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track 39
갓 지은 밥 냄새가 퍼졌다. 방도 따뜻했다. 손발이 안 묶였다면 평범한 밤이었다. 야바는 치아로 입술 거스러미를 뜯었다. 여기 끌려 와 며칠이 지난 지도 모르겠다. 허름한 방에는 시계는커녕 TV도, 전화기도 없었다. 반푼이는 이따금 결박을 풀고 마비된 자신의 팔다리를 마사지해주기도 했다. 그때 탈출 시도를 했다가 실패했고, 경계는 더 강화됐다. 사지가 자유로워도 저 괴력을 이길 방도가 막막한데 이대로는 불가능했다. 어제오늘 그렇게 악다구니 질렀지만 그는 미간을 구기는 것에만 그쳤다. 깡패들 머리통이 터졌던 건 역시 마취제의 환각인 모양이다. 그럼 자신은…아그라오…뭐지? 그건가? 살을 뚫고 나온 벌레가 무릎에 감긴 청테이프에 붙어 바둥거렸다. 천적인 차이석이 없으니 벌레 천하가 따로 없었다. 벌레를 혀로 쓸어담았다. 송곳니로 배를 누르자 내장이 탁 터졌다. 속이 메스꺼웠다.
“맛없어.”
무릎에다 혀를 빡빡 문질렀다. 이런 걸 눈썹 하나 까닥 않고 먹은 차이석도 그렇거니와 그와 혀가 녹을 만큼 키스했던 자신도 어지간히 비위가 강했다. 여기에 왔을 때 흰색이었던 스웨터가 지금은 꾸지지해졌다. 올에 밴 차이석의 스킨 향이 옅어질수록 신경은 날카로워졌다.
반푼이가 가져온 죽은 벌레 잔치였다. 식도까지 쏟아낼 기세로 토악질했다. 괴로운 건 자신인데 그가 다 죽어가는 낯이다. 세준은 24시간 곁을 지키며 보호자 놀음에 푹 빠졌다. 탈출 외에는 뭐든 수용했으며 헌신적이었다. 아랫도리가 찌르르해서 허벅지를 오므리면 세준은 귀를 쫑긋 세웠다.
“소변 마려워요……?”
불알 없는 성기를 목격한 뒤, 반푼이는 유독 화장실 문제에 참견이 심했다. 성인 두 명이 있기엔 좁은 욕실에서, 그는 자신을 뒤에서 껴안고 바지를 내렸다. 성기를 주물러 소변을 유도하는 손길을 뻔뻔했다.
“안 나와요?”
반푼이는 인질의 어깨에 턱을 얹고 쪼그라든 성기를 힐끔댔다. 반푼이는 뭐가 그리 바쁜지 늘상 콧날에 땀을 매달고 다녔다. 나무를 학대하는 직업 덕에 돈 처바른 태닝보다 자연스러운 구릿빛 피부였다. 그가 속눈썹이 길다는 건 오늘 처음 알았다. 그의 속눈썹이 떨리는 게 보였다.
“…세진이가 그렇게 보면……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반푼이는 자신의 얼굴에서 뭔가를 발견하고 오래도록 도취 되었다.
“…노래…해주세요…….”
얼마 전 자신의 노래를 들은 이후 반푼이는 수시로 졸라댔다. 추행은 수위가 높아졌다. 야바는 눈꺼풀을 닫아 버렸다.
“노래 불러주면……나 풀어 줄 거야?”
반푼이는 자신의 볼에 턱을 문댔다.
“세진이는 왜 수염 안 나요? 나는 아침마다 깎는 거 귀찮아서 수염 안 났으면 좋겠어요.”
“노래 불러주면 풀어 줄 거냐고.”
“……세진이 목소리는 너무 예뻐요. 어릴 때 그대로예요. 그래서 계속 말 시키고 싶어요.”
반푼이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이게 부러워? 별거 없어. 반병신 똥수발 병수발 들다가 거나하게 뒤통수 맞으면 돼. 그리고 포주한테 걸려 불알 도둑맞으면 너도 충분히 이렇게 될 수 있어. 그리고 귀에 입술 대고 말하지 마. 머리털 곤두서니까.”
상처받은 그 얼굴이 흉기가 되어 돌아왔다. 세준은 자신의 귓바퀴를 야금야금 깨물었다. 왕성해진 하체를 엉덩이에 밀어붙였다. 악다구니도 힘이 남아돌 때나 얘기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차이석을 만나면 그에게 매달려 펑펑 울고 싶었다.
어지럼증이 몰아닥쳐 이불 위에 누웠다. 상태가 나빠지고 있다. 반푼이에게 추행당하는 것보다, 차이석이 칼 맞은 게 나았는지보다, 코카인이 어떤 목소리로, 얼굴로 노래해 줬는지가 더 궁금해 미칠 지경이니까. 음식보다 더 절박한 건 항우울제였다. 말소리가 이불에 늘어졌다.
“약…구해 줘. 타원형에 파란색 약…….”
“어, 어디 아파요?”
반푼이는 부엌 찬장에서 약을 모두 쓸어담아 왔다. 모양이 비슷하면 맛이 달랐고, 맛이 비슷하면 모양이 달랐다. 색과 맛이 일치해도 기분은 좋아지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 약을 구할 수 있는 건 차이석뿐이다.
“그거 아니야. 타원형에 사과 맛 나는 파란색 알약이야. 먹으면 기분 좋아지는 거…….”
“……약 이름이 뭐에요?”
“몰라. 뭐겠지.”
“…그 약 먹으면 기분 좋아져요?”
“뇌가 어디 달렸는지 모를 만큼.”
“어, 얼른 다녀올게요!”
세준은 앞뒤 없이 일어섰다. 방문으로 내뻗는 걸음이 멈췄다.
“……이따 사오면 안 돼요?”
“왜?”
“갔다 돌아오면 세진이가 없을 것 같아요…….”
야바는 가느스름하게 눈을 휘었다.
“사실 나는 물거품이야. 네가 만든 환상이야. 눈 한 번만 깜빡해도 사라져 있을지 몰라. 넌 죽을 때까지 눈치 못 챌까 봐 알려주는 거야.”
세준의 이마에 공포가 드리워졌다. 더 했다간 눈물을 쏟아낼 기세였다.
“농담이야.”
야바는 베개에 한쪽 뺨을 짙게 묻었다. 늘어진 스웨터가 어깨에서 흘러내렸다. 굳이 추스르진 않았다.
“약 구해줘. 머리 아파 죽을 것 같아.”
“…….”
“……형.”
세준은 정수리를 찍힌 낯이었다. 야바는 눈을 감았다가 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형, 너무 아파.”
반푼이는 심줄이 불거지도록 주먹을 쥐었다. 그의 목덜미는 붉었다.
“…아, 아무 데도 안 간다고……꼭 약속할 거죠?”
유괴범은 인질의 손발에 테이프를 한 번 더 감으며 단단히 다짐받았다. 그리고 방을 나서기 전에 인질의 입술을 빨고 나갔다. 골목을 울리는 발소리가 자취를 감췄다. 야바는 벽에 의지해 일어났다. 어깨로 현관문을 밀어도 끄떡하지 않았다. 밖에서 자물쇠로 잠그고 바위를 쟁여 놓은 모양이다. 보호자 놀음하는 것도, 가둬 놓는 것도 모두 자신이 어릴 적 했던 그대로 흉내 냈다. 반푼이도 그때 이렇게 숨 막혔을까?
반은 철제, 반은 불투명한 유리로 된 현관문을 쏘아보았다. 이 악물고 머리로 들이받았다. 파편이 스웨터 속으로 날아들었다. 뒷짐 진 자세로 앉아 유리 조각을 쥐었다. 막무가내로 휘두르는 통에 살이 베였다. 몇 번의 시도 끝에 테이프가 갈라지자 손을 비틀어 나머지를 찢었다. 내내 묶여 있던 터라 마비가 풀리지 않아 주저앉았다. 유리 조각 하나를 주머니에 챙겼다. 현관문에 올라타 밖으로 점프했다. 높은 지대라 도시 야경이 훤히 펼쳐져 있다. 골목을 내달리려 했다. 의지와 상관없이 고개가 돌아갔다. 찬바람이 현관문을 툭툭 쳐댔고, 집에서 나온 불빛이 골목에 덩그마니 늘어졌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마치, 유원지에서 자식에게 솜사탕을 쥐여주고 도망치는 어미의 심경이었다. 모든 게 그 똥개 같은 까만 눈 때문이다. 짐승 같은 언동이 주는 괴리 때문이다. 어쩌면 세준은 이걸 노렸을까? 아니, 그를 과대평가했기를 빌었다.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반푼이가 따라붙을까 봐 신경이 뒷덜미에 몰렸다. 일단 아무 집에나 가서 경찰에 연락하는 거다. 경찰…. 그럼 반푼이는 유괴범으로 잡혀가는 걸까? 반푼이는 처벌보다 치료가 필요하다. 법정에서 친형제에게 발정했다는 사실을 증언하면 정상 참작될 거다. 그나저나 주민번호 말소된 사람 말을 믿어주긴 할지가 걱정이었다. 경찰은 관두고 일단 택시를 불러 여기서 벗어나자. 그게 아이를 두고 도망친 어미의 마지막 양심이었다.
맞은 편 멀리 떨어진 곳에서 불빛 하나가 희끔거렸다. 근처에 두 가구만 남았다고 했다. 귀먹은 할머니는 손짓 발짓해가며 사정 설명하느라 세월 다 보낼 거다. 만에 하나 할머니가 송장이 돼 있으면 골치 아파진다. 자식한테 버림받은 독거 노인의 말로야 굶어 죽거나 연탄가스에 질식사하는 것뿐인데, 괜히 갔다가 자신이 덤터기를 쓰는 꼴밖에 안 된다. 이제 남은 건 술주정뱅이뿐인데, 택시비 빌려줄 돈 있으면 술을 퍼마셨지, 주머니에 돈 남은 꼴을 놔둔다면 낙오자도 안 됐을 거다. 혹시 자신을 도둑으로 오인해서 칼이라도 휘두르면…. 머리털이 섬뜩했다. 그래도 칼 맞아 객사하는 것보다 살해 용의자로 몰리는 게 낫겠다 싶었다.
저 집에 귀머거리 노파가 있기를 빌며 달려갔다. 며칠 굶은 탓에 체력은 금세 고갈됐다. 연탄재와 합판 조각이 널린 골목은 끝없이 길었다. 10년 전 세준을 찾아 달렸던 이 길을, 지금은 그에게서 탈출하기 위해 달리고 있다. 담벼락을 꺾어 돌아갈 때였다. 어떤 인기척도 없었다. 질감 다른 공기가 등줄기를 엄습했다. 허리에 팔이 감기며 거친 숨결이 고막으로 쏟아졌다.
“약속했잖아요. 도망가지 않겠다고! 세진이를 믿었는데 왜 약속 어겼어요!”
“너도 그날 약속해 놓고 보란 듯이 사라졌어!”
“그래서 세진이한테 용서받으려고 이렇게 노력하잖아요……!”
세준은 당장 가위질할 기세로 광기 어린 눈을 번뜩였다. 도중에 되돌아온 거다. 반푼이는 어미의 거짓말에 속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를 밀치고 달아났다. 몇 발자국 못가 덜미를 붙들렸다. 저항이 심해지자 세준은 자신을 어깨에 들춰 맸다.
“다른 곳으로 이사 가요. 이 집이 세진이를 아프게 하는 거예요!”
“너를 더이상 미워하지 않아. 니가 어렸던 내 입에 성기를 쑤셔 넣었을 때도 너를 미워하지 않았어! 그럴 힘도 안 남았으니까 나 좀 내버려 둬!”
거꾸로 매달려가며 반푼이 등을 후려쳤다. 그의 말이 맞았다. 아무리 외쳐도 내다보는 이 하나 없었다. 이 길만 지나면 곧장 집이 나온다. 골목을 꺾어 돌 때였다. 뒤집힌 시야로 그림자 뭉치가 보였다. 지나던 길인지 나오던 길인지는 모르겠다. 남자의 슈트 차림과 붕대 감긴 날렵한 손, 옆구리에 낀 엽총은 이 동네와 어울리지 않았다. 뚜벅, 남자가 발을 뗐다. 구둣발이 세준의 배에 꽂아 들자 함께 나동그라졌다. 사내 네 명이 세준의 어깨를 각목으로 찍고 바닥에 눌렀다. 누군가 자신을 일으켰다. 남자의 목덜미에 감긴 전갈을 멀거니 보았다. 시커먼 전갈이 꿈틀거렸다.
“코앞에 다른 힐러가 있었다니 놀라 자빠질 뻔했어. 나를 속인 건 고의가 아닐 거라 믿고 싶군.”
기하의 손을 내쳤다. 무릎이 후들거렸다. 그의 어깨너머에 있는 코카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토록 애태웠던 걸 묻기로 했다.
“이석이는 어떻게 됐어?”
그 예쁜 주둥이로 노래해 줬어? 혼신을 다해서 고쳐줬어?
“어떻게 됐냐고 묻잖아.”
이석이 집에서 계속 지냈어? 서로……만졌어?
코카인은 눈을 내리깔았다. 고고한 저 얼굴을 콘크리트벽에 갈아버리고 싶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코카인이 이제야 10년 전의 복수를 하는 거라고.
“여기도 곧 밀어낸다던데 때마침 쓰레기들이 알아서 모였네. 이제 우리 서로 비긴 거다.”
코카인은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이건 비기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너도 세준이 형과 있는 거 힘들잖아.”
“대가리가 있으면 어디가 더 지옥인지 판단이 설 거 아냐.”
“어차피 우린 못 벗어나.”
도저히 따라가지 못할 존재였다. 코카인만 사라지면 빼앗긴 걸 되찾을 거라고, 철없던 악의를 맹신했다. 하지만 이렇게 동등한 눈높이에 설 수 있다는 걸 깨달았으며, 코카인은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아직도 너는 나와 질적으로 다른 것 같겠지? 나는 싸구려 밀고자지만, 너는 그럴싸한 명분이 있었다고. 지금 네 행동은 뭣도 아니야. 10년 전에 내가 했던 딱 그 짓이야.”
코카인의 입술 끝이 파들 떨렸다. 밤이어서인지, 장소 탓인지 상처받고 유약했던 어릴 적 채우로 돌아간 듯했다.
“친구가 있었어.”
그는 불쑥 말했다.
“한때 그렇게 될 뻔했지. 그 애 잘못이 아닌 건 알지만 그 애가 망가지는 걸 보며, 당연한 대가라고 생각했어. 질투와 열등감에 찌든 그 애 눈빛이 기분 좋았어. 내게 가진 부와 명예는 그 애가 가져선 안 될 호사였으니까.”
“……솔직해지니까 얼마나 예뻐?”
야바는 코카인의 턱을 후려쳤다. 있는 힘껏, 감정의 찌끄러기를 긁어모아서. 코카인은 땅에 나뒹굴며 턱을 싸쥐었다. 치욕에 물든 눈동자는 아름다웠다. 떡이 된 와중에도 사색이 된 반푼이가 볼만했다. 그 시절엔 핏줄을 나눈 사이에도 배신이 있다는 걸 몰랐다. 동병상련의 연민이 악의로 바뀌리란 것도 몰랐다.
“이것으로 너희를 용서할게.”
코카인은 10년 동안 침묵으로 숨통을 졸랐지만 자신은 이 한 대로 그를 용서할 거다. 오랜 기간 공들여 복수를 꿈꾸는 치밀함도, 인내심도 없다. 그럼 자신은 누구한테 용서받아야 하지?
“지난 회포는 나중에 풀기로 하고.”
기하는 말을 자르고 얻어터진 세준 앞에 앉았다. 붕대 감긴 손등으로 세준의 볼을 툭툭 건드렸다.
“이렇게 덜떨어진 새끼한테 당했단 말이지. 덕분에 손가락 병신이 됐는데 그냥 넘어가면 서운하잖아?”
코카인은 사색이 되었다.
“모두 제가 시킨 일이니 세준 형은 건드리지 마세요!”
“이 새끼 대신 네 손가락을 준다면 생각해 보지.”
입을 다문 코카인을 보며 기하는 흡족하게 웃었다. 어찌할 새도 없었다. 기하는 절단기로 세준의 새끼손가락을 잘랐다. 깡패들은 사지를 뒤트는 세준을 무릎으로 눌렀다. 코카인은 눈을 감으며 몸서리쳤다. 절단기의 다음 표적은 약지였다. 어떠한 감정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하지 마───!”
골목 쪽으로 난 창문이 진동했다. 기하는 어깨를 흠칫하더니 뒤돌아보았다. 세준은 놀란 눈을 끔뻑거렸다. 자신의 믿음을 거세한 남자와 자신의 불알을 거세한 남자와의 기막힌 조합이다. 그러나 세준을 향한 증오는 기하와는 다른 형태였다. 야바는 치를 떨며 말했다.
“하지 마. 개자식아.”
기하는 긴장을 풀고 뜻 모를 소릴 중얼거렸다.
“진정한 공포와 절망이 아니면 발현 안 된다더니 사실인가 보군. 마취제를 안 가져왔어. 저 녀석 발작 못 하게 해.”
깡패들이 자신을 잡아매 입을 가렸다. 기하는 코카인을 옆에 불렀고, 자신과는 거리를 두었다. 그 표정은 예전 그가 코카인을 경계했던 것과 비슷했다. 기하는 자신을 힐끗 보며 덧붙였다.
“그 사이 이 새끼와 배라도 맞았나?”
코카인이 반푼이의 정체를 말하지 않은 모양이다. 기하는 다시 세준의 약지를 절단기에 끼웠다. 절단기가 굳은살 박힌 손가락을 물었다. 하지 마! 소리는 깡패의 손에 뭉개졌다. 그때였다. 발소리 다발이 몰려왔다. 신경질적인 음성도 뒤따랐다.
“무슨 동네가 차 댈 데가 하나 없어! 이 근방 어디라고 했으니까 샅샅이 뒤져서 찾아와!”
골목 끝으로 모두의 이목이 향했다. 쇠파이프와 회칼을 든 남자들이 몰려왔고 그 중앙에서 차명환이 걸어왔다. 차명환은 투덜거리다가 고압 전류에 감전한 마냥 멈춰 섰다. 이렇게 어두운데도 그가 입술을 떠는 게 보였다.
“……사기꾼…. 너…….”
“…….”
“진…짜 살아 있었냐? 대체 그동안 어떻게…!!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야바의 이맛살이 절로 구겨졌다. 여기서 차명환을 재회하리라곤 상상 못했다. 조금 전까지 분노로 가득했던 머리가 휑해졌다. 깡패 손이 입을 막아 발음이 부정확했다.
“찌지리 니가 애 여기 완냐?”
“너야말로 왜 여기에……!”
차명환은 한달음에 다가와 야바의 어깨를 잡았다. 그 손을 뜯어낸 건 기하였다. 서로 대치한 어깨들이 쇠파이프와 회칼을 고쳐 쥐었다. 차명환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넌 뭐야?”
기하는 정중했다.
“우리 애들을 데려갈 땐 제 허락이 있어야 합니다. 차 대표님.”
“네가 사장이었나? 그럼 손님이 기라면 기어야 하는 건 누구보다 잘 알겠군.”
“간신히 살렸는데 차 대표님이 이런 곳에서 개죽음당하시면 코카인이 서운해할 겁니다.”
“이 새끼가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그 바닥에서 생매장당하고 싶나?”
차명환은 기하를 뿌리치고 다시 야바의 어깨를 잡았다. 기하는 그 손을 잡아 꺾었다. 어찌할 겨를 없이 차명환은 납짝 개구리가 되었다. 차명환의 경호원이 기하를 잡아 땅에 메쳤다. 기하는 균형을 잡고 경호원의 턱에 주먹을 꽂았다. 그때부터였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공격이 시작됐다.
“다 죽여버려!!”
“씹새끼들이!!”
고함치고 밀치는 덩치들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짓눌려 있던 세준은 깡패의 배를 걷어찼다. 골목으로 사라졌다가 잠시 뒤에 나왔을 땐 가위를 쥐고 있었다. 그는 가위만 쥐면 눈빛이 달라졌다. 세준은 길쭉한 가위로 조폭들의 살을 자르고 뼈를 쳐냈다. 적들은 수적 우세에도 주춤거렸다. 세준은 깡패에게 포위당한 코카인을 구해냈다. 그러다 자신을 보며 울먹거리고는 코카인을 겨드랑이에 낀 채 어두운 골목으로 사라졌다. 미친 광신도가 신의 은혜에 보답한 순간이었다. 장정 몇이 반푼이를 따라붙었다. 각목과 회칼이 날아다니고 사내들의 욕설이 오갔다. 철거 직전의 동네는 콘크리트 조각과 폐기물 때문에 활개치기 어려웠다. 자빠져 있던 차명환은 자신을 냅다 낚아채 달렸다.
“똑바로 막아. 새끼들아! 연락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살아 있으면서 왜 연락 안 했어?!”
차명환은 경호원을 닦달하고, 움찔움찔 몸 사리고, 찡찡거리느라 혼자 바빴다. 야바는 말했다.
“내가 왜 너한테 연락해야 되는데?”
“왜?! 지금 왜냐고 물었어?! 아무튼 여기서 나가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내 옆에 딱 붙어 있어!”
“몇 대 줘 터진 걸로 쫄아 놓고.”
“까불지 마. 지금은 기력이 회복 안 돼서 그래! 너 이 새끼들이! 내가 누군 줄 알……으윽!”
기하의 부하들이 차명환에게 각목 찜질을 선사했다. 그는 콘크리트 모서리에 배를 찍혔다. 경호원들은 차명환을 일으키며 공격보다 명환을 보호하는데 주력했다.
“이쪽으로 모셔!”
“빙충이 새끼들아! 나 말고 사기꾼부터 챙기란 말이다!! 사기꾼 어딨어?!”
명환은 경호원의 엄호로 골목을 빠져나왔고 결전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당도했다. 명환은 경호원들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무슨 일 있어도 데려와!! 놓치면 전부 모가진 줄 알아!”
경호원 하나는 명환을 지켰고 하나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갔다. 사기꾼을 만졌던 손이 떨림을 멈추지 않았다. 문자를 받고 인맥을 총동원해 주먹들을 모았다. 반신반의하면서 왔는데 진짜 살아 있다. 살아 있었다! 꼬질꼬질한 몰골을 보니 그간 고생이 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표독스러운 얼굴과 서리 낀 말투는 여전히……. 명환은 괜스레 볼을 붉혔다. 다시 냉정함을 가다듬고 사기꾼이 있는 동네를 보았다. 빨리! 빨리! 그간의 속 앓이가 한방에 사라진 반면 코앞에서 놓쳐 갈증만 극심해졌다. 그 순간 정체불명의 굉음이 지축을 뒤흔들었다. 명환은 밤하늘을 보며 실눈을 떴다.
“저게 왜…….”
“씨팔 새끼가! 다 죽여버려!”
골목은 혈투 극이 난무했다. 야바는 기하가 포위당한 틈을 타 뒤도 안 보고 달렸다. 떨어진 각목을 주웠다. 각목에는 주인 모를 손이 매 달렸다. 차명환 패거리가 앞을 가로막았다. 각목으로 놈의 어깨를 내려쳤다. 깡패는 맞은 곳을 움켜쥔 채 자신의 배를 걷어찼다. 곁에 있던 동료가 뜯어말렸다. 어느덧 기하가 나타나 자신의 뒷덜미를 잡고 엽총을 발사하며 길을 만들었다. 아비규환에 밀려 밀려, 공터까지 흘러왔다. 깡패들은 끈덕지게 따라온 차명환 패거리를 처단했다. 야바는 뒷덜미를 붙들린 채 기하의 손을 후려치고 쥐어뜯었다. 기하는 격앙된 음성으로 말했다.
“단지 네가 힐러여서 이런다고 생각하나? 그랬다면 쓸모없던 너를 네크로필리아한테 던져주고도 남았어. 너는 지하층에서 차이석 그 새끼를 만났겠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고, 참을 수 있는 한 모두 참았어!”
“너희들은 참았다지만, 결국 니들 하고 싶은 대로 했어. 나 좀 머리에서 지워버려! 죽었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부와 권력을 가진 새끼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그걸 모두 두고 저세상으로 가는 거라고. 내가 그 부분을 해소 해 주는 대신 그들과 동등한 힘을 가지는 거지. 코카인과 너, 둘이 합심하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야!”
“니가 아무리 발악해도 걔들하곤 태생부터가 달라. 너는 걔들 발바닥 핥는 게 어울리는 태생이야!”
기하는 기습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그의 이마에 심줄이 돋아났다.
“그 말, 다른 새끼가 지껄였다면 대가리에 총알을 박아줬을 거야.”
“다시 칩이 박힐 바엔 차라리 총알이 나아! 노예로 살 바엔……! 으읏……!”
기하는 자신의 혀를 빨고 가랑이로 허벅지를 비볐다. 맞댄 중심이 부피를 늘렸다. 그 아래 고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피떡이 된 부하들은 재빨리 고개 돌렸다. 야바는 아까 챙겼던 유리 조각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바짝 쥐고 전갈 꼬리를 찔렀다. 입속에서 혀가 빠져나갔다. 기하는 자신의 팔을 뒤로 꺾고 주먹을 들어 올렸다. 야바는 독 오른 눈을 올려붙였다. 자신도 코카인도 이미 알고 있다. 정작 죗값을 받아야 할 사람은 따로 있다는 것을, 강자에게 정면돌파할 수 없는 약자들의 비겁함이었다는 것을. 자신을 때리려 했던 손이 방향을 바꿔 목덜미에 흐른 선혈을 닦았다. “씨발. 위험했어.” 그는 침음을 뱉었다.
“코카인 그 새끼 빨리 잡아 와.”
“예!”
깡패 여섯만 남고 나머지 두 명이 골목으로 되돌아갔다. 기하는 돌멩이를 손수건으로 싸고 자신의 입에 쑤셔 넣었다. 목에 두른 남색 머플러로 입을 가리며 뒷머리에 동여맸다. 돌멩이가 혀를 눌렀다.
“만약을 대비해서야. 혹시 모르니까.”
또 미수로 그쳤다. 첫 번째는 놈의 남성을 노렸지만 실패했다. 지금 두 번째가 좌절된 순간이며, 세 번째는 부디 성공하길 빌었다. 깡패들이 자신을 번쩍 들어 공터를 가로질러 갔다. 깡패 하나가 먼발치에서 주차된 차로 달려가 지옥문을 열었다. 온몸으로 저항했다. 돌멩이에 눌려 혀를 깨물 수도 없었다.
투두두두────────!
그 순간 혼을 날리는 굉음이 땅을 두드렸다. 회오리바람에 종이와 나뭇가지가 날리고, 흙바람이 볼을 때렸다. 빛이 달려들어 망막을 찔렀다. 깡패들은 괴물체의 기습에 대피하느라 자신을 내동댕이쳤다. 헬기는 저공 비행하며 수직으로 내려왔다. 나무와 전깃줄이 프로펠러에 걸리려 하자 멀리 선회하고 돌아왔다. 금빛의 낙엽 조각들이 흩날렸다. 빛줄기 너머, 동체에 달린 착륙 지지대에 누군가 걸터앉아 있다. 아무리 검은 윤곽이라도 주변을 무채색으로 만드는 에너지, 그 에너지를 가진 사람은 하나뿐이다. 차이석은 지지대에 앉아 몸을 길게 뺐다. 그의 시선은 딴 데로 세지 않고 자신에게 날아와 박혔다.
“이…….”
수건 뭉치가 그의 이름을 흡수했다. 당연히 오지 않으리라 단정했다. 이런 일에 달려오기엔 그는 할 일이 많았고…… 너무 교활하니까. 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나올 것 같았다. 기하는 부하에게 자신을 내던졌다. 끌려가며 옷이 늘어지고, 손바닥이 뺨으로 몇 차례 날아들었다. 나선 날개는 공기를 휘감으며 치밀하게 거리를 좁혔다. 차이석은 사다리 밧줄에 매달렸다. 정지 비행한 헬기에서 그는 단박에 뛰어내렸다. 지상에 발이 닿자마자 전광석화처럼 걸어왔다. 냉혈동물의 눈알은 폭발 직전이다. 기하는 이빨을 번뜩이며 돌진했다. 가속 붙은 두 개의 행성이 충돌했다. 기하의 인중과 이석의 턱뼈가 가격당했다. 동시에 둘의 상체가 기울었다.
기하는 간격을 주지 않고 차이석의 옆구리와 복부를 연타했다. 차이석은 허리를 구부린 채 기침했다. 임수에게 당했던 자리다. 기하는 그곳에 집중적으로 주먹을 꽂았다. 차이석은 거리를 벌렸다. 기하의 명치를 무릎으로 찍고 뒷목을 휘어 찼다. 낙하하는 구두가 붕대 감긴 기하의 손을 짓이겼다. 차이석은 기하의 발등에 총을 갈겼다. 기하는 절규하며 쓰러졌고 떨어진 엽총을 집었다. 동시에 차이석의 은빛 총구가 기하의 정수리를 찍어눌렀다. 낮게 깔린 음성이 관통했다.
“고양이 가져와.”
차이석은 야바의 동선을 빠르게 훑었다. 총구를 삐뚜름하게 기울여 정수리를 눌렀다.
“가.져.와.”
부하들이 차이석을 둘러쌌다. 기하는 비릿하게 웃으며 떨어진 엽총을 움켜쥐었다.
“여길 혼자 오다니 약이라도 처먹었나? 지금 네가 큰소리칠 주제가…….”
차이석의 손이 시야 아래로 뻗어왔다. 놈이 쥔 휴대폰 액정에는 반실신한 여자가 포박돼 있다. 경악과 분노로 숨길이 갈라졌다. 차이석은 입꼬리를 끄집어 올렸다.
“모친 팔다리를 택배로 받기 싫으면 착하게 굴어야죠.”
헬기가 허용범위까지 접근하자 흉기를 든 사내들이 밧줄을 타고 내려왔다. 그들은 한달음에 달려가 야바를 맡은 부하들을 처리했다. 나머지는 기하의 손을 뒤로 결박하고, 엽총에서 탄피를 꺼냈다. 기하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야바는 재갈과 속박한 힘이 풀렸지만 목소리를 내지도, 움직이지도 못했다. 차이석과 시선이 휘감겼다. 차가웠던 눈동자가 격정적으로 일렁거렸다. 퍼석해진 안색은 그가 며칠간 어떻게 지냈는지 방증했다. 자신의 몰골도 볼만할 터였다. 귀에서는 윙윙거리는 잡음만 맴돌았다. 천적이 나타나니 벌레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한 발짝 떼어내고 달려갔다. 차이석도 기다리지 않고 돌진했다. 자신을 당겨 부서지도록 껴안았다.
“하아…….”
오장육부에서 밀려오는 두터운 한숨이었다. 차이석은 자신의 턱 아래에 코를 비비며 살내음을 폐부까지 빨아들였다. 어미를 찾은 짐승같이 코를 킁킁거리다가 송곳니로 질겅거렸다. 야바는 그의 목을 가득 껴안고 목덜미에 볼을 비볐다. 자신을 똬리 튼 팔이 다부지게 옥죄었다. 그간 억류당했던 감정이 터져 눈시울이 더워졌다. 머리카락을 움켜잡은 손도, 맞댄 심장 소리도, 모든 것이 지금 막 뜨거운 쇳물에서 나온 것 같았다. 틈 없이 물렸던 몸에 약간의 공간이 생겼다. 그의 눈길이 자신을 급하게 핥았다. 그는 코트를 벗어 어깨를 덮어 주었다. 야바는 텁텁한 입을 뗐다.
“됐어. 나 추위 안타.”
“입술을 새파랗게 하고 무슨 소리야.”
코트 깃을 바짝 여민 그의 손이 입술선을 핥고 물러났다. 말라비틀어졌던 동공에 윤기가 흘렀다. 그는 코트 안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더니 뭔가를 꺼내 갔다. 서류였다.
“잠깐 기다려.”
“왜? 뭐 하려고?”
“5분 만이야.”
기하는 밧줄에 묶인 채 살기 돋친 눈으로 보고 있다. 차이석은 기하 앞에 삐딱하게 서서 서류를 펼쳤다. 그 순간 기하의 안색이 납빛으로 돌변했다. 프로펠러 굉음이 그들의 말소리를 휘감아 먹었다.
“왜… 이걸 네가…….”
기하는 억눌린 음성으로 물었다. 눈앞의 서류는 모친이 인질로 잡혔다는 사실 만큼이나 충격이었다. 차이석은 서류를 가볍게 흔들었다.
“고양이를 집에 갖다놨을 때부터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쪽이 워낙 바빠서 기회를 노리기가 쉽지 않았는데 오늘 기분도 날씨도 적당하군요.”
기하는 눈의 초점을 집중해 다시 서류를 살폈다. 서류에는 파라디소 등기등본과 소유권 이전에 관련된 내용이 담겼다. 그리고 ‘장현식’이란 이름이 박혔다. 자신이 분기별로 실적을 보고했던 파라디소 실소유주 말이다. 헝클어진 사고가 냉정해지는데 한참이 걸렸다.
“이걸 왜…네가 가지고 있지? 장현식과 무슨 관계냐?”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입이 탔다.
“왜 이걸 네 새끼가 가졌는지 묻잖아!”
“장현식은 가상 인물입니다. 나서기 골치 아픈 일을 처리해주는 내 분신이죠.”
기하는 안면 근육을 경련했다. 장현식이 미친 새끼의 분신이라면, 그럼… 설마…….
“네 새끼가…….”
그다음은 입에 담기에도 치가 떨렸다.
“……개소리하지 마. 가게 투자받은 건 10년 전이야. 네 새끼가 겨우 고등학생 딱지를 뗐을 시기고, 이런 서류쯤은 얼마든지 위조할 수 있어. 그따위 부실한 증거를 내밀고 믿으란 거냐?”
“그쪽이 믿든 말든 내 알 바 아닙니다.”
기습적인 목소리가 말꼬리를 토막 쳤다.
“하지만, 믿어줬으면 좋겠군요. 우린 뚫고 뚫린 진한 관계 아닙니까.”
차이석은 자신의 귓바퀴를 손가락 끝으로 지분거렸다. 예전 놈에게 만년필로 뚫린 곳이다. 구역질 나는 손을 털지도 못할 만큼 사고가 마비됐다. 소유주에 관해선 아무 정보도 없다. 가족 누군가 아파서 힐러가 필요했다고 했고, 흔쾌히 투자했다. 그러나 자신이 힐러를 찾았을 때 가족들은 죽었다고 했으며 소유주는 가게를 내팽개쳤다. 그 뒤 대리인을 통해서만 의사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실소유주가 아니고선 가질 수 없는 서류들. 머리로는 부정하지만 모든 화살표가 한곳으로 향했다. 피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달았다. 이 무슨 개 같은……. 실소유주가…… 미친 새끼였어? 저 새끼가?! 오만방자한 면상을 갈기갈기 찢으려고 발광했다.
“개소리하지 마. 어떻게 네 새끼가…! 어떻게……!!”
사내가 기하의 목을 회칼로 눌렀다. 몸부림이 그치자 차이석이 앞에 내려앉았다.
“오면서 생각했습니다. 과거에 고양이와 어떻게 붙어먹었길래 그쪽이 기둥서방 흉내를 내는 지 말이죠. 내 상상력에 제동을 걸지 않았다면 도착한 즉시 이 손으로 둘 다 목을 비틀었을 겁니다. 하지만 녀석이 없으면 몸 닳는 건 나일 테니…….”
흠…. 차이석은 콧소리를 내며 자신의 중심을 꽈악꽈악 주물렀다.
“아무래도 내 고양이가 당신 좆을 가만두질 않는 거겠죠.”
그 손이 위로 올라가 자신의 벨트를 풀고, 지퍼를 열고, 바지와 속옷을 한번에 끄집어내렸다. 성기가 까발려졌다. 차이석은 자신의 목울대에 닿은 회칼을 넘겨받았다. 무례한 구둣발에 가랑이가 벌어졌다. 이어 길쭉한 광채를 뿜는 칼끝이 음낭에 닿았다. 섬뜩한 예감으로 기하는 발버둥쳤다. 차이석은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자신의 입에 수건을 물리는 손길은 다정했다.
“마취제는 준비 못 했군요. 치아 망가질지 모르니 물고 있어요.”
곧바로 칼끝이 살점을 헤집고 급소 기저부까지 파고들었다. 땅속에 박힌 돌부리를 뽑듯 고환을 도려냈다. 동그란 덩어리가 흙바닥에 굴러떨어졌다.
“크아악───!”
불에 달군 철물을 쏟아붓는 지독함이었다. 기하는 눈을 까뒤집고 사지를 비틀었다. 부하들은 각목에 맞아가며 오열했다. 덩치들이 발광하는 자신을 양쪽에서 잡아 고정했다. 칼끝이 향한 건 다른 음낭이었다. 기하의 눈이 공포에 휩싸였다. 칼날은 부드러운 껍질을 들추고, 안에 예민한 통각이 집중된 곳을 희롱했다.
“야바 것도 이렇게 했습니까?
각혈처럼 울부짖었다.
“나처럼 이렇게 즐거웠습니까?”
죽음과 맞먹는 형벌에 사지가 따로 비틀렸다. 재갈 물린 손수건이 힘없이 떨어졌다. 기하는 핏물 떨어지는 목소리를 짓씹었다.
“…너 같은 새끼들을 제일 혐오하지……. 크윽……! 아홉 개를… 가졌으면서도 남은 하나를…… 기어코 채우려고…남의 것을 빼앗거든…. 야바는…내 걸작이야……. 그 몸뚱이며 머리통까지 전부… 내 손으로 만들었어! 10년 동안 매일 매…크아아아악────!”
두 번째 고환이 뽑혀나갔다. 칼끝은 무감각하고 질서정연했다. 차이석의 충혈된 흰자위는 판단력도 상실한 아메바였다. 절절 끓는 용암에 아랫도리가 통째로 분리된 듯했다. 육체와 정신을 훼손하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은 고통이었다. 저 너머에서 하얗게 질린 야바가 보였다. 부서질 것처럼 서 있지만, 시선을 피하진 않았다. 너도 이렇게 지옥같이 고통스러웠나? 이렇게…….
차이석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고 야바에게 박힌 시선을 뜯어냈다.
“그 더러운 손이 거쳐 간 건 모조리 씻었어. 쓰레기 같은 약물도, 칩도.”
차이석은 자신의 손목을 잡아 비틀어 가랑이 사이에 고인 피 웅덩이에 담갔다. 피묻은 엄지를 서류에 꾹꾹 눌렀다. 그리고 서류를 자신의 슈트 안주머니에 꽂았다.
“그쪽 지분이 쓰레기 값이 된걸 감안해 싸게 넘기죠. 저승길 노잣돈에나 보태요.”
아직도 믿을 수가 없다. 실소유주와 대면할 날을 고대했으나 꿈에서도 그린 적 없는 장면이다. 피비린내에 정신이 가물거렸다. 기하의 눈에 섬광이 반사했다.
“……그래…네 새끼가 소유주라 치자고……. 이제 와 그런 얼굴이라니 구역질 나는군…. 좋아…. 내가 가수들을 거세했다는 건…… 보고 안 했으니 넘어가지…….”
사물이 휘청거렸다.
“그래…네 새끼가 좆. 같.은. 소유주라 치자고…….”
10년 전 가게 오픈을 앞두고 코카인의 살상 능력 때문에 골치 아팠다. 도저히 제어할 대안이 없어 고민 끝에 대리인과 상의했다. 물론 코카인의 비명에 관해선 숨기고 말이다. 어느 날 대리인한테 연락이 왔다. 위치 추적 칩을 폭탄으로 개조 해서 머리에 박는 게 어떠냐고. 잔인하고 인정머리 없지만, 기발한 발상이었다. 기하는 숨을 헐떡이며 시선을 치켜올렸다.
“그렇다면 칩은… 어떻게 설명할 거지?”
차이석은 한쪽 눈썹을 곤두세웠다. 기하는 생고기를 짓씹듯 말했다.
“……칩을 박으라는 아이디어는…소유주 대가리에서 나왔거든.”
한순간 나선 날개의 강풍이 적막을 휩쓸어 날렸다. 차이석은 자신의 멱살을 쥐어 시선을 끄집어 올렸다.
“…무슨 헛소립니까?”
자신의 표정을 탐색하는 차이석의 입술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빠져나갔다. 그 눈이 경련했다.
“무슨 헛소리야?!”
차이석은 전혀 모르는 낯짝이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태연자약했던 면상이 구겨지니 아랫도리에 절절 끓는 통각은 쾌감에 가까웠다. 기하는 킬킬거렸다.
“내가 왜… 그걸 설명해야 되지……? 궁금하면 대리인한테 물어봐. 아주 자세히 알 테니…….”
기하는 핏물 고인 이를 드러냈다. 뇌리에 하나하나 새겨지도록 쐐기를 박았다.
“알았나? 우린 공범이라고. 좆 같은 소유주 씨.”
차이석의 낯짝이 얼어붙었다. 야바가 이 사실을 알면 어떤 표정일지 궁금해 환장할 지경이지만, 저기까지 들리도록 소리칠 힘이 바닥났다. 슈트에 꽂힌 서류에는 핏빛 지장이 찍혀 있었다. 아…그래. 이제 완벽한 자신의 소유이다. 파라디소는 건물 디자인부터 사소한 인테리어, 가수들의 의상과 컨셉, 어디 하나 이 손길이 안 닿은 데가 없다. 이제 두 명의 힐러를 보유했으며 이 손으로 진정한 천국으로 만드는 일만 남았다. 인간의 잠재의식을 침범해 성역을 뒤흔드는 제3의 목소리, 천사와 악마가 공존하는 목소리. 그 짧은 글귀에 매료돼 평생을 바쳤다. 그러나 자신은 부친과 다르다. 부친이 못다 이룬 꿈을 드디어…….
기하는 서류를 움켜잡으려 했다. 그러나 손은 미처 당도 못한 채 추락했다. 슈트에 꽂힌 서류가 흙바람에 펄럭거렸다.
야바는 숨을 움켜잡았다. 무릎이 떨렸다. 가랑이 사이에 흥건한 핏물, 피 뭉친 덩어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자신의 것도 그런 식으로 도려냈을까? 면도기 값을 아끼거나, 섹스해도 성가신 혹이 생기지 않는다거나, 고자의 장점을 각인시켰던 그가 비로소 이 고통을 이해한 날이 온 것이다. 살아 있는 자체가 시궁창이고 치욕인 자들의 비애를. 참혹한 기하의 모습에 연민은 들지 않았다. 무감각하기만 했다.
차이석은 오랫동안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넓은 등은 바람에 휩쓸려 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느릿느릿 그는 몸을 돌렸다. 먼지바람을 가로질러 거릴 좁혔다. 야바는 흠칫, 몸을 빗겨냈다. 그는 조금 전 기하가 서류를 봤을 때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혹은 당장 누군가의 목을 비틀기 직전의…. 기하와 무슨 얘길 했길래 그러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혹시 그가 기하에게 줬던 서류는 푸른 수염 방에서 봤던 것과 연관 있을까? 상공에서 배회하던 헬기가 천천히 하강했다. 사다리 밧줄이 뱀 꼬리 마냥 흔들렸다. 차이석은 밧줄에 자신을 먼저 올렸다. 밧줄에 한 칸 올라설 때였다.
“기억 안 나.”
소리를 따라 고개 돌렸다. 불빛이 앉은 그의 얼굴 옆선이 가슴을 죄었다. 턱이 불거질 만치 그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개 소리야. 자기가 지껄인 걸 기억 못할 리가 없어.”
앞뒤 없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어쩐지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은 목소리였다. 헬기 날갯소리에 머리가 울렸고, 뼈가 에이도록 추웠기 때문이다.
“사소한 거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지 뭐. 가스 불에 뭐 올려놓은 것도 까맣게 잊고 외출하거나, 물건 사 놓고도 몇 년 동안 기억 못 하곤 하잖아.”
그의 눈동자에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사소한 일?”
뭔가 말을 쏟아낼 것 같던 입술은 벌어졌다가 굳게 닫혔다. 그는 예고 없이 시선을 돌렸다.
“꽉 잡아. 착륙장에 갈 때까지 이대로 가야 되니까.”
“착륙장까지 얼마나 걸려? 이 밧줄 몇 키로까지 버틴대? 혹시 끊어질지 모르니까 나 꽉 잡고 있어.”
차이석이 다친 곳은 착륙장에 도착하면 들여다봐야겠다. 야바는 그를 등지고 밧줄을 단단히 잡았다. 차이석은 자신이 디딘 밧줄 몇 칸 아래에 올랐다. 그의 발이 땅에서 떨어지자 헬기는 지체 없이 비상했다. 야바는 지금껏 조였던 긴장을 풀어헤쳤다. 고적한 동네는 부상자들의 신음으로 넘쳐났다. 기하는 콘크리트벽에 늘어져 야트막한 숨만 쉬었다. 머리가 고꾸라져 표정을 확인키 어려웠다. 깡패들은 그 앞에서 오열했고 차이석이 데려온 사내들은 봐 주지 않고 매질했다. 광신도는 신을 데리고 잘 내뺐을까? 어디다가 신전 하나 만들어주고 평생 받들며 살라지. 생지옥이 서서히 멀어졌다. 여기도 낡은 집을 밀어내고 깨끗한 건물이 들어온다. 사람들의 상처와 욕망을 덮을 만큼 밤은 충분히 깊었다.
빨리, 빨리, 지상에서 멀어지는 속도는 마음만큼 빠르지 않았다. 1M쯤 떨어졌을 무렵이었다. 멀리에서 새하얀 무언가 시야에 잡혔다. 코카인이었다. 그는 뼛속까지 얼리는 눈으로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코카인과 떨어진 곳에 누군가 머리 가죽이 잘려나간 채 널브러져 있다. 차이석이 끌고 온 사내들이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멀쩡했던 사람들이 말이다.
“쟤들 왜…….”
차이석에게 말해 주려고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밧줄이 팽팽해지며 헬기 동체가 기울었다. 그 순간 차이석의 어깻죽지로 금속 날이 비집고 나왔다. 근육을 꿴 가윗날이 자신의 턱 언저리를 스쳐 갔다.
“빼앗아 가면… 죽일 겁니다.”
회전날개의 굉음 속에서도 또렷하게 들렸다. 차이석의 어깨너머에서 세준이 일출처럼 올라왔다. 까만 동공은 분노와 상처로 뒤섞였다. 두 개로 갈라진 날에서 핏물이 떨어져 야바의 볼을 적셨다. 소리가 되지 못한 언어가 입속에 맴돌았다. 헬기 날개가 전깃줄과 나뭇가지를 위험천만하게 스치자 다시 올라갔다. 헬기 동체가 크게 휘청거렸다. 그 힘에 세 명이 뒤엉켜 추락했다. 야바는 콘크리트 조각에 등을 찍혀 숨길이 막혔다.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팔을 감싼 괴력에 끌려갔다.
“안 다쳤어요? 걱정 말아요. 이제 괜찮아요.”
핏물과 살점이 붙은 가윗날이 코앞에서 흔들렸다.
탕───! 탕───!
총성과 함께 세준은 팔을 잡고 웅크려 앉았다. 누가 자신의 팔을 잡아채 반대쪽으로 끌고 갔다. 눈앞이 핑핑 돌아갔다. 차이석은 멀리에 있던 밧줄을 낚아채 자신을 그 위에 올리려 했다. 그 순간 가윗날이 아가릴 크게 벌려 돌진했다. 차이석은 뒤로 빠졌다가 상체를 숙이고 세준의 안면에 주먹을 꽂았다. 연달아 늑골에 주먹을 쇄도했다. 세준은 몇 초간 숨길이 막혀 한쪽 무릎을 꺾었다. 반탄력이 고스란히 되돌아온 건지 차이석은 어깨를 쥐고 휘청거렸다. 그는 곧장 자신을 밧줄 쪽으로 끌고 갔다.
“어서 타.”
야바는 손을 털었다.
“그럼 니가 먼저 올라가!”
“헛소리하지 말고 타!”
“내가 네 뒤에 있어야 돼. 쟤 나한테는 아무 짓 못 할 거야. 다시 잡혀가도……! 으읏……!”
팔이 거칠게 휘어 잡혔다. 불똥 튀는 눈빛이 직진했다.
“다른 새끼 손에 넘어가는 걸 눈 뜨고 보라고? 지금 말이라고 지껄이나? 올라가서 기다리라고 하면 기다려!”
차이석은 자신의 허리를 거칠게 잡아 밧줄에 올렸다. 풍랑 같은 숨결에 귓불에 부서졌다.
“말 들어야 착한 나비지.”
그 순간 가윗날이 차이석의 등을 찔렀다. 반동으로 그는 총을 놓쳤다. 세준은 악착같이 차이석 등을 헤집었다. 차이석은 목울대를 울리며 다시 밧줄을 당겨 자신을 태웠다. 서슴없이 밧줄을 놓았다. 오염된 지상을 디딘 그가 멀어졌다. 손을 뻗었지만, 움켜쥔 건 어둠뿐이었다.
“가지 마세요……!”
세준은 차이석을 공격하다가 울부짖었다.
“어릴 땐 나밖에 없었잖아요. 나도 그랬어요…. 이 사람 눈은 뱀처럼 무섭고 섬뜩한데 왜……. 이사했던 집에다 세진이한테 줄 선물 두고 왔어요. 같이 가지러 가요…….”
결코 배신하지 않을 거라 믿었던 존재는 그 믿음을 단박에 깨부쉈다. 반드시 배신할 거라 생각했던 존재는 그 예상을 번번이 빗겨갔다. 그렇기에 이 선택은 망설임이 없어야 했다. 울며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아이 손을 뿌리치듯, 야바는 밧줄을 단단히 쥐었다. 가지 마세요! 가지 마요! 울음 섞인 외침은 프로펠러 굉음에 휩쓸렸다. 목구멍이 조여왔다. 헬기가 비상하다가 어느 지점에서 멈췄다. 그들을 눈으로 좇았다.
이석은 정원사가 한 눈 판 틈을 타 떨어트린 총을 주웠다. 동시에 운동화 발이 시야에 들어왔다. 턱을 세워 정원사를 주시했다. 고양이와 닮았지만, 훨씬 순한 인상이라 생각했다. 오늘 보니 기억이 틀린 모양이다.
“나는 가지치기하는 시기를 제일 좋아합니다. 썩은 가지를 잘라내면 이듬해 예쁘고 튼튼한 꽃을 피우죠.”
정원사는 검고 길쭉한 가위 손잡이를 고쳐잡았다. 그는 울고 있었다.
“지금부터 세진이의 가지치기를 할 겁니다.”
정원사는 가위를 저돌적으로 휘둘렀다. 이석은 총구를 정원사에게 겨눴다. 미친 가위질이 총을 되튕겼다. 이석의 옷을 베고 살을 벴다. 조금 전 뚫렸던 어깻죽지는 불심지가 박힌 듯했다. 더 끌었다간 위험하다. 조금 전 강기하의 말이든 뭐든, 잡념이 끼어들 틈이 없다. 정원사는 균형을 잡고 반격했다. 두 갈래의 가윗날이 허벅지에 콱 박혔다. 나머지 한쪽은 사타구니를 깊이 후벼 팠다. 성기를 간신히 빗겨난 곳이었다. 가윗날은 위로 솟구쳐 생가죽을 잘랐다. 동선을 따라 핏길이 뿌려졌다.
탕───! 탕───!
차이석은 총을 쏴 갈겼다. 정원사의 어깨에 피가 튀었다. 정원사는 절규했다.
“만지지 말라고 했잖아요. 빼앗아 가지 말라고 했잖아요!!”
격앙된 가위질이 빠른 템포로 가속이 붙었다. 가윗날이 닿는 곳마다 옷이 잘리고 살점이 날아갔다. 이석은 정원사의 이마에 총구를 찍어 눌렀다. 동시에 가윗날이 총구를 물었다. 이석은 서슴없이 총을 난사했다. 정원사는 가위 손잡이를 틀어 총구 방향을 흐트러트렸다. 탄알이 정원사의 귀를 찢고 흙바닥과 수풀로 헛돌았다. 관능적인 은빛 곡선과 정제된 칠흑의 직선, 그 마초적인 근육들이 서로를 물고 물어뜯었다. 가윗날이 빠르게 입을 벌렸다가 총을 쥔 이석의 손목을 물었다. 고양이가 남의 손에 넘길 바엔 인간이길 포기할 것이다. 턱뼈가 부서져서도 기어코 사냥감을 삼켜 소화액에 녹여버린다. 이석은 혀를 날름거려 입가에 묻은 선혈을 핥았다. 살아 있는 피비린내가 창자까지 전율케 했다.
“고양이는 하루에 두 번씩 사탕을 먹어야 되지.”
시뻘겋게 달궈진 세준의 눈동자가 진동했다.
“사탕을 항우울제로 알고 받아먹는 모습은 뼈째로 씹어먹고 싶을 정도야. 뜨거운 걸 못 먹어서 국이 식을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는 걸 보면 아랫도리가 뻐근해져. 젖꼭지를 혀로 쓸어주면 갸르릉거리며 구멍을 조이지. 입술로 빠는 것처럼 축축해서 환장할 정도로 말이야.”
정원사의 이마에 핏대가 갈라졌다. 검은 송곳니가 뱀 가죽을 자르고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뱀의 목이 덜렁거렸다. 총은 허공에서 몇 바퀴 굴러떨어졌다.
“그걸, 병신 같은 대가리로 다 기억할 수 있겠나?”
충혈된 세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석은 남은 손으로 정원사의 손목을 똬리 틀어 심줄을 압박했다. 예리한 쇠붙이가 부들부들 경련하며 검은 아가리를 벌렸다.
“그, 병신, 같은, 대가리로, 성질 나쁜 고양이를 어떻게 녹일 거지?”
세준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석은 생뼈를 씹어 발기듯 말했다.
“고양이는 내가 주는 것만 먹어. 맘마든, 정액이든.”
가위가 정원사의 어깨 뒤쪽으로 길게 빠졌다가 달려들었다. 이석은 금속 날을 붙잡았다. 이를 세운 가위는 목울대로 집요하게 거리를 좁혔다. 날 끝이 살갗을 뚫었다. 피비린내로 덧칠된 숨소리가 격렬하게 뒤엉켰다. 정원사는 이석의 목에 가위를 꿰고 전진했다. 한 치의 연민도, 망설임도 없는 독수리가 광기를 향해 질주했다. 이석은 간을 파 먹히는 신화 속 인물처럼 눈을 부릅뜬 채 독수리를 직시했다. 거대한 힘이 끼어들어 강제로 멈추기 전까지 내달리는 관성이었다. 이석은 자유로운 손으로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움켜잡았다. 금색 펜이 날렵한 궤적을 그렸다. 정원사의 관자놀이를 인정사정없이 꿰뚫었다. 도살꾼은 관자놀이에 박힌 만년필을 빼내려 절규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계단으로 굴러떨어졌다. 가위가 살점을 뜯어먹고 뽑혀나갔다. 빠져나간 자리에는 시뻘건 근육만이 남았다.
피로 물든 돌계단 아래서 차이석과 세준이 쓰러졌다. 야바는 진저리쳤다. 밧줄을 튕기며 소리 질렀다.
“내려 줘! 빨리!”
헬기에서 사내가 목을 빼고 소리쳤다.
“여기서 이륙 시도했다간 다 죽어!”
“최대한 가까이 대봐! 아니면 지금 뛰어내릴 거야!”
“안 돼! 어서 올라오기나 해!!”
손을 뻗는 조종사를 무시하고 한 계단씩 내려갔다. 밧줄 제일 끄트머리에 매달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닥까지 족히 10미터는 돼 보였다. 지상에서 보는 것과 체감 높이부터 달랐다. 그와 있는 매 순간 인간이라고 느꼈다. 비록 시궁창이라 해도 그가 있는 곳이라면 자신은 살아 있는 거다. 야바는 입술을 깨물고 손을 놓았다. 그가 이 지옥으로 기꺼이 몸을 던졌듯이….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자 척추가 부서진 것처럼 호흡이 버거웠다. 모두 난도질당한 옷과 살점은 맨정신으로 못 볼만치 참혹했다. 관자놀이에 만년필이 박힌 세준은 괴기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는 거친 호흡을 하며 응시했다. 야바는 거의 기다시피 차이석에게 달려갔다. 그의 목은 살이 크게 벌어졌다. 뼈가 보이는 손목은 조금만 움직여도 뚝 떨어질 것 같았다. 어디에서 흐르는지도 모를 만큼 피는 맹렬하게 쏟아졌다. 손마디가 하얘지도록 목을 눌렀다. 전에도 고쳤으니 이번에도 가능할 거다. 야바는 쇳내 나는 목소리를 밀어냈다.
“조, 조금만 참아. 조금만…….”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최대한 붙이고 고난도의 보칼리제를 쥐어짜 냈다. 그를 감싸도록 혼신을 다해 음폭을 넓혔다. 두 번째 곡에 접어들어 중반에 다다를 무렵 살갗이 점점 아물기 시작했다. 그를 고쳐야 한다는 것 말고 아무 생각도 안 났다. 그래서 알지 못했다. 주변에 다른 누군가 있었다는 걸. 차이석의 눈이 어딘가로 향한 순간이었다. 그는 자신의 어깨를 잡아 힘껏 밀쳤다.
타앙────!
동시에 차이석의 어깨에 피가 튀었다. 총성은 연달아 울렸다. 차이석의 허벅지가, 심장이 사납게 각혈했다. 마지막 총성이 야바의 팔을 할퀴고 바위에 박혔다. 예리한 여운과 화약냄새를 따라 고개 돌렸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코카인이 휘청거리며 서 있다. 코카인은 넋이 나가 은빛 총의 방아쇠를 계속 당겼다. 총은 달칵거리는 소음만 토했다. 그는 눈물범벅이었다.
“…나는……망상 속에서 독극물을 타진 않아.”
야바는 차이석을 뒤집어 품에 안았다. 경사진 숨결이 그의 볼에 흩어졌다. 총 맞은 팔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의 눈꺼풀이 무거운 상하운동을 반복했다. 물의 입자를 닮은 음성이 들렸다.
“헬기를… 타고 가면 누군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 사람이… 데려다 주는 곳으로 가. 거기가 너의 새로운 집이야.”
지독한 오한에 이가 따닥따닥 부대꼈다.
“……가, 같이 가자.”
이 진창에서 꼭 함께 나가자.
“가, 같이 갈 거야……. 조금만 참아! 내가…내가……!!”
고쳐줄게……. 실 같은 흐느낌이 부서졌다. 꾸역꾸역 목구멍에서 노래를 끄집어냈다. 차이석은 손을 들었다. 피에 젖은 손이 자신의 가슴 언저리를 지나, 턱으로 귓불로…… 머릿결을 헤치고 어떤 곳에 멈췄다. 칩 수술 자국이었다. 완전히 아물지 않은 흔적을 그는 신중하고 신중하게 어루만졌다. 아직 혼란스러운 눈이었다. 혹은 고해성사하는, 그런 눈이었다.
“움직이지 마. 가만히 좀 있어……!”
피가 너무 많이 나잖아…. 야바는 그의 손을 붙잡아 내렸다. 그리고 또 노래 불렀다. 안에 가득 찬 울음소리가 제 목을 죽죽 그었다. 그의 주변을 감싼 피 웅덩이가, 그 뚜렷한 색채가 두려웠다. 그가 아프지 않도록 부드럽게, 온 마음을 다해 쏟아냈다. 이상했다. 이렇게 간절한데, 성대가 찢어져도 상관없는데 그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조금 전에도 치유했는데, 어째서? 어째서? 관자놀이에 정을 박고 두드려대는 듯했다. 코카인을 붙잡아 차이석 앞에 강제로 앉혔다.
“어, 어서 노래해! 얼마 전에도 이석이 치유했잖아! 빨리!”
지금 이 순간만은 차이석을 흔쾌히 내주었다. 코카인은 기적의 목소리를 가졌으니 가능할 거다. 그를 되돌리기만 한다면 총 쏜 것도 없던 일로 할 거다. 코카인은 무너져내려 입술을 떨었다.
“헛짓거리……하지 마. 심장이 박살 났어…….”
한 음절, 한 음절 심장에 비수가 되어 박혔다.
“……이미 죽었다고.”
모두 개소리다. 조금 전까지 그와 얘기했다! 체온도 남아 있다! 차이석의 목을 껴안고 귀에다 하이 노트의 아리아를 쏟아냈다. 프로펠러 굉음이 노랫소리를 먹어치웠다. 코카인은 히스테릭하게 웃었다.
“……피 토할 때까지 불러 봐. 너 같은 게 가능할 것 같아……? 네 노래를 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망가지는지 보긴 했어? 그 독약 같은 목소리를 가진 네가… 힐러라고?”
이성이 하얗게 세서 뭐가 두려움인지 증오인지도 갈피를 잡지 못했다. 지금은 코카인도, 자신도 제정신이 아니라 힘이 안 나오는 거다. 일단 헬기를 타고 제일 가까운 병원으로 가자! 그때까지만 버텨준다면 창백한 남자한테 매일 밤 시달려도 괜찮다. 불알 같은 거 없어도 상관없다. 헬기 쪽으로 손을 흔들었다.
헬기 날개가 전깃줄을 스쳤다. 헬기 부조종사가 손으로 X 모양을 만들었다. 밧줄이 닿는 곳까지만 가보는 거다. 차이석을 부축했다. 땅에 끌리는 그의 다리가 신경 쓰여 견딜 수 없었다. 그의 상체가 기울었다. 함께 휩쓸려 나동그라졌다. 재빨리 일어나 차이석을 껴안았다. 헬기 조명에 시야가 밝아졌다. 그제야 제대로 보였다. 크게 벌어진 차이석의 목울대와 움푹 파인 심장의 공간……. 그 틈에서 검붉은 근육이 파열돼 있다. 머리를 어지럽게 했던 입술은 한 줌 숨소리도 내보내지 않았다. 귀울음이 뇌를 갉아먹었다. 이건 항우울제를 먹지 않은 탓이다. 너무나 생생해서 뼛속까지 울리는 잔혹한 망상.
“이석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석아…….”
근원지 모를 눈물이 그의 눈언저리에 떨어졌다. 그래도 그는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혼을 질퍽하게 했던 검은 눈동자는 그저 차가운 공간일 뿐이었다. 야바는 저주에 걸린 왕자를 가만히 안았다. 피에 젖은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세이렌은 무엇보다 제 목소리를 사랑했기에 거부당하면 자살도 기꺼워했다. 기하는 부와 권력을 쥐는 도구로 이 목소리를 이용했다. 코카인은 목소리에 대한 자부심이 흔들리자 망가졌다. 평생 이 목소리를 미워했던 자신은 아직도 헤매고 있다. 이 목소리의 진실이 뭐든 상관없다던 유일한 존재를 조금 전에 잃었다.
생을 다해가는 도마뱀같이 할딱거렸다. 팔다리가 제각각 분리된 것 같다. 집게로 손톱이 뽑히고, 불에 달군 인두로 망막이 지져지고, 귀와 입속에 끓는 납을 들이붓고, 생가죽이 갈려 창자를 한올 한올 뜯기고. 그걸 낱낱이 보며 결국 정신까지 파괴되고 마는…. 그의 심장이 멈춘 건 그런 형벌이었다. 그가 흔들리면 자신의 세계도 흔들린다. 자신의 세계가 무너졌다. 멸망한 세상은 무풍지대의 고요함이었다.
야바는 피가 감긴 제 손을 응시했다. 혀를 내밀어 손가락 사이에 묻은 것을 핥았다. 할짝, 할짝, 어둠에서 마찰음만이 또렷했다. 혈류가 돌았다. 무뎌졌던 허기가 고개를 들었다. 조금 더, 조금 더 먹고 싶다. 야바는 고개를 떨구고 그의 볼에 얼룩진 피를 음미했다. 찢어진 목덜미를, 생가죽을 씹으며 피를 쭉쭉 빨아 먹었다. 맛있다. 맛있다. 미치도록 맛있다. 아니, 아니. 이렇게 죽은 육신이 아니라, 진짜 살아 있는 것, 맥동하는 심장과 생생한 육질. 이 끔찍한 공복감 외엔 어떤 고통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눈을 굴렸다. 시커먼 입을 벌린 공터엔 수십 명의 사람이 피 흘리며 헐떡이고 있다. 멀리서 어떤 남자가 호흡의 끝자락을 간신히 틀어잡고 있다. 남자의 가랑이에서 짙은 피 냄새가 났다. 생각만 해도 입에 침이 도는 비릿한 육즙, 달콤한 혈향을 풍기는 먹이들이 저렇게나 많다. 야바는 입술을 혀끝으로 훔쳤다. 목젖을 한껏 벌렸다. 저 깊숙한 점막으로부터 소리를 끌어올렸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무료하고 몽환적인 멜로디였다. 코카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다 흠칫했다. 뱃머리에 부딪혀 풍랑을 잠재우는 하프의 선율이었다. 발목에, 목덜미에 달라붙어 시선을 인도했다. 야바는 피 웅덩이 위에서, 차이석을 품에 안고 노래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성기를 감싸 빨아올리듯, 피묻은 입술을 오므렸다가 벌렸다. 피에 젖은 스웨터는 무게를 못 이겨 아래로 늘어졌다. 한쪽만 노출된 어깨는 눈부셨다. 젖꼭지 언저리엔 차이석의 검은 머리카락이 극명하게 대조를 이뤘다.
노랫소리는 귓바퀴를 핥고, 목덜미를 빨고, 성기에 입김을 불었다. 노래가 아니라 농밀한 애무였다. 어지럽게 타는 선홍빛 선율이 공간으로 울려 퍼졌다. 그때부터였다. 모서리 진 돌덩이와 합판에 깔린 사내들이 하나 둘, 일어났다. 배에 칼을 꽂은 사람, 머리가 함몰된 사람, 팔다리가 부러진 사람, 홀린 눈으로 걸어갔다. 뼈가 돌출된 사람은 관절을 기괴하게 꺾으며 움직였다. 숨만 겨우 붙어 있던 기하도 눈꺼풀을 들었다. 몽롱한 눈으로 일어나 기어서 어떻게든 가려고 했다. 사내들은 파도를 헤엄치듯 노래가 흘러나오는 근원지로 갔다. 그들의 눈빛은 정욕으로 이글거렸다.
퇴폐적인 음색이 몸을 축축 늘어트렸다. 코카인은 현기증과 구토에 머리를 털며 의식을 차리려 했다. 세준도 피 칠갑을 한 채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비정상적으로 풀린 눈은 이미 무아지경에 빠져 있다.
“형! 안 돼요!”
코카인은 세준을 붙잡고 귀에 아리아를 쏟아부었다. 그러나 세준은 노래를 뿌리치고 허겁지겁 기어가려 했다.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그의 중심은 눈에 띄도록 발기했다. 저건 뱃사람을 침몰시켰던 세이렌의 장송곡이다. 밀랍으로 귀를 틀어막고 몸을 묶지 않으면 뼈와 살을 뜯어먹히고 마는! 돌덩이를 들어 세준의 손등을 찍어 내렸다.
“정신 차려요!”
스무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야바 주변을 에워쌌다. 그중엔 기하도 보였다.
아아아아아~~~~~~~~~~~~~~~~
신비로운 허밍이 범람했다. 암흑 도시를 탐욕스럽게 핥는 물의 흐름이었다. 사내들은 일제히 황홀경에 빠져 노래 결을 따라 유영했다. 불룩한 아랫도리를 한 반 송장들은 야바가 입김만 불면 그 옷을 찢고 덤벼들 기세였다. 이미 바지가 축축해진 이도 보였다. 피와 눈물로 얼룩진 야바는 혼이 없는 눈으로 허공을 보았다. 음울한 허밍은 점점 달구어져 절정에 다다랐다. 몇 단계를 훌쩍 도약해 초고음부에 접어들었다. 그 순간 허밍에서 갈라진 금속성이 날카롭게 쇄도했다.
끼끼기기기기──────────
그건 인간의 소리가 아니었다. 쇠와 쇠가 맞부딪혀 생가죽을 찢는 소리였다. 세상 모든 절망을 담은 피 울음이었다. 날카로운 진동은 두개골로 파고들어 뇌수를 휘저었다. 황홀경에 빠졌던 사내들은 모두 목을 잡고 땅바닥을 기었다. 간질환자같이 흰자위를 드러내며 게거품을 물었다. 음색은 한층 요사해졌다. 그 순간, 사람들 머리통이 형체 없이 파괴됐다. 뇌수를 질질 흘리며 머리 잃은 몸뚱이들이 불룩하게 팽창했다. 내장이 튀고 뼈가 박살 났다. 그다음 사람, 그다음 사람. 바다 요녀의 절규가 천국을 휩쓸고 학살을 시작했다. 야바는 눈을 내린 채 얼굴에 튀는 피를 혀로 핥아 먹었다. 핏물 배인 혀가 매끄럽게 뒤틀렸다. 피의 노래는 경계선이 없었다. 한목소리에서 미성과 금속음이 가늘게 분리되어 뻗어 나갔다.
아아아~~~~아아아~~~~~~~~~~~끼기기기기끽끽───끼끼끼─────────
위장이 쏟아질 만큼 토기가 역류했다. 세포를 전율케 하는 공포였다. 사람들은 지옥을 본 듯 정신 착란을 일으켰다. 옆 사람 머리와 몸이 터지는데도 눈을 까뒤집은 채 비죽비죽 웃었다. 기하는 얼굴이 새파래져 흙이 파이도록 손톱으로 긁었다. 단말마를 끝으로 두개골이 파열했다. 팽창한 근육을 뚫고 잔해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세준은 머리를 움켜잡은 채 사지를 경련했다. 주인 모를 팔이 바닥으로 굴렀다. 뼈가 보이는 고깃덩이는 푸른빛 반지가 끼워져 있다. 코카인은 기어가 고깃덩이를 쥐려 했다. 소리 압력이 무시무시하게 덩치를 불려 갔다. 미처 닿지 못하고 데굴데굴 굴렀다. 뇌를 헤집고 든 소리에 혼이 뭉개질 지경이다. 꽉 깨문 어금니를 비집고 비명이 뻗어 나갔다.
으아아아아악───────────!!
살아야 한다는 의지뿐이었다. 미친 듯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요사한 허밍이 절규를 삼켜버렸다.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격렬해졌다. 난도질 된 살덩이들이 사방으로 뿌려졌다. 코카인은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졌다. 모든 게 휩쓸려간 억만년의 암흑이었다.
눈 떴을 때 코카인은 흙바닥에 고꾸라져 있었다. 몸은 어디 하나 고통스럽지 않은 데가 없었다. 불소시게로 쉼 없이 고막을 들쑤시는 통증이었다. 고막에 고인 액체가 이명을 밀어내고 뺨으로 흘렀다. 흉물스런 건물과 바닥에 달라붙은 잔해들뿐, 생명 하나 없는 폐허였다. 멀리서 발소리가 몰려왔다. 흙바닥을 가로지르는 구두는 금세 더러워졌다. 그 사람은 어딘가로 달려가다 숨을 들이키며 멈췄다.
야바는 고립된 암초 위에 앉아 노래하고 있었다. 들리진 않았지만, 피부가, 세포가 감지했다. 차이석을 감싸 안은 손끝은 하얗게 떨었다. 이제 막 먹이를 배불리 먹어치운 바다 요녀는 처연했다.
으으음……아아아아………
소리 결을 따라 메아리가 뒤쫓았다. 아래로 가라앉는 물의 감촉이었다. 세상 막바지에서 읊조리는 고백이었다. 가느다란 흐느낌이었다. 자장가였다.
생의 어떤 잡음도 들리지 않는 새벽이다. 시리디시린 적막 속에서 야바는 품에 안은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의 속눈썹 아래 핏물 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살갗이 모두 잘린 것도, 심장에 뻥 뚫린 공간도 제 것인지 그의 것인지 분간키 어려웠다. 그는 더이상 피를 쏟아내지 않았다. 체온을 넘겨주지도 않았다. 자신 또한 고깃덩이였다. 모든 통각이 죽었지만, 명치뼈가 부서지는 낱알의 고통만은 선명했다. 섧은 바람에도 의식 자꾸 고꾸라지려 했다. 그의 이마에 볼을 묻고 요람처럼 몸을 흔들었다. 들릴 듯 말듯 반복된 음조를 속삭였다.
그가 손수 만든 음식을 자신에게 먹일 때, 자신의 배를 토닥이며 재울 때, 손끝 하나하나에 결핍됐던 그의 허기가 묻어났다. 방대한 왕국을 먹어치워야만 그 지독한 허기를 채울 수 있었던 거다. 식은 체온과 껍데기만 남은 육신, 그가 죽음의 냄새에 매료돼야 했던 이유일 터였다. 그럼에도 일생일대의 계획을 망친 장본인의 처벌을 볼기 때리기로 끝냈다. 발가락도 핥아주었다. 자신이 있는 이 시궁창으로 기꺼이 몸을 던졌다. 가슴이 죄어 부서졌다. 그건 고통이란 단어로 속박해선 안 될 거대한 상실감이었다. 앞으로 먹고 자고, 언제가 이 고통도 잊을 날이 오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삶의 욕구가 재생하기 전에 그냥 이 순간이 가장 적당하다고.
내가 다 해 줄게…….
어떠한 계절도 이 마음을 바꾸진 못할 것이다.
내가 너의 죽음이 돼 줄게…….
한숨처럼, 흐느낌처럼 노래 분말을 흩뿌렸다. 소리는 어둡고 싸늘한 공간으로 흘러갔다. 세상 끝에 도달해 되 울렸다. 시간이 역행하듯, 물의 흐름을 닮은 멜로디가 굽이쳤다. 식은 혈관에 스며들어 피를 덥히고 죽은 살갗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보이진 않지만, 그 고요하고 웅장한 태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를 기점으로 야바의 심장에서 열 덩이가 뭉쳤다. 덩어리는 가슴으로, 목구멍으로 역류했다. 검붉은 토혈이 흐드러지게 만개했다. 몸이 뒤로 휘청 넘어갔다. 눈앞이 암전했다. 어쩌면 이곳은 물속일지도 모르겠다. 멈췄던 그의 심장이 맥동하기 시작했다. 피는 따뜻했다.
야바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