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track 36
오전에 있었던 긴급 주총으로 회사는 술렁거렸다. 차명환은 발광하다 지쳐 자택으로 돌아갔다. 덕분에 숨돌릴 틈 없이 업무에 시달렸다. 컴퓨터 화면에는 찬란하게 추락 중인 태령 주가 등락 그래프가 있다. 강기하는 다시 오를 거란 단꿈에 젖어 있겠지. 서류를 한쪽에 치우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회사에서 뛰쳐나가고 싶어 좀이 쑤셨지만 날이 날인지라 분위기를 맞춰줄 생각이다. 고양이가 지급한 마지막 사탕을 입에 넣었다. 타원형 결정체를 녀석의 귀두인 양 세게 빨았다. 단물을 보답으로 흘려보냈다. 폰을 들어 집에 전화했다. 고양이는 받지 않았다. 고집스러운 신호음이 초조했다. 경호원에게 전화했다.
“집에서 전화를 안 받는군요. 뭐 하는지 보고 와요.”
[오늘은 계속 안에만 계셨습니다. 종일 오페라 CD를 틀어놓고 노래만 듣는 것 같았습니다.]
뒷목이 뻣뻣해졌다. 집에는 클래식 CD가 한 장도 없다. 녀석이 부른 것이다.
“5초 뒤에 전화할 테니 받으라고 해요.”
코트를 집어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바닥에 내뻗는 보폭은 급해졌다. 폰을 귀에 대고 로비를 가로지를 때였다. 악에 받친 소리가 고막을 찢었다.
“너는 사람도 아니야! 내 딸들 죽어갈 땐 눈길 한번 안 주더니 네 새끼 살아나니 좋아 죽겠지?! 내 손으로 죽여버릴 거야!”
로비 한가운데서 모친이 차 회장에게 악을 쓰고 있었다. 원피스 속옷에 모피 코트만 걸친 채 마스카라로 얼룩진 얼굴은 뒷골목 술집 작부 같다. 차 회장은 혐오감 가득한 눈으로 아내를 응시했다. 지나가는 사원들은 애써 눈길을 피했다. 이석은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경비원의 만류에도 차 회장에게 손톱을 세웠다.
“차라리 깨끗하게 죽지 그랬어?! 그랬다면 적어도 네 새끼한테 미안해했을 거야!! 내 손으로 전부 죽여버릴 거야! 너, 너희들……!”
저주를 쏟아내던 모친은 그 자리에서 실신했다.
모친이 잠든 걸 확인하고 밖으로 나왔다. 방에 꽉 찬 술 냄새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녀는 혼절한 상태에서도 울먹였다. 모친은 차명환이 완치된 이후 술독에 빠져 살았다. 아무리 코카인이라도 곪아 터진 속을 완치시키진 못했다. 그 병은 차 회장이 딸들의 무덤 앞에 무릎 꿇고 참회해야만 낫는다. 정원까지 따라나온 집사가 말했다.
“너무 흥분하셔서 뛰쳐나가시는데 저희도 손쓸 방법이 없었습니다. 한동안 코카인이 발길을 끊어서 상태가 악화 됐나 봅니다.”
“발을 끊다니요?”
“차 사고를 당해서 병원에 입원했었다더군요. 아까 연락해 보니 퇴원했다고 해서 불렀습니다. 곧 도착할 겁니다. 그나저나 전무님도 건강 챙기십시오. 지금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집사는 걱정 가득한 표정이었다. 이석은 걸음을 옮기다 멈춰 섰다. 어두운 정원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나무를 손질 중이다.
“전에 있던 정원사는 그만뒀습니까?”
“연락도 없이 그만뒀습니다. 워낙 솜씨 좋고 사모님도 마음에 들어 하셔서 계속 일을 맡길 생각이었는데…. 제가 몸이 늙으니 사람 보는 안목도 좁아졌나 봅니다.”
고양이의 죽음에 상심한 건가…. 지금은 형과 애인 사이에서 어떤 포지션으로 결정했는지 궁금했다. 이석은 정원에서 시선을 거두고 디딤돌을 밟아갔다. 집사는 정문까지 배웅한 뒤 들어갔다.
대문을 나서는데 두개골이 뻐개지는 통증이 기습했다. 대문에 어깨를 기댔다. 담배 연기 같은 입김이 바람에 휩쓸렸다. 금단현상은 예상보다 심각했다.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마약 원액 덩어리가 있는데 못 본척하는 건 지옥이다. 고양이 목구멍을 들쑤셔라도 소리를 끌어내고 싶다. 마약을 했을 때도 이렇게까지 무절제하진 않았다. 통렬한 귀울음은 쉴새 없이 고막을 찔렀다. 뱃속에서 끓는 열기가 그악해졌다. 대문에 기댄 채 차가 있는 거리를 가늠했다. 차 키를 꺼내 버튼을 눌렀다. 삑삑, 차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헤드라이트가 켜졌을 때였다. 전혀 느끼지 못했다. 바로 옆에 누군가 있었다는 것을.
정체를 확인하기도 전, 옆구리에 금속이 박혀 들었다. 칼날의 각도가 비틀리며 내장을 뿌리치고 나갔다. 시선을 돌린 건 그다음이었다. 모자에 마스크를 쓴 괴한은 무뚝뚝한 눈으로 자신을 주시했다. 익숙한 눈매, 강기하의 개다. 다시 흉기가 살가죽을 뚫고 안을 헤집었다. 괴한은 깊이 박았던 칼날을 뽑아냈다. 금속 표면에 내장과 살점이 딸려가는 듯하다. 피가 맹렬히 쏟아졌다. 그때 차 불빛이 담벼락을 기어 올라왔다. 괴한은 빛이 오는 방향을 힐끔 보더니 칼을 주머니에 넣고 유유히 골목 모퉁이를 돌아갔다. 시야가 뒤틀리고 무릎이 무너졌다. 내장에 뜨거운 쇳물을 들이붓는 것 같다. 덕분에 두통은 없어졌다. 불빛이 무서운 속도로 사라져 온통 암흑천지다. 어디선가 차 문 열리는 소리와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전무님! 전무님! 애타는 부름은 익숙한 목소리다. 곧바로 보이소프라노의 청아한 선율이 들렸다.
차이석에게 전화가 왔다. 그의 모친이 회사에서 난동을 부려 집에 데려다 준다고 했다. 혹시 차명환이 살았기 때문일까. 몸에 힘이 빠졌다. 멀거니 앉아 있다가 밥솥의 절규에 정신이 들었다. 밥 냄새가 집안에 퍼졌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는 것도 이제 끝이다. 다시 발성 연습을 했다. 뭐든 자주 봐야 정 든다고, 오늘 하루 종일 들어 보니 이 목소리도 썩 듣기 싫진 않았다. 발성 연습이 끝났을 무렵 온몸이 땀으로 축축했다.
샤워한 뒤 그가 잘라 놓고 간 망고를 접시에 담았다. 망고를 우물거리며 거실로 돌아갈 때였다. 제일 안쪽 방에서 문을 건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차이석은 외출하기 전에 요망한 것을 방에 가뒀다. 털을 바짝 세우고 문을 흘겨보았다. 야채 박스에 있어야 할 것이 개인 방이라니, 세상이 어찌 되려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자유를 묶인 신세가 얼마나 비참한지 알기에 개인 방을 가진 요망한 것이 부럽진 않다. 모르는 척하려 했는데 손은 멋대로 문을 땄다. 요망한 것은 기다렸다는 듯 틈을 비집고 탈출했다. 야바는 반사적으로 발을 뒤로 잡아뺐다. 역시나 뱀 대가리가 바닥에서 헛돌았다. 망고 접시를 가져와 거실 한가운데 자리 잡았다. 요망한 것은 스물스물 기어오더니 자신의 허벅지에 뻔뻔하게 대가리를 얹었다. 이래서 미개한 것들은 오냐오냐하면 안 된다. 야바는 포크 뒤 꽁지로 요망한 대가리를 꾹꾹 찔렀다.
“자꾸 달라붙으면 도로 가둬놓을 줄 알아.”
요망한 것은 혀를 날름대며 올려다보았다. 음식한테 말 거는 저도 한심했지만 요망한 것은 가끔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아 꺼림칙했다. 그때 현관문 너머에서 구두 소리가 들렸다. 차이석인가 보다. 늦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 밖이었다. 고개를 빼서 현관문을 쳐다보았다. 불현듯 복도에서 희미한 신음과 묵직한 타격음이 울렸다. 그 모든 소음이 사라진 찰나였다.
콰앙────!!
집이 울리도록 현관문이 뒤흔들렸다. 몇 번의 굉음이 연달아 터졌고 현관문이 거칠게 열렸다. 네다섯 명쯤 되는 사내들이 전염병처럼 집안으로 침범했다. 두 명은 석유통을 들었고 나머지는 자신을 포위했다. 그때 복도 센서 불이 켜졌다. 차가운 구두 소리가 거리를 좁혀왔다. 불빛을 어깨에 인 남자가 입구로 들어섰다.
기하는 말끔한 슈트 차림이었다. 구두는 광택이 흘렀다. 놈은 삐딱하게 선 채 집안을 눈으로 훑었다. 다시 당도한 눈동자는 분노로 이글거렸다.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크게 놀랍지도 않았다. 끝없이 맴도는 띠처럼 당연한 귀결점일지도 모른다. 기하가 치른 장례식은 차이석이 시체로 바꿔치기한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임수는 보이지 않았다. 기하가 직접 나서는 건 무척 중요한 일이란 뜻이다. 그런 일에 임수를 대동하지 않는 건 극히 드물었다. 왜 이렇게 중요한 일에 함께 안 왔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뼈를 에는 오한에 걷잡을 수 없이 몸이 떨렸다. 기하는 거실 한가운데에 완강히 서 있다.
“얼굴 좋은데?”
말투에 비해 놈의 눈빛은 서릿발이었다. 거실은 신발 자국으로 더러워졌다. 집에 석유를 뿌리는 깡패보다, 기하의 구둣발이 거슬렸다. 차이석은 깔끔한 걸 좋아한다. 공들인 것이 남의 손을 타는 것도 극도로 싫어한다. 빈집에 돌아왔을 때 그는 어떤 표정일까? 다른 걸 주워다 다시 키울까?
“신발 벗어.”
기하는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미간을 구겼다. 야바는 핏줄을 갈기갈기 끊어내듯 말했다.
“신발, 벗으라고 했어.”
놈은 코웃음으로 대답했다. 야바는 주방으로 달려갔다. 칼 꽂이에서 칼을 뽑아냈다. 놈은 직선으로 걸어와 자신의 뺨을 올려붙였다. 눈에 불이 일었다. 칼끝은 기하의 목덜미에 붙은 전갈 꼬리로 돌진했다. 새까만 협각류의 외피 속엔 뭐가 들었는지 꼭 보고 싶었다. 기하는 자신의 손을 뒤로 꺾었다. 칼이 나뒹굴었다. 그의 목에 힘줄이 돋아났다.
“너한테 용서를 빌려고 했어! 그런데 나를 속여?! 그동안 미친 새끼 밑에 깔려서 얼마나 헐떡거렸어?! 얼마나?!”
“나 하나 없어져도 상관없잖아! 살게 내버려 둬! 숨 좀 쉬게 놔둬!!”
기하는 보호자로서 많은 가르침을 줬다. 알량한 포상을 흔들고 서로를 물어뜯도록 해서 우정을 가르쳤다. 가축처럼 두드려패서 모멸과 고난에 버틸 끈기를 가르쳤다. 아무리 발악해도 진탕 같은 미래뿐임을 세뇌시켰다. 우리 밖이 이토록 달콤하니 아예 맛보지 못하게 한 거였다. 몸에 달라붙은 과거를 떼어내듯 놈의 살점을 뜯었다. 기하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포기할 생각이었으면 10년 전에 그 목을 땄어.”
구토물 같은 고백이었다. 독오른 눈을 쳐올리며 놈의 면상에 조소를 뱉었다.
“차라리 그때 죽이지 그랬어? 쓰레기 밑에서 살았을 바엔 그게 훨씬 나았어!”
놈은 냉소를 띄운 채 자신을 질질 끌고 갔다. 잡히는 대로 던지고 발길질했다. 그때 거대한 뱀이 기하의 허벅지를 물어뜯고 똬리 틀었다. 기하는 욕지거리하며 뱀의 목줄기에 칼을 박았다. 뱀의 이빨과 기하의 단도는 서로의 살가죽으로 파고들었다.
“사, 사장님! 뭣들 보고 있어?! 어서 풀어!”
깡패 두 명이 달려와 똬리를 풀어내려 했지만 뱀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하나가 더 가세하고서야 간신히 뜯어냈다. 뱀은 방향을 바꿔 깡패의 목을 휘감았다. 휩쓸려 넘어지는 깡패들, 뱀의 공격에 아비규환이었다. 사내 세 명이 합심해 굵직한 뱀 몸통을 바닥에 고정했다. 구렁이는 강인한 꼬리로 기하의 팔을 감았다. 기하는 뱀 대가리를 짓누르고 허리춤에서 다른 단도를 꺼내 치켜 올렸다.
“하지 마……!!”
온 힘을 다해 기하를 밀쳤다. 그러나 칼날이 더 빨랐다. 칼끝이 뱀의 굵직한 몸통을 가르고 뼈를 절단했다. 반 토막난 몸체가 기하의 팔에서 나가떨어졌다. 숨을 삼켰다. 야바는 분리된 뱀을 끌다시피 차이석 방으로 갔다. 문을 잠그고 그 앞에 주저앉았다. 두 동강난 몸통을 맞췄지만 붙을 리 없었다. 뱀의 몸부림은 잦아들었다. 죽어가고 있다. 죽어가고 있다. 식은땀이 등을 기어 다녔다. 동물에게도 통할까? 만약 조절 못 해서 돌이킬 수 없으면? 밖에서 문을 때려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 귀에는 환기 팬 도는 소리만이 포화상태였다. 분리된 몸통을 맞닿게 하고, 절단 부분에 입술을 가져갔다. 공기를 깊이 마신 뒤 곧바로 클라이막스 부분을 불렀다.
아아아아~~~~~~~
초절 기교의 아리아에 뱀은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 비린내가 튀어 올랐다. 노랫소리가 움츠러들었다. 어차피 이래도 저래도 죽는다. 성량을 더 증폭시키고 음의 파동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뱀은 격렬한 사투를 벌이며 자신의 팔을 휘감았다. 무시무시한 압력에 뼈가 으스러질 것만 같다. 으윽…! 신음 섞인 노랫말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 순간 눈을 의심했다. 뱀의 뼈와 가죽이 붙기 시작했다. 단도가 끊어냈던 과정이 역행하듯, 원래 모습으로 복구됐다. 그 기괴한 장면은 공포에 가까웠다. 이렇게 의식해서 힐링 하는 것도, 치유 과정을 본 것도 처음이다. 늘어진 뱀 머리에 힘이 들어가자 요망한 것은 자신을 응시했다. 붉은 눈알에는 수만 가지 언어가 담겨 있다. 아직 남은 상처에 노래를 펴 발랐다. 그때 방문이 부서졌다. 야바는 초인적인 힘으로 거대 뱀을 드레스룸 안에 밀었다. 문을 닫자마자 깡패들이 달려와 자신을 결박했다. 방문 너머에서 기하는 핏대 선 음성으로 말했다.
“여기서 노닥거릴 시간 없어. 네 저녁 만찬으로 미친 새끼 내장을 먹일 계획이니까.”
토사물을 게워낼 만큼 심장이 날뛰었다.
“무…슨 소리야?”
기하의 입술에 잔인한 조소가 걸렸다.
“임수가 오랜만에 솜씨를 발휘했거든.”
“……!”
낭떠러지에서 추락해 뼈가 박살 난 듯했다. 기하는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온갖 끔찍한 장면들이 머리를 휩쓸어갔다. 그럴 리 없다. 차이석이 쉽게 당할 리 없다. 그는 모든 일에 철두철미했고 기하 머리 위에 앉아 있다. 다만 요즘 들어 상태가 나빠졌을 뿐이다. 기하는 문 너머에서 고개를 까딱했다. 깡패들은 자신을 바닥에 눕히고 무릎으로 짓눌렀다. 다른 깡패가 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차가운 약 냄새가 콧속으로 들어오자 정신이 들었다.
“무슨 짓 했어?! 걔한테 무슨 짓 했어?!”
실성한 마냥 고개를 휘저었다. 사지를 뒤틀어도 증오는 묽어지지 않았다. 과거의 악몽 같은 약물이 혈관을 휘돌았다. 육신과 사고가 무섭게 마비되었다. 이석아. 이석아…. 혀를 깨물 듯 그 이름을 불렀다. 여긴 고립무원이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는 자궁 속이다. 저들은 자궁을 찢고 아직 여물지 않은 태아를 끄집어내려 했다. 태아는 말라 비틀어 죽어갔다. 그 피 냄새나는 탯줄을 목에 감고서…….
“저리 가────! 저리 가아아아─────────!!”
경기하며 비명을 질렀다. 금속성 절규가 촉수처럼 날아가 박혔다. 그때였다.
“크아악────!”
자신을 에워싼 깡패들이 머리통을 잡고 뒷걸음질쳤다. 눈이 까뒤집혀 사지를 떠는 순간이었다. 깡패들의 눈알이 터졌다. 정수리가 쩍 벌어졌다. 뿜어져 나오는 뇌수는 화려했다. 피묻은 절규가 그치지 않고 방출됐다. “크윽─!”기하는 귀를 틀어막고 상체를 굽혔다. 시뻘건 잔해가 악취를 풍겼다. 흰자위를 드러낸 깡패가 자신의 옆에 쓰러졌다. 잘게 경련하며 죽어갔다. 누군가의 꺽꺽대는 소리가 방바닥에 굴러다녔다. 그게 자신이 저지른 결과인지 또 다른 망상인지는 모르겠다. 마냥 무감각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죽음의 재처럼 고요했다.
“……나한테…손… 대지…마……. 죽…여 버릴……거야.”
문밖에 있던 기하는 귀를 막은 손을 내렸다. 그는 전멸한 부하들을 경악에 휩싸인 눈으로 응시했다. 놈의 무릎이 떨리는 게 보였다. 놈의 탄식이 목울대로 넘어갔다.
“너……설마…….”
그 순간 기하의 귓구멍에서 선혈이 주욱 흘러내렸다. 기하는 손을 들어 액체를 묻혔다. 그 정체를 확인한 눈이 커다래졌다. 그는 천천히 고개 들어 자신을 직시했다.
“코카인이 말했던 게…… 너였나…?”
뜻 모를 소리였다. 송장 더미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약기운이 의지를 무겁게 눌렀다. 사물들이 격렬하게 휘어졌다. 이젠 저주도 풀렸다. 자신은 더이상 놈의 노예가 아니다. 이 악연을 끊어내고 놈에게 복수할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야바는 마지막 힘을 모아 이빨 끝에 집중시켰다. 혀를 깨물려는 순간, 놈이 달려와 입속에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엇나간 이빨이 놈의 살점을 썰었다. 미적지근한 액체가 혀에 닿았다. 기하는 욕을 지껄이며 자신의 입속에 수건을 우겨넣었다. 몸이 공중에 부유했다. 씨발. 어떻게 이런 일이……. 기하는 뜻 모를 욕지거리만 반복했다. 현관문을 빠져나가자 센서불이 켜졌다. 복도에는 경호원들이 모두 포박당해 기절해 있다. 기하는 라이터를 켰다. 불씨를 집어문 금색 라이터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화마는 발화제를 핥으며 매섭게 번져갔다. 허기진 혓바닥으로 그의 공간을 차례로 삼켰다. 그와 자신의……. 천장에서 스프링쿨러가 물을 뿌렸지만 불길을 따라잡진 못 했다. 거실에 가득한 매연이 복도까지 범람했다. 천장과 벽이 휘청거렸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눈을 감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여기가 아닐 거다. 엘리베이터가 입을 벌려 연기를 먹어치웠다. 자욱한 엘리베이터 안에서 헬멧을 쓴 남자가 망령같이 서 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아비규환을 보고 충격받은 건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손엔 가지치기용 가위가 들려 있었다. 가위는 위로 올라와 무방비한 기하에게 달려들었다. 기하의 목덜미가 피를 뿜었다. 급류에 휩쓸려 나뒹굴었다. 주체 못 할 만큼 팔다리가 늘어졌다. 기하는 목을 쥔 채 균형을 잡았다. 팔꿈치로 헬멧의 아래턱을 찍어 올렸다. 틈을 주지 않고 복부와 옆구리를 강타했다. 허리춤에서 단도를 꺼내 헬멧의 어깨에 박았다. 헬멧은 아랑곳없이 거리를 좁혀갔다. 사정권에 들어오자 그때부터 주저 없이 가위질했다. 단도를 쥔 기하의 팔이 덜렁거렸다. 손가락도 몇 개 없어졌다. 핏물과 살점이 엉겨붙은 가윗날, 살을 써는 소리는 비명조차 잡아먹을 만큼 소름 끼쳤다. 쓰러진 기하가 시커먼 연기에 뒤덮였다. 헬멧 남자는 서둘러 자신을 안아 올렸다. 헬멧 너머에서 무공해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잔인무도한 행위에 비해 지나치게 투명했다. 단절된 그 세상에서 그것만이 선이었는지 모른다. 끔찍한 쇠 냄새에 의식이 나락으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