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어 봤지만 답답한 가슴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인섭은 손으로 가슴 부근을 문질러 보았다. 오늘도 자고 가라는 이우연을 간신히 떨쳐 냈다. 갈아입을 슈트가 없다는 말에 이우연은 원하면 새 옷 따위 당장 열 벌쯤 사 주겠다는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기에 인섭은 필사적으로 거절해야 했다.
‘집에 뭐 숨겨 놨어요?’
웃으면서 묻는 이우연의 눈이 무서워서 인섭은 몇 번이고 고개를 내저었다. 결국 이우연은 내일 보자며 인섭을 배웅해 주었다.
“하아….”
인섭은 한 번 더 한숨을 몰아쉬었다.
결국 이우연에게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머리가 복잡했다. 인섭은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근처의 공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벤치에 기대어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김 대표의 말대로 채연서와의 스캔들과 N사의 드라마 출연을 비교하자면 후자가 훨씬 이득이었다. 채연서는 대중들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배우인 데다 두 사람을 나란히 두면 그린 듯한 커플로 보였기 때문이다. 공개 연애라고 해도 이미지 소비는 없을 것이다. 당연히 그쪽을 택하는 편이 맞다.
하지만 이우연은 몹시 강경하게 거절했다. 재고의 여지조차 없다는 태도였다. 저는 신경 안 쓰여요, 인섭 씨가 신경 쓰는 게 싫어서 그렇지. 이우연은 간단하게 그 이유를 설명했다. 바꿔 말하면 네가 신경 쓰지 않는다면 나도 문제는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인섭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의 집을 나섰다.
보통 평범한 매니저였다면 분명히 그에게 제안을 승낙하라고 했겠지.
최인섭은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솔직히 싫었다. 이우연이 누군가와 공식 연애를 인정한다는 사실이. 그냥 싫은 정도가 아니라 울고 싶을 만큼, 끔찍이 싫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가 방송 금지를 당한 이유도 저 때문인데. …자신이 이렇게 이기적인 인간이었다니. 죄송합니다. 대표님. 실장님. 제가 이렇게 나쁜 인간이에요. 이래 가지고 이우연 옆에서 어떻게 그를 돕는단 말인가.
“…그만둘까.”
본심을 중얼거렸다가 인섭은 누가 들을세라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김 대표를 찾아가서 그렇게까지 말했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그만둘 수는 없다. 김 대표와 차 실장을 뵐 낯이 없다. 무엇보다 이우연을 생각하면 그래선 안 되는 것이다.
누구에게 툭 터놓고 상의하고 싶은데 그럴 상대도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성도 붙임성도 없는 제 성격이 한심해서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미국에 있는 가족들이 보고 싶었다. 이우연에게는 말할 수 없는 외로움이었다. 그를 선택한 제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인섭은 얼른 눈가를 닦아 내다가 문득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으악!”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로 젖혔다. 커다란 흰 개가 멍, 하고 크게 짖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콩이야!”
멀리서 누군가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 여기 있다는 듯이 흰 개가 연달아 멍멍, 짖어 댔다.
“콩이야! 야, 너 누나가 똥 치우는 사이에 도망가는 게 어디 있어! 죄송합니다. 놀라셨죠. 원래 목줄을 꼭 쥐고 다니는데…. 어?”
인섭이 눈을 껌뻑거리자 트레이닝복을 입은 여자가 반갑게 알은척을 했다.
“최인섭 씨 아니세요?”
“네? 어…, 네.”
“저 모르시겠어요?”
그녀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보이며 웃었다.
“윤아름… 기자님.”
“어머, 이름도 정확히 기억하시네요.”
이우연과 관련된 것이라면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모두 적어서 달달 외우곤 했었다. 인터뷰를 했던 기자의 이름을 잊었을 리 없다.
“네. 당연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래간만입니다.”
인섭이 벤치에서 일어나서 손을 건넸다. 윤아름이 손을 마주 잡고 가볍게 악수했다.
“그런데 여긴 웬일이세요?”
“집이 이 근처라서요.”
“저도 집이 바로 이 앞인데. 저기 하늘색 지붕 보이시죠. 저기가 저희 집이에요.”
“아, 그러시군요.”
인섭은 어색하게 웃으며 맞장구쳤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눈을 돌렸을 때, 커다란 개와 눈이 마주쳤다. 멍! 하고 짖으며 꼬리를 흔드는 모습을 보자 인섭은 윌이 떠올랐다.
한 달 전쯤, 아버지께 전화를 받았다. 윌이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잠든 것처럼 편안하게 네 방 앞에 누워 있더라. 전화를 끊고 나서 인섭은 밤새도록 울었다. 윌은 가족이었고 형제였다. 윌은 몸이 약한 자신을 동생처럼 대했다. 마지막까지 제 방문을 지켜 준 것도 윌다웠다.
며칠 내도록 우는 인섭을 달래 준 것은 이우연이었다. 하지만 온전한 이해는 아니었다. 개 키우고 싶어요? 내가 더 좋은 걸로 사 줄게요. 그러니까 울지 말아요.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위로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인섭은 쓸쓸한 웃음을 삼키며 눈앞의 개를 내려다보았다.
“야, 콩이 너는 아무나 보면 다 좋다고 꼬리 흔드냐. 응? 남자가 그렇게 지조가 없어서 어떡할래.”
윤아름이 개의 목덜미를 손으로 문지르며 장난스럽게 눈가를 찌푸렸다.
“얘 이름이 콩이인가요?”
“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처음에 왔을 때 콩알만 했었거든요. 지금은 이렇지만. 하하, 그래도 귀엽죠?”
흰색 털을 가진 강아지는 성인의 허리까지 오는 크기였지만,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이 몹시 사랑스러웠다.
“많이 귀엽습니다.”
“만져 보실래요?”
그녀의 제안에 최인섭의 눈이 일시에 커졌다.
“그래도 되나요?”
“네. 그런데 조심….”
인섭이 자리에 앉아 개의 턱을 만지려고 손을 뻗은 순간,
“……!”
그대로 달려든 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인섭은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내가 못 살아, 정말. 죄송해요. 얘가 아직 어려서 진짜 천방지축이에요.”
윤아름이 사과하며 리드 줄을 잡아당겨 보았지만, 이미 개는 폴짝폴짝 뛰며 넘어진 인섭의 얼굴을 마구 핥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가서 씻으면 됩니다.”
최인섭은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개를 끌어안고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 모습을 본 윤아름이 웃으며 물었다.
“전에 개 키우셨나 봐요.”
“네. 어떻게 아셨어요?”
“보통 이렇게 큰 애가 달려들면 무서워하는데, 개 다루는 게 자연스러워서요.”
인섭은 그런가요? 하고 웃으며 콩이의 머리를 도닥였다.
“너 되게 귀엽고 착하구나.”
“착하긴요. 얘 때문에 지금 저희 집 식탁 기울었는데. 한쪽 다리 긁어 먹어서.”
인섭이 웃음을 터트렸다. 윌의 어린 시절을 떠올린 것이다.
“저희 집 윌도….”
“키우시는 강아지 이름이 윌이에요? 헉, 우시는 거예요?”
윤아름이 흥분해서 날뛰는 개를 진정시키다가 깜짝 놀라 물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인섭이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한번 터진 눈물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윤아름이 주머니를 뒤져서 손수건을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저희는 신경 쓰지 마세요.”
인섭이 손수건으로 눈가를 가렸다. 윤아름은 개의 리드 줄을 짧게 쥐고 그의 곁을 지켰다.
“윌이 생각나서요….”
인섭이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지개다리 건넜나 보네요.”
“무지개다리요?”
처음 듣는 표현에 인섭이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에 고인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또르르 흘러내렸다.
“반려동물들이 죽으면 주인들이 그렇게 말하거든요. 무지개다리를 건너서 좋은 곳에 가길 바라는 마음이죠.”
그 하얗고 몽실몽실한 앞발로 무지개다리를 건넜을 윌을 떠올리자 간신히 그쳤던 눈물이 다시 솟아났다. 인섭은 죄송합니다, 하고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윤아름이 한숨을 내쉬며 그의 옆에 앉았다. 어색한 침묵 사이사이로 훌쩍이는 소리만 이어졌다. 저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했는지 끙끙거리던 콩이가 인섭의 손을 핥았다.
“고마워. …미안해. 너도 놀랐지.”
인섭이 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얘는 신경 쓰지 마세요. 어차피 뒤돌아서면 다 잊는 애예요.”
윤아름이 애써 밝은 투로 말했다.
“흉한 모습 보여 드려서 죄송합니다. 다 큰 성인이….”
윤아름이 아니에요, 하고 손을 내젓다가 말을 이었다.
“일 년 전에 저희 집에서 키우던 탄이라는 애가 무지개다리 건넜거든요. 십 년 넘게 키우던 애라서 저도 근 한 달을 매일 울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퇴근하고 집에 돌아가니 아버지가 혼자 울고 계시더라고요. 저 처음에 귀신 본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데요. 저희 아버지 무뚝뚝하셔서 감정 표현이 없는 분이거든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 탄이 산책은 항상 아버지가 시키셨더라고요. 아이든 어른이든 가슴 아프고 상처받는 건, 다 마찬가지잖아요.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게 뭐가 나빠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인섭 씨 우는 거 하나도 안 흉해요. 오히려 예쁜데요. 어디 가서 이런 소리 안 들어보셨어요?”
그녀의 농담 섞인 위로에 인섭은 당황해서 고개를 숙였다. 이우연에게 숱하게 들은 말이었다.
“지금은 와닿지 않는 말이겠지만, 나중에 연이 닿으면 다른 애 키워 보는 것도 좋아요. 저희 집도 요즘 얘 때문에 웃음이 끊이지 않거든요. 물론 고함도요. 벽지를 죄다 뜯어 놔서. 넌 뭘 잘했다고 웃니.”
윤아름이 장난스럽게 콩이의 코를 손끝으로 퉁겼다.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아서 안 될 것 같습니다.”
“다른 가족분들도요?”
“지금은 사정상 혼자 살고 있습니다.”
“아, 그 일은 계속하시는 건가요?”
“네? 그게….”
지금 상황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 인섭이 어물거리는 사이 윤아름이 얼른 손을 내저었다.
“미안해요. 곤란하시면 대답 안 하셔도 돼요. 저 기자 그만뒀어요. 방금도 너무 캐는 것처럼 여쭤봤죠. 어머니한테 매번 지적받는데 말투 바꾸는 게 쉽지 않네요.”
“아닙니다. 제가 사정이 있어서 지금은 임시로 이우연 씨 매니저 일을 맡고 있습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그런 것뿐입니다. 저야말로 기분 상하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인섭이 깍듯하게 사과하자 윤아름이 웃음을 터트렸다.
“인섭 씨는 생긴 거답지 않게 말투가 왜 그렇게 딱딱해요. 친구들이 안 놀려요?”
“그, 그렇습니까.”
윤아름이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최인섭은 제니가 떠올랐다. 제니의 유쾌한 웃음소리는 항상 음악처럼 들렸다.
“인섭 씨. 재미있는 분이네요.”
“…감사합니다.”
인섭은 어색하게 감사 인사를 하고 저기, 하고 손수건을 건넸다.
“그거 눈물 콧물 다 묻히셨는데 그냥 주시려고요?”
“헉,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당장 빨아서, 아니, 그러니까, 새걸로…. 무례하게 굴어서 죄송해요.”
“농담이에요, 농담. 인섭 씨한테는 농담도 못 하겠네요. 양심에 찔려서.”
인섭은 손수건을 쥐고 안절부절못했다.
“그냥 버리세요. 화장품 가게에서 사은품으로 받은 거니까.”
윤아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인섭도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닙니다. 나중에 꼭 돌려 드리겠습니다.”
“나중에 언제요?”
“네?”
“전에 제가 문자 보냈는데, 답문 안 하셨잖아요. 상처받았는데.”
인섭은 이전의 일을 떠올리고 식은땀을 흘렸다. 일부러 누구하고도 관계를 갖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시절이라 예의상의 안부 문자조차 보내지 않은 것이다.
“결례를 저질러서 죄송합니다. 제가, 그때는 경황이….”
“아니에요. 진짜 농담을 못 하겠네.”
윤아름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인섭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제니를 제외하고는 제 나이 또래의 여자하고는 제대로 된 대화를 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전화번호를 줘야 하는 걸까? 이상한 수작이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그렇지만 언제 만나서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하는 걸까? 이대로 그냥 없던 일로 하면 정말 무례한 인간이 되는 건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절절매는 그에게 윤아름이 말을 걸었다.
“제 연락처는 아세요? 왠지 지웠을 거 같은데.”
“핸드폰을 바꿔서, 이전에 있던 번호가 다 날아갔습니다.”
“핸드폰 주세요.”
인섭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건넸다. 그녀가 제 번호를 저장했다.
“저 비 오는 날만 아니면 이 공원에서 이 시간대에 콩이 산책시키거든요. 나오실 일 있으면 문자 주세요. 콩이 만나러 오세요.”
“그래도 됩니까?”
간단한 해결책에 인섭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콩이까지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살짝 기쁘기까지 했다.
“네. 저 요즘 학생을 가장한 백수 돼서 한가하거든요. 울고 싶으시면 우리 콩이 털투성이 어깨 빌려 드릴게요.”
“…네.”
인섭이 확 달아오른 얼굴로 강아지의 털투성이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그나저나 옷 버리셔서 어떡해요. 비싼 옷 같은데.”
“비싼 옷인가요?”
인섭이 화들짝 놀라서 옷에 묻은 흙을 털어 냈다. 이우연이 사다 주는 대로 입어서 전혀 몰랐던 것이다.
“인섭 씨 진짜 재미있네요. 그럼 나중에 봬요. 콩이 간식 먹일 시간이 돼서.”
“아, 네. 안녕히 들어가세요.”
최인섭은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윤아름이 손을 흔들며 콩이와 함께 사라졌다. 둘이 사라지는 모습을 확인하고 인섭은 옷에 묻은 흙을 다시 탈탈 털어 냈다.
한국에 온 뒤로 이우연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 앞에서 운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일까. 아까보다는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게 뭐가 나빠요.’
윤아름의 위로가 이상하게 잊히지 않았다. 인섭은 공원을 내려오면서 다짐했다. 집으로 돌아가 샤워를 하고, 이우연에게 전화를 하자고.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당신이 거짓이든 연기든, 다른 사람과 연인처럼 보이는 것이 싫습니다. 질투가 납니다, 라고. 아, 좋아한다는 말도 덧붙이자. 감정을 드러내는 건 좋은 거니까.
인섭은 이우연에게 할 말을 연습하며 열심히 걸음을 옮겼다.
띵동.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문 앞에 선 남자는 망설임 없이 연달아 초인종을 눌러 댔다.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열 번쯤 반복했을까. 안에서 쿵쾅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가요, 하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비스듬히 서서 팔짱을 꼈다.
현관문이 활짝 열렸다.
“누구세…. 어? 우연 씨? 어쩐 일로….”
인섭의 차림새를 확인한 이우연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누구인지 확인하지도 않고 문을 열어요? 그런 차림으로?”
반바지에 큰 티를 하나 걸친 인섭의 머리에서는 물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나쁜 새끼가 나쁜 마음 먹고 나쁜 짓 하면 어쩌려고요.”
누구보다 나쁜 새끼가 나쁜 마음을 먹은 채로, 나쁜 짓을 할 요량으로 물었다. 인섭은 주의하겠습니다, 하고 눈을 껌뻑이며 사과했다.
“전화는 왜 안 받았어요.”
“샤워 중이라서 몰랐습니다. 전화하셨습니까?”
이우연은 대답하지 않고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인섭은 문을 닫고 나서 황급히 핸드폰을 찾아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가 23통이나 찍혀 있었다.
“죄송합니다. 씻느라고 못 들었나 봅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지나가다 들렀어요.”
이우연이 웃으며 대꾸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방 안을 이곳저곳 살피고 있었다. 인섭은 뭐 찾으시는 거 있나요, 하고 물었다.
“나 몰래 숨겨 둔 거 있나 해서.”
“네?”
“농담.”
이우연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인섭이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 이우연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해해 주려고 노력해 봤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는 인섭의 의도가 썩 유쾌하지 않았다. 감언이설로 꼬드겨 집에서 재워도 며칠만 지나면 인섭은 꼭 제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마치 뭐라도 숨겨 놓은 사람처럼.
인섭이 혹시나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데까지 생각이 닿자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책상에 넣어 둔 잭나이프를 주머니에 넣고 차를 몰고 있었다. 인섭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기분이 아주 좆같았다. 만에 하나라도 누군가를 집구석에 꿀단지처럼 숨겨 둔 거라면 그 새끼의 목을 따 버리자고 생각하며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마저 씻고 오세요.”
나이프를 한쪽 주머니에 넣어 둔 남자가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투로 말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다 씻어 가던 참이었습니다.”
인섭이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꾹꾹 눌러서 닦으며 대답했다. 이우연이 이리 와요, 하고 그의 손을 잡아서 제 앞에 앉혔다. 그러고는 수건을 빼앗아 인섭의 머리카락을 탈탈 말려 주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뭘요.”
위에서 보니 목이 늘어난 커다란 티셔츠 때문에 젖꼭지가 훤히 보였다. 젖꼭지 주변에는 제가 만든 자국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이우연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는 정성스럽게 인섭의 머리카락을 말려 주었다.
인섭이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마다 보이는 습관이었다. 이우연은 모르는 척, 인섭의 머리를 꾹꾹 눌러 주며 시원해요? 하고 물었다.
“네, 아주 시원해요. 감사합니다. 저기….”
“왜요?”
이우연이 수건을 치우며 눈을 마주쳤다.
“그렇지 않아도 전화 드리려고 했습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긴 속눈썹이 사부작사부작 움직인다. 이우연은 위에서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예뻐라.
이우연의 눈가에 긴 웃음이 스쳤다.
“그러니까, 저는….”
인섭이 입을 뗀 순간, 문밖에서 가느다란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인섭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눈동자에 당혹감이 스쳤다. 인섭의 머리통을 쥔 이우연은 저도 모르게 손아귀에 힘을 주고 말았다. 인섭이 아, 하고 고통에 찬 신음을 내고 나서야 이우연은 손을 풀었다.
“미안해요. 힘 조절을 못 했네.”
“괜찮습니다.”
인섭이 젖은 수건을 구깃거리며 만지다가 저어, 하고 입을 연다.
“잠시 밖에 나갔다 와도 될까요?”
이우연은 대답 대신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혼자 가도 되는데….”
“같이 가요.”
다정하게 말했지만 이우연은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민 상태였다. 문밖에서 들리는 아이 울음소리에 인섭은 지금도 안절부절못했다.
숨겨 놓은 게 애새끼였나.
“그러고 나갈 거예요? 감기 걸려요.”
“아, 알겠습니다.”
주섬주섬 트레이닝 점퍼를 찾아 입는 인섭을 이우연은 뒤에서 지켜보았다. 반바지 사이로 드러난 가느다란 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저런 몸으로 여자를 임신시켰을 리는 없을 텐데.
“정말 따라오시게요?”
인섭이 다시 한번 묻는다. 이우연은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인섭은 생수 통을 옆구리에 끼고 찬장에서 검은색 봉투를 꺼냈다.
이우연은 콧노래를 부르며 인섭의 뒤를 따라붙었다. 비상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의 녹슨 철제문을 열자 아까부터 들리던 울음소리가 가까워졌다.
“여기 잠깐 계세요.”
인섭이 문 앞에서 이우연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우연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색 봉투를 흔들며 인섭이 구석으로 걸어가자 어디선가 나타난 고양이들이 올망졸망 모여들기 시작했다. 냐아 냐아, 우는 소리가 언뜻 어린아이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가끔 밥을 줍니다.”
인섭은 바닥에 놓인 그릇에 사료를 부었다. 검은색 봉투에 든 것이 사료였던 모양이다. 고양이들이 사료 그릇에 허겁지겁 달려들었다.
“천천히 먹어. 물도 마시고.”
인섭은 다른 그릇에 물을 따라 주며 말했다.
“얘네한테 깨끗한 물도 중요하거든요. 쓰레기 같은 거 뒤지면 인간이 먹던 음식 먹어서 몸에 안 좋대요. 저도 인터넷에서 보고 배웠습니다. …이런 얘기 재미없으시죠?”
더럽게 재미없었지만, 이우연은 계속 얘기해 보라는 듯이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한 달 전쯤에 우는 소리가 들려서 올라와 봤더니 저 구석에서 새끼를 낳았더라고요. 얘는 로이스예요, 엄마. 그리고 쟤는 아서, 저 꼬리가 휜 애는 아이작, 저기 줄무늬는 존. 제일 작고 약해요. 많이 먹어.”
인섭이 그릇을 작은 줄무늬 고양이에게 밀어 주며 중얼거렸다.
“좋은 이름이네요.”
이우연의 음성에서 웃음기가 묻어났다.
로이스 맥마스터, 아서 코난 도일, 아이작 아시모프, 존 스칼지. 모두 인섭의 책장에서 본 이름이었다. 꿈꾸는 소년 같은 취향이라고 생각했었다. 자신과는 다르게.
“만져 봐도 되나요?”
이우연이 곁으로 가려 하자 인섭이 거기 계세요, 하고 제지했다.
“애들이 겁이 많아서 낯선 사람은 무서워해요. 저도 이렇게 만지기까지 이 주 걸렸어요. 죄송해요.”
인섭이 배시시 웃는다. 그의 손아래에 작은 털 뭉치들이 가르랑가르랑 소리를 내며 엉켰다.
“왜 데려가 키우지 않고.”
이우연의 말에 인섭이 고개를 내저었다.
“저희 집에서는 동물 키우면 안 되거든요. 밥도 몰래 주는 거예요. …집주인한테 말하지 마세요.”
엄청난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인섭이 목소리를 낮춘다.
지금이라도 네가 원하면 이 빌라 전체를 사서 줄 텐데. 이우연은 벽에 기대어 선 채로 인섭을 지켜보며 지그시 웃었다.
“키우고 싶어도 저는 여건도 안 되고요. 집도 자주 비우는데…. 로이스, 네가 엄마니까 많이 먹고 힘내야지. 나 또 언제 올지 몰라, 미안해.”
이우연의 집에 묵는 날이 길어지면 인섭은 눈에 띄게 초조해했다. 그 이유를 이젠 짐작하고도 남겠다. 이우연은 주머니에 든 나이프를 만지작거렸다.
저걸 없애면, 며칠이든 집에 데려다 놓아도 인섭이 초조해할 일은 없겠지. 간단한 문제였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끝내고 싶지 않았다. 최인섭이 어떤 인간인지 아는 터다.
저것들이 다른 구역으로 떠나기 전까지 인섭은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사료와 물을 챙겨 줄 것이다. 고양이들이 오지 않는 날이 오더라도 꼬박꼬박, 그 쓸데없는 수고를 이어 갈 것이다. 죽어 버린 친구 때문에 한국까지 와서 자신에게 했던 복수를 떠올려 본다면, 그러고도 남는다.
최인섭이 저것들을 먼저 버릴 일은 없을 테지.
이우연은 인섭의 등을 바라보았다. 문득, 이해되지 않는 유아기적인 이기가 고개를 쳐든다. 처음 깨닫는 감정에 조금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부모나 가족과 연락이 끊어졌을 때도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버림받으려면 그 이전에 소유당해야 했다. 자신은 누구에게도 속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럴 수도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또 올게. 미안해. 매일 못 와서.”
한 마리 한 마리, 차례대로 더러운 고양이들의 머리를 문질러 주며 인섭이 상냥하게 속삭인다.
너한테만큼은 버림받고 싶지 않다.
놀랄 만큼 선연한 감정이었다. 아니, 욕구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이우연은 불쑥 인섭 씨, 하고 그를 불렀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
최인섭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대답했다. 이우연이 인섭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낯선 사람의 접근에 먹이를 먹던 고양이들이 어둠 속으로 재빠르게 흩어진다. 인섭이 당황해서 고양이들을 불러 보지만 나약한 생명들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이우연은 인섭의 턱을 쥐어 제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제가 왜 좋다고 하셨죠?”
“네?”
갑작스러운 질문에 인섭은 얼른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어떤 점이 좋던가요.”
“어, 저는…. …저는….”
인섭이 어물어물 시선을 피하면서 그냥 잘 모르겠는데, 다 좋은 거 같기도 하고, 하며 중얼거린다.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요.”
겁먹은 동물을 살살 어르듯, 이우연은 다정하게 인섭의 뺨을 문질렀다. 그 손길이 마음에 들었는지 긴장으로 굳은 인섭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진다.
“일 열심히 하시는 것도 멋있고, …대본 같은 거 다른 사람 대사까지 다 외우시잖아요. 노력하시는 부분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운동도 열심히 하시고. 그리고….”
“그리고요.”
인섭을 제 곁에 붙들어 둘 수만 있다면, 그가 좋아하는 모습으로 있어 주자고 생각했다. 그런 것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미필적 고의요.”
인섭의 입에서 나온 단어에 이우연은 잠시 숨을 멈춘다.
“어렵다고 하셨잖아요. 보통 사람의 방식으로 중요성을 두는 거.”
“그렇죠.”
인섭이 이 문제를 언급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솔직히,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저는 그래서 이우연 씨가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미필적 고의 사이에서 중심을 잡고 계신 거잖아요, 계속.”
이우연이 무표정하게 인섭을 직시한다. 감정이 사라진 듯한 차가운 눈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말을….”
이우연이 인섭을 끌어안았다. 파닥거리는 심장 소리가 전해진다.
“인섭 씨.”
어딘지 모르게 애틋하고 안타까운 부름에 최인섭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네.”
최인섭은 대답을 하면서도 귓가에 열이 올랐다.
“나 계속 좋아해 줄 겁니까.”
“당연히, 그럴 겁니다.”
이우연이 인섭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한껏 숨을 들이켠 다음, 힘을 주어 인섭을 번쩍 안아 들었다.
“우, 우연 씨. 누가 봐요.”
“저것들 빼면 아무도 안 봅니다.”
이우연이 구석에서 털을 세우고 캭캭거리는 고양이들을 턱짓했다. 인섭이 그래도 내려 주세요, 하고 버둥거렸다. 그럴수록 이우연은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안 놔요. 아니, 못 놔.”
장난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당신이 하지 말라는 건 안 할게. 살인, 방화, 약탈, 강간. 또 뭐 있어?”
“…우연 씨.”
“그리고 좋은 배우가 되면 되나?”
좋은 배우라는 단어에 인섭이 작게 숨을 삼켰다.
“인섭 씨는 배우 이우연이 좋다면서.”
“…네. 좋아합니다.”
“그럼 우리나라에서 제일 훌륭한 배우가 되죠. 이 정도면 만족해요? 매니저님.”
장난스러운 말에 섞인 진심을, 인섭은 알 수 있었다. 연기를 시작한 동기가 불순하다는 사실을, 이미 이우연에게 직접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래도 늘 노력하는 그가 좋았다. 그게 어떤 의도든 간에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영화나 드라마 속의 이우연이란 사람은 누구보다 빛났다. 그 반짝임이 좋았다. 그래서 이우연이 오랫동안 배우 일을 해 줬으면 하는 개인적인 욕심이 있었다.
그걸, 지금 남자는 자신을 위해 해 주겠다고 한 것이다.
“별로야? 다른 거 해 줄까요?”
인섭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거면 돼요. 그냥 그렇게…, 좋아해 주시면 됩니다.”
허리를 숙여 이우연의 목을 끌어안았다.
“인섭 씨가 나를 버리고 간다고 해도 케이크 상자를 갖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게요. 다시는 인섭 씨 상처 입히는 일 없을 거예요.”
인섭은 조심조심 이우연의 뒷덜미를 쓸어내렸다. 그의 부드러운 머리칼이 손가락에 감겼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겠지만, 가끔 이우연이 어린 동물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인섭은 이우연을 끌어안은 채로 속삭였다. 우연 씨, 좋아해요, 라고.
가볍게 흔들리는 몸에서 그의 웃음이 느껴졌다.
“당신이 하라는 대로 다 할게. 나 계속 좋아해 줘요.”
이우연이 착한 아이처럼 고분고분한 말투로 인섭에게 애정을 요구했다. 인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섭 씨, 나 하나만 더 부탁해도 돼요?”
제일 중요한 건데, 갑자기 진지한 목소리로 덧붙인 말에 인섭은 잔뜩 긴장한 채로 네, 하고 대답했다.
“아프면 안 돼요.”
헛웃음이 날 만큼 싱거운 요구였다. 인섭은 아까보다 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우연은 세상을 다 가진 아이처럼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 남자가 진심으로 사랑스러웠다. 인섭은 그의 목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결국, 그날 연습한 말 중에서 다른 말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그래도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솔직하게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인섭은 스스로를 위로했다.
“인섭아!”
김 대표가 최인섭을 보고 반색하며 달려 나왔다.
“안녕하세요.”
스케줄을 확인하러 온 인섭은 얼른 허리를 숙여 공손하게 인사했다.
“잘 왔다. 잠깐 들어와 봐.”
인섭은 바짝 긴장해서 김 대표의 뒤를 따라갔다. 사무실로 들어가자마자 김 대표가 다짜고짜 물었다.
“이우연이 데리러 가기 전까지 시간 좀 있지?”
“네. 두 시간 정도 여유 있습니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서 인섭은 항상 여유를 두고 집에서 출발했다.
“그럼 그것 좀 읽어 봐.”
김 대표가 테이블에 놓인 대본을 가리켰다.
“오늘 들어온 건가요?”
이우연에게 들어오는 대본은 일차적으로 김 대표와 차 실장이 검토했다. 그렇게 통과한 대본을 최종적으로 이우연이 골랐다. 이우연이 종종 인섭의 조언을 듣는다는 사실을, 김 대표는 알고 있었다.
“응. 오늘 들어온 거.”
인섭은 소파에 앉아 꼼꼼하게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좋네요.”
대본을 덮고 나서 인섭은 제 감상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바로 뒷말을 덧붙였다.
“엄청 좋습니다. 인물도 살아 있고, 스토리도 짜임새 있고, 대본도 훌륭하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우연한테 잘 어울리겠지?”
김 대표의 물음에 최인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주인공 역인 거죠?”
“당연하지.”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짧은 대본을 읽고도 기억에 남을 만큼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이우연이 이 역할을 맡은 모습을 보고 싶었다. 아니, 배우 이우연이 이 역할을 맡아 줬으면 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역시 너는 대본 볼 줄도 알고, 너만큼 이우연을 잘 아는 애도 없으니까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이거 보여 드릴까요?”
“음, 그게 보여 주는 건 좋은데 말이다.”
김 대표가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대본의 표지를 가리켰다. 인섭은 그제야 대본에 쓰인 글자를 확인했다.
“N 본부에 편성 예정인 드라마거든.”
“…네.”
“하, 진짜. 나도 한 입 갖고 두말하기는 정말 싫거든? 근데 이거 정말 아까운 기회인 거 같아서. 이 대본 쓴 작가가 누군지 알아? 조윤영이라고 이쪽 업계에서는 내로라하는 거물이라고. 근 7년 만의 신작이야. 분명 이거 대상은 맡아 놓은 작품이야. 시청률도 마찬가지고!”
김 대표가 흥분해서 외쳤다. 그가 대본을 인섭에게 건넨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제가 말씀드려 볼게요.”
“할 수 있겠어?”
본인이 말을 꺼내 놓고 김 대표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인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그래. 이우연이 너라면 물고 빨, 헉, 그게 아니라. 하하하. 네 말은 잘 듣잖아. 둘이 워낙 친한 친구 사이니까. 나랑 차 실장처럼 말이야. 하하하.”
친구라는 단어에 인섭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이런 마음으로는 친구도 매니저도 될 수 없었다.
“그리고 너만큼 이우연을 이해하고 아끼는 사람도 없을 거고.”
이 말만큼은 김 대표도 진심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를 떠나서 배우 이우연을 가장 잘 이해하고 좋은 방향으로 조언해 주는 상대는 인섭이었다. 인섭에게는 불행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이우연의 인생에서 그는 놓쳐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그런가요.”
인섭이 우울한 낯으로 중얼거렸다.
“저기, 말하기 곤란하면 안 해도 돼.”
이우연의 더럽고 개 같고 좆같은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김 대표가 소심하게 덧붙였다.
“아닙니다. 제가 전해 드리겠습니다.”
인섭이 대본을 챙겨 들었다.
“그래. 오늘 좀 시끄러울 텐데, 원하면 로드 매니저 하나 더 붙여 줄까?”
오늘 아침 이우연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스캔들 기사가 나갔다. 이우연은 당연히 오늘 중으로 반박 기사를 내보내라고 언질해 둔 상태였다.
“괜찮습니다. 제가 잘 처리하겠습니다.”
“그래. 너만 믿는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고. 무슨 일 있으면 꼭 전화해. 알았지?”
최인섭은 대본을 안은 채로 허리를 숙여 꾸벅 인사했다. 사무실을 나와 만나는 사람마다 깍듯하게 인사했다. 다들 오늘 기사가 난 이우연의 스캔들에 관해 한마디씩 던졌다. 정말이에요? 둘이 잘 어울리던데. 기사 대응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등등. 인섭은 대답 없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만 숙여 인사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자 어깨가 축 늘어졌다.
“…힘들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인섭은 아니지, 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어제 이우연이 옥상에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사람은 자신을 위해 좋은 배우가 되겠다고 했는데, 고작 이런 걸로 힘들다고 투정하다니.
“힘내자! 아자! 아자!”
인섭은 손바닥으로 뺨을 소리 나게 철썩철썩 치며 기합을 넣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뭐 해요, 거기서.”
“헉.”
문 앞에 서 있던 이우연이 눌러쓴 모자를 슬쩍 올리며 웃는다.
“어, 어쩐 일이세요. 여긴.”
“인섭 씨가 나 안 데리러 와서, 버림받았나 싶어서 와 봤죠.”
최인섭은 제가 혹시 실수로 시간을 착각했는가 싶어 시계를 다급히 확인했다.
“농담이에요. 집 앞에 기자들 몰려 있어서 택시 불러서 나왔어요. 지금 밴 타고 나오면 주차장 입구에서 잡힐 것 같아서요.”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거기까지 생각을 못 했습니다.”
이우연이 인섭의 턱을 쥐고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보고는 마뜩잖은 듯 혀를 찼다. 그러고는 엄지손가락으로 붉은 자국이 남은 인섭의 뺨을 문질렀다.
“왜 남의 것에 허락도 없이 손자국 남겨요.”
언뜻 이해되지 않아 인섭은 네? 하고 되물었다. 한국어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관용적 표현이었다. 따로 시간을 내어 공부를 해도 아직도 못 알아듣는 표현이 수두룩했다.
“인섭 씨 내 거잖아요.”
“……!”
문자 그대로의 표현이었나 보다.
모자를 눌러써서 이우연의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요즘 들어 종종 그는 소년처럼 웃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이우연의 짓궂음은 배가 되었다.
“나도 아까워서 잘 못 만지는데 왜 함부로 자국 내요. 속상하게.”
인섭은 누가 들을까 봐 식은땀을 흘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안 들어요. 그리고 들으면 좀 어때.”
“목소리 낮추세요. 낮말은 쥐가 듣고 밤말은 새가 듣습니다.”
진지한 얼굴로 잘못된 속담을 말하는 인섭을 보며 이우연은 웃음을 터트렸다.
“걱정 마세요. 쥐든 새든 제가 책임지고 모가지를 비틀어 줄 테니까.”
“…….”
한 손에는 쥐, 한 손에는 새를 들고 우아하게 웃는 이우연의 모습을 떠올리자 소름이 쭈뼛 돋았다.
“잠깐 여기서 기다릴래요? 차 키 받아서 올게요.”
“네? 차 키 제가 갖고 있는데요.”
인섭이 주머니를 뒤지는 사이 이우연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쑥 들어갔다. 그러고는 금방 올게요, 하고 위로 올라가 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우연은 한 손에 자동차 열쇠를 돌리며 나타났다. 옆에는 울부짖는 김 대표를 끼고.
“안 돼. 절대 안 돼. 그거 내가 제일 아끼는 차란 말이야.”
“제가 더 아껴 줄게요.”
“벤츠 살해범이 하는 말을 어떻게 믿어. 마누라하고 자동차는 빌려주는 거 아니라는 말도 모르냐.”
“에이, 차 실장님한테는 둘 다 잘도 빌려주셨으면서.”
혀끝으로 사람 패는 걸로 죄를 따지면 이우연은 교도소에 갇히고도 남을 거라는 게 김 대표의 주장이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그놈이 혀로만 팹니까, 하고 차 실장은 발끈하며 반박했다.
“너랑 차 실장이 같냐! 아니, 이게 아니지. 암튼 안 돼. 이거 문짝 하나만 가는 데 몇 천이야.”
“두 개밖에 안 달렸잖아요. 다행이네.”
하얗게 질린 김 대표의 입매가 파르르 떨렸다.
마음 같아서는 너 같은 새끼 확 잘라 버리겠다고 백 번이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 이우연이란 이름 석 자가 갖는 가치가 엄청났다. 얼마 전에 찍은 드라마가 중국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해 그가 벌어들이는 수익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업계 사람들은 농담을 반쯤 섞어 이우연을 걸어 다니는 위안화 제조기라고 불렀다.
“저기, 차 키 저도 있는데요.”
인섭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오늘은 그거 못 타요. 기자들이 개떼처럼 몰려 있을 텐데.”
“야 이 돌은 놈아. 그렇다고 빨간색 페라리를 몰고 나가냐? 사람들한테 나 좀 보라고 광고를 하지 그래!”
“어차피 광고 안 해도 볼 텐데요, 뭘.”
“이쯤 되면 그냥 막 나가자는 거지?”
김 대표가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버럭 외쳤다. 그러자 이우연이 한 손으로 턱을 쥔 채로 웃음을 터트렸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야 이우연의 웃음소리는 듣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좋아했다.
“하하하, 대표님.”
사정을 아는 이들에게는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일 따름이었다.
“막 나가는 거 한번 보여 드릴까요?”
“…….”
“저 잘하고 있잖아요. 대표님도 저한테 잘 좀 해 주세요.”
이우연이 김 대표의 옷매무새를 고쳐 주며 말을 이었다.
“그러게 왜 하필 오늘 같은 날 기사 내는 걸 깜빡해요. 나 섭섭하게.”
최인섭은 그가 일부러 사무실로 찾아와 김 대표가 아끼는 자동차 열쇠를 강탈했음을 확신했다.
“반박 기사 내용 정리하려면 바쁘실 텐데, 우린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우연은 김 대표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고는 인섭에게 열쇠를 던져 주었다. 엉겁결에 차 열쇠를 받아 든 인섭이 김 대표와 이우연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살살 몰아라.”
반쯤 포기한 듯 김 대표가 세상에서 제일 슬픈 목소리로 당부했다. 인섭은 김 대표가 조금이라도 안도할 수 있도록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포츠카 몰아 본 적 있어요?”
운전석에 앉은 인섭이 차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자 이우연이 물었다.
“몰아 본 적은 없지만, 운전할 수는 있습니다.”
“저 때문에 연습하신 건가요?”
“네.”
농담처럼 던진 질문에 즉답이 돌아오자 이우연은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으십니까.”
“인섭 씨가 제 스토커였다는 사실을 가끔 잊게 되네요.”
인섭은 안전벨트를 매며 고개를 돌렸다. 발긋하게 달아오른 그의 귓불을 이우연은 놓치지 않았다.
“벨트 매셨나요?”
이우연이 대답 대신 단단하게 조여진 벨트를 흔들어 보였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인섭은 숙지한 매뉴얼대로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시켰다. 김 대표의 말대로 도로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의 이목이 단번에 집중되었다.
차체가 낮아서 자칫 잘못하면 흠집이 생길 수 있어서 인섭은 최대한 바싹 긴장해서 차를 몰았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알아서 차들이 옆으로 비켜 줘서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었다.
“오늘 스케줄 일산이었던가?”
“네. 그렇습니다.”
인섭은 운전대를 꼭 쥔 채로 대답했다. 오디오 북 녹음이 있는 날이었다. 시각 장애인들을 위한 봉사의 일환으로 시작된 <책을 읽어 주는 남자>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처음엔 방송사 홈페이지에서 스트리밍되는 형식이었는데 이우연이 읽어 준 책을 따로 구매하게 해 달라는 요구가 빗발쳐서 추후에 오디오 북을 출판하게 되었다. 벌써 이번이 세 번째 녹음이었다.
“제가 녹음한 거 들어 본 적 있어요?”
이우연이 창가에 팔을 괴고 기댄 채 물었다.
“네. 두어 번.”
인섭은 부득이하게 거짓말했다. 두어 번이 아니라 수백 번이었다. 티를 내지 않았지만 최인섭은 이우연의 이번 스케줄이 몹시 좋아 죽을 지경이었다. 잠이 오지 않는 밤, 이우연의 오디오 북을 밤새 틀어 놓곤 했다. 이우연의 목소리에는 사람을 달래는 힘이 있었다. …반대의 경우도 종종 있지만.
“어떻던 가요.”
“좋았습니다. 워낙 발성이나 성량도 좋고 발음이 훌륭하셔서…, 잠시만요.”
인섭은 옆에서 깜빡이를 켠 차에게 지나가라고 손짓했다. 하지만 회색 승용차 운전자는 인섭의 손짓을 보고도 감히 끼어들지 못했다. 인섭은 다시 열심히 손짓했다. 하지만 누구도 몇 억을 호가하는 슈퍼 카 앞에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최인섭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이 옆에 운전자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는 다시 속도를 올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우연의 미소가 점점 진해졌다.
“페라리를 인섭 씨보다 얌전하게 운전하는 사람은 없을걸요.”
조선 시대 사대부 가문의 규수를 데려와도 이보다 정숙하게 운전할 수 없을 거라고 이우연은 확신했다.
“죄송합니다.”
인섭이 얼른 사과했다.
“속도 좀 올려 봐요.”
“돌 같은 거 튀어서 차체에 흠집 생기면 안 됩니다.”
“그거 알아요? 저기서부터 여기까지 서 있는 빌딩 다 사고 남을 정도로 김 대표님 아버지 부자인 거.”
“그, 그러신가요.”
“우리 같은 평범한 집안 사람하고는 달라요.”
“…저만 평범한 거 같은데요.”
최인섭은 미국에서 본 이우연의 집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집보다는 저택이란 표현이 더 어울리는 규모였다.
“저는 집에서 절연당했잖아요.”
인섭이 헉, 하고 숨을 삼켰다.
“괜찮아요. 내놓은 자식인 걸 어쩌겠어.”
“부모님도 우연 씨 자랑스러워하실 겁니다. 상도 많이 받으시고, 이렇게 좋은 일도 하시고….”
“가문의 수치라고 하시던데.”
“아, 그, 저기….”
인섭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옆모습을 이우연은 유쾌하게 지켜보았다. 한참을 끙끙거리던 인섭이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는지 죄송해요, 괜한 말 꺼내서, 하고 사과했다.
이우연은 내비게이션을 확인했다. 서울을 빠져나가려면 아직 한참이었다. 아까웠다. 어디 적당한 곳에 차를 세워 두고 아래가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인섭의 입술을 빨고 싶은데.
“하아.”
이우연이 드물게 한숨을 내쉬자, 인섭이 화들짝 놀라 옆을 힐끔 쳐다보았다.
“무슨 문제 있으세요?”
“서울은 다 좋은데 차 세워 둘 곳이 마땅치 않단 말이에요.”
“네? 차를 왜 세웁니까?”
이우연이 대답 대신 손을 뻗어 인섭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사, 사고 납니다.”
“만지기만 하잖아요, 그래서.”
몇 번 그의 손길을 피하려 했지만 이우연은 끈질기게 인섭의 귓불을 조물조물 만졌다.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이우연이 했던 이상야릇한 말들이 떠올라 인섭은 운전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어떻게든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인섭은 옆에 놓아둔 대본을 얼른 그에게 건넸다.
“뭔데요.”
“대본입니다. 한번 읽어 보세요.”
이우연은 겉표지에 적힌 글자를 읽어 보더니 대본을 뒷좌석으로 휙 하니 던져 버렸다.
“아, 안 읽으세요?”
“차 안에서 글자 읽으면 멀미 나요.”
달리는 차에서 책을 읽거나 대본을 읽는 이우연을 숱하게 봤었다. 인섭은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내뱉는 아름다운 연인을 보면서 한숨을 삼켰다.
“…그렇게 싫으십니까?”
“뭐가요.”
“채연서 씨랑 스캔들 나는 거요.”
이우연의 웃음이 뚝, 멈추었다. 고개를 앞으로 돌리면서 건조한 투로 아뇨, 하고 대답했다.
“싫지 않으신 거면….”
“네가 싫어하잖아.”
칼로 자른 듯한 답이 돌아왔다. 최인섭은 운전대를 고쳐 쥐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인섭은 차분하게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기분이 좋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이우연 씨가 생각하시는 것만큼 신경 쓰이지 않습니다. 실제로 사귀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그냥 연기의 일환이라고 생각하면 되니까요.”
어디에 그런 말들을 담아 두고 있었던 것일까. 스스로도 놀랄 만큼 막힘없이 말이 흘러나왔다.
“그런 일로 이 드라마 포기하기에 너무 아까운 거 같습니다. 대본 한 번만 읽어 보세요.”
이우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우연 씨 말대로 이번이 처음도 아니잖아요, 스캔들.”
인섭은 애써 밝은 투로 농담을 던졌다. 심장이 펄떡펄떡 뛰었다. 손에서 식은땀이 흘러 몇 번이나 운전대를 고쳐 쥐어야만 했다.
“최인섭 씨.”
“네, 네?”
최인섭은 하마터면 브레이크를 잡을 뻔했다. 성까지 붙여 이름이 불리는 건 거의 없는 일이었다.
“부탁하는 겁니까?”
이우연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낮아졌다. 그의 심사가 뒤틀렸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무서웠다. 이우연이 제게 화내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그가 좋은 일을 포기하는 건 더더욱 보고 싶지 않았다.
“네. 부탁드립니다.”
인섭은 용기를 내서 대답했다. 이우연은 몸을 틀어 뒷좌석에 던져둔 대본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인섭은 그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얌전하게 운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강을 건너 자유로로 들어섰다.
이우연이 대본을 덮었다. 인섭은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살폈다.
“…어떠십니까?”
“네. 좋네요.”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무슨 말이든 해야겠다는 생각에 인섭은 되는대로 내뱉었다.
“분명히 이우연 씨 연기 인생에 전환점이 될 만한 작품이 될 겁니다. 시청률도 그렇지만 사, 상도 받으실 수 있을 거고요. 그리고, 또….”
말을 할수록 공기가 냉랭해졌다.
인섭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너처럼 이우연을 아끼고 이해해 주는 사람은 없다고 했던 김 대표의 말이 떠오른 것이다.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것도 좋았지만, 지금은 그의 일을 돕는 입장이었다. 이우연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방향이 무엇인지 직시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에게는 그래야만 하는 책임이 있었다.
“이우연 씨가 훌륭한 배우로서 좋은 작품, 연기하는 모습 보고 싶습니다.”
인섭은 묵묵히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입을 굳게 다문 이우연은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다.
“차 세워요.”
“네?”
“차 세우라고.”
도로 한가운데였다. 급작스러운 그의 요구에 인섭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쩔쩔맸다. 그러자 이우연이 그대로 핸들을 꺾어 버렸다. 차가 갓길에 급정거했다.
“내려요.”
이우연이 안전벨트를 풀며 말했다. 안전벨트 경고음이 울렸다. 동시에 인섭의 머릿속에도 경고음이 울렸다.
“안 내려요?”
이우연이 차 문을 열어젖혔다. 인섭은 주섬주섬 안전벨트 클립을 풀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이우연이 운전석에 앉고 인섭에게 조수석에 앉으라고 턱짓했다.
“괜찮습니다.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타세요.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인섭은 하는 수 없이 조수석으로 가서 앉았다.
“인섭 씨.”
바싹 다가온 그의 음성에 인섭은 어깨를 움츠리며 긴장했다. 이우연은 안전벨트를 손수 매 주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나 인섭 씨 우는 거 좋아해요. 당신처럼 예쁘게 우는 사람은 본 적 없거든.”
이우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안전벨트를 매고, 핸들을 쥐며 그가 웃었다.
“그런데 나 같은 개새끼도, 가끔은 평범하게 잘해 주고 싶을 때가 있어요.”
차가 출발했다.
“인섭 씨 우는 모습, 보고 싶지 않아요.”
점점 속도가 올라갔다. 인섭은 불안스레 속도계와 이우연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우는 모습 좋아하는데, 보고 싶지 않다고. 이해하겠어요?”
인섭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이우연이 웃음을 삼켰다.
“하긴. 나도 이해 못 하는데, 누가 이해하겠어.”
구웅, 하는 엔진 소리가 도로에 울렸다.
“저, 속도가….”
이우연이 패들을 당기며 속도를 올렸다. 인섭은 히익, 숨을 삼키며 차 문을 움켜쥐었다.
“참을 수 있겠어요?”
“무슨 말씀, 우, 우연 씨. 속도 낮추….”
속도계의 숫자를 보고 인섭은 제 눈을 의심했다.
“인섭 씨 겁 많잖아.”
“앞에…!”
페라리가 아슬아슬하게 옆 차선으로 끼어들어 앞 차량을 추월했다. 뒤에서 항의의 표시로 경적을 울렸지만, 엄청난 속도로 내달리는 바람에 경적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도 않았다.
“울 거잖아요.”
이우연이 핸들을 가볍게 돌리며 말했다. 날카로운 바람 소리를 내며 차들이 가까워졌다가 멀어짐을 반복했다.
“참을 수 있겠냐고.”
“…….”
인섭은 그제야 이우연이 하는 말을 이해했다. 열애를 인정하면 아무리 무시하려고 해도 여러 가지 일들이 생길 게 분명하다. 인섭은 안전벨트를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차, 참을 수 있습니다.”
속도계의 숫자가 빠르게 올라갔다. 손끝이 벌벌 떨렸다. 당장이라도 차를 멈춰 달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인섭은 꾸욱 참아 냈다.
이우연이 말없이 패들을 당겼다. 어떻게 차에서 이런 소리가 나는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굉음이 엔진에서 터져 나왔다. 인섭은 속이 울렁거렸다. 끝없이 아래로 추락하는 놀이기구를 탄 기분이었다.
“무리하지 말아요.”
김 대표가 보았으면 거품을 물었을 속도로 달리는 와중에도 이우연은 무서울 만큼 냉정했다.
“무, 무리하는 거 아닙니다. 저는, 괜찮… 습니다.”
인섭이 더듬더듬 대답했다. 그러자 이우연이 차를 길가에 급정거시켰다. 그대로 차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인섭은 그제야 숨을 내뱉으며 몸을 시트에 기댔다. 차갑게 얼어붙은 손을 쥐었다가 펴며,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우연은 허리에 손을 얹은 채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그는 다시 운전석으로 돌아왔다.
“미안해요.”
그가 사과할 거라고 생각지 못했던 인섭이 눈을 홉떴다.
“괜찮아요?”
이우연이 인섭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인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보통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인섭이 이우연의 손에 제 손을 얹으며 대답했다. 이우연이 그대로 고개를 인섭의 어깨에 묻었다.
“시발 진짜 당신 좆같은 거 알아요?”
“…….”
“그런 식으로 부탁하면 아무리 개 같은 일도 다 들어주고 싶단 말이에요.”
세상에 이렇게 살벌하고 험악한 고백이 또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거기에 두근거리는 자신도 바보가 분명하다고 인섭은 생각했다. 이우연의 이마가 닿은 어깨가 뜨끈뜨끈했다. 인섭은 죄송해요, 하고 꾸물꾸물 사과했다.
“그럼 나도 약속 하나만 해 줘요.”
“…네. 말씀하세요.”
이우연이 인섭의 어깨에 기댄 채 고개를 들며 말했다.
“앞으로 내 앞에서만 울어요. 다른 사람 앞에서 절대 울지 말고. 알겠어요?”
눈물은 제가 조절하는 게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인섭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우연이 인섭의 뺨을 움켜쥐었다. 인섭이 아야, 하고 눈썹을 찌푸렸지만 그는 힘을 풀지 않았다.
“이런 거에 반한 내가 머저리지.”
이우연이 인섭의 뺨을 힘껏 한 번 더 잡아당긴 다음에 놓아주었다.
“가요. 이제.”
“잠깐….”
운전석에서 내리려는 이우연을 인섭이 황급히 잡았다.
“왜? 그냥 내가 운전할까요?”
“아니요, 절대로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잠시만 이대로….”
이우연은 인섭의 손을 내려다보았다가 헛웃음을 삼켰다. 손발에 힘이 풀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우연이 시동을 걸었다.
“제가 할게요!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인섭은 필사적으로 외쳤다. 다시는 그 지옥을 맛보고 싶지 않았다. 우웅, 하고 엔진이 화를 내는 듯한 소리를 냈다.
“늦었잖아요.”
과속 딱지를 수십 개는 끊었을 속도로 달려온 바람에 시간은 넉넉하게 남아 있었다. 인섭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아니에요. 안 늦었는데….”
“그래요. 잘했어요.”
뭘 잘했다는 것인지 인섭은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이우연이 액셀러레이터를 가볍게 밟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내 앞에서만 울어야지.”
빨간색 페라리가 굉음을 내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하아.”
침대에 눕는 순간, 몸이 아래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피곤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하루였다. 머리를 말리고 자야 하는데 그럴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녹음실에서 최인섭은 의자 두 개를 붙여 놓고 반쯤 누워 이우연의 녹음을 들어야 했다. 녹음을 마치고 차를 반납하기 위해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말 그대로 기자 떼에 둘러싸였다. 사무실의 다른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울분에 찬 김 대표와 마주쳤다.
바퀴는 왜 이 모양이냐, 세상에 이 기스는 다 뭐냐, 대체 차를 어떻게 몰았기에 얘가 이렇게 병든 거냐! 김 대표는 차 주변을 뱅글뱅글 돌면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인섭은 잔뜩 주눅이 들어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어떻게 인섭이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김 대표가 페라리의 보닛을 끌어안으며 외쳤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인섭은 제가 틈틈이 모아 둔 통장 액수를 떠올렸다. 그거라도 드리면서 김 대표에게 진심으로 사과하자고 마음먹은 순간, 잠시 자리를 비웠던 이우연이 나타났다.
‘차 잘 나가던데요?’
이우연의 한마디에 김 대표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인섭은 아까보다 한층 더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숙였다.
‘이우연이 몰았냐?’
‘…죄송합니다.’
인섭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질문에 수긍하고 말았다. 김 대표가 이우연을 보며 너, 너, 하면서 말을 더듬었다.
‘다행이죠?’
‘뭐가.’
‘문 두 개 다 달려 있잖아요.’
입에 넣고 눈을 감으면 천상의 나팔 소리가 들린다는 고급 초콜릿 같은 음성이었다. 이우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갈게요, 하고 인섭의 팔을 붙들었다. 그 순간, 김 대표의 눈에 어린 절규를 인섭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어떻게 인섭이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이우연에게 끌려가면서 인섭은 입 모양으로 연신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밴으로 가려고 하자 이우연은 주머니에서 M이라고 적힌 차 키를 꺼내 들었다. 이거 타고 갑시다. 인섭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이우연은 김 대표가 두 번째로 아끼는 마이바흐로 걸어갔다. 볼일이 있다더니 김 대표 사무실에서 자동차 열쇠를 가져온 모양이었다. 김 대표가 울면서 달려왔지만, 이우연은 망설임 없이 시동을 걸고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물론 최인섭을 대동하고.
대체 왜 그러셨느냐는 질문에 이우연은 대본을 가리켰다. 김 대표가 인섭을 시켜 대본을 건넨 것을 괘씸하게 여긴 것이다. 인섭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우연의 집에 도착했을 때, 다시 한번 구름같이 몰려든 기자의 무리에 둘러싸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주차장 안까지는 따라 들어오지 못해,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내일은 더 심해질 텐데. 어떡할래요.’
차에서 내린 이우연이 웃었다. 지금이라도 발언을 철회하라는 뜻이었다. 인섭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를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오니 12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오자마자 고양이 사료를 챙겨 주고 샤워를 하고 누우니 1시였다. 이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한 적도 많았지만, 오늘은 정신적인 피로까지 더해 훨씬 힘든 느낌이었다.
“…죽겠다.”
내일은 제작 발표회가 있는 날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움직여야 했다. 인섭은 침대 옆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았다. 알람을 맞추려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이우연이었다.
“네. 여보세요.”
인섭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전화를 받았다.
<자고 있었어요?>
“아닙니다.”
<아니긴, 목소리가 벌써 졸린데요.>
이우연도 침대에 누워 있는지 목소리가 나른했다.
“이제 자려고요.”
<뭘 하다 이제 자요. 아까 갔으면서.>
“그냥 이것저것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고양이 밥 주느라?>
인섭은 주섬주섬 침대에 누우며 네, 하고 대꾸했다.
<왜 걔네만 챙겨요. 나도 배고픈데.>
인섭은 다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드시고 싶은 거 있으면 사다 드릴까요?”
<먹고 싶은 건 있는데, 못 먹어서 문제지.>
“…….”
높은 확률로 그게 자신을 가리키는 것 같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오늘도 이우연은 자고 가라고 인섭을 붙들었다. 내일 아침 일찍 데리러 오려면 힘들 텐데 왜 굳이 거기까지 가냐는 게, 주장의 요지였다. 사실 관계만 두고 따진다면 이우연의 의견이 백번 옳았다. 하지만 그 저변에 깔린 의도를 살핀다면, 절대로 승낙해서는 안 될 제안이었다.
<나 먹고 싶은 거 먹게 해 줄래요?>
“…밤늦게 뭐 드시면 소화 안 되세요.”
인섭은 최대한 예의 바르게 돌려 거절했다. 전화기 너머에서 이우연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인섭은 핸드폰을 고쳐 쥐었다. 이렇게 눈을 감고 이우연의 목소리를 들으니, 피곤이 조금 가시는 기분이었다.
<보고 싶다.>
“……!”
갑작스러운 고백에 심장이 피가 확 몰렸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릴까 봐 인섭은 이불로 몸을 둘둘 감쌌다.
<보고 싶어요.>
“…저도요.”
인섭은 누가 들을세라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불 밖으로 나온 발이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그러게 왜 갔어요. 피차 번거롭게.>
가볍게 나무라는 투였다.
“그게….”
당연히 이우연의 집에서 자고 준비를 한다면 두 시간은 더 잘 수 있었다. 보고 싶은 연인을 실컷 볼 수도 있으니 일석이조라 할 만했다. 그렇지만 수면의 질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이우연은 인섭을 생각해 일주일에 한 번만 섹스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머지 밤들을 얌전히 보내는 건 아니었다. 삽입만 하지 않았지, 할 만한 것들은 다 했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밤도 드물게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날에는 이우연은 인섭을 끌어안고 놓아주질 않았다. 귓불이나 목을 질근질근 깨문다거나, 아래를 밤새 주무르기도 했다. 다음 날이면 아래가 쓸려 제대로 앉아 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게, 그러니까….”
<나랑 자는 거 불편해요?>
“아닙니다. 다음 날 스케줄에 지장이 있으면 안 되니까, 이곳에서 자는 겁니다. 늦으면 안 되니까요.”
<불편하다는 거구나.>
이우연이 최인섭의 기나긴 변명을 간단하게 축약했다. 인섭이 대체할 단어를 찾으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이미 대답할 타이밍은 저 멀리 떠나가고 난 뒤였다.
<불편해서 어떡해요.>
진심으로 걱정스럽다는 투였다.
“그,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원래 계속 혼자 자던 습관이 있어서….”
<하하하하.>
이우연이 웃음을 터트렸다. 갑작스럽게 터진 웃음은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전조 없이 그쳤다.
<그런 습관 있기만 해 봐.>
인섭은 저도 모르게 시트 속으로 몸을 웅크렸다.
분명 연인과 통화를 하고 있는데, 이 사람은 나를 진심으로 좋아해 주는 건데, …왜 이렇게 춥지.
<그래도 이제부터는 익숙해져야죠. 인섭 씨도.>
“노력하겠습니다.”
<내 옆에서 잠들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 매니저님을 위해 저는 뭘 해 드릴까요? 자장가라도 불러 드리면 되려나.>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책 읽어 줄까요?>
바로 거절을 해야 했는데 인섭은 잠시 혹해서 망설이고 말았다.
<무슨 책?>
“아, 아닙니다. 피곤하신데, 괜찮습니다.”
인섭이 극구 사양했지만, 전화기 너머에서 일어나는 기척이 들렸다.
<뭐가 좋을까요?>
책장 앞에 선 모양이었다.
“혹시…. <무진기행>이라고 읽어 보셨어요?”
불쑥, 무더운 여름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니요. 재미있어요?>
“네. 저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인섭 씨 책장에서 그 책 본 거 같네요. 나중에 빌려주세요.>
이전과 같은 말이었지만 약속의 무게는 확연히 달랐다. 이상하게 숨이 막혔다. 인섭은 베개에서 고개를 떼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열어 놓은 창으로 시원한 초여름 밤의 공기가 흘러들었다.
<오늘 읽은 책은 어땠어요?>
“좋았습니다.”
심신이 너덜너덜해진 채로 집으로 오는 길에도 원작 소설을 집으로 주문했을 만큼, 마음에 들었다.
<음, 읽은 거 또 읽으면 재미없나?>
“아닙니다. 좋습니다. 정말, 좋았어요. 지금까지 녹음하신 오디오 북 중에서 이번 것이 제일 좋았어요.”
인섭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우연이 작게 웃었다.
<인섭 씨는 가끔 나를 좋아하는 건지, 배우 이우연을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지.>
“당연히….”
<날 좀 더 좋아해 줘요.>
인섭이 조그만 목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이우연은 다시 침대에 앉았는지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눈 감아요.>
인섭은 고분고분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이우연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흔들림 없이 고요한 음성이다. 깊고 깊은 바다처럼.
그의 음성을 베고 눕자 감정이 물처럼 밀려들었다.
정말, 좋아하는구나. 이 사람을.
몇 번이고 깨닫고 만다. 햇빛에 반짝이는 수면이 점점 멀어지면서 인섭의 의식이 저 아래로 침잠했다.
“…….”
눈을 떴을 때, 뭔가 잘못되었다는 불안감이 전신을 엄습했다. 인섭은 습관처럼 머리맡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았다. 화면을 확인하고 나서도 한참 동안 멍하니 눈만 껌뻑였다.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듯한….
“헉!”
인섭은 이불을 발로 차며 일어났다. 시계를 다시 확인했다. 11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미쳤어, 미쳤…. 헤어랑 옷…. 아니, 운전은 누가….”
오늘은 이우연이 얼마 전에 촬영을 마친 영화의 제작 발표 보고회 날이었다. 크랭크 인 날짜가 잡힌 뒤 기자들을 불러서 홍보를 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왜 알람이 안 울렸지. 으아, 어떡해.”
어제 이우연과 통화를 하다가 아무래도 그대로 잠든 모양이었다. 패닉이었다.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연락, 연락을….”
인섭은 핸드폰을 다시 확인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우연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피곤하신 거 같아서 안 깨웠어요. 천천히 나오세요.」
그 아래에는 제작 발표 보고회 장소가 적혀 있었다.
“으아….”
인섭은 그대로 욕실로 달려갔다. 재빨리 샤워를 하고 튀어나왔다. 잡히는 대로 옷을 주워 입고 핸드폰과 지갑을 챙겼다.
“아, 그리고, 그리고….”
인섭은 이우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어났어요?>
웃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천천히 오세요. 이제 하실 일도 없는데.>
“오늘 움직이기 힘드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대표님이 운전해 주셔서 편하게 왔어요. 아, 대표님은 방금 가셨고요.>
“…….”
신발을 신던 인섭은 숨을 삼켰다. 꼭두새벽부터 호출당했을 김 대표를 생각하자 죄책감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이우연이 웃으면서 이제 들어가야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신발을 마저 신고 집을 나섰다.
눈이 부실 만큼 청량한 날이었다.
“…잘못했습니다.”
인섭은 핼쑥해진 얼굴로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사과를 중얼거렸다.
다행히 제작 발표회를 하는 장소가 집에서 멀지 않아 30분 만에 도착했다. 어느 관에서 발표회를 하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상영관 앞은 선물을 들고 기다리는 팬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최인섭은 조심스럽게 인파를 헤치고 앞으로 걸어갔다.
“관계자 외 출입 금지입니다.”
입구에서 검은색 양복을 입은 진행 요원이 인섭을 막아섰다.
“저 이우연 씨 매니저입니다.”
인섭의 말을 들은 진행 요원이 코웃음 쳤다.
“정말입니다.”
“정말이고 자시고, 좋은 말 할 때 가세요.”
진행 요원이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정말입니다. 같이 찍은 사진도 있는데….”
인섭은 핸드폰 사진첩을 뒤적거리다가 화들짝 놀라 화면을 꺼 버렸다. 이우연이 인섭의 턱을 쥐고 억지로 뺨에 입을 맞추는 사진이 나와 버린 것이다. …대체 이런 사진은 언제 찍은 거지.
“사진? 하하하. 당신 같은 사람 여기 한 무더기야. 저기 보이는 저 여자는 이우연 이모라던데, 저기는 이우연 사촌 여동생.”
진행 요원이 가리키는 방향에 있던 여자들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저는 거짓말하는 거 아닙니다.”
“니가 이우연 매니저면 난 이우연 친형이다.”
아무리 잘 봐 줘도 대학 신입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인섭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 줄 리 만무했다. 주변을 둘러봐도 얼굴은 아는 사람도 없었다. 최인섭은 하는 수 없이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구석으로 가서 앉았다. 한참 제작 발표회 중인 이우연에게 전화를 걸 수도 없었다. 그래도 도착했다는 것은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문자를 보내 놓았다.
“하아.”
인섭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제야 제가 양말을 짝짝이로 신고 나왔음을 발견했다. 머리도 말리지 않고 나와 엉망으로 뻗어 있었다. 인섭은 머리를 쓱쓱 뒤로 넘겨 보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 뻗어 버렸다. 그러고 보니 재킷도 이상하게 구깃구깃했다. 옷 상태를 살펴보니 세탁소에 주려고 걸어 둔 옷을 입고 온 모양이었다.
“나 왜 이러지….”
전에는 하지 않았던 실수들이 잦다. 아무래도 긴장이 풀린 모양이었다. 정신 차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인섭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어라.”
손끝에 걸리는 감촉에 인섭은 손을 주머니에서 도로 뺐다.
무슨 종이지? 영수증인가? 영수증은 모두 사무실에 제출했는데.
인섭은 반듯하게 접은 종이를 무심코 펼쳐 보았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이마가 건넨 쪽지였다. 이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정말 정신이 없구나.
“왜 안 들어오고.”
머리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인섭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우연이 인섭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매니저님 안 들어오시길래.”
“발표회 중인데 어떻게 나오셨어요?”
“영상 보는 중이라 말씀드리고 나왔어요. 들어가 봐야 해요.”
이우연은 가끔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다정함을 드러냈다. 그가 말하는 평범한 사람의 방식으로. 그리고 그때마다 인섭은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기뻤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 인섭은 시선을 내리고 얼른 들어가세요, 하고 중얼거렸다.
이우연이 손을 내밀었다. 인섭이 망설이는 사이 이우연이 인섭의 손을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이우연의 온기가 닿은 곳이 화끈거렸다. 인섭은 땀이 난 손바닥을 바지에 몰래 문질렀다.
“이우연 아니야?”
“대박, 이우연이다. 실물 어떡해.”
“우연 오빠! 오빠!”
금세 주변에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이 모이기 시작했다. 인섭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이우연의 앞을 막아섰다.
“죄송합니다. 사진 촬영은 다음에 부탁드리겠습니다.”
능숙하게 사람들을 막아선 것까지는 좋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밀어 대는 힘에 인섭은 그대로 밀려났다. 인섭이 사람들 사이로 종잇장처럼 밀려다니는 모습을 보는 이우연은 짜증이 치밀었다. 마음 같아서는 인섭을 밀어내는 인간들의 머리를 죄 비틀어 버리고 싶었다.
이우연은 인섭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그는 산뜻하게 외치고 인파 속을 헤집으며 전진했다. 아까 인섭을 막아섰던 진행 요원이 이우연의 옆에 선 인섭을 보고 당황한 얼굴로 차단 줄을 열어 주었다. 그가 인섭에게 죄송합니다, 하고 인사했다.
“괜찮습니다.”
인섭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누군데 인섭 씨한테 죄송하대.”
이우연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까 제가 우연 씨 매니저라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뒷말은 듣지 않아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이우연의 입매가 느슨해졌다.
헐렁한 양복에 앳된 얼굴, 살짝 겁을 먹은 듯한 인상. 누가 봐도 어린 학생이었다. 늦잠을 자서 머리도 제대로 손질하지 못했는지 옆으로 마구 뻗친 머리는 앳된 인상을 한층 더했다.
“제가 매니저같이 안 생겼나 봐요.”
인섭이 소심하게 웃어 보인다. 상대방을 무장 해제시키는 초식 동물같이 커다란 눈이 살짝 구부러지며 접힌다. 예쁜 웃음이다.
“어, 어디로 가세요?”
“화장실이요.”
이우연이 앞서 성큼성큼 걸어가자 인섭도 그 뒤를 따랐다.
“오늘 늦어서….”
인섭이 말을 마치기 전에 문이 잠기는 소리가 철컥, 울렸다. 이우연이 눈을 휘둥그레 뜬 인섭을 끌고 화장실 안쪽 칸으로 들어갔다.
“왜 문을…!”
이우연이 몸을 낮춰 입을 맞추었다. 말릴 틈도 없었다. 인섭이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각도를 달리해서 입술을 바싹 맞물었다. 점점 몸에 힘이 풀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섭은 숨을 헐떡이며 이우연의 품에 포옥 안기고 말았다.
“하아.”
살짝 멀어진 입술 사이로 인섭이 달뜬 숨을 내뱉었다. 이우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잘 잤어요?”
그가 인섭의 입술을 가볍게 쪽, 빨면서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어제 저 언제 잠들었나요?”
민망함에 인섭은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물었다.
“두 시쯤에.”
통화는 그 뒤로도 한 시간쯤 더 이어졌다. 인섭이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들자 이우연이 대답했다.
“주무시는지 몰라서 계속 책 읽어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피곤하셔서 어떡합니까.”
인섭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이우연은 그러게요, 하고 적당히 맞장구쳤다. 이우연은 사실 아직까지 정신적으로 곤두서는 일은 있어도 체력적으로 피곤을 느끼는 일은 거의 없었다. 김 대표는 이우연의 체력을 처음에는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극찬했지만, 요즘엔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약의 부작용에 관련된 책자를 이우연 앞에 떨어트리거나, 자기가 아는 연예인 중에 안 좋은 것에 손댔다가 인생 망친 케이스를 늘어놓기도 했다. 아무래도 본인의 상식선에서 이우연의 체력을 정상의 범주에 넣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몇 시에 끝나세요? 에너지 드링크라도 사다 드릴까요.”
그 체력이 어느 정도인지 침대에서 밤새도록, 몇 번이나 경험했음에도 인섭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얼굴을 한다.
이우연이 인섭의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인섭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처음에는 이렇게 하면 부끄러운 듯 고개도 못 들더니 요즘엔 제법 머뭇머뭇 시선을 맞췄다. 다시 입을 맞추었다. 인섭이 입을 벌려 그 움직임에 응해 준다.
이우연은 인섭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고 입술을 삼키듯 키스했다. 몇 번을 빨아도 이 작은 입술이 좋았다. 미친 듯이 좋았다. 호흡이 모자라 작게 할딱이는 숨소리도, 땀에 젖은 머리카락도, 바르작거리는 몸짓도, 어쩌지 못할 만큼 사랑스러웠다.
간신히 떨어진 입술 사이로 이우연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나… 니가 왜 이렇게 좋지.”
본인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해 느끼는 혼란과 한껏 달아오른 욕정이 뒤섞인 눈이었다. 이우연이 인섭의 등을 쓸어내렸다. 인섭이 몸을 잘게 떨었다.
“내가 만약에 너한테 질렸다는 개소리를 하거든….”
인섭은 숨을 들이켰다. 그런 날이 온다는 상상만으로도 피가 차갑게 식었다. 이우연이 그런 인섭의 두려움을 읽기라도 한 듯이 그의 등을 가만가만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내 뺨을 후려갈기면서 욕해 줘요. 너 같은 개새끼 받아 주는 인간은 나밖에 없을 테니까 정신 차리라고.”
“네?”
다소 과격한 요구에 인섭이 진담 여부를 알 수 없어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그 표정이 또 더할 나위 없이 남자의 아랫도리를 자극했다. 작게 벌어진 인섭의 입술에 이우연이 연신 입을 쪽쪽 맞추며 응? 하고 조르듯 대답을 요구했다.
“그, 그렇게 하겠습니다.”
인섭이 일생일대의 결심을 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이우연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바싹 인섭을 끌어안은 채로 이우연은 속삭인다.
“이대로, 우리 그냥 어딘가로 가 버릴까요.”
현실성 없는 말이었다.
“그때 같이 갔던 호수도 좋았는데. 김 대표님 별장 말이에요.”
이우연이 이전의 기억을 되새기며 웃는다.
그냥 듣고 웃으며 넘겨야 할 말이었다. 그런데도 인섭은 어린애처럼 설레고 마는 자신을 발견하고 만다.
“…들어가셔야죠.”
아무리 영상을 틀어 놨다고 하더라도 주인공이 자리를 비우면 안 되는 법이었다.
“가야죠.”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우연은 손에 준 힘을 풀지 않는다.
“빨리 들어가세요.”
인섭이 한 번 더 재촉을 하고 나서야 이우연은 손을 놓았다. 화장실 칸을 나가려던 이우연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그런데, 하고 몸을 돌렸다.
“그건 뭐예요?”
무슨 말이냐는 듯이 인섭이 눈을 껌뻑였다.
“이거.”
이우연이 인섭의 손에 들린 종이를 뺏어 팔랑거리며 물었다. 인섭은 헉, 하고 놀라서 도로 종이를 뺏어 버렸다. 아까 놀라서 종이를 주머니에 넣는 것도 잊은 것이다.
“아, 저기….”
인섭의 머릿속이 번잡하게 돌아갔다.
솔직하게 나이마가 준 전화번호라고 건네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그랬다간 분명히….
왜 그걸 지금 주세요, 그렇게 질투가 많아서 앞으로 어떻게 할 겁니까, 종이 한 장도 못 건네는 사람이 신경을 잘도 안 쓰겠네, 등등. 이우연의 비아냥거리는 놀림이 귓가에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다. 아직까지 소속사에서는 열애설에 관한 공식적인 입장을 발표하지 않았다. 오늘 발표회는 기자들 역시 모인 자리니 이우연으로서는 열애설에 관한 질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괜한 문제를 만들면 안 된다.
차라리 내가 받은 거라고 둘러댈까. …잘도 믿겠다. 이 사람도 눈이 두 개나 달려 있는데.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섭은 눈을 질끈 감고 대답했다. 비겁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회피를 택했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이우연의 시선이 닿아 뺨이 따끔거렸다. 금방이라도 쪽지를 빼앗아 들고 무섭게 윽박지를 것만 같았다. 그냥 사과할까.
“알겠어요.”
“네?”
“아무것도 아니라면서요.”
인섭은 눈을 슴벅거리며 이우연을 올려다보았다. 전직 이우연의 스토커, 현직 이우연의 연인으로서 그에 대해 알 만큼 안다고 자부했건만, 이런 반응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인섭 씨가 아무것도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거겠죠.”
“…네.”
이우연을 속이고 있자니 양심이 쿡쿡 찔려 미안해 죽을 지경이었다.
“안 버려요?”
“네?”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인섭은 하는 수 없이 손에 꼬깃꼬깃 쥐고 있던 종이를 쓰레기통에 툭 던져 버렸다.
“그럼 저는 들어가 볼게요.”
“네. 알겠습니다.”
“인섭 씨는 삼십까지 세고 나오세요. 지금 얼굴 야해서 아무한테도 보여 주기 싫으니까.”
이우연이 웃으면서 화장실 문을 열고 나갔다. 인섭은 한숨을 내쉬고 쓰레기통에 들어간 쪽지를 바라보았다.
“미안합니다. …전해 드리지 못해서.”
그대로 나가려다가 이우연이 했던 말이 떠올라 세면대로 걸어갔다. 이우연이 말한 야한 얼굴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머리 스타일 탓인지 평소보다 더 어수룩해 보일 뿐이었다. 차가운 물을 틀어서 세수를 했다. 물에 젖은 얼굴이 거울에 비쳤다.
“그냥 놀린 건가.”
그럴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래도 이우연의 말대로 인섭은 속으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스물둘쯤 셌을 때, 화장실 문이 열렸다.
“시발, 누가 문을 잠그고 지랄이야. 짜증 나게.”
거칠게 욕설을 퍼붓는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거울을 통해 눈이 마주쳤다.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어, 너.”
그쪽도 인섭을 알아봤는지 바로 알은체했다. 인섭은 얼른 허리를 숙여 90도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안녕은 얼어 죽을. 그런데 니가 여긴 웬일이냐.”
강영모였다. 제작 발표회에 주연 배우들과 친분이 있는 연예인을 초대하기도 했다. 대체 누가 이 사람을 초대할 만큼 친분이 있는 걸까. 인섭은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이우연 씨 제작 발표회 때문에 왔습니다.”
“엥? 차차차는?”
차차차는 차 실장의 별명이었다.
“차 실장님은 사고로 입원해 계십니다. 제가 임시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참 나. 이우연이 옆에 있으면 다 사고야. 진짜 소름 끼치지 않냐? 너도 뒤지기 싫으면 얼른 일 관둬라.”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인섭은 고개를 다시 꾸벅 숙였다. 강영모와는 되도록 말을 길게 섞고 싶지 않았다.
“야, 근데 채연서랑 이우연 진짜 사귀냐? 둘이 찍힌 사진도 한 장 없던데, 어떻게 열애설이 났어.”
능글능글 웃는 웃음이 기분 나빴다.
“배우의 사생활에 관해서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드릴 말씀이 왜 없어? 너 이우연이랑 친하잖아. 걔 성질 더러워서 매니저를 그렇게 갈아 치운다며. 차차차야 김 대표 따까리니까 또 맡은 거라고 쳐도, 넌 아니잖아.”
강영모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금방 화장실 안에 담배 연기가 가득 찼다. 떡하니 금연이란 팻말이 붙어 있는데도 강영모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너 회사에서 얼마 받냐?”
“네?”
“얼마 받아. 돈 많이 주냐?”
“적당히 받습니다.”
맥락 없이 나온 돈 얘기에 인섭은 당황했다.
“적당히 얼마? 이백? 삼백?”
강영모가 인섭의 얼굴에 담배 연기를 뱉으며 물었다. 인섭은 쿨럭거리면서 손으로 코를 막았다.
“넌 어른이 담배 피우는데 어디서 건방지게 코를 틀어막냐.”
“죄송합니다.”
“너도 어린애가 돈 버느라 고생한다.”
얼핏 걱정하는 투였지만 강영모라는 인간을 알기에 그 말이 그리 호락호락 들리지 않았다.
“거기서 푼돈 받지 말고 우리 회사 와서 일해. 돈은 내가 넉넉히 주라고 말할 테니까.”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마음만 받지 말고 돈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라. 응? 그동안 이우연이랑 친하게 지내고.”
이우연의 약점을 갖고 오라는 노골적인 회유였다. 대답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인섭은 고개만 숙이고 강영모의 옆을 지나쳤다.
“이우연이 아까 나가서 한참 있다가 들어온 것도 이상하잖아. 아 혹시 화장실 문 잠그고 너랑 여기서 한판 쳤냐?”
생각 없이 던진 화장실 유머였다. 문제는 거기에 인섭이 적절히 반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파랗게 질린 인섭을 보고 강영모가 어라, 하고 눈썹을 휘어 올렸다.
“뭐야. 진짜 붙어먹었냐? 채연서는 가림막이고?”
“그런 거 아닙니다.”
반응하면 안 되는 건데. 후회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강영모가 흥미롭다는 얼굴을 하고 인섭의 팔을 붙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우연이 너 이상하게 감싸고돌았었지. 하하하, 재미있네, 이거. 잘 좀 파 보면 얘기 좀 나오겠어.”
“무슨 말씀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늦어서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난 것인지 인섭은 단호하게 강영모의 손을 떨궈 냈다. 뒤에서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들렸지만 인섭은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제작 발표회가 열리는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감독과 출연 배우들이 차례대로 작품에 대한 코멘트를 하는 중이었다. 인섭은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식은땀이 흐르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괜찮다. 괜찮을 것이다. 강영모는 이전에도 비슷한 농담을 던지곤 했으니까. 무시하면 그만이다.
골목길 안쪽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강영모와 무표정하게 그를 내려다보던 이우연의 눈이 떠올랐다. 인섭은 고개를 내저었다. 두 사람이 다시 마주칠 만한 일은 만들지 않으면 된다. 회사에서도 그 후에는 절대로 강영모와 출연이 겹치지 않게 한다고 했다. 오늘 이 자리만 무사히 끝나면 다시는 만난 일 따위 없을 것이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제가 좋아하는 이우연을 잃어버릴 것 같다는 밑도 끝도 없는 불길한 예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인섭은 옷을 여며 쥐고 무대를 올려다보았다. 코멘트가 끝나고 각자 질문을 받는 차례였다. 주연 여배우 순서가 끝나고 이우연이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카메라 플래시 소리가 연달아 터졌다. 눈이 부실 만도 한데 이우연은 흐트러짐 하나 없이 플래시 앞에 섰다. 타고난 배우였다.
“영화에 관련된 질문만 부탁드립니다.”
사회자가 먼저 선수를 쳤다.
“이우연 씨 이번 영화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눈앞에서 잃고 복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주인공 김세현 역을 맡으셨는데, 어떠셨습니까.”
“영화를 찍을 때마다 역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고, 제가 그 사람이면 어땠을까 하는 고민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역은 유독 힘들었습니다. 행복한 장면은 앞의 오 분이 전부였거든요.”
기자들 사이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 말씀은 지금 이우연 씨께도 소중한 한 분이 있다는 말씀으로 해석해도 되는 건가요?”
영화고 나발이고, 이 자리에 있는 모든 기자가 하고 싶은 단 하나의 질문이었다.
“기자님께는 소중한 사람이 한 분만 계시나요? 하하.”
이우연이 부드럽게 웃으며 방어했다.
“그래도 최근에 좋은 소식이 들리시던데요. 어떠십니까. 그분께 이 영화를 설명해 주신다면?”
“다들 궁금해하시는 건 알겠는데, 오늘은 영화 제작 발표회 날입니다. 개인적인 질문은 자리를 따로 잡고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회를 보고 있는 리포터가 능숙하게 질문을 막아 냈다. 이우연이 괜찮습니다, 하고 리포터에게 눈웃음을 지었다.
“영화를 찍다 보면 저도 모르게 마음이 가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한 번 더 생각하게 되고, 마음이 가는 그런 작품이요.”
연예인들 사이에서도 소위 ‘연예인’이 존재했다. 예쁘고 잘생기고 끼와 재능이 넘치는 사람 중에서도 단연코 시선을 끄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제게는 이번 영화 <연인>이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저는 마음에 들었는데, 모쪼록 그분도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기자들 사이에서 와아, 하는 환호성과 함께 플래시 세례가 터졌다.
짙은 회색 슈트에 머리를 포마드로 모두 넘긴 이우연의 모습은 연예인 그 자체였다. 옆에 선 다른 배우들의 존재감이 흐릿해질 정도였다.
무대 위 이우연과 눈이 마주쳤다.
<연인>이란 영화의 대본을 받고 이우연은 인섭에게 가장 먼저 대본을 보여 주었다. 신인 감독이었다. 극본도 감독의 작품이었다. 드문 경우는 아니었지만, 신인일 경우에는 위험도가 두 배나 되었다. 투자자들이 좋아하지 않는 조합이었다.
최인섭은 밤새 극본을 읽고 이우연에게 영화의 출연을 조심스럽게 권했다. 저는 마음에 드는데, 모쪼록 이우연 씨도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대본을 건네주며 인섭은 그렇게 말했다.
“시사회 때 그분도 초대하실 건가요?”
“네. 시간이 되신다면.”
이우연이 인섭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고개를 돌려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인섭은 꼼짝할 수도 없었다.
‘이 영화 망하면 인섭 씨가 책임져야 해요. 책임지고 시사회도 같이 가 주고.’
한창 촬영 중에 걸려 온 전화에서 이우연은 투정하는 투로 말했었다.
인섭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가슴에 빠듯한 통증이 전해졌다. 저렇게 빛나는 사람이 자신을 좋아해 줘서 행복하고, 믿기지 않을 만큼 좋았으며, 이 모든 일이 어느 날 눈을 뜨면 끝나 버릴까 두려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
저 멀리서 이쪽을 바라보던 강영모와 눈이 마주쳤다. 제가 가진 이 행복을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 된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창백한 피부에 피가 튄 채 웃던 이우연의 낯이 떠올랐다. 대다수의 일이 미필적 고의라고 말하던 남자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인섭은 옷자락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우연을 잃고 싶지 않았다.
“저 앞에서 좌회전하면 돼요.”
“…….”
“인섭 씨. 좌회전.”
이우연이 운전대를 툭 치자, 인섭이 화들짝 놀라서 그제야 핸들을 꺾었다. 하지만 들어갈 타이밍을 놓쳐 뒤차 운전자에게 욕설과 함께 날카로운 클랙슨 소리를 들어야 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다정하게 대답했지만 이우연은 심기가 썩 좋지는 않았다. 신호를 놓친 게 오늘만 벌써 네 번째였다. 며칠째 이런 식이었다. 눈도 마주치지 않고 뭘 물어도 듣는 둥 마는 둥 건성이다. 같이 집에 가자고 하면 일이 있다며 허둥지둥 돌아가기 일쑤였다.
혹시 어디가 아픈지, 기분이 안 좋은지, 무슨 일이 있는지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이우연은 팔짱을 낀 채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오늘은 영화 출연진들과 함께 회식이 있는 날이었다. 어차피 인섭은 운전 때문에 술을 마시지는 않겠지만, 이우연은 같이 들어가자고 권했다. 그냥 옆에 두고 싶은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돌아온 인섭의 대답은 당혹스러울 만큼 단호했다.
‘매니저인 제가 거기 있을 필요는 없을 거 같습니다.’
처음에 이우연은 잘못 들은 건가 했다. 그럼 어디 있을 거냐는 물음에 인섭은 차에서 기다리겠다고 대답했다. 이우연은 한참 동안 인섭을 바라보았다. 인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에서 내릴 기색도 없었다. 마음대로 하세요, 하고는 이우연은 차에서 내렸다.
오늘 회식 자리의 주인공은 단연코 이우연이었다. 스태프는 물론이고 배우들도 이우연을 칭찬하기에 바빴다. 어쩌면 얼굴도 잘생겼는데, 연기도 잘하고 성격까지 좋을 수 있느냐고 모두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이우연은 웃으면서 들어 주었지만 한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이우연 씨 덕분에 영화를 무사히 찍을 수 있었다고 울면서 매달리는 감독을 내버려 두고, 중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울고 있는 건 아닌가 걱정했던 인섭은 혼자 차에서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어디로 데려다 드릴까요.’
인섭이 라디오를 끄며 물었다.
이우연은 호텔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찍었다.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을 집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아, 김 대표의 지갑에서 꺼낸 카드로 호텔 스위트룸을 잡아 둔 것이다. 최인섭은 주소를 보고도 별다른 말 없이 차를 몰았다.
“몸 안 좋아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판에 박은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얼굴빛이 안 좋은 거 같은데.”
“…어제 좀 늦게 자서 그런 거 같습니다.”
“뭘 하느라 늦게 자요.”
농담처럼 말했지만 이우연의 눈에 서늘한 빛이 스쳤다. 어제 일이 있다며 일찍 집으로 돌아간 인섭이 늦게 잠을 이루었단 말이 마음에 들 리 없었다.
“가족들하고 통화를 하다 보니….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가 있어요. 통화할 수도 있지.”
“그래도 괜히 신경 쓰이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인섭이 어색하게 웃어 보인다.
묘하게 선을 긋는단 말이지.
이우연은 시트에 기댄 채,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사람의 반응을 계산하는 건 쉬웠다. 적당한 값을 넣으면 예상 범주 안의 행동이 돌아온다. 간단하고 명쾌한 공식이었다. 이 공식을 깨닫고 나서부터는 인간관계에 큰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물론 모든 관계가 피상적인 관계에 그쳤지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것이 본인이 원하던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인섭은 달랐다.
이우연은 손가락으로 차의 손잡이를 두드렸다.
처음으로 갖게 된 제대로 된 관계였다. 그게 이우연에게는 좆같이 어려웠다. 인섭이 기분이 안 좋다는 사실은 알겠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시사회가 있던 날, 이우연은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쪽지에서 보고 외운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인섭의 말 따윈 당연히 믿지 않았다. 인섭이 자신 앞에서 그 종이를 숨긴 게 이번까지 벌써 세 번째다. 두 번은 눈감아 줬으니 세 번째는 믿어 줄 필요가 없었다.
몇 번의 신호음 뒤에 ‘Hello’ 하는 나른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번호를 봤을 때 예상했지만, 그때 광고를 같이 찍었던 여자 모델인 듯했다. 시차 때문에 잠을 깨워서 미안하다고 사과하자 그녀는 웃음을 터트렸다.
‘계속 기다렸어요, 그걸 사과해 주면 좋겠는데.’
그녀가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투정했다. 지랄하고 있군. 이우연은 인섭에게 수작을 건 게 아니라는 사실만 확인하면 그만이었다. 그대로 전화를 끊으려던 차에, 여자의 웃음 섞인 한마디가 그를 자극했다.
‘그런데 그 머저리가 용케 메모를 건네줬나 보네요.’
이우연은 하, 하고 짧게 웃었다. 이거 어쩌죠, 하고 이우연이 부드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녀가 말해 봐요, 하고 은근한 기대를 드러냈다.
‘난 너 같은 것보다 그 머저리한테 발정하는 시발 새끼라서.’
여자의 대답은 듣지 않고 끊어 버렸다. 이후로 쪽지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으니, 그것 때문은 아닐 테고.
이우연은 제가 연모해 마지않는 머저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꼈을 텐데도 인섭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운전에만 집중했다. 상대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순진하리만큼 착한 그는 제 감정을 잘 숨기지 못했다.
개 때문인가.
본인은 의식하는지 모르겠지만 인섭은 길을 다닐 때마다 하얗고 커다란 개를 보면 우울한 낯을 했다. 아까도 주차장에서 커다란 개와 마주치자 인섭은 한참 동안 멍하니 개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키우던 개가 죽었을 때 인섭은 며칠을 눈이 퉁퉁 부을 만큼 울었다. 윌은 저한테는 가족이었어요, 하고 우는 인섭을 끌어안고 달랬다. 물론 실제 가족이 죽어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이우연은 이해하지 못할 감정이었다. 훌쩍이며 잠드는 인섭을 안아서 재우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지만, 그러다가 그가 미국으로 간다고 할까 봐 그게 걱정이었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공원에서 윤아름인가 뭔가 하는 여자를 우연히 만났다고 했다. 그 여자가 키우는 개에 관해 장황히 설명하던 인섭은 ‘개를 보러 가고 싶은데 혹시 가도 될까요?’ 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물론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리냐고 일축했다. 남자들이 여자 꼬실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아이템이 큰 개인 거 모르냐고 친절한 설명도 덧붙여 주었다. 그런 거 아니라고 중얼거리는 입술을 그대로 키스로 틀어막아 버렸다.
차라리 개를 한 마리 사다가 안겨 줄까.
이우연은 인섭을 힐끗 쳐다보았다.
길고양이도 그렇게 예뻐하는데 개를 사서 안겨 주면 얼마나 좋아할까. 아마도 끌어안고 놔주질 않을 게 분명하다. 그 꼴은 절대 못 보지.
“고양이한테 밥 주러 가고 싶어요?”
차라리 관심을 고양이에게 돌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집으로 들이지도 않고 가끔 밥만 챙겨 주는, 언제 죽을지 모를 생명체. 그게 이우연이 참아 줄 수 있는 한계였다. 이우연의 물음에 인섭이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고양이 걱정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아닙니다. 밤에 가서 주면 돼요.”
주소를 호텔로 찍었는데도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다니.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그럼 혹시 또 내 뒤통수칠 궁리 하는 건가.”
일부러 인섭의 가장 약한 부분을 긁었다.
“아닙니다!”
인섭이 발작할 듯 놀라서 눈을 치뜨고 대답했다. 이우연이 손을 뻗어 핸들을 돌렸다. 가드레일에 박을 뻔한 위기를 아슬아슬하게 모면했다. 인섭이 비상 깜빡이를 켜고 차를 길가에 세웠다.
“…죄송합니다.”
인섭이 희게 질린 얼굴로 사과했다.
“같이 죽고 싶은 거면 말해요. 이런 데 말고 분위기 좋은 데서 합시다. 원하면 김 대표님 호수 별장 빌려 둘 테니까.”
이우연의 말에 인섭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커다란 눈이 불안스럽게 흔들렸다. 이렇게 보니 단순히 기분이 나쁜 게 아니라, 뭔가에 겁을 집어먹은 듯했다.
차가 다시 출발했다.
그럼 뭐가 또 겁 많고 예쁜 너를 무섭게 했을까. 떠오르는 예상 답안이 너무 많아서, 이우연은 고르는 것을 포기했다.
“인섭 씨, 오늘….”
이우연이 핸들을 쥔 인섭의 손을 움켜쥐었다. 아니, 쥐려고 했다. 인섭이 바로 쳐 내지 않았으면.
“…….”
이우연은 허공에 멈춘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살짝 굳었던 그의 입매에 그린 듯한 웃음이 걸린다.
“내 거 내가 만진다는데 왜 그렇게 박하게 굴어요.”
“밖에서는….”
인섭이 핸들을 조심스럽게 돌리면서 말을 이었다.
“밖에서는 되도록 조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뭘요.”
“…만지시는 거.”
이우연은 흐음, 하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싫다면요?”
최인섭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인섭을 바라보는 이우연의 눈빛이 형형해졌다. 지금 당장이라도 한숨을 내쉬는 저 입술에 좆을 처박고 싶은 것을 참는 게 전부인데, 만지지도 말라니.
“왜 만지지도 못하게 해요?”
난 네가 해 달라는 대로 다 하고 있는데. 뒷말은 삼켜 냈다. 유치한 만큼 구차한 발언이었다. 이우연이 팔짱을 끼고 느슨하게 웃으며 인섭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가 호텔 주차장에 들어섰다. 발레파킹을 묻는 주차 요원에게 인섭은 괜찮다고 대답하며 차를 지하 주차장 방향으로 돌렸다. 이런 순간조차 적당히 요령을 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구석진 자리에 차를 주차시켜 놓고 인섭은 도착했습니다,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우연은 안전벨트를 풀지 않았다.
“말 안 해 줄 거예요?”
“뭘, 말씀입니까.”
“니가 나한테 이따위로 구는 이유.”
뭘 더 어떻게 해 줘야 할지 몰랐다. 평범한 사람처럼 잘 대해 주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아껴 주고, 해 달라는 지랄도 다 해 줬는데.
“그냥…. 조금 조심하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보는 눈도 많고요. 괜히 저 때문에…. 안 좋은 일 생기면 안 되잖아요.”
안 좋은 일이라. 이우연이 눈을 내리감은 채 인섭이 한 말을 그대로 입 속에서 굴려 본다. 그러고는 눈을 치뜨고 되물었다.
“이우연이 남자 매니저랑 그렇고 그런 사이다, 뭐 이런 거?”
“…….”
정곡을 찌른 건지 인섭은 아무런 대답도 없다. 이우연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진해졌다.
“농담처럼 했던 말이긴 한데.”
이우연이 안전벨트의 클립을 열었다. 조용한 차 안에 딸깍, 울리는 소리에 인섭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어깨를 움츠렸다.
“가끔 헷갈려. 니가 나를 좋아하는 건지, 배우 이우연을 좋아하는 건지.”
“저는….”
인섭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이우연은 차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인섭은 벨트를 풀고 이우연의 뒤를 따라갔다. 신장 차이 때문에 나중에는 거의 뛰다시피 걸어야 했다.
“제가 가서 체크인 하겠습니다.”
최인섭이 얼른 나서서 말했다. 연예인이 호텔 로비에 들락거리는 모습을 보이면 괜한 구설수에 오르기 마련이었다. 인섭의 말을 분명 들었을 텐데, 이우연은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프런트로 걸어가서 체크인을 했다.
카드를 받아 온 이우연은 인섭을 쳐다보지도 않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대로 돌아갈까 하다가 인섭은 이우연의 뒤에 섰다. 매니저의 기본 업무 중 하나가 연예인의 안전 귀가였다. 이곳이 집은 아니더라도 호텔 방까지 제대로 들어가는지 확인해야 했다.
엘리베이터에 타서도 이우연은 말이 없었다. 위로 올라가는 내내 인섭은 어색한 침묵에 입술이 바싹 말랐다.
제작 발표회가 끝나고 강영모는 인섭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서웠다. 이우연이 이상한 소문에 휩쓸리는 것도 그랬지만, 거기에 강영모가 끼어들면 일이 어떻게 될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도 이우연은 아무렇지도 않게 강영모를 벽돌로 내리쳤다. 운이 좋아서 살았지 죽을 수도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강영모가 걱정되는 게 아니었다. 이우연이 좋지 않은 선택을 할까 봐, 그게 그의 인생을 망쳐 버릴까 봐, 그게 못내 무섭고 두려웠다.
그래서 최대한 사람들 앞에서는 사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했다. 일이 끝나면 집으로 바로 돌아가고, 밖에서는 그런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게 이우연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었다.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저기….”
인섭이 입을 뗀 순간, 뗑, 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이우연이 먼저 내렸다. 인섭은 잠시 주춤하다가 그를 따라 내렸다.
어떡하지. 인섭이 고민하는 사이에 이우연이 카드 키로 호텔 방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선 이우연이 무표정한 얼굴로 인섭을 내려다보았다. 안으로 들어올지, 돌아갈지 네가 선택하라는 뜻이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누군가 두 사람이 같이 올라가는 것은 보지 않았을까, 강영모가 사람을 시켜 사진이라도 찍은 건 아닐까, 혹시 지금이라도 이상한 이야기가 SNS에 떠도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들이 엉켜 인섭은 한 발자국도 떼지 못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결국 인섭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이우연은 대답하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인섭은 눈을 껌뻑거리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우울했다. 사실, 지금이라도 이우연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다음 주부터는 영화 개봉과 드라마 준비가 맞물려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것이다. 며칠간은 마지막이라고 해도 좋을 스케줄 없는 날이었다. 이우연에게 책을 읽어 달라고 조르고 싶었고, 같이 느긋하게 영화 이야기도 나누고 싶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욕심을 부릴 상황이 아니었다. 인섭은 다시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버튼을 누르고 김 대표에게 이우연의 무사 도착을 알리는 문자를 보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이우연에게도 문자를 보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인섭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집에 가서 뜨거운 물에 샤워부터 하고, 이우연에게 뭐라고 사과할지 생각해 보자. 인섭은 닫힘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히려는 찰나, 뭔가 쑥 하고 들어왔다. 최인섭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우연이 발을 앞으로 내밀고 엘리베이터 입구에 기댄 채 서 있었다.
“혹시 잊었을까 봐 말씀드리려고요.”
이우연의 표정은 여상했다. 하지만 그 속에 숨은 날 선 진의를 본능적으로 느낀 인섭은 잔뜩 긴장하고 말았다.
“나 버리면 죽을 줄 알아.”
“네?”
“나 버리면 죽여 버린다고요.”
버리지 말아 달라는 간청인지,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인지 헷갈렸다. 인섭은 멍하니 이우연을 올려다보았다. 현실성 없을 만큼 온화한 아름다움을 가진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 했다. 이우연이 다시 발을 들이밀었다.
“알아들었어요?”
엄청난 박력에 인섭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까 인섭 씨가 한 말, 생각해 봤는데.”
무슨 말이냐고 물을 새도 없었다. 엘리베이터로 쭉 뻗어 들어온 이우연의 하얀 손이 인섭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밖에서만 안 만지면 되는 거죠?”
등 뒤로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밖에서는 싫습니다.”
평소와는 다르게 인섭은 꽤나 끈질기게 거부했다.
“여기 밖이 아니라 안인데요.”
이우연이 인섭을 끌어안은 채로 속삭였다. 인섭이 눈물이 엉킨 눈으로 이우연을 돌아보았다.
“그래도… 싫….”
이우연이 인섭의 턱을 쥐고 거칠게 입을 맞추었다. 눈앞이 시큰할 만큼 강하게 입술을 물린 인섭은 흑, 하고 울음을 삼켰다.
“한 번만 더 싫다고 해봐요.”
“누가 보면….”
“자꾸 누가 본다고 그래요. 호텔 룸에서.”
이우연은 엘리베이터 앞에서부터 인섭의 멱살을 움켜쥔 채로 스위트룸으로 끌고 들어갔다. 누가 볼까 두려워 하얗게 질린 인섭이 돌아가겠다고 했지만, 이우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밖에서 만지지 말라고 했으니 안에서 만지는 것 외에 도리가 없다는 게 이우연의 논리였다.
“아님 누가 봐 줬으면 좋겠어요?”
기겁하며 고개를 내젓는 인섭을 이우연이 창가로 데려갔다. 삼면이 유리로 된 창밖으로 한강의 야경이 보였다. 인섭이 덜덜 떨면서 이우연에게 매달렸다.
“밖에서 안 보여요.”
인섭이 이우연의 팔을 붙들었다.
“안 돼요. 여기…, 읏.”
이우연이 인섭의 목덜미를 덥석 물었다. 질근질근 깨물고 빨고를 반복하며 이우연은 셔츠 위로 솟은 인섭의 젖꼭지를 문질렀다.
“…보일 수도 있잖아요.”
특수한 유리를 사용해 호텔의 유리는 밖에서 안을 볼 수 없었다. 인섭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만에 하나라는 생각에 다리가 덜덜 떨렸다.
“안 보인다니까.”
이우연은 셔츠 자락을 들추어 인섭의 가슴을 더듬었다. 심지가 솟은 가슴을 만지작거리며 이우연이 인섭의 뺨에, 귓불에,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셔츠 사이로 보이는 어깨가 금세 발긋하게 달아오른다.
이우연은 어깨에 이를 박아 넣을 것처럼 세게 물고 살을 빨았다. 열꽃이 피듯 울혈 자국이 점점이 새겨졌다. 덜덜 떠는 인섭의 다리 사이에 제 다리를 껴 넣고 허벅지를 문질렀다.
“하지 마세요, 제발… 읏.”
이우연의 손이 바지 사이로 들어가자 인섭은 결국 이우연의 목에 매달려 울음을 터트렸다.
“괜찮아요.”
아이를 달래듯 이우연이 인섭의 등을 쓸어내리며 얼렀다. 겁이 많은 인섭은 무서운 것을 보고 나면 항상 이렇게 죽기 살기로 매달렸다. 그 모습이 좋아서 이우연은 인섭과 공포 영화 관람을 즐겼다.
“안…. …흑.”
그런 이우연이었지만 공포 영화를 볼 때보다 더 새파랗게 질린 인섭을 보고 있자니 입맛이 썼다. 귀신보다 자신과 연애를 들키는 쪽이 더 무섭다는 건가. 이우연은 식은땀으로 젖은 인섭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렇게 싫어?”
인섭이 뭐가 싫은지 뒷말을 듣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우연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이우연은 인섭을 번쩍 안아 올려 그대로 침대로 데려갔다. 인섭을 침대에 눕혀 놓고 이우연은 인섭의 허벅지에 앉았다.
“아무도 안 보게 해 줄게요.”
이우연은 넥타이 매듭에 손가락을 넣어 넥타이를 끌렀다. 그러고는 넥타이로 인섭의 눈을 가리기 시작했다.
“뭐, 뭐 하시는 겁니까.”
인섭이 눈을 가린 넥타이를 끄집어 내리려고 했지만 이우연이 인섭의 손목을 붙들었다.
“풀면 나 다시는 못 볼 줄 알아요.”
나직한 음성에 힘이 실렸다. 넥타이를 끌어 내리려던 인섭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풀어 주세요. 우연 씨, 이거.”
이우연의 협박에 차마 제 손으로는 넥타이를 건드리지도 못하고 벌벌 떨면서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기특하고 가련했다.
이우연은 한층 더 단단히 매듭을 묶었다.
“인섭 씨 소원대로 해 줬잖아요. 이러면 누가 보는지도 모르니까, 괜찮아요.”
말도 안 되는 억지 논리였다. 말투와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인섭은 그의 심기가 뒤틀려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집에…, 집으로 보내 주세요.”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인섭 씨 나랑 억지로 사귀어요?”
말해 봐요, 이우연이 인섭을 나직하게 얼렀다. 인섭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데 왜 그래요. 인섭 씨 내 거잖아.”
이우연이 인섭의 뺨을 그러쥐려 했다. 그러나 전조 없이 다가온 손길에 놀란 인섭은 저도 모르게 이우연의 손을 뿌리쳤다.
이우연이 하, 하고 짧게 끊어 웃었다. 그러고는 인섭의 손을 덥석 움켜쥔 채 낮게 몸을 숙였다.
“한 번만 더 그래 봐요.”
억누른 분노가 섞인 숨이 인섭의 귓가에 닿았다. 이우연이 인섭의 손을 제 몸에 가져다 대고 말을 이었다.
“나 정말 싫은 거면 밀어내요. 그러면 안 할 테니까.”
“저는….”
이우연은 이를 사리문 채로 인섭의 대답을 기다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최인섭에게만큼은 거부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손을 뿌리칠 때마다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이우연 씨가 싫은 게 아니라….”
“그럼 가만히 있어.”
이우연이 짓씹어 뱉듯이 한마디를 던지고 인섭의 입술을 물었다. 거친 숨소리가 범람했다. 너울에 밀려나는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져 인섭은 숨을 헐떡이면서 이우연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오늘, 나 밀어내면 네 앞에서 영영 꺼져 줄 테니까…, 하아, 그러니까 제발 가만히 있어.”
여전히 협박인지 간청인지 모를 말을 속삭이며 이우연이 인섭의 입술을 빨았다. 부드러운 혀가 탐욕스럽게 인섭의 입술을 훑었다. 인섭은 아, 하고 잘게 몸을 떨다가 황급히 이우연에게서 손을 뗐다. 그러고는 바로 시트를 움켜쥐었다. 무의식중에라도 이우연을 밀어낼까 봐 손을 내려 버린 것이다.
이우연은 그런 인섭의 손을 가져와 제 입에 넣었다. 손가락을 차례대로 하나씩 빨아 주며 손톱을 살짝 이로 질겅였다. 마치 육식 동물이 제 새끼의 행동을 가상히 여기듯이, 그는 인섭의 손에 빠짐없이 입을 맞추었다.
“옷 벗어요.”
이우연이 인섭의 손을 셔츠에 내리게 했다. 인섭은 그가 시키는 대로 제 셔츠 단추를 풀려 했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 데다 손까지 떨고 있으니 단추를 하나 푸는 것도 시간이 걸렸다. 그때 툭, 하고 단추가 풀렸다. 이우연이 아무런 말도 없이 인섭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인섭은 흠칫 몸을 떨었다. 시야가 가려지자 몸의 감각이 극대화되었다.
“왜 이렇게 떨어요.”
이우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보다 더 낮고 정중한 울림을 갖고 다가왔다.
“내가 인섭 씨 강간하는 것도 아니고.”
“제, 제가 벗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다 벗을 건데.”
벨트의 버클이 달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인섭은 갑자기 얼마 전 교양 수업에서 들었던 수업 내용을 떠올렸다. 옷은 신체의 물리적인 보호뿐만 아니라 심리적 방어에도 큰 몫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포로를 다룰 때 가장 먼저 옷을 모두 벗겨 버린다고 했다. 타인 앞에서 전라가 되는 것은, 저항할 의지조차 없이 제 나약함을 모두 드러내는 일이었다. 점점 몸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읏….”
아랫도리가 서늘한 공기에 노출되는 느낌에 인섭은 허리를 옆으로 틀었다. 머리맡에서 이우연이 짧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양말은 왜 저렇게 짝짝이로 신고 왔어요.”
귀엽게.
들릴 듯 말 듯 한 마지막 말은 숨을 삼키는 소리와 함께 흩어졌다. 속옷이 무릎 아래로 끌려 내려갔다. 도망가고 싶었지만 숨을 곳도 마땅치 않았다. 눈을 가리고 있어 숨을 방법도 알지 못했다. 손에 잡히는 대로 몸을 가려 보려고 했지만 이우연이 그러게 놔두질 않았다.
“가만히 있어요.”
아찔할 만큼 위협적이고 달큼한 목소리였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무서웠다. 눈을 가리고 있는데도 인섭은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옹송그렸다.
“다리 벌려요.”
“네?”
“다 보고 싶으니까, 다리 벌려 주세요.”
이우연이 인섭의 무릎을 움켜쥐었다. 그의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열기에 인섭의 몸이 확 더워졌다. 뭐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인데 다리까지 벌려 달라니, 부끄러움에 눈앞이 화끈거렸다.
이우연이 이번엔 인섭의 무릎에 입을 맞추었다. 구애를 하는 듯한 입맞춤에 인섭의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었다.
“인섭 씨 몸 보고 싶어서 그래요.”
누구도 듣지 않는데 이우연은 나직하게 속살거렸다. 이우연이 인섭의 무릎에 몇 번 더 입을 맞추었다. 인섭은 그가 시키는 대로 천천히 다리를 벌렸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다. 눈을 가리고 있어서 수치심이 배가 되었다. 부끄러움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나직한 탄식이 들려왔다. 보이지 않아도 남자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다리를 오므리고 싶었지만 이우연이 무릎을 붙든 채로 놓아주질 않았다.
“이, 이제… 됐습니까?”
인섭은 용기를 그러모아 물었다.
“예뻐요, 인섭 씨.”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마치 뭐에 홀린 사람처럼 이우연은 한숨을 섞어 중얼거렸다.
“너무 예뻐요.”
이우연의 손이 허벅지 안쪽으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예술품을 대하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그가 어떤 식으로 어디서부터 만져 올지 몰라 인섭은 이우연의 손이 닿을 때마다 흠칫흠칫 몸을 떨었다.
그는 손등으로 천천히 허벅지를 쓸어내렸다. 그러다 문득 손이 아닌 다른 온기가 느껴졌다. 호흡이 닿았다. 인섭은 그제야 이우연이 제 허벅지에 얼굴을 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의 시선이 고스란히 어디에 닿을지 상상이 되자 더 이상 자세를 유지할 수 없었다.
“안 돼.”
인섭의 다리에 힘이 들어간 것을 느꼈는지 이우연이 단호하게 제지했다. 허벅지에 제 뺨을 대고 비비며 이우연이 속삭였다.
“계속 보고 싶어요. 하루 종일이라도 볼 수 있을 거 같아.”
“그, 그러지 마세요.”
이우연이 인섭의 허벅지를 살짝 물었다가 놓는다. 장난스러운 듯한 입질이 조금씩 열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우연이 살을 한입 물어 입에 넣고 혀로 굴리자 인섭이 흣, 하고 허리를 틀었다. 아래가 움찔거리며 점점 피가 몰리기 시작한 살덩이가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젠장.”
인섭의 허벅지를 쥔 이우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최인섭은 혹시 또 제가 이우연의 심기를 거스른 것은 아닌가 싶어 덜컥 겁이 났다.
“나 미치게 하려고 작정한 거예요?”
“네?”
“자지든 보지든, 이렇게까지 예쁠 필요는 없잖아. 둘 다, 시발, 사람 환장하게 생겨 가지고.”
“읏….”
인섭은 놀라서 몸을 퍼뜩 올렸다. 갑작스럽게 뜨겁고 습한 점막에 아래가 삼켜졌다. 인섭의 아랫도리에 얼굴을 묻은 이우연이 게걸스럽게 살덩이를 빨아 댔다.
“하아, 잠… 깐.”
인섭이 울먹이면서 이우연의 머리를 밀어내려다가 섬뜩한 공기를 느끼고 다시 손을 아래로 내렸다.
이우연의 입가에 미소가 비죽 머금어졌다.
살면서 이우연은 한 번도 선량한 것에 대한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선함의 기준도 없었다. 그저 이득이 되거나 되지 않거나 정도였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마음 씀씀이 따위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이건 왜 이렇게까지 사랑스러운 걸까. 인섭의 몸짓 하나, 표정, 말 한마디에 기분이 무서울 만큼 오르내렸다.
이우연이 인섭의 성기를 다시 입에 머금었다. 부드럽게 몇 번 빨아 주자 금세 살덩이에 피가 몰려 붉게 달아올랐다.
“더워요?”
이우연의 물음에 인섭이 네? 하고 되물었다.
“여기 빨개져서.”
이우연이 인섭의 성기를 손등으로 툭 쳤다. 흥분하면 피가 몰리고 색이 붉어지는 건 당연했다. 성인이면 누구나 아는 상식이었다.
“그건, 저기….”
인섭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가장 무난한 대답을 찾고 있는데, 이우연의 손이 이마에 스윽 닿는다.
“땀도 흘리고.”
식은땀이었다. 눈은 가려지고 전라로 남자 앞에서 다리를 활짝 벌린 채, 아래를 빨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식은땀이 흐르는 건 당연했다.
“네, 조금….”
호텔의 냉방 때문에 오히려 조금 추운 기분이었지만 그렇게 대답했다. 이우연이 눈을 가린 끈을 풀어 주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의 발로였다.
“그렇군요.”
이우연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끈을 풀어 줄 거란 예상과는 달리 그는 뭔가를 가지고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뭐 갖고 오신 겁니까?”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보이지 않으니 호기심은 곧 두려움으로 이어졌다.
“얼음이요.”
“네? 그걸 왜…. 앗.”
섬뜩한 냉기가 아래에 닿자 인섭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기분 좋게 해 줄게요, 덥지도 않고.”
얼음을 입에 문 채로 이우연이 말했다.
“아, 싫어…. 차가워요. …우연 씨.”
놀랐는지 인섭의 성기가 쪼그라들었다. 그것조차 귀여웠다. 이우연은 얼음을 입에 머금고 오럴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생경한 감각에 무섭다고 훌쩍이던 인섭의 호흡이 어느새 가쁘게 흩어지고 있었다.
“흐읏…. 하아….”
성기도, 그 아래에 보이는 음낭도 귀엽기 짝이 없었다. 이우연은 인섭의 음낭을 입 속에 넣고 부드럽게 애무했다. 남자의 몸에서 가장 약한 부분이었다. 그걸 상대에게 내어 주고 무방비하게 바들바들 떨고 있는 인섭의 가련한 모습이 이우연의 욕구에 불을 지폈다.
“불알 핥아 주니까 어때요?”
이우연이 얼굴을 들고 물었다. 인섭은 뺨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소심하고 겁도 많고 부끄러움도 많은 사람이었다. 아직까지 입을 맞출 때, 항상 두 눈을 꼭 감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 사람이 짓궂은 질문에도 떨리는 목소리로 좋습니다, 라는 성실한 답을 기어코 내놓는 것이다.
그다음부터는 말이 필요 없었다. 이우연은 인섭의 아래를 범하듯 물고 빨았다. 폭풍처럼 밀어닥치는 감각에 인섭은 가쁜 신음을 내뱉었다.
“하아, 읏…, 아, 천천히…. 하앗.”
어느새 다 녹아 버린 얼음 때문에 인섭의 성기에서 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힘을 주어 빨아 올릴 때마다 인섭의 발끝이 오므라들었다가 펴졌다. 이우연은 인섭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그대로 발목을 부러트려 평생 제 옆에 앉혀 놓고 싶다는 폭력적인 욕구가 치솟았다. 빨리는 건 최인섭인데, 제가 좋아서 미칠 것 같았다.
“하아, 나, 잠깐…. 우연 씨…. 갈 것 같….”
인섭이 차마 이우연을 밀어내지는 못하고 허리를 뒤로 빼면서 말했다.
“싸요.”
이우연이 흥분으로 쩔쩔매는 인섭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대신 조심해서 싸요. 옷 협찬 받은 거니까.”
그 한마디에 인섭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한껏 일그러진다. 이우연은 일부러 더 강하게 빨아 올렸다. 인섭이 허리를 뒤틀 때마다 이우연은 끈덕지게 따라붙어 성기를 입 속으로 당겨 혀를 움직였다.
“우연 씨, 잠깐만, 나, 안….”
최인섭이 사정했다. 이우연은 끝까지 입을 떼지 않았다. 입 속에서 퍼들퍼들 경련하는 그 감각을 집요하게 음미했다. 한껏 치솟아 오른 인섭의 허리가 아래로 축 늘어졌다. 이우연의 턱 아래로 정액이 흘러내렸다. 결국에 인섭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실수를 한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죄송해요…. 참으려고 했는데…흑.”
눈을 가린 넥타이 사이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제가, 드라이 맡기겠습니다. 안 되면 옷값 물어 드릴게요….”
“비싼 건데.”
이우연이 재킷을 벗으며 말했다. 그는 셔츠의 단추를 끄르면서 우는 인섭을 지켜보았다.
“죄송합니다….”
인섭이 훌쩍거리면서 사과했다. 웃음이 났다. 놀리는 대로 항상 속아 넘어가는 인섭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예뻐서.
“인섭 씨.”
“네.”
훌쩍이는 와중에도 인섭은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 이우연은 인섭의 손을 잡아 제 목을 감게 했다.
“그럼 옷값만큼, 나 예뻐해 주면 되겠네.”
대체 어떤 방식으로 예뻐해 줘야 하느냐는 질문은 필요 없었다. 이우연이 인섭에게 입을 맞추며 몸을 밀착했다. 인섭의 손을 가져와 제 바지와 속옷을 벗기게 했다. 인섭의 허벅지에 샅을 바짝 대고 비비며 이우연은 인섭의 귀를 질근질근 깨물었다. 단단한 살덩이가 엉덩이에 닿을 때마다 인섭이 숨을 들이켰다.
“안 해요. 만지기만 할 테니까.”
파렴치하기로 둘째가면 서러운 그였지만, 그 나름대로의 선을 지키려 노력했다. 이우연은 인섭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의 더운 호흡이 인섭의 어깨 언저리에 닿았다. 남자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보지 않아도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딱딱하게 일어선 성기가 인섭의 엉덩이를 스치고 지나 음낭까지 닿았다. 그가 허리를 추어올리면 인섭의 허벅지 사이로 성기가 드나들었다. 이우연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허벅지를 스치던 성기가 어느새 엉덩이 사이로 방향을 바꾸었다. 치댈 때마다 비죽이 벌어지는 틈으로 그는 집요하게 성기 끝을 문질렀다.
“인섭 씨, 하아…. 인섭 씨….”
탁하게 흐려진 음성이 열에 들떠 인섭의 이름을 연신 불렀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인섭은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이우연이 저를 불러 줄 때마다 발끝이 근질거리고, 가슴이 아프기도 하고, 목 안쪽이 답답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러면 안 된다고 머릿속으로 생각하면서도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싶었다.
인섭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말도 없었다. 하지만 그 작은 몸짓에 이우연은 곧바로 함락되었다. 그는 인섭의 한쪽 다리를 붙들어 올린 다음 힘주어 삽입했다.
“아….”
갑작스러운 삽입으로 힘들 텐데도, 인섭은 시트를 그러쥔 채로 참았다. 이우연은 숨을 골랐다. 반도 들어가지 못했는데 성기가 터질 듯이 흥분했다. 가늘고 힘없는 몸이 잔뜩 굳은 채로 자신을 받아들이려고 헐떡이는 모습에 미칠 듯한 갈증을 느꼈다. 절절 끓어오른 피가 심장을 돌아 머리까지 솟구쳐 올랐다. 이우연은 그대로 인섭의 안에 저를 때려 박았다.
“앗!”
뜨거운 구멍이 제 것을 오롯이 품은 그 느낌에, 이우연은 숨이 턱 막혔다. 온전하게 최인섭에게 속한 기분이었다. 끝내주게 좋았다.
“인섭 씨…, 하아, 인섭 씨….”
땀에 젖은 살갗이 마찰하며 열기를 더해갔다.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눈을 흐리게 뜨고 이우연은 미친 듯이 허리를 쳐올렸다. 엄청난 힘을 받은 침대의 매트리스가 삐걱거리며 흔들렸다.
“너무 좋아요, 인섭 씨, …하아, 흐.”
정신없는 마찰에 인섭의 눈에 둘러진 넥타이가 흘러내렸다. 갑작스럽게 밝아진 시야에 인섭은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치떴다. 이우연이 보였다. 열중한 눈이었다. 사랑에 빠진 남자의 얼굴이었다. 언제부터 저런 눈을 하고 있었던 걸까. 가슴이 지끈, 조였다.
눈이 마주쳤다.
“제, 제가 푼 거 아니에요. 이게….”
혹시라도 이우연이 오해해 제 앞에서 사라져 버린다고 할까 두려워, 인섭은 허둥거리며 넥타이를 도로 끌어다가 제 눈을 가렸다. 이우연이 넥타이를 잡아채서 바닥에 팽개쳤다. 놀란 인섭의 입술을 물고 비비며, 정신없이 키스했다. 이우연은 뒤에서 인섭을 옴짝달싹 못 하도록 바싹 끌어안았다. 틈 없이 끌어안은 몸을 쳐올리면서, 이우연은 잇새로 짓씹듯이 중얼거렸다.
“누가, 그따위로, 귀여우래. …어?”
인섭의 아래가 처덕처덕 짓쳐지고 쑤셔졌다. 몸이 반으로 갈리는 듯한 삽입감에 인섭이 입술을 벌리고 숨을 들이켰다. 이우연의 성기가 안을 밀고 들어올 때마다 온몸의 감각이 바짝 곤두섰다. 이우연이 땀에 젖은 인섭의 가느다란 목덜미를 한껏 물었다. 남자의 큼직한 손바닥에 갇힌 성기가 마찰당했다. 앞뒤로 범해지는 기분이었다. 한계를 벗어난 감각에 사지가 저릿저릿했다. 무서웠다. 인섭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하, 아…, 흐윽.”
인섭의 울음소리를 들었음에도 이우연은 멈추지 못했다. 미쳐 날뛰는 짐승처럼 달려들어 아랫도리를 치받았다. 퍽퍽, 쑤실 때마다 인섭의 울음소리가 커졌다. 달래 줘야 했다. 괜찮다고, 아프지 않게 하겠다고, 그러니까 울지 말라고 해야 하는데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몸이 제어를 벗어난 느낌이었다.
커다란 눈과 마주쳤다. 눈물이 고이기 무섭게 또르르 흘러내렸다. 그 눈에 담기는 전부가 자신이라는 것을 확인했을 때, 폭력적인 쾌감이 아랫배를 두드렸다. 이우연의 턱을 타고 흘러내린 땀이 인섭의 뺨에 닿았다.
“좋아해요….”
인섭의 조그만 입술 사이로 울음에 뭉개진 고백이 흘러나왔다. 벌겋게 달아오른 칼이 심장에 박혔다. 이우연의 눈에 가공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감정이 요동쳤다.
이우연은 짐승처럼 신음하며 인섭을 제 품에 가득 끌어안았다. 그의 단단한 허벅지가 침대를 딛고 한껏 당겨졌다. 그 순간, 인섭의 안으로 뜨끈한 정액이 밀려들어 왔다. 이우연의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흐으, 하는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의 다리가 몇 번이나 더 힘을 주어 근육을 당겼다. 탄탄하게 올라붙은 엉덩이가 위로 솟으며 인섭의 안에 남은 정액을 마저 사출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두 쥐어짜듯 사정한 뒤에야 남자는 팔에 준 힘을 품었다.
“하아…. 하아….”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인섭은 쓰러지듯 천장을 보고 누워 숨을 골랐다. 그의 가슴이 오르내리는 것을 보던 이우연이 괜찮아요? 하고 물었다.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이는 인섭을 보고 나서야 이우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한참 동안 숨을 헐떡거리던 인섭은 그제야 바닥에 엉망이 되어 떨어진 재킷을 보고 눈가를 찌푸렸다.
“저거 어떻게 하지….”
인섭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우연에게 협찬이 들어오는 옷은 하나 같이 값비싼 브랜드였다. 협찬을 하지 않기로 유명한 브랜드도 이우연에게는 옷을 입히지 못해 안달을 냈다. 오늘 입은 재킷도 분명히…. 고민하는 인섭의 뺨을 이우연의 덥석 물어 버린 것도 그와 동시였다.
“아!”
인섭이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내 걱정을 해야지, 왜 옷 걱정을 해요.”
“네? 어, 어디 다치셨어요?”
방금까지 저를 죽일 듯한 기세로 밀어붙이던 남자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인섭을 보며, 이우연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한참을 그렇게 웃어 대던 이우연이 여기요, 하면서 제 관자놀이를 가리켰다.
“나 인섭 씨 때문에 진짜 미치면 어떡하지. 정신 병원에 갇히는 거 이제 지겨운데.”
“그,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이우연이 인섭의 두 손을 모아서 소중하다는 듯이 입을 맞추었다.
“그러니까, 나 화나게 하지 마요.”
“…….”
“정신 병원이든 감옥이든, 나도 갇히고 싶지 않으니까.”
“알겠습니다.”
“나도 조심할게요. 밖에서 안 만지고. …또 어떻게 해 줘야 해?”
이우연이 조르듯이 묻는다. 인섭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이우연을 끌어안았다. 순순히 제게 안기는 남자가 사랑스러웠다. 이우연이 인섭의 입술을 짧게 물었다가 놓는다. 몇 번 그렇게 반복하고 나자, 어느새 서로의 사지가 뒤엉켰다.
혹시 누군가 호텔 밖에서 지키고 서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인섭은 이우연을 밀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온몸으로 부딪쳐 오는 남자의 열락에 이성은 그대로 함락당하고 말았다. 달큼한 열기에 공기가 달아올랐다. 아이스 버킷에 담긴 얼음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녹아들었다.
“뭐 하고 있어요.”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최인섭은 화들짝 놀라서 보고 있던 핸드폰을 베개 아래에 감췄다. 이우연이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털어 내며 그래요? 하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인섭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안도는 그리 길게 가지 못했다. 이우연이 제 몸으로 인섭을 누르듯이 덮쳐 버린 것이다.
“……!”
이우연이 손을 뻗어 베개 아래에 있던 핸드폰을 꺼냈다.
“야한 거 보고 있었어요?”
“돌려주세요.”
미소를 한껏 머금은 이우연은 버둥거리는 인섭을 누르며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인섭도 엄연히 욕구가 있는 남자였다. 혼자 있을 때 야한 사진이나 영상 같은 걸 찾아볼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다. 물론 애인을 두고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한 죄는 단단히 물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건.
“하하하하.”
이우연은 웃음을 터트렸다. 인섭은 어머니한테 야동을 들킨 소년보다 더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왜 본인을 앞에 놔두고 이런 짓을 해요. 뭐가 궁금한데.”
검색창에 이우연의 이름을 검색 중이던 인섭은 얼른 핸드폰을 빼앗아 화면을 껐다.
“설마 매일 검색해요?”
“…가끔 봅니다.”
“가끔 몇 번.”
이우연이 일부러 몸으로 인섭을 누르며 물었다. 옷을 입혀 놓으면 언뜻 슬림해 보이는 체격이었지만 단단하게 근육으로 조여진 이우연의 몸무게는 상당했다. 인섭은 숨을 헐떡이면서 힘들어요, 하고 이우연의 팔을 붙들었다.
“가끔 몇 번 보는데요.”
이우연이 끈질기게 물었다. 그의 눈빛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이럴 때는 어지간해서 물러서는 법이 없음을 인섭은 그간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하루에 한 번이요.”
인섭은 거짓말을 했다. 요 며칠 신경이 쓰여 틈만 나면 이우연의 이름을 검색했다. 자다가도 혹시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오늘 새벽에도 검색을 하다가 자다 깬 이우연에게 들켜 대체 뭘 하는 거냐는 질문을 받았다. 당신 이름을 검색하고 있다는 말은 도저히 할 수 없어서 인섭은 동생들과 메시지를 주고받는 중이라고 둘러댔다. 처음으로 가족이 미국에 살고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흐음.”
이우연이 인섭의 팔 아래로 제 팔을 껴서 답삭 끌어안으며 말을 이었다.
“검색하면 뭐가 나와요?”
연예인 중에 포털 사이트에 제 이름 한번 안 쳐 본 놈은 이우연밖에 없을 거라던 김 대표의 말이 떠올랐다. 이우연은 타인의 말에 관심이 없었다. 연예인으로서 축복받은 성격이지만 주변에게는 아주 똥 같은 성격이라고 김 대표는 투덜대곤 했다.
“기사나 사진,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 그런 것들이 뜹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별다른 말은 돌지 않았다. 포털 사이트는 물론이고 가입해 있던 팬 카페의 게시물도 확인해 보았지만 이우연과 채연서의 열애에 관한 이야기만 가득했다. 강영모가 했던 말이 그가 평소 버릇처럼 내뱉는 폭언에서 끝나길, 인섭은 빌고 또 빌었다.
“그런 게 뭐가 중요해요. 실물을 앞에 두고.”
“매니저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아….”
이우연의 손가락이 인섭의 가슴 부근을 어루만졌다. 어제 밤새도록 빨고 깨물고 핥아 예민해진 유두가 금세 힘을 받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있던가요.”
“없었, 읏….”
인섭이 아랫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이우연은 발갛게 도드라진 돌기를 손가락 끝으로 슬슬 문질렀다.
“저 회사에 메일 보내야 합니다.”
“보내세요.”
이우연이 흔쾌히 대답했다. 여전히 인섭의 가슴을 만지작거리며.
“누구한테 보내요?”
“조 대리님이요. 다음 주 스케줄 확인하려고요. 원래 직접 가서 받아야 하는데….”
마지막 말에는 언뜻 작은 원망이 서려 있었다.
폭풍 같은 섹스를 하고 난 다음 날, 인섭은 제 옷이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옷이 어디 갔느냐고 묻자 이우연은 당연히 불태웠죠, 하고 산뜻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중에 듣기로는 호텔에 세탁을 맡겼다는데 좀처럼 그는 옷을 돌려주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인섭은 호텔에 있는 내도록 배스 가운만 입고 있어야 했다.
“제 옷은 언제 오나요?”
인섭은 이우연이 더는 만지지 못하게 시트로 몸을 가리며 물었다.
“글쎄. 세탁물이 많이 밀렸나 보죠.”
보통 호텔 세탁 서비스는 다음 날이면 세탁물을 가져다주는 게 기본이었다. 전용 버틀러까지 있는 스위트룸의 세탁물을 지금까지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이우연은 시트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인섭의 어깨를 문지르며 얼른 써요, 하고 재촉했다. 인섭은 하는 수 없이 메일 창을 열어 손가락을 움직이지 시작했다.
인섭이 ‘안녕하세요, 최인섭입니다’까지 쳤을 때 이우연이 발끝에 힘을 주어 몸을 슬쩍 추어올렸다. 단단히 솟아오른 성기가 엉덩이 사이에 닿자 인섭이 흠칫하며 몸을 떨었다.
“안 해요.”
“…….”
“그냥 문지르는 거니까, 일일이 겁먹지 말아요.”
일일이 겁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비기만 할 겁니다, 잠깐 넣었다 빼기만 할게요, 입에 넣고 잠시 맛만 보는 겁니다, 등등. 비슷한 유의 말을 듣고 나서 벌어진 일들을 생각해 보면.
“오늘은 집에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모레부터 스케줄 시작이기도 하고….”
인섭이 조심스럽게 몸을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다음 주에 개봉되는 영화 때문에 스케줄이 줄줄이 잡혀 있었다. 황금 같은 연휴를 이렇게 보내도 되는 거냐고 인섭은 울상이 되어 물었지만 이우연은 이렇게 보내니 만족스럽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스케줄 받아 둬야죠. 메일 안 써요?”
이우연이 은근히 허리 짓을 하며 물었다. 인섭은 핸드폰을 침대 옆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본격적으로 해 달라는 거예요?”
“아닙니다. 오늘은….”
이우연이 인섭의 입술을 부드럽게 머금었다가 놓는다.
“오늘은, 뭐.”
“집에 갈….”
이번에도 끝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쪽쪽. 몇 번 더 입을 맞추었지만 인섭은 입술이 떨어지는 와중에도 계속 집에 가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이우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며칠 내내 호텔에 감금시켜서 살살 달래 보기도 하고, 윽박지르기도 하고, 은근슬쩍 떠보기도 했지만 인섭은 집에 가겠다는 타령을 멈추지 않았다. 원래도 겁이 많긴 했지만 이번에는 유독 심했다.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흡사 빚쟁이에게 쫓기는 사람 같았다.
대체 뭐가 그렇게 불안해서.
이우연은 인섭의 머리카락을 움켜쥐듯 깊게 손을 찔러 넣고 입을 맞추었다. 아예 입도 뻥긋하지 못하게 만들어 줄 심산이었다. 인섭이 키스를 멈추려는지 이우연의 팔을 붙들고 힘을 주었지만 너무나 하찮아서 오히려 흥을 돋울 뿐이었다.
시발, 그러게 누가 그렇게 귀여우래.
이우연은 인섭의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고 흠뻑 젖은 입 안을 핥았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해 억울한 듯 눈썹을 치켜 올린 얼빠진 표정마저 예뻐 미칠 지경이었다.
“하아….”
숨이 모자란지 인섭의 가슴이 가쁘게 오르내렸다. 가슴 부근에 길게 남은 흉터 자국이 도드라져 보였다. 이우연은 고개를 숙여 인섭의 수술 흉터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 배 부근에 멈추었다. 칼에 찔렸던 흉터다.
“제, 제가 흉터가 잘 안 없어지는 체질이라 그래요. 이미 다 나은 겁니다.”
인섭이 얼른 시트를 가져와 몸에 둘렀다. 이우연은 섹스를 하다가도 인섭의 배에 남은 흉터를 보면 표정이 굳었다. 그래서 인섭은 어떻게든 흉터를 가리려고 노력했지만 이우연은 매번 흉터를 확인하려 들었다.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이젠 하나둘쯤 더 생겨도 티도 안 날 겁니다.”
인섭이 애써 밝게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이우연은 따라 웃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풀이 죽어 사과하는 인섭의 뺨을 이우연이 장난스럽게 깨물었다가 놓는다. 그게 그 나름의 위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인섭은 주저주저하다가 이우연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우연이 웃음을 삼켰다.
이래 놓고 집에 보내 달라는 소리를 하다니.
“파렴치한 게 누군지 모르겠군요.”
“네?”
“입 벌려요. 키스하게.”
입술이 맞물렸다. 피가 몰려 발갛게 달아오른 인섭의 입술을 빨며 사람의 살이 이토록 달큼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찰을 할 무렵 이우연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
“입 벌리라고 했죠.”
이우연이 인섭의 양다리를 벌리고 그 위에 올라탔다. 다시 입을 맞추려고 허리를 굽힌 순간.
“…….”
벨 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는 인섭의 핸드폰이었다. 정확히 같은 상황을 얼마 전에도 겪은 두 사람은 전화를 거는 상대가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무시해요.”
“대표님인 거 같은데요.”
“그러니까 무시해야지.”
인섭은 불안한 듯 핸드폰이 놓인 테이블을 흘깃 쳐다보았다. 이우연이 인섭의 뺨에 쪽쪽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인섭은 끊임없이 울리는 핸드폰을 힐긋거리기 바빴다. 인섭의 벨 소리가 멈추면 이우연이 것이 울렸고, 그쪽이 멈추면 다시 인섭의 핸드폰으로 벨 소리가 옮겨 갔다. 인섭은 나중에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시발, 진짜.”
이우연이 짜증 섞인 욕설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아직도 벨이 울리고 있는 인섭의 핸드폰을 낚아채어 받았다.
“왜요.”
<왜 네가 받아.>
김 대표가 떨떠름한 투로 대답했다.
“저 받으라고 전화 거신 거 아니었어요? 아니면 끊을게요.”
<끊지 마!>
김 대표가 다급하게 외쳤다.
“무슨 일인데요. 저번처럼 쓸데없는 일로 전화 거신 건 아니라고 믿어요.”
인섭이 겁에 질린 얼굴로 침대에서 주춤주춤 몸을 일으켰다. 이우연은 눈가를 좁혔다. 김 대표에게 전화가 온 것만으로 저렇게까지 겁을 먹을 필요가 있나.
<지금 어디야.>
“어디긴요. 문자 안 갔어요?”
<…거기냐?>
김 대표의 카드로 결제한 호텔이었다.
“그거 확인하시려고 전화하셨어요?”
<아니, 그게 아니고. 너 지금 사무실로 나와라. 급한 일이야.>
“오늘 휴일인데요.”
이우연이 파랗게 질려 저를 올려다보는 인섭을 도로 앉혀 놓고 침대에서 멀찌감치 떨어졌다.
<인섭이랑 관련된 일이니까 얼른 와. 아 참, 내 차 돌려 놔. 이 페라리 학대범아.>
이우연은 힐끔 인섭을 쳐다보았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 주인 침대에 실수를 한 강아지처럼 처량했다.
“알겠어요.”
이우연이 전화를 끊었다.
“뭐라고 하세요?”
“차 갖고 오라는데요. 차 쓰겠다고.”
“그리고요?”
“그거뿐이었어요.”
이우연이 웃으며 대답하고는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옷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다른 말씀은 없으셨어요?”
“네. 듣고 싶은 말씀이라도 있어요?”
이우연의 물음에 인섭은 아닙니다, 하고 어물어물 시선을 내렸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났는지 퍼뜩 고개를 든다.
“지금 둘이 같이 있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이우연은 김 대표를 엿 먹일 심산으로 그의 카드로 호텔비를 긁었다. 연휴에 호텔 스위트룸에서 자신이 누구와 있을지 김 대표가 모를 리 없다.
“오늘 인섭 씨랑 영화 본다고 미리 얘기해 뒀어요.”
“다행이네요.”
이우연의 말에 인섭은 안도한 듯 어깨를 늘어트렸다. 열 살짜리 아이도 한 번은 의심할 거짓말에 잘도 속아 넘어간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까지 사람이 순진할 수 있는 걸까. 이우연은 인섭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예뻐서요.”
“…놀리지 마세요.”
인섭의 얼굴이 금세 붉어진다. 이우연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손톱만큼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지금도 인섭을 그대로 침대에 엎드리게 해서 개처럼 붙어먹고 싶을 정도였다.
“놀리는 거 아니에요. 내가 인섭 씨를 얼마나….”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만요.”
이우연이 세탁물을 받으러 간 사이 인섭은 혹시 눈에 띌까 봐 시트를 몸에 둘둘 두르고 구석에 숨어 있었다. 세탁물을 받아 온 이우연은 소파 뒤에 숨어 있는 인섭을 발견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몇 번 말씀드렸지만 절대 안 보여요. 걱정 마세요.”
백 평이 넘는 스위트룸이었다. 출입문으로 가려면 거실과 복도를 가로질러야만 했다.
“…혹시 모르잖아요.”
인섭이 고개를 빠끔 내밀며 대답했다.
“보이면 또 어때.”
이우연은 반듯하게 포장된 비닐을 뜯어내고 셔츠를 꺼내 입었다. 인섭이 다가와서 테이블을 둘러보다가 물었다.
“제 건요?”
“그러게요. 아직 세탁이 안 끝났나.”
이우연이 셔츠 단추를 잠그며 뻔뻔스럽게 대답했다. 옷을 모두 갖춰 입은 그는 속옷 한 장 돌려받지 못한 연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금방 올 테니 어디 가지 말고 얌전히 있어요. 내가 당신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갔다 와서 말해 줄 테니까.”
인섭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 금방 왔네.”
김 대표가 놀랐다는 듯이 말했다. 제가 불러 놓고 이렇게 순순히 올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갈까요?”
이우연이 선글라스를 벗어 테이블에 던져 놓고 소파에 앉았다.
“아니. 잘 왔어. 안 왔으면 내가 호텔로 찾아가려던 참이었다.”
“징그럽게 왜 남의 호텔 방에 들어와요. 이상한 소문나서 남의 혼삿길 막히면 어쩌시려고요.”
“혼사 생각이나 있으시고?”
“저는 많죠.”
의미심장한 한마디에 김 대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너 이것 좀 봐라.”
김 대표가 핸드폰을 꺼내 이우연에게 내민다.
“뭔데요.”
이우연은 대충 화면을 휙휙 내렸다. 화려한 옷차림의 여자 사진으로 도배된 SNS 계정이었다.
“지금 이거 보라고 저 여기에 부르신 건 아니죠?”
“내용을 보라고, 내용을.”
김 대표가 계정에 게재된 영문을 이우연 앞에 들이밀었다.
“이번 촬영은 끔찍한 경험이었다. 그는 시종일관 무례했고 나에 대한 존중을 보여 주지 않았다. 흠, 더 해석해 드려요?”
“누가 해석해 달래? 내용 보고도 무슨 일인지 몰라?”
이우연이 그제야 계정의 주인을 확인했다. 나이마 켐프만. 얼마 전에 시계 광고 촬영을 했던 모델이었다.
“이거 너잖아, 너. 그날 광고 현장 사진 떡하니 올려놓고 이런 저격 글 올려놓으면 바보 천지가 아니고서야 너인 거 왜 모르겠어.”
이우연이 빙긋 웃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아무 짓 안 해서 저러는 거예요.”
김 대표가 미심쩍다는 얼굴로 이우연을 노려보았다. 이우연이 테이블에 놓인 생수 통을 집어 들었다.
“제가 요 근래 여자 문제 만든 적 있나요?”
“…….”
없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생활을 영위 중이었다. 사실 김 대표조차 이우연이 이토록 오랫동안 평범한 연애를 이어 갈 줄 예상하지 못했다.
“저 이래 봬도 엄청 순정적인 연애 중인데.”
“순정 좋아하시네. 너 같은 놈이 무슨.”
“저 같은 놈이 뭔데요.”
이우연이 생수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나쁜 놈.”
천하의개썅미친놈, 이라고 대답하려다가 최대한 순화된 단어로 표현했다.
“나쁜 놈한테도 보기 드문 순정이 있는 거죠.”
“보기 드문 순정을 가진 나쁜 놈아. 그래서 이거 어쩔 거냐고. 벌써 애들이 벌써부터 너 아니냐고 떠들어 대고 있어.”
“떠들라고 해요.”
“대체 뭔 일이 있었는데. 알아야 기사 나면 대응을 할 거 아니야.”
“만나자길래 깠어요.”
이우연이 간단하게 요약해 주었다.
“…물론 예쁘고 정중한 말로 깠지?”
“아뇨.”
이우연이 눈가를 접어 웃으며 대꾸했다. 김 대표가 참지 못하고 분노를 터트렸다.
“이 바닥 하루 이틀이야? 아무리 외국인이라고 해도 보는 눈이 있고, 듣는 귀가 있는데!”
“걱정 마세요. 듣는 사람 없었으니까.”
“그러면 뭐 해. 본인이 이렇게 떡 하니 SNS에 글을 올려놨는데!”
“대표님이야말로 이 바닥 장사 하루 이틀 해요? 상대 모델이 이성적인 호감을 보여서 정중하게 거절했다. 마음이 많이 상한 모양이다. 이런 일이 생겨서 유감이다. 이렇게만 대응하면 되잖아요. 나머지는 사람들이 알아서 소설 써 줄 텐데 뭐가 문제예요.”
“정중하게 깐 거 아니라며!”
“증거 있어요?”
이우연이 뻔뻔하게 되물었다.
“…없어?”
“있겠어요? 있으면 애초에 풀었겠지. 전화 통화할 때 거기 새벽이었을 텐데, 그 정신에 녹음했으면 리스펙트하자구요.”
얄미울 만큼 산뜻한 어투였다. 김 대표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냉수로 달래며 이우연을 노려보았다.
“문제 만들 새도 없어요. 최인섭 하나로도 벅찬데.”
“벅차다고? 네가?”
김 대표가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되물었다.
이우연이 다리를 꼬고 앉아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유로움 그 자체였다.
“인섭이가 벅찬 건 아니고?”
“그럴 리가요. 얼마나 잘해 주는데.”
그래서 벅찬 거야. 이 미친 새끼야.
김 대표는 하고 싶을 말을 꿀꺽 삼켰다.
“그래서 인섭 씨랑 관련된 얘기는 언제쯤 꺼내실 겁니까.”
“…하하. 그게.”
이우연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딱히 인섭의 일로 김 대표가 자신을 바삐 호출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혹시 모를 가능성 때문에 서울 시내를 130까지 밟아서 왔건만.
“대표님.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대표님 때문에 인섭 씨 호텔 방에 혼자 두고 왔단 말입니다.”
“걔가 어린애야? 혼자 좀 있음 어때.”
“홀랑 벗겨 놓고요.”
김 대표의 낯이 흙빛으로 변했다.
“옷은 왜 벗겨 놨어….”
“자꾸 집에 가겠다고 해서요. 묶어 두면 더 좋았겠지만, 그건 아프니까.”
대단한 관용이라도 베푸는 듯한 투였다. 김 대표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사람을 왜 그렇게 달달 볶냐.”
“볶아서 먹으면 맛있잖아요.”
“…….”
김 대표가 질렸다는 듯이 이우연을 쳐다보았다. 이우연이 농담, 하고 바로 덧붙이긴 했지만 따라 웃을 기분이 나지 않았다.
“내가 이런 말까지 안 하려고 했는데….”
“그럼 하지 마세요.”
이우연이 웃으면서 단칼에 잘라 냈다.
“아니. 해야겠다. 너 인섭이 좀 그만 괴롭혀.”
이우연이 황당하다는 듯이 눈썹을 휘어 올렸다.
“그만 달달 볶으라고. 요즘 걔 얼굴이 반쪽이더라. 낯빛도 안 좋고.”
“얼굴 반쪽인 사람한테 매니저 시켜 놓고 잘도 말씀하시네요.”
“너는 말 한마디를 안 지냐. 불쌍한 인섭이. 어쩌다가 저런 놈에게 걸려 가지고.”
“어쩌다 걸리긴요. 인섭 씨가 나 좋다고 따라다니다가 걸렸지.”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김 대표와 차 실장은 늘 온 마음을 다해 인섭을 동정했다.
어쩌다 저렇게 착하고 성실하고 바른 애가 이우연에게 코가 꿰어서 인생이 꼬였을까. 이우연이 저러다가 싫증 난다고 버리면 인섭이는 어찌 되는 거냐. 어찌 되긴 인생 다시 피는 거지. 그래도 상처받지 않겠냐. 그렇다고 이우연 옆에 평생 붙어 있냐. 저주를 해라, 저주를.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두 사람은 늘 인섭을 걱정했다.
대체 저놈의 어디가 그렇게 좋다고 그러는 걸까. 김 대표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이우연을 위아래로 살폈다.
“슬슬 가 봐야겠네요. 금방 간다고 했는데.”
이우연이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얼마 전 광고를 찍은 브랜드의 시계였다. 광고를 찍어도 협찬은 얄짤없기로 소문난 브랜드에서 예외적으로 그에게 선물을 보낸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비싸고 고급스러운 시계로 소문난 브랜드에서 젊은 층을 겨냥해서 만든 상품이라고 했다. 아시아 시장을 염두에 두고 이우연을 모델로 선택한 이유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회색 셔츠 사이로 보이는 시계가 캐주얼하면서 더할 나위 없이 고급스러워 보였다. 완벽한 아름다움이었다.
…어디가 좋은지 대충 알 것도 같구나. 몹시 우울해진 김 대표는 얼른 눈을 돌려 버렸다.
“그래. 얼른 가 버려.”
악귀를 내쫓듯이 손짓하던 김 대표가 문득 문자 수신음에 핸드폰을 확인하고는 눈썹을 휘어 올렸다.
“야. 오랜만에 밥이라도 먹고 갈래? 이 근처에 아주 괜찮은 일식집 생겼거든.”
이우연이 짧게 웃었다.
“인섭 씨가 뭐라는데요?”
“뭐? 아, 아니야.”
김 대표가 필사적으로 핸드폰을 감추었다. 하지만 금세 이우연에게 제압당하고 말았다. 완력으로나 팔 길이로나 도무지 당해 낼 수가 없는 상대였다. 이우연은 핸드폰을 빼앗아 스크롤을 내리며 대화 내용을 확인했다. 예상대로 방금 온 메시지는 최인섭이었다. 자신을 한 시간만 붙들어 달라는.
“나 빼고 셋이 대화방이 따로 있어요?”
이우연이 눈썹을 슬쩍 휘어 올리며 물었다.
“보지 마! 넌 프라이버시 모르냐.”
김 대표가 얼른 이우연에게서 핸드폰을 빼앗았다.
“왜 저를 붙들어 두래요?”
“잠깐 어디 좀 다녀온대.”
“어디요?”
“낸들 알아. 네가 직접 물어봐! 꼬치꼬치 캐묻지 말고.”
김 대표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이우연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인섭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울렸지만 통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왜? 안 받냐?”
“그러게요.”
“얼마나 못살게 굴었으면 네 전화를 피해. 쯧쯧.”
김 대표는 들으라는 듯이 신나게 혀를 내찼다.
“네. 어젯밤에 못살게 굴긴 했죠.”
이우연이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웃었다. 생수 통을 찰랑찰랑 흔들며 그가 말을 이었다.
“대표님도 아시다시피 인섭 씨 너무 귀엽잖아요. 그래서 적당히 하려고 했는데 그게 제 마음대로….”
“됐어. 그만해. 듣고 싶지 않아.”
팔불출의 단순한 애인 자랑이 아니었다. 제주도 리조트의 악몽이 떠오른 김 대표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알겠다고 하시고 어디 가는지 물어보세요. 티 내지 마시고요. 대표님은 다 좋은데 연기가 너무 어색해요. 그러니까 드라마에서 잘렸지.”
이우연은 웃으면서 모델에서 배우로 전직하려다가 실패한 김 대표의 과거를 사정없이 들쑤셨다.
김 대표는 입술을 파들파들 떨며 인섭에게 문자를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답 문자가 왔다.
“차 실장 병문안 간다는데?”
김 대표가 문자 내용을 확인하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우연이 흐음, 하고 생각에 잠겼다.
“나쁘지 않네요.”
“뭐가 나쁘지 않아?”
인섭이 유독 차 실장을 따른다는 사실을 이우연도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같은 매니저 출신인 차 실장과 통하는 부분이 있는 모양이었다. 마음에 들진 않지만.
“인섭 씨가 요 며칠 이상했거든요. 고민이 있으면 차 실장님한테 상담하겠죠. 차 실장님한테 가서 물어보면 되겠네요.”
꼼짝하지 말고 있으라고 엄포를 놓고 나왔는데 몰래 나가서 차 실장을 찾아간 거면 나름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넌 상담이란 뜻을 모르냐? 상담의 기본 전제는 비밀 유지야. 그리고 네가 묻는다고 차 실장이 잘도 말해 주겠다. 현규 걔가 다른 건 몰라도 의리 하나는 끝내주는 놈이라고.”
김 대표가 차 실장을 칭찬하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하실 말씀 다 끝나셨죠?”
이우연이 선글라스를 집어 들었다.
“진짜 가려고?”
“그럼 가짜로 갑니까.”
“이우연. 너 아까 한 말 뭐 들었냐. 인섭이 그만 괴롭히고 잘해 주라니까.”
“잘해 주러 가는 건데요.”
여상하게 대꾸하긴 했지만 이우연은 벌써 인섭이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잘 때 팔다리를 묶어 버리는 건데, 하는 생각까지 들 만큼.
“너 가끔 무서운 거 알아?”
“가끔이요?”
김 대표가 한숨을 몰아쉬었다.
“의처증 걸린 남편같이 굴지 좀 마. 인간관계에서 숨 쉴 틈도 필요한 거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충고신가요?”
“그래.”
“하긴. 세 번의 결혼과 세 번의 이혼을 통한 경험이니 어련하시겠어요.”
“…나 너 좀 때려도 되냐?”
김 대표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당연히 안 되죠. 배우는 얼굴이 생명이라면서요.”
생명력 충만한 얼굴을 노려보며 김 대표는 화를 삭였다. 그는 최대한의 이성을 끌어모아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인섭이가 너 좋다고 한국 온 거긴 하지만, 너무 당연하게 여기지는 마.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너도 가족이랑 떨어져 살아서 잘 알… 리가 없지.”
김 대표가 얼른 말을 바꾸었다.
“네놈이야 그렇다 쳐도 인섭이는 다르잖아.”
“다르니까 더 자상하게 해 주려고 하는 거잖아요.”
김 대표가 주먹으로 제 가슴을 내리쳤다.
“두 번 자상했다가 애 잡겠다. 그리고 네놈이 잘했으면 인섭이가…. 하, 이건 인섭이가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뭔데요.”
저렇게 말해 놓고 정작 비밀을 지키는 사람 따윈 본적이 없었다. 이우연은 매번 귀찮게 사족을 붙이는 김 대표를 귀찮다는 듯이 재촉했다.
“담배 피우러 나갔다가 비상계단에서 인섭이가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 근데 참 들을 때마다 놀라지만, 걔 영어 엄청 잘하더라.”
“미국인이잖아요.”
이우연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하긴, 그렇지. 자꾸 까먹어. 아무튼 어머니랑 통화하는 건가 했는데, 통화가 끝나고 나서 울더란 말이지.”
김 대표는 훌쩍이는 인섭과 마주쳤을 때 적잖이 당황했다. 뭐라고 위로를 해 줘야 할지 몰라 허둥대는 김 대표에게 인섭은 얼른 일어나 인사했다. 김 대표는 얼른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인섭은 고개를 내저으며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닦았다. 하지만 눈물은 닦아 내기 무섭게 고여 또르르 흘러내렸다.
‘이우연 씨한테는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처연한 그 얼굴에 김 대표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네가 잘해 줬으면 인섭이가 울었겠어?”
이우연이 눈을 내리감은 채로 웃었다.
“아, 정말인데. 나 인섭 씨한테 정말 잘해 주는데.”
“퍽이나. 그러다가 인섭이 미국으로 도망가면 어쩌려고 그래.”
이우연이 가장 반기지 않는 시나리오였다.
생각해 보니 근래 부쩍 미국에 있는 가족들과 연락이 잦아졌다. 요즘 같아서는 날개옷을 숨긴 나무꾼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것도 같았다. 문제는 자신에게는 숨길 날개옷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게요.”
이우연이 고뇌에 찬 표정으로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감싸 쥐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김 대표는 눈을 두어 번 껌뻑거리다가 쓴웃음을 삼켰다. 드문 일이었다. 배우 이우연이 아니라 인간 이우연의 얼굴을 보는 것은. 속에 천 년 묵은 구렁이가 똬리를 트고 있는 것 같은 놈이지만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속수무책인 게 나름 귀여워 보였다.
“여권 없애는 게 낫겠죠?”
이우연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
김 대표는 5초 전으로 돌아가 이우연을 귀엽다고 생각한 저를 매우 치고 싶었다.
“여권은 신분증만 있으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어.”
누구의 여권을 없애겠다는 것인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신분증도 없애야죠. 만에 하나, 인섭 씨가 신원 보증 서 달라고 해도 서 주시면 안 돼요.”
그렇게 말하는 이우연의 눈이 희번덕 빛났다.
어쩌다가 저렇게 징그러운 놈이랑 눈이 맞은 거니. 인섭아.
들리지 않는 절규를 하며 김 대표는 연거푸 냉수를 들이켰다. 이우연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어깨를 쭈욱 뒤로 젖혔다.
“그런데 대표님.”
그놈 참 길기도 하다고 생각하던 김 대표가 왜, 하고 쌀쌀맞게 대꾸했다.
이우연이 주머니에서 김 대표가 애지중지 여기는 차 열쇠를 꺼내어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한 번만 더 인섭 씨 이름 팔아서 저 호출해 보세요.”
“…….”
“어떻게 되는지.”
이우연의 우아하고 긴 손가락이 차 열쇠를 톡톡 두 번 두드렸다. 그 어떤 길고 상세한 협박보다 소름 끼치는 행동이었다. 김 대표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대답을 듣고 나자 이우연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천사 같은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래서 차 실장님이 입원해 계신 병원이 어디라고요?”
<다음 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