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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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震翰 玉羽三年 진한 옥우삼년 浩氏 三十四歲 호씨 34세 현종은 호씨를 옥에 가두고 그의 처벌을 논하니 여태 호씨가 살아오며 지은 참혹한 죄가 차례로 드러났다. 도성에서만도 연일 호씨의 죄를 고하는 자가 줄을 이어 현종은 각지로 호씨의 죄상을 파악할 관리들을 파견하였다. 각지로 파견된 관리들은 연일 호씨의 죄목을 황궁으로 보내었는데 그 죄상의 악랄함과 참혹함이 눈뜨고 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현종은 이런 흉악한 죄를 범한 자를 어이 처벌해야할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였다. 그 사이 현종에게는 불길한 일이 끊이지 않았다. 현종의 모후인 태후가 갑작스레 승하하였고 현종의 두 아들과 그들의 생모인 왕비마저 연이어 까닭모를 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거기에 갑작스러운 가뭄으로 천하에 근심이 깊어지니, 현종의 시름도 깊어졌다. 호사스러운 의자에 앉은 호운은 어슴푸레한 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늘도 시종들은 호운에게 음식을 먹이느라 곤욕을 치렀다. 호운이 음식을 거부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주리를 틀지 않으면 음식을 먹지 않았고 먹인다 하여도 토해내기 일쑤였다. 나날이 메말라 가는 호운을 보며 황제가 고육지책으로 짜낸 것이 보약을 지어 먹이는 일이었다. 토할 수 없도록 소량으로 원기를 보충하는 보약을 지속적으로 먹여 호운은 죽지 않고 살았다. 호운 본인이 아무리 죽고 싶어 안달을 하여도 굶고 지친 몸은 저를 살리는 보약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무리 보약이라 하더라도 곡기를 끊은 지 반년이 지나자 그의 몸은 점차 보기 흉할 정도로 메말라 갔다. 원래 마른 몸이 광대뼈가 도드라질 정도로 마르고 목은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가느다랗게 변했다. 그러나 황제는 호운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밤 뿐만이 아니라 낮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호운을 찾아왔다. 그런 황제의 태도에는 호운이 죽었나 죽지 않았나 조마조마하며 살피는 기색이 엿보였지만 호운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황제가 생각하기에 자신이 호운에게 한 일은 그리 미움 받을 일이 없었다. 자신은 언제나 호운을 총애하였고 그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한 적이 없었다. 비록 한때 호운의 과거를 견디지 못하여 그에게 가혹하게 대하긴 하였지만 그것은 먼 과거가 아니던가. 오히려 그 과거를 불문에 붙이고 다시 자신을 총애해 주는 황제에게 감사를 해야 할 것을, 도리어 호운은 황제를 미워하였다. 미움이라는 것이 꼭 말로 흘러나와야만 아는 것이 아니다. 그 눈빛이, 숨소리가, 표정이 그리 말하는데 황제라고 모를 리 없었다. 황제는 때때로 호운을 찾아와 이런저런 말들을 늘어놓으며 호운의 환심을 사려하였다. "갖고 싶은 거라도 있느냐?" "먹고 싶은 것은?" "혹시 계집이 품고 싶은 게냐." "아니면 금은보화를 주랴." 황제는 재갈이 물려 대답할 수 없는 호운을 향해 혼자 떠들어댔다. 그는 호운의 고개가 조금이라도 자신을 향해 까딱거리기를 기다리며 연신 말을 이었다. 그러나 호운은 여전히 황제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저 뺨을 치면 잠시라도 자신에게 시선이 돌아올까 황제는 생각하였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어느 순간부터 황제는 호운의 몸에 손을 대기가 저어되었다. 이는 단지 폭력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가끔은 호운을 안는 것조차 저어되었다. 이런 황제의 태도는 호운에 대한 열정이 식은 것을 증명하는 것 같았지만 가끔 그는 참지 못하고 발정기의 개처럼 호운에게 달려들곤 하였다. 분명 호운을 향한 열정은 여전하지만 그저 그에게 접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대신 황제는 호운을 향해 수없이 많은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황제는 호운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호운이 이러는 것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몰라 그러는 것이라 여겼다. 만약 자신이 호운에게 모든 부귀영화를 쥐어줄 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죽으려 하지도 않고 웃어줄 것이다. 황제는 그리 여겼다. 황제는 호운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호운이 어째서 자신을 죽이려 하였는지, 그리고 이제는 어째서 죽으려 하는지 끝까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호운은 이해를 요구하지 않았다. 메말라가는 몸처럼 호운의 마음도 메말라갔다. 입에 재갈이 물린 사내를 곁에 두고 혼자 떠드는 황제를 보며 시종들은 그저 고개를 숙였다. 사실 최근 황궁 안에서는 암암리에 황제가 미친것이 아닌가 하는 소문이 돌았다. 틈만나면 죽겠다고 소란을 피우는 사내를 끼고 도는 것도 그렇거니와, 밤마다 그 사내의 침실을 찾는 것도 그러했다. 거기에 가끔 지금처럼 호화롭게 치장했지만 입에는 재갈이 물려있고 다리에는 족가(足枷)까지 찬 사내를 이끌고 정원을 산책하는 모습을 보면 아무리 봐도 황제가 제정신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주변에서 어찌보든 간에 사내의 손을 이끌고 산책을 하는 황제는 여느 때와 달리 더없이 행복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그 행복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황제의 손에 얌전히 잡힌 채 산책을 하던 사내가 별안간 자신의 옆에 서 있던 석등에 제 머리를 세차게 박아 버렸기 때문이다. 빡! 멀리 서 있는 시종들의 귀에도 들릴 만큼 세찬 소리가 나더니 사내가 힘없이 바닥에 늘어졌다. 그런 사내의 머리로 검붉은 피가 흐르기 시작하자 황제가 시퍼런 안색으로 달려 나갔다. 부랴부랴 달려온 의원의 진찰로는 뼈에는 이상이 없지만 머리를 세차게 박은 충격으로 뇌진탕에 걸린 것이라 하였다. 흐른 피도 그저 거죽이 상했을 뿐이지 안은 이상이 없다는 말에 황제는 한숨을 돌렸지만 곧 살기어린 눈으로 시종들을 돌아보았다. "네놈들은 뭣들을 하고 있었던 것이냐!" 워낙 순식간의 일이라 시종들도 어찌 할 수가 없었지만 결국 사내의 곁에 서 있던 시종들은 그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였다는 죄목으로 그날 모조리 참수되었다. 호운은 눈을 끔뻑였다. 가물거리는 눈이 제대로 뜨이는 것을 보니 이번에도 살아있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죽을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리 생각하며 호운은 자리에서 일어나려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호운은 눈을 돌려 움직이지 않는 팔을 올려보았다. 양 팔이 침상 끝에 묶여있었다. 거기에 다리는 여전히 족가가 채워진 채이니 호운은 그대로 침상위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마침내 호운은 족가로 모자라 하루 종일 묶인 채 생활해야했다. 호운이 사지가 풀리는 시간은 하루 네 번으로 정해졌다. 아침, 점심, 저녁 용변을 해결할 때와 밤에 찾아온 황제가 그를 안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에도 재갈만큼은 치워지지 않아 호운은 혀조차 깨물 수가 없었다. 숨을 쉬지 않으면 죽을까 싶어 시도를 해 보았지만 기절을 하고 나면 몸이 저절로 숨을 쉬기 위해 애를 써 버린다. 호운의 의사가 아무리 죽음을 바라더라도 몸은 살기 위해 발버둥치기 때문이다. 황제는 사지가 묶인 후 나날이 메말라가는 호운을 안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시일이 지나면서 호운의 침소로 향하는 횟수가 적어지면서 그에 반비례하듯 행위는 더더욱 집요해졌는데, 호운의 전신에 황제의 손이며 입술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황제는 호운이 자신의 손아래에서 흥분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이 파고드는 구멍에 혀를 대는 일도 망설이지 않았다. 원래는 배설을 위해 사용되는 곳이니 한없이 지저분한 곳이었지만 거기에 혀를 집어넣는 것에 황제는 오히려 쾌감을 느꼈다. 그러나 호운은 황제가 그 어떤 일을 해도 조금도 쾌감을 느끼지 않았다. 자신이 들어갈 안을 집요하게 핥던 황제는 여전히 힘없이 늘어진 호운의 성기를 보고 미간을 찡그렸다. 예전처럼 입놀림이 뛰어난 자를 불러 호운을 흥분시킬까도 고민하였던 황제는 곧 그 생각을 지웠다. 그는 이제는 누군가가 호운에게 손을 대는 것도 싫어졌다. 예전에는 호운이 원한다면 계집이라도 하사할 생각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 생각마저 사라졌다. 만약 호운이 계집을 안는다면 자신은 필시 그 계집을 찢어죽일 것이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굳이 다른 자에게 시킬 이유가 없었다. 자신이 하면 그만인 일이기 때문이다. 황제는 호운의 성기를 입안에 넣는 일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힘없이 수축한 성기는 쉽사리 황제의 입안에 들어갔다. 그는 자신이 안아온 이들이 했던 행동을 떠올리며 고환을 손가락으로 자극하며 안으로 성기를 굴리기 시작하였다. 손으로 만질 때와 온기와 압력이 달라 그런지 호운의 성기는 쉽게 팽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흥분했다 할 정도로 단단해지지는 않았다. 아무리 물고 빨고 무슨 수를 써도 절정은커녕 제대로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성기를 보고 끝내 입가가 저려진 황제가 화를 내고 성기를 뱉어냈다. 그러나 화를 내는 와중에도 황제의 성기는 위를 향해 고개를 치켜들어 까딱거리고 있었다. 결국 황제는 호운을 흥분시키는 것을 포기하고 호운의 다리를 크게 벌리고 엉덩이를 들어 올려 호운의 안으로 침입하였다. 황제는 호운이 부서질 것처럼 강하게 끌어안은 채 허리를 앞뒤로 흔들었다. 침상이 들썩거릴 정도로 요란한 움직임에 맞춰 힘없이 늘어진 호운의 팔이 흔들거렸다. 저것이 한 번 더 등 뒤로 돌아준다면 정말 좋을 텐데. 등 뒤에 손톱자국을 내고 피가 터지더라도 정말 좋을 텐데. 황제는 힘없이 흔들리는 팔을 재촉하듯 허리를 격하게 놀렸지만 호운의 양 팔은 여전히 침상에 내던져진 채였다. 황제는 학학 거친 숨을 내쉬며 필사적으로 호운의 몸에 매달렸다. 목덜미를 핥고 턱을 빨고 귀를 잘근잘근 씹고 코를 빨았다. 그러나 호운은 아무 반응도 없이 천정을 바라보고 황제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다 황제는 호운의 입을 막은 재갈이 타액으로 젖어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혀를 물지 못하도록 입안을 채우고 있으니 타액에 젖는 것은 당연하였지만 새삼스럽게 그것이 눈에 띠었다. 황제는 홀린 것처럼 입가를 막은 재갈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호운의 턱을 잡는 것을 잊지 않았다. 혹시라도 재갈이 사라진 사이에 호운이 혀를 깨물면 어이될지 알았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재갈이 풀린 호운의 입가는 재갈 때문에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고 타액으로 젖어있었다. 황제는 그 입가를 적신 타액을 혀로 핥았다. 그리고 턱을 붙잡혀 벌어진 입 안으로 망설임 없이 들어갔다. 황제의 혀가 호운의 입안으로 들어가 호운의 혀를 엮어냈다. 억지로 벌려진 입 안을 황제의 혀가 비집고 들어갔다. 가만히 있는 호운의 혀를 건드리고 빨고 이로 잘근거리며 정신없이 안을 헤집었다. 혀가 얽히는 소리가 황제의 뇌를 직접 뒤흔들었다. 안쪽에서 들리는 끈적한 소리가 허리로의 쾌감으로 연동되어 눈앞에서 번개가 치는 것처럼 작은 불빛이 점멸하였다. 황제는 호운의 입안을 맛보며 허리를 놀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 쾌감이 절정에 이르자 호운의 턱이 으스러질 정도로 강한 힘으로 억누르며 허리를 밀어붙였다. "흐읍-!" 강한 쾌감에 숨이 막힌 황제가 겨우 호운의 입을 해방하였다. 그리고 몸을 부르르 떠는 황제에게 맞추듯 호운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여운에 취한 황제는 호운이 떠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였다. 쿨럭! 그러나 호운의 입에서 기침이 터져 나오자 황제는 쾌감에 절로 감겼던 눈을 떴다. 그리고 눈앞의 광경에 경악했다. 호운이 피를 토하기 시작한 것이다. 쿨럭거리며 연신 타액 섞인 피를 토해낸 호운은 곧 힘없이 축 늘어졌다. 순식간에 호운이 토한 피로 물든 침상을 보다 황제가 대경해 소리를 질렀다. "어의를 불러라 어서! 어서!" 황제의 재촉에 내관들이 급히 달려나갔다. 그들 또한 방금까지 황제가 안고 있던 남자가 잘못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호운은 꼬박 하루가 넘도록 혼절해 있었다. 의원들은 궤양이 악화되어 피를 토한 것이니 심려하지 말라 고하였지만 황제는 그 일을 쉽게 넘길 수 없었다. 어찌 호운이 피를 토했는데 그것을 심려하지 않을 것이 되는가. 그 좋다는 약재를 모두 먹이는데 어째서 호운이 피를 토하는 것인지 황제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어 저것이 저러냐는 말이다!" 황제의 살벌한 기색에 의원들은 차마 무어라 말을 하지 못했다. 그들이 호운의 상태를 보니 어찌해 병이 생겼는지는 확연했건만 황제만 외면하고 있었다. 이는 의원이 아니라도 충분히 알 문제였고 궁내의 사람들이라면 모두 알 일이었으나 오직 그만이 외면하고 있으니 무슨 말을 하랴. 결국 의원들은 신경질을 내는 황제의 성화에 얼른 위를 보하고 피를 토하지 않을 약을 지어 바쳤다. 그들에게는 그것 밖에 방법이 없었다. 황제는 호운이 알고 싶어졌다. 호운이 왜 저리 행동하는지, 뭘 해주면 좋아할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호운은 입을 다물어버렸고 묻는다고 대답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결국 황제는 호운이 도성에서 함께하였던 진성왕의 왕부에 머물렀던 하인과 여인들을 불러들였다. 그러나 그들이라고 딱히 호운에 대해 아는 것은 없는지라, 결국 황제는 다시 화성으로 조사관을 파견해 호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조사하라 일렀다. 들어봐야 화가 날 일들 뿐이겠지만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게 되면 조금은 그를 파악할 수 있을까 해서였다. 화성에 조사관들을 파견한지 한달 만에 황제는 그들이 보낸 결과물들을 받았다. 그런데 그 결과, 황제의 서탁 위에 쌓인 것들은 황제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가득 채운 기록들이었다. 분명 1년 전에 조사하였을 때는 호운이 화성에서 몸을 팔던 자이고 화성에서 이름난 남창이었다고 쓰여 있었다. 그러나 불과 1년 만에 조사 결과는 손바닥을 뒤집은 듯 뒤바뀌어 호운이 참으로 처지가 딱한 사람으로 묘사가 되어 있었다. 황제는 이 차이에 알 수 없는 불안을 느껴 먼저 화성으로 보냈던 조사관들과 새로이 화성으로 보낸 조사관들을 대전으로 불러 대조하였다. 나란히 선 여섯 사내들을 보며 황제는 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내 오늘 너희들을 불러들인 까닭은 똑같은 명을 받은 너희들이 상반된 말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희 중 어느 한쪽은 거짓을 고하고 있다는 증거일터. 그러니 너희는 너희가 거짓을 고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여야 한다." "황상, 저는 거짓을 고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고개를 조아리며 그리 고한 사내는 이번에 서남에서 돌아온 자의 우두머리였다. 그 사내가 그리 외치자 반사적으로 맞은편에 서 있던 1년 전에 서남으로 다녀왔던 사내도 얼른 고개를 숙였다. "황상, 저 또한 거짓을 고하지 않았습니다!" "그것 참 이상하구나. 서로 거짓을 고하지 않았다는데 어찌 이리 다른 결과가 나왔단 말이냐." "황상, 저는 제 말이 진실임을 증명할 증인들도 데려 올 수 있습니다." "하. 그렇다면 너는 어떠냐? 너도 그러하냐?" 최근 서남에서 돌아온 자가 그리 고하자 황제는 맞은 편에 선 사내에게 물었다. 1년 전 서남에서 조사를 마쳤던 사내는 그런 황제의 말에 눈에 띄게 당황하더니 시선을 피하며 주춤거렸다. "저, 저 또한 증인을 데려올 수 있습니다." 그 미심쩍은 태도에 황제가 눈썹을 찡그렸다."네가 작성한 조사서의 모든 증인을 데려올 수 있단 말이냐?"그 물음에 사내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입을 다물고 대답을 못하는 사내를 보며 황제가 옥좌를 내려쳤다. "답이 나왔군." 너무나 쉬운 결론에 황제는 어이없는 얼굴로 웃었다. 황제는 먼저 조사결과를 올렸던 세 사람을 하옥시키고 어찌 그런 조사서를 올렸는지를 추궁하였다. 처음에는 자신들은 결백하다며 주장하던 사내들은 고문이 더해지자 마침내 모든 것을 포기한듯 사정을 실토했다.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황제는 허탈해졌다. 1년 사이에 조사결과가 그리 바뀐 이유는 단 하나였다. 1년 전에는 옥씨일가가 아직 득세를 하던 때이지만 지금은 그들이 없다. 단지 그 탓이었다. 조사관들은 옥명천에게 모두 뇌물을 받고 황제가 호운을 내치게 하기 위해 애를 썼다. 진성왕에게 희망을 걸 수 없다는 것을 안 옥명천은 오왕비 옥씨를 밀어 올려 옥씨일족을 득세하게 하려 했는데,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는 호운이 방해였기에 그를 제거하려 했을 것이다. 그 조사서가 만들어진 경위를 알게 된 황제는 말을 잃었다. "네놈들이 서남에 가기는 하였느냐?" 황제의 물음에 사내들은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였다. 황제는 뻔히 눈을 뜨고 기만당한 자신의 어리석음에 기가 막혔다. 세 조사관을 벌한 황제는 새로 화성으로 파견되었던 자를 다시 화성으로 보내었고 동시에 전국으로 조사관을 파견하였다. 그리고 혹시 호운을 아는 자가 없는지 수소문 하도록 하였다. 그러면서 황제는 혹시 전과 같은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조사관들을 감시할 자들 또한 파견하였으니 호운 한 사람을 조사하기 위해 전국에 백여명의 사람들이 풀리게 되었다. 몽롱하게 부유하던 의식을 부여잡고 호운은 눈을 떴다. 멀리 새처럼 지저귀는 궁녀들의 목소리에 호운은 오늘이 원단(元旦)임을 알았지만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참으로 시간이라는 것은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절로 흐르는 것이었다. 힘겹게 눈꺼풀을 밀어올려 천정을 올려보다 감기를 반복한 호운은 긴 한숨을 쉬었다. 숨을 쉬기가 점차 힘겨워지고 몸에 기력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이렇듯 날이 갈수록 쇠약해지는 자신의 몸에 대해 기대하였다. 그라고, 자신이 죽으려 할 때 마다 목숨을 잃는 이들이 가슴 아프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은 원래 자신을 먼저 생각하게 되어 있다. 자신이 이렇게 아픈데, 살고 싶지 않은데 타인의 목숨을 위해 제 한목숨을 연명하고 싶지 않았다. 호운의 삶은 단 한번도 자신을 위해서 이어졌던 적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누군가에게 의미를 찾았고 누군가에게 기대기를, 혹은 기대어지는 버팀목이 되길 바라며 살아왔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본인을 확인하는 것이 인간이라지만, 어미에게 방치되어 애정에 굶주렸던 호운은 자신을 필요로 해주는 이를 간절히 원하였다. 그렇기에 타인을 위해 그리 살았다. 아파도 견디고 언젠가는 사랑받으며 행복하게 그리 살 수 있으리라 헛된 기대를 가졌다. 그러나 그 기대가 모두 깨어진 지금 호운은 더는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생을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면 적어도 죽음 정도는 자신의 의지대로 하고 싶었다. 어쩌면 이것이 생에 최초로 호운이 자신을 위해 한 일이 될 것이다. 호운은 자신을 위해 죽음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황제 덕분에 그리 죽어갈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호운은 원망할 기력도 미워할 기력도 사라졌다. 그저 모든 것이 무의미해져 하루라도 빨리 이 지긋지긋한 삶이 끝났으면 하는 소망을 느낄 뿐이다. 호운은 점차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간절히 소망하였다. 죽음으로 찾아올 자유를 그리 간절히 소망하였다. 그리고 호운이 떠오르는 해를 보며 자유를 간절히 원하던 그 시각. 황제는 마침내 호운에 대한 조사가 끝났다는 보고와 함께 전국 각지에서 올려진 조사서를 받았다. 아무리 길에 채이도록 흔한 범부(凡夫)의 일생이라 하더라도 삼십년이 넘는 긴 기록이다 보니 내용이 참으로 방대하여 호운에 대한 조사는 황제의 탁자를 모두 채우고도 남음이 있었다. 황제는 서탁 위에 산처럼 쌓인 서류를 보고 몇 번이나 망설이다 이내 결심을 한 듯 자리를 잡고 읽기 시작하였다. 새로 파견한 조사관의 조사결과의 첫머리는 호운이 원래 어렸을 때부터 사내치고는 곱상한 외모라 수십년이 흐른 후에도 그가 많았기에 그에 대하여 조사하기가 수월하였다고 적었다. 그리고 서남 화성에서의 호운의 행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내용에 황제는 심장이 철렁 차가워졌다. 가장 먼저 쓰인 것은 호운이 태평왕의 사고로 아비를 잃었다는 것이었다. 호운의 아비가 마방에서 일을 했는데, 태평왕이 마차사고로 죽자 책임을 물어 목이 잘려 거리에서 효수되었다라고 쓰여있었다. 그 내용에 황제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호운과 자신의 인연이 스쳤음을 발견한 까닭이다. 승하한 선황이 짐작하였듯 태평왕을 죽인 것은 황제 자신이었다. 그런데 그 탓으로 호운이 아비를 잃었다니 시작부터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좋은 인연이었다면 웃으며 볼 수 있지만 기억조차 못할 첫 인연의 교차가 악연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얼굴이 굳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내용 또한 황제의 얼굴을 펴지는 못하였다. 조사서에는 그의 아비가 마방의 일꾼이었다는 것부터 시작해 그 후 호운과 그 어미가 관제묘에 지냈다고 쓰여있었다. 그리고 그 어미가 몸을 팔기 시작했다는 것이나 마을에서 창녀의 아들로 손가락질 받으며 자랐다는 것 까지 아주 상세히 쓰여 있었다. 거기에는 그 후 그가 어떤 취급을 받으며 살아 왔는지와 황궁 감옥에 투옥된 왕씨의 존재도 언급되어 있었다. 그리고 황제가 신경썼던 호운이 기루에서 몸을 팔았다는 것이나, 그 어미에 대한 것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내용은 이러했다. =이 일에 대하여서는 호운과 이웃에 살던 석씨가 아주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석씨는 호운이 화성에서 자취를 감추기 전날 기방에서 손님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 사실은 그 뿐만이 아니라 근방에는 사는 모두가 알 정도로 공공연한 이야기였는데, 연유가 사내인 호운이 금 서른 냥에 팔렸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손님을 받은 적 없는 몸이라지만 사내라 할 수 있는 열여섯의 호운이 그 가격에 팔렸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놀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음날 석씨가 그 집 마당이 소란스러워 보니 호운이 제 어미에게 이끌려 바닥에 패대기쳐지고 있더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오씨가 더럽고 천한 것이라 욕설을 퍼부어댔는데, 그 후에 집 밖에까지 쩌렁쩌렁 들린 오씨와 왕씨의 말다툼을 보면 호운이 제 의붓아비인 왕씨와 살을 섞어 오씨가 분개해 그를 내친 것이라 합니다. 오래전 일인데 그게 사실이냐, 확신하느냐고 거듭 물었지만 그는 확실하다며 날짜까지 말할 수 있다 대답하였습니다. 오히려 너무 자세한 대답을 하기에 저는 믿을 수 없어 몇 번이고 진실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대답하기를, 호운이 금 서른 냥에 팔린 것으로 저자가 북적거린 다음날 월왕의 반란이 일어나 화성이 쑥대밭이 되었기에 아주 똑똑히 기억한다 합니다.= 거기까지 읽은 황제는 눈을 감았다. 17년 전 월왕의 반란이 일어나기 전날 밤의 화성. 금 서른 냥. 그리고 손님을 받은 적 없는 사내아이. 하나하나 떼어놓고 보면 별것 아니지만 연속해 붙여놓으니 기시감이 느껴지는 단어들이다. 17년 전 자신 또한 화성에 있었다. 그리고 한 사내아이를 안았다. 그때 그 사내아이를 얼마에 샀었는지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금 서른냥. 뒷말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황제는 불길한 예감에 이어지는 내용을 읽었다. 그러나 그 보고는 다음날 호운의 어미가 시체로 발견되었고 호운은 화성에서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황제는 서둘러 다음 보고를 읽었다. 드문드문 짧은 보고들은 호운이 천하를 유랑하며 스친 곳의 기록들이었다. 농가에 의탁해 일을 도와주었다거나, 한때 마방의 일을 하였다거나 하는 소소한 기록들이 호운의 발자취를 따라 이어지다 다시 긴 보고서로 이어졌으니 이는 황제 또한 아는 일을 기록한 것이었다. 대완평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것이다. 자신 또한 연관된 일임에도 황제는 그것을 전혀 낯선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대완평에서의 일은 당시 곡마단에 있었던 아이들의 증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이들은 당시의 일을 그저 무서웠다. 두려웠다 따위로 표현하였지만 그들이 느낀 당시의 감상이 호운과 크게 다를 것 같지가 않았다. 그때 호운이 어떠했던가. 황제는 떠올리려 애를 썼지만 잘 기억나지가 않았다. 두려워하였던가, 울었던가. 아무것도 기억나는 것은 없고 남은 것은 그저 황제 자신이 만족했다는 사실 뿐이었다. 황제는 고개를 저으며 서둘러 다음으로 향하였다. 다음 호운의 기록은 한동안 없다 소주에서의 기록으로 나타났다. 기록을 읽은 황제는 작게 신음을 흘렸다. 기록에는 호운이 주가의 딸 진씨와 혼인하였다는 것이 쓰여 있었다. 황제는 이제야 호운이 말한 아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바로 이 여인을 뜻함일 것이다. 조사서에는 호운과 진씨가 매우 금슬이 좋았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두 부부의 모습이 무척 화목하여 한쌍의 원앙같았는데, 어느날 돌연 호운이 자취를 감추어 진씨가 소주 전체를 헤집으며 제 남편을 찾아 헤맸다는 것이 쓰여 있었다. 황제는 어렴풋이 그날의 호운을 기억했다. 아내가 있다며 애원하던 그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과연 호운은 그날 일을 어찌 기억했을까. 그리고, 어째서 소주에서 달아난 것일까. '나 때문인가?' 그것 말고는 답이 없었다. 실상 그 외에도 이유가 있었지만 황제의 눈에 보이는 증거는 그것이 사실임을 시사하고 있었고, 황제의 영향이 아주 없지도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소주의 조사는 어째서인지 남편을 찾아 헤매던 진씨가 참혹하게 살해되었다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황제는 진씨가 어이 살해되었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거기에 관심을 가지기 보다 다음의 서류로 손길을 돌리기에 바빴다. 그리고 다시 호운의 행적은 길게 끊겼다가 2년 뒤 남쪽에서 발견되었다. 그때는 이미 호운은 어린 남매를 데리고 있었는데, 외모도 볼만하고 금의 솜씨도 뛰어나 한동안 부잣집을 전전하며 금을 뜯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쓰여 있었다. 데리고 있는 남매와의 우애가 너무 좋아 그들을 본 사람들은 백이면 백 그들이 한동기간인줄 알았는데 성씨가 제각각인 것을 알고 놀라곤 하였다는 이야기도 쓰여 있었다. 그리고 드문드문 이어지던 정보는 도성으로 이어졌다. 도성에 도착한 후에도 호운이 두 남매를 이끌고 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 까지 본 황제는 그 후는 볼 필요도 없다는 듯 조사서를 거칠게 밀쳤다. 수천장의 종이들이 허공으로 뿔뿔이 흩어졌다가 힘없이 날려 바닥을 뒹굴었다. 담담히 기술된 한 사람의 인생이 뿔뿔이 흩어진 모습에 황제는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었다. 이제야 겨우 호운이라는 자가 보였다. 눈앞에 두고도 보이지 않던 것이, 이 하얀 종이위의 검은 문자들을 보고 나니 겨우 보였다. 황제는 호운이 다른 사내들의 품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 것에 대한 기쁨보다 그 내용이 시사 하는 바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호운은 황제와 마주칠 때마다 어디론가 떠나야했다. 쫓기듯 떠나기도 하고, 제 발로 떠나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기도 하고 괴로워도 하고, 슬퍼도 하며 그리 떠나야 했다. 황제는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가 호운이라는 존재에 미쳤을 영향을 생각해 보았다. 그의 아비도. 그의 어미도. 그의 유년도. 그리고 그 후의 그의 인생도. 모두 황제가 짓밟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한번은 우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번, 세 번이 되면 우연이 아니다. 황제와 호운 사이에 얽힌 것은 분명 인연이었다. 그것도 지독한 악연이다. 호운이 이 일을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그의 아비의 일은 모를 것이다. 그러나 그 외의 것들은 백치가 아니고서는 모를 리가 없었다. 그의 아내의 일은 황제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이마저도 황제라는 존재가 그 앞에 나타났을 때 벌어진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가 마지막으로 정을 붙인 남매들은 어이되었던가. 정신을 차려보니 황제의 전신은 어느새 덜덜 떨리고 있었다. 여태는 까닭 없다 여기던 호운의 증오가 또렷한 증거를 가지고 황제의 눈앞에 들이밀어어지니 눈앞이 아찔해졌다. 이제 알았다. 호운이 그리 울면서 죽이라 애원하던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그러나 알았다고 해서 뭘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눈을 감아도 눈앞에 호운의 증오가 뱅글뱅글 돌았다. 그러나 곧 증오는 허탈함으로 변질되었고 아무것도 없는 무감한 눈동자가 황제를 향하여 외쳤다. 내가 죽고 싶어 하는 것은 모두 황제 너 때문이다! 너만 없었으면 이리 되지 않았을 것이다! 호운의 눈동자가 그리 외치는 환청을 들어 황제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당장 호운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에게 묻고 싶었다. 왜 입을 다물고 있었더냐, 너는 모두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냐. 바삐 정궁으로 달려들어간 황제의 뒤를 시종들이 바삐 쫓아왔지만 황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정궁 안 호안의 방까지 내달린 황제는 숨을 몰아쉬며 호운을 보았다. 호운은 의자에 결박당한 채 한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황제가 방 안으로 들어왔음에도 그를 향해 시선한번 주지 않았다. 한동안 황제가 멀리하여 얼굴은 말짱하였지만 피골이 상접한 그 모습이 어이 멀쩡하다 할 수 있는가. 황제는 그런 호운의 얼굴을 차근차근 보았다. 그러나 도무지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17년 전 황제가 그를 보았다 하였는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17년 전 그날 황제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고작 그날 품었던 아이가 그럭저럭 마음에 들었다는 것. 그것 뿐이었다. 어찌 그런 의미 없는 존재에 눈앞의 사내를 거듭하랴 싶었지만 황제는 확인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네가…." 숨을 몰아쉬며 황제는 겨우겨우 그리 말하였다. "네 아비가, 화성 마방에서 일하다가…태평왕의 일로 목숨을 잃었느냐." 겨우 그리 말한 황제의 목소리에 호운의 시선이 천천히 황제에게 향하였다. 그 말간 시선이 물었다. 왜 그런 것을 묻느냐고. 시선은 부정하지 않았고 황제의 입매가 부르르 떨렸다. "네가…네가 기루에서 받았다는 손님이… 나였더냐. 금 서른냥에 받은 손님이, 나였던게냐. 그래서 네가 네 어미에게 그리…." 더듬더듬 잇는 황제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음에도 호운의 시선은 다시 모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부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황제는 더욱 더 외치고 싶었다. 묻고 싶었다. 그러나 거기까지만 확인한 그는 현기증이 일어 그 자리에 서 있기도 힘들었다. "황상!" 황제가 비틀거리자 내관들이 얼른 그를 부축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이내 그들의 손을 뿌리치고 호운을 보았다. 호운은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 한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황제는 그 모습을 보다 그 방을 도망치듯 벗어났다. 그리고 도망치듯 방을 벗어난 후에야 자신의 지금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난생 처음으로 전신이 후들후들 떨릴 정도로 두려웠다. 그 무심한 시선에 이유가 덧붙여지자 심장을 찌르는 듯 아팠다. 이 아픔이 어이해서인지도 모른 채, 그는 처음으로 느낀 두려움에 휩싸였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황제는 바닥을 물들이듯 흩어진 종이의 바다를 바라보다 이윽고 그 안에 침몰하듯 무너져 내렸다. 전신이 덜덜 떨렸다. 알 수 없는 한기로 오한이 들었다. 소름이 끼치고 두려웠다. 되돌릴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모든 것을 되돌리고 싶었다. 처음부터 다 제자리로 가져다 놓을 수 있도록 그리 하고 싶었다. 그러나 물은 아래로만 흐르듯 한번 흘러간 시간을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였고, 그를 둘러싼 서류들은 사실을 황제에게 강요하였다. 황제는 비명을 지르며 주먹으로 바닥을 내려쳤다. "아아아악!" 방문 앞에 서 있던 내관이며 병사들이 눈치를 살폈지만 근래 황제의 흉포한 태도에 기가 질린 것인지 누구하나 황제에게 나서서 말을 걸지 못하였다. 그 사이 몇 번이나 바닥을 내려친 황제의 주먹에서 피가 터져 하얀 종이위에 점점이 흩어졌다. 그러나 고작 몇방울의 피는 종이위의 모든 것을 덮지 못하였고, 오히려 흉하게 일그러진 채 황제에게 사실을 고해바쳤다. 일그러진 얼굴로 튄 핏방울을 바라보던 황제가 돌연 실성한 것처럼 웃기 시작했다. "으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광기어린 황제의 웃음소리는 밤이 깊도록 이어졌다. 그 후 황제는 연 이틀 동안 자신의 방에서 두문불출 하였다. 당연히 조례 또한 불참하였다. 이에 일부 대신들은 불만의 소리를 토해냈지만, 요즘 황궁안의 흉흉한 일들을 아는 이들은 입을 다물었다. 한때는 그저 진한의 번왕에 불과했던 자라 하더라도 지금은 그는 황제였고 모든 정적이 제거된 이상 그를 위협할 자는 없었다. 더군다나 진한의 가장 큰 세력인 옥씨일족까지 황제의 손에 걸려 모조리 목이 달아난 것을 생각하면 감히 황제의 행동에 제지를 할 만한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 동안 황제는 실성한 사람처럼 바닥을 덮은 종이들을 헤집으며 계속해 안으로, 안으로 침잠하였다. 그러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호운의 눈물과 원망만이 맴돌았다. 그렇게 나흘이 흘렀다. 피가 터지도록 주먹으로 바닥을 내려치던 황제가 침수조차 들지 않고 곡기를 끊자 궁 안에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드디어 황제가 실성을 하였다며 속삭이는 자들 또한 하나둘 생겨났다. 그러나 그 소문이 본격적으로 돌기 전에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가장 먼저 왕씨를 가둔 감옥으로 향했다. 일년이 넘도록 감옥에 갇혀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왕씨는 겨우 나타난 황제를 보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는 황제가 자신을 오해해 이런 것이라고 철석 같이 믿고 있었다. "황상, 저는 억울합니다! 황상!" 황제는 억울하다고 소리를 지르는 왕씨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 병사들에게 턱짓을 했다. 그러자 병사들이 갇혀있던 왕씨를 옥에서 끌어내었다. 왕씨는 황제가 저를 풀어주려나 보다 하며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황제는 왕씨의 앞으로 한걸음 한걸음 다가왔다. "무엇이 그리 억울하다는 것이냐?" "황상, 저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 황상!" "잘못을 하지 않았다?" 비웃는 듯한 황제의 어조에 왕씨는 불길함을 느꼈다. 1년만에 본 황제의 얼굴은 전보다 쌀쌀한데다 냉기가 감돌았다. 왕씨는 혹시, 호운이 어떤 간교한 말로 황제를 홀린것이 아닐까 염려하였다. "황상 아직 그 사악한 것에 속고 계십니까, 저는 결백합니다 황상! 저는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왕씨의 외침에 황제는 코웃음치며 말했다. "그럼 호씨의 어미 오씨는 어이 된 것이냐." 황제의 말에 왕씨가 힘겹게 입을 뻐끔거렸다. 황제의 말을 듣고서야 왕씨는 이제는 까마득한 과거로 잊었던 것을 떠올리고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혹시나 황제를 조사한 것일까. 조사하여 그 여인네를 죽인 것을 알아챈 것일까. 불안해진 왕씨가 입을 열었다. "혹시…그 일 때문이십니까." 추궁하기도 전에 제가 먼저 입을 여는 왕씨를 보며 황제는 낮게 웃었다. 그런 황제의 반응에 왕씨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는 이미 황제가 이미 제가 저지른 죄를 알아챘다고 착각했다. "황상, 그것은 제 잘못이 아닙니다! 그 여자가 제게 갑자기 덤벼들어서…!" "먼저 덤벼들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황상! 이미 아시겠지만 호운 그놈이 남자를 홀리는 요물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유횩에 넘어가자 그 어미가 질투에 미쳐 저를 죽이려 한 겁니다. 그러니 그것은 그놈의 탓입니다 황상! 제 잘못이 아닙니다, 저는 억울합니다 황상!" 힘없는 여인의 목을 부러트려 죽이고도 왕씨는 죄책감이라고는 없었다. 이미 왕씨에게는 까마득한 과거가 그리 기억되고 있었고, 그것은 그가 생각하기에는 한없이 진실에 가까웠다. "그 아들이 너를 유혹하였다 하였느냐? 그래서, 그를 안았다고?" 그러나 황제의 관심은 거기에 있지 않았다. 황제의 물음에 왕씨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황상! 말씀드렸듯이 그놈은 본시 타고나기를 천하게 타고나 남자라면 아주 좋아 죽는 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년이 제가 그놈에게 홀린 것을 알고는 길길이 날뛰며…." 격하게 말을 잇던 왕씨에게 황제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 그자를 안았단 말이냐?" "그야 그놈이 애원해서 할 수 없이…." 우물거리며 대답하는 왕씨를 보며 황제가 미소 지었다. 이제는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여전히 화사한 미소였다. 그 미소에 왕씨는 일순간 넋을 잃었다. 너무나 황홀한 미소였기에 미소를 지은 채 황제가 벽에 걸려있던 쇠고리를 꺼내는 것 조차 왕씨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런 멍함은 자신의 허벅지를 황제가 꺼낸 쇠고리에 꿰뚫린 순간 사라지고 말았다. "아아아악!!" 왕씨가 비명을 질렀지만 황제는 더욱 쇠고리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연이어 다른 한쪽의 다리와 양 팔에도 쇠고리를 박아 넣었다.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던 왕씨가 일순 고개를 떨구었다. 지나친 고통에 혼절한 것이다. 황제는 그런 왕씨에게 손수 물을 뿌렸다. 그리고 정신을 못 차리는 왕씨의 뺨을 쳤다. 철썩! "눈을 떠라." 눈을 뜬 왕씨는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황제를 보았다. 그의 눈은 공포 흐려져 있었다. 황제는 천천히 왕씨에게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이 입술이, 그에게 닿았느냐?" "이 손가락이 그에게 닿았겠지?" "이 눈은 그를 보았을 테고." "이 코는 그의 냄새를 맡았을 테지." 마치 하나하나 그 위치를 확인하듯 어루만지던 황제는 이번에는 벽에 걸린 단도를 뽑아냈다. 왕씨는 겁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마침내 단도가 왕씨의 얼굴에 박힌 순간 돌벽에 왕씨의 찢어지는 비명이 섬뜩하게 메아리쳤다. 그러나 황제의 손길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곧 황제의 손에 의해 왕씨의 입술이 도려내지고, 혀가 베이고, 손가락이 잘리고, 눈이 파이고 코가 베였다. 왕씨는 전신에 피칠갑을 하고도 죽지를 못해 꺽꺽,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그렇게 왕씨의 몸을 차례 차례 난도질한 황제는 마지막에는 고통에 발기한 왕씨의 양물마저 싹독 베어냈다. 그 순간 왕씨의 짐승같은 울부짖음이 돌벽에 메아리쳤지만, 이내 그 비명은 꺽꺽거리는 작은 신음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숨소리조차 잦아들어 황제는 왕씨가 절명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황제는 그 후에도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아직 제 형상이 남은 왕씨의 양 귀를 잘라내고 얼굴에 수없이 단도를 찔러댔다. 그리고는 잘라낸 왕씨의 혀를 만두를 만드는 고기를 다지듯 난도질 하였다. 그 다음에는 잘라난 성기의 차례였다. 그런 황제의 모습은 제정신을 잃은 듯하여 주변을 둘러싼 병사들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황제는 왕씨의 성기를 형태를 알아볼 길이 없을 정도로 토막 낸 후에야 칼질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도려낸 왕씨의 눈알을 신발로 짓밟은 후 바닥에 흥건하게 고인 피를 밟으며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저것을 도성 밖에 내다 버려라. 묻지 말고 들에 그대로 버려 들짐승에게 주어라." 참담한 명령이었지만 병사들은 황제의 명에 토를 달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왕씨의 피로 전신을 더럽힌 황제가 대전을 거니는 모습에 시종들은 누구도 말을 붙이지 못했다. 황제는 자신을 보고 분분히 고개를 숙이는 시종들을 스쳐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황제가 다니는 길마다 그의 몸이며 옷자락에 묻은 피가 뚝뚝 떨어져 섬뜩한 궤적을 남겼다. 마침내 집무실로 들어선 황제는 안이 엉망이 되는데도 아랑곳 않고 탁자위며 바닥에 흩날린 종이뭉치들을 끌어 모아 그대로 대전 밖으로 나아가 바닥에 팽개치고는, 자신이 걸친 옷을 그 자리에서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황상!" "폐하!" 깜짝놀란 시종들이 그를 말리려 했지만 워낙에 흉흉한 기세에 밀려 누구하나 그의 곁으로 접근하는 이가 없었다. 황제는 피에 젖은 옷을 모두 벗어던져 속바지 한 장만 몸에 걸친 나체의 몸으로 큰 소리로 명했다. "기름을 가져와라!" 시종들이 눈치를 살피며 재빨리 기름통을 가져오자 황제는 제가 벗어던진 옷에 기름을 손수 끼얹었다. 기름통 하나를 통째로 비워낸 황제는 대전 앞에 있던 향로를 그대로 엎어버렸다. 향로의 미약한 불씨가 기름을 만나 순식간에 큰 불로 변해 옷과 서책이 삽시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대전 안에 매캐한 연기가 가득차고 시종들은 입을 막고 컥컥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황제만은 꼿꼿이 선 채 불길 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침내 한참동안 불타오르던 불길이 사그라들고 자리에 남은 것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불탄 잔해 뿐이었다. 황제는 그 잔해를 직접 헤집고는, 모두가 불탔다는 것을 확인 한 후에 큰 소리로 외쳤다. "이것들을 모아 북원 뜰에 묻어라! 그 위에 누름돌을 얹어 재 하나도 밖으로 나오는 일이 없어야 한다!" 황제의 지엄한 명에 시종들이 분분히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마치 생사대적을 노려보듯 그 재를 바라보다 그대로 등을 돌렸다. "황상, 옷을 입으셔야…!" 시종들이 당황해 그 뒤를 따라왔지만 황제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대전 밖으로 나섰다. 그때, 갑작스레 마른 하늘에서 천둥이 치기 시작하더니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후두득 거리는 빗소리가 쏴아, 묵직한 흐름으로 변하자 시종들이 너도나도 겉옷을 벗어 황제의 앞으로 달려가 그의 몸에 제 겉옷을 씌웠다. 그러나 황제는 그런 시종들을 뿌리치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세찬 빗속을 걷는 사이 황제의 몸에 엉겼던 피도, 검은 재도 천천히 씻겨 내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황제가 정궁(正宮)에 당도하였을 때 그의 몸 어디에도 피와 재의 흔적은 없었다. 남은 것은 그저 빗물의 냉기에 창백하게 질린 황제의 몸 뿐이었다. 정궁 앞을 지키던 병사들은 난데없이 반나체로 등장한 황제의 모습에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그런 병사들에게는 일언반구도 없이 그대로 정궁 안으로 들어섰다. 정궁 안은 희미한 호롱이 밝혀져 있었다. 그 안에 재갈이 물려진 채 의자에 결박당해 앉아있던 호운이 황제를 발견하고 고개를 돌렸다. 황제는 그 모습에 숨이 턱 막혔다. 이제 겨우 제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분명 호운은 살아 있었다. 살아 숨은 쉬고 있었지만, 먹는 것도 억지로 주리를 틀어 먹이지 않고 사지를 자유롭게 내버려두면 자꾸 죽으려 해 그 혀마저 자유롭게 내버려둘 수 없으니 이것이 어찌 산 사람의 모습이란 말인가. 그 모습에 속에서 다시 시커먼 것이 끓어올라 황제는 급하게 숨을 삼켰다. 분명 사태를 알았지만 마음은 어찌하지 못했다. 그저 바라만 봐도 욕정이 들끓고 숨이 막혔다. 없어지면 견디지 못할 것 같았고 제 손에 꼭 쥐고 놓고 싶지를 않았다. 이렇게 되고서도 안에서 들끓는 이 마음이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저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만 봐 준다면 정말 좋을 텐데. 그리고 저 손에 자신을 향한다면 정말 좋을 텐데. 그리고 저 입술이 자신을 향한다면 정말 좋을 텐데. 호운은 결코 그러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마음이 더욱 애달파졌다. 아팠다. 진심으로 아팠다. 그러나 이미 황제는 깨닫고 있었다. 모른척 하고 있었지만 이미 깨달고 있었다. 단지 욕정이라 믿었던 이것의 이름을 눈치 채 버렸다. 그 순간 황제는 절망하였다. 이름을 눈치 채 버리게 된 이상 이미 늦어버렸다. 차라리 모두 몰랐다면 좋았을 텐데, 이름을 알아버린 이상 그는 사지가 묶인 짐승처럼 운신조차 할 수 없었다. 분명 사지가 묶여있는 것은 호운인데도 옴짝달싹 할 수 없는 것은 오히려 황제 쪽이었다. 호운은 황제를 외면할 자유를 가지고 사지가 묶인 황제를 난자하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벼랑으로 밀어내며 황제의 목을 서서히 조여오고 있었다. 차라리 내 손으로 죽여 버릴까. 황제는 혼란 속에서 생각했다. 메말라 이제는 뼈만 남은 호운은 죽기만을 기다리는 사람과 하나 다르지 않았다. 그리 제 목숨을 제가 거둘 셈이라면 황제가 직접 죽여 버려도 될 일이 아닌가. 어차피 그는 머리칼하나까지 황제의 것이고, 황제는 죽어도 그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깨달음 이전에도 그러하였는데 이 깨달음 이후에는 오죽 그럴까. 죽일까 살릴 까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이 죽일까 호운 스스로가 죽을 까였다. 결론은 호운이 죽는다는 것이고, 굳이 선택한다면 황제는 제 손으로 호운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황제는 홀린 것처럼 호운의 앞으로 다가갔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뻗어 호운의 목을 감싸고 갑작스레 미친 듯 호운에게 달려들어 그의 목을 졸랐다. 덜컹! 호운이 결박되어있던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뒹굴고 호운의 몸도 따라 바닥을 뒹굴었다. 메말라 가느다랗게 변한 모가지가 황제의 손아귀 안을 헛돌았다. 황제는 그런 목을 부러트릴 듯 조이며 양손에 힘을 주었다. 앞으로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숨이 끊어질 것인데도 호운은 발버둥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황제의 태도가 기꺼운 것처럼 눈을 감은 채 상황을 감내하였다. 황제는 그런 호운의 얼굴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손바닥에 닿는 온기가 황제의 결심을 흐리게 하였다. 손바닥 아래 목줄기에선 여전히 약간하게나 맥동이 이어졌고 그 움직임이 황제의 손바닥을 두드렸다. 잔뜩 힘이 들어갔던 손아귀에 점차 힘이 빠지고 이내 황제는 힘없이 양손을 늘어트린 채 호운에게서 물러났다. 그러고서도 다시 호운의 목을 조르려 움찔거리는 손을 몇 번이나 들었다 놓았다 하던 황제는 이내 천천히 손을 내리고 고개를 저었다. 왕씨는 그리 잔인하게 난자해 죽일 수가 있었는데, 겨우 호운의 목을 조른 것 하나로 손끝이 차가워졌다. 눈앞이 어칠거리고 숨이 막혔다. 가차 없이 호운을 두들겨 팼던 것이 정말 까마득한 옛날 같았다. 황제는 왕씨를 난자하였다. 호운을 유린한 그를 탓하며, 그를 괴롭힌 왕씨를 벌하였다. 그러나 왕씨와 자신의 차이가 무엇이던가를 생각해보니 헛웃음밖에 흘러나오지 않았다. 호운에게는 그자나 저나 다 똑같은 사람이 아닌가. 도리어 왕씨보다 황제가 호운에게 더한 사람일 것이다. 더 밉고 미워서, 곁에서는 숨조차 쉬기 싫은 사람일 것이다. 황제는 매달리듯 호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호운의 시선은 황제를 향하지 않았고 그는 여전히 바닥에 쓰러진 채 일어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이미 황제의 앞에서 죽어버렸다. 황제는 웃었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문득 제 어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붕어(崩御)한 선황도 떠올랐다. 혈통이라는게 이래서 무서운지도 모른다. 제 아비를 그리 비웃었는데, 결국 저가 하는 일은 한 치 다르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황제는 수차례 심장이 멎는 듯한 경험을 하였다. 선황처럼 단번에 가슴이 무너져 내린 것이 아니라, 차츰차츰. 수천 개의 바늘로 찔러대듯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겨우 그 정도에 그러한데, 호운을 죽일 수 있을 리가 없다. 지난 나흘간 그는 수많은 생각을 하였다. 사죄라도 해 볼까 생각하였다. 그러나 호운이 어디 황제를 돌아보기라도 할까. 모른척 해 볼까도 생각하였다. 호운이 이대로 죽어도 그렇게 모른 척 할 수 있을까. 그러면 어이해야 하는가. 황제는 자신의 허리에 얌전히 자리한 단도를 뽑아들었다. 멀찍이 지켜보던 시종들이 경악하였지만 아무도 황제를 막으러 나서지 않았다. 황제는 여태껏 멍하니 늘어진 채 눈을 감은 호운을 보며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리 죽고 싶으냐." 호운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긴, 재갈이 물린 입으로 어이 대답을 할까. 황제는 호운의 입을 가린 재갈을 풀어 헤쳤다. 까슬하게 껍질이 일어난 입술이 드러나자 황제는 이상하게 목이 말라졌다. 거친 입술에 입맞추고 그 안을 헤집고 싶은 욕망이 본능처럼 일었다. 그러나 입맞춤을 한다고 뭐가 해결될까. 그 안으로 비집고 들어간다고 무엇이 해결될까. 황제는 손안에 쥔 단도에 힘을 주며 다시 물었다. "죽여주었으면 하느냐? 내가, 내가… 너를 죽여주었으면 하느냐." 황제의 물음에 호운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리고는 말간 눈동자로 황제를 보았는데, 그는 자유로워진 혀를 깨물 시도조차 하지 않고 황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방금 전 자신의 목을 조른 황제가 이제는 단도를 들고 있는데 기대를 하였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도 아니다. 그 눈빛에 서린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호운의 눈은 황제 너머의 먼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선은 황제에게 향해있으되, 그의 눈 안에 황제는 들어가지 못하였다. 황제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단도를 호운의 코앞까지 들이밀었다. "이 칼로, 네 가슴을 찔러주었으면 하느냐? 그때 네가 나를 찔렀듯이, 그리 가차 없이 찔러주었으면 하느냐? 아니면 네가 그랬듯이 목을 졸라줄까. 다시 목을 졸라서, 그렇게…!" 코앞으로 들이밀어진 단도에도 말에도 반응하지 않는 호운을 보며 황제는 이를 악물었다. "대답을 해라! 대답을 해! 뭐라고, 한마디라도 하란 말이다!" 황제는 호운의 멱살을 잡고 그를 닦달하였다. "죽여달라고 한마디만 해라, 그러면 죽여주마! 네가 원하는대로 해주겠다는데 왜 말을 않는 것이냐! 죽여달라고, 한마디만 하면 될것을! 단 한마디면 될것을!" 호운을 잡아 흔들던 황제는 결국 호운의 위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제발 한마디만 말해다오, 죽여달라고! 제발…제발 그리 말해다오!" 이제는 애원하는 황제를 보고도 호운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결국 황제는 비명처럼 외쳤다. "차라리 날 더러 죽으라고라도 하란 말이다!" 황제는 손안의 단도를 자신의 가슴에 대고 외쳤다. "차라리 죽으라고 말해라, 그러면 그리 해주마! 그것이라도 해 주마! 한마디만, 그러니까 한마디만…!" 필사적인 애원도 호운에게는 닿지 않았다. 진정 호운의 죽으라는 한마디면 황제는 죽어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호운은 황제가 무엇을 하든 관심이 없었다. 그가 자신을 죽이든, 혹은 그 스스로가 자살을 하든. 호운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생사마저 초탈한 호운에게 황제 따위가 무슨 상관이랴. 애원도 위협도 그 무엇도 받아들이지 않는 호운에게 무엇을 해야할까. 결국 방법은 하나 뿐이었다. 스스로 내린 결론에 황제는 맥이 탁 풀려버렸다. 비를 맞을 때는 추운지도 몰랐는데 등 뒤로 한기가 으슬으슬 몰려왔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호운의 숨은 꺼져만 갔다. 황제라는 독으로 인해 죽어가는 호운을 보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다. 쨍그랑!황제의 손에서 단도가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황제는 여지껏 꼼짝않고 누운 호운의 위에서 물러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마조마한 얼굴로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자들에게 명했다. "손발을… 풀어주어라." 황제의 명에 그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살폈다. 감히 황제의 명을 바로 시행하지 않는 것은, 여태 호운이 자해를 하느라 죽어 나간 시종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제의 말은 번복되지 않았고 결국 시종들은 눈치를 살피며 바닥에 쓰러진 호운을 일으켜 앉히고 사지를 풀어주었다. 마침내 호운이 자유를 되찾자 황제는 손짓으로 시종들을 뒤로 물렸다. 오랜만에 자유를 찾았건만 호운은 전혀 기뻐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하긴, 이제는 스스로 죽을 기력조차 없는 그가 무엇이라고 기뻐할까. 허공을 힘없이 맴돌던 호운의 눈이 천천히 황제를 향했다. 그 눈동자 안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원망도, 살의도 없는 죽어버린 시체처럼 무감한 눈동자에 황제의 심장이 다시 한번 내려앉았다. '아….' 황제는 내심 깊은 탄식을 흘렸다. 조롱의 대상이었던 아비를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어미의 말 한마디에 숨을 쉬었다 말았다 하던 그의 비루함이, 이제는 이해가 되었다. 아니 차라리 아비는 나았다. 어미는 제 손으로 제 목숨을 끊어버릴 정도로는 제정신이지 않았던가. 그러나 눈앞의 호운은 어떤가. "궁을 나가게 해 주마." 그 말은 의외로 쉽게 황제의 입술 사이로 튀어나왔다. 그 말에 먼저 반응한 것은 호운이 아니라 방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수많은 시종들이었다. 그러나 정작 호운 본인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진성왕의 아들도 데리고 나갈 수 있게 해 주마." 그 말에 호운이 처음으로 반응했다. 호운의 시선이 천천히 그를 향했다. 생기를 잃어 탁해졌던 눈동자에 희미한 빛이 돌아왔다. 그 빛은 이미 죽은 그 아이를 무슨 수로 데려가게 해 준단 말이냐고 황제에게 묻고 있었다. "그날 죽은 것은 그 아이가 아니었다. 또 다른 진성왕의 아이였다. 네가…네 동생 유란란이 낳은 아이가 아니었다.' 변명처럼 흘러나온 황제의 말에 호운은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시체처럼 굳어있던 호운의 표정이 처음으로 변하였다. 그는 황제가 고한 사실에도 놀랐지만, 처음으로 유란란의 이름을 제대로 부른 것에 놀라기도 하였다. "아이를 데리고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 하늘에 맹세코, 너와 아이를 쫓지 않으마." 호운의 얼굴에 서서히 감정이라는 것이 번져나갔다. 그러나 이는 자유를 얻은 기쁨도 황제가 말한 사실에 대한 의심도, 그리고 슬픔도 아니었다. 오랜시간 동안 감정을 드러내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굳어있던 호운의 얼굴에 번져가는 감정의 흐름을 황제는 필사적으로 바라보았다. 눈앞에서 서서히 살아있는 사람이 되어 숨쉬기 시작하는 호운을 보니 심장이 지끈거렸다. 하나씩 놓아가는 자신을 반(反)하듯 하나씩 얻어가는 그의 모습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황제는 그런 호운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 겨우겨우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이제… 다시는 네 인생에 분탕질 치고 끼어들지 않으마." 황제는 거기까지만 말 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미 그에게는 방금 전의 윽박을 지르던 기세가 모두 사라진 후다. 그저 고요한 황제의 얼굴을 보며 마침내 호운의 입이 열렸다. "왜…그러십니까." 오랜만에 말을 하여 그런지 목소리가 거슬거슬 하였다. 그러나 겨우 겨우 열린 입에서는 아이가 살아있는 것이 사실이냐 묻는 것도, 그리고 정말 아이를 살려줄 것이냐 묻는 것도 아닌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황제는 호운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오랜만에 듣는 호운의 목소리를 음미하듯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참 만에 눈을 뜨고 조용히 말했다. "내가 그리해야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황제의 조용한 말에 호운은 그의 진의를 찾듯 눈을 마주쳤다. 생각해보니, 이런식으로 온전히 눈을 마주친것도 처음 같았다. 한참동안 호운과 눈을 마주치고 있던 황제가 느릿하니 입을 열었다. "대신, 단 하나만 부탁하마." 말을 하는데 자꾸만 입속이 마르는 것 같아 황제는 몇 번이나 침을 삼켰다. "수년, 아니 십수년이 지나 혹시라도 우연히 짐을…다시 나를 만난다면. 그때는…." 황제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 말만은 이상하게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말했다. "아니, 아니다. 다시는…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꾸나. 서로 원래 마주친 적 없는 사람처럼 연을 끊자꾸나. 그러니 만약에, 먼 훗날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너 또한 나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그리 대해다오." 황제는 맥이 풀린 어조로 그리 말하고 고개를 숙였다. 몇 번이나 말을 끊으며 이어진 황제의 말이 끝나자 호운은 그의 진의를 살피듯 눈을 끔뻑거렸다. 너무나 갑작스러웠고 진의를 파악하기 힘든 말이었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호운을 죽일 듯 목을 조르던 자가 이렇듯 순순히 말하니, 호운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고요한 황제의 태도는 마치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을 증명하는 듯 해 호운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호운 안의 증오는 산불 후에 남은 불씨처럼 미미한 것이었다. 상대를 증오하는 마음이 지속되기에 호운은 너무나 지쳐있었다. 때문에 황제의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제안에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호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황제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분명 그의 입술은 굳게 닫혀있는데도 수없이 많은 말을 하는 것처럼 일렁거리는 눈으로 호운을 바라보던 황제는 끝내 말없이 돌아서 방을 나섰다. 알 수 없는 황제의 태도에 호운의 두 눈에는 그저 의아함만이 어렸다. 호운은 궁금한 것이 많았다. 갑작스러운 황제의 말에 굳어있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죽음만을 바라던 마음이 다시 삶을 떠올리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일에 그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었다. 의문과 남은 원망과, 억눌린 무언가가 속에서 정신없이 휘몰아쳤다. 허나 그의 입은 아교를 붙인 것 마냥 단단히 붙었다. 생각한 것은 한 마디도 입 밖으로 흘러나오지 못하였고 그저 황제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어쩌면 재갈에 막혀있는 사이 말하는 법을 잊은 것인지도 모른다. 호운은 황제가 이미 자취를 감춘 곳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입에서 나온 것은 그저 긴 한숨 뿐이었다. 호운의 방을 나서며 황제는 하지 못한 가슴속의 말을 수십 번 되풀이 하였다. 사실은 그런 말을 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염치도 없는 황제의 가슴은 다시 만난다면 나를 미워하지 말고 사랑해 달라고 수도 없이 외치고 있었다. 누구보다 뜨겁게, 나를 사랑해 달라 애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자존심이 남았는지, 차마 그 말만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아직 그 사내 앞에서 지킬 자존심이 있었던가를 생각한 황제는 허탈하게 웃었다. 사실은 그저 그 말을 듣고 호운이 얼굴을 찡그릴 것이 싫었을 뿐이다.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그를 보는 호운의 그 시선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다시 웃었다. 허탈하게 웃었다. 황제의 관을 벗어던지고 호사스러운 옷을 벗어던지고 호운의 앞에 서니 제가 참으로 작아지는 듯하였다. 사랑은커녕 한 톨의 온기조차 받지 못하는 제 처지가 참으로 비참했다. 다음날 황제는 약속대로 호운과 아이를 궁 밖으로 내보냈다. 반년 만에 아이를 본 호운은 조심조심 아이를 끌어안았다. 강보에 싸여 잠만 자던 반년 전과 달리 기어 다닐 정도로 자란 아이는 호운의 품안에 묵직하니 안겨들었다. 험한 취급을 받았으리라는 호운의 예상과 달리 아이는 살이 포동포동 오른 건강한 모습이었다. 호운은 아이를 안고도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처음에는 정말 아이가 살아있는지 반신반의 하였지만 품안에 안긴 아이는 유란란을 쏙 빼닮은 외모를 하고 있었다. 분명 그녀의 아이였다. 자신이 그녀의 아이를 잘못 볼 리 없다. 오랜 시간 곡기를 끊고 있어서 후들거리는 팔로도 호운은 아이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혹시 누군가 다시 빼앗아 갈지도 모른다는 불안보다, 아이를 다시 만났다는 데 드는 안도가 더 컸다. 황제는 여타의 말없이 시종들에게 호운과 아이를 마차에 실으라 명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황제는 호운의 곁으로 절대 다가가지 않았다. 마차의 문이 닫히고 마부가 자리에 오르고, 마침내 마차바퀴가 구르기 시작할 때까지 황제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호운과 아이를 실은 마차가 천천히 움직여 궁의 높다란 담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황제는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황제의 발길은 황궁의 망루로 향했다. 그는 망루의 꼭대기에 올라 멀어지는 마차의 모습을 보았다. 처음에는 그리 멀지 않던 마차가 차츰 멀어져 이윽고 완전히 모습을 감출 때 까지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제는 마차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 작게 헛웃음을 지었다. 마치 가슴을 비워내기 위해 숨을 내쉬듯 끝없이 헛웃음이 흘렀다. 허무함이 그의 가슴을 도려냈다. 그에게 남겨진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이 지독한 악연이 사라지려면 황제가 호운을 놓아야 했다. 스스로 이어진 연을 끊어야했다. 이제 앞으로 호운은 잘 살 것이다. 황제가 곁에 없으니 죽겠다 발악할 일도 없을 것이고,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그 성격처럼 누군가와 잘 섞여들어. 혹은 다시 누군가와 혼인을 해 살아갈 것이다. 다시는 그리 피를 흘리며 거꾸러지는 일이 없을 텐데도 왜 이리 가슴에 뻥하니 구멍이 뚫린 것 같을까. 황제는 이제는 마차가 모습을 감춘 대로를 멍하니 바라보다 망루를 내려왔다. 애끓던 감정은 모두 망루위에 버려둔 것처럼 망루를 내려온 황제의 낯은 무표정하여 마치 조각상처럼 생기가 없었다. 그 후 황제는 곧장 전국으로 파견하였던 조사관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모두 백아홉명의 사내가 궁으로 들었지만 제 발로 궁을 걸어 나간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황제는 호운을 곁에서 모신 내관들과 궁녀들의 혀를 잘라 모두 궁 밖으로 내쫓았다. 그리고 먼 발치에서나마 호운을 본 적이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그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지 못하도록 명하였다. 그 후에는 정궁을 폐쇄하고 두 번 다시 정궁 쪽으로는 발길도 하지 않았으니, 도성에 남은 호운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게 황제는 도성에서 눈에 보이는 호운의 존재를 완벽하게 지워내었다. 그러나 제 마음속에 틀어박힌 감정마저 지울 수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덜컹, 덜컹! 호운은 달리는 마차 안에서 아이를 보았다. 아직 어렸지만 아이는 진성왕보다는 유란란의 외모를 닮아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하니 귀여운 생김새였다. 그다지 정이 생길 시간을 함께하지도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아이를 보니 속에서 따스한 것이 차올랐다. 겨우 풀려났다는 안도나, 어쩌면 그가 번복하여 저를 쫓아올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이상하게도 들지 않았다. 그저 호운에게는 품안의 온기와 무게가 중요했다. 잃었다 생각하였던 온기가 이리 품안에서 무게감을 가지고 살아 숨 쉰다는 그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마치 모두 불타 없어진 삶의 희망이 아이의 숨소리와 함께 다시 깨어난 듯 싶었다. 호운은 옹알이를 하듯 입을 우물거리는 아이를 어르듯 품에 안은 후 창밖을 보았다. 마침 창밖의 풍경은 번잡하던 도성을 벗어나 삭막한 들판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꼭 3년 전 이맘 때 복치운, 유란란 남매와 함께 도성으로 왔다. 그때 본 풍경도 이런 것이었다. 그때는 별 감흥 없이 보았던 풍경이 이리 복잡한 느낌으로 보일수도 있구나. 호운은 제 가슴속을 어지럽히는 감정에 고개를 저었다. 황제는 원하는 곳으로 가라했다. 그러나 정작 마음대로 떠나라 하니 호운은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어디로 갈까요 묻는 마부에게 남쪽으로 가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자유롭게 떠날 수 있게 되자 그저 남쪽으로 가자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사실은 서쪽으로 가 복치운이나 융을 찾아야함이 마땅했지만, 서쪽으로 간다한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있는 확률은 희박했다. 무엇보다 복치운은 자신을 반길지 알 수 없는 요족의 영역으로 갔다. 어쩌면 자신이나 이 아이가 그의 걸림돌이 될지도 모른단 생각에 호운은 쉽사리 그것을 선택할 수 없었다. '필시 무사하다면 소식이 전해지겠지.' 그때 움직여도 늦지 않다. 호운은 그리 생각하기로 했다. 멍하니 창밖을 보던 호운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아이의 작은 손이 호운의 머리칼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아이는 호운이 저를 바라보자 까르르 웃었다. 그 순진한 웃음에 호운의 눈가에도 자연스레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아이의 이름을 부르려던 호운은, 곧 아이의 이름을 정할 틈이 없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우선은 네 이름부터 생각해보아야겠구나." 호운의 말에 아이는 다시 까르르 웃었다. 아이의 미소에 호운은 머릿속의 상념이 사라졌다. 호운은 웃었다. 마치 근심 없는 어린아이처럼 환히 웃었다. 震翰 玉羽四年 진한 옥우 사년 浩氏 三十五歲 호씨 35세 마침내 현종이 호씨를 벌하니 도성에 큰 비가 내렸다. 이 비로 인해 가뭄에 시달리던 도성의 사람들이 해갈(解渴)되었으니 흉사가 걷히고 처음 찾아온 흥복이다. 호씨가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큰 비가 내리기 전날 도성밖에 전신이 난자된 시신이 방치되고 병사들이 누구도 그 근처를 얼씬대지 못하게 하니 이가 호씨의 시체라 미루어 짐작될 뿐이다. 현종은 호씨를 조시해 만든 책자를 직접 불태우고 불길한 방위인 북방에 그 재를 묻어 재조차 날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더불어 호라는 성조차 입 밖으로 내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 이름이 불러오는 흉사를 현종이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알 수 있다. 호씨에 대해서 알려진 계기는 세종 17년 발견된 상소의 일부에서 언급된 내용으로 부터였다. 현종 2년에 제작된 것으로 짐작되는 상소는 현종의 장인인 옥명천이 올린 것으로, 진성왕의 총비 유씨의 오라비라는 자의 성이 호씨로, 유씨와 성이 다른 것이 수상하다며 올린 상소였다. 아울러 상소에는 원래 호씨라는 자는 유씨의 남편으로 그녀의 포주노릇을 하던 자라 고하는 내용이 있었으나 현종은 이 상소를 황실의 집안일을 감히 조정대신이 논 할수는 없다며 재고의 여지가 없다며 일소하였다. 그러나 이후 현종이 호씨를 궁으로 불러들인 것을 보면 현종이 호씨를 경계하게 되었음은 두말할 것이 없을 것이다. 이 상소를 시작으로 사관들이 당시의 사료들을 살펴보니 호라는 이름이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세종 21년 현종이 호씨를 조사하한 문서 일부가 발견되어 북방진한사(北方震翰史) 흉사부(凶事部)에 첨록(添錄)하나 그 내용의 흉험함에 북방진한사에서 탈락하였다. 세종 34년 사관 임영에 의해 호씨에 대해서만 따로 기록한 책을 만들어지니 이가 바로 호가지록이다. 처음에는 내용의 흉험함으로 제작조차 만류하였던 세종은 이 책으로 악행을 저지른 자의 말로를 알려 악행을 경계하기로 결정하고 호가지록의 배포를 윤허한다. 이로 인해 북장진한의 삼대흉사 중 하나로 손꼽히며 먼 훗날에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호씨의 존재가 후대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浩家之錄-終 호가지록 -종 浩家之錄-從 호가지록 -종 남자는 흐드러지게 핀 꽃을 올려 보고 미소를 지었다. 이제 눈가에 희미하게 주름이 생기기 시작한 남자는 사내치고는 부드러운 선을 가지고 있었는데, 눈가의 주름도 웃음주름이라 썩 보기 나쁘지 않았다. "아빠, 빨리 와!" 아이의 목소리에 남자는 산속에 피어있던 꽃에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는 자신이 모는 마차의 앞에서 쪼르르 뛰다 걷다 하는 아이를 웃으며 바라보았다. 세월이 참 빨랐다. 겨우 강보에서 꾸물거리며 기어 다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저리 폴짝폴짝 뛰어다니니 아이의 성장은 정말 눈 깜빡할 사이라는 말이 맞았다. "그렇게 뛰지 말고 이리 와 마차에 올라오렴. 그러다 내일은 걷지도 못하겠다." "아니야, 나 괜찮아! 아빠도 내려와, 응?" 아이는 귀엽게 짐마차를 모는 제 아비를 졸라댔다. 아이는 참으로 귀여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게 겨우 너 댓살 남짓이지만 또렷한 이목구비나 똘망똘망 동그란 눈과 윤기 있는 머리칼이 참으로 귀한 혈통같아 보였다. 아이의 아비인 사내도 사내 치고는 유려한 외모를 가졌지만 아이 만큼 고귀해 보이는 인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닮았다고도, 닮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는 부자였지만 애정만은 돈독해 보였다. 흐뭇하게 아이를 바라보던 남자는 아이가 갑자기 길가에 서자 놀라 외쳤다. "시운아, 그쪽은 위험하다! 구르면 어쩌려고!" 깜짝 놀라는 남자를 보고 아이는 까르르 웃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길 가장 자리로 폴짝폴짝 뛰었다. 위태로운 그 모습에 남자는 재차 아이를 불렀다. "시운아, 이리 오너라!" "에이 괜찮아, 아빠는 괜히…!" 남자를 향해 웃으며 말을 하던 아이가 한순간 다리를 삐긋 하더니 어어어! 소리를 내고 그대로 기슭을 구르기 시작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남자가 어이할 틈도 없이, 기슭을 구른 아이는 휜 나무에 부딪히고 튕겨져 그대로 계곡 사이를 흐르는 물줄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시운아!" 그것은 남자가 수년전에 보았던 광경을 떠올리게 하였다. 그때도 아이는 구르듯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나 튕겨지는 물보라는 그때와 달리 커다래서 남자는 재빨리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남자는 비명처럼 아이의 이름을 외치며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러는 동안 아이는 자꾸자꾸 물살에 떠밀려가 남자의 시야로부터 멀어졌다. 남자는 구르듯 기슭을 내려와 물길을 따라 달렸다. 아이는 몇 번인가 물 안으로 가라앉았다가 고개를 내밀기를 반복했다. 다급한 남자는 주변을 둘러보다 아이가 떠내려가는 방향 끝에 있는 낭떠러지를 발견하고 핼쓱 해졌다. 세차게 쏟아지는 물줄기의 모양으로 보아 폭포였다. "시운아!" 결국 남자는 앞뒤 보지 않고 그대로 물로 뛰어들었다. 폭포에 닿기 전에 아이를 건져내야한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세찬 수류에 휩쓸린 남자는 몇 번인가 허우적거리다 겨우 아이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남자의 손은 닿을 듯 닿지 않을 듯 아이의 주변만을 맴돌았고, 어느 순간 아이는 물 아래로 가라앉아 모습을 감췄다. 남자의 얼굴에 절망이 떠오른 그 순간, 풍덩!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몇사람인가의 사내가 물속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허우적거리는 남자를 잡아 기슭으로 잡아 끌었다. "노, 놓으십시오! 제 아들이 떠내려갔습니다!" 남자가 버둥버둥 소리를 질렀지만 그를 잡은 사내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남자는 안타까운 얼굴로 물줄기를 바라보았다. 그때, 물로 뛰어들었던 사내들이 아이를 안고 물 밖으로 나왔다. "시운아!" 남자는 구르듯 제 아이에게로 달려갔다. 물에서 건져진 아이의 낯빛이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남자가 아이에게 다가가는 사이 그를 건진 사내들이 아이의 가슴을 눌렀다. 몇 번인가 가슴을 누르자 아이가 쿠륵, 물을 토해냈다. 절망만 떠올라 있던 남자의 얼굴에 희망이 떠올랐다. 남자는 자꾸만 물을 게워내는 아이를 달려가 끌어안았다. 몇 번인가 물을 토해낸 아이의 눈이 가물가물 열리고 검은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에 남자는 아이를 꽉 끌어안았다. 아이는 물에 빠지면서 정신이 없어졌는지 그저 멍한 눈으로 남자를 보고 있었다. 남자는 그런 아이의 볼에 제 얼굴을 비비며 몇 번이나 하늘에 감사 인사를 했다. 그렇게 한참동안 아이의 볼을 비비던 사내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주변에 서 있는 사내들을 향해 감사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주인께서 명하신 일이니 감사는 되었소." 사내들의 말에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위를 보자 남자가 짐마차를 버려둔 곳 근처에 멈춰선 거대한 행렬이 보였다. 호화로운 마차나 그 마차 주변을 둘러싼 위사들의 모습을 보아 이만 저만한 집안의 행렬이 아닌 듯 보였다. 남자는 그 행렬의 가장 중심에 있는 호화로운 마차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큰 소리로 외쳤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남자가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자 그에 대답하듯 마차의 문이 열렸다. 설마 마차의 문이 열리리라 짐작하지 못한 남자는 마차의 문이 열리는 모습에 놀라다가, 그 안에서 나타난 사람의 모습에 두 눈을 크게 떴다. 마치 홀린 것처럼 마차에서 내린 자를 바라보는 남자를 향해 그의 주변에 서 있던 사내들이 서둘러 말했다. "고개를 숙이지 않고 무엇을 하는 것이냐, 황상이시다!" 그 말에 정신을 차린 남자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인 남자의 귀로 "황상 위험합니다!"라고 외치는 말이 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의 근처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귀에는 그 발자국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황제를 앞에 둔 공포 때문인지 남자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남자의 품에 안겨 비로소 정신을 차린 아이가 저를 안고 떨리는 남자의 손길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빠…?" 아이의 부름에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숙였다. 마침내 고개를 숙인 남자의 눈에 새카만 가죽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마 그가 마차에서 내린 황제일 것이다.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 말을 하는데도 남자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라." 황제의 명령에 남자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남자는 후들후들 떨리는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가장 먼저 가죽신에 이어 윤기가 흐르는 새카만 장포자락이 보였다. 이어 허벅지로 늘어진 긴 금수(錦繡)의 장신구와 옥이 박힌 피대(皮帶), 그리고 새카만 장포에 싸였어도 단단해 보이는 가슴팍이 보이고 목울대가, 턱이 보였다. 그러나 남자는 그 이상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 이상 고개를 드는 것은 거부하는 듯 부르르 떨던 남자는 시선을 내리깐 채 그저 감사 인사를 했다.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남자는 그저 이 시간이 빨리 끝났으면 하였다. 남자가 시선을 미묘하게 내리깐 채 감사 인사를 하는 사이, 갑자기 황제가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절로 황제의 얼굴이 남자의 시야 속으로 들어왔다. 주변에서 경악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 누구도 황제의 얼굴을 바라본 남자 만큼은 아니었다. 중년으로 보이는 황제는 분명 사내였지만 무척 아름다운 외모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 안에 숨은 강렬한 눈빛은 사람을 제압하는 압도적인 그 무엇이 있었다. 그 강렬한 눈빛으로 직시당한 남자는 숨이 막히는 듯하였다. "내 이름은 고광윤(告匡胤)이다.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갑자기 황제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자 주변에 서 있던 사내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뒤늦게 황제를 따라 기슭으로 내려온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황제라는 지위를 가진 이가 제 입으로 이름을 말하는 것은 전례가 없다시피 한 일이었다. 황제는 그저 황상이나 폐하로 불리는 존재이지, 누구에게 감히 이름을 불릴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이 직접 이름을 말하는 것은 상대에게 그같이 불리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남자는 멍하니 황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황제가 재차 물었다. "이름이 무어냐 묻지 않느냐." 남자는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호운(浩運)이라 합니다." 이제는 제 이름을 소개한 남자 호운이 고광윤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마치 홀린 듯 고광윤의 손이 호운으로 향했다. 그 순간 호운이 움찔 뒤로 몸을 빼자 그 손길은 호운에게 채 닿기 전에 멎었다. 잠시 동안 이상한 침묵이 감돌았다. 손을 멈춘 고광윤은 그 손을 더 뻗는 대신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너의 이름이 나와 인연이 깊은 듯하구나. 내 성씨에 물수를 붙이면 너의 성이 되는데 이것이 오늘 이 같은 인연을 뜻하는 듯 싶다. 해서 싫지 않다면 너와 아이를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고 싶다만…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어린아이처럼 치졸한 이야기였지만 황제의 위(位)에 있는 자가 하는 말이니 누구도 웃는 자가 없었다. 호운은 마치 제 눈치를 살피듯 머뭇거리는 고광윤의 말에 놀라 머뭇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이제 마흔이 넘음직한 황제였건만 제 눈앞의 호운의 눈치를 살피는 모양이 길을 잃은 어린아이와도 같아 패기가 하나도 없었다. 이에 호운의 마음이 흔들렸다. 거기에 마침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호운의 아들이 제 아비의 가슴팍을 잡으며 말했다. "아빠, 나 저런 마차 타 보고 싶어. 가자, 응?" 그러고 보니 호운도 소싯적에 저런 마차를 타는데 가슴이 두근거렸었다. 결국은 좋지 않은 기억이 되어버린 마차행이지만 시작 전에는 가슴이 쿵쾅거릴 정도로 흥분하지 않았었나. 호운은 잠시 망설이듯 자신의 앞의 고광윤을 보았다. 그의 호화로운 차림이나 아름다운 얼굴이 아닌 기슭의 물기에 지저분해진 그의 장포자락과 머뭇거리는 표정을 보았다. 사실 호운은 오래전에 이 사내를 본 적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여러 차례 본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오늘 본 그는 무척 낯설었다. 마치 생전 처음 본 사람처럼 낯설었다. 호운은 과연 눈앞의 이자가, 자신이 알던 그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를 만날 때 마다 벌어졌던 슬프고 흉악한 일이 오늘은 벌어지지 않아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오히려 오늘은 그를 만났기에 아들의 목숨을 구했다. 호운은 다시 한 번 고광윤의 얼굴을 보았다. 보면 볼수록 낯설었다. 마치 오늘 처음 본 사람처럼 낯설었다. 다만 그 낯선 얼굴에 어린 머뭇거림만이 호운에게는 익숙하였는데, 그 머뭇거림이 딱히 불길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무표정한 듯 하면서도 제 대답을 끈기 있게 기다리는 고광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호운이 한참의 머뭇거림 끝에 입을 열었다. "폐가 되지 않는다면…그리 하겠습니다." 호운이 그리 대답하자 고광윤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는 마치 호운의 대답을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환한 미소를 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가 된다면 내가 먼저 말을 하였겠느냐! 내가 그리하겠다는 것이니 너는 조금도 신경쓰지 말거라. 여봐라!" 고광윤은 아직 마차주변에 선 사람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이 부자가 갈아입을 옷을 대령하거라! 그리고 수건을 준비하고, 마차 안을 정리해라!" "예 황상!" 제 무릎이 더러워졌는지도 모른 채 호운과 그 아들을 모실 준비를 하라며 부산을 떠는 고광윤의 모습에 주변은 어리둥절해졌지만 호운은 제 아들을 꼭 부둥켜안은 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윽고 주변을 둘러싼 사내들의 도움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호운은 여전히 품에 아들을 안은 채 천천히 기슭을 올라갔다. "아빠, 혹시 황제 알아? 전에 봤어?" 아들은 어쩐지 미심쩍은 제 아비의 태도나 황제의 태도에 수상한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유난히 총명한 아이니 상황의 어색함은 금방 눈치 챘을 것이다. 그 물음에 호운은 기슭에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고광윤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움찔하며 시선을 먼저 피한 것은 고광윤 쪽이었다. 도리어 호운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를 가만히 보았다. 어느 샌가 세차게 떨리던 가슴이 고요해져있었다. 이 또한 무척 이상한 일이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호운은 오래전에 저와 비슷한 사내가 하였던 말을 떠올렸다. 지금 눈앞의 황제와 동일인물이라 단언할 수없는 그 사내는 호운에게 마지막으로 부탁을 하였다. 그 하나만을 간절하게 원하듯 말하였다. 그 남자가 알고 있을지 몰랐지만 그것은 그가 한 최초의 부탁이고 애원이었다. 들어주지 않으면 어찌하겠다는 협박도 없는 순수하던 그 부탁이 떠오르며 호운은 납득하고 말았다. 그 애원은 분명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이 눈앞의 사내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아빠?"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아들의 손길에 호운은 한참 만에 물음에 대답하였다. "아니, 처음 보는 사람이다." 그렇게 대답하는 호운의 어조는 자연스러웠고 분명 진실을 담고 있었다. [終] ==[사족에 가까운 내용이므로 이 뒤는 읽지 않으셔도 무방합니다.]== 賢宗 北方 震翰 宣諭 十六年 - 玉羽 三十三年 현종 북방 진한 선유 십육년 - 옥우 삼십삼년 북방진한 십육대 황제인 현종은 십오대 황제인 성종과 황후 옥씨의 삼남으로 아명은 소윤(昭胤), 이름은 광윤(匡胤)다. 현종은 소싯적부터 영특함이 남달라 문과 무에 능하며 서화에도 자질이 있는 성군으로 명망 높았다. 또한 현종은 외모마저 사람의 눈을 현혹할 정도로 빼어나 요족의 장수 서융이 그 용모를 칭송한 서신을 보낸 것이 기록에 남았을 정도였다. 현종의 대는 태평성대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천하가 평화로웠다. 치수사업에 힘을 써 농사는 언제나 풍년이었고 인신매매금지법 등의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제도들을 철패 해 백성들이 현종을 칭송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현종은 두 명의 귀비를 비롯하여 여섯 명의 후궁을 두었지만 황후는 없었다. 현종이 황후를 두지 않은 이유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하였지만 현종실록을 보면 그 이유가 뚜렷해지는데, 이는 바로 현종이 총애하였던 보령왕의 탓이다. 현종의 치세에 유일한 흠은 사내인 보령왕을 곁에 두고 총애하였다는 것인데, 보령왕의 문제는 현종의 생전에는 언급조차 되지 못하다가 현종이 승하한지 육십년이 지난 후에야 그 이름이 다시 언급될 수 있었다. 북방진한은 법으로 비역을 금하지 않았다. 더욱이 요족과의 첫 대전 이래, 패배한 요족의 인질로 도성에 도착한 요족의 인물 중에는 유난히 미동(美童)이 많았기에 현종의 조부인 옥제 때부터 도성에는 비역이 유행처럼 번졌다. 처음에는 한족에 비해 체구가 작은 요족의 미소년들을 곁에 두는 것으로 시작하였으나, 선종대에 이르러서는 용모가 빼어난 한족의 소년이나 청년들을 첩으로 들이는 것이 고관대작들 사이에서 유행하였다. 때문에 공공연하게 인신매매가 이루어졌고 가난한 농부들 중에는 제 자식이 용모가 빼어나면 관리들에게 자식을 바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렇게 비역은 북방진한의 문화로 자리 잡아 현종의 대에 이르러서는 조정의 고관대작들 중 남첩이 없는 자가 드물 정도였다. 그러나 조정의 우두머리이자 만인의 지상인 황제가 앞장서 비역을 하였다는 것은 결코 칭찬할만한 일이 아니었고, 이는 조정의 기강을 흩트리고 풍기를 문란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정대신들이 앞다퉈 용모가 아름다운 사내를 첩으로 들이니 인신매매가 활개를 쳤고 가난한 양민들이 제 자식을 색노로 파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현종이 훗날 재정한 인신매매 금지법과 양민의 노예화 금지법은 이러한 풍기문란을 바로잡기 위한 일환이었다. 현종의 조카손자가 되는 혜종이 황위에 올라 가장 먼저 한 일은 보령왕의 이름을 황실의 족보에서 지워버리고 그를 군(君)으로 강등시키는 것이었다. 해서 현재는 보령왕의 이름과 생년등을 알 길이 없이 현종실록과 명종실록의 기록에서만 그 명호를 찾을 수 있을 뿐이다. 보령왕의 정확한 출생은 알 길이 없으나 월왕의 아들로 추측되기에 요족의 피를 이었음이 짐작된다. 떄문에 조정대신들은 그를 경원하였다. 요족을 한족보다 낮게 보던 시선이 만연하던 시기라 요족의 피를 이은 보령왕은 조정대신들에게 백안시되어 처음에는 변변한 봉작조차 없었다. 헌데 현종은 까닭 없이 보령왕을 총애하여 진성왕의 아들인 운양군을 보령왕에게 맡겨 양육케 하였다. 이때까지만 하여도 현종의 춘추가 한창이라 조정대신들은 운양군을 보령왕에게 맡기는데 이견이 없었다. 더군다나 현종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기에 후사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 운양군은 태자의 후보로도 거론되지 않았다. 헌데 현종의 두 아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망하였다. 불혹이 넘은 나이에 후사가 없는 상황이 되자 현종은 죽은 진성왕의 아들 운양군을 태자로 책봉한다는 교지를 내린다. 이에 조정대신들은 맹렬하게 반발하였지만, 진성왕이 현종의 동복(同腹) 형제임을 생각하면 유일한 적통인 운양군에게 태자의 지위를 내리는 것이므로 매우 타당한 처사였다. 허나 조정대신들은 운양군이 요족과 연이 닿은 자에게 양육되었다는 이유로 그의 태자책봉을 맹렬하게 거부하였는데, 그 요족과 연이 닿은 자가 바로 훗날의 보령왕이다. 사실 그때까지만 하여도 보령왕은 실록에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던 인물이었다. 요족의 피를 이은 월왕의 아들인데다 그 어미조차 확실하지 않으니 황가의 적통이라 할 수도 없는 자였다. 때문에 군(君)이라는 칭호조차 받지 못하고 그저 월왕의 아들이라는 뜻의 월왕자로 불리웠던 자였는데 갑작스레 그에게 양육된 운양군을 태자로 책봉한다니 대신들이 이를 염려한 것은 당연하다. 허나 이 문제에 있어 현종은 매우 강경하였다. 그는 굳이 월왕자에게 왕의 이름을 내리며 그를 보령왕이라 칭하니 조정대신들이 한꺼번에 일어나 상소를 올렸다. 조정대신들은 현종이 보령왕의 간악함에 총기가 흐려졌다 하여 보령왕을 벌하고 원지로 유배할 것을 청하였으나 현종은 자신이 총애하는 보령왕을 말하는 이들에 분노하였다. 그리고 이로 인해 벌어진 것이 현종 말년에 있었던 가장 큰 옥사인 보령의 옥이다. 현종은 상소를 올린 조정대신들을 모조리 참하여 이후로 보령왕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가 하나 없도록 하였으니 적어도 현종이 세상을 뜰 때 까지는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는 이가 없었다. 현종의 시대가 중요한 것은 그가 북방 진한의 마지막 황제였기 때문이다. 현종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오른 명종은 요족의 피가 섞인 보령왕을 지극히 경애하여 그를 친아비처럼 따랐는데, 그 영향인지 명종에게는 북방진한의 한족에게 만연하던 선민의식(選民意識)이 없었다. 때문에 그는 오랑캐로 멸시되던 요족과 후무족을 백성으로 받아들이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진한의 영토는 두 배 이상 커지며 중원의 전체를 장악하게 되었다. 따라서 현종은 순수하게 한(翰)족만으로 구성되어 있던 진한의 시대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북방진한이라는 명칭은 한족만이 백성이던 시절을 뜻하는 용어로, 본래는 현종의 치세도 진한이라는 국명으로 불렸다. 그러나 명종이후의 진한과의 구분을 위하여 부득이하게 북방진한이라 명명함으로 그는 북방진한 최후의 황제로 기록되게 된다. 현종의 능은 자신의 봉토가 아닌 서북 월왕의 봉토에 있으며 황제답지 않은 검박한 규모로 지어졌다. 이곳이 현종의 능임을 알리는 비석도 최소한의 크기로 제작되었고, 비석에 남은 글귀도 황제를 뜻하는 칭호가 아닌 현종의 이름자 두자만이 새겨져 있다. 현종의 능은 원래 다른 무덤이 있던 자리에 지어졌는데, 길지(吉地)도 아니었음에도 명종은 현종의 능을 굳이 그 자리에 썼다. 이를 두고 후세의 사람들은 제 부친의 황위를 강탈한 현종에 대한 명종의 앙갚음이라 하기도 하였지만 명종의 부친 진성왕이 불사에 빠져 황위를 고사한 것을 생각하면 이는 낭설이 분명하다. ================================================================================== 즐겁게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감상은 모두 모아 작가님께 잘 전달드리겠습니다. [email protected] 작가님의 메일 주소입니다. 직접 감상을 쓰실 분께서는 옆의 메일 주소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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