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震翰 宣諭 四十三年 진한 선유 43년-
浩氏 二十三歲 23세-
항주에서 모습을 감춘 이래로 호씨의 행적이 묘연해졌다. 다만 천하의 기근과 약탈, 그리고 흉험한 사건이 이어지는 곳으로 호씨가 이동하였다는 추측을 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 동안 그가 도성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 확실한 것은 그가 사라진 기간 동안 도성에서는 태평성대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핀 산길을 터덜터덜 걸으며 호운은 멍한 눈으로 하늘을 보았다. 이틀 전 까지 억수처럼 내리던 비는 어느새 멎었고 하늘이 쨍쨍했다. 욱씬거리던 통증도 이틀이 지나자 많이 살만 해 졌다. 호운은 피곤하면 기슭을 찾아 잠들고 배가 고프면 산열매를 주워 먹으며 걸었다. 자신이 어디로 걷고 있는지도 모른 채 걷는 걸음이지만 호운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한참 걸음을 옮기던 호운은 산골 한 구석에 쪼그려 있는 두 명의 아이를 발견했다. 깊은 산골은 아니지만 마을의 흔적도 없는 이런 먼 산골에서 아이라니. 어쩐지 기묘한 느낌이 들어 호운은 아이들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호운이 십여장 거리로 접근하자 아이들도 호운을 발견했다. 열두어살 정도 먹은 계집아이와 열 살 정도 먹은 사내아이였다. 아이들은 호운이 접근하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다 큰 소리로 말했다.
"소, 손님이예요?"
계집아이의 목소리가 참으로 높고 고왔다. 호운은 어이가 없었다. 이런 산골에 손님이라니? 그러나 호운이 채 무어라 대답하기 전에 아이들은 재빨리 호운에게 다가와 그의 양손을 붙들었다.
"손님, 어서 오세요!"
그리고는 호운을 이끌고 산길을 걷기 시작했다. 여태 호운이 걷던 큰길과 달리 짐승이 만든 것 같은 소로(小路)를 따라 아이들이 걸었고 그 뒤로 호운이 따라 걸었다. 마침내 아이들은 소로 끝의 허름한 오두막에 도착해 호운을 돌아보았다.
"반시진에 세냥입니다 손님."
그리 말하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그리고는 손을 내밀었다. 호운은 아이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아이 중 계집아이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손님, 저는 처녀예요. 오늘이 첫 장사예요. 처녀를 세냥이 안을 수 있다면 남는 장사라구요."
아이의 말에 호운은 충격을 받았다. 아이는 지금 호운을 상대로 매춘을 권하고 있는 것이었다.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서 있던 호운은 이내 아이들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이런 일을 할 아이들이라 하기엔 아이들의 표정은 너무 굳어 있었다. 도저히 이런 일에 익숙해져 보이지 않았다.
그런 호운의 표정을 무어라 생각한 것인지 소녀는 초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면 두냥 정도도 괜찮아요. 손님, 이래 보여도 저 잘할 자신 있어요. 제 어미는 한때 왕의 애첩이 되어 귀비의 자리까지 올랐던 여자라구요."
왕이니 귀비니 하는 말에 호운이 움찔했다. 그러나 그런 호운의 반응을 아이는 자신의 말에 호응 한 것이라 여겼는지 아직 납작한 제 가슴에 호운의 손을 갖다대며 말했다.
"네, 손님? 한번 사 보세요."
아이의 가슴은 슬플 정도로 빈약했다. 여자의 가슴을 직접 만져본 것이야 어미를 제외하면 진부용의 가슴을 만진 것이 전부였기에 여자가 이토록 납작한 가슴을 가진 것을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 빈약하고 마른 몸을 가지고도 아이는 호운에게 필사적으로 아양을 떨고 있었고, 그 곁에 선 사내아이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운은 그들의 모습에 어린 날의 자신을 보았다. 살기위해 자존심도 팽개치고 수치를 참아야 했던 그 시절의 자신을.
"미안하지만 나는 돈이 없단다."
호운의 대답에 가슴을 들이대던 계집아이가 움찔했다. 그리고는 눈치를 보면서 호운의 손을 놓았다. 닳고 닳은 기녀였다면 여기서 호운에게 욕설이라도 퍼부었을 테지만 그 아이들은 그저 호운의 눈치만 살폈다.
"여행객, 아닌가요?"
"맨몸으로 나와 돈이 없구나. 미안하다."
호운은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듯 말하고 아이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 순간, 호운의 등뒤에서 꼬르륵! 커다란 소리가 터져나왔다. 호운은 저도 모르게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사내아이가 시뻘건 얼굴을 하고 제 배를 움켜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뭐, 뭘 보는 건가요?!"
부끄러운 것은 사내아이일텐데 오히려 계집아이가 큰 소리를 쳤다. 호운은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처박은 사내아이를 가만히 바라보다 계집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둘 다 차림은 그럭저럭 볼만했지만 얼굴이 까칠한 것이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한 듯 보였다.
"배가 고프냐?"
호운의 물음에 계집아이는 반응하지 않았지만 사내아이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곧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지만 그 얼굴에는 호운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다행히 호운은 야숙에는 매우 익숙해져있었다. 그는 근처 산길을 뒤져 산열매를 따다 아이들에게 일단 던져주고 토끼를 잡을 덫을 만들었다. 호운은 뛰어난 사냥꾼은 못 되었지만 중간은 갔고, 거의 인적이 드문 산길이라 그런지 토끼는 쉽사리 잡혔다.
호운은 잡은 토끼를 아이들에게 곧장 들고 가려다 생각을 바꾸어 일부러 아이들에게 가기 전에 죽였다. 자신이 예전에는 갓 잡은 토끼를 죽이는데 거부감을 느꼈기에 아이들도 그러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호운이 처음 산열매를 가져다 주었을 때만 해도 경계하는 표정을 짓던 아이들은 호운이 자리를 비운 사이 입가를 더럽히며 산열매를 흔적도 없이 먹어치웠다. 그들은 호운이 다시 나타나자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곧 그의 손에 들린 토끼를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부싯돌이 있니?"
"네!"
호운의 토끼를 멍하니 바라보던 사내아이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가져와 불을 피우렴. 불을 피우는 법은 알고 있지?"
호운의 말에 아이는 고개가 끊어질 정도로 끄덕이고 얼른 부싯돌을 가져왔다. 그 사이 호운은 토끼와 함께 주워온 마른 나뭇가지로 모닥불이 될 만한 모양을 잡아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칼 같은 것 있니?"
호운의 말에 계집아이는 잠시 경계하는 눈초리를 했지만 곧 포기한듯 순순히 자신의 치맛자락을 뒤졌다. 그러면서 계집아이가 품안에서 꺼낸 것은 손가락 두 개 길이의 단도였다. 간단한 단도였지만 거기에 음각된 모양새가 심상찮아 보통 물건은 아닌 것으로 보였지만 호운은 일부러 모른 척 하고 토끼의 껍질을 벗겼다.
일부러 호운은 땅을 파고 아이들에게서 등을 돌린 채 토끼를 손질했다. 그리고 토끼의 손질이 끝나자 재빨리 파낸 내장과 눈알을 땅에 묻고 핏자국도 희미한 토끼의 몸뚱이를 꿰었다. 그러는 사이 사내아이는 용케 모닥불을 피웠다. 호운은 그 모닥불에 토끼를 꿰어 기대었다. 그리고 자리를 비웠다.
호운은 부러 산길에서 한시진 정도를 헤매다 돌아왔다. 그 사이 토끼는 뼈만남아 앙상했고, 두 아이의 얼굴은 검댕이 묻어 엉망진창이었다. 그러나 아까전의 까칠한 기운은 사라지고 제법 혈색이 돌았다.
배가 불러서인지, 아니면 먹을 것을 줘서인지 아이들은 이제 제법 호운에 대한 경계가 느슨해져있었다. 그러나 그 느슨한 경계에 오히려 호운은 쓴웃음을 지었다. 세상에는 호운이 지금 베푼 호의처럼 작은 호의를 베푼 후 상대를 이용하려는 자들이 아주 많다. 호운은 그것을 호의로 베풀었지만,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언제부터 이곳에 살았니?"
호운의 물음에 계집아이는 잠시 망설이는 듯 했다.
"대답하기 힘들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너희들의 처지가 참으로 딱해 보여 물어 본 것이니까."
호운의 말에 계집아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호운은 혹여 그것이 계집아이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여 그리된 것인가 하고 우려했지만 곧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계집아이의 두 눈에서 별안간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누, 누님."
사내아이가 당황해 계집아이에게 매달렸다. 계집아이는 사내아이의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린 채 눈물을 흘렸다.
호운은 자신의 이 작은 호의가 눈앞의 아이의 무엇을 건드렸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가 호운의 한마디에 설움이 북받쳐 울고 있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하긴 언제가 되었든 무슨 상관인가. 이토록 이런 남매가 단 둘이, 몸을 팔겠단 결정을 할 때 까지는 순탄한과정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호운은 아이가 제 성이 풀릴 때까지 울도록 내버려 두었다. 한참동안 소리도 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던 아이는 이내 시원해졌다는 듯 크게 숨을 들이쉬고 호운을 보았다.
"어디로 가시는 길인가요?"
의외의 질문에 호운의 말문이 막혔다.
"차림을 보아 먼 길을 떠나는 사람 같지는 않은데 신발에 먼지가 잔뜩 묻었고 비를 맞은 흔적도 있네요. 거기에 돈도 없으니…계획된 여행은 아니겠군요."
아이의 영리한 지적에 호운은 감탄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자신같은 처지가 되어도 그리 비참하지는 않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어리석은 자신과 달리 영리한 아이니, 멍청한 선택을 할리 없다.
"그래. 네 말 대로 나는 갑자기 길을 떠났다. 목적지도 없지만 어쨌든 가야하는구나."
호운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어쩐 일인지 자신을 배신한 아내에 대한 기억은 길을 걸으며 어렴풋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한없이 자신을 향해 애정을 주던 모습 뿐이었다. 이래서 사람이 살아남는구나 싶기도 하고 그리해 자신이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는구나 싶기도 했다.
고작 스물세살이지만 호운은 이제 사람에게 질려있었다. 호운은 이대로 심산유곡에 틀어박힐까, 아니면 다시 천하를 유랑할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계집아이는 그런 호운의 속내를 짐작한 것 처럼 날카롭게 말했다.
"벌써 포기하지 말아요. 아직 젊잖아요."
호운은 허를 찔린 표정으로 아이를 보다 곧 짓궂게 물었다.
"그러면 너는 포기한 것이 아니냐? 네 나이 많아봐야 열두, 세 살로 보인다면 그 나이에 벌써 몸을 팔 결심을 하다니."
호운의 말에 계집아이는 빳빳하게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
"왜 그것이 포기하는게 되나요? 저는 몸이 여자의 가장 큰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아요. 지금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해 몸을 팔지만 저는 언젠가 제 몸을 갈고 닦아 모든 사내가 발밑에 무릎 꿇는 그런 여자가 될 거예요. 모두가 갈망하는 그런 여자. 제 어머니가 그랬던 것 처럼요.""진정 네 어머니가 왕의 귀비였느냐?"
호운의 물음에 계집아이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뉘인지 말할 수는 없지만 그건 사실이에요. 비록 억울한 누명을 쓰고 지금은 이 지경이 되었지만 저는 분명 남들보다 뛰어난 피를 타고 났어요. 그러니, 제 힘으로 다시 신분을 되찾을 거예요."
계집아이의 눈에는 묘한 열망이 이글거렸다. 이는 호운이 처음 보는 열기였다. 호운은 이 또래의 아이가 이만한 야망을 가지고 눈을 빛내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호운이 어렸을 때 본 동무들이야 고만고만한 처지의 아이들이라 제 부모 뒤 밖에 볼줄 몰랐고, 커서 본 기예단의 아이들은 이미 제 인생의 결정권을 잃은 아이들이었다. 그 후에 천하를 유랑하면서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는데 오늘, 호운이 상상치도 못한 맹랑한 꼬마를 만난 것이다.
호운은 제 주제는 생각지도 않는 아이의 말이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았다. 아이의 말을 들으면 정말 그리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진정 그리 될 것이라 믿느냐?"
"믿는게 아니라 그리 될 거예요. 그리 되게 할 거구요."
그저 허망한 계집아이의 발악이라 할 수도 있었지만 호운은 그 말을 듣고보니 정말 그럴것만 같았다. 아이는 제 말을 사람에게 신뢰감 있게 하는 묘한 재주가 있었다. 얼굴도 그럴듯한데 그런 재주까지 있으니, 제 말 처럼 모든 사내를 발 아래 무릎 꿇릴 힘을 가지게 될 지도 모른다.
호운은 돌연 치민 충동에 계집아이를 향해 물었다.
"나를 따라 나서겠느냐?"
아이는 잠시 호운을 판단하듯 눈을 굴렸다.
"나는 가진 것도 없고 네게 해줄 것도 없다. 세상 천지에 피붙이 하나 없고 집도 절도 없는 신세다. 하지만 너희 남매 둘 보다는 어른이라 잠시 세상의 방패막이는 되어줄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것으로 당신이 얻는 것은 무엇인가요? 돈? 아니면, 제 몸?"
계집아이의 노골적인 물음에 호운은 고개를 저었다.
"돈이야 벌면 되는 것이고 네 몸에는 관심이 없다. 내 아내는… 너보다 훨씬 아름다웠어. 만약 내가 미색을 탐하였다면 아내의 곁에 있었을 테지."
말을 하는 호운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계집아이는 고민하듯 눈을 굴리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호운을 보았다.
"아내가 있나요?"
"있었지만 이제는 없다. 이제는…."
호운의 대답에 계집아이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잠시 신세 지겠어요. 하지만 혹시라도 우리에게 해가 될것 같으면 당장 도망갈거예요."
당당한 계집아이의 말에 호운은 웃었다.
"그리 하려무나."
계집아이의 이름은 유란란, 사내아이의 이름은 복치운이라 하였다. 남매이지만 성씨가 다른 그들에 대해 호운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저의 이름을 가르쳐주었다. 말을 하면서도 제 이름을 누군가 불러주던 것이 까마득해 이제는 저도 제 이름인데도 낯설었다. 실상 이름을 가르쳐 주어도 유란란에게 제 이름이 불릴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런 호운의 생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유란란은 호운을 "오라버니"라고 불렀다. 호운의 이름조차 부르지 않은 것은 형식적으로 호운과 유란란, 복치운 세사람은 세상을 유랑하는 남매처럼 행세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아이들을 데려 걷는데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호운은 아이들과의 생활에서 묘한 만족을 얻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누군가를 지키고 있다는 충족에서 온 만족이었다. 생전 누군가를 지켜본 것은 이 아이들이 처음이었고, 제 손길이 끊기면 당장 내일조차 위태로운 존재들도 이 아이들이 처음이었다.
호운은 내가 가지고 싶었던 것은 가족이었을까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알 수 없었다. 다만, 가끔씩 진부용이 어이 살고 있을지가 생각날 뿐이었다.
아이들의 성장이 빠른 만큼이나 그들과 함께하는 세월은 빨리 흘러갔다. 처음에는 가슴도 흔적뿐인 꼬마였던 유란란은 순식간에 포동포동 살이 올라 어른이 되어버렸다. 그 변화는 호운조차 당황스러울 정도로 빨랐다. 그리고 그 변화만큼이나 유란란은 아름다워졌다. 굳이 제 어미가 왕의 귀비였다는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혈통이 귀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다. 더욱이 복치운은 나날이 성장해 열여섯이 되자 호운과 엇비슷한 키가 되었다. 체구도 당당한것이 어릴적의 그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훤칠한 체격이 되어 유란란과 나란히 서면 남매가 아닌 연인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둘은 여전히 좋은 남매였고, 호운 또한 그들 남매와 한가족 처럼 살았다.
호운은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며 여러 가지 일을 했다. 짐꾼 노릇도 해보고 장사꾼의 보조 역할도 해 보고, 돈이 되는 것이라고는 몸을 파는 것 말고는 다 해 보았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떠돌다 호운이 정착한 것이 있으니 바로 금(琴)을 뜯는 일이었다. 소싯적 어미가 금을 뜯는 것을 곁눈질로 본 것이 의외로 도움이 되었다. 이래저래 잔치에서 금을 뜯는 호운을 따라다니며 눈동냥으로 춤을 배운 유란란은 제법 나이가 차자 호운의 연주하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유란란이 추는 춤에는 사람의 눈길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었다. 이는 유란란 본인이 타고난 매력일수도 있었고 단지 춤에 재주가 뛰어나 그런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유란란의 춤이 보기 좋은 것은 사실이었고 호운과 유란란이 함께 연주를 하며 춤을 추자 돈을 버는 일은 예전보다 손쉬워졌다.
그러나 유란란은 거기 안주하지 않았다. 세월이 지나며 제 몸이 무르익기를 기다린 유란란은 열여덟이 되던 해부터 본격적으로 제 야망을 펼치기 시작했다. 제 처녀성을 황금 오십냥에 팔아치우는 수완을 발휘하는 것을 시작으로 유란란은 제 미모와 몸을 이용해 사내들에게서 돈을 뜯어냈다. 가끔은 그 사내의 첩노릇을 하며 집에도 들어가 살았지만 그녀는 대부분 짧은 관계를 원했다. 가끔 관계가 길어지면 그 부인들에게 수모를 당했기 때문이다. 호운은 그런 그녀에게 단지 돈이 목적이라면 자신이 더 벌겠으니 굳이 그런 일 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 만류했지만, 그녀는 돈이 아닌 경험을 위해 이 일을 한다 말하고 호운의 요청을 거절했다.
시일이 지나며 유란란이 노리는 상대는 점차 대범해졌다. 지방의 중신들을 시작하여 황족의 먼 친척과도 관계를 맺어 금전이 그야말로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러나 호운은 차마 그 금전을 사용할 수가 없어 금전은 쌓여만 갔다.
그리고 마침내 만냥이라는 거금이 마련된 순간 유란란은 쌓인 금전으로 값비싼 패물과 장신구를 사들여 제 몸을 꾸미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호운에게 말했다.
"도성으로 가요."
도성으로 가자는 유란란의 제안에 호운은 거절했다. 어쩐지 도성에서 까지 유란란이 저런 행동을 했다가는 위험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유란란은 호운의 거절에 흔들리지 않고 재차 도성으로 가자고 호운을 졸랐다. 호운은 몇 번이나 그런 요청을 거절했지만 그럴때마다 유란란의 눈빛은 사나워졌다.
결국 호운이 수긍하지 않아도 저 혼자 도성으로 향할것이라 엄포를 놓는 유란란의 말에 호운은 백기를 들었다. 대신 호운은 유란란에게 말했다.
"도성에 있는 시간은 딱 100일. 그 이상은 안돼. 약속 해 줄 수 있어?"
호운의 말에 유란란은 크게 기뻐하며 수긍했다.
그리하여 호운의 나이 서른 두 살에 처음으로 도성의 땅을 밟았다.
호운이 그렇게 도성으로 향하던 시기, 도성에는 일대 파란이 일고 있었다. 금상(今上)이 지병으로 몸져 누운 것이다. 다행히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은 아니었지만 정무를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금상으로 인해 조정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조정 대신들은 누가 금상을 대신해 정무를 보게 될 것인지에 대해 눈치를 보기에 바빴다. 지금 금상을 대신해 대리청정할 만한 인물은 진성왕과 오왕 밖에 없었는데, 정통성으로 따지자면 황후 소생 진성왕이었지만 능력으로는 오왕이 앞섰다. 때문에 대신들은 자리에 누운 금상이 누구를 자신의 대리로 지목할지에 주목하였다.
결과는 어렵지 않게 났다. 황제는 자리에 누운지 이틀도 되지 않아 자신의 봉토에 있는 오왕을 도성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뻔히 도성에 자리를 잡고 있는 진성왕을 놔두고 멀리있는 오왕을 불리들이는 목적이 너무나 뻔했다. 그에게 정무를 맡기려는 것이다. 이에 처음부터 오왕을 지지하던 대신들은 환호를 울렸고 그를 멀리하던 대신들은 재빨리 오왕에게 붙으려 아우성이였다.
마치 모두가 이 소식을 반기는 듯 바삐 돌아가는 정국이었지만 이 소식에 길길이 날뛰는 자들도 있었으니 황후와 진성왕이었다. 공식적으로는 오왕 또한 황후 소생이라지만 제 배를 아파 낳은 진성왕이 어디 오왕과 비견되겠는가. 황후는 오왕이 도성에 도착하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고 진성왕 또한 흔들리는 관리들을 불러 저야말로 유일한 황실의 적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다 보니 조정이 둘로 나뉘어 오왕파와 진성왕 파가 대립하기 시작했고 살기섞인 긴장감이 도성 전체를 감쌌다.
오왕이 도성에 도착하기만 하면 거친 비바람이 몰아 칠 것이라는 것은 누가 봐도 뻔했다. 그리고 그 비바람이 어느 한쪽이 모조리 휩쓸려 나갈 때 까지 절대 멈추지 않을 광풍이 되리라는 것도, 너무나 확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