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震翰 玉羽三年 진한 옥우삼년
浩氏 三十四歲 호씨 34세
호씨는 병사들이 진성왕부를 지킨 가운데 유씨에게 손을 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그들 부부의 은밀한 일이 현종의 장인 옥명후의 귀에도 들어갔는데, 이 흉한 일을 알게 된 옥명후는 호씨와 유씨에 대하여 간하는 상소를 올리게 되었다. 이 상소로 인해 그들이 남매간이 아닌 부부지간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현종이 크게 진노하여 호씨와 유씨를 벌하려 하였다. 허나 유씨에 대한 애정이 지극하였던 진성왕은 유씨를 감싸며 이 모든 일이 자신의 부덕이라하며 그들을 사하여 달라는 상소를 올리니, 사사로이는 형님이 되는 진성왕의 간청에 현종은 뜻을 꺾고 말았다. 허나 진성왕의 후의로 구사일생한 호씨는 반성을 하기는커녕 도리어 자신은 잘못이 없다며 큰 소리를 질러대었다.
헌데 겨울을 넘어갈 무렵 진성왕이 갑작스레 급사하였다. 건강하였던 진성왕이 원인도 알 수 없이 급사하자 현종은 이것이 모두 호씨가 불러온 흉사라 생각하고 그를 왕부에서 내쫓았는데, 호씨는 이마저도 유씨의 탓이라 여기며 유씨를 괴롭히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유씨의 배는 나날이 부풀어 올라 왕부에서 쫓겨날 무렵에는 세인들의 눈을 피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고 이에 호씨는 제 죄가 드러날까 두려워 유씨를 죽이려 하였다. 그러자 이를 먼저 눈치챈 유씨가 진성왕이 죽은지 칠주야가 지나기도 전에 부른 배를 부여잡고 도성에서 달아났다. 뒤늦게 유씨가 달아난 것을 눈치챈 호씨는 유씨의 뱃속에 든 제 씨를 죽이기 위해 그녀를 따라 나섰다.
도성을 떠나기로 결심한 호씨는 결코 순순히 도성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 모를 진성왕부에 불을 지르고 제가 까닭 없이 미워하던 현종이 사는 황궁에도 불을 질렀다. 그 불은 삽시간에 주위로 번져 진성왕부 뿐만이 아니라 도성 일각을 잿더미로 만들 지경이었는데 이 일로 현종마저 큰 부상을 입었고 그 밤 죽은 이의 숫자가 물경 천여명을 넘어서니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유란란은 배가 불러갈수록 초췌해졌다. 임신하면 살이 포동포동 오르는 것이 보통이거늘 날이 갈수록 말라가는 유란란의 모습에 호운은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다. 황제는 호운의 간청에 못이긴 것인지, 아니면 단지 수십의 병사가 둘러싼 가운데 호운이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것을 알기에 그러는 것인지 쉽게 유란란을 보러가게 해달라는 호운의 청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호운이 유란란과 단 둘이 방안에 있는 것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공식적인 핑계는 유란란의 광증이 도져 호운을 해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으나, 정말 그것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호운과 유란란의 만남은 그녀가 황족의 아이를 임신한 여인이라는 이유로 얇은 발 너머로 수십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이루어졌다. 서로 표정을 보는 것이나 말을 섞는 것조차 힘들 만큼의 거리이니 만난다고 표현하기도 어려운 거리였지만, 호운은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였다.
"많이 먹지 못하는 게냐?"
"입맛이 없어서…."
"뱃속의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잘 먹어야지."
호운의 말에 유란란이 무어라 대답하였지만 워낙에 먼 거리였는데다 그녀가 우물거리듯 작게 말하여 호운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그다지 호운에게 대답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아직도 뱃속의 아이를 싫어하고 있다는 것을 호운또한 잘 알고 있었다. 황제가 말한 광증 때문이 아니라 그녀 본인의 의지라 그녀는 뱃속의 아이를 죽이고 싶어 하고 있었다.
"란란아…."
축복받아야 할 새 생명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유란란의 모습에 호운은 한탄했다. 비록 그녀가 야심에 찬 여인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한 생명을 원망하고 증오하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더군다나 그 생명은 그녀의 뱃속에 자리한 그녀의 자식이니 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그러지 마라, 란란아. 그러지 말아…."
호운의 말에 유란란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자신의 곁에 있는 시종에게 작은 소리로 속삭였는데, 그 말을 들은 시종이 종종걸음으로 호운에게 다가와 말했다.
"총비마마께서 피로하시어 쉬고 싶으시다 하십니다."
시종의 말에 호운이 유란란을 보니, 그녀는 벌써 자리에서 일어난 참이었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침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호운은 유란란이 앉아있던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다 깊은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란란의 방을 나서던 호운은 마침 방으로 향하던 복치운과 마주쳤다. 여태 호운이 몇 번이나 진성왕부를 찾아도 얼굴한번 내보이지 않던 복치운인지라, 황제가 주최했던 연회의 밤 이래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보는 복치운을 마냥 반가워 할 수가 없었는데, 이는 복치운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날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고개를 들 수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때문에 호운이 말도 건네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가운데 복치운이 먼저 성큼성큼 호운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병사들이 복치운의 앞을 막아서 복치운은 호운에게서 다섯걸음 정도 떨어진 자리에 멈춰서야 했다. 복치운은 자신을 막아선 병사들을 흘끔 보더니 호운에게 물었다.
"누님을 뵙고 가시는 겁니까."
"그래."
그 어조가 너무나 평상시와 같았기에 무심코 호운 또한 그리 대답해 버렸다. 복치운은 호운을 가만히 보다 고개를 숙이고 호운을 스쳐지나갔다. 그 어색한 태도에 호운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러나 되돌아서서 복치운을 붙잡을 용기가 없는 호운은 그저 복치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야했다.
유란란이 진성왕부에 억류되어 황제의 병사들에게 지켜지는 동안 정국은 점차 살벌해져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었다. 자신의 총비인 유란란이 진성왕부에 연금되자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진성왕이 드러내 놓고 황제에게 적의를 표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암암리에 적대하던 두 사람이 이제는 대놓고 이빨을 드러내자 당장이라도 무언가 일이 터질 것처럼 위태한 공기가 도성을 둘러쌌다.
그러나 의외로 진성왕은 그 다혈질인 성격을 드러내며 당장 황제에게 덤벼들지 않았다. 이는 진성왕의 뒷배인 옥씨일족이 어정쩡한 자세를 취한 탓이다. 원래 선황인 성종이 살아있었을 때만 하여도 노골적으로 진성왕을 지지하였고, 불과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노골적으로 그를 지지하던 옥씨일족이 갑작스레 손바닥을 뒤집은 것처럼 진성왕에게서 멀어졌다. 이는 황제의 유일한 비(妃)인 옥씨가 회임한 것과 연관이 있었다. 시일이 지나도 호운을 향한 황제의 총애가 지극하였기에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였는데, 어느 날 옥씨를 진맥한 의원이 그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황제에게 고해바친 것이다.
그것은 소양군이 태어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암암리에 수많은 여인네들을 상대하면서도 단 한 번도 임신을 시키지 못한 황제의 남성으로서의 기능을 의심하는 말이 오가는 가운데 유일하게 황제의 아들을 낳은 오왕비가 임신을 하였으니 경사가 따로 없었다. 만약 태어나는 아이가 아들이라면 이 아이가 장차 황제의 뒤를 이어 보위를 이을 테니 옥씨일족으로서는 무작정 진성왕을 편들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옥씨일족이 노골적으로 현 황제의 편을 든 것은 아니지만, 진성왕이나 황제와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 두 사람을 저울질하는 듯 하는 것이 또렷하게 보였다. 때문에 진성왕은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옥씨일족이 수대를 거쳐 번창한 것은 그들이 권력 자체를 잡았기 때문이 아니라 권력을 잡은 자에게 줄을 잘 섰기 때문이다. 비록 진성왕이 그 옥씨일족의 일원이지만 그들은 권력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진성왕을 버릴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허나 속에서 치미는 분기는 어이할 수 없었다. 원래 화급한 성정을 타고난 진성왕에게 애초에 참기만 하라는 것은 무리였다. 오히려 이만큼 참은 것만 해도 기적이라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작은 계기 하나만 터진다면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라는 것을 모든 이가 알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도성을 둘러싼 공기는 답답하고 묵직했다.
“조심히 내리시지요.”
호운은 내관의 도움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사실 혼자서 충분히 내릴 수 있는 높이임에도 내관들은 일부러 호운의 도움을 주기를 자청하였는데, 이 내관처럼 호운에게 지나치게 친절하게 구는 자가 너무 많아 셀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궁에 머무는 자들 대부분이 주로 일을 맡기는 내관이 있지만 호운은 아무도 곁에 두지 않았다. 황제가 그에게 내려준 내관과 여관들이 서른명이 넘었지만 호운은 그들에게 그 무엇도 명한 적이 없었고, 그들의 이름을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은 호운의 일거수 일투족을 황제에게, 혹은 태후에게 흘리기 위해 붙어있는 인물들일 따름이었다. 그래도 한때는 동생처럼 생각하였던 송연이 호운에 대하여 그리 말을 쉽게 흘렸던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것이 확실하였고, 호운은 아무에게도 마음을 주지 못했다.
때문에 이름조차 불린 일이 없는 그들은 호운의 눈에 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정확히는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는 호운의 눈에 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는 표현이 맞겠지만 말이다.
호운이 원한다면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가마로 정궁까지 이동할 테지만 호운은 가마를 타는 대신 걸어서 정궁으로 향했다. 어차피 정궁으로 일찍 가 봐야 좋은 일이 일어날리 없으니 되도록 늦은 시간에 도착하려 하다 보니, 걸음이 미적미적 느려졌다.
산책을 하듯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던 호운은 멀리 밝은 색의 털외투를 걸친 여인이 여러 여인들을 거린 채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 화려한 금비녀로 머리를 치장한 아름다운 그 여인은 오왕비 옥씨였다. 임신이 알려지기 전 까지만 하여도 죽은 듯 지내던 그녀는 최근 들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배를 일부러 내보이며 걷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정궁 밖으로 나오는 일이 거의 없는 호운이 그녀를 마주칠 일이 없었다.
호운이 옥씨를 알아챘을 때, 그녀 또한 호운을 알아챘는지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이내 유연하지만 당당한 걸음으로 호운의 앞으로 다가왔다.
"궁을 나섰다 돌아오는 길인가 봅니다."
그녀가 이런 식으로 호운에게 말을 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행사가 있을 때나 대전으로 불렸을 때 몇 번 마주쳤던 적이 있지만 그녀는 수치심 때문인지 호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임신을 해서 여유가 생긴 것인지 그녀 쪽에서 먼저 호운에게 말을 걸었다.
호운은 그녀를 어이 대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그녀쪽이 호운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이니 인사를 건네야 할 텐데 무어라 건넬지도 판단할 수 없었다. 호운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 호피가 황상께서 하사하신 것입니까."
“예.”
호운이 우물쭈물 대답하자 옥씨는 호운이 걸친 호피를 살피고는 부럽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황상의 총애가 정말 남다른가 봅니다. 내가 잉태하였다는 사실을 아셨을 때도 호피는 커녕 호피(狐皮) 조차 하사하시지 않으셨는데 첩지조차 받지 않은 호공(浩公)에게는 이렇듯 귀한 백호피를 하사하시니 참으로 부럽습니다."
옥씨의 말은 다른 식으로 들으면 첩지조차 받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비꼬는 것으로도 들렸지만, 옥씨의 어조에는 가시가 없었다. 그녀는 그저 순수하게 호운이 부럽다는 듯 말하였고 예상하지 못한 옥씨의 말에 호운은 뭐라 대답할지 몰랐다. 옥씨는 호운에게 껄끄러운 존재였다. 호운은 그녀의 알몸을 보았다는 것이나 그녀를 보고 욕정하였다는 것 때문에 그녀 앞에서 당당할 수가 없었다.
“헌데 생각해보니 정말 이상하군요. 황상께서는 어찌 호공께 첩지를 내리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녀의 말에 호운은 뭐라 답할 말을 찾지 못해 머뭇거리고 있었는데, 그 사이 옥씨의 바로 옆에 선 늙은 여관이 말했다.
"마마, 어찌 그런 것을 물으시는 겁니까. 그런 것의 대답이야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늙은 여관은 호운을 위아래로 훑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 표정은 호운이 궁에 들어오기 전에도 몇 번이나 보았던 것이었다. 그를 하찮고 천하게 여기는 표정이었다.
"뻔하다니? 송부인께서는 연유를 아시는가?"
"예."
"말해보게."
옥씨의 말에 늙은 여관은 호운을 흘긋 보고 말했다.
"첩지를 내린다는 것은 곧 황적(皇籍)에 이름을 남긴다는 것인데 단지 총애를 받는다 하여 그리할 수 있겠습니까."
"허나 황상께서는 호공을……."
"마마, 사내는 본디 쉬 질리게 마련입니다. 황상의 수많은 총동들이 어이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 중 궁에 남은 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늙은 여관의 말처럼, 황제의 총동들 대부분 1년을 넘기기 힘들었다. 황제는 보통 총동을 들이면 한동안은 줄기차게 그 총동을 품에 안지만 어느 정도가 되면 질려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다 나이가 차 앳된 얼굴이 사라지면 황제의 곁에서 쫓겨나는 것이 여태까지의 상례였다.
"더군다나 총애는 교만한 자에게 머물지 않는 법입니다. 황상께서 하사하신 호피를 보란 듯 걸치고 다니는 저런 교만한 자가 과연 황상의 총애를 오래도록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아무리 귀한 호피라 하여도 호피는 커녕 구피(狗皮:개 가죽)처럼 보일 수밖에요."
은근히 호운이 걸친 호피마저 깎아내리는 여관의 말에 옥씨가 얼른 끼어들었다.
"송부인, 말이 너무 과하시네."
옥씨는 넌지시 늙은 여관을 나무라고 아직 아무 말 못하고 선 호운을 보며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송부인의 말에 혹 마음이 상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닙니다."
호운이 겨우 그리 대답하자 옥씨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사실 전부터 호공과 한번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한 지아비를 섬기는 사이니 남이라 할 수도 없는 사이 아니겠습니까. 송부인의 말이 과하였으나 악의는 없으니 신경쓰지 마십시오."
옥씨는 그리 말하며 호운을 흘끔 보았다. 비록 자신이 황제의 아이를 임신한 몸이라 하더라도 현재 가장 총애 받는 것이 자신이 아닌 눈앞의 사내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녀는 혹시 늙은 여관의 말에 호운이 기분나빠할까 걱정하는 듯 보였다.
너무나 자연스레 호운을 사내를 섬기는 자라 말하는 옥씨의 말에 호운은 그저 고개를 숙였다. 이제 상처 받을 수도 없었다. 그녀의 말처럼 이 궁 안에서 호운의 입장이 그러했다.
"마마, 바람이 찹니다."
불만스러운 얼굴로 뒤로 물러서 있던 늙은 여관이 옥씨를 재촉했다. 옥씨는 그녀의 재촉에 고개를 끄덕이고 호운을 보며 말했다.
"바쁘신데 제가 너무 호공을 붙잡았나 봅니다."
"아닙니다."
"그럼 먼저 가겠습니다."
끝까지 예를 차리며 우아하게 걸어가는 옥씨를 보며 호운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동안 고개를 숙인 채 바닥만 바라보던 호운은 자신의 뒤에 선 내관들의 은근한 헛기침 소리에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정궁으로 돌아온 호운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유란란의 모습을 보았을 때는 그렇게 슬펐는데, 옥씨를 만났을 때 들은 말은 전혀 슬프지 않았다. 그저 속이 답답하게 침잠하여 가라앉을 뿐이었다. 호운이 그리 멍히 있어도 시종들은 알아서 호운의 옷을 갈아입히고 그의 몸을 치장했다. 굳이 황제가 온다는 전갈이 없어도 거의 매일같이 호운을 찾으니 시종들은 늘 그를 준비시키느라 바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치장 당한다는 것은 무척 거북한 일이었지만 반복되는 일상에 호운은 익숙해졌다. 아니, 질렸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른다.
'어째서 나는 여기 있을까.'
호운은 자신이 황궁안에 이리 호화롭게 치장되어 있는 현실에 도저히 적응할 수 없었다. 현실을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어찌해 이렇게 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호운도 눈이 있기에 황제가 거느린 수많은 여인들과 소년들을 보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젊고 아름다웠다. 그런데 어찌 자신 같은 자가 이런 대접을 받으며 이런 장소에 있는 것일까.
처음 호운을 궁안으로 끌여들였을 때만 하더라도 황제의 행동 대부분은 여봐라는 듯한 것이 많았다. 호운 본인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런 경향은 오왕비 옥씨가 궁으로 들어온 이후 더 심해졌다.
확실히 황제는 호운에게 다정했다. 하지만 호운은 그 다정함이 그의 관용안의 제한된 다정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황제는 호운이 자신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한 이 다정함을 유지해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일까. 결국 황제는 자신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온순한 인형을 바라고 있는데, 호운 본인의 마음 따위는 아무 상관이 없는데.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 것이냐."
상념에 잠긴 채 멍하니 정원을 바라보고 있던 호운은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깜짝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어느새 들어온 것인지 황제가 호운의 방문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평소와 달리 용포가 아니라 붉은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척 보아도 궁 밖으로 나갔다 들어온 참으로 보였다.
"오셨습니까."
호운이 어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자 황제는 미간을 찡그렸다.
"네가 바라는 대로 진성왕부도 다녀오게 해 주었거늘 어찌 그런 표정인게냐."
황제는 호운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성큼성큼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황제가 아무리 그리 말해도 자신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 호운은 자신이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몰랐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라도 있느냐."
황제의 말에 호운은 방금 전 만났던 오왕비 옥씨를 떠올렸다. 부른 배를 자랑스레 드러낸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자 유란란의 모습도 절로 떠올렸다. 혈색 좋은 얼굴로 웃고 있던 옥씨와 유란란의 얼굴이 대조되어 떠오르자 바싹 마른 채 창백한 얼굴을 한 유란란이 더욱 처량해 보였다.
"황상."
호운이 고개를 숙인 채 조심스레 황제를 불렀다.
"그래, 말해 보거라."
"제가 진성왕부로 가도록…허락해 주실 수 없으신지요."
호운이 그리 말한 순간 황제의 얼굴이 극적으로 변했다. 방금 전 까지는 그래도 입가에 미미하게 미소를 짓던 것이 순식간에 걷히고 싸늘하게 굳어 버렸다. 대기하고 있던 내관들은 그런 황제의 표정변화에 일제히 경악했지만, 정작 호운은 고개를 숙이고 있기에 그런 변화는 눈치 채지 못했다. 황제는 싸늘한 얼굴로 호운을 보다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오늘 총비를 보고 왔으니 된 것 아니냐."
그러나 냉담한 표정과 달리 그 입에서는 의외로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호운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걱정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굳이 제가 궁 안에 있어야 할 이유는 없는 것 아닐런지요."
호운은 황제가 자신을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도대체 무슨 도움이 되는지 몰라도 변하는 상황에 따라 변하는 황제의 태도를 보면 그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호운이라는 존재는 결국 진성왕과 유란란을 떼어놓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제 유란란이 진성왕부에 연금된 이상 호운 또한 궁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유란란을 연금한 것으로 황제의 목적은 모두 달성된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어이해 그리 생각하는 것이냐."
황제의 물음에 호운은 우물쭈물 대답했다.
"황상께는 다른 여인들도 있고 굳이 제가 아니더라도……."
말을 잇던 호운은 갑작스레 황제가 머리를 잡아당기자 혀를 깨물 뻔 했다. 머리채가 붙잡힌 채 고개를 든 호운은 코앞에 들이밀어진 황제의 얼굴이 움찔했다. 평탄한 목소리로 눈치채지 못한 황제의 흉포한 표정을 이제야 눈치 챘기 때문이다. 황제는 호운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고 으르렁대듯 말했다.
"그 계집이 너에게 왕부로 와 달라고 부탁이라도 했더냐."
그 계집이 누구를 지칭하는 말인지 깨달은 호운은 허둥지둥 대답했다.
"그런 게 아닙니다. 그저 제가 란란이를 걱정해서……!"
황제는 호운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그의 머리를 놓으며 호운을 의자에 밀쳤다. 끼익-! 의자 다리가 바닥을 날카롭게 긁었다.
"그 계집을 걱정한다면 네 입부터 조심하도록 해라. 자꾸 네가 그리 말한다면 그 계집의 목을 지금 당장 쳐 버릴 테니 말이다."
그리 말하는 황제의 표정은 결코 허언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호운이 대답대신 고개를 숙이자 황제는 옷자락을 거칠게 털어내며 방을 나섰다. 황제는 방을 나서며 내관들을 흘긋 보고 지나갔다. 그러자 내관들 중 몇몇이 서로 눈짓을 하더니, 그들 중 가장 뒤에 서 있던 내관 한 사람이 슬그머니 황제를 뒤따라 방을 나섰다. 그러나 의자에 밀쳐진 자세 그대로 바닥만 바라보던 호운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종종걸음으로 방을 빠져나온 내관은 거의 달리다시피 하여 그대로 대전으로 향했다. 황제와 얼마 차이가 나지 않게 그를 따라나섰지만 궁 안에서 말을 타고 이동하는 황제의 속도를 따를 수는 없었다.
미리 언질을 받은 것인지 대전을 지키던 위사들은 내관의 발걸음을 막지 않았다. 순식간에 황제의 집무실 앞까지 온 내관은 집무실 앞을 지키는 다른 내관들과 몇 마디 말을 주고받더니 재빨리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마침 궁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용포를 걸치고 있던 황제는 내관이 들어서자 눈썹을 치켜들고는 손짓을 했다. 그러자 그의 옷차림을 가다듬던 궁녀들이 소리없이 뒤로 물러섰고 집무실 안에는 황제와 호운의 처소에서 온 내관 단 둘만이 남게 되었다.
"오늘 그것이 무엇을 했는지 소상히 고하라."
황제의 말이 떨어지자 내관은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그는 호운이 오늘 언제 일어났는지부터 아침은 언제, 무얼 먹었는지 어떤 말을 했는지까지 하나하나 빠짐없이 고하였다. 내관은 진성왕부에서 있었던 일까지 낱낱이 고해바쳤지만 황제가 생각하는 그런 내용은 나오지 않았다.
"그럼 진정 아무일도 없었는데 저것이 저런 말을 한단 말이냐?"
황제의 물음에 내관은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호공께서 왕부에서 돌아오는 길에 오왕비마마를 만나셨습니다."
무릎을 꿇으며 대답한 내관의 말에 황제는 미간을 찡그렸다.
"오왕비를? 따로 개인적으로 만난 것이냐."
"아닙니다. 그저 궁안에서 마주친 정도입니다."
"겨우 그런 것 때문에 저것이 그리 말한단 말이냐."
황제의 말에 내관은 고개를 더더욱 아래로 숙이며 대답했다.
"아뢰옵기 황공합니다만, 오왕비마마께서 거느린 여관 송씨가 호공을 모욕하였습니다."
"오왕비의 여관이 호씨를 모욕하였다?"
그 말에 대번에 인상을 찡그린 황제는 내관을 재촉하였다.
"어찌 감히 여관 따위가 호씨를 모욕할 수 있단 말이더냐."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쓸데없는 말은 되었으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고하라."
황제가 재촉하자 내관이 방금 전 정원에서 있었던 일을 소상히 고해바쳤다. 그들 사이에 오간 짧은 대화가 황제의 앞에서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반복되었는데, 그 말을 들은 황제는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쳤다.
쾅!
"감히 여관 따위가 그런 말을 지껄였더냐!"
"예, 호공께서 그 말에 어찌나 상처를 받으셨는지 오왕비마마께서 자리를 뜨시고 나서도 한참을 고개도 들지 못하는 모습이 참으로 안쓰러웠습니다."
내관의 말에 황제는 아름다운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이를 갈았다.
"그런데도 네놈들은 주인을 편들지 않고 그저 구경만 하고 있었단 말이냐!"
설마 불똥이 이쪽으로 튈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한 내관은 황제의 분노가 자신을 향하자 놀라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용서해주십시오 황상!"
"내가 단지 호씨를 감시하라고 네놈들을 붙여 놓았느냐! 호씨가 황궁에서 지내는데 한 치의 불편함이 없도록 보필하라는 내 명을 잊었던 것이냐!"
황제의 일갈에 바닥에 넙죽 엎드린 내관은 고개도 들지 못했다. 황제는 덜덜 떠는 내관을 죽일듯 노려보다 다시 탁자를 주먹으로 내려쳤다. 내관의 입에서 튀어나온 내용을 생각하니 이가 갈렸다. 고작 여관 따위가 황제가 가장 총애하는 첩에 대해 그리 건방진 언사를 하다니. 생각하면 할수록 괘씸했다.
"여봐라!"
"예, 황상!"
황제의 외침에 문앞을 지키던 내관이 들어서자 그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린 채 외쳤다.
"지금 당장 오왕비 옥씨의 처소로 가 송씨 여관을 이리로 잡아 오라!"
"명을 받잡습니다!"
고개를 조아린 내관이 방문을 나섰다. 곧 척척 거리는 일사 분란한 발소리가 대전을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황제는 아직 고개를 숙인 채 벌벌 떨고 있는 내관을 흘긋 보고 냉엄하게 말했다.
"이번 한번은 용서하겠다. 그러나 다음에도 이 같은 일이 있다면 그때는 네 목이 먼저 달아날 것이다."
"서, 성은이 망극합니다!! 성은이 망극…!"
"되었으니 어서 호씨에게 돌아가라!"
다행스럽게 벌을 내리지 않을 눈치인 황제의 말에 재빨리 네발로 기어 방을 나섰다. 네발로 기어나가던 내관은 황제의 집무실을 나서자 사지에 힘이 쭉 빠져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그런 내관을 대전 내관들이 부축하였지만, 그는 곧 되었다는 듯 고개를 젓고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겨우겨우 몸을 추스른 내관이 느릿느릿 대전을 나설 찰나 대전을 나섰던 위사들이 좀 전의 늙은 여관을 둘러싸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그리 멀지않은 곳에 있었던지 생각보다 빨리 불려왔다. 어이해 자신이 대전으로 불렸는지 짐작하지 못하여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여관의 표정이 대전을 나서는 내관을 보고는 눈에 띄게 변했다. 그녀는 지금 대전을 나서는 내관이 누구를 모시는 자인지 알았다. 내관은 자신을 보고 표정이 변하는 여관을 향해 보란 듯이 웃었다. 그 웃음에 여관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그녀는 그 미소에 겨우 자신이 어이해 대전에 불려왔는지를 깨달은 것이다.
'그러게 입조심을 했어야지.'
내관은 새파란 얼굴의 늙은 여관을 향해 잔인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전을 나섰다. 내관은 그 여관이 살아서 대전을 걸어 나가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오히려 경쾌한 발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
오왕비 옥씨는 자신이 거느린 여관의 우두머리가 대전에 불려나간 후 소식이 끊기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방안을 서성였다. 여관 송씨는 오왕부에 있을 시절부터 오왕비를 모셨던 여인네로 원래 옥씨의 사가인 옥씨세가의 사람인 동시에 소양군의 유모다. 때문에 옥씨는 적잖게 송씨에게 기대고 있었기에 그녀가 곁에 없자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송씨가 대전으로 불려간지 한참이 지나 밤이 되자, 갑작스레 황제가 자신의 처소를 방문한다는 전갈을 받게 되었다. 가장 신뢰하는 여관이 없는 상황에 맞는 황제의 방문에 그녀는 당황하였지만 황제가 자신을 찾는다는 사실에 잔뜩 들떠 치장을 하였다. 그녀는 일부러 부른 배를 강조하는 옷을 입고 곱게 화장을 하고 황제를 기다렸다.
"황상께서 납십니다!"
이제나 저제나 하며 황제를 기다리던 옥씨는 시종의 외침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무가 끝난 후라 용포(龍袍)대신 붉은 장포를 걸친 황제의 모습은 잘생겼다는 말 보다는 아름답다는 말이 잘 어울렸다.
"오셨습니까."
옥씨는 황제의 모습을 정신없이 보다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황제가 옥씨의 방을 찾은 것 자체가 여태 없었던 일인데다 그가 수많은 시종들을 거느리고, 호사스레 치장된 커다란 궤(櫃)를 가져온 것도 처음이었다. 큰 궤의 모습에 옥씨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기대로 상기되었다. 미모가 빼어난 그녀가 열심히 치장한 채 상기된 얼굴을 한 모습은 무척 아름다웠지만 황제는 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않고 입을 열었다.
"요즘 외출이 잦다 들었다."
"황상의 귀에 들어갈 정도였습니까."옥씨는 임신한 여인이 방문턱을 자주 넘나드는 것이 좋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조심스레 물었다. 옥씨의 물음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왕부에서 자유롭게 지내다 황궁 같은 곳에서 지내려니 답답하기도 하겠지. 허나 뱃속의 아이를 생각하면 그리 경솔하면 아니 될 터. 해서 그대에게 하사하는 것이다."
황제의 말이 떨어지자 시종들이 궤를 옥씨의 앞에 내려놓았다. 모양부터 내용물을 기대시키는 것인지라, 옥씨의 얼굴에 절로 웃음이 피어났다.
"앞으로 산책을 나설 때는 이것을 꼭 걸치도록 하라."
"이것이 무엇입니까?"
기대로 두근거리는 표정을 숨기지 않은 옥씨가 묻자 황제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대가 직접 확인해 보아라."
황제의 말에 옥씨는 마치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들뜬 표정으로 궤를 열었다. 끼익 거리는 소리를 내며 부드럽게 열린 궤 안에서 나타난 것의 모습에 옥씨의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옥씨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리며 궤 안을 바라보았다. 숨을 쉬기 힘든것처럼 경악한 옥씨를 보며 황제가 다정하게 말했다.
"앞으로 처소 밖을 나설때는 반드시 이것을 걸치도록 해라. 만약 그대가 처소밖을 나서 궁 안을 거니는데 이것을 걸치지 않았다는 말이 전해지기라도 하면 소양군의 생모인 그대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조곤거리며 속삭이는 황제의 말에 옥씨는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황제는 뭐라 말도 못하고 궤 안을 뚫어져라 보는 옥씨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지은 후 옥씨의 처소를 나섰다. 황제가 있는 동안 멀리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은 황제가 방을 나서자 서둘러 옥씨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마마, 황상께서 어떤 것을 하사하셨습니까."
"마마, 어찌 그런 표정이십니까?"
시종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건네는 가운데 옥씨의 눈은 여전히 궤 안으로 고정된 채였다. 그 시선을 따라 하나둘 궤 안으로 시선을 돌린 시종들의 입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꺄아악!"
열린 궤 안에는 약간 노란빛을 띈 가죽이 얇게 퍼져있었다. 형태를 보아 무언가의 가죽임이 분명한 그것은 보통 호랑이처럼 용맹한 동물들의 가죽을 뜰 때 그러하듯 머리까지 연결한 가죽을 떠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그 가죽의 머리에는 아까까지 오왕비 옥씨가 그토록 안절부절하며 찾던 여관 송씨의 머리가 연결되어 있었다.
궤 안의 가죽의 정체는 바로 송씨였다.
"어, 어찌 이런!"
경악해서 말도 못 잇는 시종들의 사이에 가만히 굳은 채 있던 옥씨가 힘없이 뒤로 넘어갔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혼절한 것이다.
그 날 밤, 도성에는 첫 눈이 내렸다. 아직 10월 초입이라 중추가 지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북부에 위치한 탓인지 도성은 다른 지방보다 눈이 일찍 내렸다. 쌓이는 정도가 아니라 그저 눈발이 날리는 정도인 그 눈은 달빛을 받아 꽃잎처럼 날려 마치 현실이 아닌 환상같았다.
호운은 열린 들창 너머로 흩날리는 눈송이를 멍하니 보았다. 방안은 땀이 날 정도로 뜨거운데도 얇은 창 너머에는 흰 눈이 날리고 있으니 참으로 기묘한 경험이었다. 멍하니 날리는 눈발을 바라보던 호운의 허리를 두꺼운 손바닥이 감싸 안았다.
"윽!"
멍하니 밖을 바라보던 호운은 갑작스러운 감각에 짧은 신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숙였다. 붉게 부어오른 호운의 밀지로 기다란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방금 전 까지 황제의 옥경이 얼얼하도록 꽂혀있던 곳은 쉽사리 손가락을 받아들였다. 황제는 호운의 등이 파르르 떨리자 그 등줄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리 겁을 먹지 마라. 그저 뒤처리를 하는 것뿐이니."
달래는 황제의 말에도 호운의 등은 쉼 없이 떨렸다. 황제는 그런 호운의 뻣뻣한 태도에 혀를 쯧 찼다.
"어이해 시일이 지날수록 더 서툴러지는 것이냐. 이래서는 도저히 품을 맛이 나지 않겠구나."
그리 말하면서 안을 헤집는 손가락을 타고 끊임없이 정액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호운의 전신의 붉은 자국 또한 황제의 입술로 남은 자국이니 도저히 품을 맛이 나지 않아 시큰둥한 사람이 해 놓은 일 같지 않았다.
호운의 안에서 흘러내리던 것을 모두 빼어낸 후에도 황제는 호운에게서 손을 놓지 못하였다. 벌벌 떠는 감촉에 그만 흥분해 버린 탓이다. 결국 황제는 엎드려 누워있던 호운을 똑바로 뉘이고 다리를 벌렸다. 황제를 보는 호운의 눈에 두려움이 어렸다. 그러나 황제는 그 두려움을 풀어주는 대신 양 다리를 붙들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으…."
짧은 신음이 호운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황제는 낮게 웃었다. 그러면서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호운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땀에 젖은 피부가 밀착하여 원래 그런 듯 착 달라붙는 감촉이 기분 좋았다. 황제는 그 감촉을 만끽하며 바싹 다가붙은 호운의 가슴에 입술을 대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내 여태 네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구나."
호운은 가슴께를 지분거리며 묻는 황제의 목소리를 멍한 표정으로 흘려들었다. 이미 호운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풀려 흐릿해져있었다. 그 눈동자를 본 황제는 다시 낮게 웃고 이윽고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황제가 오왕비 옥씨를 모시던 여관을 죽여 가죽을 벗겨 그 가죽을 옥씨에게 하사하였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황궁 전체로 퍼져나갔다. 정작 소동의 중심이었던 호운은 그 소문에 대하여는 까맣게 몰랐지만 호운 본인이 모르는 곳에서 소문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여관이 죽은 이유가 호운 때문이라는 것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날이 채 지나기도 전에 들불처럼 번진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변해 어느덧 소문은 호운 본인이 여관의 가죽을 벗겨내었다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그러나 그 모든 소문에서 고립된 호운은 자신의 말이 어떤 식으로 황궁을 떠도는지 전혀 알지 못하였다. 그렇게, 사태는 호운이 모르는 곳에서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날 이후 황제는 첫눈이 내린 것을 핑계 삼아 길이 얼어 위험하다는 이유로 호운의 외출을 금했다. 호운이 만삭의 여인네도 아닌데 단지 길이 얼었다는 이유로 정궁 밖으로도 걸음을 하지 못하게 하니 이는 연금이나 다름없는 처사였다. 그러나 정궁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뿐이지, 정궁 안에서 호운의 생활은 무척 호화로웠다. 황제는 호운의 처소 안에 수많은 화로와 향로를 설치하여 방안을 마치 봄처럼 따스하게 하였고 호운에게 수십벌의 겨울옷을 내렸다.
하루가 멀다하고 정궁으로 여러 가지 물건을 하사하는 황제의 태도는 호운의 이름을 또다시 사람들의 구설에 오르내리게 하였다. 후궁들이 질투할 만큼 정궁 안은 갈수록 풍요로워졌지만 호운은 날이 갈수록 지쳐갔다. 마음이 말라죽는다는 것이 이럴까 싶을 정도로 날이 갈수록 기력이 없어졌다. 그러나 황제는 질리지 않고 호운을 찾았고 호운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인피(人皮)사건 이후로 정원 출입은커녕 자신의 처소조차 나서지 않고 있었던 옥씨는 오랜만에 태후 옥씨의 방문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록 마음고생이 심하였다지만 황제의 씨를 임신한 유일한 여인이다 보니 그녀의 대접은 확실히 다른 후궁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때문에 보통 임신한 여인들이 그러하듯 그녀도 살이 제법 포동포동 오른 상태로 무척 건강해 보였다.
"오시었습니까."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려는 오왕비를 태후가 손을 저어 만류했다.
"누워 계시게."
"하지만…."
"뱃속의 태자를 생각해야지."
넌지시 오왕비를 나무란 태후가 내관들이 준비한 의자에 앉았다.
"요즘 몸은 좀 어떠신가."
"나쁘지 않습니다."
"황통(皇統)을 이을 후계자를 생산할 몸인데 나쁘지 않은 정도로 쓰겠는가. 내 어의에게 일러 보약을 지으라 하였으니 내일부터 조제원에서 보약이 당도할 테니 끼니때마다 잊지 말고 챙겨 드시게."
"태후마마…망극하옵니다."
태후의 말에 오왕비가 울컥 눈물을 보였다. 소리 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녀를 보며 태후가 혀를 쯧쯧 찼다.
"황상께서는 아직 발길하지 않으셨는가."
"발길만 없으셨겠습니까. 이쪽으로는 기별 조차 않으십니다."
눈물을 흘리는 오왕비 대신 그녀의 곁에 시립하고 있던 여관이 대답했다. 그러자 태후가 다시 혀를 쯧쯧 찼다.
"자네가 지금 마음고생이 심하겠구만. 하지만 뱃속의 태자를 생각해 마음을 독하게 먹게. 이번 한번만 잘 버티면 아무 일이 없을 것이네."
"어찌…어찌 버텨야 할지 막막합니다. 송부인은 소양군의 유모입니다. 소양군에게는 또 다른 어미나 다름없는데 그런 송부인을 어찌…. 앞으로라고 뭐 달라지겠습니까?"
울먹거리는 옥씨를 보며 태후는 미간을 찡그렸다.
"자네는 자네 부친이나 우리 옥씨일족이 이 일을 가만히 두고 볼듯 싶은가. 어찌 집안을 믿지 않고 그런 약한 말을 하는 것인가."
"황상께서 누가 말한다고 하여 들으실 분이 아니라는 것은 태후께서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이 사람아. 나라고 붕어하신 선황의 총애를 받았는지 아는가. 아닐세. 내가 궁에 들어 왔을 때 이미 선황에게는 정인이 있었네. 그 정인이 나 때문에 황후가 되지 못하였다고 선황이 나를 얼마나 원망하고 미워하였는지 자네가 아는가. 그러나 나는 굴하지 않았네. 어찌되었든 황상의 아내는 나였고 선황의 정인은 그저 정인일 뿐이었으니 말일세. 그러나 결국 그 여인이 자진해 버리자 선황은 태평왕을 총애했네. 비록 나를 총애하신 적은 한번도 없지만 나의 아들들을 총애해 주셨으니, 내 비록 여인으로서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였으니 어미로서는 참으로 굉장한 기쁨을 누린게 아니겠는가."
궁 안으로 쉬쉬되는 황제의 생모에 대한 이야기에도 태후는 거리낌이 없었다.
"제가 알기로 총비마마께서 그리하신 것은 월왕전하와의 옛 정을 잊지 못하여서라 알고 있습니다. 헌데 호공에게 과연 그런 옛정이 있겠습니까. 황상의 총애를 받으며 호의호식 하는 것을 보면 그가 그런 옛정으로 무너질 사람 같지가 않습니다."
눈물 섞인 오왕비의 말에 태후는 혀를 쯧쯧 찼다.
"그러니 말하지 않았는가. 집안을 믿으라고."그 말에 오왕비는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훔쳤다.
"무언가 생각이 있으십니까."
매달리는 오왕비를 보며 태후는 진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생각하지 말고 자네는 그저 건강한 아이를 생산하는 것만 생각하게. 장차 황통을 이을 아이는 그 아이 뿐이니 말일세."
비록 믿을만한 내관 뿐이라지만 황궁 안에는 여러 사람의 눈도 있으니 태후는 거기까지만 말했다. 사실 태후의 말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숨어있었다. 뱃속의 아이는 진성왕이 이긴다면 진성왕의 아이로 황통을 이을 것이고, 진성왕이 진다해도 현 황제의 아이로 황통을 잇게 될 아이였다. 어느 쪽의 후계자도 되는 아이이니 태후로서는 그녀의 몸을 보살펴서 손해를 볼것이 없었다. 태후의 말뜻을 알아챈 오왕비는 그저 고개를 숙였다. 태후는 부풀어오른 오왕비의 배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기다리게. 분명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야."
신년을 앞둔 어느 겨울날, 황제는 뜻하지 않는 자를 맞아들이게 되었다. 한 노인이 황제가 호씨에게 하사한 목걸이를 들고 와 황제를 뵈어야겠다며 난동을 피워댔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병사들은 노인을 황궁 밖으로 내치려 하였지만, 그 손에 들고 있는 것이 황제가 자신의 애첩을 위해 특별히 주문한 장신구인지라 황제에게 이 일을 보고하게 되었다.
보고를 들은 황제는 의아함에 노인을 자신의 앞으로 데려오라 명하였다. 황제의 앞에 나타난 노인은 비루해 보이는 차림을 한 비렁뱅이 노인이었다.
"도대체 무엇에 대해서이기에 짐을 보아야 겠다는 것이냐."
"황상 억울합니다. 저는 억울합니다 황상."
나타나자마자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억울하다 외치는 노인을 보며 황제는 미간을 찡그렸다.
"무엇이 그리 억울하다는 것이냐."
노인은 황제가 자신의 말을 들어줄 듯 하자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황제의 안색을 살피며 말하였다.
"황상, 황상께서 총애하는 자 중에 혹씨 호씨성을 가진 사내가 있습니까."
노인의 물음에 황제는 연유를 알 수 없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을 네가 어찌 묻는 것이냐."
"그 호씨성을 가진 자가 제 아들이기에 그렇습니다."
노인의 밀에 황제의 표정이 변하였다. 황제는 고개를 조아린 노인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노인의 말처럼 자신의 애첩과 핏줄이라면 어디 한구석 닮은 곳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노인에게는 애첩과 닮은 구석이라고는 없었다.
"보기에는 전혀 핏줄로 보이지 않는구나."
"물론 피가 섞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자의 어미와 함께 살며 그를 양육하였으니 제게는 아들 같은 자입니다."
노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호운의 의붓아비쯤 되는 자였다.
"그것이 사실이렷다?"
"물론입니다 황상. 그것이 아니라면 어찌 제가 이것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그리 말하며 품안에서 황금 목걸이를 내보이니, 이가 바로 황제가 이 노인을 마주하게 된 이유가 된 물건이다.
"그래. 그런데 네가 억울하다는 것이 무엇이냐."
"예 황상. 저는 억울하고 분하여 참을 수가 없습니다. 어찌 자식 된 자가 출세를 하였다고 아비를 나 몰라라 할 수 있습니까."
"출세를 하였다고 나 몰라라 하였다?""그렇습니다 황상. 그렇지 않아도 이리 비루한 신세가 되어 충분히 비참한데, 아들이라는 놈이 아비에게 고작 이 목걸이 하나만 던져주고 등을 돌리니 이 어찌 비참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황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천륜(天倫)이 맺어지지는 않았어도 인륜(人倫)으로 맺힌 인연입니다. 어찌 그것을, 아비가 이리 비루한 처지가 되었다고 모른척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인간이 할 짓이 아닙니다. 부디 아들을 벌하여 주십시오 황상!"
노인의 말에 황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고작 그런 일로 짐의 애첩을 벌하라는 것이냐."
황제의 말에 노인은 번쩍 고개를 들고 외쳤다.
"황상, 황상께서도 눈을 뜨셔야 합니다! 그놈은 도저히 황상이 총애할 만한 놈이 아닙니다!"
"고작 너를 무시하였다고 나의 총애를 문제 삼는 것이냐."
황제의 말에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놈은 황상의 총애를 받을 자격이 없는 놈입니다. 그리고 그놈은 사내로 태어난 주제에 사내라면 사족을 못 써서 어렸을 때부터 사내들을 후리고 다닌 더러운 놈입니다. 아마 제가 살던 일대에서 그놈 맛을 못 본 사내가 없을 겁니다."
노인의 입에서 나온 말에 황제의 미간에 굵은 주름이 나타났다. 그러나 노인은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제가 그놈을 쫓아낸 것도 그놈이 기루에서 본격적으로 손님을 받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더럽고 더러워, 한집에서 지낼 수가 없는 놈이었습니다!"
"기루에서 손님을 받았다…? 그 말은, 그가 창기라도 된다는 듯 하구나."
"네 황상! 사실입니다! 그놈은 창기였습니다!"
그 말에 황제의 미간에 간 주름이 더욱 굵어졌다. 노인은 혹시 황제가 믿지 않을까 싶어 격하게 말했다.
"믿어주십시오 황상! 그놈은 천하디 천한 놈입니다! 얼마나 천한가 하면 제 아비되는 저 또한 유혹한 놈입니다!"
"너를 유혹하였다는 것이냐? 그래서, 안기라도 하였단 말이더냐?"
그 말에 노인은 살짝 황제의 눈치를 살피며 우물거리듯 대답했다.
"그놈이 사내로 타고나기는 했지만 요물은 요물이라…사내를 홀리는 재주만은 탁월해 그만…. 그놈이 다리를 먼저 벌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우물거리던 노인은 말을 하며 꿀꺽 침을 삼켰다. 그 눈이 탁해진 것이 뭔가를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는 듯하였다. 그 모습에 황제는 처음으로 의혹이 어렸다. 노인의 태도는 아무리 봐도 꾸며내서 헛소리를 하는 자의 그것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노인의 말들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떠올리자 황제의 얼굴에는 대번에 불쾌감이 번졌다.
"그러니 결국, 네가 하고 싶은 말은 호씨를 벌하고 내치라 그 말이냐."
"바로 그것입니다 황상!"
황제의 말에 섞인 불쾌감을 눈치 채지 못한 노인은 번쩍 고개를 들며 외쳤다.
"그 놈을 벌하여 주십시오 황상."
황제는 가만히 노인을 노려보다 곁에 선 내관에게 명하였다.
"호씨를 이리 불러오라. 지금 당장."
황제의 명이 떨어졌음에도 노인은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자신의 말이 거짓이라면 당사자인 호운이 나타난다는 말에 조금이라도 긴장할 법도 하건만 오히려 황제의 말에 자세가 더욱 당당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의 부름을 받은 호운이 대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랫동안 정궁안에 연금되다시피 하다 갑작스레 대전으로 불려나온 호운은 영문을 알수가 없어 그저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대전에 나타난 호운은 황제의 앞에 고개를 조아린 노인을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들어오지 않고 뭘 하는 게야."
그리 말하며 황제가 호운의 안색을 살피니, 아무래도 노인을 보고 크게 놀란 듯 싶었다. 호운이 노인을 알아본 것 자체가 황제의 심기를 거슬렸다.
"어서 이리 들어오너라."
황제가 재차 명하자 호운은 무겁게 걸음을 옮겨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 노인이 너의 의붓아비라 한다마는, 너는 이자를 알고 있느냐."
황제의 물음에 호운은 답하지 못했다. 황제는 대답하지 못하는 호운을 보며 재차 물었다.
"네가, 의붓아비인 이 노인에게 고작 목걸이 하나만을 주고 모른척 한 것이 맞더냐."
호운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황제는 미간을 찡그렸다.
"맞느냐고 묻지 않느냐."
"황상 그놈이 어찌 제 입으로 그것을 인정하겠습니까. 저 교활한 놈이 제 입으로 순순히 인정하려 하겠습니까."
노인이 그리 말하는데도 호운은 묵묵부답이었다. 황제는 호운이 아무 말도 못하는 것에 더욱 인상을 찡그렸다. 호운은 부정하지 않았다. 이는,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노인이 한 다른 말들도 사실이란 말인가?
사내라면 사족을 못 쓰고 온 마을의 사내를 후리고 다녔다 하였다. 그 일대에 그 맛을 보지 못한 자가 없다 하였다. 단지 헛소리로 치부하기엔 노인의 몽롱한 눈빛이 미심쩍었다. 이는 분명 과거를 회상하는 눈빛이었고, 꿀꺽 침을 삼키는 모양새는 아직도 흥분을 기억하는 듯 하였다.
벌써 수십 년이 지났다면서 아직 그때를 떠올리는 듯한 노인의 태도에 불쾌감이 치솟았다. 이는 황제 자신이 호운을 놓지 못한다는 사실과 연동하여 노인의 말에 신빙성을 더해주는 듯도 하였다.
요물, 그래 호운은 요물이다. 그런 요물을 한번이라도 품어본다면 잊을 수 있으랴.
그리 생각하고 나니 노인의 말이 목에 가시처럼 걸렸다. 모든 사내들이 그를 품었다고 한 것이나 사내라면 사족을 못 쓴다는 말이 쿡쿡 쑤셔댔다. 다른 사내들이 그를 품에 안았을 사실을 생각하니 화가 치밀었다. 아무 말 못하고 선 호운은 입에 아교라도 붙인 것처럼 그 자리에 서 있는 호운을 노려보며, 황제가 엄하게 물었다.
"기루에서 손님을 받았다는 것은 사실이냐?"
황제의 말에 호운의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그러나 크게 벌어진 눈과 달리 호운의 입은 단단히 붙은 채, 끝내 아니라는 부정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런 호운의 태도에 황제의 뱃속에서 시커먼 열기가 치솟았다. 그것이 모든 것의 긍정으로 여겨지며 노인의 말 또한 모두 사실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황제는 호운을 노려보며 빠드득 이를 갈았다. 그러다 병사들을 돌아보며 큰 소리로 명했다.
"저놈을 지금 당장 옥에 가두라!!"
그 말에 노인은 희색이 만만해 고개를 들었다. 그는 황제가 호운을 가리키며 그리 명하였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고개를 들어보니, 어쩐 일인지 황제의 손가락은 자신을 가리키고 있었다.
"화, 황상!"
노인은 황제의 말에 깜짝 놀라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나 황제는 명령을 번복하지 않았고 병사들은 순식간에 노인을 제압해 대전에서 끌어내었다.
"황상, 황상 어찌 그러십니까 황상! 황상!"
노인의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멀어지는 가운데 황제는 침묵을 지켰다. 마침내 노인의 비명이 완전히 사라진 후 황제는 호운의 턱을 으스러트릴 듯 움켜쥐고 물었다.
"뭐라 말을 해보거라. 억울하다면, 억울하다고 무어라 말이라도 해 보거라."
황제의 말에 호운은 그저 눈을 내리깔았다. 그것이 황제에게는 대답에 되었다. 그 태도에 황제의 뱃속에서 분노의 열기가 치솟았다.
그리 뻣뻣하게 굴더니 다른 사내들 아래서 굴렀단 말인가.
그리 고결한 척 하더니 다른 사내들이라면 좋았단 말인가.
대답하지 않는 호운의 작은 한숨이 들린 순간, 황제의 분노는 폭발하였다.
황제는 그 길로 바로 호운의 머리채를 붙들고 자신의 침전으로 향했다. 머리가 붙들려 질질 끌려 가는 호운의 모습에 내관들이 분분히 시선을 돌렸다. 마침내 침전에 도착한 황제는 호운의 몸을 바닥에 패대기치며 옷을 벗겨내었다. 그러자 호운이 본능적으로 그 손을 밀치며 저항을 하려 했는데, 이 행동에 황제는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닳고 닳은 놈이 어찌 그런 태도냐! 내 친히 너를 품어주겠다는데 감히 저항을 하다니!"
철썩!!
호운의 뺨이 홱 돌아갔다. 황제의 모욕적인 말에도 호운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순간적으로 강하게 뺨을 얻어맞아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황제는 호운의 그 멍한 표정에 오히려 욕정이 치밀었다.
황제는 옷을 거칠게 찢어내고 호운의 다리를 벌렸다. 조밀하게 입을 다문 밀지가 황제의 눈앞에 들이밀어졌다. 저리 조신한 척 조밀한 것의 내부가 사내를 미치게 한다는 생각에 황제는 더욱 화가 났다.
"더러운 것!"
황제는 다시 호운의 얼굴을 쳤다. 주먹이 코를 빗맞아 터진 코피가 호운의 하얀 얼굴을 따라 흘렀다. 호운의 미간이 고통으로 일그러졌지만 황제는 망설이지 않고 호운의 밀지에 침을 뱉었다. 그리고 평소처럼 손가락으로 안을 길들이지 않고 곧장 자신을 밀어 넣었다.
호운의 몸이 일순 경직되더니 파들파들 떨렸다. 바닥을 기는 손의 관절이 하얗게 변했다. 황제도 지나친 압박감에 숨을 쉴 수가 없어 밭은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멈추지는 않았다.
힘겹게 안으로, 안으로 들어간 황제는 호운의 엉덩이가 자신의 아랫배에 밀착될 때 까지 침입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안에 자리를 잡자 호운의 내부는 침입자를 몰아내기 위하여 움직이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황제의 쾌감으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평소라면 좋아 미칠 것 같던 그 반응조차 지금은 화가 났다.
"그래, 처음부터 네놈이 그런 놈인 줄 알아보았다! 천한 놈, 더러운 놈!"
말을 하면서도 눈앞에서 환상이 어른거렸다. 호운이 여러 사내와 뒤엉켜 좋아 미치는 모습이 선했다. 낮선 사내와 뒤엉켜 헉헉거리는 호운의 모습을 본적이 없는데도 또렷이 상상할 수 있어 황제는 화를 억누를 수 없었다.
철썩!
황제는 다시 호운의 뺨을 치고 손톱으로 피가 날 정도로 허리를 긁어댔다. 황제는 분을 참지 못하고 계속하여 호운의 뺨을 치고 주먹질을 했다. 그러면서도 허리를 놀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주먹으로 때리고 뺨을 치고 목을 조르면서도, 계속해 허리를 놀렸다.
마침내 황제가 토정하였을 때는 이미 호운은 기절한 후였는데, 그 얼굴은 멍과 코피로 엉망진창이었다. 아무리 보기 좋은 미인이라도 흉해다 할 만한 몰골이었음에도 황제는 기절한 호운의 몸을 질질 끌어 침상위에 던지고 행위를 멈추지 않고 이어갔다. 기절한 호운의 몸에는 상처가 증가해갔고 그가 흘린 피로 바닥과 침상이 섬뜩하게 물들었다.
시종들은 갑자기 흉포해진 황제의 모습에 그저 눈치만 보며 벌벌 떨었다.
다음날, 황제는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옥좌에 앉았다. 어제 분기를 모두 욕정으로 풀어내었음에도 아침이 되니 자꾸만 호운이 생각났다. 화가 나면 날수록 그 안으로 파고들고 싶어졌다.
황제는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 호운의 안으로 파고들고 싶은 욕정을 억눌렀다. 아마 지금 달려갔다간 어제처럼 다시 주먹질을 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번에는 호운을 죽여 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자신의 행동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그리 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호운이 죽어서는 안 되었다. 황제는 아직 그 몸에 볼일이 남아있었다.
황제는 호운에게 향하는 대신 감옥에 가둔 노인, 왕씨를 찾아갔다. 왕씨는 어이해 자신이 감옥에 갇혔는지 영문을 몰라 답답한 가슴을 부여잡고 있다 황제가 나타나니 반색해 외쳤다.
"황상, 황상 저를 빼내어 주십시오 황상! 황상!"
애원하는 왕씨를 보며 황제가 냉랭히 말했다.
"네가 호씨와 함께 살던 곳이 어디냐."
"서남, 서남의 화성입니다."
"옛 월왕의 영토로군."
황제는 미간을 찌푸린 후 다시 물었다.
"그놈의 이름은?"
"운(運)입니다."
왕씨가 냉큼 대답하지 황제는 더는 볼 것도 없다는 듯 등을 돌렸다. 황상 황상! 황제를 부르짖는 왕씨의 목소리가 돌 벽에 메아리쳤지만 이미 황제의 관심은 왕씨에게 향해있지 않았다. 왕씨의 비명을 뒤로하며 빠른 걸음으로 감옥을 벗어나던 황제는 지상으로 향하는 계단의 입구에서 서융과 마주쳤다. 평소와 달리 가벼운 경장차림인 서융을 보며 황제는 미간을 찡그렸다. 서융 또한 황제를 마주하고 일순 낯을 찌푸렸지만 이내 그 찌푸린 낯을 숨기듯 고개를 숙였다.
"분명 진성왕부를 감시하라고 명했을 텐데 여기는 어쩐 일이냐."
"부하들에게 물샐 틈 없이 왕부를 감시하라 명하고 오는 길입니다."
"나는 분명 서장군에게 그곳을 지키라 명하였다. 그런데 어찌해 명령을 어기는 것이냐."
황제의 어투는 날이 선 것이 심상치 않았다. 평소라면 명령이 제대로 이행만 된다면 사소한 것은 꼬투리잡지 않던 이가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것은 무언가 심상찮은 전조였다. 황제의 얼굴을 가만히 보던 서융의 눈빛이 묵직해졌다. 황제는 서융을 가만히 바라보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호씨를 안은 적이 있더냐."
황제의 물음에 서융은 침묵을 지켰다.
"어찌 대답을 않는 것이냐."
채근하는 황제를 보며 서융이 느릿하게 물었다.
"갑자기 왜 그런 것을 물으시는 것입니까?"
"네가 그리 말이 길어지는 것을 보니 알겠구나. 안았구나."
단정 짓는 말에 서융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곧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물었다.
"그러하다면, 제 목이라도 베시려 하십니까."
서융의 대답에 황제의 입이 다물어졌다. 마치 노호성이 터져나올 듯 비틀어진 입가는, 이내 일자로 평평해지더니 애써 미소를 그려낸 채 평탄한 말을 토해냈다.
"겨우 그런 천한 놈을 어찌했다고 너처럼 쓸 만한 부하를 버릴 성 싶으냐. 쓸데없는 소리 말고 진성왕부로 돌아가라."
그리 말하며 스쳐 지나간 황제의 등을 향해 서융이 말했다.
"어찌 천한 것이라 하십니까. 총애하던 자가 아닙니까?"
"총애? 내가 그런 것을 총애하였다고?"
황제의 말투가 사나워졌으나 서융은 태연했다.
"그자를 위해 아끼던 총동들의 목을 벨 정도로 총애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놈을 위해 벤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자가 원인이 되기도 하였지요."
평소에는 서융의 당돌하리만치 직선적인 어투를 마음에 들어 했던 황제는 지금만큼은 도저히 그의 말을 웃어넘길 수 없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냐."
"버리실 겁니까."
서융의 물음에 황제의 대답은 없었다. 그것이 대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대답하지 못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서융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침묵 속에서 황제의 갈등을 읽어냈기 때문이다.
"버리실 것이라면, 그놈을 제게 내려주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닳고 닳은 놈이다. 그런데 탐을 내는 것이냐?"
황제의 말에 서융은 낮게 웃었다.
"어차피 황상이 버릴 것이라면 제가 거둔다 해도 상관없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황상의 은총을 입은 몸인데, 저자에서 사내들을 상대로 구른다면 황상의 마음도 편치 않겠지요."
서융의 말에 황제는 화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두 눈은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지만 미소만은 화사해, 눈빛 속에 숨은 분노를 읽지 못하였다면 그의 감정을 오해하였을 만큼 말이다.
"그 놈이 내 손을 떠날 때는 이미 산 목숨이 아닐 테니 그런 일은 없을 게다. 서장군은 쓸데없는 것에 신경 쓰지 말고 맡은 바 소임에 충실 하라."
황제는 그리 말하고 미소를 유지한 채 복도를 걸어갔다. 서융은 그런 황제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낮게 혀를 찼다.
태연한 듯 서융을 뒤로하였지만 황제의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용암처럼 뜨거운 것이 속에서 북받쳐 그는 견딜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는 분노는 심상치 않아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황제는 감옥을 나서자마자 곧장 서남으로 세 사람의 조사관을 파견하여 호운에 대해 낱낱이 조사해 올리라 고하였다.
그러나 마냥 보고를 기다리기에 황제의 화는 컸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왕씨에게서 들은 호운의 일들이 모두 사실인 것처럼 그려졌고,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화가 치밀었다. 때문에 황제는 쉴 새 없이 정궁을 들락날락하며 호운을 집요하게 괴롭혔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처음 호운을 만났을때 힘들어하던 그의 모습따위는 사라져있었다. 그의 망상속에서 호운은 점차 음란하고 방탕한 모습으로 변해갔고 그런 망상의 변질에 따라 그의 행동도 더욱 난폭하게 변했다.
이제 황제는 호운에게 주먹을 예사로 들었고 피를 보는 일도 잦았다. 폭력적인 황제의 행동에 호운은 속수무책으로 휩쓸렸는데, 이는 근래 황제의 다감하던 태도와는 천지차이인 것이라 궁 안은 다시 호운의 소문으로 시끄러워졌다. 호운을 대하는 황제의 태도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 호운은 제대로 운신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 되는 날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는 사이 신년이 지나 황제의 제위도 햇수로 3년이 되었다. 계절은 한겨울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황제는 싸늘한 북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서남에서 보고를 마쳤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사관들이 올린 서류가 황제의 탁자위에 켜켜이 쌓이기 시작하였다.
보고의 내용을 본 황제는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 거기에는 호운이 서남 화성에서 몸을 팔던 자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왕씨의 말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결과에 황제는 말도 잇지 못하였다. 거기에는 왕씨의 말처럼 호운이 여러 사내와 관계를 맺어왔고 화성에 소문난 남창이었다고 쓰여 있었다. 그를 품었다고 주장하는 사내의 숫자가 기록에만도 백 여명이 넘어가니 길을 구르는 노류장화도 그보다는 정절을 지켰다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호운이 제 어미를 겁간하고 목 졸라 죽인 죄를 저지른 의혹까지 있다는 것을 안 황제는 어이가 없어졌다.
기록을 넘기면 넘길수록 분노가 쌓여갔다. 기록을 보니 호운은 세상에서 가장 추악하고, 가장 더럽고, 가장 흉한 자였다. 그런 자가 자신의 궁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황제는 너무나도 불쾌했다.
그러나 가장 불쾌한 것은 이런 서류를 보면서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의 모습에 욕정이 치미는 현실이었다. 황제는 어이해 자신이 그런 추악하고 더럽고 흉한 자를 보면 욕정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여태 저지른 죄를 보면 응당 목을 쳐야했다. 제 어미를 죽인 죄와 황제를 능멸한 죄, 그리고 그 더러운 몸으로 감히 황제에게 안긴 죄 등을 생각하면 저잣거리에서 사지를 찢어내고 뼈가 삭아 없어 질 때 까지 효수를 하여도 부족할 정도였다.
그러나 황제는 그 기록을 모두 보고도 그러할 수 없었다. 그는 그 보고들을 모두 바닥에 팽개치고 다시 정궁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침상에 기절한 듯 잠든 호운을 끌어내 바닥에 내팽개쳤다.
아직 정사의 흔적을 남긴 채 알몸인 호운은 찬 바닥에 팽개쳐진 충격으로 눈을 떴다. 부어오른 눈매가 제법 아플 법도 하건만 호운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앓는 소리 한번 내지 않는 호운을 보고 황제는 분기탱천하여 외쳤다.
"참으로 가증스러운 놈이구나, 그러고도 네가 하늘을 이고 살고 있느냐!"
다시 주먹으로 호운의 배를 두드리자 이번에는 입에서 끅, 하는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겨우 황제는 분이 조금 풀리는 듯싶었다. 그러나 사죄하는 말도 없이 뻣뻣한 호운의 태도에 다시 분이 치밀었다. 저리 뻔뻔한 호운의 태도에 치가 떨렸다. 그러나 더 치가 떨리는 것은 그리 뻔뻔한 호운을 보고도 다시 욕정을 느끼는 자신이었다.
결국 황제는 그대로 찬 바닥에서 호운을 짓뭉개듯 안았다. 다시 코피가 터지고 밀지에서 피가 흐르고, 몸 곳곳에서 피가 흘러 매끄러운 대리석위로 흘렀다. 그 동안 호운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기절하는 그 순간 까지 황제가 그토록 바란 사죄의 말은 커녕 그 어떤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호운은 멍투성이의 얼굴을 가리지도 않고 연못을 노니는 잉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비록 그 얼굴에는 황제가 남긴 멍 자국이 선명했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간밤에 황제가 하였던 행동 따위는 이미 자취를 감춘 후였다.
그에게는 황제의 난폭한 행동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간이라도 빼어줄듯 달게 굴더니 어느 날 표변하게 저리 구는 황제에게 이유를 묻고 싶지도 않았다. 호운이 묻는다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쏟아지는 말의 폭력도 그다지 아픈 줄을 몰랐다. 황제는 왕씨에게서 호운이 기루에서 손님을 받았다는 사실을 어이 전해 들었는지 호운을 남창취급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거기에 호운은 아무 반론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황제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고 왕씨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호운의 말 만큼 의미가 없는 것 또한 없다.
멍하니 연못 안을 노닐던 잉어를 보던 호운은 수면이 비치는 얼굴을 발견하고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다가온 것인지 서융이 호운이 선 연못가에 서 있었다. 서융은 멍이 든 데다 입술은 터진 호운의 몰골에 인상을 썼다.
"황상이 이리 했더냐."
그 물음에 호운은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다. 서융은 그런 호운의 모습에 인상을 쓰다 주변에 인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목소리를 낮췄다.
"도망치고 싶지 않으냐."
서융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전혀 의외의 말이었다. 잠시 그 말에 놀랐지만, 호운은 곧 그 은밀한 제의에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도망쳐서 뭘 어찌하겠어. 설령 도망친다고 해도…."
아직 유란란은 진성왕부에 연금된 채이고, 복치운도 마찬가지인 신세였다. 서융은 말끝을 흐린 호운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 낮게 말했다.
"황상이 밀명을 내렸다."
서융의 은밀한 어조에 호운은 도리어 연못으로 시선을 돌렸다. 연못안의 잉어들은 여전히 근심이 없는 것처럼 유유히 돌고 있었고 파문이 잦아든 연못에 비춰진 호운의 얼굴은 보기 흉하게 부어있었다. 그 얼굴 옆으로 나란히 비춰진 서융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으냐."
"왜, 내가 궁금해 해야 하는 건가?"
무심한 호운의 대답에 서융은 짧게 코웃음을 쳤다.
"월왕의 아들에 대한 밀고가 들어왔다."
그 말에 호운은 놀라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제야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호운을 보며 서융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제 흥미가 생겼나?"
"월왕의 아들에 대한 밀고라니…?"
호운은 입속이 바싹바싹 마르는 듯 해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융은 그런 호운을 보며 심술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살아있는 황족 중에 황위를 계승할 수 있는 것은 황상의 아들인 소양군과 진성왕 뿐이다. 소양군은 어차피 병신이니 상관이 없고, 진성왕은 머지 않아 황상의 손에 목이 달아 날 테니 남은 것은 혹시 모를 불씨를 꺼트리는 일이지. 그러니 당연히, 죽은 번왕(藩王)들의 가솔들을 추적해야 하지 않겠어? 특히 월왕은 황상과도 적지 않은 인연이 있는 자이니 더 추적이 집요해질 수 밖에."
호운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서융이 혹시 복치운에 대한 것을 알아챈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을 숨기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런데 왜 그걸 내게 말하는 거지?"
호운의 말에 서융은 낮게 웃었다.
"그게 네가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아니었던가?"
그 말에 호운은 서융이 복치운의 정체를 알고 있음을 눈치 챘다. 호운은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미 호운의 안색인 새하얗게 변해있었고 보는 사람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래서, 그 말을 하는 이유가 뭐야?"
겨우 목소리가 떨리지 않을 정도로 진정하여 물은 호운을 보며 서융은 피식 웃었다.
"어째서일 것 같아?"
"……."
이유가 짐작도 가지 않는 호운은 아무 말 하지 못했다. 그러나 서융은 호운이 대답을 하지 못하리라 미리 짐작한 것처럼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말을 이었다.
"선택해라. 도망칠건지 말건지."
"말했잖아. 내가 도망치면…란란이와 치운이가…."
아니 그보다 그 란란이와 치운이가 지금 무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언제까지나 이런 식으로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그러나 호운 혼자서 도망친다고 뭔가가 변할까.
호운은 황제의 폭력적이고 잔인한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나 손바닥을 뒤집은 것처럼 태도를 바꾸었다.
"그 남매도 함께 말이다."
그 말에 호운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서융은 자신의 말에 호운이 반응한 것을 알았기에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네가 선택한다면 그리 해주지. 어찌 할 테냐. 도망 칠 테냐,"
호운은 서융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었다.
"어째서,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 거지?"
혼란스러운 얼굴로 묻는 호운을 보며 서융은 다시 대답을 재촉했다.
"아까부터 자꾸 어째서냐고 묻는군. 어째서 인지가 그렇게 중요한가?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시간이 없어. 빨리 선택해라."
서융의 말에 호운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 보니 평소에는 호운과 그리 멀지 않은 자리에 버티고 서 있던 내관들이 주변에 보이지 않았다. 여태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호운은 서융이 내관들을 물려놓은 것이라는 것을 뒤늦게 눈치 챘다.
"네가…?"
"시간이 없다고 말했을 텐데."
서융의 재촉에 호운의 대답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가고 싶어."
유란란, 복치운만 아니었다면 진작 어떻게 해서든 도망칠 방법을 궁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가능하다면 달아나고 싶었다. 굳이 황제가 폭력적으로 변하기 전이었다 하더라도 호운은 달아나고 싶어 했다. 호운을 둘러싼 부귀영화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거북하였고 한시라도 마음이 편한 날이 없었다. 무엇보다 당연히 사내를 상대하는 사내로 낙인찍힌 이곳이 너무나 싫었다.
대답하는 호운의 눈동자가 눈물을 머금고 흔들거렸다. 서융은 그런 호운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그 때를 기다렸다는 듯 모습을 감추었던 내관들이 하나둘 정원 가운데의 돌문 뒤에서 걸어 나왔다. 그들 중 일부가 서융의 모습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서융은 태연하게 그들을 흘긋 보더니 그대로 정원에서 모습을 감췄다. 내관들은 서융의 등장에 서로를 돌아보며 속삭이고 있었지만 호운은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융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린 호운은 느릿느릿 다시 연못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호운이 귀여워하는 빨강이 마침 연못의 끝에 다다라 몇 번이고 연못 끝을 따라 돌다 이내 연못 안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똑같이 갇힌 신세지만 아무 생각 없이 자유로운 듯 노니는 그들의 신세가 차라리 자신보다는 나아 보였다.
2월 초하루.
진성왕과 황제의 대립이 이어지는 가운데 황궁에서 멀리 떨어진 서북 국경에서 큰 분쟁이 일어났다. 원래 요족과는 국경을 맞닿고 있기에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지 않았지만 황제가 오왕이던 시절의 요족 친정이후로는 잠잠하였던 요족이 갑작스레 국경을 침입한 것이다. 이 일로 두 개의 마을이 불타고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다.
참으로 시기가 절묘하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때는 마침 남의 후무족을 상태로 지속된 영토분쟁 때문에 서북에 있던 병사 삼만을 남쪽으로 파견한 후였다. 따라서 서북에 병사수가 부족하여 부득이하게 다른 지방에서 병사를 파견하여야했는데, 후무족과의 끈질긴 전투 덕에 달리 파견할 병사들이 없었다. 때문에 황제는 도성을 수비하던 병사 중 자신이 오왕의 시절 거느리던 사병을 제외한 오천의 병사를 서북으로 파견하고 근방의 지역에서도 병사를 징발하였다. 상황이 도성의 병사들을 쉽게 비울 수 없는 상황인지라 황제는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아무리 진성왕을 하찮게 여긴다 하더라도 그가 거느린 사병의 수만도 일 만에 근접하고 옥씨세가가 동원할 수 있는 병사의 수도 그에 못지않았다. 때문에 황제는 도성에 적어도 이만의 병사를 상주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병사들이 출정하던 날은 눈 대신 비가 내렸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대낮조차 어둡게 만드는 가운데 오천의 병사가 도성문을 나서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도성의 주민들은 멀리서 일어났다는 전투에 대해 두런두런 이야기하였고, 대신들은 혹시 모르니 조금 더 많은 병사들을 파견하여야 한다고 주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황제는 대신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오왕부에 있는 병사들을 도성으로 보내라는 명령을 전달했다. 도성 외부를 지키던 병사들을 안으로 들였기에 표면적으로 황궁을 지키는 병사의 수는 같았지만 병사들의 질은 예전만 못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날 황제는 여러모로 바빴다. 그 때문에 궁안의 분위기도 어수선하였지만 호운의 일과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예전에는 호운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듯 착 달라붙어있던 내관들이 최근에는 조금 그와 거리를 둔 상태였다. 귀찮을 정도로 호들갑을 떨며 대접하던 태도 또한 손바닥을 뒤집은 것 처럼 변하여 처음 정궁을 드나들던 때처럼 최소한의 것만 그에게 제공되었다. 그러나 호운은 오히려 이 상태가 편했다. 누구도 호운에게 과한 접근을 하지 않고 누구도 말을 걸지 않았다. 쓸쓸하였지만 말을 섞을수록 가슴속이 텅 비는 것을 생각하면 차라리 이쪽이 나았다.
"서장군께서 오셨습니다."
멍하니 앉아있던 호운은 갑작스러운 목소리게 고개를 번쩍 들었다. 곧이어 가벼운 갑주를 걸친 서융이 방 안으로 들어오자, 내관들이 소리 없이 방을 물러섰다. 호운과 거리는 둬도 방밖으로 나간 적 없던 내관들이 방문 밖으로 나가자 호운은 놀라고 말았다.
"도대체 어찌 한 거야?"
호운의 물음에 서융은 대답대신 뚜벅뚜벅 호운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거의 호운의 코앞까지 접근하고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일이다."
속삭이는 저음에 호운은 움찔하였지만 곧 그 말이 뜻하는 바를 깨닫고 눈을 번쩍 떴다.
"내일 동문 밖으로 나와라."
서융은 그리만 말하고 호운에게서 물러났다. 그런 서융의 등 뒤로 호운이 다급히 물었다.
"그리로 어찌 가란 말이야? 지금 나는…!"
"그리로 오기만 하면 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서융은 그렇게 말하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호운은 그저 멀어지는 서융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예상외로 빠른 서융의 말에 호운은 당황했다. 처음 서융이 그리 말하였을 때만 해여도 설마, 서융이 자신을 위해 그리 해 줄까 여겼다. 그런데 정작 내일이라고 날짜를 제시하자 당황스러웠다. 정궁밖으로 운신조차 못하는 처지에 동문이라니. 과연 그리로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지만 동시에 서융이 그리 해 주겠다는 이유를 몰라 불안이 치솟았다. 그리해서 서융이 얻는 이득이 무얼까.
'내 몸?'
불현듯 든 생각을 호운은 순식간에 지웠다. 이것은 자만이다. 이제 자신의 나이도 서른 넷. 결코 젊지도 않고 계집들처럼 부드럽지도 않다. 더군다나 다른 사내의 품에서 뒹군 자를 쉽사리 받아들일까.
황제의 표변을 보면 그것은 분명하다. 황제는 호운이 기루에서 손님을 받았다는 사실을 안 순간 손바닥을 뒤집은 듯 난폭해졌다. 그 전에는 어울리지 않게 다정한 말투로 호운을 당황시키더니 고작 그 사실 하나로 호운을 이리 대하였다. 그런데 뻔히 황제와 수없이 뒹군 것을 아는 호운을 서융이 원할 리 만무했다.
'융이 얻는 이득은 뭘까.'
호운은 서융이 자취를 감춘 복도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어스름한 밤이 깔리기 시작한 복도의 어둠이 마치 뱀의 뱃속처럼 시커먼 어둠을 드러내고 있었다.
서융이 말한 내일의 전에 찾아온 초하루의 밤은 길었다. 눈썹보다 가느다란 달은 구름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호운의 방에 켜진 등불은 밤이 깊도록 꺼질 줄을 몰랐다. 마치 숨 하나하나를 세듯 느릿하게 가던 시간에 호운은 숨을 죽였다.
황제는 평소와 변함이 없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폭력을 휘두르며 호운을 유린했다. 아물 틈이 없는 전신의 상처에서 피가 흘렀지만 황제는 거침이 없었다. 그는 마치 호운을 괴롭히는 것이 삶의 목적인 것처럼 집요했다.
그러나 새벽을 지나며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 어느덧 정신을 차려보니 정오가 다 되어 있었다. 그때야 겨우겨우 자리를 털고 일어난 호운은 옷을 챙겨주는 여관들의 시중을 받으며 느릿느릿 정원으로 나섰다.
어젯밤에도 황제는 평소와 변함이 없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폭력을 휘두르며 호운을 유린했다. 겨우 아물어가던 상처가 터져 피가 흘렀지만 황제는 거침이 없었다. 마치 호운을 괴롭히는 것이 그의 삶의 목적인 것처럼 집요한 황제의 행동에 호운은 이제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서융이 말한 내일인 오늘은 무척 고요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오늘의 흐름 속에 호운은 과연 그가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무언가 일이 벌어지리라 믿기에 오늘은 너무 고요했고 평소와 같았다.
무언가 일이 터질지도 모른다는 전조는 늦은 오후부터 시작되었다. 호운의 처소인 정궁의 창밖으로 수많은 군사들이 일제히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군사 훈련을 하더라도 황궁의 안쪽인 정궁에서 보이는 일은 드물었고, 이처럼 갑주를 걸친 병사들이 한꺼번에 달려 나가는 모습 자체가 드물었다. 병사들이 사라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서 북소리가 들렸다.
둥둥둥둥!
황궁 안에서 울릴 리가 없는 전장 같은 긴장된 북소리에 내관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나이든 내관들은 어린 내관들을 시켜 밖을 확인하러 나가라 하였다. 멀찍이 그들과 떨어진 채 상황을 주시하던 호운은 이윽고 밖으로 나갔던 어린 내관이 다급히 고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뭔가 사단이 일어난 듯 합니다. 황궁밖에 웬 군사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군사라니? 도성에 어찌 군사가 들어왔단 말이냐? 제대로 본 것이 맞느냐?"
"제대로 본 게 맞습니다!"
"누구의 군사 같더냐?"
"아무래도 진성왕전하의 군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린 내관의 말에 나이든 내관들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진성왕과 황제의 대립이야 전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갑작스레 이런 식으로 정면으로 군사를 일으키다니.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정쟁정도에서 끝날 일이 아닌 심각한 사태였다.
"네 어서 대전으로 가 보아라."
"예."
어린 내관이 다시 쪼르르 달려 나가자 남은 내관들이 불안에 차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것이 융이 말하였던 '내일'의 실체일까. 호운은 내관들의 이야기들을 흘려들으며 생각했다.
"으아아아악!"
그때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정궁안까지 쩌렁쩌렁 울려왔다. 멀어 둔탁하니 알아보기 힘든 목소리였지만 이는 분명 변성전의 어린 소년의 목소리로, 방금 전 궁을 나선 내관의 목소리와 무척 닮아 있었다. 그 비명소리에 정궁 안에 싸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나 그 침묵은 잠시였다. 곧이어 우렁찬 함성과 날카로운 비명, 요란한 병장기의 소음이 연이어 울리기 시작하였다.
먼 곳에서 아스라이 울리던 소리는 점차 소리를 키워갔고 마침내 정궁의 코앞까지 비명을 울리더니, 이윽고 쾅쾅! 문을 박살내는 소음과 함께 무거운 갑주를 걸친 병사들이 우르르 정궁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어린 내관들이 마치 새끼 새처럼 비명을 내지르며 도망치는 가운데 피 묻은 병장기를 든 병사들이 흉흉한 모습으로 정궁 안을 짓밟으며 걸었다. 내관들은 공포에 질려 병사들을 피하다 호운을 보았다. 만약 호운이 전처럼 총애를 받는 입장이었다면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호운 먼저 대피를 시키려 하였을지 모르지만 지금 호운의 꼴을 보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들은 호운을 내버려둔 채 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달아났다.
순식간에 궁 안을 빠져나간 내관들의 뒤를 수많은 병사들이 뒤쫓았다. 순식간에 병사들이 실내에서 사라지고 남은 것은 단 한명의 병사와 호운 뿐이었다. 다른 병사들과 달리 화려한 투구를 쓴 그 병사가 호운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와 날카롭게 검을 내찔렀다.
피방울이 맺힌 칼날이 자신의 코앞에 들이밀어진 순간 훅, 강렬하게 끼치는 피 냄새에 호운은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순식간에 전신의 피가 발밑으로 빠져나가는 듯하였다. 당장이라도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것처럼 다리에 힘이 빠졌지만 용케 호운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호운에게 칼을 들이민 병사는 호운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호운도 홀린 듯 그의 얼굴을 보았다. 워낙 경황중이라 첫눈에는 알아보지 못하였지만, 그는 호운에게도 낯이 익은 자였다. 그는 바로 진성왕부의 주변을 경호하던 진성왕의 사병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유란란이나 호운을 못마땅해 하는 자들 중 하나였다. 상황과 사람이 일치하자 등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코앞으로 들이밀어진 칼날은 당장이라도 호운의 목을 꿰뚫을 것처럼 살벌한 기색을 띄고 파르르 떨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호운에게는 마치 영원처럼 긴 시간이었지만 무장이 들이민 칼끝에 맺힌 핏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전의 짧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핏방울이 신호처럼 바닥에 파문을 그리고 떨어지자 무장은 칼을 거두고 나직하게 으르렁거렸다.
"운이 좋은 줄 알아라, 남창."
무장은 그리 말하고 호운을 스쳐지나가 다른 병사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울려 펴졌다. 그리 멀지않은 곳에서 울리는 그 비명의 주인은 방금 정궁에서 달아난 환관들임에 틀림없었다. 그 비명을 신호처럼 호운은 그 자리에서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하악, 하악! 학!"
저도 모르게 숨조차 멈추고 있었던지 호운은 밭은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등 뒤는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한참 그렇게 고개를 숙인 채 숨을 고르던 호운은 얼마 지나지 않아 느릿느릿 고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도 떨림이 멎지 않았지만 이대로 이 자리에 있을 수는 없었다. 호운은 떨리는 다리를 질타하며 걸었다.
정궁의 정원으로 나선 호운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곳곳에 병사들의 시체가 널려있었다. 한참동안 눈을 감고 그 자리에 서 있던 호운은 이내 이를 악물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병사들의 시체가 드문드문 쓰러진 정궁의 모습은 이미 예전의 아름다움은 온데간데 없었다. 짓밟힌 꽃들과 부러진 나무, 그리고 쓰러진 시체에서 쏟아진 피와 석양에 온통 붉게 물든 연못이 있는 풍경은 마치 지옥 같았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질타해 겨우겨우 정궁을 나선 담 밖의 풍경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좁은 창으로 볼 때는 짐작도 못하였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황궁 곳곳에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곳곳에 궁녀와 내관, 그리고 병사의 시체가 뒤엉켜 쓰러져 있었고 멀었던 함성이 가까워졌다.
우아아아아아! 우레와 같은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였다. 빨간 석양에 물든 하늘은 불타는 건물들이 뿜어낸 검은 연기에 가려져 칙칙한 먹빛을 하고 있었다. 이쯤 되니 무언가 사단이 터져도 단단히 터졌다는 싫어도 알 수 밖에 없었다.
멍하니 그 풍경속에 서 있던 호운은 둥! 둥! 둥! 크게 울리는 북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이대로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호운은 재빨리 동문을 향해 달렸다. 그 길에는 시체가 수도 없이 쓰러져 있었지만 융이 말한 곳이 그곳이니 어쩔 수 없었다. 동문을 향해 달리던 호운은 일부 살아남은 여관들이 울부짖는 모습과 부상당한 병사들이 신음을 울리는 것을 보았다. 평소 황궁의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이 압도적인 폭력 앞에 무너지는 풍경에 호운은 달렸다. 경황이 없는 상황이었던데다 제정신으로 보이는 자가 단 하나도 없는 상황이어서 그 누구도 호운의 발길을 막지 않았다. 평소라면 무겁게 닫혀있을 겹겹의 문들이 모조리 활짝 열리고 부서져 있었기에 호운은 어렵지 않게 동문에 다다를 수 있었다.
"허억, 헉! 헉!"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연일 이어진 폭력과 긴장으로 인해 이미 호운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지쳐있었다. 그러나 호운은 그 자리에 주저앉는 대신 주변을 둘러보았다. 융은 동문으로 나오라고만 하였지, 언제라고는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문의 주변에는 개미새끼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담 하나만 넘으면 황궁밖이기에 언제나 경비가 삼엄한 곳이 을씨년스럽게 버려져 있었다. 물론, 융도 없었다. 호운은 불안한듯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살폈다.
그때, 멀리서 새카만 흑마가 달려왔다. 소란속에서도 선명하게 말발굽소리를 울리며 달려온 흑마는 순식간에 호운의 앞에 당도하였다. 거칠게 투레질하는 말의 위에, 흑마와 일체인듯 새카만 옷을 걸친 융이 앉아있었다.
"융…!"
호운이 놀란 듯 눈을 깜빡이자 서융이 외쳤다.
"타라, 어서!"
다른 말도 없이 손을 내미는 서융을 보고 호운이 멈칫하였다. 주변에는 그들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곧 가장 불안했던 것을 먼저 물었다.
"란란이와 치운이는?"
"그 남매는 내가 먼저 피신시켰다."
"정말이야?"
호운은 서융의 말을 마냥 믿을 수가 없어 그리 물었다. 그러나 서융은 호운의 표정도 살피지 않고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어서 와, 늦었다간 도성을 빠져나가지 못할 거다!"
호운은 잠시 서융의 말이 진정인지 아닌지를 가늠했다. 그러나 시간은 너무 촉박했고 서융이 이런식으로 거짓말을 해서 얻을 것이 없었다. 결국 호운은 서융의 손을 잡고 말에 올라탔다. 서융은 호운이 자신의 뒤에 앉자마자 말의 배를 찼다.
히이잉!
세찬 투레질 소리와 동시에 빠른 속도로 말이 달려 나갔다. 생전 처음 이런 속도를 겪어보는 호운은 겁에 질린 듯 서융의 등에 바싹 달라붙었다. 말은 엄청난 속도로 도성의 대로를 가로질렀다. 그 사이 스치는 거리의 모습에 호운은 휘둥그레 떴다.
불길은 황궁에서만 치솟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석양대신 어둠이 내리깔리기 시작한 도성 곳곳이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도성 전체가 거대한 불덩어리가 된 양 불타는 가운데 대로를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그중에는 병사들의 모습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보통의 사람들이었다.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야?"
호운의 물음에 서융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말은 엄청난 속도로 달려나갔다. 마침내, 도성의 성문에 다다라서야 서융은 말을 세웠다. 병사는 서융의 모습에 의심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그가 내민 금패를 보더니 얼른 성문을 열었다. 열린 문 사이로 융은 다시금 빠른 속도로 말을 몰았다.
도성을 벗어나자 소란도 잠잠해졌다. 마침내 석양을 몰아내고 완벽하게 자리 잡은 밤으로 주변은 온통 새카만 어둠뿐이었다. 들리는 것은 오직 말발굽 소리와 거친 투레질 소리뿐이었고, 그 새카만 어둠의 소음에 호운의 가슴이 불길하게 뛰었다. 아무것도 없는 깜깜한 밤과 거친 투레질과 말발굽은 마치 먼 옛날 꾼 악몽의 한 장면처럼 섬뜩했다. 호운은 저도 모르게 앞에 앉은 서융의 허리에 더욱 바싹 달라붙었다. 그런 호운의 동작에 서융이 움찔하였지만, 자신의 두려움과 싸움 중이던 호운은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렇게 온통 어두운 곳을 한참동안 달리던 서융이 한적한 곳에 말을 멈춰 세웠다. 달조차 숨은 밤이라 잘 분간하기는 힘들었지만 그곳에는 한 대의 마차가 서 있었다. 서융은 재빨리 말에서 내려 호운의 손을 잡았다. 덩달아 말에서 내려온 호운은, 마치 홀린 것처럼 서융을 뒤따라 마차를 향했다.
이윽고 마차의 문이 열리자 안쪽에서 희미한 빛이 보였다. 그리고 그 빛을 받아 보이는 얼굴들은 유란란과 복치운이었다.
"얼른 올라타."
서융의 재촉에 호운은 엉겁결에 마차에 올라탔다. 그러자 서융 또한 그 안으로 올라타고 마차의 문이 닫혔다.
"출발해라!"
서융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차는 달리기 시작했다. 흔들거리는 마차의 진동을 느끼면서도, 호운은 이것이 현실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
"형님."
그러나 호운의 손을 감싼 복치운의 온기는 너무나 생생했다.
"그 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형님."
"치운아…."
복치운을 보고서도 호운은 그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모든 일이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도저히 적응이 되지를 않았다. 호운은 마치 이 모든 것이 꿈속의 일인듯 몽롱했다.
한참동안 덜그럭 거리며 밤길을 달린 마차는 점차 오르막으로 향했다. 밤길에는 오직 달리는 마차의 소리가 덜컥거리는 소리만이 음산하게 울렸다. 그렇게 정적을 깨며 요란히 달리던 마차는 어느 순간 점차 느려지더니 마침내 멈춰섰다. 마차가 멈춰서자 서융은 망설임 없이 마차의 문을 열고 내렸다. 그 뒤를 따라 조심스레 마차에서 내린 호운은 눈앞의 풍경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도성에서 멀리 달아나고 있으리라 짐작했던 마차가 도착한 곳이 의외로 진성왕이 짓던 절의 한 가운데였던 것이다.
진성왕이 있던 때만 하여도 수천의 병사가 우글거리던 그곳에 지금은 썰렁하니 한기가 돌았다. 마차에서 내린 융은 마부에게 주머니를 던져주었다. 그러자 마부는 주머니를 받아들고 두말 않고 마차를 몰아 산을 내려갔다.
호운은 어이해 서융이 자신들을 이곳으로 데려온 것인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자신 혼자라면 또 모를까, 복치운이나 유란란도 함께 있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서융은 그런 호운의 마음을 읽어낸 것처럼 담담히 말했다.
"일단 성문을 빠져나왔으니 되었어. 여기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어이할지 정하면 돼."
"그래도 도성 코앞인데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복치운이 묻자 서융은 코웃음을 쳤다.
"이래도 도성의 군사 절반을 통솔하던 몸이다. 군사들의 움직임 정도는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아. 일단 도성 안에서 일이 터지면 안을 먼저 정리하고 밖으로 나오게 마련이다. 그보다는 진성왕이 어찌하느냐가 변수지. 만에 하나 천운이 따라 그놈이 정말로 황제를 해치우기라도 한다면 이쪽도 곤란해질테니."
"어찌 진성왕이 황제를 치면 곤란해집니까? 그는 누님의…."
"네 누이 말고 너나 호운의 목 말이다. 월왕의 자식인 너나 전 황제의 애첩이었던 호운을 그 졸렬한 놈이 살려둘 것 같으냐."
서융의 신랄한 말에 복치운은 낮게 신음을 울렸다. 자신의 지아비를 서융이 그리 폄하하는데도 유란란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부른 배를 부여잡고 눈썹을 내리깔고 있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
서로 친숙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복치운과 서융의 모습이나 지금의 상황에 도무지 적응할 수 없는 호운이 머뭇거리며 묻자 복치운이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형님께서도 아시겠지만 황제가 저의 출신을 알았어요. 그래서 저를 죽이라 병사를 보냈더군요."
예상했던 대로의 대답에 호운의 얼굴이 굳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보시다시피 아무 일 없이 무사하니까. 모두 서장군이 도와주신 덕분이지요."복치운의 대답에 호운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서융을 보았다. 그러나 서융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을 지은 채였고, 복치운이 거짓말을 하는것 같지는 않았다.
"어째서 융이?"
"…이유는 저도 모릅니다. 서장군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하지만 저희들을 도와주고 이렇듯 형님까지 탈출을 시켜주셨다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망설이면서도 명확히 말하는 투로 보아 복치운도 서융을 완전히 믿고 있는 것은 아닌듯 싶었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서융은 황제의 심복중 하나다. 그런 그가, 갑자기 뚜렷한 이유도 없이 황제를 배반하는 행동을 돕는다니 믿기 어려울 수밖에.
"진성왕의 거사도 서장군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하였을 겁니다. 서장군이 내부에서 정보를 교란하여 황궁에 그리 쉽게 침입할 수 있었으니까요."
복치운은 불안한 표정의 호운에게 그리 말했다. 서융의 의도는 몰라도 확실히 황제를 배신했다는 증거가 있으니 안심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호운은 그렇지 않았다. 이미 호운은 서융에게 배신당했다. 그것도 한번이 아닌 두 번이다. 과거 서융은 손바닥을 뒤집은 것처럼 호운을 배신했고, 그 배신은 언제나 호운이 예상치 않은 상황에서 벌어지곤 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호운은 서융의 이 호의에 가까운 행동의 이유가 더더욱 궁금해졌다. 서융이 과연 무엇을 바래서 이런 일을 해 주는 것일까. 복잡하게 얽힌 생각에 호운은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꽈릉!!
그러나 어둠을 뚫고 울린 거대한 폭발음에 움찔해 도성으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어둠을 뚫고 이글이글 불타오르던 도성의 불길이 더욱 거세진 듯 먼 발치에서도 또렷이 보였다.
"방금 그건…!"
"화탄이 터졌군."
"!!!"
도성안에서의 내전으로 부족해 화탄이라니. 경악한 호운이나 복치운과 달리 서융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이걸로 확실해졌군. 진성왕이 졌다."
"어째서 진성왕이 졌다고 단언하십니까?"
"황제는 바보가 아니야. 도성안에서 화탄을 터트릴 만한 놈이라면 진성왕이지. 그놈도 아주 바보는 아니니 보통때였다면 화탄을 터트리지는 않았을 테지만 궁지에 몰리면 할 수도 있는 놈이다."
서융의 추론은 호운이 듣기에도 그럴듯했다. 한참동안 불길이 치솟는 성문안을 바라보던 서융이 혀를 차고 말했다.
"생각보다 너무 빨라. 안되겠어. 바로 산을 내려가야겠어."
"이렇게 빨리요?"
"진성왕이 적어도 오늘 하루는 버틸 거라고 예상했는데 2시진도 채 못 버텼으니 도성 안이 재정비 되는것도 예상보다 빠를 거다. 그러니 가려면 지금 갈 수밖에."
서융의 말에 호운이 물었다.
"어디로?"
도성을 떠나는 것은 좋다. 그렇게 해야 복치운이나 유란란이 살 수 있으니까. 하지만 어디로? 어디로 도망쳐야 잡히지 않고 살 수 있는가. 호운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서융이 아닌 복치운이었다.
"서장군에게는 이미 말한 것이지만…형님께는 이번에 처음 말씀드리는 거겠네요."
"무슨 생각이라도 있느냐?"
"국경을 넘어가려고 해요."
"국경을?"
복치운의 말에 호운은 깜짝 놀랐다. 그것은 호운의 생각에는 없는 발상이었다. 국경을 넘는다니. 저, 험한 무법천지로 가자는 말인가? 그러나 차근차근 생각해보니 지금 상황에서는 그것이 최선인 듯도 싶었다. 오히려 국경을 넘어가면 황제의 추적이 이어지지 못할 테니 오히려 그들에게는 유리할 수 도 있는 상황이다.
"어느 쪽 국경을 말하는 것이냐? 서쪽이냐 남쪽이냐?"
"서쪽입니다."
"역시 요족 쪽이냐."
복치운의 대답에 호운은 신음을 삼켰다. 복치운의 핏줄을 생각하면 그가 선택하는 국경은 뻔하다. 그러나 알면서도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은 요족의 잔악함 때문이었다. 굳이 한족이 요족을 경원하는 풍조로 가진 선입견이 아니더라도 호운은 여태 살면서 국경지대에서 몇 번이나 요족의 만행을 지켜보았다.
요족은 원래 먼 사막 너머의 땅에서 온 이방인의 부족으로, 언제나 척박한 땅에 살아온 그들은 타인을 약탈하는 것으로 생계를 이었다. 농경민족인 한족과 약탈과 사냥, 그리고 유목으로 생활하는 요족은 아예 민족성이 전혀 달랐다. 난폭하기 이를 데 없는 요족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언제나 피와 시체만이 즐비하였다. 요족은 한족과 달라서 뿌리부터 유목과 투쟁에 익숙해진 자들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항상 난폭하고 언제든 칼을 뽑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치운아, 요족은…."
"물론 저도 알아요. 요족이 위험하다는 것쯤은. 하지만 지금 가장 안전한 곳이 그곳인 것도 사실이죠. 그리고 이걸 가지고 가면 안전할 수도 있고요."
복치운은 옷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그것은 엄지손가락 크기 만한 납작한 옥패였다. 누군가가 수없이 쓰다듬은 것은 지 표면이 매끄러워진 그 옥패를 보며 복치운이 말했다.
"아버지의 유일한 유품인 옥패예요. 아버지의 어머니…제게는 할머니 되시는 희락공주의 유품이지요. 희락공주가 요족의 왕의 딸이었고, 요족의 왕족은 바뀌지 않았으니 분명 지금의 왕은 제게 친척이 되는 자일 겁니다."
"하지만 벌써 몇 대 전의 일이다."
"네. 하지만 지금 걸어볼 것은 그것 밖에 없으니까요."
복치운은 그리 말하며 옥패를 다시 품안에 집어넣었다. 복치운의 말에 별다른 반응이 없는 것으로 보아, 서융도 거기에 반론은 없는 듯 했다.정말이지 모든 것이 불안하고 막막한 상황이었다. 호운에게 요족은 미지의 존재였다. 그저 두렵고 무섭다는 인상뿐이던 그들의 영역으로 간다는 사실에 호운의 불안은 피어올랐다. 마치 여우굴을 피해 호랑이굴로 들어가는 상황이랄까. 아니 이쪽에 있으면 확실히 목숨을 잃게 될 것을 저쪽에 있으면 그래도 살아날 가능성이 생기니 호랑이굴을 피해 승냥이떼를 향해 돌진하는 격일까.
불안하고 복잡한 심정에 입을 다문 호운을 보며 복치운이 웃어보였다.
"걱정마세요 형님. 분명 괜찮을 거예요."
웃고는 있었지만 그리 말하는 복치운의 얼굴에도 숨기지 못할 불안이 서려있었다. 애써 불안을 감추는 복치운을 보니 호운은 자신 또한 이래서는 안 되겠다 생각해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괜찮아지겠지."
호운이 그렇게 이 복잡한 상황을 억지로 납득하는 와중, 유란란은 끝까지 침묵을 지키며 자신의 부풀어 오른 배만을 쓰다듬고 있었다. 호운은 그런 유란란의 모습과 불안함을 숨기지 못하는 복치운, 그리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서융의 모습을 번갈아 보다 아직 불길이 치솟고 있는 도성을 바라보았다. 도성을 감싼 맹렬한 불꽃이 마치 지옥불처럼 사납게 용솟음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