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震翰 宣諭 四十年 진한 선유 40년
浩氏 二十歲 20세
선유 40년, 가을 초입에 요족이 국경을 침범해 왔다. 원래 조공을 바치는데 망설임이 없고 언제나 조용하였던 요족이 갑작스레 반기를 들자 조정대신들은 크게 당황하였다. 요족의 행보가 신출귀몰한 것으로 보아 누군가 요족에게 진한의 정보를 빼돌리고 있음이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대 진한의 백성중 누가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할까 다들 말하기를 저어하여 까닭이 알려진 바가 없었다. 다행히 요족의 침입은 현종에 의해 막아졌으나 이 일은 훗날까지 조정 대신들을 괴롭히는 일이 되었는데, 훗날 알려진 바로는 당시에 그곳에는 호씨가 머물렀다 하였다.
본디 욕심이 많고 남의 안위는 관심 없는 자이니 일을 저지른 것이 호씨가 아니겠냐는 의견에 다른 학자들도 동의하였고, 실제 호씨가 저지르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가 불러온 흉사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고향을 떠난 호운은 정처 없이 세상을 방황했다. 한없이 북쪽으로 갔다가 한없이 남쪽으로도 갔다. 국경의 끝과 끝을 돌다 호운이 정착한 것은 사천 근방에서 마주친 기예단이었다. 엄밀하게 말해 정착이라 할 수는 없었다. 기예단은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천하를 떠돌아다니니, 호운의 천하유랑에 무리가 더해진 것 밖에 차이가 없었다.
호운이 기예단에 들어간 것은 순전히 사람에게 굶주려서였다. 처음 세상을 떠돌던 1,2년은 그래도 버틸만 했지만 시일이 지나면서 점차 외로움이 북받쳐 올랐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마주친 기예단 단장 채승의 요청에 호운은 흔쾌히 수락하고 그들과 합류했다. 비록 제대로 된 교육은 받은 적 없어도 호운은 글을 쓸 줄 알았고 셈을 할 줄 알았다. 그리고 어미와 단둘이 살며 살림살이에도 제법 능숙해졌다. 채승이 호운을 기예단원으로 원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호운이 합류한 것은 원래 곡마를 주로 하던 기예단이었는데 전쟁으로 말이 징집되자 아쉬운대로 몸을 사용한 기예단으로 전향한 곳이었다. 때문에 기예단의 인원은 대부분이 어린 소년 소녀였고, 호운이 기예단에서 하는 일은 그 아이들의 뒤를 봐주며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교육을 하는 것이었다.
대부분 그렇듯 기예단의 아이들은 대부분이 제 어미 아비에게서 팔려온 아이들이었다. 겨우 쌀한섬에 팔려온 아이가 있는가 하면 입을 줄이겠다며 버려진 아이도 있었다. 고만고만한 입장이라 서로를 보듬어주면 좋을텐데, 이 좁은 사회도 사회라 위계질서가 존재했고 귀하고 귀하지 않은 사람이 존재했다. 어른들은 아이들끼리 위계질서를 세워야 사고가 안 난다며 아이들끼리의 아귀다툼을 방치했다.
기예단의 아이들 중 가장 권력이 강한 것은 융이라는 사내아이였다. 융은 이제 갓 열여섯이 된 아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키가 컸고 덩치가 좋았다. 그는 힘이 센데다 한번 자신의 눈밖에 나면 상대가 피를 토할 때 까지 두들겨 팰 정도로 성격이 잔인했다. 거기에 머리회전도 빨라 기예단의 아이들은 융에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헝-!"
오늘도 융의 눈 밖에 나 융에게 얻어맞고 코피가 터진 아이가 울며 호운에게 매달렸다. 이 아이는 기예단에 들어 온지 아직 보름도 되지 않아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해 매일 융에게 얻어맞았다.
호운은 안타까운 얼굴로 아이의 코피를 닦으며 아이를 달래주었다. 비록 융보다 호운이 연상이지만 호운은 융의 패악을 막을 힘이 없었다. 육체적으로도 쌀 두섬을 번쩍 들어 올리는 융의 괴력을 당하지 못했고, 그 잔인한 성정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런 식으로 융의 패악에 당한 아이들이 자신에게 매달려도 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위로 뿐이었다.
"그래그래, 서럽다 서러워. 그래도 어쩌겠니. 참아야지."
호운은 어린시절 자신이 몇 번이고 되뇌었던 것을 아이에게 반복해 말했다. 그게 힘없는 자의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서러워도 어찌할 수 없다. 살기 위해서는 참을 수 밖에 없다. 호운은 아이에게 하는지 자신에게 하는지 모를 말을 반복하며 아이의 등을 쓸었다.
최근 몸집이 더욱 커지면서 재주를 부리다 실패 하는 일이 잦아진 융의 패악은 극에 달했다. 조금만 자신의 눈 밖에 나는 아이가 있으면 가차 없이 아이들을 두들겨 패는게 그의 주된 일과였다. 이 아이의 잘못은 고작 기예단에 들어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융이 자꾸 실패하는 재주를 완벽하게 부렸다는 점 뿐이었다.
훌쩍거리며 아이의 울음이 잦아들자 호운은 고개를 들었다. 품안의 아이가 놀랄까 모른 척 하고 있었지만 사실 아이가 울며 달려왔을 때부터 융이 아이의 뒤를 쫓아와 자신들을 보고 있었다. 아이를 노려보는 융의 눈빛은 열여섯 어린아이의 눈빛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살벌했다.
융은 호운을 좋아하지 않았다. 기예단의 모든 아이들이 그렇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호운을 형처럼 따랐지만 융은 달랐다. 그는 사내로 자신보다 힘이 약한 호운을 경멸하듯 난폭한 태도를 취했다. 일부러 어깨로 호운을 밀치는 일은 다반사였고 호운을 부르는 호칭도 형이 아니라 어른들이 부르는 호칭대로 호씨였다.
호운은 융의 눈빛이 점점 흉포해지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품 안의 아이를 더욱 끌어안았다. 어서 돌아가 줘. 호운의 마음속 애원은 성큼성큼 다가오는 융의 발길에 짓밟히고 말았다.
"아악-!"
융이 호운의 품안에 안긴 아이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아이가 버둥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그래도 호운이 끼어 있을때 까지 패악을 부린 적은 없었다. 그것이, 적어도 암묵의 이해라 여겼다. 그러나 융은 비명을 지르는 아이를 가차 없이 호운에게서 끌어내 바닥에 패대기를 쳤다.
"그만둬!"
호운은 저도 모르게 융의 팔을 잡았다. 그러나 융은 마치 어린아이의 손목을 비트는 것처럼 가볍게 호운을 뿌리치고 바닥에 쓰러진 아이의 배 위에 올라타고 주먹질을 했다. 아이가 비명을 내질렀지만 주변을 지나가던 기예단의 식구들은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몇몇 아이들이 구석에서 융에게 맞는 아이를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지만 누구도 감히 말리러 나서지 못했다.
"그만 하라니까!"
바닥에 쓰러졌던 호운이 융의 어깨에 매달리다시피 해 융을 뜯어말렸다. 이미 융의 아래에 깔려 얻어맞는 아이는 눈이 풀려있었다. 이러다가는 아이가 맞아죽을지도 모른단 생각에 호운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만해!!"
정신없이 융의 어깨에 매달려 말리던 호운은 그만 융의 팔꿈치에 얼굴을 맞고 뒤로 나가 떨어졌다. 순간적으로 가격을 당해 머리가 핑핑 돌았다. 코가 얼얼하고 뜨거운 것이 후두둑 흐르는 것을 보아 코피가 터진 모양이었다. 그러나 가만 있을 수가 없어 호운은 다시 융에게 매달렸다.
한참 아이를 두들겨 패던 융이 뒤늦게 호운을 깨닫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호운의 얼굴을 보고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 제 어깨에 호운이 흘린 피가 묻은 것을 보고 신경질을 부렸다.
"더럽게!"
융은 자신에게 매달린 호운을 팽개치고 바닥에 쓰러진 아이를 발길질 하려 했다. 그 순간 호운은 재빨리 아이를 감싸고 드러누웠다. 융은 그런 호운을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다 곧 침을 토하고 걸어가 버렸다.
융이 씩씩거리며 사라진 후에야 아이들이 하나둘 호운과 아이의 근처로 다가왔다. 그들은 융이 있으면 차마 두려워 그들 근처로 오지 못했을 것이다.
"오빠, 피나."
계집아이 하나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호운의 코를 어루만졌다. 몇 명 아이들은 호운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나 호운은 자기를 챙기기 전에 바닥에 쓰러진 아이를 안아 올렸다. 이제 갓 열 두어 살 쯤이 된 어린 아이라 힘이 그리 세지 않은 호운도 쉽사리 안아 올릴 수 있었다.
호운은 안아 올린 아이를 기예단 아이들이 머무르는 천막 한 구석에 뉘였다. 이동이 잦은 기예단은 주로 천막을 치고 생활을 했는데 이 천막마저도 아이들은 제 손으로 쳐야했다. 어른들이 친 천막보다 한없이 부실한 천막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태로웠지만 없는 것 보다는 나았다.
이불로 사용하는 더러운 천을 덮은 아이는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며 앓기 시작했다. 호운은 열이 오르는 아이를 닦아주기 위해 물을 길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기예단이 머무는 곳은 서쪽 사막과 인접한 초원이라 물이 드물었다. 때문에 멀리 시냇가에서 물을 길어다 물통을 채워두고 이용했는데, 그 물통은 물의 헤픈 사용을 방지하기 위해 기예단의 천막 한 가운데 있었다. 호운이 물통을 들고 접근하자 물통 주변에서 단도를 던지고 있던 기예단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곧 호운의 얼굴을 보더니 혀를 쯧쯧찼다.
소싯적에는 그 또한 기예단에서 재주를 부렸다는 그 사내는 이제는 나이가 들어 아이들에게 재주를 가르치는 일을 했다.
"자네 그 꼴이 뭔가."
사내의 말에 호운은 자신이 어디 이상한가 하여 자신의 몸을 살폈다. 그러나 곧 그가 말하는 것이 코피로 더러워진 자신의 얼굴이라는 것을 깨닫고 어색하게 웃었다.
"융이 그놈이지?"
호운은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물었다.
"쯧쯧. 저보다 어린 것에게 당해 그 꼴이 뭔가?"
사내의 타박에 호운은 어색하게 웃었다.
"물을 좀 써도 될까요?"
"한통이라면."
호운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 물을 길었다. 혹시나 물이 밖으로 샐까 주의를 하고 길은 물을 들고 호운은 다시 아이가 있는 천막으로 돌아왔다. 아이는 본격적으로 앓아누워 열이 대단했다. 호운은 옷을 벗기고 손수건을 적셔 아이의 몸을 닦아주었다. 갈비뼈가 앙상한 아이의 몸에는 곳곳이 융이 남긴 벌건 자국으로 부어올라 있었다. 호운이 젖은 수건으로 몇 번인가 몸을 닦아주자 아이의 숨소리가 조금 편안해졌다. 그제야 호운은 제 얼굴이 신경쓰여 물이 남은 물통에 비추어 보자 코와 입주변이 벌건 피로 범벅되어 있어 쓴웃음이 나왔다.
호운은 아이를 닦아준 수건의 남은 물기로 제 얼굴을 닦아내었다. 여전히 콧등은 부어있었지만 꼼꼼히 닦아내고 보자 그래도 사람 꼴처럼 보였다. 호운은 한숨을 쉬고 머리를 긁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다른 아이들은 재주 연습에 한창일 것이다. 멍하니 앉아있던 호운은 갑작스러운 말소리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아이까지가 전부입니다."
천막이 열리며 안으로 들어온 것은 낯선 사내와 기예단주 채승, 그리고 채승의 오른팔 소완서였다. 채승이나 소완서야 호운에게 익숙한 인물이었지만 사내는 낯설었다. 그는 보통 사내들이 거뭇한 수염을 제멋대로 기르는 것과 달리 수염을 잘 정돈해 있었는데, 그 모양새를 보면 제법 돈이 있는 사내거나 지위가 있는 사내였다. 혹은 둘 다일수도 있고. 여하튼 그러한 사내는 채승과 소완서를 아랫것 처럼 달고 천막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오더니 누워있는 아이와 호운을 번갈아 보다 물었다.
"왜 저런 상태인가?"
"에…아이들 사이에 다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채승이 대답했다.
"저자도 기예단의 아이인가? 그렇기에는 나이가 좀 많아 보이는데."
"아이들의 일을 봐 주는 일꾼입니다."
"그렇군."
채승의 대답에 사내는 두꺼운 종이책을 꺼내더니 휴대용 세필로 무언가를 적어내려갔다. 그리곤 종이 한 장을 북 찢어 채승에게 건넸다.
"사내 아이 아홉명 계집아이 열두명. 모두 확인했네. 그럼 열흘 뒤에 늦지 않고 도착하게."
"네 나으리! 고맙습니다 나으리!"
사내는 자신을 향해 굽실거리는 채승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그대로 천막을 나섰다. 사내가 가자마자 채승은 이마에서 땀을 훔치고 아직 누워 끙끙거리는 아이의 근처로 다가왔다.
"쯧쯧. 상태가 생각보다 심하구만."
채승의 중얼거림에 소완서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괜히 옆에 앉은 호운을 탓했다.
"자네는 말리지 않고 무얼 했는가."
처음 들어보는 타박이었다. 여태는 아이들끼리의 위계질서라며 천방지축으로 날뛰던 융을 방치하던 그들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채승이 들고 흔드는 종잇조각을 보면 그 타박의 이유를 알듯도 싶었다.
"어디 잔치라도 벌어진답니까?"
호운의 물음에 채승이 움찔했다. 호운은 어이해 그가 자신의 물음에 움찔하는지 알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곧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큰 잔치지. 기예단 아이 모두가 참석해야 하는 잔치니 자네가 아이들이 싸우지 못하게 잘 봐두게. 아이들에게도 잘 타일러 둘테지만 자네가 봐 줘야 할걸세. 어느 하나라도 몸이 상하면 안될것이야."
보통 기예단이 재주를 부려도 한번에 무대에 나서는 것은 열명 남짓이다. 규모가 커 봐야 스무명 남짓이 나서는데 모두가 필요하다니. 정말 큰 무대인가 싶어 호운이 다시 물으려 했지만 채승과 소완서는 할말만 하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채승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지만 어쨌든 잔치가 있다니 누워있는 아이에게 다행이었다. 단주 채승이 저리 신신당부를 하는 걸 보니 융에게도 한마디 언질쯤은 있을테니 한동안은 아이들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그런 호운의 예상대로 융은 그날 이후로 잠잠 해졌다. 그렇다고 얌전해 진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꼬집거나 흔적이 남지 않을 정도로 때리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패던 예전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러는 사이 융에게 얻어맞고 앓아 누웠던 아이는 닷새만에 제발로 걸어다닐 만큼 상태가 좋아졌다. 부어 엉망진창이던 얼굴의 붓기도 빠지고 나니 원래의 귀여운 외모가 도드라 졌다. 그래도 융이 또 무슨 트집을 잡을지 몰라 호운은 아이의 주변에서 맴돌았다. 그럴때마다 융이 눈을 부라리는 것으로 보아 이번 잔치가 끝나면 사단이 일어나도 단단히 날 터였다. 그것을 생각하면 우울해졌지만 일단은 융의 폭력에서 아이들이 벗어났다는 점에 호운은 안심했다.
그렇게 조용한 나날들이 계속 된지 닷새하고도 사흘이 지난 날. 단주 채승이 재주 부리기 연습을 하던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융에게 아이들을 두들기지 말라며 엄명을 내린 채승은 아이들에게도 다치지 말라며 엄명을 내렸는데, 그것은 평소의 기예들 중 높이 뛰거나 위험한 것은 하지 못하게 한 것을 보면 확실했다. 호운은 굳이 연습까지 가로막는 채승의 극성에 기가 막혔지만 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어 그러하리라 짐작하며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채승은 공터에 모여든 아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우리는 오늘부터 길을 떠나야 한다. 꼬박 이틀이 걸리는 길이야."
꼬박 이틀이 걸리는 길이라는 말에 아이들 사이에 술렁임이 일었다. 원래 이동이 많은 기예단이지만 꼬박 이틀이 걸리는 길이를 단번에 이동하는 경우는 없었다. 대부분 반나절 정도를 이동하고 기예를 팔아 돈을 번 후 다시 이동하는 식이었다.
"어딥니까?"
아이들 중 우두머리격인 융이 묻자 채승은 순순히 대답했다.
"이곳에서 서북으로 사십리 정도 가면 있는 대완평(大琓平)이라는 곳이다."
"거기 무엇이 있는데요?"
이어진 융의 질문에 채승은 눈을 부라렸다.
"그걸 네가 알아 무엇하게? 거기 재주를 부릴 일이 있으니 가는 것이지 달리 가는 것이겠느냐?"
"하지만 서북으로 사십리 가면 국경쪽 아닙니까. 아니 국경을 넘어간 위치일지도 모르죠."
융의 말에 아이들 사이에 동요가 일었다. 호운도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융의 말이 틀리지 않았는지 채승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자연스럽게 말했다. 그는 융의 성격을 잘 알았다. 워낙에 불같은 성미라 제가 납득하지 못한다면 아이들을 윽박질러 이곳에서 한걸음도 떼지 못하고 할 터였다.
"네 말대로 국경쪽이다. 하지만 위험하지 않다. 그 근처에 마을도 있고…."
"가려면 마을로 가는거지 마을 근처로 가는 이유는 또 무엇입니까."
채승은 또 말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냥 마을이라고 했으면 융도 순순히 동의했을 텐데 융이 거기에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자 채승의 얼굴에 눈에 띄게 당황한 색이 흘렀다. 보다못한 소완서가 나서 말했다.
"단주는 왜 아이들이 불안하게 그러십니까."
채승이 소완서를 보자 소완서는 자신을 믿으라는 듯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 융을 보며 말했다.
"우리들이 대완평에 가는 것은 사막을 넘어온 상단을 맞이하기 위해서다."
"상단이오?"
"사막을 뚫고 막 중원으로 돌아오는 상단이라 많이 지쳐있는 상단이야. 우리들이 할 일은 그 상단이 여독을 풀고 여흥을 즐길 수 있게 하룻밤 재주를 부리며 그들의 눈을 즐겁게 해 주는 일이다. 알겠지만 사막을 오가는 상단은 군의 호위를 받으며 이동하기에 국경 근처라도 전혀 위험하지 않다."
소완서의 말에 융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곧 납득한듯 중얼거렸다.
"그러면 다치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겠군요."
"…그렇지. 사막 인근이라 바람이 센 지역이니까."
소완서는 융의 중얼거림에 대꾸하듯 말했다. 그리고는 아직 불안한 표정을 지은 아이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융이 말한 것처럼 바람이 세서 평소처럼 생각하고 재주를 부리다가는 아주 크게 다칠 것이다. 그러니 미리미리 몸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해 가야한다."
거기에 융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호운은 생각보다 융이 영리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단지 영악한 것과 영리한 것은 달랐다. 융은 제 아비가 노름빚에 팔아치운 자식이라 열 살 무렵까지는 서원에도 다녔다고 했는데 그것이 거짓은 아닌 듯 보였다.
"그럼 그리 알고 모두 길을 떠날 차비를 해라!"
단주의 말에 아이들은 일사분란하게 흩어졌다. 일단 단주의 명이 떨어졌으니 사막으로 갈 준비를 마쳐야했다. 호운은 아이들이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준비를 위해 등을 돌리려 했다. 그때 멀리 서 있던 채승이 호운을 불렀다.
"왜 그러십니까 단주."
"자네 말이야. 한동안 융을 좀 잘 감시하게."
"예?"
"…어쨌든. 이동하는 도중에는 융이 늘 타던 마차에 같이 타주게. 별일은…없을 거야."
채승은 말끝을 흐렸다. 호운은 갑작스레 융을 감시하라는 그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평소에는 융을 자신의 왼팔처럼 대하더니 갑자기 감시라니. 방금 전 그 말 때문인가? 호운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쨌든 단주의 명령이란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왜 니가 내 옆에 있어? 그 젖먹이는 어쩌고?"
준비가 끝나고 마차에 오르자마자 융이 이죽거렸다. 융은 아이들과 달리 기예단의 짐이 잔뜩 실린 마차에 혼자 있었다. 아이를 실으면 네, 다섯명은 쉽게 실을 공간을 혼자 쓰는 것만도 융이 기예단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알게 해 줬다. 채승도 힘이 장사인 융을 어찌하지 못하는 것이다. 융의 이죽거림에 호운은 아무말 없이 마차 밖으로 보는 풍경에 시선을 돌렸다.
"사람이 물었으면 대답을 하란 말이야!"
호운은 융이 갑자기 자신의 어깨를 낚아채자 깜짝 놀라 그릴 보았다. 어깨를 쥐는 아귀힘이 너무 강해 어깨가 저릿할 정도였다. 두꺼운 천막 천에 그림자가 가리워진 융의 얼굴에 눈빛만이 형형하게 빛났다.
"단주께서 이 마차를 타라고 하셨어."
호운은 단주가 융을 감시하라 하였다는 말을 빼놓고 일부러 그리 말했다. 그러나 호운의 대답에 융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호운은 자신의 어깨를 잡고 거칠게 숨을 내쉬는 융의 모습에 혹시나 그가 주먹을 휘두를까 살짝 염려가 되었다. 이미 융이 마음먹고 덤벼든다면 호운은 그저 속절없이 당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곧 융은 코웃음을 치고 호운의 어깨를 밀쳤다.
"겨우 네까짓놈을!"
호운을 밀친 융은 호운에게서 멀리 떨어진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래봐야 좁은 마차라 서로의 다리가 부딪힐 정도로 가까웠지만, 호운은 융이 멀어지자 조금 안심이 되었다. 자신보다 네 살이나 어린 아이에게 위축된 자신의 신세가 우스웠지만 어쨌든 융이 아무일 없이 넘어가 주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 여행은 순탄하게 이어졌다. 단주의 말처럼 꼬박 이틀을 이동해 도착한 대완평은 무척이나 탁 트인 전망을 자랑하는 평지였다. 평원 근처의 구릉 아래로 흐르는 넓은 강을 본 아이들은 환성을 내질렀다. 만약 채승의 눈초리가 없었다면 당장이라도 강으로 뛰어나갈 기세였다. 그러나 일단 도착하면 천막을 치는게 우선이라는 것을 아는 아이들은 재빨리 마차에서 짐을 내려 천막을 치려했다. 그런데 채승이 손을 들어 아이들을 말렸다.
"되었다. 천막은 상단에서 온 일꾼들이 친다고 하니 너희들은 강에 가서 몸이나 씻어라. 귀한 손님을 모시는데 지저분한 몰골로 나서면 안되겠지."
채승의 말에 아이들이 다시 한번 환성을 내질렀다. 그리고는 너너 할 것 없이 강으로 달려나갔다. 채승답지 않은 호의에 호운은 어리둥절해졌다. 그가 이 기예단과 돌아다닌 것이 근 일년이 다 되었건만 이리 채승이 아이들에게 온화하게 대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이미 아이들은 강으로 달려나간 후고 채승에게 왜 갑자기 호의를 베푸느냐 묻는 것도 이상했다. 호운은 자신도 아이들과 함께 모처럼 강에서 몸이나 씻을까 하여 강쪽으로 가려 했는데 그런 호운을 채승이 불렀다.
"호씨, 잠시만."
"네?"
"아이들이 목욕을 마치면 이걸로 갈아입으라고 해."
호운이 내민 보따리 안을 슬쩍 본 호운은 놀라고 말았다. 그 안에 든 것은 깨끗한 새 옷이었다. 비록 호화로운 비단옷은 아니었지만 늘 입던 옷만 입히고 재주를 부릴 때만 깨끗한 옷을 입히던 채승이 이리 깔끔한 새옷을 내어주다니. 없던 일만 생겨서 호운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나 호운이 어리둥절 하거나 말거나 채승은 보따리만을 준 채 바삐 걸어가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서 마차가 다가오는 것으로 보아 그들이 채승이 말한 상단의 일꾼들일 것이다. 멍하니 보따리를 들고 서 있던 호운은 곧 아이들이 있는 강가로 걸어갔다.
아이들은 이미 강에서 물장구를 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몸을 씻는것 보다 노는데 정신이 팔린 아이를 보며 호운은 어이없는 듯 웃었다. 그러나 근심 없이 웃으며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기 좋은 것도 사실이었다. 멍하니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던 호운은 아이들과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혼자 몸을 씻는 융을 발견했다. 물장구를 치는 아이들과 달리 묵묵히 몸을 씻어내는 융의 전신은 아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탄탄한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고작 열여섯인 지금도 호운과 엇비슷하니 필시 성인이 된 후에는 호운이 올려 볼 정도의 거구가 될 것이다.
한참 멍하니 몸을 씻는 아이들을 바라보던 호운은 멀리서 들리는 땅울림 소리를 들었다. 혹시나 채승이 말한 상단이 도착하는 것인가 의아했던 것은 잠시, 곧 호운의 표정에는 의혹이 서렸다. 사막에서 돌아오는 상단이라면 말이 아닌 낙타를 타고 돌아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들리는 것은 아무리 들어도 말이 세차게 땅을 차는 소리였다. 호운이 어리둥절하며 주위를 둘러보자 해가 기울어가는 서쪽이 아닌 북쪽에서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어째서 저쪽에서 흙먼지가 피어나는 거지?'
의아한 표정을 지은 것은 호운만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물장구를 치느라 몰랐지만 융 또한 그런 기척을 느끼고 땅울림을 들었다. 융은 곧 재빨리 강가로 걸어나와 젖은 몸에 옷을 걸쳤다. 그리고는 구르듯 구릉 위를 달려갔다. 호운은 융을 잘 감시하라던 채승의 말을 떠올리고 그를 따라 달렸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에게 채승이 부탁한 한마디를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목욕을 다 하면 그 옷을 입어라!"
호운은 아이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융의 뒤를 따랐다. 다행히 융은 멀리 가지 않았다. 그는 구릉을 올라서자마자 멈춰 서 있었다. 당황해 융의 뒤를 따르다 넘어져 호운의 얼굴은 땀과 먼지로 지저분해졌지만 호운은 융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했다. 숨을 헉헉 몰아쉬며 융을 뒤따라 구릉 위에 선 호운은 눈앞의 풍경에 눈을 깜빡였다.
아직 노란 흙먼지가 피어나는 평원에 아까와 달리 인파가 우글거렸다. 고작 기예단의 단원 몇만이 오가던 평원을 순식간에 말과 갑주를 입은 병사가 채운 모습은 장관이었다. 병사들의 차림새나 그들 주변에 채승이 가 있는 모습으로 보아 국경 너머 침입자는 아닌듯 했지만 어이해 이 많은 병사들이 이곳에 나타났는지 호운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병사들의 수는 어림잡아도 오십은 넘어 보였고 그들의 갑주 곳곳에 피가 튀어 있었다. 마치 일전(一戰)을 치른 병사들 처럼 보였다.
"빌어먹을!"
융이 갑자기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그리고는 바닥에 침을 뱉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나 곧 호운은 자신의 앞을 낯선 사내가 막아서자 놀라 멈춰섰다. 사내도 다른 병사들처럼 갑주를 걸쳤지만 그만이 유일하게 왼쪽 가슴에 붉은 인장이 박힌 갑주를 입고 있었다.
"네가 아이들을 관리한다는 호씨냐?"
"아, 예."
어리둥절해하며 호운이 대답하자 사내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아이들에게 안내해라."
사내의 말에 호운이 망설이는 찰나 멀리서 융이 채승에게 무어라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 보였다. 워낙이 사람이 많고 말발굽소리가 커 뭐라 소리를 지르는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융이 단단히 흥분한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내 융은 병사들에 의해 포박되어 바닥에 처박혔다. 그러고도 융은 지지 않고 소리를 질러댔지만 곧 호운의 시야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 모습에 호운은 뭔가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꼈다.
"무엇을 하는 것이냐 안내하질 않고."
그런 불길함 속에서도 호운은 사내의 재촉에 응할 수 밖에 없었다.
호운을 따라 구릉을 내려온 사내는 아직 물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을 물 밖으로 나오라 명령했다. 그리고 아이들을 하나하나 찬찬히 훑어 보고는 몇몇 아이들을 지목했다.
"너, 너. 그리고 너."
사내가 지목한 아이는 세명이었는데 모두 열 살 이하의 어린 계집아이였다. 물에 젖은 채 발가벗은 아이들은 사내의 지목에 영문을 모르고 둥그런 눈을 했다.
"모두 따라 와라."
아이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쭈볏거리다 호운이 채승의 명령대로 가져다 놓았던 꾸러미에서 옷을 꺼내 걸쳤다. 사내는 아이들이 옷을 걸치자마자 아이들을 재촉해 구릉을 올라갔다. 남겨진 아이들은 병사의 모습에 놀랐는지 불안한 얼굴로 호운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예요? 왜 병사가 왔어요?"
"군인이죠??"
"상단을 보호하는 군인인가요?"
아이들의 물음에 호운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불안함은 점차 호운의 가슴을 짓눌렀다.
순식간에 밤이 찾아왔다. 가슴에 붉은 인장이 박힌 갑주를 입은 사내가 데려간 세명의 계집아이도 돌아오지 않았고 융도 돌아오지 않았다. 천막이 쳐지고 횃불이 곳곳에 밝혀진 평원은 완벽한 군(軍)의 진영으로 변모해있었다. 기예단의 얄팍한 천막과 달리 두꺼운 천으로 만들어진 천막에는 하나같이 진한(震翰)이라는 글귀가 수놓아져있었다. 곳곳에 갑주를 걸친 병사가 서 있었고 그들은 하나같이 무기를 소유하고 있었다. 밤이 되었에도 채승이 말한 상단이 오지 않은 것을 본 호운은 뒤늦게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부터 상단 따위는 없었던 것이다.
호운은 채승이 어이해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몰랐다. 그리고, 기예단이 어이해 이 자리에 불려왔는지도 몰랐다. 곳곳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모습은 보였지만 이미 기예단이 재주를 부릴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기예단은 이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은 이물같았다. 불안감이 시간과 함께 점차 커 갔다.
점차 달이 높이 떠오르고 나자 중앙에 있던 천막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는 병사들과 달리 갑주를 걸치고 있지 않았지만 어둠속에서도 금실로 자수를 박은 상의의 모습이 휘황했다. 남자가 천막 밖으로 나오자 이리저리 흩어져있던 병사들이 줄을 맞춰 도열했다. 갑주를 입은 병사들이 도열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호운의 근처에 서 있던 아이들은 입을 쩍 벌리고 그 모습을 구경했다.
병사들이 도열하자 천막 밖으로 나온 사내가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횃불이 일렁대는데다 거리가 있어 얼굴을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크게 울리는 목소리로 보아 그는 젊은 사내였다.
"대(大) 진한의 병사들이여 들으라!"
사내의 음성에 병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병장기의 쇠가 마찰하는 소리와 그들이 고개를 숙이는 소리가 마치 음악처럼 웅장하게 울렸다.
"우리는 오늘의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우와아아아!!
사내들의 우렁찬 함성에 대지가 진동하는 듯 했다. 호운은 그 소리에 움찔해 저도 모르게 주먹을 그러쥐었다. 어째서인지 그 함성에 소름이 돋았다. 아이들 중 몇은 그 소리에 겁을 집어먹고 호운에게 매달렸다.
그때 어딘가에 사라졌던 채승이 나타나 아이들을 재촉했다.
"어서, 어서 이리 오거라! 어서!"
아이들은 채승의 말에 겁을 먹은 채 호운을 보았지만 호운은 아무말 하지 못했다. 결국 아이들은 겁을 먹고 채승을 따라 나섰다. 채승은 망설임없이 병사들을 지나 천막에서 나온 사내와 병사들 사이에 섰다. 아이들도 그런 채승을 따라 조르르 섰다. 아이들이 병사들의 위세에 질려 겁을 먹은 모습이 멀리 선 호운에게도 보였다.
아이들이 모두 자리를 잡고 서자 천막에서 나온 사내가 다시 외쳤다.
"단 오십사인이 그 같은 대업을 이루었으니 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니더냐! 이에 본왕(本王)은 그대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자리를 마련하였다."
쩌렁쩌렁한 사내의 목소리에 한기가 들어 호운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어깨를 감싸쥐었다.
"이 아이들은 오늘밤 그대들을 위해 준비되었으니 그동안 쌓인 욕구를 마음껏 발산하여라! 누구도 그대들을 막지 못할 터이니 오늘 밤은 마음껏 즐기라!"
"우아아아아아!"
사내의 외침에 호응하듯 군사들이 외쳤다. 그 소리가 마치 짐승의 합창같이 호운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두 다리가 덜덜 떨렸다.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것이라 믿고 싶었다. 그러나 짐승같이 표효한 군사들이 앞에 선 아이들에게 손을 뻗는 모습이 호운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호운은 눈앞의 풍경에 토할 것 같아졌다. 천막 안에 들어가 일을 치르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어둠을 핑계 삼아 대놓고 일을 치렀다. 아직 솜털이 보송한 어린아이들이 거구의 사내들에게 깔려 버둥거리는 모습에 구역질이 치밀었다. 기예단의 취급이 이렇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호운이 기예단과 돌아다니면서 몇 번인가 암암리에 아이들이 몸을 파는 모습도 보았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남들이 보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짐승처럼 뒤엉켜있는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기예단의 아이들은 사내, 계집 할 것 없이 모두 사내들의 아래에 깔려 있었다. 그나마 한 사람을 상대하는 아이의 처지는 나았다. 심한 경우는 사내들 두세명이 아이 한명에 매달려 있는 경우도 있었다. 아이들의 비명과 울음, 교성과 사내들의 아우성이 뒤섞인 모습이 그야말로 지옥을 재현한 것 같았다. 결국 그 모습을 견디다 못한 호운은 그 자리를 박차고 뛰어 나갔다.
모닥불의 영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달려간 호운은 바닥에 쓰러지는 동시에 구토를 시작했다.
"우웩, 욱, 우웩!"
아침부터 바삐 돌아다니느라 먹은 것이 없어 올라오는 것은 약간의 과일과 허연 거품 같은 것뿐이었다. 호운은 속에 있는 것을 모두 토해내고 나서도 계속해서 구역질을 했다. 토하느라 기진맥진해진 호운은 힘이 빠져 자신이 토해 놓은 것에 미끄러져 쓰러졌다. 그러나 그 더러움을 느낄 수 없을 만큼 호운은 지쳐버렸다.
한참 쓰러진 채 숨을 고르는 호운의 귀로 바람결에 희미해진 소리들이 섞여 날아들었다. 아이들의 비명은 이제 잦아들었고 남은 것은 사내들의 소리와 울음소리, 그리고 교성 뿐이었다. 호운은 그 소리에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저 소리들을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채승의 속셈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막을 수 있었을까. 호운은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는 이 사태를 막을 힘이 없었다. 설사 아이들을 도망치게 한다 하여도 그 아이들을 이끌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호운은 소리를 피하듯 무작정 걸었다. 얼마를 걸었을까. 아이들의 소리가 희미해진 위치에서 호운은 물소리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쪽에는 낮 동안 아이들이 몸을 씻었던 강이 있다. 호운은 망설임 없이 물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걸었다.
얕은 구릉을 지나자 달빛을 받아 시커멓게 빛나는 강이 조용히 흐르는 모습이 보였다. 평원지대 한 가운데를 흐르는 강은 조용하지만 힘 있게 도도한 흐름을 이어가고 있었다. 호운은 홀린 것처럼 구릉을 내려가 강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옷을 입은 채 강 안으로 들어갔다.
호운은 토사물에 더러워진 얼굴을 닦고 전신을 강물에 담궜다. 후끈한 여름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아 뜨겁게 타올랐던 머리가 서늘한 강물에 차게 식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강물 안에 서 있던 호운은 천천히 강가로 걸어 나왔다. 그때, 자갈이 밟히는 소리에 호운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이미 모닥불에서는 멀어져 있었지만 구름 한점 없이 보름달이 환히 떴고, 강에 달빛이 반사되어 강가는 유난히 밝았다. 그 밝은 강가에 달빛을 등진 것처럼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아니, 잘 보니 사내가 아니었다. 워낙에 덩치가 좋아 일순 사내라 생각했지만, 호운을 향해 다가오며 드러난 얼굴은 융이었다.
"융…?"
호운은 무심결에 융의 이름을 불렀다. 호운은 분명 그 또한 사내들을 상대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때 융이 채승에게 달려든 것으로 보아 융은 이 상황을 모두 깨달은 것임이 틀림없다. 그때 병사들에게 제압되어 끌려갔지만 호운은 그 또한 무사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아무리 덩치가 커도 융은 아직 아이였고, 얼굴이 상당히 반반한 편이었다. 호운은 굶주린 사내들이 색(色)에 어이 반응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광태(狂態)가 벌어지기 전에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이 아이들은 오늘밤 그대들을 위해 준비되었으니 그동안 쌓인 욕구를 마음껏 발산하라고. 애초부터 기예단을 불러온 목적이 그것일진데, 그 기예단의 아이 중 한 사람인 융이 이리 강가에 서 있는 모습은 호운에게는 의외의 일이었다. 거기에 차림을 보니 융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지 않은가.
그러나 그런 호운의 표정을 간파한 것처럼 융이 비웃음을 흘렸다.
"왜, 나는 멀쩡한 것 같아서 신기해? 걱정 말아. 내가 상대해야 할 놈은 제대로 상대하고 왔으니까."
융의 덩치가 크다 한들 병사들만 하지 못하고, 얼굴에는 아직 앳된 느낌이 남아있었다. 아무리 사악한 표정을 짓고 있다한들 아직 아이였고, 그 표정에 남은 어림은 어찌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호운의 눈앞에 있는 융은 달랐다. 여태 보아왔던 치기가 완전히 사라진 융의 표정은 마치 아이들을 탐하는 병사들의 표정과 한 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아니, 다를 바 없어 보이는게 아니라 더욱 흉포해보였다.
호운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어쩐지 자신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융의 모습에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이게 강에 젖어 느껴지는 한기인지, 융의 기이한 얼굴에서 느껴지는공포인지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호운이 채 세걸음도 떼기 전에 융이 별안간 호운에게 달려들었다.
융에게 밀려 바닥에 쓰러진 호운의 입에서 고통의 비명이 흘러나왔다. 가까이 다가온 융의 몸에서 풍기는 비릿한 냄새가 뒤섞여 풍겨 호운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정액의 풋내와 피냄새였다.
"융?"
그 불길한 냄새에 호운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치며 융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달을 등져 그림자에 가리워진 융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융은 호운의 부름에 대답대신 대신 호운의 옷에 손을 댔다. 처음에는 그것이 왜인지 몰랐던 호운은, 융의 손이 자신의 바지춤을 풀자 경악해 저항하기 시작했다.
"왜 이러는 거야, 그만둬!"
호운이 비명을 지르며 저항했지만 융의 손길은 거침이 없었다. 그는 호운의 저항을 가볍게 제압하고 젖은 호운의 상의를 그를 구속하는 도구로 사용했다. 순식간에 양팔이 속박된 호운이 다리만으로도 버둥거렸지만, 융의 튼튼한 몸에 깔린 호운의 저항은 그다지 효과를 발휘할 수 없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왜? 그럼 나는 왜 그놈에게 뒤를 대줘야 했는데?"
불쑥 튀어나온 융의 말에 호운은 경직되었다. 융은 경직된 호운을 보며 잔인하게 웃었다.
"나도 그만하라고 했어. 그만하라고 애원했어. 이 내가 말이야. 그런데 그만 두지 않더군. 나를 비웃으면서 때리더군. 생긴 게 마음에 안 들지만 구멍은 똑같은 구멍이라고 말하면서 말이야. 나 같은 놈이 언제 자기 같은 사내의 품에 안기겠냐고 영광으로 알라면서-!"
융의 사나운 외침은 계속해 이어졌다.
"한놈이 지나면 다른 한놈이, 또 한놈이 왔어! 세놈이 제 욕심을 다 채운 다음에야 물러나더군! 그리고는 나를 걷어찼지, 나를 비웃으면서. 덩치만 커다랬지 사내에게 뒤나 대주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이라고 말하면서 말이야."
"유, 융…."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이라니, 그건 네놈 같은 놈을 말하는 거지. 나를 말하는게 아니라. 안 그래? 네놈이야 말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이지!"
사납게 외친 융은 마침내 호운의 바지를 벗겨내고 그의 하체를 드러냈다. 호운은 분노가 이글거리는 융의 눈빛에 경직되었지만 곧 다시 저항하기 시작했다.
"걱정마. 그놈들이 하는 법을 배워서 못하지는 않을 테니."
융은 호운의 양다리를 억누르고 그의 허리를 띄웠다. 융은 모습을 드러낸 호운의 구멍에 침을 뱉고 거칠게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가차 없는 침입에 호운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파들파들 떨자 융은 비웃으며 더욱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호운의 목이 뒤로 꺾이고 입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융은 파들거리는 호운의 양다리를 붙잡고 자세를 잡았다. 어느새 밖으로 드러난 융의 성기는 팽팽하게 긴장되어 머리를 쳐들고 있었다. 덩치에 걸맞게 아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커다란 그 성기가 호운의 입구에 자리를 잡았다.
"이러지마, 제발! 제발 그만해!"
호운의 비명에 융은 오히려 만족한 표정으로 허리를 밀어 넣었다. 입구로 이물이 침입하는 감촉에 호운의 입이 다시 크게 벌어졌다.
그 순간, 슝! 바람을 가르는 낮은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호운의 허리를 붙잡고 있던 융의 팔이 크게 떨렸다. 호운은 갑자기 떨기 시작하는 융을 보고 눈물이 맺힌 시선을 돌렸다. 고개를 든 호운은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 두 눈을 흡떴다.
융의 어깨에 마치 날개가 돋은 것처럼 화살이 박혀있었다.
"융!"
호운이 경악해 융을 불렀다. 융은 호운에게서 몸을 떼어 내고 자신의 어깨에 박힌 화살을 잡았다. 그러나 어둠속에서 두 개의 화살이 더 날아들어 융의 등과 어깨에 연속으로 박혔다.
"융!!"
결국 융이 버티지 못해 바닥으로 쓰러지자 호운이 그를 불렀다. 애써 기듯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앉은 호운이 융을 보는 사이 멀리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무거운 갑주를 두른 병사들이 융과 호운을 둘러쌌다. 호운은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해 자신의 몸을 가리려 했지만, 양팔이 속박된 채로는 민망한 부분이 보이지 않도록 다리를 움츠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병사들이 모두 자리를 잡은 후 병사들 사이를 가르며 한 청년이 걸어 나왔다. 손에 활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융을 쏜 자일 것이다. 호운의 시선이 저절로 청년을 향했고, 그 얼굴을 본 호운의 얼굴은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달빛아래 나타난 청년은 무척 고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고귀한 신분의 상징처럼 태양에 타지 않은 새하얀 피부와 잘 정돈된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까지. 누가 봐도 잘 생겼다고 표현할 그런 미청년이었다. 그러나 호운이 놀란 것은 청년이 잘 생겨서가 아니었다.
호운은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도, 지독한 악몽을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럴 수가 없었다. 이래서는 안 되었다.
호운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그의 악몽에 종종 등장했던 청년의 얼굴 바로 그 자체였다. 그날 밤 호운을 사고, 마침내 그를 고향에서 쫓겨나듯 떠나게 만든 청년. 청년의 얼굴을 본 순간 호운의 가슴이 세차게 뛰고 시작했다. 동시에 호운의 전신이 볼품없이 덜덜 떨렸다.
청년은 그런 호운의 모습을 흥미로운 듯 바라보다 바닥에 쓰러진 융을 보았다.
"이놈인가?"
청년의 조용한 물음에 병사 두 사람이 나서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이놈입니다! 이놈이 진가를 죽였습니다!"
"이놈이 틀림없습니다!"
"덩치는 커다랗지만 아직 아이가 아니냐. 그런데 겨우 이런 녀석에게 죽었다고?"
"이놈이 워낙에 갑자기 달려들어서…!"
"거기에 진가가 아직 바지를 못 추스른 통에 당해서 그렇습니다."
변명하듯 말하는 병사를 보며 청년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호운은 병사와 청년이 주고 받는 말에 놀라 두 눈을 흡떴다.
융이 사람을 죽였다…?
바닥에 쓰러진 융은 숨을 씩씩거리며 청년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병사를 노려보았다. 융의 성격상 제가 하지 않은 일을 덮어씌운다면 이처럼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융은 그저 죽일 듯이 병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청년은 병사와 융의 얼굴을 보고 다시 호운을 보았다. 그리고 주변의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천막으로 옮겨라."
"이 녀석을 말입니까?"
병사가 융을 가리키자, 청년은 차갑게 말했다.
"두 놈 모두 말이다."
호운은 양팔이 결박당한 채 그대로 천막 안에 굴려졌다. 그의 곁에는 융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등과 어깨에 화살을 세 개나 박고 있었지만 융의 눈빛은 당장이라도 사람을 죽일 것처럼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천막 안은 그저 천막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잘 정돈되어 있었다. 한 가운데는 작은 모닥불이 불타고 있었고 구석에는 투명한 막이 드리워진 침상이 있었다. 바닥에는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모포가 깔려있고 의자나 가구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었다.
청년은 호피가 깔린 의자에 앉아 바닥을 구르는 호운과 융을 보았다. 천막 안에는 융과 호운, 청년 말고도 몇사람인가의 병사가 함께 서 있었다. 그자들 중에는 융이 죽일 듯 노려보던 자들도 섞여있었는데 밝은 곳에서 보니 그자들의 옷에 검붉은 피가 튀어 있는 것이 보여 호운의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네 죄를 알고 있느냐."
청년의 말에 융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서 하문에 대답하지 않고 무엇을 하는 것이냐!"
병사 중 한 사람의 칼집으로 융의 배를 쳤다. 융은 잠시 컥 소리를 내며 허리를 꺾었지만 곧 자신을 두드린 병사를 죽일듯 노려보았다. 청년은 그런 융의 태도에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지만 곧 호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마치 풍경을 감상하듯 호운의 얼굴과 드러난 몸을 천천히 훑은 후 입을 열었다.
"너는 저놈의 정인(情人)이냐?"
청년의 말에 호운은 고개를 저었다. 거부가 강한 만큼 강하게 고개를 휘저었는데, 호운은 보지 못했지만 그런 호운의 동작에 융의 눈빛이 다시 사나워졌다. 그런 융의 눈빛을 정확히 파악한 청년은 피식 웃음을 흘리고 옷에 핏자국이 남은 병사들에게 턱짓했다. 병사들이 다가오자 청년이 말했다.
"네 놈들은 이 놈을 이길 자신이 있느냐?"
"물론입니다! 아까는 그저 경황이 없어…!"
"세놈이 덤벼 한놈이 죽고 두놈은 이놈을 붙잡지도 못했는데, 이길 자신이 있다고?"
비웃는 청년의 말에 병사들은 움찔해 고개를 숙였다. 청년은 고개를 숙인 병사들을 보다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다가왔다. 청년이 다가오자 호운의 몸이 절로 경직되었다. 호운은 청년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였지만 곧 머리칼을 잡아당기는 힘에 억지로 고개를 들 수 밖에 없었다.
"사내치고 생긴 것 하나는 반반하구나."
-사내치고 생긴 것 하나는 반반하구나.
아직도 악몽에서 종종 떠오르던 말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말을 던진 청년을 보고 호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태도로 보아 호운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 분명한데도 그 말 만큼은 전과 똑같았다. 전신에 식은땀이 솟고 입술이 덜덜 떨렸다. 청년은 그런 호운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다 뒤에 선 병사들에게 말했다.
"침상위의 것을 끌어내고 침상을 정리해라."
청년의 말에 병사들은 재빨리 막으로 가리워진 침상으로 다가갔다. 곧 작은 비명소리가 울리고 엉망진창이 된 아이가 병사들의 손에 이끌려 바닥을 굴렀다. 침상에서 끌려나온 아이는 일이 벌어지기 전 가슴에 인장이 있는 사내가 데려갔던 세명의 계집 아이 중 한 사람이었다. 부어오른 얼굴이나 피와 알 수 없는 끈적한 것이 흐르는 하체를 보면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명백했다. 그리고 그 일을 행한 것이 누구인지도. 병사들은 바닥을 구르는 아이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재빨리 침상을 정리했다.
이제는 입술뿐 아니라 전신이 떨렸다. 청년은 덜덜 떠는 호운을 바라보다 천천히 침상으로 향했다. 청년이 침상에 앉아 턱짓을 하자 병사들은 호운을 질질 끌고 침상앞으로 다가가 그의 몸을 침상위로 굴렸다.
청년은 겁에 질려 굳은 호운의 몸을 억누르고 아직 드러난 채로인 호운의 다리 사이를 살폈다. 융의 침입에 붉게 부어오른 부위를 본 청년은 자신의 바지자락을 풀어 성기만을 꺼냈다. 노골적인 모습에 호운이라고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모르지 않았다. 그것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융도 마찬가지였다.
"그만둬!"
융이 마치 으르렁대는 짐승처럼 외쳤다. 화살을 세발이나 맞고도 들썩거리는 융을 병사들이 억지로 억눌렀다. 청년은 재미있다는 듯 융을 보다 멀뚱히 선 두명의 병사에게 말했다. 그들은 죽었다는 병사의 동료였다.
"네놈들이 저 놈을 억눌러라. 만약 내가 만족할 때 까지 저놈의 무릎이 바닥에 닿아있다면 네놈들을 살려두겠지만, 혹시라도 저놈의 무릎이 바닥에 붙어있지 않다면 네놈들의 목도 무사하지는 않을 것이다."
"저, 저희들은…!"
"무능한 병사는 필요없다."
청년은 쌀쌀맞게 말하고 호운의 다리를 벌렸다.
"멈춰, 멈추란 말이다!"
융이 외치자 청년은 손짓을 했다.
"소리가 거슬리는군."
그 말에 병사들은 융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그리고는 재빨리 뒤로 시립했다. 결국 네명의 병사가 달려들어 억누르던 융을 옷에 피가 묻은 두명의 병사가 억눌러야했다. 네명이 억누르던 힘이 사라지자 당장에 융의 어깨가 들썩들썩했다.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융의 몸을 억눌렀다. 청년은 그것을 확인하고 자세를 잡았다.
삽입은 순간이었다. 이미 사년전에 겪은 일이지만 단 하룻밤의 일이었고, 익숙해질 틈도 없던 일이었기에 호운의 몸은 처음처럼 경직되었다. 아니 오히려 처음보다 더욱 경직되었다. 호운은 이 앞에 있는 지옥을 알고 있었기에 공포에 떨었다.
다만 전의 학습으로 울며 애원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울고 애원해봐야 시끄럽다며 얻어맞는 결과를 만들 뿐이라는 것을 호운은 알고 있었다. 호운은 그저 공포에 떨면서 밭은 숨을 내쉬었다.
청년이 호운의 몸을 파고들자 융의 어깨가 다시 크게 들썩였다. 그를 억누른 병사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청년은 거기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호운의 몸을 파고드는데 열중했다.
"으아…!"
마침내 호운의 몸에 완전히 자신의 성기를 안착시킨 청년은 망설임 없이 허리를 앞뒤로 흔들기 시작했다. 마른 통로에 나무토막같은 성기가 비비어지는 통증에 호운의 입이 벌어졌다.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 해도 절로 비명이 새어나왔다. 비참함과 고통에 눈물이 줄줄 흘러나와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청년은 호운의 양 다리를 붙잡고 강하게 몸을 밀어붙였다. 거의 뽑을 듯이 빼내었다 찍어내리듯 꿰뚫는 동작에 호운의 몸이 육지에 올라온 물고기처럼 경련했다. 끈적거리는 물소리와 청년의 밭은 숨, 그리고 호운의 울음이 뒤섞여 천막안을 들썩거렸다.
그렇게 한참동안 쉬지 않고 격하게 움직이던 청년의 동작이 멈추고 호운은 속으로 역류하는 뜨거운 감촉을 느꼈다. 사년전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그 감각에 호운의 등도 벌벌 떨렸다. 청년은 그런 호운이 이 정사에 느끼는 것인가 싶어 묘한 눈초리를 했지만 곧 힘을 잃고 축 늘어진 호운의 성기를 보고 그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호운이 어떻게 느끼든 간에 청년은 호운의 몸에서 만족을 얻었다. 그것은 그가 단기간에 절정에 이른 것을 보면 분명했다. 청년은 눈물로 흐려진 호운의 눈을 보며 낮게 속삭이듯 말했다.
"왜 하필 다 큰 사내놈을 깔아뭉개고 있나 했더니 네놈이 명기로구나."
"으--으으--!!!"
청년의 말에 병사들에게 억눌려있던 융이 다시 발작하듯 몸을 떨었다. 청년은 그런 융을 돌아보고 피식 웃었다. 융의 눈빛이 제 것을 탐내는 자를 향한 분노로 이글거렸다. 얼굴로 보아 아직 어린 아이임이 분명한데 저 정도라면, 필시 다 자라 성인이 된다면 더욱 더 강해질 것이다. 그러나 청년의 흥미는 융에게 머물지 않았다. 그는 곧 늘어져 있는 호운의 양 다리를 붙잡고 다시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힘을 잃고 있던 그의 성기도 다시 단단해져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짐승 같은 놈이 원하는 사내고, 사내치고 반반해보이는 얼굴에 호기심이 생겼다. 그러나 지금은 그 몸에 호기심이 있었다.
처음부터 한번으로는 끝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생각했던 호운은 다시 허리를 움직이는 청년의 동작에 놀라지 않았다. 한번 청년이 내뿜은 액체로 질척해진 호운의 몸에서 음탕한 물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 호운은 눈을 감았다. 잔뜩 고여있던 눈물이 눈감은 눈매에서 뺨을 따라 주르륵 흘러내렸다.
"으아악!"
"자, 잡아라!"
"막아라!"
우당탕! 쿵!
눈을 감았던 호운은 갑작스러운 소음에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다. 얇은 막 너머로 목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져있는 병사와 병사들에게 억눌려 으르렁대는 융의 모습이 보였다. 어찌 재갈을 제거했는지 융은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그건 내꺼다, 당장 비켜! 비키란 말이야!"
소리를 지르는 융의 눈빛은 미친 사람처럼 흉흉했다. 목에서 피를 뿜는 병사를 누가 그리 했을지는 뻔했다. 아직 호운의 양 다리를 붙잡고 허리를 움직이고 있던 청년은 그런 융의 외침에 오히려 비웃음을 흘렸다.
"네 것? 이 천하에 너 같은 비천한 놈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있을 것 같더냐."
"그건 내 것이란 말이다!"
"저놈의 입을 다시 막아라. 그리고 저 놈의 목을 베어라."
처음 청년이 가리킨 것은 융이었지만 의외로 두 번째 명령은 융이 아닌 멀뚱히 서 있던 다른 병사를 향해 있었다. 그는 처음 청년이 융을 억누르라 명령한 두 사람중 한 사람이었다.
"둘이서 고작 저런 애송이 하나 버티지를 못했고 제 동료가 목이 잘려 쓰러졌는데도 제 살길만 찾아 물러선 놈이다. 저런 놈은 필요 없다."
"왕야, 왕야 살려주십시오 왕야!"
병사가 비명처럼 청년을 불렀지만 청년의 말은 번복되지 않았다. 곧 비명을 지르는 병사가 끌려 나가고 바닥에 쓰러진 병사의 시체도 사라졌다. 입이 틀어 막힌 융이 다시 병사들에 의해 억눌려 상황이 정리되자 다시 호운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눈물 젖은 호운의 얼굴을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지옥을 알리는 미소였다.
엎드린 채 엉덩이만 높이 들고 청년을 받아들이던 호운은 뜨거운 액체가 자신의 몸속을 역류하고, 자신을 지지하던 손이 사라지자 힘없이 침상위로 무너졌다. 호운의 몸은 아직 정신을 잃은 채 바닥을 구르는 아이처럼 피와 정액으로 얼룩졌다. 이미 호운의 몸을 가리던 옷은 모두 사라진 후다.
그러나 벌거벗은 호운과 달리 청년은 하체만 드러낸 채였다. 그나마도 호운의 몸에서 손을 뗀 후 자신의 앞섶을 정돈해 버리자 청년의 모습은 언제 그런 음행(淫行)을 저질렀냐는 듯 단정해졌다. 힘없이 침상에 늘어져있던 호운은 숨을 몰아쉬며 청년의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분명 청년은 먼저 끌려난 아이처럼, 그리고 옛날에 호운이 그러했던 것처럼 호운을 침상에서 끌어내라 명할 것이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그때까지만 참으면 된다. 호운은 스스로를 격려하듯 그렇게 되뇌었다.
"지금도 저것이 네 것 같으냐?"
청년의 냉랭한 음성은 호운이 아닌 융을 향해있었다. 호운이 청년에게 안기는 동안 재갈이 물려진 채 침상 위를 노려보던 융의 입에서 재갈이 제거되었다.
"내 꺼다."
재갈이 물려져있는 동안에도 쉬지 않고 소리를 지르려 한 융의 목소리는 이미 칼칼해져있었다. 그러나 위협적인 느낌만은 여전했다. 청년은 융의 대답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는 병사들에게 손짓을 하며 말했다.
"저놈의 등에 박힌 화살을 뽑고 치료해 주어라."
"어디 가두어 둘까요."
"그래. 단단히 가두어야 할 게다."
청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병사들은 바닥에 억눌린 융을 질질 끌고 천막을 나섰다. 천막을 나서는 그 순간까지 융은 침상 위를 노려보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죽여버릴테다, 네놈을 죽여버릴테다!"
미친듯이 고함을 지르는 융의 목소리가 차츰 멀어지고 나서야 호운은 눈을 떴다. 어째서인지 청년은 아직 호운을 끌어내라는 명령을 하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의아해 하던 것도 잠시.
"정리해라."
마침내 청년의 명령이 떨어지자 호운은 오히려 안심했다. 이제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안심에 전신에서 힘이 쭉 빠졌다.
"이자를 말입니까?"
"이곳을 정리하라는 말이다."
뭔가 당황한 기색이 느껴져 호운은 가물가물한 눈을 떴다. 그러자 병사들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호운은 그들이 자신을 침상에서 끌어내리리라 짐작하며 몸에서 힘을 뺐다. 그러나 호운의 몸은 침상 밖으로 끌려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두명의 병사가 호운의 몸을 억누르고 한명의 병사가 호운의 가랑이로 손을 뻗었다.
무심결에 비명을 지르려는 호운의 입을 상체를 억누른 병사가 막았다. 곧 철벅거리는 물소리가 나며 호운의 다리 사이로에 무언가가 침입했다. 보지 않아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분명, 그것은 호운을 억누른 병사의 손가락이었다.
상상하지 못한 상황에 호운이 경기를 일으키듯 발버둥쳤지만 그를 억누른 병사들의 손길은 조금의 저항도 용납하지 않았다. 별안간 안에서 밖으로 끈적한 액체가 흘러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안을 가득 채우며 역류했던 것이 병사의 손을 따라 차츰 밖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역류하는 감각만큼이나 끔찍한 감각에 호운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윽고 안을 휘젓는 손가락에서 물소리가 나지 않을 때 까지 호운의 하체를 뒤지던 병사는 정액대신 피만 흐르는 상태가 되자 호운에게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섰다. 병사가 물러서자 기다렸다는 듯 청년이 호운의 앞에 섰다.
이미 경악도 공포도, 그 무엇도 느낄 수 없을 만큼 지쳐버린 호운은 멍한 눈으로 청년을 올려보았다. 청년의 손이 자신을 향해 뻗어지는 것을 호운은 남의 일을 바라보듯 바라보았다. 그리고 청년이 자신의 허리를 붙들고 마침내 청년의 성기가 다시금 침입해 왔을 때도 호운은 별다른 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지독하게 피곤했다.
호운은 눈을 깜빡거렸다. 마치 악몽에서 깨어난 것처럼 급속도로 정신이 돌아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그가 있는 곳은 자신이 의식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천막 안이었다. 천막 안에는 호운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천막 안을 따뜻하게 데워준 모닥불은 이미 불씨만 남긴 채 사라졌고, 천막 안에는 싸한 냉기가 흘렀다.
호운은 벌거벗은 몸으로 저도 모르게 부르르 떨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자신의 옷을 발견하고 주섬주섬 걸쳤다. 아직 습기가 남은 것으로 보아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지는 않았다. 전신이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것처럼 노곤하고 아팠다. 그러나 더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호운은 비틀거리며 천막을 나섰다. 천막을 나서자 어스름하게 기울기 시작한 태양이 보였다. 붉은빛과 노란빛의 중간으로 흐물거리는 태양은 멀리 지평선의 근처에서 헤매고 있었다.
"자네 어디 있었나!"
호운이 비틀비틀 천막을 나서자 기예단 단장 채승이 호운을 발견하고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호운의 상태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충 그의 모습을 보면 간밤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뻔했기 때문이다. 그보다 지금 그에게는 급한 일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칼칼해진 음성으로 호운이 묻자 채승이 말도 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간밤에 교전이 벌어진 모양이야. 더는 여기도 안전하지 않으니 마을로 돌아가 있으라는 분부일세."
"마을로요?"
"그래. 여기서 이십리 쯤 가면 소승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거기서 대기하고 있으라는구만. 해가 지기 전에 떠나야 하니 서둘러야 하네! 자네도 어서 준비하게!"
채승의 재촉에 호운은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이미 기예단의 짐은 대부분이 정리된 상태였고, 초췌한 몰골을 한 아이들도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저 아이들의 신세나 자신의 신세나 다를것이 하나 없다는 생각에 호운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런 호운의 한숨은 아이들 뒤에 보이는 우리 안에 갇힌 융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사라지고 말았다.
사지가 결박당한 채 우리 안에 갇힌 융은 마치 짐승같이 눈을 번뜩이며 호운을 노려보고 있었다. 보통 기예단에서 부리는 짐승을 가두는 우리에 융을 가두어 놓은 이유는 뻔했다. 간밤의 일 때문이다. 호운은 섬뜩한 융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아이들 중 몇은 호운을 발견하고 울기 시작했고, 몇은 시선을 외면했다. 그들에게도 간밤의 사건은 충격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호운은 아이들을 어르며 길을 나설 채비를 했다. 그런 호운의 등 뒤로 융의 무시무시한 시선이 따라왔지만 호운은 끝까지 융을 돌아보지 않았다.
기예단이 소승이라는 마을에 도착한 것은 밤이 깊은 시각이었다. 일행은 소승에 도착하자마자 제법 큰 규모의 장원으로 안내되었다. 마을에 안내된 후에도 융은 우리에 갇힌 채였다. 호운이 언제까지 융을 저리 두어야 하냐 넌지시 물어보자 자신들이 돌아올 때 까지 절대로 융을 우리 밖으로 내어선 안 된다는 명령을 들었다고 했다. 채승은 사람과 기예를 파는 장사치였기에 돈을 주는 고객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다. 호운은 마치 짐승처럼 우리에 갇힌 융이 안 된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자신을 덮치려 한 짐승 같은 그를 떠올리자 이내 고개를 젓고 말았다.
"아무래도 전쟁이 될 모양이지?"
"감히 요족 그놈들이 국경까지 넘어올 줄은."
기예단이 머무는 장원에는 기예단 뿐만이 아니라 병사와 상인, 그리고 일반 사람들도 뒤섞여 있었다. 그들은 밤늦도록 전투에 나선 병사들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호운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였지만 절로 그의 귀에도 들어왔다. 간밤에 그 난리를 피웠던 병사들은 국경을 침범한 요족을 경계하기 위한 오왕의 병사들이라 했다. 오왕은 현 황상의 셋째아들로 장차 보위에 오를 가장 유력한 후보자의 한사람이다. 비록 형님인 진성왕이 있지만 최근의 기세를 보아 오왕이 황제가 되는 것도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라 상인들은 입방아를 찧었다. 호운은 그들이 말하는 오왕이 간밤에 자신을 유린했던 청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분명 병사들이 그를 왕야라 불렀으니, 그자일 것이다.
그를 떠올리면 그러고 싶지 않아도 전신에 식은땀이 흘렀다. 호운에게는 그자는 그저 무섭고 혐오스러운 자였으나, 그를 말하는 상인들이나 병사들은 한결 같이 그를 칭송했다. 그야말로 진정한 천하의 주인이라는 그들의 속삭임에 호운은 경기를 일으키듯 귀를 막았다.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돋았기 때문이다.
기예단의 사람들이 모조리 곯아떨어진 심야, 호운은 잠들지 못했다. 몸은 피로한데 정신이 말짱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거리며 뒤척이던 호운은 결국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심정이 너무 복잡했다. 아니, 생각하면 할수록 두려웠다. 결국 기예단이 여기서 기다리는 것은 그 병사들이고, 병사들이 오면 똑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다.
차라리 자신은 나았다. 필시 왕야라는 자는 자신을 안고 싶어 안은 것이 아니다. 호운은 그가 융 때문에 자신을 안았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것은 간밤에 왕야라는 자가 자신이 안았던 아이만을 따로 관리하라 채승에게 명령했다는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채승은 혹시나 그 아이가 달아날까 아이의 손목과 자신의 손목을 밧줄로 꽁꽁 묶고 하루 종일 아이를 자신의 곁에 두었다. 그것만 보아도 왕야는 다시 호운을 안을 마음이 없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 호운은 하룻밤의 치욕이라고, 살아보면 버텨야 하는 일이라고 넘길 수 있었다. 어차피 처음도 아니었으니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사정이 달랐다. 이런 작은 마을에 병사들을 위로하는 사람을 불러 모아 봐야 한계가 있다. 필시 아이들이 다시 병사들의 노리개가 될 것이고, 자신은 그 광경을 또 다시 지켜봐야 할 것이다. 자신에게는 그것을 막을 힘이 없었다.
멍하니 자리에 앉아있던 호운은 결국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방 한구석에 정리되어 있던 짐 중 자신의 짐만을 꺼내 조용히 방을 나섰다.
장원의 마당에는 인기척 하나 없이 조용했다. 호운은 그런 마당을 벽을 따라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걸었다.
"그래, 도망가라."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호운은 화들짝 놀라 품에 안았던 짐을 놓칠 뻔 했다. 심장이 두근거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호운이 덜덜 떨며 돌아보자 우리에 갇힌 융이 형형한 눈으로 호운을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자유로워지면 널 가만두지 않을테니 도망치는게 좋을거다."
융의 말에 호운은 말을 잃었다. 형형하게 자신을 노려보는 융을 보자 속에서 기이한 것이 북받쳐 올랐다. 호운은 융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호운이나 융이나 신세는 거기서 거기였다. 융은 아비의 도박 빚에 팔려왔고 호운은 어미에 의해 쫓기듯 고향을 떠났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것은 피차일반인데, 융은 처음 봤을때부터 호운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허나, 어제 일을 생각하니 융의 태도가 단지 호오(好惡)의 문제로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호운의 이해를 초월해 있었다.
"넌 도대체…."
억누르던 것의 반동처럼 입이 열렸지만 호운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어이해 나를 안으려 했느냐.
왜 나를 네것이라고 하는 것이냐.
어찌해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는 것이냐.
여러 가지 의혹들이 복잡하게 머릿속을 파고들었지만 결국 호운은 입을 다물었다. 뭐라 말을 하기에 눈앞의 융의 눈빛은 너무나 강렬했다. 호운이 입을 다물자 융은 흐흐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그것이 아무리 들어도 다 큰 사내의 웃음같아 호운은 또 다시 섬뜩해졌다.
"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내가 이리 묶여 있는 기회는 흔치 않으니 욕이든 뭐든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면 될텐데 왜 입을 다물지?"
"………."
빈정거리듯 웃은 융의 목소리는 낮았다. 융은 호운을 부리부리한 눈으로 바라보다 곧 더욱 음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가 말하지 않으면 내가 말하지. 내게는 그리 저항해 놓고 왜 그 놈에게는 그리 순순히 안긴거지? 상대가 그럴듯해 보여 안기고 싶은 마음이라도 들었어?"
융의 물음에 호운은 섬뜩한 것이 등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호운은 그러한 한기를 뿌리치듯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항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하! 그 병사들이 그리 무서웠어? 이 나 보다, 겨우 그런 병사들이?!"
융이 사납게 으르렁거리자 호운은 고개를 저었다. 호운은 마치 융에게 대답하는 이 기회를 빌어 제 마음을 정리하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저, 그 남자가 두려웠을 뿐이야."
"왜, 침상에서 끌려나온 놈을 봐서 그래? 겨우 그 정도에 두려움을 느꼈어?"
빈정거리는 융의 목소리에 호운은 울컥해 대답했다.
"어찌 될지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어차피 저항해봐야 고통만 커진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호운의 대답에 융은 두 눈을 흡떴다. 호운은 자신의 대답 어디에 융이 저런 표정을 지을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융이 가슬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제가, 처음이 아니었던 건가?"
호운은 대답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융은 그런 호운을 보고 안달이 난 것 처럼 물었다.
"대답해라, 어제가 처음이 아니었어? 그럼, 누구야? 상대는 누구야? 채승이냐?!"
헛다리를 짚는 융의 물음에 호운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어제 그 남자야."
"어제 그 작자? 왕야라는? 헛소리, 그자는 너를…!"
"그래, 못 알아봤지. 하지만 나는 한 번에 알아봤어. 한번도 잊은 적 없는 얼굴인데 어떻게 내가 그를 잊겠어?"
호운은 씹어뱉듯 말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니 더 저항할 수 없었어. 저항 못하는 내가 우스웠어? 비참해 보였어? 웃기지마. 어머니에게 팔려간 그 밤 보다는 차라리 어제가 나았어. 적어도 누가 나를 팔지는 않았으니까. 버림받은 기분도 느끼지 않았으니까. 그저 하루만 참고 넘기면 될 일이니까!"
적어도 그랬다. 어제는 고통스러웠지만 비참하지는 않았다. 굴욕적이지만 슬프지는 않았다. 그저 아팠고, 화가 났고, 무서웠고, 굴욕적이었을 뿐이다. 정신적인 상처는 처음보다 어제가 훨씬 적었다. 육체적으로는 더 힘들었지만 적어도 정신은 그랬다.
호운의 대답에 융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호운은 격앙한 감정에 쓸데없는 말까지 쏟아낸 자신을 자책하며 융을 바라보다 홱 등을 돌렸다.
호운이 몇 걸음 채 떼지 못했을 때 등 뒤에서 융의 목소리가 들렸다.
"잊지마."
"?"
호운이 미간을 찌푸리고 돌아보자 우리안에서 융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나도, 절대로 잊지마."
호운은 어이가 없어졌다. 이미 융은 호운에게는 잊고 싶어도 잊기 힘든 존재라는 것을 모르는 걸까. 그러나 더 말해봐야 평소처럼 바보취급 당할 뿐이라는 것을 아는 호운은 그대로 등을 돌렸다. 장원을 나설 때 까지 등 뒤로 융의 시선을 느꼈지만 호운은 이번에는 한 번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융은 호운이 사라진지 한참이 지나서도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해가 뜨고 사람들이 나온 후에도, 융은 오직 호운이 사라진 방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운이 사라지고 이틀이 지나고 오왕이 병사들을 이끌고 소승으로 왔다. 그는 소승의 장원에 들어서마자 기예단 단장 채승을 찾았다.
"내가 말한 녀석은?"
"융은 저기 있습니다."
채승이 가라킨 방향에 우리 안에 얌전히 앉은 융을 본 오왕은 만족스레 웃었다. 그리고는 채승에게 다시 물었다.
"다른 한 녀석은?"
"소아는 방에 있습니다. 왕야의 말씀대로 잘 감시해두었습니다."
굽실거리는 채승을 보며 오왕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석의 이름이 소아더냐."
"임소라는 이름이온데 소아라고 부릅니다."
"그래? 안내해라."
사실 채승은 임소의 이름도 몰랐다. 왕야가 다시 그 아이를 찾을 것을 암시한 후에야 부랴부랴 알아둔 이름이었다. 채승은 허리를 굽힌채 재빨리 오왕을 안내했다. 보통 사람이라면야, 갓 열 살이나 되었음직한 계집아이를 품는다면 변태 취급을 받을 테지만 상대는 왕이었다. 고귀한 자들이 어린 계집아이를 좋아한다는 것이야 서민들에게도 유명한 일이었으니 채승은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못했다. 채승은 혹시나 오왕의 첩이 될지도 모르는 신분이라 생각해 임소를 제법 그럴듯하게 대접했다. 옷도 비단옷을 구해 입히고 오늘 오왕이 도착할것이니 준비하라는 전갈을 받은 후에는 깨끗이 씻겨 준비시켰다.
"여깁니다."
채승은 고개도 못 들고 어렵게 문을 열어 오왕을 안내했다. 방 안에 앉아있던 계집 아이는 오왕의 등장에 경직되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처음 오왕에게 안기던 밤에 미리 잘 교육받은 대로, 아이는 왕을 대접하는 법을 알았다.
"와, 왕야를 뵙습니다."
채승은 덜덜 떠는 왕소를 흐뭇하게 보았다. 임소는 겨우 은자 한냥에 사온 아이였다. 그런데 오왕의 눈에 들었으니 적어도 은자 한냥 값, 아니 그보다 더한 값을 한 셈이다. 원래 하룻밤의 계약이던 것이 오늘까지 이어진 것도 전적으로 저 임소가 왕야에게 잘 보인 탓이니 이 얼마나 흐뭇한 일이던가.
그러나 그런 채승의 흐믓한 미소는 방에 들어선 오왕의 싸늘한 목소리로 인해 부서지고 말았다.
"저 아이는 누구냐?"
"네? 누구…라니요."
"나는 분명 내 시중을 든 자를 준비해 두라 말했을텐데."
"저 아이지 않습니까 왕야. 그날 왕야를 모신 것은…."
채승이 얼떨떨하게 대답하자 오왕이 혀를 찼다. 그러자 그의 곁에 서 있던 한 사람의 병사가 다가와 채승에게 말했다.
"왕야께서는 그날 밤 왕야의 시중을 든 사내를 준비하라 하셨네."
"그러니까 저 아이가 아닙니까."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채승의 대답에 오왕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오왕을 모신 그 사내는 자신이 왕을 모셨다는 사실을 채승에게 고하지 않은 듯 보였다. 그 사실이 미묘하게 불쾌해 오왕의 미간은 절로 찌푸려졌다.
그러나 곧 오왕은 방을 나서 성큼성큼 융이 갇혀있는 우리로 다가갔다. 융은 우리 너머로 오왕을 형형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오왕은 그런 융을 차갑게 노려보며 물었다.
"그 자의 이름이 무엇이냐?"
"누구를 말하는 것이오?"
불손한 융의 대답에 주변에 있던 병사가 욱하며 덤벼들려 했다. 그러나 오왕은 손을 들어 병사를 제지하고 말을 이었다.
"그날 내 시중을 든 사내 말이다. 설마 네 것이라 주장하면서 이름도 모르지는 않겠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구려."
상대가 왕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융은 배짱을 부렸다. 융의 대답에 오왕은 분노해 소리를 지르거나 하지를 않았다. 대신 자신의 뒤로 따라와 어쩔줄 몰라하는 채승을 불렀다.
"기예단원들을 모조리 집합시켜라, 지금 당장."
밤에 있을 것이라는 연회준비로 분주하던 아이들은 갑작스러운 집합명령에 허둥지둥 마당으로 모여들었다. 병사들이 쭉 마당을 둘러싼 모습에 아이들은 긴장했지만 명령을 거스를 수는 없어 모여든 아이들은 덜덜 떨면서 눈치를 살폈다. 채승은 그런 아이들의 숫자를 세었다.
"왜 아이들 뿐이냐? 어른들도 모아라."
오왕의 명령에 채승은 당황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단주 소완서와 기예단의 짐꾼이며 기술을 가르치는 재주꾼, 호객꾼, 익살꾼들이 몰려나왔다. 주로 아이들로 이루어진 기예단인지라 어른들의 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오왕은 모여든 사람들의 얼굴을 찬찬히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채승은 오왕이 눈살을 찌푸리자 무언가 잘못되었냐는 듯 눈치를 살폈다.
"이게 모두란 말이냐?"
그리 묻는 오왕의 목소리는 싸한 냉기가 흘렀다. 채승이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이자 오왕이 다시 물었다.
"진정, 이것이 네 기예단의 전부냐?"
"예 왕야, 이것이 모두입니다."
"진정 이것이 전부냐? 이틀 전에 있던 그 사람들 전부란 말이냐."
오왕의 냉랭한 물음에 채승은 눈을 껌뻑이다 곧 이해한듯 대답했다.
"한 사람만 빼고는 전부입니다."
"어떤 자가 빠졌느냐."
"기예단의 아이들을 관리하는 자인데 이틀 전 밤에 사라졌습니다. 어차피 정식 단원도 아니니 어쩔 수…."
거기까지만 들어도 대충 감이 온 오왕은 어이가 없는 듯 웃었다. 채승은 자신의 대답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오왕이 웃자 저도 모르게 어깨를 경직시켰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채승이라도 지금 오왕의 웃음이 기분 좋아 웃는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사라졌다는 그놈 이름이 무엇이냐?"
"그게…."
채승은 오왕의 눈치를 살피다 다른 단원들을 보았다. 단원들도 모르겠다는 듯 다들 고개를 저었다. 대부분이 성씨로 그를 부르다 보니 이름을 아는 자가 없었다. 아이들도 그저 그를 형이나 오빠라고 부를 뿐 이름을 부른적이 없어 이름을 아는 자가 없었다. 오왕은 그 모습이 더욱 어처구니 없는 듯 웃었다.
"호씨라는 것 말고는 잘…."
머뭇거리며 대답하는 채승을 보며 오왕은 웃음을 거뒀다. 웃을 때도 냉랭해 보였는데 웃음을 거두자 얼굴이 더욱 냉랭해 보였다.
"내 분명히 명령을 내렸다. 내 시중을 든 놈과 저놈을 잘 감시해 두라고."
오왕의 말에 채승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설마, 저 말대로라면 그 호씨가 오왕의 시중을 들었다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그날 아침, 호씨는 누군가와 밤을 보낸 것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기 했다. 채승은 그저 그것이 병사들에게 잘못걸려 변을 당한 모습이라 생각하고 가볍게 넘겼었다. 그런데 설마하니 그 호씨가 오왕과…?
"그런데 감히 천한것이 내 명령을 어기는구나. 이는 왕의 권위에 도전함이나 다름이 없다."
"와, 왕야!"
오왕의 목소리에는 분노한자 특유의 날카로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 서린 냉기는 이제 뼈가 시릴 정도였다. 채승의 안색이 새파래져 가는 가운데 오왕이 차갑게 말했다.
"감히 왕의 명령을 어긴 저놈의 목을 베어라."
"와, 왕야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채승이 오왕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지만 이윽고 병사들의 손에 이끌려 오왕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자리로 끌려나왔다. 그리고 채 비명도 지르기 전에 목이 잘려 바닥을 뒹굴었다. 그 모습에 기예단 아이들이 비명을 질렀다. 몇 명은 졸도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어른들마저 핼쓱해진 그 풍경에도 우리안의 융은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왕은 검붉은 피를 내뿜으며 쓰러지는 채승의 몸을 흥미 없는 듯 바라보다 우리로 시선을 돌렸다.
"그놈의 이름을 말하지 않으면 네 목도 베겠다."
"베시오, 차라리."
눈앞에서 사람이 베어죽었는데도 융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왕은 그런 융을 가만히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보통 때의 오왕이었다면 융의 목을 베어도 백번은 베었을텐데 그는 목을 베라는 명령 대신 낮은 코웃음과 함께 융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날 밤 소승이라는 작은 마을에는 승전한 오왕을 위한 연회가 벌어졌다. 미리 오왕의 눈에 들기 위해 소승에 몰려있던 상인들은 "원하는 것을 하나는 얻었으나 하나는 얻지 못하였으니 불만이로구나."는 오왕의 말에 앞 다퉈 미녀들을 내밀었다. 오왕이 얻었다는 원하는 것은 요족에게서 국경을 지킨 것이고, 얻지 못한 것은 성욕을 풀기 위한 방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한 황족들은 성욕이 왕성하기로 유명했는데 오왕의 형인 진성왕에게는 벌써 마흔명이 넘는 첩이 있었고 조금 덜하다는 오왕에게도 스무명이 넘는 첩이 있었다. 그런 사내가 아무리 황명이라 하더라도 여자의 그림자도 없는 곳에서 몇몇일을 보내면 당연히 답답할 것이다.
그러나 오왕은 상인들이 내민 여자를 단 한사람도 취하지 않고 모조리 부하들에게 내려주었다. 그런 오왕의 행동에 상인들은 부하들의 사기를 고취시키기 위한 방법이 탁월하다며 감탄했지만 우리 안에 갇힌 융은 그저 코웃음을 쳤다. 오왕은 연회가 파하자 상인들을 돌려 보내고 혼자 침수 들었다. 그러나 다음날 밤, 은밀하게 거적에 싸인 시체가 오왕이 머무는 장원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기예단의 사내아이 둘이 모습을 감췄지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모두 입을 다물었고 그 사실은 오왕의 업적 아래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