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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震翰 宣諭 四十三年 진한 선유 43년

浩氏 二十三歲 23세

항주에 도착한 호씨는 주가 주인 진씨의 딸 부용의 미색에 혹하여 그녀를 겁간하였다. 순결한 부용은 비록 자신을 겁간한 자이나 순결을 바친 자이니 호씨를 지아비로 섬겼다. 그때 그녀의 나이 열여섯이었으니, 한창 꽃피는 나이였다. 그러나 호씨는 진부용의 순결을 더럽힌 것으로 모자라 연일 그녀를 학대하였다. 

주가에는 진부용의 울음이 그칠 날이 없었는데 진부용을 농락하는데 진력이 난 호씨는 그 울음이 지겹다며 진부용의 목을 잘랐다. 진부용의 잘린 목에서 피가 콸콸 치솟자 호씨는 박수를 치다 그녀의 양손을 연달아 잘랐다. 호씨는 죽어가는 진부용마저 학대를 하며 기뻐하다가 관원들이 달려오자 얼른 달아났다.

한편 호씨가 제 아내를 죽이기 전날 항주에는 큰 흉사가 벌어졌다. 당대의 대 석한 곡무용과 남궁지우, 부령 세사람이 한날 한시에 참살을 당한 사건이 그것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조정대신들이 저마다 파를 갈라 다툼을 벌이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날 항주에서 목숨을 잃은자만 백명이 넘고 그 여파로 줄줄이 고관대작들이 목숨을 잃었으니, 그야말로 조정에 피바람이 불었다. 이 모든 것이 호씨라는 존재 하나로 인해 벌어진 흉사이니 얼마나 흉험한 인사인지 짐작할 따름이다.

기예단을 떠난 호운은 다시 천하를 떠돌기 시작했다. 처음 한번 보다는 경험이 있는 두 번째가 쉬웠다. 돈은 없었지만 호운은 젊었고 성격이 긍정적이라 어디든 잘 적응하며 살 수 있었다. 돈이 필요해지면 잠시 일을 해 돈을 벌었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어디론가 떠났다. 그렇게 부평초처럼 떠돌던 호운은 풍문에 전쟁이 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한번 물러갔던 요족이 다시 침입해와 벌어진 전쟁은 북서의 전체를 휩쓸고 돌았다. 때문에 호운의 행보도 전쟁이 벌어진 북서를 피해 남쪽으로, 남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세월이 흘러 전쟁의 소식도 잠잠해졌을 때 호운은 향락의 도시로 유명한 항주의 한 주가에 정착했다.

호운이 그 주가에 정착하게 된 계기는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 주가는 수로를 따라 뱃놀이를 하는 풍류객들을 상대로 술을 파는 곳이었는데, 술병을 나르던 주인 영감이 허리를 다쳐 끙끙거리는 것을 도운 것이 계기였다. 우연한 계기였지만 그 일로 호운은 주인영감의 집에 며칠간 신세를 지게 되었는데 주인영감에게는 아직 어린 딸이 하나 있었다. 진부용이라는 그 아이는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아직 열여섯 어린 나이였지만 눈부신 미모를 가지고 있어 장래가 촉망되는 아이였다. 그런데 그런 아이가, 우연히 자리를 잡은 호운에게 한눈에 반해 사랑을 고백한 것이다.

호운은 난생처음 받아보는 사랑의 고백에 마음이 흔들렸다. 상대가 자신보다 일곱 살이나 어린 여자아이였지만 눈부신 미모를 가진 아이가 고백을 하자 사내로서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호운은 자신의 신세를 생각하며 아이를 거절했다. 이미 더러워진 몸 운운을 하며 아이를 멀리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가진 것이 없는 자신의 신세가 아이에게 별달리 해줄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부용은 물러나지 않았다. 순종적이기 보다는 맹랑한 성격이었던 그녀는 자신의 집이 주가라는 점을 백분 활용했다. 진부용은 독하지만 마시기 쉬운 술을 호운에게 권했다. 그것이 독한 술이라는 것을 모른 채 한잔 두잔 받아든 호운은 어느새 만취했다. 진부용은 그가 만취한 틈을 타 호운과 동침에 성공했다.

호운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모든 일이 끝나있었다. 침상은 진부용과 자신의 체액으로 더럽혀져 있었고 진부용의 하얀 다리에서는 처녀를 잃은 것을 뜻하는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미 그녀는 호운에 의해 순결을 잃은 것이다. 결국 호운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받아들여야했다.

시작은 억지로 부부의 연을 맺은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래도 호운과 진부용의 생활은 나름 행복했다. 진부용은 호운을 열렬히 사랑했고 그의 사랑을 받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생전 처음 자신을 위해 온전히 열정을 다하는 사랑을 받아본 호운은 당황하면서도 그녀의 애정에 길들여졌다. 호운보다 일곱 살이나 어리면서도 진부용은 때때로 호운의 누이같았고 어미 같았다. 그런 진부용의 애정에 호운은 잃은 모성에게서 받은 상처를 점차 치유해 갈 수 있었다.

"그럼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이제는 제법 아내다움이 몸에 익은 진부용이 집을 나서는 호운을 배웅했다. 호운은 최근 본격적으로 자리보존하고 누운 장인을 대신해 풍류객들에게 술을 날랐다. 배가 출발하는 선착장은 보통 몇 군데로 정해져 있었기에 오늘 호운이 하는 일은 수레에 술을 실어 그 선착장에 가져다주는 것으로 끝이 날 터였다. 호운은 진부용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최근에는 봄 분위기가 완연한 것이 선선하면서도 따스한 날씨가 생활하기에 좋았다.

수로를 따라 물 냄새를 마시며 호운은 천천히 수레를 끌었다. 항주에 자리를 잡아 일을 하는 동안 그의 표정은 예전보다 많이 느긋해져 있었다. 그것이 일이 몸에 익어서인지 아내 진부용덕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예전보다 행복하다 느끼는 것은 사실이었다.

"어이 호씨, 왔는가!"

오늘 술을 배달할 선착장은 주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호운은 수레를 끌고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선착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선착장에 도착하자마자 배를 빌려주어 돈을 버는 선주(船主) 남궁수가 호운을 반겼다. 그는 이쪽 선착장의 배 절반 정도를 가진 거부인데도 불구하고 이렇듯 매일매일 직접 선착장에 나서 확인하는 부지런한 자였다. 호운은 남궁수에게 목례하고 물었다.

"어제는 술이 잘 팔렸습니까?"

"한 병만 남기고 다 팔렸네. 과연 진노인의 술이라고 다들 칭찬이 자자하더군."

비록 자신이 담은 술은 아니었지만 장인이 담은 술이 칭찬을 받자 절로 호운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호운은 수레에 실어 온 술단지를 내리고 한구석에 쌓인 빈병을 실었다. 보통은 술을 팔면 병이 돌아오기 힘들지만 뱃놀이를 위해 팔리는 술은 대부분 빈병이 돌아와 병제작 비용을 절약시켜 주었다. 호운은 꼼꼼하게 빈병을 싣고 남궁수에게 목례를 하고 선착장을 뒤로 했다. 

갈 때 보다 수레는 가벼워졌지만 주머니가 묵직해져 호운의 입에서는 작은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봄이 된 항주는 풍류객들의 발길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밤만되면 항주의 수로가 막힐 정도로 뱃놀이 인파가 붐볐고 그 뱃놀이 인파를 상대로 장사를 하는 노점들이 항주의 밤을 떠들썩하게 했다. 원래 기루나 뱃놀이로 유명해 일년 내내 객지인들이 붐비는 항주지만 봄처럼 낯선 사람이 많은 때도 드물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던 호운은 멀리서 보이는 얼굴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멀어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낯익은 얼굴이었다. 그 낯익은 얼굴은 2층 객잔의 창가에 서 있었는데 점점 다가가자 윤곽이 뚜렷해졌다.

"!!!"

호운은 저도 모르게 경악성을 울렸다. 분명 그것은 융이었다. 기예단의 폭군 융, 그가 틀림이 없었다. 호운이 기억하던 융 보다 한층 덩치가 좋아졌고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비싼 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분명 융이었다. 호운은 멍하니 그 자리에 선 채 객잔 창가에 선 융의 모습을 보았다. 이런 곳에서 융을 보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그 이전에 융이 살아있으리라 짐작조차 못했다.

융은 오왕의 병사를 죽였다. 그때도 명성이 자자했고 지금은 요족의 침공을 막은 영웅으로 추앙받은 오왕의 병사를 죽인 죄인이었다. 마지막으로 호운이 그를 보았을때 그는 우리 안에 갇혀 있었다. 오왕이 그를 벌하겠다는 의사가 분명히 보이는 모습이었건만, 지금 융은 너무나 멀쩡한 모습을 하고 객잔의 창에 기대 서 있었다.

'그저 닮은 다른 사람일까? 아니야…분명 융이야.'

호운이 멍하니 넋을 잃고 융을 바라보는 가운데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던 융이 호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 정도 거리고 있었지만 호운은 일순, 융과 눈이 마주쳤다 생각했다. 그리고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심장이 미친듯 뛰었다. 호운이 죄를 지은 것은 없건만 어쩐지 융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꺼림칙했다. 그것이 과연 자신의 과거를 제 입으로 폭로한 일 때문인지, 아니면 융에게 덮쳐질 뻔 한 것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융의 눈앞에서 사내에게 농락당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호운은 차마 융과 눈을 마주칠 수 없어 고개를 숙였고 한참이 지나 고개를 들어보니 객잔 2층의 어디에도 융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융의 모습이 사라졌다는 것을 확인한 호운의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어쩐지 그대로 서 있을 수가 없어 비틀거리던 호운은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주가로 향했다.

"다녀오셨… 안색이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무슨 일 있어요?"

웃으며 호운을 반기던 진부용은 새파란 얼굴을 하고 돌아온 호운을 보며 당황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호운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표정을 지으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미소를 지을수가 없었다.

"아니야, 그저 조금 피곤했나봐. 좀 쉴게."

호운은 호들갑을 떠는 진부용을 떨치고 도망치듯 방 안으로 들어갔다. 심장이 도무지 진정되지를 않았다. 숨을 몇 번이나 내쉬었다 들이쉬었다를 반복하던 호운은 침상에 쓰러지듯 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부용이 슬그머니 방 안으로 들어왔다.

"많이 피곤해요?"

걱정스러운 진부용의 표정에 호운은 미안한 마음이 들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그냥 한숨만 잘게."

"그래요."

진부용은 호운의 말에 미적지근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애써 평소처럼 밝은 미소를 짓고 말했다.

"그럼 푹 쉬세요. 저녁에 깨울게요."

"응. 미안해."

진부용이 나서고 혼자가 된 다음에야 호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융 때문에 이리 위축되어 있는 마당에 진부용의 앞에 있는 것이 한없이 꺼림칙했기 때문이다. 진부용이 완전히 사라진 후 호운은 어지러운 두 눈을 억누르고 애써 잠을 청했다.

지금 자신은 단지 피곤할 뿐이다, 스스로를 그렇게 납득시키면서.

그날 밤 호운은 오랜만에 아내 진부용과 잠자리를 함께했다. 소싯적의 충격 때문인지 호운은 잠자리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가 아내와 잠자리를 하는 횟수는 한달에 많아 봐야  두세번, 그나마도 아내 진부용이 적극적으로 매달려 이루어지곤 했다.

진부용은 호운의 허리를 양 다리로 단단히 감싼 채 적극적으로 허리를 흔들었다. 이미 단단하게 결합된 두 사람의 행위는 진부용이 이끌어가고 있었다. 허리를 흔드는 반동으로 눈앞에서 풍만한 유방이 흔들리는 모양을 보고도 호운은 흥분보다 거부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호운의 아내였고, 아내인 그녀에게 창피를 줄 수는 없었다.

호운은 아내의 부드러운 가슴에 입술을 대고, 아내의 작은 허리를 감싸 쥐었다. 호운의 가벼운 행동에도 진부용의 붉은 입술에서는 자지러지는 교성이 터져나왔다. 호운은 자신이 느낀 고통 때문에 진부용을 강하게 억압하지 않았지만 진부용은 언제나 호운에게 자신을 거칠게 다루어 달라고 요구했다. 

진부용은 미친듯이 허리를 흔들며 호운을 재촉했다. 호운은 마지못해 진부용의 가슴을 강하게 그러쥐고 허리를 움직이던 것을 격하게 바꾸었다. 철벅거리는 물소리와 진부용의 흥분한 외침이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흥분한 진부용이 머리를 흔들며 호운의 가슴에 입을 맞추며 그의 어깨며 등에 손톱을 세웠다.

"아, 아-아아!"

짧게 끊어지는 비명을 내지르고 진부용이 절정에 달했다. 아직 호운은 채 절정에 다다르지 못했지만 진부용은 전신에 땀을 흘리며 파르르 경련했다. 자신이 만족을 못해도 호운은 이것으로 되었다 생각하며 결합을 풀었다.

"…그만둘거예요?"

쾌감에 늘어져 있던 진부용이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호운을 느끼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물었다. 호운은 대답대신 진부용의 가슴에 입을 맞추고 침상에 던져놓았던 옷을 걸쳤다. 난잡한 모양으로 침상에 늘어져있던 진부용은 팔꿈치로 상체를 세우고 자신의 하체와 호운의 하체를 번갈아 보았다. 그녀의 하체는 자신이 절정에 다다르며 흘린 애액으로 번들거렸지만 거기에는 사내가 남긴 흔적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아직 절정을 느끼지 못하고 서서히 경도(硬度)를 잃어가는 호운의 성기를 보면 확실한 일이었다. 비단 이것은 오늘만의 일이 아니었다. 처음 그 일이 있고 서로 부부의 연을 맺은지 1년. 아직 호운은 진부용의 몸으로 절정을 느낀 적이 없었다. 

진부용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 채 추슬러지지 못한 호운의 하체를 바라보다 갑자기 자세를 낮춰 호운의 성기를 입안에 집어넣었다.

"부, 부용!"

진부용은 놀라 뒤로 물러나려는 호운의 성기에 이를 세웠다. 그 감촉에 호운이 놀라 굳어지자 다음은 그녀의 뜻대로였다. 그녀는 익숙하게 호운의 성기를 빨고 입안에서 조였다. 마치 성행위를 하듯 조이고 빨고를 반복한 끝에 그녀의 입안에서 호운이 절정에 달했다. 진부용은 호운이 토한 액체를 삼키며 숨을 몰아쉬는 자신의 남편을 보았다. 절정을 느낀 후 멍해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편이, 연상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워 보였다.

"괜찮아요, 언젠가는 같이 할 수 있을 거야. 당신도 나를 사랑하지요?"

진부용의 물음에 멍한 눈을 하고 있던 호운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진부용은 고개를 끄덕이는 호운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생긋 웃었다. 그 입술에서 전해지는 묘한 비릿함에 호운은 저도 모르게 거부감을 느꼈지만 그것을 진부용에게 표현하지는 않았다.

융을 본 이래로 한동안 호운은 주변을 경계하는 자세로 걸어 다녔다. 그러나 융을 본 것은 그날이 최초로 최후였다. 항주가 넓어서 그러하기도 하겠지만 융을 발견한 그 객잔 근처에서도 융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처음 하루 이틀, 그리고 그 다음날 까지는 전신에 긴장감이 넘쳤다. 그러나 나흘을 지나면서 슬슬 긴장은 온화되었고 열흘이 흐르자 융을 보았다는 것 조차 완전히 잊어버릴 정도였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호운이 경계하지 않을 때 사단이 난다는 것은 어태 호운의 인생을 보면 명확했다. 마찬가지로 호운이 융에 대한 경계를 잃은 열흘째 되던 날. 융은 호운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수로를 산책하던 호운은 자신의 앞에 선 융의 모습에 경직되었다. 이번은 전과 달라서, 멀찍이 떨어져 있거나 한 것이 아니었다. 거의 네, 다섯 걸음을 두고 호운과 대치한 융은 정확히 호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운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융을 보았다. 어쩌면 상당히 바보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입을 쩍 벌린 채 그저 융만 바라보는 호운의 모습은 말이다. 그러나 융은 그런 호운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오랜만이군."

융의 목소리는 예전보다 한층 낮아져 완연한 사내의 목소리 같았다. 하긴 그도 이제 열아홉살이니, 더는 아이라 할 수 없는 나이다. 마치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것처럼 태연한 융의 인사에 호운은 경직되어 대답할 수 없었다.

"이런 곳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그러니, 같이 차나 한잔 마실까?"

예전의 융이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세련된 언동으로 융이 호운을 권했다. 호운은 홀린 것처럼 융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지금의 융에게서는 예전의 위험한 냄새가 풍기지 않았던 것이 그 제의를 받아들인 결정적 이유였다.

"철관음 두잔 주게."

근처에 있던 다관에 곧장 들어간 융은 개인실을 요구했다. 그런 융의 태도는 명령하는데 익숙해진 사람처럼 보였고, 더더욱 예전의 융과 차이가 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점소이가 차를 날라오자 융은 익숙한 태도로 동전을 튕겨 준 후 문을 굳게 닫았다. 호운은 상대가 예전에 자신을 덮치려 했던 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다지 경계하지 못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융이 예전과 달랐기 때문이다.

예전의 융은 근처에 가기만 해도 살이 에일듯한 냉기가 풀풀 흘렀다. 조금만 수가 틀리면 사람을 죽일 듯 노려보았고 실제로 반 죽도록 패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의 융은 무언가 고요한 기세가 있었다. 이것은 융이 어른이 되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단지 예전처럼 호운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인지 호운은 판단할 수 없었다.

"살아있었군."

호운이 겨우 입을 열어 한 말은 그런 거였다. 사실, 그게 호운의 솔직한 감상이기도 했다. 호운의 말에 융은 피식 웃었다.

"왜. 죽었으면 했어?"

심술궂은 어조는 예전의 융 같았지만 그 소리마저 묵직한 것이 딴 사람 같았다.

"아니. 그냥…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호운이 변명하듯 대답하자 융이 다시 피식 웃었다.

"뭐, 그랬을 수도 있었지. 그렇지만 아직 살아있어. 그것도 아주 잘."

"그런 것 같네.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야."

호운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사실 호운은 융과 이야기를 나눌만한 것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융과 호운의 공통 화제라고 해 봐야 기예단 정도였는데 기예단 시절 호운과 융의 사이는 최악이었고 이별도 최악이었다. 당연히 더 할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그것은 융도 마찬가지였는지, 호운의 말을 끝으로 그 또한 입을 다물어 버렸다. 방 안에 묘한 침묵이 감돌아 호운은 자리가 불편해 견딜 수가 없었다. 어째서 자신이 융을 따라오겠다고 한 것인지 후회가 일었다.

그러나 융은 마치 신기한 것을 보듯 뚫어져라 호운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를 어떻게 봐도 사내의 얼굴이고 3년 전에 지겹도록 본 얼굴일 텐데도 계속해 호운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만에 융이 입을 열었다.

"어디 한구석 변한 게 없군."

융의 말에 호운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얼굴을 쓸었다. 변한게 없는 걸까? 스스로는 잘 알 수 없지만 타인이 융이 그렇다니 그런 걸지도 모른다. 융은 그런 호운을 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호운은 그 미소에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호운은, 융이 이리 웃는 것을 생전 처음 보았다. 그가 여태 본 융의 미소는 타인을 비웃거나 괴롭힐 때 짓는 잔인한 미소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융은 분명 제대로 웃고 있었다.

"그렇게 긴장 하지마. 그냥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워 말을 걸었던거 뿐이니까."

융의 부드러운 어조에 이끌리듯 호운이 입을 열었다.

"기, 긴장한 게 아니라 놀라서… 너, 전에는 그렇게 안 웃었으니까."

더듬거리며 호운이 말하자 융이 다시 피식 웃었다.

"그때는 나도 어렸으니까."

"그래…."

"사실 열흘 전에 너를 봤는데 말이야."

융의 말에 호운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아무래도 그날 융이 자신을 보았다 생각한 것이 호운만의 착각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때 말을 걸고 싶어 뒤를 따라갔는데 보니까 어떤 여자가 너를 반기더군. 태도를 보아 아내 같던데…."

"어, 내 아내야."

얼떨결에 호운이 대답하자 융이 말을 이었다.

"네가 혼자 산다면 모르지만 아내가 있는데 내가 나타났다가 혹시 난처해 질까 싶어 말을 걸 수가 없었어."

융의 말에 호운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은 융이 호운을 배려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융은 호운의 놀란 표정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오늘 이렇게 말을 할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

"어, 그래."

"그런데 말인데, 너. 요즘 주가 일을 하나보지?"

"응."

호운이 대답하자 융은 마침 잘 되었다는 듯 말했다.

"사실 오늘 말을 건 것은 일을 부탁하기 위해서야. 오늘 내 동료들이 뱃놀이를 하게 되었는데 술이 필요하거든."

"술? 어떤 술?"

"좋은 것일수록 좋아. 그리고 많을수록 좋고. 그걸 네가 가져다 줬음 하는데…. 가격은 네가 부르는 대로 줄게."

융의 말에 호운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지 융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모조리 예상외의 것이었다. 융의 제안을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는 호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주면 나야 고맙지. 그래, 언제 어디로 가져다 주면 돼?"

"술시 초(저녁 7시)에 남쪽 선착장에 가져다주면 돼. 배가 모두 열대라 나눠 싣는데 시간이 좀 걸릴거야."

"알았어. 최대한 많이 가져다 줄게."

호운이 겨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융도 마주 미소를 지었다. 3년만의 재회가 이리 온건한 것이 될 것이라고는 3년 전 그날에는 예상치도 못했다.

그 후로도 호운은 융과 몇 마디인가 더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다. 융과 나눈 대화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온화하고 온건한 대화였다. 과연 이 자가 내가 아는 융이 맞는 것일까 호운이 의심할 정도였다. 그러나 융은 융 본인이 맞았고, 기예단의 폭군이던 그 소년이 맞았다. 다만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었을 뿐이다.

융과 이야기를 나눈 후 호운은 재빨리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대량으로 주문을 받은 것을 말하고 술을 준비했다. 이미 융과 만났던 것이 신시초쯤이었기에 지금부터 준비해야했다.

겨우 유시 초쯤에 준비를 마친 호운은 나갈 차비를 했다. 그래도 손님들이 볼 것이기에 옷차림을 대충 하고 나갈수는 없다. 마침 아내 진부용이 준비해둔 깨끗한 경장이 있어 호운은 그것을 입고 나가리라 마음을 먹고 걸치고 있던 옷을 벗었다.

그때, 호운이 옷을 갈아입던 방으로 진부용이 들어왔다. 어차피 부부지간이니 상반신 알몸 정도야 부끄러울 것이 없었지만, 분명 저녁을 준비한다며 부산을 떨던 그녀가 방안으로 들어온 것이 의아했다.

"부용?"

의아한듯 호운이 그녀를 부른 순간, 갑작스레 진부용이 호운의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그 기묘한 행동에 호운이 의아해 한 것도 잠시, 그녀는 재빨리 그의 바지춤을 풀어 호운의 성기를 입에 물었다. 그 행동에 당황한 호운이 그녀를 밀치려 했지만 이미 익숙해진 그녀의 입 안에서 호운의 성기는 순식간에 힘을 얻어갔다.

진부용은 호운의 성기가 단단해지자마자 자신의 입에서 뱉고는 호운을 침상에 밀어 쓰러트리고 그 위에 자리잡았다. 그리고는 자신 또한 옷은 벗지도 않은 채 속옷만 벗어 호운의 성기를 받아들였다.

"!!"

호운의 짧은 탄성과 진부용의 교성이 겹쳤다. 따스하고 매끈한 그녀의 몸은 호운을 느긋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느긋했던 것은 시작의 잠시 뿐, 그녀는 곧 격하게 허리를 흔들면서 호운을 몰아쳤다. 그녀가 호운보다 격한 성교를 좋아한다는 것은 미리 알고 있었지만, 지금 그녀는 평소와 달랐다. 호운을 조이는 힘이 평소보다 심해 호운은 점점 숨이 찼다.

곧 진부용은 평소의 흥분상태에 도달해 교성을 흘리며 호운의 가슴을 물어뜯는 것처럼 빨았다. 그리고 그의 어깨며 등에 손톱을 세웠다. 갑작스레 시작한 성교였지만 평소보다 강한 아내의 힘에 휩쓸린 호운은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 흥분을 느끼고 아내의 품안에서 절정을 맞이했다. 동시에 진부용이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호운의 품 안으로 푹 쓰러졌다.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가 방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호운은 자신의 심장이 터져나갈 듯 뛰는 감각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드디어…."

진부용이 감동한 것처럼 중얼거렸다. 실제로 흥분해 발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있었다.

"기뻐요."

진부용은 자신이 긁어 상처가 난 호운의 어깨를 핥으며 황홀하게 말했다. 그러나 호운은 거기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천정만 보고 있었다. 여자의 몸에서 처음 느낀 절정에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진부용은 멍한 호운을 보고 킥킥 웃으며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좋았어요?"

진부용이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물어오자 호운이 저도 모르게 벌개진 얼굴로 외면했다. 그러자 진부용은 까르르 웃으며 호운의 몸 위에서 자신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속옷을 입고는 호운의 배를 손가락으로 훑으며 말했다.

"얼른 준비하고 다녀오세요. 기다릴테니까."

평소에는 일이 끝난 다음에도 끈적거리던 진부용과 사뭇 다른 태도였지만 첫 경험이 넋이 나간 호운은 그런 것을 눈치챌 겨를이 없었다. 호운은 진부용이 나간 후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부스스 나갈 차비를 마쳤다.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이 진정되지를 않았다.

호운은 둥실둥실 떠오르는 것 같은 기분으로 선착장으로 향했다. 심장이 자꾸 쿵쾅쿵쾅 뛰고 머릿속으로는 진부용의 모습이 떠올랐다. 여태는 죄악감이나 성교에 대한 부정적 의식 때문에 온전히 흥분을 느끼지 못했었다. 그러나 오늘은 어떠했나. 급하고 앞뒤 맞지 않는 성교였지만 이만큼 온전히 흥분과 만족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멍한 얼굴로 진부용을 떠올리던 호운은 곧 놀란 표정으로 화들짝 고개를 저었다.

길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모두 제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손가락질 할것만 같았다. 호운은 자꾸만 멍해지려는 머리를 애써 질타하며 선착장에 도착해 융이 말한 배를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첫 배가 도착했다. 융이 말한 대로 노란 깃발에 오(吳)라는 글귀가 쓰여있었다. 호운은 술을 나르기 위해 준비를 했다. 그런데 호운의 예상과 달리 첫 배에서 일꾼들이 내렸다. 그들은 호운이 나르려던 술병을 냉큼 뺏어들고 자신들이 배에 올리기 시작했다.

"서대인께서 술을 싣는 일은 우리가 하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서대인이 아는 분이라고 쉬게 해 드리라 했습니다. 빈병은 내일 아침나절에 이곳 선착장에 모아둘 테니 그때 가져가시면 됩니다."

아무래도 일꾼이 말하는 서대인이 융인듯 하였다. 호운은 융의 성씨를 오늘에야 알았다. 일꾼의 말에 호운은 융의 배려를 깨달았다. 일만 호운에게 준 것이 아니라 이런 배려까지 하다니. 새삼 융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호운은 자신의 일을 대신해주는 일꾼들 덕에 예정보다 빨리 집으로 돌아왔다. 진부용에게도 해시 말이나 되어야 돌아올 것이라 해 두었으니 일찍 돌아가면 그녀가 기뻐할 것이다.

진부용을 떠올리자 다시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호운은 가벼운 걸음걸이로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나 저제나 자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아내를 생각하니 호운의 걸음은 절로 빨라졌다.

거의 뛰다시피 집으로 돌아온 호운은 집안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어쩐 일인지 집안에 인기척이 없었다. 장인이야 침술을 받는다고 의원의 댁에서 머물고 있으니 없는게 당연했지만 아내 진부용의 기척이 없는 것은 이상했다. 의아한 표정을 지었던 호운은 곧 진부용이 잠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발소리를 죽였다. 그가 나서기 전에 짧지만 격한 정사를 벌였으니 말이다.

호운은 발소리를 죽인 채 살금살금 집 안을 걸었다. 그러나 의외로 자신들의 방에 불이 켜져있는 모습에 의아해졌다. 혹시 불을 켜 둔채 잠든 걸까? 그러면 위험할텐데. 희미하게 열린 방문의 모습을 보면, 정말 진부용이 피곤해 그대로 쓰러져 잠든 건지도 몰랐다. 그 생각헤 호운이 문으로 다가선 순간, 그는 손가락 한 개 길이만큼 열린 문틈 사이의 풍경에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방안에는 호운의 예상대로 그의 아내 진부용이 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녀는 침상에 있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잠들어 있지 않았다. 그녀의 가슴이 덜렁덜렁 흔들리고, 그녀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연신 가쁜 신음이 터져 나오고 그녀의 몸이 미친것처럼 부르르 떨렸다. 그녀가 혼자 그리하고 있다면 괴이한 풍경이었겠지만 그녀의 뒤에는 남자가 있었다. 마치 짐승처럼 뒤에서 그녀를 덮친 남자는 호운보다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붙잡고 연신 허리를 쳐올리고 있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자지러지는 소리를 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잇새로 신음을 내뿜는 사내를 보니 그가 절정에 달한듯 싶었다.

이내 침상에 고개를 파묻은 그녀가 숨을 몰아쉬는 사이 사내가 진부용의 가슴을 만지며 말했다.

"내 말 대로 했어?"

"네."

"남편이 좋아 하던가?"

"당신이 가르쳐준 대로 하니까 잠시도 버티지 못하던 걸요?"

사내가 음탕하게 웃자 진부용도 까르르 웃었다.

"그런데 남편이 눈치 채지 못했어? 내가 왔을 때 몸 안에 정액이 남아있었으니 안긴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던데 말이야."

"그런 걸 눈치 채게 할 리가 없잖아요? 안 벗고 했으니까!"

진부용이 천진한 아이처럼 말했다. 그러자 사내는 비웃음을 흘렸다.

"남편이 옷을 벗기려 하지 않았어?"

"그 사람은 당신처럼 이런 거 잘 못해요, 여자 가슴을 어떻게 만지는 지도 모르는걸!"

"그럼 그런 남자랑 왜 사는 거야, 너 같은 여자가."

"내 말이라면 사죽을 못 쓰는 남자예요. 좋잖아요? 내가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남자." 

까르륵 웃는 진부용을 보며 사내도 웃었다. 그 사내의 미소는 진부용이 아닌 호운을 향해 있었다. 호운은 멍하니 그 자리에 선 채 사내의 미소를 보았다. 그 미소는 참으로 순해보였고 믿음직스러웠다. 그러나, 그 눈동자 안에서 이글거리는 열기는 예전에 보았던 광기에 가까운 빛을 띄고 있었다.

진부용의 뒤에서 웃고 있는 사내는 융이었다.

호운은 다리에 힘이 풀려 저도 모르게 문에 기댔다. 삐걱, 문이 작은 비명을 토하자 진부용이 고개를 들었다. 순간 쾌락에 달아올라있던 진부용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여, 여보…."

"여보라니, 지금 그런 소리가 나와?"

호운이 아닌 융이 진부용의 가슴을 움켜쥔 채 허리를 움직이며 물었다. 그 동작에 진부용의 입에서 교성을 닮은 비명이 튀어나왔다.

"아흑, 아, 안돼!"

"갑자기 왜 그래. 아, 혹시 남편이 겁간당하는 걸로 오해해 주길 바라는 거야? 걱정마. 남편이라면 네가 좋아서 내게 매달리고 있을 때 이미 도착해 우리를 보고 있었으니까. 안 그래?"

그 말에 진부용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그러나 융은 진부용이 호운에게 무어라 할 틈도 없이 그녀의 허리를 잡은 채 허리를 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호운을 신경써서 저항하던 아내도 이내 쾌락에 무너져 융의 박자에 맞춰 몸을 흔들어댔다. 호운에게는 이 모든 것이 악몽 같았다. 아내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도, 그리고 그 뒤에서 웃고 있는 것이 융이라는 사실도. 마치 과거의 망령이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오다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우르릉!!

쏴아아아---.

아내와 융의 정사에 충격을 받은 호운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집을 뛰쳐나와 수로가에 섰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리 날씨가 좋았는데 순식간에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구름을 가리고 한바탕 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비에 젖은 몸이 순식간에 싸늘해졌지만 호운은 수로를 바라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눈앞에서 몸을 틀어대던 아내의 모습이 잊혀 지지 않았다. 이것은 배신감일까 슬픔일까. 호운은 자신의 감정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어느새 흘리기 시작한 눈물은 빗물과 섞여 그 형상을 구분할 수 없어졌다. 그래서 호운은 마음 놓고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넋을 놓고 눈물을 흘리던 호운은 멀리서 한척의 배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이런 비가 내리는 날이면 어지간하면 배를 선착장에 댈 텐데, 용케도 배는 꾸역꾸역 수로를 더듬었다. 호운은 멍하니 다가오는 배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2층으로 이루어져 수로의 절반을 채울만큼 거대한 배는 수로가에 선 호운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듯 접근했다. 이대로는 배 안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만큼 배가 갑자기 접근한 순간. 배 안에서 시커먼 손들이 쑥 튀어나와 호운의 몸을 배 쪽으로 잡아끌었다.

"!!!!"

갑작스러운 일에 울던 것도 잊고 당황해 사지에 힘을 줬지만 호운을 잡아끄는 팔들은 용서 없이 그를 뱃전으로 이끌었다. 호운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뱃전에 빨리듯 끌려들어갔다.

배로 끌려들어간 호운은 순식간에 갑판에서 선실로 옮겨졌다. 마치 짐짝처럼 질질 끌려 선실로 내동댕이쳐진 호운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은은한 호롱으로 밝혀진 선실은 밖에서 보는 것 보다 내부가 더 넓어 보였다. 도대체 어째서 자신을 이런곳으로 끌어들인 것인지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은 호운은 어둠에 익숙해져 선실 한 구석에 앉은 사내를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악!"

"마치 귀신을 본 것 같은 반응이군."

호운의 비명에 사내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나 호운에게 다가왔다.

"내 얼굴을 기억하겠지?"

마치 호운이 자신의 얼굴을 잊었을 수도 있다는 반응이었다. 오히려 잊은 것은 자신 쪽이면서 그리 묻는 사내를 향해 호운은 덜덜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를 본 순간 본능으로 박힌 공포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려는 호운을 뒤에서 다가온 손들이 억눌렀다. 당황해 주변을 둘러보자 새카만 옷을 입은 사내들이 좁은 선실에 가득 들어차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밀실, 자신을 둘러싼 사내들. 그리고 눈앞의 사내까지 - 이제는 청년이라 부를 수 없는 오왕을 앞에 둔 호운의 두 눈이 공포로 크게 벌어졌다.

"다른 구경을 하러 왔다가 좋은 걸 주웠군."

오왕은 입술 끝을 비틀어 웃으며 손끝으로 자신이 선 자리 옆에 있는 탁자를 두드렸다. 자의식 과잉이라 할 수 있었다. 어린 날의 자신은 소년이었기에 오왕이 안았고, 그 후의 자신은 단지 융 때문에 안긴 것이었다. 지금의 자신같은 평범한 사내는, 오왕같은 자가 안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오왕을 앞에 둔 호운은 떨렸다. 그것은 오왕을 눈앞에 둔 순간부터 피어오른 공포 때문이었다. 그가 자신을 알아보았을 때부터 호운은 공포를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공포에 박차를 가하듯 호운의 뒤에 서 있던 검은 옷의 사내들이 그의 몸을 잡아끌어 오왕이 두드린 탁자위에 억눌렀다. 설마설마 하던 호운의 의심은 사내들의 다음 동작에 쐐기가 박혔다.

사내들은 망설임 없이 호운의 바지와 속옷을 벗겼다. 그리고 호롱의 기름을 취해 호운의 가랑이 사이에 부었다. 곧이어 뒤에 선 사내들이 오왕이 자신의 뒤에 섰다. 호운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오왕은 가차 없는 힘으로 호운의 머리를 탁자에 내리찍었다. 

쿵! 탁자에 세게 머리를 박힌 호운의 눈앞이 핑 돌았다.

"목이 베이고 싶으면 저항해라."

오왕의 목소리는 서늘했다. 그러나 호운의 뒤로 파고드는 오왕의 성기는 뜨겁고 날카로웠다.

"아----!"

호운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겨우 입구에 들어온 정도였지만 이미 과거가 된 옛 고통은 호운의 전신을 경직시켰다. 기름 덕분에 입구는 들어오기 쉬웠지만 내부는 빡빡해 쉽게 침입할 수 없어 오왕은 호운의 머리를 억누른 채 허리에 힘을 주었다.

"으, 으헉!"

내장이 찢기는 고통에 호운이 몸부림치자 탁자가 그에 맞춰 들썩거렸다. 불안정한 자세로 굳은 상대로 일을 치르기가 쉽지 않았는지 오왕이 혀를 말했다.

"이놈의 옷을 벗겨서 팔을 탁자 다리에 묶어라."

오왕의 말에 사내들이 달려와 호운의 상의를 벗겨내고 그 상의를 밧줄삼아 양손을 묶었다. 마치 거열형(말이나 소가 사지를 잡아당겨 찢어 죽이는 형벌)을 당하는 죄수처럼 양팔이 잡아당겨진 호운은 그 통증에 몸을 떨었다.

"응? 이건 뭐야."

오왕이 어깨를 만지자 찌릿한 통증이 일었다. 호운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아내 진부용이 남긴 상처일 것이다. 아직 피가 맺혀 생생한 상흔은 호운의 어깨에 가느다란 실핏줄을 남기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계집의 흔적인데…."

오왕의 목소리가 기묘해졌다. 호운은 오왕이 잠시 동작을 멈추자 살았다는 듯 외쳤다.

"아, 아내가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제발…!"

처음에는 그토록 애원했었다. 그러나 오왕은 호운의 애원에 주먹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지금이라면 다를지도 모른다. 아내가 있는 남자다. 그런 남자라면, 안지 않을지도 모른다. 실낱같은 기대를 걸며 호운이 외쳤지만 그런 호운의 외침에 오왕은 천천히 고개를 내려 호운의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헛소리도 작작하거라."

"정말입니다, 정말 아내가…! 아악!"

콰드득. 

애원하듯 외치던 호운의 목소리가 비명으로 바뀌었다. 오왕이 애원하는 호운의 어깨를 물어뜯었기 때문이다. 마치 살점을 베어 물려는 듯 깊게 어깨를 무는 오왕의 아래서 호운이 파들파들 몸을 떨었다. 오왕은 깊이 물린 호운의 어깨에서 피가 철철 흘러 작은 손톱자국을 지우는 것을 만족스레 본 후 뒤에 천천히 흘러내리는 피를 핥았다. 그러다 보니 혀에 닿는 피부의 감촉이 제법 마음에 든다는 사실을 깨닫고 호운의 목덜미며 어깨, 등허리를 핥아내렸다. 분명 땀을 흘린 몸이라 짠 맛이 느껴졌지만 그다지 더럽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이에 오왕은 잠시 기묘한 자신의 행동에 갸웃하다 곧 호운의 엉덩이를 만졌다. 

호운은 기묘한 오왕의 행동에 덜덜 떨었다. 여태 오왕이 호운을 안은 것은 두 번이었지만, 그를 핥거나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거기에 놀라 경직되었던 호운은 엉덩이에 닿은 오왕의 손길에 더욱 놀라고 말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여태 오왕은 한번도 호운의 입구나 몸에 손을 대거나 한 적은 없었다. 그저 그는 호운의 몸을 이용해 제 욕구를 푸는 것을 확실히 하려는 듯 호운의 뒤를 푸는 것도 자신의 부하들을 시켜 풀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등이며 허리를 핥던 오왕이 호운의 엉덩이를 주무르듯 만지다 손가락 하나를 호운의 몸 안에 쑥 밀어 넣었다. 기름덕에 마찰이 적어져 쉽게 호운의 몸을 파고 든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인 오왕은 고통에 푸들푸들 떠는 호운을 보며 낮게 속삭였다. 

"네게 아내가 있건 말건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천것과 몸을 섞은 것이 왕의 시중을 들 수 있다면 영광으로 알아야지."

그러면서 호운의 속을 휘젓던 오왕의 손가락이 하나 둘 늘었나. 그것은 호운을 배려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저 형식적으로 자신의 편의를 위해 뒤를 푼다는 느낌이 강했다. 마침내 세 개의 손가락으로 뒤를 풀던 오왕은 손가락을 빼어내고 망설임 없이 자신의 것을 밀어 넣었다. 처음처럼 거부하는 압력이 약해져 오왕은 쉽게 호운의 몸에 침입할 수 있었다. 끝까지 성기를 밀어넣자 짜릿한 압박감에 오왕의 눈매가 나른해졌다. 동시에 호운의 입에서 밭은 숨소리와 쇠된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오왕의 입에서는 그저 만족스러운 낮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정말, 명기는 명기구나. 내 지난 3년간 네 몸뚱이는 한번도 잊은 적이 없다."

호운의 몸에 삽입한 오왕은 격하게 움직이지 않고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처음 안은 사내 아이도 명기였지만 너 만한 명기는 아니었어. 너처럼 못 잊을 만한 명기는 아니었어. 그건 딱 서른 냥 값어치, 그뿐인 놈이었지."

제 욕구만 풀고 끝이던 옛날과 달리 신중하게 호운의 속내를 맛보듯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는 오왕이 말했다. 그 말에 호운은 이를 악물었다. 오왕에게는 딱 서른냥 뿐인 놈이었지만 그 덕분에 호운은 어미에게 버림받았다. 고작 호운을 기억도 못하는 오왕 때문에.

"하지만 너는 달라. 천냥을 주어도 너 같은건 못 구하지. 내 너를 안은 후에 수많은 계집과 사내를 안았지만 모두 너같이 만족스럽지 않았어. 사내이니 임신할 걱정도 없고 너만큼 굉장한 명기도 또 없으니 이야말로 하늘이 나를 위해 준비한 물건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렇게 말한 오왕은 본격적으로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호운의 목에 이를 세웠는데, 점점 거칠어지는 동작에 맞추어 목을 문 이에 힘이 더해져 붉은 피가 뭉클 솟아 올랐다. 점점 거칠어지는 오왕의 숨소리에 맞춰 호운의 입에서 고통의 소리가 새었다. 그러나 오왕은 상대가 고통스러워 하거나 말거나 자신의 원하는 대로 천방지축으로 허리를 휘둘렀다. 이내 거친 행사에 뒤가 찢어진 호운의 허벅지를 타고 붉은 피가 흘렀다. 툭, 툭. 바닥으로 흐르는 붉은 피의 소리가 선실 천정이 비를 튕기는 소리처럼 커다랗게 울렸다.

흥분한 오왕에게 휘둘린 호운의 전신은 목과 어깨, 그리고 안에서 흘러나온 피가 섞여 섬뜩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오왕이 채 절정에 달하기 전이건만 이미 저항할 힘은 남아 있지 않아 사지는 축 늘어진 채였다. 멍한 눈을 한 호운은 탁자를 타고 바닥에 흐른 자신의 피를 무심히 보다 자신의 허리를 잡은 오왕의 아귀 힘이 더욱 강해지는 느낌에 본능적으로 몸을 떨었다. 이내 철벅거리는 물소리가 점차 격해지더니, 강하게 호운의 속을 찔러들어온 오왕이 그대로 허리를 부르르 떨었다. 순간 뜨거운 것이 속으로 치솟는 느낌에 호운은 상대가 절정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았다.

오왕은 모든 것을 호운의 몸에 쏟아낸 후에야 그의 허리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섰다. 축 늘어진 다리를 타고 안쪽으로 들어온 것이 차츰 밖으로 흘러나오는 감각이 전해졌지만 호운은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은 채였다. 수치심이나 자존심을 따지기에 이미 그는 너무 지쳐있었다.

실내에는 가쁜 숨소리와 비릿한 냄새가 가득했다. 오왕은 멍한 호운의 얼굴을 흘긋 보고는 자신의 옷차림을 정돈했다. 

"꽃은 피었느냐?"

오왕의 물음에 검은 옷의 사내 중 한 사람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아직입니다."

"그러면 나가자꾸나. 이곳까지 온 김에 서장군의 솜씨를 보아야하지 않겠느냐."

오왕은 낮게 웃음을 터트리며 의자에 앉자 사내 몇 사람이 오왕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호운을 유린하는 사이 흐트러진 오왕의 머리와 의관을 정돈하였다. 그러는 사이에도 호운은 탁자위에 방치된 채였다. 자신의 모습이 정돈되자 오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자는 어이 할까요."

선실을 나서려는 오왕을 향해 검은 옷의 사내가 묻자 오왕은 탁자에 누운 채 꼼짝도 못하는 호운을 보았다.

"일이 끝나면 데려갈 것이니 그 사이에 정리해 두어라."

오왕은 그 말만을 남긴 채 선실을 나섰다. 몽롱해진 호운은 오왕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겠다는 소리인지 몰랐다. 그러나 남겨진 사내들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 한 모양이다. 그들은 곧장 호운을 탁자에 묶인 팔을 풀고 그를 바닥에 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따듯하게 데운 물을 가져와 호운의 몸을 닦아냈다. 피와 정액으로 얼룩진 비소에 손가락이 불쑥 침입하자 호운의 몸이 움찔 떨렸다. 수치도 수치였지만 육체의 고통이 이미 감내할 지경을 넘어서 있었다. 민감한 부위를 피가 터질 때 까지 휘둘러 대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안에 든 것을 빼내려는 손가락의 움직임에 점차 호운의 숨이 거칠어졌다. 일순 상처가 난 곳을 손가락이 스치자 호운은 짧은 비명을 지르고 몸을 떨었다.

그 모습에 꿀꺽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 호운은 가물가물해졌던 눈을 떴다. 어느새 호운의 몸을 정리하던 두 사내 중 한 사내의 눈빛이 게슴츠레해져있었다.

"사내를 보고 동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구만."

사내의 손이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것을 호운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그 손은 곁에 서 있던 또 한 사내의 손에 의해 제지되었다.

"그만 두게. 데려 가겠다던 왕야의 말씀을 잊었는가. 만약 왕야께서 아시면 자네 목이 멀쩡하지 못할 걸세."

"하지만 자네도 보게. 이미 엉망진창인데 조금이라면 왕야도 눈치 채지 못할 걸세."

사내는 말을 하며 호운의 다리를 노골적으로 벌렸다. 순간 고통에 몸을 떤 호운은 실내에 자신이 아닌 다른 숨소리가 가득 차는 것을 감지했다. 

"왕이 품었던 몸이 아닌가. 거기에 왕야의 말씀 자네도 들었지? 잊지 못할 명기라는 말."

호운의 다리를 붙든 사내의 말에 다른 한 사내는 망설이는 듯했다. 그러나 이미 그의 숨소리도 숨길 수 없을 만치 거칠어져있었다.

"아직 꽃이 피지 않았다니 상황이 정리되려면 필시 반시진은 족히 걸릴거야. 그러니 우리가 재미를 보고 정리를 해도 괜찮다는 말이네."

"하지만 혹시 왕야께서 돌아오셨는데 저자가 고해바치기라도 한다면…."

망설이는 사내의 말에 또 한 사내가 침묵을 지켰다. 그들은 눈앞의 호운에게 현옥되면서도 왕야에 대한 두려움을 떨칠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들이 마음대로 호운의 처우에 대하여 이야기 하던 차였다.

텅!유유히 잘 흘러가던 배가 무언가에 부딪히는 것처럼 튕겨나갔다. 순간적으로 선실에 있던 사내들과 호운의 몸도 충격이 온 반대쪽으로 굴렀다. 그러나 힘없이 바닥을 구른 호운과 달리 사내들은 재빨리 자세를 바로잡고 선실을 나서며 외쳤다.

"무슨 일이냐!"

"배에 무언가 부딪혔습니다 나으리."

"무언가라니 그게 무슨…!"

콰릉!

천둥이 치는 소리가 울리고 배가 통째로 흔들렸다. 콰직, 콰르륵! 무언가가 쪼개지고 급격하게 물이 차는 소리가 들렸다. 필시, 배에 물이 차고 있는 것이다. 호운은 힘없이 늘어져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물을 막아라!

-네놈들은 뭣들 하는게냐, 당장 물을 퍼라!

요란스러운 목소리들이 멀리서 울렸다. 호운은 엉금엉금 기어 널려있는 자신의 옷을 하나둘씩 주워 걸쳤다. 그리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질타해 선실을 나섰다.

새카만 밤의 수로를 이동하는 뱃전에는 인적이 없었다. 방금 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심상찮은 일이 벌어져 모든 사람들이 배의 아래로 내려갔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호운은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뱃전에 섰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물에 뛰어 들었다. 소란 덕분에 호운이 물에 뛰어드는 소리는 가볍게 지워졌다.

봄이지만 아직 물은 찼다. 전신이 찌르는 듯한 한기로 가득 차 일순 숨이 막혔다. 그러나 마침 배가 수로의 좁은 부분에 닿아 있어 얼마 지나지 않아 쉽게 수로의 벽에 다다를 수 있었다. 호운은 배를 대기 위해 늘어트려 져 있는 밧줄에 의지해 물 밖으로 나왔다. 배에서 뛰어내리며 수류의 밀려 떠내려 와서인지 호운을 집어삼켰던 검은 배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떠다니고 있었다.

호운은 그 배의 모습을 보다 젖은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했다. 어찌해 발길이 그쪽으로 향하는지 호운은 스스로도 알수가 없었다. 거기에는 자신을 배신한 아내가 있을 테고 융이 있을 터였다.

평소보다 두배는 느린 걸음으로 집에 도착한 호운은 자신의 예상이 틀리다는 것을 알았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내도 융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남은 것이라고는 그들의 정사를 밝히던 호롱과 더럽혀진 이불뿐이었다. 호운은 정사의 흔적이 적나라한 이불을 바라보다 질질 끄는 발걸음으로 방 안을 가로질렀다. 그리면서 걸치고 있던 옷을 하나 둘 벗어던지고 새 옷을 꺼내 걸쳤다. 

하나 하나 옷을 걸쳐 입는 동안에도 한기는 가시지 않았다. 입술이 부르르 떨리고 손이 덜덜 떨렸다. 어느새 호운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호운은 눈물을 흘리며 옷을 차려입고 자신의 방을 나섰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그런 호운의 머리 위로 처량 맞은 비와 어울리지 않은 화려한 폭죽이 터졌다. 갑작스러운 폭죽소리에 하늘을 본 사람들은 아무일도 없는 날에 화려한 폭죽이 터지는 모습에 의아해 했지만 그마저도 호운의 발길을 붙들지는 못했다.

샥!

또 하나의 목이 주인을 잃고 바닥을 뒹구는 모습을 무심히 바라본 융은 메마른 입술을 핥았다.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그렇다고 어려웠던 것은 아니다. 예정보다 수가 많았고 목을 베는데 예상보다 시간이 더 걸리는 것 뿐이다. 이미 수십의 목을 벤 융의 전신은 피로 얼룩져 있었고 갑작스러운 비에 젖은 전신에는 핏물이 흘러내렸다. 그런 융의 모습은 충분히 음산해 보였지만 주변에는 융의 모습을 탓할 자가 없었다. 이미 대지에 두 발을 버티고 선 자 대부분이 융과 비슷한 모양새를 한 융의 부하들 뿐이었기 때문이다.

"장군, 안은 모두 정리되었습니다."

"꽃을 피워라."

앞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한 부하의 보고에 융이 말하자 수하들이 부싯돌을 준비했다.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용케 불씨를 피운 그들은 허공을 향해 폭죽을 쏘아 올렸다.

피유유웅! 

펑! 펑!허공을 수놓는 일그러진 불빛을 보던 융은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그들이 서 있던 장원에는 이미 적막만이 감돌았다.

"그러게 시류를 잘 봤어야지."

장원은 항주 일대에서 알아주는 석학의 장원이었다. 이제는 과거형이 된 장원이 이리 쑥대밭이 된 것은 모두 한 장의 상소 때문이었다. 현 황제에게는 일곱명의 아들이 있지만 그들 모두가 왕으로 봉해진 것은 아니다. 그 중 왕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것은 태평왕과 진성왕, 오왕과 세 사람 뿐이다. 그나마 그들 중 가장 유력하던 태평왕이 사고로 죽었으니 황제가 될 만한 자는 오왕과 진성왕 두 사람 뿐이었다. 그 석학은 진성왕의 장인이 되는 자였는데, 자신의 사위되는 진성왕이 어지간히 황제가 되었으면 하였던지 황제에게 상소를 올렸다.

-신이 아뢰옵기에 황공하오나 고래로부터 미천한 밭에는 씨앗도 뿌리지 말라 하였습니다. 하온데 황상께옵서는 미천한 밭에서 거둔 생명을 어찌…….

길고 긴 상소문의 요점은 단 하나였다. 오왕에게 내린 왕위를 거두고 그에게 내린 봉토를 회수하라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월왕의 반란과 요족의 침략을 막아낸 오왕이 황실과 조정에서 차지하는 자리가 나날이 커지자 진성왕 측에서는 달갑지 않은 터였다. 아무리 공식적으로는 황후 소생인 오왕이지만 실상 오왕의 어미는 황제가 총애하여 궁으로 들인 무희 출신 총비(寵妃)에 불과했다. 비천한 신분이던 그녀가 비라는 지위에 오른 것은 오직 황제의 총애 덕분이었고, 그 아들인 오왕은 적자(嫡子)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때문에 태평왕이 죽자 진성왕 측에서는 희희낙락하였다. 이제 남은 왕들 중 황후 소생은 오직 진성왕 뿐이니 그가 당연히 황위에 오를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자 결과는 달라졌다. 

태평왕이 죽은지 구년이 지나서야 그 배후가 밝혀졌는데, 범인으로 지목된 것이 월왕이었다. 원래 월왕은 그 어미가 요족의 공주라 황상의 형제라지만 절반은 오랑캐의 혈통을 받고 있어 황상의 미움을 받고 있던 터였다. 선황이 붕어하며 남긴 유언만 아니었다면 왕의 봉작도 옛날이 잃었을 만한 자가 그였다. 그런데 그가 태평왕을 죽인 죄상이 드러나자 황상은 더는 그를 자신의 형제라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월왕은 반역죄로 참수되었다. 그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문제는 그 월왕을 참하라는 명을 받는 것이 오왕이라는 점이었다. 그 후로도 황제의 오왕을 향한 알듯 모를듯한 편애는 계속되었다. 서북 요족의 침입을 막는 것에 대한 명령도 오왕에게 내렸고 남방의 치수사업도 오왕에게 맡겼다. 황실과 관련된 굵직굵직한 것을 자꾸 오왕에게 맡기자 진성왕 측은 애가 탔다.

결국 진성왕 측에서 내민 승부수가 이번 상소였다. 애초에 군(君)이었던 오왕을 왕(王)으로 봉한 것이 문제였다며 황제에게 상소를 올린 것이다. 진성왕측에서는 월왕의 사례를 들먹이며 어미가 비천하면 그 자식 또한 비천하다며 황제에게 고하며 거듭 오왕을 군으로 원상복귀 시킬 것을 요청했다. 말이 좋아 원상복귀지 이미 오왕이 입지를 다진 마당에 다시 군으로 봉하라는 것은 그에게 나가 죽으라는 말이나 다름이 없고 정면으로 오왕을 상대로 싸움을 거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들은 황후 소생인 진성왕이야 말로 진정한 후계자라는 명분이 있었다.

허나 싸움 상대를 잘못 골랐다. 융이 보기에는 한심한 작자들이었다. 이미 천운은 진성왕이 아닌 오왕으로 기울었고 황위는 누가 봐도 오왕의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싸움을 걸었으니 결과는 뻔하지 않은가.

"관원들이 달려오기 전에 떠야한다, 서둘러라!"

"옙!"

융과 수하들은 비와 야음 속에 섞여 몸을 낮추고 장원을 빠져나왔다.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던 오왕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융이 빠져나간 장원이 바로 보는 누각 위에 선 채 일의 전말을 지켜보았다. 오늘밤 융이 방금 전의 전각처럼 습격한 곳은 모두 세곳이었다. 오왕은 일부러 세곳 모두 동일한 흔적을 남기라 주문했고 융은 그 주문을 성실히 지켰다.

방금 몰살당한 진성왕의 장인의 장원 말고도 오왕을 지지하는 장원, 그리고 중립파의 장원 한곳이 당했다. 대담한 행사로 보아 암암리에 오왕이 범인이라는 것이 알려질 테지만 자신의 수족마저 당했으니 오왕을 탓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그 수족이라는 것이 병들고 썩어 언제든 잘라버리려 준비하던 것이었지만 남들이 알 리가 없다.

"이제 슬슬 돌아가 볼까."

"왕야 서장군을 만나지 않고 돌아가십니까."

"나는 여기 없는 사람이 아닌가."

오왕은 가볍게 대답하고 누각을 걸어 나갔다. 돌아가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사내를 생각하니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수많은 사내나 계집을 안아온 자신이지만 한번 안고 나면 대부분의 상대에 대해 흥미를 잃곤 했다. 왕인 그에게 바쳐지는 여인들은 너무나 잘 교육되어 오히려 질리는 구석이 있었고 암행하며 안는 이들은 설익어 재미가 없었다. 부러 그리 하는 것이지만 역시 재미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사내는 이도 저도 아닌 미묘함이 오히려 매력이었다. 저항이 없는 듯하지만 오왕을 전력으로 거부하는 것도 매력적이지만 무엇보다 큰 매력은 바로 그 몸이었다.

소위 말하는 궁합이 맞는 자인지도 모른다. 원래 정력이 센 오왕이지만 대부분의 상대는 한두번의 절정에 이르고 나면 식상해 발기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사내는 달랐다. 안아도 안아도 질리지가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융을 골리느라 손을 댄 사내였다. 그때 융의 힘을 알아본 오왕은 융이 그 두명의 병사를 뿌리치고 일어선다면 그가 어떤 죄를 지었더라도 수하로 맞을 생각이었다. 때문에 적당히 융을 골려준 후 그에게 선심 쓰듯 사내를 하사 해 주려 했건만, 그 생각은 사내의 몸을 꿰뚫은 순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것은 말로 할 수 없는 충족감이었다. 자신을 받아들이는 몸뚱이가 경련하는 모습이 그토록 흥분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사내를 안은 순간 오왕은 융에게 하사를 하리라는 마음 자체가 사라졌다. 손에 넣고 싶은 수하와 저울질해도 빼앗기고 싶지 않을 만큼 사내의 몸은 오왕을 만족시켰다. 융이 그 사내를 신경 쓰는 듯 보였지만 다른 계집을 던져준다면 생각이 달라지리라 생각했다. 

때문에 요족의 침공을 막고 마을로 돌아와 사내가 모습을 감추었을 때 오왕의 분노는 컸다. 그리고 실망도 하였다. 그러나 사내는 그의 눈앞에서 사라졌고 이름조차 몰라 어이 찾을 길도 막막했다.

한동안 신경질을 부리던 오왕은, 그때까지 다 큰 사내는 안아 본 적이 없었기에 혹시나 그가 다 큰 사내여서 그러했을까 싶어 미색이 출중한 사내들을 안아보기도 하였지만 그 같은 충족을 준 자는 없었다. 이름도 모르는 사내였기에 평생 다시 만날 일이 없으리라 믿었건만 오늘 기적처럼 사내를 다시 만났다.

오왕은 이를 운명이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넓은 중원천지에서, 이름조차 모를 사내를 다시 마주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나를 위해 하늘이 내린 몸이지.'

적어도 자신이 질릴 때 까지는 마음껏 품을 수 있는 몸이 기다리는 배로 향하는 오왕의 입가에는 짙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허나 그 미소는 반파된 배에 도착해 사내가 사라졌다는 보고를 받은 직후에 사라지고 말았다. 무엇을 물어도 알 수 없습니다란 대답을 돌려주는 수하를 보는 오왕의 표정은 냉랭했다.

"그래서, 지금 정확히 네놈이 아는 것이 무엇이냐?"

고개를 숙인 수하에게 묻는 오왕의 목소리는 온기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수하가 부르르 고개를 떨었다.

"어찌 폭발했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단 말이냐?"

"누군가 폭탄을 실은 나무궤짝을 띄워보냈을 거란 추측 밖에는…."

"그래서, 그 폭발에 정신이 팔려 그 자가 사라지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이냐?"

오왕의 물음에 수하들은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켰다. 오왕은 성큼성큼 수하의 앞으로 다가왔다. 오왕은 아직도 내리는 비를 바라보다 수하들을 이끌고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배는 반파되었지만 가라앉을 지경은 아니었다. 다만 부력이 약해져 많이 쳐져있는 상태였고 조만간 다른 배로 갈아타거나 육지로 내려야 할 상황이었다. 

실내에는 사내의 몸을 정리하면서 나왔을 정액과 피의 흔적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오왕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한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자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다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수하들은 오왕이 웃음을 짓자 혹시나 몰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이내, 그들은 눈은 자신들을 향해 휘둘러진 은빛 궤적을 보았다.

소리도 없이 휘둘러진 오왕의 검이 두명의 수하를 베어 넘기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사람의 목은 근육과 연골, 뼈가 있어 두부처럼 쉽게 베어지지 않건만 오왕의 검은 소리도 없이 수하들의 목을 베었다. 곧 검붉은 피가 터져나오고 목을 잃은 두명의 수하가 바닥을 굴렀다. 

"버려라."

어차피 사단이 난 터에 이 같은 시체들이 뒹굴고 있다하여 오왕이 손해를 볼것은 없었다. 오왕의 명령에 남은 수하들이 재빨리 사내들의 시체를 수습해 수로에 집어던졌다. 풍덩풍덩! 물이 튀어 오르는 소리를 들으며 오왕은 의자에 앉았다. 실내에 충만한 피냄새로도 쉽게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어찌할까….'

오왕은 무릎에 얹은 손가락을 까딱이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 당장이라도 수하를 풀어 그 사내를 잡아오라 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오왕은 이곳에 없는 자다. 수색이 된다면 누군가의 눈에 들지 않을 리가 없다. 그에게 유리하지 않은 상황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왕은 망설였다.

'별 수 없군.'

오왕은 혀를 차고 입을 열었다. 일이 복잡해질 것이 뻔히 보였지만 그는 자신의 욕구를 멍청한 수하 때문에 참을 생각은 없었다.

"서장군을 불러라."

"어이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왕야."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서융은 무척 듬직해 보였다. 처음에는 미친개처럼 오왕을 향해 이를 드러냈지만 그가 자신에게 힘을 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챈 서융은 곧 오왕에게 고분고분 해 졌다. 그러나 그 고분고분함은 언제든 등 뒤에 비수를 꽂을 수 있는 고분고분함이라는 것을 오왕도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서융에게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오늘 밤은 수고가 많았다."

"겨우 노고를 치하하고자 여기까지 오신 것은 아닐테고, 무슨 일이십니까?"

눈치 빠른 서융의 물음에 오왕은 피식 웃었다. 그러나 곧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

"그대가 지난 열흘간 이곳에 있으면서 사람을 제법 풀어놓았을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사람들을 통해서 사람을 한 사람 찾았으면 한다."

"사람을 말입니까? 누구를 찾기에 왕야께서 이런 곳에서…."

"그대도 잘 아는 자다. 그대는 기예단 호씨라는 사내를 기억하는가."

오왕의 물음은 다분히 작위적이었다. 오왕은 서융이 그 사내를 잊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때때로 스치는 서융의 반항적 눈빛이 그 사내로 기인하는 것을 알면서도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 서융은 오왕의 말에 약간 동요를 보였으나 곧 평소처럼 무심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호씨? 아, 그 자 말입니까. 한때 왕야가 품으셨던 사내가 아닙니까. 그런데 그 사내는 갑자기 왜 물으십니까?"

일부러 태연한척 대답하는 서융을 보며 오왕은 피식 웃었다.

"그래 그 사내다. 오늘 내가 그 사내를 다시 만나 시중을 들게 하였는데 잠시 소란이 있어 놓치고 말았구나. 해서, 그대가 그 사내를 찾아주었으면 한다."

"…그렇습니까. 그 사내가 이곳에 있었습니까."

오왕은 서융의 눈에서 새파란 귀광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분명 오왕에 대한 살의였다. 그 눈빛이 서융이 아직 그 사내를 잊지 못하였음을, 그 사내에 대한 연정도 사그라들지 않았음을 알렸지만 오왕은 거리낌이 없었다. 자신은 왕이었다. 그 자신이 갖고 싶다면 신하된 도리로 그의 앞에 대령하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오왕은 서융이 그리 순순히 그 사내를 자신에게 바치리라 믿고 이런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서융을 사냥개로 쓰고자 했다. 서융의 사내에 대한 집착은 오왕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란 계산에서였다. 필시 서융은 오왕 몰래 사내를 찾아내어 숨기려 들 테니, 오왕은 서융이 사내를 찾을 때 까지 기다렸다 낚아채면 그만이었다.  

"알고 있겠지만 나는 이 자리에 없는 자이니 은밀하게 하여야 한다. 그 사내는…그래. 그대의 첩이 될 이라고 하고 찾아도 상관없다."

일부러 서융의 신경을 긁는 말을 하는 오왕이었지만 서융은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서로가 서로를 뻔히 믿지 않으면서도 표면적으로는 참으로 서로를 신뢰하는 주종의 모습을 연출하는 그들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오왕이 모르는 것이 있었으니 이미 서융이 호운과 마주쳤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서융은 끝끝내 그 사실을 내색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존명."

'결코 네놈에게는 건네주지 않을 것이다.'

입으로 나오는 말과 속내가 다른 서융의 얼굴은 깊이 숙인 고개에 의해 가리워졌다.

오왕이 항주를 떠나는 것을 확인한 서융은 사람을 풀지 않았다. 대신 자신을 뒤따르는 이가 있는지를 면밀히 살핀 후, 자신을 따르는 시선이 둘 있다는 것을 깨닫고도 호운의 주가로 발길을 재촉했다. 아마 오왕에게 서융의 행보를 고해바치는 자들도 호운에 대해서는 고해바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호운은 단지 서융이 배를 맞춘 계집인 진부용의 남편일 뿐이다. 서융은 열흘 전 호운을 만난 바로 다음날 진부용과 접촉했다. 우연으로 가장한 시작에 진부용이 넘어오는 것은 순식간이었고, 서융이 그녀의 옷을 벗기는 것은 노류장화의 옷고름을 푸는 것 보다 쉬웠다. 이미 서융과 그녀의 관계가 시작된것이 오래이기에 그들은 진부용의 집으로 향하는 서융의 행동을 수상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기에, 주가로 향하는 서융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보란듯이 향하는 경향이 있었다.

서융은 이때까지만 해도 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호운이 이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주가에 도착한 서융이 본 것은 미친여자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하고 있는 진부용의 모습이었다.

진부용은 평소의 아름다움을 몰라볼 정도로 초췌한 얼굴로 땅을 두드리고 있었다.

"허어엉, 여보. 여보…!"

그런 진부용의 손에는 너덜너덜해진 옷이 쥐어져있었다. 그는 그 옷이 마치 호운이라도 된다는 양 뺨을 비비며 울고 있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쉴새없이 눈물이 흐르는 진부용의 얼굴을 본 서융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직감적으로 일이 틀어졌음을 알았다. 서융은 울고 있는 진부용의 곁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그녀의 멱살을 잡았다.

"호씨는 어디로 갔느냐? 네 남편은 어디로 갔어?"

울고 있던 진부용은 멍한 눈으로 서융을 올려다 보다 곧 발작처럼 외쳤다.

"그 사람은 떠났어요, 당신때문에! 당신 때문에 나를 버렸어!"

진부용은 악다구니를 쓰며 서융의 얼굴을 할퀴려 들었다. 그러나 서융은 그런 진부용의 따귀를 가차없이 때렸다. 악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진 진부용은 그래도 지지않고 서융에게 덤벼들었다. 그럴때마다 서융은 그녀의 얼굴을 가차없이 두드렸고 이내 아름답던 진부용의 얼굴은 코피와 붓기로 흉하게 일그러졌다.

"당신이 나를 유혹하지만 않았으면 남편이 나를 버리지는 않았을 텐데, 당신이 나를 유혹해서 일이 이 지경이 되었어! 내 남편을 돌려줘, 돌려 달라고!"

바락바락 악을 쓰는 진부용을 보며 서융이 어이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저는 터럭도 손에 넣지 못한 호운의 마음을 가득 가지고도 다른 남자와 쉽사리 놀아난 그녀에 대한 마음이 좋지 않던 터였다.

"나 때문이라고? 웃기지마. 그건 엉덩이가 가벼운 네년 탓이지."

"너 때문이야, 다 너때문이야!"

악을 쓰는 진부용을 보고 서융은 얻을 것이 없다 생각했다. 진부용이 하는 것으로 보아 호운이 어디로 갔는지 알 리가 없었다. 서융은 악을 쓰는 진부용을 발길질 하고 그대로 주가를 뒤로 했다. 그때 바닥에 쓰러져 있던 진부용이 서융에게 덤벼들었다.

"너, 너만 죽이면 그 사람이 돌아올거야! 너만 죽이면!"

서융의 목을 버둥거리며 조르는 진부용의 눈빛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지를 상실한 채 소리를 지르는 진부용을 차갑게 바라보던 서융의 손이 제 허리춤으로 향했다.

샥-!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진부용의 목에서 검붉은 핏줄기가 터져나왔다. 목이 베이고도 진부용은 서융의 몸에 악착같이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목이 잘려 소리는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꺽, 끄억, 꺽!"

진부용이 눈을 뒤집고 서융의 목을 조르려 했다. 평소라면 쉽사리 뿌리칠 수 있는 여자의 연약한 손이건만 마치 아교라도 붙인 것 처럼 강하게 진부용의 두 손은 서융의 목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스컥!

결국 서융의 칼이 다시 휘둘러지고 진부용의 양 손이 주인에게서 잘려나갔다. 서융이라는 축을 잃은 진부용의 몸은 힘없이 바닥에 쓰러져 경련하다 이내 절명했다. 서융의 몸과 진부용의 몸, 그리고 바닥은 검붉은 피로 흥건해졌다. 진부용은 죽어서도 서융을 노려보는 것 처럼 두 눈을 부릅 뜨고 있었다.

서융은 그런 진부용의 사체에 발길질을 하고 이번에야 말로 주가를 뒤로했다.

이미 서융의 머릿속에 비참하게 살해당한 진부용 따위는 들어있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어젯밤 망연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던 호운의 모습만이 어른거렸다. 그 모습을 상상만 해도 숨이 가빠지고 아랫도리가 뻐근해지는데, 눈앞에서 놓쳤다고 생각하니 속이 뒤집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뜸을 들이지 말 것을 그랬다. 다시 만난 그의 곁에 아내가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아 그 아내를 떼어놓는데 혈안이 되어 정작 호운 자신을 손에 넣는 일을 등한시 해 결과적으로 호운을 다시 잃고 말았다.

오왕이 호운을 다시 안았다는 것도 화가 났다. 호운이 제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첫 사내가 오왕이었다고. 호운의 성격상 제 발로 사내에게 안길 리 없으니 아마 오늘 오왕에게 다시 안길 때 까지 호운은 그 어떤 사내와도 연이 없었을 것이다. 만약 열흘전 그를 만났을 때 어딘가 가두어 버렸다면, 아니면 억지로라도 취해버렸다면 이런 결과는 초래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은 그것을 하찮은 여자를 상대하느라 날려버렸으니, 이 어찌 화가 나는 일이 아닐 쏘냐. 그 여자의 목숨을 빼앗고도 서융은 분풀이가 되지 않았는지 애꿎은 신발을 괴롭히며 땅을 찼다. 그러나 곧 표정을 다잡고 자신이 심어둔 연락책들을 찾아 나섰다. 일단은 그들에게 오왕의 명령을 전해야했다.

그러나 서융은 그 연락책들도 결코 호운을 찾아내지 못하리란 생각이 들었고, 실제로 그것은 들어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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