상태를 보니 집고양이는 아닌 거 같던데.”
“제가 그냥 밥만 챙겨 주는 고양이입니다.”
인섭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큰일이네요. 퇴원해도 저 상태로 밖에 두면 며칠 못 버틸 텐데요.”
수의사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인섭이 말을 마치기 전에 이우연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제가 데리고 있을게요.”
“네?”
인섭은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인섭 씨 집은 동물 못 키우잖아요. 저희 집은 노는 방 많아요.”
“아닙니다. 이우연 씨는 고양이 키워 보신 적 없잖아요.”
“이참에 키워 보죠.”
“저 때문이면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인섭은 차마 다음 말을 입에 담지 못했다. 이우연이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우연은 그런 인섭의 속내를 읽기라도 했는지 비스듬히 입가를 올린 채 웃었다.
“괜찮아요.”
동물 따윈 질색이었다. 날리는 털과 특유의 냄새. 무엇보다 귀찮은 것은 질색이었다. 하지만 인섭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그걸 빌미로 인섭을 집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계속 집 비우시고, 요즘 많이 바쁘시잖아요.”
“일하시는 분께 말씀드려 두면 됩니다.”
“그래도….”
“괜찮으면 제가 데리고 가도 될까요?”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윤아름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네? 아닙니다. 당연히 제가 책임져야죠. 이사 가면 됩니다. 최대한 빨리 방도 알아보고 하겠습니다.”
인섭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인섭 씨도 지금 엄청 바쁘시잖아요.”
“…그렇지만.”
무엇보다 가장 인섭의 마음에 걸리는 문제였다. 거주지는 바꾼다 하더라도 고양이를 돌볼 시간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자신이 지금 돌보는 당사자를 앞에 두고 고양이 때문에 일을 그만두겠다는 말은 더더욱 할 수 없었다.
“저 고양이 엄청 좋아하고, 전에 키워 본 적도 있어요. 아픈 애는 키워 본 사람이 돌보는 게 나아요.”
“그렇죠. 이래저래 손이 많이 가니까요. 계속 곁에서 돌봐 주실 분이 있는 편이 좋습니다.”
수의사가 그녀의 말에 동조했다. 인섭은 두 손을 모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병원비랑 사료비, 그 외에 드는 돈은 다 제가 대겠습니다. 사례비도 드리겠습니다. 필요하신 거나 원하시는 건….”
“괜찮아요. 무슨 사례비예요. 사례비 받으려고 하는 일 아니에요.”
“정말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인섭은 고개도 들지 못했다. 윤아름과는 오늘로 딱 세 번 본 사이였다. 전화번호를 받고도 이렇다 할 연락조차 못 했다. 당분간은 바빠서 콩이를 보러 가지 못할 거라는 짧은 문자만 보냈을 뿐이다.
무례할 수도 있는 연락에 윤아름은 시간 나실 때 언제든지 보러 오시라고 상냥하게 답했다. 초면에 가까운 사이인데 이 밤중에 병원까지 같이 와 준 것도 몹시 고마웠다. 그런데 이런 수고까지 끼쳐 미안함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지 마세요. 제가 더 미안해지잖아요.”
윤아름이 인섭을 일으켜 세우려 손을 뻗었다. 이우연이 먼저 인섭의 어깨를 움켜쥐어 그를 바로 서게 했다.
“그래요. 너무 그러시면 윤아름 씨 무안해요. 그리고 병원비는 제가 낼게요.”
“아닙니다. 제가….”
“제가 낼게요. 이 정도는 내가 해야지.”
웃고 있는 이우연의 눈이 이상하게 서늘해 보였다. 인섭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우연이 병원비를 결제하는 동안 인섭은 윤아름에게 다시 한번 고맙다고 인사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겠습니다.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예. 그런데 아까 너무 경황이 없어서 여쭤보지 못했는데 고양이는 어쩌다가 다친 거예요?”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지만 확실하지 않아서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아무리 봐도 누가 일부러 단단한 걸로 후려친 거 같아서요. 그렇죠? 선생님.”
윤아름이 굳은 표정으로 수의사에게 물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담뱃불로 지진 흔적도 있고요.”
“담뱃불로 지져요? 그런 미친…. 하, 진짜. 천벌을 받을 새끼.”
윤아름이 분노하며 욕설을 내뱉었다. 담뱃불이란 단어에 인섭은 제 의심이 어느 정도 들어맞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다른 애들은 없어요? 저 정도 크기면 분명 엄마랑 같이 있었을 텐데.”
“두 마리 더 있습니다.”
존은 그중에 가장 약하고 느린 아이였다. 경계심이 많은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가장 먼저 인섭에게 다가와 그 작은 머리통을 들이밀면서 애교를 피우곤 했다. 어째서 존만 그 지경이 되었는지 생각하자 가슴이 콱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럼 걔들도 내가 주인 찾아 줘야겠다.”
윤아름이 팔짱을 낀 채로 포부를 밝혔다. 인섭이 커다란 눈을 치뜨고 어떻게요, 하고 물었다.
“어떻게 하긴요. 싹 잡아 와서 집에서 털 깨끗이 빨고 통통하게 살 오르게 한 다음에 사진 찍어서 분양 글 올려야죠. 사룟값은 인섭 씨가 대세요.”
“네. 당연히 다 대겠습니다!”
인섭이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였다.
“그럼 오늘은 이만 가도 되는 건가요?”
이우연이 수의사에게 물었다.
“가셔도 됩니다. 내일 오셔서 애기 상태 확인하심 되고요.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드릴 비상 연락처만 하나 더 적어 주시면 됩니다.”
“제 번호 적을게요.”
접수대로 다가가서 연락처를 남기는 윤아름을 이우연은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선생님 잘 부탁드립니다. 오늘 정말 감사합니다.”
인섭은 수의사에게 인사를 하고 병원을 나섰다.
“인섭 씨는 제가 태워 드리겠습니다.”
밖으로 나온 이우연이 윤아름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데 두 분 정말 친하신가 봐요. 이 시간에 와 주시고. 대단하시다.”
윤아름이 경탄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네. 친합니다.”
이우연이 짧게 대꾸했다. 인섭이 얼른 윤아름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오늘 정말 폐 많이 끼쳤습니다. 감사합니다.”
“괜찮아요. 내일 다시 연락드릴게요.”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윤아름이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이우연은 도로에 아무렇게나 세워 둔 차로 걸어갔다. 인섭은 얼른 그의 뒤를 따라갔다. 이우연은 조수석 문을 열어 준 다음 운전석으로 갔다.
인섭은 차에 타고 난 후에 이우연에게 인사했다.
“미안합니다. 저 때문에 괜히….”
“제가 뭘 했다고요.”
이우연이 부드럽게 웃어 보인 후 시동을 걸었다.
“벨트.”
이우연의 지적에 인섭이 얼른 벨트를 끌어와 클립을 잠갔다. 이우연은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집으로 가는 길 내내 그는 말이 없었다. 인섭은 이우연의 심사가 사납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안전벨트만 만지작거리며 말 걸 기회를 엿보았다.
아파트 주차장에 들어섰을 때 이우연이 문득 입을 뗐다.
“누가 그런 거 같아요?”
“네?”
“아까 잘은 모르겠다고 대답했잖아요. 뭔가 알고 있긴 한데 정확하지는 않다는 뜻 아니었어요?”
인섭은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별거 아닌 자신의 한마디에 이우연이 그런 것까지 생각하고 있을지는 몰랐다.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그냥?”
“옥상에 올라가기 전에 주인집 아들을 만나서. 그 사람 담배도 피우고…. 하지만 제 짐작일 뿐입니다.”
“그렇군요.”
이우연이 주차를 하려고 핸들을 돌렸다.
“아닙니다. 그냥 앞에서 내려 주시면 됩니다.”
이우연은 대답하지 않고 주차를 마치고 차의 시동을 껐다. 차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우연이 손을 뻗어 인섭의 뺨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아닙니다. 제가….”
이우연의 손에 피가 묻을까 봐 인섭은 그의 손을 내리려 했다. 하지만 이우연은 꿈쩍하지 않고 인섭의 얼굴을 꼼꼼하게 닦아 냈다.
“피도 무서워하고, 누구 다치는 건 더더욱 못 보는 사람이. 많이 놀랐겠군요.”
말투와 음성은 다정하기 그지없었지만 주변의 공기는 서늘하게 말라붙은 느낌이었다. 인섭은 어깨를 움츠리며 괜찮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런 와중에 그 여자한테 전화할 생각은 잘도 했네요. 내가 아니고.”
얼굴을 닦아 내던 이우연의 손이 인섭의 입술에 닿았다. 그가 엄지로 인섭의 입술을 문질렀다.
“내 생각은 안 나던가요?”
“그게….”
이우연이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닿았다. 놀라서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가 들어왔다. 인섭이 몸을 뒤로 젖히려 하자 이우연이 인섭의 어깨를 붙들고 그대로 끌어당겼다.
“……!”
인섭이 발작하듯 이우연을 밀어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누가 보면….”
“누가 보면 안 되죠. 큰일 나니까.”
이우연이 인섭의 뒷말을 이어 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인섭은 그의 소맷자락을 붙들었다.
“이우연 씨 생각 안 한 거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런 일로 부르면 괜히 다른 사람 눈에 띌 수도 있고, 무엇보다….”
“알아요. 난 적합하지 않죠. 이런 일.”
이곳으로 오는 내내 이우연은 자괴감을 곱씹었다. 자신은 고작해야 인섭을 위해 고양이를 참아 줄 수 있을 뿐이다. 윤아름처럼 마음에서 우러나 좋아서 해 줄 순 없었다. 선천적인 결핍을 아무리 그럴싸하게 꾸며 봐도 타고난 감정을 이기지 못했다.
보통 사람과 다른 감정의 결핍에 슬픔이나 분노를 느껴 본 적은 없었다. 그저 어린 시절에 치료를 한답시고 병원을 드나들어야 하는 게 귀찮았을 따름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저는….”
인섭의 눈이 당혹감과 죄책감으로 발갛게 물든다.
이우연은 이를 낮게 사리물었다.
제 결핍을 인섭은 알고 있다. 그래서 윤아름을 부른 것이다. 옳은 선택을 나무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인섭이 결국 언젠가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옳은 선택을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버려질 테지.
좆같은 수치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거 절대 아닙니다. 진심입니다.”
“알아요. 늦었다. 피곤할 텐데 얼른 들어가요.”
새벽 세 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내일 스케줄 때문에 지금 집에 간다 해도 두어 시간도 자지 못한다. 인섭이 차 문을 열지 못하고 머뭇머뭇 이우연을 쳐다보았다.
“…늦었는데 주무시고 가실래요?”
다른 사람이 본다고 밖에서는 손도 잡지 못하게 하는 인섭이 얼마나 용기를 내서 한 말인지 이우연은 알고 있었다.
“아니요. 그냥 갈게요.”
그래서 이우연은 그 말을 더더욱 덥석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슬아슬하게 쥔 이성은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지금 이 기분으로 올라갔다가는 인섭이 울어도 그의 바지를 벗겨 내어 좆을 쑤셔 박을 게 분명했다. 밤새도록 싫다는 인섭을 안고 안고 또 안을 것이다.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인섭의 사지를 힘으로 눌러 강제로 꽂아 넣었는지 셀 수조차 없었다. 불쑥 치미는 욕구에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하와이에서 저지른 실수를 두 번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조심히 가세요.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인섭이 차에서 내리면서 인사했다. 시동을 걸려던 이우연이 인섭 씨, 하고 그를 불러 세웠다.
인섭이 조금 긴장한 채로 돌아보았다.
이우연이 인섭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일 나오지 마세요.”
웃는 낯도, 다정한 목소리도 없었다.
「세 마리 다 적응 완료.」
인섭은 첨부된 사진을 보고 가만히 미소 지었다. 오늘 오전에 인섭은 윤아름의 도움을 받아 로이스와 새끼들을 모두 구조했다. 세 마리 모두 병원에 데려가 어디 아픈 데가 없는지 확인한 후 윤아름의 집으로 옮겼다. 창고 방 하나를 아예 고양이들에게 내어 준 그녀는 늘어져 자는 고양이들의 사진을 인섭에게 보냈다.
「낯을 많이 가려서 걱정했는데 다행입니다. 콩이는 스트레스 받지 않나요?」
얼마 뒤 펜스 너머로 고양이를 힘없이 바라보는 강아지 사진이 도착했다.
「콩이에게 정말 미안하고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문자를 보내 놓고 인섭은 침대에 털썩 몸을 뉘었다. 피곤이 몰려왔다.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지친 기분이었다. 인섭은 핸드폰을 확인했다. 여전히 이우연에게는 문자 한 통 없었다. 전화를 걸어 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인섭은 한숨을 삼키며 몸을 뒤척였다.
‘내일 나오지 마세요.’
이우연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 당혹감에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간신히 입을 열어 화가 나신 거냐고 물었다. 이우연은 고개를 내저었다.
‘오늘 피곤하잖아요. 휴가 줄 테니 하루 쉬어요.’
인섭은 괜찮다고 극구 사양했다. 갑자기 당일에 휴가를 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은 피곤하지 않고 이우연 씨께 그런 폐를 끼칠 수 없다고 말하는 인섭에게 이우연은 대꾸했다.
‘나한테는 그 정도 폐도 못 끼치나요.’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몇 배는 나직하고 서늘해서 결국 인섭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인섭은 오전에 이우연에게 일 잘하시라고 문자를 보냈다.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연락을 무시하는 일이 없었다. 어지간히 화가 났거나 정말 죽도록 바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아마, 전자의 확률이 크겠지만.
새벽의 일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이우연에게 먼저 연락을 해야 했던 걸까. …그랬다면 아마 존은 지금쯤 죽었을지도 모른다. 몇 번을 생각해도 어제 자신의 선택은 최선이었다. 하지만 최선의 선택이 모두를 기쁘게 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인섭은 옆으로 누워 머리에 팔을 괴었다. 그러고는 습관적으로 핸드폰으로 포털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이우연의 이름이 걸린 것을 보고 벌떡 일어났다.
오늘 스케줄은 생방송이 아니라서 방송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대체 무슨 일이지. 떨리는 손으로 가까스로 이우연의 이름을 검색창에 쳤다. 기사가 주르륵 떴다.
「마음까지 훈훈한 진정한 훈남 이우연」
「이 시대의 미담 제조기 이우연. 이번에는 동물에게까지!」
「이우연의 동물을 향한 따뜻한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