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震翰 玉羽三年 春 진한 옥우삼년 봄 

浩氏 三十四歲 호씨 34세

마침내 호씨가 아내를 찾았을 때 그녀는 막 아이를 낳은 직후였다. 아직 탯줄도 잘리지 않은 아이는 흉악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이는 제 아비인 호씨와 한 치도 다르지 않은 생김이라 아이의 혈통은 누가 봐도 확연하였다. 호씨는 아이를 낳은 유씨를 보고 분을 참지 못하여 그녀를 목졸라 죽였는데, 그 소동에 주변의 사람들이 일어나 문을 두드리니 화들짝 놀란 호씨는 유씨의 시체를 팽개치고 아이를 안은 채 달아났다. 

칠흑 같은 밤을 달려 강가에 다다른 호씨는 아이를 강보 째 강물에 집어 던졌다. 헌데 어이 된 일인지 작은 아이가 강에 빠지는 소리가 벽력이 치는 소리보다 커 그 소리에 놀란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순식간에 주변이 대낮처럼 밝아지고 수십명의 병사들이 몰려들자 호씨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속수무책으로 병사들의 손에 포박되고 말았다. 이어 호씨가 던진 것이 무엇인지 확인한 병사들은 추악한 얼굴을 한 아이의 시체에 깜짝 놀라고 그 얼굴이 호씨와 같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그 밤이 지나기 전에 호씨의 흉행은 작은 마을을 떠들썩 하게 하였고, 이튿날 유씨의 죽음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경악하고 말았다.

결국 이 일은 도성에 있던 현종에게 까지 전해졌는데, 이미 도성에서 일어났던 변고가 호씨의 탓이라는 것을 알고 암암리에 병사들을 풀었던 현종은 직접 그를 추국(推鞫)하기로 하였다.

마침내 현종의 앞에 대령된 호씨는 현종을 앞에 두고도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죄를 묻는 현종에게 오히려 입에 담기도 민망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 욕설이 어찌나 흉험한지 대전의 모든 사람들이 그 욕설에 얼이 빠졌는데, 호씨는 그 틈을 타 위사의 손에서 칼을 뺴앗아 현종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하늘의 뜻으로 현종을 노린 호씨의 칼은 도리어 제 가슴을 찔렀고 호씨는 그 자리에서 폭포같이 피를 흘리며 거꾸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가슴에 칼을 맞고도 숨이 끊어지지 않은 호씨는 끈질기게 살아남아 현종을 원망하는 말을 멈추지 않았는데 피에 젖어 고함을 질러대는 모습이 흡사 악귀와 같았다.

임신한 유란란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서융은 도보로 산을 내려와 도성을 떠났다. 걸음이 느려질것이 뻔한데도 굳이 서융이 마차를 미리 보낸 이유 또한 밝혀졌다. 서융은 그 마차가 앞으로 삼일간 전속력으로 도성을 떠나 남쪽으로 달릴 예정이라고 하였다. 한마디로 일행이 도망치는 시간을 벌어줄 미끼가 될 예정이란 말이었다. 아무래도 서융은 처음부터 도주가 쉽지 않을 것을 예상한듯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예상하였다 하더라도, 만삭의 임산부와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호운이 함께하는 여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호운은 억지로 기력을 짜내 어찌어찌 걷는다 하여도 부른 배와 함께 몸이 무거워진 유란란은 하루에도 십여번 쉬어 가야했다. 원칙적으로 격한 행동이 불가능한 시기이기에 당연한 결과였지만, 덕분에 여정은 생각보다 느려졌다.

결국 도주 사흘째. 도성에서 오십리 떨어진 노암(露岩)에 도착하여 서융은 두 패로 찢어질 것을 제안했다. 네 사람이 함께 도망쳤다 쫓고 있을 터이니 둘씩 찢어지면 더욱 안전해 질 것이라면서 말이다. 처음에는 망설였던 호운이지만 결국 그 제안에 동의했다. 

그래서 복치운과 유란란 남매가 신혼부부로 위장하여 길을 떠났고 호운과 융은 장사치로 변장하였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지 않고 일부러 당당하게 길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야음을 틈타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전국 방방곡곡에 호운과 서융을 비롯해 복치운, 유란란의 용모가 묘사된 수배지가 뿌려졌기 때문이다. 

수배된 자들을 잡는 것을 돕는다면 포상을 내릴 테지만 혹시 이자들을 숨겨주거나 조금이라도 도운 자는 일족을 참하겠다는 엄한 내용이 덧붙여진 수배지는 호운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예상보다 빠르군."

호운에게는 그저 놀라운 일이었지만 이는 서융에게는 예상범위였던 일인 모양이었다. 다만 예상보다 빠른 게 문제였던지 그는 혀를 찼다.

"적어도 국경에 다다를 때나 수배지가 뿌려질 줄 알았는데 이제 겨우 닷새인데 수배지가 여기까지 올 정도라니."

지금 수배지가 뿌려졌다는 것은 이미 도성의 혼란이 이미 정리가 되었다는 증거였다. 도성이 혼란스럽다면 벌써 수배지를 뿌릴 여력도 없고, 설사 뿌린다 하더라도 여기까지 전해지는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헌데 겨우 닷새 만에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수배지가 전달되었다. 이는 황제의 지배력이 건재하다는 것의 반증이었다.

“서둘러야겠어.”

“치운이와 란란이는 괜찮을까?”

호운이 걱정스러운듯 묻자 서융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괜찮을 거다. 유란란과 달리 복치운의 외모는 그다지 특징이 없으니까. 유란란의 얼굴만 잘 숨긴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거다. 문제는 저 수배지에 네 외모가 너무 자세히 묘사되었다는 점인데….”

서융은 저자에서 떼어온 수배지를 뚫어져라 보았다. 서융의 말처럼 다른 사람의 수배지보다 호운의 수배지는 그 외모를 묘사함이 지나치게 세밀하였다. 보통의 수배지가 특징만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초상화처럼 조목조목 그 외모를 묘사한 것이어서 호운을 알지 못하는 자도 몇 번을 보면 외모를 익힐 정도였다. 다행히 지금 호운이 황제에게 맞은 흔적덕분에 얼굴이 부어올라 다르게 보였지만, 조금만 시일이 지나면 금세 사람들이 알아볼 게 분명했다.

"일단 변장을 해야겠군."

지금까지는 그다지 남의 눈을 피하거나 변장을 한다거나 하는 것은 전혀 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여태까지처럼은 안 될 것이다.

결국 그날이 지나기 전에 호운과 서융은 각각 장사치와 짐꾼으로 변장했다. 호운은 머리에 길게 늘어지는 두꺼운 두건을 쓰고 옷은 다섯 겹을 겹쳐 입어 몸집을 불렸다. 그리고 서융은 당당하던 허리를 굽혀 자세를 구부정하게 하고 큰 짐을 맸다. 그들은 누가 봐도 장사치와 그가 부리는 짐꾼 같은 모양새를 하고 길을 재촉했다.

가는 길 곳곳에 반란에 가담한 자들의 목이 걸려 저자에 나걸리는 것을 몇 번이나 보게 되었다. 수도의 혼란이 정리되자 이제는 전국으로 그 정리의 손길이 닿는 모양이다. 이대로라면 잡히는 것도 시간문제라는 생각에 호운은 초조해졌다. 그러나 의외로 서융은 느긋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호운은 뒤늦게 알 수 있었다. 닷새가 지난 이후 서융이 선택한 길은 친황제파를 표방하는 관리들이 자리잡은 성시였던 것이다. 이른바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것이다. 다른 도시와 달리 노골적인 친황제파의 성시들은 검문이 느슨했기에 호운은 쉽게 검문을 통과해 목적지로 이동할 수 있었다.

호운은 낮 동안 땀에 젖은 몸을 닦아냈다. 몸집을 커 보이게 하느라고 옷을 몇 겹으로 입고 2,30리를 걸으니 쉬 피로해지는데다, 검문이 느슨하다고 해도 역시 병사들이 지키고 선 성문을 통과하는 것은 긴장되는 일이기 때문에 저녁이 되면 언제나 이렇듯 녹초가 되곤 했다. 

밤이 되면 땀으로 목욕을 한 듯 전신이 끈끈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제대로 목욕을 하고 싶었지만 도망자 신세에 그런 과분한 것을 바라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호운은 물에 적신 수건으로 몸을 닦는 정도로 만족하였다. 

지금 호운이 있는 곳은 성시 구석에 위치한 작은 객점의 객실로, 서융은 방안에 없었다. 혹시 모를 습격을 대비해 늘 서융과 한방을 사용하지만 호운은 서융이 제대로 쉬는 모습을 본적이 없다. 그는 늘 짐속에 숨긴 검을 옆구리에 끼고 벽에 기대 앉아 선잠을 잘 뿐, 제대로 침상에서 쉬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잠들기 전 까지의 시간은 대체적으로 밖에서 보내다 돌아온다. 그러나 그가 멀리 가지 않는다는 것을 호운은 알고있다. 그는 주로 그들이 머무는 객점이 보이는 근처의 주가에 있거나, 객점의 식당에서 자리하고 있다. 호운은 그것이 자신을 위한 배려인지, 아니면 주변의 경계인지 알수가 없었다. 어쩌면 반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융과 도피행을 한지도 벌써 엿새가 흘렀고, 호운은 자연스레 서융이 함께있는 상황에 익숙해졌다.

상황도 다르고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난 일이지만, 호운은 무심코 기예단을 떠올렸다.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하루종일 이동하며 서로 제대로 된 대화도 없이 보내는 시간. 그리고 자신의 곁에는 서융이 있다. 달라진 것은 자신은 이미 옛날 처럼 젊지 않고 서융도 어리지 않다는 점일까.

멍하니 생각에 잠긴 채 몸을 닦던 호운은 갑자기 벌컥 문이 열리자 놀라 수건으로 몸을 숨겼다. 방안에 들어온 것은 서융이었다. 같은 사내이니 부끄러울 것이 없건만 어째서인지 서융의 앞에서 당당히 옷을 벗고 있는 모습이 신경쓰였다. 이는 부끄러움 따위가 아닌 꺼림칙함 때문이었다.

"…일찍 왔네."

"아, 병사들이 돌아다녀서 말이야."

어색한 호운과 달리 서융은 태연했다. 그런 서융의 태연함에 호운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서융에게서 등을 돌렸다. 호운은 눈치 채지 못했지만 서융은 호운이 등을 돌린 그 순간 까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융이 호운의 벗은 몸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이런 상태의 호운의 몸을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닷새가 흘렀음에도 울긋불긋 전신에 남아있는 흔적이 무척이나 또렷한 몸. 폭력과 집착의 흔적에 얼룩진 호운의 등에는 뼈가 도드라져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잘게 움직이는 근육과 뼈의 움직임을 가만히 보던 서융의 시선 속에, 호운은 어색하게 수건을 내려놓고 옷을 주워들었다. 자신의 몸을 숨긴 그 조심스러운 동작에 서융의 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치솟았다. 그것은 분노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전신에 황제의 흔저을 남기고 있는 호운이 그 몸을 서융 앞에서 가리는 것에 분노가 치솟았다.

치솟은 분노에 서융은 곧장 호운에게 덤벼들었다. 등을 돌린 채 옷을 걸치던 호운은 속수무책으로 서융에게 당해 바닥으로 쓰러졌다.

쾅! "윽!"

거친 마룻바닥에 밀려 쓰러진 호운은 머리와 등을 부딪쳐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융은 그런 호운을 억누르고 대충 걸쳐진 옷을 끌어내렸다.

"왜 숨기는거지? 이제와서 뭘 그렇게 숨기는거야?"

"융…!"

"설마 황제 앞에서도 그렇게 숨기고 있지는 않았을 텐데!"

"왜 이래!"

호운은 갑자기 돌변한 융의 행동에 당황해 그를 밀치려했다. 그러나 오히려 융은 더욱 단단히 호운의 몸 위에 자리를 잡고 호운의 옷을 벗겨냈다. 처음부터 허술하게 걸쳐져있던 옷은 쉽게 융의 손아래서 흩어졌고 호운은 당황해 숨을 멈췄다. 

"융!"

그러나 당황한 호운과 달리 옷을 벗겨낸 융의 눈빛은 날카롭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벌써 닷새가 지났는데도 아주 또렷하게 남았군."

그리 중얼거리며 융은 호운의 몸 곳곳에 남은 황제의 흔적을 훑었다. 융의 말처럼 닷새가 흘렀건만 호운의 몸에는 여전히 황제가 남긴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목덜미를 빨았던 흔적들이 희미하게 남은 것이나 황제가 한참동안 지분거렸던 유두며 가슴께에 남은 흔적, 그리고 허리에 멍처럼 남은 손자국이 그랬다. 특히 허리의 손자국은 어지간히 강하게, 오래 붙들고 있지 않고서는 닷새나 지난 지금 이런 식으로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마치 방금전에 난 자국인듯 선명한 그 손자국에 융은 이를 갈았다.

"얼굴이 엉망이라 몸도 엉망일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몸은 멀쩡하군. 오히려 여러모로 사랑받은 모양이야, 응? 기분 좋았어? 그래도 총애를 받는 남첩이 설마 그때처럼 또 뻣뻣하게 있지는 않았을 테지? 어떻게 했어, 응? 스스로 다리를 벌렸어? 아니면, 넣어달라고 애원이라도 했어?"

융은 그렇게 호운을 조롱하듯 말하며 귓가에 입술을 댔다. 지근거리에서 들리는 거친 숨소리와 배위에 닿은 딱딱한 감촉에 호운은 솜털까지 곤두설 정도로 놀랐다.

분명 지금 융은, 호운을 상대로 욕정하고 있었다.

한동안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던 융이 갑자기 이런 모습을 보이자 호운은 그저 당황하였다. 등 뒤로 소름이 쭉 돋았다. 그러나 그런 호운의 당황에 아랑곳 않고 배 위에 올라탄 서융은 태연하게 자신의 옷을 벗었다. 곧 탄탄하게 단련된 융의 상체가 호운의 앞에 여과 없이 드러났다.

"왜 이러는거야, 갑자기!"

호운은 두려웠다. 이제 겨우 황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생각했는데 융이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덤벼들자 진심으로 두려웠다. 두려움에 경직되는 호운과 달리 융의 숨소리는 갈수록 거칠어졌다. 호운은 그저 서융의 어깨를 밀며 애원했다.

"왜 이런다고 생각해? 이런 상황 잘 아는거 아니었나, 응?"

빈정거리는 서융의 물음에 호운은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휘두르며 저항했다.

"그만해 융, 제발…이러지마!"

자신이 융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호운을 보자 융은 더욱 분기가 치밀었다. 융은 저항하는 호운의 양손을 한손으로 그러쥐고 호운의 따귀를 쳤다. 철썩! 마른 소리가 울리고 호운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융은 그런 호운을 내려보며 이죽거렸다.

"여태 수없이 해왔던 건데 왜 갑자기 빼고 그래?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내가 모를것 같아? 천만에! 나 뿐만이 아니라 도성의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야! 그런데 왜 이제와서 싫다는 거지? 어차피 닳고 닳은 거 한번 더 다리를 벌린다고 달라지는 게 뭐냔 말이야!"

빈정거리는 서융의 말에 호운의 얼굴이 굳었다. 서융은 그렇게 날카로운 말들을 던진 후 호운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말에 굳은 호운의 얼굴도, 그리고 그 후 체념하듯 덮인 눈도 보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융은 자신을 밀치던 호운의 손이 힘없이 늘어지는 것을 느끼고 흘끗 호운의 얼굴을 보았다. 호운은 눈을 감은 채 가만히 낮은 숨을 내쉬고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듯 축 늘어진 채 가만히 있는 호운을 융은 기묘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저항을 할 때도 화가 났지만 갑자기 저항을 그만두자 이상한 기분이 든 것이다.

"왜 저항하지 않아?"

그런 서융의 물음에 호운은 눈은 감은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왜 저항하지 않느냐고 묻고 있어.”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고 으르렁거리는 서융의 물음에 호운이 천천히 눈을 뜨고 대답했다.

"…저항한다고 그만둘게 아니잖아."

그리 대답하는 호운의 목소리는 담담하니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목소리에 서융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졌다. 호운의 말이 맞긴 했다. 저항한다고 그만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정작 호운이 이렇게 나오니 기분이 묘해졌다. 마치 흥이 깨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잠시 미간을 찡그린 채 호운을 바라보던 융은 곧 행동을 재개했다. 호운의 가슴께를 빨고 어깨를 빨았다. 황제의 흔적이 남은 곳 곳곳을 자신의 흔적으로 채우기 위하여 손을 멈추지 않았다. 점차 서융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호운의 몸 곳곳이 그가 남긴 흔적으로 붉게 물이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호운의 깊숙한 곳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은 순간 그는 위화감을 느꼈다. 아까부터 호운은 자유로워진 양손으로 저항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얼굴을 얼굴을 가린 채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손가락을 밀어 넣었을 때부터 잘게 떨리는 몸이, 이번을 알렸다.

융은 손가락을 밀어 넣던 것을 중단하고 호운의 얼굴을 가린 손을 떼어내었다. 그리고 드러난 호운의 얼굴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였다.

호운은 울고 있었다. 괴로워 죽을 것 같아 얼굴을 찡그린 것도 아니고 슬퍼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두 눈에서는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왜 그래."

융의 목소리에 당황이 어린 것은 그 탓이었다. 얼굴 표정은 무표정인데 두 눈에서는 쉴 새 없이 눈물이 흐르는 호운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왜 그러냐고 물었어."

호운의 어깨를 밀치며 융이 강하게 묻자 호운은 울면서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여전히 대답이 없는 호운을 보며 융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울어? 왜? 그렇게 내가 싫다는 거냐?"

융의 말투가 거칠어지자 호운이 하하 소리를 내어 웃었다.

"좋고 싫고가 무슨 상관이야."

원망하는 것도 아니고 호운은 그렇게 말하였다. 거기에는 체념이 서려있었다.

"왜 상관이 없다고 하는 거냐."

"어차피 너도 네 멋대로 할 테니 내 감정 따위 무슨 상관이야."

너도 라는 말에 융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너도 라는 말이 누구와 서융을 함께 묶은 것인지를 깨달은 탓이다.

"지금, 나와, 나와 황제를 같이 말하는 거냐?"

융의 숨소리가 당장이라도 호운의 숨통을 물어뜯을 것처럼 거칠어졌다. 융의 물음에 호운은 대답 없이 눈을 감았다.

"어떻게 나를 그놈과 비교할 수 있어! 나는 너를…!"

융은 이를 갈며 외쳤다. 그러나 호운은 여전히 두 눈을 감은 채 융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감긴 두 눈을 따라 굵은 눈물이 흘렀다.

"이!"

융은 분을 참지 못하고 다시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호운은 눈을 뜨지도 않고 여전히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자신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는 호운을 보며 한참동안 손을 치켜든 채 부들부들 떨던 서융은, 결국 호운대신 애꿎은 침상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쿵!

침상이 부르르 흔들렸지만 호운은 반응하지 않았다. 서융은 죽일 듯이 호운을 노려보았다. 여전히 벌거벗은 호운이 자신의 아래에 있고, 그 피부와 맞닿은 흥분은 아직도 서융의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이할 방법이 없었다. 자신을 보지 않는 호운 때문에 화가 치밀었지만 이대로 안아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도 눈치 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번 치밀어 오른 욕정은 어이 할 길이 없었다. 그 몸을 갖고 싶었다.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융은 자신이 바라는 것이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자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이미 그는 두 번의 실수를 겪었다. 이대로는 빼앗아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과거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굳이 모든 귀찮음을 감수하고서 그 두 남매까지 빼돌렸는데 이제와서 거기에 재를 뿌릴 수 없었다. 서융은 호운을 죽일 듯 노려보다 거칠어진 호흡을 진정시켰다. 이대로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낸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동안 시간이 흘렀다. 씩씩거리던 서융의 숨소리가 잦아들자 방 안에 외부의 소란과 섞여들었다. 먼 곳에서 울리는 술 취한 사내들의 고함소리와 여자들의 교성들이 스며 방안의 침묵을 흐렸다.

서융은 호운의 얼굴을 바라보며 끈질기게 기다렸다. 마침내 그 눈가를 따라 흐르던 눈물의 흐름이 멎자 서융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너는 나와는…죽어도 싫다는 거냐.”

눈을 감고 있던 호운은 서융의 말에 천천히 눈을 떴다. 눈물로 흠뻑 젖은 눈꺼풀 아래로 드러난 눈은 새빨갛게 충혈 되어 있었다.

“나와는, 죽어도 싫다는 거냐고 물었다.”

호운은 서융이 어찌해서 그런 것을 묻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호운 본인의 의지가 서융에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왜 그런 걸 묻는 거야.”

잔뜩 쉬어 가릉거리는 음성으로 호운이 묻자 서융은 목소리를 낮춘 채 말했다.

“나와 죽어도 싫은 게 아니라면, 단지…사내에게 안기는 게 싫은 거라면.”

서융은 호운의 부은 눈매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멈칫거리는 서툰 손짓이었지만 그 동작이 여태 융의 거친 행동과 어울리지 않아 호운의 눈빛이 흔들렸다. 차라리 좀 전처럼 강하게 나온다면 이렇게 당황스럽지는 않을 텐데, 갑자기 손바닥을 뒤집은 것처럼 부드러운 서융의 행동에 오히려 호운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네가 나를 안아라."

서융의 말에 호운은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서융을 외면하던 호운의 눈이 저절로 서융의 얼굴을 향했다. 방금 전까지의 이글거리던 열정은 그 두 눈에 여전하였지만, 서융의 말 또한 호운이 잘못 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무슨 소리야."

호운의 목소리가 떨렸다.

"지금 당장 그러하라고 말하는게 아니다. 지금 당장은 싫겠지. 사내에게 진력이 났겠지. 하지만 너도 사내가 아니냐. 싫어도 반응하고, 본능적으로 그러고 싶어지는 것이 사내가 아니냐."

"너…."

"오늘은…내가 실수했다."

서융은 그리 말하며 호운의 위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흐트러진 옷을 바로잡아주고 방을 나섰다. 

호운은 이 순간이 되어서야 융이 자신에게 안고 있는 복잡한 심정을 눈치 챘다. 단지 욕정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훨씬 복잡하고 격렬한 감정을. 오직 자신 한사람만을 향하는, 당장이라도 불타오를 것처럼 뜨거운 그 감정을 말이다. 

호운은 전혀 생각지도 않은 방향으로 변한 상황에 그저 멍한 표정으로 융이 사라진 방문을 보았다. 도성을 도망치는 그날까지, 아니 오늘 이 시간 이때까지 상황이 이렇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서융은 입술을 굳게 다문채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호운이 있는 방에서 한참 멀어진 후에야 거칠게 주먹으로 벽을 두드렸다.

"제길!"

더는 호운에게 경계심을 심어줄 필요가 없단 생각에 물러났지만 그것은 매우 인내심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지금 서융은 분노와 욕정, 그리고 여러 가지 감정으로 당장 터져나갈듯 용솟음치는 가슴을 억누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호운은 같다고 하였지만 융은 자신과 황제의 결정적인 차이를 알았다. 그렇기에 융은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다. 차라리 열여섯의 그때처럼 무작정 달릴 정도로 어리석었다면 호운을 취하는 것은 간단하였을텐데. 이제 서융은 열여섯 철없던 소년이 아니었다.

융이 호운에게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한 계기는 눈이었다. 황제처럼 몸으로 호운에게 호기심을 느낀 것이 아니라, 단지 아이를 바라보던 그 온기 섞인 눈매에 호기심을 가졌다. 저 또한 그다지 나을 것 없는 처지이건만 호운은 언제나 주변의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처지를 동정하고 마음 아파하였다. 그런 호운을 융은 처음에는 한심한 작자라 생각했다. 제 처지도 생각지 않는 철없는 그의 태도가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의 눈이, 아이들을 바라보는 그 눈을 쫓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그 시선을 쫓았던 것이 시작이었다. 그 시선을 자신이 받고 싶은 것이 시작이었기에, 결국 융은 황제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융이 보기에 호운은 어리석었다. 그리고 정에 약했다. 한번 정을 주면 상대가 배신을 하기 전 까지는 꾸준히 정을 주는 얼간이 같은 자였다. 그 말은 바꿔 말하면 상대가 배신하지 않는 이상 호운은 절대로 돌아서지 않는다는 증명과도 같았다. 

때문에 융은 진부용이 그를 배신하도록 만들었다. 그 일로 호운이 자신을 원망할 것을 알면서도, 그가 진부용을 버리게 하기 위해 그리 해야 했다. 그가 진부용에게 호운을 배신하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그리고 그 광경을 호운에게 보여주어야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다. 바로 융이 진부용을 질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부용이 사랑받듯, 그렇게 사랑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일은 지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비록 그로 인해 호운이 자신을 불신하게 되었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금 같은 말을 들었을 때 화가 나는 것은 어이할 수 없다.

융은 조바심이 나려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그리 생각하기로 하였다. 아직 몸에 황제가 남긴 흔적이 가득한 지금 과연 호운이 사내를 받아들이려 할까. 억지로 사내에게 정복당한 기억이 그리 쉽게 사라질까.

황제나 자신이나 같다는 말에 화가 치밀었지만 지금의 호운에게는 그것이 진실일 것이다. 아무리 융의 속이 뒤틀려도 지금 호운을 안았다가는 다시는 그를 가질 수 없어질 게 분명했다.

융은 호운이 있는 방의 창을 보며 다시 한번 발을 굴렀다. 차분해져야 했다. 일단 요족의 영토로 넘어가면 호운을 두 번 다시 빼앗기지 않을 테니 모든 것은 그때 가서 시작해도 늦지는 않는다. 그리고 호운은 융이 한 말로 충분히 고민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기다릴 때다.

융은 스스로를 그리 다독이며 욕정을 억눌렀다.

그 밤 이후 둘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변한것은 아니었다. 다음날부터 호운은 융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지만 그것은 냉담함이라기 보다는 어색함과 거북함이라는 것을 눈치 챈 융은 오히려 태연하게 굴었다. 처음에는 융을 어이 대해야할지 몰라 거북하던 호운도, 그런 융의 태연함에 점차 긴장이 풀렸는지 나흘이 지날 쯤에는 처음과 비슷한 관계로 돌아가 있었다. 친하지도 않지만 서로 적대하지도 않는 미묘한 관계. 가깝지도 않지만 그리 멀지도 않은 그런 관계로 말이다.

복치운과 유란란과 다시 합류한 것은 그로부터 보름이 지나서였다. 다행히 합류하기로 한 장소에 무사히 나타난 두 남매를 본 호운은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서융의 말처럼 신혼부부로 가장한 복치운과 유란란은 의외로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고 합류지점까지 이동하였다. 호운과 서융의 어색한 관계는 두 남매와 합류한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서융은 그 밤 이래로 호운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지만 시선만은 늘 호운을 따라다녔는데, 말도 걸지 않고 계속 바라보기만 하는 서융의 유별난 행동에 오히려 호운이 당황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도 시일이 지나자 점차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에게 보여 진다는 것은 어색한 일이었지만 융의 눈빛은 예전처럼 흉포하지도 강압적이지도 않았다. 단지 안쪽에 묵직한 것이 들어있는 듯 고요했다. 복치운은 그런 융의 눈빛에 무언가를 눈치 챈 듯도 하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기묘한 동행이 보름여가 이어진 후 마침내 일행은 국경에 닿았다. 

서융이 요족의 영토로 넘어가기 위해 선택한 국경은 거친 산맥들과 협곡으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국경으로 향한 길 모두가 물과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어 국경지대 중 가장 험난한 곳이었지만, 굳이 서융은 이곳을 선택했다. 그가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요족의 영토와 접한 모든 국경 중 이곳에 배치된 병사의 수가 가장 적다는 점과 이곳의 자연 환경이 도저히 임산부를 대동한 일행이 향할 곳은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언제나 꼭대기가 흰 눈으로 뒤덮여있는 대산맥과 교룡(蛟龍)이라 불리는 거친 물길이 둘러싼 마을은 자연환경 자체가 강고한 벽이 된 곳이었다. 그는 설마 병사들이 편한 길을 놓아두고 가장 험난한 이곳으로 가지는 않았을 것이라 여길 점을 역이용 하였다. 서융은 처음부터 교룡을 건너 국경을 넘을 생각이었다.

이는 황제의 명으로 각지를 시찰하던 도중 이 마을의 특성을 파악했기에 내릴 수 있는 결단이었다. 교룡은 바다처럼 넓은 물길에 중심으로 가면 갈수록 물살이 센 데다 도중에 바윗돌이 삐죽삐죽 솟아있어 사람이 살아 나갈 수 없는데다 시체가 상어에 뜯긴 듯 너덜너덜해져 하류로 떠내려 오기에 그런 이름이 붙은 강이었다. 강임에도 살아있는 생물처럼 사람을 집어삼키는 거친 물줄기지만 유일하게 1년에 단 한번. 봄쯤이 되면 그 기세가 약해진다는 것을 서융은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서융의 예상과 달리 새싹이 돋는 봄이 왔건만 올해는 아직 강의 기세가 절정기처럼 거칠었다. 가물어져 가늘어져야 할 물줄기는 여전히 거셌고 설상가상으로 눈발까지 날리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다시 다른 마을로 돌아갈 수는 없었기에 일행은 그저 교룡의 물줄기가 약해지기만을 기다려야했다.

그러나 일행이 교룡을 앞두고 발이 묶인 지 나흘 째 되던 날 유란란의 진통이 시작되었다. 산달까지는 아직 한 달이 넘도록 남았건만 오랜 이동에 몸에 무리가 가서인지 예상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산통이 시작된 것이다. 유란란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내인 일행은 당황했다. 그러나 파수가 시작된 마당에 유란란을 그대로 들에 방치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일행은 한 농부의 집에 몸을 의탁했다. 눈발까지 날려 농사준비도 뒷전인 가난한 농부부부는 서융이 내민 돈을 받고 말없이 방을 내 주었다. 짚이 깔린 허름한 방안의 낡은 침상위에서 유란란은 출산을 시작했다. 도망자의 신분인데다 위치가 워낙에 변경인지라 의원조차 부를 수 없는 유란란은 홀로 진통을 견뎌 내야했다. 

유란란의 진통은 꼬박 하루가 넘도록 이어졌다. 호운은 안절부절 못하며 유란란의 손을 잡았다.

혹시라도 농부 부부가 들을까, 제대로 소리조차 지르지 못한 유란란은 수건을 피가 배이도록 꽉 깨문채 산통을 견뎌야했다. 하루가 넘도록 이어진 진통에 유란란 이미 기진맥진해져 있었다. 땀에 젖은 얼굴로 입술이 찢어지도록 악문 유란란의 모습에 호운은 그저 그녀를 위로하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란란아, 힘을 내라! 조금만 힘을 내!"

유란란이 비명대신 호운의 손등을 꽉 틀어쥐었고, 이에 대답하듯 호운은 그 손을 더욱 꽉 잡았다. 유란란의 날카로운 손톱이 호운의 손등을 파고들어 피가 터져 나왔지만 호운은 결코 손을 놓지 않았다. 처음에는 함께 자리하고 있던 복치운은 유란란의 요청에 의해 방문 밖으로 나선 상태였다. 

거친 숨을 쌕쌕 몰아쉬는 유란란의 얼굴은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그토록 빛나던 미모는 빛을 바랬고 땀에 젖어 창백해진 얼굴은 비참해 보일 정도였다.

"-----!!!"

마침내 진통을 시작한지 하루하고도 3시진이 지난 새벽. 소리 없는 비명과 동시에 새 생명이 탄생하였다. 태어난 것은 팔삭둥이라 그런지 체격이 무척 작은 아기였다. 울음소리마저 희미해 꺽꺽거리는 소리에 가까운 작은 소리만 내는 아이를, 호운은 조심스레 받아들고 탯줄을 잘랐다. 

태어난 아이는 사내아이였다. 갓 태어난 아이는 호운의 상상과 달리 작고 쪼글쪼글한데다 전신이 붉어서 전혀 유란란의 피를 이은 아이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아이는 분명 유란란이 하루가 넘도록 산통을 겪으며 힘들게 낳은 아이였다. 그 증거로 아이는 온 몸에 유란란의 피를 묻히고 태어났다.

"오라버니, 아기…아기를…이리로…."

호운이 유란란에게 아기를 안겨주자 그녀는 울어 부은 눈을 가물거리며 아기의 얼굴을 보려 노력했다.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는 아이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을 텐데, 그녀는 아이의 얼굴이며 몸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눈물 투성이의 얼굴로 웃었다.

"아들이네, 아들. 후후…아들이구나."

"그래 란란아. 아들이다. 네 아들이야."

유란란은 기진맥진해서도 아이를 꽉 안은 채 웃고 있었다. 호운은 그래도 유란란이 미소를 짓자 안심했다. 그러나 아이를 꽉 끌어안은 유란란의 얼굴이 진통에 시달리던 때 보다 더욱 창백해 진듯 보이자, 호운은 의아한듯 그녀를 불렀다.

"란란아…?"

호운의 부름을 듣지 못한 것처럼 유란란은 그저 아이만 바라보고 있었다. 알지 못할 불길함에 유란란을 살피던 호운은 곧 제 무릎에 닿은 물기에 흠칫 놀라 아래를 보았다. 낮은 침상에 유란란과 손을 맞잡기 위해 호운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였는데, 그 무릎이 어느 샌가 붉은 피에 젖어있었다.

"!!"

호운은 깜짝 놀라 유란란의 치마를 들추었다. 치마 안은 이미 피로 흥건히 젖어있었다. 그피가 어디서 나왔는지는 너무나 분명한데, 이는 마치 몇 해 전 진성왕비 옥씨가 세상을 뜨기 전과 흡사한 모습이라 호운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란란아…!"

어쩔줄을 몰라 하는 호운을 보며 유란란은 쓰게 웃었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사람처럼 품에 안은 아기의 볼에 제 볼을 비비며 말했다.

"오라버니, 아기를…부탁해요."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 란란아. 네 아이를 어찌 내게…!"

"이 아이만은 행복하게…행복하게 해주세요."

유언 같은 그 말에 호운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니, 유언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이는 분명 유란란의 유언이었다. 유란란은 그 말을 끝으로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호운이 비명처럼 유란란의 이름을 외치며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란란아, 정신좀 차려 보거라 란란아!"

밖에서 난 상처라면 눌러보기라도 하련만 피는 유란란의 속으로부터 흐르고 있었다. 호운은 눈을 가물거리며 의식을 잃어가는 유란란의 뺨을 두드렸다.

"란란아, 눈을 감으면 안 된다! 란란아!"

"무슨 일입니까!"

호운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복치운이 문을 부술 듯 안으로 들어왔다. 그 또한 방안의 풍경을 보고 경악해 얼른 유란란이 누운 자리로 다가왔다. 꺼져가듯 눈빛이 가물거리는 유란란을 보니 속이 타 호운은 그녀의 손을 꽉 붙들었다.

"란란아 제발 눈 좀 떠 보거라. 란란아 응?"

호운은 유란란의 손을 붙들고 애원했다. 그러나 호운의 애원을 듣지 못한 것인지 유란란의 숨소리는 점차 잦아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희미하던 숨소리마저 잦아지는 순간을 호운은 분명히 느꼈다. 맞잡은 손에서 힘이 쭉 빠졌다. 그러나 호운은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손안의 온기가 점차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도 호운은 유란란의 손을 맞잡은 채였다.

"란란아…."

그리 유란란은 죽었다. 모든 사내들을 제 발 아래 무릎 꿇리겠다던 야무진 계집아이는 원치 않던 사내의 아이를 낳고, 최후에는 어미의 얼굴이 되어 허망하게 죽었다. 업보 때문인까. 유란란의 최후는 제가 죽인 것이나 다름없는 진성왕비 옥씨와 한 치 다르지 않았다.

호운은 식어가는 유란란의 뺨을 쓰다듬었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현실감 없는 흐름이었지만 시간은 착실히 흘렀다. 마냥 밖을 지키고 있던 서융이 갑자기 방 안으로 들어오며 다급한 태도로 말했다.

"가야한다, 그 농부가 밀고 했어."

융의 말에 먼저 반응한 것은 복치운이었다. 그는 아직 유란란의 곁에서 그녀의 뺨을 쓰다듬는 호운을 불렀다.

"형님."

호운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를 않아 복치운이 부축해 줘서 겨우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지금의 상황이 급박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호운은 유란란의 시신을 수습하고 가자는 주장은 하지 않았다.

결국 호운은 채 식지도 않은 유란란을 그 자리에 남겨둔 채 그 자리를 떠나야만 했다.

작은 마을은 순식간에 병사들에 의해 포위되었다.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서융의 표정이 험해졌다. 그러나 이대로 있다고 해도 뾰족한 수가 없다. 결국 서융은 결단을 내렸다.

"오늘 밤 교룡을 건너자."

그 말에 복치운은 쉽게 수긍할 수 없었다. 거센 교룡의 위력을 설명하며 지금 건넜다가는 상어에게 물어뜯긴 것처럼 너덜너덜한 시체가 될 것이라 설명한 것은 서융이었다. 

"하지만 지금 건넜다가는…."

"지금 방법은 그것뿐이다. 물길이 잠잠해 질 때 까지 기다렸다가는 잡혀죽을 테지."

서융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복치운은 곧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호운은 그저 품안의 아이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강을 건너기 위한 배를 찾기 시작한 것은 서융이다. 다급한 상황이었지만 그는 어리석게 굴지 않았다. 교룡처럼 위험한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노련한 뱃사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미 마을 전체에 수배가 된 상황이었지만 돈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하여서 서융은 쉽사리 병사들의 눈을 피해 마을 안을 헤집었다. 그리고 마침내, 지금처럼 교룡의 위세가 가장 대단할 때 물을 건넜다는 뱃사공을 찾아냈다. 서융은 사공에게 몇 번이나 확답을 받고 그날 밤으로 약속을 잡은 후 사공과 헤어졌다. 혹시 사공이 병사들에게 밀고를 할까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병사들이 서융을 비롯한 세 사람을 잡아간다 하여도 사공에게는 돌아가는 것이 없지만 강을 건너게만 해 주면 주머니가 두둑해 질 것이라는 것을 사공도 알기 때문이다.

서융의 예상대로 사공은 밤이 어둑해지자 약속 장소에 홀로 나타났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겨놓았던 쪽배를 강가로 끌어냈다. 쪽배의 모습에 서융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배로 세 사람이 물을 건널 수 있단 말이냐?"

쪽배는 매우 크기가 적어 두, 세명이 타면 꽉 찰 정도로 좁았다. 서융처럼 덩치가 큰 자가 탄다면 세 명도 버거울 정도였다.

"두 명이라지 않으셨습니까."

오히려 사공은 무슨 말이냐는 듯 되물었다.

"세 명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서융이 윽박지르자 사공은 머리를 긁으며 대답했다.

"저를 비롯하여 세 명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이거, 곤란하구만."

"네가 지금 나를 놀리는 것이냐?"

서융이 위협적인 표정을 지으며 검을 뽑아들자 오히려 사공은 느물거리며 웃었다.

"대인. 이렇게 나오시면 곤란하지요. 제가 없으면 교룡은 어떻게 건너시려구요."

사공은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던 듯 자연스레 말하였다. 그의 말대로였다. 지금 성질대로 사공을 해쳤다가는 절대로 교룡을 건널 수 없을게 분명했다. 서융이 이를 갈며 노려보는 가운데 사공이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교룡을 두 번 건너야 되게 생겼으니 돈을 두 배로 주셔야겠습니다."

사공의 말에 서융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지금 와서 이 사공을 닦달한다 하여 방법이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그는 호운과 복치운을 돌아보았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이 없다. 셋 중 하나는 여기 남아서 나중에 와야 해. 어쩔 테냐."

서융의 말에 복치운은 호운의 얼굴을 보고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제가 남겠습니다. 형님을 모시고 먼저 건너세요."

"치운아!"

생각에 잠겨있던 호운은 갑작스러운 복치운의 말에 깜짝 놀랐다.

"그게 무슨 소리냐. 위험하게 네가 남겠다니!"

"그럼 어찌합니까 형님. 저는 형님을 지켜줄 자신이 없지만 서장군이라면 무슨 일이 생겨도 형님을 지켜줄 겁니다. 그러니 형님, 형님이 아이를 안고 서장군과 먼저 물을 건너세요."

"치운아!"

"걱정 마세요. 저도 곧 따라 갈 테니. 그래도 되겠지요, 서장군."

복치운의 말에 서융은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호운은 수긍하지 않았다.

"그런 거라면 내가 나중에 건너마. 나도 곧 따라 건너면 되지 않겠느냐."

"형님, 그런 억지가…."

"이게 어찌 억지란 말이냐! 나와 네가 무엇이 달라서 내가 먼저 물을 건너야 한다는 것이냐! 위험하다면 오히려 네가 위험하지!"

호운은 그리 윽박지르고는 품안의 아이를 복치운에게 떠넘겼다. 얼결에 아이를 받아든 복치운은 곧 다급히 말하였다.

"형님, 그러지 마세요."

"되었다. 네가 먼저 건너라."

복치운과 호운이 서로 먼저 건너라며 입씨름을 하는 모습에 서융은 인상을 썼다. 사공을 제하고는 두 사람 밖에 탈 수 없는 배라는 말에 융은 호운과 자신이 배를 타려 생각하였기에 지금 호운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융, 너도 말 좀 해봐. 지금 더 위험한건 치운이니 먼저 물을 건너야 한다고."

"동의할 수 없군."

"융!"

호운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 융을 보았다. 그 눈동자는 안타까움이 흔들거렸다. 융을 애절하게 바라보던 호운은 곧 그의 손을 잡고 강가에서 멀어졌다.

"형님?"

"이야기를 하고 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거라!"

호운은 그리 말하고 융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생전 처음 호운 스스로가 자신의 손을 잡은 일에 융은 깜짝 놀라 호운이 하는 대로 끌려갔다. 

호운이 융을 이끌고 간 곳은 강가에서 조금 멀어진 커다란 나무들의 뒤였다. 복치운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곳 까지 다가가고 나서야 호운은 융에게 애원했다.

"융, 제발 부탁이야. 제발 치운이를 먼저 데려가줘. 너도 알잖아. 치운이가 월왕의 아들이라는 게 밝혀진 이상 치운이는 잡히면 무조건 죽어."

"그것은 나도, 너도 마찬가지야. 그 황제가 자신을 거역한 자들을 살려둘 성 싶어?"

그리 말하면서도 사실 융은 호운의 경우는 반신반의 하였다. 과연 황제가 호운을 죽일까? 그러나 융과 달리 그의 말을 진실로 생각하는 호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하지만…하지만 … 치운이 마저 잘못되면, 나는…나는 차라리 죽는 게 나아. 제발 융."

호운의 말에 융의 표정이 흉포해졌다.

"그 말은, 지금 너는 죽겠다는 거냐?"

"그런 게 아니야. 너도 그랬잖아. 설마 지금 교룡을 건너려 할 것이라고는 생각 못할 거라고. 그냥 여기서 기다렸다 늦게 건너는 것 뿐이야."

"그래. 그런데 그게 복치운이 되면 왜 안 된다는 거냐."

"내가 여기를 떠난 다음에 이 위험한 곳에 치운이가 혼자 남는다는 게 싫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게 싫어."

"그런 일이 생긴다면 네가 남았을 경우에도…."

"제발, 융. 부탁할게. 네가 바라는 대로 뭐든 할 테니까, 제발. 제발 치운이를 데려가."

호운은 필사적이었다. 이미 유란란이 죽은 마당에 그에게 가족같은 사람은 복치운 한 사람 밖에 남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 하나 남은 가족을 위해 필사적으로 애원하였지만 오히려 융은 그 애원에 속이 뒤틀렸다.

"뭐든지? 하. 마치 그래주면 순순히 안겨주기라도 하겠다는 말 같이 들리는군."

융의 말에 호운은 움찔, 뒤로 물러섰다. 그런 호운의 행동은 행위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어서 서융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호운은 이내 머뭇거리며 뒤로 물러섰던 거리를 좁혀 다시 융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흠칫거리며 융의 얼굴을 살피다 그에게 손을 뻗었다.

약간 서늘한 손바닥이 자신의 뺨을 감싸는 감촉에 융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나 이어서 호운이 점차 자신에게 다가오자 믿을 수 없다는 듯 그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다가온 호운의 숨결이 닿을 듯 가까워졌다 느낀지 얼마 지나지 않아 따스한 입술이 융의 입술에 닿았다.

처음으로 호운은 스스로의 의지로 융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에게 입을 맞췄다. 호운의 입술이 닿자 융은 움찔, 몸을 떨었다. 호운은 굳게 닫힌 융의 입술을 혀로 핥으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융은 순순히 호운에게 길을 열어주었고 곧 호운의 혀는 조심스레 융의 혀와 얽혀 들었다.

마치 융의 눈치를 살피듯 조심조심한 움직임이었지만 안을 스치는 혀의 움직임이 서툰 것 까지 모두 융을 자극했다. 서툰 입맞춤이 길게 이어지면서 호운의 숨이 거칠어지는 것이 융에게도 느껴졌다. 그러나 호운은 융을 밀치지 않고 오히려 그의 몸에 매달리듯 다가와 입맞춤을 이어갔다.

마침내 긴 입맞춤이 끝나고 호운이 주춤거리며 입술을 떼어놓았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융을 바라보며 부탁했다.

"융, 부탁이야."

호운도 나름대로 필사적이었다. 그는 융이 어째서인지 자신을 연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기에 그 감정을 이용해서라도, 그 몸을 이용해서라도 융에게 부탁하고 싶었다. 이것은 알 수 없는 예감이었다. 먼저 배에 태워야 하는 것은 복치운이다. 그러지 않으면 죽을 때 까지 후회할 것이다. 때문에 호운은 통할지 통하지 않을지 알 수 없는 입맞춤에 최선을 다했다.

"제발."

간절히 융을 바라보는 호운의 입술은 젖어있었다. 그 입술안의 혀가, 방금 전 스스로 자신을 향해 왔었다는 사실에 융의 머릿속이 저릿저릿해졌다. 이보다 더한 일도 했었다. 이보다 더, 더 굉장한 일도 했었다.

그런데 이 치졸한 한 번에 입맞춤이 모든 것을 잊게 했다. 방금까지 치솟아 있던 화가 한순간에 억눌려 사라져 버릴 정도였다.

자신이 빼앗은 것이 아니라 그가 주었다.

다른 사람이 아닌, 호운이 융에게 주었다.

그가 스스로 융에게 준 것이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다는 것은 이런 것일 게다. 융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렇지 않으면 깜빡깜빡 점멸하는 시야 덕에 다리가 풀릴 것 같았다.

"겨우, 이까짓 것으로…."

입으로는 그리 말하면서도 선연하던 독기는 이미 자취를 감춘 후였다. 남은 것은 호운을 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눈빛뿐이다. 정말 융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자신은 오직 호운을 손에 넣기 위해 황제에게 등을 지고 이곳까지 왔다. 그런데 정작 이런 순간에 호운을 손 놓는 것은 주객전도다. 그러나 눈앞의 호운이 생전 처음 자신에게 부탁을 했다. 입을 맞추고 부탁을 하고 저 스스로 자신에게 왔다.

융은 혼란스러웠다. 고작 잠시간 떨어지는 것이다. 그 정도라면 그 부탁을 들어줘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엎치락뒤치락 하였다. 그러나 이내 만약 여기서 호운의 제안을 거절하고 복치운을 버리고 호운만을 데려간 사이, 혹여 복치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방금 같은 입맞춤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도피행의 사이 겨우 연화된 호운의 눈빛은 전처럼 날카로워 질 것이다. 호운은 전처럼 자신을 두려워하고 꺼려하고, 그리고 미워할 것이다.

그 눈빛이 다시금 자신을 바라볼 것을 떠올리자 심장에 화살이 꽂힌 것처럼 화끈거렸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고 아픈 그것이 실현될 것이라는 상상은 융의 판단력을 흐렸다.

"가지 않을 거요?"

뒤에서 불쑥 들린 말소리에 융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느새 온 것인지 커다란 나무 뒤로 뱃사공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표정이 야릇한 것이 아무래도 방금 전 호운과 융이 주고받은 입맞춤을 본 모양이다. 눈앞의 호운에게 신경이 팔려 사공이 여기까지 접근하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한 스스로에게 융은 환멸을 느꼈다.

"융, 부탁이야."

호운이 융의 손을 잡으며 말하였다. 손으로 전해지는 온기에 융은 호운의 눈을 보았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자신의 눈을 피하지도 않고 자신을 피하지도 않고. 호운은 그렇게 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결국 저 물가에 선 복치운을 위해서라니 뱃속이 싸르르 했다.

'그래서 어쩔거냐. 이 손을 뿌리치기라도 할 거냐.'

융은 어쩔 수 없는 분을 삭이는 속을 억누른 채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손안의 온기를 콱 틀어쥐고 멀찍이 선 뱃사공에게 말했다.

"지금 간다."

복치운은 강가에 선 호운을 보고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호운은 아무말 없이 뒤로 물러섰고 융은 복치운의 등을 뱃전으로 밀었다.

"형님!"

복치운이 호운을 불렀지만 호운은 그저 웃으며 말했다.

"먼저가. 뒤따라 갈 테니."

"형님…!"

복치운의 외침에 호운은 그저 미소만 지었다. 서융은 그런 복치운을 억지로 뱃전 위로 끌어 올렸다. 복치운은 이미 호운과 서융은 이야기가 끝났다는 것을 알고 결국 허탈한 얼굴로 뱃전에 주저앉았다. 그 옆에 서융이 섰고 뒤늦게 뱃사공이 배에 올라탔다.

"물이 험하니 돌아오는 시간까지 두시진 정도 걸릴 거요. 그때까지 기다리시오."

사공의 말에 호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 배가 옅은 물가를 떠나 짙은 물속으로 진입하였다. 새카만 밤의 강에 희미하게 빛이 바랜 조각배가 수면의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모습에 호운은 눈을 깜빡였다. 호운의 눈앞에서 배는 점차 멀어져 잔잔하던 물가를 벗어나 거친 교룡의 영역으로 침입하기 시작했다. 물길 곳곳에 뾰족하게 솟아오른 바위사이를 작은 쪽배가 위태롭게 스치는 모습을 호운은 마음을 졸이며 지켜보았다.

호운이 멀리서 들리는 땅울림을 느낀 것은 그때였다. 갑작스러운 땅울림에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달이 희미한 밤이라 어둑어둑 했던 하늘이 땅울림이 울리는 방향으로 부터 밝아지는 것이 눈에 확연히 보였다. 마치 새벽이 미쳐 한밤에 찾아온 것처럼 붉게 물드는 하늘에 호운은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곧 그 붉음이 횃불에서 나온 빛이라는 것을 깨달은 호운은 얼른 강가의 수풀 사이로 몸을 숨겼다.

그 횃불을 따라 말을 탄 수십인의 병사들이 강가로 몰려들었다. 강가는 순식간에 병사들이 든 횃불로 붉게 물들고 어둠에 묻혀있던 풍경이 선명하게 너울거렸다. 강가에 몰려 나온 병사들은 교룡의 안으로 들어선 쪽배를 발견하였다.

"저기다!"

한 병사가 외치자 몇 사람인가의 병사들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외쳤다.

"복치운입니다!"

"서장군입니다!"

"호씨는 보이지 않습니다!"

"총비 유씨도 보이지 않습니다!"

병사들의 외침을 모두 들은 붉은 피풍의를 걸친 병사가 큰 소리로 외쳤다.

"화살을 쏴라! 절대 물을 건너게 해서는 안 된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말 위에 선 병사들이 화살을 쏘기 시작하였다. 허공을 향해 쏘아진 화살이 작은 쪽배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그러나 거친 물살에 요동치는 작은 쪽배는 일부러 화살을 피하는 것처럼 잘도 이리저리 움직였고 점차 쪽배의 모습이 멀어졌다.

병사들이 모여든 곳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몸을 감춘 호운은 숨죽인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멀리. 멀리 가라!

위태위태하게 화살에 꿰뚫리려는 쪽배를 보며 호운은 마음속으로 애원하였다. 그러나 그런 호운의 애원이 무색하게 하나의 화살이 날카롭게 허공을 갈라 멀리 떨어진 복치운의 등에 꽂혔다.

호운은 비명이 터져나올 뻔한 입을 틀어막고 두 눈을 크게 떴다. 화살을 맞은 복치운의 몸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세찬 수류에 튕겨진 배가 복치운이 기운 것과 반대방향으로 튕겼다. 그리고 그 반동으로 힘이 빠진 복치운의 품안의 아기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그 모든 것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호운은 눈을 크게 뜨고 허공으로 떠오른 아이를 보았다. 순간적으로, 세상이 아주 느려진 것처럼 모든 상황이 똑똑히 호운의 눈에 들어왔다. 복치운이 허공으로 떠오른 아이에게 손을 뻗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손가락이 허무하게 강보 끝을 스치고, 아이가 포물선을 그리며 강 속으로 빨려들어 가듯 사라졌다.

풍덩!

물소리에 호운은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다급히 둘러보았다. 병사들은 물에 빠진 것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뱃전의 사람들을 향해 계속해서 화살을 쏘아댔다. 멀리서도 복치운이 비명을 지르며 떠내려가는 아기를 향해 손을 뻗는 모습이 보였다. 팔을 휘두르는 모양으로 보아 그리 심한 상처는 입은 것 같지 않았다.

호운은 그 모습을 보다 못해 물로 뛰어들었다.

초봄이라지만 며칠전에는 눈까지 내린 터라 물 안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러나 호운은 이를 악물고 물살을 헤집었다. 다행히 아이가 튕겨나간 곳은 교룡의 영역 밖이었다. 그러나 세차게 흐르는 물줄기는 눈으로 보는 것 보다 더욱 거칠어서, 당장이라도 물에 휩쓸려 갈 것 같았다. 호운은 그런 몸을 애써 가누며 떠내려가는 아이를 붙들었다. 겨우겨우 아이의 강보를 붙들고 보니 멀리서 복치운이 무어라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급류에 휩쓸린 호운의 귀에 들리는 것은 오직 거친 물소리 뿐이었다.

콰르르르륵!

호운은 거친 물줄기에 휩싸인 채 몇 번이나 탁류에 삼켜지고 가라앉고 뜨기를 반복하다 겨우 뭍에 닿았다. 이는 천행이라 할 수 있었다. 길게 뻗어 나온 나무뿌리를 움켜쥔 호운은 품안에 아이를 단단히 껴안은 채 뭍으로 기어 나왔다.

남방을 지날 때 갓난아기는 모두 헤엄을 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는데 아무래도 그것이 사실이었던지, 아이는 크게 물을 먹은 눈치가 아니었다. 겨우 아기를 건져 물가로 나온 호운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고 주변을 확인해 보니, 처음 호운이 뛰어든 기슭에서 수백장은 떨어진 거리였다. 그러나 수백장의 거리라 하여도 말을 탄 병사들에게는 지척이나 다름이 없었다. 멀리, 병사들이 자신을 발견하고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강위를 보니 이미 복치운과 융을 태운 배는 작아져 모습조차 분간하기 힘들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호운은 그대로 아기를 안은 채 달리기 시작했다. 품 안의 어린 아이는 강물에 젖은 추위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달리는 호운의 턱을 따라 물줄기가 비처럼 뚝뚝 떨어졌다.

"미안하다, 미안해."

자신의 혈육이나 다름없는 유란란이 세상에 남긴 유일한 생명이건만 호운은 아이가 이리 추위에 떠는데도 해줄 것이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달리는 일 뿐이었다. 가급적 멀리. 병사들에게서 조금 더 멀리. 한참을 달리던 호운은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고 달렸다.

그러나 처음부터 물속에 빠져 기진하였던 호운과 혈기왕성한 병사들의 달리기 실력은 비교할 것이 못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말을 탄 병사들이 두 다리로 달리는 호운의 차이는 클 수 밖에 없어, 호운은 금세 포위되고 말았다.

수십명의 병사들이 호운을 앞뒤로 둘러싸고 위협적으로 창을 들이밀었다. 호운은 품에 아이를 안은 채 마른침을 삼켰다. 의연한 모습을 보이고 싶은데 추위에 굳은 몸은 자꾸 움츠러들었다. 호운은 당장이라도 병사들이 화살을 쏠까, 아니면 칼을 휘둘러올까 몰라 품안의 아이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러는 와중에 호운을 둘러싼 병사들 중 하나가 품안에서 족자를 꺼내어 확인하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생포해라! 조금이라도 다쳐서는 안 된다!"

뜻밖의 외침에 호운은 깜짝 놀라 그리 외친 병사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나 이내 그는 삽시간에 달려든 병사들에 의해 포박되어 바닥을 굴렀다. 그 사이 한 병사의 거친 손길에 품안의 아이도 놓치고 말았다. 포박되기 직전 아이를 향해 필사적으로 뻗은 호운의 손은 그저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떠나올 때는 두 달이 넘게 걸린 길을 돌아올 때는 채 열흘도 걸리지 않고 돌아왔다. 도중에 수십 번을 마차를 갈아타며 호운은 도성으로 압송되었다. 호운을 옥죄었던 포승줄은 마차를 탄 순간 풀렸다. 그리고 처음에는 허름하던 마차는 도성으로 접근하며 점점 호화로워졌다. 분명 죄인임에도 호화로운 마차 안에 실려 포박조차 되지 않은 채 도성으로 압송되는 상황이 오히려 호운은 불안했다. 그리고 떼어놓아진 아이가 어이되었는지도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침내 호운을 태운 마차가 도성의 성문을 지났다. 막 장마에 접어든 도성의 하늘은 어두침침했고 공기가 묵직했다. 마차는 쉼 없이 도성의 대로를 달려 황궁으로 향했다.

우르릉, 천둥이 울리더니 호운이 마차에서 내릴 때 막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투둑투둑 한두 방울 씩 쏟아지던 비는 이윽고 장대비가 되어 쏟아져 내렸고 병사들은 분분히 호운을 건물 안으로 끌고 갔다. 비록 포박은 되어있지 않았지만 병사들에게 주변을 빈틈없이 옥죄어진 호운은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호운은 병사들에게 이끌린 채 쉼 없이 황궁안을 걸어 마침내 황궁의 가장 크고 웅장한 건물의 앞에 섰다. 수십 개의 계단위에 올라선 건물을 향해 재촉당한 호운은 점차 비에 젖어가는 몸보다 안에서 오는 불안의 한기에 떨었다.

한걸음 한걸음, 계단을 오르고 마침내 계단이 끝나자 호운의 눈앞에 웅장한 기둥들이 들어선 건물 내부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 익숙치는 않아도 호운도 알고 있는 대전이었다. 호운이 대전 앞에 당도하였을 때 마침 안에서 웬 여인네가 시종들의 등에 업혀 나왔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여인은 호운에게도 낯이 익었다. 바로 오왕비 옥씨였다. 호운은 어이해 그녀가 이런 낯으로 시종들에게 업혀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안으로 들이지 않고 무엇을 하는 것이냐."

멍하니 시종들에게 업혀간 오왕비를 바라보던 호운은 건물 안에서 들린 목소리에 흠칫하고 어깨를 떨었다. 그러나 흠칫한 호운과 달리 병사들은 그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것처럼 호운을 안으로, 안으로 이끌었다.

대전 안은 밖에서 볼 때보다 넓고 웅장하였다. 그러나 호운은 그 웅장함 보다 옥좌아래 선  황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는 마치 보고 싶지 않은 것을 굳이 눈으로 확인하는 것과 비슷하였다. 두렵고 두려운 존재지만 눈앞에 있는 이상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는 호운이 마지막으로 본 그날처럼 금빛 용포를 걸치고 있었다. 그래도 한차례 반란이 있었으니 얼굴이 조금이라도 상했어야 하련만 얼굴하나 상한 곳 없이 생생하였고 눈빛은 강렬했다. 

그러나 호운은 그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는 황제의 얼굴보다 그의 손에 들린 파르스름한 빛의 장검과 거기서 흘러내리는 붉은 것과, 그리고 황제의 발치에 있는 작은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작은 덩어리는 온통 붉은 액체로 더럽혀져있었는데 그 색이 황제가 든 장검에서 흘러내리는 것과 닮아있었다.

저것이 무엇일까.

호운은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다 그것이 작은 손가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잘 보니 작은 머리도 있고 가슴도 있고, 머리카락도 있다. 그 가슴에서 쉼없이 흘러나오는 액체가 바닥을 적셨다고, 저 작은 몸에서 흘러나온 것이 바로 황제의 검을 적신 것이라고 머리가 알려주는데도 호운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것이 아이의 시체라고 믿고 싶지가 않았다.

호운은 그 자리에서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가 제대로 몸을 가눌 수 없었다. 그러나 시선은 여전히 바닥에서 붉은 피를 흘리는 아이에게 고정된 채였다. 작고 하얀 손가락이 힘없이 강보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유란란이 그토록 미워하였고 원망한 끝에 낳은 사랑하는 아이. 유란란처럼 새하얗던 아이는 더욱 새하얗게 변해서 황제의 발치에 누워있었다. 

호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제는 눈물도 메말랐다 생각했는데 그렇게 눈물이 흘렀다. 호운은 멍하니 눈물을 흘리며 이제는 황제가 된 사내를 올려보았다. 처음 저 사내를 만난 것이 16년 전이었고 지금 호운이 34 살이니 호운은 삶의 절반 이상을 저 사내와 마주치며 살았다. 저 사내와 만난 후의 자신의 인생이 어떠했나를 생각하니 호운은 허탈했다. 사내와 마주칠 때마다 호운의 인생은 망가졌고 그에게 남은 것은 슬픔뿐이다.

바닥에 남겨진 아이의 머리칼이 대전안의 횃불에 반사되어 힘없이 반짝거렸다. 그 얼굴이 보이지 않아 아이가 고통스러워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알 수 없는 것이 다행인가 불행인가. 호운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왜 그리 우는 것이냐."

황제가 호운의 앞으로 걸어오며 물었다. 여전히 그 손에는 핏방울이 맺힌 검이 들려있었고 눈빛은 날카로웠다. 그러나 호운은 마냥 눈물을 흘리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제 갓…갓 태어난 아이였습니다. 어이해 죽이신 겁니까."

호운의 물음에 황제는 잠시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잔인하게 웃었다.

"진성왕의 아이였으니 죽일 수밖에."

"겨우 그런 것 때문에…!"

짝!

호운이 외친 순간 황제가 호운의 뺨을 갈겼다. 순식간에 얼굴이 빨갛게 부어오를 정도였지만 호운은 아무것도 못 느낀 사람처럼 멍하니 눈물만 흘렸다.

"겨우 그런 것? 반역자의 씨앗이 왜 겨우 그런 것이 되느냐. 반역자의 씨는 결국 반역자가 될 뿐인데 내가 어찌 그런 것을 살려둘까."

눈물이 점점 더 굵어져 이제는 앞조차 분간할 수 없어 호운은 결국 고개를 떨어뜨렸다. 반항도 반론도 아무것도 의미가 없었다. 황제는 우는 호운을 보고 칼을 바닥에 팽개쳤다. 그리고 속삭이듯 물었다.

"유씨가 네게 애원하였느냐? 아니면, 월왕의 아들이 네게 부귀영화라도 준다고 헛소리라도 하더냐? 그게 아니면 내가 네게 소원하게 군 것이 원망스러웠더냐."

황제의 말에 호운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황제가 무엇을 묻고 있는지도 몰랐다. 고개를 숙인채 눈물만 뚝뚝 흘리는 호운을 보며 황제는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게 왜 그리 후회하도록 미련한 짓을 하느냐."

호운을 탓하듯 말하는 황제의 어조는 그 답지 않게 부드러웠다. 황제는 무릎 꿇은 호운에게 바싹 다가와 앉았다.

"황상 위험합니다!"

병사들이 황제를 말렸지만 황제는 망설임 없이 호운의 코앞까지 다가와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눈물이 흘렀다. 황제는 뺨을 흐르는 호운의 눈물을 손으로 훑으며 낮게 웃었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빛은 흉악하게 빛났다. 호운의 등줄기로 한기가 흘렀다. 

"그래, 한동안 즐거웠느냐? 서장군 그놈이 방중술로는 제법 이름을 날리고 있으니 그리 심심하지는 않았을테지?"

황제는 부어오른 호운의 뺨을 만지다 주변을 보고 명했다.

"치워라."

황제의 명을 따라 바닥을 구르던 아이의 시체가 거적에 싸여 대전 밖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흘러 굳은 핏자국도 여전하였고 바닥을 구르는 검에서 뚝뚝 흘러내리는 핏방울도 여전하였다. 황제는 핏자국이 남은 바닥을 응시하는 호운을 보았다.

"왜 그런 표정인게냐."

황제의 물음에 호운은 대답하지 않은 채 그저 눈물만 흘렸다. 황제는 자꾸만 흐르는 호운의 눈물을 닦아주다 주변의 병사들을 보고 명했다.

"모두 물러나라."

"황상!"

"물러나라 하였다."

엄한 황제의 말에 병사들은 곧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섰다. 병사들이 모두 물러난 후에도 호운은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였다. 황제는 그대로 무릎 꿇은 호운의 몸을 자신에게 끌어 당겨 옷을 벗겨냈다. 수많은 시선들이 자신을 향하는데도 호운은 그저 무력하니 황제의 손에 몸을 맡겼다.

황제는 성급했다. 평소에는 기름으로 안을 정돈하는 정도는 하였던 그가 오늘은 무작정 호운의 안으로 꿰뚫어가려 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데다 메마른 내부는 쉽사리 황제를 안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몇 번인가 호운의 안으로 침입하여 애쓰던 황제는 곧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멀찍이 선 내관에게 유등의 기름을 가져오라 명하였다. 그리고 평소처럼 손가락에 기름을 묻혀 호운의 안을 어루만졌다.

"그놈에게 안기지 않은 게냐, 응?"

귓전에서 속삭이는 소리에 호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단히 굳어있는 호운의 내부는 대답보다 더 확실한 것을 황제에게 알렸고 황제는 단숨에 기분이 좋아졌다. 기름에 젖은 손가락이 호운의 내부에서 끈끈한 소리를 내며 제멋대로 분탕질 쳐댔다.

"하긴 정신이 없어 그럴 틈이 없었겠지. 도망가느라 바빠 그럴 정신이라도 있었겠느냐."

이제는 슬슬 여유마저 묻어나오는 어조로 중얼거리는 황제의 숨소리가 점차 거칠어졌다. 내부를 어지럽히며 귓가를 핥고 빠는 황제의 동작에도 호운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내부를 분탕질 치던 손가락이 빠져나가고 더 굵은 것이 안으로 침입했을 때도 호운은 반응하지 않았다. 호운의 눈은 이미 눈물로 흐려져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였다.

호운은 기진맥진해 멍한 눈으로 눈앞의 풍경을 보았다. 눈물로 아른아른 멀어지는 풍경의 휘황함이 이곳이 어디인지를 새삼 각인시켰다. 횃불은 여전히 대전 안을 환히 밝히고 있었고 주변에 서 있던 병사들도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었다. 심지어 자신을 유린하는 황제는 복장마저 흩트리지 않은 채였다.

이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었다. 아름다운 궁녀들과 위엄어린 병사들, 그리고 충실한 시종들과 강인한 황제. 그러나 자신은 그런 이들이 모인 곳에서 벌거벗겨져 이런 꼴로 뒹굴고 있었다. 그것도 아직 유란란의 아이가 흘린 핏자국이 남은 이곳에서.

비참하다 못해 처참하였다.

학. 하악.

귓전에 들리는 거친 숨소리가 아련했다. 호운은 뜨거운 것을 토해내고 느긋하게 허리를 움직이는 황제의 움직임을 느끼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저를 왜 살려두시는 겁니까."

"내가 마음에 드는 것을 살려두는데 이유가 필요하다 생각하느냐?"

황제의 대답에 호운은 다시 물었다.

"어디가 그리 마음에 드십니까."

호운이 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디에나 있는 사내가 아닙니까. 어린 것도 아니고,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황상을 매혹할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제는 젊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어디가 그리 마음에 드셨습니까."

점차 호운의 목소리는 통곡처럼 변해갔다.

"차라리 그냥 죽이시지요, 왜 자꾸 저를 이리 괴롭히십니까?" 

황제는 호운의 통곡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 그의 목에 입술을 대며 물었다.

"왜 짐이 그대를 죽여야 하는가. 그리고, 짐이 그대롤 괴롭혔단 말인가?"

호운의 턱이 덜덜 떨렸다. 분기보다 슬픔이 가슴에 가득 찼지만 등 뒤에서 그를 끌어안고 있는 황제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 괴롭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무엇이 그리 괴롭단 말이냐."

황제의 말에 호운은 웃었다. 어이없는 듯, 허탈한듯 웃었다.

"왜 웃는 것이냐?"

호운은 그저 말하지 못하고 웃었다. 웃는 와중에도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웃으면서 울고 있는 호운은 마치 실성한 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황제는 호운이 흘리는 허탈한 웃음에 그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그는 여태 단 한 번도 호운이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아이를 어르듯 호운의 몸을 들어 올려 자신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바꿔 앉혔다. 한번 빠져나갔다 다시금 안을 묵직하게 파고드는 침탈의 고통도 이미 호운에게는 멀게 느껴졌다. 황제가 호운의 얼굴을 마주하였을 때는 이미 그의 얼굴에서는 헛웃음조차 사라진 후였다. 호운은 마치 가면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는 웃음이 사라진 호운의 얼굴에 혀를 찼다.

황제와 마주한 호운이 한참의 침묵 후에 입을 열었다.

"치운이를, 죽이실 겁니까."

그러나 그 입에서 나온 것은 황제가 듣고 싶은 말이 아니었기에 황제는 대번에 미간을 찡그렸다.

"월왕의 핏줄이니 죽여야지."

"융을 죽이실 겁니까."

"배신자니 당연히 죽여야지."

"그런데도 저를 살려두실 겁니까."

"그렇다."

대답을 하면서도 내내 찡그려진 황제의 얼굴을 호운은 보지도 못했다. 그저 그의 귀에는 오직 황제의 대답만이 들렸다. 이제는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한마디 한마디를 주고 받을 때마다 가슴속이 텅 비었다. 자신에게는 힘이 없고 결국 멀쩡히 두 눈을 뜨고 모두가 죽어 없어지는 것을 구경만 해야 할 자신의 처지가 신물이 났다.

예전이었으면 어쩔 수 없다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싫었다. 어차피 유란란은 죽었다. 복치운은 떠나고 없다. 아이도 죽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이제 알량한 제 목숨 뿐이었다.

새로 어딘가로 떠나 새로 사람을 만나, 새로 삶을 살아가기에 그는 너무 지쳐있었다.

"그러지 말고 제 목도 치십시오. 저 역시 황상이 말씀하시는 반역자의 도당이 아닙니까."

"그것은 내가 결정할 문제다. 네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황제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흔들리는 것은 오직 물기로 흐려진 호운의 시선과 목소리 뿐이었다. 황제는 그리 말하고 다시 호운의 허리를 강하게 붙들었다. 다시금 거칠어지는 내부의 흉기의 움직임을 느끼며 호운은 고개를 숙였다.

너무나 담담한 그 소리에, 자신의 손을 잡은 양손의 감촉에. 그리고 안에서 꿈틀대는 성기의 움직임에 마음속에서 뜨거운 것이 이글이글 치밀었다. 점차 거칠어져가는 황제의 숨소리처럼 호운의 속내가 거칠어졌다. 순식간에 폭풍이 이는 밤처럼 흐려진 호운의 눈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오직 호사스러운 비단옷에 싸인 가슴팍 뿐이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의 오만함이 만든 단단한 가슴팍에 호운은 자신의 감정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이것이 증오였다. 눈앞이 빨갛게 변하고 숨이 막히고, 혈관속의 피들이 단번에 들끓는 이것이 증오였다.

눈앞의 사내가 죽도록 미웠다.

호운은 자신의 감정을 이제야 알았다. 어미가 그리 자신을 버렸어도. 융이 자신에게 그리 대했어도. 진부용이 자신을 배신했어도. 유란란이 그렇게 죽어버렸어도. 그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래도 살아갈 수는 있었다. 버틸 수 있었다. 허탈하기도 했고 아프기도 했고 슬프기도 했지만 이내 체념하고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체념이 아닌 증오가 가슴속에 들끓었다.

자신을 이토록 비참하고 괴롭게 만드는 눈앞의 사내가 죽도록 미웠다. 

철퍽, 철퍽. 

황제의 움직임에 맞춰 안에서 흘린 액체가 음탕한 소리를 흘리는 것에 맞춰 호운의 심장은 점차 싸늘하게 식어갔다. 빠르게 뛰던 심장이 점차 느리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쉴 새 없이 흐르던 눈물도 멎어가는 것을 느꼈다. 강렬한 미움으로 눈앞이 일그러지자 다른 감정들마저 미움으로 바뀌어 내뱉는 숨조차 썼다. 호운은 저를 끌어안은 채 다시금 절정을 향해 밭은 숨을 내쉬는 황제의 가슴팍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며 물었다.

"그럼, 저, 를 살려두실, 생각이십니까."

"자꾸 같은 것을 묻는 구나."

너무나 당연한 것을 묻는 호운을 보며 황제는 어이없는 듯 대답하였다. 당연히 그리 할 것이었다. 호운의 안으로 파고들어 지복을 맛보고 있는 황제는 이미 호운을 죽일 마음 같은 것은 없었다. 한때는 감히 자신의 총애를 저버리고 달아난 호운의 목을 치리라 이를 갈았지만 어차피 죽인다면 이 몸을 질릴 때 까지 맛본 다음이라도 늦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지금은 아니었다. 아직 황제는 이 몸에 홀려 있었다.

그러한 욕구로 가득찬 황제의 대답에 마침내 호운의 눈으로 흐르던 눈물이 멎었다. 그러나 황제는 그런 호운의 변화 따위는 눈치 채지 못하였다. 그는 제 품안의 호운이 어이 변해 가는지 눈치 채지 못한 채 자신의 욕심을 채우느라 바빴다.

마침내 마지막 눈물이 호운의 뺨을 굴러 떨어지자 호운의 얼굴은 마치 흘려낸 눈물이 모든 감정을 쏟아낸 것처럼 무표정하였다.

흡, 흐읍, 거칠어지는 마찰음과 함께 점차 숨소리를 거칠게 하며 호운의 허리를 쥔 손에 힘을 더하던 황제는 갑작스레 힘없이 늘어져있던 호운의 손이 자신을 향해 뻗어오자 움직임을 멈췄다. 창백한 손등에는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부드러움이라고는 하나 없는 각이 진 그 손이 천천히 황제의 어깨를 스치고 그의 등으로 돌자 황제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호운이 이리 자발적으로 황제에게 손을 댄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언제나 그는 누군가에게 등을 떠밀려 황제의 앞에 나타났고 때로는 황제 본인의 손에 끌려오기도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호운의 손은 단 한번도 황제를 향한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 손이, 황제의 어깨를 너머 등으로 돌고 있었다. 천천히 황제의 등으로 돈 호운의 손이 마치 황제의 등줄기를 훑듯 천천히 움직였다.

옷 너머로 전해진 희미한 온기에 황제의 등줄기에 엄청난 쾌감이 관통했다. 단지 언제나 힘없이 늘어져있던 팔이 자신의 등을 돈 것뿐인데도 눈앞이 어찔 거릴 정도였다. 호운의 양팔이 황제의 등으로 돈 순간 황제는 그야말로 쾌락의 무아지경에 빠졌다.

철퍽, 철퍽!

살이 마찰하는 소리와 물소리가 섞여 요란하게 울렸다. 조금 전 보다 더욱 거칠어진 소리를 울리며 황제는 호운의 엉덩이와 허리를 쥔 손에 힘을 더 주었다. 엉덩이의 모양이 일그러질 정도로 힘을 준 황제의 격한 몸짓에도 호운의 손은 그의 등에 단단히 돌려진 채였다.

마침내 황제가 탄성을 토해내고 탄성과 함께 호운의 속으로 뜨거운 것을 토해낸 순간, 등으로 돌려져 있던 호운의 손이 천천히 아래를 향했다. 애무처럼 느릿한 그 동작에 토정의 여운에 만취해있던 황제의 열정이 다시금 치솟았다. 그러나 그것은 애무가 아니었다. 부드럽고 느릿하게 황제의 등을 훑은 손은 황제의 허리를 스쳐 그의 골반으로 향했다. 그 순간이었다. 느릿하던 손이 순식간에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쾌락에 머리까지 둔해져있던 황제는 갑작스러운 호운의 행동에 그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어이해 호운이 자신의 허리춤에 꽂혀있던 단도를 뽑아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새하얀 손과 비견될만한 새하얀 칼날이 대전 안을 비추는 빛을 받아 번쩍 빛났다.

다음순간, 그 단도가 자신을 향해 휘둘러진 것을 본 그는 본능적으로 호운의 팔을 밀쳤다. 그러나 워낙에 지근거리였던 데다 토정후의 기력이 빠진 몸인지라 호운의 행동을 완벽하게 저지할 수는 없었다.

찍!

비단이 날카로운 비명을 토하며 찢어지고 단도가 황제의 팔에 깊숙이 박혀들었다. 살이 찢기고 피가 터졌다. 황제의 금빛 용포가 피로 더럽혀지자 병사들이 우르르 창과 칼을 들고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렇게 모든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황제가 채 무어라 외치기 전에 황제를 향해 단도를 내민 호운의 등으로 병사가 창을 찔렀다. 그 창이 정확히 호운의 등을 꿰뚫자 호운의 몸은 크게 뒤로 휘었다.

푹!

들리지 않아야 할 뼈와 살을 가르는 쇳소리가 황제의 귀로 선명하게 들렸다. 황제의 앞에 선 호운의 가슴을 뚫고 날카로운 첨단이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날카로운 쇳조각을 타고 흐르는 피는 분명 호운의 피였지만, 호운은 흔들리지 않고 황제의 팔을 찌른 단도에 힘을 주었다. 분명 단도에 찔린 것은 황제의 팔이었음에도 그에 연동하듯 호운의 목에서 쿨럭, 소리가 나더니 검붉은 피를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호운의 가슴에 고개를 내밀고 있던 쇳조각이 점차 작아지더니 이내 가슴에 검은 구멍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마침내 쇳조각이 모두 사라지자 검은 구멍에서 검붉은 피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흘러내리는 피에 모든 생기가 빨려나간 것처럼 호운의 몸이 힘없이 무너져 황제의 가슴팍에 쓰러졌다. 호운의 입에서, 그리고 가슴에서 흘러내린 피가 황제의 가슴께로 흘러내렸다. 가슴께의 옷자락을 적신 피는 순식간에 안으로 침입해 황제의 피부에 닿았다. 

맞닿은 피부는 얼음처럼 차가운데 검붉은 피는 용암처럼 뜨거웠다.

"폐하!"

"황상!"

병사들이 무어라 소리를 지르며 호운을 끌어내려는 모습에 황제는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재빨리 병사들의 손을 밀쳐낸 후 큰 소리로 외쳤다.

"어서, 어서 어의를 불러와라 어서!"

"황상, 먼저 단도를…!"

손에 피묻은 창을 든 병사가 무릎을 꿇고 황제를 향해 외쳤다. 아직도 방울져 떨어져는 피를 본 순간 황제는 제 팔에 꽂혀있던 단도를 뽑아 병사의 목을 그었다. 동맥이 잘렸는지 폭포 같은 피가 솟아올랐다. 악! 병사들 사이에서 비명이 울리고 순식간에 목이 베인 병사가 허우적거리다 쿵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갔다. 그러나 황제는 피 묻은 단도를 집어던지고 호운의 가슴을 누르며 외쳤다. 그는 하의조차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채 호운의 가슴을 억눌렀다.

"어서 어의를 부르지 않고 뭣들 하는거냐! 만에 하나 호씨가 죽는다면 네놈들, 단 한 놈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어서 어의를 불러와라 어서!"

황제의 쩌렁쩌렁한 외침에 시종과 병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제가 입은 상처에 아랑곳 않고 피를 뿜어내는 호운의 가슴을 눌렀다. 손가락 사이로 솟는 뜨거운 피에 황제의 손이 덜덜 떨렸다. 점차 호운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와 황제의 팔에서 흘러내린 피가 뒤섞여 바닥에 고여 웅덩이를 만들어갔고 황제의 노성이 이어졌다.

"어의는 아직이냐!"

소리를 지르는 황제의 목소리에 바닥에 거꾸러졌던 호운의 입가에서 가느다란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움찔거리는 호운의 동작에 황제는 얼른 귀를 대고 그의 소리에 귀기울였다.

무어라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아 처음에는 그저 숨만 뻐끔거리는 소리처럼 들리더니 마침내 호운이 무어라 말하는지 황제는 알아들었다.

"죽어…."

그러나 이는 아니 듣느니만 못한 소리였다. 호운의 입에서 나온 말에 황제는 눈을 깜빡였다. 지금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호운이 자신을 향해 말하였다. 다 죽어가며 제 입에서, 가슴에서, 그리고 전신에서 피를 쏟으면서 가까스로 흘러나온 말이 황제를 저주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서도 황제는 호운의 가슴을 막은 손을 치우지 못했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굳은 것처럼 호운의 가슴을 억누른 채 그의 얼굴을 보았다.

출혈이 지속되어 점차 창백해진 호운은 제 가슴에서 분수같이 오르는 피를 막는 황제를 비웃었다. 그 비웃음이 황제가 처음 보는 호운의 웃음이었다. 잔뜩 비틀리고 일그러져 있었지만, 이런 웃음마저도 호운이 짓는 것을 황제는 본적이 없었다.

키득키득 실성한 것처럼 웃으며 다시 죽으라는 말을 토해낸 호운은 쿨럭 거친 기침을 하더니 왈칵 피를 토해내고 축 늘어졌다. 그 순간 뒤늦게 달려 들어온 어의들이 구멍난 가슴을 억누르고 있는 황제의 눈치를 살피다 호운의 곁에 앉았다. 

상처를 압박한다, 피를 멎게 한다, 침을 놓는다 분주한 어의들을 보며 황제는 멍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구경만 하고 서 있었다. 어째선지 상처 입은 팔보다 호운의 피로 젖은 손이 지끈지끈 아파오는 것 같았다.

호운의 소원과 달리 황제는 죽지 않았다. 그리고 호운 또한 죽지 않았다. 죽지 못했다. 서슬 퍼런 황제의 명에 대경한 의원들 수십 인이 달려들어 겨우겨우 목숨은 부지했다. 허나 실혈이 너무 심해 한 달이 넘도록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가끔 눈을 떠도 헛소리를 하며 정신이 오락가락했는데, 그때마다도 입에서는 황제를 향한 저주만이 흘러나와 의원이 죽어나갔다.

마침내 호운이 제대로 정신을 차린 것은 그 일이 있고서 한 달 하고도 보름이 지났을 때쯤 이었다. 마침 정신을 차린 호운의 곁에는 황제가 서 있었다. 한 달 보름동안 호운이 다시 정신을 차리기를 간절히 원했던 황제는 눈을 뜬 호운을 보고 저도 모르게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 동안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도성에서, 그것도 황궁에서 황제가 부상을 당한 일로 황궁은 발칵 뒤집혔다. 황궁의 수비에 임하는 수많은 무관들이 좌천되거나 유배되었다. 그리고 그날 황제가 칼에 찔린 자리에 있던 병사들은 모조리 참수되었다. 그러나 정작 황제는 제게 해를 끼친 호운만은 처벌하지 못하였다. 도리어 그는 지금처럼 호운의 곁에서 맴돌며 언제 그가 눈을 뜨나 노심초사하여야 했다.

황제는 이러한 스스로에게 당황하였다. 원래대로라면 아무리 그 몸이 마음에 들더라도 감히 황제의 몸을 상하게 한 호운을 살려두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는 호운을 살려두었다. 그것으로 부족해 지난 한달 보름동안 호운이 누워있는 정궁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가끔은 호운이 누운 침상에 나란히 누워 그의 모습을 지켜보기도 하였다. 그는 그런 스스로의 결정과 행동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토록 애타게 기다린 호운이 드디어 눈을 떴다. 황제는 가물거리는 호운의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이미 황제의 팔에 난 상처는 모두 나은 상황이었다. 애초에 호운처럼 악력이 약한 자가 어설프게 찌른 상처이니 보기에만 요란할 뿐 치명상이 될것도 아니었다.

눈을 뜬 호운은 멍하니 천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을 차렸느냐?"

황제가 말을 걸자 호운은 멍하니 천정을 바라보던 시선을 황제에게 돌렸다. 정신이 오락가락할 때는 그래도 황제를 노려보기는 하더니, 이번에는 그저 눈을 떠 황제를 한번 흘긋 본 후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마치, 황제를 보지도 못한 듯한 태도였다.

다른 때였다면 호운의 뺨이라도 쳐서 저를 보게 만들었을 황제였지만 이때만은 호운에게 손을 대기는커녕 말도 붙이지 못했다. 그만큼 오래도록 잠들어 있었던 호운은 창백했고 초췌해 보였다. 결국 황제는 그대로 호운을 두고서 자리를 떴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밤 황제는 호운이 있는 방을 찾았다. 깊은 시각 그가 그 방을 찾은 이유는 하나였다. 한참동안 호운을 몰아치며 제 욕심을 채운 황제는 씨근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호운을 끌아 안았다. 갓 병석에서 일어난 호운은 거의 반응도 보이지 못하고 축 늘어져 있었다. 아직 가슴에 감긴 붕대가 까슬하게 피부에 닿았다. 반응도 없는 이를 끌어안는 것이 무슨 재미가 있는지 황제는 도무지 호운을 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침수 드시겠습니까."

시종이 묻자 황제는 느릿하게 말했다.

"오늘은 이곳에서 침수 들 것이니 그리 알라."

황제의 말에 시종들은 눈치를 살피다 침상 위를 정리하고 물러났다. 황제는 호운을 끌어안은 채 이불안으로 기어들어갔다. 호운의 목덜미에 코를 묻은 황제는 냄새를 맡듯 숨을 들이쉬었다. 강하게 풍기는 약재의 냄새에 섞여 희미하게 피냄새가 났다. 약재의 냄새도 좋지 않았지만 피의 냄새도 좋지 않았다.

"쯧."

황제는 그 냄새에 혀를 차고 축 늘어진 호운의 몸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어째서인지 품안의 차가운 냉기를 품은 몸뚱이를 끌어안자 마음이 진정되었다.

어느 순간 잠이 들었던 황제는 숨이 막혀 눈을 떴다. 그리고 제 코를 찌르는 강한 피 냄새를 느꼈다. 황제는 가물거리는 눈을 떠 앞을 보았다. 황제의 몸 위에 누군가가 걸터앉아 목을 조르고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어 눈앞의 풍경을 확인한 황제는 눈이 크게 벌어졌다.

황제의 몸 위에 걸터앉아있는 것은 호운이었다. 그는 벌거벗은 채 양손으로 황제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핏기가 가셔 창백하던 눈매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것이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황제의 목을 조르기위해 용을 쓰기 때문인 것은 확연해 보였다.

비록 호운이 신체 멀쩡한 사내라지만 그는 지금 갓 병석에서 일어난 몸이었다. 오랜 시간 의식이 오락가락하였던 몸에는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아 황제의 목을 조르는 손가락에도 크게 힘이 들어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빨갛게 충혈된 눈이, 그리고 필사적으로 악다문 입술이 호운의 진심을 황제에게 보였다. 숨이 막혔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황제는 잠시 이 상황을 어이할지 알 수 없어 그저 멍하니 호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코를 찌르는 피냄새가 제 몸위에 걸터앉은 호운의 가슴에서 흘러나온 피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안 순간 그는 호운의 양손을 자신의 한손으로 모아 떼어냈다.

"쿨럭, 쿨럭."

그래도 숨은 제법 막혔던 모양인지 호운의 손을 떼어내자 기침이 터져나왔다. 황제의 기침소리에 얇은 휘장너머의 시종들이 불을 붙였다. 그러고 보니 평소에는 침전을 밝히는 등을 오늘은 다 꺼 두라 명하였던 것을 떠올린 황제는 눈썹을 찡그리고 호운을 보았다.

자신의 양손을 제압한 것이 고작 황제의 한손 임에도 호운은 손목이 잡힌 채 꼼짝도 하지 못하였다. 황제는 제 가슴에 피가 터졌는데도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었던 호운의 모습에 무어라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화가 나야할텐데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속에서 스멀스멀, 수천마리의 지네가 꿈틀거리는 것처럼 속이 싸하며 뒤틀렸다. 결국 황제는 그러쥐고 있었던 호운의 양팔을 뿌리치듯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원을 불러라, 상처를 제대로 붙여놓지 않으면 자신들의 목도 제대로 붙어있지 못할 것이라고 명하여라!"

자리에서 일어난 황제는 그 말만을 남기고 그대로 방을 나섰다. 시종들이 분분히 고개를 숙이는 가운데 침상위에 홀로 남겨진 호운은 힘없이 양팔을 늘어트렸다. 그런 호운의 얼굴은 방금전 같은 붉은 기운이라고는 터럭도 남아있지 않았다.

황제는 반쯤 벌거벗은 모양새로 황궁의 정원을 가로질렀다. 시종들이 분분히 옷을 들고 달려왔지만 그는 도저히 그 옷을 받아 입고 있을 정신이 없었다.

제대로 힘조차 줄 수 없는 손으로 자신의 목을 조르던 호운의 차가운 손끝이 아직도 생생하였다. 그 모습이 마치 가슴을 찔리고도 황제의 팔에 찔러 넣은 단도에 힘을 주던 그 모습과도 같아서 등줄기로 서늘한 것이 스쳤다. 한기가 든 황제가 그 자리에 멈춰 서자 시종들이 얼른 달려와 용포를 걸쳐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한기가 느껴졌다. 그 차가운 손이 아직도 목을 조르는 것처럼 서늘했다.

황제는 붉은 자국이 남은 자신의 목을 쓰다듬다 곧 그것을 뿌리치듯 걸음을 옮겼다. 그의 걸음은 침전이 아닌 후궁들이 머무는 처소로 향하였다.

후궁들은 갑작스러운 황제의 방문에 잔뜩 들뜬 분위기였다. 황제는 자신을 보고 교태를 부리며 달려나오는 후궁들의 모습에 미간을 찡그렸지만 치솟은 열기를 해결하기 위해 그녀들을 품에 안았다.

그리고 한동안 황제는 호운이 있는 정궁으로 향하지 않았다. 그는 한동안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던 여러 후궁들을 품으며 왠지 모를 한기를 느끼는 몸을 달래려 하였다. 그러나 누구를 안아도 심심하고 누구를 안아도 한기가 들었다. 아직도 그 차가운 손이 목을 조르는 것처럼 

뜨거워졌던 흥분도 금세 식곤 하였다. 자꾸만 그 하얀 손과 냉기를 떠올리는 자신에게 황제는 곤혹하였다. 그러나 호운을 생각하면 자꾸만 성욕이 일어 그는 어쩔 수 없이 여러 후궁들을 품었다. 만족도 못할 관계를 맺으며 황제의 마음속은 점차 호운에 대한 생각으로 묻혀버렸다.

그리고 며칠이 흐른 저녁. 오랫동안 망설이다 다시 호운의 처소를 찾은 황제는 모든 피가 발밑으로 빠져나가는 것 같은 경험을 했다. 호운이 있는 할 방안에 무언가가 힘없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추처럼 흰 광목에 힘없이 데롱데롱 매달려있는 것은 호운이었다. 목을 매고 축 늘어진 호운의 모습에 황제는 경악을 터트리며 얼린 호운에게 달려들었다. 다행히 목을 맨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지 목을 매었던 줄을 풀자 호운은 금방 쿨럭거리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파랗게 질려있던 얼굴에 핏기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황제가 노호성을 터트렸다.

"네가 죽고 싶은게냐…!"

황제의 말에 호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얀 목에 빨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모습에 황제는 서둘러 손을 뻗었다.

짝!

그런 황제의 손을 호운이 날카롭게 쳐냈다. 손등이 아릿할 만큼 날카로운 거부에 황제는 멍해졌다. 어느 사이엔가 바닥을 바라보고 있던 호운이 고개를 들어 황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기어린 그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색채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차가운 듯도 뜨거운 듯도 한 그 색채에 이름을 붙인다면 살의(殺意)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눈빛을 정면으로 받은 황제는 이를 악물었다. 순간적으로 분이 치밀었다. 감히 자신에게 이런 건방진 태도를 취하는 호운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호운의 목을 쳐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아니, 하다못해 저 건방진 눈알이라도 뽑아줘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그러나 황제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바닥에 쓰러진 호운을 팽개쳐둔 채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그대로 방을 나서려고 한 황제는 혹시나 호운이 다시 대들보에 목을 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대로 방을 나설 수가 없었다.

"내 다시 올 때 까지 저놈의 목숨이 붙어있지 않으면 너희들이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황제의 말에 방안으로 따라 들어왔던 시종들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고개를 숙이는 시종들을 확인 한 후 그대로 방을 나섰다.

그러나 그날이 채 지나가기도 전에 황제는 다시 정궁을 찾아야 했다. 호운이 다시 목을 맨 것이다. 다행히 시종이 금방 대들보에서 내렸다지만 그 과정에서 천에 목이 쓸려 피부가 찢어져 피를 흘리는 모양새가 참담해 보였다.

그 모습에 분개한 황제는 검을 뽑아들었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호운의 목을 벨것처럼 흉흉한 빛을 뿜는 검 끝은 호운의 곁으로는 접근하지도 않았다. 도리어 베어진 것은 호운을 구한 시종의 목이었다. 잘린 목이 데구르르 호운의 발치로 굴러갔다.

"꺄악!"

호운의 곁에 서 있던 어린 궁녀가 질겁하고 비명을 질렀지만 호운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잘린 시종의 목을 흘끔 보고 아직도 피가 방울져 흐르는 검을 쥔 황제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네가…!"

황제의 아름다운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는 검을 들고 부들부들 떨면서도 결코 호운을 내려치지 못했다. 흉흉하게 호운을 노려보던 황제는 곧 홱 소리가 날 정도로 몸을 돌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한 번 더 이런 일이 있으면 네놈들 모두의 목을 베어버릴 테다!"

그 말에 정궁의 시종들은 단번에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나 호운은 그 자세 그대로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황제가 시종의 목을 벤 데는 이유가 있었다. 네가 이러면 네 탓에 시종이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 후로도 호운은 몇 차례 목을 매려 시도하였다. 그때마다 시종들이 죽어나갔으나, 호운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자신의 행동에 누군가가 죽는다는 사실에 가슴아파하며 운신조차 못했을 그가 제 목숨은 물론 타인의 목숨마저 안중에 없는 듯 보였다.

결국 황제는 시종의 목숨으로 위협하기를 그만두고 호운의 다리에 족가와 추를 채웠다. 그 덕분인지 그 후로 호운은 한 번도 목을 매지 못했다. 그러나 세상에 죽을 방법이 목을 매는 것 뿐이 아니라는 것을 황제는 절절히 알았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아 호운이 혀를 깨물어 버린 것이다.

목과 달리 입안의 혀는 주변 사람들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황제는 깨물어 찢어진 혀가 치유되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호운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그리고 혹시나 재갈을 빼어낼까 싶어 손에도 수가(手枷)를 채우고 나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황제는 자신이 호운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집착으로 인해 자신이 점점 이상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황제는 마냥 호운과만 씨름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진성왕이 일으킨 반란에 가담한 자들을 색출하는 막바지 작업에 한창이었다. 정통 후계자인 진성왕이다 보니 지방으로 갈수록 그를 지지하는 자의 수가 늘었다. 그들은 도성의 분위기를 몰랐기에 진성왕의 돌연한 죽음의 이유 또한 몰랐고, 도성이 황제에게 장악되었다는 사실도 몰랐다. 황제는 그들 하나하나를 궁으로 불러들여 모두 목을 쳤다. 이는 폭군이나 다름없는 행동이었으나 아무도 황제의 행동을 제지하지 못하였다.

사실 여기에는 까닭이 있었다. 대신들은 지금 황제의 행동이 단지 폭군의 전횡(專橫)이 아님을 알았다. 황제는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는 누구도 용서하지 않았다. 그 뜻을 확고히 보여준 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본 대신들은 감히 나서서 황제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였다.

시간을 조금 거슬러, 때는 호운을 태운 마차가 막 도성의 성문에 다다랐을 때였다. 황제는 오랜만에 오왕비 옥씨를 대전으로 불러 들였다. 옥씨는 황제의 부름에 꽃처럼 미소 지으며 한 걸음에 달려왔다. 그런 오왕비의 품에는 갓난 아이가 안겨있었다. 이 아이가 바로 열흘 전에 태어난 황제의 둘째아들이다. 법도상 태어난 아이는 백일동안 집밖 출입을 하지 않지만 어차피 황궁에서 태어난 아이고 황제의 아들이란 생각에 부름을 받은 옥씨는 부러 품에 아이를 안고 황제의 앞에 나섰다.

"아이를 데려왔군."

옥좌에 앉아있던 황제의 말에 옥씨가 수줍은 듯 미소 지었다.

"황상께서 아직 한 번도 아이의 얼굴을 보신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군."

옥씨의 말투에는 적잖은 서운함이 서려있었다. 옥씨가 아이를 낳은 열흘 전 밤, 황제는 옥씨의 처소에 들지 않았다. 난산으로 고통스러워하던 옥씨는 몇 번이나 황제를 부르고 또 불렀지만 결국 그는 얼굴 한번 내비치지 않았다. 그래도 첫 아들 소양군 때는 그러지 않았던 황제가 둘째 아이 때는 이토록 냉담한 것이 옥씨는 자신이 소양군을 모자라게 낳아서라 여겼다. 그러나 이번 아이는 소양군과 다르다. 옥씨는 그것을 분명히 알았다. 이 아이는 제 아비를 닮아 건강하고 영리하게 자라날 것이다. 제 아비의 다른 아이들처럼.

아이를 황제의 앞에 내민 옥씨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이 아이는 처음부터 소양군과 달랐다. 태어난 후에 첫 울음을 울지 않아 애를 태웠던 소양군과 달리 아이는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태어났다. 그리고 젖을 빠는 힘도 남달라 옥씨는 이 아이가 장차 아주 튼튼하게 자라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였다.

"젖을 보채는 것이 과연 황상의 아들이다 싶을 정도입니다."

"그래?"

황제가 관심을 보이자 옥씨가 거듭 말하였다.

"네, 아주 건강한 아이입니다. 한번 안아 보시겠습니까?"

조심스레 건넨 옥씨의 말에 황제는 옥씨에게서 아이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품안의 아이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러다 점차, 황제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옥씨는 그런 황제의 표정이 자신의 아이를 안은 감동이라 여겼다. 그러나 점차 입가로 번진 미소는 뒤틀렸고 눈빛은 날카로웠다. 이는 도저히 기쁨이나 감동의 미소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옥씨는 눈앞이 아득해졌다.

"과연 진성왕의 씨답게 아주 튼튼한 아이구나. 그래도 왕비가 양심은 있어 반역자의 씨를 내 앞에 진상하니 그 정성을 무시해서는 안되겠지."

"화, 황상? 그게 무슨 말씀이십…?"

갑작스러운 황제의 말에 옥씨의 안색이 바랬다. 그러나 황제는 그런 옥씨의 얼굴을 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시종들이 모두 벙어리라는 말에 안심을 하였더냐? 어리석은 것. 벙어리라고 눈에 보이는 것 마저 알지 못하겠느냐."

황제의 말에 옥씨의 얼굴이 순식간에 핼쑥해 졌다. 황제는 그 핼쑥한 얼굴을 보며 웃었다.

"어리석구나. 그대로 있었으면 목숨만은 부지 했을 텐데. 감히 진성왕의 씨를 품고서 짐을 농락하려 하다니. 내 그래도 너의 어리석음이 가여워 목숨만은 부지하게 하려 하였거늘 너 역시 옥씨의 핏줄이구나.""화, 황상…."

옥씨는 겁에 질렸다. 처음부터 지아비인 황제를 배신하는 것이 두려웠던 그녀는 황제의 한마디에도 쉽사리 무너져 내렸다.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떼도 목숨을 부지할지 안 할지 알 수 없는 마당에 그녀는 고개를 조아리고 외쳤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황상! 태후께서 그리하지 않으면 절 가만 두지 않으신다고 하여…! 황상, 황상!"

옥씨의 손이 황제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새하얀 얼굴이 창백해져 눈물을 글썽거리는 모습이 가련하기도 하였지만 황제는 냉담하였다.

"진한의 법은 알고 있을 테지."

진한은 법대로라면 부정한 여인은 집에서 내 쳐 지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그녀는 황제의 비이고, 부정을 저지른 것으로 모자라 다른 사내의 아이까지 낳았다. 단지 감정적인 이유만이 아니라 법적으로도 열 번을 찢어 죽여도 부족한 일이었다.

"황상 용서해 주십시오 황상! 황상!"

울며불며 매달리는 옥씨를 황제는 차갑게 뿌리쳤다.

"황상! 황상!"

바닥에 쓰러진 옥씨를 향해 황제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리고 품안의 아이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황상!!"

옥씨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른 것과 황제가 칼을 뽑아 바닥에 패대기친 아이의 가슴을 찌른 것은 거의 동시였다. 아이의 무른 몸은 날카로운 칼날 앞에서 무력하였다. 순식간에 가슴에 생긴 구멍으로 검붉은 피가 터져 나오더니 아이는 울음한번 울리지 못하고 절명하였다.

"아아…!"

옥씨는 부들부들 떨며 제 입을 가렸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황제를 보았다. 그러나 황제는 무심하게 아이의 시체에서 검을 뽑아내고 옥씨를 보며 말했다.

"돌아가 기다려라. 그대가 그토록 기다렸던 교지를 내리마. 그대와 소양군 모두에게."

옥씨는 황제가 언급한 교지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차리고 말았다. 그녀가 그토록 기다렸던 황후의 첩지가 아닐 것이다. 그런 것이라면 소양군까지 언급할 이유가 없다. 결국 옥씨는 그 자리에서 힘없이 실신하고 말았다. 그러나 대전의 시종 누구하나 나서서 그녀를 부축하는 이가 없었다. 총애와 지위를 잃은 왕비의 처지란 그런 것이었다. 결국 옥씨는 황제의 명에 의해 시종들의 등에 업혀 대전을 나섰다. 한때는 자신의 아내였던 옥씨가 실신하여 업혀 나가는데도 황제의 관심은 거기에 있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이내 대전 앞에 나타난 호운에게 쏠렸고 황제의 머릿속에서도 옥씨에 대한 일은 황제의 관심 밖이 되었다.

바로 옥씨에게 교지를 내리려 한 황제는 한동안 호운의 일로 정신이 없어졌다. 호운이 생사를 오락가락 하는데 옥씨 따위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황제가 다시 옥씨를 떠올린 것은 호운에게 수가마저 채운 후였다. 겨우 호운이 죽지 못한다며 한숨을 돌린 황제는 여태 방치해두었던 옥씨를 떠올렸다.

호운의 목은커녕 머리털 하나 상하게 하지 못한 황제의 붓은 망설임 없이 옥씨를 사사하고 소양군을 사사하라는 명령을 써내려갔다. 그래도 한때는 살을 맞대던 아내였고 또 한 사람은 분명 자신의 핏줄임이 분명한 아들임에도 사사하라는 글을 쓰는 황제의 손은 망설임이 없었다.

그리고 그날이 채 지나기 전에 교지는 옥씨의 처소로 전달되었다. 교지를 내린다 한 후 황제가 한동안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자 옥씨는 일말의 기대를 가졌다. 그러나 내려온 교지는 그런 옥씨의 기대를 모두 부정하는 냉혹한 것이었다. 

그나마 한때 부부였던 온정인지 황제는 옥씨와 소양군, 그리고 태어난 아이를 모두 황적에 남겨둔다 하였지만 그것은 옥씨에게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았다. 

교지가 전달되고 채 한시진도 흐르기 전에 당도한 사약에 옥씨는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옥씨는 감히 황제의 명을 거역할 용기가 없었다. 옥씨가 조금이라도 소양군을 염려하였다면 그래도 소양군을 먼저 보내고 자신이 떠났을 텐데, 그녀는 소양군이 괴로워하며 죽는 모습을 볼 자신이 없어 자신 먼저 사약을 받았다. 

이내 옥씨가 칠공으로 피를 토하며 쓰러지자 다음차례는 소양군이었다. 비록 지능이 떨어진다지만 제 어미가 저것을 먹고 되는 모습을 본 소양군은 겁에 질려 울었다. 그러나 명을 집행하는 병사들은 망설임 없이 소양군을 제압해 그 입에 사약을 밀어 넣었다. 이내 소양군 또한 제 어미 옥씨와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모양새로 피를 토하며 죽었다. 

사사된 그들의 시신은 조용히 궁 밖으로 빠져나가 황제도 알 길이 없는 곳에 거둬졌다. 이로 인해 진한의 번왕에게 시집을 간 세 옥씨 중 마지막 여인도 죽음을 맞으니, 이것은 옥씨일족이 멸망을 증명한 일이 되었다.

제 아내와 아이들을 벤 후에도 황제의 숙청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황제는 옥씨 일가를 아예 뿌리 뽑기로 작정을 한 듯 조금이라도 옥씨 일가와 연이 닿아있는 사람들은 가만두지를 않았다. 공식적으로 문제 삼을 수 있는 이들은 반역이니 역모니 하며 참하였고, 공식적으로 문제 삼을 수 없는 자들은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제거하였다. 그 와중에 옥명천또한 반역을 기도했다는 죄목으로 목이 베였다. 도성 한 가운데서 구름같이 몰려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목이 베인 옥명천의 시체는 열흘이 넘도록 그 자리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렇게 냉철한 지배를 이어가는 황제에게 감히 반기를 드는 자가 있을 턱이 없다.

아들 진성왕을 잃고 제 수구인 왕비들도 잃은 태후는 그저 그 꼴은 가만히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태후는 점차 자신을 옥죄어오는 황제의 손길을 느꼈다. 그가 황제의 자리에 올라도 그리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에게는 옥씨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뒷배가 모두 사라지자 태후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한 신세가 되었다.

그렇게 시일이 지나다 선황 선종이 승하한지 딱 2년째가 되는 날. 태후에게 한 장의 교지가 내려왔다. 그것은 황실의 관혼상제를 주관하는 예관(禮官)에서 내려온 교지로 죽은 성종의 이름으로 내려왔다. 그 교지의 내용을 본 황후는 그 자리에서 실신하고 말았다.

그것은 죽은 성종의 유언이었다. 성종이 죽을 당시만 해도 분명 유언이 없다고 딱 잡아떼던 황제가 태후의 주변 세력을 모조리 제거해 그녀가 운신조차 할 수 없어지자 유언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만약 선황이 서거한 당시 이런 유지를 내놓았다면 단번에 휴지조각이 되어버렸을 테지만 지금은 그것은 제대로 된 유지였다.

거기에는, 지금은 태후가 된 황후 옥씨를 순장(殉葬)하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이러는 법은 없다, 이러는 법은 없어! 황상의 무덤에 마지막으로 흙을 덮은 것이 2년이 지났거늘 지금 와서 나를 순장하다니, 이러는 법은 없다!"

갑작스레 태후가 미쳐날뛰자 여관들이며 내관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비록 황명이 떨어졌다 하나 그녀는 아직 살아 숨쉬는 태후였고 황실의 가장 큰 어른이었기 때문이다.

"뭣들 하는 게냐. 어서 태후를 모시지 않고."

싸늘한 일갈에 자신을 둘러싼 시종들을 미친듯이 쳐내던 태후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언제 들어선 것인지, 용포에 금관을 쓴 황제가 태후의 방안에 들어와 있었다.

"오왕, 네놈이 감히 나를…!"

태후가 손가락을 부들부들 떨며 황제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감히 네놈이 나를 죽이려 하느냐! 다 죽어가던 것을 구해준 나를, 이 나를!"

태후가 미친듯이 소리를 지르자 오히려 황제는 태연하게 주변의 시종들을 보고 명하였다.

"뭣들하느냐, 어서 태후를 모시라 하지 않았느냐."

황제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눈치를 살피던 시종들이 재빨리 태후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태후가 미친듯 발버둥치며 소리를 질러대었지만 이미 노쇠한 그녀가 젊은 내관들의 손길을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내관들은 차례로 그녀의 머리치장을 벗겨내고 그녀를 새하얀 속옷차림으로 만들었다. 속옷차림이 되어서도 맹렬히 저항하는 태후를 시종들이 억눌렀다. 그리고는 황제의 명을 기다렸다.

"약을 올려라."

황제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허리를 숙인 내관들이 종종걸음으로 커다란 사발과 항아리, 그리고 여러개의 주걱을 가져왔다. 이는 태후가 처음부터 순순히 순장을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예상했기에 준비한 것이었다. 내관들은 황제에게 고개를 숙이고 재빨리 결박된 태후에게로 다가갔다. 태후는 입을 벌리지 않으려고 하였지만 내관들은 능숙하게 주걱을 그녀의 입에 쑤셔넣었다. 마침내 힘없이 벌어진 그녀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오왕, 오왕 이 천한것! 천한것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던 태후의 목소리는 이윽고 억지로 입을 벌린 시종들의 의해 사그라들고, 곧 켁컥! 숨막히는 소리가 울렸다. 시종들은 태후의 사지를 억누른 채 그녀의 입을 벌리고 검은 액체가 든 잔을 기울였다. 태후는 처음에는 그것을 삼키지 않으려 버둥거리며 애를 썼지만 곧 숨이 막혀 본능적으로 입안의 액체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저 몇모금만의 액체를 삼켰을 뿐인데도 태후의 몸은 세차게 경련을 하기 시작했다. 시종들은 그런 태후의 몸에서 재빨리 손을 놓았다. 태후는 사지를 덜덜 떨며 삼킨 액체를 토해내려 했지만 곧 그녀의 입에서 검붉은 핏줄기가 터져 나왔다. 

몸속에 든 모든 피를 토해내려 그렇게 한참을 검붉은 피를 토해내던 태후가 맥없이 쓰러지자, 곁에서 대기하고 있던 어의가 그녀의 맥을 잡았다. 어의로부터 태후가 승하하였다는 신호를 받은 황제는 대기하고 있던 또 다른 시종들에게 턱짓을 하였다. 그러자 그들이 재빨리 태후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옷을 벗겨내었다. 아무리 죽었다 하더라도 태후이고 한때는 황후였던 여인을 이리 대접하는 법은 없었다. 그러나 시종들은 자신의 할 일만 하면 그만이라는 듯 피에 물든 태후의 얼굴을 닦아낸 후 발가벗긴 몸에 옷을 새하얀 상복을 입혔다. 그리고 태후는 그대로 검은 마차에 실려서 황궁을 떠났다. 그 후 과연 그녀가 성종의 무덤에 순장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그 후로 그녀는 두 번 다시 황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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