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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가지록 외전 (14/14)

호가지록 외전

칠주야

마차는 울퉁불퉁하고 좁은 길을 한참동안 달렸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길이 마침내 끝을 보였다. 이제 이 짧은 동행의 끝은 그리 멀지 않았다. 이 산길의 끝에 있을 관도가 나오면 고광윤은 싫어도 그를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이 길이 이대로 계속되었으며 s하고 수없이 바래왔지만 길의 끝은 이제 눈에 보일 정도로 다가왔다. 고광윤은 안타까움에 애가 탔다. 두 평 남짓한 공간은 다리를 뻗으면 닿을 만큼 좁아 숨소리마저 크게 전해졌다. 정신이 아득할 정도로 황홀한 이 공간이 이제 곧 끝난 다는 사실에 고광윤의 가슴 한구석이 묵직하게 무거워졌다. 

무어라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그 한마디에 이 모든 것이 환상처럼 와르르 무너질까 두려워 입조차 열 수 없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 공간이 계속되었으면 간절히 원하였다. 

그리고 그런 고광윤의 뜻을 알아챈 것처럼, 관도를 달리는 마차의 지붕 위로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고광윤의 마차가 설 이유가 없는 산 중턱에 섰을 때부터 무언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부산스럽게 병사들과 내관들이 오가며 찬참을 뜸을 들이는 것이 뭔가 일이 생겨도 단단히 생긴 듯하였다. 고광융은 지체 않고 마차의 문을 열고 내관을 불렀다. 

“무슨 일이냐?”

“송구합니다. 길이 막혀서...”

“길이 막혔다?”

 내관이 땀을 뻘뻘 흘리며 가리키는 곳을 보니 엄청난 흙더미가 내려앉아 산길을 막고 있었다. 병사들이 나서서 흙을 치우고 있었지만 빗물에 미끄러져 내려오는 토사에 길을 쉬 뚫리지 않았다. 이른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점차 그 방울이 룩어져 마차가 섰을 때쯤에는 폭우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폭우라하여도 내린 것이 잠시인데 겨우 이 정도에 길이 막히다니. 고광윤은 어이가 없어 인상을 찡그렸다. 

“겨우 이 정도에 길이 막히다니.”

“아무래도 가뭄으로 땅에 힘이 없어 이리된 것 같습니다.”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쩔쩔매는 내관의 말에 고광윤은 혀를 차고 밖을 보았다. 아직 해가 떠 있을 시간이건만 순식간에 몰려든 먹구름에 하늘이 어두컴컴했다. 병사들이 횃불을 들고 빗속에서 흙더미를 치우고 있었지만 이는 구멍 뚫린 배 안에서 손으로 바닷물을 퍼내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고광윤은 병사들이 흙더미를 치우고 있는 산길을 바라보다 반대편으로 난 길을 보았다. 

“저 길은 어디로 통하느냐?”

고광윤의 말에 내관이 부산스레 병사들과 함께 흙을 치우고 있던 길잡이 사내를 불렀다. 길잡이 사내는 흙투정이인 차림으로 냉큼 내관의 옆에 섰다. 

“저 길이 더이로 통하느냐?”

내관이 묻자 길잡이 사내가 답했다. 

“저리로 가면 하관이 나옵니다.”

고광윤이 내관을 제치고 묻자 길잡이 사내가 황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황제가 자신에게 직접 말을 건 것을 믿을 수가 없다는 듯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하관의 가장 가까운 성시는 소운성입니다.”

“소운성이라면 도성과도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입니다.”내관의 말을 들은 고광윤이 길잡이 사내에게 물었다. 

“지금 하관으로 향하면 오늘이 지나기 전에 당도하겠느냐?”

“밤이 늦겠지만 오늘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사내의 대답에 고광윤은 잠시 미간을 찡그리고 있다 마차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잠든 아이를 무릎위에 재우고 있는 호운 도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지, 고광윤이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어찌할 테냐. 이 길은 지나지 못하게 되었는데.”

고광윤의 물음에 호운은 잠시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도 비를 맞으며 병사들이 토사를 치우는 모습이 보였다. 저대로라면 절대로 통과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억지로 통과를 하려다 빗물에 휩쓸려 내려오는 토사에 변을 당할지도 모른다. 호운이 내릴 답이 하나뿐이라는 것을 안 고광윤이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일단 하관으로 가겠느냐? 이대로라면 이 길을 언제 다시 사용할 수 있을지 예측할 수 없으니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그리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고광윤의 말에 호운은 고민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길이 막힌 이상 이곳에서 억지로 산길로 향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결국 호운은 잠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심스레 대답했다.

“그리하겠습니다.”호운의 대답에 고광윤은 헛기침을 하더니 내관에게 말했다. 

“병사들에게 하관으로 향할 차비를 하라 이르라.”

“네. 황상.”

 내관이 부리나케 달려가는 것을 본 고광윤이 문을 닫았다. 두꺼운 마차의 문이 닫히자 시원하게 들리던 빗소리가 한 겹 멀어졌다. 두꺼운 막에 감싸진 마차안에서 고광윤이 다시 작게 헛기침을 했다. 

“춥지는 않으냐?”

갑작스레 내린 비로 기온이 많이 쌀쌀해져 있는 상태였다. 두꺼운 겉옷을 걸친 자신과 달리 호운과 아이는 얇은 경장 차림이니 충분히 추위를 느낄 수도 있다 생각한 고광윤이 물었다. 

“옷을 더 가져오라 할까?”

“아닙니다. 춥지 않습니다.” 지금 호운과 아이가 입고 있는 옷은 고광윤이 내관들에게 명해 낸 옷이라 무척 고급이다. 평소에 호운이 입고 있는 옷보다 두껍고  촘촘하게 짜진 옷감은 방한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리고 마차 안에 시간마다 뜨겁게 데운 물을 놓아 공기를 따스하게 하니, 밖에서는 입김이 나올 정도였지만 마차 안에서는 더위를 느낄 정도였다. 호운의 대답에 고광윤은 또다시 헛기침을 했다. 할말이 없으니 자꾸 헛기침이 나왔다. 

 그때 병사들이 재정비를 하고 마차를 둘러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곤히 잠들어 있던 아이가 잠투정을 하며 호운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호운은 그런 아이의 등을 토닥이고 머리를 쓸어주었다. 그야말로 일상 속에서 볼 수 있는 보통 동작이었음에도 아이의 머리를 쓸어 넘기는 호운의 손가락을 본 고광윤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였다. 마차안의 불빛에 비춰진 창백한 손가락이 먼 과거, 그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보았던 어떤 광경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마치 홀린 듯 멍하니 그 손가락을 바라보던 고광윤은 다시잠투정을 하는 아이를 보고 제정신을 찾았다. 마치 백일몽을 군 것처럼 멍하였던 정신이 돌아오자 어떤지 낯이 뜨거워졌다. 고광윤은 헛기침을 하며 일부러 창밖으로 시선을 도렸다. 창 밖에는 여전히 굵은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고광윤은 호운을 처음 본 날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것은 모든 사실을 안 이후 그를 가장 괴롭히는 일 중 하나였다. 호운은 분명 고광윤을 처음 만난 그날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광윤은 그때 자신이 어떠했는지, 호운이 어떠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처음으로 안아본 사내아이였다는 인상이 어렴풋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시기, 고광윤은 왕비 옥씨에게서 첫 아들인 소양군을 얻었다. 비록 힘이 약해 옥씨 일족의 여인을 아내로 맞긴 하였지만 고광윤은 옥씨를 임신시킬 생각은 없었다. 때문에 옥씨의 곁에 사람을 심어두어 옥씨의 달거리의 날싸를 계산하고 그녀와 잠자리를 하였는데, 어이된 영문인지 그녀가 덜컥 임신을 해버렸다. 고광윤은 어떻게 해서든 옥씨의 뱃속의 아이를 없애려 하였다. 그러나 옥씨는 임신을 하자마자 태교를 핑계 삼아 옥씨 일족의 저택으로 가 버렸다. 결국 고광윤은 소양군이 군으로 책봉되어 그의 후계자로 인정받은 후에야 처음으로 얼굴을 보았다. 비록 자신의 피를 아이였지만 고광윤은 소양군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가 마땅치 않았다. 외모는 자신을 닮았지만 옥씨의 피를 이었다는 것만으로도 고광윤은 소양군을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할수 없었다. 소양군의 존재는 고광윤에게 또 하나의 제거해야할 암적 존재에 불과했다. 그 후로 고광윤은 만약에 생길지도 모를 사태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진한의 모든 황족들이 그러하듯 고광윤 또한 성욕이 왕성했다. 허나 그 왕성한 성욕을 그대로 발휘하다가는 진성왕 꼴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기에 대책을 강구해야했다. 실수는 소양군 하나로 족했다. 

그렇기에 고광윤은 그 후부터 초경을 맞지 않은 동녀만을 상대했다. 아직 채 발달도 못한 기관으로 고광윤을 받아들이는 계집아이들은 십중팔구 피를 봤고 개중에는 하혈을 하다 죽은 계집아이도 있었다. 그러나 고광윤은 자신을 상대한 계집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에 오히려 안심했다 때로는 일부러 잠자리에서 상대의 목을 졸라 죽이기도 하였다. 죽기 직전의 계집아이가 선사하는 압박감이 고광윤을 더욱 흥분시켰기 때문이다. 처음 임신을 피하려 동녀를 상대하였던 목적은 어느새 쉽게 부러지는 목이나 더한 성적만족감으로 변질되었다. 그때도 그랬다. 고광윤은 단지 자신의 흥분을 풀기 위해 호운을 품었다. 그때 월왕을 처단하라는 황명을 받고 길을 나선 고광윤은 고양감으로 인해 흥분이 절정에 이르러 있었다. 그는 그 흥분을 풀 대상을 찾으라 부하에게 명했고 부하는 금 삼십 냥에 한 사내아이를 사왔다. 그때는 아무 의미도 없었던 삼십 냥짜리가 호운이었다. 

동녀가 없으니 사내아이로 참으라는 부하의 말에 화가 치밀기도 했다. 만약 다른 부하가 그런 건방진 말투를 썼다면 당장에 목이 잘려나가도 부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부하는 선황에 고광윤에게 붙여준 최초의 부하였다. 그는 결코 황제가 되지 못할 황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고광윤에게 성심을 다했다. 어찌보면 고광윤에게 있어 유일한 충심을 가진 부하가 그였다. 

그 부하의 강권에 사내아이를 안았다는 기억은 어렴풋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고광윤은 결코 그 당시의 호운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 당시 그에게 호운은 자신이 품어왔던, 혹은 죽여 왔던 수많은 계집아이들과 하등 다를바 없는 존재였다. 설마 그런 기억 속에도 남지 않은 존재가 훗날 고광윤의 심장을 틀어쥔 존재로 변할 줄 그 누구도 집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탓인지 고광윤은 종종 어린 호운이 나오는 꿈을 꾸곤 했다. 아직 소년인 호운은 그의 기억 속의 여러 몽상과 다름 없이 흐릿한 존재였다. 가끔 상상을 하려 해도 편린조차 남지 않은 흔적을 겨우 유추하는 것이 전부인 그의 유년은 고광윤의 성감을 자극했다. 형체도 그 무엇도 알 수 없는 그는 고광윤의 꿈을 휘저었다. 고광윤은 꾸속에서도 물에 빠진 사람처럼 형제도 없는 것을 향해 손을 뻗는다 그러나 꿈에서 고광윤에게 남는 것은 오직 싸늘하게 식은 침상뿐이다. 

 가끔, 그런 꿈을 꾸고 나면 마치 어린아이처럼 속옷을 적시고 일어날 때가 있었다. 처음에는 생전 겪어보지 못한 경험에 적잖게 당황했다. 몽정을 하던 시절은 그야 말로 까마득히 옛날 이니 말이다. 그러나 몇 번이나 반복된 몽정에 고광윤은 익숙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 꿈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런 고광윤의 마음의 변화처럼 꿈속의 호운도 달라졌다. 언제나 잡힐 듯 잡히지 않을 듯 아른거리던 호운은 어느새 고광윤의 품으로 나긋이 안겨들어 요사스럽게 웃게 되었다. 하얀 다리는 어둠 속에서도 윤이 났고 눈읏음을 치는 눈매는 고광윤을 휴혹하기 위해 떨리고 있었다. 하얀 다리가 고광윤의 허리를 두르고 요사스럽게 움직이면 고광윤은 참지 못하고 온 몸으로 호운을 끌어 안았다. 그리고 그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강하게 움켜쥐고 격한 허리 짓을 했다. 그러면 작은 호운은 어느새 팔다리를 쭉쭉 늘려와 고광윤의 품 안에 뿌듯이 안겨올 만큼 켰다. 그리고 하얀 손으로 고광윤의 등에 매달려 뜨거운 한숨을 흘렸다. 애무하듯 어깨를 끌어 안은 하얀 손의 움직임에 고광윤은 잠시도 버티지를 못했다. 

덜컹!

몽상 속에 빠져 있던 고광윤은 마차가 크게 흔들리는 느낌에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만 하여도 고광윤의 아래에서 허리를 흔들고 있던 호운이 어느 샌가 고광윤의 맞은 편에 앉아 있었다.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는 호운의 손가락을 멍하니 보다 백일몽을 꾼 것이다. 수 없이 몽상과 굼속에서 보아왔던 손가락이 눈앞에서 움직이는 모습은 너무나 쉽게 그를 유혹했다. 가능하며면 저 손가락에 닿고 싶었다. 그리고 저 손목에 닿고, 저 팔에 닿고 저 몸을 품에 안고 싶었다. 그러나 고광윤은 의자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눈앞에 호운이 앉아 있는 것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호운을 향한 망상을 수 없이 반복한 끝에 지금도 구을 꾸고 있는 듯하였다. 금방 끝나리라는 예상과 달리 좀 더 길게 이어지는 동행은 고광윤의 이지를 흐리게 하였다. 4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그동안 고광윤은 호운이 없는 낮과 밤을 보내왔다. 없으면 죽을 것 같고,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4년이 지난 기금 그는 죽지도 미치지도 않았다. 그리고 지금 호운은 그의 눈앞에 있다. 이 광경에 현실감을 가지라는 것이 무리한 요구였다. 이미 고광윤은 호운을 단념하고 있었다. 두 번 다시 두 사람의 연이 이어질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건만, 인연은 기묘한 형태로 호운과 고광윤을 엮어 놓았다. 마차는 마침내 넓고 편탄한 관도로 접어 들었다. 길잡이가 말했던 하관이라는 마을로 향하는 관도인 듯 하였다. 마을은 산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지 관도에 이른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들이 준비를 위해 말을 몰고 앞서 덜려 나갔다. 병사들이 말을 몰고 달려 나가자 마차도 속도를 냈다. 이미 발은 깊어져 자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마부는 조금이라도 빨리 황제를 마을 안으로 모시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 생각하며 속도를 냈다. 그러나 그것은 고광윤이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어쩌면 마을에 도착하면 하루 이틀을 시간을 벌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길을 언제까지 저렇게 막아 놓을 수 없으니 막힌 길은 조만간 통행이 재개될 것이다. 그것은 곧 천행 같은 동행을 끝을 뜻했다. 고광윤은 고민했다. 그러나 마차는 야박하게 마을로 달려가 고광윤의 고민을 더욱 무겁게 하였다. 쉼 없이 이어지는 질주에 고광윤의 한숨이 깊어졌다. 

우당탕! 쾅!

그때, 뒤따르던 행렬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비명이 섞여 울렸다. 소리로 보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이 분명했다. 

“무슨 일이냐.”

 고광윤이 창밖으로 묻자 마차의 앞 에 매달려 있던 내관이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뒤따르던 짐마차가 빗길에 미끄러졌다 합니다.”

“짐마차가?”

지금 일행 중에 짐마차라 부를 것은 호운이 몰고 온 마차뿐이다. 그 말에 호운이 당황한 얼굴로 아이를 자리에 뉘여 놓고 얼른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어찌된 겁니까?”

호운이 묻자 내관은 고광윤의 눈치를 살폈다. 호운에게 대답을 해주어도 되겠느냐는 듯한 시선에 고광윤이 고개를 끄덕이자 내관이 빠른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짐마차의 기둥이 빠진 듯 하네.....만.”

 호운에게 하대하던 내관은 고광윤의 날카로운 눈빛에 기가 죽은 듯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호운은 그런 고광윤과 내관의 눈빛 교환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그는 마차의 기둥이 빠졌다는 말에 얼른 타고 있던 마차의 문을 열고 바으로 나섰다. 억수같이 내리는 빗속으로 호운이 성큼 나서자 고광윤이 당황해 그 뒤를 따라 내렸다. 순식간에 젖어 버린 호운을 보고 고광윤이 무의식중에 자신의 옷을 벗어 그의 머리에 씌웠다. 

“비가 내리지 않느냐!”

 호운은 고광윤이 그러는 것도 눈치 채지도 못한 것인지 빗속에 처박힌 마차를 보고 있었다. 마차는 바퀴 하나가 빠지고 몸체 아래가 심하게 부서진 채 기울어 진 모습으로 빗속에 처박혀 있었다. 내관은 황제가 비를 맞고 있는 것에 대경하였지만 그보다 더 대경한 것은 황제가 자신의 겉옷을 평범한 사내에게 벗어주었다는 것이었다. 

“아....”

호운은 진창에 처박힌 마차를 보고 말도 잇지 못했다. 병사들이 횃불을 들고 어둠 속에서 부서진 마차를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바퀴 하나가 아예 빠져러니 마차를 세우기란 쉽지 않았다. 다행이 마차를 몰던 망아지는 무사한 듯 보였지만 마차가 이래서는 방법이 없었다. 넋을 잃고 선 호운을 보던 고광윤이 말했다.

“마차는 병사들에게 일러 가져오라 하면 되니 마차에 오르거라. 다 젖지 않았느냐.”

“하지만 마차가...”

“지금 이리 비를 맞고 서 있다고 답이 나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고광윤은 호운이 비를 맞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신경 쓰였다. 지금 자신 또 한 젖은 생쥐꼴이었지만 지금 그에게 그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오직 눈앞의 호운이 비를 맞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고광윤의 채근에 호운은 흠칫하고 자신의 어깨를 보았다. 그는 그때야 자신이 고광윤의 피풍의를 걸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것....”

호운의 어깨 위에 피풍의를 흠칫거리며 벗어 건네자 고광윤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리고 멀리서 두꺼운 우산을 들고 선 내관들에게 명했다. 

“새 옷을 가져오라!”

“예, 황상!”

내관들이 앞다퉈 고광윤의 앞으로 달려왔다.

“갈아입으시겠습니까!”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내관을 향해 고광윤은 인상을 찡그리고 말했다. 

“내가 아니라 호, 아니... 이자가 갈아입을 것을 가져오란 말이다!”

고광윤은 그리 말하고는 내관의 우산을 빼앗아 호운의 손에 강제로 쥐어줬다. 빗속에서 차게 굳은 손가락이 고광윤의 손가락에 닿았다. 순간 심장이 요란하게 튀었지만 고광윤은 애써 담담한 신색을 유지했다. 

“어서 들어가 말리거라.”

 그저 손가락이 닿았다. 따스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은 체온의 접촉에, 고광윤의 마음은 흔들렸다. 호운은 과연 어떠했는지 고광윤은 확인할 용기가 없어 먼저 그에게서 돌아섰다. 그리고는 내관들이 모여 타던 마차를 향해 외쳤다. 

“몇 사람은 여기 남아 마차를 수습하고 나머지는 일단 마을고 간다!”

“예, 황상!”

고광윤은 내관들에게 떠밀리듯 마차에 오르는 호운의 모습을 확인한 것을 끝으로 마차에 올라탔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마차가 마을에 도착했을 때, 한밤임에도 불구하고 마을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먼저 마을로 출발한 병사들로부터 연락을 받았던지 주변은 대낮처럼 환히 밝혀 놓은 가운데 관복을 입은 사내 몇몇이 모여 든 사람들을 대표하듯 서 있었고 적잖은 수의 병사들이 몰려 있었다. 

 마침내 황제의 일행이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관복을 입은 사내들은 도착한 것중 가장 호화로운 마차의 앞으로 얼른 달려갔다. 그리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 달리 황제가 탄 것으로 추정되는 마차는 열리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먼저 열린 것은 후방에서 온 평범한 검은 마차였다. 시종들이나 타는 검은 마차에 신경조차 쓰지 않고 호화로운 마차만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검은 마차에서 도저히 시종으로 보이지 않는 자가 내리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맹목적으로 화려한 마차의 문을 바라보며 이제나 저제나 하고 있었다. 

"하관의 지현인가."

 때문에 묵직한 저음이 불쑥, 옆에서 들린 순간 하관의 관리들은 당항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뒤늦게 어둠 속에서도 형형히 빛나는 눈을 한 중년인이 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관리 중 한 사람이 뒤늦게 눈앞에 선 사람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얼른 무릎을 꿇었다. 

"황상!"

 한 사람이 무릎을 꿇자 기다리고 섰던 사람들이 차례로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설마 황제가 시종들이나 타는 마차를 타고 나타날 것이라고는 에상치 못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차에서 내리는 황제를 모른 척 한 것은 쉬 용서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현 황제는 부하들의 실수를 잘 용서하지 않는 냉철한 이롤 유명했다. 혹시나 황제에게 벌해질까 무릎을 꿇을 사람들은 잔뜩 긴장했다. 그러나 황제는 긴장하고 무릎을 꿇은 자들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성큼성큼 가자 화려한 마차로 가다갔다. 그리고 직접 마차 문을 열고 말했다. 

"시간도 늦어 묵을 곳이 마땅치 않을 게다. 어떠냐. 함께 관으로 가겠느냐?"

 황제의 물음에 사람들은 호기심이 마차로 쏠렸다. 태연한 척 말하였지만 고광윤의 목소리는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다행이 그 떨림은 빗소리에 가려졌지만 횃불에 비춰진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마차 안에 앉아 있던 호운은 고광윤의 말에 잠시 곤란한 듯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날이 이미 어두워졌고 아들이 잠들어 있다는 것을 생각한 것인지 고개를 숙였다.

".....폐가 되지 않는 다면 그리하겠습니다."

호운이 자신을 바라보며 대답하자 고광윤의 심장이 미친 듯 요동쳤다. 그 짧은 말이 자신을 향해 나왔다 생각하니 전신의 피가 들끓는 듯하였다. 품 안의 아이 때문에 내린 것이 분명한 그 결정이 고광윤은 너무도 고마웠다.

"그래, 그럼 그리해라."

고광윤은 애써 태연하게 말하며 아직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향했다. 

"언제까지 그리 무릎을 꿇고 있을 것이냐. 어서 관으로 안내라하."

고광윤의 명에 무릎을 꿇은 채 상황을 지켜보던 자들이 부분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어리둥절한 얼구을 하고 열린 마차와 황세의 모습을 번갈아 보았다. 그들은 마차안의 호운이 누구인지 열심히 추측하며 서로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쉽사리 호운의 정체는 알수 없었다. 

그렇게 첫 밤이 지났다. 

지현은 과광윤을 위해 호화롭게 치장한 침실을 준비하였지만 이런 규모의 마을에서 준비한 침실 수준은 뻔했다. 하지만 고광윤은 거기에 별다른 불만을 제기 하지 않았다. 지금은 황제로 호화로운 생활에 익숙해진 그도 한때는 전장을 누비며 천막과 같은 곳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훗날 전공을 쌓고 나서는 도성에서 못지 않은 호화로운 천막을 가지게 되었지만 열네살 처음 전장에 나섰을 무렵, 그는 병사들과 똑같은 천막의 바닥과 다름없는 딱딱한 나무 침상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하지만 어차피 주변을 경계하느라 잠이 얕을 그에게 침실의 상태는 별 의미가 없었다. 

"기침하셨습니까."

 고개를 숙이는 내관에게 고광윤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자시가 훨신 넘은 시각에 방으로 안내되어 그보다 더 늦은 시간에 잠들었음에도 고광윤이 일어난 시간은 무척 빨랐다. 아직 새벽이라 할 수 있는 찬 공기를 마시며 고광윤이 물었다. 

"어제의 마차는 어찌 되었는가."

황제가 일어나자마자 마차의 안위부터 묻자 내관은 당황한 듯 보였다. 내관은 설마 황제가 아침에 기침하자마자 짐마차가 어이되었는지 물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기에 그에 대해서는 전혀 준비된 대답이 없었다. 내관은 곧 그 자리에서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지금 당장 알아오라 시키겠습니다!"

"시키는 것이 아니라 네가 직접 가라."

"예, 황상."

늙은 내관이 서둘러 방을 나서자 남은 내관과 시종들이 황제의 앞으로 세숫물을 대령했다. 황제는 시중을 받으며 느긋이 준비했다. 외유 중에는 가벼운 복장을 주로 하는 지라 옷차림을 정돈하는 데 그리 긴 시가닝 걸리지 않았다. 허둥지둥 방을 나섰던 늙은 내관은 고광윤이 시종의 손에 머리를 손질 받을 때 도착했다. 내관은 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고개를 숙이며 고했다. 

"마차는 오후 쯤에 수리공을 부를 예정이라 합니다."

사실 이 예정은 방금 생긴 것이었다. 원래 내관들은 허름한 짐마차의 일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난 황제가 가정 먼저 그것부터 챙기니 부랴부랴 마차를 수리할 일정을 세울 수밖에. 다행이 고광윤을 그런 사실을 추궁하지는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수리공이 도착하면 다시 보고하라."

"네, 황상."

내관은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점점 굵어지더니 마침내 밤새 폭우가 되어버린 날씨가 참으로 심상치 않았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쏟아지는 비에 하관의 곳곳에서 흙벽으로 만든 집이며 담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벽돌로 샇은 지현의 관은 그에 비해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성시와는 비교하 ㄹ수 없는 인구 천이 겨우 작은 규모의 마을이지만 촌이라 불리는 곳의 몇 배의 크기인지라 자연스럽게 지현의 거처 또한 그럴 듯했다. 생전 처으므 맞아보는 황제를 대접하기 위한 준비로 지현은 한창 분주했다. 만약 날시의 변덕이 없었다면 결코 일어날 없는 기적 같은 만남에 지현은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거기에 등을 밝혀라, 너무 어둡지 안느냐! 거기! 의자를 제대로 놓아라!"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데도 커다란 잔치라도 하듯 거창한 식사가 준비되었다. 수십 개의 탁자는 가지런히 놓였고 지현이 아기고 아끼던 도자기와 귀한 외국의 그릇들도 모두 탁자 위를 장식했다. 하관 전체를 디ㅜ져 귀한 재료들만 모아 상을 차린 지현은 자신의 솜씨에 매우 뿌듯해졌다. 지에 오십대로 접어드는 지현은 귀밑머리가 희끗해진 장년인이었다. 재법 덩치가 있는 편이지만 키가 작아서 풍채가 좋기 보다는 땅딸막해 보였고 유난히 튀어나온 배는 차미 늙은 노새의 배처럼 축 쳐져 있었다. 그런 체형으로 주름하나 없이 빳빳하게 정돈된 관복을 입으니 포목전에 진열된 비단뭉치처럼도 보였지만 다행이 이곳에 그런 지현의 모습을 지적할 사람은 없었다. 지현 뿐만이 아니라 관아의 사람ㄷ르 모두가 생전 처음 보는 귀한 사람에게 흥분한 상태였던 것이다. 

"거기, 촛불을 켜라. 거기는 창을 닫아라. 비가 새어 들어오지 않느냐. 그리고...!"

"황제폐하 납시오!"

서둘러 명령을 내리던 지현은 갑작스레 울린 소리에 깜짝 놀랐다. 아직 이른 시간이니 황제가 일어났을 리가 없다는 안신에 일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황제가 등장하다니!

"황상!"

지현이 자연스레 무릎을 꿇없고 일은 하던 이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개중에는 천정을 장식한 붉은 천을 달다 너무 놀라 굴러 떨어지는 이까지 있을 정도였다. 쿵쿵쿵! 무릎을 꿇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울리고 모든 사람들이 무릎을 꿇은 것을 본 황제가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는 탁자위에 준비된 음식들을 보더니 지현에게 물었다. 

"이게 다 무엇인가?"

"아침상입니다."

치현이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하룻밤 사이에 이 모든 것을 준비한 것이 무척 자랑스러웠기 땜누이다. 그러나 칭찬의 말을 기대한 지현의 예상은 황제의 냉담한 한마디에 여지없이 무너졌다. 

"마을은 비가 와서 난리인데 잔치라도 할 셈인가."

"황상..."

"나라의 녹을 먹는 자가 이 상황에서 고작 아침상을 준비한다고 부산을 떨다니."

고광윤은 그리 말하고 탁자 쪽으로는 다가가지도 않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훽 소리가 날 정도로 몸을 도려 나서자 지현이 허둥지둥 그 뒤를 따랐다.

"화, 황상! 식사를!"

"네가 챙기지 않아도 먹을 수 있다. 그보다 너는 어서 마을로 나가 이번 비로 일어난 피해를 알아보어나. 한 시진 않에 도아와야 할 것이다. 내 친히 보고를 듣겠다."

고광윤의 말에 지현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부리나케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런 지현의 뒤로 몇몇의 병사가 따르는 모습을 보고 고광윤은 혀를 찼다. 간밤의 내린 비로 마을에 패해가 생긴 것을 고광윤이 안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복도를 지나다 일꾼 사내들이 한탄하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사정을 신경써야할 지현이 황제를 대접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으니 한심하기 그지 없었다. 기본조차 하지 못하는 저런 자가 관리라 생각하니 새삼 전국의 관리들을 재입용 하여야 한다는 대신들의 목소리도 이해가 갔다. 진성왕의 반역과 요족의 국경침입, 그리고 파벌싸움으로 인한 소란이 불과 4년 전까지 지속되었다. 그 사이 고광윤은 커다란 성시를 챙기느라 바빠 이처럼 작은 성시의 관리들은 본의 아니게 방치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조정도 안정이 되었으니 그 지배를 전국으로 뻗어나가야 하였다. 고광윤은 몯느 황제가 바라는 태평성대를 바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백성이 굶주리고 가뭄이 들고 관리들이 부패한 것은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성군이라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백성의 안위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었다. 애초에 그가 백서의 안위를 신겼썼다면 제 부변의 부하들의 목을 그리 쉽게 칠 리가 없었다. 단지 고광윤이 그러한 것들을 신경 쓰는 것은 그것이 모두 자신의지배를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고광윤은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것인 권력을 공고히 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아내도, 자식도, 혈육도 없는 고광윤에게 있는 것은 권력이 유일했다. 진한으 하ㅗㅇ제라느 자리를 빼면 고광윤이라는 자를 표현할 길은 없었다. 그는 황제가 되었고 황제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는 그 황권을 강화하기 이ㅜ해서라며 무슨 짓이든 했다. 

 고광윤은 자신이 언제부터 황위에 집착했는지 알지 못했다. 처음 그느 ㄴ황위 따위에 집착하는 게 아닌 살아가느 ㄴ데 급급했다. 처음에는 아비를 미워해 자신을 학대하였던 어미 밑에서 목숨을 챙겨야 했고, 자신을 홀대하는 황후의 밑에서 숨죽인 듯 살아야 했다. 그리고 어미를 닮았다는 이유로 왕의 봉작을 내린 아비 덕분에 끊임없는 암살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살기 위해 달리기 시작한 것은 어느 순간 모두를 제압하는 절대권력을 향하는 향수가 되어 지금의 고광윤이 만들어졌다. 어찌 보면 살기 위한 선택이었건만 정신을 차려보니 고광윤에게는 그 권력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  

어느 순간 그는 권력만이 남은 허상이 되어 살아 있었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결코 손에 넣지 못한다는 것을 안 순간 그 속은 텅 비었다. 그는 마치 권력이라는 이름의 빈 껍질처럼 변해 하루하루를 살았다. 음식을 먹는 것도, 계집을 안는 것도, 그리고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는 일도 기쁘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을 그저 반복되는 흔한 하루에 불과했다. 

 만약 어제의 우연이 없었다면 오늘도 그저 반복되는 하루였을 것이다.

"아..."

마치 그 우연의 연속처럼 복도를 돌자마자 나타난 얼굴에 고광윤은 일순 숨을 멈췄다. 상대도 고광윤을 보고 적잖게 놀란 눈치인지 작은 탄성을 흘렸다. 고광윤을 저도 눈앞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혹시나 저 얼굴 어딘가에 자신을 향한 혐오나 두려움이 없는지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 기적같은 어제 처럼. 그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리 자신을 보아주었으면 했다.

"일찍 일어났구나."

그리 말하는 데느 제법 큰 용기가 필요했다. 아무도 고광윤의 떨림을 알지 못할 것이다. 올랜 시간 억눌러온 본심은 쉽게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았고 속내의 망설임과 달리 밖으로 나온 음성에는 힘이 있었다. 

"예. 밤새 평안하셨습니까?"

어색하게 인사를 하며 고개를 숙이는 호운을 보며 고광윥은 마른 침을 삼켰다. 어제와 달리 지금은 호운의 곁에는 아이가 없었다. 아직 잠들어 있는지 다른 곳에 있는지는 알수 없지만 호운에게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하던 고광윤에게 이는 매우 좋은 소재가 되었다. 

"아이는?"

"...아직 잠들어 있습니다."

"그래? 제법 영특해 보이더구나. 이름이 무엇이냐."

"시운이라 합니다."

"시운이라. 종은 이름이구나."

"감사합니다."

대답은 고박꼬박 하고 있었지만 호운은 고광윤이 어색한 모양이었다. 고개를 숙인 해 들지 않는 것도 그러했고 대답이 흐린 것도 그러했다. 그러나 고광윤은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나름 필사적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호운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비록 그가 자신을 불편해 하는 기색이 열력하더라도 그 안헤 혐오나 두려움이 없다는 걸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고광윤이 다시 말을 건네기 위해 입을 연 순간, 새철머 높은 아이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 아빠!"

그 소리에 호운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고광윤을 향해서는 내내 눈을 내리깔고 있더니 소리가 난 방향으로는 잘도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 모습에 속이 욱씬욱씬 쑤셔왔다. 그러나 고광윤은 과욕을 부리지 않으려 했다. 호운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발절이지 않을가. 복도에서 달려온 아이는 냉큼 호운의 품에 매달렸다. 호운은 제 목에 팔을 두르고달랑달랑 매달린 아이를 안아 올렸다. 

"어, 황제님이다."

달려오는 동안ㅇ느 제 아비만 눈에 보였던 것인지 아이는 뒤늦게 고광윤을 알아보았다. 고광윤을 멀뚱멀뚱 보던 아이가 호운의 품에 안긴 채 고개를 꾸적숙이며 인사했다. 

"황제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맹랑한 고마였지만 아이는  제법 교육을 잘 받았는지 곧장 인사를 건넸다. 고광윤은 그런 아이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네 나이가 몇이냐."

"네 살요."

아이는 손가락 네개를 들어 보이며 자알스럽게 말했다. 네 살치고는 발음도 또렷하고 말투도 침착한 것을 보면 매우 영특한 아이였다. 

"그래, 이름이 무엇이냐?"

 굳이 방금 전 호운에게 들은 것을 고광윤은 다시 물었다. 별로 아이의 대답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호운과 함께 있는 시간을 만들고 싶어서졌다. 아이는 고광윤의 말에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유시운이요! 바를 시자에 아버지랑 같은 운자를 써요."

아이의 말에 고광윤의 입매가 미미하게 굳었다. 아이의 성시가 자신의 예상과 달랐기 때문이다. 고광윤은 아이가 호운과 같ㅇ느 성을 쓸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네 아비는 호씨인데 네 어찌 유씨인게냐?"

그러나 고광윤으 표저을 눈치 채지 못한 아이 유시운은 천진난만하게 대답했다. 

"아빠는 아빠지만 엄마의 오빠랬어요. 아빠라고 물러도 원래는 아빠가 아니라, 음...음.. 맞다. 외백부! 외백부랬어요."

"그러냐..."

"엄마의 제일 나이가 많은 오빠를 외백부라고 한 대요. 아빠가 나중에 아빠 동생을 만나면, 음... 외숙부라고 불러야 한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나중에는 절대로 아빠라고 부르지 말래요. 외숙부가 흉본다고."

아이의 말에는 아무 악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말은 마치 고광윤의 심장에 얼음으로 만든 칼을 들이미는 것 같이 섬뜩했다. 

"그래, 너는 아직 외숙부를 본 일이 없느냐?"

"아빠가 나는 너무 어려서 못 간댔어요. 나중에 내가 조금 더 크면 외숙부를 만나러 갈거래요."

"그래, 그 숙부는 어디 있느냐?"

"저도 잘 몰라요. 아빠가 숙부는 서쪽에 있대요. 작년에 아빠랑 갔던 마을이랑 가까운데 있는데, 가기 힘들다고 했어요. 거기가...으으으음!"

대답을 하던 유시운은 고개를 갸우거리며 호운을 올ㄹ려보고 물었다.

"아빠, 그 마을 이름이 뭐야? 생각이 안나."

아이이ㅡ 물음에 호운은 대답하지 못하였다. 

"아빠? 생각 안나? 무지 큰 강이 있던 거기. 생각 안나?"

유시운의 순진한 물음에 고광윤은 그가 말하는 곳이 어디인지 알수 있었다. 아마도 위서일것이다. 넓은 강 교률이 흐르는 국경의 땅, 그리고 유란란이 숨을 거둔 땅. 순진하게 묻는 아이에게 호운은 단 한마디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런 홍누과 고광윤의 사이에 썰렁한 기운이 감돌았다. ㅇ고광윤은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고. 호운은 그런 고광윤의 침묵이 두려운 듯 아이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한참 동안 고광윤은 입을 다물고 있다가 겨우겨우 입을 열고는 "다음에 생각이 나면 알려다오."라는 말만을 했다. 그리고는 더는 아무런 말도 하니 않고 호운을 스쳐 지나갔다. 호운은 그런 고ㅗ강윤에게 목례를 해보일 뿐 그를 붙잡지는 않았다. 들떴던 머리에 참울을 부은 듯 머리가 서늘해졌다. 단지 호운을 다시 만았다고 들떠 아무생각도 못했던 그에게 아이는 순식간에 과거를 끌고 들어왔다. 잊고 있었다. 그 아이는 유란란의 아이다.

자신이 죽인 그 여자의 아이였다.

자신이 호운과 떨어져 있었던 동안 호운은 그 여자의 아이를 홀로 키우며 살아왔다. 과연 호운은 여태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아왔을까. 생각조차 안 적이 없었다. 단지 아이를 제 아이로 키웠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아이의 말들은 고광윤에게 큰 충격이었다. 호운에게 과거는 무엇 하나 지워진 것이 없었다. 유시운이 건재한 과거는 그에게 영원히 현재로 숨 쉴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니 두려워 고광윤은 도저히 그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 호운은 뒤로한 고광윤은 다른 일에 몰두하기로 했다. 그는 한시진이라는 시간제한을 두었던 지현을 기다렸다. 조반을 들지도 않았는데 어쩐지 배가 고프지 않았다. 한시진이 조금 못 되어서 지현이 돌아왔다. 어지간히 서둘렀는지 오이 부리나케 고광윤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평소라면 이곳 대청에서 위세를 뽐낼 그가 오늘 은 참으로 초라해보였다. 

"보고해라."

"예, 황상. 어제 내린 비로 가옥 아홉 채가 무너지고 흙벽이 무너져 세 사람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돼지를 키우던 농가의 축사가 무너졌고 닭을 키우는 온가도..."

"죽은 사람이 누구냐> 장정이냐, 아니면 늙은 노인이냐?"

"장정 둘과 늙ㅇ느 노인 하나입니다."

"멀쩡한 장정들이 죽을 만한 일이라면 부상자도 제법 있겠구나. 몇 명이냐?"

"서른 명 정도 입니다."

"정확한 수를 모르는 것이냐?"

"소, 송구합니다."

지현은 가차없는 황제의 물음에 뭐라 대꾸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고광윤은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지현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다 말했다. 

"동남쪽 산기슭에 산사태가 난 것을 알고 있느냐?"

일단 지리상으로 그곳도 하관의 지현이 관리할 곳임을 아는 고광윤이 물었다. 그러자 관리는 무어라 대답을 못했다.

"그조차 파악이 되지 않은 것이냐."

"송구합니다."

"되었다. 오늘부터라도 그 산길을 복구하도록 하라. 작은 산길이라 하나 길이 막히며 각 마을의 이동이 이려워 질 테니 하루속히 복구하도록 하라. 부상ㅇ르 입은 자들은 제외한 건장한 장정들은 모두 산 길 복구에 동원해야 할 것이다."

"예, 황상."

고광윤은 되었다는 듯 지현을 향해 손을 저어보였다. 무엇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사실 말로는 하루속히 산길을 복구하라 하였지만 고광윤은 그 산길의 복구를 그다지 바라지 않았다. 그 산길이 보구된다는 것은 곧 호운이 이곳을 떠난 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고광윤은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곁에 선 내관에게 물었다. 

"마차를 수리한다는 자는 아직 이더냐."

"지금 마을의 복구 작업 땜누에 일손이 모자란다 합니다."

고개를 숙이며 내관이 답하자 고광윤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러나라."

"예. 황상."

내관과 시종들이 멀찍이 물러나자 고광윤은 의자에 앉은 채 눈을 감았다. 상황은 마치 고광윤의 바람을 이루어주기 위해서인 듯 움직이고 있었다. 산길이 막히고 마차가 부러졌다. 설상가상으로 큰 비까지 내리니 호우은 꼼짝없이 이곳에 박목이 묶인 신세가 되었다. 만약 아이의 이름을 아직 몰랐다면 그리고 그 아이의 말을 아직 듣지 못하였다면 이곳은 고광윤에게는 큰 행운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고광윤은 감았던 눈을 뜨고 아직 세차게 빗줄기가 내리는 창밖을 보았다. 여전히 비는 그칠 생각을 않고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이 비가 과연 호제인지 아닌 지는 좀 더 시일이 지나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밤이 되자 지현은 연회를 펼졌다. 여러 가지 문제로 심심히 피곤하였던 고광윤은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지현의 연회를 물리려다 술이라도 마시고 취하고 싶은 마음에 연회에 참석했다. 아침 나절에 경을 친 것이 효과가 있었던지, 지현이 마련한 연회는 황제를 위한 것치고는 조용하면서도 술을 즐길 수 있는 분위기였다. 고광윤은 잔을 들어 물끄러미 안을 보았다. 찰랑찰랑 투병한 것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이것을 비우면 마음도 비워지려나. 스스로도 어이없는 생각을 하며 그는 술잔을 비웠다. 한번 든 술잔은 또 다시 술잔을 불렀고, 연거푸 술잔을 기울이다 보니 어느새 술병이 텅 비었다. 빈 병이 두병이 넘어가자 고광윤도 적당히 취기가 올랐다. 

"과연 황상이십니다! 술을 마시는 것도 어쩌면 그렇게 호탕하십니까?"

술에 적당히 취해 느슨해진 사고에는 지현의 입에 발린 말도 그리 거슬리게 느껴지지 않았다. 고광윤은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술잔을 기울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술잔을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술에 취하면 취할 수록 가슴 속 한구석에 ㅇ웅크린 묵직한 것은 그 무게를 더해갔다. 마치 커다란 돌덩이가 속에 들어앉은 양 무거운 한숨을 쉬며 고광윤은 술을 마셨다. 

그렇게 두 번째 밤이 지나갔다. 

3

고광윤은 깨질 듯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눈을 떴다. 오랜만의 숙취였다. 무언가 길고 긴 꿈을 꾼 듯한데 꿈의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나는 것이 업었다. 아직 사방이 어두컴컴하지만 멀리서 들리는 소란으로 보아 이미 날이 밝은지 한참은 지난 듯싶었다. 짧은 잠을 자는 그로서는 드물 정도의 숙면이다. 그러나 숙면을 취한 것 치고는 머리는 맑아지지 않았다. 어젯밤의 술기운이 남은 것인지 연신 머리를 흔드는 고광윤을 보고 얼른 내관이 꿀물을 받쳤다. 고광윤은 말없이 꿀물을 받아 마시고 다시 침상에 누우며 명했다. 

"창을 열어라."

창을 열자 희미한 빗방울이 떨어지는 밖이 보였다. 오늘도 날은 흐렸다. 꾸물꾸물. 구름이 살아 있는 생물철머 움직이는 모습이 멀리서도 또렷이 보였다. 고광윤은 그 구름의 궤적을 바라보다 긴 한숨을 지었다. 그는 비오는 날을 싫어했다. 이유는 알수 없지만 어느 순간부터 비를 싫어하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비 덕분에 간절히 원하던 이를 곁에 묶어 두었으니, 세상일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고광윤은 아직 지끈거리는 머리를 억누르며 천정을 보았다. 아직 술기운이 남은 멍한 머리는 어제의 일들을 뒤죽박죽으로섞어 그의 눈앞을 어지럽혔다. 그러나 혼란스럽게 얽힌 것의 중심에는 또렷이 호운이 있었고 아이가 있었다. 멍하니 호운이ㅡ 얼굴을 생각하던 고광윤의 머릿속에 훼방꾼처럼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바로 자신이 죽인 두 사람의 피를 이은 아이의 유시운의 얼굴이 말이다. 

진성왕이 황궁을 습격하였던 그날 아침이 될 때까지 고광윤은 아무런 조짐도 눈치 채지 못하였다. 그날도 시작은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그의 일과는 대신들과 조례를 하며 면담을 하는것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그때부터 무언가 일이 이상하게 돌악ㄴ다는 느낌은 있었다. 언제나 조례에 참석하는 대신들 중 삼분지 일이 불참을 한 것이다. 그들 중에는 진성황을 옹호하는 자들도 있었고 조례에 참석했지만 그와 대립하거나 중림인자들은 하나같이 조례에 불참했다는 점이다. 

불길한 느낌을 받은 고광윤은 곧장 서융을 불렀다. 진성왕부에서 명을 수해하고 있던 서융은 고광윤의 부름에 재빨리 궁으로 달려왔다. 고광융은 서융에게 진성왕 측의 동태를 확인하고 오라 명하였다. 서융은 충성스러운 신하인양 고개를 숙이고 그의 앞을 나섰다. 서융이 돌아온 것은 한시진이 훌쩍 지나서였다. 서융은 진성왕이 아무래도 모반을 일ㄹ으킬 것 같다는 보고을 올렸다. 그리고 오늘 아침 조례에 참석하지 않은 이들 모두가 진성황을 지지하는지 사병을 준비하고 있다는 보고도 함께 올렸다. 그 보고에 고광윤은 고심했다. 진성왕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오늘 아침, 조례에 참석하지 않은 대신들 중에는 도성의 병사를 담당하는 서군제독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의 휘하 병사들이 모조리 등을 돌린다면 아무리 고광윤이라도 버거운 점이 있었다. 고광윤ㅇ느 일단 서융에게 궁을 지키던 뱡사의 절반을 서군제독의 저택을 포위하는데 보내라고 명했다. 궁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서군제독의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도 중요했다. 그의 발만 묶인다면 일다 ㄴ상대할 적은 절반으로 죽어드는 셈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게 고광윤의 실책이었다. 고광윤은 서융을 불신하면서도 그가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서융은 욕망에 충실한 남자였다. 때문에 자신에게 권력을 쥐어줄 고광윤을 결코 배신할 자가 못 되었다. 아니, 적어도 고광윤은 그리 믿었다. 그랬기에 고광윤은 서융에게 철저하게 당하고 말았다. 고광윤이 서융의 배신을 안 것은 진성왕이 병사들을 이끌고 궁의 담을 통과한 후였다. 궁을 지키던 병사들이 반으로 줄어든 데다 검술이나 궁술이 뒤어난 병사들 대부분이 서군제독의 저택을 포위하러 향해있던 처라 황궁의 방어막을 속수무책으로 뚫렸다. 다급해진 고광윤이 서융을 찾았으나 돌아온 대답은 그를 찾을 수 없다는 대답뿐이었다. 불혀듯 고광윤은 호운으 ㄹ떠올렸다.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었다. 그 순간 그는, 직감적으로 이 일이 호훙과 관계가 되어 있음을 알았다. 때문에 호운이 있는 정궁으로 병사들을 향하려 하였는데 진성왕이 더 빨리 본궁까지 들이닥치고 말았다. 그 후 참으로 치열한 난정이 펼쳐졌다. 만약 서융의 계략으로 아무 이유없이 집 안에 연금되어 있던 서군제독이 병사들을 이끌고 황궁으로 돌아오지 않았던 들 지금의 고광윤은 없을 것이다. 서군제독의 귀환으로 기세는 순식간에 진성왕에게서 고광윤으로 기울었다. 그리고 여기서, 고광윤은 다시 방심하고 말았다. 대부분의 수하를 잃고 고립되어 검을 든 진성왕에게 항복을 권한 것이 그것이었다. 궁지에 몰린 진성왕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고광윤을 죽일 듯 노려보며 천한 것이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악을 쓰며 욕을 하는 모양새가 제 어미인 태후를 너무 닮아 있어 고광윤은 그저 그를 비웃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비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궁지에 몰린 진성왕이 화탄을 터트린 것이다. 고광윤은 진성왕이 설마 화탄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리고 그 화탄을 궁안에서 터트릴 정도로 머리가 나쁜 놈이라고도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궁지에 몰린 진성왕은 이미 이성을 상실한 상태였다. 진성왕이 터트린 화탄이ㅡ 위력을 강했다. 그 화탄 하나로 고광윤의 침전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고 수십 명의 병사와 내관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화탄을 터트린 진성왕 본인도 그 자리에서 폭사하였다. 그러나 정작 고광윤은 오른 팔에 화상을 입은 정도로 끝이 났다 진성왕이 화탄에 불을 붙인 순간 침실에 장식된 요족의 궁문 뒤로 숨었기 때문이다. 두께가 중지 세 개의 길이에 달하는 두꺼운 철판은 폭발의 충격에도 튼튼하게 버텨주었다. 이것이 희락공주가 선황에게 시집오며 가져온 지참품이었고 한때는 고광윤의 어미의 방에 장식되어 있던 물건이었다. 결국 고광윤은 어미의 정인을 낳은 여자 덕에 살아남은 셈이었다. 고광윤은 형체조차 알아 볼 수 없게 일그러진 진성왕의 시체를 짓밟고 정궁으로 달려갔다 사실 먼저 그리도 달려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그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정궁으로 달려간 그를 반긴 것은 시체가 되어버린 내관들 뿐이었다. 그곳 어디에도 호운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고광윤ㅇ느 서둘러 호운을 찾으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혼란한 도성 안에서 호운을 찾기란 무척 힘들 일이었다. 도성의 혼란은 만 하루가 지나서야 잠잠해졌다. 혼란이 잠잠해진 후에야 고광윤은 진성왕부에 있던 유란란이 못브을 감췄다는 사실을 알았다. 서융. 호운. 그리고 유란란 세사람이 동시에 모습을 감춘 것이 결코 우연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나서 생각을 해보니, 월왕의 아들로 밝혀진 복치운 또한 먼저 모습을 감추지 않았던가! 그것을 깨달을 고광윤은 서융을 찾으라는 명을 먼저 내렸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도성의 ㅁ누을 지키는 문지기가 그가 혼란 통에 도성을 빠져나갔다는 보고를 올렸다. 도성을 빠져나간 서융은 푸른 장포를 걸친 사내와 함께 말을 타고 있었는데, 소란통에도 선명하게 보이는 푸른 비단이라 기억에 남는 다는 보고를 했다. 결국 그 모든 사실들에 고광윤은 깨달았다. 이 모든 일은 서융이 호운을 손에 넣지 위해 꾸민 짓이었다. 서융은 고광윤은 결코 내리지 못할 결단을 내렸다. 서융은 호운 한 사람을 손에 넣기 위해 그때까지 자신이 쌓은 모든 것을 버렸다. 지위와 재산, 그리고 미래까지. 보장된 모든 것을 단번에 버린 서융은 고광윤의 판단밖의 존재였다. 고광윤은 결코 하지 못하리라는 배신을 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어버렸다. 기어코 손에 넣어버렸다. 그 모든 사실을 깨달은 고광윤은 본노했다. 만약 그 분노가 질투에서 시작된 것임을 깨달았다면 지금쯤 결과가 조금은 달라져 있을까. 그러나 고광윤은 그것이 질투라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그저 분노하였다. 결과는 지금 보듯 뻔히 드러났다. 그는 결코 호운을 소유하지 못했다. 

 몽상 속을 헤매던 고광윤은 누을 꾹 감았다. 아직 술이 깨지 않은 듯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지금 그에게는 잠이 필요했다. 

4

결국 어제 고광윤을 하루 종일 침실에서만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황제인 그의 나태를 탓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황상, 이제 비가 그쳐 오늘이라면 소운성으로 갈 수 있습니다."

내관은 아침에 일어난 고광윤에게 그리 보고하며 고개를 숙였다. 마치 미리 정보를 알아본 자신에게 고광윤이 큰 상이라도 내릴 것이라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고광윤은 내관의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엉뚱한 것을 물었다.

"마차를 수리한다는 자는 왔느냐."

"네. 황상."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내관이 고개를 끄덕이자 고광윤은 다시 물었다. 

"그래서 얼마나 걸린다고하더냐."

"바퀴나 기둥을 새로 만들어야 해 이틀은 족히 걸린다고 합니다."

그 답이 고광윤은 한숨을 쉬고 눈을 감았다.  

'이틀리라.'

오늘 비가 그쳤다고 하였으니 막힌 산길을 뚫는 작업을 한다면 빠르면 내일부터 통행이 재개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차의 수리기간을 생각한다면 최대한 빠른 출발은 앞으로 이틀 후다. 지금 호운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단 하루를 보지 않았는데도 호운의 얼굴이 그리웠다. 

고광윤의 후의에 과청에 지내는 입장이라 호운은 행동을 조심하고 있는 듯했다. 그는 식사를 하거나 산책을 하는 시간 말고는 줄곧 유시운과 단 둘이 방에서 지내는 시간이 맣다고 하였다. 내관들 중 눈치가 빠른 몇 사람은 고광윤이 호운을 신경 쓴다는 것을 눈치 채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있었다. 덕분에 고광윤이 호운에 대해 알고 싶어 하자마자 곧장 그가 무어을 하는지, 어디서 지내는지를 쉽게 알 수 있었다. 4년 전 이후 궁의 내관들과 병다들이 대거 죽고 교체가 되어 지금 고광윤과 동행한 내관들은 단 한사람도 호운을 알지 못했다. 때문에 호운이 정확히 어떤 자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지만, 과거 그의 소문을 들은적이 있는 자람녀 고과윤이 또 다시 사내에게 관심을 가진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설마, 지금 눈앞의 호운이 그 소문 속의 사내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토로 ㄱ입단손을 시켰어도 호운의 소문은 궁을 넘어 도성 안으로 퍼져나갔다. 황제를 홀린 요사스러운 나창, 그리고 남자로 두기에는 아까울 정도의 미모를 가진 사내. 시일이 지나며 변질되는 손문들에 고광윤은 그저 쓴웃음을 지었다. 진실은 언제나 저런 식으로 시간에 따라 변핟다. 그가 호운에 대해 그리 알았던 것처럼, 진실이라는 것은 쉬운 함정의 뒤에야 제 본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금도 방 안에 있느냐?"

"네,황상."

고광윤은 자신의 방 창문을 열었다. 여태 호운이 어디에서 지내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 그런데 내관읠 밀을 들어보니, 호운은 고광윤이 머무는 2층 창에서 정명으로 보이는 방에서 머물고 이ㅣㅆ다 하였다. 작은 창의 크기로 보아 그리 커다란 방은 아닐 테지만 두 부자가 무리 없이 머물고 있는 듯 했다. 고광윤은 굳게 닫힌 창을 가만히 보았다. 저 방 안에 호운이 있다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호운을 복 싶었다.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다. 결국 고광윤은 충동에 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를 걸으면서, 그리고 모퉁이를 돌면서 고광윤은 수없이 고민했다. 그러나 머릿속의 고민과 달리 겨우 하루를 건너뛴 것으로 안달이 난 그의 발은 너무나 쉽게 호우이 머무는 방으로 향했다. 허나 고광윤의 발걸음이 거침없었던 것은 그의 방문 앞에 다다를 때까지였다. 일단 방문 앞에 다다르자 갑작스레 두려움이 일었다. 그날 호운을 피해 달아나듯 한 이유가 무어이었던가. 제 죄를, 눈앞에서 들이밀어져서가 아니었던가. 고광윤은 그리 방문 앞에서 서성이며 자신이 왔다는 기척조차 못 냈다. 그런 황제의 기묘한 행동에 뒤를 따라나섰던 시종들은 표정이 묘해졌다. 그런데 고광윤이 바라보고 있던 방문이 갑작스레 벌컥, 열렸다. 고광윤은 예고도 없이 열린 뭄에 놀라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병문안 오셨어요?"

"병문안이라니?"

"아빠, 아파요."

유시운의 말에 고광윤은 깜짝 놀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는 호운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다는 내관들조차 알려주지 않을 일이었다. 유시운의 말처럼 방 안으로 들어가니 호운이 침상위에 몸을 둥글게 만 채 누워 있었다. 얼굴은 열꽃이 피어 발갛게 달아 올라 있었고 입술은 하얗게 터 있었다. 어찌, 겨우 하루를 보지 앟은 사이에 사람이 이 지경이 되는지 고광유 ㄴ은 어이가 없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의원은?"

"어제부터 그냥 아팠어요. 의원은 비가 와서 다친 사람들 때문에 바쁘대요. 아빠도 그냥 자면 낫는다고 의원 안 불러와도 된댔는데.... 그런데 어제도 아무것도 못 먹고 쭉 잠만 잤어요."

눈매가 붉다 했더니 유시운의 눈초리에 또 눈물이 어렸다. 고광윤은 방 안에 자신이 들어와 큰 소리를 내는데도 눈을 못 뜨는 호운을 보니 속이 뜨거워졌다. 호운이 이리 아파하고 있을 때 자신을 술에 취해 하루를 허비했다고 생각하니 후회가 가슴을 두드렸다. 

"어서 의원을 불러와라!"

고광유 ㄴ이 명하자 한 사람의 내관이 재빨리 복도를 달려갔다. 고광윤은 혀를 차고 호운의 곁에 앉았다. 여전히 호운은 눈도 뜨지 못하고 축 늘어져 있었다. 고광윤은 조심조심 호운의 이마에 손을 댔다. 손끝에 전해지는 온도만으로도 놀랄 정도로 뜨거웠다. 

"너는 어디를 가는 길이었더냐?'

"죽 얻으려고 부엌에요. 아무것도 못 먹고 자며 ㄴ더 아프잖아요. 나도 전에 그랬는데, 아빠가 죽 끓여줬어요. 먹으니까 다 나았어요."

울먹거리는 유시운의 코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고광윤은 그런 유시운을 보다 혀를 차며 물었다.

"너는 뭐라도 먹었느냐? 아니, 잠은 잔 게냐?"

고개를 젓는 유시운을 보며 고광윤은 한숨을 쉬고 대기하고 선 한명의 내관에게 명했다. 

"이 아이를 데려가 식사를 먹여라. 그리고 잠을 재워라."

"아빠만 두고 못 가요."

유시운이 말하자 고광윤ㅇ느 엄한 얼굴로 말했다. 

"네 아비가 눈을 떴을 때 네 얼굴을 보면 다 낫고서도 다시 아프게 될 게다. 지금 네 얼굴도 병자나 다름이 없으니 내 말을 들어라."

"하지만..."

"

"네 아비 곁에는 내가 있으마."

"황제님이요?"

유시운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유시운은 어찌 보면 생판 남이나 다름 없는 황제가 왜 자신의 아비를 돕는다고 나서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황제는 그들에게 호화로운 마차도 태워지고 이렇듯 잡잘 곳도 주었다. 때문에 유시운은 황제를 무척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꼭 아빠 낫게 해 주세요."

아니, 어쩌면 황제는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말 한마디면 수하들이 모든 것을 척척 하는 모습을 보며 그리 생각해도 이상한 것은 아니다. 아이다운 치기어린 요구에 고광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내관이 유시운을 데리고 사라지자 방 안에는 호운과 고광윤 단 둘만이 남았다. 숨소리조차 가냘파진 호운을 보며 고광윤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미안하구나."

호운과 재회한지 고작 나흘. 그런데도 호운이 이리 되자 고광윤은 이 모든 일이 어째서인지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았다. 

5

의원의 치료를 받고도 호우은 꼬박 하루를 누워 있었다. 그나마 의식을 차린 것은 하루가 지난 늦은 오후 무렵이었는데, 그는 자신의 곁에 고광윤이 앉아 있는 모습에 크게 놀란 듯 하였다. 

"어찌 이곳에...계십니까."

아직 열이 남아 거슬거슬해진 음성으로 물은 호운을 보고 고광윤이 말했다. 

"네 아들이 부탁했다."

사실은 자신이 먼저 그리 말한 것이지만 고광윤은 그리 말했다. 그 말에 호운은 이해한 듯 눈을 끔뻑거리다 방 안을 둘러 보았다. 

"시운이는 어디 있습니까..?"

"그 아이는 네 병간호를 하느라 많이 지친 듯 해 다른 방에서 쉬게 했다. 보고 싶다 한다며 불러오겠다만, 아직은 쉬게 놓아두는 것이 좋을 듯 싶구나."

고광윤의 말에 호운은 그저 눈을 끔뻑이다 긴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사흘을 앓다 일어나선지 아직 기운이 없어 보였다. 

"뭘 좀 먹겠느냐?"

"괘찮습니다."

"그래도 뭘 좀 먹어야 하지 않겠느냐? 이대로라면 네 아들도 걱정할게다."

유시운을 거론하며 말하자 호운은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죽을 가져오너라."

고광윤은 호운이 열이 슬슬 내려가기 시작했을 때부터 주방에 죽을 준비하라고 명했다. 언제든 먹을 수 있도록 부엌에서 끓고 있던 죽이 얼ㄹ느 대령되었다. 호훙은 잠시의 지체도 없이 자신의 코앞에 나온 죽을 보고 놀란듯했다. 

"뭘하는 게냐. 먹지 않고."

고광윤은 그런 호운을 향해 채근하듯 말했다. 그 말에 호운이 힘이 없는듯 팔을 천천히 들어 숟가락을 잡았다. 그리ㅗㄱ 천천히 죽을 떠먹기 시작했다. 손목이 힘없이 흔들거리는 모습을 보니 괜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이 떠 먹여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리했다가는 호운이 대번에 꺼릴 듯하여 도저히 말도 꺼내지 못했다. 고광윤이 지켜보는 가운데 호운은 천천히 죽을 먹었다. 그러나 한 사흘 을 앓고 나니 이ㅜ가 줄었는지 죽 그릇의 반도 비워내지 못했다. 그나마도 더 먹으라는 고광윤의 채근에 억지로 숟가락을 몇 번 더 움직여 비워낸 것이 그 정도였으니. 아마 호운이 혼자서 식사를 하였다면 반은커녕 세 숟갈도 제대로 먹지 못하였을 것이다. 

"의원을 불러라."

호운이 죽르릇을 물리자 고광윤이 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방 안으로 들어와 호운의 앞에 섰다. 그는 호운의 이마에 손을 대어보고 손목을 자아 맥을 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제대로 식사를 하고 몸만 보하여 주면 될겁니다."

의원의 말에 고광윤은 안도한 듯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호훈은 그런 고광윤의 태도에 기묘한 표정이 되었다. 어찌 호운이 괜찮다는 말에 고광윤이 저리 안도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광윤은 모조리를 잘하라는 말을 남기고 방을 나섰다. 그러자 마치 고광윤을 대신하듯 유시운이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쉬게 하라는 고광윤의 명대로 그야말로 푹 쉰 유시운은 어제의 초췌한 못브은 온데간데 없이 생기가 넘쳤다. 유시운은 침상에 기대앉은 호운을 보자마자 얼른 달려왔다. 

"아빠, 괜찮아? 괜찮아?"

유시운의 작은 손이 호운의 이마를 짚었다. 아이의 따스한 손이 제 이마에 닿자 호운은 부드럽게 웃었다. 

"이제 아무렇지도 않으니 걱정마라."

"아빠 이제 아프지 마."

유시운은 호운의 품을 파고들며 그리 말했다. 여태 유시운은 호운이 이런 식으로 앓는 못브을 본 적이 없기에 더더욱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자신이 무너지면 유시운을 돌볼 사람이 없다는 점 때문에 호운은 여태 무리를 해서라도 버텨왔는데, 이번에는 그저 정신력으로는 힘이 들었던 모양이다. 

"미안하다. 네가 힘들었겠구나."

"아냐. 나는 힘 안 들었어. 황제님이 아빠 병간호 해줬어."

"....황상께서?"

호운의 푼 앞으로 파고들어 있던 유시운은 그의 눈동자가 흔들린 것을 보지 못했다. 유시운은 호운의 품을 파고든 채 응석을 부리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응. 밤새도록 아빠 간호 해줬대. 부엌 아줌마들도 황제님이 정말 착하다고 그랬어."

더욱 믿을 수 없는 말에 호운은 침묵을 지켰다. 밤새도록 병간호를 했다고? 저 황제가? 그러나 유시운의 태도로 보아 그것은 거짓이 아닌 듯 했고, 호운은 혼란스러워졌다. 

"아빠?"

"으, 응?"

재차 부르는 유시운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호운이 유시운을 보았다. 

"왜 그래?"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눈동자가 자신을 보자 호운을 그저 미소를 지었다. 유시운에게 이 상황을 설명하기에는 호운 자신의 마음이 너무나 복잡했다. 

섬뜩한 냉기에 호우은 잠에서 깨어났다. 유시운을 보내고 잠시 눈을 붙인다 누웠는데, 깨어보니 주변이 어두컴컴했다. 비록 피로했지만 몸은 잠들기 전 보다 더욱 가뿐했다. 이 정도라면 내일은 평소와 다름없이 움직일 수 있을 듯싶었다. 뒤척거리며 침상에서 돌아누운 호운은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한 방 안에서 느껴진 인기척에 놀라 벌떡 침상에서 일어나 앉았다.

"누구십니까?"

호운은 방의 어둠을 바라보며 그리 물었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새햐얀 얼굴이 환상처럼 떠올랐다. 바로 고광윤이었다. 

"왜, 이곳에 계십니까."

호운의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고광윤이 입을 열었다.

"긴장하지 마라. 괜찮은지 확인을 하러 왔을 뿐이니."

"...."

긴장하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쉽게 긴자잉 가라앉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불현드스 유시운의 말을 떠올린 호운은 고광윤의 얼굴을 힐끔 보았다.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나 놀라긴 하였지만, 유시운의 말대로라면 그가 지난 이틀간 자신을 간호했다지 않은가.

"...혹시, 어제도 이 방에 계셨습니까."

굳이 간호를 하였냐 묻지 않은것은 혹시 모를 가능성 대문이었다. 호운의 말에 고광윤은 부정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호운을 향해 물었다.

"이제 아프지는 않느냐?"

"예."

호운이 대답하자 고광윤은 일을 다물고 호운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마치 자신의 얼굴을 눈 안에 새겨두려듯 둟어져라 보는 시선이 호운은 불편했다. 

"왜, 그리 보십니까."

"아프지 마라."

"?"

"이제, 다시는 아프지 마라."

고광윤은 그리 말하고 방문을 나섰다. 혼자 남겨진 호운은 뜻을 알 수 없는 고광윤의 태도에 그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호운이 머무는 방을 나선 고광윤은 조용히 복도를 걸었다. 일부러 내관들조차 물리고 혼자 나선 길이다. 지난 이틀간 앓는 호운의 곁에서 고광윤은 많은 것을 생각했다. 아파하는 호운의 앞에서 그의 곰니은 모두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호운은 혹시 자신을 미워할까. 과거의 일로 원망을 할까 따위는 호운이 혹시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공포 앞에서는 아무 의미를 가지지 않았다. 이것은 마치 천벌 같았다. 자신을 만나면 호운은 언제나 괴로운 일을 겪게 되었다. 그게 의도한 일이든 의도하지 않은 일이든 결과는 그리 되었다. 이제는 결코 그런 일이 없으리라 여겼는데 이렇듯 호운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자 이 모든 것이 자신이 불러온 악연의 증거 같았다. 그렇기에 호은을 놓으려 하지 않았던가. 자신이라느 악연에서 자유로워지라고, 그리 자유롭게 살라고 그렇게 놓아주려 한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도 자신은 아직도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어느새 당연한 듯 호운을 소유하고 싶어 했다. 아니, 지금도 호은을 소유하고 싶다는 말음은 어이 할수 없었다. 고광윤은 호운이 있는 방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곧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깨달았다고 하여도 마음만은 어찌하지 못한다는것은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었다. 

6

"아빠, 아빠 일어나 봐!"

소란스러운 아이의 목소리에 고광윤은 눈을 떴다. 아직 주변이 푸르스름한 것으로 보아 아침이라기보다는 새벽에 가까운 시간인 듯 하였다. 희미하게 열린 들창 사이로 들리는 목소리는 유시운의 목소리였다. 고광윤이 소리에 미간을 찡그린 것을 눈치 챈 내관이 들창을 닫으려 했지만 고광윤은 그 손을 멈추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빠!"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왜 그리 소란인게야."

아이의 높은 목소리에 맞추어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어제만 하여도 약간 쉰 목소리로 흘러나오던 것이 오늘은 맑고 부드럽게 울렸다. 들창 앞에 선 고광윤은 들창 사이로 밖을 보았다.꺽쇠 모양으로 지어진 건물이라 고광윤이 머무는 방에서 바라보니 반대편 건물의 입구가 또렷이 보였다. 그 건물 입구로 회색 겉옷을 어깨에 걸친 사내가 걸어 나왔다. 호운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던 호운이 자리에서 일어나 걷고 있었다. 그것을 인식한 순간 고광윤은 저도 모르게 들창을 손으로 붙들었다. 호운은 회색 겉옷을 입고 입구에서 나오다 밖의 풍경에 놀랐는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빠, 눈! 눈이야!"

아이가 외치는 말 대로 어제까지만 하여도 비에 젖어 친창이던 마당이 하얀 눈에 덮여 있었다. 온통 새하얀 그 눈밭에서 유시운은 마치 강아지처럼 폴짝폴짝 뛰며 흰 눈에 까만 족적을 새기며 오갔다. 호운은 그 모습에 가만히 보다 감탄한 듯 말했다.

"어, 정말 눈이구나."

"이상해! 꽃이 폈는데 눈이 내려. 아빠, 이상해!"

아이는 쪼르르 호운의 품으로 달려가 안기며 쫑알거렸다. 호운은 그런 아이를 안아주며 쓴 웃음을 지었다. 

"이상하니?"

"이상해. 아빠는 안 이상해?"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호운은 아이의 손을 양송으로 비비며 대답했다.

"우리 마을보다 북쪽이라서 그래. 북쪽에는 원래 봄이 되어도 가끔 눈이 내린단다.

"우와! 원래 이래?"

"그래. 더 북쪽으로 가면 기금은 아마 꽃도 피지 않았을 거야. 그쪽에는 4월이 지나고 나서야 꽃이 피거든."

"우와!"

아이는 호운의 말에 어지간히도 흥분했는지 큰 소리를 내며 호운의 어깨에 매달렸다. 먼발치에서도 호운이 부드럽게 미소 짓는 게 보였다. 호운은 아이를 단단히 품에 안아 올리며 말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이 복장으로는 감기 걸리겠다."

기리 말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간 호운의 뒷모습을 고광윤은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모습이 마지막으로 아이를 안고 마차에 오르던 그때의 모습 같이 보여 창틀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고광윤은 호운이 사라진 후에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그러나 호운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그 사이 흐릿하던 해는 완벽히 떠올라 주변이 환해졌다.

"황상."

고광윤은 조심스레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세숫물을 들이라 하오리까."

내관의 물음에 잠시 가만히 있던 고광윤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의관을 차린 고광윤이 방을 나서자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지현이 절ㅇ르 했다. 이틀 동안 호운이 머무는 방에 있느라 지현은 고광윤의 얼굴조차 보기 힘들었다. 

"간밤엔 평한하셨습니까?"

"일어나라."

고광윤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난 지현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침상을 준비했습니다."

"겨우 아침을 준비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이곳에서 기다린 것인가."

고광윤이 무뚝뚝하게 대꾸하자 움찔한 지현은 고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천자를 모시는 일인데 어찌 겨우가 되겠습니까. .황상을 이곳에 모셨다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광영이온데 소신이 감히 소홀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되었다."

더 길게 이으려는 지현의 말을 고광윤이 냉담하게 잘랐다. 매끄럽게 움직이는 혀는 평소라면 봐 줄만한 것이었다. 황제의 자리에 올느 이후 아부나 아첨은 귀에 목이 박힐 정도로 들어왔고, 이 정도 아첨은 기본중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판에 박힌 아첨을 들어 줄 기분이 아니었다. 지현은 고광윤의 기분이 어제와 달리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그 한마디에 금방 입을 다물었다. 지현은 고광윤과 지낸 시간동안 부쩍 눈치가 늘어났다.

"살길은 어찌 되었는가."

"오늘부터 무리 없이 통행을 재개 할 수 있을 겁니다."

지현은 얼른 대답하였다. 그는 이 대답으로 고광윤의 기분이 좋아졌으리라 생각했지만 결과는 그의 예상과 달랐다. 그 대답에 고광윤의 기분은 더더욱 나빠졌다. 고광윤은 흔한 치하의 말조차 건네지 않고 지현을 스쳐 지나갔다. 하관은 마을의 규모에 비해 커다란 관청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황궁안의 소궁처럼 넓은 복도는 장정 열 명이 동시에 걷기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넓었지만 지금은 개미새끼 한마리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첫날이다 둘째 날에는 오가는 일꾼들이며 여종들이 보였는데 시일이 지나며 점점 사람이 드물어지더니 오늘은 개미새끼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지현이 단속을 한 듯 보였다. 처음에는 황제를 어이 대하는 지 몰라서 그야 말로 눈치를 살피던 지현도 하루하루 그에게 익숙해져갔다 원래 시간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고광윤은 그 넓은 복도를 홀로 걸었다. 목적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고 길은 외길이었다. 그리고 지난 이틀간 너무나 자연스럽게 오갔던 길이기도 하다. 그 길을ㄹ 앞두고 고광융의 발걸음은 몇 번인가 망설이듯 멈추기를 반복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망설이고 멈춘다고 하여도 이어진 발걸음에 결국 길은 끝날 것이 자명했다. 결국 고광윤은 포기한 듯 느릿느릿 걸음을 이었다. 고광윤은 목적한 곳이ㅡ 모퉁이를 돌기 전에 다시 발걸음을 멈췄다. 이 모충이를 돌면 목적한 곳이 나오는데 발을 떼기가 힘들었다. 입 안이 바싹바싹 마르고 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고광윤을 보며 뒤따르던 지현을 비롯한 호위병과 내관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대로 몇 걸음만 더 가면 목적지인데도 도저히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할 지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무러아 말을 할까. 병이 다 나은 듯 해서 다행이라고? 아니, 그리 말했다가는 부담을 가질지도 모른다. 그러면 산길이 뚫렸으니 오늘이라도 떠날 수 있다고? 아니다, 그리 말했다가 호운이 정말 이대로 먼저 떠나 버리면? 일단은 아침 식사라도 드는게 어떠냐고 먼저 말을 햐야 할까. 그래, 아이가 있으니 그 요청을 거절하지는 않을게다. 아침이 준비되었으니 같이 하는게 어떠냐.

아침이 분지되었으니 다른 일이 없다면 같이 드는게 어떠냐....

고광윤은 입 안으로 볓 번이나 호운에게 건넬 말을 연습하며 다시 발걸음을 뗐다. 그러나 그런 고광윤의 걸음은 이어지지 못했다. 모퉁이를 돈 순간 호운과 마주쳤기 때문이다. 고광윤은 예상이상으로 빨리 마주치게 된 호운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호운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는지 잠시 멍하니 고광윤을 바라봤으니 이내 그의 주변에 선 사람들을 의식한 것인지 고개를 숙이며 무릎을 꿇으려 하였다. 고광윤은 무의식중에 그런 호운의 손목을 잡았다.

"절은 되었다."

그야 말로 무의식중에 뻗어진 손이었지만 옷감 너머로 잡은 손목의 감촉이 새로웠다. 마지막으로 만졌던 나뭇가지처럼 말라비틀어진 손목과 달리 제대로 된 사내의 손목으로 적당히 살집이 있어 손아귀에서 헛돌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영원히 이 손목을 붙잡고 있고 싶다는 마음이 치솟았지만 고광윤은 속내를 억누르고 손목을 놓았다. 순간적인 일이라 손목을 잡힌 호운의 얼굴에 놀람 이외의 감정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더 시간이 지났다가느 ㄴ어떤 것이 나타날지 알수 없기 땜누이다. 고광윤은 손을 떼고도 느껴지는 손안의 감각에 잠시 입을 열지 못했다. 호운도 곤혹한 것은 마찬가지였느지 아무 말도 못하고 눈썹을 내리깔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놀라 자신을 직시하던 눈길이 다시 사라지자 고광윤은 애가 탔지만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예상 밖의 사건에 미리 준비했던 대사마저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그는 백치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 황제님!"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에 고광윤은 정신을 차렸다. 호운의 뒤로 유시운이 쪼르르 달려왔다. 

"

황제님 안녕하세요."

유시운은 고광윤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고 냉큼 호운의 옷자락을 잡았다. 호운도 자신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힘에 정신을 차렸는지 아래를 보고 자연스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연스러운 그 동작에 고광윤은 뚫어져라 보았다. 약간 마디가 튀어나온 손가락이 유시운의 작은 머리를 감싸고 움직이는 평범한 모습이었지만 몇 번을 보아도 새로웠다. 어쩐지 그의 눈에는 그 손가락이 빛나는 듯 보였다. 아니, 분명 그 손가락은 빛이 나고 있었다. 마치 어둠 속의 야광충처럼 그 손가락만 빛나는 모습에 고광윤은 현기증이 일었다. 환한 빛이 쏟아지는 복도인데도 고광윤에겐 어쩐지 어둠 속에 혼자 내팽개쳐진 착각에 휩싸였다. 

고광윤의 예상대로 호운은 유시운이 있어서인지 함께 식사를 하자는 제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이는 유시운에게서 병간호를 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나온 행동이지만 고광윤은 그런 것은 알지 못했다. 그 상황에 당황한 것은 지현이다, 사실 그 또한 고광윤이 요 며칠 호운이 머무는 방을 들락거렸다는 이야기는 전해 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단지 황제의 변덕으로 불쌍한 부자에게 호의를 베푼 것이라 여겼다. 헌데 황제가 친히 식사를 청하기 위해 그의 방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그가 심상치 않은 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광윤이 자신이 호운의 방에 머물며 밤새 병간호를 하였다는 것을 철저히 입단속 시켰기에 지현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호운도 말이 없고 황제도 말이 없으니 지현은 그저 이 상황을 어찌 판단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어 속이 탔다. 식사는 무척 조용하게 진행되었다. 유시운은 생전 처음 먹어보는 신기한 음식들이 많은지 눈을 또르르 굴리며 젓가락을 놀리기 바빴다. 호운은 조로 생선과 야채요리를 먹고 있었다. 

"입에 맞느냐?"

자신이 차린 것이 아니면서도 고광윤은 그리 물었다. 고광윤의 물음에 유시운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네! 맛있어요."

천진난만한 대답에 고광윤은 호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이 자신에게도 대답을 요구하는 것이라는 것을 안 호운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맛있습니다."

"그래, 입에 맞는다니 되었다. 뭐 달리 더 필요한 것이라도 있느냐?"

호운은 작게 고개를 저었고 유시운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고광윤은 호운이 대답하지 않는 곳에 아쉬워했지만 적어도 함께 식사르 한 것 정도로 만족을 하기로 했다. 마차의 수리가 끝났다는 것을 언제 이야기 할까. 고광윤이 망설이는 사이 호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동안 여러모로 폐를 기쳤습니다. 마차의 수리가 모두 끝났다고 하고 길도 정돈되었다 하니 저희들은 내일 이곳을 떠나겠습니다."

현실이라는 무기는 그렇게 언제나 고광윤의 몽상을 부수며 나타났다.

고광윤은 멍하니 누워 천정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건물 안에 그가 있다. 그리고 멀지 ㅇ낳은 방에 그가 있다. 지금은 무엇을 할까. 어쩌면 아이를 품에 안고 자장가라도 불러주고 있을까. 아니면 아이와 함께 곤히 잠들어 있을까. 그것도 아니면 내일 이곳을 떠나기 위한 차비를 하고 있을가. 먼발치에서 나마 목소리를 듣고, 모습을 보던 그가 다시 사라진다고 하니 속이 탔다. 몸은 따뜻한 비단 이불에 감싸여 있는데 가슴 안에 휑한 바람이 불었다. 

다시 간다. 

그가 사라진다.

마지막 눈이 내리고 이제 곧 봄이 건만 고광윤의 가슴은 한겨울 보다 더 차갑게 가라앉았다. 묵직한 것이 가득 차올랐다가 몇 번이고 무너지듯 일그러지고 속에 바윗덩이라도 들어온 양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가 다시 사라지면 견딜 수 있을까. 고광윤은 스스로에게 자문했다. 그러나 대답은 뻔했다. 겨우 나아가던 상처를 다시 칼로 도려냈는데 어찌 아프지 않을까.

차라리 애원해볼까. 그러나 그 생각은 이내 부정되었다. 애원한다고 해서 그가 들어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때도 하지 못하였고, 통하지도 않았을 애원을 지금 와서 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고광윤은 바보가 아니었다. 이제 호운과 자신을 잇고 있는 것으 하나도 없었다. 호운은 자신을 모르는 이라고 말했고 자신 또한 호운을 모르는 이처럼 그리 만났다. 그리고 그리 하지 않았더라면 과거의 굴레가 자신들 앞을 막아 이처럼 짧은 기간의 만남조차 이루어짖 않았을 것이다. 이 시간이 타인이기에 태어난 짧은 스침임을 알면서도 고광윤은 그 짧은 스침에 영원을 요구하고 있었다. 호운이 그릐 곁에 있을 이유는 무엇하나 없었다. 지금 그에게는 사랑하는 아들이 있고 생활이 있고, 삶의 터전이 있다. 호운의 삶의 가치 중 무엇하나도 고광윤과 이어진 것은 없었고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것은 터락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새삼스럽게 괴로움이 가슴을 짓눌렀다. 불조차 켜지 않은 어두운 방이 마치 그가 바라는 영원의 정체 같았다. 영원한 고독과 갈구가 자신의 남은 삶의 지표같아 고광윤은 그 어둠 안에서 몸부림쳤다. 희미한 목소리가 고광윤의 귓가를 파고 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러다 감기 들겠다."

"그렇지만 내일이면 다 족는다잖아."

호운의 목소리와 아이의 목소리가 뒤석여 울렸다. 고광융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고광윤이 머무는 동안 지현이 사람을 물려놓아 지금 이곳 마당에 나온 사람은 한정되어 있었다. 고광윤의 예상대로 비스듬한 창틈너머로 호운과 아이가 마당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는 눈을 뭉쳐서 바닥으로 굴리고 있었다. 눈사람을 만들려고 하는 모양인지 서투르게 눈을 굴리는 아이의 곁에서 쓴 웃음을 짓고 있던 호운은 곧 자신의 외투를 벗어 아이에게 입혀주었다. 아이는 호운의 겉옷을 입고 소매가 헐렁한 팔다리를 휘드르며 말했다. 

"지금 만들어 놓으면 적어도 내일 새벽까진 있겠지?"

"쉬, 조용해야지. 모두 잠들어 있을 텐데."

"응, 알았어."

호운의 주의를 주자 아이는 입을 다물었다. 호운은 그런 아이의 머리를 다시 쓰다듬었다. 언젠가 복도에서 마주쳤던 그날처럼 마디가 튀어나온 손가락이 어둠속에서 새하얗게 빛났다 그 모습을 본 순간 고광윤의 심장이 다시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모두 나가라."

"예?"

"나가라고 했다."

고광윤의 냉엄한 말에 눈치를 보던 호위병과 내관들이 조심조심 방을 다섰다. 그들은 고광윤의 말에 불복하는 법이 없었다. 방 안을 지키던 이들이 모두 사라지자 고광윤은 창가에서 멀어져 침상에 걸터 앉았다. 창밖에서는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이내 작은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그목소리에 고광윤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어둠속에 하얗게 빛나던 손이 마치 눈앞에 있는 듯 떠올랐다. 고광윤은 뜨거운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허리띠를 풀었다. 금세 속옷 안에서 다단히 발기한 것이 튀어나왔다. 고광윤은 느릿느릿 솟ㄴ을 뻗어 흥분한 것을 움쳐쥐었다. 아무것도 없었는데도 이미 그는 지나칠 정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어릴 때마다 그는 언제나 두 눈을 감았다. 그가 바라는 상대는 언제나 어둠속에 있었다. 

따스한 온기가 있는 상대와 함께하였던 마지막 잠자리가 언제였던지를 기억하니  까마득했다. 처음 호운이 곁을 떠났을 때 상실감에 몸부림치던 그는 다시금 수 많은 여인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호운을 떠올리게 할 소년이나 사내들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여인들과 함께 주지육림의 나태한 생활을 즐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방이 조용한 어느 새벽에 잠에서 깨어난 그는 자신의 곁에 누운 사람이 누구인지를 깨달았다. 그의 곁에 누운 사람은 결코 그가 바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아는 그의 체온은 낮았다. 손발을 언제나 차디차서 한밤중에 닿으면 섬뜩섬뜩 놀라기도 하였다. 그가 아는 그는 풍만한 가슴대신 뼈가 도드라진 가슴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심장과 맞닿은 얇은 가슴에 귀를 대면 느릿느릿한 심장소리가 들렸다. 콧날은 조금 날렵하고 작았고 눈썹은 부드러운 반달모양이었다. 목을 어루만지면 마른 몸만큼이나 튀어나온 목젖이 ㅁ나져졌다. 가끔 잠들어 있는 그에게 손을 뻗으면 무의식중에도 고광윤의 손을 피했다. 그러나 잠에서 깨어난 고광윤이 품에 앉은 이는 그렇지 앟았다. 같은 곳은 하나도 없었다. 아니 닮은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뜨거운 체온도 부드러운 몸도, 손을 뻗으면 바로 안겨드는 교태도, 모두 잔인한 현실을 고광윤의 앞에 들이밀었다. 결국 고광윤은 어느 순간부터 여인을 멀리하게 되었다. 사내를 안으면 혹여 호운이 떠오를까 손조차 뻗을 수 없었고, 여인 또한 안을 수 없으니 그느 성욕이 왕성한 진한의ㅏ 황족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청렴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침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 욕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시일이 쌓일 수록 욕구는 점점 커져갔다. 고광윤은 엄지로 성기의 끝을 어루만지듯 하며 천천히 허리를 흔들었다. 하, 하, 점차 거칠어지는 숨소리에 섞여 창밖의 소리가 스며들듯 퍼져왔다. 무어라 속삭이는 낮은 그 목소리에 드문드문 낮은 웃음이 섞여 들었다. 계집아이처럼 높지도, 그리고 부드럽지도 않은 음성이었지만 그 낮은 음성이 고광윤의 흥분에 불을 붙였다. 

"음....!"

언제나 씁쓸함과 함께 차오르던 흥분이 오늘은 처음부터 주체 할 수 없었다. 침대에 앉은 허리가 들썩거리고 성기를 주무르느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손바닥 안을 적시는 것이 땀인지 조금씩 흐르기 시작한 것인지 알지 못하였지만 그것은 무척이나 뜨거웠다. 

하, 하! 학!

고광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숨소리가 점차 가빠졌다. 흥분은 점차 걷잡을 수 없이 차올랐고 성기를 만지는 손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뒤로 젖혀졌던 고광윤의 고개가 점점 앞으로 쏠렸다. 마치 움츠러든 아이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고광윤은 숨을 쉬지 못했다. 벅차오른 흥분에 숨이 막혔다. 창 밖에서는 여전히 소곤고리를 듯한 목소리가 전해졌다. 정담을 속사이듯 조곤조곤 낮은 음성은 고광윤의 흥분을 조율하듯 높게도 낮게도 울렸다. 그 낮은 소리는 한때의 일을 상기시켰다. 벌써 몇 번인가의 봄이 지난 가과거의 일이지만, 고광윤에게 그것은 그리 먼 과거가 아니었다, 아니 언제나 어제 일처럼 떠올릴 수 이ㅣㅆ었다. 밤이면 밤마다 환영처럼 자신을 찾아오는 호운의 모습에 고광윤은 눈앞이 아득해졌다. 따스한 체온과 강렬한 억압, 그리고 거친 숨소리가 방 안을 가득 울렸다. 학, 학, 어느 순간 고광윤은 자신의 숨소리에 취해 흘러들어오는 목소리는 듣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는 점차 절정을 향해 다렸다. 곧 절정이 다다를 것이라는 기대에 그의 심장이 거칠어진 순간.

"아!"

환청처럼 날카로운 목소리가 창 밖에서 울렸다. 그 순간 심장의 뛰는 소리가 귓전을 크게 울리고 눈앞이 빨갛게 물들었다. 마치 태양을 직시한 듯 흐려지는 시야는 어둠 속에서 더욱 선명했고, 감은 눈꺼풀 너머로 마치 혈관을 비추듯 빨간 불빛이 점멸했다. 예고 없이 폭발하듯 닥친 절정에 고광윤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미친 듯 뛰는 심장소리는 귓전에서 북을 치듯 요란했다. 잠시 동안은 자신의 심장소리에 묻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새빨갛게 변한 시야가 점차 정상으로 돌아오고 심장소리가 잦아들자 고광윤은 창밖에서 들리는 웃음소리를 들었다. 환청이었을까. 방금 전 그는 분명 호운의 목소리를 들었다. 호운이 교성을 낸다면 이러할 것이라는 상상처럼 낮으면서도 날카로운 그러한 소리였다. 고광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더럽힌 것을 수건에 닦아낸 후 바지를 추스르고 홀린 것처럼 창가로 다가갔다. 창밖에서는 호운이 유시운이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내일이면 족을 눈으로 진지하게 눈사람을 만드는 호운의 뒤로 유시운이 살금살금 다가가더니 쪼르리고 앉은 호운의 목덜미에 제 손을 쑥 집어넣었다.

"아!"

호운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펄쩍 뛰어 올랐다. 그리고는 유시운을 돌아보더니 짐짓 미간을 찡그렸다.

"자꾸 장난을 치는 걸 보니 네가 눈사람을 만드는 게 지겨운가 보구나."

"아냐, 손 시린 걸. 봐. 빨개."

유시운은 자신의 양손을 불쑥 호운의 앞으로 들이믹었다. 구름이 걷힌 만월아래의 광경은 먼발치의 고광윤에게도 선명하게 보였다. 호운을 빨갛게 변한 유시운의 양손을 제 손으로 감싸더니 호호 입김을 불었다.

"그럼 이리 해 다랄고 해야지. 자꾸 목에 손을 대면 놀라잖아."

"에헤헤."

유시운은 웃으며 호운의 품에 덥썩 안겼다. 그리고는 꼬물꼬물 호운의 몸에 매달려 자리를 잡다가 잡자기 호운의 어깨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아빠. 나 무등! 무등 태워줘!"

"영차!"

유시운의 어리광에 호우은 순순히 유시운을 어깨위에 실었다. 유시운이 그저 무등을 타고 싶었나 하였는데, 정작 무든을 탄 유시운은 호운의 머리를 잡는 대시 ㄴ위로 손을 쭉 뻗었다. 유시운의 작은 손이 허공을 가르더니, 이내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움켜쥐었다. 뚝, 가지가 꺾이는 소리가 울리고 눈이 쌓여 있던 나무가 푸르르 떨며 눈들을 쏟아냈다. 유시운은 쏟아지는 눈에 까를 웃으며 자신이 꺽은 나뭇가지를 불쑥 호운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왜 나뭇가지를 꺾은 게냐?"

"꽃!"

유시운의 말철머 메마른 나뭇가지의 끝에는 흰 꽃이 매달려 있었다. 매화였다. 

"처음에는 눈인 줄 알았느데 꽃이야. 신기하지."

싱글벙글 웃는 유시운을 보고 호운은 훈계를 하려던 것도 말고 결국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유시운은 호운의 무등을 탄 채 매화를 흔들며 말했다. 

"이거, 집에 가져가서 심으면 필까?"

"글쎄. 빨리 도착해서 심으며 살지도 모르지."

"얼마나 빨리?"

"사흘 정도?"

얼떨결에 호운이 그리 대답하지 유시운은 실망한 눈치였다. 사실 호운도 잘린 매화가 얼마나 오래 사는지는 알수 없었다. 그러나 제 아비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유시운은 실망감을 감추지 않으며 말했다.

"그럼 나 이거 괜히 꺾은 거야?"

"여기에라도 심어주면 꽃이 피겠지."

"그럼 내가 못 보잖아."

"피운 꽃을 보고 싶니?"

"응!"

유시운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자 호운이 웃으며 말랬다.

"그럼 집까지 가져가 볼까?"

"그러다 죽으면?"

아이들은 때때로 이런 식으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물을 하였다. 답은 뻔하지만 아이의 생각에서는 이곳도, 저것도 걸려서 결국 이도저도 못하는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그러나 호운은 화를 내는 대신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물음에 답했다. 

그럼 여기 심고 갈까?"

"그건 싫은데."

유시운은 호운의 머리위에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호운은 자신의 어깨우에 실어진 중량을 느끼며 웃었다. 아마 몇 년이 지나 자신이 늙고 유시운이 자라면 이런 시간도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면 호운은 이 시간이 한없이 아쉬웠다. 어깨위의 중량이 사랑스러웠다. 한참을 어깨위에서 끙끙거리던 유시운이 어떤 대답을 내는지 호운은 끈기 있게 기다렸다. 그때ㅔ였다. 생각에 잠겨있던 유시운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황제님! 안 주무세요?"

유시운의 말에 호운이 놀라 그가 향한 방향을 보자 고광윤이 창가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직 잠옷으로 갈아입지 않은 평상복 차림의 고광윤을 보고 호운은 놀란 표정을 기었다. 그러나 유시운은 마침 좋은 게 생각났다는 듯 호운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아빠, 황제님 있는 데로 가자. 응?"

"시운아."

갑작스러운 요청에 호운은 작잖게 당황한 듯 보였다. 그러나 유시운은 발랄하게 발을 흔들며 호운을 재촉했다.

"응? 응?"

자신의 어깨위에서 애교를 피우는 아들에게 진 호운은 결국 내키지 않은 걸음으로 황제가 있는 창가로 다가갔다. 아무리 가까운 창가라도 하더라도 2흥과 1층의 차이가 제법 커 결코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유시운은 고광윤이 서 있는 창가로 다가서자마자 위를 향해 팔을 쭉 뻗었다.

"왕제님."

싱글벙글 웃으며 나뭇가지를 건넨 유시운을 보고 고광윥은 당황하는 눈치였다. 자신을 향해 들이믹어지긴 하였지만 팔이 짧은 유시운이 뻗은 거리다 보니 창 근처는 커녕 1층의 지붕에도 겨우 닿을 정도였다. 그러나 자신을 향해 뻗어진 나뭇가지가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는 않았다.

"이거, 황제님이 심으세요."

"내가, 말이냐."

고광윤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유시운은 싱글벙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져가서 심으세요. 꽃이 예쁘잖아요."

유시운을 그리 말하며 하얀 꽃을 팔랑팔랑 흔들어 보였다.

"왜 날 주는 것이냐. 꽃을 보고 싶다더니."

그 말에 호운은 고광윤이 자신들 부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유시운은 그런 것에 놀라거나 의문을 품는 대신 방글방글 웃었다. 

"그러니까 황제니밍 심어주세요. 도성에서 제일 잘 보이는 곳에 심어주세요."

"어째서 도성이냐?" 

"저는 이 다음에 커서 어른이 되면 도성에 살 거예요.! 도성에서 제일 큰 집에서 살면서 아버지한테 좋은 거 해드릴 거예요. 그럼 그때 꽃을 볼 수 있잖아요?"

영특하다고 하여도 아이의 논리란 이런 것이다. 도성에서 가장 큰 집이라면 황궁밖에 없는데 황제의 면전에서 일ㄴ 말을 하는 것은 참으로 겁없는 행동이었다. 만약 다 큰 성인이 이런 부탁을 했다면 불경죄로 치도곤을 맞아도 할 말이 없을 테고 보통 때의 고광윤이람녀 아이라도 용서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아이는 호운의 아이였다. 비록 피는 이어져 있지 않았지만 그의 아들이나 다름 없었다. 그리 생각하자 자신을 향해 아등바등 뻗어진 작은 손과 그 손에 들린 매화 나뭇가지로 절로 손이 갔다. 고광윤이 아래로 손을 쭉 뻗어 나뭇가지를 받아들자 유시운은 배시시 웃더니 호운에게 말했다. 

"아빠, 나 내려줘."

"어? 아, 아..."

예상외의 사태와 흐름에 굳어 있던 호운ㅇ느 뒤늦게 유시운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바닥에 다리를 붙인 유시운은 아직 나뭇가지를 들고 있는 고광윤을 향해 다시 한번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저 제 나무예요. 나중에 꽃 보러 가면 모른 척 하지 마세요."

"그래, 모른 척하지 않으마."

아직 나뭇가지를 들고 선 고광윤을 멍하지 보던 호우이 유시운에게 이끌리듯 정원을 가로질렀다. 마침내 호운과 유시운이 사라진 후에도 고광윤은 창가에 선 채 한참을 서 있었다. 

7

칠 일째의 아침이 밝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차갑게 얼우 붙어 있던 공기는 한층 누그러져 있었다. 하얗게 뿜어져 나오던 입김도 온데 간 데 없어져 새백이 공기는 고요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고광윤은 푸르게 밝아오는 하늘을 보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 부자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새하얀 속옷차림으로 의관조차 차려 입지 않은 고광윤이 그리 묻자 내관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그 부자는 이미 관을 떠났습니다."

"...."

고광윤은 침묵한 채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부자가 머물던 방을 보았다. 지난 시간 동안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활짝 열려 있고 그 안을 청소하느라 부지런히 오가는 여인들이 보였다. 아이가 뛰어놀던 정원의 흰 눈은 밤새 내린 비와 함께 녹아 진창이 되어 있고 부자가 손이 빨개지도록 만든 눈사람도 이미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롱아롱 힘없이 매달려 있던 꽃송이도 간밤의 폭우에 씻겨나듯 떨어지고 남은 것은 진창이 된 길 위를 나뒹구는 하얀 꽃의 잔해들뿐이었다. 마치 언제나 꾸는 꿈처럼 환상과 다름없었다. 시간들이 끝자나 고광윤은 비로소 눈을 떴다. 그의 곁에는 호운이 없다. 이것이 그의 현실이었다. 잠시 넋을 잃은 듯 멍하니 차밖을 바라보던 고광윤은 이내 창문을 닫았다. 창문을 닫고 돌아선 그의 얼굴을 밝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은 어젯밤철머 어둡게 침잠되어 있지 않았다. 고광윤은 탁자위에 올려놓은 가지를 보았다. 폭우에 씻겨 내려간 꽃들과 달리 꺾인 가지의 꽃들은 여전히 소담스레 피어 은은한 향기를 흘렸다. 한곳에 뭉쳐 올망졸망 핀 하얀 꽃망울이 하늘하늘 고광윤의 손길아래 떨렸다.  크기는 작은 크기철머 그 향도 희미해 가까이서 맡지 않으면 마치 향기가 없는 꽃처럼 느껴졌다.그러나 분명 그 꽃 또한 향기가 있었다. 단지 알기 어려울 뿐이다. 조심스레 꽃망울을 어루만지던 고광윤은 이내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 내관을 돌아보며 명했다. 

"의관을 준비하라."

내관들이 소리 없이 의복을 준비하는 가운데 고광윤은 자신이 어루만지던 가지를 놓았다. 흰 꽃의 향이 아스라이 멀어지고 평소와 다름 없는 향의 냄새가 그의 코를 자극했다. 그러나 그는 꽃향기를 잊지 않았다. 그리고 어젯밤의 일을 잊이 않았다. 어찌 보면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밤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특별했다. 호운과 함께 한 공간에 있었으면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밤은, 맹세코 이날이 처음이었다. 시중을 받으며 씻고 의복을 차려 입은 고광윤이 한 손에 가지를 들고 방을 나섰다. 아침마다 고광윤을 기다리는 것으로 경을 쳐서인지 오늘은 지현이 서 있지 않았다. 고광유은 자신을 뒤따르느 ㄴ내관과 병사들을 이끈 채 복도를 걸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기던 고광윤은 익숙한 모퉁이에 다다라서야 멈춰 섰다. 이곳에 지내는 동안 호운 부자가 머물던 방으로 향하는 복도 모퉁이다. 이제 그들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발걸음은 그리로 향하였다. 마치 오랜 세월 폐쇄된 정궁 앞을 맴돌았던 그의 발걸음처럼 그리 의미없이 발걸음이 그리향했다. 고광윤은 모퉁이에 섰다. 그들이 머물던 그때처럼 그리 섰다. 그러나 그때와 같ㅇ느 긴장과 두근거림은 없었다. 동시에 어젯밤과 같ㅇ느 허탈과 외로움은 이상하게도 남아 있지 않았다. 호운이 떠나다는 사실에 가슴 한 구석에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은 상실감에 몸부림쳤는데, 이상하게도 오늘 아침은 담담했다. 고광윤은 가만히 모퉁이에 서 있다 이내 돌아섰다. 그러는 동안에도 고광윤이 손에서는 매화가지가 하늘하늘 흔들렸다. 한 참 그리 말없이 걷던 고광윤이 우뚝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곁에서 고개를 조아리며 따라오던 내관에게 물었다. 

"이것이 며칠 정도 살 것 같으냐?"

"어제 꺾은 것입니까?"

내관이 묻자 고광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에만 잘 담궈 둔다면 열흘도 살 것입니다."

"그렇다며 도성에 도착하는 때까지는 멀쩡히 살아 있겠구나."

이곳에서 도성까지는 사나흘이면 도착하는 거리다. 고개를 주억거린 고광윤은 내관을 향해 말했다.

"가서 이 가지를 꽂아 둘 만한 병을 마련해 와라. 안에는 물을 가득 채워서 가져와야 할 것이다."

"예. 황상!"

고광윤의 뜬금없는 행동에 의하하긴 했지만 내관은 별다른 토를 달지 않고 부리나케 병을 구하러 달려갔다. 고과윤은 하늘하늘 흔들리는 꽃잎을 코에 대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청아한 매화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병사들과 내관들은 언제나 무표정이거나 분노한 표정만을 보이던 황제가 너무나 부드럽게 미소 짓자 놀랐다. 비록 불혹을 넘긴 나이였으나 그의 아름다움은 여전히 건재하였기에 그가 미소 짓자 저절로 시선을 빼앗기게 될 정도였다. 

오늘은 다시 시작된 호운이 없는 첫 하루였다. 그러나 고광윤은 전처럼 실망하지 않았다. 분명 전과는 다르다. 아니, 어쩌면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손안에는 작은 나뭇가지가 있었다. 작고 가냘픈, 어린아이의 손에도 힘없이 부러지는 그런 마눗가지였지만 마치 이 나뭇가지고 여태까지의 모든 악연을 끊어 줄 부적처럼 느껴졌다. 혼자만의 망상이라 비웃어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고광윤은 이 나뭇가지를 받은 것으로 만족했다. 호운은 자신과 다시 만났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는 듯 그리 헤어졌다. 그 증거철머 남은 나뭇가지에 어찌 만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광윤은 누구보다도 먼저 매화의 향을 맡으며 웃었다. 호운과 함께 하지 못하는 다섯 번째의 봄이 그리 시작되었다. 

꽃노래

새하얀 종이에 쓰인 글귀를 읽으며 호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치도 못한 서간이 닿은 것은 어젯밤 늦은 시간이었다. 창밖에서 들린 인기척에 나서보니, 마당의 굵은 나뭇가지에 비단으로 감싸진 편지 한 장이 남겨져 있었다. 호운은 그것이 평소와 같은 편지라 생각하였다. 그렇기에 봉투를 뜯느데 망설임이 없었다. 그러나 그 편지의 내용 때문에 호운은 밤새 잠들지 못하고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어찌할까.'

호운은 편지의 내용은 손가락으로 깊으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호운은 화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가 화원을 운영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처음 유시운과 함께 길은 나섰을 때만 하여도 호운은 정처없는 유랑생활을 했다.  16살 이래로 계속해 유랑을 하며 살아왔던 그에게 유랑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갓난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유랑생활은 생각보다 힘에 부쳤다. 결국 호운은 유시운이 두 살 무렵일 때 지금의 마을에 정착하였다.오십 가구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이지만 씨족으로 이루어진 마을이 아니다 보니 외지인인 호운과 유시운도 십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처음 마을에 자리를 잡은 호운은 무얼 해서 먹고 살아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천하를 유랑하는 동안은 여러 재주로 먹고 살아왔지만, 아이를 데리고 정착하는 생활에는 그런 잡기는 통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커다란 성시가 아닌 작은 마을에서는 호우이 하 룻 있는 재주들은 무용지물인 것이 많았다. 호운이 자리 잡은 마음 사람 대부분은 농사를 지내 그 농작물을 반나절 거리에 있는 커다란 성시에 내다 파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때문에 호운도 농사를 지내보려 하였지만 그에게는 따잉 없었다. 그리고 농사의 기술도 없었다. 무엇으로 먹고 사아야 할지 고심하던 호운이 마음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것은 그런 때였다. 

날품을 팔러 간 밭에서 일하던 마음 사람들은 쉬는 시간에 성시의 이야기를 화제로 하였다. 그들은 성시에서는 최근 목단이 유행하고 있다 하였다. 저마다 집에 목단을 심어 키우는데, 목단이 만개할 쯤 되면 아마도 서로의 꽃을 자랑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작년에는 모란이 유행하더니 올해는 목단이라며 성시의 사람들은 참 할일이 없다 웃는 사람들의 말을 들은 호운은 이 마을에서 자신이 할 만한 일을 앚았다. 바로 화원을 여는 일이다. 그것이라면 커다란 농지가 없어도 되고 거친 땅에서도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샛ㅇ각에서였다. 그렇게 호운은 화원을 시작했다. 그리고 4년이 지난 지금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그럴듯한 형태의 화원을 가지게 되었다. 먼 성시에서 까지 호운이 키운 꽃나무를 가져 달라는 요청이 들어올 정도로 일은 궤도에 안정적이 되었다. 걱정이라고는 없을 것 같았다. 첫 편지가 도착한 것은 그쯤이다. 

그 편지가 처음 닿았을 때 호운은 놀라 편지를 열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버렸다. 두 번째 편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후로도 편지는 계속해서 이어졌고, 어느 순간부터 호운은 그 편지의 내용이 궁금해졌다. 편지는 부정기적으로 닿았다. 달에 맞춰 드문드문 오기도 하였고 때로는 보르 ㅁ간격으로 닿기도 하였다. 그렇게 쌓인 편지가 결국 1년에 십여 통이 되자 호운은 편지를 열어보게 되었다. 호운의 궁금증을 자극한 편지의 내용은 맥이 빠지는 것이었다. 짧은 편지는 때로 계절의 이야기나 도성의 이야기를 하였고 때로는 호운과 유시운의 안부를 붇고 있었다. 기껏해야 열줄 남짓한 잛은 것이 있는가 하면 2장이 넘어가는 장문의 편지도 있었지만 그 내용은 거의가 비슷비슷하였다. 비록 그 안을 보았지만 호우은 답장을한 적이 없다. 무어라 답장을 써야 할 지도 알 수 없었지만, 어떻게 답장을 보내는지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호운은 이 편지가 어찌 자신의 집에 도착하는지도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편지는 어느 순간 겆ㅇ신을 차려보면 호운의 잡 앞 나무에 거려 있고, 창가에 얹어져있었다. 아마도 누군가 호운이 집을 비운 사이에 편지를 놓아두고 사라지는 것이겠지만 그 행동이 워낙에 신속해 호운은 편지를 그 자리에 놓은 자도 번 족이 없다. 하지만 호운의 행동을 모두 아는 것으로 보아 이 마을 사람 누군가가 이거나 이 마을을 종종 드나드는 자가 아닌가 집작할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이어진 편지가 호운의 생활 한 부분을 차지한 것은 사실아다. 비록 편지를 기다리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도착하는데 의문을 품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어느 날, 비단으로 감싸진 편지가 도착하였을 때 호운은 아무 경계도 없이 그 편지를 열어보았다. 그러나 그 편지의 내용은 여태까지의 그 어떤 것과 다른 내용이었다. 

[호공 진성왕의 아드님이신 왕자를 양육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소. 만약 진성왕의 누명이 그대로였다면 모를까 이미 2년 전에 진성왕전하가 복권된 바, 왕자저하 또한 복권이 되신 것이오. 그런데 어찌 호공이 왕자 전하를 그런 비천한 마을에서 양육한단 말이오. 또한 황실의 법도상으로도 호공이 왕자 저하를 양육한다는 것은 말이 되이 않소. 황상께 자녀가 없는 지금 황실의 유일한 적통인 왕자 저하를 어찌 그러한 벽촌에서 모신단 말이오. 황상께서 호공에게 옛정이 있어 말을 못하실 뿐, 황상께서도 왕자 저하의 양육을 동성에서 하셨으면 하고 계시오. 황상께서 무엇을 하러 호공에게 그리 편지를 보내었겠소? 이 모두 왕자 저하의 안위를 걱정함이 아니겠소. 여태 호공이 왕자 전하를 모셔온 것을 무애로 함이 아니오. 만야 호공이 왕자 전하를 모시고 도성에 온다면 호공이 평생 먹고 살 방편을 마련해 주겠소. 그러니 이 번 봄이 지나기 전에 황자저하를 모시고 도성으로 오시오. 도성에 도착하며 내 쪽에서 연락 하겠소.]

간결하게 자신의 뜻만을 밝힌 편지의 내용은 단순했다. 호운에게 유시운을 내놓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유시운을 내어놓으라는 요구는 터무니없는 것이었지만 호운은 고민스러웠다. 여태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가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호운이 알기에 황제에게는 자녀가 있다. 그러나 그 자녀는 지능이 떨어져 도저히 황위에 오를 재목이 못되었다. 또한 옥씨 일족의 숙청에 그 황자라고 무사했을 리가 없다는 것을 새각하면 지금 황제에게 자녀가 없는 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호운이 관심을 두고 싶지 않아도 옥씨 일족의 숙청을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야말로 황실을 쥐락펴락하던 세력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린 이야기는 호사가들의 호기심을 자극해 저자에 떠도는 이야기들의 양도 어마어마했다. 그러나 호운은 그런 것들이 자신과, 혹은 유시운과 관계가 있을 일이 디ㅗ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편지의 내용을 보면 그것은 유시운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일이었다. 

황실의 적통.

호운이 아무리 부적하여도 유시운은 진성왕의 아들이다. 그리고 진성왕은 황후의 아들이다.그러니, 유시운의 혈통 또한 황실의 일원이 됨이다. 그러나 호운은 그것을 여태 잊고 살았다. 유시운이 그저 유란란의 아이라는 것만을 생각하며 산 것이다. 자랄수록 유시운이 유란란보다는 진성왕의 외모를 닮아 와도 사내이기에 그런 것이라 여겼다. 그것이 혈통에 관계도니 것은 아니라며 일부러 생각을 고쳤건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었다. 호운은 한숨을 시ㅜ다 마당으로 나갔다. 그리고 밥을 하기 위해 불을 떼고 있는 아궁이에 편지를 밀어 넣었다. 편지는 순식간에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타 없어졌다. 그러나 호운의 마음은 더욱 복잡해졌을 뿐이다. 

'떠나야 할까'

이미 이곳은 황제에게도, 그리고 그 외의 사람들에게도 밝혀져 버렸다. 호운은 유시운을 그런 혼란의 소용돌이에 밀어 넣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유시운의 혈통을 저들이 아는 한 앞으로도 이것은 무시할 수 없는 일 이 될 것이다. 형체 없이 타들어간 그 편지처럼 이 상념도 불타 사라지면 좋으련만, 호운은 작게 한숨을 쉬며 그리 바랬다. 이때 호운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알지 못했다. 

유시운은 최근에는 부쩍 의젓해졌다. 고작 여섯 살의 아이에게 의젓하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기묘하게도 느껴졌지만 또래보다 키도 크고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한 유시운에게는 제법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어린아이라 제 동무들과 장난을 치는 못브을 보면 영락없이 여섯 살 꼬마였다. 유시운이 제 친부에 대해 궁금해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호운은 친모인 유란란에 대해서는 이야기 해 준 적이 있지만 친부인 진성왕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이야기 하지 않았다. 호운은 그가 유시운의 부친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편지는 호운의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것을 모두 수면 위로 드러냈다. 과거를 잊은 그에게 과거는 아직 묻히지 않았다고 항변하는 편지의 내용은 호운의 마음에 여전히 또렷이 존재하고 있었다. 멍하니 서 있던 호운은 방문 밖에서 들린 소란에 고개를 들었다. 곧 우당탕,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유시운이 방안에 뛰어 들어왔다. 

"아빠! 아빠!"

무너가에 잔뜩 흥분한 듯 상기한 유시운의 부름에 호운은 부드럽게 웃었다. 

"왜 그러니?"

호운이 묻자 유시운은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리 도성에 가!"

"뭐?"

뜬금없이 흘러나온 유시운의 말에 호운은 크게 놀랐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호운이 놀란 기색을 숨기지 않고 묻자 유시운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장선생님이 도성에 갈 길잡이를 찾는다고 했는데, 아빠는 도성에 살았었잖아! 오래 살았으니까. 내가 장선생님한테 얘기했어.! 그랬더니 장선생님이 아빠가 길잡이를 해줬으며 좋겠대!"

장선생님이란 이 마을의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서생이었다. 장선생이라는 호칭을 보면 제법 지긋한 나이인 듯 들리지만 실상 그는 아직 풋내가 나는 청년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느 유일하게 글줄을 배운 학자인지라 마을 사람들은 그를 존경을 담아 장선생이라고 불렀다. 

"아빠? 응? 응? 가자! 장선생님도 도성에서 살았던 사람이라면 안심이랬단 말이야! 응? 아빠아!"

최근에는 잘 부리지도 않는 애교까지 부리며 매달리는 유시운을 보고 호운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호운은 유시운에게 종종 다른 마음이나 성시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유량생활이 길었던 호운은 가본 곳이 많았고 경험한 것이 많았다. 비록 좋지 못한 일만 가득하였지만 도성에서도 살았었다. 호운은 그런 이야기 중 아이가 호기심을 느낄만한 것만 골라 이야기 해주었다. 아무래도 아이다 보니 유시운은 다른 그 어떤 곳보다 도성의 이야기에 큰 관심을 가졌다. 도성의 건물이 정말 엄청나게 크다는데 얼마만큼 커? 송씨아저씨네 집만큼? 도성에는 예쁜 여자들이 많다던데, 정말이야? 도성에 가면 매일매일 황제님이랑 높을 사람들을 볼수 있어? 아이의 질문들에 호운은 자신이 아는 것은 성심껏 대답 해 주었다. 그러다 보니 아이는 어 느 순간 도성이라는 것을 동경하게 되었다. 그 이후 아이의  입버릇은 어른이 되면 도성에서 가장 큰 집에서 살 것이라 말하는 것이 되었다. 그랬던 아이니, 도성에 갈 기회라는 것에 흥분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나 시기가 좋지 않았다. 

"치운아, 지금 집을 비우면 화원은 누가 돌보느냐. 너도 알겠지만 꽃들은 하루라도 물을 제대로 주지 않으면 쉽게 시든단다. 그런데 그런 꽃들을 모두 버리고 도성에 갈수는 없지 않겠니."

달래듯 말하였지만 그 말은 도성에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말에 유시운은 금세 울상이 되었다.

"아빠는 도성에 가기 싫어?"

"싫은게 아니라 지금 집을 비울 수 없다는 거야. 그리고 뭣보다 도성으로 가는 길은 멀고 험해. 여태까지의 사나흘 걸리는 거리의 여행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단다."

"도성이 우리 마을에서 보르 정도 걸리는 거리라는 건 아빠가 얘기해줬잖아. 보름이라면 나 참을 수 있어. 그리고 화원은 제갈아저씨가 돌봐주잖아. 응? 응? 아빠." 

보통 때람녀 호운의 말을 고분고분 듣는 유 시운이 오늘따라 떼를 쓰듯 말했다. 하긴 그렇게 동경하던 도성에 갈 기회니 쉽게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호운도 평소와 달랐다. 호운은 평소라면 웃으며 이쯤에서 져 줄 상황에서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지금이 여울이라면 또 모를까. 어떻게 제갈아저씨에게 한 달이나 이 화원을 봐 달라고 할 수 있단 말이냐."

"......"

유시운은 호운이 절대 굽힐 생각이 없어 보이자 입을 다물았다. 호운은 유시운의 마음이 상한 듯 해 달라려 말했다. 

"나중에 크면 언제든 도성에 갈 기회가 생기지 않겠니?"

호운의 말에 유시운은 도리질을 치더니 방을 나가버렸다. 호운은 유시운의 뒷 모습을 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다른 문제라면 몰라도 호운은 이 문제만은 양보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유시운은 한동안 그 문제로 퉁퉁 부어있었지만 원래 유순한 아이라 화는 그리 길게 가지 않았다. 하지만 서움함은 아지 ㄱ남았는지, 때대로 호운을 매달리듯 바라보곤 하였다. 그러나 호운은 그런 유시운의 부탁을 받아주지 않았다. 이대로 조금만 지나면 유시운도 포기하겠지, 하겠지 하며 시간이 흐르기를 기라렸다. 그런데 호운이 바랄만큼의 시간도 흐르지 않은 어느 날 저녁, 의외의 손님이 호운의 집을 방문했다. 바로 장선생이었다.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호운은 갑작스러운 방문객에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장선생이 말했다.

"도성까지의 길잡이를 부탁하러 왔네."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말한 장선생을 보고 호운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화원의 관리때문에 도성에 갈수 없다는 말은 들었네."

양 뺨을 퉁퉁 부풀리며 뛰어나간 유시운이 아무래도 곧장 장선생을 찾아간 모양이다. 호운은 그 말에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미안할 것 없네. 화원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당연한 이야기지. 나도 자네의 화원을 망치면서까지 길잡이를 요구할 파렴치한이 아니라네. 하지만 나도 처지가 급하니 절충안으로 제갈씨와 용씨에게 화원들 돌봐 달라고 부탁하였네. 어떤 가? 그들이라면 믿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한 며칠 조용하기에 장선생이 다른 길잡이를 찾는가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 사라이 장선생은 호운이 길잡이를 하 ㄹ수 있느 방향을 고심한 듯 싶었다. 그러나 며칠이 흘러다고 마음이 변할 리 없어 호운은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을 찾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그러자 장선생은 한숨을 푹 쉬며 사정하듯 말했다. 

"나도 지금 사정이 난처하네. 숙부께서 어서 도성으로 올라 오라 채근하시는데 내 한번이라도 도성에 가 봤어야지. 그런데 대놓고 도성까지의 길잡이를 구하자니 숙부의 체면에 먹칠을 하는 셈이 아닌가."

사람이 모르는 것을 모른다 말하여야 하는데, 배우고 있느 자들을 모른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그런 풍조를 알기에 호운도 장선생의 말뜻은 이해하였지만 호운은 시ㅜㅂ게 수락할 수 없었다. 

"내 이렇게 부탁함세. 내 보수는 두둑이 주겠네."

"그리 말을 하셔도..."

호운은 거절을 하기 위한 말을 찾았다. 

"제갈 아저씨랑 용아저씨가 화원 대신 봐준다는데도 왜 안 된다는 거야?"

그때 불쑥 유시운이 방안으로 뛰어 들어 왔다. 호운이 워낙 강경하니 거의 포기하고 있었던 유시운이지만 장선생이 오니 혹시나 싶어 귀를 기울이다 호운이 다시 거절을 하려느 듯 보이자 뛰어든 것이다. 

"시운아."

"왜? 응? 왜 안 돼? 나 정말 가고 싶단 말이야."

유시운은 이제 눈에 눈물까지 담고 말했다. 유시운의 애원에 약한 호운의 마음이 흔들렸다. 

"응? 아빠. 아빠아."

아롱아롱 눈물까지 달고 애원하니 호운의 마음이 요동쳤다. 이 아이가 이런식으로 무언가를 조르는 것을 흔치 않은 일이었다. 무엇을 조르더라도 호운이 안된다고 하면 이내 포기하던 아이가 몇 며칠을 포기도 않고 조르니 호운의 마음도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 호운의 마음이 흔들린 것을 눈치 챈 것일까. 장선생이 쐐기를 박는 한마디를 했다.

"내 도성에서 하루, 하루면 되네. 딱 하루면 되네."

하루.

그 말을 호운은 속으로 곱씹었다. 그 단 하루면 유시운이 바라는 것을 이뤄줄 수 있다. 호운은 눈초리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유시운의 얼굴을 보고 결국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유시운은 그런 호운에게 환호성을 지르며 매달렸다. 

"아빠. 아빠! 고마워!"

유시운이 무언가를 이리 기뻐하는 것을 보는 것도 처음이라 호운의 마음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장선생도 호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화원을 나섰다. 

이렇게 호운은 다시 도성으로 향하게 되었으니 유시운을 품에 안고 도성을 떠난지 불과 5년 만의 일이다. 

무릎을 꿇은 사내의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맺혀있었다. 그는 극도로 긴장한 듯 숨소리조차 큰 소리로 쉬지 못하고 조심스레 눈을 내리 깔고 있었다. 그런 사내의 앞에는 용포를 걸친 황제가 앉아 있었다. 황제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패어 있었다. 황제는 도무지 방금 전 부하의 보고를 믿을 수 없었다. 

"없었다고? 그래서. 그냥 돌아왔다고?"

"예, 황상."

고개를 조아리며 부하는 다시 같은 보고를 하였다. 부하의 손에는 황제가 쓴 편지가 고스란히 들려있었다. 여태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처음 그곳에 사람을 보내는데 고광윤은 몇 번이고 망설였다. 참아야 할 이유는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했다. 생각해보니 스스로도 말이 안 된다는 생각만 들어 도저히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지만 생각만은 터져나갈 듯 복잡하였다. 시간이 지날 수록 속만 답답하였다. 참을 자신이 없었다. 그저 어찌 지내는지 라도 들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아 보낸 자가 전해온 이야기에 고광윤은 더욱 애가 탔다. 결국 편지를 쓰기 시작한 것은 어느 만취한 밤, 취기의 힘을 빌려 붓을 놀린 것이 시작이었다. 그 편지를 호운이 받아줄지, 읽어줄지,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할 지 알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앞에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은 이길 수가 없었다. 첫 편지가 결국 뜯기지도 않고 버려졌다는 보고에 실망도 하였다. 그런데도 그는 다시 편지를 보냈다. 두 번째 편지도 버려졌다는 보고에도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세 번째 편지는 적어도 버려지지는 않았고 네 번째 편지도 버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호운이 편지를 읽기 시작하였다는 보고가 올라오기 시작하자 그는 뛸 듯이 기뻐졌다. 그러자 욕망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편지를 보냈다. 이렇게 편지를 보내다 보면 언젠가는 답장이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단 몇 불, 자신의 모든 생각을 억누른 채 호운이 보고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것으로 추린 편지를 끝없이 보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호운이 없어 그냥 돌아왔다 한다. 이 같은 허망한 대답을 돌려주자 화가 치밀었다.

"집을 비운 것이라면 다시 올 때까지 기다렸다 전하면 될것을 돌아오다니! 네 지금 죽고 싶은 것이냐?"

눈썹을 치켜세운 황제의 말에 부하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향한 곳이 도성이라는 말에 족히 한 달은 걸릴 것이라 생각해 그냥 돌아왔습니다. 황상."

그 대답에 황제의 얼굴이 굳었다. 한참을 넋을 잃은 듯 멍하니 있던 황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그것이 정말이냐?"

"네, 황상."

"그때가 언제냐?"

"보름전입니다."

보름전이라면 지금쯤 도성에 도착하였을 시간이었다.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난 채로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웃는 표정 같기도 했지만 어쩔 줄을 모르는 표정같기도 하였다. 한참동안 뭐라 말도 못하고 그리 서 있던 황제가 손짓으로 내관을 불렀다. 옥좌의 곁에 대기하고 있던 백발의 내관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하문하십시오."

"너는 호씨를 알고 있으렷다."

황제는 그 답지 않게 목소리를 낮추고 말문을 열었다. 마치 이 소리가 밖으로 새는 것이 두렵다는 식이었다. 내관이 대답대신 고개를 숙이자 황제가 말했다. 

"지금 즉시 도성을 샅샅이 뒤져 호씨를 찾아내라. 찾아내서 내게 보고를 하라."

"예, 황상."

내관은 고개를 조아리고 소리 없는 발걸음으로 대전을 나섰다. 이내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부하까지 내보낸 후 황제는 힘이 풀린 듯 옥좌에 미끄러지듯 앉았다.

"지금 도성에 있다고..."

이 도성에 그가 있다. 그리 생각하자 황제의 가슴이 다시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거기 있는지도 몰랐던 심장이 세차게 박동하며 황제에게 제 존재를 알렸다. 비로소 황제는 심장을 가진 사내, 고광윤이 되어 웃었다. 

그 시각 유시우은 거대한 물을 보고 기가 죽어 있었다. 그들이 살던 작은 마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규모의 성문은 존재 자체가 외지인들을 위압하기에 충분했다. 튼튼한 쇠로 덧대어진 나무는 두께만도 작은 어린아이의 몸통보다 두꺼웠고 면적이나 높이또한 만만치 않았다. 하늘을 틀어막은 듯 압도하고 선 문을 보며 말문을 잃은 유시운은 보고 호운은 돌려하듯 말했다. 

"아직 문 밖에 보지 못했는데 왜 그러는 것이냐, 안으로 들어가면 더 놀랄 일들만 있을텐데. 자, 어서 내리자꾸나."

호운의 말에 유시운은 번쩍 정신을 차렸다. 도성의 성문은 특별한 사람 말고는 마차를 타고 지날 수 없으니 일행ㅇ느 모두 마차에서 내려야 했다. 장선생까지 마차에서 내리자 마지막으로 마부가 마차에서 내렸다. 아무래도 긴장한 것은 유시운만은 아니었던지, 장선생은 굳은 얼굴로 뻣뻣하게 걸었다. 도성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하여도 의젓하던 그가 도성의 성문을 보고 굳은 것을 보니 그 또한 아직 어린 청춘이구나 싶어 호운은 웃었다. 일행 중 가장 먼저 도성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열에 줄을 선 것은 유시운이었다. 누구보다 빨리 자리를 잡은 유시운은 일행에게 크게 손짓을 했다. 

"아빠! 장선생님!"

금세 평소 같아진 유시운의 태도에 장선생은 굳어있었던 자신이 부끄러웠던지 허둥짇둥 그의 뒤에 가서 줄을 섰다. 호운은 둘의 모습에 그저 미소를 지으며 아련하게 웃었다. 자신이 청므 도성을 찾았을 때가 생각났다. 도성의 모습에 놀란 호운처럼 복치운도 놀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유일하게 태연했던 것이 유란란이었는데 그 피를 이은 유시운도 이리 담대하게 나오니 절로 그때가 떠올랐다. 호운은 마치 그때처럼 구름이 잔뜩 긴 하늘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수년만에 다시 찾은 도성은 전과 다름없이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며 호운을 반겼다. 

도성의 검문은 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웅장한 도성의 성문을 열고 들어간 유시운은 그 안의 풍경에 입을 딱 벌렸다. 장선생도 어지간히 놀란 것인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주변을 살폈다. 마부도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는지 뭐라 말도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합니까."

유일하게 놀라지 않은 호운이 장선생에게 묻자 그가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숙부께서 사람을 보낸다고 하셨네."

장선생의 말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장선생을 찾는 이가 나타났다. 사내치고는 키가 작고 얼굴이 갸름한 그 사내는 장선생을 단번에 알아보고 다가왔다. 

"장면 서생이시오?"

마을에서는 선생으로 불리 우는 그이지만 도성에 도착하자 서생으로 순식간에 신분이 변했다. 그러나 여기서 자신이 장선생이니 하여봐야 창피를 당한다는 것을 아는 장선생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그 사내는 일행을ㄹ 확인하듯 한번 쭉 둘러보더니 마부에게 명했다.

"자네는 되었으니 내일 진시쯤에 이곳에 다시 나오게. 내일 또 먼 길을 가야하니 말을 충분히 먹여야 할 게야."

"예."

마부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는 것을 들은 사내가 장선생에게 말했다.

"장서생은 나를 따라오시오. 그리고 일행도 함께 오시오."

고압적인 말투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사내의 목소리는 조금 가늘었다. 그러나 그 가느다란 목소리에도 장선생은 조금 기가 죽은 듯 고개만 끄덕이고 그의 뒤를 따랐다. 호운과 유시운도 그 뒤를 따랐다. 조금 걸어가자 대로변에 검은 칠이 된 마차가 세워져 있었다. 날렵한 몸매를 가진 흑마 두 마리를 앞세운 쌍두마차였다. 그것만으로도 장선생의 숙부라는 자의 위세가 짐작이 되었다. 

"오르시오."

위압적인 사내의 말을 다라 장선생은 마차에 올랐다. 어찌하다 보니 얼결에 호운과 유시운 또한 마창 오르게 되었다. 원래 도성에 도착하면 따로 행동을 하기로 약조한 터였는데, 위압적인 사내의 기세에 눌리다 보니 일이 이렇게 되었다. 갸름한 얼굴의 사내까지 마차에 타자 마차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장선생은 붕위기에 눌린 태를 내고 싶지 않았던지 애써 태연한 척 하며 사내에게 물었다. 

"숙부님께서는 안녕하신가."

사내는 대답대신 고개만 까딱거렸다. 그 태도가 무례해 보여 장선생은 족므 기분이 상한 듯 말했다.

"자네는 숙부님의 집에서 뭘 하는 자인가?"

"장선생이 알 것 없소."

그 대답에 장선생의 표정이 굳었다. 예상과 다른 전개에 호운의 표정도 굳었다. 그러나 사내는 자신의 말에 분위기가 굳어있다는 것을 뻔히 앎녀서도 그것을 타개하기 위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유시운마저도 분위기에 눌려 단 한마디도 못하였다.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인 가운데 마차는 쉼 없이 달려 목적지로 향했다. 

"도착했습니다."

호운이 밖을 보니 도착한 곳은 어느 저택의 정원인 듯 하였다. 장선생은 사내의 말에 낯을 굳히고 거친 동작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쿵! 일부러 발을 굴린 장선생을 보고 사내는 모른척 하였다. 이에 장선생은 사내의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비록 사내가 위세는 더 대단하지만 나란히 서자 장선생보다 머리 반개쯤 작아 장선생이 사내를 내려다보는 형국이 되었다. 부아가 치민 장선생이 사내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자네가 얼마나 대단한 자인지 모르지만 나는 숙부님의 핏줄이네. 자네가 모시는 분의 한 가족이란 말일세. 그런데 감치 이리 옴나하게 굴다니! 사람을 보는 눈이 없어도 늘 조심을 하여야 한다는 것을 배우지 못하였는가!"

장선생의 훈계에 사내는 오히려 피식 웃음을 흘렸다. 

"시골 서생이라 하더니..."

"자네 지금 뭐라고 했는가!"

장선생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내가 모시는 사람은 목대인이오. 장대인이 아니라. 이것으로 대답이 되었소?"

그 말에 장선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호운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지만 장선생은 알아들은 모양이다.

"그러면 그렇다고 처음부터..."

"따라오시오."

사내는 그리 말하고 얼른 앞장서서 걸었다. 그 뒤에서 일그러진 얼굴로 서 있던 장선생은 곧 한숨을 쉬고 성큼성큼 걸었다.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호운도 그저 유시운의 손을 잡은 채 그 뒤를 따라갔다. 

입구부터 화려하고 웅장하였던 저택은 안으로 가니 더욱 화려해졌다. 이는 마치 호운이 보았던 궁 안의 소궁들의 규모와 다르지 않았다. 그 화려한 모양이 낯이 익을 듯한 기분이 들어 호운이 주위를 둘러보는 가운ㄷ 사내는 점차 안으로 안으로 일행을 이끌었다. 사내를 따라 걷던 호운은 걸리는 게 있었다. 묘하게 익숙한 내부의 형태도 마음에 거렸지만 이렇게 넓은 건물을 지나는데 여태 단 한사람도 마주치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거슬렸다. 이런 건물이람녀 적어도 시종 몇은 마주쳤어야 옳은데 그들이 가는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치 이목을 피하듯 조용한 길을 따라 걸으며 호운은 침묵을 지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는 한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탁자 하나와 여럿이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마련된 것으로 보아 주로 손님을 맞을 때 사용하는 방으로 보였다. 

"기다리시오"

사내는 그 맒나을 남기고 방을 나서버렸다. 사내가 방을 나서자마자 장선생이 울화가 치미는 듯 탁자를 내려쳤다. 여태 장선생을 생각해 입을ㄹ 다물고 있었던 호운이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호운이 묻자 화가 난다느 듯 탁자를 치고 있던 장선생이 대답했다.

"여태는 내 면구스러워 읿을 다물고 있었네만, 내가 이렇듯 도성에 온 것은 선때문이네."

"선이요?"

"숙부께서 조정 고관인 목대인의 여식과 맺어주시겠다 하여 이리 찾아오게 된것이네."

그 말에 호운은 그가 어째서 하루면 된다고 말하였는지 알았다. 하긴, 서로 집안을 맞춘 후 얼굴 정도를 보는 자리인데 그 이상이 이어질 리가 없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선을 보러 온 것치고는 기묘했다. 무엇보다 선을 보여주겠다며 사람을 불러와 놓고 저런 고압적인 자를 마중으로 보내고 저택에 도착한 후에도 시종이 차조차 내어오니 앟는다니, 호운이나 유시운은 무시한다고 하더라도 장선생은 그리 대할 수 없는 것인 아닌가.

"그럼 아까 그 사람이 모신다고 하였던 목대인이 장선생께서 선을 볼 여인의 집안사람이란 말입니까?"

"그리 되겠지! 하지만 아무리 내가 숙부님 말고는 기댈 곳이 없는 처지라지만, 이건 너무 하는 것 아닌가! 자네도 그리 생각하지?"

장선생의 말에 호운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심하기 이전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장선생은 그런 의심은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빠, 우리 여기 있어야해?"

도성에 도착할 때 까지만 하여도 잔뜩 들떠 있던 유시운은 차례차례 절어진 일에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호운이 느끼는 불안이 유시운에게도 전염 된 듯 하였다. 

"아니, 곧 여기서 나갈 거야."

"그렇지만 아까 마차..."

유시운이 장선생의 눈치를 살피다 호운의 귀에 대고 소곤소곤 귓속말로 말했다.

"우리가 들어온 다음에 다시 나갔어."

그말에 호운이 깜짝 놀랐다. 나갔다니? 어느 마차가?

"어느 마차 말이냐?"

"울리가 도성까지 타고 온 마차."

그 말에 호운의 표정이 변했다. 마차가 도성 밖으로 나갔다? 내일 다시 이곳으로 와야 하니 말을 시ㅜ게 하라는 명을 받은 마차가 어째서 도성 밖으로 나갔단 말이인가?

"그게 사실이냐?"

"응. 아까 마차에서 오르기 전에 보니까 도성 밖으로 나갔어. 아주 빨리 달려서 가 버렸어."

유시운이 느끼는 불안은 단순히 호운에게서 전염된 것이 아닌 듯 했다. 또래보다 영특한 유시우은 직감적으로 지금의 상황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듯 하였다. 그러나 선을 본다는데 정신이 팔린 장선생은 그런 사황을 눈치 채지 못한 것인지 다시 탁자를 두르리며 말랬다. 

"여기 시종들은 뭘 하는 게야. 손님이 왔는데도 차도 내지 않고!"

그러나 장선생이 큰 소리를 내는데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방안을 들여다보는 이가 없었다. 점차 불안이 호운의 심장을 뛰게 했다. 이상했다. 지금 상황은 아무리 보아도 정사잉 아니었다. 불안에 눌린 호운이 성큰 장선생의 앞으로가 말했다.

"장선생님, 저희들은 일단 가보겠습니다."

"예가지 왔는데 차조차 들지 않고? 지금 무너가 잘못되어 이런 거네. 조금만 기다리게. 곧 시종들이 차를 내올게야. 기왕임녀 식사도 하고 가게."

장선생은 혹시나 호우이 자신이 홀대받는 것만 보고 돌아가게 될까 두려웠다. 비록 여기서는 아무것도 아닌 그이지만 자신의 마을에서는 존경 받는 '장선생'이다. 그런 자신을, 친척에게 홀대받는 자로 보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장선생은 혹시나 그런 것만 보고 돌아간 호운이 마을에서 장선생이 별것 아니라고 떠들어 댈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느꼈다. 호운은 아무래도 장선생이 쉬 자신들을 놓아줄것 같지 않자 거짓말을 했다. 

"제가 도성에서 아는 분이 있어 그 분을 만나 뵈러 가려고 합니다. 저녁 늦게 찾아뵈면 실례가 아니겠습니까?"

"아는 분이라니? 어떤 분인가?"

"제가 도성에 있었을 때 모셨던 분입니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는 호운을 보고 장선생은 오히려 호기심이 동한 듯 했다. 

"어떤 분인가? 말해보게. 어쩌면 내가 아는 분인지도 모르지 않나."

호운은 장선생이 추궁해오자 오히려 난처해졌다. 아무 이름이나 대었다가 장선생이 아는 척을 하면 곤란해져 호운이 우물거리는 찰나. 여태 누구도 들여 보지 않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어려 사내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숙부님!"

 사내들은 중 귀밑머리가 희끗해진 남자를 보고 장선생은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호운은 오히려 그 상황에 경계심이  들었다. 방안으로 들어온 중년인은 수많은 사내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집안에서 저리 많은 사내들을 거느리고 나타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호운이 의심스레 바라보는 가운데 반색해 앞으로 나선 장선생이 자신의 숙부에게 말을 걸었다.

"숙부님을 기다리느라 목이 빠지는 줄알았습니다."

장선생은 반색했지만 그 숙부라는 자는 침묵을 지켰다. 장선생은 자신을 만나면 적어도 무어라 반가워하며 말을 건네주리라 믿은 숙부가 말 없이 서 있자 안달이 나 ㄴ듯 말했다. 

"숙부님! 왜 그러십니까? 절 찾으시지 않으셨습니까."

"확인해보십시오."

그러나 숙부라는 자는 장선생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방문 밖에 대고 말하였다. 그러자 열린 문 너머로 아까 일행을 맞이해 마차에 태우고 왔던 갸름한 얼굴의 사내가 한 노인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검버섯이 피고 머리가 새하얗게 샌 그 노인은 외모와 달리 무척 정정해 허리도 굽지 않았고 눈빛도 선명했다. 방안으로 들어온 노인은 장선생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호운과 유시운은 벌갈아 보았다. 특히 호운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그리고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노인의 말이 떨어지지 장선생의 숙부가 말했다. 

"끌고 가라."

그러자 숙부의 뒤로 서 있던 사대르잉 앞으로 나서서 장선생의 팔을 붙들었다. 장선생은 예상 못한 상황에 당황해 제 숙부를 보았다.

"숙부님?"

"조용한 곳에 대려 놓아라. 다치게는 하지 말고."

숙부는 장선생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그리 말했다. 숙부님! 숙부님! 복도에 장선생의 목소리가 한참을 메라리쳤다. 호운은 저도 모르게 유시운의 어깨를 손을 대고 그를 자신의 가까이에 두었다. 그러자 백발의 노인이 인상을 찡그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분의 몸에서 손을 떼라."

유시운은 갑작스러운 일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천한 것이 감히 왕자 전하에게 손을 대다니. 분수도 모르는 놈."

그 말에 호운의 숨이 멎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앞의 노인을 보았다.

"왕자 전하?"

상황을 모르는 유시운은 그저 어리둥절한 듯 노인의 말을 흉내 내 말했다. 노인은 그런 유시운에게 다가와 말했다. 

"네, 왕자전하. 저자가 왕자전하께는 사실을 고해바치지 않은 모양이지요?"

유시운의 눈동자가 불안한 듯 흔들렸다. 그는 호운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호운을 올려 보았다. 아상하게도 호운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아빠...?"

"전하, 어찌 그런 천것을 아비라고 부르십니까. 전하의 부친은 황가의 적통인 진성왕전하이십니다. 저런 천것이 아닙니다."

노인은 조곤조곤 온화하게 유시운에게 말을 건넸다. 그 말투에 호운은 이 노인의 정체를 알 수 밖에 없었다. 

"편지를 보낸 것이 당신입니까?"

호운의 말에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편지라는 게 뭐야?"

"시운아."

유시운은 이 알수 없는 상황을 제 아비가 아는 듯 하자 불안한 듯 물었다. 대답하지 못하는 호운을 대신 노인이 대답했다. 

"바로 전하를 도성으로 모시고 오라는 편지입니다. 한데 저자는 그 명을 무시하고 감히 편지를 불에 테워버렸지요. 참으로 파렴치한 자가 아닙니까."

"아빠?"

유시운은 갑작스러운 이야기들에 혼란스러운 듯 호운을 보았다. 그러나 호운은 한마디도 못하고 그저 노인을 보고 있었다. 부르르 떨리는 그의 입술은 무언가 말을 찾고 있었지만 부정하는 말은 다 한마디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노인은 파리한 호운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래도 이린 전하를 만나게 되었으니 참으로 하늘이 도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

유시운이 놀라 눈을 끔뻑거리는 가운데 노인이 호운을 향해 말했다. 

"혹시 이대로 전하를 네 곁에서 키워 장차 부귀영화를 누리려 했더냐? 황상께 자식이 없으니 시간만 지나면 전하께서 황위를 물려 받을 것이라 계산하고 그리 전하를 품에 끼고 있었을 테지, 과연 천한 것 답게 천한 짓거리에 능하구나. 하니만 내가 두 눈을 벌겋게 뜨고 살아있는 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여봐라!"

노인이 부르자 문 밖에서 대기 하고 있던 자들이 우르르 방안으로 들어와 호운을 순식간에 포박했다. 그 모습에 유시운이 번쩍 정신을 차렸다. 

"무슨 짓이에요. 아빠한테 그러지 말아요!"

유시운이 호운을 향해 가려하지 노인은 그 팔을 붙들었다. 

"놔요. 아빠! 아빠!"

상당히 나이가 든 노인임에도 그 악력이 대단해 유시운은 그 손을 뿌리칠수가 없었다. 유시운이 외치는 소리에 호운도 다급하게 그를 보았다. 그러나 노인은 두 사람이 서로를 보는 것조차 못마땅했던지 차갑게 말했다. 

"전하. 저자가 누구인지 지금 아시고 그러시는 겁니까. 저자가 바로 전하의 모친을 죽인 장본인입니다."

그 말에 호운을 부르던 유시운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호운도그 말에 충격을 받은 듯 노인을 보았다. 노인의 말은 호운의 해묵은 상처를 정통으로 관통하였다. 숨을 쉬 수가 없는 사람처럼 입을 뻐끔거리는 호운을 보며 노인은 말했다. 

"그러고도 왕자 전하의 아비노릇을 하여왔다니, 참으로 소름이 끼칩니다."

"아니야. 아빠는 ... 아빠는 엄마의 엄마의 오빠라서, 나한테는 백부고..."

유시운은 더듬더듬, 자신이 아는 호운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은 들은 노인은 오히려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저 자가 그리 말했습니가? 자신이 백부라고? 전하, 어찌 그런 간악한 속임수에 속고 계시었단 말입니까?"

혀를 찬 노인은 유시운을 설득하듯 말했다. 

"전하의 모친의 이름은 알고 계십니까?"

"란란..."

유시운이 홀린 듯 대답하자 노인이 말했다. 

"그런데 그분의 성은 유씨입니다. 제가 그분께 직접 첩지를 전해드렸습니다. 진성왕의 총비 유씨였지요. 그런데 저자의 성은 무엇입니까."

노인의 말에 유시운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매달리듯 호운을 보았다. 호운은 노인의 말을 거짓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단 하나도, 부정하지 않았다. 유시운의 혼란에 휩싸인 것을 확인한 노인이 명했다.

"끌고가라."

자신을 잡아끄는 사내들의 행동에 호운은 뒤늦게 정싱을 차리고 유시운을 보았다. 그리고 애타게 그를 불렀다.

"시운아!"

호운은 유시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유시운은 호운에게 손을 뻗지 않고 그저 호은을 가만히 바라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유시운의 눈에는 선명한 불신의 색이 떠올라 있었다.

호운은 사내들에게 끌려 나가 그대로 타고 왔던 마차에 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들은 이끌고 왔던 백발의 노인도 함께 마차에 올랐다. 그는 함게 마차에 오른 사내들에게 명해 호운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그러나 호운은 소리를 낼 기력조차 없었다. 마치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멍했다. 지금 그는 노인이 헤집은 과거의 상처와 유시운이ㅡ 눈빛으로 입은 새롱누 상처에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호운과 노인, 그리고 세 명의 사낼르 태운 마차는 쉼없이 달렸다. 마차가 선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거의 도성 밖으로 나간 것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한참을 달린 마차에서 끌려 내려온 호운의 머리위로 두꺼운 천이 씌워졌다. 사내들은 호운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천으로 씌운 후 짐짝처럼 들어올렸다. 호운이 다시 밖을 본 것은 사내들에 의해 내동댕이쳐진 후였다. 얇ㅇ느 벽돌이 깔린 바닥은 이곳이 어딘가의 걸물 안이라는 것을 알려줬지만 도대체 이곳이 어디인지, 어디쯤인지도 분간하기 힘들었다. 호운이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노인이 성큼 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이곳이 어디인지 궁금한가?"

노인의 물음에 호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뚫어져라 노인의 얼굴을 보았다. 점차 멍했던 머리가 정리되자 호운은 상대가 누군인지를 깨달았다. 너무나 정신이 없어 처음에는 깨닫지 못하였다.

"목현상..."

대전태감 목현상이었다. 내관이면서도 품계가 있는 관직을 가지고 있는 대전 내관들의 우두머리로 호운 또한 궁에 있으면서 몇 번인가 그를 본  적이 있었다. 만약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못 알아보았을지도 모르지만, 그가 유란란에게 첩지를 내리러 왔다는 말에 홍누은 상대를 알 수 밖에 없었다. 

"나를 기억하는 모양이군."

호운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은 목현상은 비뚤어진 미소를 지었다. 호운은 그 미소가 목현상이 품은 악의를 알았다. 그러나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호운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던 자다. 그런데 그런 그가 돌연 이 같은 일을 벌이다니, 장선생의 선이라는 것도 결국 목현상이 꾸민 일이 분명했다.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왜?"

"저와 시운이는 그냥 조용히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호운이 외치자 목현상의 멀굴이 일그러졌다. 그냥 보기에는 온화하게도 보이느 얼굴이 일그러지자 마치 악귀처럼 보였다. 

"왜? 지금 왜라고 하였느냐?"

목현상은 포박된 호운의 코앞까지 다가와 그의 머리를 움켜쥐며 말했다. 

"그럼 네 놈은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그리 했던 것이냐?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그 아이를 죽인 것이냐!"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머리의 가죽이 뜯겨나갈 듯한 고통에 호운이 힙겹게 소리를 질렀다. 그아이라니, 목현상의 말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목현상은 그런 호운의 말에 오히려 으르렁거렸다.

"내 아들을 네가 죽이지 않았느냐!"

"아들...?"

호운은 짐작이 가는바가 없었다. 삶이 평탄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여태 단 한 사람도 죽인 적이 없다. 비록 유란란의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더라도 그가 누군가를 죽인적은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데 아들을 죽였다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목현상은 호운의 얼굴을 제 앞으로 바싹 잡아당기며 말했다.  

"짐작도 가지 않는 표정이구나. 그렇겠지. 네놈이 죽인 자가 워낙에 많으니, 그 중 누구인지 짐작도 가지 않겠지!"

목현상의 목이 벌겋게 달라올랐다. 그러나 지나친 분노 때문인지 얼굴은 서서히 창백해졌다. 

"내 아들은 네 ㄴ모이 죽겠다며 난리를 치는 통에 목이 달아났다. 그 아이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황상을 희롱하기 위해 거짓으로 자살을 하려 한 네 놈때문에, 네 놈 때문에 죽었단 말이다!"

숨이 막혔다. 아니, 숨이 멎었다.

"....설마..."

호운이 경악해 목현상을 보았다. 목현상은 여전히 악귀 같은 얼굴로 호운을 노려보며 외쳤다.

"내가 거세해 내관이 되기 전 가진 유일한 아이였다. 결국 저 또한 나처럼 내관이 되어버린 불쌍한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 그 아이를 죽이고도 어찌 네놈은 이리 멀쩡하게 살아있단 말이냐!"

목현상의 외침이 귓전에서 쩌렁쩌렁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아느냐? 응?"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있던 호운을 보고 목현상이 빈정거리며 물었다. 

"모르겠지! 너처럼 이기적인 놈이 죽은 내관의 이름 따위를 알 턱이 있느냐! 잘 들어라. 그 아이의 이름은 정이었다. 바르게 살라고, 내가 그 아이가 태어났을 때 지어줬던 이름이다! 그런데 고작, 고작 겨우 네깟 놈때문에..."

분에 경누 듯 목현상이 주먹으로 호운의 얼굴을 쳤다. 힘이 없는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손에 실린 힘은 상당했다. 주먹에 맞은 호운이 힘없이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쿠당탕! 바닥을 구른 호운에게 목현상이 달려들었다. 뼈가 툭툭 불거진 노인의 손은 호운을 가차없이 두들겼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벌컥 열리더니 호화로운 복장을 한 뚱뚱한 사내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호운에게 주먹질을 하는 목현상을 보고 깜짝 놀라 그를 말리고 들었다. 

"목대인 상품에 상처를 내시면 어찌합니까!"

뚱뚱한 사내의 제지에 목현상은 씩씩거리며 거친 숨ㅇ르 내쉬며 주먹을 멈췄다. 뚱뚱한 사내는 바닥에 쓰러진 호운을 보고 혀를 찼다. 

"얼굴이 붓지 않았습니까. 저러면 상품가치가 떨어집니다."

목현상은 아직도 분이 주체되지 않는지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비뚤어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안하게 되었네. 내, 자네의 상품에 상처를 내고 말았군."

호운은 멍하니 목현상의 말을 들었다. 목현상은 자신이 때려 부어오른 호운의 눈가를 쓰다듬으며 말해ㅆ"내 비록 네 놈에 대한 원한은 크짐나 나는 네놈같은 인간백정과 달라 목숨은 사려 줄 것이다."

목현상의 말 한마디에 스며든 악의가 실로 대단했다. 

"내 편지에 쓰지 않았더냐. 평생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게 해 주겠다고. 여기에 있으면 평생 먹고 살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네놈이 가장 잘 하는 것을 하며 죽을 때까지 살 게 될 테니 아마 내게 고맙다고 할게야."

목현상은 그리 말하며 호운을 바닥에 밀쳤다. 여전히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있는 호운을 뚱뚱한 사내의 곁에 서 있던 자들이 붙들어 세웠다. 

"실수라도 저놈이 도망치게 하지는 마시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놈은 이제 죽을 때까지 태양빛을 보지 못하는 신세가 될 테니."

"쯧, 이래서는 열 냥도 받기 힘들겠구나. 그래도 멀쩡했다면 족히 스무 냥은 받을 얼굴이거든."

그리고는 혀를 쯧쯧 찬 사내가 손가락을 올렸다.

"별실로 끌고 가라."

"예."

명을 받은 사내들은 호운을 붙든 채 걸었다. 호운은 사내들에게 붙들린 채 멍하니 끌려 갔다. 저항할 기력이 솟지 않았다. 그의 귓전에는 여전히 목현상의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그때문에 죽었다는 자의 얼굴을 아무리 생각해 보려 하여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때의 기억 대부분이 몽롱한 것이지만 자신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죽이리라고 위협하는 말을 듣고도 자신의 괴로움에 목을 맸다. 돌에 머리를 박고 혀를 깨물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자신은 살았고 대신 다른 자들이 묵었다. 여태 그것을 잊고 있었다. 그러나 잊었다고 해서 그것이 없었던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호운이 정신을 차려보니 주변의 풍경은 변해있었다. 마치 감옥철머 사방이 돌벽으로 이루어지 ㄴ곳으로 호운을 끌고 온 사내들은 그 돌 벽을 지나고 또 지나 방문을 열었다. 허름한 침상 하나와 향로가 전부인 방안에는 매케한 연기가 가득 차 있었다. 사내들은 호운을 그 자리에 내팽개치고는 능글능글 웃었다. 

"도망칠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아니, 이 방에서 이틀만 있으면 도망쳐도 제 발로 다시 찾아오게 될게야. 제발 별실에 넣어달라고 말이다."

호운은 사내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내들은 호운을 비웃으며 그대로 방을 나섰다. 그러는 중에도 호운은 여전히 넋이 나간 채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사내들의 발소리가 멀어지지 호운은 부스스 자리에서 얼어났다. 이내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죄책감에 가슴이 아팠다. 자신의 선택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호운은 울었다. 결국 호운의 과거는 지워어지지 않았다.

호운과 떼어내 진 후 유시운은 무척 호화로운 방으로 안내되었다. 생전 처음보는 커다란 침상과 화려한 가구들과 번쩍거리는 장식품으로 치장된 방이었지만 유시운의 눈에는 그 무엇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유시운은 혼란스러웠다. 생전 처음 들어 본 말들이 머릿속을 점령해 그의 머리는 지금 당장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러나 유시운을 무엇보다 혼란스럽게 한 것은 자신의 아비였다. 그는 노인의 말을 그 무엇 하나 부정하지 않았다. 유시운의 부친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유시운의 어미가 유씨라는 것도 그리고 그 어미를 자신이 죽였다는 것도 그 무엇 나하 부정하지 않았다. 새파란 얼굴로 부들부들 떨면서도 침묵을 지켰다. 

'아빠....'

유시운은 머리를 감싸 쥐고 움츠러들었다. 그렇게 유시운이 한참을 웅크리고 있는 와중에 굳게 잠겨있던 문이 열렸다. 그리고 호운을 데려갔던 목현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하."

방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고개를 숙이는 목현상을 보고 유시운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목현상의 말에 유시운이 불쑥 말했다.

"그 전에 아빠는요? 아빠를 보고 싶어요."

"아직 그 천것을 아비라 부르시는 겁니까?"

목현상은 유시운의 말이 탐탁지 않은 듯 인상을 썼다. 그러나 유시운은 오히려 강한 어조로 말했다.

"천것이라고 말하지 말아요!"

"전하, 아직 속고 계신 것입니까? 제가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천것은..."

"천것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어요!"

유시운이 외치자 목현상은 입울 다물었다. 그는 유시운이 이렇게 나오리라는 진정 예상하지 못했는지 당황스러운 눈치로 유시운을 보다 말했다.

"그 자는 전하의 어미를 죽인 놈입니다."

"아빠가 그렇다고 말하지 전까지는 믿을 수 없어요. 그러니까 아빠를 다시 데려와요!"

스스로 외친 말에 유시운은 깨달았다. 그랬다. 적어도, 자신은 호운에게는 단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그의 말을 듣지 전까지는 이 말도 안 되는 사실을 절대로 믿을 생각이 없었다. 

"아빠가 말하기 전 까지는 절대로 못 믿어요!"

"전하, 그자는 차마 전하의 앞에서는 입에 담지도 못한 일을 하던 그런 자란 말입니다.!"

"아빠를 데려오라니까요. 데려와요! 데려와!"

유시운은 악을 쓰고 발을 굴렀다. 목현상은 얌전해 보이던 유시운이 갑자기 소리를 질러대자 감당히 힘든 것인지 인상을 쓰고 말했다.

"정신 차리십시오. 전하! 그 천것에게 홀려서는 아니 됩니다!"

"데려오라니까요!"

"계속 이러시면 그놈을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전하!"

목현상의 말에 유시운의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제가 그놈의 목숨만 살려줄 생각이었는데 전하가 이러시는 것을 보니 생각이 바뀌는 군요. 이대로라면 전하는 절대로 황제가 될수 없습니다. 황제가 되실 존귀하신 분이 그런 천것을 아비라고 부르다니요!"

"무, 무슨말이에요!"

유시운은 겁게 질려 목현상의 소매를 잡았다.

"아빠를 왜 죽여요! 죽이지 말아요!"

유시운의 애원에 목현상은 냉정하게 말했다. 

"이제 다 전하를 황제로 만들기 위한 저의 충심임을 알ㄹ아주십시오. 전하. 지금은 괴로울지라도 훗날에는 제게 고마워하실 겁니다."

목현상은 그리 말하고 유시운을 뿌리치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문을 단단히 잠그라 명했다. 곧 유시운이 문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외쳐댔다.

"죽이지 말아요! 죽이지 마! 죽이지 말아요!"

유시운의 비염이 문 밖으로 크게 울렸지만 목현상은 미간을 찌푸리고 그대로 복도를 걷다 혀를 찼다.

"어찌 귀한 혈통이 저런단 말인가. 이게 다 그놈 탓이다. 그놈이 모든 일을 맘ㅇ치고 있어."

목현상은 도무지 상황이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그놈이 끼어든 일은 ㄹ모두 다 엉망친창, 제대로 된 일이 하나도 없었다. 

"살려두어서는 안되겠군."

처음에는 매음굴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는 신세가 되는 것이 그에게 내릴 최고의 벌이라 여겼는데, 이래도라면 그놈이 다시 일을 엉망으로 만들지도 모른다. 아쉽지만 그놈을 하루빨리 죽여야 했다. 

"영성장원에 전해라. 내일까지 오늘 보낸 놈의 목을 보내라고."

목현상의 명을 들은 부하가 고개를 끄덕이고 얼른 밖으로 나섰다. 목현상은 굳이 호운의 목을 요구했다. 조금 충격은 받겠지만 그 목을 유시운에게 보여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죽었다는 소리만 저해줬다가는 어쩌면 호운을 데려오라 또 악을 쓸지도 모르니 적어도 확실히 죽었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그러면 유 시운도 호운을 포기할 것이 분명하다. 죽음이라는 것이 대부분 그렇듯 말이다. 

'이 모든 것이 황실을 위해서다.'

거기에 목현상 개인의 사심은 없다. 적어도, 본인은 그리 믿었다.

한편 미친 듯이 방물을 두르리던 유시운은 이내 기력이 다해 그 자리에 힘없이 주저 앉았다. 두려움에 전신이 덜덜 떨려왔다. 노인은 단지 위협으로 그리 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노인의 눈을 보면 그것은 확실했다. 그 노인ㅇ느, 자신의 아비를 미워하고 있었다. 

"아빠, 아빠...!"

유시운의 눈에 뿌옇게 눈물이 차올랐다. 새삼, 후회가 물밀듯 밀려왔다. 왜 그순간에 아비를 못 빋었던가, 아비는 어쩌면 단지 그 말들에 놀라 대답하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뭣보다 노인은 호운이 유시운을 키운 이유가 그가 황위에 올랐을 때의 부귀영화 때문이라 하였다. 그러나 유시운이 아는 호운은 그런 것을 바랄 자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유시운은 호운이 자신의 어미를 죽였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엄마는 어떻게 왜 죽었어?"

유시운이 처음으로 그렇게 물었을 때 호운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유시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네 어미는 병에 걸려서 죽었단다."

"어떤 병에?"

"아주 무서운 병에 걸려서 죽었어."

그렇게 말하는 호운의 표정이 너무 슬퍼보여서 유시운은 더는 묻지 못하였다. 어미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호운은 때로는 혼화해지고 대로는 행복해지고 때로는 슬퍼졌다. 유시운은 그런 호운을 보며 어미를 향한 애정을 느꼈다. 그런데 호운이 어미를 죽였다니, 절대로 사실일 리가 없다. 방안에 힘없이 주저 앉아 있던 유시운은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까 확인한 바로는 창도 못질을 해뒀는지 열리지가 않았다. 그러나 이대로 이곳에 있을 수는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유시운의 눈에 서탁 위의 유등이들어왔다. 그것을 보며 망설이는 시간은 극히 짧았다. 유시운은 성큼성큼 서탁 앞으로 가 유등을 집었다.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호화로운 침상 한 가운데 집어 던졌다. 유등이 기름과 불길이 침상위로 떨어지고 순식간에 불길이 번지기 시작했다. 

"뭐? 죽이라고?"

호운을 상품 운운하였던 뚱뚱한 사내는 갑작스러운 목현상의 전갈을 받고 인상을 찡그렸다. 

"내일까지 목을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이어진 말에 뚱뚱한 사내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웬일로 그 늙은 내관이 자신에게 좋은 일을 해주나 하였더니, 이럴 줄 알았다. 그 늙은 내관은 행실이 바르지 못하거나 처리해야 할 내관들이나 여관들이 생기면 종종 뚱뚱한 사내에게 데려오곤 하였다. 괜히 다른 고승로 데려가 말이 새는 것보다는 이곳에서 처리하는 것이 잡음없이 처리하는 것으로는 최고의 방법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돌발적인 전갈을 보내어 오면 매우 짜증스러웠다. 그것이 새로 들어온 상품이 얼마캄큼의 수익을 올릴 지 열심히 계산을 하고 있던 와중이라면 더더욱.

"알았다고 전해라."

그러나 사내는 목현상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전령을 보낸 사내는 다시금 계산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새 상품이 하루 만에 몇 사람을 상대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계산이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군.'

시내는 부랴부랴 자리에서 일어나 시종을 찾았다. 지금이라도 새 상품을 손님에게 내어줘야 그래도 조금은 이익이 될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해질 무렵 궁 앞에는 황제를 보기 위해 몰려든 인파로 인산인해였다. 도성에서 내란이 있을 후 황제는 열흘에 두 번 일부러 백성들이 보이는 길에 서서 마차를 타고 궁 밖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도성의 흉흉해진 분위기를 잠재우기 위한 일환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화려하고 웅장한 황제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황제와 도성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ㄹ알리는 것이다. 호아제가 나타나자 백성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힐끔흘끔 황제의 모습을 살폈다. 이 단 한 순간을 위해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온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황제는 ㅁ낳은 사라들의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걸어 나와 준비된 마차로 향했다. 사람들은 모두 황제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숨을 죽였다. 그때 갑작스레 소란이 일며 침묵이 깨졌다. 황제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사람들이 분분히 고개를 돌렸다. 황제도 그 소란에 고개를 돌렸다. 소란이 이는 곳을 보니 병사들이 막아선 가운데 거지아이가 큰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던히 지나치려 해던 고광윤은 어쩐지 거지아이의 얼굴이 낮이 익은 듯 해 고개를 돌렸다. 자세히 보니 거지 꼴을 하고 있는 그 아이는 유시운이었다. 

"황제님! 황제님!"

"이 녀석이!"

병사들이 황제가 나선 상황에서 소란을 피우는 아이를 보고 적잖게 당황한 듯 보였다. 그러나 고광윤은 그런 병사들을 한손으로 물리고 유시운을 놓아주라 명했다. 도성에 와 있으리라 짐작은 하였지만 유시운이 이런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라고는 에상도 못했다. 그의 모습은 아루미 봐도 심상한 상태가 아니었다. 병사들에게서 풀려난 유시우은 한달음에 고광윤의 앞으로 달려 나왔다. 유시운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진창에서 굴렀는지 옷은 진흙투성이였고 얼굴에도 검댕이 가득했다. 그런 상황에서 고광윤이 유시운을 알아본 것은 그야말로 천행이나 다름없었다. 유시운은 곧장 고광윤의 앞에 서더니 그의 옷자락을 잡고 매달리며 말했다.

"황제님 우리 아빠 좀 살려주세요! 아빠, 아빠가 죽어요!"

"아빠가 죽는다니?"

곧바도 유시운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에 고광윤의 심장이 철렁 내려 앉았다. 유시운이 이런 몰골로 나타난 것도 놀랐는데 호운이 죽는다는 말에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할아버지가, 아빠를 죽인댔어요! 죽어야 한댔어요! 아빠가, 아빠를 죽여야 제가 황제가 된대요. 그러니까 아빠를 죽이겠대요. 그런데 아빠가..."

혼란스러운 상황인지 아이는 횡설수설했다. 고광윤은 유시운의 어깨를 움켜쥐고 말했다. 

"진정해라. 차근차근 말해보아라. 그 할아버지란 사람이 누구냐?"

"할아버지는 장선생님의 집에 온 사람이에요."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고광윤이 알아들을 리 없다. 고광윤이 눈살을 찌푸린 가운데 유시운이 말을 이었다.

"아빠를 데려가고, 아빠는 저를 불렀는데, 저는 아빠한데 대답을 안해서 아빠가 없어져서... 아빠가 없어져서.. 그래서 제가 불을 냈어요. 불을 내고 도망쳤어요. 아빠를 찾아야 하니까, 그런데..."

유시운의 말은 여전히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말들 중 유시운이 불을 질렀다는 말을 용케 알아들은 고광윤은 번쩍 고개를 들고 명했다.

"도서어 안에 불이 난 집을 찾아라. 어서!"

고광윤의 명을 받은 병사들이 우르르 뛰어나갔다. 그 후 고광윤은 유시운의 어깨를 흔들며 물었다. 

"침착해라. 네 아비를 어디로 데려갔다는 거냐."

"모르겠어요. 아빠가 나를 불렀는데...내가 대답을 안 해서...."

유시운은 죄책감과 불안에 견디지 못하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엄마가 아빠 때문에 죽었다고 해서... 아빠가 그럴 리가 없는데, 그걸 믿어버렸어요. 아빠가 그럴 리가 없는데, 믿어버렸어요."

우는 아이의 말에 고광윤은 상황이 예상이상으로 심각하다는 것을 알았다.

"울지만 알고 침착해라. 침착하지 않으면 네 아비는 죽는다."

유시운을 냉정하게 만들려고 한 말이지만 그 말은 고광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호운이 죽는다?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고광윤의 말에 유시운은 울음을 멈추려고 애를 썼다. 쉽게 눈물이 멈추지 않았지만 노력은 했다. 고광윤은 유시운의 숨이 비교적 고르게 되자 물었다. 

"그 할아버지라는 자라 했던 말 중에 생각하는 것이 있느냐? 이름이라거나."

유시운은 애써 기억을 더듬었다. 혼란스러웠지만 지금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할아버지가... 엄마가 총비라고 했어요. 엄마한테 첩지를 준 사람이 자기라고..."

첩지를 내리라 명한 사람이 바로 고광윤이다. 고광윤은 첩지를 어찌 써서, 누구에게 내리라 하였는지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고광윤은 멀찍이 대기하고 선 내관에게 물었다.

"목태감은 어디에 있느냐?"

"황상, 목태감은 오늘 휴일입니다."

길게 생각할 것까지 없었다. 고광윤은 유시운이 달아난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아직 어린 유시운의 걸음으로 달려 도망쳐 이곳까지 올만한 건물은 많지만 목현상이 있을 만한 건물이라면 한 곳 밖에는 없었다.

"진성왕부로 가자!"

목현상은 종이품에서 정이품으로 승진을 하여 과거의 진성황부를 하사받았다. 수십명의 처첩을 거느리고 살던 진성왕부는 무척 화려하였고, 일개 환관이 하사받기에는 과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러나 육십이 넘도록 궁에서 황제를 보필하는 자인 것을 감안하면 그리 과한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 목현상의 궁에서 기거하지 않고 출퇴근을 하는 내관 다수를 데리고 있었다. 그 수를 감안하면 이 넓은 집도 결코 넓다 할 수 없었다. 처음에 불이 났다는 보고를 받은 목현상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넓은 집이다 보니 방에 불을 켜 놓았다 종종 사고가 일어나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불이 유시운이 있는 방에 붙었다는 것을 안 목현상은 당황했다. 그가 얼른 달려가 보니 불길의 기세가 예상보다 더 셌다. 불은 삽시간에 번져 유시운을 가두었던 방으로 향하는 복도에도 매케한 연기가 자욱했다.

"전하는! 전하는 어디 계시냐?"

목현상의 외침에 수하 내관들은 뭐라고 대답을 못했다. 유시운이 아직 저 불길에 휩싸인 방안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목현상이 불길 속을 향해 외쳤다.

"전하! 전하!"

그러나 불길 속에서 유시운의 대답은 없었다.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벽처럼 목현상의 속도 새카맣게 타들어갔다.

"어서 물을 가져와라! 어서, 어서!"

매캐한 연기가 가득 찬 복도에 사람들이 양동이로 불길에 묵을 뿌렸다. 그럴 때마다 수증기가 일어 그렇지 않아도 어둑어둑 하던 복도가 시커멓게 변했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지만 사람들은 계속 불길을 향해 물을 뿌리고 뿌렸다. 마침내 반시진 정도가 흐르자 불길이 어느 정도 잡혔다. 목현상은 서둘러 유시운이 갇혀있던 방으로 달려갔다. 열기에 부서졌는지 굳게 닫혀있던 방문은 반쯤 무너져 있었다.

"전하!"

시퍼런 안색의 목현상이 방 안을 보니 온토오 새카맣게 탄 재 뿐이었다. 혹시나 저 재중에 하나가 유시운일까 겁에 질렸던 목현상은 타다 남은 침상의 위에 유등이 떨어져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이 불이 유시운이 지른 불이라는 것을 깨달은 목현상이 큰 소리로 외쳤다.

"전하를 찾아라! 아직 멀리 가지는 못하셨을 테니 어서!"

목현상의 명에 부하들이 우르르 흩어졌다.

목현상의 예상과 달리 유시운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이 근방이 아이가 쉽사리 돌아다닐 곳이 아니니 눈에 뛸것이라 예상하였음에도 유시운을 보았다는 자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 사실에 목현상의 속이 타들어가는 와중에 갑자기 황제가 저택을 방문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렇지 않아도 유시운의 일 때문에 정신없던 목현상은 당황하면서도 허둥지둥 황제를 맞았다.

"황상, 이곳까지 어인일이십니까?

목현상이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광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목현상의 저택에서 기거하는 내관들도 맨발로 뛰어나와 그를 맞았다. 모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내관들은 쭉 둘러본 고광윤이 말했다. 

"내가 좋지 않을 때에 온 것이냐?"

고광윤의 물음에 목현상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좋지 않은 때에 온 것은 맞지만 목현상은 그런 것을 내색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아닙니다. 황상! 그저 갑자기 이런 곳에 오셔서 모두 당황한지라..."

목현상의 말에 고광윤이 피식 웃었다.

"그저 당황하였다..라. 왜, 없어진 아이가 어디로 갔는지 찾지 못하여서 그런것이냐?"

고광윤의 말에 목현상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불길한 예감에 더듬더듬 대답을 했다.

"그게...무슨 말씀이온지..."

"아니면 아이가 지른 불 때문에 누가 죽기라도 하였느냐?"

고광윤의 무심한 말에 목현상은 뭐라 말도 못하였다. 입만 뻐금거리는 목현상을 보다 고과윤이 짧게 명했다.

"모두 포박하라."

진성왕부에 기거하던 내관들 모두가 순식간에 포박되어 마다에 일렬로 세워졌다. 개중에는 호운이 도성에 도착하였을 때 마중을 왔던 갸름한 얼굴의 사내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당에 포박되어 앉은 내관들 모두 표정이 어두웠다. 

"내 궁 안에 반역자들이 이리 많은지 몰랐구나."

"황상, 반역자라니요!"

목현상이 큰 소리로 외치자 고광윤은 엄하게 일갈했다.

"그러면 지금 네가 하는 일이 반역이 아니고 무엇이냐? 황족을 감금하고 그 보호자에게 위해를 입히려 하나다! 이는 삼족을 멸할 일이다!"

고광윤의 일갈에 고개를 조아린 몇몇 내관들의 사이에 동요가 일었다. 이 일에 연루된 내관들 중에는 일의 내용을 아는자도, 모르는 자도 섞여있었는데 아무래도 그들은 후자의 경우 같았다. 그러나 목현상의 저택에서 포박되어 있는 이상 그들은 모두 한통속으로 처벌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목현상은 고광윤의 말에 오히려 큰 소리로 외쳤다. 

"황상, 이 모든 것은 황상을 위한 충심입니다!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호오, 나를 위한 충심이라."

"그렇습니다. 황상! 이 모든 것은 황상을 위한 일입니다!"

"그게 어찌 나를 위한 것이 되느냐?"

목현상은 고광윤이 자신의 말을 들어 줄 듯하자 얼른 말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은 황상을 위하고 장차 황실을 위한 일입니다. 황상과 황실에 해밖에 되지 않는 호가에게 황상께서 다시 서신을 보내니, 이 얼마나 황망한 일입니까! 그러다 그 호가가 다시 궁에라도 들어오게 된다면 황상께 어떤 누를 끼칠지 상상도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한 목숨을 걸고 그 호가를 없애기 위해....!"

"하하하하! 그래서 나를 위해서라는 말이냐?"

고광윤은 목현상의 말이 어이가 없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목현상은 고광윤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자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고광윤은 곧 웃음을 거두고 말했다.

"개인적인 복수를 차으로 아름답게 치장하는구나."

"어, 어찌 복수라 하십니까? 제가 무슨 복수를..."

"네 아들 놈이 죽은 복수가 아니더냐?"

목현상은 깜짝 놀랐다. 그는 설마 황제가 그런 것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고광윤은 놀란 표정을 짓는 목현상을 보고 피식 웃었다. 

"내 아무리 사랑에 눈이 멀었기로서니 내가 벤 놈이 누구의 자식인지 몰랐을 성 싶으냐. 그 놈은 제 소임을 다 하지 못하였으니 백번 같은 일이 벌어진다고 하여도 나는 목을 벨것이다."

고광윤은 목현상을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아들을 잃고도 제 소임을 다하는 네가 기특하다고 정이품의 관직을 내리고 이 저택까지 내렸거늘. 이 저택에 살면서 키워온 것이 고작 그런 알량한 복수심이었더냐. 그래, 너는 그것이 복수심이 아니라 충심이라 하였다. 그러면 말해 보거라. 진성황의 소생은 어이해서 도성으로 불러들인 것이냐."

"그것은 황상의 보위를 좀 더 공고히 하기 위해..."

"진성왕이 누구의 손에 죽었는지 모르고 하는 말이냐?"

목현상은 고광윤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그래서, 진정 그것이 내게 도움이 된다고 여겼더냐?"

고광윤이 물었다. 목현상은 무러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설마 고광윤이 모든 것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참으로 어리석은 놈이로구나."

고광윤은 혀를 끌끌 차다 안색을 굳히며 물었다.

"호운은 어디있느냐?"

"....."

목현상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고광윤이 다시 재차 물었다.

"호운은 어디에 있느냐 물었다."

"황상께서 어이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저는 황상을 위해 그리 했습니다."

"나를 위해 그리 하였다?"

"네. 그렇습니다. 황상!"

목현상은 그렇게만 반복하였다. 고광윤은 계속해서 자신을 위해 그리했다는 말만을 반복하는 목현상의 말이 그의 대답임을 알았다.

"...그래서, 끝까지 호운의 행방을 알려줄 수 없다. 그것이냐."

고광윤의 말에 목현상은 결연한 표정으로 답했다.

"우리들은 호아상을 위해 끝까지 입을 열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든은 고광윤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목현상은 분노할 것이라 생각한 고광윤이 의외로 웃음을 터트리자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고광윤은 목현상의 말이 우스워 견딜 수 없다는 듯 호쾌하게 웃었다.

"나를 위해 입을 열지 않겠다고! 하하하하, 그야말로 어리석은 개소리로구나! 하하하하!"

고광윤은 한참을 그리 웃었다. 그리고 웃는 얼굴 그대로 허리의 패검을 뽑아 들고 목현상의 바로 곁에 포박되어 있던 어린 내관의 목을 쳤다. 소리도 못 지르고 그대로 절명한 내관의 몸이 풀썩 그자리에서 무너지고 주인을 잃은 목이 바닥을 굴렀다. 순식간에 바닥으로 퍼져나가는 검붉은 궤적을 칼끝으로 어루만지며 고광윤이 한 내관의 코앞에 검을 들이밀여 물었다.

"그래서, 너 또한 대답하지 않을 것이란 말이지."

"저, 저는...."

갑작스러운 사태에 사고가 정지한 듯 대답도 못하는 어린 내관을 보며 고광윤은 웃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의 검이 휘둘러 진것은 순식간이었다. 악! 이번에는 비명을 지르고 쓰러진 어린 내관의 목이 바닥을 굴렀다. 가차 없는 고광윤의 검에 내관이 둘이나 목숨을 잃자 무릎을 꿇은 내관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고광윤은 또한 내관의 코앞으로 검을 들이밀었다. 우연찮게도 그는 호운을 안내하였던 갸름한 얼굴의 사내였다.

"자, 어찌할까. 네게는 기회를 줄까. 응?"

"아...으!"

새파랗게 질린 채 오줌까지 지린 내관의 코앞에 들이밀어진 검 끝에서 피가 뚝뚝 흘렀다.

"반역자로 죽고 싶으냐. 아니면 죄인으로라도 살아남고 싶으냐."

고광윤의 말에 내관은 결국 고개를 처박으며 외쳤다.

"서북, 대로 끝 홍등가의 영, 영성장원이라는 장원입니다. 그곳, 그곳 지하입니다. 황상, 제발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호운이나 장선생을 위압하던 기세는 모두 사라지고 그는 목숨을 구명하며 울었다. 그리 외치고 엉엉 울음을 터트린 내관을 보고 목현상은 경악한 듯 외쳤다.

"네, 네놈이 대의를 망칠 셈이냐?"

고광윤은 그런 목현상을 비웃으며 말했다.

"어찌 사사로운 목수가 대의가 된다고 생각하느냐? 제 복수도 아닌 것에 목숨을 걸 바보는 없음을 진즉에 알았어야지."

고광윤은 그리 말하고 허공에 검을 털었다. 내관들의 핏방울이 고스란히 목현상의 얼굴로 튀었다. 아직 온기가 남은 미지근한 피의 감촉에 목현상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네 놈이 쉽게 죽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마라."

영성장원이라는 유려한 글체의 현판에 걸린 장원은 홍등가 한 가운데 위치한 기묘한 장원이다. 언제나 정문이 굳게 닫혀있었고 드나드는 사람도 드물지만, 가끔 드나드는 방문객도 대부분이 창까지 검은 막으로 가린 마차에 찬 채 드나들었다. 가끔 음악소리나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으로 보아 안에서 연회가 펼쳐지는 것은 분명한데도 높은 담과 울창한 정원수로 그 내부를 살피기는 힘들었다. 때문에 홍등가의 사람들도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 영성장원의 담 안에서는 음악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렸다. 연회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많은 사람들의 추측대로 영성장원의 담 안에서는 연회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사뭇 보통의 연회와는 달랐다 상석이 없이 저우언에 차려진 연회장에는 사내들이 둥글게 앉아 술을 마시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은 보통의 연회와 같았지만 사내들이 둥글게 둘러 앉은 가운데서 펼쳐진 풍경이 달랐다. 보통이라면 재주꾼이 재주를 부리거나 여인네들이 춤을 출 그 공강에 발가벗은 소녀가 팔다리가 묶인 채 서 있었다. 아직 가슴도 제대로 자라지 않은 소녀는 겁에 질려 주변을 보고 있었다. 소녀의 주위를 빙 둘러앉은 사내들은 소녀의 몸을 살피다 외쳤다.

"백 냥에 사겠소."

"내가 백 스무 냥에 사겠소!"

사내들의 외침은 점차 과열되었다. 벗은 소녀를 묶어 두고선 가격을 논하는 이유는 하나 밖에 없었다. 그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눈앞의 소녀를 물건처럼 경매하고 있었다. 그들은 겁게 질린 소녀의 가격을 매기는데 전혀 죄책감을 가지지 않은 듯 하였다. 

"내가 이백 냥에 사겠소."

한 사내가 외치자 그 후로 외치는 자가 없었다. 이백 냥이라 외친 사내는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일꾼들이 나서서 포박된 소녀를 사내의 앞으로 끌고 갔다. 

"대금은 오늘 내로 치르셔야 합니다."

일꾼의 말에 사내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앞으로 밀려나온 소녀를 보았다.

"일단 경매를 잠시 쉬고 여흥을 즐깁시다."

둘러앉은 사내 중 가장 호화로운 복장을 한 사내가 술잔을 높이 들며 외치자 다른 사내들도 술잔을 들었다. 곧 음악소리가 울리기 시작하고 어디선가 반라의 여인들이 나타났다. 그녀들은 방금 전 소녀가 포박되어 있던 공간으로 나아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사내들은 무희들의 몸매를 훑으며 술을 마시고 연회를 즐겼다. 그라나 그 연회 분위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박살났다. 두꺼운 오동나무 대문이 무너지고 그 사이로 수 많은 병사들이 뛰어 들어왔다. 그기고 그 병사들의 뒤를 따라 아름다운 얼굴의 사내가 장원 안으로 들어왔다. 

"모두 포박하라."

고광윤의 외침을 따라 병사들이 둘러앉은 사내들을 행햐 달려갔다. 연회를 즐기던 사내들은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병사들을 보고 놀라 혼비백산해 달아났다. 춤추던 무희들도 벗은 몸을 가리느라 급급했고 방금 낙찰받은 소녀를 희롱하던 사내는 얼른 소녀를 팽개치고 달아났다. 일하던 일꾼들도 달아나느라 정신이 없어 영성자우언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자이 되었다. 우당탕! 쨍그랑! 곳곳에서 의자가 부서지고 그릇과 잔이 깨졌다. 고광윤은 병사들이 방안의 사람들을 포박하는 것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방 안의 사람 대부분이 포박되어 바닥에 꿀려지자 그는 가장 호화로운 옷을 걸친 뚱뚱한 사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놈을 끌고 와라."

병사들이 그 사내를 고광윤의 앞까지 끌고 왔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금으로 된 장신구로 도배한 사내는 척 보아도 이 자리를 주도하고 있는 사내로 보였다. 무리의 우두머리가 아니고서는 남들보다 배로 화려한 차림을 하고 연회를 즐길 리가 없었다. 그런 고광윤의 추측은 틀리지 않아, 그는 실제로 고광윤이 들이 닥치기 전 경매를 중단시키고 연회를 즐기자고 외쳤던 자였다.

"네놈이 이 장원의 주인이냐"

"제, 제가 아닙니다."

뚱뚱한 사내가 땀을 뻘뻘 흘리며 대답하자 고광윤은 피식 웃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는데도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그래?"

고광윤이 화사하게 웃으며 묻자 뚱뚱한 사내는 상황조차 잊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제가 아닙니다!"

뚱뚱한 사내는 고광윤이 누구인지 몰랐지만 그가 심상치 않은 자라는 것은 단 번에 파악했다. 보통 사람이 이처럼 수많은 병사를 이끌고 치외법권이나 다름없는 홍등가에 들이닥칠 리가 없으니 당연한 판단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눈앞의 화사하게 웃는 사내가 어떤 사내인지 안ㄹ았다면 차라리 처음 부터 순순히 사실을 고해바쳤을 것이다. 

"아아악!"

고광윤이 내리 찌른 칼은 정확히 바닥으로 펴진 사내의 손가락을 관통했다. 손가락 두 개가 잘려나가고 피가 줄줄 흘렀다. 뚱뚱한 사내가 자지러지며 비명을 지르자 고광윤이 혀를 찼다. 

"실수했구나. 하나만 자를 생각이었는데 둘을 잘랐군."

고광윤은 비명을 지르며 벌벌 떠는 사내를 보며 바닥을 뒹구는 손가락을 발로 찼다. 그 손가락이 포박된 무희들 사이에 떨어지자 찢어지는 비명이 물렸다. 고광윤은 고통에 경련하는 사내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아직 손가락은 8개나 남았으니 다행이지 않느냐. 그리고 손가락이 없어지면 손목을 자르면 될 테고, 어디 주인이라는 놈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 보자꾸나."

다정하게 말하였지만 고광윤의 얼굴에는 싸한 냉기가 흘렀다. 손가락에 잘려 비명을 지르던 사내는 직감적으로 고광윤의 이 말이 단순한 위협으로 끝이 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그는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외쳤다. 

"제가,, 제가 주인입니다! 제가 주인입니다!"

머리를 쿵쿵 박으며 외치는 사내를 보고 고광윤이 물었다.

"그러면 이 장원의 구조를 알겠구나."

"네. 네! 잘, 잘 알고 있습니다!"

"지하는 어디를 통해 들어가느냐?"

고광윤의 물음에 사내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이 질문으로 눈앞의 사내가 어찌해 자신의 장원으로 왔느지 깨달았다. 지하의 존재는 비밀 중의 비밀로 사내가 여는 연회에 초청되는 자들도 모르는 자들이 다수였다. 그런데 생전 처음 보는 사내가 지하의 존재를 거론하니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감히 시치미를 뗄 수 없었다. 바닥을 뒹구는 자신의 손가락어럼 눈앞의 사내는 자신으리 거역하는 자를 용서하지 않을 게 확실했기 때문이다. 결국 뚱뚱한 사내는 바닥에 고개를 처박으며 지하로 향하는 입구를 고해바쳤다. 

"저기.. 있는 창고, 아래입니다. 가장, 가장 안쪽의 나무궤짝을 열면 지하로 연결됩니다."

뚱뚱한 사내의 말에 고광윤은 화사하게 웃었다그 리고고는 그대로 칼을 휘둘러 뚱뚱한 사내의 왼손을 잘라냈다.

"으아아아아아악!"

고광윤은 비명을 지르는 뚱뚱한 사내를 보며 병사들게에 명했다.

"지혈해주어라. 호아궁에 도착하기 전에는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된다."

손목이 잘린 사내가 피를 철철 흘리는데도 그는 무십하게 말하고는 그대로 사내가 가리킨 창고로 향했다. 그 뒤를 병사들이 따랐다.

뚱뚱한 사내는 과연 거짓을 고하지 않았다. 그가 말한 창고의 궤작을 열자 지하로 연결되는 통로가 나타났다. 고광윤은 병상들을 앞세워 통로를 내려갔다. 입구는 사람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았지만 일단 지하로 내려가자 넓은 돌로 만든 통로가 나타났다. 지하라 바람이 통하지 않아서 그런지 탁한 공기에 머리가 어지러운 듯 해 고광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지하 통로에는 두꺼운 쇠창살이 덧대어진 문이 곳곳에 존재했다. 고광윤이 턱짓을 하자 병사들이 밖에서 잠긴 문들을 열었다. 잠 긴 문 안에는 십중팔구 피폐한 모습의 소녀와 소년, 그리고 여인과 사내가 한 사람씩 누워있었다. 그들은 문을 연 병사들을 보고도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고광윤은 문 안을 일일이 확인하며 앞으로 걸어갔다. 개중에는 잠기지 않은 문도 있었는데, 그 안에는 반드시 두 사람 이상이 들어가 있었다. 

"뭐, 뭐냐!"

앞을 채 추스르지도 못한 사내가 병사들을 보고 놀라 외쳤다. 병사들은 그런 사내를 포박했다. 고광윤이 안을 보니 좁은 돌방 안에는 풋내와 땀 냄새가 진동을 했고 벌거벗은 여인이 죽은 듯 널브러져 있었다. 이곳이 어떤 용도로 사용되는 방인지 확연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자 고광윤은 가만히 병사들이 확인을 하는 것을 무작정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는 병사들을 제치고 앞장서 각 방들을 확인했다. 죽은 듯 누워있는 소녀가 있는 방도, 그리고 벌거벗은 채 웅크리고 앉은 소년이 있는 방도 스쳤지만 어디에도 그가 찾는 사람은 없었다. 고광윤이 그리 복도를 달리는 사이 멀리서 희미한 고함소리 같은 것이 울렸다. 돌벽을 울려 탁하게 흐려진 소리였지만 고광윤은 본능처럼 그 소리가 자신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재빨리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달렸다. 그 소리는 복도의 가장 끝에 있는 방에서 울려왔다. 고광윤이 발문 앞에 다다르자 앞서 본 몇개의 방들처럼 문이 잠겨있지 않은 방문에 눈에 띄였다. 그것이 시사하는 바를 알기에 고광윤은 지체 않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방문을 열자마자 보인 관경에 고광윤의 두 눈이 한계까지 벌어졌다. 향이 피워진 좁은 방안에는 다른 방처럼 거적으로 겨우 구색만 맞춰놓은 침상이 있었다.그 침상위에 한 사내가 누워있었고, 그런 사내의 몸을 거구의 사내가 짓누르고 있었다. 저항을 하다 맞은 것인지 광대 부변이 부어오른 사내는 거친 숨을 내쉬며 자신을 올라탄 사내의 팔을 필사적으로 밀고 있었다. 그토록 고광윤이 찾고 있었던 호운이 거기 있었다. 소리르 지르는 것 보다 그리고 생각보다 몸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 고광윤은 호운의 위에 들어앉은 사내의 몸을 끌어냈다. 억! 사내가 경악성을 지르며 뒤로 끌려나와 바닥을 굴렀다. 곧 사내는 고광윤을 향해 무어라 외치려 했지만 고광윤은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콰드득!

고광윤은 아직 피의 흔적이 남은 검으로 사내의 목을 그대로 찔렀다. 사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경련하다 이내 고목처럼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고광윤은 쓰러진 사내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호운에게 달려갔다. 얼굴이 붓고 상의가 흐트러진 것 외에는 별다른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다행히 큰일이 있었던 것은 아닌 듯 하였다. 그러나 부어오른 얼굴을 보자 화가 치밀었다. 고광윤은 방금 전 한 새나의 목숨을 빼앗은 손으로 조심조심 호운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호운은 갑작스러운 사태에 놀란 것인지 그저 멍한 얼굴로 고광윤을 바라보고있었다. 그거나 고광윤의 손이 호운의 뺨에 닿자, 호운이  짧은 비명을 질렀다.

"윽...!"

호운이 거친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자 고광윤이 놀란 듯 그의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

"어, 어디 아픈 게냐? 다치기라도 한 게냐?"

고광윤이 성큼 앞으로 다가와 호운의 팔을 잡자 호운은 이를 악물고 바르르 몸을 떨었다. 고광윤은 호운의 심상치 않은 방응에 얼굴을 굳혔다. 아무리 보아도 지금 호운의 반응은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때야 그는 방안에 가득 찬 기묘한 냄새를 알아차렸다. 그저 향이 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향의 단내 손에 매캐한 탄내가 희미하게 방안에 스며들어 있었다.

"설마...!"

고광윤은 재빨리 향로에 코를 댔다. 향로 안에는 마른 풀잎 같은 것이 타들어가고 있었는데, 향로의 냄새를 맡자 순간적으로 눈앞이 아찔해졌다. 고광윤은 얼른 고개를 뒤로 뺐다. 밀폐된 곳이라 약간 머리가 멍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가 멍한 것을 느낀 것은 이 향로 안에 타들어가는 잎의 효과임이 분명했다. 어지럼증에 고개를 저은 고광윤은 뒤늦게 방안으로 들어온 병사들에게 재빨리 명했다.

"이 향로를 치워라!"

몇 명의 병사들이 향로를 들고 방을 나섰다. 그러나 형로를 치웠다고 해서 방안의 공기가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호운을 여기서 데리고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고광윤은 거친 숨을 내쉬는 호운을 안아들었다. 겨우 그 동작에도 호운은 몸을 떨었다. 맞닿은 호운의 체온은 놀라울 정도로 높았다. 고작 향로안의 환각제 때문에 여기까지 괴로워하는 것은 비정상이었다. 

"황상!"

다른 방을 조사하던 병사들이 고광윤이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말했다.

"이런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대마와 미혼분입니다."

병사의 보고에 고광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이제야 호운이 왜 이리 뜨거운 한숨을 내쉬는지 이해했다. 그러나 이해하였다고 하여도 답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고광윤은 긴장된 숨을 내쉬면서도 호운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호운은 여전히 두 눈을 꽉 감은 채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호운은 난생처음 겪는 감각이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종국에는 숨조차 쉬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기는 호운의 등을 고광윤이 쓰다듬었ㅎ다. 파르르 떨리는 등줄기의 진동이 고광윤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괜찮다. 괜찮아. 괜찮다."

그저 괜찮다는 말 외에 그는 해줄 말이 없었다. 그런 고광윤의 말에도 호운은 떨었다. 이미 그는 차오른 눈물로 앞을 분간 할 수 없었다. 두려움과 공포가 뒤섞인 숨이 거칠게 흘러 나왔다. 

"아무 일도 없을게야. 괜찮다. 괜찮아."

고광윤은 호운을 그리 달래며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그러는 사이에도 호운의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졌다. 밖으로 나온 고광윤ㅇ느 포봑된 사람들과 병사들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장원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장원 안으로 들어간 고광윤은 곧장 보이는 서재로 호운을 데리고 들어갔다. 부자의 서재답게 비단으로 싸인 긴 의자가 준비된 서재에 호운은 눕힌 고광윤은 뒤따라 들어오려는 병사들을 물렸다. 

"모두 물러가라."

"황상!"

"물러가라 하였다."

냉정한 일갈에 병사들은 잠시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호운을 대하는 고광윤의 심상치 않은 태도에 무언가 감지한 것인지 이내 순순히 서재를 나섰다. 이제 서재에는 호운과 고광윤 단 두 사람이 남겨졌다. 일단 밖으로 데려오기는 하였지만 호운과 단 둘이 남은 고광윤은 어쩔 줄을 몰랐다. 고광윤이 안타까움에 호운의 손을 잡자, 의외로 호운이 강한 힘으로 그손을 맞잡았다. 손등이 바스러질 듯 강한 악력처럼 호운의 괴고움도 보통이 아닌 듯 보였다. 눈앞에서 괴로워하는 호운을 그저 멀뚱히 보고 서 있을 수만은 없어 그는호운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속삭였다.

"괜찮다. 괜찮다."

그광윤이 달래듯이 말하며 등을 쓰다듬자 호운은 가물가물 눈을 떴다. 멍하니 고광윤을 보던 호운은 덜덜 떠는 손으로 눈앞의 고광윤에게 매달렸다. 눈앞이 녹아내릴 듯 흔들거리고 심장은 터질 것처럼 거칠게 뛰었다. 쿵쿵거리는 심장의 고도이 시끄러울 정도로 귓전을 울려댔다. 혼란과 흥분이 전신을 감싸고 얼굴이 불이 붙은 듯 뜨거웠다.

"흐아, 하악. 아!"

입을 열자 입에서는 거친 숨이 흘러나왔다. 호운은 고광윤의 옷자락이 찢어질 정도로 강하게 움켜쥐고 몸을 떨었다. 이미 호운의 성기는 옷 안에서 흥분으로 꼿꼿이 치솟아 있었다. 민감한 피부에 닿는 옷자락만으로도 자극이 되어 전신이 뜨거워졌다. 차라리 완벽히 약에 취해 이성까지 무너져 내렸다면 이토록 괴롭지는 않았을 텐데 호운은 어정쩡하게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점차 흐려지는 이성과 이유없이 흥분하는 자신의 몸을 보며 공포에 떨었다. 고광윤은 몸을 떨며 괴로워하는 호운을 보고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에게 매달린 호운의 체온은 당장이라도 타오를 것처럼 뜨거워져 있었다. 그 체온에 고광윤의 체온마저 올랐다. 절로 호흡이 거칠어지고 당장이라도 호운에게 달려들 것처럼 흥분되었다.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도  몇년이나 마음에 품고 있었던 자가 눈앞에서 흥분한 자태를 드러내자 몸이 저절로 반응하였다. 그러나 고광윤은 치솟는 흥분을 억눌렀다. 비록 이성조차 무너질 정도로 강렬한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겁에 질려 우는 호운의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 또한 해결 방법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이 자리에 여인만 불러 온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다. 그라나 그는 호운이 여인을 안는 모습을 보고 인내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분명 닫혀있건만 창 너머에서 홍등가 틍유의 소란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 소란이 고광윤의 마음을 더욱 울렁거리게 하였다. 창밖에서 비쳐드는 홍등의 빛에 붉게 물드는 호운의 얼굴이 땀에 젖어 빛났다. 고광윤은 뜨거운 숨을 내쉬는 호운을 보다 스스로에게 되뇌듯 중얼거렸다.

"괜찮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게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호운의 눈매를 입술로 훑어주고 그의 바지자락을 풀기 시작했다. 움찔! 호운의 몸이 크게 튀고 방금 전까지 고광윤에게 매달려 있던 호운의 양팔이 본능적으로 그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광윤은 오히려 호운을 안은 팔에 힘을 주고 억지로 호운의 바지를 벗겨냈다.

"싫, 저리가!"

호운이 저항하며 외쳤지만 고광윤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성큼 호운의 속옷까지 벗겨내고 젖은 호운의 성기를 손으로 직접 쥐었다. 그것만으로 호운의 몸이 푸드득 경련했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뒤로 꺾인 호운의 목을 고광윤이 콧날로 간질이며 낮게 말했다. 

"괜찮다. 괜찮을 게야. 괜찮다."

그리 말하는 고광윤의 한숨이 뜨겁게 호운의 피부를 자극했다. 그리고 동시에 고광윤의 한손도 호운의 성기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부드럽게 어루만지듯 쓰다 듬으며 가해지는 자극에 호운은 울었다. 자신의 손과 다른 크고 거치니 사내의 손이 닿는 감촉에 소름이 돋았지만 아내 그것도 흥분으로 뒤바뀌었다. 희미하게 남은 이성은 그만을 외치고 있엇지만 그의 몸은 솔직하게 고광윤의 애무를 받아들였다. 이미 흥분으로 숨조차 멎을 지경인 몸은 다음의 자극을 요구하고 있었다. 

"으윽..!"

쾌감으로 우는 호운을 보며 고광윤은 애무하는 손아귀에 힘을 줬다. 손안으로 맥박마저 느껴질 듯 흥분한 호운을 느끼며 고광윤의 입안이 바싹 말랐다. 젖은 피부가 고광윤의 얼구에 닿는 감촉이나 손바닥을 적시기 시작한 끈끈한 액체에 그의 숨이 점차 거칠어졌다. 헉헉! 거친 숨소리가 서재 안을 가득 채웠다. 처음에는 호운의 숨소리만이 울리던 방 안에 고광윤의 숨소리도 섞여 울렸다. 고광윤의 손아래 호운은 점차 이성의 끈을 놓았다. 오므리기 위해 애를 썼던 다리가 점차 벌어지고 입에서는 끊임없는 한숨이 흘렀다. 호운의 저항이 사라지자 고광윺ㄴ은 호운의 몸 아래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호운의 성기를 애무하며 의자의 앞에 뭂을 꿇고 호운의 다리에 입술을 댔다. 의자 아래 내려져 있던 다리에 고광윤의 입술이 닿자 호운의 몸 전체가 움찔 떨렸다. 고광윤은 종아리에서 시작해 무릎의 뒤, 그리고 허벅지의 안쪽을 서서히 입술로 애무하며 움직였다. 뜨거운 한숨과 입술의 감촉이 민감한 피부를 자극하자 호운은 머리를 휘저으며 흐느꼈다. 점차 은밀한 곳으로 이동한 고광윤의 입술이 마침내 호운의 성기로 향했다. 같은 사내의 물건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고광윤은 그것을 입에 넣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아주 기뻐하며 그것을 입에 넣었다. 

"학!"

흥분한 것이 젖은 체온에 휩싸이자 호운의 몸이 크게 튀었다. 호운은 힘없이 늘어트렸던 다리가 허공에서 파르르 경련했다. 고광윤은 그런 호운의 다리의 뒤쪽으로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혀를 놀렸다. 뿌리까지 깊이 삼킨 채 혀로 전체를 빨아올리자 호운의 다리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고광윤은 과거 호운의 열기를 몇번이나 받아내었던 그 소년이 하였던 것을 그대로 흉내 내었다. 그렇게 해야 호운이 조금ㅂ이라도 흥분을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점점 고광윤의 입안에서 호운의 열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호운의 허리가 달아나려는 듯 디ㅜ로 빠졌다. 어쩌면 이런 순간에마저 본능이 고광윤은 거부하려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고광윤은 오히려 그런 호운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고 가랑이사이에 얼굴을 묻은 채 자신의 일에 열중했다. 처음에는 갈 길을 잃고 허우적거리던 호운의 양 다리는 고광윤의 양 어깨에 걸렸다. 실내에 젖은 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가득 찼다. 고광유 ㄴ의 거칠어지는 숨처럼 호운의 숨 또한 거칠어지고 마침내 호운이 고광윤의 입 안에서 절정을 맞았다.

"!!"

호운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고개를 뒤로 꺾다가 이내 힘없이 축 늘어졌다.고광윤은 그런 호운을 보며 입안으로 쏟아진 것을 망설임없이 삼켰다. 그리 좋은 맛이 아니었음에도 몸 속에 호운의 것을 받아들인다는 흥분에 삼키는데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절정에 달한 호운의 전신은 땀으로 끈끈해져있었다. 고광윤은 땀에 젖어 호운의 전신에 휘감긴 옷을 벗겨주었다. 땀 때문에 몸에 달라붙은 호운의 옷은 쉽게 벗겨지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호운의 몸은 움찔움찔 잘게 경련하였다. 고광윤이 보니 호운의 성기는 벌써 머리를 치켜들고 있었다. 옷을 벗긴 것에 다른 뜻은 없었다. 그러나 벌거벗은 호운의 몸이 드러나자 고광윤의 흥분은 다시 한 번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고조되었다. 이미 그의 성기는 호운을 애무하는 사이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그런 그의 눈앞에 호운이 있었다. 고광윤은 황전히 벌거벗긴 호운을 끌어 안으며 성큼 의자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축 늘어진 호운을 일으켜 안았다. 조금은 서늘한 체온을 끌어안자 그 안으로 망설임없이 파고들었던 과거가 떠올랐다. 이대로 다리를 벌리고 안으로 들어간다. 상상만으로도 아찔하였다. 약에 취한 지금의 호운이라면 고광윤의 아래에서도 쾌감에 몸부림칠지도 모른다. 어깨에 걸렸던 양다리가 허리로 돌고, 입을 맞춰도 쾌감에 울면서 고광윤의 몸을 끌어안은 채 녹아들듯, 그렇게 하면 그러면 호운은...

고광윤은 머리를 젓고 호운을 자신에게 기대게 하였다. 목덜미에 호운의 한숨이 닿자 등뒤로 소름이 돋는 것처럼 전율이 일었다. 고광윤은 꿀꺽 침을 삼키고 자신의 하의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이미 흥분해 번들번들 젖은 자신의 것을 꺼냈다. 이미 옷 안이 끈적하도록 흔들거리던 성기를 꺼내고 반쯤 일어선 호운의 성기를 잡았다. ㄱ4ㅡ리고 호운의 엉덩이를 자신에게 끌어들여 두 개의 성기를 바싹 붙인 채 강하게 그러쥐었다. 호운의 고광윤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탄성을 토해냈다. 그는 한손으로는 두 사람의 흥분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호운의 허리를 쥐고 들썩,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끼익! 끽! 의자의 다리가 고광윤의 동작에 맞추어 날카로운 소리를 토해냈고 두 사람의 호흡이 점차 조를 맞추듯 교차되었다. 학, 하악. 아! 아! 호운이 괴로워하며 몸을 꼬며 고광윤의 목에 얼굴을 비볐다. 고광윤은 그런 호운의 정시리에 입술을 대고 점차 허리를 움직이는 속도를 높였다. 마치 두 사람이 연결되어 정교를 나누듯 뜨거운 한숨이 섞이는 가운데 두 사람은 점점 절정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끼익!

의자의 날카로운 비명과 동시에 두 사람은 동시에 절정에 달했다. 고광윤은 호운의 것과 자신의 것이 뒤섞이는 광경을 도취된 듯 바라보았다. 제대로 된 성교가 아니었음에도 고광윤이 얻는 만족은 컸다. 그러나 고광윤은 그 여운을 계속해 느낄 수 없었다. 절정에 달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광윤의 목덜미에 얼굴을 대고 있던 호운이 고개가 힘없이 꺾였다. 고광윤이 서둘러 호운의 얼굴을 확인해 보니 그는 두 눈을 단단히 감고 있었다. 어느 정도 약기운이 빠지자 혼절을 해 버린 것이다. 고광윤은 혼절한 호운의 몸에 튄 것을 정성스레 닦아 준 후 자신의 걸치과 왔던 피풍의로 호운의 몸을 감쌌다. 기절해 축 늘어진 호운은 고광윤이 하는 대로 가만히 늘어져 있었다. 고광윤이 밖으로 나가보자 대기 하고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고광윤은 그런 병사들의 사이를서둘러 빠져나갔다. 한시라도 빨리 호운을 이곳에서 데려나가고 싶었다.

"아빠!"

고광윤이 호운을 ㅍ ㅜㅁ에 안고 황굴으로 돌아오자 유시운이 냉큼 달려 나왔다. 유시운의 몰골을 그가 궁을 나설 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형편없는 상태여서 고광윤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 이 아이를 씻기라 하지 않았느냐."

고광윤의 말에 내관들이 쩔쩔매며 고개를 숙였다.

"제 아비가 올 때까지는 이 자리에서 비키지 않겠다고 떼를 쓰는지라..."

하긴 제 아비가 죽는다는 말을 듣고 소식이 끊겼는데 당연히 걱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제 아비의 무사를확인하기 전에는 이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고 떼를썼을 것이고,

"아빠, 어디 아파요? 왜 눈을 못 떠요?"

유시운이 얼른 다가와 호운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그런 유시운의 눈빛에 고광윤은 조금 꺼림칙한 것을 느꼈다. 비록 호운을 돕기 위해서라는 명붕이 있지만 흥분한 호운과 함께 제 욕심을 채운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피로해서 그런 것이다. 크게 다친 곳은 없으니 걱정마라."

"정말이에요?"

"정말이다. 한 이틀 정양하고 나면 괜찮을 게야."

그광윤의 대답에 유시운은 겨우 안도한 듯 한숨을 쉬었다. 

고광윤은 내광에게 유시운을 돌보라 이른 후 호운을 안은 채 그대로 자신의 침전으로 향했다. 궁안의 사람들은 낯선 사내를 안고 들어온 황제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지만 누구하나 감히 나서서 황제에게 그가 누구냐 묻는 이가 없었다. 고광윤은 호운을 자신의 침상에 뉘였다. 그리고 목욕준비를 하라 이르렀다. 여관들은 황제가 목욕을 하리라 생각하고 얼른 목욕통을 방 안으로 들고 들어와 물을 채웠다. 그리고는 황제의 시중을 들려 하였는데, 황제는 오히려 여관들을 뒤로 물렸다.

"모두 물러가라."

알수 없는 황제의 명에도 여관들은 소리 없이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방 안에서는 물러나지 않고 버티는 여관들을 보고 황제가 다시 명했다. 

"모두 침전 밖으로 나가라."

"황상?"

생전 그런 명을 내린 적 없는 이가 그러니 여관들의 표정이 의아해졌다. 그러나 황제의 명령은 거두어짖 않아 결국 그들은 침전 밖으로 물러났다. 그들은 얇은 주렴이 쳐진 침전 밖에서 황제가 옷을 벗는 ㄱ덧을 보았다. 평소라면 시종들이 해줄 일을 스스로한 황제는 곧 침상에 누운 사내의 옷도 벗겨냈다. 그리고는 사내를 끌어 안고 목욕통으로 들어갔다. 마치 보물이라도 대하듯 조심스러운 황제의 태도에 여관들이 숨을 죽이는 가운데, 목욕통에 들어간 황제가 다시 명했다. 

"문을 닫아라."

이것 또한 이례적인 명이지만 여관들은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 문을 닫았다. 닫힌 문 너머로 조금씩 물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목욕을 하고 있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도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호운이 정신을 차린 것은 다음날의 늦은 오후였다. 가물가물 잠에 취한 채 호운은 멍하니 오늘 할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하였다. 파종이었던가, 아니면 가지치기 였던가. 멍하니 생각을 하더 호운은 이내 자신을 덮친 사내의 거친 숨소리를 떠올리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보니 자신은 도성에 왔다. 어제 하루 동안 벌어진 일을 생각하니 절로 눈앞이 핑 돌았다. 호운은 고개를 젓고 자신의 몸을 살폈다. 분명 의식을 잃기 전, 이상한 약을 먹게 된 후 몸이 뜨거워진 상황에서 어떤 사내가 자신을 덮친 것을 기억하고 있다. 비정상적으로 흥분한 것으로 보아 소문으로만 듣던 최음제나 미혼약 같았다. 그러나 지금 몸에서는 아무런 이상도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나른하기는 하였지만 허리도 아프지 않았고 어느 한군데 나쁜 곳이 없었다.

"기침하셨습니까."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호운은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다가온 것인지 그의 앞에 푸른 옷을 걸친 여인들이 다가와 있었다. 익숙한 여인들의 목장에 호운은 눈을 끔적거렸다. 시간이 지났지만 호운은 저 옷이, 궁에서 일하는 여관들이 입는 옷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호운은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곧 그의 눈에 웅장한 넓이의 방과 화려한 장식, 그리고 보석으로 된 주렴이 보였다. 호운은 도무지 사태를 파악할 수 없었다. 이게 어찌된 일일까.

"황상께서 기침하시면 드시라 내리신 탕약입니다."

여관은 은쟁반에 받친 약사발을 내밀었다.

"황상...?"

호운은 마치 말을 처음 배우는 사람처럼 여관의 말을 흉내 내듯 말했다. 그러자 여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황상이 내리신 것입니다."

여고나은 어서 마시라는 듯 탕약그릇을 디밀었다. 그러나 호운은 그릇을 받는 대신 자리에서 벌떡 얼어났다. 꺅! 놀란 여관이 순간적으로 탕약그릇을 놓쳤고 바닥에 떨어진 그릇은 산산히 부서져 탕약이 바닥을 적셨다.

"어, 어찌 황상이 내리신 것을...!"

여관이 호운의 태도를 비난하듯 외쳤다. 그러한 호운은 그런 것을 챙길 겨를이 없었다. 그는 맨발로 그대로 방을 뛰쳐나왔다. 여관들이 무어라 외쳤지만 호운은 멈추지 않았다. 방을 나선 호운은 눈앞에 펼쳐진 궁의 모습에 깜짝 놀라 말을 잃었다. 정말 황궁이었다. 그리 자각하자 전신에서 식은 땀이 솟아올랐다. 어쨌든 이곳에서 도망쳐야 한다는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어디로? 혼란스러워진 호운이 넋을 잃고 서 있는데 궁의 중문을 통해 한 사내가 걸어 들어왔다. 수많은 여관과 내관, 그리고 병사를 거느린 그의 모습에 호운은 현기증이 있었다.

'황제...'

충격을 받아 휘청하는 호운을 보고 황제의 곁에 서 있던 사람이 한 달음에 달려왔다. 호운은 멍하니 황제의 곁에서 달려온 사람을 보았다.

유시운이었다.

"시운아...!"

호운은 예상치도 못한 유시운의 등장에 놀라 그저 눈을 끔뻑였다. 유시운은 눈물을 글썽이며 호운의 품에 안겼다. 호운은 언젠가 기적이라 느꼈던 그 순간처럼 아이를 품에 안으며 황제를 보았다. 마치 이 모든 것이 그에게는 꿈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아빠, 미안해."

호운의 품에 안긴 후 부터 유시운은 계속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뭐가 그리 미안한 게냐."

"아빠를 못, 아니 안 믿은 거...정말 미안해. 미안해."

울면서 용서를 구하는 아이를 본 호운은 놀랐다. 고작 여섯 살이 아이가 믿지 못한 자신엑 대한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호운은 멍하니 유시운을 보다 말했다. 

"아니다. 내가... 네게 너무 많은 것을 속이고 있었구나. 오히려 아비가 미안하다."

"아니야. 사과 하지 마. 나, 아빠가 아니라 낯선 사람이 한 말을 그대로 믿어버렸어. 그러니까 아빠... 나한테 미안해 하지 마. 내 잘못이야."

아이의 말에 호운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시운아, 사실은..."

"사실 같은 거 필요 없어."

유시운은 그렇게 호운의 말을 자르고 그의 품에 안겼다. 호운은 오히려 자신을 위로하는 아이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그 모습을 가민히 지켜보던 고광윤은 유시운의 흥분이 가라앉았을 때쯤 말했다. 

"목현상의 처우는 오늘 결정하기로 했다."

그 말에 호운이 움찔했다.

"그에게는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해 줄 것이야."

고광윤은 그리 말하고 자리를 뜨려했다. 그러나 호운은 쉽ㅈ게 그에게 그러하라고 말할 수 없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왜 그러느냐."

호운은 머뭇거리다 말문을 열었다. 

"그를... 만나고 싶습니다."

"그를? 무슨 이유로."

고광윤의 물음에 호운은 뭐라 답을 못했다. 고광윤은 말을 하지 못하는 호운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따라오너라."

목현상은 하루 만에 수십 배는 늙은 듯 파리하 ㄴ얼굴로 대전에 포박되어 앉아 있었다. 평소라면 황제를 보필하며 당당히 서 있을 공간에 금줄로 포박된 채 앉아 있는 자신의 처지를 목현상은 믿을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목현상만이 홀로 앉아 있는 대전에 호아제가 둘장했다. 그의 등장에 고개를 번쩍 든 목현상은 이내 황제 의 곁에 선 호운을 보고 눈에 핏발을 세웠다. 목현상은 적어도 호운은 어제 이미 죽었으리라 굳게 믿고있었기에 그가 살아있는 모습을 보자 분노가 치밀었다. 

"네놈이 살아 있었더냐!"

부노해 외치는 목현상을 보며 고광윤은 미간을 찡그렸다. 호운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죄인이 감히 어디에서 언성을 높이는 것이냐."

고광윤읠 말에 목현상이 큰 소리로 고했다.

"황상, 황상 정신 차리십시오! 저 요망한 것이 또 황상을 홀리려 하는데 속지 마십시오!"

호운을 따라왔던 유시운은 미친 사람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목현상의 못브에 겁에 질려 호운의 옷자락을 잡았다. 호운은 그런 유시운의 어깨를 안아주며 목현상을 가만히 보았다. 

"모두 저 욕망한 것 때문입니다. 저것은  황상께 불운을 몰고오는 악귀와 같은 놈입니다! 황상, 부디 정신을 차리고 저 요망한 것의 목을 치십시오. 황상!"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 목현상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고광윤은 그가 한참을 떠들고 제 풀에 지쳐 입을 다물자 엄하게 일갈하였다. 

"그가 무엇을 잘못하였더냐. 말해 보거라."

"모두 저놈 탓입니다. 모두...! 모두! 진성왕 전하의 일도, 총비 유씨의 일도! 도성에서 얼어난 일도, 소양군저하의 일도 모두 저놈의 탓입니다."

"진성왕은 반역을 일으키다 죽었고 총비는 산통으로 죽었다. 도성에서 일어난 일이야 말로 진성왕의 탓이지 그놈이 반역만 일으키지 않았던 들 그런 일이 있었겠느냐. 소양군의 사사는 옥씨일족과 관계된 일이다."

고광윤은 거침없이 목현상의 말에 대답했다. 총비라는 말이 나오자 유시운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그러나 호운은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어찌 저것을 그리 감싸고 드시는 겁니까. 황상!"

"그러는 너는 어찌 그 모든 것이 그의 탓이라고 말하는 것이냐."

"그건 저놈의....!"

"따지고 보면 그들 모두 내 손으로 죽인 자들이다. 그런데 어찌, 그 허물을 그에게 씌우는가."

고광윤의 말에 목현상은 입술만 벌벌 떨었다. 고과윤은 핏발이 선 눈으로 자신을 보는 목현상을 보다 말했다.

"너는 네 아들의 죽음에 대해 복수하기 위해 그 모든 일들을 끌어들였을 뿐이다. 네 복수가 대의인얀 포장하려 했을 뿐이야. 그나마 그 복수의 대상도 너는 졸렬하게 택했다."

고광윤은 용서가 없었다.

"결국 황제인 나에게는 복수할 용기가 없으니 그 화살을 호운에게 돌린 것뿐이다."

고광윤의 냉담한 말에 목현상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무어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고광윤의 말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네 아들의 목을 벤 것이 호운이냐?"

"...."

"네 아들을, 죽인 게 호운이냐고 지금 묻고 있지 않느냐."

"제 아들은, 그 때문에..."

"죽인 것이 호운이냐고 묻고 있지 않느냐."

목현상은 대답하지 못했다. 고광윤의 말대로다. 그의 아들은 호운 때문에 죽기는 하였으나, 정작 아들의 목을 베라 명한 것은 고광윤이었다.

" 네 앋르은 내 손에 죽었다. 그런데도 아들의 원수인 나를 너는 충심을 다해 보필하였다. 그런 네가 아들의 복수를 한다로 말할 자격이라도 된단 말이더냐?"

고광윤의 말은 가차가 없었다. 용서 없는그의 말에 목현상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격국 목현상은 한참동안 황제를 바라보다 이내 힘없이 고개를 꺾었다. 고광윤은 그런 목현상의 앞에 단도를 던졌다. 

"그래도 오랫동안 나를 보필해 온 몸이니 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기회를 주마."

자진하라는 말이었다. 목현상은 단도로 손도 뻗지 못하고 그저 축늘어진 채 있었다. 

"네 스스로 죽지 않겠다면..."

죽음을 재촉하려는 고광윤의 말에 호운이 불쑥 끼어들었다.

"기다려...주십시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며 경을 쳤을 테지만 고광윤은 호운을 그저 말없이 보았다 호운은 바닥에 무릎 꿇은 목현상보다 고광윤에게 물었다. 

"목내관이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끈금없는 물음에 고광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엇이냐니?"

"그가 죽음을 당해야 할 만큼의 죄를 지은 것입니까."

"그는 감히 황제인 나를 우롱하고 황족을 해라려 했다. 또한 너 또한 그의 손에 죽임을 당할 뻔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죽음을 당할 죄가 아니란 말이냐."

"저는 죽지 않았고 시운이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모두 실제는 일어나지 않은 일입니다."

"허나, 그는 황제인 나를 능멸했다."

"황상께서 용서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호운의 말에 고광윤은 미간을 찡그렸다.

"결국 너는, 이 자를 용서해 주라고 말하는 것이냐."

호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이 자를 용서할 수 있느냐?"

호운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그럴 수 있느냐?"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복수할 이유가 있습니다."

호운의 말에 목현상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한참 믿을 수 없다는 듯 호운을 보던 그는 곧 핏발을 세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내가 그렇다고 해서 너를 용서할 성 싶으냐! 너는 내 아들을 죽였다. 죽였단 말이다. 이 인간 백정 같ㅇ느 놈. 더러운 놈."

소리를 질러대는 목현상을 보고 고광윤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나 그 모든 말을 들은 호운은 그저 조용히 말하였다.

"용서하지 마십시오."

호운의 목소리는 목현상의 목소리처럼 크지도 날카롭지도 않았다. 그러나 또렷하게 대전을 울렸다. 그 말에 목현상의 목소리가 뚝 멎었다. 고광윤은 의외의 말을 한 호운을 가민히 보았다. 호운은 다시 한 번 조용히 말했다.

"그저 내 마음이 편해지기 위한 위선일 뿐이니, 절대 용서하지 마십시오."

호운은 그리 말하고 유시운의 손을 잡고 대전을 나섰다. 나머지 판단은 고광윤에게 맡길 수 밖에 없었다. 

"아빠."

"응?"

대전을 나선 호운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잘 생각해보니 목현상과 황제가 이야기를 할 때 그런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호운은 유시운의 어깨를 잡고 그것을 부정하려 하였다. 하지만 유시운의 눈빛은 도저히 거짓을 용납할수 없어 보였다. 

"....너를 낳고 죽었다."

호운은 겨우 그리 말할 수 있었다. 그리 말하면서도 유시운이 충격을 받지나 않을까 노심초사 하였는데, 의외로 유시운은 담담했다.

"그랬구나."

그리고는 유시운은 입을 다물었다. 아마 어제부터 쏟아져 나온 정보에 그는 충분히 혼란스러울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그에게 진실을 모두 말해 줄 수 없었다. 진실이란 때로는 거짓보다 못해서 사람을 쉽게 상처 입히곤 한다는 걸 호운은 알고 있었다. 유시운은 호운에게 더 이상의 말을 요구하지 않았다. 겨우 하루만이지만 유시운은 부쩍 자란 어른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밤이 깊었건만 호운은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처음 이곳이 황궁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대경하였던 마음이 남아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어제의 일 때문인지 쉬 잠을 잘 수 없었다. 황제는 호운과 유시운을 정원이 딸린 작은 별굴에 기거하도록 하였다. 황궁 안의 것치고는 무척 작은 규모였지만 그 검박한 규모가 오히려 호운에게는 마음에 들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호운은 정원을 서성거렸다. 달이 무척 환하게 떠올라 구름의 그림자가 바닥에 선명하게 찍혔다. 마치 어린시절의 장난처럼 그 그림자를 따라 천천히 걷더 호운은 자신의 방향으로 길게 이어진 그림자를 발견하고 고개를 들었다. 거기에는 단 한 사람의 시종도 대동하지 않은 고광윤이 서 있었다.

"잠이 오지 않는 것이냐?"

"네..."

호운이 그리 대답하자 고광윤은 불이 꺼진 건물 안을 흘끔 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목현상은 멀리 유배를 보내기로 하였다."

"그렇습니까..."

호운의 대답이 미적지근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사실 그 사이 호운은 잣니이 어찌 궁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유시운에게 전해 들었다. 유시운의 말에 따르면 아비를 구해달라는 그의 요청에 고광윤이 직접 가 호운을 구해 왔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 고광윤을 어찌 대할 지 알수가 없었다. 2년 전 산길에서 우연히 만났던 때 그랬던 것처럼 고광윤은 이번에도 호운을 위기에서 구해낸 것이다. 호운은 고광윤의 얼굴을 보았다. 몇 번을 보아도 감탄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였다. 그가 두려울 때는 자세히 보지도 못했던 모습을 보면서 호운은 새삼스레 그의 아름다움을 깨달았다. 그 아름다움을 보지도 못하던 시절의 기억을 호운은 새삼스레 떠올렸다. 그 때문에 어미에게 버림 받았던 기억은 이제 너무나 까마득한 옛일이 되었다. 16살이었던 자신은 서른 아홉이 되었고 어린 청년이던 그는 완연한 중년의 나이가 될 만큼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이제 그 사이에 남은 것이 무엇일까. 따져보니 쓸려간 시간 속에 남은 것은 유란란과 복치운 뿐이었다. 만약 그들이 지금 곁에 있었다면 그마저도 과거의 추억으로 풍화되었을 텐데, 유란란은 죽고 복치운은 생사조차 알 수 없다. 그러니 그것은 결국 호운에게 지울 수 없는 과거가 될 것이다. 마치 목현상에게 아들을 죽인 호운의 존재처럼 말이다. 호운이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긴 동안 고광윤또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였다. 그는 호운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 불쑥 입을 열었다.

"너에게 용서라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이냐."

"쉬워 보였습니까."

"그래, 내게는 너무 쉬워 보였다. 너를 해라려 한 자를, 너는 너무도 쉽게 용서하더구나."

그리 말하는 고광윤의 어조는 무척이나 어두웠다. 

"황상께서는 무엇을 말하고 싶으십니까."

호운의 물음에 고광윤이 입을 열었다.

"나를 아직 미워하고 있느냐?"

갑작스러운 물음에 고요하던 호운의 마음에 파문이 일었다.

"왜 그런 걸 물으십니까."

호운의 목소리가 기묘하게 떨렸다. 분노보다는 곤혹이 강한 그 목소리에 고광윤이 마른 침을 삼키며 말했다. 

"만약 아직 네게... 미움 받고 있다면 나 또한 용서를 받고 싶다."

그리 말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고광윤의 입은 이미 이성을 배신 한 채 제멋대로 움직였다. 이는 참으로 뻔뻔스러운 요구였다. 목현상을 본 순간 고광윤의 마음은 요동쳤다. 한 번 흔들린 마음을 고광윤은 붙잡지 못하였다. 호운은 고광윤의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곤란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호운의 대답을 기대하는 그 얼굴을 본 후 호운이 말했다.

"제가 황상을 용서한다고 해서, 무언가 변하는 것이 있습니까."

"아니다. 아무것도....변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용서를 바라십니까."

고광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필사적이기 까지 한 그의 태도에 호운은 숨을 골랐다. 자신의 마음인데도 입 밖으로 말하기는 무척 어려웠다. 고광윤은 호운의 대답을 끈기 있게 기다렸다.

"저는 황상이 두렵고 싫습니다."

한참의 침묵 후 말을 그렇게 쉽게 입술을 타고 흘렀다. 호운은 단단히 그리 말했다. 고광윤은 침묵했다. 호운은 말을 이었다.

"란란은 황상 때문에 죽었습니다."

호운은 자신의 말을 속으로 곱씹었다. 그게 사실이다. 사실이 그러했다. 

"란란은 황상때문에 죽었습니다."

부러 황제가 그녀를 죽였다고를 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원인이었다 말했을 뿐이다. 호운이 다시 말하였지만 고광윤은 여전히 침묵하였다. 그러나 굳게 다문 입술 끝이 잘게 요동하였다. 무표정아래 감춰진 내심이 무엇일까 호운은 고민하지 않았다. 호운은 유란란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눈꺼풀 아래로 거뭇한 환영 속에 선명한 미소가 떠올랐다. 마지막 그녀의 미소가 그러챘던지, 행복하던 시절의 미소가 그러했던지 이제 와서는 분간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황상을 탓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느 순간 온 깨달음과 같은 것이었다. 증오는 호운을 지탱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호운은 증로에 힘겨워했고 원망은 그의 심장을 갉아 먹는 병과 다름이 없었다. 때문에 호운은 증오를 버렸다. 잊은 것이 아니라 그저 버렸다.

"그게 란란이 선택한 삶이니까요."

적어도 호운은 유란란의 삶이 타인이 짓밟았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선택은 유란란이 했다. 그녀가 진성왕비를 그리 비참하게 죽음에 이르게 하도록 선택한 것처럼, 모두 그저 본인의 미래를 선택했을 뿐이었다.

"그러니 저는 황상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호운의 말이 끝나자 고광윤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호운은 갑작스러운 고광윤의 태도에 깜짝 놀랐다. 호운은 당황했지만 고광윤은 무릎을 꿇은 채 말했다.

"고맙다. 정말 고맙다. 고맙다. 정말 고맙다....."

그리 말하는 고광윤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고광윤은 통곡하듯 호운에게 감사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겨운 안 호운의 마음을 알았다. 그 마음이 온전히 호운만의 것임에 고광윤은 그저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한참을 통곡하던 고광윤이 사라진 후 호운은 집 안으로 향했다. 그러다 황량한 정원 한 가운데 삐죽 솟아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처음에는 마치 무덤처럼 붕긋 솟은 땅위에 어린 나무가 덩그러니 있는 모습은 충분히 의아할 만 했다. 호운이 자세히 보니, 아직 꽃은 피지 않아 확실치 않았지만 시커먼 줄기의 색이나 모양이 매화나무 같았다. 의아한 듯 그것을 보던 호운은 이내 2년 전 유시운이 고광윤에게 건넸던 나뭇가지를 떠올렸다.

그것도 매화였다. 호운은 가만히 그 나무를 보았다. 과연 이것이 2년전 그 나뭇가지인지는 알수 없다. 그러나 어쩐히 호운은 그 나무를 살짝어루만지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과연, 유시운의 소원처럼 나무의 곁에 서서 보자 황궁 너머의 도성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북방진한 일물열전 제 23장 :보령왕전>

보령왕- 명호 미상. 생몰 미상.

현종9년 현종이 갑작스레 죽은 진성왕의 아들 운양군을 태자로 책봉한다는 교지를 내린다 또한 운양군의 보호자인 월왕자 무명씨를 왕으로 책봉하며 그를 황궁으로 부르니 그 이름이 보령왕이다.

이것이 보령왕이 처름 정사에 등장한 순간이다.  그 이전까지 보령왕은 정사에 이름조차 나타나지 않은 자였다. 그런데 현종 9년, 돌연 왕의 이름을 받으며 나타났으니 여러 역사의 인물 중 단연 특이한 등장이라 할 수 있다. 보령왕은 북방 진한 마지막 황제인 현종의 애첩으로 유명하지만 그 이름은 남아있지 않다. 또한 생몰 또한 알 수 없다. 이는 현종의 조카 손자가 되는 혜종의 기록 말소에 의한 것인데, 혜종은 위대한 황제인 현종이 남색을 저지르다 못해 첩에게 왕의 복작까지 내렸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하였다. 때문에 그는 황위에 오르자마자 보령왕을 군으로 강등시키고 그에 대한 모든 기록을 삭제하는 것으로 우선시 하였다. 현종의 철저한 말소에 의해 정사에는 보령왕의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현종실록에는 종종 보령왕의 존재가 거론되는데, 이는 아무리 혜종이라 하더라도 붕어한 종조의 역사에 손을 댈 수 없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또한 정사외에도 보령왕에 존재가 종종거론되는 곳이 잇으니 바로 북방진한에 만연하였던 야사집이다. 야사집에는 보령왕의 각종 일화들이 전해지는데, 정사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것이 있는가 하면 터무니 없는 내용을 담은 것도 있다.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운유록]이라는 이름의 야사집으로 소설의 형식을 취한 그 야사집은 보령왕의 일대기로 널리 알려졌다. 그 소설에서 현종은 극악한 악인으로 묘사되는데, 죽거리는 아래와 같다. 본래 보령왕은 아내를 장가가 행복하게 살던 사람이었느데 현종이 보령왕을 보고 한 눈에 반해 그를 강제로 궁 안으로 끌고 갔다. 현종은 보령왕에게 각종 금은보화를 주며 현혹하려 하였으나 보령왕은 흔들리지 않았다. 결국 이 일로 현종은 보령왕을 손에 넣게 되었다. 그러나 현종을 사랑한 적이 없는 보령왕은 궁 안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끝내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는다. 이야기는 목매어 죽은 보령왕의 시체 앞에서 현종이 울부짖었다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것은 야사 중에서도 가장 인기를 끈 것으로 북방진한 방방곡곡에 퍼져나가 현종의 골치를 아프게 하였다. 현종은 몇 번이나 이 야사집이 시중에 흐르는 것을 막으려 노력하였지만 제법 재비가 있는 소설의 형식을 취한 야사집이었던지라 엄한 금지정책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그것을 보는 걱을 막을 수 없었다. 

유시운

"재미있는데."

유시운은 책을 덮으며 웃었다. 유시운은 최근에는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배우고 있었다. 유일한 황위 계승자이자 태자인 그가 제왕학을 배우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여섯 살 무렵까지는 들판이며 산이며 마음 껏 띠ㅜ어다니던 그에게는 새장 속의 새처럼 궁 안에 갇혀 매일 책과 씨름하는 것은 무척 답답한 일이었다. 그러나 유시운은 그 불편을 알면서도 궁 안의 생활을 택했으니, 누구를 탓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유시운의 존재가 조정 대신들에게 알려진 것은 4년 전의 ㅇ리이다. 그때 유시운은 아직 여섯 살이었고, 세상에 대해 몰랐다. 그러나 내관 목현상의 계략으로 일어난 일련의 사태에 휘말리면서 유시운의 존재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유시운의 존재를 안 조정 대신들은 격하게 반응했다. 황제인 고과윤에게 후사가 없는 이상 유시운이 유일한 황위 계승자다. 때문에 그들은 더욱 격하게 반응하였다. 일부는 유시운을 멀리 귀양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일부는 사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유시운의 의사와 관계없이 유시운의 존재 자체를 문제 삼았다. 호운이 그를 데리고 도성을 떠나겠다고 하였지만 그들의 주장은 더욱 강경해졌다. 황제가 보지 않는 곳에서 무슨 짓을 할 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원래였다면 그 사건이 정리된 후 도성을 떠났을 유시운이 도성에 남게 된 것은 그 탓이었다. 황제는 분명 강하다. 그가 강하게 명령하면 대신들은 거부하지 못한다. 하지만 수면 아래의 일 까지 황제가 어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 유시운은 몇 번이나 암살의 위기에 처했다. 불혹을 넘었지만 아직 황제는 사내로서 왕성하니 자신들과 연이 닿은 여인을 황후로 밀어올리고 싶어 하는 자들은 많았다. 그들에게 유시운의 존재는 걸림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결국 유시운은 스스로 힘을 기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유시운은 지루한 공부들을 모두 참고 견뎠다. 그러나 지금 유시운이 본 책은 그런 지루한 책이 아니었다. 표지도 없는 얄팍한 책을 본 유시운은 쿡쿡 웃었다. 이것은 그의 내관이 보고 있는 것을 발견해 빼앗아 읽은 책이다. 구석에서 하도 숨을 죽이며 무언가를 보고 있어 빼앗아 버렸다. 결구구 내관은 울상을 지으며 유시운에게 책을 받쳤다. 몇 줄 만으로 유시운을 웃게 만든 책을 자세히 읽어보니 과연 흥미진진했다. 유시운은 내용을 곱씹으면서 웃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이 책을 보아야 할 사람이 있는 듯 하였다. 

"바쁘십니까"

유시운은 지금 쯤 정무를 보고 있을 시간이라 생각하여 대전을 찾았다. 과연 그의 ㅅ애각처럼 그가 찾는 이는 대전에 있었다. 서류를 살피던 황제는 유시운을 힐긋 보고 대답했다. 

"그다지 바쁘지 않다. 무슨 일이냐. 매우 기분이 좋아 보이는 구나."

"재미있는 것을 읽어서 그렇습니다."

"재미있는 것?"

"예, 한번 황상께서도 읽어보시면 어떨까 하여 가져왔습니다."

황제는 의아한 표정으로 유시운이 건네는 책을 받았다. 그러나 책장을 연 그는 첫줄에 인상을 굳혔다.

"이게.... 무엇이냐?"

"무엇은 무엇입니까. 책이지."

"아니, 이 내용이... 이게..."

황제는 뭐라 말을 못하고 더듬거리며 책장을 넘겼다. 책장이 천천히 넘어갈 수 록 황제의 낯빛이 기묘해졌다. 결국 책을 덮고 유시운에게 물었다.

"이게 어디서 난 게냐? 누가, 누가 감히 이런..."

순식간에 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황제가 외치자 유시운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디서 나든 무슨 상관입니까. 저잣거리에 쫙 풀려있는 책인걸요. 어디서든 구하려면 구할 수 있지요."

그 말에 황제의 입이 쩍 벌어졌다. 유시운은 세월의 흔적을 가지고도 아름다운 그 얼굴이 이리 멍청해 보일 수도 있구나 하고 감탄했다. 

"이, 이게 저잣거리에 풀려 있다고?"

부들부들 떨며 책을 가리키는 황제를 보며 유시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자에 쫙 깔려 있습니다."

그 말에 빨갛던 황제의 안색이 순식간에 새파래졌다. 곧 황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지금 당장 병사들을 불러 모아라!"

격하게 반응하는 그를 보며 유시운은 결국 푸하하핫!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원래 강건너 물구경은 재미있는 법이었다.

고광윤

고광윤은 손안에 든 책을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이미 병사들을 도성 곳곳에 파견하였지만 책의 내용을 생각하니 아직 속이 울렁거렸다. 이런 것이 도성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생각을 하니 들줄기가 오싹해졌다. 고광윤은 주변에 아무도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서둘러 책장을 폈다. 그러나 내용을 다시 봐도 얼굴이 벌것게 달아올랐다. 모조리 날조라면 다행인데 일부는 진실과 유사하다. 아니, 아예 진실이었다. 그것도 바로 옆에서 보고 듣고 쓴것처럼 너무 정확한 진실이라 보고 있자니 얼굴이 벌개졌다가 새파래졌다. 결국 고광윤은 끝까지 읽지도 못하고 책을 쾅 덮고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저녀석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책을 내게 가져온 게야!"

고광윤은 유쾌한 듯 웃던 유시운을 떠올렸다. 마치 재미있어서 견딜수 없다는 듯 웃던 유시운의 얼굴을 떠올리니 웬지 으스스해졌다. 유시운은 최근 들어 성격이 많이 음험해졌다. 호운과 단 둘이 살적만 하여도 참으로 순진하고 맹랑하던 꼬마가 고광윤과 함께 하면서부터 교활한 노인네처럼 변했다. 전만 하여도 생각이 빤했건만 이제 고과윤은 유시운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아무도 유시운에게 진실을 말하여 준 자는 없다. 고광윤과 호운 사이에 있었던 일이나 그의 외숙이 되는 복치운의 이야기, 그리고 제 친모와 친부의 이야기까지 그에게는 무엇 하나 진실이 전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영특한 아이는 알아서 자신의 진실을 하나 둘 찾아갔다. 그리고 그 진실의 숫자만큼 입이 무거워지고 표정이 사라졌다. 표면적으로 유시운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유지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이런 식으로 비수를 던지는 것을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게 아닌 것은 확실했다. 사실 고광윤은 유시운이 과거를 알든 말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가 현재를 알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만약 그가 현재를 알고 있다면, 고광윤이 누리는 지금의 행복은 한순간 무너져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그것도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하나의 가능성을 생각한 고과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4년전 오랜 요족과의 소모전이 극적으로 막을 내린 때였다. 고광윤은 요족의 왕으로부터 한 가지 소식을 전해들었다. 그 소식에 고광윤의 심장은 바싹 움츠러들었다. 그때 그는 겨우 쥐게 된 행복에 만취해 있었다. 그런 그에게 그 소식은 청천벽력과 다름이 없었다. 그것은 10년 전 자취를 감춘 두 사람에 대한 소식이었다. 그 소식에 놀란 고광윤은 거의 하루를 잠도 못 이루고 고민했다. 만약 그들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알면 그리고 이제 요족과의 화의로 서로의 왕래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면? 그러면 나는 어찌되는 거지? 고광윤은 전율했다. 결국 그는 대책을 강구하다 비열한 수단을 선택했다. 황제로서 수많은 더러운 짓을 서슴지 않았던 그가 생각해도 무척 비열한 짓이었다. 그러나 누가 말하였던가. 원래 연적을 상대할 때는 비열한 것이다.

서융

천장에 뚫린 구멍으로 환한 빛이 들어와 침상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 빛을 받으며 구릿빛 피부의 남자가 침상에서 일어섰다.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침상에 누워있던 여인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서대인은 참 말이 없으십니다."

여인은 무척 체구가 작았다. 구불구불한 머리나 새하얀 피부가 그 작은 체구와 어우러져 무척 매력적이었지만 침상에서 일어난 남자는 여자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한족의 남자들은 요설이라더니 제가 속았나 봅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물리고 싶으냐?"

"아닙니다."

남자의 말에 여자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저 남자가 한다면 하는 남자인 것을 알았기에 농담으로라도 그리 말할 수 없었다. 여자가 얼른 입을 다물자 남자가 의복을 걸쳤다. 하나둘씩 옷을 걸친 남자는 단지 야성적인 사내에서 요족의 대장군 서융이 되어 천막을 나섰다.

원래 유목생활을 하는 요족의 주거는 조금 튼튼하게 지은 천막 같은 것이다. 따라서 언제든 치고 거둘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었다. 서융이 나선 천막의 주변에는 그와 비슷한 형태의 천막들이 즐비했다. 그러나 비슷비슷하다고 하여도 천막의 위치나 형태에 따라 서열은 존재했다. 요족은 천막을 원형으로 치는ㄷ, 계급이 높을수록 원의 안쪽에 천막을 치게 된다. 형태또한 높은 사람일수록 외부에 화려한 문양을 그려 넣은 것을 친다. 그러한 요족의 풍습을 생각하면 서융의 천막은 이 진에서는 가장 높은 자의 것이라 할 수 있다. 서융은 천막을 나서자마자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빠른 속도록 진을 벗어나 동쪽으로 달렸다. 달릴수록 불어오는 바람에 차가운 습기가 맺혔다. 물의 냄새에 흥분한 듯 말은 더욱 속도를 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융은 커다란 강 앞에 도착하였다. 콰르르륵! 마치 폭포처럼 거친 용트림을 하며 흐르는 강줄기 앞에 선 서융은 강 너머의 땅을 보았다. 희미하게 형태만이 겨우 보이는 땅을 한참을 바라보던 서융의 표정은 깊은 물의 색 만큼 이나 어둡게 침잠되었다. 눈으로 보이는 저 땅이 서융은 평생 밟을 수 없는 땅이 될 줄은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이 강에서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서융은 풍문으로 전해 들었다. 드문드문 전해지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피가 거꾸로 돌았지만 서융은 결코 강을 걸널 수가 없었다. 마치 투명한 벽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저 강 너머의 땅을 바라볼 뿐이었다. 드디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4년 전 그에게 닿은 한 장의 전갈로 정말 모든 것이 끝나 버렸다. 전갈에는 긴 내용이 쓰여 있지 않았다. 정확히 한 줄이 새겨진 전갈이었지만 그 효과는 실로 엄청났다.

진부용의 죽음에 대해 고하겠다.

발신인도 쓰여 있지 않았지만 서융은 발신인이 누구인지 알았다. 이런 전갈을ㄹ 보낼 이가 또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이 전갈이 서융에게 어떤 위력을 발휘할지 아는 이가 또 있을 리 없다. 바로 진한의 황제다. 죄로 따진다면 진한의 황제가 범한 죄가 더 많고 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죄는 이미 백일하게 노출되어 있다. 또한 그는 직접적으로 호운의 주변의 누군가를 죽인 일이 없다. 그러나 서융의 경우는 달랐다. 그의 죄는 숨어 있다. 또한 그는 직접적으로 누군가를 죽였다. 어쩌면 호운이 평생 유일하게 사랑으로 간직할지도 모르는 진부용을 말이다. 어제 서융에게 남은 방법은 두 가지 뿐이다. 황제를 죽이거나, 호운에게 이 모든 것이 탄로 나거나, 황제는 죽이는 것은 지금 상황으로서는 불가능했다. 그리고 호운에게 모든 것을 드러낼 자신도 없었다. 그러니 양쪽 모두를 선택 할 수 없는 서융은 결국 닭 쫓던 개가 지붕을 쳐다보듯 매일매일 교륭 너머의 땅을 바라보는 것 밖에는 할수없었다. 서융은 그렇게 한참을 강 너머의 땅을 바라보다 품 안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냈다. 수십, 수백 번을 펴고 접어서인지 끝이 너덜너덜해진 그 종이에는 한 남자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그때는 이것을 보여 쓸데 없이 자세히 그려 놓았다고 욕을 했는데 지금은 이 종이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서융은 커다란 뿔피리소리를 듣고 종이를 품 안에 챙겨 넣었다. 혹시 달리는 사이에 샐까 가슴과 맞닿는 깊숙한 속옷에 종이를 밀어 넣은 서융이 다시 말머리를 진으로 돌려 달렸다. 

진으로 돌아오자 한 떼의 인마가 진의 앞에 모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서융은 그 중에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 얼ㄹ른 말에서 내렸다.

"역긴 어쩐 일이지?"

이미 지루하게 이어지던 소모전도 끝났으니 굳이 군사가 이곳에 올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군사 복치운은 전쟁이 끝난 이 땅에 왔다.

"재미있는 소식을 전해드릴까 하고요."

앚기 서른 초반의 나이임에도 머리가 하얗게 샌 복치운이 빙글빙글 웃었다. 

복치운

복치운은 처음 요족의 영토로 넘어오기 전날의 일을 잊지 못한다. 화살을 맏은 통증보다 품안의 아이가 허공으로 튀어 오르고 물로 빨려들듯이 사라지던 그 광경을- 그리고 자신의 형님이 그 아이를 구하기 위해 물로 뛰어들던 그 광경을. 결국 복치운은 호운과 아이의 생사를 알 수 없이 강을 건넜다. 복치운과서융은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다시 강을 건너려 하였다. 그러나 병사들이 몰려온 광경을 보고 겁에 질린 사공은 노를 잡지 않았다. 서융의 협박도 톹ㅇ하지 않았다. 그는 여기서 자신을 죽여 버리면 강을 건널수 없다는 것을ㄹ 알기에 배짱을 부렸다. 결국 서융은 이를 갈면서도 사공을 어찌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서융이 눈을 떴을 때 이미 사공은 달아난 후였다. 그러나 서융은 사공을 쫓아가지 못했다. 다음 날 새벽 국경을 지키던 요족의 경비병들에 포위망을 뚫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곁에는 부상을 당한 복치운이 있었다. 복치운은 어렴풋이 서융이 호운 때문에 자신들을 도운 것을 알았기에 서융이 이순간 자신을 버릴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서융은 의외로 복치운을 버리지 않고 순순히 함께 포로가 되었다. 포로가 된 복치운과 서융은 국경 근처에 있는 병사들의 주둔지로 끌려갔다. 복치운은 자신의 품 안의 패를 꺼내보이며 자신들을 요족의 왕에게 데려가 달라 애원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병사들은 오히려 그를 비웃었다. 복치운이 꺼낸 옥패는 바닥을 굴렀다.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복치운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이미 요족은 5년 전 왕조가 바뀐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복치운의 충격을 받은 얼굴을 보고 끼낄 거리며 비웃었다. 그리고 전왕조의 핏줄을 데려가면 적어도 말을 열 마리는 하사박을 수 있다며 복치운의 처우를 논했다. 그러자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서융이 복치운에게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무조건 땅에 엎드려 있어라."

복치운이 놀라 서융을 바라보자 그때부터 서융은 사납게 날뛰기 시작했다. 서융은 가장 가까이 있는 병사의 검을 빼앗아 그의 목을 날렸다. 그러자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뽑아 들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보던 복치운은 서융의 말이 생각하고 얼른 바닥에 엎드렸다. 곧이어 일대 다수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가차없는 살육전이었다. 서융은 마치 토끼 무리에 풀린 승냥이 같았다. 그는 거침없이 병사들의 목을 베었다. 그 살육전이 언제 끝났는지, 복치운은 알지 못했다. 서융의 말은 롷았다. 어둠 과 난전이라는 요소가 더해지자 시야가 좁아진 병사들은 눈앞의 서융을 공격하느라 바빠 구석에 누워있는 복치운은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 모든 소란이 끝나고 복치운이 고개를 들었을 때는 그 많던 병사들이 모두 바닥으로 쓰러져 있었고, 오직 서융 한 사람만이 남아 전신을 피로 물들인 채 서 있었다. 그 후도 별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호전적인 요족은 복치운과 서융을 보자마자 덤벼드는 일이 잦았다. 키가 박고 곱슬머리가 많은 요족들 사이에 키가 크고 직모를 가진 서융과 복치운이 눈에 띄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서융은 단 한 번도 싸움에서 지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요족의 새 왕의 눈에 띄어 다시금 장군이라는 자리를 얻을 때 까지. 그는 한 번도 지지 않았다.

천막으로 들어가자마자 서융이 재촉하듯 묻자 복지운은 빙그레 웃었다. 

"죄근 글을ㄹ 쓰는 취미가 생겨서요."

서융은 뜻을 알 수 없는 복치운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일전에 서장군이 해준 이야기 말입니다. 형님의 아내 이야기."

"...그건 왜."

술심에 호운의 아내 이야기를 하긴 하였다. 그러나 서융은 자신의 이야기는 쏙 배고 자신이ㅡ 눈으로 본 호운과 그 아내의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화가 날 정도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던 그들의 이야기를 말이다. 

"그걸 생각하다 보니 글로 쓰면 재미있게다 싶었거든요."

복치운은 그리 말하며 품안에서 얇은 책자를 꺼냈다. 그것을 받아든 서융은 첫 장부터 인상을 찡그렸다. 방금 복치운의 말대로 호운과 그 아내의 이야기를 쓴 글이었던 탓이다. 

"이게 뭐가 재미있단 말이냐?"

"계속 보시죠."

복치운의 재톡에 서융은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책장을 넘겼다. 점점 이어지는 내용을 본 서융의 입매가 비뚤어졌다. 

"어째서 이런 것을 쓴 것이냐. 그리고 이런 것을 써서 뭘 하겠다고..."

"작녀 ㄴ가을 에 사신을 통해서 진한의 도성에 이것과 같은 것을 열부 뿌렸습니다."

복치운은 빌그레 웃었다.

"그랬더니 지금은 아예 집집마다 없는 집이 없다고 하는군요."

그 말에 서융의 입술이 씰룩, 꿈틀거렸다.

"어제 진한에서 돌아온 사신이 말하더군요. 황제가 진한을 떠도는 이 책을 금서로 지정하고 혹시라도 가지고 있는 자는 엄벌에 처하겠다고 명을 내렸다고요. 덕분에 이 책은 도성을 벗어나 진한 전체로 퍼지고 있다고 합니다. 일종의 유명세랄까요?"

서융이 입술이 다시 한 번 씰룩거렸다. 마치 화가 난듯 입술만 찡그려져 있는 상태지만 복치운은 그것이 서융의 미소라는 것을 알았다.

"참 치사한 방법이구나."

"원래 연적을 향한 복수는 비열한 법입니다."

"모른 척 감상문이라도 보내어 볼까?"

"좋은 생각입니다. 그 잘난 면상이 지금 어떤 꼴인지 보지 못하는게 원통하다는 말을 꼭 써붙여 주십시오."

복치운의 말에 서융은 마침내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이리 통쾌하게 웃은 게 언젠가 마지막인지 정말 까마득했다.

호운

따스한 손바닥이 뺨을 어루만지는 느낌에 호운은 눈을 떴다.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계속 자라."

"아닙니다."

호운은 침상에서 일어나 앉았다. 희미한 호롱이 아른아른 흔들리는 방 안에는 내관과 여관들이 모두 물러나고 오직 고광윤과 호운, 단 둘 밖에 없었다. 

"오늘은 늦으셨습니다."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리 말하는 고광윤의 표정이 조금 어두운 듯 해 호운이 물었다.

"뭐 큰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습니까."

아무것도 아니라지만 그 표정은 아무것도 아닌게 아니었다. 그러나 호운은 굳이 더 캐묻지 않았다. 고광윤ㅇ느 가끔 이런 식으로 호운의 처소를 찾았다. 처음 궁에 머물기로 결심을 했을 때만 하여도 이러 ㄴ관계는 상상한 적이 없었다. 그저 호운은 유시운의 목숨과 미래를 위해 이곳에 남았다. 때문에 누군의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생활을 하려 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지 지금의 상황이 되어 있었다. 그는 구명을 위해라는 명목으로 왕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변하는 것은 단지 이름 뿐, 실상 아무것도 달라질 것은 없다 믿었건만 많은 것이 변하였다. 그 중 가장 변한것은 눈앞의 사내와의 관계였다. 호운은 설마 눈앞의 사내와이ㅡ 관계가 이리 변하리라고는 과거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다. 고광윤은 가라앉은 표정으로 호운을 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함께 자도 되겠느냐."

답지 않게 어눌한 물음에 호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호운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겉옷을 벗은 고광윤이 침상으로 올라왔다. 그는 호운이 누운 자리의 옆에 나란히 누워 호운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한때는 고광윤이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소스라치게 놀라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지금처럼 자신의 손을 만지작 거리는 그의 행동은 익숙해져 버렸다. 시간이라는 것이 그래서 무서운지도 몰랐다. 한참을 손을 만지작거리던 고광윤이 호운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았다. 호운은 이런 고광윤의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이럴 때 마다 그가 할 말은 정해져 있다. 이런식으로 호운의 곁에 누워 손을 만지작거리다 그의 눈치를 보고 종국에는 우물쭈물 입을 연다.

"안아도...되겠느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묻자 호운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고광윤이 얼른 호운의 겨틍로 바싹 다가와 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마치 호운이 지금이라도 변심해 안 된다고 대답할 것이 두렵다는 식이었다. 허겁지겁 호운의 옷을 벗겨낸 고광윤은 호운의 맨살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이런 관계가 시작된 것이 언제부터였던가. 호운은 멍하니 생각했다. 그저 어느 순간 어느날 부터, 그저 그렇게 시작되었다는 것밖에 호운은 알지 못했다. 고광윤은 호운의 피부를 조심조심 어루만졌다. 그러다 천천히 입술을 대었다. 고광윤은 호운의 피부를 빠는 것을 보아했다. 그래봐야 사람의 피부이고 땀이라도 흘리면 짠맛밖에 나지 않을 텐데 그는 호운의 피부 곳곳을 빨았아. 일전에는 고광윤을 받아들이는 곳마저 혀를 집어넣고 빨아 대서 호운이 기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놀란 호운이 고광윤을 발로 걷어차자 고광윤이 그대로 침상 밖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 그 후에는 그곳 근처에는 혀는 커녕 입술도 얼씬거리지 않았으니 호운으로서는 고맙기는 했다. 고광윤의 입술이 호운의 목으로부터 가슴, 배꼽 그리고 골반을 거쳐 서서히 가랑이 사이를 향했다. 뜨거운 혀가 몸을 훑는 감촉은 마치 연체동물이 몸 위를 기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호운은 애써 그것을 표현하지 않았다. 가랑이사이로 향한 고광윤은 반쯤 일어나 있던 호운을 입술로 애무했다. 따뜻한 입김이 민감한 피부 끝을 자극하자 호운의 몸이 살짝 떨렸다. 그러자 고광윤은 망설이지 않고 호운의 성기를 입 안으로 삼키며 동시에 어느샌가 기름에 적셔 놓았던 손가락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쾌감과 불쾌감이 동시에 치미는 자극에 호운의 등이 크게 뒤로 휘었다. 고광윤은 호운의 상태를 살피며 천천히 혀와 손가락을 놀렸다. 안쪽 깊숙이 기름을 펴 바르는 고광윤의 손가락은 무척이나 신중했다. 반ㅁ녀 호운의 성기를 감싸고 빠는 혀의 움직임은 거칠고 대담했다. 처음에는 불쾌감과 쾌감이 공존하던 미묘한 상태가 마침내 쾌감만으로 이루어진 자극이 되자 호운의 숨소리가 젖ㅁ점 더 거칠어졌다. 고광윤은 호운의 숨소리를 가늠하고 천천히 입안의 것을 뱉어내고 호운의 허리를 끌어 안으며 자세를 잡았다. 고광윤은 호운의 다리를 크게 벌리며 제 몸을 앞으로 밀었다. 호운의 등이 다시 한번 뒤로 휘었다. 고광윤은 한손으로는 호운의 허리를 잡고 한 손으로는 흥분한 호운의 성기를 잡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점차 젖어오는 둘의 피부가 서로 마찰하는 소리와 기름의 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음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소리가 점차 빨라지고 호운의 입에서 단락적인 신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고광윤의 동작은 더더욱 빨라졌다. 호운은 이럴 때마다 정신이 없었다. 조금의 고통도 없는 순수한 쾌락은 호운에게는 공포의 대상이나 다름없었다. 그 공포의 대상은 호운의 이성을 순식간에 마비시켰고 언제나 정신을 차리며 ㄴ터무니없는 추태를 보이고 있는 날이 많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호운은 고광윤의 안아도 되겠냐는 제의를 종종 거절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흥분이 더해가는 관계가 두려웠기 때문이었지만 한 번씩 거절당할 때마다 고광윤은 침울해 보였다. 그러나 그는 강권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호운은 고광윤의 제의에 쉽게 응하게 되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것은 어느 날 제의를 거절한 호운의 침상의 곁에 서서 자위에 열중한 고광윤을 본 다음부터였다. 천하를 모두 가졌다는 자가 자신의 거절에 홀로 자위를 하는 모습을 보니 민망하기 이전에 이상한 기분이었다. 비록 열중하여 눈을 감고 있던 고광유은 호운이 잠에서 깨어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는 것을 몰랐지만, 그 일은 호운에게 고광윤의 인상 중 하나로 깊이 자리 매길 하게 되었다.

"으윽!"

호운은 고광윤이 강하게 유두를 빨자 몸을 떨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하여도 사내도 유두에 반응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알지 못하였는데 고광윤의 덕에 참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고광윤은 점차 동작을 빨리하며 호운의 어깨며 턱, 그리고 목을 정신없이 빨고 깨물었다. 아마 아임이 되면 또 다시 울긋불긋하게 되어 있으리라는 것이 잠시 머리를 스쳤지만 그것은 이내 뜨거운 열기에 휩싸여 날아가 버렸다. 마침내 호운이 절정에 달해 다리를 부르르 떨었다. 동시에 호운의 내부에서 고광윤이 쑥 빠져나갔다. 호운은 엉덩이 근터에 닿는 젖은 느낌으로 그가 사정을 하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광윤ㅇ느 의원에게 정액이 장에 좋지 않다는 말을 들은 이후부터 이렇듯 절정에 다다르면 외부에 사정을 하였다. 재정신이 날아갈 그 순간에 저럴 수 있다니. 호운으로서는 도저히 흉내도 낼 수 없는 이성이었다. 고광윤ㅇ느 호운이 숨을 고르는 것을 보고 천천히 호운의 위로 덮여 왔다. 그리고 조심조심 그의 콧잔등에 입술을 대고 물었다.

"입을 맞춰도 되겠느냐."

그 물음에 호운은 대답대신 작게 웃음을 흘렸다. 곧 고광윤의 입술이 호운의 입술을 집어 삼킬 듯 덮쳐왔다. 호운의 입 안으로 들어온 고광윤의 혀는 마치 혀로 성교를 하는 것처럼 거칠게 호운의 안을 헤집었다. 그는 호운의 혀를 빨고 당기고 간질이며 호운의 관능을 끌어내려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점차 숨이 막혀온 호운은 결국 고광윤을 밀치고 말았다. 고광윤은 번들거리는 입술로 아쉬운 표정을 짓고 호운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더 매달리지는 않았다. 대신 침상에 준비된 수건으로 호운의 몸을 꼼꼼히 닦아 준 후 호운을 끄어 안고 자리에 누웠다. 호운은 자신을 끌어 안은 고광윤의 체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곤히 잠들었던 호운은 새벽에 돌연 잠에서 깨어났다. 이유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저 잠이 깨어버렸다. 호운은 자신을 끌어 안은 고광윤의 팔에서 조심스레 빠져나가 침상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소리를 죽이고 창가로 다가갔다. 푸르스름한 달빛아래 꽃이 만개한 매화나무가 보였다. 여섯 살 무렵의 유시운 만큼이나 작던 매화나무는 어느새 호운의 키 보다 조금 더 높이 자라 많은 가지를 뻗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그 꽃은 마치 오래전에 보았던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였다. 그것은 자신의 어미 같기도 하였고 아내였던 진부용 같기도 하였고 유란란같기도 하였다. 그리고 또 끄 꽃은 한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였다. 아른아른 흔들리는 꽃을 바라보던 호운은 침상에 누워 곤히 잠든 고광윤을 보았다. 가끔 호운은 고광윤이 참으로 가여운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자신에게 애정을 갈구하면서도 결코 말 못하는 그를 눈치 챈 순간, 호운은 그를 동정하게 되었다. 스스로 결코 아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필사적으로 애정을 갈구하는 그의 모습이 처량함녀서도 때로는 미웠다. 아직도 고광윤에게 남은 감정은 많았다. 단지 세월의 흐름에 묻혀 조용히 잠들어 있을 뿐이다. 고광윤은 그것을 모두 알면서도 호운을 바라고 원하였다. 아마 그리해서 호운을ㄹ 사랑을 얻을 수 있다면 그는 볓 번이고 무릎을 꿇고 사랑을 갈구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하지 못할 것이다. 호운이 결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절망적인 사랑에 행복해 했다. 호운은 희미하게 잠꼬대를 하며 돌아눕는 고광윤을 보고 창가에서 침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소리 없이 고광윤의 품을 파고 들었다. 호운보다 훨씬 높은 체온에 감싸지는 감각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그리고 결코 사랑할 수 없는 사람과 이리 살아가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호운은 그리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허나 이 야사집이 정사로 인정 받을 수 없다. 야사집이 만연한 시점이 아직 보령왕이 생존하였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야사집에 보령왕은 평범한 민초로 묘사되는데 월왕이ㅡ 아들로 밝혀진 보령왕이 평범한 민초일 리가 없으니 결국 야사집의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 판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야사집으로 당대의 사람대부분이 궁 안에 사는 보령왕이라는 자의 존재를 알게 되었으니 아마도 현종이 남색을 하는 것을 비난하기 위해 어느 신하가 만든 책이 아닌가 하고 짐작 될 뿐이다. 그러한 논란 속에서도 현종은 결코 보령왕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토록 현종을 몰두하게 한 보령왕이 대단한 것인지, 혹은 그토록 보령왕을 사랑한 현종이 대단한 것인지 일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결국 현종의 사랑은 보령왕이 죽던 그 순간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 보령왕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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