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0. 폭풍우 치는 밤 (1/21)

00. 폭풍우 치는 밤

달마저 구름에 가려 칠흑같이 어두운 밤. 밤은 폭풍이 불어오는 심해처럼 뒤척이고 있었다.

타닥타닥.

그 밤을 헤치고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확히는 모습보다는 발소리가 먼저 존재감을 드러냈다.

한 치 앞도 확인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도 앞으로 내딛는 이의 걸음은 늦춰지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점점 더 속도를 높였다.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사람처럼.

타닥타닥타닥.

물론 그의 뒤로 따라붙는 기척은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화수는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어둠 속에서 뻗어 나온 손아귀가 머리칼을 움켜쥘 것 같았다. 턱까지 차오른 숨에 폐가 찢어질 것 같았지만 화수는 고집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아마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걸음을 멈추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 순간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통증만 아니었다면.

-!

화수가 본능적으로 아랫배를 감싸 안으며 걸음을 멈췄다.

허억허억. 부족했던 산소가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에 목구멍이 찢어질 것 같았지만 화수의 신경은 오직 감싼 배에만 향해 있었다. 정확히는 그 안에 자리 잡은 생명에게라고 해야 맞는 말이었지만.

조금 전 담 위에서 뛰어내린 것이 무리가 되었을까.

마른 몸이라 잘 티가 나지 않았지만 사실 화수의 배는 제법 불러 있는 상태였다. 멀쩡할 때도 운동과는 담쌓고 지내던 화수인데 이 배를 하고 담을 뛰어넘어 도망을 치고 있었으니 탈이 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하지만 화수 역시 아이를 가진 경험은 처음이니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제 배 속에 아이를 품을 거라는 상상은 꿈에서조차 해본 적이 없는 화수였다.

“착하지?”

부푼 배를 감싸 안은 화수가 태胎 안의 아이를 가만가만히 달랬다.

“지금은 안 돼. 조금만, 참자. 응?”

아이를 달래면서도 화수의 시선은 연신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마치 새끼를 밴 초식동물이 포식자를 경계하듯. 다행히 조금 전 날카로운 통증 이후로 더 이상의 통증은 없었다. 슥슥, 마른 손으로 부푼 배를 둥글린 화수가 걸음을 내디뎠다. 마음이 조급했다.

지금쯤 자신을 쫓는 이들의 기척이 여기저기서 들려와야 했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너무 조용했다. 오히려 조용하면 좋은 일이지 않냐고 제대로 도망쳤다고 안심해야겠지만 화수는 너무 조용한 지금이 더 불안했다. 상대가 누군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컥.

하지만 성급하게 걸음을 내디딘 탓일까. 두어 걸음 내딛지도 못하고 화수는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한 손으로 배를 감싼 채 다른 손으로는 겨우 돌담 벽을 짚고 균형을 잡았다. 이번엔 통증이 조금 전보다 훨씬 길고 날카로웠다.

하아.

겨우 숨을 토해내는 화수의 얼굴에 핏기라고는 없었다. 진짜 뭐 잘못된 거 아니야? 아픔보다도 먼저 드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그래놓고 조금 놀랐다.

사실 화수에게 배 속의 아이는 난감한 존재일 뿐이고 더더욱 이렇게 도망치는 상황에서는 그저 거추장스러운 존재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화수는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아, 안 돼.”

당황한 화수가 담벼락에 몸을 붙이고 배를 끌어안았다. 마치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 덕분에 화수의 몸이 기와 아래 드리워진 어둠 속으로 숨겨졌다.

“내가 잘못했어. 앞으로는 절대 너 같은 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말 안 할 테니까. 그러니까.”

그건 진심이 아니었어. 화수가 속삭였다. 누구에게도 이렇게 간절하게 매달린 적이 없었다. 심지어 자신을 버린 어미에게도 매달리지 않은 화수였다.

“가지 마. 제발, 나만 두고 가지 마.”

그런 화수가 애원하고 있었다.

이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아이가 소중하다는 걸. 오히려 너무 소중해서, 아닌 척 외면해왔다는 걸.

늘 그렇게 살아왔다. 그렇지 않으면 살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다시는 그런 온몸이 부서지는 경험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화수는 그 어떤 것도 마음에 품지 않고 살아왔다.

하지만 아니라고 외면한다고 해서 정말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그런다고 마음이 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서. 그래서 화수는 어쩔 줄을 몰랐다.

“제발.”

화수가 배를 꽉 끌어안았다. 사실 그건 아무 소용 없는 행동이었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어서 화수는 자신의 아이를 꽉 끌어안았다.

그 때였다.

갑자기 눈앞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화수가 저도 모르게 눈을 찡그렸다가 곧바로 자동차 빛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몸을 좀 더 바싹 뒤로 붙였다.

부앙.

흙먼지를 일으키며 전속력으로 달려오던 검은 자동차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화수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만약 조금 전 화수가 멈추지 않고 계속 가던 길을 가고 있었다면 아마 그대로 발각되어 붙잡혔을 것이 분명했다.

하아.

가라앉지 않은 희뿌연 흙먼지를 보며 화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어깨를 주저앉히던 화수가 이내 멈칫한다.

설마.

살짝 찌푸려진 화수의 눈이 향한 곳은 자신의 부푼 배였다. 하지만 곧 고개를 내젓는다.

에이, 우연이겠지.

사실 우연이라기엔 자동차가 사라지고 난 뒤로 거짓말처럼 통증이 사라졌지만 화수는 애써 그렇게 무시하고 넘겼다. 지금은 그런 생각에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툭. 투둑.

설상가상 심상치 않게 뒤척거리던 하늘에서 비마저 떨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화도 나지 않았다. 점점 굵어지는 빗방울에 화수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빗소리에 자신의 기척을 숨길 수 있다는 점이었다. 천천히 방향을 틀어 담과 담 사이, 차는 진입할 수 없는 샛길로 막 들어섰을 때였다.

끼이익-!

멀지 않은 곳에서 급정거한 차바퀴가 미끄러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순간 화수의 발도 그대로 멈췄다.

타닥.

누군가 다급하게 차에서 튀어나오듯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달려간 걸음이 멈추기 무섭게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고해.”

상부인 듯한 이의 목소리. 하아. 화수의 입에서 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럴 리 없음에도 순간 제가 생각하는 이의 목소리일까 봐 잔뜩 긴장했다.

“보고드립니다. 저희가 다리 쪽부터 샅샅이 훑어 내려왔습니다만, 오는 동안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없었습니다.”

“확실해?”

“확실합니다!”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는 군기가 바짝 들어 있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알았어. 가봐.”

“네!”

대답한 이가 다시 차에 오르자 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관의 차가 먼저 가도록 길을 비켜주는 듯했다. 안심한 화수도 다시 가던 걸음을 옮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또 다른 차가 출발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쏴아아아.

쏟아지는 빗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단숨에 젖은 화수의 머리카락을 타고 물이 뚝뚝 흘러내렸지만 화수는 눈도 깜짝할 수가 없었다.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 그리고 그 불길한 예감은 좀처럼 어긋나는 법이 없었다.

딸칵.

기묘한 침묵을 뚫고 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뒤이어 바닥을 딛는 묵직한 군홧발 소리까지. 그 소리를 끝으로 다시 묘한 침묵이 흘렀다. 주변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 순간만큼은 비마저도 멈춘 것 같았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누군지, 무슨 상황인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뒤돌아볼 수가 없었다. 돌아보기는커녕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었다. 그저 화수가 할 수 있는 일은 초식동물처럼 그 자리에 숨을 죽인 채 가만히 있는 것이 고작이다.

저벅저벅.

천천히, 하지만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발을 내딛는 소리가 천둥소리 같았다. 그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화수는 숨을 쉬는 것이 어려워졌다. 그리고 팽팽하게 당겨진 공기를 찢으며 들려온 목소리.

“확실하다라.”

­!

말도 안 돼. 순간 그 목소리를 들은 화수의 눈이 커졌다. 지금 한창 정무총감의 생일파티에 참석해 있어야 할 그가 어째서? 제가 도망친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기에는 지나치게 빨랐다.

그렇지만 이 목소리를 잘못 들었을 리 없었다. 무엇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그가 뿜어내는 패기霸氣로 아랫배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온몸이 벌벌 떨렸다. 지금 화수가 할 수 있는 바라곤 그저 정신을 잃지 않도록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사실 그것도 좋은 선택지는 아니었다. 이렇게 무작정 버티다가 뇌가 녹아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화수도 어쩔 수가 없었다. 단 한 번도 최선의 선택지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저 늘 최악의 선택지 중에서 그나마 조금 덜 최악인 선택지를 선택하는 게 고작이었다.

“이렇게 냄새가 진동하고 있는데.”

툭, 하고 내뱉은 목소리는 여상했지만 그 무게마저 여상하다고 생각하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정무국 내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제3 부장, 리 샤오였기 때문이다.

스릉.

검이 울었다. 새파랗게 벼려진 검이 어느새 병사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책임질 수도 없는 확답은 함부로 하지 말라고 안 배웠나?”

그나마 당장 베어버릴 생각은 없었던지 그의 손은 멈춰 있었지만 언제 손이 움직일지는 알 수 없었다.

“……사, 살려, 살려주…….”

뒤늦게 부들부들 떨리는 부하의 목덜미가 위태로워 보였다. 게다가 모르긴 몰라도 목을 겨누고 있는 검보다 지금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패기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 더 괴로울 터였다. 다행히 보다 못한 이가 불쑥 끼어들었다.

“부장.”

검은 우산을 씌워주는 이는 그의 직속 비서관인 카이였다.

“이 녀석들에게 그 냄새를 맡으라는 건 무리지요.”

그는 단순히 곤鯤에게서 나는 사향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설사 곤의 향기라고 하더라도 이런 빗속에서 그것을 찾아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이제는 쏟아지는 비로 인해 검은 우산 너머로 제대로 된 시야를 확보하기도 어려웠다.

“그건 부장만 맡을 수 있는 냄새가 아닙니까.”

마주한 시선에 카이 역시 몸이 짜부라들 것 같은 기분을 느꼈지만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버텼다.

“이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이토록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냄새가? 오히려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 리 샤오에게 카이가 어깨를 으쓱인다.

“그렇다고 몇 번을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

잔뜩 긴장했던 것과는 달리 노려보던 시선이 순순히 물러났다. 휙, 하고 겨누고 있던 검도 거두어졌다. 하지만 걸음은 되돌려지지 않았다.

저벅저벅. 이번에는 카이도 그의 뒤를 따를 수 없었다.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제 쪽으로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화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도망쳐야 한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사실 온몸이, 손가락 하나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 때였다.

“화수야.”

-!

거짓말처럼 바로 코앞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지금의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미치게 달콤한 목소리. 이질감마저 느껴지는 그 단어가 자신의 이름이란 걸 깨닫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어찌 보면 다행이었다. 인식하는 것이 늦지 않았다면 저도 모르게 부름에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화수의 대답보다 그가 더 빨랐다.

“이쯤에서 나오면 죽이지는 않을게.”

조금 전과 다를 바 없는 달콤한 목소리. 하지만 그와 완전히 반대되는 소름 끼치는 내용에 등줄기가 바짝 올라붙었다. 들키지 않았다, 라는 안도감 따위는 없었다. 금방이라도 손이 뻗어와 자신의 머리채를 잡아챌 것 같았다.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

“그러니까 나와.”

발이 굳어 움직일 수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만약 몸이 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상태였다면 이쯤에서 포기해버렸을 테니까. 평소의 화수라면 그랬을 것이다. 배 속에 아이가 없는 화수였다면. 부푼 배를 꽉 끌어안으며 화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뭐, 예상은 했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차피 처음부터 기대 같은 건 없었다는 듯 그렇게 툭, 하고 내뱉는 목소리가 어쩐지 상처 입은 듯 들리는 건 아마도 자신의 착각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런 화수의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 패기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네가 너무 얌전하더라고. 꼭 도망갈 것처럼.”

속였다고 생각했는데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걸 다 알면서도 도망치게 두다니. 지독한 사내였다. 어차피 도망쳐봐야 제 손바닥 안이라고 생각했겠지. 사냥감을 붙잡는 여흥쯤으로 여겼을지도. 이가 부득부득 갈렸다. 하지만 그런 분노조차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컥.

더 이상은 봐주지 않겠다는 듯 그의 패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온몸을 확 채우는 진한 향기에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배 속이 그로 가득 찬 것 같았다. 시뻘겋게 달군 쇳덩이로 몸 안쪽이 휘저어지는 감각. 본능적으로 굴복하고 싶어지는 붕鵬의 패기였다.

감히 그것을 버티려니 몸으로 먼저 반응이 왔다. 당연한 일이었다. 벌어진 입안에서 침이 줄줄 흘렀다. 부들부들, 몸이 경련했다. 뇌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화수는 버텼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배를 꽉 끌어안으며. 그나마 배 속의 아이에게는 그의 패기가 통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조금만 더 있다가는 뇌가 터져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던 그 때.

“빌어먹을.”

순간 패기가 누그러졌다. 물론 화수조차도 바로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미세한 변화였지만 분명 누그러졌다. 덕분에 화수의 뇌가 터져버리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으나 화수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쾅!!!

그도 그럴 것이 리 샤오가 패기를 누그러트린 그 찰나의 순간, 적막을 뚫고 엄청난 굉음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대장.”

그를 부르는 카이의 표정이 심각했다. 굉음이 들려온 방향이 하필이면 총감의 사택이 있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이름을 부른 것뿐이지만 리 샤오 역시 카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따르릉.

침묵 속에서 군용 통신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움직이지 않는 대장을 대신해 카이가 급히 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금 전 총감의 사택이 습격당했다고 합니다.”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급히 돌아온 카이가 보고했다. 하지만 리 샤오는 여전히 움직이질 않았다.

“부장.”

카이의 부름에도 그의 시선은 어둠을 향해 있었다. 마치 그 어둠 속에 화수가 숨어 있기라도 하듯.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아마도 몇 번은 더 죽였을 법한 살기가 가득한 눈이었다.

카이는 자신의 대장이 화수에게 단단히 미쳐 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총감의 습격소식을 듣고도 이러고 있을 리가 없으니까.

“부장. 당장 가보셔야 합니다.”

마음이 급해진 카이가 재촉했다. 감히 총감의 생일파티에 얼굴만 비치고 나와버린 데다, 하필 그 부재중에 이런 사고가 생겼다. 물론 제 상관의 신임이 그런 것에 흔들릴 수준은 아니었지만 괜한 오해를 사서 좋을 일은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 상황을 수습할 책임자가 리 샤오였다. 초조하게 시간을 확인하던 카이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부장-”

휙.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리 샤오가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 카이가 급히 그 뒤를 따른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이미 이곳을 빠져나갔을 겁니다. 있었다면 버티지 못하고 이미 나왔을 테니까요.”

그렇지 않고서는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기란 불가능했다. 심지어 같은 붕인 카이조차 그의 패기에 온몸이 압박될 정도였는데, 그 패기를 곤인 화수가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카이의 말에도 리 샤오는 아무 말도 없었다.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닫은 채 차에 올랐을 뿐이다. 오히려 조금 전에 비해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였다. 자신의 대장이 이성을 잃는 건 오직 한 사람과 관련되어 있을 때뿐이었다.

“수색은 계속하도록.”

낮은 숨을 내쉰 카이가 차에 오르기 전 뒤쪽에 서 있던 병사를 향해 일렀다. 그리고 급히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기 무섭게 차가 출발했다. 무서운 기세로 사라지는 차를 향해 경례를 한 채 꼿꼿이 서 있던 병사가 뒤늦게 어깨를 주저앉혔다. 그리고 그 역시도 막 차에 오르려던 그 때였다.

“왜?”

차에 오르려던 그가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

빗소리 사이로 분명 무슨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동료의 물음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걸어가던 병사의 눈에 어둠 속에 숨겨져 있던 샛길이 들어왔다.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법한 좁은 길은 교묘하게 돌담과 기와의 그림자에 가려 바로 앞까지 오지 않았으면 그 존재를 알아차릴 수 없는 사각지대였다.

“뭐가 있-”

쉿-!

뒤따라온 동료에게 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병사의 눈이 빗속에서도 번뜩였다. 들여다본 좁은 길 조금 안쪽에 누군가 웅크리고 있는 것이 분명한 검은 그림자가 보였던 것. 이게 웬 떡인가 싶었다.

총검을 고쳐 든 병사가 조심스럽게 웅크린 인영人影에게 접근했다. 어느 정도 거리를 확보한 병사가 외쳤다.

“꼼짝 마!”

어두운 데다 쏟아지는 비에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지만 자신에게는 총검이 있었다.

“천천히 일어나. 도망칠 생각 같은 건 꿈도 꾸지 말고.”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움직임이 없었다. 뒤늦게 뭔가 이상하다, 라는 생각을 했을 때 바로 등 뒤에 바싹 붙은 동료의 핀잔이 들려왔다.

“뭐야. 짚 뭉치잖아.”

욕망으로 번뜩이던 눈이 실망으로 물든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가 사람의 인영이라고 생각했던 검은 뭉치는 나무 짚을 한데 모아 묶어둔 뭉치에 불과했다.

“에이, 씨.”

푹. 총검으로 애꿎은 짚 뭉치에 화풀이를 한 병사가 방향을 틀었다.

황급히 차 문이 닫히고 차바퀴가 미끄러지는 소리를 끝으로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조금 전 소란이 거짓말처럼 빗소리 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쏴아아아아.

말 그대로 비가 쏟아붓고 있었다. 누군가의 어떤 흔적은 한 톨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