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40화 (40/42)

힐러-track 38

추적하는 자.

코카인은 그 길로 인근 병원에 끌려왔다. 병실에 들어섰을 때 사장의 몰골은 볼만했다. 얼굴이며 목덜미, 팔은 모두 난도질당해 성한 곳이 없었고 산소호흡기에 겨우 연명하고 있었다. 저 지경이 돼도 숨이 붙었다니 끈질긴 생명력에 이가 갈렸다. 자신과는 달리 임수는 참담한 낯빛이었다.

“이틀째 의식 불명이야. 밖에서 망보던 부하들이 빨리 구출하지 않았으면 이 모습조차 못 봤겠지. 병원에서는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더군. 하지만 너는 모두가 포기했던 차명환도 살렸잖아?”

임수는 한발 다가와 시선을 내리꽂았다. 위압적인 체격에 숨통을 눌렀다.

“빨리 시작해. 두 시간이면 충분하겠지.”

“그 시간 안에 무슨 재주로요? 하루 종일 매달려도 장담 못합니다.”

“노력해 봐. 미리 말해두는데 감상용으로 눈속임할 생각 마라. 내 대화법은 사장님과 다르니까.”

임수는 안 주머니에서 푸른빛 반지를 꺼냈다. 코카인은 창백하게 질려 자신의 전용 리모컨을 노려보았다. 목구멍에 칼을 쑤셔도 싫었다. 자신이 계획이 실패한다면 머리가 터져 죽든 말든 될 대로 되라였다. 그러나 목숨이 붙어 있는데 살고 싶지 않을 리가 없었다. 눈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다. 임수는 몸을 틀며 길을 터주었다. 코카인은 사장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때 침대 곁에 놓인 사장의 휴대폰이 요동쳤다. 임수는 대신 받아들었고 한순간 안색에서 핏기가 빠졌다. 그는 손마디가 하얘지도록 폰을 움켜쥐었다. 통화를 끝낸 그가 부하에게 반지를 건넸다.

“사장님 깨어나시면 드려.”

그리고 코카인에게 눈길을 돌렸다.

“내가 돌아왔을 때 사장님이 앉아 계신 걸 봤으면 좋겠어. 아니면 저 침대에 눕는 건 네가 될 거야.”

임수는 서둘러 약속 장소에 당도했다. 사장을 지키는 부하 몇을 제외하고 모두 이끌고 왔다. 급하게 나오느라 아이들을 모을 시간이 부족했다. 이번 일로 부하 4명을 잃었다. 원인은 모르나 모조리 머리가 부서졌고 사장도 피습당했다. 야바를 데리러 갔을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유일한 생존자인 사장에게 직접 듣길 원했다. 생사의 경계에 선 사장만으로도 감당키 어려운데 이건 그야말로 설상가상이었다. 빛 한점 들지 않는 폐공장은 스산했다. 임수를 맞아준 건 10여 명의 우람한 사내들이었다. 자신들과 동류의 냄새를 풍겼다. 임수는 눈으로 폐공장 내부를 훑었다. 통화 내용과는 달리 사내들 외엔 아무도 없다. 역시 함정인가…….

“누가 사주 했지?”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말로 대화하려 했던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누구의 사주인지는 모르나 사장이 타깃인 건 분명했다. 임수는 우두머리로 보이는 놈에게 달려들어 턱뼈를 박살 냈다. 그를 신호탄으로 맹격이 이어졌다. 서로에게 휘두른 무기에 살이 베이고 뼈가 으스러졌다. 피 토하는 고성이 난무했다. 수적 열세에 임수 패거리는 삽시간에 포위됐다. 상대 우두머리가 어딘가를 쳐다보았다. 시선 끝에 누군가의 인영이 이쪽을 관조하고 있었다. 어두웠고 정신없던 터라 다른 자가 있었다는 건 눈치 못 챘다. 남자는 상체를 일으켜 느릿느릿 다가왔다. 소리 없이 미끄러지는 뱀 비늘의 움직임같이, 암흑 속에서도 힘 있는 선과 강렬한 빛깔이 온몸에 와 닿았다. 뜬금없는 한기가 들었다. 불빛에 남자의 얼굴이 드러난 순간 임수는 눈을 의심했다.

“차 전무…….”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자신에게 배를 뚫렸음에도 멀쩡하다는 것보다, 사장의 모친을 인질로 삼은 장본인이 차 전무였다는 게 충격이었다. 차 전무는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엉뚱한 사람이 나왔군요. 내가 보고 싶었던 건 거기가 아닌데.”

“차 전무 당신이……꾸민 일입니까?”

이석은 임수의 목을 움켜잡아 벽에 처박았다. 불빛에 드러난 눈동자는 허기진 날짐승같이 번들거렸다.

“내가 원한 건 강기하입니다. 저녁 만찬에 메인디쉬가 빠지면 쓰면 안 되죠.”

“사장님은 지금 나오실 상태가 아닙니다.”

“무덤에 기어들어가기라도 했습니까?”

“사장님 모친이 무사하신 걸 확인하기 전까지 내게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 겁니다.”

임수는 흔들림없이 받아쳤다. 차이석은 어딘가로 전화했다.

“잘 보이게 해봐요.”

그리고 임수의 코앞까지 폰을 디밀었다. 제일 먼저 미약한 흐느낌이 들렸다. 액정 안에는 중년 여자가 포박당해 있었고, 그녀의 관자놀이에 총구가 닿아 있다. 여자는 두려움에 탈진해 몇 년은 늙어 보였다. 사장의 모친이었다. 차이석은 애태우듯 폰을 뒤로 잡아뺐다. 임수는 안면 근육을 경련했다.

“너 이 새끼…….”

차이석은 왼쪽 눈썹을 곤두세웠다.

“이만하면 당신 주둥이를 터지게 할 만합니까? 모친이 사라진 지 이 주가 지났는데, 아들이란 사람이 전혀 모르다니 실망이군요. 싱싱하진 않지만 오늘 만찬의 앙트레로 나쁘지 않죠.”

“아무리 피 튀기는 전쟁터에서도 예의란 게 있는 거야. 죄 없는 분이다. 어서 풀어 드려!”

임수는 이를 갈았다. 차이석은 코끝을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그때 사내들이 달려들어 임수와 부하들의 손을 뒤로 묶었다. 다리 뒤쪽에서 걷어차 무릎을 꿇렸다. 차이석은 임수 앞에 수직으로 내려앉았다.

“강기하와 당신은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니 서로 비밀도 없겠군요. 지금부터 허튼소리 할 때마다 당신 이빨을 하나씩 뽑겠습니다.”

빡빡머리 사내가 임수의 입속에 펜치를 쑤셔 넣었다. 그 순간 차이석의 눈빛이 돌변했다. 사냥감의 혈관을 가닥가닥 물어뜯듯이 뇌까렸다.

“야바는 어디에 있지?”

“…모른다고 했… 크으윽……!”

“실장님……!!”

펜치가 잇몸으로 파고들었다. 살점 묻은 이빨이 뿌리째 뜯겨 나갔다. 임수는 몸을 뒤틀며 피를 토했다. 부하들은 절규했다. 비수 같은 목소리가 살을 썰었다.

“어딨어?”

“모른다고 했…크아악……!!”

한눈팔 틈 없이 은빛 흉기가 잇몸에서 생니를 뜯어냈다. 피묻은 조각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임수는 생생한 고통에 발광했다. 피 냄새가 자욱했다. 미치광이는 목 졸린 사람같이 눈을 일그러트렸다.

“말해. 그럼 고통 없이 죽여줄 테니.”

마치 애원으로 들렸다. 부하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똘아이는 우리한테 없어! 사장님도 어떤 놈한테 당한 뒤에 사경을 헤매는 중이라고! 진짜 없으니까 실장님을 놔줘! 미친 새끼…크악……!!”

의리로 뭉친 사내들의 이빨이 모두 뽑혀나갔다. 그 뒤 강기하의 개들은 고문을 견디다 못해 흰자위를 뒤집고 기절했다. 기절한 걸 두드려 깨워 고문해도 우두머리의 소재를 실토하지 않았다. 시간은 자정을 넘어섰다. 몇 시간에 걸친 고문 끝에 알아낸 건 강기하가 입을 놀릴 수 없을 만큼 위중한 상태이며, 야바가 그 손에 없다는 것뿐이다. 피떡이 되어 실신한 개들과 살점 묻은 이빨만이 바닥에 낭자했다. 살집 두둑한 사내가 달려와 물건을 내밀었다.

“놈들 차에서 모두 가져왔습니다.”

임수는 피를 울컥울컥 토하면서도 기가 꺾이지 않았다. 저 인상적인 눈빛을 몰라볼 리 없지. 이석은 허리를 곧추세우고 자신의 개에게 손을 내밀었다.

“칼 좀 빌려주겠습니까?”

이석은 사내에게서 칼을 건네받았다. 임수의 배에 칼질했다. 정확히 두 번, 자신이 당했던 그 자리였다. 내장을 뜯어먹고 나온 금속이 바닥에 뒹굴었다.

“전체요리는 이쯤 하죠. 별로 안 당기는군요.”

드릴에 두개골이 뚫린 듯하다. 이석은 폐공장에서 나왔다. 흔들리는 걸음으로 차에 올랐다. 조수석에 있던 버미즈 파이톤이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폰이 깜빡거렸다. 폰을 받아들자 성재 목소리가 들렸다.

[너 칼 맞았다니 무슨 소리야?! 집에 화재 난 건 대체 뭐고? 지금 브레인들이 너만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어! 일단 만나서 얘기하자. 너 지금 어디야?]

선뜻 와 닿지 않는 말이다. 사고를 관장하는 기관이 그날 이후 모두 정지했다.

“몰라.”

사방은 암흑천지다.

“나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마른 음성이 땅바닥을 뒹굴었다. 통화를 끝내고 운전석에 늘어졌다. 고양이를 도둑맞은 지 삼일째다. 전국의 도로 CCTV를 뒤지라 명령했고, 지명 수배를 내렸다. 강기하 손에 없다고 해도 실마리는 쥐었을 것이다. 강기하는 야바를 가지려고 어디까지 포기할 것인가? 그럼 자신은? 모친의 목숨과 야바,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선뜻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아마 둘 다 포기하지 않겠지. 강기하도 마찬가지라면, 건진 건 없이 이쪽 패만 모두 내보인 셈이 된다. 강기하가 왜 그렇게 생각이 많았는지 이제야 뼈저리게 느낀다. 그건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이석은 양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대시보드에 박인 케이스를 열었다. 깊은 바다 빛 사탕을 꺼내 입에 넣었다. 까드득. 까드득. 아래턱으로 푸른빛 결정체를 박살 냈다. 온종일 물 한 방울도 입에 안 댔다. 담배는 생각도 안 났다. 더 지독한 금단증상이 뇌를 갉아먹기 때문이다. 썩고 짓무른 심장은 수시로 그악한 통증이 기습했다. 대신 뱃가죽을 후벼 파는 고통은 무뎌졌다. 순이는 흰색 가디건을 깔고 힘없이 누워만 있다. 화재 더미에서 유일하게 건진 고양이 흔적이다. 냉혈동물이 차지한 가디건을 잡아당겼다. 옷자락에 코를 박고 섬유 사이에 묻은 목소리 분말과 체향을 들이마셨다. 순이도 옷자락에 머리를 얹어 혀끝에 냄새를 묻혀갔다. 몽롱한 향기에 굳은 머리가 이완됐다. 살가죽은 차가웠고 내장은 절절 끓었다. 이석은 눈을 감고 한숨을 토했다.

“나비야…….”

“감히 나를 가지고 놀아?! 어떻게 죽여줄까?”

코카인 명치에 주먹이 쇄도했다. 신음할 틈도 없이 발로 짓뭉갰다. 뼈 으스러지는 소리가 병실을 채웠다. 기하는 비척거리며 벽에 손을 짚었다. 몸이 성치 않아 고자 가수 하나 주무르는데도 숨이 가빴다. 부하의 말에 따르면 꼬박 삼 일간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코카인이 힐링 했다고 하나 고마움은커녕 살의로 몸을 가누기 어려웠다.

“네가 말한 힐러가 야바였군. 언제부터 알고 있었지?”

코카인은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흠칫했다. 기하는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이를 갈았다. 야바가 힐러였다니, 직접 목격했지만 믿기지 않는다. 무엇보다 야바 역시 스스로의 실체를 몰랐다는 게 말이 된단 말인가. 아니, 다른 건 둘째치고 우선 야바를 찾아야 한다.

“그 헬멧 새끼가 들고 있던 가위는 정원사들이 사용하는 거였어. 연합파가 숙소를 습격했을 때 잠시 머물렀던 집주인이 정원사라고 하지 않았나?”

부하가 대답했다.

“저도 그렇게 압니다. 코카인과 어릴 때 한동네에서 살았다고 하던데요. 애들 시켜서 가보라고 하겠습니다.”

“확인할 필요 없어. 벌써 내뺐을 테니까. 가위도 함께.”

분노보다 새파란 새끼한테 당했다는 수치심이 앞섰다. 기하는 쓰러진 코카인 옆구리를 걷어찼다. 녀석은 격렬하게 기침했다.

“그 새끼와 작당해서 야바를 빼돌렸겠지? 어디로 빼돌렸는지 말해.”

“뒤통수를 친 건 피차 마찬가지 아닙니까?”

코카인은 피범벅이 된 눈으로 표독스럽게 노려보았다.

“눈 뒤집혀서 비명이라도 지를까 봐 살 떨리는군.”

기하는 코카인의 배와 옆구리에 송곳 같은 주먹을 꽂았다. 그러나 건방진 눈은 없어지지 않았다.

“당장 찢어 죽여도 모자라지만 보수 공사도 완료했고 파라디소는 이제 곧 재 오픈 하지. 차명환 소문을 들은 거물들이 너만 목 빠지게 기다리는 중이야. 게다가 뉴 페이스가 들어왔다고 광고했으니 고객들의 기대감을 저버리면 곤란하잖아? 이 바닥에선 신용이 생명이니까. 정원사 새끼는 어딨는지 말해.”

“모릅니다.”

“그럼 알아내.”

기하는 자신의 폰을 코카인 무릎에 던졌다. 코카인은 잔기침하며 말했다.

“제 번호가 아니면… 안 받을 겁니다. 경계심 많은 사람이라 이상한 낌새를 맡으면 야바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길 거에요.”

코카인은 압수당했던 폰을 건네받아 번호를 눌렀다. 입안이 터져 계속 피가 흘렀다. 사장이 야바에게 빠졌다는 건 오래전부터 알았다. 야바가 힐러라는 걸 알아도 노예처럼 대하진 않을 것이다. 신호음 끝자락에서 세준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형, 저예요. 뭐 했어요?”

[채우는요?]

“그냥…있어요.”

[채우 목소리가 이상해요. 어디 아파요?]

“감기에 걸렸어요. 형 지금…어디세요?”

[하늘과 제일 가까운 동네에 있어요.]

그러고 보니 세준을 재회했을 때 예전에 살았던 곳에서 머문다고 들었다. 어렸을 때 자신이 사장을 피해 숨어 살았던, 야바를 처음 만났던 동네…….

“형은 어떻게 거기서 계속 살죠? 나는 생각하기도 싫은데.”

[그냥…….]

세준은 뭐라 우물거렸다.

“야바……세진이는요?”

[계속 밥도 안 먹고… 무서운 얼굴만 하고 있어요. 그리고…계속 노래해요.]

세준이 야바의 노래를 들었다는 건가……. 코카인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갑자기 환경이 바뀌어서 그럴 거에요. 워낙 예민하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아무래도 세진이를 다시 데려와야겠어요. 시간이 좀 늦었지만 지금 좀 데려와 줄래요?”

[왜요?]

말문이 막혔다. 하늘은 왜 파란 거냐고 묻는 아이의 질문 같았다. 코카인은 폰을 그러쥐었다.

“세진이는 거기에 있으면 더 아플 거에요. 앞으로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고요.”

[그럼 채우가 여기 와서 고쳐주면 되잖아요…….]

“세진이한테는 제힘이 통하지 않아요. 이유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래요. 형, 저 믿으시잖아요.”

[채우는 무조건 믿어요.]

“그럼 지금 데리고 오세요. 제가 마중 나갈 테니 어디서 볼까요?”

자신이 야바를 아파트에서 빼 오라했고, 잠시 데리고 있으라했다. 이번에도 당연히 따르리라 의심치 않았다.

[싫어요…….]

코카인의 입술 끝이 경직됐다.

“혀, 형……?”

[이제부터 세진이는 내가 돌봐줄 거에요. 헤어지지 않을 거에요…….]

“……형.”

[싫어요.]

뚜뚜뚜뚜──────

숨넘어가는 신호음이 고막을 찔렀다. 코카인은 패닉에 빠졌다. 세준이 이렇게 나오리란 건 예상 밖이다. 사장은 담배를 피우며 이쪽 통화에 집중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지나갔다. 간신히 표정을 정돈했다.

“……알았어요. 형. 그럼 제가 직접 갈게요. 거기에서 봐요.”

어쩌면… 세준은 애초부터 야바를 보낼 생각이 없었던 걸까? 코카인은 폰을 끊었다. 사장은 틈없는 시선으로 포위망을 좁혔다. 부디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길 빌었다.

“오늘 만나기로 했어요. 대신 제가 함께 오지 않으면 안 나오겠답니다.”

기하는 코카인의 머리카락을 틀어 올렸다. 독한 담배 향이 확 뿜었다.

“넌 어떤 상황에도 보험 하난 확실하게 드는군.”

기하는 일행과 함께 병원에서 나왔다. 거추장스러운 깁스를 뜯어내고 팔을 접었다가 폈다. 팔 뿐만 아니라 가위질당한 곳이 낫지 않았으나 지체할 여유가 없다. 지금은 사지를 움직이는 것으로 충분하다. 뒷좌석에 올라 코카인 옆에 자리 잡았다. 부하들은 밴에 올랐다. 기하는 조수석에 탄 부하를 힐끔 보았다.

“임수는 아까부터 왜 안 보이지?”

“아까 나가신 뒤에 연락이 없습니다.”

“다시 해 봐.”

“예. 참, 그리고 이건 임 실장님이…….”

부하가 안 주머니에서 반지를 내밀었다. 기하는 리모컨 반지를 손가락에 끼웠다. 그렇게 하려고 했다. 붕대가 두껍게 감긴 손은 위화감이 들었다. 부하는 고개 숙였다.

“죄송합니다. 연기와 유독 가스 때문에… 손가락은 회수 못 했습니다.”

“대신 목숨은 회수했지.”

엄지와 검지, 중지가 날아갔고 쓸모없는 손가락만 남았다. 정원사 새끼, 고스란히 되갚아주고 말겠다. 바로 옆에 또다른 힐러가 있는데도 몰랐다니. 테스트에서 놓쳤더라도 10여 년간 전혀 몰랐다는 게 도무지 납득이 안 간다. 야바와 코카인은 사이가 나빴지만 줄곧 같은 방을 썼고 거의 붙어 지냈다. 늘 코카인에게 가려 야바가 힐러일 경우는 염두에도 없었다. 기하는 생각을 멈추고 고개 돌렸다. 어쩌면 야바가 코카인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게 아니라,

“혹시……네가 야바를 가려줬던 거냐?”

코카인은 대답없이 앞만 쳐다보았다. 기하는 코웃음 쳤다.

“친구 팔아 자유를 얻으려는 녀석이 퍽이나 그랬으려고. 이것으로 둘이 서로 비긴 건가?”

차가 출발한 뒤 부하가 말했다.

“참, 얼마 전부터 임진희라는 여자가 계속 전화했다고 실장님이 전해 드리라고 했습니다.”

기하는 폰을 들어 전화 걸었다. 중년 여인의 음성이 넘어왔다.

[며칠 전부터 계속 전화했는데 어디 아프셨다면서요? 괜찮나요?]

“용건이나 말씀하시죠.”

싸늘한 응대에 조수는 잠시 침묵했다.

[전에 물어봤던 거 말이지요. 텔크시오페가 비명을 질렀는데도 강기하 씨가 살아남았다고…….]

여자는 말을 이어갔다.

[노래든 비명이든, 힐러의 힘이 통하지 않는 건 죽은 사람뿐이에요. 하지만 강기하 씨의 말이 사실이라면, 셋 중 하나밖에 없어요. 그 안에 있던 게 아그라오페메뿐이었거나, 아그라오페메와 텔크시오페가 함께 있었거나, 혹은 아그라오페메와 리게이아가 함께 있었거나. 반드시 그 안에는 아그라오페메가 있었어야만 강기하 씨의 생존이 성립된답니다.]

“어째서입니까?”

[텔크시오페와 리게이아의 비명은 전자레인지의 원리와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전자레인지에 계란을 넣고 돌리면 주파수와 진동으로 안에서 압력이 팽창해 터지지요. 아그라오페메는 살상의 힘이 없는 대신, 살상의 주파수와 진동을 흐트러트립니다. 힐러가 소리를 낼 때 입을 중심으로 원뿔 모양의 거대한 소리 영역이 생기는데, 그 소리 영역이 각각 공격과 방어막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된답니다.]

기하는 눈가를 떨었다. 소리 영역? 미친 새끼 집에서 야바가 비명을 질렀고, 영역 핵심부에 있었던 부하들은 전멸했다. 그 당시 야바는 부하들에게 눌려 누운 상태였으니 소리 영역이 위로 향했을 것이다. 자신은 방 밖에 있었기에 고막이 터지는 데만 그쳤다. 만약 그 방안에 함께 있었다면……. 뒷일은 생각만 해도 모골이 송연했다. 그럼 야바와 코카인이 거세당했던 날은 뭐지? 그 안에 반드시 아그라오페메가 있어야 자신의 생존이 성립된다면, 코카인이 몰살시켰던 주민들은?

“그 당시 힐러 두 명이 있었고 둘 다 살상 능력이 있습니다.”

[그때 힐러가 하나였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런 줄만 알았죠. 한 명은 며칠 전에 직접 목격했습니다. 혹시 10년 전 크리스마스 살인 사건이라고 기억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코카인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고고한 얼굴로 앞을 보고 있지만 신경을 이쪽으로 향한 게 역력했다. 기하는 말했다.

“나머지 하나가 주민을 몰살한 범인입니다.”

[희대의 살인 사건이니 기억하고 말고요. 그런데 한 공간에서 살상의 힘을 가진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면 파장이 충돌해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 안에서 살아남는 자체가 불가능해요. 그리고 뭔가 잘못 알고 계시네요. 그때 국과수에서 주민들의 사인은 둔기에 맞아서라고 발표했답니다.]

“물론 그렇게 알겠지만 주민들 사체에서 나왔던 마약 반응이나 두개골 파열은 그 녀석이…….”

[둔기로 치면 밖에서 안으로 충격이 가해져 두개골이 함몰되지요. 힐러의 비명은 안에서 압력을 받아 밖으로 터집니다. 둔기로 친 것과는 두개골 망가지는 모양부터가 달라요. 아, 그 무렵 비슷한 사건이 있었어요. 등산객이 서울 인근 야산에서 암매장당한 시신을 발견했는데, 시신 둘 다 두개골이 파열된 상태였지요. 의사였나 그랬을 거에요. 바로 그 사람들이 압력으로 두개골이 터진 거랍니다. 사람들은 그걸 연쇄살인이라고 아는데 어쩌면 힐러의 소행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

머리가 뒤엉켰다. 거세 수술을 맡았던 의사들일 것이다. 부하들을 시켜 시신을 인근 야산에 암매장했다. 기하는 머릿속에 당시 배치도를 그렸다.

① 야바 ② 젊은 의사?      ③ 노 의사? ④ 코카인

⑤ 나 ⑥ 임 실장

임수는 그 사건으로 왼쪽 귀의 청력을 상실했다. 왼쪽? 소리 영역에서 멀어질수록 영향을 덜 받는다면 이 위치는 맞지 않다. 그럼 대체 뭐지? 자신이 그렸던 배치도를 보고 코카인이 했던 말이 기억났다. 기하는 천천히 코카인을 응시했다.

“그래, 인간의 기억력은 믿을만한 게 못 되지.”

서로가 분출하는 비명 소리가 공격과 방어 역할을 했다면……. 기하는 머리에 그린 배치도를 지우고 다시 그렸다.

① 야바 ② 젊은 의사?        ③ 노 의사? ④ 코카인

⑤ 임 실장  ⑥ 나

자신과 임수의 위치가 바뀌고 코카인 쪽에 좀 더 붙어 있었다면, 임수의 왼쪽 귀와 자신의 생존이 모두 성립된다. 코카인 영역 안에 있었음에도 노 의사가 죽은 건 자신과 임수보다 야바와 가까이 있었거나, 노쇠한 체력이 충격파를 못 견뎠을 거라고 조수는 설명했다. 조수와의 통화를 끝낸 뒤 시선을 돌렸을 때 코카인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박 형사는 항상 주민들이 둔기에 맞아 죽었다고 주장했고, 헛다리 짚은 그를 비웃었다. 정작 헛다리 짚은 건 자신이었다.

“그때 나와 임수가 살았던 건 네 영역에 있어서였던 거야. 이어 플러그 때문이 아니라. 너한텐 애초에 살상 능력이 없었던 거지. 의사들도, 크리스마스 사건도 네 짓이 아니었나?”

모든 게 까발려졌음에도 코카인은 오기로 버텼다. 기하는 고아한 면상에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코카인은 얕게 기침했다.

“스무고개 하는 것 같아서 재미가 쏠쏠한데?”

야바는 어떤 힘을 가졌을까. 만약 둘 중 하나라도 완벽한 힐러라면 자신은 죽음도 두렵지 않은 불사신이 된다. 야바를 회수한 뒤 둘을 시험해볼 계획이다. 시체 구하는 건 일도 아니니까. 힐러는 다른 이의 고통을 가져가는 대신 제 수명을 야금야금 내놓아야 한다. 완벽한 힐러는 죽은 목숨을 살리는 대신 그에 버금가는 가치를 내놓아야 하지 않을까. 아니, 어디까지나 우연의 일치일 거다. 고작 8명으로 단정하기에 허술한 실험이다. 힘을 사용해서 단명한다기보다 운명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게 아니냔 말이지. 그렇다면 그리되지 않도록 하면 된다. 힐러를 둘이나 보유한 파라디소라니. 그야말로 세상 어디에도 없는 진짜 천국이 아닌가. 그토록 갈망했던 꿈을 이제 곧 거머쥔다.

그나저나 차이석은 왜 이렇게 조용하지? 벌써 눈치챈 뒤 공격하고도 남을 새끼다. 끝 간데없는 고요함이 불길하다. 문득 차이석 집을 습격했을 때가 떠올랐다. 야바가 시체에게 발정하는 미치광이한테 감금당해 더 비참하게 살 거라 믿었다.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길 원할 거라고, 머리통이 짓무르도록 상념과 전쟁해서 얻은 결론이다. 그 결론은 흡족했으며 바꿀 생각은 없었다. 그 집에서 야바를 재회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야바는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만개해 있었다. 누구도 끼어들지 못할 공기 속에서 완벽하게 보호받고 있다는 게 뼛속까지 와 닿았다.

문득 통화 말미에 조수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인어공주는 왕자를 만나기 위해 목소리를 포기했고, 왕자 목에 단검을 찌르는 대신 물거품이 되는 걸 선택했죠. 세이렌은 뱃사람을 잡아먹는 바다의 요녀로 불렸지만 어쩌면 그들은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해줄 누군가를 기다렸는지 몰라요. 그 바위 위에 앉아서…….]

[언제 괜찮다면 강기하 씨가 데리고 있는 힐러들을 만나게 해주겠어요?]

기하는 생각을 몰아냈다. 목적지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차는 속력을 올렸다. 코카인은 차 유리에 비친 사장을 노려보았다. 며칠 간 사경을 헤맸던 탓인지 사장은 머리를 대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식은땀이 맺힌 저 이마에 칼을 박아넣고 싶다. 살가죽이 저미도록 분하고 원통했다. 휴대폰은 압수당해 도움 요청할 방법도 봉쇄당했다. 문을 잠가 뛰어내리지도 못했다. 그때 사장의 바지에서 휴대폰 끄트머리가 고개 내밀었다. 차체의 흔들림에 폰은 주머니에서 미끄러져 나왔다. 심장이 가파르게 뛰었다. 눈알만 굴렸다. 앞 자리에 탄 부하 두 명은 전방을 보고 있다. 사장은 잠들었다. 입술을 깨물자 피딱지가 터져 쇠 맛이 났다. 재빨리 폰을 빼냈다. 손을 무릎 아래로 내리고 문자를 찍어 어딘가로 전송했다. 사장이 자신을 조롱했듯이 자신 또한 야바를 곱게 가지도록 내버려두진 않겠다. 절대로.

이석은 아파트 주차장을 가로질러 차에 올랐다. 고양이를 도둑맞은 곳에서부터 다시 시작했다. 강기하는 경비원을 미리 포섭해 습격시간에만 CCTV를 끄라고 했다 한다. 그 전후 CCTV를 모두 뒤졌고 흥미로운 수확을 건졌다. 강기하가 습격하기 전 정문에서 잡힌 차명환 아내였다. 여자는 오토바이 탄 남자와 동행했다. 남자는 헬멧으로 얼굴을 가렸고, 오토바이 번호판도 가렸다. 그리고 오토바이 옆구리에 매달린 가지치기용 가위는 낯설지 않다. 둘은 함께 들어갔지만 나올 땐 따로였다. 여자가 나오고 얼마 뒤 30분가량 CCTV 기록이 끊어졌다. 강기하가 습격했던 시간과 맞물린다. 이석은 차에 타자마자 차명환 아내에게 전화했다. 전원이 꺼져 있다. 침음을 뱉으며 다시 시도했다. 당연히 강기하 외에 없다고 단정했다. 그런데 또 다른 누군가 있을지도 모른다. 헬멧의 오토바이에 있던 건 분명 정원사들이 사용하는 가지치기다. 예전 임시 숙소로 찾아갔던 날 녀석의 형제를 만났다. 가위로 자신의 목을 겨냥하며 야바를 애인이라고 주장했던…. 문득 뒷좌석에 놓인 물건에 눈길이 갔다. 잡다한 서류와 휴대폰, 강기하의 개에게서 압류한 것들이다. 그 중 단말기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GPS와 비슷하나 더 크고 모양이 약간 달랐다. 노트북을 켜고 단말기를 연결했다. 버튼을 조작하자 화면에 위성사진이 떠올랐다. 최대한 확대했으나 한계가 있었다. 빼곡한 건물에 몇 개의 불빛이 모여 있다. 그리고 하나의 불빛이 어딘가로 이동 중이다. 단순히 출장 가는 가수 중 하나일지 모른다. 그러나…. 가지처럼 뻗은 도로들을 빠르게 훑고 되돌아왔다. 눈으로 불빛의 움직임을 집요하게 주시했다.

“저것도 노래라고. 돼지 멱따는 소리가 차라리 낫겠군.”

명환은 인상을 구기며 차에 올랐다. 아내와 함께 오페라 하우스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병상에 누웠을 땐 그토록 오고 싶었던 곳이건만, 중간에 나와 버렸다. 사기꾼과 엇비슷한 목소리를 들으면 위로가 될까 싶었다. 그러나 어떤 목소리도 갈증을 채우지 못한다는 게 오늘 공연의 감상이다. 몇 시간 동안 소리에 시달리느라 진이 다 빠졌다. 차 안은 조용했다. 아내와 있어도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는다. 침묵을 견디지 못해 먼저 수다 떠는 건 아내 쪽인데 그녀는 며칠 동안 죄지은 사람 마냥 자신을 피했다.

“너 요새 왜 그래?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나?”

“아니요? 그런 게 어딨어요?”

그녀는 목소리 톤을 과장되게 높였다. 명환은 미심쩍은 눈초리로 아내를 흘겨보다 창밖으로 시선을 내팽개쳤다. 홍콩인들 때문에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이럴 때일수록 자신이 건재해야 하지만 만사가 짜증 나고 성가셨다. 뜬금없이 오한이 들었다. 비서에게 히터를 올리라고 했다. 아내는 공연 내내 꺼놓았던 폰을 켰다. 액정을 확인하던 그녀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 여보! 이것 봐요! 코카인 씨가……!”

아내가 폰을 디밀었다. 명환은 눈살을 찌푸렸다. 액정을 본 순간 숨을 그쳤다.

-코카인입니다. 위급합니다. 난곡동으로 사람들을 보내주세요.

-그곳에 야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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