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프롤로그 (1/13)

“죄송합니다, 잠시만요. 잠시만, 지나갈게요.”

낯빛이 새하얗게 질린 청년이 연신 양해를 구하며 사람들 사이를 헤쳐 지나갔다. 지하에서 올라오는 승강기는 일 층에 도착하기 전에 만원이었다. 청년은 그대로 계단으로 뛰어 올라갔다. 숨이 끊어질 듯 차올랐지만 청년은 멈추지 않았다. 8층에 도착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청년의 눈에 데스크가 들어왔다. 허겁지겁 달려간 청년은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입을 뗐다.

“저, 차현규 환자랑….”

“401호. 저 안쪽 병실이요.”

간호사는 컴퓨터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고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청년은 그대로 달려가다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몸을 돌려 다시 데스크로 돌아왔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고는 청년은 다시 복도를 달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이대로 멎어 버리는 것은 아닌가 두려울 만큼 심장이 쿵쾅거렸다. 병실 앞에서 호수를 확인했지만, 문을 열 수조차 없었다.

괜찮을 거다. 괜찮을 거야.

사고 소식을 듣고 이곳으로 달려오는 내내, 주문처럼 외던 말이었다. 청년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문고리를 잡고 힘을 주었다.

“어! 인섭 씨 왔어?”

침대에 누워 있던 남자가 청년을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차 실장님 어떻게….”

“부러졌대. 동강.”

차현규 실장이 활짝 웃으며 제 다리를 가리켰다.

“괘, 괜찮으세요?”

“철심 박는 수술 해야 한다더라. 그래도 뼈가 깨끗하게 두 동강 나서 철심 박기는 쉽겠어. 아주 잘됐어. 안 그래?”

차 실장이 싱글벙글 웃으며 침대 옆에 선 김학승 대표에게 동의를 구했다. 죽을상을 하고 있던 김 대표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

“넌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하, 진짜.”

김학승 대표가 앞머리를 사납게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바빠도 숍에 들러 머리 손질은 빼놓는 일이 없는 그가 제 손으로 머리를 헝클어트리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최인섭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한 시간 전에 김 대표에게 문자를 받았다.

「우연이가 탄 차가 사고 났다, 병원으로 좀 와 줘.」

최인섭은 문자를 받자마자 이우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우연의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무슨 정신으로 택시를 잡아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몇 번이고 다시 전화를 걸어 봤지만 여전히 이우연의 전화기는 계속 꺼진 채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인섭의 휴대 전화도 배터리가 방전되어 택시 안에서 전원이 꺼지고 말았다.

너무도 미안하지만, 다리가 부러진 것치고 멀쩡해 보이는 차 실장을 확인하고도 최인섭은 다행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곳으로 오는 내내 그의 머릿속에 있던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그리고 그 상대는 지금 보이지 않았다.

“이, 이우연 씨는….”

인섭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울지 않으려고 애써 입술 안쪽을 깨물며 간신히 더듬더듬 물었다.

“아, 그거….”

김 대표가 말을 마치기 전에 뒤에서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그거라뇨, 대표님. 듣는 그거 섭하게.”

“왔냐.”

김 대표가 입매를 찌푸리며 대꾸했다.

최인섭은 눈을 껌뻑이지도 못하고 그대로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이우연이 특유의 커피 향이 날 것 같은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멀쩡한 모습을 확인하고도 최인섭은 한동안 멍하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오랜만이에요. 인섭 씨.”

이우연이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건넨다.

“전화를 안 받으셔서, 대체 어떻게….”

이우연이 주머니에서 박살이 난 핸드폰을 꺼내 보인다.

“처리할 일이 좀 있어서 바로 연락 못 했어요. 미안해요.”

“검사하셨습니까? 아니, 검사하셔야죠. 교통사고가 겉으로는 괜찮아도 며칠 뒤에 아픈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얼른 가서 검사해요. 제가 수속 다 밟아 두겠습니다.”

이우연은 일부러 최인섭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게 당연한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쏟아 내는 인섭을 마주하자 시커먼 수렁 저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기쁨을 차마 어쩌지 못했다.

이우연은 낮은 웃음소리를 삼키며 말했다.

“검사 마치고 오는 길이에요.”

“결과는….”

“결과도 깨끗하고요. 가벼운 타박상도 없대요.”

이우연의 대꾸에 차 실장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재수 없는 새끼, 하고 낮게 혀를 찼다.

“재수 없긴요. 차가 한 바퀴 굴러서 운전자는 다리가 부러졌는데 저는 털끝 하나 안 다쳤으면 엄청 재수 좋은 거죠. 안 그래요?”

차 실장이 목덜미를 잡고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차 실장 저래 봬도 전치 8주다. 살살 해라.”

보다 못한 김 대표가 이우연을 타박했다.

“하하하. 당연하죠. 차 실장님의 운전 중 부주의로 저도 죽을 뻔했는데 당연히 살살해 드려야죠.”

“야, 말은 바로 하자. 부주의가 아니라 갑자기 뭐가 시커먼 게 튀어나와서 그런 거잖아.”

커브를 돌려는 찰나에 시커먼 물체가 차 앞으로 튀어나오는 바람에 차 실장은 황급히 운전대를 꺾은 것이다.

“강아지인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데.”

동물 애호가인 차 실장에게 로드킬만큼은 절대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강아지는 어떻게 됐어요? 다쳤나요?”

최인섭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걱정 마세요. 애초에 다칠 개새끼가 없었으니까.”

“네?”

“검은 비닐봉지였거든요. 실장님 입원하신 김에 안과 검사도 꼭 한번 받아 보세요. 개새끼랑 비닐봉지도 구별 못하시는 거 보면 진심으로 걱정되네요.”

차 실장은 다칠 뻔한 개새끼는 거기가 아니라 이 병실에 한 마리 있다고 외치고 싶은 것을 꾸욱 참아 냈다.

“아무튼 강아지가 아니라 천만다행이네요.”

최인섭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이우연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다.

“인섭 씨였으면 어떻게 했을 거예요?”

“네? 뭘 어떻게.”

“그 상황이었으면 핸들을 꺾으셨나요? 물론, 실제 개새끼가 있다는 전제하에요.”

“당연히….”

이우연의 눈웃음은 일품이었다. 특히나 상대를 직시하며 짓는 눈웃음에는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내로라하는 모 여배우도 이우연이 눈웃음을 짓고 대사를 치면 자기 대사를 까먹어 몇 번이나 엔지를 낸다는 후문이 돌 정도였다.

“말해 봐요. 나인지 개새끼인지.”

이우연이 눈웃음을 지은 채 시선을 맞추며 끈질기게 묻는다. 최인섭은 차마 가정으로라도 개를 치겠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이우연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점점 진해졌다.

“운이 좋아서 안 다친 거예요. 정말 큰일 날 수도 있었어요.”

“네.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운이 따를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게, 그러니까….”

커다란 눈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이우연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바라본다.

…어쩌다 저런 개새끼한테 걸려서.

차 실장과 김 대표는 침울한 낯으로 눈빛을 교환했다.

“어흠, 어, 인섭아. 뭐라도 마실래? 음료수 줄까?”

김 대표가 인섭을 구해 주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열며 물었다.

“괜찮습니다.”

주제가 환기되자 인섭이 얼른 고개를 들어 대답했다.

“괜찮긴. 너 얼굴이 땀범벅이다.”

“그러게요, 인섭 씨. 웬 땀을 이렇게 흘려요.”

이우연이 인섭의 목을 감싸 쥐며 물었다.

“계단을 뛰어오느라….”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이우연이 설핏 눈가를 찌푸렸다. 정상인처럼 보여도 무리해서는 안 되는 몸이었다.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왜 엘리베이터 안 탔어요?”

“기다릴 새가 없어서요.”

“내 걱정 많이 했어요?”

“네, 당연히….”

대답하던 최인섭이 김 대표와 차 실장을 발견하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말해 봐요. 얼마나 걱정했어요?”

서늘한 손가락이 목덜미에 닿았다. 인섭은 어깨를 움츠리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많이 걱정했습니다, 하고 대꾸했다. 붉게 물든 인섭의 목덜미를 내려다보던 이우연의 눈가에 웃음이 스쳤다.

“나 정말 괜찮아요.”

“다행입니다.”

“기왕이면 있지도 않은 개새끼보다 더 걱정해 주면 좋을 텐데.”

이우연이 한 마디 한 마디를 더할 때마다 인섭의 얼굴은 점점 붉어졌다.

“그만해. 그러다 인섭이 울겠다.”

김 대표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이우연의 만행을 가로막았다. 이우연이 그제야 고개를 돌린다.

“그럼 어떻게 하실 건가요?”

“뭘 어떻게 해?”

“매니저요.”

인섭이 일을 그만둔 이후로 차 실장이 주욱 이우연의 매니저를 맡고 있었다. 연봉 500프로 인상이라는 파격적인 제안 끝에 이루어진 협상이었다. 차 실장이 사직서를 내던질 때마다 김 대표가 떼어 준 회사 지분만 해도 만만치 않은 양이었다. 그럼에도 차 실장은 늘 가슴 속에 사직서를 품고 다녔다.

“당장 내일부터 스케줄 있잖아요. 매니저 구해야죠.”

“어떤 선량한 인간 인생을 조지려고… 헉.”

주절주절 마음속 진심을 내뱉던 차 실장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이우연이 가느다랗게 웃으며 차 실장을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흐음, 하고 입을 다문다.

“왜! 뭐! 뭐가!”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느낀 차 실장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가능하실까 해서요.”

“뭐가 가능해!”

“액셀이랑 브레이크는 오른쪽 발로 밟잖아요. 영 불가능은 아니다 싶네요.”

“…….”

차 실장의 낯이 창백하게 질렸다. 부러진 다리는 왼쪽이었다. 즉, 차 실장에게 부러진 다리로 매니저 업무를 수행하라는 뜻이다.

“아서라. 현규 죽는다.”

김 대표가 제 친구의 편을 들고 나섰다.

“하하하하. 농담이죠.”

이우연의 웃음소리가 병실 공기를 가볍게 흔들었다. 하지만 병실에 있는 세 사람은 동시에 생각했다.

…진심이구나, 저거.

“그런데 정말 어쩌실 거예요?”

“그러게나 말이다. 아무한테나 맡길 수도 없고.”

김 대표가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한다.

“대표님이 해야지요.”

차 실장이 베개에 몸을 누이며 김 대표를 툭 친다.

“미쳤어? 내가? 내가 미쳤다고 저 미친…. 하하, 아니, 명색이 회사 대표인데 어떻게 매니저를 해 주냐. 소문 이상하게 난다.”

“모양새가 좀 그렇긴 하겠네요.”

차 실장도 떨떠름한 표정으로 동의했다.

“많이 그렇지, 아무렴.”

김 대표가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대충 아무나 뽑아요. 보름가량만 쓰고 잘라 버리면 되잖아요.”

이우연이 아무렇지도 않게 노동법과 인간의 도리에 어긋나는 말을 내뱉었다.

“보름? 누구 맘대로 보름? 나 전치 8주 나온 몸이야. 8주 꽉 채워서 병가 낼 거라고.”

차 실장이 부러진 제 왼발을 가리키며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인섭은 그제야 다리가 부러졌는데도 차 실장이 그토록 발랄하던 이유를 알아챘다.

“…3주면 운전은 가능하지 않을까?”

김 대표가 조심스럽게 방금 자신이 했던 말을 철회했다.

“현규 죽어요.”

차 실장이 단호하게 대꾸했다.

“그 정도로는 안 죽어.”

차 실장이 주먹을 휘두르자 김 대표가 가뿐히 피하며 낄낄 웃어 댔다. 최인섭은 진심으로 부럽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아, 진짜 어쩌냐. 갑자기 사람을 어디서 구해. 우연이 쟤 곧 영화 개봉해서 한창 바쁜데 언제 또 일을 가르치고 있어. 어디서 경력 있고, 입도 무겁고, 저 인간 심기도 거스르지 않는 유능한 매니저 안 떨어지나.”

김 대표의 한탄이 끝나기 무섭게 최인섭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저… 그거 제가 하면 안 될까요?”

“뭐?”

“뭐라고?”

“뭐라고요?”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최인섭에게 향했다.

“유능하지는 않지만, 입은 무겁습니다. 경력도 있고요. 이우연 씨 취향 같은 것도 알고 있으니까 적어도 우연 씨 심기 거스르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아마.”

최인섭이 커다란 눈을 슴벅거리며 슬며시 동의를 구한다. 이우연은 고개를 슬쩍 옆으로 기울인 채 물었다.

“지금 그거 농담하신 건가요?”

이우연의 물음에 최인섭이 어깨를 움츠리며 죄송합니다, 하고 얼른 사과했다.

“뭐가 죄송해요.”

“제가 일 안 하는 사이에 취향이 바뀌셨을 수도 있는 건데, 미처 고려를 못 하고….”

이우연이 이건 또 무슨 개소리냐는 표정으로 최인섭을 내려다보았다.

“필요하면 다시 공부하겠습니다.”

비장한 어투로 덧붙인 말을 보아하니 영 농담은 아닌 모양이다. 이우연은 웃음을 삼켰다.

심기를 거스른다니. 정말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열흘 만이었다. 지방 촬영 스케줄 때문에 그간 서로 전화 통화만 하며 지냈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병원 침대에 눕혀 범해 버리고 싶은 걸 참는 게 고작인 사람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네.

이우연은 손을 뻗어 땀에 젖어 이마에 들러붙은 인섭의 머리카락을 올려 주었다.

“공부하실 필요 없어요. 제 취향 그대로니까.”

“그럼, 제가….”

금세 최인섭의 커다란 눈이 반짝인다.

이우연은 잠시 고민했다. 지금이라도 인섭을 병실에 딸린 화장실로 끌고 들어가 바지를 끌어 내려 뒤에서 박아 버리면 안 될까, 하고.

“안 돼요.”

이우연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최인섭은 눈에 띄게 기가 죽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차 실장이 왜 안 되는데, 하고 이유를 물었다. 기실, 최인섭은 하늘에서 내린 이우연의 매니저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인섭 씨 제 매니저로 부리기 싫어요.”

“…나는 부리고 싶고?”

“차 실장님은 건강하시잖아요.”

이우연이 산뜻하게 그 이유를 뱉어 준다.

“나보다 건강한 놈, 이 병원에서 당장 백 명가량 찾을 수 있거든?”

차 실장이 상체를 벌떡 일으킨 후 외쳤다.

“그럼 찾아오세요. 대신 검은 비닐봉지랑 개새끼는 구분할 줄 아는 인간으로.”

“…….”

차 실장이 목덜미를 잡고 도로 침대에 누웠다.

“제가 할게요. 할 수 있어요. 검은 비닐봉지랑 개도 구분할 줄 압니다.”

최인섭이 다시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우연이 설핏 입매를 찌푸렸다.

“저 그리고 건강해요. 얼마 전에 검진 결과 보셨잖아요.”

“무리하지 마세요.”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안 그래도 다음 주부터 방학이라 아르바이트 자리 찾으려던 참이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인섭은 대학을 다니기 시작했다. 외국인 전형으로 입학해 한국 문학을 전공하는데 공부에 재미를 들였는지,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읽곤 했다. 체력은 약한 주제에 집중력과 끈기는 남달라서 한번 책을 들면 종장을 보기 전까지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법이 없었다.

그러다 코피를 쏟은 적도 여러 번이다. 급기야 이우연의 입에서 책을 다 불살라 버리고 싶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 말에 겁을 먹은 인섭이 눈을 휘둥그레 뜨자 이우연은 농담이에요, 하고 웃어 주었다. 물론, 진심이었다.

“아르바이트를 왜 해요.”

“제 나이에 부모님 신세를 계속 질 수는 없잖아요. 매니저 일 못 하더라도 다른 일 찾을 겁니다.”

인섭의 눈에 굳은 결의가 보였다. 순하고 사람 좋은 성격인데 한번 마음먹으면 어지간해선 물러서는 일이 없었다.

“알겠어요. 이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죠.”

최인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김 대표의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 메시지 수신음이 들렸다. 쌓여 있던 메시지를 차례대로 읽던 김 대표가 한숨을 내쉬었다.

“기자들 벌써 병원 앞에 진 치고 있다네.”

“갔다 오세요.”

“네가 음주운전 하고 차 때려 박아서 중환자실에 누워 있다는 소문이 돈단다.”

이우연이 아, 그래요? 하고 저랑 일말의 상관도 없다는 투로 산뜻하게 대꾸했다. 그 산뜻함에 김 대표의 속은 시커멓게 썩어 들어갔다.

“반박 기사 내야지.”

“기사를 제가 씁니까? 기자들이 쓰지.”

“가서 얼굴 한 번만 비춰. 이 기회에 기자들 호감도 사고 좋잖아.”

“사람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거 취재하러 온 씨발 것들한테 호감 사서 뭐 해요?”

“…우연아.”

김 대표가 제발 언성을 낮춰 달라고 손짓하며 이마를 짚었다. 아무리 일인실이라고 해도 언제든 의료인이 들어올 수 있는 병원이었다.

“됐어. 내가 내려가서 운전자 나고, 다친 것도 나라고 말할게. 어차피 웬만한 기자들은 내 얼굴 아니까.”

차 실장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다 다리에서 올라오는 통증에 읏, 하고 신음을 삼켰다. 그걸 본 최인섭이 간호사 선생님을 부를까요? 의사 선생님을 부를까요? 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이우연은 슬슬 피곤해졌다. 이대로 뒀다간 최인섭을 병원에서 끌고 나가는 일이 요원해질 것 같았다.

“5분만 할게요. 5분 지나면 바로 올라올 겁니다.”

이우연의 말에 김 대표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래. 그냥 얼굴만 비추면 돼. 5분이 뭐냐, 3분이면 된다.”

김 대표가 벗어 두었던 재킷을 집어 들고 이우연과 함께 병실을 나섰다. 병실 문이 닫히자 차 실장은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베개에 고개를 묻었다.

“너스 콜 할까요?”

“됐어. 진통제 맞고 있는데, 뭘.”

“뭐 필요하신 거 없으십니까?”

인섭이 베개를 고쳐 주며 물었다.

“나 물 좀 줄래.”

인섭이 얼른 컵에 물을 따라서 차 실장에게 건넸다.

“천천히 드세요.”

차 실장은 인섭의 순진무구한 눈동자를 마주하자 문득,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무리 이만한 적임자가 없다고 해도, 착하고 순진한 청년을 악마의 구렁텅이에 처넣는 꼴이나 다름없는 건데.

“저기, 인섭 씨.”

“네. 실장님.”

“일, 그거 영 거시기하면 안 맡아도 돼.”

최인섭이 어, 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한테는 솔직히 말해도 돼. 김 대표한테는 내가 말해 둘 테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인섭이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하나도 좆같지 않습니다.”

물을 마시던 차 실장은 그대로 사레들려 쿨럭쿨럭, 기침을 내뱉었다. 인섭이 깜짝 놀라서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괜찮으세요?”

“지금 뭐라고….”

욕이라고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던 순진한 청년의 입에서 저속한 표현이 나오자 차 실장은 제 귀를 의심했다.

“거시기…. 남자 성기 지칭하는 표현 아닌가요?”

인섭이 비속어나 인터넷 용어, 사투리에 약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엄밀히 따지면 미국 국적을 가진 외국인이니까.

차 실장이 하하하, 하고 힘없이 웃자 인섭이 제 실수를 알아챘는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죄송합니다. 다른 뜻이 있는 줄 모르고….”

“아냐. 모를 수도 있지.”

차 실장이 진심을 다해 인섭을 도닥였다. 그 뜻을 너무 잘 알고 틈만 나면 써 대는 이우연 같은 놈도 있는데….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뭔가를 끼적이며 적는 인섭을 보고 차 실장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 버릇 여전하네.”

수첩에 막 거시기 뜻 찾기, 라고 적던 인섭이 배시시 웃었다.

저렇게 착하고 성실한 청년이 어쩌다가.

그간의 일들을 떠올리자 차 실장은 목이 콱 메어 왔다.

“인섭 씨. 우연이가 잘해 줘?”

“네? 아…, 예.”

뺨은 물론이고 목덜미까지 붉어진 최인섭이 어물어물 덧붙였다. 엄청 잘해 주세요, 라고.

차 실장은 이를 사리물었다. 그 악마 같은 놈이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일까.

“인섭 씨. 혹시나 해서 말해 두는 건데, 그놈이 만약에, 만에 하나라도 너한테 몹쓸 짓 하거나 그러면 나나 김 대표한테 꼭 말해. 그리고 모를까 봐 알려 줄게. 우리나라 경찰은 112다.”

인섭이 펄쩍 뛰며 두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그런 일 없습니다. 경찰이라니요.”

“외워 둬. 요긴하게 쓸 일이…. 하아, 아니다. 삼십육계 줄행랑이란 말이 있거든?”

최인섭이 수첩을 꺼내 차 실장이 사용한 단어를 적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뭔 일 생기면 도망치라는 뜻이야. 알겠지?”

“알긴 뭘 알아요.”

이우연의 음성이 그림자와 함께 낮게 드리운다.

“으악! 깜짝이야! 넌 어떻게 된 놈이 발소리도 안 내!”

“냈어요. 실장님 귀가 어두워서 못 들으신 거지. 이 김에 청력 검사까지 받으세요.”

이우연이 최인섭의 어깨에 팔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누가 도망쳐요? 응?”

“아니, 그게….”

차 실장이 필사적으로 눈을 피하며 자리에 도로 주섬주섬 누웠다.

“인섭 씨. 나 버리고 도망칠 거예요?”

이우연의 물음에 인섭이 열심히 고개를 내저었다. 이우연이 인섭의 어깨를 가볍게 도닥였다.

“그래요. 나도 9시 뉴스에 나가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진의를 알면 섬뜩한 한마디였다. 차 실장은 서늘해진 병실 공기에 시트를 어깨까지 끌어다 덮으며 물었다.

“너 인터뷰는.”

“기자들이 4층까지 올라와 있어서 사진만 찍고 끝냈어요. 대표님은 볼일 좀 보고 올라오신대요. 저희는 먼저 가 볼게요.”

“그래. 얼른 가라.”

차 실장은 손을 두어 번 내저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 차 실장은 눈을 감았다. 솔솔 몰려오는 잠기운에 의식을 맡기려는 찰나, 다시 병실 문이 드르륵 열렸다.

“…왜 또.”

차 실장이 짜증 섞인 어투로 중얼거렸다. 재수 없을 만큼 반듯하고 규칙적인 발소리만 들어도 상대가 누구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못 드린 말씀이 생각나서요.”

이우연이 침대 곁으로 뚜벅뚜벅 걸어온다. 선량한 아름다움을 지닌 미청년이 허리를 굽혀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차 실장님.”

“뭔데.”

겉가죽 안에 도사리는 악마의 존재를 아는데도 차 실장은 일순 이 새끼 존나 잘생겼네, 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저 요즘 운동 시간도 늘리고 식단 조절도 철저하게 하는 중인 거 아시죠?”

“아, 알지.”

원래도 이우연은 자기 관리를 잘하는 편이었지만, 요즘 들어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철저하게 관리 중이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해 주니 소속사로서는 기뻐해야 하는데도, 이우연의 본모습을 아는 차 실장은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김 대표는 저놈 혹시 약하는 거 아니냐고 불안에 떨 정도였다. 차 실장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떨떠름한 마음으로 이우연을 지켜보던 차였다.

“저 오래 살고 싶어요.”

이우연이 담담하게 제 속내를 고백했다.

“뭐?”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고 싶다고요.”

이우연을 알 만큼 안다고 자부하던 차 실장이었지만, 적잖이 당황했다. 눈앞의 이우연이 일순 너무도 인간다워 보인 터다.

사람이 좋은 사람을 만나면 개과천선하기도 한다던데, 얘도 설마….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그냥 밟아요.”

“뭐?”

“개든 사람이든, 밟고 지나가라고요. 한 번만 더 그런 식으로 운전하면.”

이우연은 끝말을 맺지 않고 하하, 웃으며 몸을 바로 세웠다. 다음 말은 필요치 않았다. 구태여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우연은 하얗게 질린 차 실장의 어깨를 두드리며 쾌차하세요, 하는 영혼 없는 한마디를 내뱉고 병실을 나갔다.

차 실장은 제 생각이 몹시도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개과천선은 개새끼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 마련된 단어였다.

“…인섭아. 112야….”

차 실장은 쓸쓸한 한마디를 중얼거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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