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震翰 玉羽二年 진한 옥우 이년
浩氏 三十三歲 호씨 33세
진성왕이 용성산 자락에 칩거해 불사(佛舍)를 짓기 시작한후 호씨는 자꾸만 현종의 주변을 얼씬거렸다. 호씨는 제게 부귀영화를 쥐어줄 진성왕이 용성산에 간 것이 오직 현종의 탓이라 여겨 현종만 사라진다면 모든 부귀영화가 제 것이 될 것이라는 망집에 사로잡혀 시시때때로 현종을 해하려 하였지만 현종은 쉽게 호씨의 꾀에 넘어가지 않았다.
이에 호씨의 패악은 극에 달해 종종 왕부의 여인네들을 겁간하고 괴롭히기를 일삼았다. 결국 왕부에 남아있던 여인네들은 호씨의 패악을 견디다 못해 하나둘 자취를 감추고 종국에는 진성왕의 처첩들마저 왕부를 떠났다. 호씨는 더는 희롱할 여인네가 없자 대놓고 제 아내를 탐하였다. 졸지에 두 지아비를 섬기 된 유씨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해 미모마저 흐렸다.
자세한 상황은 알지 못하였지만 호씨의 성품을 아는 현종은 유씨의 안색이 어두운 것이 호씨의 탓이라 여겼다. 때문에 현종은 유씨를 위로하고자 그녀를 황궁의 연회에 초청하였는데, 그 자리에 호씨도 당연한듯 따라왔다. 연회 내도록 유씨에게 붙어 기묘한 태도를 취하는 호씨를 보고서 대신들 또한 그들의 사이가 심상치 않음을 알게되어 도성안에 그들 남매를 두고 여러 소문이 들끓었다.
그러다 중추절이 지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호씨의 아내에게 태기가 있었다. 시기를 셈하여 보니 왕부의 여인네들이 달아나 호씨가 유씨를 탐하기 시작한 이후이니, 이는 호씨의 씨가 분명하였다. 이에 대경한 호씨는 뱃속의 아이를 죽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 일이 진성왕에게 발각되면 제 한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호씨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제 아내의 배에 발길질을 하고 주먹질을 하였는데 어느 날 시종이 아내의 배를 보니 검붉은 멍이 참담해 그 흉악함에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한다. 마침내 호씨와 유씨의 소문이 걷잡을 수 없어지자 현종이 진성왕부에 병사 수십명을 파견해 그들의 동태를 살피도록 하였다.
진성왕이 용성산에 오르자 왕부의 분위기는 살벌해졌다. 표면적으로는 붕어한 황제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사를 한다지만, 그 속내에는 이미 황제가 되어버린 오왕을 어찌 견제할지 시간을 벌겠다는 수작이 확연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도를 닦겠다는 자가 왕부의 군사들을 모조리 데려갈 이유가 없었다.
결국 왕부에는 진성왕의 수많은 처첩들과 그의 자식들, 그리고 그들을 모시는 시종들만이 남겨졌다. 유일한 예외는 유란란이었다. 진성왕은 용성산으로 향하며 유란란을 대동하였다. 이에 유란란은 크게 기꺼워하는 기색은 아니었지만 진성왕의 앞에서 낯을 찌푸릴 수는 없었다.
이미 진성왕이 오왕, 아니 이제는 황제가 된 제 동생과 결판을 봐야 하는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이미 황제가 된데다 연호마저 고친 오왕을 진성왕이 당해 낼리 없어 보였고 진성왕이 패할 것은 자명해 보였다. 진성왕이 싸움에서 패하면 역적이라는 이름을 받게 될 테니 그들 또한 무사하지는 못 할 테니, 그들에게 남겨진 방법은 진성왕이 살아있는 동인 다른 사내에게 재가(再嫁)하는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왕부에 남겨진 여인들은 제 한목숨을 구명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호운은 그런 복잡한 왕부의 사정 따위는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진성왕이 왕부를 떠난 후 그는 거의 왕부에서 지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새로 황제로 등극한 오왕은 진성왕이 용성산으로 가자마자 호운을 대놓고 황궁으로 불러들였다. 황제가 되었어도 그는 호운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욱 자주 그를 황궁으로 불러들여 품에 안았다. 그래도 진성왕이 왕부에 건재하던 시절에는 얼마간 쉴 틈이 있어 몸을 추스를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진성왕이 왕부를 비운 후에는 대놓고 호운을 불러들이니, 호운은 거의 연일 황궁으로 불려가 황제의 침전에 들어야 했다. 그런 호운을 두고 황궁안에서는 진성왕비의 오라비인 자가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며 말이 많았지만 호운 본인에게는 그저 남일 같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짐승이 앓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황제가 토정한 순간 호운은 가만히 천정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엉덩이를 그러쥔 손이 아플 정도로 피부를 옥죄었다. 예전에는 하나하나 흔들렸던 것이 이제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저 몸이 아프고 괴로웠다. 이런 것에 하나하나 울고 기운을 빼기에 밤은 너무 길었다. 이번이 겨우 첫 번째 토정이다. 적게는 두 번, 많게는 네, 다섯 번 씩 토정하는 황제의 성욕은 이미 호운이 감내할 수 있는 영역 밖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호운의 짐작을 증명하듯 토정한 후 잠시 힘을 잃었던 황제의 성기가 몸 안에서 점점 힘을 얻는 것이 느껴졌다. 점차 안을 확장하듯 넓어지는 성기의 감촉에 호운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몸을 뒤로 띄웠다. 포기했다 해서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한번 토정한 덕분에 안이 적셔졌다 해도 원래 무언가 들어와도 될 곳이 아닌 곳에 이물(異物)을 쑤셔 박은 일이니 아플 수밖에.
"왜 자꾸 뒤로 물러나는 게냐."
호운의 자꾸 몸을 뒤로 빼자 안의 성기가 밖으로 삐져나오려 해 황제가 불만스럽게 물었다. 호운은 그저 미간을 찡그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픈게냐."
황제가 다시 물었지만 호운은 대답 없이 가만히 천정만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황제는 혀를 차고 호운의 뺨을 쳤다.
철썩. 고개가 꺾일 정도로 세게 친 것이 아니라 그저 뺨이 따가울 정도였지만 호운의 시선을 천정으로부터 황제의 얼굴로 옮기는 효과는 있었다. 황제는 호운이 저를 바라보는 것을 확인한 후 다시 물었다.
"아프냐고 묻지 않느냐."
"…예."
호운이 그리 대답하자 황제는 다시 혀를 찼다.
"앞으로 아프면 아프다 얘기하거라. 감히 뒤로 물러서지 말고."
그리고 여관에게 손짓했다.
"기름을 가져와라."
여관이 고개를 숙인 채 기름병을 가져오자 황제는 호운의 가랑이 사이를 벌려 자신과 연결된 부위 위에 기름을 끼얹었다. 그리고 성기를 몇 번인가 뺐다 꽂았다 하며 안쪽에 다시 기름을 바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호운의 미간의 주름은 가실 줄을 몰랐다.
"아직 아픈게냐."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물음에 호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에 발끈한 황제는 다시 한번 손을 치켜들었지만 곧 그 손을 내려 호운의 몸을 뒤집었다. 그리고는 뒤에서 호운의 허리를 안고 행위를 재개했다. 천정을 향하던 호운의 시선은 이제는 새하얀 이불을 향했다. 멍하니 흔들리는 몸을 방치한 채 이불을 바라보던 호운은 곧 눈을 감았다. 목덜미에 닿는 사내의 숨결이 선명해 한기가 들었다.
호운은 눈을 끔뻑거리며 천정을 보았다. 벌써 눈에 익어버린 천정이 호운의 시야에 들어왔다. 가만히 눈만 뜨고 있던 호운이 몸을 일으켰다.
"으윽."
소리를 내지 않으려 해도 절로 신음소리가 나왔다. 누군가에게 전신을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절로 이마에 송글송글 식은땀이 맺혔다. 호운이 자리에서 일어나 앉자마자 시종이 소리 없이 가까워져 물을 바쳤다. 마침 목이 말랐기에 호운은 순순히 물을 마시고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밤마다 황제에게 불려가고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오는 것은 예전 그대로였지만 그가 황제가 된 후 호운의 대접은 예전과 천지차이로 변했다. 우선 황궁에 볼려올때 호운이 머무는 곳이 후궁전의 호화로운 처소가 되었다. 비록 방이라 표현하는 곳이지만 몇 개의 기둥을 사이에 두고 나뉘어진 그곳은 어지간한 사람들의 집 보다 규모가 웅장했다. 거기에 수십인의 여관과 내관이 호운에게 배속되었고 주변을 지키는 호위병들도 배치되었다. 그 행태가 마치 황제의 첩을 대접하는 것 같았고, 실제로 지금 호운의 처지가 첩과 다른 것이 없었다.
제 처지가 우습기도 해 호운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성에서 황제와 재회한지 1년이 흘렀다. 그간 밤을 보낸 횟수를 모두 더하면 호운이 아내 진부용과 밤을 보낸 횟수의 수십 배를 뛰어넘는다. 그러나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과연 그것이 밤을 보냈다 말할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따스한 아침햇살을 받으면서도 호운의 마음속은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아침상을 올리오리까."
여관의 물음에 호운은 고개를 젓고 그대로 다시 침상에 드러누웠다. 그렇게 호운이 다시 자리에 누운 찰나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엷은 주렴 너머로 내관들과 여관들이 한 방향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보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가 방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예상치 못한 황제의 방문에 호운은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황제는 호운을 흘긋 보더니 여관들에게 명했다.
"어서 의관을 준비하라."
황제의 말에 여관들인 고개를 조아리고 소리 없이 호운이 앉은 침상으로 다가와 재빨리 호운을 몸치장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손 하나 까딱 않고 옷이 갈아입혀 지는 것이 최근의 일상이 되었지만 벌건 대낮에 눈앞에 황제가 있는데 벌거벗겨지는 것은 어쩐지 불편하였다. 그러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인 호운과 달리 황제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마침내 호운이 의관을 갖추자 황제는 호운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아직 자리에 앉은 호운의 손목을 낚아채 그를 자리에서 일으켰다. 손목을 그러쥐는 강한 손아귀 힘에 호운이 인상을 찡그렸지만 황제는 그 손을 풀지 않았다.
처음에는 손목을 잡아끌던 황제는 이내 호운을 품에 끌어안다시피 하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비록 자신이 황제의 침실에 드나드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라지만 이리 벌건 대낮에 품에 안기니 수치스러웠다. 그러나 호운은 저항하지 못하고 황제의 품에 안긴 채 걸음을 옮겼다.
황제는 호운을 황궁의 가장 작은 문인 남문이 닿는 계단으로 안내한 후에야 품안에서 놓아주었다. 호운은 황제에게서 조금 거리를 취한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황궁은 총 네 개의 담과 세 개의 단(壇)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안으로 오면 올수록 땅이 높아져 황궁 최심부인 대전에서는 도성의 전체가 내려다 보였다. 그러나 그 높은 곳에 서서 탁트인 경치를 내려보면서도 호운은 오히려 불안해졌다. 어이해서 황제가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 황궁의 문이 열리고 마차가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남문은 첫 번째부터 두 번째, 세 번째 문을 지날 때 까지는 완만한 오르막과 같아 마차를 타고 이동할 수 있었지만 네 번째는 높은 계단이 있어 마차에서 내려와 계단을 올라야 했다. 때문에 황궁을 드나드는 자들 중에 가장 신분이 낮은 자들이 사용하는 문이 바로 이 남문이다.
그런데 그런 남문 앞에서 황제를 비롯한 병사, 여관들이 줄을 지어 기다리는 까닭을 호운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호운은 황제에게 묻는 대신 멀리서 가까워지는 마차를 주시하였다. 그 마차를 바라보면 답이 나올까 해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네 번째 문에 당도한 마차에서 두 남녀가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아직 멀어서 모습은 분간하기 힘들었지만 여인은 고운 궁장차림이었고 남자또한 차림이 화려했다. 그들은 네명의 여종을 거느리고 마차에서 내렸는데, 한동안 머뭇거리듯 문 근처에 서 있다 이내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점차 가까워지는 남녀의 모습에 호운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차에서 내린 남자가 황제를 지나치게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남자라기에는 지나치게 어렸다. 멀리서 볼 때는 제법 체격이 있어 다 큰 사내라 여겼지만 가까이서 보니 얼굴 생김에 아직 어림이 남아있었다. 이제 갓 열다섯쯤이나 될까 한 소년은 아무리 봐도 황제의 핏줄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런 호운의 생각을 증명하듯, 계단을 오르던 소년은 황제를 보자마자 해맑게 웃으며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아바, 아바바!"
키는 멀뚱하니 커서 열다섯 살은 족히 되어 보이는 소년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어린아이같은 옹알거림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힘이 풀린 눈이나 헤 벌어진 입을 보아서는 아이가 지능이 떨어지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소양군 그러면 안 됩니다!"
소년을 이어 계단을 오른 여인이 당황해 소년을 잡아끌었다. 여인은 호운과 비슷한 또래로 보였는데 무척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유란란을 보며 아름다운 여인에 익숙해진 호운이 봐도 곱고 우아한 여인이었다. 여인은 아직 아바, 아바 하며 황제를 부르는 소년을 다독이며 살랑살랑 부드럽게 황제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흠잡을 데 없는 예법으로 인사를 올렸다.
"소첩, 부르심을 받고 왔사옵니다 황상."
미소까지 지어보이며 인사를 한 여인과 대조적으로 황제는 담담하게 대꾸하였다.
"먼 길 수고 많았다. 여봐라, 오왕비를 모셔라!"
오왕비라는 말에 호운은 눈앞의 여인이 황제의 비(妃)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어이해 그녀를 아직 비라 부르는지는 이해하지 못하였다. 황제가 왕에서 황제가 되었듯, 그녀 또한 황후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리고 그 호칭에 당황한 것은 호운 뿐만이 아니었던 듯, 여인은 어쩔 줄 몰라 하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문제라도 있나?"
여인의 시선을 받은 황제가 담담히 묻자 여인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우물거리듯 말하였다.
"태후께서 책봉되었다 전해 들었사옵니다…."
기어들어가듯 중얼거린 여인을 보며 황제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황께서 승하하시고 내가 황제가 되었으니 응당 태후가 되셔야지. 그것이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호운마저도 뻔히 보이는 문제를 황제는 굳이 무시하였다. 아마 오왕비는 태후가 책봉되었으니 응당 왕비인 자신도 황후가 되어야 하지 않느냐 묻고 싶을 터였다. 그러나 황제는 그 문제를 못본 척 하며 왕비의 말을 무시했다. 그리고 말투도 도저히 아내를 대하는 자의 말투 같지 않았다. 황제는 머뭇거리는 오왕비를 보고 멀찍이 떨어져 있던 호운을 자신의 품 안으로 잡아끌었다.
"엇!"
갑자기 황제에게 당겨져 넘어질 뻔한 호운이 황제의 가슴에 코를 박았다.
"어째서 자꾸 뒷걸음질을 치는 것이냐. 간밤에 내 말하지 않았더냐. 함부로 물러나지 말라고."
그리 말하며 사람들이 뻔히 보는 앞에서 호운의 목덜미를 이로 씹었다. 그 모습에 오왕비의 두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황제는 그런 오왕비의 표정을 뻔히 보고도 태연했다. 그는 점차 창백해지는 오왕비의 얼굴을 본척만척하며 자신의 품안에서 어쩔줄 몰라하는 호운을 끌어안았다.
"가자. 바람이 차구나."
그리 말하며 아직 그 자리에 선 오왕비를 남겨두고는 그대로 호운을 품 안에 끌어안고 계단을 뒤로하였다. 남겨진 오왕비는 자신의 남편인 황제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고, 상황을 모르는 소양군은 그저 모자란 미소를 지었다.
"손이 왜 이리 찬 게야."
호운을 이끌고 침전에 당도한 황제는 호운의 손을 만지작거리다 여관들에게 명했다.
"어의를 불러와라."
"예, 황상."
여관들이 소리 없이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서자 황제는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호운의 옷을 벗겨냈다. 아직 태양이 높이 떠있거늘 옷을 벗겨오는 황제를 보고 호운은 당황했다. 그러나 황제는 망설이지 않았다.
"쯧."
황제가 덤벼올 것이라 겁에 질린 호운과 달리 황제는 호운에게 덤벼들지 않았다. 그는 호운의 하의는 벗겨내지 않고 상의만을 벗겨낸 후 갈비뼈가 도드라진 몸을 손으로 훑으며 말했다.
"이리 말랐으니 몸에 열이 없지. 제대로 먹고 있는 것이냐."
호운의 냉기가 전해진 찬 손이 옆구리를 스치자 호운은 흠칫 몸을 떨었다. 황제는 다시 혀를 차고는 여관들에게 명하였다.
"호피(虎皮)를 가져오너라."
여관들은 소리 없이 움직여 백호의 호피로 만든 옷을 가져왔다. 황제는 그 호피로 호운의 알몸을 감싸고 물었다.
"잘 어울리는구나. 어떠냐, 따스하냐?"
순식간에 호피로 전신이 말린 호운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호피라는 것이 생각보다 길고 무거워 몸을 감싸고 남은 것이 바닥으로 질질 끌렸다. 황제는 호운의 손을 다시 어루만지고 의자에 앉았다.
아직 절기상으로는 여름이라 할 수 있는 시기였지만 도성이 북쪽이다 보니 찬 날은 겨울 만큼이나 냉기가 감돌았다. 때문에 고관대작들은 각종 가죽으로 만든 외투를 즐겨입었는데, 호피는 그 그런 가죽옷 중 최상으로 치는 것이라 가격도 비싸고 매우 드물었다.
"뭘 하느냐, 앉지 않고."
황제의 말에 호운은 어렵사리 자리에 앉았다. 무거운 호피 때문에 몸이 둔해져 제대로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황제는 그런 호운을 잡아당겨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아주 어렸을 적에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말고는 해본적도 없는 경험에 호운은 굳었지만 호운을 무릎 위에 얹은 황제는 만족한 듯 보였다.
"마치 큰 개를 안고 있는 것 같구나."
황제는 호운이 걸친 호피를 쓰다듬으며 그리 중얼거렸다.
"이 호피는 네게 하사 할 테니 봄 까지는 계속 입고 있도록 하여라."
"예, 황상."
황제의 말에 호운은 작게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의가 황제의 침전에 당도하였다. 어의는 호피를 걸친 채 황제의 무릎위에 있는 호운의 모습에 처음은 당황한 듯 하였으나 곧 자연스레 절을 하였다.
"부르셨습니까."
"이리 와 호씨를 진맥해 보고 탕약을 지어 올려라. 무슨 연유에서인지 손이 아주 차다."
황제의 말에 의원은 조심조심 다가와 황제의 무릎위에 앉은 호운의 손목을 잡았다. 황제의 말처럼 손이 차긴 하였지만 굳이 보약을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황제가 보약을 지어 올리라면 그리 해야하는 것이다.
그래서 의원은 조심스레 물러나며 물었다.
"탕약은 어떤 것으로 바치오리까."
"손이 따뜻해지는 것이면 무엇이든 좋다. 그리고 살이 좀 오를 수 있는 것이면 좋겠구나."
거기까지 말한 황제는 마침 생각났다는 듯 호운의 바지자락 사이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갑작스런 행동에 호운이 당황한 사이 황제는 태연하게 말했다.
"발기를 잘 하지 못하는 것 같으니 양기보충에 좋은 약재를 섞어라."
"예 황상."의원은 두말 않고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섰다. 순식간에 성기능에 문제가 있는 사람 취급을 받은 호운은 어이가 없었다. 호운은 자신이 발기하지 못하는 이유를 아주 정확히 알았다.
사람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을 안는 이가 자신에게 그 혐오와 두려움을 심어준 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황제에게는 그저 호운에게 문제가 있는 것으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호운은 자기중심적이다 못해 오만한 황제의 사고에 그저 한숨을 쉬었다.
이제 겨우 점심나절인데 심하게 피로하단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태후가 된 선황의 황후 옥씨가 처음부터 지금처럼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 선황에게 시집을 갔을 때만 하여도 그녀는 옥씨일족이 내세운 허수아비로 오직 황제의 아들을 낳아 대를 이어 옥씨일족의 세를 불리기 위해 그에게 시집을 간 존재였다. 한마디로 일종의 장기말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하였던가.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낯설어 일족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던 그녀는 점차 황후라는 자리가 주는 권력의 맛을 알았다. 제 손가락 하나에 사람의 목숨을 죽이고 살리는 일이 가능한 자리. 이 얼마나 짜릿한가. 황제마저 저를 함부로 못하는 권력에 만취한 황후는 그 권력이 어찌하면 더욱 강해질까에 골몰하였다.
옥씨의 야망은 컸다. 그녀는 이 달콤한 권력을 단지 황제가 살아있는 동안만 누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녀는 살아있는 동안도,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그리고 숨을 거둔 후에도 가장 빛나는 자리에 있고 싶었다.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뒷배인 옥씨일족의 세를 불리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정적을 제거하는 것은 기본중의 기본이었다. 그녀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차기에 대권을 쥘 수 있으리라 짐작되는 황실의 사내들 모두를 옥씨 여자에게 장가들게 하는 일이었다.
자신의 아들 진성왕의 비(妃)뿐만이 아니라 예전에 반역혐의로 세상을 뜬 월왕의 비도, 그리고 현재 황제가 된 오왕의 비도 옥씨일족의 여인이다. 진한의 세 번왕 모두가 나란히 옥씨일족의 여인에게 장가를 갔다는 것만봐도 옥씨일족의 세가 어디까지 뻗어있는지는 확실했다. 여인네 하나로 무엇이 바뀔까 싶기도 하지만 그녀들이 생산하는 아들이 장차 그들의 후계자가 되니, 이는 곧 옥씨 일족의 힘이 되었다.
'혹시나 하고 오왕에게 시집보낸 그 아이가 정말 도움이 될 날이 오다니.'
태후는 미간을 찡그리고 동경을 바라보다 곧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오늘은 오왕비 옥씨를 황궁에서 맞이하는 첫날이니, 그녀에게 자신이 아군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어야 했다.
오왕에게 시집간 옥씨는 태후 옥씨의 먼 친척 조카였다. 혈통은 좋지 않았지만 미색이 뛰어나고 유려한 몸매나 하얀 살결이 남심을 자극하는 여인네였다. 태후가 그녀를 오왕에게 시집보낸 이유는 단지 그것 하나였다. 그녀가 오왕의 혼을 뽑아 그를 치마폭으로 휘감았으면 해서였다.
그러나 오왕비가 된 옥씨는 요물같은 몸과 달리 심약한 성정을 타고나 도무지 태후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왕이 한마디만 하면 움찔해 제 목소리조차 못 내는 그녀를 보며 태후는 옥씨일족에서 어찌 저런 바보 같은 것이 태어났냐며 볼멘소리를 하였다.
하긴, 그녀가 처음부터 그리 소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시집을 가자마자 임신하고 사내아이를 낳았을 때 까지만 하여도 기세가 등등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라면서 아이의 지능이 떨어진다는게 드러나면서 그녀는 한없이 작아졌다. 이제 열여섯이 되었음에도 제 이름조차 쓸 수 없는 아이는 결코 오왕의, 황제의 후계자가 될 수 없을 테니 왕비이면서도 그녀가 위축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그녀는 오왕의 수많은 처첩 중 유일하게 첩지를 받은 여인인 동시에 태후 옥씨의 조카였다. 중요한것은 그것이었다.
"그래 먼 길 고생이 많으셨네."
태후는 동경을 보며 연습한 미소로 오왕비 옥씨를 맞아들였다. 다행히 옥씨는 태후의 앞에까지 바보같은 소양군을 데려오는 우는 범하지 않았다.
"아니 안색이 왜 그런가? 어디 몸이라도 아픈 것인가?"
태후는 이미 남문에서 벌어진 일을 뻔히 듣고도 일부러 모른 척 물었다. 그러자 옥씨는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안색이 아니지 않은가. 오는 길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가? 혹여 누가 왕비에게 해를 끼친 것이라면 말하게. 내 당장 황상께…!"
"황상께는 가지 마십시오!"
황상이라는 말에 오왕비가 화들짝 놀라 외쳤다. 그 모습에 태후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지만 겉으로는 짐짓 모른척 말하였다.
"어찌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황상은 왕비의 지아비가 아닌가. 하나뿐인 비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데 설마 황상이 모른척 할까."
"…진정 제가 하나뿐인 비입니까."
태후의 말에 옥씨는 속에서 무언가 북받친 것이 있는 모양인지 울컥 하는 모양새로 말하였다. 그러나 그 울컥이 분노가 아닌 설움이라는 것을 보면 옥씨가 어지간히 움츠러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얘기해 보게."
옥씨는 몇 번이고 입술을 깨물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황위에 오르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까지만 해도 이리 불안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황위에 오르고 한달 두달 세달이 흐르더니 이제는 근 일년이 지났습니다. 전하께선, 아니 황상께서는 일년이 지난 후에야 우리 모자를 궁으로 불러들이시니 제가 어찌 그분의 하나뿐인 비(妃)라 자신하겠습니까. 거기에 이미 그분은…저를 보기를 원치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혹시 황상이 최근 총애하는 그 사내 때문인가."
"태후께서도 아시는 자입니까."
태후의 말에 옥씨가 매달리듯 묻자 태후는 일부러 큰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어디 나만 알고 있겠는가! 황궁을 드나드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 정도네!"
"황상께서…그를 많이 아끼시는 듯 하더이다. 제게는 한번도 그리 다정하게 대하신 적이 없는데 그자에게는…."
옥씨는 말을 잇지 못하고 푹 고개를 숙였다. 태후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떨어트릴 듯 물기가 그렁그렁해진 옥씨의 눈매를 닦아주며 혀를 찼다.
"그 사내 때문에 왕비가 속이 많이 상했나 보구나.""흑, 흑흑…."
결국 눈물이 터진 옥씨를 태후가 등을 두드리며 다독였다.
"걱정하지 말게. 자네는 꼭 황후가 될 테니."
"정말 그리 생각하십니까."
울며 묻는 옥씨를 보며 태후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옥씨가 궁으로 도착하면서부터 태후의 계획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황제가 호운에게 호피를 하사한 다음날 여러 여관들이 호운의 방을 찾았다. 그들은 의장(衣欌)에 걸린 긴 호피를 몇 개로 재단하더니 곧 솜씨 좋게 호운의 몸에 맞는 길이의 외투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남은 것으로는 호운의 손발을 감싸는 말랑한 호구(護具)를 만들어냈다.
호운이 백호의 가죽을 하사받았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궁 안을 휘돌았다. 호운은 뒤늦게 알았지만 호운이 하사받은 백호의 가족은 남의 후무족이 선황의 쉰번째 생일을 축하하며 올린 것이었다. 말하자면 선황의 유품인 셈이다. 그런 물건을 아무런 직책도 없는 호운에게 내렸으니 사람들의 구설수가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구설수를 알면서도 호운은 황제의 명대로 호피로 만든 외투를 걸쳐야했다. 황제는 호피를 걸친 호운을 보란 듯이 이곳저곳으로 데리고 다녔는데, 호운은 그런 황제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명을 따를 뿐이었다.
호운은 점차 궁 안에서 자신의 존재가 기묘해 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황제는 어떤 일에든 호운을 대동하였다. 정무를 제외한 모든 일에 호운을 대동하고 잠자리까지 그와 함께한 시기가 언제인지를 생각해 보니 왕비 옥씨가 궁에 들어온 다음이다. 이는 바로, 호운을 이용해 왕비 옥씨를 견제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친 것이다.
그러나 호운과 왕비 옥씨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신분이었다. 옥씨는 정식으로 황제와 혼례를 치르고 시집을 온 여인이었고 호운은 그저 황제가 침실로 불러들이는 첩 수준, 그나마도 남자였다. 그런데도 어쩐 일인지 황제는 자꾸만 호운을 앞장세우니 호운의 입장이 난처하여졌다. 그리 사람들의 기색에 민감하지 않은 편인 그조차도 자신을 보는 후궁들의 시선이 점차 날카로워져 간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에게 있어 호운은 굴러들어온 돌 같은 존재였다. 그것도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 아름답지도 않은 굴러온 돌. 때문에 호운은 다른 후궁들이 그러하듯 정원을 거니는 일 조차 하지 못한 채 황제에게 불려갈 때를 제외하고는 늘 방에 틀어박혀 지내야 했다.
그러다 보니 호운은 황궁 안에서 지내는 시기에는 언제나 다시 진성왕부로 되돌아가는 날을 손꼽았다. 진성왕부로 돌아간다고 딱히 무슨 수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곳에는 복치운이 있어 말하지 못하는 답답증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황제는 호운을 쉽사리 진성왕부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처음에는 열흘간, 보름간 시작되었던 호운의 황궁체류는 이번에는 근 한 달이 다되어간다. 그러나 황제는 호운에게 진성왕부로 돌아가라는 명을 내리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돌아가라는 명 대신 오늘밤에도 호운을 찾겠다는 전갈을 하였다.
뉘엿뉘엿 기울어가는 해를 따라 호운의 한숨이 깊어졌다. 밤이 오면 일어날 일을 생각하니 가슴이 바윗덩이에 눌린 것처럼 답답했다.
"왜 한숨인 것이냐."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호운은 황제가 들어오는 기척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호운은 당황해 침상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예는 되었다."
황제는 무릎을 꿇은 호운을 일으켜 세우고 침상에 앉혔다. 황제와 나란히 침상에 앉은 자세가 되자 호운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느릿하게 자신의 등을 쓰다듬는 손길이 은밀하게 변해가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이제 해도 넘어갔으니 익숙해 질 법도 한데 매번 시작할 때마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점차 빨라지는 고동에 맞추어 등줄기가 빳빳하게 굳자 황제가 혀를 찼다.
"또 긴장한 것이냐."
최근 황제는 호운의 행동이 못마땅할 때는 손을 대는 대신 혀를 차는 일이 잦았다. 그러나 호운은 여전히 그가 혀를 차는 소리에 움찔하였는데, 그 움찔거림에 황제는 다시 혀를 차곤 하니 호운의 몸은 더더욱 굳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시일이 지나던 어느 날, 오랜만에 황제에게 불려가지 않아 평화롭게 잠들어있던 호운은 기묘한 압박감에 눈을 떴다. 호운의 배 위에 어느새 들어온 것인지 황제 호운이 살을 섞을 때면 가끔씩 불려오던 소년이 앉아있었다. 깜짝 놀란 호운이 소리를 내려 한 순간, 누군가 호운의 입을 틀어막았다. 호운이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위를 보니 낯선 소년이 호운의 입을 막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쉬, 조용히 해야지 아저씨."
배위에 앉은 소년과 엇비슷한 체구의 그 소년이 그리 속삭이자 키득키득 낮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호운이 고개를 돌려보니 배 위에 앉은 소년 말고도 발치에 또 한 사람의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호운은 세 소년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에 왠지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소년들이 좋은 의도로 이 늦은 밤에 방을 찾아온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소년들의 의도는 금세 밝혀졌다. 두 소년이 호운을 억누른 사이 배 위의 소년이 호운의 침의를 벗기기 시작한 것이다. 호운은 발버둥치려 했지만 양쪽에서 체중의 전체를 실어 누르는 소년들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런데 진짜로 할 생각이야?"
"왜, 너희들이 먼저 말 꺼냈잖아."
"그렇지만 저런 노인네인걸."
"그래도 황상이 자꾸 부르시는 거 보면 모르겠어? 틀림없이 죽여줄 거라고."
소년답지 않은 대화를 나누며 배위의 소년이 드러난 호운의 배를 쓸었다.
"기름 줘."
"진짜 할 거야?"
"야, 더 늦었다가 들켜. 빨리 기름 줘."
태연한 재촉에 다리를 억누르고 있던 소년이 품안에서 작은 기름병을 꺼냈다. 그러자 그것을 받아든 배 위의 소년이 짓궂게 미소 지었다.
"아저씨, 그렇게 나쁘게 생각 하지 마. 이 기회에 내가 좋은 거 가르쳐줄게."
그렇게 말한 소년은 기름을 묻힌 손가락으로 호운의 안을 차근차근 풀기 시작하였다. 호운은 황제보다 훨씬 작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안을 꼼꼼히 훑는 그 느낌에 미간을 찡그렸다. 언제 느껴도 안이 적셔지는 느낌은 실금을 한 듯 불쾌하였다. 호운이 미간을 찡그리자 위에서 억누르고 있던 소년이 낄낄 웃었다.
"네 손가락이 너무 가늘어서 싫은가봐. 이 아저씨 인상 찌푸린 것 좀 봐."
"있어봐. 곧 좋아 죽게 만들 거니까."
마치 농담을 하듯 가볍게 이야기를 한 소년은 계속해서 호운의 안을 헤집었다. 그 감각에 호운은 그저 불쾌감만을 느꼈지만, 안쪽 깊숙이 들어온 소년의 손가락이 어느 한 점을 쿡 찌르자 몸에 번개를 맞은 것처럼 찌릿해졌다. 그 반응을 눈치 챈 것인지 소년은 그 부분을 집요하게 누르기 시작했다. 이것이 쾌감이라는 것을 인지한 호운은 두려움에 아이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애초에 자세가 불리한 채로 아이라지만 자신과 크게 체격 차이도 나지 않는 세 소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은 무리였다. 키는 호운이 더 컸지만 메마른 호운은 그들에게 쉬운 장난감처럼 굴려졌다.
"야. 섰다."
다리를 잡고 있던 소년이 가볍게 중얼거리자 배 위에 있던 소년이 보란 듯 코웃음 쳤다.
"봐, 내 실력이 이 정도야. 손가락으로도 세우잖아."
호운은 낄낄거리는 소년의 목소리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어쩐 일인지 크게 흥분하지도 않았는데 발기한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소년은 망연한 표정을 지은 호운을 보며 천천히 자신의 바지춤을 풀었다. 그 모습에 호운은 다시 한번 저항하기 위해 몸을 들썩거렸지만 숨소리만 거칠어질 뿐 전 체중을 실어 호운을 억누른 소년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음에는 나다?"
"웃기시네. 언제는 노인네라 싫다더니."
"그래도 한번 맛은 보고 싶잖아. 황상을 푹 빠지게 한 명기라니."
호운이 저항하건 말건 소년들은 행동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마침내 바지춤을 푼 소년이 호운의 입을 막고 머리를 억누른 소년에게 말했다.
"하기 힘들어. 좀 앉혀 봐."
"까다롭기는. 그냥 해."
"그럼 너도 나중에 그냥 할래? 하기 힘들텐데?"
투덜거리며 소년들이 자세를 고쳐 잡으려 한 순간, 호운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다시 필사적으로 다리를 뻗었다. 순간 다리를 억누르던 소년이 튕겨나가자 호운은 재빨리 몸을 틀었다. 그러자 위에서 배를 억누르던 소년이 균형을 잃고 침상 아래로 뒹굴었다. 우당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구른 소년이 떨어져 나간 사이 호운은 몸을 일으켰다.
"이 아저씨가!"
위에서 입을 막고 있던 소년이 당황해 호운에게 덤벼들었다. 침상에서 일어나려던 호운의 몸은 다시 침상위로 처박혔고 배위에 자리를 잡은 소년은 서둘러 호운을 억눌렀다.
"닳을 대로 닳아놓고 왜 이렇게 비싸게 굴어?"
"놔!"
호운은 자신의 배 위에 올라탄 소년을 밀치며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당황한 소년이 호운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그 소리는 방 밖으로 빠져나간 후였다.
"무슨 일입니까!"
곧 방문 밖에 있던 병사들이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왔고 어둑어둑 하던 방 안이 환해졌다. 병사들은 방 안의 모습에 놀라 당황한 듯 보였다. 그들은 황제의 총동들이 최근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는 사내의 방에서 뒹굴고 있는 모습을 어이 해석해야 할지 몰랐다. 그들 중 한 소년은 바지춤이 풀려있고 한 소년은 호운의 배 위에 올라 앉아있으니 상황은 명백하였지만 그들 모두가 사내라는 점이 문제였다. 그리고 그들이, 병사들의 눈을 피해 호운의 방 안에 들어와 있다는 점도 문제였다.
호운의 배 위에 앉아있던 소년은 곧 교활한 미소로 말했다.
"이 일이 황상의 귀에 들어가면 서로 곤란하겠죠? 그러니 서로 못본 척 하는 건 어때요?"
"못 본 척 하다니…."
병사가 당황해 중얼거리자 소년은 교태롭게 미소지었다.
"그저 오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는 거예요. 우리도 장난은 이쯤 할 테니까, 어때요?"
"하지만 그자가 황상께 고해바치기라도 하면…."
"황상께 고해바치면 우리 셋이서 이 자가 먼저 유혹해 왔다 하면 그만이죠. 지금은 이 사내가 총애를 받고 있다지만 우리도 황상의 총동이니, 두려울 건 없어요."
소년은 그리 말하며 자신감을 얻은 듯 더욱 미소를 짙게 하였다. 그러나 소년의 그 당당하던 미소는 이내 병사들의 뒤에서 소리 없이 나타난 얼굴에 의해 무너졌다. 도대체 어찌 이리 소리 소문 없이 등장한 것인지 병사의 뒤에서 황제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하더냐."
"화, 황상."
소년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병사들은 갑작스러운 황제의 등장에 모두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모든 사람이 무릎 꿇은 가운데 뒤늦게 호운의 위에 자리하고 있던 소년만이 굳어 어쩔 줄을 몰랐다.
"왜 그런 얼굴인 것이냐. 두려울 것이 없다더니, 왜 그리 두려운 표정을 짓는 것이냐."
"황상…."
소년은 부드러운 황제의 어조에 오히려 공포를 느꼈다. 본능적으로 눈앞에서 웃고 있는 황제에게 공포를 느낀 것이다. 황제는 미소를 지으며 소년을 바라보다 곧 거짓말처럼 미소를 거둔 무표정으로 명했다.
"저것을 끌어내려라."
"예 황상!"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병사들이 호운의 배 위에 올라탄 소년을 바닥에 패대기치듯 끌어내렸다. 이미 세 소년들 모두 기가 죽어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상황에 자유를 되찾은 호운은 엉거주춤 옷을 다시 걸쳤다. 황제는 그런 호운의 모습을 눈으로 훑고는 미간을 찡그렸다. 호운이 움직이는 모습이 어색한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저것이 마음에 들었더냐."
호운은 처음에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눈치 채지 못하였다. 그러나 곧, 황제가 말하는 저것이 바닥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소년이라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왜 그리 흥분한 것이냐."
황제는 이미 호운의 중심이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상태였다. 그 말에 호운은 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생각하니 수치스럽기도 하였고 스스로도 연유를 알 수 없어 당황스럽기도 하였다. 그리 대답을 못하는 호운을 보며 황제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혀를 차더니 병사들에게 명하였다.
"저것들을 당장 하옥시켜라. 추후에 내 친히 심문할 것이다."
"화, 황상!"
"용서해 주십시오 황상!"
"황상!"
소년들이 황제를 부르며 매달렸지만 황제의 시선은 그들에게 향하지 않았다. 황제는 소년들이 모두 끌려 나가는 그 순간까지 고개를 숙인 호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운은 그 시선이 견디기 거북해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황제는 고개 숙인 호운의 머리를 억지로 들어 올려 시선을 맞췄다.
"오늘은 어디 제대로 하는지 보자."
그리 말하는 황제의 표정이 너무나 흉포해 보여 호운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황제의 의도와 달리 그 밤 호운이 다시 흥분을 보이는 일은 없었다. 도리어 황제가 불쑥 양물을 입에 쑤셔놓자 그만 침상위에 토해버리는 일까지 저질렀다. 황제는 그런 호운을 보며 역정을 내고는 평소와 달리 이른 시간에 호운을 팽개치고 방을 나서버렸다. 그리고 다음날의 이른 아침, 호운은 한달 만에 진성왕부로 보내어졌다. 한동안 진성왕부로 돌아오지 못하였던 호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간밤의 행동을 보면 황제가 겨우 자신에게 질려준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도 든 것이다.
호운은 시종의 부축을 받아 겨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호운은 왕부에 돌아온 참에 복치운을 만나고 싶었지만 복치운은 왕부를 비운 상태였다. 이에 호운은 쓸쓸히 침상에 누웠다. 집이라고 돌아오는 왕부이지만 이곳에는 복치운, 유란란 남매를 제외하고는 마음 붙일 이가 없었다.
까무룩 잠들었던 호운은 비몽사몽간에 자신의 이마를 쓰는 손을 느끼고 눈을 떴다. 도대체 언제 돌아온 것인지 복치운이 호운의 침상 곁에 앉아있었다.
"치운아."
"형님 괜찮으십니까?"
호운은 복치운의 물음에 비몽사몽간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호운의 태도에 복치운은 미간을 찌푸리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 표정 짓지마라, 나는 괜찮으니까."
비몽사몽간에 자신을 달래주는 호운의 말에 복치운은 참혹한 표정으로 호운의 손을 붙들었다. 그리고 그 손에 자신의 뺨을 비비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잠시만 참아주세요, 형님. 제가 반드시…반드시 형님을 구해드릴테니까…."
그리 말하는 복치운의 뺨에 대어진 호운의 손바닥에 축축한 감촉이 전해졌다. 그게 무얼까 생각해보기도 전에 호운은 다시 잠이 들었고 까무룩 어두워진 시야에 마지막으로 비친 것은 서글픈 표정을 지은 복치운의 얼굴이었다.
다음날 눈을 뜬 호운은 간밤의 일이 꿈이었는지 생시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비몽사몽간이라 복치운의 얼굴을 본 듯도 하고 이야기도 나눈 듯 한데 도무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시종에게 물어보니 간밤에 복치운이 온 사실이 없다고 하니 어쩌면 꿈을 꾸었는지도 모른다.
호운은 인상을 쓰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아직 전신이 나른하고 허리가 무거웠다. 그러나 황궁에 있는 것 보다는 마음이 편해서인지 쉽게 눈이 떠지고 움직여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호운은 할 일이 없었다. 그나마 예전에는 송연이나 복치운이 말동무를 했지만 송연은 진성왕의 시종으로 왕부를 비웠고 복치운 또한 자리에 없으니 호운은 답답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처음 하루와 이틀은 피로해진 몸을 치유하느라 잠으로 보낼 수 있었지만 사흘째가 되자 답답함이 느껴졌다. 그 동안 복치운은 왕부로 돌아오지 않았고 호운은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결국 사흘째가 되는 날 호운은 답답함에 왕부를 나섰다. 예전과 달리 지키는 병사들조차 없어진 왕부의 문을 드나드는 것은 매우 쉬웠다. 아무리 지키는 병사가 없다 하더라도 왕부(王府)인데다 황궁과 일직선으로 난 대로에 서 있기에 감히 왕부안을 넘볼 이는 없었다.
호운은 왕부의 문을 나서 느릿느릿 대로를 따라 걸었다. 밖으로 나온다고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누구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니지만 호운은 그저 무작정 걸었다. 그렇게 한참을 정처없이 걷던 호운은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이 대로를 벗어나 상당히 구석진 곳 까지 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려한 대로와 달리 퇴락한 뒷골목에는 싸구려 술집과 낡은 점포들이 즐비했고 허름한 복장을 한 자들이 바삐 오갔다. 어찌 보면 사람들이 꺼릴 것 같은 그 풍경에 호운은 향수를 느꼈다. 예전에 호운이 어미와 함께 살던 곳이 딱 이런 곳이었다. 이런식으로 가난한 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그런 곳이었다.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던 호운은 이내 자신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다. 그리고 호운은 자신의 복장이 이 풍경에 융해할 수 없는 어색한 것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지금 호운은 황제가 하사한 옷을 입고 백호피로 만든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호피는커녕 토끼 가죽조차 쉽게 입지 못하는 가난한 자들 가운데 호운같은 차림을 한 자가 있으니 당연 시선을 끌 것이다. 호운은 그 시선들의 압박에 어색한듯 발길을 돌렸다.
그렇게 발길을 돌리던 호운은 길 모퉁이에 엎드려 손을 벌린 노인을 발견했다. 낡은 거적위에 쪼그리고 앉은 노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양손을 모아 낡은 물그릇을 받든 채 그 자리에 있었다. 구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그런 모습에 호운은 가여운 마음이 들어 품을 뒤졌다. 그러나 무작정 왕부를 나선 호운의 옷에는 전낭 같은 것이 없어 거지에게 줄 것이 없었다. 하지만 고개를 숙인 노인은 무척 왜소해 보였고 지쳐 보여 뭐라도 하나 주고 싶었다.
한참 고민하던 호운은 자신이 일전에 황제가 하사한 목걸이를 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을 빼어내 그릇에 떨어뜨렸다. 그릇에 목걸이가 떨어지는 소리에 엎드리고 있던 노인이 슬쩍 그릇 안을 확인하였다. 그리고는 금 목걸이를 확인하더니 놀란 듯 번쩍 고개를 들어 호운을 보며 절을 하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대인…! 감사합니다!"
커다란 소리로 외치는 노인의 말에 호운은 민망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모로 돌렸다. 그러자 몇 번이고 감사인사를 하던 노인이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뜨더니 뚫어져라 호운의 얼굴을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고 있던 호운은 그 시선을 눈치 채지 못하였다.
호운이 민망함에 얼른 등을 돌리려던 순간, 엎드려있던 노인이 상체를 일으키며 큰 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너 설마…운이, 운이 아니냐?"
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호운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말투를 보아 자신을 아는 자 같았기 때문이다.
"저를 아십니까?"
그러나 호운은 아무리 보아도 노인이 누구인지 도통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호운이 자신의 말에 부정하지 않자 노인은 두 눈을 크게 뜨더니 그를 위 아래로 훑었다. 노인은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호운의 복장을 유심히 보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네가 진정 호씨의 운이더냐!"
노인은 감탄한듯 호운을 위아래로 본 후 말을 이었다.
"네가 어찌 도성에 있느냐? 관리로 등용된 것이냐? 아니면 장사치가 된 것이냐?"
호운은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고 질문만을 던지는 노인을 보고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대답하기도 어려운 질문이기도 하였지만 노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어 곤혹스러웠던 것이다. 호씨의 아들이라 자신을 지칭한 것을 보아 자신의 아비를 아는 자인 듯한데 그의 기억 속에는 이 같은 노인이 없었다. 그런 호운을 보며 노인이 자신의 가슴을 치며 말했다.
"나를 못 알아 보겠느냐? 나다, 왕우. 한때는 네게 아버지 노릇을 하였던 그 왕우다."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는 노인의 말에 호운은 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비 노릇을 하였던 왕우.
그 말에 호운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시고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하였다. 이 노인의 정체를 깨달은 호운은 숨이 막혔다. 눈앞의 노인은 호운의 어미 오씨와 함께 살던 사내, 왕씨였던 것이다.
"왕, 아저씨…."
"그래, 그 왕아저씨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호운이 저도 모르게 주춤,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왕씨는 그런 호운의 태도는 눈치 채지 못하고 그저 호운이 자신을 알아보았다는 것에 만족하였는지 씩 미소를 지었다.
"네 복장을 보니 지금 네가 제법 살만 한 듯싶구나. 그러니 나를 좀 도와다오. 도성에 도착한 이래로 지붕이 있는 곳에 쉰 적이 없어 뼈마디가 쑤신다."
태연히 말하는 왕씨의 말에 호운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설마 아비같은 나를 모른 척 하지는 않겠지?"
그 말에 호운은 어이가 없어져 큰 소리로 되물었다. 너무나 태연한 왕씨의 태도에 천하의 호운이라도 화가 났다.
"내게 한 짓을 잊어버린 겁니까!"
"응?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네게 무슨 짓을 하였다고?"
왕씨는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지 멀뚱멀뚱 호운의 얼굴을 보았다. 왕씨의 말간 얼굴을 보니 호운은 속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 같았다.
"그날, 그날 내게 한 짓 때문에 내가 어머니께…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진정 잊었습니까."
힐문하는 호운의 어조에 왕씨는 또르륵 눈알을 굴렸다. 그러다 마침내 생각해 냈던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아직 그 일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냐? 대장부가 그리 사소한 일에 원한을 품어서는 안된다."
"사소한 일이라구요?"
호운은 숨이 턱 막혔다.
"네가 먼저 유혹하지 않았더냐. 나도 참으려 했는데 네가 먼저 유혹해서 어쩔 수 없이 일이 그리된 것 아니냐. 그런데 나만 원망하다니."
뻔뻔한 왕씨의 말에 호운은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그때도 왕씨는 어미에게 그리 말했었다. 호운이 먼저 유혹하였다고.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고. 그러나 호운은 단 한번도 왕씨를 유혹한 적이 없었다. 그런 관계를 바란적 조차 없다. 그런데 어찌 십수년이 지난 후에도 이리 똑같은 말을 하며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인가.
"그래도 너도 좋지 않더냐? 내가 지금은 이런 신세지만 한때는 물건이 튼실하다고 소문이 자자하였다. 너도 그때 좋아하지 않았더냐."
이어진 왕씨의 말에 호운은 아무말도 못하였다. 도대체 어이 기억하면 저렇게 기억할 수 있는지 그저 알고 싶을 따름이다. 결국 호운은 입술을 깨물다가 왕씨에게서 등을 돌렸다.
"어디를 가는게냐!"
왕씨는 호운이 돌연 자리를 뜨려 하자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나 호운은 그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외쳤다.
"내 몸에 손대지마!"
그렇지 않아도 사람이 손을 대는 것을 싫어하는데 상대가 왕씨라는 것을 알자 더욱 격한 거부감이 일었다. 그러나 왕씨는 그런 호운의 반응에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네가 어찌 내게 이럴 수 있느냐 네가!"
왕씨가 호운을 원망하며 외쳤지만 호운은 그저 싸늘하게 그를 노려보고 그대로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왕씨에게서 멀어졌다.
"기다려라!"
왕씨가 크게 외쳤지만 호운은 기다리지 않았다. 왕씨는 부랴부랴 깔고 앉았던 거적을 둘러말고 호운의 뒤를 따라 달렸다. 그러며 끝없이 호운의 이름을 외쳤는데, 그러는 사이 호운은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왕부로 돌아온 호운은 도망치듯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설마 왕씨와 다시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기에 그 만남으로 인해 받은 호운의 충격은 컸다. 떨지 않으려 했는데 손이 덜덜 떨렸다. 왕씨가 자신을 알아보았다는 사실이 너무나 불쾌하여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결국 호운은 그대로 거칠게 옷을 벗어던지고 침상안으로 파고들어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지금이라도 당장 왕씨가 자신을 뒤쫓아와 다시 손을 잡을까 두려움에 몸서리가 처졌다.
호운의 걱정과 달리 왕씨는 호운을 뒤쫓지 않았다. 그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호운은 안심하지 않았다. 왕씨를 마주친 이래 호운은 함부로 왕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혹시 왕부 밖으로 나섰다 다시 왕씨를 마주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왕부 안에서 두문불출하던 호운은 그로부터 나흘 후 다시 황제의 부름을 받고 황궁으로 향하였다. 다른 때였다면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을 부름에 이번에는 호운은 안심하였다. 일단 황궁안이라면 왕씨가 절대 따라올 수 없으리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황궁안으로 불린 호운은 후궁전에 마련된 처소로 안내될 것이라 지레 짐작하였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그를 태운 마차는 한없이 오래 황궁 안을 달렸고, 마차가 멈춰선 곳은 호운에게도 익숙한 궁 앞이었다. 바로 황제가 왕이던 시절 사용하던 정궁(正宮)이다. 내관의 안내에 따라 마차에서 내린 호운은, 주로 밤에만 불려 다니느라 제대로 본 적이 없는 정궁의 풍경에 감탄하였다. 새삼스럽지만 참으로 호화로운 정원과 건물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내관은 그런 호운을 이끌고 자꾸 안으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정궁의 안은 황제가 사용하던 시절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때는 주로 은은한 색조의 장식품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붉은색과 금색을 이용한 화려한 장식들과 보석으로 이은 주렴들이 달려있었다. 그 화려한 장식들을 헤치고 나아가자 과거 황제가 사용하던 침전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침전 안에 서 있는 황제의 모습 또한 보였다. 토한 호운을 보며 역정을 내며 사라지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황제는 평소와 같은 신색으로 호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딱 칠주야만에 다시 보는 황제의 모습에 호운은 어색하게 절을 하며 무릎을 꿇으려 하자 황제가 손을 들어 그것을 막았다. 시종들이 분분히 무릎을 꿇는 가운데 호운만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황제가 그런 호운에게 느긋이 물어왔다.
"마음에 드느냐."
"?"
호운은 황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해 그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황제가 호운에게 재차 물었다.
"새로 단장한 궁의 모습이 마음에 드느냐 물었다."
"예…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사실 화려하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지만 황제가 그런 칭찬을 바라는 듯하여 호운은 그리 대답하였다. 그 대답에 황제는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다운 것 같다니 되었다. 싫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 걸 보니 마음에는 드는 모양이구나. 앞으로 지낼 처소인데 싫어서는 안 되겠지."
황제의 말에 호운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제 이 정궁이 네 것이라는 말이다."
황제의 말에 호운은 눈을 끔뻑거렸다.
"그 말씀은…."
"이제 굳이 진성왕부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황제의 말에 호운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어이해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는 진성왕부에…."
"짐이 이곳에 머물라 하는데 감히 진성왕부로 돌아가겠다는 것인가."
불쾌감이 섞인 황제의 어조에 호운은 흠칫해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자신의 말에 거역하는 것을 용서하지 않는 자였기에 절로 두려움이 일었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너는 그저 짐이 명하는대로 이곳에서 지내면 된다."
일방적인 황제의 말을 호운은 고개를 숙인 채 들었다. 황제가 황위에 오른 후의 행동들 대부분이 호운의 이해 범주를 넘어있었지만 계속해 이어지는 기행에 호운은 오히려 불안해졌다.
"또 왜 그런 표정인것이냐."
황제는 고개 숙인 호운의 턱을 들어 표정을 살피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호운은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몰랐다. 그렇기에 황제가 어째서 저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지도 몰랐다. 황제는 호운의 얼굴을 매만지며 말했다.
"너는 어이된 것이 웃는 법이 없구나. 얼굴은 곱게 타고난 놈이 왜 웃지를 않는게냐."
웃으라는 황제의 말에 호운의 표정은 더욱 굳었다. 어이해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호운이 어쩔 줄을 모르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황제는 혀를 차며 호운의 얼굴에서 손을 떼어냈다.
"오늘 밤 이리로 올 테니 그리 알고 기다리거라."
그렇게 말하고는 침전을 나서는 황제를 호운은 그저 그 자리에 선채 전송하였다.
호운이 정궁을 하사받았다는 소문은 호피를 하사받았을 때 보다 더욱 빠르게 황궁 안에 퍼져나갔다. 정궁은 황제가 예전에 사용하던 처소로 수십 개의 방이 딸린 넓은 궁인데 그것을 첩지조차 없는 호운 한 사람에게 하사했다는 의미가 참으로 남달랐다. 이는 황제의 총애가 단지 바람결에 스치는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어서 호운에 대한 대신들의 평가도 달라지게 되었다.
호운이 정궁을 하사 받은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호운의 앞으로 수많은 선물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과거 진성왕의 총비인 유란란의 오라비로 받은 선물의 몇 배나 되는 선물이 갑작스레 물밀듯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하자 호운은 무척 당황하였다. 그리고는 그런 선물공세를 거절하려 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그런 호운의 거절에 오히려 이상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짐의 애첩에게 바치는 선물은 곧 짐에게의 충성이다. 어째서 이를 거절하려는 것이냐."
황제의 입에서 직접적으로 나온 애첩이라는 말에 호운은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충격을 받은 호운과 달리 시종들은 그 한 단어에 호운을 보는 눈을 달리했다. 이제 그는 황제 본인마저 인정한 황제의 애첩이 된 것이다.
황제의 그 어떤 애첩도 받지 못한 파격적인 대접을 받는 호운은 순식간의 궁안의 소문에 휩싸였다. 그와 동시에 호운의 방을 잠입하려 하였던 총동들에 대한 소문도 암암리에 궁을 돌았다. 궁 안에는 그 세 소년이 수십명의 죄인들에게 윤간당한 후 살해당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직접 목격했다 나서는 이가 없었지만 호운이 정궁을 하사받는 것과 거의 동시에 돌이 시작한 소문은 충분히 신빙성이 있었고, 실제로 그 세 소년은 그 일 이후로 어디에서도 목격된 적이 없다.
때문에 궁 안의 사람들은 태후나 오왕비 보다 호운의 동태를 더욱 신경쓰게 되었으니 이는 호운을 옥죄는 또 하나의 족가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호운이 정궁을 처소로 받으며 황궁에서 입지를 다져가는 사이 오왕비 옥씨는 점차 고립되어 갔다. 황제는 그녀가 황궁에 있는 것을 모르는 사람처럼 그녀를 아예 찾지 조차 않았고 그녀는 날이 갈수록 울적해졌다. 심지어는 오늘은 우연히 정원을 거닐다 마주쳤음에도 그녀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황제를 생각하니 그녀의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그런데 그날 밤, 태후는 어이 알았는지 낮의 일을 언급하며 옥씨를 방문하였다.
"자네 마음이 얼마나 쓸쓸하겠는가."
자신을 보듬어주는 태후의 말에 옥씨는 그저 쓴웃음을 지었다. 태후는 옥씨를 위로하며 황제가 지금 한 사내에게 눈이 멀어 총기가 흐려져 그렇다며 말하였다. 그 사내가 누구를 뜻하는지 모르지 않았지만 옥씨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황궁에 들어온 날 보았던 사내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고 그녀의 부정은 이내 힘없이 잦아들었다.
태후는 얼굴이 어두워진 옥씨를 보며 천천히 말하였다.
"비록 지금은 그 사내가 총애를 받고 있다지만 사내는 사내일 뿐. 후사를 이을 수 없으니 자네가 후사를 생산하기만 하면 황상의 총애가 자네에게 돌아올 걸세."
태후의 말에 옥씨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황상께서는…."
옥씨는 차마, 자신의 지아비인 황제의 치부를 제 입으로 말하지 못하였다. 그런 옥씨를 보며 태후가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황상의 문제는 나 또한 알고 있네. 처첩이 그리 많은데 그가 본 후사가 자네가 생산한 소양군이 유일한데다 그 소양군마저 그러하니, 사내로서 입에 담기 힘든 문제를 갖고 있음이지."
태후의 말에 옥씨는 침울한 표정으로 변했다. 소양군을 생각하면 옥씨는 우울해졌다. 태후의 말처럼 황제의 유일한 자식이 옥씨의 소생 소양군이지만 그 소양군은 지능이 떨어졌다. 이제 열다섯이 되었음에도 서너살 먹은 아이처럼 어린 소양군을 보면 옥씨는 할 말이 없어졌다. 유일한 후계자가 저 꼴이니 왕비로서 소임을 다하지 못한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허나, 자네가 소양군을 생산한 것을 보면 자네의 밭은 황상과 달리 문제가 없지 않은가."
실제로 옥씨를 살핀 의원도 그리 말 하였다. 옥씨의 나이도 이제 서른 둘로 적지 않은 나이였으나 자식을 생산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래도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무리 제가 문제가 없다하여도 황상께서 그러하시니 어쩌겠습니까."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문제인데다 상대가 황실의 웃전이며 동시의 자신의 혈족이라는 생각에 옥씨의 입이 가벼워졌다. 그녀의 푸념에 태후가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아무리 밭이 윤택하여도 씨가 부실하면 싹을 틔울 수 없는 법이지. 하지만, 자네만 생각을 고치면 얼마든지 싹을 틔울 방법이 있네."
"그게…무슨 말씀이십니까?"
옥씨는 갑작스러운 태후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을 고치면 얼마든지 싹을 틔울 수 있다? 옥씨가 의아한듯 묻자 태후가 대답하였다.
"진성왕의 자녀가 많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네? 네…알고 있사옵니다. 일전에 왕자아기씨가 또 한분 태어나셨다 전해들었습니다."
얼떨떨한 듯 옥씨가 대답하자 태후가 은근히 목소리를 낮추며 말하였다.
"자네가 알다시피 진성왕은 여인에게 문제만 없으면 어지간하면 모두 자식을 보았네."
태후의 은근한 말에 옥씨의 안색이 변하였다.
"지금 무슨…무슨 말을 하시려는 겁니까."
옥씨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그녀는 차마, 지금 태후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였다는 기색을 내비칠 수 없었다. 그러나 태후는 옥씨와 달리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태연하게 말하였다.
"어차피 같은 황실의 씨앗이네. 누구의 몸을 빌어 태어난들 모두 선황의 손자이니 그게 무슨 차이겠는가."
"태후마마!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옥씨가 안색마저 변해 외쳤지만 태후는 오히려 엄한 표정으로 일갈하였다.
"지금 누구를 상대로 언성을 높이는 것인가!"
태후의 일갈에 옥씨는 주눅이 들었다. 그녀는 원래 타고나기를 소심하게 타고난 여인이었다. 옥씨가 기가 죽은 듯 보이자 태후가 다시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자네에게 강제하고자 함이 아니야. 비록 자네는 내 며느리의 입장이나 사사로이는 내 육촌 조카가 아닌가. 그런 자네의 처지가 참으로 딱해 보여 이리 말하는 게야. 벌써 황후가 되었어도 옛날에 되었을 자네가 첩지조차 받지 못하고 왕비로 불리다니."
태후의 조곤조곤한 말에 옥씨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표정에는 놀람과 충격을 넘어서 희미한 갈등이 내비쳤다. 태후는 그런 옥씨의 어깨를 툭툭 쳐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 결정하라는 것이 아니네. 하지만, 한번쯤 생각해 보게. 총애도 받지 못하고 후사 또한 생산하지 못한 여인의 처지가 어이될지 말이야."
태후는 그 말만을 남기고 옥씨의 처소에서 사라졌다. 남겨진 옥씨의 얼굴에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갈등이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날이 지나지 않아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오왕비 옥씨의 아비이자 태후의 사촌오라비 중 한명인 옥명후가 상소를 올려왔는데, 그 내용이 조정의 분란거리가 될 만한 것이었다. 조정 대신들이 상소를 올리는 일이야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이지만 상소에서 언급한 자들이 문제였다.
서문을 제하고도 무려 삼천자가 넘는 장문의 상소에서 옥명후는 진성왕비 유씨와 그 오라비를 거론하며 이같이 말하였다.
[무릇 남매라면 성씨가 같아야 할진데 진성왕비 유씨는 유씨이건만 그 오라비라는 자는 성이 호씨라, 괴이함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하여 신(臣)이 조사하여 보니 호씨와 유씨는 원래 남매지간이 아니라 부부지간으로, 호씨는 포주노릇을 하였고 유씨는 기녀노릇을 하였다 합니다. 도성에 이 일을 모르는 백성이 없으니 황실의 이름에 누가 되어 황상마저 욕되게 할까 두렵습니다.]
상소를 받은 황제는 웃음을 터트렸다. 실상 이 상소가 무엇을 노린 것인지는 뻔했다. 진성왕의 곁에 붙은 유란란을 제거하고 동시에 황제의 곁에 있는 호운을 제거하고자 하는 것이다. 정치를 하는 자들이 상대를 진창으로 밀어 넣는 일이야 흔하기에 황제는 그저 웃었다. 웃으면서도 머릿속은 차게 식었다.
옥명후의 상소가 황제 자신도 알면서도 눈감았던 부분을 찔렀기 때문이다. 아직 황제는 호운의 이름을 몰랐다. 그저 그를 호씨라 불렀을 뿐이다. 그러나 진성왕비가 유씨라는 것도, 호씨와 성이 다르다는 것도 알고는 있었다. 허나 세간에는 그런 관계가 흔하였기에 그저 눈을 감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새삼스레 상소로 인해 그것을 자각하게 되자 속이 껄끄러웠다. 호운과 그 여인이 육체적인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왠지 모를 것이 속에서 치밀었다. 이에 황제는 오랫동안 이루어왔던 일을 할 때가 되었음을 직감하였다.
'시기는…그래. 그때가 좋겠군.'
마침 조금만 더 있으면 부황인 성종이 승하한지 1년이 되는 날이 온다. 황제는 옥명후가 올린 상소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이 상소는 원인이 되지 못하였지만, 계기 정도는 되었다. 황제는 상소를 탁자에서 밀어내고 방문 앞의 시종에게 명하였다.
"호씨를 데려오기 전에 먼저 왕비 옥씨를 침전으로 불러오너라."
참으로 오랜만에 황제는 옥씨를 품을 마음이 들었다.
황제는 곧장 자신의 침전에 도착한 옥씨를 안았다. 오랜시간 황제의 손길이 닿지 않았던 그녀는 잔뜩 기대를 하고 몸을 치장하고 나타났다. 과연 역대 황제들의 사랑을 받은 옥씨일족의 여인답게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러나 황제는 그 흔한 아름답다는 칭찬조차 않고 그녀를 침상에 눕히고 일을 벌였다. 옥씨는 이에 실망한 기색을 나타낼 틈도 없었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황제를 뒤따라가느라 그녀는 그저 필사적이었다.
새하얀 몸을 붉게 물들이며 신음을 흘리는 옥씨가 황제의 목에 팔을 두르고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녀는 황제가 자신에게 빠져들게 하기 위해 나름 필사적이었다. 교태롭게 허리를 흔들고 보란 듯이 가슴을 내보였다. 그러나 결국 흥분해 매달리는 것은 그녀 쪽이었고 황제는 담담한 신색인 채였다.
"황상!"
달뜬 신음을 내지르며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그녀를 황제는 여유 있게 다루었다. 옥씨의 숨소리가 점체 거세어지고 황제의 허리 놀림도 더욱 바빠졌다. 옥씨의 하얀 다리가 황제의 허리에 감겨진 채 바르르 떠는 모습은 충분히 매혹적이었다. 이윽고 옥씨의 하얀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에 맞추어 황제가 사정을 하였다.
황제가 사정을 하자 옥씨는 파들파들 몸을 떨면서 더욱 황제에게 매달렸다. 그러나 황제는 사정이 끝난 후 볼일이 끝났다는 듯 옥씨의 몸을 매정하게 떨쳐냈다.
"황상…."
옥씨가 매달리듯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황제는 침대를 가린 얇은 나삼 너머의 여관을 불렀다.
"왕비를 데려가라."
이런 순간마저 자신을 왕비라 칭하는 황제가 원망스러웠지만 옥씨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채 정사의 여운이 가시지도 않은 몸을 애써 단장하고 시종들의 손에 이끌려 황제의 침전을 나섰다. 그러나 침전을 나설 차비를 하던 옥씨는 침전 앞에 낯선 사내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움찔하였다. 잘 보니 그저 낯선 사내가 아니었다. 그는 그녀가 궁 안에 들어온 날 만났던, 황상의 총애를 받는다던 그 사내였다.
사내 치고는 선이 곱고 부드러웠지만 아무리 보아도 사내였다. 황제가 품었던 무수히 많은 총동(寵童)들처럼 남자라고도, 여자라고도 할 수 없는 미묘한 소년이 아닌 정말로 그냥 사내였던 것이다. 그러나 옥씨는 그 사내가 밤이면 밤마다 황제의 침전에 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여관들이나 내관들, 그리고 그 외의 궁녀들이 쉬쉬하며 사내와 황제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아무리 궁 안의 일에 어두운 옥씨라도 사내의 일을 모를 수가 없었다. 사내를 향한 황제의 총애부터 은밀해야 할 밤의 일 까지 옥씨의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 사내가 방 앞에 서 있다는 사실에 옥씨는 블쾌함을 느꼈다. 사내는 옥씨의 시선을 받고 어쩔 줄을 몰라하며 시선을 피했다. 왕비인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대신 시선을 피하는 사내의 행동이 옥씨에게는 한없이 무례해 보였다.
"들어오지 않고 뭘 하는 것이냐."
그러나 황제의 말에 옥씨는 그가 황제에게 불려 왔음을 알고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사내는 옥씨를 본척만척하며 침전 안으로 들어갔다. 명백히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에 옥씨는 치욕에 부르르 떨었다. 그렇지 않아도 황후의 첩지를 받지 못한 채 궁에서 겉도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였거늘, 이제는 한낱 황제가 비역의 상대로 불러들이는 사내마저 자신을 무시한다 생각하니 참담함이 일었다. 그러나 옥씨는 아무 말 하지 못하고 황제의 침전 앞을 물러나야 했다. 어쨌든 그녀는 이제 물러가라는 황제의 명을 받은 몸이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일찌감치 호운이 침전 앞에 도착한 것을 눈치챘다. 다른 때였다면 옥씨를 그 자리에서 물리고 호운을 불러들였을 테지만, 옥씨를 바라보는 호운의 표정을 본 황제는 그러할 수 없었다. 일순간의 당혹감과 미미한 열정이 스친 호운의 표정을 황제는 분명히 읽어냈다. 그렇기에 그는 옥씨를 품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호운에게 보란듯 옥씨를 품었다. 그러나 정작 욕심을 채우고 나니 어쩐지 화가 났다. 침전에서 물러나는 옥씨와 시선조차 마주치지 못하는 호운의 태도에 부아가 치밀었다.
옥씨가 침전에서 물러나자마자 황제는 바로 호운을 침상으로 잡아끌었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호운의 가랑이 사이로 손을 뻗었다. 호운이 채 말릴 틈도 없이 비집고 들어간 손은 정확히 가랑이 사이에 있는 것을 콱 틀어쥐었다. 그 감각에 호운이 숨을 급하게 들이쉬자 황제가 은근히 중얼거렸다.
"섰구나."
그리 말하는 황제의 표정은 미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어찌 황제가 손을 대면 서지도 않는 것이 다른 자들 앞에서는 잘만 선다는 생각을 하자 다시 화가 치밀었다.
"그 계집이 탐이 나더냐? 욕정이 일더냐?"
황제의 말에 호운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면 왜 이런 것이냐!"
"악!"
강하게 잡아당기는 힘에 호운은 짧게 비명을 질렀다. 호운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오자 황제는 성기를 잡아당기던 힘을 약하게 하였다. 그리고 귓가를 지분거리며 물었다.
"계집이 안고 싶은 것이냐, 응? 그런 것이냐?"
"그런게 아닙니다."
겨우겨우 그리 대답한 호운을 보며 황제가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말해 보거라, 화내지 않을 테니 말해봐. 계집이 그렇게 탐이 나더냐?"
"그런게 아닙니다."
"왜 자꾸 거짓말을 하는 게야!"
황제는 불쾌감이 이는지 얼굴을 찡그리고 캐물었다. 그러나 호운은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그 여자를 안고 싶었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저, 절정을 향해 흔들리는 그녀의 몸이 오래전에 헤어진 아내 진부용을 연상시켰기에 그랬다. 진부용도 그녀만큼이나 하얀 피부에 나긋나긋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분칠이라도 한 것처럼 창백한 다리에 허리가 감겨있는 모습을 본 순간 호운은 마치 자신이 아내를 안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물론 그 착각은 일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일순간의 착각에 오랫동안 굶은 몸이 반응하였고 이 같은 결과가 일어난 것이다.
호운이 말을 못하고 있자 황제는 화를 내며 호운의 옷을 벗겨냈다. 이미 황제의 손아귀에서 호운은 풀이 죽어있었지만 황제 자신은 건강하다 못해 당장 터져나갈 듯 긴장되어있는 상황이었다.
"왜 보는 것만으로도 세우던 것을 만져주는데도 못 세우는 게냐."
캐묻는 황제에게 호운은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황제는 혀를 차고 호운을 뒤로 뒤집었다. 이 밤 오랜만에 피를 봤지만 알 수 없는 분은 식지가 않아 황제는 밤새도록 호운을 몰아 붙였다.
다음날, 옥씨는 다시 황제의 부름을 받고 차비를 하였다. 그러나 황제가 옥씨를 부른 곳은 침전이 아니었다. 이에 옥씨가 의아해 하며 내관의 뒤를 따르자 내관은 옥씨를 궁의 안쪽 깊은 곳으로 안내하였다.
옥씨가 안내된 곳은 황궁 안의 또 다른 소궁(小宮)이었다. 말이 소궁이지, 적어도 오왕부 정도의 규모는 되는 궁이었다. 넓은 정원을 따라 난 길을 걸으며 옥씨는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멀리 희미한 등을 밝힌 궁의 모습이 보이자 어째서인지 기분이 묘해졌다.
그러나 옥씨는 그런 속내를 내색하지 않고 내관의 뒤를 따랐다. 모처럼 연일 황제가 자신을 불러주었으니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밖에서 보이는 것 보다 더욱 웅장한 규모에 옥씨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넓은 복도에는 몇 걸음마다 여관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방의 숫자는 적어도 수십 개는 되는 듯 넓어 보였다. 거기에 이 넓은 곳 모두가 환한 빛으로 가득 차 있으니 도무지 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옥씨는 흠이 되지 않을 정도로 주변을 둘러보며 내관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당도한 침전의 앞에서 옥씨는 숨을 가다듬었다. 그러다 그녀는 미묘한 냄새를 맡고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그것은 옥씨에게도 낯익은 냄새였다. 바로 땀 냄새에 섞인 정액냄새였다.
"왕비를 들여라."
미간을 찡그리고 있던 옥씨는 안에서 들린 말에 얼른 안으로 들어섰다. 대낮처럼 밝은 복도와 달리 내부는 희미한 등 몇 개만이 밝혀져 있어 어슴푸레했다. 목소리는 방의 가장 안쪽인 침상 쪽에서 들리고 있었다.
침상을 바라본 옥씨는 저도 모르게 입가를 가리며 뒤로 물러섰다. 침상위에는 황제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는 품안에 벌거벗은 호운을 안은 채 옥씨를 바라보고 있었다. 호운은 고개를 푹 숙인 채였지만 황제는 고개를 들어 똑바로 옥씨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리로 오라."
황제의 말에 옥씨는 정신을 차리고 황제를 보았다.
"지금, 그리로…말씀입니까."
말을 하면서도 옥씨는 더욱 진해진 냄새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가까이 서 보니 방금 전의 어렴풋한 냄새의 몇 배나 되는 정액냄새가 진동을 했다. 이것이 호운과 황제가 뒤섞여 흘린 물건이라 생각하니 토악질이 일었다. 황제는 옥씨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는 것을 뻔히 보고도 태연히 그녀를 재촉하였다.
"그래. 이리로 오라."
옥씨는 결국 눈을 질끈 감고 황제가 있는 침상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황제가 옥씨에게 담담한 목소리로 명했다.
"옷을 벗어라."
그 명령에 옥씨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여전히 그녀를 담담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결코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황제는 그녀를 재촉하였다.
"벗으라 하였다."
결국 옥씨는 부들부들 손을 떨며 옷을 벗었다. 그녀라고 자존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녀는 자신의 지아비인 황제가 두려웠다. 감히 그녀는 그의 명령을 거역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옥씨의 옷자락이 하나둘 떨어져 내리고 옥씨가 벌거벗은 몸으로 그 자리에 섰다. 수치스러움에 가슴을 가린 그녀를 보고 황제가 차갑게 말했다.
"가리지 마라."
옥씨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억지로 내리고 벌거벗은 몸을 드러냈다. 수치에 입술이 새파랗게 변한 옥씨는 아랑곳 않고 황제는 자신이 품에 안고 있던 호운의 고개를 들게 하였다.
멍하니 초점이 흐려진 호운의 시선이 옥씨를 스치고 점점 초점이 돌아왔다. 이내 옥씨를 눈치챈 호운의 눈이 찢어질 만큼 커지더니 옥씨에게서 시선을 돌리려 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그가 시선을 돌리지 못하도록 턱을 단단히 고정시키며 말하였다.
"어떠냐. 마음에 드느냐. 응?"
"황, 황상."
지친 목소리로 호운이 황제를 부르자 황제는 태연히 옥씨가 보는 앞에서 호운의 성기를 더듬었다.
"어떠냐, 저 계집이 눈앞에 있으니 세울 수 있겠느냐?"
"읏…!"
강하게 성기를 그러쥐는 힘에 호운이 부르르 떨었다. 충격을 주어선지 아니면 눈앞의 옥씨 때문인지 성기가 어느 정도 단단하게 굳어있었다.
"어떠냐. 네가 원한다면 저것을 한번 품어보게 해 주마. 지금 품어 볼 테냐, 응?"
그리 말하며 허리를 흔드니 철벅거리는 물소리가 울렸다. 황제의 말에 옥씨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가만히 서 있는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입술이 덜덜 떨렸다. 모욕이니 치욕이니 따지지 않아도 충분히 비참한 그 말에 분노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총애가 지극하다는 말을 들었어도 설마, 저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옥씨는 두려움에 차 황제의 품에 안긴 호운을 보았다. 그가 만약 한마디만 한다면, 작게 고개라도 끄덕인다면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겨야 할 터였다.
그러나 옥씨의 두려움과 상관없이 호운은 힘없이 고개를 움직였다. 위 아래가 아닌 옆으로 천천히 움직이는 고개를 보며 옥씨는 맥이 탁 풀렸다. 그러나 그런 호운의 답에 황제는 작게 혀를 차더니 그의 허리에 둔 손에 힘을 주었다.
곧 옥씨의 눈앞에서 두 사내가 격하게 엉켜들었다. 황제는 호운을 품에 안은 채 가쁜 숨을 내쉬며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이는 옥씨를 상대로 할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전혀 움직이지 않는 호운을 내버려두고 혼자 물고 빨고 하며 허리를 격하게 놀리는 황제의 모습에 옥씨는 눈을 크게 떴다. 납작한 호운의 가슴을 입술로 지분대는 모습이나 땀에 젖은 이마에 입술을 대는 모습이 마치 정인을 대하는 모습처럼 다정하였다. 마침내 황제가 앓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터는 것을 볼 때 까지도 옥씨는 시선조차 돌릴 수가 없었다.
결국 그 밤 옥씨는 황제에게 안기긴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황제가 호운을 안는 사이 내내 벗은 몸으로 그 자리에 서 있다, 그가 실신하자 흥분이 식지 않은 황제가 그녀를 침상으로 불러들여 그러했을 뿐이다. 아직 호운이 실신하여 누운 침상 곁에 개처럼 기며 황제의 열정을 받아들인 그것을 과연 안기었다 표현할 수 있을까. 호운을 안을 때와 달리 손하나 까딱않고 옥씨를 파고드는 황제의 행동에 옥씨는 참담함에 눈물을 흘렸다.
다음날 아침 옥씨에게 황제가 내리는 탕약이 닿았다. 이는 원기왕성한 황제의 상대를 하는 여인들을 위해 황제가 특별히 제작한 것인데 이 탕약을 받는 다는 것에 여인들은 자랑스러워하였다. 그러나 옥씨는 오늘은 그 탕약 그릇조차 쳐다보기 싫었다. 그러나 황제가 내린 탕약을 무시할 수는 없기에 옥씨는 깔깔한 목으로 겨우 탕약그릇을 비워냈다. 옥씨가 탕약을 비우는 것을 확인한 내관들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옥씨의 처소를 나섰다.
옥씨는 현재 수많은 후궁들과 한 궁에서 생활을 하고 있기에 그 규모가 오왕부에 있는 옥씨의 처소보다 모자람이 있었다. 여기서 옥씨는 형태만 왕비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오늘처럼 치욕스레 실감한 것은 처음이었다.
결국 그날 옥씨는 황후에게 조심스레 기별을 넣었다. 두려움보다 상처입은 여자로서의 자존심이 그녀를 움직였다.
그리고 또 열흘이 지났다. 옥씨는 다시 황제의 침전으로 불려갔고 다행히 이번에는 그저 황제의 앞에서만 옷을 벗었다. 그러나 한번 새겨진 치욕은 쉽사리 사라질 줄을 몰랐다. 자신을 안는 황제의 냉담함이 옥씨는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황제에게 안긴 다음날 옥씨는 진성왕을 보러 간다는 태후와 함께 황궁을 나섰다. 며느리와 시어미인 두 사람의 외출을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태후와 오왕비 옥씨를 태운 마차는 쉼 없이 달려 용성산 중턱에 멈춰 섰다. 먼저 기별을 받은 시종들이 앞서서 태후와 옥씨를 맞이하며 한창 인부들이 오가는 곳과는 정 반대 방향으로 그들을 이끌었다.
시종을 따라간 옥씨의 눈매에는 불안함이 어렸다. 그러나 태후는 전혀 불안하지 않는 기색으로 당당히 걸었다. 마침내 시종은 사당처럼 작은 건물 앞에서 옥씨와 태후에게 고개를 숙이고 사라졌다. 불사를 짓는 현장과 한창 떨어진 그곳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들어가자."
태후의 말에 옥씨는 두려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 좁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은 외부에서 보듯이 그다지 넓지 않았다. 그러나 제법 호화스럽게 꾸며놓은 방 안에는 진성왕이 앉아있었다. 혼자 술을 마시던 중인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방안으로 들어왔음에도 그저 고개만 까딱 하였다.
태후는 그런 진성왕의 행동에 무어라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방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태후는 자신의 뒤에 서 있던 시종들에게 턱짓을 하였다. 그러자 시종들은 고개를 조아린 채 옥씨의 앞으로 다가가 성큼 그녀의 치맛자락을 걷어 올렸다.
"이 무슨…!"
당황한 옥씨가 그 손을 뿌리치려 하였지만 워낙에 타고나기를 연약하게 타고난 옥씨가 여러명의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결국 치맛자락을 걷은 시종 중 하나가 옥씨의 밀지로 불쑥 손가락을 밀어넣었다.
갑작스러운 일에 옥씨는 참담한 듯 고개를 숙였지만 시종은 묵묵히 제 할 일을 처리하였다. 마침내 밀지에서 손가락을 뽑아낸 시종은 고개를 조아리며 뒤로 물러서서 말하였다.
"문제 없사옵니다."
"그러면 되었다. 탕약을 올려라."
태후의 말에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던 시종들이 검은 액체가 가득 찬 그릇을 바쳤다. 옥씨는 마지못해 그릇을 비워내었다. 태후는 옥씨가 그릇을 비워내자 이번에는 진성왕을 재촉하였다.
"뭘 하고 있는 게냐. 어서 하지를 않고."
재촉에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서 있던 진성왕이 성큼성큼 옥씨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아직 고개를 들지 못하는 옥씨를 못마땅한 듯 보다 그녀를 거칠게 침상으로 밀쳤다.
"흔적이 남지 않도록 주의해야한다."
"알고 있습니다."
태후의 말에 진성왕은 부루퉁하게 대답하고는 옥씨의 옷을 찢어발기듯 벗겨냈다.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도 사내인지라 점차 드러나는 새하얀 나신에 점차 욕정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일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에는 남녀의 교합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였다. 태후는 눈앞에서 엉켜있는 남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진성왕이 제대로 옥씨의 안에 씨앗을 뿌리는지 확인을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마침내 진성왕이 허리를 부르르 떨고 옥씨도 작게 경련을 하였다. 밭은 숨을 내쉬며 학학 대는 옥씨와 달리 진성왕은 숨 하나 흩트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하지 않고?"
"깊숙이 씨를 뿌렸으니 한번이면 족합니다."
아직 차림도 추스르지 못한 옥씨가 침상위에 있는데 두 모자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서 되겠느냐?"
"달포후에 확인해 보고 안 되었다면 다시 하면 되지요. 뭐가 그리 급하십니까?"
진성왕의 말에 태후는 잠시 인상을 찡그렸다. 진성왕의 말처럼 그리 쉬운게 아니었다. 요즘 황제는 천한 사내에게 홀려 여인에게는 거의 발길을 않고 있었다. 그러니, 한달 후에도 이런 기회가 올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지 말고 두어 번 더 하려무나. 확실한 게 좋지 않겠느냐."
"부실한 오왕의 씨조차 꽃을 틔운 밭입니다. 제 씨가 꽃을 피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진성왕의 말을 듣고 보니 태후가 듣기에도 그럴듯하였다. 결국 태후는 고개를 끄덕이고 시종들에게 눈짓을 하였다. 그러자 시종들이 얼른 침상을 뒹구는 옥씨를 추슬러 옷을 걸치게 하였다. 연 이틀 사내를 상대한 옥씨는 매우 기진한 상태로 시종의 등에 업혀 방을 나섰다. 시종들이 옥씨를 업고 나가자 진성왕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그런데 일은 은밀하게 되겠지요."
"물론이다. 일이 흐르고 싶어도 못 흐른다. 저 아이들 모두가 벙어리들이니까."
자신만만한 태후의 대답에 진성왕은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때, 태후도 진성왕도 간과하는 것이 있었다. 벙어리라도 귀는 트여있을 수 있고, 문자는 쓸 수 있다는 점을 말이다.
그렇게 느릿느릿 시간이 흘러 어느새 성종의 1주기를 목전에 두게 되었다. 무상하게 흐르는 시간 속에 혼자 방치된 호운은 그저 버겁게 흐름에 휩쓸려갔다. 유란란이나 복치운과 연락이 끊긴 채 황궁 안에 혼자 고립된 호운은 외롭고 쓸쓸해졌다. 날이 갈수록 그를 대하는 황제의 대우는 파격이라는 말이 붙을 정도로 총애를 드러내는 것이었지만 이조차도 호운의 외로움을 달래주지는 못하였다.
호운은 멍하니 연못안의 잉어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궁의 연못에는 세 마리의 잉어가 사는데 그 모습이 제각각 달라 귀여운 맛이 있었다. 호운이 주로 바라보는 것은 이마에 붉은 얼룩이 있고 전신이 새하얀 잉어로 호운은 그 잉어에게 빨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빨강은 다른 두 잉어보다 몸집이 작았지만 움직임이 활기찬데다 아기자기한 구석이 있어 보는 재미가 있었다. 호운의 유일한 취미라 할 수 있는 것이 잉어에게 먹이를 주는 일이니 쓸쓸하다면 쓸쓸한 취미였다.
호운은 잉어가 노니는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다 손가락으로 연못의 물을 그림 그리듯 그었다. 작은 손가락의 움직임으로 연못안에 커다란 파문이 번져갔다. 그 파문을 따라 연못물에 비춰지던 호운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하였다. 호운은 철모르는 아이처럼 그렇게 수면을 희롱하며 놀았지만, 이내 거기에도 질린듯 다시 멍하니 잉어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멍하니 수면을 바라보는 호운의 눈에 붉은 것이 보였다. 언뜻 연못에 어른거리던 모습에 주변을 지키는 병사인가 하였던 호운은 상대의 얼굴을 보고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나타난 것은 서융이었다.
"융!"
호운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서융은 그런 호운의 목소리에 말없이 그의 얼굴을 보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긴 것도 같고 짧은 것도 같은 침묵이 이어진 후 서융이 입을 열었다.
"황상께서 부르신다."
그 말에 호운이 미간을 찡그렸으나 서융은 호운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굳은 채 선 호운의 손목을 낚아채 그를 자리에서 이끌었다. 손목을 그러쥐는 강한 손아귀 힘에 호운이 인상을 찡그렸지만 서융은 그 손을 풀지 않았다.
서융은 호운의 손을 잡은 채 성큼성큼 정궁을 나서 황궁의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러는 중에도 호운의 시선은 줄곧 바닥을 향해있었다. 어쩐 일인지 시종들이 따라오지 않아 복도에는 오직 서융과 호운 단 둘 뿐이었다. 호운은 서융과 단 둘이 있는 이 상황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서융이 오왕을, 아니 황제를 위하여 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언젠가는 이리 마주칠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였다. 그러나 생각보다 만남은 갑작스러웠고 또 일방적이었다.
한참동안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던 서융은 인적이 드문 복도에 서게 되자 서융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날."
한참을 말없이 걷기만 하던 서융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에 호운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고개를 든 호운은 후회하고 말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서융의 강렬한 눈빛과 정면으로 부딪혔기 때문이다.
"왜 기다리지 않았지?"
잠시 서융이 말하는 그날이 언제인지를 곰곰이 생각한 호운은 그것이 유란란이 사라져 자신이 그녀를 찾아 헤매었을 때라는 것을 눈치 챘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그날, 그 빗속에서 서융을 만났었다. 다만 그날 들은 오왕의 음성이 너무나 강렬히 뇌리에 박혀버렸기에 그의 존재를 여태 잊고 있었을 뿐이었다.
호운이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자 서융이 억지로 턱을 잡고 고개를 들게 하고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대답해."
"…어째서, 내가 기다려야하지?"강압적인 요구에 호운은 미간을 찡그렸다.
"어째서냐고? 그날 내가 너를 구해준 걸 잊은 거냐?"
융의 빈정거림에 호운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융은 헛웃음을 짓는 호운의 얼굴을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하! 구해줬다고? 지금 겨우 그깟 걸 가지고 구해줬다고!"
융의 오만한 태도에 호운은 화가 치밀었다. 자신이 호운에게 한 일은 까맣게 잊고 고작 그것을 탓하는 융의 오만에 치가 떨렸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만났더니 너는 머리가 나빠진 모양이구나, 그래도 전에는 머리하나는 쓸만 했는데. 그런데 어쩌지? 나는 너와 달리 예전 그대로인데. 그날, 그날 밤…! 네가 부용에게 한 짓이 아직도 눈앞에 선한데 뭐 어째? 날 구해줘?"
호운의 외침에 융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에게는 너무나 먼 과거라 계집의 이름 따윈 잊었지만 호운이 말하는 그날 밤이 언제를 뜻하는지 정도는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한 짓이 아니라 그 계집도 같이 한 짓이다. 너도 봤잖아? 그 계집이 좋아 미치는 꼴을."
융의 악의로 똘똘 뭉친 말에 호운은 급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 계집이 먼저 부탁한 거야. 그 계집이 그러더군. 남편이 사내가 되어서 계집을 안는 법을 몰라 사정조차 제대로 못 한다고. 혹시 그게 자신의 기술이 모자라 그런 건지 걱정이 된다고 말이야. 그러면서 그년이 먼저 다리를 벌렸어. 자신이 모자란 것인지 확인해 달라면서 말이야."
"부용은 그런 여자가 아니야! 거짓말 하지마!"
"거짓말? 그럼 이건 어때? 네가 제대로 사정조차 못해서 그 계집이 입으로 핥아줘야 사정이 되었다던데, 응? 그래서 내가 알려줬지. 사내가 꼼짝 못하고 사정하는 방법을. 네가 집을 비운 낮 동안 계속 말이야. 그래, 그년이 다른 건 몰라도 조이기 하나는 잘 하더군."
호운의 입술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서융은 그런 호운을 보며 악랄하게 말을 이었다.
"어때, 좋았어? 내가 알려준 대로 하니까 잠시도 못 버티고 사정했다고 그년이 자랑하던…!"
퍽!
호운은 저도 모르게 융의 얼굴을 쳤다. 그러나 융은 고개도 꺾이지 않고 똑바로 호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쪽손목이 융에게 잡힌 채라 어차피 큰 힘도 낼 수 없었다.
"함부로 말하지마!"
"그 창녀의 뭐가 대단해서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는 거냐."
"내 아내다!"
다시 호운이 주먹을 휘둘렀지만 이번에는 융의 손에 잡혔다. 호운이 힘을 줘 손을 빼려 했지만 융의 단단한 아귀힘 앞에서는 어림도 없었다.
"내 아내다! 네가 마음대로 그렇게 말해도 좋을 여자가 아니란 말이다!"
결국 손목이 잡힌 채 호운은 흥분해 소리를 질렀다.
"누가 아내라는 거지?"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호운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호운이 돌아보니 어느 새인가 황제가 수많은 시종들을 거느리고 융과 호운이 서 있는 복도에 다가와 있었다.
호운은 얼굴을 굳히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융은 형식적으로 예를 취하는 동작만 보였을 뿐 고개는 숙이지 않았다.
"누가 아내라는 것이냐고 묻지 않느냐."
평소와 달리 용포위에 붉은 피풍의를 걸친 황제가 성큼성큼 호운의 앞으로 다가왔다. 호운은 자신의 발끝만 바라보고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황제는 그런 호운의 턱을 쥐고 시선을 자신에게 맞추며 다시 물었다.
"대답해라. 누가 아내라는 것이냐."
여전히 대답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는 호운을 보며 황제는 서융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네가 대답해라. 방금 아내라는 여자가 누구냐?"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사실 그것이 서융의 진심이었다. 그러나 코웃음을 치는 모습을 봐서는 황제는 그리 받아들이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나 그는 더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호운의 턱에서 손을 놓았다. 그리고 곁에 선 서융에게 말했다.
"뭣 하고 있는게냐. 어서 가서 준비하지 않고."
황제의 말에 서융은 두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복도를 나섰다. 아무래도 황제가 그에게 시킨 일은 호운을 데려오라는 일 뿐만이 아니었던 듯싶었다. 서융이 복도에서 사라지자 황제는 호운을 보았다.
"오늘은 멀리 나갈 터이니 따라 오너라."
"어디로…말입니까."
조심스레 고개를 든 호운이 묻자 황제는 가볍게 대답하였다.
"따라와 보면 안다."
한번 거한 산사태가 일어났던 용성산 자락에 사람들이 돌을 쌓으며 치성을 드리기 시작한 것이 언제인지는 모른다. 그저 큰 산사태가 일어 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돌탑을 쌓기 시작하자, 또 누군가가 그것을 따라 돌탑을 쌓았다. 사람들은 의미 없는 돌탑으로나마 가족을 잃은 아픔을 달래려 하였고 시일이 지날수록 돌탑의 수는 점점 더 많아졌다.
진성왕이 자리를 잡은 것은 그런 용성산의 깊은 자락에 한 구석이었다. 점점이 쌓아놓은 돌탑이 이어진 길 끝에 있는 널따란 평지에 불사를 짓기 시작한 진성왕을 보고 멋모르는 도성의 백성들은 백성들의 마음을 달래는 좋은 왕이라 칭송하였지만 조금이라도 정치적인 상황을 아는 이들이라면 결코 진성왕을 칭송하지 않았다. 오히려 도성에 분란을 일으킬 불씨를 키우는 진성왕을 원망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황족으로 태어난 진성왕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야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 것을 까맣게 모른 채 야망을 향해 달려갔다. 이미 기세는 황제에게 기울어 있었으나 자신감이 넘치는 진성왕은 이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호운은 황제와 같은 마차에 올랐다. 이는 소싯적 호운이 타 본적 있는 마차보다 몇 배는 호사스럽고 고급스러운 마차였다. 그러나 그 마차 안에서도 호운은 결코 편안할 수 없었다. 오히려 황제와 단 둘이 이런 좁은 곳에 있다는 것이 한없이 거북하였다.
마침내 마차가 용성산 앞에 당도하자 미리 마중 나와 있던 진성왕이 병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마차에 앉은 채 흔한 인사치레도 없이 병사들에게 길 안내를 명하였다.
이윽고 황제가 탄 마차가 용성산자락을 타고 올랐다. 원래 관도는커녕 제대로 된 길도 없던 산에는 공사를 위해서인지 제대로 된 길이 나 있었다. 그 위를 마차가 느릿느릿한 속도로 오르자 호운은 곧 이 거북한 동행이 끝날 것이라 생각해 내심 안심하였다.
오르막이 끝나고 평지에 도착한 마차의 문이 열리자 호운은 먼저 내린 황제의 손을 어색하게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에서 내려 지어지고 있는 불사의 크기를 본 호운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건 보통 그냥 불사 수준이 아니었다. 마치 산속에 대궐을 짓는 것처럼 웅장한 건물의 규모에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놀라는 호운과 달리 황제는 담담한 표정으로 불사를 쓱 둘러본 후 멀리서 다가오는 진성왕을 바라보았다.
진성왕은 왕부에 있을 때처럼 호사스러운 황금관을 쓰고 화려한 비단옷을 걸치고 있었다. 도저히 불심이 깊어져 불사에 빠진 자로는 보이지 않는 복장이었지만 어차피 서로의 속내를 뻔히 알고 있는 사이여서일까, 진성왕은 눈가림조차 하지 않을 작정인듯 보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상."
먼저 인사를 건넨 것은 진성왕 쪽이었다. 황제가 먼저 아는 척도 하지 않았는데 이리 인사를 하는 것은 예법에서 어긋나는 일이었다.
"건강해 보이는구나 진성왕."
그러나 황제는 태연했다. 이제 황제가 된 그는 더는 진성왕에게 존댓말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진성왕은 그런 황제를 보며 그저 눈썹만 꿈틀거릴 뿐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황제는 그런 진성왕의 표정은 관심이 없다는 듯 지어지고 있는 절을 다시 한번 보았다.
표면적 이유를 위해서가 아니라 수천이 넘는 군사가 머물 공간이 필요해 짓는 건물이다 보니 절이라기 보다는 막사(幕舍)에 가까운 형태로 지어지고 있는 건물이 진성왕의 의사를 더욱 확연하게 했다.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키려 준비하는 진성왕을 빤히 보고도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형식적으로나마 불상을 깎고 있는 도공들을 보며 말했다.
"부황의 명복을 빌기 위한 절이니 튼튼하게 잘 지어야 할 것이다."
"예."
진성왕은 겨우 그리 대답 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는 그 또한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훗날 모후의 명복도 이곳에서 빌어야 할 테니 말이야."
황제의 말에 진성왕의 눈빛에 살기가 어렸다. 이는 이제는 태후가 된 황후마저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암시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살기가 어린 진성왕의 눈빛을 여유 있게 받아 넘기며 말했다.
"그보다 네 총비는 어디에 있느냐."
"제 총비는 어찌 찾으십니까."
진성왕이 경계를 드러내며 묻자 황제는 곁에 서 있던 호운을 일부러 제 품에 끌어당기며 말했다. 중인환시에 그런 일을 당한 호운은 당황해 황제의 품을 벗어나려 했지만 황제의 완력을 당해내지를 못하였다.
"잊고 있는 것이냐? 네 총비의 춤을 그리 자랑하지 않았더냐. 내 오랜만에 그 춤이 보고 싶다."
황제의 말에 진성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라고 황궁내에 도는 소문을 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조정대신들이나 황궁을 드나드는 자들에게 호운의 존재는 비밀도 아니었다. 오히려 황제는 노골적으로 호운을 드러내었는데, 이는 진성왕과 그 왕비를 조롱하는 의도가 다분했다.
"총비의 오라비가 황상을 족히 만족시켜 주는 듯한데 굳이 총비까지 황궁으로 보내야 하겠습니까."
말에 빈정거림을 담아 그리 말한 진성왕을 보고 황제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예로부터 불사를 지을 때는 계집을 멀리하라 하였다. 헌데 진성왕 너는 부황의 명복을 비는 불사를 지으면서도 계집을 가까이 하니 저승에서 부황이 이 어찌 통탄하지 않을 소냐. 해서 내가 그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왔는데 감히 짐의 명을 거절하는 것인가?"
거절은 바로 황제가 진성왕을 공격할 명분을 주는 일이 된다. 진성왕은 이를 갈면서도 무어라 대꾸조차 하지 못하였다. 곧 그는 마지못해서라는 기색을 역력히 보이며 대답했다.
"총비가 오늘아침부터 달거리를 시작해서 춤을 출수가 없습니다. 허니 달거리가 끝나면 곧 준비를 시켜 보내겠습니다."
진성왕의 대답에 황제는 작게 코웃음을 쳤다. 아무래도 남성다운 진성왕의 입에서 달거리라는 말이 나와서 우스웠던 모양이다. 그 웃음에 진성왕의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황제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호운을 품에 안은 채 다시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는 진성왕에게는 인사도 없이 산을 내려가자 명하였다.
혹시나 유란란을 만날까 살짝 기대하였던 호운은 실망했지만 그것을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어이 알았는지 황제가 물었다.
"왜, 총비를 보지 못하여 서운한 것이냐."
"…아닙니다."
"왜 자꾸 아니라고만 하는 것이냐."
황제는 부정하는 호운을 채근하였다.
"보고 싶다면 솔직히 보고 싶다고 말하거라. 내 그 정도의 소원을 들어주지 못할까."
비교적 온건한 황제의 어조에 호운은 살짝 그의 안색을 살폈다. 안색을 보니 별다른 의도가 있는 듯도 보이지 않아 호운은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만나게 해 주실것입니까."
그 말에 황제는 픽 웃었다.
"만나보고 싶기는 하였던 모양이구나."
황제의 말에 호운은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그런 호운의 머리카락을 지분거리며 말했다.
"내가 겨우 그 정도도 못 들어주겠느냐. 그래, 총비가 궁에 오게 되는 날 개인적으로 만나게 해 주마."
"감사…합니다."
호운은 그리 어색하게 말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이것이 처음으로 호운이 황제에게 한 감사의 표현이었다. 호운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지만 황제는 그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황제의 품은 의혹에 쐐기를 박아 넣은 일이 되었지만, 이때의 호운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호운의 말에 황제의 마음속에 떠오른 의혹이 구체화 되었다. 길을 나서기 전 서융과 호운이 나누었던 대화에서 등장하였던 그 '아내'의 존재다. 옥명후의 상소로 촉발된 황제의 의심에 아내라는 단어는 하나의 기폭제가 되었다.
바로 유란란이 호운의 아내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다.
이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가끔 미모가 빼어난 아내를 거느린 사내들이 제 아내를 신분이 높은 자들의 첩으로 보내 오라비나 아비로 불리며 호의회식 하는 일이 도성에서도 비일비재 하였다. 호운과 유란란은 성씨가 다르다. 그리고 황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 동생이라는 복치운 또한 성씨가 다르다. 누가 보아도 친 동기간이 아닐 세 사람이 남매라는 허울을 쓰고 한 집에 들어와 살 이유가 과연 무엇이겠는가.
황제는 유란란을 만나게 해 준다는 말에 궁을 하사하여도 한 적이 없는 감사 인사를 한 호운의 모습은 이런 황제의 의혹에 쐐기를 박았다. 거기까지 생각한 황제는 치솟는 불쾌감에 당황했다. 호운이 저 유란란과 살을 섞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당장이라도 유란란을 불러들여 목을 베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다.
그러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본 황제는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사내였다는 말이지.'
그 또한 최근 자신의 행동이 당황스럽기는 하였다. 여러모로 호운이라는 존재는 황제에게 무척 도움이 되었다. 그 하나로 태후를 긴장시키고, 진성왕을 모욕하고, 후궁들의 소란을 잠재울 수 있으니 어디 그런 존재가 흔하랴. 더군다나 그는 사내라 혹여 예기치 못한 임신으로 황제의 발목을 잡을 일도 없는데다 침실에서 조차 만족스럽게 해 주었다. 그러니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 주면 그만일 텐데, 어째서인지 황제의 행동은 그 합당함을 매번 뛰어넘고는 하였다.
황제는 이제야 겨우 자신이 호운에게 집착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그 몸을 향한 육욕에 져 중심을 잃었음을 인정하였다. 자신이 그토록 비웃었던 자신의 아비처럼, 그리고 진성왕처럼 색욕(色慾)에 눈앞이 흐려졌다.
'어차피 잠시간일 뿐이다.'
그러나 황제는 자신이 색욕에 눈이 흐렸다고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잠깐 저 몸을 총애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란 말인가.
자신은 황제이고 이 나라의 지배자인데 말이다.
그는 그렇게 자신이 눈앞의 사내에게 집착하는 것이 결코 계속해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자신의 행동을 눈감았다. 그러나 황제는 이 순간에도 제 속에서 꿈틀대는 감정이 무엇인지 눈치 채지 못하였다. 결국 이로 인해 훗날 가슴이 찢어지도록 후회를 하게 되었지만 이 순간의 황제는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채였다. 그렇기에 이 순간 그는 무지 속에서 행복하였다.
진성왕이 달거리 중이라며 차일피일 미루던 유란란의 황궁 방문은 결국 그로부터 두 달이나 지난 후에 이루어졌다. 그날은 황제가 마련한 거한 연회가 황궁안에서 벌어져 도성안의 관리라고 이름을 올린 자들 모두가 황궁 안으로 모여들었다.
황제와 태후를 비롯한 황궁의 모든 이들이 참석한 자리에는 호운이나 오왕비 옥씨도 끼어있었다. 그러나 오왕비 옥씨가 상석은 상석이되 태후의 곁에 조용히 앉아있는 것에 반해 호운은 연회의 가장 상석인 황제의 곁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호운은 사람들이 이리 많이 모이는 자리에서 그런 자리에 앉게 된 스스로의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황제는 연회가 시작한 후에는 아예 호운을 자신의 품안으로 잡아당겨 거의 안듯이 하며 연회를 즐겼다.
호운의 당황과 상관없이 연회는 계속되었다. 악단이 나와 악기를 연주하고 궁녀들이 우아하게 군무를 추었다. 그렇게 점차 연회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자 마침내 유란란이 연회장의 한 가운데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나타난 것은 화려한 군무가 끝난 직후라 넓은 연회장에 홀로 선 그녀의 모습은 초라해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란란은 당당한 태도로 앞서 나오더니 우아하게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단 한사람의 춤인데도 사람들은 방금 전의 군무보다 더욱 집중하여 바라보게 되었다.
사람들은 한때 소문의 중심에 있었던 진성왕비를 유씨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분명 아주 매혹적인 여인이었다. 얼굴부터 몸매, 고운 살결까지 어디 하나 빠지는 곳이 없었다. 그 아름다운 여인이 춤을 추니 나비가 나는 것처럼 매혹적이고 우아해 보였다.
단지 유란란의 춤이 보기 좋기에 황제가 그녀를 궁으로 불러들인 것은 아니었다. 이는 진성왕이 결코 황제의 명을 거역하지 못하는 입장을 널리 알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예전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내지 않았을 유란란을 황제의 연회에 보냈다는 것은 진성왕이 지금은 황제가 하는 일을 막을 수단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정치적 이해를 초월하여 유란란은 우아하게 춤을 추었다. 호운은 몇 달 만에 보는 유란란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어째서인지 얼굴이 많이 수척해 보였다. 진성왕의 처지가 전과 달라 고충이 심한 것일까. 걱정이 된 호운은 유란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황제는 그런 호운의 시선을 눈치 채고 불쾌한 듯 입술을 일그러트렸다. 대비되는 두 사람의 표정이 교차하는 사이 유란란의 춤이 끝났다. 마지막으로 현을 튕긴 악공이 고개를 숙이자 유란란도 천천히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그런 유란란을 향해 술잔을 높이 지켜들며 말했다.
"과연 진성왕이 자랑하는 총비답구나! 어떤 사내도 그 매혹적인 몸놀림에는 넘어갈 테니 진성왕은 참으로 행복한 자다."
황제의 말은 겉보기에는 칭찬 같았지만 실상은 유란란을 조롱하려는 의도가 다분하였다. 아무리 사내들이 매혹적인 여인을 좋아한다 한들 한 사내의 아내가 된 이상 정숙해야 한다. 그런 여인네에게 어떤 사내도 넘어갈 매혹적인 몸놀림 운운하였으니, 이는 그녀의 정절을 의심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유란란은 이에 굴하지 않고 그저 나긋나긋 미소만 지었다. 그녀는 마치 상황을 모르는 백치처럼 행동했다. 황제는 일부러 궁에 들어오는 유란란의 시종의 수를 한명으로 제한하였다. 이는 왕의 비를 대하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처사였으나 유란란은 그 처지를 감내하며 궁으로 들어왔다. 유란란이 선택하여 데려온 시종은 그 동생 복치운이었으나 그 복치운 마저도 연회장 근처에는 들어오지 못해, 그녀는 이 넓은 연회장에서 고립무원의 신세가 되었다.
그런 처지에도 당당히 고개를 든 유란란의 태도는 칭찬받아 마땅한 것이었지만 황제는 그마저도 불쾌감이 일었다. 그러나 황제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곁에 대기하고 있던 내관을 불러 말하였다.
"아름다운 춤을 보여준 진성왕비에게 내 친히 술을 하사하마."
황제의 명에 내관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잔을 대령하였다. 황제는 그 잔에 손수 술을 채우고 턱짓을 했다. 내관은 종종걸음으로 유란란의 앞으로 다가가 황제가 따른 술이 가득 찬 술잔을 바쳤다.
유란란은 내관이 바친 술을 자연스럽게 받았다. 그리고 황제에게 절을 한 후 소맷자락으로 입가를 가리고 술을 마시려 하였다.
그런데 그 순간, 유란란이 갑자기 욱 하는 소리를 내더니 손안의 술잔을 놓쳤다. 그러자 유란란의 손에 들려있던 술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이 부서지고 술이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갑작스러운 유란란의 행동에 연회장은 물을 뿌린 듯 고요해졌다.
"어이해 짐이 내린 술을 바닥에 팽개치는 것이냐."
황제가 엄히 일갈하자 유란란은 얼른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황상. 소첩이 최근 속이 좋지 않아 술에서 풍기는 강한 냄새에 그만…."
고개를 숙이고 사죄하는 유란란을 보던 황제는 그녀의 행동에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다, 무언가 떠오른 것이 있는지 어의를 불렀다.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리둥절해 하였다. 이윽고 어의가 달려오자 황제는 유란란을 진맥하라 명하였다.
"총비가 최근 속이 좋지 않다 한다. 속병이 있는 것이 아닌지 진맥해 보라."
황제의 명에 의원은 종종걸음으로 유란란의 앞으로 다가가 조심스레 진맥을 시작하였다. 진맥을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의가 놀란 듯 탄성을 질렀다. 그러자 황제가 물었다.
"어떤가?"
"황상께 아룁니다. 총비마마는 속병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마마께서는 회임하셨습니다. 맥으로 보아 두 달 정도가 된 듯 합니다."
호운은 어의의 그 말에 깜짝 놀랐지만 황제는 예상했다는 태도였다. 어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연회장이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황제는 그 술렁임을 손을 들어 가라앉힌 후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는 유란란을 흘긋 보고 태후에게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태후마마. 그토록 바라였던 비(妃) 소생의 왕자를 보실 기회입니다. 총비가 아들을 낳으면 진성왕의 진정한 후계자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황제의 공손한 인사에 태후는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분명 태후가 비의 소생인 왕자를 바란 것은 사실이지만 유란란 같은 천한 신분의 총비에게서 후계자를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뻔히 알 황제가 하는 말에 분이 치밀었지만, 그러나 그녀는 황제 앞에서 소리를 지르거나 하는 우를 범하지 않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
"고맙소. 허나 벌써부터 왕자를 생산하라 하면 총비가 부담이 심할터. 그저 왕자든 공주든 건강한 아이를 낳아주면 고맙겠소."
태후의 말에 황제는 호쾌하게 웃었다.
"태후 마마께서는 참으로 욕심이 없습니다. 기왕이면 아들을 낳아야지요. 그것도, 진성왕을 쏙 빼닮은 아들을!"
그리 말하며 황제는 다시 한번 술잔을 높이 치켜들었다.
"태어날 진성왕의 아들을 위하여!"
황제의 말에 맞춰 수많은 대신들이 술잔을 들었지만 유란란은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주먹만 틀어쥐고 있었다.
호운이 유란란, 복치운과 마주한 것은 연회가 파한 후였다. 황제는 용성산에 다녀오던 날 약속하였던 대로 호운이 유란란, 복치운 남매와 마주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정말 오랜만에 마주한 세 사람은 서로 할 말이 많은 듯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중 창백한 얼굴로 입을 다문 유란란의 모습은 유독 눈에 띄는 것이라, 호운이 걱정스레 먼저 말문을 열었다.
"많이 피로한 것이냐?"
호운의 물음에 유란란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앙다문 입술은 새파랬고 뺨 또한 분을 바른 것처럼 창백했다. 그 얼굴을 걱정스럽게 보더 호운은 그런 유란란의 양손이 자신의 배 위에 얹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고 미소지었다.
"그러고 보니 축하가 늦었구나. 축하한다 란란아. 건강한 아이를 낳아라."
여인으로서 임신을 한 것은 응당 축하받아야 할 일이기에 호운은 그저 축하하였다. 그러나 호운의 그 말에 유란란의 입에서 기괴한 신음소리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축하한다 하였어요? 건강한 아이를 낳으라고요…? 오라버니는…오라버니는 황제의 총애를 받게 되었으니 이제 나 같은 건 필요 없다는 것인가요?"
목이 졸린 듯 겨우겨우 짜내는 소리로 그리 말하는 유란란의 눈동자에 서서히 독기가 차올랐다.
"누님,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치운아, 너도 들었잖니! 축하한다고! 축하한다고 하셨잖아!
호운은 유란란이 어째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수가 없어졌다. 그는 유란란의 심상찮은 태도에 당황해 물었다.
"어째서 그러는 것이냐? 뭐 잘못되거라도 한 것이냐?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짓느냐?"
당황한 호운의 물음에 유란란이 원망스러운 듯 호운을 보았다. 그러나 이내 그 원망과 독기는 눈안에 뿌옇게 차오른 눈물로 가려졌고 유란란은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란란아!"
당황해 호운이 유란란에게로 다가가자 바닥에 주저앉은 유란란은 갑자기 미친여자처럼 자신의 배를 주먹으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죽어, 죽어!"
"란란아!"
호운은 얼른 유란란의 팔을 붙들었지만 그녀는 호운의 손을 쉽사리 떼어내고 제 배를 두드렸다. 미친듯이 자신의 배를 두드리는 유란란의 양팔을 호운이 다시 붙들었다.
"치운아 뭘 하는게냐, 어서 돕지 않고!"
호운이 어렵게 유란란의 팔을 붙들고 복치운에게 외쳤지만 복치운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였다.
"치운아!"
호운이 복치운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유란란이 몸을 뒤틀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는 사이에도 그녀는 쉼없이 제 배를 두드리려 하였는데 그 모습에 호운이 기겁해 외쳤다.
"이러지 마라 란란아! 이러다 정말 큰일 나!"
"죽여야해요 오라버니, 죽여야 해! 진성왕의 씨앗 같은 건 죽여 버려야 해!"
유란란은 미친 여자처럼 발악했다. 자신의 손을 붙든 호운을 밀쳐내기 위해 발버둥친 통에 곱게 틀어 올렸던 머리가 흐트러졌다.
"란란아 이러지 마라, 이러지 마!"
"죽여야 해요, 죽여야 해!"
유란란은 큰 소리로 외치다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려 오열하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이거 좀 떼어줘요, 이거 좀, 이거 좀 떼어줘!"
"란란아…."
"이거 좀, 이거 좀…흐으으으으, 오라버니 이거 좀 떼어줘요…."
제 배를 움켜쥐고 우는 유란란을 보며 호운은 어쩔 줄을 몰랐다. 어찌해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호운은 바닥에 쓰러져 우는 유란란을 끌어안고 토닥였다.
"란란아 진정해라, 란란아. 울지 마라."
호운의 품안에서 간헐적으로 이어지던 유란란의 울음소리는 이내 통곡으로 변했다. 호운은 유란란이 그리 서럽게 우는 것을 처음 들어 어찌할 바를 모르며 그저 그녀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통곡하던 유란란이 겨우 울음을 멈춘 것은 목이 쉴 정도로 통곡을 한 후였다. 유란란은 자신이 흘린 눈물로 젖은 호운의 어깨에 기댄 채 숨을 헉헉 몰아쉬고 있었다. 호운은 겨우 유란란이 진정된 듯해 안심하였다. 그러나 겨우 울음을 멈춘 유란란의 눈빛은 독기를 품고 있었다.
"아이를 죽여야 해요."
"란란아 왜 그리 흉한 말을 하는 것이냐."
"이 아이 때문에 제가 죽어요 오라버니, 제가 죽게 된다구요!"
"그게 무슨 소리냐?""아직 모르겠어요? 제가 왜 진성왕 곁에 있었는지? 왜 오라버니에게 잠시만 도성에 머물 거라고 그렇게 대답 할 수 있었는지!"
호운은 유란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런 호운에게 복치운이 대신 상황을 설명했다.
"황실의 율법에 그리 정해져 있어요. 역자로 규정된 황족은 그 처첩은 물론이고 자식들 까지 모조리 참한다고. 하지만, 유일한 예외가 아이를 낳지 못한 여인에 대한 사면이죠. 아이를 낳지 못하였다는 것은 그가 여인으로서 제 구실을 하지 못하였다는 증거이니까요."
호운은 그런 복잡한 관례 따위는 몰랐다. 그러나 그 말에 호운은 뒤늦게 유란란의 진의를 깨달았다.
"너는…처음부터 진성왕이 반역자가 되리라 생각하고 그의 첩이 된 것이냐."
"그래요! 오라버니, 설마 내가 진성왕같은 자가 황제가 되리라 믿으세요? 천만에요! 전 진성왕이 반역자로 목이 잘리는 날을 기다리며 곁에 있었어요! 그런데 임신이라면…제 목숨도…!"
유란란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부들부들 떨었다. 호운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던 사실에 그저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런, 이런 씨 따위 필요없어요! 바라지 않았다구요!"
유란란이 스스로의 배를 다시 주먹질하기 시작했다. 호운이 그런 유란란을 말리기 위해 손을 뻗었고 잠시 호운과 유란란이 엎치락 뒤치락 하던 그 순간이었다.
"황상께서 납십니다!"
내관의 커다란 목소리에 호운과 유란란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그리고 자세를 바로하고 어쩌고 할 틈도 없이 황제가 수십인의 병사를 대동하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찌 총비와 네가 그리 얽혀있는 것이냐."
방안에 들어온 황제의 불쾌한 듯한 물음에 호운은 얼른 유란란의 손을 떼어놓았다. 서로 겹쳐 팔을 잡은 두 사람의 모습은 어찌 보면 남녀간의 은밀한 방사 직전의 모습과도 같았기에 충분히 수상한 모양새였다.
"아무일도 아닙니다."
호운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자 유란란도 얼른 차림을 정돈하였다. 황제는 호운의 대답에 호, 하고 낮게 탄성을 흘리더니 고개를 숙인 유란란에게 명했다.
"배를 보여라."
"황상!"
황제의 명에 깜짝 놀라 소리를 친 것은 호운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명령을 번복하지 않았다.
"어, 어찌 그런 명을 하십니까? 이는 가족간이라도 있어서는 아니되는 일입니다."
배를 보이려면 치마를 들어 올리거나 벗어야 한다. 그 말은 유란란더러 황제 앞에서 발가벗으란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때문에 유란란이 부드럽게 거절하려 하였으나 황제는 오히려 엄하게 일갈했다.
"감히 내 명을 거역하는 것이냐? 진성왕이 네게 그리 하라 명하더냐? 나의 명을 어겨도 좋다고?"
황제의 말에 유란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호운이 그런 유란란의 앞을 막아서며 서둘러 말하였다.
"어찌 그런 명령을 내리십니까, 란란이는 아이를 배었습니다. 혹여 아이가 잘못되면 어찌하려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제발 명령을 거두어 주십시오."
호운이 그리 말하며 고개를 조아리자 오히려 황제는 불쾌한듯 헛웃음을 지었다.
"네가 그리 말을 길게 하는 것은 처음 보는구나. 그리 저 계집이 중요한 것이냐?"
"여동생이니 당연하지 않습니까."
"여동생이라. 그것 참 희한한 일이구나. 내 알기로는 네 성씨는 호이고 저 계집은 유씨인데 어찌 남매간이 될 수 있더냐."
뻔히 알고있던 사실을 새삼스레 지적하는 황제의 말에 호운의 말문이 막혔다. 황제는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문 호운에게서 시선을 돌려 유란란을 향해 말했다.
"내 명을 계속 그리 거역하고 있을테냐?"
"황상!"
"시끄럽다! 아무리 총애를 받는 자라 하더라도 감히 황제의 어명을 거역한 자를 구명할 수 있을 성 싶으냐."
황제의 일갈에도 호운은 물러나지 않았다. 점차 험악해지는 황제의 기세가, 이대로는 유란란 본인 뿐만이 아니라 호운에게도 불똥이 튈 것 같아 유란란은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호운이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옷자락을 들어올렸다.
"란란아!"
호운이 안타까운 듯 유란란을 불렀다. 다행히 오늘은 춤을 추기 위해 얇은 속바지를 걸치고 와 치마 아래가 완전히 알몸은 아니었지만 투명한 속바지는 유란란의 밀지를 둘러싼 거뭇한 모습마저 여과 없이 비칠 정도였다. 때문에 유란란은 치마를 들어 올린 채 수치에 휩싸여 고개를 숙였다.
드러난 유란란의 배는 방금 전 그녀 자신이 두드린 흔적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개중에는 멍이 되어 내일까지 이어질 것 같은 심한 자국도 몇몇 있었다. 새하얀 몸에 드러난 그 자국이 너무나 선명해 비참해 보였지만 그보다 치마를 든 채 떨리는 유란란의 모습이 더욱 가련하였다.
호운은 얼른 유란란의 손을 치맛자락에서 풀어내 그녀의 하체를 다시 치마로 가렸다. 그리고는 마치 유란란을 감싸듯 앞을 막아섰다. 황제는 그런 호운의 태도에 살짝 미간을 찡그렸으나 곧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방문 밖에서 들은 소리에 짐이 헛들었나 하였는데, 배를 보니 확실하구나."
그 말에 호운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방문 밖에서 들었다니…도대체 무엇을 어디까지 들었단 말인가. 호운과 유란란의 안색이 동시에 창백해졌다.
"아무래도 총비는 광증이 있는 듯하구나. 그것이 아니고서는 황실의 핏줄을 배고 제 배를 그리 두드릴 수는 없을 테지."
순식간에 유란란을 정신병자 취급한 황제는 자신의 뒤로 시립한 병사들에게 명하였다.
"여봐라, 지금 당장 총비 유씨를 진성왕부로 데려가라! 그리고 몸을 풀 때 까지는 빈틈없이 총비를 보필하여 그녀가 건강한 왕자를 생산할 수 있도록 하여라!"
"어, 어찌 제게 진성왕부로 가라는 것입니까 황상!"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니 광증이 심각하다. 혹시 뱃속의 왕자에게 해를 끼칠지 모르니 몸을 풀 때 까지 사지를 결박하여 왕자가 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황제의 명에 유란란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황상! 저는 광증 따위는 없습니다! 황상, 황상!"
유란란이 서둘러 외쳤지만 병사들은 그녀를 포박하려는듯 자리에서 이끌었다. 그런 병사들을 복치운이 막아섰지만 그 또한 순식간에 병사들에 의해 포박되어 바닥을 굴렀다. 그 모습에 다급해진 호운이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황상! 란란이에게 그리 하지 말아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황상!"
그는 혹여나 유란란이나 복치운이 상할까 제정신이 아니었다.
"제발 부탁 드립니다 황상! 제발, 제발 그리하지 마십시오!"
호운의 애원에 황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황상 제발, 그리 하지 마십시오, 제발!"
호운은 필사적으로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외쳤다. 황제는 필사적인 호운의 태도에 미간을 찌푸렸지만 곧 무언가를 떠올린 듯 고개를 조아린 호운의 턱을 들어올렸다.
"그리 하지 않았으면 하느냐?"
"네, 황상. 제발 부탁드립니다!"
황제가 자신의 말을 들어줄듯 보이자 호운이 황제의 옷자락까지 잡아당기며 말했다. 워낙 경황중이라 호운은 자신이 황제의 옷자락을 잡아당기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다.
"그러면, 그 부탁을 들어주면 무엇이든 하겠느냐?"
"예!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호운의 애원에 황제는 낮게 웃었다. 호운은 그 웃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행여나 유란란을 벌하라는 명을 내릴까 싶어 황제의 입술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호운은 몰랐지만, 황제의 시선 또한 호운처럼 입술에 꽂혀있었다.
"네가 나를 기쁘게 해 준다면 네 부탁을 들어줄 수도 있다."
그리 말하며 턱을 잡은 손의 손가락 끝으로 호운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호운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지 못하였지만, 이내 손가락을 입술 사이로 미는 미묘한 동작과, 옷자락을 잡아끌던 호운의 손을 자신의 옷 안으로 잡아당긴 황제의 동작에 눈치 채고 말았다. 손에 닿은 생생한 열기에 황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깨달은 호운의 두 눈이 경악으로 크게 벌어졌다.
"무엇이든 하겠다고 하지 않았더냐."
황제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그저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는 호운을 혀를 차며 채근했다. 호운은 그 말에 정신을 차린 듯 황제의 등 뒤를 보았다. 그 뒤로 병사들에게 억눌러 새파래진 유란란과 황제를 죽일 듯 노려보는 복치운의 모습이 보였다. 이대로라면 복치운마저 해를 입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결국 호운은 고개를 떨궜다.
"병사들과… 동생들을 물려주십시오."
"짐에게 그것까지 요구하는 것이냐."
황제의 냉담한 반응에 호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차피 평소에도 다른 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방사를 벌이곤 하던 자이니, 이런 일은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호운은 달랐다. 다른 자들 앞에서 그런 일을 하는 것도 죽을 만큼 수치스러운데, 복치운이나 유란란의 앞에서 그런 짓을 할 자신은 없었다. 뭐라 말도 못하고 한참동안 고개를 떨구고 있는 호운을 가만히 보던 황제는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여관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등을 씌워라."
그 말에 여관들이 얼른 방안을 환하게 밝히던 호롱과 초에 등을 씌웠다. 방안 구석구석이 보일 정도로 밝았던 것이 순식간에 어슴푸레한 빛으로 바뀌자 황제는 지체 않고 호운을 일으켜 세워 방의 안쪽에 위치한 침상으로 이끌었다. 침상주변에는 얇은 막이 드리워있어 조명까지 어두워지자 유란란이나 복치운이 있는 방문쪽에서는 모습을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어리석은 이는 이 방 안에 없을 것이다.
그런 호운의 망설임과 달리 황제는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호운을 침상으로 이끈 후 평소처럼 호운을 침상으로 밀어 누이는 대신 호운을 침상아래에 앉히고 자신은 침상위에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
사실 한번 침상에서 토한 이후로도 황제는 몇 번이나 호운에게 이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호운은 매번 거부감에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였는데, 그때마다 황제는 화를 냈다. 하지만 딱히 강권도 하지 않았으니 어쩌면 침상에서 다시 토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거부하거나, 그때처럼 토하는 사태가 벌어지면 유란란에게 어떤 영향이 미치는지 알기에 호운은 침을 꿀꺽 삼키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 겹겹이 싸인 끈을 풀어내는 손가락이 서툴게 움직였다.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 같던 옷자락이 마침내 걷히고 반쯤 머리를 들어올린 성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뭘 하는 것이냐."
보고도 머뭇거리며 손도 뻗지 못하는 호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황제가 낮게 속삭였다.
"어두워서 그런 것이냐? 불을 밝히라 할까?"
황제의 말은 호운에게는 위협이었다. 결국 호운은 머뭇거리면서도 고개를 숙여 양물에 입술을 댔다. 이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이 같은 혐오감은 없을 텐데, 이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혐오감과 거부감이 들었다. 등줄기로 소름이 쭉 돋았고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이 맺혔다. 가까이서 풍기는 비릿한 수컷의 냄새에 당장이라도 토하고 싶은 구역질도 일었다.
그러나 호운은 그것을 참고 황제의 성기를 핥았다. 그리고는 자신이 경험한 것을 토대로 조심스레 혀를 놀렸다. 호운의 입술에 닿을 때부터 딱딱하던 것이 점차 힘을 가지고 서 가는 모습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자신이 제대로 하고 있는 듯해 호운은 조금 안심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꼿꼿이 일어난 성기를 호운은 뿌리부터 천천히 핥은 후 끝을 빨며 조심스레 입안으로 삼키기 시작했다.
일단 입안에 넣은 것 까지는 어찌 했는데 그 후에는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호운은 당황했다. 그때까지는 어찌 기억을 되살리며 노력했지만 이 후에는 어찌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언제나 이쯤이 되면 쾌감에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세세하게 무엇이 되었었는지를 기억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빨아야 하나, 아니면 진부용이 해 주었던 것처럼 빨았다 뱉었다 하여야 하나. 호운이 멈칫거리자 황제가 그를 재촉했다.
"뭘 하는 것이냐."
호운은 황제의 음성에 불쾌감이 섞인 듯해 놀라 다시 혀를 움직였다. 그러나 호운은 방중술에는 소질이 없었고 낯선 상황에 잔뜩 긴장해 일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그저 입에 문 채로 우물쭈물 눈치만 보는 호운의 태도에 황제는 낯을 찌푸렸다. 아슬아슬하게 차오른 쾌락이 더 큰 자극을 원하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호운의 태도에 안달이 났기 때문이다. 결국 황제는 혀를 차고 호운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윽!"
갑작스레 목구멍 안쪽까지 찌르고 들어오자 호운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황제는 호운의 머리를 강하게 움켜쥔 채 혀를 찼다.
"입에 좀 더 힘을 주어야지, 좀 더. 좀 더."
황제가 시키는 대로 힘을 주어도 안을 찔러오는 움직임 때문에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결국 황제는 호운에게 시키는 것을 그만두고 머리를 단단히 고정시킨 채 제멋대로 허리를 놀렸다. 안으로 깊숙이 찔러 들어왔다가 빠져나갔다 하는 감촉이 목구멍을 찌를 때마다 토기가 일었다. 그리고 점차 비릿한 것이 입안으로 스며들어 숨쉬기가 괴로웠다. 그러나 호운은 그저 인내하였다. 점차 격해지는 황제의 동작과 숨소리에 조금만 더 참으면 될 것이라고 스스로를 억눌렀다.
마침내 호운의 입안 깊숙이 박힌 성기에서 비릿한 것이 확 퍼져 나왔다.
"쿨럭, 쿨럭!"
기도로 넘어온 정액을 기침을 하며 호운이 토해냈다. 호운의 침과 뒤섞인 정액이 곳곳으로 튀어 황제의 옷자락을 더럽혔다. 그 모습에 황제는 미간을 찌푸리고 호운의 머리를 거칠게 틀어쥐었다.
"뱉어내다니. 네가 지금 죽고 싶은 게냐."
그리 말하며 호운의 머리 가죽을 뽑을 것처럼 잡아당기며 명했다.
"핥아라."
호운이 토해낸 정액이 곳곳에 튀어 더러워진 곳을 가리키자 호운은 머뭇거렸다. 그러나 곧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조심스레 튄 것들을 핥기 시작하였다. 호운의 혀가 탄탄한 아랫배와 성기주변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사이 황제의 중심은 다시 힘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호운은 힘을 찾는 중심에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눈에 띄는 곳은 모두 다 핥아낸 호운은 황제의 표정을 살폈다.
이리 했으니 란란이에게는 그러지 않으실 것이지요?
호운의 눈빛이 그리 묻는 것을 본 황제는 혀를 찼다. 그리고 얇은 막 너머에 대기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말했다.
"왕비를 진성왕부로 데려가라."
"황상!"
호운이 무심결에 황제의 옷자락을 잡고 매달렸다. 황제는 그런 호운을 보며 미간을 찡그린 채 말했다.
"네 노력을 가상히 여겨 결박은 하지 않으마. 허나, 왕비를 진성왕부로 보내는 것은 전부터 생각하였던 일이다. 지금 진성왕은 부황을 위한 불사를 하는 중요한 몸이다. 불사는 원래 여색을 멀리하는 것이 원칙이거늘 진성왕은 왕비에게 손을 대어 임신까지 시켰다. 그러니 앞으로라도 진성왕이 불사에만 전념하도록 너는 몸을 풀 때 까지 진성왕부에 머물도록 하는 것이 한 집안의 수장으로서, 그리고 황제로서 당연한 결론이 아니겠느냐."
황제는 자신이 많이 양보한다는 듯 말하였지만 결국 유란란을 인질로 삼겠다는 의사는 변함이 없었다. 호운은 그제야 황제가 어이해 유란란을 오늘 궁으로 불러들였는지 깨달았다. 유란란이 임신하지 않았어도, 그 술잔을 제대로 받았어도. 혹은 아무 일이 없었어도 황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유란란을 진성왕부에 묶어두려 했을 것이다. 모든 것은 그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황제의 의도는 호운의 행동으로는 변하지 않는 확고한 것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유란란은 그저 고개를 조아렸다. 그 뒤로 복치운이 가만히 서 있었지만,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얇은 막에 가려 호운에게 보이지 않았다. 호운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왕비 남매를 왕부로 데려가라."
황제의 명이 다시 떨어지자 병사들은 재빨리 유란란과 복치운을 둘러쌌다. 그리고는 그들이 무어라 할 틈도 없이 방 안에서 데려나갔다. 호운은 고개를 숙인 채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또 고개를 숙이는구나."
황제가 그런 호운의 턱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는 호운의 입가에 아직 남은 것을 손가락으로 훔쳐주고는 호운을 침상위로 이끌었다. 호운은 자신의 옷을 벗기는 황제의 손아래에서 그저 눈을 감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현실에 눈감는 일. 그것이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