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 자, 잠깐만.”
최인섭이 숨을 헐떡이며 이우연의 옷자락을 쥐었다.
“왜요.”
서늘한 눈빛이었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상대를 끌어안고 벽으로 몰아붙이던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냉정이 이우연의 눈에 머물러 있었다. 그의 눈을 마주하면 온탕과 냉탕을 쉬지 않고 오가는 기분이었다. 가끔 그 간극이 두려울 때가 있다는 말을, 인섭은 차마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조금 이따가 하면….”
뒷말은 부드럽게 다가오는 입술에 가로막혔다.
드라마 러브 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남녀 배우 간의 합이었다. 그것은 아무리 뛰어난 피디의 연기 지도로도 가르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영역이었다. 이우연은 어느 누구를 가져다 놔도 소위 말하는 케미가 사는 배우였다. 이우연이 찍은 키스 신만 편집한 동영상이 키스의 교본이라고 인터넷에 떠돌아다닐 정도였다.
입술을 가로지르고 들어온 혀가 부드럽게 입 속을 휘젓다가 떨어졌다. 이우연의 키스는 끝내줬다. 그 말 외에는 떠올릴 표현이 마땅치 않았다. 인섭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이우연을 올려다보았다.
“샤워를…. 아까 뛰어서 땀을 흘렸습니다.”
눈이 마주치자 인섭은 그제야 더듬거리며 간신히 하려던 말을 이어 나갔다.
“할 말 다 했어요?”
최인섭이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단단한 허벅지가 인섭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신장 차이 때문에 인섭의 발끝이 아슬아슬하게 바닥에 닿았다.
“그런 이유로 기다리라는 거, 병원에서부터 당신 다리 벌릴 생각만 하던 놈한테 너무 잔인하잖아요.”
본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팽팽하게 부푼 남자의 살덩이가 느껴졌다. 이우연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인섭의 뺨과 코, 이마, 이리저리 입을 맞추었다.
“거의 열흘 만이에요. 알아요?”
“알고 있습니다.”
학교 시험과 촬영 스케줄이 엇갈려 서로 그간 전화 통화만 했었다.
“시발,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어요.”
이우연이 인섭의 귓불을 살짝 씹으며 중얼거렸다. 원색적인 욕설마저 달콤하게 들리는 탁월한 음색이었다. 흥분한 이우연의 음성은 평소보다 탁하게 흐려져 있었다.
“인섭 씨는 내 생각 많이 했어요?”
“네. 당연히 많이 했습니다.”
솔직하게 돌아오는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이우연이 낮게 웃으며 인섭의 턱을 쥐고 뺨에 입을 맞추었다.
“얼마나 많이 했어요?”
“하, 하늘만큼 땅만큼이요.”
“전 밤마다 인섭 씨 생각하면서 자위할 만큼이요.”
일차원적인 관용구를 뻔뻔하게 음담으로 받아친 이우연이 인섭의 귓바퀴를 입에 넣고 혀를 굴렸다. 최인섭이 어깨를 바들바들 떨면서 신음을 삼켰다.
“인섭 씨도 내 생각 하면서 자위했어요?”
인섭이 얼굴을 푹 숙인 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안 했어요.”
마치 숙제를 안 한 학생을 나무라는 듯한 말투였다. 인섭이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한 후 다음부터는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덧붙였다.
이우연은 쓰게 웃었다.
인섭은 제 성정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부모도 포기한 쓰레기 같은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해 주는, 어쩌면 유일한 인간이었다.
이우연은 말없이 인섭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었다.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인섭의 커다랗고 까만 눈이 천천히 움직였다.
이우연이 엄지로 인섭의 아랫입술을 쓸어내리자 머뭇거리던 그가 쪽, 하고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다.
이우연은 그대로 인섭을 끌어안았다. 갈비뼈 안쪽의 근육이 일제히 팽팽하게 땅기며 욱신거렸다. 뜨거운 피가 혈관을 타고 오르내린다. 자신의 머리가 정상이 아님을 이미 진즉에 인지하고 있었다. 항상 궁금했다. 미친놈이 사랑에 빠지면 그건 제대로 된 감정일까. 누군가 알려 주면 좋을 텐데.
“인섭 씨.”
물에 빠진 병아리처럼 가쁘게 숨을 내뱉던 인섭이 네, 하고 대답했다.
“오늘 보여 줄래요?”
무슨 말이냐는 듯이 인섭이 커다란 눈을 껌뻑였다. 이우연은 대답 대신 인섭의 성기에 손을 뻗었다. 인섭이 놀라서 허리를 비틀자 이우연이 인섭의 바지춤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바지를 우악스럽게 끌어 내렸다.
“나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이우연이 발로 인섭의 바지를 마저 벗기고 말을 이었다.
“밤새도록 내 앞에서 보여 줘요.”
최인섭은 잠결에 이마를 쓸어 올리는 손길에 천천히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눈이 마주치자 상대는 이렇다 할 반응도 없이 한참을 그렇게 응시하다가 깼어요? 하고 묻는다.
“…왜….”
목소리가 잠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우연이 침대 옆 협탁에 올려 둔 물컵을 집어 들어 인섭에게 건넸다.
목을 타고 흘러들어 오는 차가운 물의 달콤함에서 인섭은 자신의 갈증을 알아챘다. 물 한 컵을 다 비우고 나서야 인섭은 컵을 내려놓았다.
“더 마실래요?”
“괜찮… 습니다.”
이우연이 인섭의 입가에 묻은 물을 닦아 주고는 한쪽 팔을 뻗어 그를 끌어안았다.
“왜 안 주무시고 그러고 계세요.”
최인섭이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인섭 씨 잘 자고 있는지 구경 중이었어요.”
이우연은 웃으며 시트를 끌어다가 인섭의 몸을 포옥 감싸 주었다. 최인섭은 이우연의 허리에 팔을 감은 채로 몸을 기댔다. 인섭이 어리광 많은 제 성격을 잘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다는 걸, 이우연은 알았다. 그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이 바로 잠결이라는 사실 또한.
이우연은 조심스럽게 인섭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완전히 깨지 않고 계속 어리광을 부릴 수 있을 만큼만.
“내가 하지 말라고 해도 일하실 거죠?”
“…네.”
이우연이 손가락으로 인섭의 콧등을 가볍게 툭 친다.
“알겠어요. 대표님한테 내일 말해 보도록 하죠.”
인섭이 눈을 내리감은 채로 배시시 웃었다.
“대신 절대 무리하는 일 없어야 합니다. 아셨죠?”
“네. 알겠… 습니다.”
졸음이 극에 달했는지 대답을 하면서도 인섭의 눈이 여러 번 깜빡깜빡 감긴다. 약 먹은 병아리 같은 몸짓에 이우연은 다리 사이에 빠듯하게 피가 몰리는 것을 느꼈다.
이우연은 쓰게 웃었다.
인섭을 무리하게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울면서 헐떡이는 인섭을 보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좆이 섰다. 특히 오늘처럼 오랜만에 하는 관계 중에는 자제가 더더욱 힘들었다.
발정 난 개새끼도 이 정도는 아닐 텐데.
나중에는 반쯤 혼절한 상태로 흐느끼는 인섭의 다리 사이에 정액을 뿌리며 이우연은 진지한 자아 성찰에 빠졌다. 잠든 인섭의 몸을 따뜻한 수건으로 닦아 주고 뒤처리를 해 준 후에도, 자아 성찰은 내도록 이어졌다.
“저기요.”
잠기운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가 이우연을 불렀다.
“네.”
“…내일부터 열심히 하겠습니다.”
최인섭은 엉뚱하다 싶은 결심을 밝히고는 그대로 도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이우연은 그런 인섭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삼켰다.
“안 돼.”
전혀 예상치 못한 거절에 최인섭은 물론이고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이우연조차 눈썹을 휘어 올렸다.
“역시 생각해 봤는데 인섭이한테 일 안 맡기는 게 낫겠어.”
오늘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차려입은 김학승 대표가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고서 고개를 내저었다.
“왜 안 되는 건가요? 혹시 제가 외국인이라서 그런 겁니까? 보험이나 그런 게 문제 되면 저 임금 안 받아도 됩니다.”
“인섭 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 무임금으로 외국인 노동자 착취하면 대표님 잡혀가요.”
이우연의 한마디에 김 대표의 미간이 일그러진다. 인섭이 자리에서 펄쩍 뛰며 두 손을 내저었다.
“절대로 신고하지 않겠습니다. 112에 전화 안 걸겠습니다.”
“112는 무슨…. 하아. 인섭아. 국적 문제가 아니다. 니 옆에 있는 놈도 한국산 아니잖아.”
이우연이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럼 왜 안 되는 겁니까?”
사석에서 가끔 마주칠 때마다 김 대표는 최인섭의 손을 잡고 자네 혹시 우리 회사에서 일해 보지 않겠는가, 하는 진심 99%가 섞인 농담을 건네곤 했다.
사실, 인섭도 방학이 시작되면 얼굴에 철판을 깔고 JN엔터테인먼트에 찾아가 아르바이트 자리라도 청해 볼 생각이었다. 이우연의 매니저 일은 못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곁에서 그를 돕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제, 제가 혹시 큰 실수를 한 거라면…. 고쳐 보겠습니다.”
최인섭에게 김 대표와 차 실장은 소중한 인연이었다. 좋지 않은 목적으로 위장 취업을 한 자신에게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고, 미국으로 갈 때는 배웅까지 해 주던 사람들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무임금으로 몇 년이라도 일을 해서 그 은혜를 갚고 싶었다.
“말씀해 주세요.”
인섭은 거의 울 것 같은 눈이었다.
“그게 고쳐진다고 고쳐질 게 아니라서….”
김 대표의 시선이 옆에서 대본을 읽고 있는 이우연에게 향했다. 시선을 느꼈을 텐데도 이우연은 고개도 돌리지 않는다.
“제가 본의 아니게 폐를 끼치고 실수한 거면, 아니, 본의든 뭐든, 다 제 잘못이니 사과드리겠습니다.”
최인섭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이우연이 그런 그를 강제로 끌어다 도로 자리에 앉히고는 대본에서 시선도 떼지 않은 채 비스듬히 웃었다.
“대표님.”
“…니가 그따위로 부를 때마다 내 수명이 열흘씩 주는 거 아냐?”
“몰랐는데.”
이우연이 대본을 한 장 넘기며 말을 이었다.
“알았으면 좀 더 자주 불러 드릴 걸 그랬죠?”
“…….”
김 대표는 입술을 깨물었다.
빌어먹을 새끼. 저놈이 조금만 덜 생겼더라면, 조금만 덜 매력적이었더라면, 조금만 피지컬이 떨어졌더라면…, 연기력이 조금만 덜했더라면, 단칼에 잘라 버리는 건데.
“인섭 씨 울리지 마요. 나도 아까워서 자주 못 울리는데.”
마지막에 덧붙은 말을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김 대표는 애꿎은 찬물만 연신 들이켰다.
“제 매니저 인섭 씨로 해요. 이만한 사람 없는 거 잘 아시잖아요.”
“잘 알지. 왜 몰라. 그런데 니가….”
“제가 왜요.”
이우연이 읽던 대본을 탁, 덮었다.
작년 말, 이우연은 프랑스 유명 감독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주연도 아닌 조연인 데다 누벨바그 영화에 가까운 작품이었기에 김 대표는 필사적으로 출연을 반대했다. 이름값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흥행도 되지 않는 단편 영화에 출연할 이유는 없다고. 심지어 역할도 좆같았다. 취미로 사람을 죽이는 청각 장애인 사이코패스 살인마라니.
너 이거 찍으면 안 돼. 너랑 찰떡같이 잘 어울려서 이미지 콱 박힌다고!
김 대표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지만, 언제나처럼 이우연은 귓등으로 듣는 척도 하지 않고 출연을 승낙했다. 결과는 더 좆같았다. 이듬해 작품은 프랑스의 저명한 영화상을 휩쓸었고 이우연도 남우 조연상을 받게 됐다. 덕분에 한동안 살인마나 냉혈한, 사이코패스 악역 같은 배역만 줄줄이 들어오는 걸 거절하느라 김 대표만 진땀을 뺐다.
“제가 뭘 어쨌는데요.”
이우연이 눈웃음을 띤 채 묻는다. 사랑하는 여인을 제 손으로 죽이면서도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어, 수많은 여성 관객으로 하여금 살인마에게 동정심을 느끼게 만든 그 웃음이었다.
하지만 김학승 대표는 안다. 사람의 감정을 뒤흔든다는 저 아름다운 눈을 가진 미청년이 얼마나 소름 끼치는 흉계를 지녔는지.
“니, 니가….”
너무 티를 내잖아, 새끼야.
김 대표가 간신히 시선을 피하며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
“제가 뭘 어쨌다는 겁니까. 대표님.”
이우연이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되물었다. 한 손에는 아직도 인섭의 손목을 움켜쥐고.
‘내가 괜한 소리 해서 초 치는 걸 수도 있는데, …인섭이가 우연이 매니저 해 주는 거 좀 그렇지 않아?’
처음 차 실장이 이 얘기를 꺼냈을 때, 보조 침대에 걸터앉아 사과를 깎던 김 대표는 발끈했다. 그러긴 뭐가 그러냐, 인섭이만 한 적임자가 어디 있다고 그러냐, 네놈이 기어코 나를 이우연 개놈의 새끼 매니저로 만들려고 그러는 거냐. 숨 한 번 쉬지 않고 다다다 쏘아붙였다. 차 실장이 곱게 깎아 둔 사과를 하나 집어 들며 차분하게 되물었다.
‘들키면 어쩌려고?’
김 대표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병실에는 차 실장이 사과를 아삭아삭 씹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차 실장과 김 대표는 이우연과 최인섭의 관계를 외면하고 싶었지만, 결국 알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알게 되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단순한 스캔들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밝혀지면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 이우연이란 배우의 가치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게 분명했다. 상장을 한 회사는 이제 한참 영역을 확장하며 성장하고 있었다. 이우연은 JN엔터테인먼트의 간판 배우였다. 결국, 김 대표는 뼈를 깎는 심정으로 인섭의 채용을 부결하기로 결정했다.
“너 전처럼 이미지 좋지만은 않아. 스캔들 큰 거 한 번 터지면 훅 간다고. 인섭이는 너무 착하니까 좀 악독하고 엄격한 매니저가 너한테 어울릴 거다.”
김 대표는 최대한 인섭이 자책감을 느끼지 않도록 이우연에게 책임을 고스란히 돌렸다. 물론 사실이기도 했다.
“하하하하.”
이우연의 웃음에선 5월의 녹음을 흔드는 바람 같은 청량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 방에서 그 청량감을 만끽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와, 무서워라.”
이우연이 그렇게 말하고는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은 채, 고개만 인섭을 향해 돌렸다.
“나 백수 되면 인섭 씨가 먹여 살려 줄래요?”
삼대가 사치하며 놀고먹어도 남아돌 정도의 돈을 벌어 둔 남자가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우연의 재무 관리를 도와주는 김 대표로서는 눈앞의 광경이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제가 책임져 드리겠습니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최인섭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눈을 하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네요.”
“되긴 뭐가 돼?”
“저 한 방에 훅 가도 인섭 씨가 책임져 준다잖아요.”
김 대표가 죽일 듯한 눈으로 노려보자 이우연이 대본을 집어 들며 말했다.
“그래서 저에게 어울리는 악독한 매니저는 구해 두셨어요?”
“그렇지 않아도 내가 몇 명 후보 추려 뒀거든? 이 바닥에서 아주 일 잘하기로 유명한 놈들로다 골라 놨어. 자, 여기 이력서 보고….”
김 대표가 이력서가 든 파일을 건네기도 전에 이우연이 그런데, 하고 말을 자른다.
“보험 처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무슨 보험?”
“저에게 어울리는 계약직 매니저가 불의의 사고로 다치면 어떻게 되나 해서요. 하긴 괜한 걸 여쭸네요. 돈 많은 회사에서 알아서 해 주실 텐데.”
“…….”
김 대표의 낯이 몇 초 사이에 심하게 초췌해졌다.
“새 매니저님 얼른 뵙고 싶네요.”
콧노래를 부르며 대본을 넘기는 이우연의 완벽한 옆얼굴을 보며 김 대표는 이를 사리물었다. 저 얼굴에 속아 넘어간 과거의 저를 몹시 패고 싶어지는 오후였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거울을 들여다보던 김 대표는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젠장, 이건 또 뭐야.”
눈 밑에 깊게 팬 주름을 발견하고는 그는 이내 혀를 찼다. 피부 하나만큼은 현역 배우하고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해 온 나날이었건만.
얼마 전 건강 검진에서도 위벽이 헐었으니 관리하라는 의사의 권고를 받았다. 옆에 있던 차 실장이 그러게 술 담배 좀 작작 하라니까, 하고 타박했다가 아니지, 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술 담배의 원인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동지인 터다.
빌어먹을 이우연 새끼.
김 대표는 이를 바드득 갈며 얼굴을 요리조리 돌려 보았다. 오늘 오후 스케줄을 취소하고 당장 에스테틱 예약을 잡아야겠다고 다짐한 순간.
“대표님….”
저를 부르는 나직한 목소리에 놀란 김 대표는 그 자리에서 펄쩍 뛰며 소리 질렀다.
“아이고, 깜짝이야.”
뒤를 돌아보니 최인섭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제발 조용히 해 달라는 손짓을 한다.
“야 인마. 너는 왜 몰래 들어와서 사람을 놀라게 하냐.”
“죄송합니다.”
인섭이 고개를 꾸벅 숙여 사과한다.
“그런데 갑자기 왜?”
분명 이우연과 가겠다고 나선 게 5분 전이었다.
“잠깐 뭐 놓고 온 거 있다고 하고 올라왔습니다. 우연 씨는 아래서 기다리고 계시고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전화로 하면 되지.”
“긴히 드릴 말씀이요.”
화장실에 단둘이 있는 데도 인섭은 한껏 목소리를 낮춘 채였다. 연신 뒤를 돌아보며 초조해하는 기색이 아무래도 이우연 몰래 올라온 모양이었다. 그 이유를 짐작하고도 남는 김 대표는 한숨을 내쉬며 말해 보라고 손짓했다.
“저, 아까 그거 말인데요.”
인섭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저는 괜찮습니다.”
“뭐가?”
“전 보험 안 들어도 괜찮습니다. 아무래도 외국인이니 고용 보험이니 그런 거 번거롭다는 것도 압니다.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니까….”
연예인 기획사를 해 오면서 김 대표는 수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최인섭만큼 깨끗한 눈을 가진 사람은 보지 못했다. 흰자에 핏줄 하나 보이지 않을 만큼 인섭의 눈동자는 아이처럼 깨끗하고 맑았다. 그래서인지 인섭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말을 하면, 이쪽에서 못된 어른이 된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부탁드립니다. 저를 무보험으로 고용해 주세요.”
“…….”
최인섭의 간청에 김 대표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가까스로 그는 정신을 차리고 저기, 하고 입을 뗐다.
“인섭이 네가 잘못 들은 모양인데 아까 한 말은….”
“아까 잘 들었습니다.”
인섭이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지. 김 대표는 난감함에 입매를 찌푸렸다. 이우연, 그 빌어먹을 새끼가 매니저 고용 보험 운운한 것은 협박이었다. 당신 멋대로 아무나 고용했다가는 끔찍한 사달이 날 것이라는.
“저는 보험 없어도 괜찮습니다.”
“아니, 널 보험도 없이 고용했다가는 큰일 날걸.”
“아닙니다. 저 안전 운전 하겠습니다.”
안전 운전이 일생의 목표라도 되는 듯, 진지한 눈빛이었다.
“이우연은 네 고용 보험을 물어본 게 아니라…. 하아.”
김 대표는 한숨을 삼켰다.
이우연과 인섭의 관계가 묘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미국으로 갔던 인섭이 한국으로 귀국한 시점이었다.
이우연은 일과가 끝나면 거의 모든 시간을 최인섭과 함께 보냈다. 심지어는 촬영 중이던 드라마가 끝나자마자 몰디브행 비행기 티켓을 끊어 인섭과 함께 보름간 휴가를 다녀오기도 했다.
이때만 해도 김 대표는 설마, 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에베레스트산만큼 쌓인 물증을 앞에 두고도 현실을 직시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차 실장 역시 아무런 말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이우연 같은 놈이 진지한 관계를 형성할 리 없다고 현실을 외면했다. 정신 승리의 종장은 예상보다 끔찍하고 빠르게 찾아왔다.
상장 이후 회사는 빠르게 성장했고 모델과 가수까지 영입하며 사업 영역을 확장하게 되었다. 김 대표는 기쁨을 주변 사람과 나눌 만큼 그릇이 큰 사람이었다. 직원 전원에게 보너스를 지급하고 제주도의 고급 리조트를 통째로 빌려 사원 여행까지 선물했다. 상사가 있으면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며 김 대표는 그날 저녁에 잠시 얼굴만 비추고 빠지기로 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이우연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계획대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네가 여기 왜 있냐.’
김 대표의 경악에 찬 물음에 이우연은 말없이 웃으며 최인섭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인섭이도 부르죠, 걔도 고생 많이 했는데, 라고 말하며 인섭을 초대했던 차 실장은 구석에서 혼자 소주를 들이켜고 있었다.
이우연이 별다른 짓을 하는 건 아니었다. 소파에 앉아 술을 마시며 이따금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뿐이었다. 문제는, 그의 시선이었다. 차 실장 표현에 의하면 천하의쌍놈개싸가지 이우연이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한 눈으로 최인섭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우연은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였다. 그 더러운 성질을 친절로 가장하는 데 어려움도 없고 거리낌도 없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김 대표는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저 눈빛은 꾸며 낸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아닐 거야. 당연히 아니어야지. 그럴 리 없어. 기분 탓이야. 가서 보드카 한잔하고 오늘 여기서 보고 들은 건 싹 다 잊고 자는 거다.
김 대표가 결심하며 몸을 돌리려는 순간.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마요. 얼굴 빨개졌네.’
그렇게 말하며 인섭의 달아오른 뺨을 손등으로 툭 치는 이우연을 바라보는 김 대표의 동공은 속절없이 흔들렸다. 그건 구석에 있던 차 실장도 마찬가지였다.
김 대표는 술병을 들고 차 실장의 옆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눈치 더럽게 없고 센스 없는 사장 따윈 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우연과 최인섭을 이곳에 두고 가자니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김 대표는 차 실장 옆에 쭈그려 앉아 같이 술을 홀짝홀짝 마시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사원들은 각기 제 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난 후였다. 차 실장은 바닥에 늘어진 김 대표에게 들어가서 자라고 잔소리했다. 김 대표는 창백한 얼굴로 토할 것 같다고 중얼거렸다. 차 실장은 얼른 그를 큰방과 연결된 욕실로 데려갔다. 속을 게워 내는 김 대표의 등을 두드리며 차 실장이 물었다.
‘다 토했어요?’
김 대표가 벌건 눈을 하고 고개를 든 후 어, 하고 대답했다. 입을 헹궈 낸 뒤, 김 대표가 한숨을 내쉬었다. 욕실에 침묵이 감돌았다. 두 사람 모두 이렇다 할 말을 하지 못했다. 먼저 입을 뗀 것은 차 실장이었다.
‘저기, 대표님 이우연 말이에요….’
하지만 그는 말을 맺지 못했다. 누군가 방으로 들어오는 기척이 들린 것이다. 제가 아는 정보를 떠들어 주목받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래서 이 바닥에서 가장 입단속을 시켜야 할 대상은 다름 아닌 회사 직원이었다. 김 대표는 차 실장에게 조용히 하라고 손짓했다. 적당히 기회를 봐서 기척을 내고 차례대로 나가려고 했다.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괜찮아요?’
이우연이었다.
김 대표와 차 실장이 동시에 눈을 부릅뜨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갠찬슴미다.’
혀가 꼬인 채로 대답하는 건, 최인섭이다.
‘그러게 너무 많이 마시지 말라고 했잖아요.’
‘기부니가 조아서….’
혀 짧은 대답에 이우연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린다. 김 대표는 소름이 돋은 팔뚝을 반대편 손으로 문질렀다. 차 실장도 입매를 찌푸렸다.
‘인섭 씨 술 마시면 귀여워지는 거 알아요?’
‘모르는데여.’
이우연의 웃음소리가 잇따랐다. 더 이상 들어 줄 수가 없었다. 욕실 안의 두 사람은 나가자는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럴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철컥.
방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불길했다.
‘인섭 씨. 이리 와요.’
대사도 불길했다. 뒤이어 들려오는 효과음은 한층 더 끔찍했다. 입술이 비벼지는 소리, 교차되는 숨소리, 옷가지가 발치로 떨어지는 소리.
가장 공포스러운 것은,
‘인섭 씨 젖꼭지 빨아도 돼요? 하아, …시발, 진짜 흥분되는 거 알아요?’
이우연의 입이 걸다는 사실은 두 사람 모두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더러운 입이 침대 위에서 한층 더러워진다는 사실은 맹세코 오늘 처음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괜찮아요. 여기서는 안 넣을게요. 그러니까 울지 말아요. 나 인섭 씨 우는 얼굴에 꼴리는 개새끼인 거 알잖아요. 하아, 다리 벌려 봐요. 나 인섭 씨 자지에 문지르면서 가고 싶으니까.’
이후 이어지는 난잡한 음담패설의 향연을 두 사람은 욕실에 쪼그리고 앉아 고스란히 들어야만 했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벌을 받는 걸까, 사람이 어디까지 상스러워질 수 있는 걸까, 저빌어먹을미친이우연 새끼는 대체 왜 저렇게 생겨 먹은 걸까, …무서워.
얼마나 지났을까. 두런거리는 대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욕실 문이 벌컥 열렸다. 마흔 중반을 훌쩍 넘긴 중년의 두 남자가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어린아이처럼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드로어즈 한 장만 걸친 이우연과 눈이 마주쳤다. 요즘 유독 공들여 운동을 한다던 이우연은, 같은 남자로서 자괴감이 들 정도로 완벽한 몸을 하고 빙긋이 웃었다.
‘왜 그러세요?’
침실에서 들려오는 인섭의 물음에 이우연이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고 대답했다. 김 대표와 차 실장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로 이우연을 올려다보았다.
쉿.
우아하고 아름다운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댄 채, 그가 낮게 속삭였다. 시청자는 물론이고 상대 여배우들까지 끔뻑 죽는다는 예의 그 눈웃음 때문에 김 대표와 차 실장은 무심코, 본인들이 처한 좆같은 상황을 잊고 말았다.
‘여기 욕실은 고장 난 거 같으니 저쪽 욕조에 물 받을게요.’
이우연은 인섭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욕실 문을 닫아 버렸다. 둘이 방 밖으로 나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두 남자는 욕실에서 나왔다. 두 사람은 옆 호텔로 옮겨 1박 2일간 꼬박 술을 마셨다. 더 이상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러면 그게 무슨 뜻이었습니까?”
최인섭의 물음에 김 대표는 얼른 회상에서 빠져나왔다.
“인섭아. 아니 최인섭 씨.”
김 대표가 진지한 목소리로 최인섭을 불렀다. 저를 부르는 호칭이 달라졌다는 사실에 인섭이 눈을 부릅뜨고 네, 대답했다.
“대체 이우연 매니저가 왜 하고 싶어? 돈이 필요해서 그래? 그럼 다른 아르바이트 자리 구해 줄게. 몇 배, 아니 몇십 배는 더 편한 일로. 물론 페이도 괜찮을 거야.”
그 일이 있고 며칠 뒤, 이우연이 김 대표의 집으로 찾아왔다. 김 대표는 아끼던 위스키를 뜯었다. 이 기회에 허심탄회하게 얘기해 보자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이야기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전 밝혀져도 상관없어요. 일 그만둬도 되고요. 대표님도 벌 만큼 버셨잖아요. 안 그래요?’
소름 끼칠 만큼, 가볍고 여상한 말투였다.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장면을 들킨 사람이 보일 만한 태도가 아니었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수치심이나 당혹감, 혹은 분노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치 남의 일이라는 듯이, 이우연은 태연한 낯이었다.
이 새끼 이거, 예상보다 심각하게 미친놈이구나. 김 대표는 식은땀을 흘리며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요. 뭐가 달라진 게 있습니까?’
야, 이 빌어먹을 새끼야. 그날 내가 자지니 좆이니 하는 드러운 단어를 몇 번이나 들은 줄 아냐! 내 귀 물어내! 내 정신 건강을 돌려 달라고!
고래고래 그렇게 외치고 싶은 충동을, 김 대표는 간신히 참아 냈다.
‘…일 그만둘 거냐고.’
이우연이 하하하, 웃으며 술잔을 집어 들고는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얼마 전 이우연이 찍은 주류 광고가 공전의 히트를 쳐서 광고주의 입이 귀에 걸렸다고 했다. 그럴 만한 모습이었다. 술잔을 쥔 손의 모양이나 자세, 술을 삼키는 표정까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근사했다.
김 대표는 저런 새끼한테 저런 외모를 준 신에게 욕을 퍼부었다.
‘왜요?’
‘그만둬도 상관없다며.’
‘상관없다고 했지, 누가 그만둔대요?’
김 대표는 위스키 병을 힐끗 쳐다보았다. 가정교육을 조금만 덜 받았더라도 이걸로 이 새끼의 머리통을 내리쳐 버리는 건데.
이를 바드득 갈던 김 대표가 그럼 왜 왔는데, 하고 물었다.
‘저는 상관없는데 인섭 씨는 상관있을 거 같아서요.’
‘…….’
‘분명 마음 쓰겠죠. 폐 끼쳤다고 생각하고, 주눅 들고, 신경 쓰고.’
뭔가를 떠올렸는지 이우연은 눈을 내리감은 채로 느리게 웃음을 삼킨다.
‘그런 모습도 나쁘지 않지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이우연은 기다란 손가락으로 크리스털 잔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고는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까 모른 척하세요.’
‘…….’
‘침대 밖에서는 별로 울리고 싶지 않으니까.’
‘…….’
‘전 대표님과 다르게 잃을 게 없어요. 아니, 하나 있긴 하네요. 그 하나가 망가지면 저도 제가 어떻게 될지 장담을 못 하겠군요.’
이우연은 술잔을 단번에 비워 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실장님께도 안부 전해 주시고요.’
차 실장의 입단속도 알아서 해 달라는 뜻이었다. 김 대표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이우연이 아셨죠? 하고 재차 물었다. 예의 그 눈웃음을 띤 채, 세상에서 제일 우아하고 소름 끼치는 협박을 던지고는 사라졌다.
참다운 개새끼.
그 얘기를 전해 들은 차 실장이 내뱉은 한마디였다.
“우리끼리 있으니 하는 말이지만, 이우연이 매니저가 쉬운 일은 아니잖아.”
김 대표는 최인섭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잘 생각해 봐. 두 사람 사이 각별, 아니, 친한 거 알지만, 그거랑 이건 영 다른 문제야.”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하고 싶습니다.”
“대체 왜?!”
김 대표는 저도 모르게 벌컥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정말 묻고 싶은 말이었다. 아무리 겉이 멀쩡하다고 하더라고 그놈은 속이 콱 썩어 버린 인간이었다. 그 사실을 인섭도 모를 리 없다. 아니,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소리 질러서 미안해. 그래도 정말 이건 아니잖아.”
여러 의미를 담은 말이었다. 인섭아, 아무리 보기 좋은 떡이라고 해도 아무거나 주워 먹는 거 아니다.
“이우연 씨 성격, 보통 사람과 다른 거 알고 있습니다.”
“…….”
그건 보통 사람과 다르다는 표현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이우연은 지옥에서도 질색하며 받아 주지 않을 놈이었다.
“그래서 옆에 있고 싶습니다. 저는 그거 아니까, 그래도 저희랑 있을 때는 이우연 씨, 하고 싶은 대로 편하게 말씀하시잖아요. 그게 보기 좋아서요.”
“…너 욕먹는 거 좋아하니?”
“아, 아니. 욕하고 그런 게 좋다는 건 아니고요. 그, 그러니까….”
인섭이 새빨개진 얼굴로 말을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매니저랑 오랜 시간 있으셔야 할 테니까,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게 이유입니다. 죄송합니다.”
김 대표는 차 실장이 이우연을 보며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떠올랐다.
‘저렇게까지 성격이 개 같을 필요는 없는 거 아니에요?’
지금 이 순간, 비슷하지만 영 다른 말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까지 사람이 선할 필요도 없을 텐데….
김 대표는 말로 형용하기 힘든 기분을 느꼈다.
“너는 그러니까, 이우연이를 감당하기에 너무 착해.”
“아니요. 저 그렇게 안 착해요. 정말입니다. 저도 나빠요.”
이우연에게 편한 시간을 제공하고 싶다는 이유로, 있지도 않은 제 악랄함을 주장하는 인섭을 보는 순간 김 대표는 뜨거운 것이 왈칵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어쩌다가 이런 거에 그런 게…!
그러다가 혹시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인섭아. 나한테는 솔직하게 말해도 돼. 알았지?”
“네? 알겠습니다.”
“혹시, 너 말이다.”
김 대표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우연한테 뭔가 협박당하고 있니?”
“아니요! 절대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인섭이 펄쩍 뛰며 강하게 부정했다. 그거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최인섭은 열심히 이우연을 변호하기 시작했다.
“이우연 씨 그런 분 아니에요. 말이 좀 험하시고 성격이 단호하셔서 그렇지, 저에게 협박하거나 강요하는 일 따위 없습니다.”
‘인섭 씨. 내 자지가 인섭 씨 구멍에 닿기만 해도 엄청 느끼는 거 알아요? 하하, 그러니까 좋다고 말해 봐요. 네? 말할 때까지 안 놔줄 거니까.’
‘입 벌리고 다 삼켜요. 불알까지 다 핥고. …진짜 당신 끝내주게 야해요. 좆물을 어디에 쏟아 줬으면 좋겠어요? 울지 말고 얼른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그 짧은 순간에 김 대표의 머릿속에 이우연이 인섭에게 했던 흉측한 강요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네가 없었다면 없었던 거겠지. …그래도 만에 하나, 이우연이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을 너한테 한다면 언제든지 주저 없이 나나 차 실장한테 말해라. 알았지?”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 들려왔다.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짓이라뇨?”
인섭은 힉, 하고 어깨를 움츠리고 김 대표도 그 자리에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이우연은 팔짱을 낀 채로 웃으며 서 있었다.
“어,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아까요. 꼼꼼한 인섭 씨가 중요한 걸 두고 오셨다고 해서, 대체 그게 뭔지 너무 궁금해서 올라와 봤습니다.”
인섭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수그러들었다. 이우연이 빙글빙글 웃으며 김 대표에게 물었다.
“그런데 인간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란 게 대체 뭐예요?”
“…몰라서 묻냐.”
“네. 정말 몰라서요.”
이우연이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그게 잘 구분이 안 가더라고요, 전.”
신이시여. 제가 대체 뭐랑 계약을 한 겁니까.
김 대표가 속으로 성호를 그으며, 최대한 차분하게 대꾸했다.
“살인, 방화, 약탈, 강간. 뭐 그런 거 말이다. 법에 처벌받는 일.”
“아아.”
이우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는 안 해요, 그런 거, 하고 대답했다.
“그럼 다행이고.”
그래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은 있구나.
“해 봤는데 영 귀찮더라고요. 증거도 없애야 하고.”
“…….”
“…….”
“하하하. 농담인데.”
아무도 따라 웃지 않았다.
“그럼 하실 말씀들은 다 나누셨어요?”
이우연의 물음에 인섭이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했다.
“뭐가 죄송해요?”
“…거짓말로 이우연 씨 속인 거요.”
이우연이 대답 대신 인섭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었다. 형편없는 거짓말에 상대가 속아 넘어갔다고 믿는 순진함이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 대표가 헛기침을 하며 이우연에게 눈치를 주었다. 이우연이 입 모양으로 왜요, 하고 묻는다.
저 개도 안 물어갈 새끼.
김 대표는 어금니를 깨물었다가, 한숨을 내뱉었다.
“인섭아. 정말 할 수 있겠니?”
“네. 할 수 있습니다.”
김 대표는 거의 포기하는 심정으로 당부를 늘어놓았다.
“인섭이가 일 도와주는 대신, 둘 다 알아 둘 게 있어.”
“뭔데요.”
“뭡니까.”
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이우연이 너 조용히 무난하게 지내라. 이 바닥 생리가 그래. 스타가 빛나야 하지만, 너무 눈에 띄어도 안 좋아. 알잖아, 이우연.”
“모르는데요.”
이우연이 얄망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우연 너 전처럼 여론이 호의적이지만은 않아. 이젠 악플도 은근히 달려.”
“은근히 달린 악플에 어느 병신이 신경 쓴다고 그래요.”
김 대표는 요 근래 이우연 기사에 악플을 쓰고 싶다는 충동을 심각하게 느끼곤 했다. 어느 날은 포털 사이트에 로그인해서 온갖 욕설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차 실장에게 허심탄회하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정신 병원에라도 가서 상담받아 볼까? 그러자 차 실장은 뭔 개소리냐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걸로 병원 갈 거면 전 갇히고도 남았어요. 악플 베댓의 절반이 납니다.
“대표님도 그딴 거 신경 쓰지 마세요. 나이 생각하세요. 그러다 훅 가십니다.”
아, 은근히가 아니라 격렬하게 악플 달고 싶다.
김 대표는 근질거리는 손가락을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괜히 사람들 눈에 띄어 좋을 거 없어.”
인섭이 칼에 찔려 병원에 실려 갔을 때, 패닉에 빠진 이우연이 제 손목을 긋고 난리를 쳤었다. 본인 대신 다친 매니저를 구하지 못한 죄책감과 슬픔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고, 소속사는 최선을 다해 그 끔찍한 사건을 미담으로 둔갑시켰다. 그날의 사건이 동영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 물론 아직도 끈질긴 안티 몇은 걸핏하면 그 일을 거론해서 이우연을 사이코패스 미친놈이라고 몰고 갔다. 김 대표 역시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지만, 회사를 위해서는 되도록 수면 위로 부상시키고 싶지 않은 사건이기도 했다.
“대표님, 뭐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뭔데.”
이우연의 질문에 김 대표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지만, 그는 애써 평연한 척 되물었다.
“대표님이 보시기에 제가 요즘처럼 무난했던 적이 있었습니까?”
웃으며 던지는 질문에 뼈가 있었다.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이우연은 전보다 더 훌륭하게 성장 중이었다. 연기는 물론이고 몸까지 완벽하게 다듬어 갔다. 덕분에 그렇지 않아도 넓은 어깨가 더 도드라져, 한동안 이우연 옆에 선 남자 연예인의 굴욕 사진 모음이 유행처럼 번졌다. 뿐만 아니라 매니저를 갈아 치우는 일도, 여자를 갈아 치우는 일도 없었다. 소속사 입장에서는 무난하다고 표현하기에 무리가 따를 만큼 훌륭한 나날이었다.
“안 그래요?”
이우연이 재차 묻는다. 김 대표는 그게, 하고 어물어물 말끝을 흐렸다.
“걱정 마십시오.”
최인섭이 냉큼 대화에 끼어들었다.
“전 존재감도 희미하고 평범해서 눈에 띄는 일이 없을 겁니다. 그러니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인섭아, 그도 그런데…. 그러니까 둘이….”
김 대표는 이쪽을 바라보는 형형한 눈빛을 마주하고 저도 모르게 힉, 숨을 삼켰다. 산에서 호랑이와 눈이 마주치면 그 안광에 홀려 시름시름 앓다 죽는다던 옛날얘기가 떠올랐다.
진짜 저거 계속 키우다가는 제 명에 못 살지.
김 대표는 축축하게 젖은 손을 주머니 안에서 문질렀다. 최인섭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김 대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둘이 서로 생명의 은인이고 그래서 친한 건 알겠는데, 너무 좀, 하하하하. 매니저랑 연예인이 너무 가까워 보여도 말이 돌아요, 여긴. 적당히 비즈니스 관계처럼 지내. 나랑 차 실장처럼 말이다.”
차 실장과 일주일에 7일을 함께 보내는 김 대표가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 알겠습니다.”
인섭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인섭에게 김 대표와 차 실장의 관계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옆에 서 있던 이우연이 슬쩍 눈가를 접으며 웃었다.
“부부처럼 지내라고요?”
“뭔 개소리야.”
“솔직히 대표님이랑 실장님, 섹스만 안 했지 부부 수준 아닙니까? 아니, 그 정도로 오래된 부부면 섹스 안 하니까, 제대로 된 부부 맞네요.”
“야! 이! 너!”
김 대표가 질색하며 소리를 내지르다가 한숨을 뱉었다.
“하아, 저런 놈을 인섭이 네가 감당할 수 있겠어?”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감당할 수 있습니다.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인섭이 얼른 말을 이었다.
“대표님이 걱정하시는 부분이 뭔지 충분히 알겠습니다. 아까 당부하신 대로, 최대한 악독하고 엄격하고 프로페셔널하고, 그리고 비즈니스적인 매니저로 일하겠습니다.”
“그래. 부탁한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영양가 없는 당부 끝나셨으면 가 볼게요.”
이우연이 최인섭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런 거!”
김 대표가 옳다구나 하고 삿대질했다. 인섭이 놀란 표정으로 네? 하고 되물었다.
“그런 스킨십. 하지 마. 이상해. 평범하지 않아. 눈에 띈다고.”
최인섭이 바로 이우연의 팔을 떨치듯 내려놓으며 알겠습니다, 하고 대꾸했다. 이우연의 눈웃음이 진해졌다.
“평범. 냉정. 엄격. …안전. 알지? 명심해라!”
김 대표가 인섭에게 재차 당부했다.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던 인섭이 이우연에게 잡혀 모퉁이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김 대표는 한숨을 몰아쉬었다.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차가 정차하자 인섭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돌아오는 답이 없다. 오는 내내 이우연은 거의 말이 없었다.
사실, 이우연은 아까부터 저기압이었다. 인섭이 차에 오르자마자 내비게이션에 저장된 제집 주소를 찍은 것이다.
이우연이 같이 살자는 말을 열댓 번가량 했지만, 인섭은 그때마다 번번이 고개를 내저었다. 한국으로 오면서 독립된 성인으로서의 삶을 살기로 부모님과 약속했다는, 이우연으로서 절대 이해하지 못할 이유를 대면서.
최인섭은 안전벨트를 만지작거리다가 저기, 하고 다시 말을 건넸다.
“화나셨습니까?”
“누가요?”
운전대를 쥔 채로 이우연이 묻는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차를 몰아 인섭이 사는 낡아 빠진 빌라를 박아 버리고 싶었다. 아까 김 대표가 말한 살인, 방화, 약탈, 강간은 아니니 상관없지 않나, 하며.
“죄송합니다.”
그제야 이우연이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아까 거짓말한 거…, 죄송합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인섭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이우연의 눈가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접혔다.
“제가 그렇게 어려운가요?”
“네?”
“아까 그거 솔직히 말했으면 제가 안 보내 드렸을 거 같아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다른 사람은 상관없지만, 인섭 씨는 저한테 솔직했으면 좋겠어요. 저도 항상 인섭 씨 앞에서는 솔직하려고 노력하니까.”
낮게 가라앉은 음성에 우울함이 묻어났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이우연은 제 본모습의 반의반도 드러내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보였다가 인섭이 천리만리 도망가기라도 하면, 누구 좋으라고.
“하긴. 저 같은 인간이 그런 노력하는 거, 인섭 씨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네요.”
“아니요, 전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 하지 마세요.”
인섭이 펄쩍 뛰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이우연의 표정이 좀처럼 풀리지 않자 인섭은 급기야 우연의 손을 움켜쥐고 정말이에요, 하고 간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씨발. 이우연은 속으로 욕을 삼켰다. 인섭이 웃는 모습도 좋지만, 이렇게 울먹거리는 눈이 취향인 것은 도저히 어쩔 도리가 없다. 타고나길 좆같이 타고난 것이다.
“그러면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네. 그럴게요.”
최인섭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있잖아. 개 인형. 차에 두면 고개 까딱까딱하는 거. 닮지 않았냐? 차 실장이 인섭을 두고 놀리는 듯 던진 말이 떠올랐다.
이우연은 손을 뻗어 인섭의 목을 움켜쥐었다. 힘을 주면 부러질 듯 가늘다.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말간 눈을 하고 인섭은 이우연을 올려다보았다.
“입 벌려요.”
갑작스러운 이우연의 명령에 인섭은 얼떨결에 입술을 벌렸다. 혀가 들어왔다. 단단하게 끝을 세운 혀가 질척이는 소리를 내며 입 안을 휘저었다. 인섭은 놀라서 안전벨트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지하 주차장이라고 해도 사람이 지나다니는 곳이었다. 누가 볼 수도 있었다.
“우…, 자, 잠….”
인섭은 이우연을 밀어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우연은 인섭이 꼼짝하지 못하도록 턱을 움켜쥔 채로 입을 맞췄다. 혀가 비벼지는 소리와 숨소리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파묻혔다.
이우연은 키스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서로 입술을 벌리고 타액을 주고받는 행위가 썩 달갑지 않게 느껴졌다. 그에게 키스는 상대의 옷을 쉽게 벗기기 위한 단계일 뿐이고, 입은 좆을 처넣을 또 하나의 구멍 정도였다.
하지만 이건 확실히 다르다.
이우연은 눈을 꼭 감은 채 입을 벌린 인섭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부끄러워하면서도 어떻게든 상대의 움직임에 맞춰 주려는 그 가련한 몸짓이, 이우연의 가학적인 연정을 자극했다.
적당히 심술만 부리다가 집에 보내 줄 생각이었는데.
찰칵. 안전벨트 클립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우연의 넓은 어깨가 어느새 한쪽으로 고스란히 무게를 실었다. 이우연은 손바닥으로 인섭의 뒤통수를 받치고 고개를 틀어 입술의 각도를 비틀었다. 깊게 맞물린 입술에서 금세 달뜬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셔츠 안쪽으로 손을 넣자 부드러운 피부가 손바닥에 감겼다. 이우연은 몸을 움츠리려는 인섭을 힘껏 끌어안았다.
그때였다. 반대편에서 다가오는 차량의 헤드라이트가 앞 유리를 비췄다. 어차피 보이지 않을 각도였기에 이우연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키스를 이어 갔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뻗어 나온 손이 이우연의 행위를 가로막았다.
“가만히 계세요.”
“…….”
최인섭이 이우연을 끌어안아 제 가슴팍으로 가리며 속삭였다.
“차 지나가면, 잠시만요, 이렇게….”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인섭이 이우연의 얼굴을 가려 준다. 인섭은 가여울 만큼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우연은 물끄러미 인섭을 바라보았다.
타인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이우연에게 몹시 소모적인 행위였다. 아주 오래전에 귀찮아서 그만둔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가끔은 불쑥불쑥 호기심이 치미는 건 어쩌지 못했다.
이 사람은 어떤 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걸까. 이 순간, 진심으로 자신을 지켜 줄 수 있다고 믿는 걸까. 기자가 마음먹고 기다리던 거라면, 지금 그 타이밍이 아니라 일찌감치 사진을 찍고 사라졌을 텐데.
어떻게 하면 이렇게 순진하고 어리석으며, 사랑스러울 수 있지.
최인섭이 주차장 밖으로 멀어지는 차의 라이트를 확인하고 한숨을 내쉰다.
“언제 놓아주실 건가요?”
이우연의 물음에 인섭이 그제야 팔에 준 힘을 풀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잡아당겨서 놀라셨죠.”
사실 이우연은 키스를 하는 와중에 차 엔진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인섭이 사는 아파트는 말만 아파트지 빌라에 가까운 형태였다. 주차장도 비좁아서 주차할 수 있는 차도 몇 대 되지 않았다. 인섭을 데려다주면서 주차장에 세워진 차의 번호와 차종을 모두 외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차를 세우며 이우연은 습관적으로 주차장의 모든 차를 확인했다. 낯선 차량은 없었다.
인섭이 여전히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누가 오는 거 눈치챘어야 하는데. 미안해요. 정신이 없어서…. 매니저 실격이네요.”
“오늘은 매니저 아니잖아요.”
“그래도….”
이우연이 흐트러진 인섭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며 말을 이었다.
“정신없던 건 피차 마찬가지예요. 이런 걸로 사과하지 말아요.”
이전에 있던 사건 때문에 이우연은 주변을 살피고 수상한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는 게 습관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굳이 그걸 입에 담지 않는다. 인섭을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저 연예인 인생 끝나면 책임져 주신다면서요.”
“네. 책임질 겁니다.”
“그럼 됐지.”
이우연이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아니요. 책임은 책임이지만, 저 때문에 이우연 씨가 일을 그만두는 건 싫습니다.”
인섭의 더없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배우로서의 이우연 씨를 좋아합니다. 될 수 있으면 오래오래 좋은 배우로 활동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인섭이 팬클럽 회장 시키면 운영 참 잘할 것 같던데. 아니, 이미 하고 있는 거 아니야?
이우연은 김 대표의 웃음 섞인 농담이 떠올랐다.
“나 배우 안 했으면 큰일 났겠네. 인섭 씨가 거들떠도 안 봤을 거 아니에요.”
“아니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배우로서의 이우연을 좋아하신다면서요.”
“평소의 이우연 씨도 좋아해요. 배우 이우연은 다른 의미입니다. 멋있고, 그러니까, 뭔가 다른 사람 같으면서도, 그러니까….”
이우연의 입가에 삐딱한 미소가 걸렸다. 인섭이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시잖아요, 제 마음.”
“모르는데.”
이우연의 뻔뻔한 대답에 최인섭은 쩔쩔맸다. 옷자락을 꾸깃꾸깃 만지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끙끙거리는 게 한눈에 들어왔다.
슬슬 그만 놀리고 보내 줘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저는 태어났을 때부터 심장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친부모님이 저를 포기하신 거 같다고 들었습니다.”
“…….”
갑작스러운 말에 이우연은 움직임을 멈추고 인섭을 바라본다.
“그렇지만 한 번도 친부모님을 원망하거나 미워한 적 없습니다. 그분들도 그들 나름의 사정이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렇군요.”
최인섭다운 발상이었다.
그냥 하는 말이나 가식이 아닌, 진심일 것이다. 죽었다 깨어나도 저로서는 갖지 못할 반듯한 마음을 지닌 상대를, 이우연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전 학교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학생이었어요. 몸도 약하고 뭐든 느리고, …우연 씨처럼 잘생긴 것도 아닌 동양인 입양아였으니까요.”
최인섭이 부끄러운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저희 가족은, 뭐라고 해야 하지…. 하하,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거든요.”
가족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쁜지 인섭의 뺨이 발그레 달아오른다.
“저희 부모님은, 친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세상의 그 어떤 분보다 훌륭하신 부모님이에요.”
이우연은 인섭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보았던 그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인섭이 어떤 식으로 사랑받고 어떻게 자랐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 선한 미소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제 목숨을 준다 해도 아깝지 않을 분들이에요. 저는 진심으로 저희 가족을 사랑해요.”
인섭이 고개를 들어 이우연을 바라본다.
“그런 분들을 뒤로하고 저는 한국으로 온 겁니다.”
“…….”
“이우연 씨와 함께 있고 싶어서, 한국에서 살기로 결심한 겁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러고 싶고요.”
이우연은 표정 없이 인섭을 바라보았다.
일생일대의 고백을 마친 인섭은 이렇다 할 반응이 돌아오지 않자 무안한지 뺨을 긁적이다가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하고 차 문을 열었다.
탁.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차 문을 다급하게 닫았다. 이우연이 뒤에서 인섭을 끌어안았다. 잔뜩 긴장했는지 인섭의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미안해요. 인섭 씨.”
“네?”
“나 같은 놈이 당신 좋아해서.”
좋아하는 마음조차 남달랐다. 보통 사람처럼 어여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뒤틀린 제 연정은 인섭의 것과 비교하면 흉측하기까지 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인섭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이우연은 인섭의 머리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오늘 같이 자 줄까요?”
이우연의 물음에 인섭이 얼굴을 붉혔다.
“일하는 거 오랜만이라 준비할 것도 많고, …저 혼자서 잘 자요.”
인섭은 살짝 아래로 눈을 내리깐 채로 말했다.
“그래요, 그럼.”
한참 더 붙들고 있을 거라 생각한 이우연이 웬일로 순순히 손을 놓았다.
“얼른 가요. 나 마음 변하기 전에.”
“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인섭이 차 문을 열고 나가는 모습을 이우연은 운전대에 기대어 바라보았다. 한참을 걸어가던 인섭이 뭔가 생각났는지 다시 차로 와서 창문을 톡톡 두들겼다. 이우연이 차창 유리를 내리면서 물었다.
“왜요?”
“하고 싶은 말이 생각나서요.”
“생각이 바뀌었어요? 전 카섹스도 좋은데.”
“아,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인섭이 우물쭈물하더니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말을 이었다.
“…저 좋아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이우연이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채, 낮게 웃었다. 인섭이 놀라서 고개를 퍼뜩 들었다.
“기분 나쁘게 들리셨다면 사과할게요.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그럴 리가.”
이우연은 운전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인섭 씨.”
“네.”
이우연은 조수석으로 고개를 내밀어 인섭에게 가볍게 키스했다. 그러고는 얼른 들어가요, 하고 그를 밀어내듯 놓아주었다. 인섭이 벌게진 얼굴을 꾸벅 숙이고는 비상구 쪽으로 걸어갔다.
이우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인섭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흔히들 APD 환자, 즉 반사회적 인격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알고 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오히려 명확하고 단순하게 감정을 느꼈다. 쾌락과 분노, 욕망 같은 일차원적인 감정이 대부분이며 감정의 중요도가 보통 사람과 좀 다를 뿐.
욕구를 제어할 필요도 방법도 터득하지 못한 인간들은 정키나 범법자로 살아간다. 다행히 자신은 어린 시절부터 본인의 정신적 결함을 받아들이고 사회와 타협하는 방식을 배워 갔다. 그래서 감정을 제어하는 데는 누구보다도 능숙하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종종, 인섭 앞에서 다스려야만 하는 잔인한 욕구가 불쑥불쑥 치솟았다. 지금도 이대로 인섭을 차로 끌고 와 그를 붙들고 밤새도록 섹스를 하는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이다.
네가 원하는 대로 뭐든 해 버린다면, 결국 네 곁에 남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다. 인간관계란 그런 것이야. 상대를 위해 인내심을 발휘할 줄도 알아야지.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의사가 해 주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걸어가던 인섭이 슬며시 뒤를 돌아본다. 눈이 마주치자 손을 흔들어 보인다. 이우연이 얼른 들어가라고 손짓하자 그제야 인섭은 공동 현관 안으로 사라졌다.
이우연은 길게 숨을 뱉었다.
“잘할 수 있다. 힘내자.”
밴을 주차해 둔 최인섭은 혼잣말로 용기를 북돋았다. 아무리 이전에 해 봤다고 하더라도 일을 하지 않은 기간이 있다. 그간 업계 사정이 바뀌었을 수도 있고 이우연의 취향이 변했을지도 모른다.
“음료, 아침, 그리고 의상이랑 헤어는 그쪽에서 하기로 했고. 위치는 찍어 뒀고. 좋아.”
인섭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차에서 내렸다. 오늘부터 일을 시작한다는 생각에 잠을 설치다가 새벽에 집에서 나왔다. 회사로 가서 차를 받아 와 이우연의 집으로 오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남았다. 최인섭은 핸드폰을 꺼내 이우연에게 문자를 보냈다.
「저 아래에 도착해 있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면 올라가도 될까요?」
한참을 기다려도 답신이 오지 않았다.
어쩌지.
사실,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면 고민할 문제도 아니었다.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우연을 태우고 가면 그만이었다. 최인섭은 잠시 고민하다가 공동 현관으로 걸어갔다.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기에 문을 열어 달라고 말할 필요도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내내 인섭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문자를 봤으면 전화가 왔을 텐데, 아무런 연락도 없다.
자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지금 올라가도 되는 거겠지. 잠을 깨워야 하니까. …늦으면 안 되잖아. 엄격한 매니저라면 응당 이렇게 했을 것이다.
최인섭은 제 행동을 합리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관 앞에 도착하고 나서도 인섭은 다시 망설였다.
초인종을 눌러야 하나,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야 할까.
고민하던 그는 벨을 눌렀다. 최대한 비즈니스적인 관계를 유지하라던 김 대표의 말이 떠오른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터폰으로 이우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