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Last track
코카인은 헤쉬쉬의 도움을 받아 베개에 기대앉았다. 병원에서 보호자에게 연락하라고 했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난 건 헤쉬쉬였다. 그토록 탈출하고 싶었는데 결국 돌아올 곳은 여기뿐이었다. 난곡동 사건 당시 현장에 달려온 누군가 병원으로 자신을 옮겼다고 했다. 생존자는 손으로 꼽힐 정도라고 했다. 잠깐 정신이 든 적이 있다. 그때 같은 병실에서 혼수상태였던 세준을 봤던 것 같다. 10년 전 잡혀왔을 때도 자신의 근처에 있던 사장과 임 실장은 생존했다. 혹시 자신의 비명이 야바의 살상력을 상쇄했던 걸까? 그것 말고는 세준의 생존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래, 그는 끝까지 등 돌리지 않았던 신자였다. 답답하리만치 충직한…. 하지만 세준은 그 아비규환 속에서도 동생을 데리러 갔다. 세준은 동생과 자신이 화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며칠 뒤 다시 깨어났을 때 그는 홀연히 사라졌다.
자신은 앞으로 영원히 듣지 못할 거라고, 담당 의사는 말했다고 한다. 껍데기만 남은 모습으로 숙소에 돌아왔다. 눈만 떴다뿐,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노래를 부르지도 않았다. 헤쉬쉬는 노트에 글씨를 써 보였다.
-이따 눈 온다는데 산책이나 할까?
그날의 후유증은 엄청났다. 청력을 잃은 건 물론 뇌를 다쳐 수시로 팔다리가 저렸고 경련과 마비도 찾아왔다. 야바는 같은 병원에 있었다고 들었지만 서로 한 번도 찾지 않았다. 자의로 가지 않은 자신에 비해 야바는 올 수 없었다.
그냥 집에…….
체온이 빠져나갔다. 세상의 잡음은 완벽하게 사라졌다.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내, 목소리……어디 갔어?
헤쉬쉬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노트에 글씨를 휘갈겼다.
-지금은 귀를 다쳐서 안 들리겠지만 네 목소리는 그대로야. 여전히 아름다워. 조금만 참아. 모두 백방으로 알아보는 중이니까…….
이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그럼 목소리가 나오는 게 무슨 소용이지? 음정은 제대로인지 발성은 올바른지 뭐 하나 확인할 길이 없는데! 완벽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데 어떻게!! 어떻게 노래를 안 불러? 어떻게 숨을 안 쉬고 살아?! 그건 사형선고였다. 노트를 내쳤다.
내 목소리! 어떻게 된 거야───?! 내 목소리───!!
목을 잡고 절규해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숨통이 막혔다. 어디선가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렸다. 그 아래 시퍼런 날을 품은 저주의 노래가 정신을 잠식해갔다. 귀를 틀어막았다. 구석에서 몸을 말고 노래가 나오는 곳을 찾았다.
……누가 부르는 거야? 이 소리 안 들려? 좀 그치게 해 줘! 이 소리가 나를 미치게 하고 있어!
가장 밑바닥을 건드리고, 공포심을 두드려 깨우는 매혹적인 허밍. 내장과 뼈로 배를 불린 바다 요녀는 아직도 허기진 음색으로 유혹했다. 자신을 완벽하게 파멸시키려 한다. 노래 잔향은 킬킬거리는 조롱으로 바뀌었다. 결박을 끊어야 한다. 그 소리 때문에 다른 소리가 들어올 틈이 없는 거다. 헤쉬쉬에게서 펜을 빼앗아 제 귓구멍을 찌르려고 했다. 뺨에 불이 터졌다. 볼펜은 침대 위로 뒹굴었다. 헤쉬쉬는 자신을 잡아채 뭐라 소리쳤다. 벌겋게 타는 눈동자가 다그쳤다. 문 건너편에서 가수들은 애처롭다는 눈으로 자신을 목도 했다. 속으로는 비웃는 거지? 이렇게 되길 기다렸지? 패배자의 말로는 이렇게 비참했다. 다리가 꺾여 나뒹굴었다. 그들에게 총을 겨눈 건 마지막 발악이었다. 차이석이 야바의 노래에서 벗어나면 되돌아오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날 차이석은 단순한 말기 중독 환자가 아니었다. 그저 한 사람에게 모든 걸 내던진 다른 한 사람이었다. 그동안 자신이 쫓았던 게 뭔지도 모르고 맹목적으로 매달렸다.
그래, 이건 암 덩어리 같은 질투심에 대한 죗값이었다.
으아아악─────!
잡히는 대로 물건을 던지고, 할퀴었다. 균형감각이 어긋나 손이 헛돌았다. 헐떡이며 널브러졌을 때 헤쉬쉬도 자신도 만신창이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정신이 암전되었다.
헤쉬쉬는 옷을 추스르고 코카인을 침대에 눕혔다. 병원에 실려왔을 당시 코카인은 넋이 나간 상태에서도 뭔가를 악착같이 쥐고 있었다고 한다. 피묻은 리모컨 반지였다. 그는 멍하게 있다가도 지옥을 본 사람처럼 발작한다. 헤쉬쉬는 뼈만 앙상한 코카인의 손을 물수건으로 닦았다. 얼굴과 손등 곳곳에 있는 생채기도 그의 아름다움을 흠집 내진 못했다. 이런 식의 접촉을 불편해했던 코카인이 순순히 몸을 맡겼다. 이대로 충분하다고, 헤쉬쉬는 생각했다.
거실 밖에서 가수들은 숨죽이고 있었다. 모르핀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코카인 저거 불쌍해서 어떡하냐…….”
필로폰은 풀죽은 어투로 말했다.
“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을 해야 알지. 그렇게 시끄럽다가 갑자기 뉴스는커녕 인터넷 기사도 사라졌으니……. 도끼가 그날 가담했던 똘마니들 시체를 확인했는데 폭탄 맞은 것처럼 누가 누군지도 못 알아볼 지경이었대. 조폭 간의 세력 다툼이라고 하기엔 뭐가 이상하지 않아?”
“알게 뭐야? 사장 새끼 천벌 받은 거지! 그 새끼도 뒤지기 전에 고자로 만들었어야 했는데!”
모르핀은 이를 박박 갈았다. 누구 하나 사장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는 없었다. 헤로인은 말했다.
“그래도 그 사건 이후로 임 실장하고 그 똘마니들 싹 다 검찰에 끌려갔잖냐. 누가 검찰 옆구리를 찌르지 않고서야 한방에 소탕할 리가 없지. 누군지 몰라도 만나면 큰절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야.”
모르핀의 어깨가 축 처졌다.
“똘아이도 있었으면 엄청 좋아했을 텐데……. 지지리 복도 없지. 하나는 불에 타 죽고, 하나는 산 송장이나 다름없고…. 쟤들은 어째 팔자가 저러냐?”
“똘아이가 코카인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했는데도 그렇게 오랫동안 같은 방 썼다는 게 신기해.”
“그게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야.”
모르핀은 말을 잘랐다. 헤로인과 필로폰은 눈을 크게 떴다. 모르핀은 음성을 낮췄다.
“헤쉬쉬가 그동안 코카인하고 같은 방 쓰고 싶어 얼마나 매달렸냐? 하루는 둘이 투닥거리는 걸 내가 들었는데, 코카인이 헤쉬쉬한테 그러더라. 똘아이한테 비밀이 있는데 그걸 사장한테 들키면 안 된다고. 사장 눈을 가릴 수 있는 건 자기뿐이라고…….”
“똘아이한테 무슨 비밀이 있는데?”
“그것까진 말 안 해서 몰라.”
모르핀은 코카인의 방을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한때 신처럼 떠받들던 코카인은 폐인이나 다름없었다. 청력을 잃은 건 둘째치고 정신이 망가져서 손 쓸 도리가 없었다.
“나, 사실 자유의 몸이 되면 우리끼리 음반 내서 데뷔할 생각이었다? 코카인이 리드 보컬 했으면 끝내줬을 텐데……. 진짜 저렇게 살아야 하는 거냐? 누가 고쳐줄 사람 없을까?”
모르핀은 눈물을 훔치고 한숨 쉬었다.
“사장 그 새끼, 새로운 힐러라도 찾아 놓고 뒈지지.”
TV 화면 속에서 차명환은 산타복을 입고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줬다. 태령 대표 이사가 매년 시설에 방문하는 건 연례행사였다. 차명환은 꽃 같은 아이들이 안기는데도 시큰둥했다.
“쌩쑈를 하는군.”
성재는 혀를 차며 TV를 껐다. 숙소 거실에 둘러앉은 브레인들은 패색이 완연했다. 선장을 잃은 한 달여간 차 회장은 언론을 주물렀고, 자금을 끌어모아 지분을 불렸다. 가장 최악은 이쪽이 수개월간 공들인 우호 세력들이 차 회장에게 빌붙었다는 것이다. 곧 다가올 주총에서 패배는 안 봐도 뻔한 결과였다.
“저 산타복 나한테 어울릴까?”
목소리가 나온 곳으로 사내들의 시선이 쏠렸다. 소파 상석에, 흘러내리다 굳은 촛농처럼 앉아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자릴 비웠던 자신들의 선장이 말이다. 브레인들은 웃음 한 자락 내보이지 않았다. 이석은 담배 필터를 빨며 혀를 찼다.
“얼굴들 풀어. 오전에 동지였던 자가 오후에 적군이 되는 게 이 바닥 생리니까. 밑그림은 넉넉하니 어떤 색을 부을지나 고민해 보자고.”
성재는 정색했다.
“너는 어떻게 이 지경이 돼도 태연자약하냐?”
“태연하다니, 내 속이 얼마나 까맣게 탔는지 안 보이나?”
이석은 셔츠 깃을 한껏 벌려 보였다. 그때 폰 진동음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차명환이었다. 난곡동 사건 뒤 이석은 며칠 간 혼수상태였다. 퇴원한 뒤에도 회사에 나가지 않자 틈만 나면 성가시게 했다. 당시, 피신해 있던 차명환은 뒤늦게 현장으로 달려와 생존자를 병원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석이 눈 뜨자마자 차명환은 광분해서 떠들었다. 기적이 일어나는 광경을 봤다고.
이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은 움직임에도 몸에 도배된 상처들이 악을 썼다.
“면도하고 사우나에라도 다녀와. 부랑자 같은 얼굴 보려고 여기 들어 앉힌 거 아니니까.”
그리고 테이블에 USB를 놓았다.
“차 회장 탈세자료야. 부자한테 예쁜 커플 은팔찌부터 채워주자고.”
이석은 숙소를 빠져나왔다. 메스컴에서는 한동안 난곡동 사건을 일면에 실었다. 서둘러 모든 메스컴을 막았으며 사건은 재개발을 둘러싼 조폭 간의 세력 다툼으로 종결하도록 했다. 차 회장은 이석이 병원 신세를 지는 사이 맹추격했다. 불리한 상황인 걸 알면서도 적극적인 제스쳐는 취하지 않았다. 그때는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를 걸어갔다. 도어락에 지문을 대자 현관문이 단말마를 토했다. 거실에 들어가도 맞아주는 이는 없었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 한켠, 석양이 흐르는 창가 아래에서 알비노 버미즈 파이톤이 리듬을 타는 허벅지에 머리를 얹고 있다. 동그란 등이 보였다. 녀석은 큼지막한 헤드폰을 낀 채 리듬을 따라 고개를 까닥까닥 흔들었다. 갸름한 볼의 솜털이 석양빛에 젖었다. 마른 몸에 품이 넉넉한 셔츠를 입히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다. 신비하고 외설적인 몸의 실루엣이 관음증을 부추겼다.
이석은 한눈 팔지 않고 걸어갔다. 냉혈동물이 머리를 들고 슉슉 경고음을 냈다. 볼륨을 있는 대로 키웠는지 녀석은 바로 뒤에 접근해도 눈치 못 챘다. 이석은 선이 고운 목덜미를 입술로 감싸고 턱 아래까지 물길을 그렸다. 녀석은 흠칫 놀라 고개 돌렸다. 차가운 표정과는 달리 녀석의 귀밑은 붉었다. 갈색과 회색이 섞인 눈동자에 무던히도 이성을 잃었다. 정확히 21일 14시간 동안, 녀석은 자궁 속에 든 태아처럼 수면에 빠져 있었다. 다시 깨어나 이 품에 들어왔을 때 생각했다. 태령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고.
이석은 뒤에서 감싸 안듯 녀석의 헤드폰을 벗겼다.
“누가 덮쳐도 모르겠군. 이렇게 빈틈을 보이니까 기어오르는 거야.”
차이석은 야바의 허벅지에 얹은 뱀 머리를 손등으로 후려쳤다. 그의 손에는 뱀 이빨 자국이 빼곡했다. 뱀은 머리를 치켜 올리며 공격 태세로 돌입했다. 그제야 요망한 것이 있었다는 걸 발견했다. 아까 차이석이 방에 가뒀는데 또 탈출했나 보다. 차이석은 요망한 것을 주시하며 뇌까렸다.
“내 최대 단점은 마음이 너무 약하다는 거지.”
퇴원하고 이 집에 온 첫날, 차이석은 무슨 바람이 불어선지 요망한 것을 같은 침실에 재웠다. 물론 침대 위로는 얼씬 못 하게 했으며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전에 한번은 요망한 것이 베개인 줄 알고 껴안고 잔 적이 있다. 차이석은 요망한 것을 강제 탈피시키려 했고, 요망한 것은 차이석 목을 똬리 틀어 질식시키려 했다. 30여 분의 혈투 끝에 차이석은 타박상으로, 요망한 것은 294번 척추 골절로 마무리됐다. 한때 죽고 못 살던 사이였다는데 이젠 다음날 아침 누가 요절나도 이상하지 않은 관계가 되었다.
난곡동 사건이 있고 한 달이 지났다. 오랜 잠에서 깨어났을 때 차이석이 앞에 있었다. 잘 잤어? 눈뜨자마자 그가 물었다. 그때가 태어나서 가장 많이 울었던 때였다. 그가 살아난 이유를 들었을 때 귀를 의심했다. 자신의 노래로 죽은 사람을 살렸다니, 쉽사리 믿기지도 않았고, 그가 살아 있다는 것도 실감이 안 났다. 사실 코카인이 총을 쏜 이후부터 기억이 없다. 재단한 것 마냥 그 장면만 통째로 잘렸다. 선명하게 남은 건 차이석의 죽음과 절망뿐이었다. 차이석은 영특한 뇌가 필요 없는 정보를 주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숨겨 놓은 거라고 했다. 그렇지만 가끔 이상한 꿈을 꾼다. 잔인한 장면들이 난도질 된 악몽. 꿈에서 깨어났을 땐 두서없는 장면만 머리에서 뒹굴었다.
차이석은 드레스룸에서 베이지색 코트를 들고 와 자신의 팔에 끼웠다.
“갈까?”
야바는 발딱 일어났다.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사방을 살폈다. 차이석은 재까닥 방으로 들어가 크로스백을 들고 나왔다. 물잔과 항우울제를 들고 와 자신의 입에 털어 넣었다.
“아…아…….”
마음만 앞서 괴이한 신음이 나왔다. 차이석은 바닥에 있는 붉은색 폰과 전자펜을 건네줬다. 야바는 액정에 글자를 써서 그에게 내밀었다.
-오늘은 너 혼자 치료받아.
목소리를 잃은 뒤, 폰과 전자펜을 항상 끼고 다닌다. 이 현상은 자신이 깨어난 직후부터였다. 그는 빠르게 폰 화면을 훑었다.
“왜?”
-그냥. 그렇게 하라면 해.
차이석은 자신을 물끄러미 보다 나머지 팔에 옷을 끼워 주었다. 말을 못 해도 딱히 불편하진 않았다. 평소에 자신은 말하는 행위를 즐기지 않을뿐더러, 차이석은 자신의 속을 귀신같이 읽어내 답답해할 틈을 안 줬다. 아마 자신이 혼수상태였던 동안 독심술을 마저 연마한 모양이다.
목소리가 아예 안 나오는 건 아니다. 어떻게든 쥐어짜면 신음 비슷한 게 나오긴 하지만 그때마다 불심지로 목구멍을 후벼 파는 것 같이 고통스러웠다. 병원에서는 성대에 종양이 생긴 것도, 결절도 아니며, 의학적으로 설명하기 불가능하다고만 했다. 목소리를 찾으려고 안 가본 병원이 없고, 안 해본 짓이 없다. 결국 오늘 아침에야 깨달았다. 자신이 겪는 현상은 모두 미개한 생선의 저주였다. 선원을 홀리지 못해 자살한 반인 반어가 한을 품은 게 틀림없다. 만약 노래로 그를 살린 게 맞다면, 그 말이 진짜라면, 그들이 이 목소리를 가져간 대신 차이석의 목숨을 돌려준 것인지 모른다. 그러니 목소리를 돌려받으려면 그의 목숨을 내줘야 하는 게 룰일 터다. 그럴 바엔 평생 말을 못 해도 상관없다.
차이석은 가위질당한 곳을 치료받으러 다닌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책을 잔뜩 샀다. 현재 지내는 거처는 전에 살던 아파트였다. 정확히는 차이석의 일꾼들 숙소와 층수만 서로 바꿔치기했다. 그는 누구도 파악 못 할 곳으로 가자고 했지만 낯선 곳은 질색이다. 서로 반씩 물러나 구조가 비슷한 곳에서 살기로 한 거다. 얼마 전 말소된 주민등록을 되살렸다. 민증은 일주일 뒤에 나온다. 두고두고 갈 텐데 이왕이면 살을 뺀 다음에 만들고 싶었다. 초조하지 않았다. 시간은 넘쳐났고 방해꾼도 없다. 그런데 문제는 민증을 신청하다가 본의 아니게 학력을 들켜 버린 거다. 중학교 1학년 때 잡혀왔으니 엄밀히 따지면 최종학력이 초졸이었다. 차이석은 중학교 검정고시를 제안했고 과외는 그가 해주기로 했다. 그는 한팔을 책상에 얹고 삐딱하게 섰다.
“첫 날이니 가볍게 두 페이지 어때? 틀리는 개수대로 손바닥 맴매야.”
야바는 전자펜을 빠르게 휘갈겼다. 눈꼬리를 바짝 치켜떴다.
-내가 왜? 문제 틀리는 건 선생이 무능력해서야. 그러니까 너나 나한테 맞아 봐.
그는 한쪽 눈썹을 세웠다.
“그럼 벌이 아니지.”
그는 기습처럼 시선을 겹쳐왔다. 자신의 아래턱을 느릿느릿 쓰다듬었다.
“손바닥 말고 특별히 원하는 곳 있으면 말해 봐.”
“…….”
초졸과 MBA 출신의 대화에 전혀 괴리감이 없는 건 대체 어느 쪽이 비정상일까? 차이석은 숙제를 잔뜩 낸 뒤 자리를 피했다. 파란 눈을 부릅뜬 디지털시계의 감시를 받으며 문제지를 뒤적거렸다. 휴대폰 진동이 집중을 흐트러트렸다. 액정에 뜬 번호는 뜻밖이었다. 야바는 한숨을 내리 쉬며 폰을 받았다. 귀가 쩌렁쩌렁 울렸다.
[이럴 줄 알았지! 번호 바꾸고 이사까지 하면 못 알아낼 줄 알았나? 다 알아본 거니까 잡아뗄 생각 마!]
찌질이였다. 자신이 입원했던 당시 차명환은 링거액 마르기가 무섭게 병실을 들락거렸다. 서둘러 퇴원한 뒤로도 어떻게 알아낸 건지 전화 융단폭격을 가했고 집에 찾아와 땡깡까지 부렸다. 폰 번호를 바꾸고 거처까지 옮겼는데 기어코 알아내다니, 저 정도 근성이면 차이석이 그를 대표자리에서 내쫓는 것도 만만치 않겠구나 싶었다. 콧김 뿜는 소리가 귓속으로 달려들었다.
[건방지게 내 말을 씹는 걸 보니 사기꾼이 확실하군. 아직도 목소리가 안 나오는 건가? 그럼 문자로 보내 봐.]
귀찮아. 귀찮아.
야바는 전자펜을 들고 액정에 뜬 번호로 문자를 전송했다.
-너 산타복 더럽게 안 어울리더라.
얼마 뒤 차명환은 툴툴거렸다.
[글씨 쓰는 꼬락서니 하고는…. 누군 입고 싶어서 입을 줄 아나? 명예 회장님 엄명만 아니었어도…! 아, 됐고. 차 전무, 나한테 말도 없이 멋대로 퇴원시켜놓고 코빼기도 안 비쳐? 너도 배은망덕하긴 마찬가지야. 기껏 구하러 가줬더니 고마운 줄도 모르고! 그날 니들이 누구 덕에 살았는데?!]
-세상이 다 너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겨우 119에 전화 한 통 한 걸로 유세 떨지 마.
[빌어먹을! 됐으니까 지금 어디야? 너한테 물을 게 많아. 네 정체가 뭔지, 그날 내가 본 게 뭔지, 당장 만나서 확인해야겠어!]
-네 입으로 기적이 일어나는 거 봤다고 했다며?
[그것뿐이면 내가 이렇게 날뛰지도 않지.]
심장이 딱딱해졌다. 야바는 머뭇거리다가 문자를 전송했다.
-또…… 뭐가 남았는데?
[차 전무가 말 안 하던가? 난곡동 사건 때 내가 데려갔던 깡패 하나가 간신히 생존했어. 정신 착란을 일으켜서 의심스럽긴 하지만 그날 봤던 걸 아주 상세히 말하더군.]
그날 기하는 죽었으며 코카인은 무사히 퇴원했고, 반푼이는 생존자 명단에 없었다는 것뿐, 차이석도 당시 상황을 자세히는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이미 알고 있다니…….
[어때? 좀 솔깃한가? 궁금하겠지. 궁금하고말고. 좋아, 직접 만나면 말해 주지!]
득의양양한 어투와는 달리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난곡동 사건에 관한 기사는 인터넷이나 TV에서는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차이석은 왜 갑자기 자신이 벅찰 만큼 숙제를 내주는 걸까? 자신의 뇌는 왜 굳이 그 장면만 삭제했을까? 그날 뭘 목격했길래……. 이유 모를 두려움이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관심 없어. 스토킹 질 그만하고 네 앞가림이나 잘해.
[끊기만 해! 그러지 말고 얼굴 좀 보……!]
휴대폰 전원을 꺼버렸다. 손끝이 서늘했다. 볼펜 끝을 물어뜯으며 동요하는 심장을 달랬다. 반푼이는 살아 있나? 기하는 어떻게 죽었지? ……코카인은? 내내 그들의 행방이 궁금했다. 아니, 궁금하지 않다. 두 팔을 겹쳐 그 위에 머리를 얹었다. 그동안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생각에 먹혀 살았다. 뇌가 기억을 지웠다면 다 이유가 있을 거다. 이제 스스로를 괴롭히는 건 관두기로 했다. 상념에 자물쇠를 채웠다. 열쇠는 잠시 빈 음낭에 넣어 뒀다.
잠깐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어쩌면 깊은 잠에 빠졌는지도 모르겠다. 죽음처럼 어두운 곳에서 노랫소리가 퍼져 나왔다. 그곳은 물속이었다.
아아아~~~~~~~~~~~~아아~~~~~~~~~~~~~~~~~~~~~~
재단 같은 암초 위에서 누군가 앉아 있었다. 광기에 젖은 눈동자는 품에 안은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다. 틈 벌린 살갗과 파열된 심장, 완벽했던 육신은 참혹했다. 그 모든 걸 지켜보며 핏물을 닮은 흐느낌을 토했다. 목소리는 낯설면서도 낯익었다. 소리의 향연에 팔다리가 잘린 사람들이 광란의 춤을 췄다. 머리가 파열되고 뼈와 내장이 피부를 찢어 사방으로 튀었다. 그곳은 절규와 피 냄새로 가득했지만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었다. 그 사람은 즐겁다는 듯이 사람들의 피와 절규를 핥았다. 공포에 질린 뼈와 살을 게걸스럽게 발라먹었다. 피묻은 입술이 요사하게 웃었다.
“……!”
야바는 벌떡 튕겨 일어났다. 얼마나 힘을 줬는지 갈빗대가 뻣뻣했다. 식은땀에 젖은 셔츠가 몸에 달라붙었다. 어두운 침실엔 혼자뿐이었다. 오한이 몸을 기어 다녔다.
“이…….”
그 이름을 매듭짓지 못했다. 소리를 내면 고통이 뒤따른다는 걸 몸이 기억했다. 거실로 나갔다. 발아래도 안 보일 만큼 어두웠다. 형광등 스위치도 사라졌고 집 구조는 짐승의 뱃속처럼 꿈틀거리며 악취를 풍겼다. 규칙적인 태동소리가 들렸다. 물컹한 벽에 의지한 채 어둠을 더듬어갔다. 손바닥에 정체불명의 액체가 쩍쩍 달라붙었다. 발치에 뭔가 걸려 나자빠졌다. 탯줄을 목에 감은 아이였다. 여긴 썩은 자궁이었다. 미끄러져 엎어지고 노폐물과 뒹굴고, 출구 없는 벽을 두드리고 할퀴었다. 암흑천지를 빠져나왔다. 모퉁이를 꺾어 돌았다. 어두운 터널이 펼쳐져 있었다. 이빨이 울릴 만큼 소름 끼쳤지만 발은 이미 암흑으로 걸어갔다. 첫 번째 문, 두 번째 문, 세 번째 문을 열었다. 그는 보이지 않았다. 원래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흔적조차 없었다. 이 문들은 과거로 향하는 통로일 터였다. 저 문을 열면 그날로 되돌아가 있을 거다. 차갑게 식은 그를 껴안았던…….
탕탕───!
총성이 고막을 가로질렀다.
으윽……!
형체 없는 소리가 튀어나온 순간, 어김없이 세이렌의 손톱이 목구멍을 쥐어뜯었다. 심장이 파열됐는데 살아날 리가 없다. 주민등록증이 나오길 기다리고, 문제지와 씨름하고, 그런 일상이 올 리가 없다. 그날의 절망과 피묻은 바람이 뒤엉켜 또다시 환상을 만들어낸 거다. 통로 끝에서 마지막 문이 보였다. 저 문을 열었을 때 절벽이 나오면 망설임 없이 뛰어내릴 거다. 문을 열어젖혔다. 더운 공기가 밀려왔다. 매운 냄새가 뒤따랐다. 어두운 실내 언저리에 불빛 덩어리가 어른댔다. 뿌옇던 형상은 점차 선명해졌다.
차이석은 갑작스러운 방문객을 주시하고 있었다. 노트북 팬 돌아가는 소리가 서류 위를 뒹굴었다. 재떨이엔 담배꽁초가 수북했다. 그는 벌떡 일어났다. 거친 반동에 커피잔이 뒤집혀 서류를 적셨다. 다리가 곤두박질쳤다. 겨울처럼 다가온 차이석 때문에 추락을 모면했다. 그는 경직된 얼굴이었다.
“왜 그래.”
재앙 같은 찰나였다. 야바는 손을 들어 그의 볼을 감쌌다. 피부를 만지고 콧날을 쓸며 그가 살아 있음을 확인했다. 손끝에 스미는 체온은 따뜻했다. 차이석의 입매가 서서히 굳어갔다. 그 표정마저 절실하도록 생생했다. 차이석은 자신의 볼에서 눈물을 거둬갔다. 그는 목 졸린 사람 같이 괴로워 보였다.
“……또 악몽 꿨나?”
이런 식으로 밤을 배회한 게 처음이 아닌가 보다. 그가 가끔 보였던 무거운 눈빛의 의미는 이것이었나 보다. 길다란 손가락이 자신의 머리카락에 얽혀들었다. 떨고 있는 건 그의 손길인지 자신인지 모르겠다. 그를 멀거니 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휴대폰을 두고 왔다.
왜 이 시간에 일해? 낮에 하면 되잖아.
그의 눈길이 입술의 움직임을 핥았다.
“네가 그러라고 했으니까.”
“…….”
“하루 종일 너만 보라고, 너한테 말 걸어 달라고 보챘잖아. 정작 다가가면 털을 세우지만.”
아니야. 그런 적 없어.
“했어. 지금처럼 이렇게 흔들리는 눈으로 귀에 속삭였어.”
아니…….
차이석은 자신의 턱을 잡아 올렸다. 검은 눈동자가 틈을 좁혀왔다.
“그런데 어떻게 너 외에 다른 게 눈에 들어오겠어.”
그가 기꺼이 심장을 포기했듯이, 목소리쯤 얼마든지 내줄 수 있다. 만약 그의 죽음 앞에 다시 돌아간대도 이 선택은 변함없다. 이 시간의 유통기한이 얼마나 남았는진 모르겠다. 저 눈빛이 내일 아침 부패한다 해도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스스로가 사랑스러웠다.
아깐 보이지 않던 문제집과 머그잔이 펼쳐진 그대로 있었다. 공부하다 졸려서 제 발로 침실까지 갔나 보다. 아니면 그가 침실로 옮겼거나. 아무래도 상관없다. 한 손엔 문제집, 한 손엔 베개를 들었다. 책상 옆에 베개를 깔고 엎드려 누웠다. 그때 문제지 위로 잘 깎인 이목구비가 침범했다. 짙은 눈동자가 정신을 분산시켰다. 야바는 문제지 모퉁이에 글씨를 썼다.
-옆에 있을 테니까 빨리 일해.
“너는 문제 풀어. 나는 너를 풀 테니.”
그는 와인처럼 짙게 웃었다. 자신의 머리를 당겨가 콧잔등을 깨물었다. 맞댄 심장 소리가 가슴에 전해졌다. 그 위에 가만히 호흡을 얹어 보았다.
“으……!”
괴이한 쇳소리가 목을 비집고 나왔다. 그 소리에 차이석의 허리짓은 난폭해졌다. 낮엔 가려졌던 것들이 밤이 되면 꺼풀을 벗어던진다. 그의 목줄기를 가른 상처와 사타구니에서 성기를 아슬아슬하게 빗겨간 가위질 자국, 모두 반푼이가 남긴 종적이었다. 그래서 차이석과 몸을 섞을 땐 예기치 않게 그가 떠올랐다. 그 순간 대담한 선이 시야에 가득 찼다. 흥분한 그의 얼굴이 잡념을 짓뭉갰다. 야바는 신음이 터지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를 밀어내는 손이 땀으로 미끄러졌다. 그는 짐승의 목소리로 아이처럼 보챘다.
“한 번만…마지막이야.”
벌써 저 말만 네 번째다. 두 달여간 자신의 노래를 듣지 않아 야만인의 출몰 횟수는 줄었지만 밤이 되면 야만인과 다를 바 없었다. 서로가 쏟아낸 토정액이 배에 눌어붙고 음부에 엉켰다. 엉덩이에 충돌하는 그의 고환이 오늘따라 선명하게 와 닿았다. 잠시 성기가 빠져나갔다. 그는 자신을 잡아당겨 아래를 꽉 붙였다. 불에 달군 쇳덩이가 꽂아 들어 내벽을 둥그렇게 훑었다. 그 율동에 점막이 딸려가는 듯했다. 아, 헉…! 그는 욕을 삼키며 강렬한 악센트로 아래를 쳐올렸다. 더는 참지 못할 파고였다.
“……하앗…으응……!”
생선의 저주는 신음 소리 한 자락도 용서치 않았다. 목구멍 속을 수백 개의 바늘로 헤집듯이 끔찍이도 아팠다. 어깨를 움츠리자 차이석은 몸놀림을 그쳤다. 그는 미간을 일그러트리며 아래를 주시했다.
“하아…. 어쩌라는 거야. 환장하게 맛있지를 말던가…….”
질 나쁜 언어가 거친 숨결과 엉켰다. 차이석은 뒤로 나갔다가 부드럽게 들락거렸다. 지금은 어디를, 어떤 강도로 자극해도 절정이 임박했다. 사정하고 나자 정신이 무섭게 하강선을 탔다. 그는 상체를 기울여 자신의 아랫입술을 품어 비벼 물었다. 야바는 혀를 내밀어 그의 입술을 세레나데같이 핥았다. 구멍에 깨물린 성기가 다시 몸집을 불렸다. 그는 목젖을 울리며 허리를 잘게 움직였다.
“조절이 안 돼.”
그는 자신을 뒤집어 허리를 잡아당겼다. 어깨를 바닥에 눌리고 엉덩이가 높이 들렸다. 뜨겁게 달군 성기 끝이 진입했다. 내벽을 헤치고 들어와 견딜 수 없는 곳에서 멈춰 섰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뒷목을 물었다.
“이렇게 넣고만 있을 테니 네가 허리를 움직여.”
U자형 테이블에 앉은 경영진들은 이석을 보며 수군거렸다. 더러 눈인사를 건네는 이도 있다. 회사 돌아가는 정황도 파악할 필요가 있고, 더는 자리를 비우면 늙은이가 토라진다. 때마침 차 회장이 경영진을 긴급 소집해 얼굴도장이나 찍을 겸 참석했다. 얼마 전까지 홍콩인들에게 공격당한 경영진들은 전세가 역전되자 기세등등했다. 차 회장과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무뚝뚝한 눈이 안부를 물어온다. 이석은 입술을 뒤틀어 화답했다. 차 회장이 긴급 소집한 이유는 역 매수를 제안키 위함이었다. 홍콩 펀드가 태령 지분을 공개 매수했듯이 태령도 홍콩 펀드의 주식을 사들이는, 한마디로 맞짱 뜨는 전략이다. 차 회장의 극약처방에 찬반이 나뉘었다. 퉁퉁한 사내가 입을 뗐다.
“얼마 전 대만 반도체 인수에 자금을 모두 투자했는데 다시 자금을 확보하려면 담보를 잡아야 합니다. 예전 미도파 사건 경우에도 그렇고 너무 위험합니다.”
“우린 이미 충분히 위험하오.”
차 회장은 잘라 말했다. 장내는 술렁거렸다. 이석은 가죽 의자에 등을 묻은 채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차명환은 늙은이 곁에 앉아 있었다. 회의는 뒷전이고 당장 테이블을 타고 덤벼들 기세였다. 못 보던 새 살이 올라 암 투병 환자의 흔적조차 없다. 그를 살린 장본인이 누구인지 알면 더욱 혈안이 되겠지.
회의는 별다른 결론 없이 마무리됐다. 차명환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늙은이에게 불려 갔다. 한 이사와 임 회장은 늙은이 뒤에 서서 이쪽 눈치를 살폈다. 그들의 약점을 쥐었다는 건 자신도 그들에게 약점을 잡힌 거나 마찬가지다. 주총이 불과 보름 앞이다. 그들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그때 판가름난다. 태령이 손에 떨어지면 조각조각 찢어 껌 값에 팔아치울 계획이었다. 갈기 빠진 늙은 사자가 지켜보는 앞에서. 그러나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수세에 몰리니 오히려 전의가 타올랐다. 유리에 투사된 도시를 감상하며 회의실 의자에 좀 더 앉아 있었다. 이석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어금니를 부딪쳤다.
“회의실에서 금연인 거 모르냐?”
빈 회의실로 성재가 들어와 문을 닫았다.
“어제 검찰에 자료 넘겼다. 그런데 아버지가 차 회장 쪽에 마음이 거의 기우신 눈치야. 전에 찍었던 임 회장, 미성년자 강간 스너프도 텄어. 언론사에 넘기는 즉시 곧바로 차 회장 주머니로 들어갈 거야. 임 회장 가족한테 보여준다고 했더니 마음대로 하라더군. 차 회장이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배째라야.”
“모든 언론이 차 회장 편은 아니야. 분명 어딘가 구멍이 있어. 너야 구멍 찾는데 도 텄으니 이럴 때 솜씨 좀 발휘해 봐.”
성재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준형이 동생이 지방 신문기자라던데, 후환이 두려워서 덤비려나?”
“심심한 기업 비리 얘기는 치우고, 차 회장 사생활부터 헤집어 보라고 해. 딸 두 명을 정신 병원에 처넣고, 산소에도 발길 한 번 안 한 재벌가 B씨. 길바닥에서 나체로 얼어 죽은 재벌가 A양. 자극적인 레파토리야 얼마든지 있잖아?”
“돌아가신 누나까지? 지독하긴.”
말과는 달리 성재는 이미 전화를 거는 중이다. 최대한 지저분한 개싸움인 게 좋다. 그래야 천하의 불한당이 나타났을 때 정의의 사도로 보일 테니.
그때 차명환이 회의실 문을 부수듯 열고 들어왔다.
“차 전무!”
성재는 차명환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피했다. 이석은 양팔을 활짝 펼쳤다.
“형님, 잘 지내셨습니까?”
“쇼하지 마! 사기꾼 어디로 빼돌렸어?! 직접 만나서 할 얘기도 있으니 좋은 말할 때 내놔.”
“할 얘기라뇨?”
“사기꾼이 힐러였다는 것, 또 그날 구역질 나도록 처참하게 죽은 사람들, 그게 누구 때문인지…크윽……!”
살기가 발화점 없이 솟구쳤다. 이석은 차명환의 머리통을 벽에 뭉갰다. 그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벽에 구겨졌다.
“고양이는 그 사실을 기억 못 합니다. 할 필요도 없고.”
“기억 못 하다니? 기억 상실증에라도 걸렸다는 거냐?”
“선택적 해리 장애라고도 하죠. 녀석이 선택해서 지운 겁니다.”
차명환은 벌게진 얼굴로 이를 갈았다. 몇 초만에 돌변한 자신의 태도에 적잖이 당황한 낯짝이다. 그는 머리를 움켜쥔 손을 틀어잡았다. 비실댔던 예전에 비해 제법 완력이 들어갔다.
“……좋아. 다른 건 둘째 치고 사기꾼이나 데려와! 목소리라도 고쳐 줘야겠……!”
다시 차명환 얼굴을 짓뭉갰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요. 고양이는 지금 그대로가 좋습니다. 목소리든, 기억이든.”
“너…설마, 사기꾼 목소리를 고칠 생각이 없는 거냐? 차 전무, 대체 왜 이래? 뭐 잘못 먹었어?!”
“어젯밤 고양이를 과식하긴 했죠.”
차명환 눈에 핏발이 섰다.
“너 이 자식…….”
이석은 차명환 입속에 손가락을 쑤셔 넣고 혀를 잡아당겼다. 차명환은 컥컥거리며 발버둥쳤다. 고개를 삐딱하게 틀어 벌레에게 시선을 박았다.
“알았나? 혓바닥은 마누라 팬티 속에서나 놀리라고.”
이석은 얼빠진 면상을 내팽개치고 출입구로 걸어갔다. 그때 양복 입은 사내들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들은 자신을 지나쳐 차명환에게 걸어갔다.
“차명환 씨 되십니까?”
“넌 뭐야?”
차명환은 구겨진 슈트를 탁탁 털었다. 사내가 신분증을 꺼내 보였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 검사입니다. 차명환씨를 주가 조작, 세금 포탈 혐의로 긴급소환합니다.”
“무슨 소리야?! 주가조작이라니?!”
이석은 그들을 뒤로 하고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차에 올랐다. 시큰거리는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메탈 시계 아래는 정원사가 남긴 가위 자국이 선명했다. 정원사는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물론 정원사가 아니라 야묘와 자신이 안전할 곳으로 말이다. 코카인에 대한 처벌도 하려했지만 실성한 사람을 상대로는 보람이 없으니 잠시 보류 중이다.
한 손으로 폰 단축번호를 눌렀다. 최근 기억이 끊어지는 일도, 두통도 없어졌다. 그러나 또 다른 증세가 급부상했다. 눈앞에 고양이가 없으면 안정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옆에 있어 상황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다. 신호음 끝에 야트막한 숨결이 넘어왔다. 그 소리에 숨통이 뚫렸고, 명치를 짓이기는 둔통이 함께 찾아왔다. 제 몸 하난 끔찍이 아끼는 녀석이 더 줄 게 없는지 매일 자신을 관찰한다.
“20분 뒤에 도착할 거야. 쌀쌀하니 꼬까옷 단단히 입고 준비해.”
희미하게 앓는 소리가 났다. 나오지 않는 소리를 쥐어짜듯, 오므렸다 벌리는 입술을 상상하자 칼로 심장을 저미는 듯하다. 얼마 뒤 문자가 도착했다. 삐뚜름한 글씨는 지극히 녀석답다.
-진짜 민증 없는 사람도 수술해주는 거 확실해? 그 의사 실력은 괜찮고?
“그쪽에선 최고 권위자고, 보호자가 있으니까 상관없을 거야.”
녀석은 답이 없었다. 얼마 뒤 짧은 답신이 왔다.
-응. 빨리 와.
차라리 잘 됐다. 힐러가 노래할 때 생명이 누수 된다. 수명이 단축될 바엔, 그 목소리로 다른 새끼를 중독 시킬 바엔 벙어리인 쪽이 낫다. 녀석에게 홀린 것들은 마지막 하나까지 찾아내 정원사와 함께 처박아 놓겠다. 녀석의 노래를 이미 취했다면 뱃가죽을 찢어서라도 꺼낸다.
‘그래…네 새끼가 좆.같.은. 소유주라 치자고. 그렇다면 칩은… 어떻게 설명할 거지?’
‘……칩을 박으라는 아이디어는…소유주 대가리에서 나왔거든.’
‘알았나? 우린 공범이라고. 좆 같은 소유주 씨.’
10년 전이라면, 한참 술과 약에 빠져 살 냄새 없인 잠도 못 잤을 시기였다. 칩을 박으라고 했다는 사실은 전혀 기억이 없다. 강기하가 보냈던 서류는 얼마 전 아파트 화재로 모두 재가 되었다. 대리인에게 굳이 확인할 생각은 없다. 누구 머리에서 나왔건 달라질 건 없으니까. 만약 강기하의 말이 맞다면, 강기하와 자신이 빼도 박도 못 할 공범이라면, 고양이는 이 사실을 몰라야 한다. 차 키를 구멍에 꽂아 돌렸다. 악셀레이터를 밟았다. 파라디소 가수들은 모두 노리개였으며 코카인은 그 중 괜찮은 인형에 불과했다. 단 한 번도 그들을 인간으로 본적 없다. 고양이 역시 마찬가지다. 그 야한 얼굴을 보기 전까지, 혼을 지배하는 노래를 듣기 전까지, 그 밑바닥에 숨죽인 어둠을 볼 때까지는. 녀석이 겪었던 세월은 차차 갚아 나가면 된다. 발바닥을 핥아서라도 말이다.
야바는 발딱 일어나 미리 프린트한 종이를 가방에 넣었다. 크림색 외투를 가방 옆에 놓았다. 차이석이 오면 곧바로 나가도록 모든 준비를 마쳤다. 오늘은 쓰레기통에 처박혔던 미래를 찾으러 가는 날이다.
심장이 울렁거려 구역질까지 났다. 차이석이 도착할 때까지 20분, 가는데 15분, 검사와 수술 시간까지 합하면 못해도 3시간 뒤에 자신은 진짜 남자가 된다. 수술이 성공하면 음모도 이식할 거다. 차이석은 고된 시간을 견딘 것에 대한 상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자신은 상을 받아 마땅했다. 항우울제를 있는 대로 털어 넣어도 진정되지 않았다. 항우울제 복용량은 세 알에서 두 알로 줄었고 위급한 일이 아니면 먹지 않는다. 차이석이 무던히 노력한 끝에 이제 벌레 더듬이도 안 보였다. 조금 전 차이석의 말이 머리에 맴돌았다.
보호자…….
보호자가 어떤 걸 의미하는지 그는 알고나 있을까? 어떤 상황에도 버려선 안 되며 보호자 노릇이 신물 난다 해도 평생 짊어져야 하는 짐짝이라는 걸. 간질거리는 가슴을 손톱으로 쥐어뜯었다.
아까 풀다 만 문제집을 찝쩍대다가 멀찌감치 밀어버렸다. 일생일대의 숙원사업이 코앞인데 눈에 들어올 턱이 없었다. 요망한 것이 문제집 위에 머리를 턱 얹었다. 바닥에 뒹굴던 펜 모양 레이저를 요망한 것의 이마에 쏘았다. 빨간 눈알이 세 개가 생겼다. 그것도 잠시 레이저 포인터를 내던지고 거실을 빙빙 돌아다녔다. 털이 북실한 슬리퍼는 검은 고양이 모양이었다. 쫑긋한 귀가 걸을 때마다 부대꼈다. 차이석은 엊그제 고양이 귀와 꼬리가 달린, 상의와 하의가 하나로 된 걸 잠옷이랍시고 사왔다. 그 밖에도 요상하게 생긴 물건들이 집안 곳곳에 나뒹굴었다. 모두 바구니에 쓸어 담다가 얼결에 집 청소까지 했다. 그래도 시간이 남아 빨래를 하려 했다. 차이석이 집안일을 모두 해결했기 때문에 세탁기 조작법은 모른다. 바구니를 들고 욕실로 발길을 돌릴 때였다. TV에서 여자 앵커 목소리가 들렸다.
[태령 그룹 차명환 대표가 오늘 오전 검찰에 소환됐습니다. 차명환 대표는 주가조작과 세금 포탈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태령 그룹 총수 일가와 계열사에 대한 수사도 착수 중입니다. 차명환 대표는 기자들의 질문에도 묵묵부답으로 조사실로 향했습니다. 차명환 대표 심문 뒤, 차 회장의 소환 여부가 판가름날 예정입니다. 얼마 전 홍콩 펀드의 적대적 인수 합병 시도로 악재가 겹친 태령 그룹의 향방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TV 화면에서 차명환은 기자들이 들이대는 마이크에 온갖 인상을 썼다. 산타복 입고 해맑게 웃던 게 엊그제인데 차명환도 참, 파란만장하다 싶었다. 개같이 벌어서 개같이 쓰니 저 사단이 나는 거다. 차이석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고 했다. 그는 차 회장이 바짝 따라붙는데도 초조해하지 않았다.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여유로움이 질투 났다.
잠깐 한눈판 사이 요망한 것이 벽에 기댄 가방 속으로 머리를 넣고 있었다. 작은 크로스 백엔 몸통 1/10도 안 들어갔다. 함께 가고 싶은 모양인데 어림없다. 가방을 들어 뱀 대가리를 탈탈 털어냈다. 마음 같아선 당장 택배로 정글에 보내버리고 싶지만 정글엔 아는 사람이 없다. 뱀 꼬리를 잡아 방으로 질질 끌고 갔다. 큼지막한 옷장 서랍을 열자 자신의 속옷이 정리돼 있다. 우선 요망한 머리부터 넣고 몸통과 꼬리를 차곡차곡 개켜 넣었다. 요망한 것은 조금 발버둥치나 싶더니 정리된 팬티 사이로 콧잔등을 꾹 밀었다. 얌전해진 걸 확인하고 서랍을 닫았다.
그가 도착하기까지 10분, 오디오를 켜고 볼륨을 끝까지 올렸다. 욕조 안에 물을 채우고 빨래에 세제를 뿌렸다. 바지를 무릎까지 걷고 욕조로 들어갔다. 커다란 벽면 유리 건너에서 소화불량에 걸린 건물들이 보였다. 마주 노려보지만 바깥에선 이 사실을 알 수 없다. 빨래를 지근지근 밟았다. 손을 바지에 넣고 음낭을 조물락거렸다. 초라한 음낭과도 작별이다. 리베라 합창단의 아베마리아가 온 집안에 흘러넘쳤다. 변성기를 지나지 않은 보이톤이 고막으로 들어와 몸속으로 흡수되었다. 소리는 혈관을 휘돌아 피를 뜨겁게 했다. 다시 그날로 돌아간대도 선택은 변함없다. 목소리쯤은 얼마든지 내 줄 수 있다. 다만……견딜 수 없이 노래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 고비만 넘기면 괜찮았다. 충동적으로 입술을 벌리고 목소리를 꺼내 보았다. 따라오는 건 지독한 통증뿐이었다.
“으…….”
숨소리가 움츠러들었다. 코카인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후미진 골목에 앉아 서로를 알아갔던……. 왜 하필 그때가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10년 전 교회에서 울며 달려나가는 코카인을 따라가지 않았더라면, 코카인의 노래를 시험하려 들지만 않았더라면, 매일 후회하며 발등을 찍었다. 코카인도, 자신도 거대한 힘에 배를 갈리고, 생식기 떼인 도마뱀이었다. 권력에 대항할 힘이 없었기에 만만한 대상을 물어뜯었다. 그것만이 숨 쉴 길이었다. 코카인은 자신의 숨통을 졸라맨 존재가 아니라 산소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한 번 죽다 살아나니 그토록 몸서리쳤던 열등감이 너저분해만 보였다. 오랜 투병 끝에 자신은 비로소 지성인에서 성자로 거듭난 것이다.
대충 때가 빠진 빨래를 바구니에 담았다. 물먹은 빨래는 무게가 엄청났다. 심호흡하고 번쩍 들 때였다. 벽 거울 안에 누군가 있었다. 창백한 남자였다. 헉! 바구니와 함께 뒤로 나자빠졌다. 한동안 안 나타나서 방심했다. 새집에 이사 오면서 거울 없애는 걸 깜빡했다. 차이석이 내던진 걸 복수하려고 쫓아온 거다. 온몸이 마비된 채 바닥만 뚫어지게 보았다. 칼을 가지러 가기엔 주방은 너무 멀었다. 무방비한 상태인데도 남자는 공격하지 않았다. 혹시 간 걸까? 심호흡하고 거울 쪽을 곁눈질했다. 창백한 남자는 그 자리에 있었다. 후다닥 시선을 피했다. 욕실 문을 쳐다보았다. 무릎을 세워 달아나려 할 때였다. 남자도 따라 일어났다.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났다. 남자도 주춤거렸다. 무심결에 거울을 보는 순간 또다시 놀라고 말았다. 남자는 겁먹은 얼굴이었다. 겁을 먹어? 왜? 아, 야바는 작은 탄성을 뱉었다. 제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다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자신과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의 목덜미에 화상 자국도 보였다. 반대편이지만 자신과 꼭 같은 위치와 모양으로…. 멀뚱히 눈만 끔벅거렸다. 오른손을 들어 뺨을 꼬집자 그는 조롱하듯 똑같이 따라 했다.
“…….”
머리가 뒤엉켰다. 마주쳐오는 눈동자가 숨 자락을 비틀었다. 이렇게 눈을 피하지도, 도망치지 않은 것도 처음이다. 야바는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그러쥐었다. 남자도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만졌다. 야바는 눈을 바닥으로 굴렸다가 다시 남자를 응시했다. 욕실은 제 숨소리로만 가득했다. 천천히 손을 뻗었다. 남자도 자신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남자는 왼손잡이였다. 떨리는 두 개의 손이 닿기 직전에 흠칫 물러났다. 거울에 비친 남자는 경악으로 얼어 있다. 그는 예전처럼 흐릿한 형체가 아니었다. 증오로 점철된 눈도 아니었다. 야바는 손을 떨어트리고 그 남자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이 목소리가 싫었다. 아이도 성인도 아닌 이 몸뚱이가 증오스러웠다. 남이 가진 것만 보느라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다. 분노와 증오만이 버텨내는 유일한 힘인 줄 알았다. 차이석과 새벽 5시의 거리를 거닌 적이 있다. 누구도 깨지 않는 적막이 공포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술 취한 거리의 흔적들이 혐오스럽지 않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먼 계절을 돌아온 여정은 멀고도 험난했다. 또 어떻게 탈출한 건지 거대한 뱀이 곁으로 기어왔다. 작은 비늘로 짜인 몸체가 자신의 팔을 타고 올라왔다. 어깨에 머리를 얹은 뱀이 붉고 투명한 막으로 자신을 관찰했다. 목덜미에 닿은 서늘한 감촉이 싫지만 내치지 않았다. 이젠 오물 같은 이 세계를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벽면 유리 너머, 도시를 투과해온 무언가 안으로 쏟아져 그림자를 몰아냈다. 눈이 멀도록 거대한 황금색 빛 가루였다. 바닥에서 되 튀어 오른 태양의 중량감이었다. 목 안이 뜨거워졌다. 이제 피해 다니지 않을 거다. 더이상 저 현란한 빛이 두렵지 않았다. 빛은 머리카락에, 콧잔등에, 겨드랑이와 목덜미에, 사타구니에도 녹아들었다. 지상으로 쏟아지는 빛줄기로 오염된 정신을 표백하고, 역병 같은 열등감을 소독했다. 성스러운 의식처럼, 숨 쉬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산란하는 빛의 춤사위를 눈으로 쫓으며,
야바는 빛의 분말을 혀로 받아먹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