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39화 (39/42)

힐러-track 37

아리아가 몸속으로 침투했다. 불에 달궈지는 통증도 잇따랐다. 부드럽게 다가와 단호히 돌파하는 정기가 증폭했다. 절단된 혈관과 신경을 재생시키는 강렬한 에너지다. 화마에 삼켜지는 고통이 누그러지고 뱃가죽을 점령했던 통증이 이완됐다. 숨 쉬는 것도 편해졌다. 이따금 여자 울음소리가 끼어들었다. 낙폭 높은 아리아가 끝나고, 부드러운 결의 에너지가 퍼지며 남은 고통을 흡수했다.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이 지났다. 의식이 표면으로 떠올랐다. 공간을 인지하는 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제일 처음 보인 건 유럽풍 천장이다. 화려한 가구와 장식으로 점철됐음에도 비어 보이는 장소는 모친의 방이었다. 숨죽인 코카인이 내려다보고 있다. 곁에는 모친도 함께였다. 그녀는 제법 어미다운 얼굴로 울먹거렸다.

“정신……들어? 괜찮아?”

이석은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가 뜨며 기억을 쓸어넘겼다. 허리에 감긴 붕대의 압박감이 거슬렸다. 코카인은 이마에 땀을 매단 채 말했다.

“기억나세요? 괴한한테 습격당해서 집 앞에 쓰러져 계셨어요. 아까 집사님이 사모님께 힐링을 해달라고 제게 연락하셔서 왔더니…….”

“코카인이 발견 안 했으면 어쩔 뻔했어! 안 되겠다. 너도 이참에 본가에 들어와. 네 멋대로 살게 뒀다간 누나들 꼴 나겠으니까!”

모친은 악다구니했다. 머리는 약에 취한 듯 둔탁했다. 그들의 어깨너머로 밤하늘이 보였다. 선뜩한 예감이 뒷목을 할퀴었다.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났다. 뱃가죽에서 뜨끔한 고통과 현기증이 발목을 묶었다. 모친과 코카인이 옷을 잡고 늘어졌다.

“안 돼요! 피를 너무 많이 흘리셔서 좀 더 치료받으셔야 해요!”

“이석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보이지 않았다. 그들을 뿌리치고 차를 몰았다.

아파트 근처엔 구급차가 주차돼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갈수록 탄내가 강해졌다. 층수를 밝히는 불빛이 오늘따라 느리다. 엘리베이터 문이 틈을 벌리자 낯선 사내들로 가득한 복도가 보였다. 그을음이 기어간 벽면과 부서진 현관 도어락, 탄내음 속에 옅은 피 냄새가 섞였다. 급박한 심장 소리가 걸음 속도를 올렸다.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사내들이 들것으로 뭔가를 나르며 헛구역질했다.

“대체 뭐로 내려쳤길래 머리가 이 지경이 됐대? 아니, 이봐요!”

이석은 비닐을 모조리 벗겨 냈다. 모두 피범벅 되어 얼굴을 식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체격이나 입었던 옷으로 보아 고양이가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막아서는 형사들을 치우고 안으로 들어갔다. 불탄 거실은 형태만 간신히 유지했고, 유독 가스의 잔재로 숨쉬기 어려웠다. 고양이 장난감, 고양이가 덮었던 이불, 옷……모조리 잿더미가 됐다. 없다. 고양이가 안 보인다. 말라비틀어진 이성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냈다. 고양이는 낯선 자들의 방문에 겁을 먹고 집안 어딘가에서 털을 세운 채 숨어 있을 것이다. 비틀거리며 걸어가 자신의 방부터 확인했다. 드레스룸, 다용도실, 욕실, 베란다 빠트림 없이 뒤졌다. 고양이가 없는 걸 확인할 때마다 심장이 발기발기 뜯겨나갔다. 형사는 신분 확인 뒤 정황을 설명했다. 소방대원들이 도착해 불길은 금세 잡았으나 집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질식사했거나 두개골이 파열된 상태였다고 한다. 발치에 불에 탄 옷이 걸렸다. 녀석이 즐겨 입던 가디건이다. 부드러운 촉감을 좋아해서 이 옷을 입은 채 코를 비비적거리곤 했다. 시야가 나갔다. 고양이를 도둑맞았다. 모든 게 정지했다.

코카인은 집사와 함께 차이석을 침대에 눕혔다. 조금 전 차이석은 깨어나자마자 아파트로 달려갔다. 집사와 자신이 함께 뒤를 따랐으나 차이석은 그조차 모르고 아파트에서 뭔가를 찾았다. 폐인처럼, 인생 막바지에 이른 사람처럼. 그리고 또 쓰러졌다. 집사는 밖으로 나가다가 물었다.

“그런데 사모님. 저 구렁이는 어떻게 할까요? 전무님 댁에 있던 거라면서 구급대원이 주길래 받아는 왔는데…….”

모친은 인상을 썼다.

“내다 버려요. 어디 키울 게 없어서 그 흉측한 걸……!”

“그래도 전무님 깨어나시면 한 번 여쭈는 게…….”

“이석이한테는 내가 말하면 되니까 버려요.”

“알겠습니다.”

집사는 뒷목을 긁으며 밖으로 나갔다. 코카인은 차이석에게 다가갔다. 칼을 능숙하게 다루는 사람인지 내장을 제대로 끊어놨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익히 짐작 갔다. 차로 돌아오는 길에 힐링으로 출혈은 막았지만 완전히 고치려면 몇 날 며칠 밤을 새워도 모자랄 판이다. 모친은 정신 잃은 아들 손을 붙들었다. 이렇게 깊은 상처에는 격렬한 에너지를 쏟아내야 한다. 모친이 감당하기 괴로울 것이다.

“나머진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사모님은 잠깐 눈이라도 붙이세요.”

“차 회장 아들이 완치됐단 말 들었을 때 너를 죽여버릴 생각이었어.”

그녀가 불쑥 말했다. 뒤늦게 당도한 눈빛에는 적대감이 역력했다.

“오늘 너 아니었으면 우리 이석이는……. 이석이까지 잘못되면 나 진짜 못 살아.”

모친은 눈가에 고인 눈물을 훔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손님 방 치워놓을 테니 이석이 치료하면서 아예 며칠 있다 가.”

퍼석한 인사였으나 그녀가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느껴졌다. 모친이 나간 뒤 코카인은 차이석을 내려다보았다. 사장이 야바의 소재를 파악했으리란 건 짐작했으나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몰랐다. 세준에게 아파트에서 미리 잠복하라고 시킨 게 천만다행이었다. 차명환 아내 덕분에 정문을 무사히 통과했다. 이 일을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그녀는 흔쾌히 승낙했다. 그러나 머리가 가벼운 인간은 입도 가벼운 법이다. 만약 차이석이 알게 된다면, 아니, 목숨까지 살려냈는데 뭐 어쩌랴 싶었다. 세준은 야바를 잘 데려갔는지, 상황을 봐서 연락할 참이다. 지금은 차이석의 치유가 먼저이다.

침대 가에 앉아 그의 이마에 맺힌 땀을 수건으로 눌렀다. 차이석의 셔츠를 벗기고 피에 젖은 붕대를 풀었다. 칼자국은 두 군데, 겉보기와는 달리 내상이 심각했다. 그의 허리 언저리에 입술을 댔다. 피 냄새에 섞인 코롱향이 퍼졌다. 목덜미에 열이 오르는 걸 무시하고 노래를 시작했다. 치유와 동시에 정화하는 작업이다. 격정적인 아리아를 다섯 곡 연달아 불렀다. 차이석은 괴로운 듯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온 힘을 다해 힐링 했는데도 아직 이 상태라니, 당황스러웠다. 이런 현상은 전부터 그랬다. 보이지 않는 장막이 그를 감싸서 자신의 힘을 쳐내는 듯한……. 꽤 오랫동안의 힐링을 끝냈다. 코카인은 밭은 숨을 쉬고 상체를 세웠다. 상처는 꽤 많이 아물었다. 그는 한결 편해진 호흡소리를 들려주었다. 조명에 젖은 차이석의 콧대와 눈매를 어루만졌다. 그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얽었다. 최면을 거는 음률로 그를 더럽힌 불순물을 거둬냈다. 그리고 새하얀 에너지를 덧씌웠다.

I dreamed a dream in time gone by

지나 버린 옛날, 나는 꿈을 꾸었어요.

When hope was high and life worth living

그때는 희망 가득하고 삶은 살만한 가치가 있었죠.

I dreamed that love would never die

사랑은 결코 죽지 않으리라 꿈꾸었고…….

매춘부이자 미혼모인 팡틴이 비참한 삶 속에서도 꿈이 있던 시절을 회상하는 노래이다. 레미제라블에서 제일 좋아하는 곡이었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자유가 되어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고 그를 가지는 거다. 어차피 야바도 그의 지저분한 과거 한 자락으로 지워질 거다. 성대가 찢어져도 상관없다. 이 순간만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쏟아냈다. 유연하고 달콤한 음색으로 그를 치유했다.

I had a dream my life would be

지금 이 지옥과는 다른 모습일 거라고.

So different from this hell I'm living

지금과는 다른 삶일 거라고…….

그가 숨 쉴 때마다 꽉 조인 근육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자꾸 다친 곳과 상관없는 곳에 눈길이 갔다. 그는 어떤 식으로 야바를 안았을까? 야바는 어떤 식으로 반응했을까? 명치가 뜨거워졌다. 고개를 기울여 다가가자 그의 이마에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차이석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갰다. 그것만으로도 체온이 더워졌다. 살을 오므려 그의 아랫입술을 감쌌다. 더는 위험하지만 멈추고 싶지 않았다. 입을 살짝 벌리고 혀끝으로 그를 핥았다. 약물 중독자에, 저급한 말만 담았던 입술치고 몹시 부드러웠다. 그리고 끈적했다. 미끈거리는 접촉에 허벅지가 저릿했다. 더 깊이 들어가 그 강인하고 색정적인 감촉을 탐닉했다. 이 추악한 내면을 잊기에 충분한 자극이었다.

쫓기는 자.

야바는 곰팡내에 눈 뜨기 싫었다. 차이석 집에서 나는 냄새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취제 탓인지 눈꺼풀도 혓바닥도 흐물거렸다. 언제까지고 눌어붙고플 만치 방바닥은 후덥지근했다. 혼곤한 눈을 끔뻑거렸다. 입 찢어진 벽과 상처투성이 창문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허름한 방은 처음 보는 곳이다.

“으…….”

골이 지끈거렸고, 뼈마디는 제각각 어긋난 듯했다. 정신을 잃기 전의 기억을 되감았다. 기하가 습격했고 자신을 끌고 가려 했다. 요망한 것을 고쳐준 뒤 비명을 질렀다. 깡패들 머리가 파열됐던 장면은 마취제가 일으킨 환각인지, 실제인지 경계가 모호했다. 그 순간 차이석이 뇌리를 때렸다. 발뒤꿈치에서 정수리까지 세포가 곧추섰다. 벌떡 일어나다 쓰러졌다. 그제야 손목과 발목이 결박된 걸 알았다. 발목은 청테이프가 단단히 감겼고 뒤로 묶인 손목도 그러할 거다. 여기가 어딘지,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파악하는 건 둘째치고 여기서 빠져나가는 게 먼저였다. 엉덩이 걸음으로 문을 향해 가다가 중심이 기울어 가로 널브러졌다. 문득 방 모서리에 있는 야상 점퍼와 헬멧이 시야에 걸렸다. 그 순간 방문 열리는 소리에 몸을 경직시켰다. 문틈으로 곧게 뻗은 다리가 들어섰다. 밥상 아랫면에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상을 바닥에 내리고 자신을 일으켰다. 젖은 빨래 마냥 딸려 갔다.

“머리 부딪혔어요? 아직 움직이면 안 되는데…….”

목소리 주인을 확인한 건 한 박자 뒤였다. 새까만 눈이 맞닿아온 순간, 잠결에 따귀를 맞은 듯 얼어붙었다. 세준은 자신을 안아 이불 위에 내렸다. 야바는 마비된 채 반푼이만 쳐다보았다. 아파트를 급습한 기하와 반푼이의 상관관계를 아무리 연결하려 해도 불가능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반푼이 혼자 알아낼 리 없다. 이런 일을 앞장서 꾸밀 주제도 안 된다. 그를 손끝으로 부릴 인간은 세상에 하나뿐이다.

“코카인… 그 새끼가 시켰어?”

“아, 아니요…….”

반푼이는 눈을 피했다. 거짓말 못 하는 성격은 여전했다. 그래, 그렇겠지. 펄펄 끓는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너에 대한 기대는 오래전에 무너져서 이제 놀랍지도 않아. 다 필요 없으니까 이거나 풀어.”

“…….”

“이거 풀라고 했어.”

미성의 보이톤은 협박용으로 적합하지 않았다. 세준은 자신의 발목에 감긴 테이프를 만지작거렸다.

“풀어주면…세진이가 도망칠 것 같아요……. 그러면 나는… 화가 나서 못 참을 것 같아요…….”

“…….”

“여기도 곧 깨끗한 건물이 들어올 거래요. 두 집 빼고 모두 쫓겨나서… 세진이가 아무리 소리쳐도 안 와요…. 한 집은 귀 먼 할머니만 살아요. 남은 한 집은 매일 술에 취해 우는 아저씨가 살아요…….”

세준은 밥상을 끌어왔다.

“배고프죠? 어제부터 계속 잠만 자서…아무것도 못 먹었잖아요…….”

“이거 풀어!”

밥상을 걷어찼다. 반찬과 국이 뒤집혀 반푼이 무릎을 더럽혔다. 기하의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임수는 전직 칼잡이다. 청부살인으로 그 바닥에서 이름 꽤나 날렸으며 기하의 기대를 저버린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폰 내나 봐. 연락할 곳이 있어. 어서!”

세준의 어깨가 딱딱해졌다.

차이석이 괜찮은지 알아야만 미치지 않을 것 같다. 부디 그것만이라도……!

“그럼 이석이…어떻게 됐는지 물어봐. 걔 본가 전화번호 알지? 차이석 몰라? 너 일했던 집 아들이야. 지금 어떻게 됐는지만 알아보라고!”

“어째서…….”

그는 앓는 소리를 냈다.

“어째서 그런 사람을 걱정해요? 채우가 그랬어요. 그 남자가 모두를 속이고, 세진이를 잡아가서 감금했다고…. 그런데 왜 걱정해요? 그 사람은 세진이한테 나쁜짓 했잖아요.”

“니가 신봉하는 코카인이 진짜 악질이야! 헛소리 말고 괜찮은지나 알아보란 말야!”

“세진이가 죽은 줄만 알았어요…. 그런데 왜… 살아 있으면서도 나한테 연락 안 했어요? 나는 계속 죽고 싶었어요…….”

“죽어! 차라리 죽어버려! 아니면 니들 둘 다 내 손으로 죽여버릴 거야!”

무작정 문으로 기어갔다. 세준은 100Kg나 되는 자신을 번쩍 들어 이불 위에 내렸다. 이번엔 사뭇 거칠었다. 그의 눈동자에 화염이 이글거렸다.

“그 사람한테 가고 싶어요?”

그는 신음처럼 물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좋아요?”

세준은 스스로 던진 말에 분노했다. 곧바로 야바를 짓눌렀다. 괴력에 옷이 늘어져 맨 상체가 드러났다. 세준은 눈앞에 드러난 가슴과 쇄골을 더듬었다. 붉어진 귓불, 가쁜 숨결은 그 옛날 자신의 입을 겁탈하기 직전의 위태로움이었다. 세준은 서슴없이 지퍼를 내렸다. 튀어나온 성기는 아이 같은 행동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의 얼굴이 추락했다. 살집 두둑한 혀가 점막을 휘저었다. 턱을 씹히고, 목덜미를 씹혔다. 젖꼭지에 타액과 신음이 난무했다. 이 말 안 되는 욕정은 형제에게 남발해선 안 되는 거다. 아니, 이미 그와는 뭣도 아니었다. 토악질이 났다. 묶인 다리로 세준의 허벅지를 걷어찼다. 그는 끄떡없다. 낡은 옷장 옆에 가지치기용 가위가 서 있다. 피묻은 가윗날은 그의 집에서 봤던 야구방망이와 닮았다. 세준은 자신의 엉덩이를 꽉꽉 주무르다가 양쪽으로 잡아 벌렸다.

“하아…하악……. 못…참겠어요. 세진이한테 용서받을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어요. 그런데……!!”

“으읍……! 하지 마! 미친 새끼야!!”

세준은 자신의 가랑이에 성기를 문지르며 아래쪽으로 귀두를 밀기 시작했다. 피가 빠져나갔다. 발버둥치자 뒤로 묶인 자신의 손이 바닥에 쓸렸다. 세준은 야바의 성기를 쥐고 흔들었다. 그 아래 쪼그라든 음낭을 움켜잡을 때였다. 뜨거운 손길이 파들 떨렸다.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그쳤다. 세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음낭에 닿은 손을 빼냈다. 아무리 모자라도 있어야 할 게 없다는 것쯤 구분할 터였다. 성인의 몸에 덜 자란 정신을 지닌 반푼이 형과 성인의 정신에 덜 자란 육신을 지닌 동생. 반쪽씩 상실한 형제간의 상봉이었다. 충격에 휩싸인 반푼이에게 야바는 속삭였다.

“기억나? 10년 전 크리스마스 날 납치돼서 이렇게 됐어. 니가 코카인한테 환장해서 나 버리고 갔던 날 말야.”

반푼이는 입을 열었다가 닫으며 기괴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아무런 변명 없이 말했다.

“미, 미안…해요…….”

자신이 겪었던 세월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참회였다. 이름값도 못했던 가족들은 자신을 방치했다. 사무치도록 외롭게 했고, 두려움에 떨게 했다. 그 옛날, 세준에게 들려주려 했던 생애 첫 노래를 그가 끝까지 들었더라면, 증오를 품지 않았다. 미래를 거세당하지 않았다. 야바는 살기 돋친 눈으로 놈을 노려보았다.

“고작 혓바닥 놀리는 걸로 떼울 생각 마. 니가 그날 버렸던 건 어떤 경우에도 버리면 안 되는 거였어. 너는 절대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아무 죄책감 없이 버렸어! 나를 이렇게 만든 건 너야! 니들이 날 망가지게 했어!”

놈의 등짝을 후려 패고 싶어도 사지가 묶여 그마저 좌절됐다. 머리통으로 그의 가슴을 짓찧고 옷과 그 아래 살점을 물어뜯었다.

“왜 나를 버렸어?! 왜?! 왜───!!”

어릴 적 형욱이가 도마뱀을 잡아온 적이 있다. 하늘빛의 작은 도마뱀이었다. 형욱이는 도마뱀의 배를 갈라보자고 제의했다. 반푼이만 있는 그 집이 싫었다. 대소변 지린 냄새가 넌덜머리 났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형욱이와의 시간을 붙잡고 싶었다. 형욱이와 함께, 산 도마뱀의 배를 갈랐다. 꼬리를 자르고, 생식기를 뗐다. 도마뱀은 새끼의 먹이를 구하러 나왔던 아비였을까? 처음으로 독립해 여정에 올랐던 길이었을까? 도마뱀을 죽인 건 자신 안의 악마가 아니라 가족들의 무신경함이었다. 코카인에게 독극물을 먹인 건 이 추악한 질투심이 아니라 그들이었다!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제발 좀 내버려 둬……!!”

이제 그만 편안해지고 싶다. 미친 사이코, 약물 중독자가 아니라, 그냥 사람이 되고 싶다. 단지 그뿐이다. 숨을 할딱이며 늘어졌다. 세준은 커다란 몸을 말고 자신의 무릎에 머리를 묻었다.

“미안해요…미안해요……. 용서해 줄 때까지……내가 다 해줄게요. 뭐든지 해줄게요…….”

눈을 감았다. 축축한 무언가가 뇌를 적시고 얼굴을 적셨다.

“이거… 풀어.”

“미안해요…….”

“풀어.”

“……어떤 취급 해도 되니까…옆에만 있고 싶어요…….”

누더기가 된 언어가 야바의 무릎에 뒹굴었다. 모든 걸 다해주겠다고 애원하면서 그는 가장 원하는 걸 들어주지 않았다. 핏줄마저 외면하는 거룩한 충성심이었다.

야바는 탈진해서 이불에 늘어졌다. 세준은 말려 올라간 야바의 스웨터와 바지를 정돈했다. 흉측하게 발기된 제 성기도 집어넣었다. 그는 뒤집힌 음식을 치우고 나갔다. 한참 뒤에 다시 밥상을 차려왔다. 밥그릇에 벌레알이 수북했다. 갓 낳은 건지 김까지 피어올랐다. 장국에서 회충 같은 벌레가 뒤엉켜 떠다녔다. 뿐만 아니라 벌레 무침, 벌레 볶음…… 밥상은 벌레 뷔페를 방불케 했다.

“…조금만이라도 먹어요. 어제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요…….”

먹고 싶다. 먹고 기운 차려야 탈출할 힘도 생긴다. 차량 전복 사고 때도 살아났고, 뇌수술까지 이겨낸 자신이다. 이 후진 방구석에서 아사하는 건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 그러나 벌레를 먹을 만치 정신을 놓진 않았다. 기하는 저녁 만찬으로 차이석의 내장을 먹었을까? 야바는 허리를 구부리며 토악질했다. 반푼이는 허둥지둥 자신을 부엌으로 들고 나왔다. 토사물에 더러워진 옷을 벗기려 했다.

“치워.”

“더럽잖아요…….”

“진짜 더러운 건 너희야.”

구토물 같은 코카인의 욕망이다. 그 구토물을 핥아 먹는 반푼이다. 옷자락에 닿은 그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세준은 야바의 목에 수건을 두르고 세수시켰다. 비누 거품 너머로 굳은살 박인 손바닥이 느껴졌다. 그는 자신을 안에 들인 뒤 풀죽은 낯으로 나갔다. 세간살이는 이불 한 채와 작은 옷장이 전부인데도 몹시 좁았다. 그러고 보니 벽에 가득한 낙서와 집 구조가 낯익었다. 여긴 10년 전에 살았던 집이다. 곰팡이 핀 벽지에 색연필로 그린 동산이 보였다. 꽃도 있고 나무도 있는, 아이가 상상할 법한 뻔한 그림이었다. 자신이 어릴 적에 그렸던 거다. 벽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엄마에게 죽도록 맞았다. 그때 세준이 말리다가 엄마가 휘두른 술병에 머리가 찢어졌다. 엄마는 자신의 다리에 담뱃불을 지지는 것으로 분을 삭였다. 방문의 불투명한 유리 너머로 인영이 비쳤다.

“그 사람……집 앞에서 칼에 찔렸는데 채우가 고쳐줬대요. 채우가 계속 곁에 있을 테니 괜찮을 거에요…….”

거품이 잘 씻기지 않았는지 눈이 따끔거렸다. 요망한 것은 드레스룸에 잘 숨었을까? 기껏 살려놨는데 어처구니없게 질식사하거나 뱀 구이가 되진 않았겠지? 멋대로 그랬다간 가방으로 만들고 말 거다. 어깨로 흘러내린 스웨터에서 시큼한 토사물 냄새가 났다. 코카인은 지금 아름다운 목소리로, 깨끗한 얼굴로, 차이석을 홀리는 중이겠지? 곧 저주도 풀어주겠지? 그는 중독에서 빠져나와 예전 모습을 찾아야 하고, 태령도 가져야 한다. 손 많이 가는 돼지를 구하러 오기에 그는 너무 바쁘다. 만에 하나 자신이 기적적으로 탈출한다면 앞으로 운동도 빠트리지 않고, 말 잘 듣는 고양이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자신이 감금된 이 현실보다 그가 자신의 존재를 망각했을까 봐 더 무서웠다. 항우울제가 필요하다. 먹으면 기분이 들떠서 차이석 외에는 아무 생각도 안 나는, 그를 닮은 와인빛 알약…….

창문에 덧댄 판자는 바깥세상의 사정을 차단했다. 눅눅한 공기가 목덜미에 달라붙었다. 비가 오나 보다. 차이석은 많이 다쳤을까? 얼마나?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코카인한테 의지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현기증이 기습해 머리를 벽에 기댔다. 빗소리에 귀 기울이다 가만히 입술을 열었다. 물방울 입자 하나하나에 목소리를 실어 보냈다. 부디 이 노래를 그에게 전해주기를…….

La scia ch'io pian ga…….

나를 울게 하소서…….

la du ra sorte e che so spiri la liberta

비참한 나의 운명. 나 자유 위해…….

e che sospiri e che sospiri la liberta

나에게 자유를 주소서……

알레미나는 왕에게 붙들려 성에 갇힌다. 리날도는 연인 알레미나를 구하러 기약없는 여정을 하던 중에 마법사 아르미다를 만난다. 그는 아르미다의 아름다움에 취해 여정의 목적도 망각한다. 어쩌면 리날도는 알레미나를 사랑했던 게 아니라, 연인을 위해 위험도 불사했던 스스로의 용맹함을 사랑했을 터였다. 어차피 알레미나의 처녀를 정복하고 나면 식고 말라비틀어질 마음이었다. 리날도가 마법사와 백년해로했는지, 알레미나는 기다림에 지쳐 성에서 몸을 던졌는지, 그 이야기의 끝은 기억나지 않았다.

Lascia ch`io pianga la durasorte…….

나를 울게 하소서. 비참한 나의…….

노래가 사그라졌다. 목구멍을 죄는 열 덩이는 여간해서 가라앉지 않았다. 눈을 감고서, 침을 삼켰다. 무릎에 떨어진 노랫말이 처량 맞았다. 노랫말 하나 허투루 새지 않도록 단단히 모았다. 목소리는 곰팡이 벤 벽을 통과해 빗물에 흡수됐다. 여명이 내리기 직전의 공허함처럼 대기를 감쌌다. 격정적이지 않지만 거세된 유년을 돌아볼 만큼 여백이 충분한 멜로디였다. 의식용 주문처럼 입속에서 선율을 굴렸다. 문득 옷감 부대끼는 기척이 났다. 소리를 따라 고개 돌렸을 때 방문은 열려 있었다. 그 너머에서 세준은 주술에 걸린 듯 굳어 있었다. 하지만 까만 눈동자만은 맹렬하게 요동쳤다.

Il duol infranga queste ritorte di` miei martiri

이 슬픔으로 고통의 사슬을 끊게 하소서…….

야바는 그 모습을 무감각하게 보며 허밍처럼 읊조렸다. 소리의 잔향이 사라질 때까지 그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코카인은 찬물을 끼얹고 볼을 두드렸다. 물기 서린 거울을 닦자 갸름한 얼굴형과 분홍빛 입술을 가진 자신이 보였다. 밤새워 노래한 탓에 목이 따끔거렸고 기진맥진했지만 덕분에 차이석은 많이 호전됐다. 휴대폰 전원을 켜자 임수에게 걸려온 부재중 전화가 빼곡했다. 코카인은 코끝으로 웃으며 폰을 꺼버렸다. 칩이 있었을 땐 꿈도 못 꿀 일탈이었다. 계속 본가에 머무르며 차이석을 힐링 할 작정이었다. 2층에 딸린 욕실에서 나왔다. 손님방에서 잠깐 눈 붙이기 전에 차이석을 들여다보려 했다. 한발 앞서 방문이 열렸다. 차이석이 외투를 들고 나오는 길이었다. 그는 알맹이만 빠져나간 뱀 껍질 같았다. 초조함이 벤 눈동자는 누가 봐도 금단 증세 막바지에 이른 사람이었다. 그는 한쪽 팔을 외투에 걸친 채 우뚝 섰다. 상처가 완치 안 돼서인지 거동이 불편해 보였다. 코카인은 말했다.

“언제 일어나셨어요? 이제 좀 괜찮으세요?”

차이석은 양팔을 벌렸다. 한쪽 팔에 걸린 외투가 하늘거렸다.

“아니. 아파서 환장할 지경이야.”

“외출하시는 건 아직 무립니다. 어제도 갑자기 달려나가셔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걱정했어?”

그의 입가에 나른한 웃음이 녹았다. 코카인은 저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훔쳤다.

“당연하죠.”

토라진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이석은 코카인의 볼을 가볍게 건드리고 멈췄던 걸음을 뗐다. 코카인은 그의 옷자락을 잡아챘다.

“아파트에서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을 거에요. 전무님을 습격한 게 누군지 뻔히 아시면서 이렇게 대책 없이 다니시면 어쩌자는 겁니까.”

“너도 알고 있었나? 고양이가 살았다는 걸 말이야.”

“사장한테 얘기 들었습니다. 전무님도 그만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사장이 쉽게 포기할 생각이었다면 시작도 안 했을 사람이니까요.”

차이석은 느긋하게, 그리고 민첩하게 거리를 좁혀왔다. 코카인은 무심결에 뒷걸음질쳤다. 벽과 그의 사이에 끼었다.

“내가 고양이를 길들이느라 얼마나 애먹었는지 아나? 기껏 공들였는데 남의 손 타는 건 질색이거든.”

고양이? 그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애칭이 거슬렸다. 저절로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야바는 이미 그전부터 남의 손을 탔습니다.”

야바가 체벌 창고에서 깡패들한테 무슨 짓을 당했는지 가수들 사이에선 공공연한 비밀이다. 어릴 적 분별력 없던 친형에게도 입에 담지 못할 짓을 당했다는 것도, 동네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통해 익히 들었다.

“그래?”

차이석은 충혈된 눈을 희번뜩거렸다. 섬뜩한 눈빛은 오늘 새벽에 있었던 일을 떠오르게 했다. 그는 새벽에 갑자기 발작하며 뭔가를 찾는 듯 집안을 휘저었다. 눈빛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나마 붙었던 상처가 다시 벌어졌다. 집사와 고용인들이 가까스로 진압해 힐링을 마쳤다. 그가 겪는 기현상이 야바 때문이란 걸 알고나 있을까? 이 고비만 넘기면 그를 사로잡은 환각에서 빠져나오리라 믿었다. 코카인은 눈을 내리며 말했다.

“전무님은 지금 환각에 빠져서 판단력이 흐려진 겁니다. 얼마나 걸릴지 장담 못 하지만 제가 힐링 해 드릴게요.”

차이석은 상체를 숙이며 시선을 밀어 넣었다.

“그런가. 네 노래가 나를 구원할 수 있나?”

“저를 믿고 전무님을 제게 맡겨주신다면요. 이리로…….”

차이석은 코카인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그의 다리가 허벅지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겹쳐지고, 초점 풀린 눈동자가 침투해왔다.

“이대로 어때?”

“이런 상태로는… 발성하기 힘듭니다.”

“노래는 힘들지만 달콤한 소리를 내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지.”

저급한 농담에 귓불로 열이 몰렸다. 자신과 눈 마주치는 것도 황송해했던 다른 손님과는 달리 그는 예전부터 음담패설로 수치심을 자극하곤 했다. 손만 안댔다 뿐, 섹스에 가까운 언어추행이었다. 처음 그가 자신의 노래에 매료돼 파라디소를 드나들던 때로 돌아간 것 같아 반가운 반면, 이 상황에도 장난으로 넘기려는 작태가 신경을 건드렸다.

“제가 이렇게 무단이탈한 것도, 전무님을 힐링 하려는 것도 목숨 걸고 하는 겁니다. 제가…왜 이러는지 정말 모르시겠어요?”

눈꼬리가 뜨거워졌다. 코카인은 그가 볼 새라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매사 진지하지 않은 남자를 흘겨보았다. 차이석은 야릇한 눈빛으로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위험한 일을 감행했을 줄은 몰랐군. 생명을 구해준 사람한테 내가 심했어.”

차이석은 자신의 턱을 부드럽게 쓸다가 고개를 기울여 다가왔다. 입김이 부대낄 만큼 가까웠다. 코카인은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곧 다가올 감촉을 예감하며 어깨를 수축했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동요했다. 그리고 자신의 셔츠 속으로 파고든 손길에 눈을 떴다. 손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수표 다발이 꽂혀 있었다. 그는 턱을 치켜올려 시선으로 자신을 짓뭉갰다.

“수고했어.”

툭, 툭, 차이석은 손등으로 코카인의 볼을 건드렸다. 그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았기에 그만큼 잔인했다. 그는 이내 계단으로 내려갔다. 코카인은 셔츠에 꽂힌 수표를 망연하게 응시했다.

이석은 정원을 가로질러 가며 산허리에 걸린 해를 주시했다. 어제오늘 정신을 잃어 시간을 허비했다. 심부름꾼을 통해 강기하의 동태를 확인하려 했으나 계속 연락 두절이다. 어쩌면 이미 강기하에게 덜미를 잡혔을지 모른다. 옆구리에 엄습하는 통증을 무시하고 걸음 속력을 올렸다. 현관문을 열려는데 집사가 다급하게 불렀다. 집사는 초대형 쓰레기 종량제 봉투를 힘겹게 끌고 왔다.

“이거 어제 전무님 댁에 있던 구렁이입니다. 사모님이 버리라고 하셨는데 뱀을 함부로 다루면 재앙을 받는다고 들어서요. 또, 박 여사가 이걸 음식 쓰레기통에 넣어야 할지, 옷 수거함에 넣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면서…….”

종량제 봉투에는 노란색 파충류가 담겨 있다. 성체에 가까워지는 중이라 녀석을 담기엔 대형 봉투로도 모자랐다. 평소 공격적인 녀석이 어쩐 일로 목을 늘어트리고 있었다. 꼭 죽다 살아난 것처럼 말이다. 목 언저리엔 까닭 모를 상처가 보였다. 집사가 말했다.

“참, 오늘 새벽에 정원사한테서 연락이 왔습니다. 말도 없이 그만둔 게 미안했나 보더군요.”

“그런데요?”

집사는 당황한 낯이다.

“아, 전에 전무님이 정원사를 찾으시길래…….”

“내가 그랬나요?”

어디에 처박혔든 딱히 궁금한 건 아니다. 이석은 순이를 차 뒷좌석에 싣고 운전석에 올랐다. 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했다.

“준비해요.”

코카인은 2층 창가에 서서 은색 차가 떠나는 걸 주시했다. 그가 살아난다면 성대가 망가져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를 가지려고 인간 이하의 짓도 행했다. 그 모든 게 짓밟혔다. 고작 이런 일로 포기했을 바엔 시작도 하지 않았다. 코카인은 수표를 양손에 쥐고 찢어발겼다. 피를 쏟아내듯 어금니를 물었다.

“그래, 계속해 봐. 차곡차곡 기억해 둘 테니.”

손님 방으로 들어갔다. 폰을 켜고 세준에게 전화를 걸려 할 때였다. 한발 앞서 폰이 울렸다. 액정에는 임 실장 번호가 떠올랐다. 어제오늘 잠적해서 그쪽도 어지간히 애가 닳은 모양이다. 여기서 더 버텼다가 일이 더 커지면 곤란하다. 거처를 모르니 당장 무슨 짓은 못 하겠지. 폰은 귀에 대자 무뚝뚝한 음성이 넘어왔다.

[사장님이 위급하시다. 골목 앞에 있으니까 내려와. 아무리 넓은 저택이라도 나오는데 3분이면 충분하겠지?]

“……!”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예상이 맞았다. 손마디가 질리도록 폰을 그러쥐었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아냈죠?”

[네 앞에서 부순 건 가짜 반지야. 피묻은 칩도, 엑스레이 사진도 조작했고, 의사를 매수해 머리 가죽만 찢고 봉합했지. 위치 추적을 해도 정확한 주소 지를 알아내는 데까지 시간이 좀 걸렸어.]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코카인은 입술을 부들부들 떨었다.

“당신들…쓰레기인 건 알았지만 언제나 실망 시키지 않는군요.”

[그 점은 정식으로 사과하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 조용히 네 발로 나오든가 강제로 끌려나오든가.]

전혀 와 닿지 않은 사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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