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track 35
차이석은 홈바 위에 반찬을 정렬했다. 아무것도 아닌 행동인데 정갈하고 군더더기 없어서 눈이 쉴 틈을 안 줬다. 음식은 물론, 청소까지 집안일은 모두 그가 해치웠다. 솜씨가 보통 아니어서 도우미가 몰래 다녀가는 줄 알았는데 놀라웠다. 차이석이 창백한 남자를 내던진 이후로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거울도 모조리 없앴으니 언제 또 나타날까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된다. 홈바에 앉자 그가 자신의 뒷머리카락을 뒤적였다. 수술 부위 실밥은 다 녹았고 상처도 아물었다. 빈 음낭을 채우러 갈 날이 머지않았다는 의미였다. 야바는 수저 끝을 자근자근 깨물었다. 그가 옆에 앉으며 불쑥 말했다.
“혹시 나한테 속이는 거 없나?”
돌발 질문에 밥을 토할 뻔했다.
“없어.”
혹시 그가 야만인으로 변한다는 걸 눈치챘나? 아니면 서류를 훔쳐본 걸 알아챘나? 그것도 아니면, 그의 눈을 피해 요망한 것을 구박했던 거나…. 그는 상체를 숙인 채 시험하듯 빤히 쳐다봤다. 너는 누구야? 왜 기하가 보낸 서류가 너한테 있는 거야?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재벌가 일원, 겉은 멀쩡하지만 뼛속까지 미치광이인, 그리고 또 뭐가 더 남았지?
“뭐? 왜 그렇게 보는데?”
그의 눈길이 유연하게 미끄러져 자신의 입술에 멈췄다.
“너 말야. 켕기는 게 있으면 그렇게 입술 씹거든. 어제 또 복도에 나갔다고?”
뒤통수를 잔뜩 긴장하고 있으면 그는 보란 듯이 앞통수를 후려쳤다.
“그게 왜?”
“이유는 네가 더 잘 알 텐데.”
되묻는 음성이 심상치 않다. 야바는 한숨을 푹 쉬었다.
“너는 경호원들을 100% 믿어? 자격증은? 정신감정서는 확인했어? 걔들이 그동안 상대한 의뢰인은 모두 저 잘난 맛에 사는 인간들일 텐데 그런 것들 상대하다 보면 아무리 성인군자라도 성격이 고약해질 거야. 상대했던 적이라고 해봤자 술 취한 인생 낙오자나 꺅꺅대는 여고생이 전부였을 건데, 온갖 수모를 참아가며 일해도 박봉에다, 누구 하나 알아주지도 않으니 직업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는 건 당연하겠지. 분명 겉만 멀끔했지 속은 썩었을 거고, 걸어 다니는 흉기나 다름없는 사람들이 총까지 가졌는데, 내 안전을 맡기라고?”
“어차피 가짜 총이야.”
“가짜 총이었어?”
야바는 눈살을 찡그렸다.
“그럼 더 심각하잖아.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제일 중요한 순간엔 의뢰인을 제대로 보호하는 꼴을 못 봤어. 게다가 대통령도 유명인사도 아닌 나 같은 사람한테 쟤들이 신경 써봐야 얼마나 신경 쓰겠어? 분명히 너 없는 사이에 교대로 PC방에나 들락거릴 거야. 언제 눈 뒤집혀 폭동을 일으킬지 모르고. 내가 수시로 복도에 나가는 건 쟤들이 나를 잘 지키는지 감시하는 거야.”
차이석의 입술에서 바람이 빠졌다. 야바는 그를 모로 노려보며 입에 든 걸 씹어 넘겼다. 아침 식사가 끝나고 그는 빈 그릇을 식기 세척기에 넣었다. 버튼을 누르던 그가 비틀거렸다. 그릇이 떨어져 조각났다. 야바는 한달음에 달려갔다. 괜찮냐고 묻지 않았다. 괜찮아 보이지 않아서였다. 자신의 노래를 멀리한 뒤 차이석은 하루에 두 시간도 안 잤다. 피로가 쌓이면 한 번에 몰아 잤는데 그때마다 야만인으로 돌변했다. 주로 무방비한 의식에서 깨어나는 모양이다. 잠자코 있던 시간만큼 야만인은 더 난폭해졌다. 그의 관자놀이에 선혈 같은 식은땀이 고였다.
“두통약 가져올까?”
두통약도 고통을 덜진 못했다. 빛없는 그의 동공이 이글거렸다.
“저리 가.”
차이석은 자신을 한쪽으로 밀며 유리 조각에서 떨어지게 했다. 밀어내는 손끝은 싸늘했다. 그가 자신을 힐러라고 폭탄 발언한 뒤 변할 게 없다고 단언했다. 그래서 괜찮을 거라고 여겼다. 그냥 모른 척하는 게 맞을까? 눈 딱 감고 노래 해줘서 찰나의 고통이라도 덜어주는 게 맞을까? 힐링 용은 물론, 감상용도, 말할 때도 목소리 성분이 누수 된다고 들었다. 그럼 중독 성분도 셀까? 전화기로는? 녹음한 건? 입안이 타들어갔다. 헐렁한 바지 주머니에서 약 케이스를 꺼냈다. 그가 구해온 신종 항우울제였다.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손.”
차이석은 한쪽 눈썹을 지그시 구겼다. 그러나 순순히 손을 펼쳤다. 그의 손바닥에 알약 두 개를 얹고 단단히 일렀다.
“오전에 두 알, 오후에 두 알, 과다복용은 금물이야.”
그는 뜬금없이 입술을 조금 벌렸다.
“먹여 줘. 네 혀로 살살 녹인 다음에.”
“…….”
저 뻔뻔한 낯짝은 지구 핵보다 두꺼울 거다. 딱 잘라 말했다.
“싫어.”
“어째서?”
“더러워.”
“먹는 건 난데 네가 더러울 건 없잖아.”
“그래도 싫…….”
한순간 그의 눈동자에 광기가 스쳤다. 그것이 목을 비틀고 살을 지졌다. 그는 요즘 중간지대가 없어졌다. 깨어 있을 땐 난폭한 행동만 없을 뿐, 잠잠하다가도 금세 공격적으로 돌변했다. 가장 심각한 건 그런 사실을 차이석이 인식 못 한다는 거였다. 야바는 눈썹을 찡그리며 항우울제 한 알을 입에 넣었다. 그가 주문한 레시피 대로 좌우로 굴리며 타액을 듬뿍 묻혔다. 침 범벅이 된 알약을 그의 혀에 올려주었다. 습기 진 살덩이가 손가락에 감겼다. 그는 굶주린 개처럼 손가락을 빨았다. 한참을 한눈팔던 혓바닥이 손가락에 물린 알약을 가져갔다. 손가락은 타액투성이였다. 자신의 시선 아래에서 밀도 높은 눈동자가 부딪혀 왔다. 조급함이 더 짙어진 눈빛이다. 그냥 사나운 들짐승 한 마리를 키운다고 생각하면 조금 위안이 됐다. 야바는 입속에 맴도는 말을 덧붙였다.
“수술한 거, 거의 다 회복했으니까 집안일은 내가 할게.”
이제부턴 내가 다 해줄게. 다 해줄게…….
남은 언어는 목안으로 삼켰다. 자신의 숨결이 그의 이마에 흩어졌다. 박혀 오는 시선에 본능과 이성이 격렬하게 싸우는 듯했다. 그는 어금니를 씹어 물었다.
“내 앞에서 혓바닥 놀리지 마. 미치겠으니까.”
차이석은 자신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채 아프도록 입술을 빨았다. 혀 아래를 세게 긁었다. 농염한 자극에도 신음을 참았다.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자 그는 목구멍을 들쑤셔 신음을 게워내게 했다. 으응…. 앓는 소리가 터졌다. 그는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게걸스럽게 들이마셨다. 희미한 피 냄새가 뒤따라왔다.
차이석이 출근하자마자 노트북을 켰다. 이 모든 게 불가항력이라면, 방법부터 찾아야 한다. 감상용보다 힐링용의 중독성이 훨씬 높다고 들었다. 그 둘을 구분할 테크닉부터 습득해야 한다. 그런데 자신의 노래를 가장 가까이서 접했던 코카인은 이상 증세가 없었다. 자신이 코카인의 노래를 강하게 거부했듯이, 그도 마찬가지여서 그런가. 코카인은 혹시 눈치챘을까? 자신의 정체를…….
인터넷에서 발성법과 음성학에 대한 자료를 찾아 읽었다. 목젖의 개폐 여부, 몸속으로 빨아들인 산소를 어떻게 이용하는지, 기초부터 시작했다. 코카인이 그렇게 떠들어댈 때 흘려들었던 게 한탄스러웠다. 전에 코카인이 촛불 앞에서 연습했던 적이 있는데 성량은 풍부하면서도 불꽃은 안 흔들렸다. 그건 최소한의 숨으로 최대한의 소리를 낸다는 의미며, 발성의 정석이라고 했다. 그럼 그게 힐링용일까? 이론적인 내용을 되새기며 거실 한가운데 섰다. 밖으로 소리를 내뿜으려다 그쳤다. 목소리를 쓸수록 수명이 단축된다면 최대한 안 써야 하는 게 아닐까? 무엇보다 자신은 수명 깎아 먹으면서까지 희생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코카인은 수없이 힘을 써댔으니 요절할 가능성도 그만큼 높다. 포주한테 이용당하다가 서른도 못 채우다니, 어울리지 않는 개죽음이다. 그의 죽음은 순교자처럼 고귀해야 한다. 그 심판대에 세울 사람은 자신이다. 물론 자신을 심판대에 세울 사람도 코카인이다. 그런데 완벽한 힐러가 죽은 사람을 살린다면 그만큼의 대가도 뒤따른다는 건가? 뭐, 어차피 완벽한 힐러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유가 뭐든 이 목소리를 써야 할 때가 올지 모르니까……. 잡념을 떨쳐냈다. 그렇게 꼬박 3시간 동안 치열하게 소리와 싸웠다. 발성 연습이 끝났을 무렵 목에서 쇠 비린내가 났다. 쉴 틈 없이 러닝머신에 올랐다. TV를 켜고 러닝머신과 전쟁을 치를 때였다.
[차명환 대표가 기자들에게 싸여 본사로 들어가는 중입니다. 태령 지분을 보유한 홍콩 펀드는 긴급 주총을 요구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주총 이후 태령측 대변인을 통해 전해 드리겠습니다.]
눈이 등잔만 해졌다.
“어? 찌질이다.”
멀리서 잡혔지만 TV 안에 있는 건 차명환이었다. 기자들에게 포위된 차명환 얼굴엔 살 대신 신경질만 덕지덕지 붙었다. 그는 경호원들의 비호 아래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저 찌질함은 카메라로도 해결이 안 되나 보다. 혀를 찼다. 저렇게 멀쩡히 다니는 걸 보니, 그게 어쩌면 자신 때문일지 모른다니, 기분이 복잡미묘했다. TV를 껐다. 러닝머신 레일을 딛는 제 발끝을 보았다. 혼란스럽고 거부감뿐이던 감정은 다른 성질로 변해갔다. 눈앞에 있는 문들 중에 반드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자신에게 가장 안전한 문이어야 한다. 그건 자신을 대신해 저주에 걸린 차이석에 대한 예의다.
홍콩인들이 적대적 M&A를 공표한 직후, 증권가와 언론은 떠들썩했다. 오늘 오전, 홍콩인들이 요청한 긴급 주총은 본사 사옥 회의실에서 비공개로 진행됐다. 그간 우호적 합병 제스쳐를 취했던 외국 기업은 있었으나 공격적인 합병을 선포한 건 이례적이다. 흔히, 우호적 M&A를 양자 예의를 지킨 중매결혼에 비유한다면, 적대적 M&A는 혼인빙자 간음에 비유한다. 고이 키운 딸이 윤간당하고 악당과 강제 결혼까지 하게 생겼는데 세상 어느 부모가 기꺼워하겠는가. 두 시간의 설전을 벌였으나 이렇다 할 결론 없이 주총을 마쳤다. 홍콩 패거리는 통역사를 대동한 채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홍콩인들은 성재가 미리 포섭한 연기자이며 이쪽으로 문외한인 그들에게 대사부터 표정, 제스쳐까지 한 달여간 집중 교육 시켰다. 이석은 눈빛으로 그 신들린 연기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홍콩 펀드의 첫 번째 요구는 무능한 대표이사의 해임이었다.
“천박한 쓰레기들이! 나를 뭐 어째?! 내가 만만하게 당할 줄 알고?!”
차명환은 욕설을 뱉으며 책상을 걷어찼다. 그는 좀 더 입원할 예정이었으나 무리해서 참석했다. 이미 건재하다는 걸 보여주는 쇼였다. 그의 거친 행동에 경영진은 눈살을 구겼다. 차 회장을 비롯한 경영진들은 대형 탁자에 둘러앉아 뒷일을 도모했다. 그들의 낯빛은 흑색이었다.
“차 대표가 완쾌해서 경사가 났나 했더니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우리도 가만히 당하진 않을 거요! 모두 합심해서 내쫓으면 됩니다!”
경영진들은 홍콩 패거리가 앉았던 빈자리를 노려보았다. 홍콩인들은 적군의 심장부에 들어왔음에도 방약무도한 태도로 경영진 속을 긁었다. 차 회장이 경영권 승계 과정이 투명하지 않았던 점, 차명환의 보호막을 치려고 무리하게 반도체 회사를 인수한 점, 그 때문에 태령의 기업 가치가 떨어졌으며 적자를 면치 못했다는 점.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썩고 곪은 부분을 이방인들이 후벼 파냈다. 차 회장은 패색 짙은 눈으로 아들을 중재했다. 차명환은 겨우 진정했지만 책상 아래에서 다리를 떨며 전전긍긍했다. 차명환은 환자였다는 면죄부가 있다. 차 회장의 화살은 곧바로 자신에게 날아왔다.
“너라도 정신 차리라고 했잖느냐?”
이석은 비스듬히 앉아 대답했다.
“홍콩 펀드가 태령 주식을 사들인다는 소문은 접했지만 한탕치고 빠지는 무리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건 회장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홍콩 측의 진짜 목적은 경영권을 장악한 뒤 핵심부만 쪼개 팔아 단기 차익을 노리려는 거겠죠. 물론 그건 걔들 생각이고.”
차명환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받아쳤다.
“차 전무 말이 맞습니다. 국내 기업에서 적대적 M&A가 성공할 확률은 희박하죠. 내부 세력만 단결한다면 우리가 훨씬 승산 있습니다.”
“물론 내부 세력이 태령에 대한 충성도가 얼마나 높으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요.”
이석은 성재와 그의 부친인 한 이사, 임 회장에게 삐딱한 시선을 골고루 나눠주었다. 성재는 한쪽 눈을 구기며 도발에 응수했다.
“우리 쪽에는 백기사가 -적대적 M&A에서 경영권 방어를 돕는 우호주주- 충분히 준비돼 있습니다. 장기 투자하려는 주주나 태령과 거래 튼 기업들, 태령 사원들, 일반인들은 태령이 쪼개지면 낙동강 오리 알 신세가 될 테니 열심히 발길질해주겠죠. 안 그렇습니까? 차 전무님?”
이번엔 성재가 자신을 도발했다. 이석은 눈꼬리를 휘며 맞받아쳤다.
“홍콩 측 흑기사도-경영권 탈취를 돕는 제3자 우호주주- 만만치 않을 겁니다. 방심은 한 번으로 충분하잖습니까.”
물론 자신의 흑기사는 성재와 한 이사, 임 회장, 그리고 차 회장이 탈세한 돈으로 만든 페이퍼컴퍼니다. 차 회장은 제 돈으로 방어하고 공격하는 것이다. 옆구리에서 피가 새는 것도 모르는 늙은이가 새삼 딱했다. 임 회장은 헛기침하며 말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대처할지 의견부터 듣겠습니다.”
회의실 공기는 무거워졌다. 각각 의견을 내놓았으나 제자리만 헛돌았다. 이석은 관자놀이를 찌르는 통증에 집중하는 게 쉽지 않았다. 뜬금없이 치미는 살기도 통제가 어려워진다. 그간 부서졌던 집기들은 고양이의 몽유병 탓이라 단정했다. 그러나 며칠간 밤을 잊고 일에 매달리는 동안 고양이는 얌전히 잠만 잤다. 가끔 고양이 몸에 못 보던 흔적도 생긴다. 뒷구멍도 감촉이 달라졌다. 녀석이 뭔가를 숨긴다는 직감이 괜한 노파심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조금 전 입안 구석에 쟁여뒀던 사탕을 혀에 올려 감았다. 옅은 사과 향이 입안에 고였다. 뇌를 쑤시는 통증은 차츰 이완됐다. 차 회장의 엄한 눈길이 날아들었다. 이석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두통약입니다.”
모두 열 올리는 가운데 차명환은 초조한 눈알만 궁글렸다. 당분간 지위를 박탈당할 위험에 시달리다 보면 야바에 대한 중독 증상도 잊겠지. 차명환은 예상 밖의 말을 꺼냈다.
“참, 그런데 갑자기 웬 경호원이냐? 영주가 네 아파트에서 봤다던데?”
경호원에게 여자가 다녀갔다는 보고는 들었다. 미리 입단속 못한 게 실수다. 이석은 먼지 묻은 미소를 보냈다.
“글쎄요. 보물이라도 숨겼나 보죠.”
홍콩 펀드가 태령 지분을 4% 이상 보유했으나 차명환 해임 안건이 통과하려면 까다로운 절차가 있다. 차 회장도 넋 놓고 당할 위인은 아니다. 오늘 임시주총은 태령을 흔들어줬다는데 의의를 둔다. 앞으로가 진짜 전쟁이다.
회의실에서 나와 방으로 돌아왔다. 이석은 의자에 몸을 늘어트리고 담배를 빼물었다. 커다란 창문으로 빛깔 없는 건물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비뇨기과 간판이 눈길을 붙들었다. 폰을 들어 어딘가로 전화했다. 신호음이 가고 여자 목소리가 넘어왔다. 차명환의 아내는 숨소리만 들려주었다. 병원에서 이후 여자는 자신을 두려워한다. 순진한 영양에겐 충격적인 밀어였던 모양이다.
[도련님, 어쩐 일이세요?]
경직된 목소리 끝에서 물기가 묻어나왔다. 이석은 사탕을 반대쪽으로 보냈다. 여자의 귓구멍에 쭉쭉 빠는 소리를 여과 없이 들려주었다.
“형님 퇴원 선물을 고민하다가 도움을 구할까 해서요. 형님 취향이야 형수님이 제일 잘 아실 테니까요.”
[아, 그이 클래식 LP판에 욕심 많아요. 요즘엔 CD로만 나와서 구하기 어렵다고 늘 투덜거렸거든요.]
“당장 주문해야겠군요.”
이석은 여자의 귓전에 입김 같은 웃음소리를 불어넣었다. 홍콩 펀드가 대표 이사 해임을 요구해도 객관적인 타당성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러니 이제부터 그 객관적인 타당성을 만들면 된다.
“완쾌 선물로 LP판은 너무 협소하지 않습니까? 이왕이면 다른 것도 보태죠.”
[뭔데요?]
“형님을 위해 지분을 좀 더 사들이는 건 어떻습니까?”
돌려갈 필요 없이 직구로 승부 했다. 돌려 말해봐야 눈치챌 여자도 아니다.
“홍콩 펀드가 형님의 해임 요구를 했습니다.”
[네에? 그 사람이 뭘 잘못했다고…! 그, 그럼 그이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여자가 겁에 질렸다는 게 낱낱이 느껴졌다.
“자칫 잘못하면 대표이사 자리를 박탈당하는 거죠.”
[…….]
“홍콩 측은 대표이사 해임 건을 물고 늘어질 겁니다. 지금 우리가 보유한 우호지분을 합쳐도 형님이 불리하죠. 단 1%로도 성패가 좌우되는데, 내부 세력에서 배신자가 생길 수 있으니 미리미리 지분을 확보하는 게 좋습니다. 깜짝 선물이니 이 사실은 당분간 형수님과 저만 아는 걸로 하죠.”
[그럼…그이 모르게 하자는 말씀이신가요? 하지만……지금 경황도 없는데 시간 봐서 제가 그이한테 말하면 안 될까요?]
홍콩 펀드의 목적은 현 대표 이사의 해임이다. 상법상, 결의에 관하여 특별한 이해관계가 있는 자는 의결권이 없다. 안건의 주인공이 차명환이므로 그가 곧 ‘특별한 이해관계가 있는 자’가 된다. 차명환이 태령 지분의 절반을 가졌다 한들, 표결에선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말이다. 물론 이런 법안이 있는 걸 여자가 모른다는 확신하에, 이석은 상체를 깊숙이 밀어 낮게 말했다.
“여유가 별로 없습니다. 조만간 홍콩 측에서 정식 주총을 열면 즉시 표결에 들어갈 거니까요. 형수님이 망설이는 지금 이 시간에도 홍콩 측은 태령 주식을 열심히 긁어모으는 중일 겁니다.”
여자는 조용했다. 이내 달뜬 목소리가 넘어왔다.
[그럼…제가 어떻게 하면 되나요?]
“제 말 대로만 하면 됩니다. 나중에 형님이 이 사실을 알면 기뻐 날뛰겠는데요?”
여자가 쉽게 미끼를 문 건 오직 남편을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여자와 만날 시간을 정하고 통화를 끝냈다. 곧바로 폰이 진동했다. 감시꾼이었다.
“늦었군요.”
[죄송합니다. 잠시 길가에 차를 세워두고 조는 바람에……. 강기하는 지금 집에 들어갔습니다. 오전에 납골당에 잠깐 다녀왔고 가게 보수 공사현장에 들렀다가 계속 집에만 있습니다.]
이석은 손가락으로 눈썹 산을 문질렀다.
“차 안이라기엔 목소리가 넓게 퍼지는데요.”
[아, 방금 전에 잠 좀 깨러 나왔습니다.]
“워낙 험한 일이라 건강 해칠까 봐 걱정되는군요.”
[말씀이라도 고맙…….]
“한 번만 더 보고가 늦으면 방구석에서 평생 잠만 자도록 해주죠.”
[…….]
이석은 폰을 책상에 던지고 약속 장소로 갔다.
기하는 남자의 입에 댔던 폰을 떼어내고 부하에게 건넸다. 손이 뒤로 포박된 남자는 공포에 질렸다.
“이봐, 부자연스럽잖아. 눈치가 귀신 같은 새끼라고.”
놈은 얼마 전 잡아들인 파리였고 예상대로 차이석이 붙인 놈이다. 밤새도록 구타당해 퉁퉁 부은 면상은 피가 말라붙었다. 특별히 주둥이는 건드리지 않았다.
“네 마누라와 딸이 사창가에서 번 돈으로 말년 보내기 싫으면 제대로 하는 게 좋을 거야.”
기하는 소변 자국에 얼룩진 남자의 가랑이를 구두로 밟았다. 남자는 흠칫흠칫 떨었다. 새벽까지 끈질기게 입을 다물었던 놈은 가족을 지키려고 모든 걸 털어놓았다. 미친 새끼의 사주로 차 사고를 냈으며, 시체와 바꿔치기한 뒤 야바를 그 집에 배달했다는 등등…….
“감시 잘해. DVD 때처럼 실수하면 네놈들 쓸모없는 눈깔부터 처리할 거니까.”
“예! 사장님!”
부하들은 바짝 기합이 들어갔다. 기하는 체벌 창고에서 나왔다. 아파트 경비원은 두어 시간만 모르는 척하란 제의를 받아들였다. 우연찮게 사채빚이 있어서 구워삶기 편했다. 임수의 특별 임무, 아파트 주변에 잠복한 부하들, 모든 물밑 작업은 끝났다.
부하가 먼저 달려가 차 문을 열었다. 임수는 지금 막중한 임무를 수행 중이라 며칠간 다른 부하가 빈자리를 대신했다. 차가 출발하자 기하는 신문을 펼쳤다. 홍콩 펀드의 합병 선포 직후 태령 주가가 연일 하락세다. 아마 홍콩놈들이 한탕 하고 빠지려는 속셈일 거다. 떨어졌을 때 더 사두려면 자금을 확보해야 한다. 임수는 반대했지만 흐름만 잘 타면 중소기업 못지않은 돈을 만질지 모른다. 미친 새끼가 넘긴 주식을 담보로 잡기엔 위험 부담이 크다. 파라디소라면 그나마 안전할 텐데…. 실소유주는 연락이 없다. 가게 값을 올리려는 수작인가? 넘길 의사가 없는 것보다는 그게 낫지만 말이다.
운전 중인 부하가 말했다.
“아, 코카인이 퇴원해서 방금 숙소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기하는 손가락을 매만졌다. 손가락엔 반지가 있던 흔적만 남았다. 평생 이렇게 손해 보는 장사는 처음이다. 이쪽에서 최대한 성의를 보였으니 코카인도 허튼짓은 안 하겠지.
“기념비적인 날인데 그냥 넘어가면 서운하지. 퇴원 선물 보내.”
“예.”
헤쉬쉬는 침대 가에 앉아 꽃바구니를 건넸다.
“사장이 퇴원 선물로 보냈단다. 꽃바구니는 무슨…….”
꽤 신경 써서 고른 듯한 장미였다.
“그 새끼들 막 밟을 때마다 간이 철렁했다니까. 그나저나 병문안도 못 오게 하고 너도 지독하다.”
헤쉬쉬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코카인의 수술 자국을 들여다보았다. 가수들에겐 차 사고로 심한 뇌진탕을 당해서 수술했다고 둘러댔다. 자신이 칩을 제거했다는 사실을 알면 동료들에게 산채로 뜯어먹히겠지.
“얼굴이 반쪽이 됐네. 앞으로 열심히 먹여야겠다.”
헤쉬쉬는 자신의 볼을 만지다가 뭘 상상한 건지 얼굴을 붉혔다. 오직 자신만 쳐다보는 정직한 눈동자에 명치가 꽉 막혔다. 차라리 차이석이 아니라 헤쉬쉬였다면 이 지경까지 치닫진 않았을까? 왜 사람은 타락한 것에 더 매료될까…….
“꽃 이대로 두면 시들겠다. 병에 좀 꽂아줄래?”
“알았어.”
헤쉬쉬가 나가자 침대에 몸을 기댔다. 약한 현기증이 돌았다. 뒷머리를 만졌다. 붕대는 풀었으나 아직 수술 자국이 남았다. 수술 시간은 고작 두 시간, 바로 다음날에 깨어났다. 일주일간 특별 휴가를 얻어 회복기를 거쳤다. 의식이 돌아왔을 때, 수술 전후 엑스레이 사진과 피묻은 칩부터 확인했다. 리모컨 반지도 망가트려 달라고 했다. 사장은 눈앞에서 요구를 들어주었다. 이렇게 간단한 거였나? 고작 이런 걸로 노예생활을 했단 말인가? 족쇄를 풀어냈다는 환희보다 시달렸던 세월에 분노가 끓었다.
그런데 예전보다 여유로워 보였던 사장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사장은 교활한 인간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움직이는 중이겠지. 어디까지 알아냈을까. 그가 야바를 먼저 찾아내면 힐러라는 걸 눈치채는 것도 시간문제다. 그럼 자신의 카드가 무용지물이 된다. 차이석의 거처를 알아내는 것보다 안으로 들어가는 게 가장 난제다. 어딘가로 전화 걸었다. 차명환의 아내가 반겨줬다. 시덥잖은 대화를 나누고, 그녀의 요청으로 노래를 불러주었다.
[코카인 씨 목소리는 정말로 경이로워요! 목소리도 얼굴도 너무 아름다워요. 아마 정식 가수로 데뷔하면 세상이 떠들썩해질 거에요!]
“과찬이십니다.”
코카인은 쓰게 웃었다. 한때 차이석에게 전화로 노래를 불러줬다. 파라디소에서도 그는 자신만 쳐다보았고 자신의 노래만 원했다. 그렇게 달콤했던 기억도 있었다. 코카인은 신중하고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어려운 부탁이 있습니다. 사모님.”
[뭔데요?]
“혹시 차 전무님 댁이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왜 그러시죠?]
“차 전무님께 돌려받을 것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 수술 직후라 친구를 대신 보내려고 하는데 아파트에는 아무나 들이지 않아서요.”
[도련님께 돌려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가져가도 좋다고 허락하셨는데 잊으신 건지 말씀이 없습니다. 자꾸 제가 보채면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직접 가려고요. 경호원에게 맡겨놓은 걸 받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사모님이 경비에게 말씀만 잘해주시면 전무님을 귀찮게도 안 해드리고 저도 마음이 편할 겁니다.”
[하긴, 요즘 도련님이 회사일 때문에 정신이 없으시긴 해요. 그런데 그런 일이라면 도련님께 직접 말씀하시는 게 제일 쉬울 텐데…….]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전무님이 돌려주시겠다고만 하셨지 뚜렷한 말씀은 안 하셔서요. 조금 급해서 빨리 돌려받아야 하는데…….”
[그럼 제가 받아올까요? 안 그래도 조만간 도련님댁에 갈 일이 있는데…….]
“크기가 좀 돼서 사모님이 들고 오시기엔 무리일 겁니다.”
평소 백치처럼 굴어 쉬울 줄 알았는데 의외의 복병이다. 하는 수없이 승부수를 띄우기로 했다.
“역시 곤란하시겠죠. 괜한 소릴 해서 부담만 드렸습니다. 못 들으신 걸로 하세요.”
[아니, 저……!]
다급하게 붙든 여자는 또 오랫동안 고심했다. 심장 박동수가 빨라졌다. 이어 여자가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만약 제 남편을 살려주는 사람이 있다면 뭐든 해주자고 항상 다짐했어요. 거기 경호원에게 받아오기만 하면 된다고 했죠? 코카인 씨 친구분 시간에 제가 맞출게요.]
코카인은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폰을 끊었다. 일이 착착 진행되는데 별로 기쁘지 않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슈퍼에 다녀오겠다 둘러대고 숙소에서 나왔다. 의아했다. 칩을 없앴음에도 깡패들은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헤쉬쉬를 떼놓느라 애먹었다. 자유를 얻었는데도 이 불안함은 뭔지…. 성긴 가로등에 의지해 세준의 집으로 들어갔다. 대문을 긁는 소음이 마당에 뒹굴었다. 집은 불이 꺼졌고 세준은 보이지 않았다. 항상 깨끗했던 집안은 거미줄과 먼지투성이였다. 뒷마당으로 걸어갔다. 백열등 아래서 웅크린 세준의 등이 보였다. 생업까지 내팽개친 그는 유작을 남기는 장인처럼 조각에만 심취했다. 세준은 조각도를 내리고 큰 붓으로 조각상에 묻은 가루를 털었다. 반투명한 살색 점토에 야바의 섬세한 이목구비가 모두 완성되었다. 아름다운 눈매와 콧날, 약에 절어 독설만 뱉는 입술은 그 얼굴에서 가장 볼만했다. 그래서 더 마음에 안 들기도 했다.
“형. 뭐해요?”
세준이 고개를 돌렸다. 그 조각상과 닮은 사람은 또 울고 있었다. 그는 성인임에도 눈물 흘리는 걸 수치스러워하지 않았다. 그는 10년 전 자신의 노래와 재활치료 덕에 장족의 발전을 했다. 그러나 이미 자궁에서 손상당한 뇌는 완벽한 정상인으로 되돌리긴 어렵다. 그렇기에 아직 그는 자폐증 환자의 특성을 간직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준이 비정상적인 집착을 하는 건 자신과 야바라는 인간 자체가 아니라, 목소리가 아니었을까?
“세진이가 그렇게 좋아요? 나보다 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지만 기어코 듣고 싶은 고약한 심경이다. 저 사람은 누구보다 진실을 말해줄 거라 의심치 않았다.
“빨리 대답해 봐요. 정말 궁금해서 그러니까.”
“나, 나는…….”
세준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눈을 피했다.
“세, 세진이와 채우…그리고 나……이렇게 셋이서 다 함께 살고 싶어요……. 두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그것 말고는 아무 생각도 안 나요…….”
“형은 지금까지 제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착해요.”
그의 충성도는 확인한 바 있다. 아니, 훨씬 이전에도 확인했다. 쪽마루 아래, 신문지로 말린 야구방망이가 보였다. 야구방망이 끄트머리에는 머리카락과 핏물이 말라붙어 있다. 그 틈으로 작은 이니셜이 보였다. 자신의 형은 야구선수였다. 종종 야구방망이를 도둑맞곤 해서 임시방편으로 새긴 거였다. 코카인은 그곳에서 시선을 묻은 채 읊조렸다.
“그리고… 제일 무서운 사람이에요.”
10년 전, 그 잊지 못할 악몽의 크리스마스.
그날은 눈 대신 폭우가 쏟아졌다. 그때 자신은 중학생이었다. 아직은 크리스마스가 설레었던 나이였다. 그러나 엄마는 선물 대신 사람들을 끌고 왔다. 자신의 절규로, 광신도들의 악다구니로 배 속을 채웠다. 어미란 여자를 매분, 매초 죽이고 싶었다. 가난에 허덕이던 사람들은 자신의 노래로 구원을 갈구했다.
노래해! 노래 불러줘! 뭐든지 다 해줄게!
사람들은 눈을 까뒤집고 자신을 뜯어먹을 기세로 덤벼들었다. 눈물 콧물을 흘리며 애원하는 그들이 두려웠다. 차라리 이 저주받은 목소리를 없애고 싶다! 모두 사라졌으면 좋겠다!
그만해요─────! 그만!! 싫어───────!!!
목구멍에서 피 냄새가 날만큼 악을 쓰고 발작했다. 광인들은 혀를 꺼내 그 비명마저 받아먹었다. 모두 제정신이 아니다. 자신도 미쳐가고 있다. 진액이 쥐어 짜여 거실 바닥에 늘어졌다. 그때 온통 젖은 남자가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허리는 구부정해도 키가 큰 남자였다. 방금 들어온 건지, 이미 와 있었던 건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는 자신을 동정 어린 눈으로 목도 했다. 남의 서방과 눈맞아 동사한 모친에, 식물인간 부친, 똥오줌도 못 가려 동생에게 민폐나 끼치는 사람이 말이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도와줘. 누구라도 구해줘요. 제발…….
세준은 자신의 외침을 들었는지 흠칫 굳었다. 그는 신발장에 세워진 야구방망이를 쥐고 거실 불을 껐다. 암흑 뒤에 숨어 그는 본성을 드러냈다. 세준은 야구방망이로 사람들 머리를 박살 내기 시작했다. 어둠으로 피가 튀고 절규가 튀었다. 하나, 둘, 셋…광신도들의 머리통이 으깨졌다. 흰자위를 드러낸 사람들은 환각에 빠져 이웃의 머리가 터지는 것도 몰랐다. 바로 눈앞에서 중년 여자의 머리에 흉기가 내리쳐졌다. 곧바로 그 옆 사람의 두개골도, 자신의 얼굴에 피가 뿌려졌다. 살인마의 흉기는 느렸지만 목적은 뚜렷했다. 생생한 장면에도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피와 뇌즙의 악취로 뒤엉켜 누가 누구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어느덧 사람들의 광기는 멈췄다.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로 도망친 거라고 생각했다. 저 시체 더미에 섞였다 해도 불쌍하지 않았다. 살인마가 아니었다면 자신이 그랬을 거니까. 피를 뒤집어쓴 살인마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강아지 같은 눈망울엔 살기의 여운이 번들거렸다.
‘이, 이제 우리 집에서…살아요……. 내, 내가 지켜…줄게요…….’
살인마는 송장 사이를 비집고 걸어와 자신을 잡아 일으켰다. 그는 엄마를 죽인 살인마가 아니라, 구원자다. 머리로는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다. 경기하며 피묻은 손을 뿌리쳤다. 살인마의 위압감에 질려 이빨이 부서지도록 떨었다. 다시 살인마에게 손목을 붙들렸을 때였다.
‘장세준! 어딨어?!’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어둠을 가로질렀다. 울음 섞인 목소리와 발소리는 가까워졌다.
‘여기에 있는 거 다 아니까 나와!’
살인마는 어깨를 움츠렸다.
‘어, 어, 어쩌지? 여기에 온 거 알면… 세진이가 화낼 텐데…….’
수많은 인명을 몰살한 남자는 고작 동생 목소리에 겁을 먹었다. 살인마는 사방을 살피다가 어둠으로 사라졌다. 뒷문으로 도망쳤는지 집안 어딘가에 숨은 건지 확인할 엄두는 안 났다. 현관 창문으로 아이의 인영이 비쳤다. 자그마한 날개를 가진 예쁜 실루엣이었다. 어쩌면 크리스마스를 축복하려고 온 천사일까? 아이는 손잡이를 잡고 조심히 문을 열었다.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얼어 있을 때였다. 빗물을 묻힌 걸음 소리가 들렸다. 유유히 다가온 성인의 그림자가 아이를 덮었다. 두 사람은 현관 밖에서 얘기를 나누었다.
‘너 이 집에 사나?’
‘아니요. 전 그냥… 잠깐 놀러 온 거예요.’
‘이 시간에 남의 집에 멋대로 들락거리다니, 가정 교육을 받다 말은 모양이군. 아, 괜찮아. 아저씨는 거짓말을 많이 해봐서 거짓말인지 아닌지 잘 알거든.’
그 남자다! 이 집에 이사 오기 전부터 자신을 조사하러 다녔던. 그를 피해 여기로 이사 왔고 이름까지 바꾸었다.
‘네 이름은?’
‘자, 장세진…….’
‘몇 살?’
‘여, 열네 살요…….’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갔다. 남자는 세진이가 이 집에 사는 것으로 판단한 모양이다. 세진이를 자신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죽을 힘을 다해 기도했다. 제발 저 남자가 계속 착각에 빠져 있기를, 제발! 제발! 그리고 기적 같은 소리가 들렸다.
‘널 찾으려고 좆 빠지게 돌아다녔어.’
그렇게 암울했던 과거를 잊고 살아가리라 믿었다. 만약 야바가 밀고만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코카인은 웃었다. 그리고 울었다. 우린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형은 제가 원하는 걸 다 해주셨죠. 10년 전에도 그랬잖아요.”
아마 이번에도 구해주리라 의심치 않았다. 추악한 비밀을 공유한, 그날의 가해자와 목격자기에…….
“가지고 싶은 게 있어요. 그 사람은 차갑고 화려한 뱀 같아요. 하지만 그를 가지려면 그 몸을 잠식한 독부터 제거해야 해요. 형의 도움이 필요해요. 그곳에 가면 형에게도 선물이 기다릴 거에요.”
조약돌 같은 눈망울이 일렁거렸다. 특별한 신자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채우가 갖고 싶은 건 다 해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