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36화 (36/42)

힐러-track 34

노래가 끝나고 침묵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억만년의 적막, 부산한 먼지 소리. 환상 같은 이…믿기지 않는 광경이 모든 감각을 폐쇄 시켰다. 거실은 피바다를 방불케 했다. 그의 어깨와 옷을 적신 핏물은 채 마르지도 않았다. 생생한 쇠 비린내에 현기증이 돌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의 목덜미를 가로지른 상처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야바는 뒷걸음질쳤다.

“뭐, 뭐야…. 이거…왜…….”

차이석은 손을 올려 상처가 있었던 자리를 더듬었다. 신중하게 탐색하고 돌아온 손가락엔 핏물만 묻어나왔다. 그는 경직된 얼굴로 자신을 목도 했다. 혼란과 경악이 범벅된 입술이 벌어졌다가 닫혔다. 턱선이 경직과 이완을 반복했다.

“너…….”

단단한 동공에 감정의 회오리가 몰아쳤다. 차이석은 눈매를 일그러트리며 읊조렸다.

“이제야 이해 가는군. 마약도 코카인 노래도 멀리한 지 꽤 시일이 지났는데 내게 감지됐던 마약 양성 반응, 감쪽같이 사라지곤 했던 상처, 차명환의 완치와 후유증. 어떤 패턴에도 속하지 않는 네 이상 뇌파…….”

“…….”

“차명환이 처음 네 노래를 듣고난 뒤 며칠간 의식불명이었지. 어쩌면 너도 모르게 발현한 힘을 놈이 감당 못해서였을지 몰라. 코카인도 포기했던 차명환은 최근 비약적으로 호전됐어. 너는 코카인이 오기 전부터 노래 불러줬으니 이미 치유가 시작됐던 거야. 동시에 중독도.”

차이석은 상체를 굽혀 멍하게 굳은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뼈와 살이 뜯어먹히는 걸 알면서도 들을 수밖에 없는 목소리, 세이렌의 환생. 누구보다 네 노래 그 자체인데 왜 아무도 몰랐지? 물론 나도 그랬지만.”

그의 언어가 뭉개졌다. 귀로 낱낱이 듣고 있어도 뇌로 전달이 안 됐다. 핏기 가신 입술이 떨렸다. 그는 자신의 어깨를 끌어당겨 다시 막다른 어딘가로 몰아갔다. 단단한 목소리로 쐐기 박았다.

“너는 힐러야.”

“──-!!”

야바는 눈을 크게 뜨고서 숨을 그쳤다. 그것은 거대한 우주 공간으로 떠밀려 나자빠지는 아찔함이었다. 단 몇 초 만에 살갗과 뇌까지 얼리는 잔인한 공간. 무중력 상태같이 귀가 먹먹했다. 도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힐러가 이렇게 칙칙하고 무거운 목소리여도 된다고? 힐러는 모두 아름다운 목소리와 그에 걸맞는 외모를 가졌다고 들었다. 저주스러운 힘을 갖고 태어난 반대급부라고 했다. 자신의 목소리는 다른 가수들과 톤이 섞이지 못해 민폐라고 불만만 샀다. 찌질한 하자 인간은 실력이 형편없다고 매일 투덜거렸다. 뭐 하나 납득할 실마리가 없는데 그는 말도 안 되는 소릴 강요하고 있다. 저주의 시간이 낮까지 침범했나 보다. 그의 남은 이성까지 잡아먹은 게 틀림없다. 굳은 혀를 가까스로 움직였다.

“정신 차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는…….”

차명환의 완치도, 차이석의 이상 증세도 모두 나 때문이라고? 조목조목 반박해야 하는데 사슬에 묶인 사고가 제대로 돌지 않았다. 그는 외출하고 돌아와 느닷없이 목을 긋고 노래를 다그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릴 해대고 있다. 터럭만큼이라도 낌새가 있었다면, 아무리 그가 현실로 인도하는 통로라고 해도 이건 도에 지나쳤다. 그래, 항우울제 과다 복용으로 환영이 보이는 거다. 그게 아니고선 이런 일이 벌어질 이유가 없다. 털투성이 벌레가 모조리 기어나왔다. 자신의 어깨를 쥔 차이석 손으로 옮겨 갔다. 손등을 깨물고 보복했다. 야바는 그의 손을 감싸고 벌레를 터트려 죽였다. 그가 자신의 턱을 쥐고 들어 올렸다. 야바는 눈을 치켜떴다.

“나한테 준 약, 항우울제 아니지? 갑자기 약 바꾼 것도 이것 때문이지?”

약 때문에 착시현상이 일어난 거다. 어쩌면 지금 이 상황도 망상일지 모른다.

“내가 눈감고 노래할 때 상처에다 무슨 짓 한 거지? 나한테 다 뒤집어씌우려는 거 다 알아. 민증이 말소된 사람 하나쯤 손쉽게 물 먹일 수 있잖아. 그게 니들 수법이잖아. 내가 만만하게 당할 줄 알아?”

태령이 망하면 한국 사람 1/3이 실업자가 된다는 풍문이 나돌 만치 국내 굴지의 태령그룹이다. 그 태령의 차기 총수 자리를 둘러싼 국가적 음모이다. 대통령도 연루된 거대한 음모!

“그럼 이 상처는 어떻게 설명할 거지?”

차이석은 자신의 손목을 난폭하게 잡아 올려 목에 갖다 댔다. 그의 목덜미의 핏물을 뒤적이고, 탄탄한 살갗을 더듬게 했다. 출혈도, 벌어졌던 살점도 사라졌다. 없다. 없어졌다. 그가 스스로 목을 긋고 피가 정신없이 쏟아졌다. 자신이 노래하고…… 그 뒤에 사라졌다. 야바는 발작처럼 손을 잡아 뺐다. 끈 떨어진 인형 마냥 손목은 덜렁거렸다. 혼을 게워내고 빈 껍데기만 남은 사지에 힘이 풀렸다. 가랑이에 물린 그의 허벅지가 균형을 잡아줬다. 차이석은 자신을 부축해 팔에 가뒀다. 훨씬 냉철해진 눈이 목을 찔렀다.

“피하지 마. 그 항우울제는 진실을 보여주는 거라고 말했을 텐데.”

“……시끄러워.”

그는 차고 고요했다. 자신은 미칠 것 같은데 어째서 저렇게 명료할까. 몇 가지 단서만으로 어떻게 확신했을까. 그 눈빛이, 언어가 담고 있는 무게감에 뼈가 부서지는 것 같다. 겉가죽은 차가웠지만 속에선 열 덩이가 절절 끓었다.

“시끄러워! 입 다물어! 나는 이제 겨우 사람이 됐어! 니가 뭔데 그걸 포기하라는 거야?! 니가 뭔데?!”

머릿속이 너덜거렸다. 쇄도하는 현기증에 눈을 감았다. 자신은 DVD를 훔쳐 그의 정체를 매장시켰다. 차이석은 그 DVD로 스스로 목을 찔러 자신의 정체를 파내려한다. 어떻게 부인하려야 할 수 없도록 증거를 내보이면서. 꾸역꾸역 고개를 치켜올렸다. 만약 그의 예상이 엇나갔다면……. 저 바닥에서 싸늘한 시체로 누워 있을 터였다. 뒤늦게 등을 떠미는 공포에 전신이 떨렸다.

“그래서… 이거 확인하려고 목을 그은 거야?”

그가 앞으로 무슨 짓을 할지 예측이 안 됐다. 그게 너무 두려웠다. 닥치는 대로 그를 두드려팼다.

“죽어! 죽어버려! 무슨 확신으로 미친 짓을 한 거야?! 네까짓 거 죽든 말든 하나도 안 무서워! 안 무서워!”

야바는 그를 후려쳤다. 차이석은 매서운 주먹질을 잡아채고 벽에 밀어붙였다. 등에 부딪히는 벽에 숨이 턱 막혔다. 불꽃에 그을린 눈동자는 식어 있다.

“물론 내 숙원사업을 갈아엎은 범인을 색출해야니까. 괜한 사람 잡기 전에 진범을 밝혔으니 다행이군.”

피로 엉망인 거실과 망가진 전화기. 그제야 조금 전 그의 미치광이 행각이 떠올랐다. 작살 같은 그의 시선이 목구멍을 뚫었다.

“너는 모든 걸 망쳤어. 덕분에 가장 완벽했던 시나리오를 폐기처분시켰고, 내 유일한 즐거움까지 공중분해 시켰지. 이렇게 제대로 뒤통수를 갈겼으니 혼나야지.”

스스로 목을 찌르고 자신을 다그쳐 여기까지 끌고 왔던 건 그런 이유였다. 최종 목적지에 도착한 그는 본성을 숨기지 않았다. 발뺌할 수 없는 증거 앞에서도 자신이 한사코 부인했던 이유였다. 야바는 입술을 악물었다.

“죽어버려.”

차이석은 질 나쁘게 웃었다. 성난 눈에 불길이 타올랐다.

“범인을 응징하기 전엔 곤란하지.”

차이석은 손목을 부러트릴 듯이 옭아맸다. 살점 묻은 DVD 조각이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차례라고 경고했다. 혼란을 정돈하기도 벅찬데 이것까진 감당이 안 됐다. 텅 빈 머리에 어거지로 오물을 쑤셔 넣는 것 같다. 야바는 소름 끼치는 것에서 제 손을 잡아 빼려 했다. 그는 목뼈가 꺾일 만치 포악하게 당겼다. 미치광이 눈에 날 비린내가 번뜩였다. 그를 밀치다가 핏물에 미끄러져 쓰러졌다. 몸은 피에 젖어 엉망이었다. 엄습하는 그림자에 체온이 바닥까지 떨어졌다. 몸을 일으킬 새도 없이, 미치광이는 자신을 거칠게 잡아챘다. 그의 무릎에 얹어 뒤집어엎고는 바지와 팬티를 한번에 끌어내렸다. 찹찹한 공기가 엉덩이를 감싸는 그때였다. 찰싹! 찰싹! 매운 소릴 내며 살갗에서 화끈한 자극이 터졌다. 채찍 같은 손은 볼기짝 다섯 대를 때리고 물러났다. 자신의 발버둥은 잦아들었다. 야바는 제 팔에 코를 묻었다. 미치광이가 지금 어떤 표정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시야가 뿌예졌다.

“……이게 끝이야?”

그가 탁한 음성으로 뇌까렸다.

“아니, 이제부터가 시작이야.”

“그만…해……! 그만.”

차명환을 살린 죗값은 혹독했다. 괴로운 감촉에 허리가 튀어 올랐다. 입속에서 기괴한 헐떡임과 옹알이가 맴돌았다. 발가락 사이를 그의 혀가 꽉 누르며 스쳐 갔다. 발치에 매달린 그의 등 근육이 일렁거렸다. 처음엔 그냥 자신의 몸에 묻은 피를 그루밍하다가 비롯됐다. 정신을 차리니 바지와 팬티는 거실 바닥에 떨어져 있다. 스웨터는 가슴 위로 말려 올라왔고 그 아래 하체는 전부 드러났다. 저 피가 왜 묻은 건지 기억도 가물거렸다. 누가 제정신이 아니든 상관없다고, 이 고문 같은 열기가 모서리 진 신경을 녹여버렸다. 차이석은 자신의 엄지발가락을 입에 넣고, 노골적인 소릴 내며 빨았다. 혀를 넓게 펴 발바닥을 괴롭히기도 했다. 견디기 벅찬 감촉에 물고 있던 입술을 뱉었다.

“으읏…간…지러워……! 하지…마!”

차이석은 발바닥을 길쭉하게 핥아 올리며 낚아채는 시선을 쳐올렸다. 신기한 걸 발견한 듯, 그의 눈빛이 날렵하게 반짝거렸다. 위로 올라온 그가 자신의 입술을 만지며 미간을 찌푸렸다.

“놓쳤어.”

뭐가? 야바는 숨을 할딱이며 물었다. 그는 뭔가에 발동걸려 다시 아래로 미끄러졌다. 이번엔 놓치지 않겠다는 듯, 시선을 박아 올렸다. 그는 자신의 발뒤꿈치를 잘근잘근 깨물고 발바닥에 움푹 파인 곳을 혀로 휘저었다. 야바는 허리를 비틀며 자지러졌다. 낯선 소리가 입에서 흩어졌다.

“하하…! 가, 간지러워……! 하앗……!”

그의 눈길에 불길이 치솟았다. 부드러운 살덩이가 집요하게 그곳을 파헤쳤다. 야바는 또 숨넘어가게 웃었다. 그는 사나운 소리를 씹고 일어났다. 자신의 뒷머리에 손을 넣고 수술 부위가 바닥에 쓸리지 않도록 했다. 넓게 편 그의 혀가 즙을 바르듯 쇄골에서 목덜미로, 턱으로, 입술로 역행했다. 점성 높은 율동을 따라 진한 쇠 비린내도 역행했다. 입술과 입술이 밀착해 서로의 점막을 느끼고, 타액이 오갔다. 그는 자신의 위에 포개 좌우로 맞비비다가 혀를 빨았다. 차이석이 야만인일 때 노래하라는 신호였다. 동전을 넣으면 절로 노래가 나오는 주크박스같이 노래를 흘려보냈다. 맞댄 입술이 빠르게 떨어졌다. 이어 칼날 같은 눈빛이 관통했다.

“함부로 노래하면 지지해. 나비야.”

차이석은 자신의 젖꼭지를 손톱으로 아프게 긁으며 민감한 부분을 지졌다.

“네 입속엔 내 혀만 있어야 돼.”

고개를 튼 그가 이번엔 부드럽게, 녹진하게 혀를 감아왔다. 온몸으로 부딪히는 밀착의 힘에 시야가 일렁거렸다. 농도 짙은 신음이 귓속으로 녹아들었다. 차이석은 다물린 엉덩이 살을 벌렸다. 손가락으로 입구를 누르며 가늘게 진동시켰다. 달궈진 입구에 미세한 자극이 전해졌다. 야바는 신음을 깨물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는 허벅지로 자신의 엉덩이 아래를 받쳐 높이 들리도록 했다. 구멍이 그에게 낱낱이 드러났다. 귀두 끝이 화심의 입구에 꼭 맞게 하고 지그시 마찰했다. 다시금 진입하다가 멈추고는 아주 굼뜨고 더디게 잔 마찰했다. 부드러운 애액과 귀두의 느낌이 적나라했다. 숨소리도 조심스러운 교살 직전의 열락이었다. 눈가에 열기가 몰렸다. 그의 손이 속눈썹 끄트머리를 핥았다. 손길을 따라 고개 들었을 때 그는 음란한 율동을 보는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정욕이 일렁이는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네 눈은 사물을 보고 뇌로 정보를 보내는 통로가 아니라, 성기야. 네 눈구멍에 내걸 박아 넣고 싶어. 부드럽고 축축한 동공에 귀두를 문지르면 미치게 좋을 거야.”

날고기를 씹기 좋은 치아가 눈앞에 육박했다. 젖은 혀가 눈두덩을 지분거렸다.

“다음엔 꼭 하게 해줘.”

아이처럼 보채는 목소리는 소름 끼쳤다. 그는 자신을 주시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좁고 뜨거운 통로를 따라 뿌리까지 찔러넣었다. 생식기가 진입하는 곳은 아래지만 눈에 넣는 것 같다. 차이석은 자신의 두 다리를 어깨에 걸친 채 입술을 뜯어먹을 기세로 삼켰다. 페니스를 집어문 입구가 움찔거리며 쾌감을 치댔다. 엉덩이를 두드리는 아랫배가 딱딱해졌다. 수컷은 들고날 때마다 번들거렸다. 그의 혀가 유두 끝을 밑에서 위로 튕겼다.

“하아…! 앗……!”

깊숙한 자극이 극에 달했다. 탄탄한 복근에 제 성기가 비벼지며 점액을 흘렸다. 쉽게 반응하지 않던 성기는 오늘따라 어딜 건드려도 고비였다. 밖에서 뭔가가 문을 두드렸다. 어떤 생물이 안으로 들어오려는 지 문고리도 건드렸다. 그는 가슴 근육을 꽉 조이며 무한정 속도를 냈다. 유연하게 몸을 비틀 듯 페니스가 움직였다. 진저리치는 쾌감에 야바는 허리를 들고 온몸을 떨었다.

“아으…하아…하읏……!”

“흣…하아……!”

그는 자신을 한 아름 껴안았다. 힐러였어. 힐러였어…. 그의 읊조림은 교성에 파묻혔다. 살과 살이 부딪히는 반동에 온몸이 울렸다. 발가락에서부터 시작해 온몸이 죄었다. 자신의 것이 그의 배에 쏟아냈다. 미적지근한 토정이 아니라 응축됐던 것을 폭발시키는 절정이었다. 엉덩이가 꽈악 수축하며 그의 페니스를 아득한 곳까지 빨아당겼다. 헉, 그는 아랫배에 힘을 모았다. 순식간에 임계점으로 도약한 피스톤질은 감당 못할 만큼 빨라졌다. 그가 황급히 허리를 밀었다. 몸속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수압이 가장 깊은 곳을 적셨다. 육질의 큰 돌기가 자신의 귓바퀴를 핥고, 한숨 소리가 흘러들었다. 그 열락은 귀에서부터 목줄기까지 매끄럽게 이어졌다. 차이석은 성기를 깊이 박은 채 자신을 눕혔다. 엉덩이골로 정액이 넘쳐나왔다. 몸도 머리도 눅눅해졌다. 뒤늦게 생각이 몰려왔다.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가 목숨 걸고 내민 증거를 결국 받아들인다면…….

나는 어떻게 돼? 너는?

그의 목 울림이 볼에 전해졌다.

계속 살면 돼. 너는 주의할 게 몇 가지 더 는 것뿐이고, 나는 좀 더 바빠졌을 뿐이야.

막막한 우주에 자신을 내던진 건 그였다. 그 손을 잡아 준 것도 그였다.

땀 냄새와 애욕의 냄새가 뒤엉켜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오후 늦게 깨어났을 때 그는 보이지 않았다.

코카인이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태령가 사람들이 보인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차명환 부인은 코카인을 끌어안고 탈진할 때까지 대성통곡했다. 차 회장은 차명환처럼 시큰둥하지도, 차명환 아내처럼 요란하지도 않지만 눈빛만은 차분한 환대가 담겨 있다. 차명환은 이제 주삿바늘에도 산소호흡기에도 의존하지 않았다. 그러나 껍질만 남은 육신은 간신히 앉아 있는 것으로 보였다. 아까부터 뭔가를 찾는 지 바짝 마른 눈을 굴렸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차명환의 부인은 기력을 차리고 목소리를 높였다.

“코카인 씨. 그동안 불쾌하셨다면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당신도 어서 사과해요!”

“일하면서 이런 사람도 상대하고 저런 사람도 상대하는 거지. 그걸 다 일일이 사과받고 다니면 피곤해서 어떻게 사나?”

“여보!”

아내의 다그침에 차명환은 짜증 섞인 기색이다. 그러나 오만함은 예전보다 누그러졌다.

“수고했다. 돈은 원하는 만큼 줄 테니 말해.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생명의 은인에 대한 인사치곤 빈약했다. 불쾌하진 않았다. 엉뚱한 사람한테 인사치레하는 저들이 되레 딱했다. 야바도 한때 자신의 행세를 했으니 별 가책은 없다. 코카인은 말했다.

“대표님 말씀이 맞습니다. 이런 일을 하다 보면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나는 거겠죠. 차 대표님이 쾌차하신 것만으로도 다행입니다.”

차명환은 못마땅한 낯으로 노려보았다. 코카인은 그 눈길을 받아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등골엔 땀이 흥건했다. 막상 야바의 힘이 어디까진 지 시험하려 했다. 오늘의 결과는 상상을 초월했으며 이젠 야바가 두렵기까지 했다. 차명환이 중간에 정밀 검진을 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암세포가 줄진 않았다. 이상증세 또한 단계적으로가 아니라 갑자기 심해졌다. 치유와 중독 모두 어느 시점부터 폭발적으로 두드러졌다. 혹시 야바의 목소리가 발현하는 힘이 비약적으로 성장할 계기가 있었던 걸까? 가끔 야바가 욕실에서 발성연습을 하는 걸 들었다. 모르핀은 얼마 전부터 야바가 사장이 줬던 항우울제를 끊고 정체불명의 약을 먹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항우울제를 장시간 복용하면 멀쩡한 사람도 망가지기 십상이다. 혹시 야바가 힐러로서 눈뜬 계기는 사장이 줬던 약을 끊었기 때문인가? 혹은 심리적인 변화라던가…….

그때 병실 문이 열렸다. 들어온 건 차이석이었다. 전혀 예상치 않은 만남에 코카인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며칠 만에 보는 차이석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초점 풀린 눈과 퍼석한 입술은 영혼이 빨린 듯했다. 차명환처럼 말이다. 차이석은 문앞에서 우뚝 서서 눈가를 일그러트렸다. 그리고 차명환에게 한달음에 달려들어 강하게 포옹했다.

“형님.”

차이석은 벅찬 심경을 누르듯 짙게 탄식했다. 차명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다른 말이 필요 없는, 감격스러운 형제간의 상봉 장면이었다.

“아까 왔었다면서 대체 어딜 갔던 거냐? 얼마나 기다렸는데.”

“집에서 막 뛰쳐나온 모습으로 완치된 형님을 보고 싶진 않았습니다.”

차이석은 형제에게서 몸을 떼어냈다. 증명하듯 그는 말끔하고 세련된 슈트 차림이었다. “아무튼 못 말린다니까.” 차명환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실 영주나 코카인보다 더 고마운 건 차 전무야. 내게 힘을 북돋아 주고 세심하게 신경 써준 건 너뿐이었으니까. 누가 봐도 부러워했던 형제 사이로 돌아가서 함께 태령을 이끌어가자.”

차이석의 입가에 씁쓸한 곡선이 그려졌다.

“저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형님께 계속 실망만 안겨 드렸으니까요.”

“내가 믿을 사람은 너밖에 없는 거 알면서 무슨 소리냐? 다신 그런 소리 마라.”

“이사진 모두 형님의 퇴원을 기다립니다. 형님은 당분간 기력회복하는 것만 생각하십시오.”

“그러마.”

차명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 회장은 상체를 곧게 편 채 차이석이 여기에 들어왔을 때부터 예의주시했다. 행여 자신의 새끼를 해하진 않는지 경계하는 맹수 같았다. 차명환은 머리를 움켜잡고 앓는 소리를 냈다. 그의 아내가 달려가 안색을 살폈다.

“왜요? 또 머리 아파요? 이상한 소리가 들려요?”

“잠깐 누워야겠어.”

차명환과 차 회장을 두고 모두 복도로 나왔다. 차이석은 눈꼬리를 접으며 그의 형수에게 말했다.

“샴페인은 좀 더 미루도록 하죠. 저라도 회사를 지켜야 하니 그만 가보겠습니다.”

“네. 도련님…….”

여자는 볼에 홍조를 띠었으나 아까부터 시동생과 눈 한번 맞추지 못했다. 차이석은 형수에게서 눈길을 회수했다. 그제야 코카인에게 시선을 적선하고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차명환의 아내는 뒤늦게 시동생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수심에 잠긴 옆모습은 첫 발령 온 남선생을 바라보는 여고생같이 청초했다. 여자는 이내 표정을 정돈했다.

“아, 죄송해요. 도련님이 조금 이상해서요. 예전엔 잘 웃으셨는데 이젠 그때만큼 잘 웃지도 않으시고, 안색도 안 좋고……. 아마 그이를 대신해서 회사 일에 매달리느라 피곤하신가 봐요. 차 대기 시켰으니까 그거 타고 가세요. 코카인 씨.”

“아닙니다. 타고 온 차가 있습니다. 그럼 전…….”

그가 간다. 마음이 조급했다. 하지만 여자는 끈덕지게 물고 늘어졌다.

“이대로 보내기 미안해서 그래요. 그이가 완쾌됐다고 발길 끊으면 안 돼요! 저는 계속 코카인 씨 노래를 듣고 싶어요! 그이도 표현은 안 하지만 코카인 씨가 와주길 바랄 거에요.”

전부터 느꼈지만 은근히 짜증을 부추기는 여자다. 코카인은 되도록 정중히 말했다.

“그 문제는 사장님과 조율하시면 됩니다. 그럼.”

대화를 갈무리하고 걸음을 옮겼다. 복도 모퉁이를 돌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차이석이 보였다. 야바를 시체로 둔갑시키고, 모두의 뒤통수를 쳤다. 그럼에도 뻔뻔한 낯으로 출몰한 저 남자에 대한 온갖 원망이 몰아쳤다. 차이석은 야바 자체에 끌린 게 아니라, 그 노래에 홀려 판단력이 흐려진 거다. 그는 차명환보다 야바를 더 자주 접했으니 중독도 더 심할지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자신의 힐링이 필요한 시기다. 원망은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그의 팔을 잡고 사람들 시야의 사각지대로 데려갔다.

“5분만 주세요.”

곧바로 노래했다. 입을 떼고 얼마 안 돼 그가 손을 잡아 뺐다. 그를 노려보았다. 다짜고짜 노래를 불러주면 의심하겠지. 그는 아직 야바의 실체를 모를 테니…. 코카인은 표정을 정돈하고 손을 내렸다.

“오전에 사모님께 들렸는데 상태가 안 좋으십니다.”

차이석 모친은 그간 꾸준한 힐링으로 좋아졌지만 오늘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같이 알콜 중독자 몰골로 돌아가 있었다. 차이석은 윤기나는 미소를 머금었다.

“단순한 복통이야. 차명환이 살아났으니 배앓이를 하는 거지.”

“저도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한순간 그의 눈에 기묘한 빛이 스쳤다. 어쩐지 목구멍이 따가웠다.

“그런 얼굴 하지 마. 너도 고의는 아니었을 테니.”

그는 자신의 턱 아래를 가볍게 쳤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차이석이 먼저 올라섰다. 버튼을 누른 그가 눈썹을 들었다. 코카인은 선뜻 올라탈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는 살기를 감춘 채 입을 벌리고 사냥감을 기다리는 거대 파충류 같았다.

“먼저 가세요. 저는 사모님께 드릴 말이 남았습니다.”

차이석은 버튼에서 손을 떼고 엘리베이터에 삐딱하게 기댔다. 서서히 틈을 좁히는 문 너머로 그가 보였다. 약물 중독자의 모습은 사라지고 금속 같은 눈빛이 관통했다.

“너는 노래보다 연기에 소질이 있어 보이는군.”

코카인은 정수리를 두드려 맞은 얼굴로 굳었다. 그 뜻을 되묻기 전에 문이 닫혔다. 아래로 내려가는 소음도 멀어졌다. 은색 문에 비치는 제 모습은 흉하게 어그러졌다. 어쩌면 조금 전 차명환 아내와 비슷한 표정일지도 모르겠다. 불현듯 명치가 조여왔다. 미치도록 그가 갖고 싶다. 지금껏 누구든 자신 앞에 무릎 꿇고 구애했다. 그러나 차이석에게 끌린 건 자신의 추종자 대열에 끼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다. 화려한 배경 때문도 아니다. 숨을 죄는 철두철미함과 한숨 날 정도로 느슨해지는 극단성, 그 중 어떤 게 그의 진짜 모습일지라도 상관없다. 그냥 저 오만방자한 남자를 가지고 발치에 무릎 꿇리고 싶다. 그전에 개 목줄 같은 칩부터 풀어야 한다. 바로 오늘이 개 목줄을 푸는 날이다.

명환은 천장을 멍하게 응시하며 누워 있었다. 국내외 최고 의료진마저 포기했던 자신이 완치됐다는 사실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일이건만 살 떨리는 환희는 없었다. 이렇게 살아 봤자 사기꾼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만 더 생생하게 다가올 따름이다. 정작 생명의 은인은 따로 있는데 자신의 육체는 사기꾼의 노래만 갈구했다. 이 비정상적인 욕구는 스스로도 납득 안 됐다. 명환은 몸을 웅크린 채 이불을 물어뜯었다. 머리는 깨지도록 아팠으며 오한으로 사지가 경련했다. 부친이 벌떡 일어나 벨을 누르려 했다.

“……부르지 마십시오. 괜찮아……질 겁니다.”

명환은 힘겹게 바로 누웠다. 걱정 가득한 부친의 얼굴이 뿌예졌다.

“지금 물색 중이다.”

명환은 한 박자 늦게 눈을 굴렸다. 부친은 말을 이어갔다.

“그 가수의 얼굴과 체형, 목소리, 모두 똑같은 놈으로 찾는 중이니 너도 회복에만 힘쓰거라.”

“……가짜는 필요 없습니다.”

“애초에 가짜는 그놈이었다.”

부친의 서슬에 명환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부친의 노여움을 사는 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다. 자신을 위해 뭐든 다 해주지만 한번 눈 밖에 난 자식에겐 피도 눈물도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명환은 입술을 깨물며 눈을 피했다. 부친은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아까 며늘아기가 그러더군. 얼마 전부터 차 전무 집에 경호원들이 배치됐다고.”

“경호원이요? 차 전무 그런 걸 달고 다니는 거 질색해서 일부러 호신술까지 배웠잖습니까? 왜 갑자기…….”

부친은 눈을 빛냈다.

“글쎄다. 집안에 보물이라도 숨겨놨나 보군.”

병원 로비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기하는 담배를 물었다. 안내 데스크를 지키는 남자가 노려보지만 섣불리 제지하진 않는다. 추적 기록이 끊어진 최종 장소를 탐색하니 이 병원이 나왔다. 신경외과로 유명한 곳이다. 야바가 이곳에서 수술받았는지 물어도 함부로 알려주지 않았고, 미친 새끼가 기록을 남겼을 리도 만무하다. 어쨌든 이곳에서 수술받았다는 심증은 확실했다. 대리석 바닥엔 수만 가지 구두 자국들이 찍혔다. 이 중 야바와 미친 새끼의 것도 있겠지. 그 흔적을 짓밟고 출구로 걸어갔다. 뒤따르는 임수가 말했다.

“코카인 수술 날짜를 잡으러 오신 줄 알았습니다.”

“굳이 이런 데서 할 필요 있나. 수술 준비는?”

“말씀하신 건 모두 준비했습니다.”

코카인은 아침부터 차 회장에게 불려 갔다. 죽을 목숨까지 살려냈으니 그야말로 신 취급을 받는 중이겠지. 코카인 실력이야 정평 났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만약 이 기회를 빌어 차 회장만 포섭한다면, 잔챙이 수십 명 합친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뒷배를 얻는 것이다. 그런데 코카인이 파라디소를 그만둔다면 기껏 잡은 행운도 날아간다. 게다가 새로운 힐러의 실력이 어느 수준인지, 어떤 타입인지도 모르는데 선불로 칩을 제거하라니 누가 봐도 손해 보는 장사다. 실력이 검증 안 된 뉴페이스보다 노련한 코카인이 백배 낫지 않은가. 양손의 떡을 쥐고 한쪽만 선택하란 법은 없지 않은가.

에스컬레이터 교차점에 다다랐다. 그때 의사 무리가 지나갔다. 기하는 걸음을 멈췄다. 무리에서 낯익은 얼굴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눈을 좁히고 얄쌍하게 생긴 남자를 주시했다. 그래, 분명 차이석 요트에서 봤다. 미친 새끼 허리에서 매달려 교태 부리던 남자다.

“오늘은 뭘 먹나? 그나저나 여기 식당 아줌마 언제 바꾼데?”

“난 왕진가야 돼. 맛없는 점심 너희끼리나 배 터지게 먹어라. 수고.”

새파란 의사는 출구로 바삐 나갔다. 의사였나? 사회 고위층이 더럽게 노는 거야 정평 났지만 뭔가 찜찜했다. 기하는 담배를 끄고 말했다.

“차 대기시켜.”

남자의 차는 30여 분을 달려 펜트하우스에 도착했다. 정·재계 거물급만 응집한 초호화 아파트이다. 차를 정문 멀찌감치 세우고 의사의 동태를 살폈다. 의사는 경비실 앞에 정차하고 창문으로 신분증을 내보였다. 바가 올라가자 의사 차는 지하 주차장으로 사라졌다. 단순히 왕진 온 건지도 모르나 냄새가 난다. 지금껏 자신은 촉으로 버텼다 해도 무방하다. 여기 어딘가에 야바가 있다. 피가 끓어 올랐다. 그러나 여긴 외부인 출입 단속에 철저하다. 수천 가구가 되는 거대 단지에서 미친 새끼 집을 찾는 것도 문제다. 집 앞에 문지기를 세워뒀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당장 쳐들어가면 잡음만 나고 실패할 확률이 높다. 기하는 경비원을 힐끔 보며 말했다.

“적당히 기회 봐서 구워삶아. 돈으로 매수하든, 딸과 부인을 사창가로 팔아넘긴다고 하든, 무조건.”

“예.”

기하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아파트 단지를 노려보았다. 시동을 켜고 차가 출발했다. 기하는 창문을 내려 안에 꽉 찬 담배연기를 빼냈다. 문득 사이드미러에 눈길이 갔다. 몇 미터에서 정차해 있는 검정 승용차가 거슬렸다. 병원에서부터 봤던 차였다.

“파리가 꼬인 줄도 몰랐군.”

임수는 백미러를 곁눈질했다. 우직한 눈빛이 사냥개로 돌변했다.

“누가 붙였을까요?”

기하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말했다.

“그야 잡아서 족치면 알겠지.”

[‘아그라오페메’-달콤한 속삭임-치유만 가능한 힐러예요. ‘텔크시오페’-매혹적인 목소리-치유와 살상의 힘을 모두 가진 힐러이고, ‘리게이아’-날카로운 목소리-살상만 가능한 힐러죠.]

[……반인 반어의 세이렌은 노래로 사람의 혼을 빼앗았고, 실패하면 암초에 몸을 던져 자살해야 했어요. 힐러들 역시 자신의 노래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

야바는 침대에서 불도 켜지 않고 노트북과 씨름했다. 차이석은 직접 들어보라며 도청 녹음 파일을 두고 외출했다.

“세이렌의 환생 좋아하네. 그깟 노래가 뭐라고 자살이야? 미개한 생선들 같으니라고…….”

힐러라는 것들은 이가 갈렸다. 힐러 때문에 기하의 애비란 작자가 미친 짓을 했고, 그 아들도 더러운 피를 물려받아 인생 여럿 망쳐놨다. 그런데 자신이 그 힐러라고 한다. 아니, 뭔가 음모가 있는 거다. 자신이 서류를 봤던 걸 알아챘나 보다. 그가 스스로 목을 찌르며 헛소리까지 지어냈는데도 자신이 안 넘어오니 회유책을 쓴 거겠지. 역시 보통 서류가 아닌 게 틀림없다. 그러나 변태 약쟁이 농간에 넘어가진 않을 거다. 앞뒤 없이 제 목이나 긋는 날짐승하고 자신은 질적으로 다르다. 자신은 지성인이다. 한 평밖에 안 되는 소파에서 인생을 굽어본 철학자이다.

야바는 팔뚝을 긁으며 먼지 낀 과거를 들추었다. 어릴 때 교회 누나가 자신의 노래를 듣고 두통이 나았다고 했다. 사실 차명환도 자신의 노래에 이상할 만치 매달렸다. 차이석의 비정상적인 현상도 그랬다. 무엇보다 아까 사라졌던 상처는 어찌할 수 없는 증거였다. 야바는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모르겠다. 모르겠다. 자신이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뭣부터 받아들여야 할지. 대체 이 느낌을 뭐에 비유할까. 여자인 줄 알고 살았는데 알고 보니 감춰진 고추가 있었다는 기분? 불알이 없다고 믿고 살았는데 알고 보니 허벅지 살에 감춰져 있었다는 기분? 감정의 정체조차 정의 내리기 버거웠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녹음파일을 들었다. 기하의 목소리는 끔찍했지만, 실은 듣고 또 들어도 질리지 않았다. 신의 영역을 침범하고 자연의 섭리를 깨부술 수밖에 없는 운명, 그 대가로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그딴 건 자신과 상관없다고 여겼다. 코카인은 비명으로 사람을 죽였으니 텔크시오페다. 만약에, 정말 만에 하나, 자신이 힐러가 맞다면……어떤 타입일까? 손을 들어 입술 끝에 댔다. 입술선을 따라 목으로 미끄러트렸다. 몇 겹이나 접힌 목선을 매만졌다.

“아…아…….”

목소리 분말이 흩어졌다. 보이지 않는 것을 움켜쥐고 주먹을 코앞에 가져왔다. 이것은 코카인과 같은 성분이다. 이 칙칙한 목소리가……. 그때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노트북을 얼른 껐다. 코까지 이불을 뒤집어쓰며 눈을 감았다. 문틈으로 불빛이 길게 늘어졌다. 걸음 소리가 다가왔다. 시원하면서 정욕적인 내음도 따라왔다. 그가 상체를 구부린 건지 옷감 부대끼는 소리가 들렸다. 숨소리가 볼에 흘러내리자 안면 근육이 떨렸다. 그가 남긴 체벌 자국 때문에 엉덩이가 따끔거렸다. 모든 걸 어둠이 가려줄 터다. 그는 한동안 움직임 없이 있다가 밖으로 나갔다.

이석은 고양이가 잠든 걸 확인하고 복도로 나왔다. 경호원들이 절도있게 허리를 굽혔다. 그들은 센서 불보다 조용했지만 주변에 둘러싼 기운은 예리했다. 그들을 뒤로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고양이가 그러했듯이 자신 또한 녀석이 힐러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누구보다 혼란스러운 건 고양이일 것이다. 지금은 마지못해 받아들였지만 언젠가 스스로 인정할 날이 올 것이다. 녀석은 아그라오페메인가? 아니면 텔크시오페? 완벽한 힐러인지 여부도 시험해야 하나…. 이석은 중얼거리며 뒷목을 주물렀다.

도착한 곳은 바로 위층, 브레인들의 숙소였다. 은밀한 회담 장소에 들어서자 담배 연기가 맞아줬다. 브레인들은 소파에 모여 앉아 뉴스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탁자에 있는 신문에는 차명환 소식이 일면에 실렸다. 차명환 측은 축제 분위기인데 반해 이곳은 초상집을 방불케 했다. 이석이 다가가자 브레인들은 어정쩡하게 일어나 인사했다. 험악하게 돌변한 성재가 예상대로 잔소리를 퍼부었다.

“지금 언론사에서 난리 났어! 그러게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했잖아! 설마 코카인이냐? 그 녀석은 알아서 했다면서?”

성재는 보기 드물게 격앙돼 있다. 자신에게 의사를 타전했으나 번번이 제동 걸렸으니 무리는 아니다. 이석은 소파 팔걸이에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차명환이 죽고 주총을 장악한 뒤 내가 대표이사가 된다. 굵직한 주주들을 미리 포섭했고 이사진도 늙은이에게 불만이 많았으니 내 쪽이 유리했지. 그 뒤 늙은이를 자리에서 끌어내고 태령 왕국을 조각조각 찢어 분해한다. 아주 정석적이고 순탄한 계획이었지. 차명환이 죽었다면 말이야. 오늘부로 시나리오 A는 버려. 차명환이 무덤에서 일어났으니 시나리오 B로 간다.”

사내들은 일제히 긴장했으나 의연했다. 무테안경에 이지적인 남자가 말했다.

“내일 바로 태령 주식 떨어트리겠습니다. 그런데 대충 얼마나…….”

“바닥까지 떨어트려 봐. 일주일 정도 유지하고.”

강기하가 바지를 지릴 만큼. 그래서 썩은 동아줄이라도 붙들도록 말이다. 며칠 전 감시꾼을 통해 강기하가 야바의 장례식을 했다는 보고를 들었다. 그날 이후 강기하는 가게 보수공사 현장에 들르는 것 말고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시체가 가짜라는 걸 눈치채는 건 시간문제이다. 놈이 먼저 움직이기 전에 이쪽에서 선수 쳐야 한다. 놈이 절대 외면할 수 없는 최상의 미끼를 눈앞에 흔들면서.

“그리고 이번 주가조작 건은 늙은이와 차명환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으로 마무리.”

이석은 덧붙였다.

“주가가 폭락하면 경영권 방어를 위해 차명환 측도 주식을 사들일 거야. 조작은 우리가 하지만 표면적인 증거들을 종합하면 모든 화살표가 늙은이와 차명환 쪽으로 가지. 이 사실이 밝혀지면 개미 주주들이 눈 뒤집혀서 덤벼들 거야. 대선도 시작했으니 영웅이 되려고 혈안 된 놈들에게 태령 일가의 비리만큼 입맛 도는 먹잇감은 없지. 내일 언론사에 떡밥 던져 주는 거 잊지 말고.”

박준형은 안경을 올리며 말했다.

“무덤 대신 감옥이군요. 차 회장과 차 대표의 분식회계, 탈세에 이번 주가조작까지 얹어주면 엄청난 추징금에 콩밥까지, 이중타격을 입겠죠. 물론 금세 풀려날 거고 남아도는 게 돈인 양반들이지만요.”

성재는 그제야 화를 누르고,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나저나 주가가 내려갔을 때 형님이 그걸 사들여야 증거가 남든 말든 하지. 이제 겨우 완치된 양반이 무슨 정신으로 주식을 사들이냐고.”

이석은 뒷목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굳이 차명환이 살 필요 있나? 그 측근이든 부인이든, 차명환 명의로 사면 돼.”

“형수님이? 아무리 시동생 부탁이라도 남편 명의로 몰래 사주실 리가 없잖냐. 행여 나중에 발각됐을 때 형수님이 네가 시킨 거라고 불면 넌 빼도 박도 못해.”

“글쎄, 한번 시험해 볼까…….”

그 여자가 자신을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를. 이석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반찬투정 심한 차명환에게 콩밥도 맛있게 먹도록 입맛 개선을 해주자고. 늙은이와 차명환이 사이좋게 검찰에 불려다니는 동안, 치한이 활약할 차례야.”

브레인들은 숨을 죽이고 신경을 집중했다. 모두 땅속에서 치열하게 일한 결과, 태령 지분을 충분히 긁어모았다. 주총을 열어 경영권을 장악하고 대표 이사의 해임 요구를 할 만큼 말이다. 이석은 소파 등받이에 팔을 짚고 상체를 앞으로 쭈욱 당겼다. 사내들을 칼같이 둘러보며 말했다.

“내일 태령에게 M&A 공식 선언해. 최대한 더럽고 치졸하게 겁탈하라고. 그래야 정의의 사도가 빛나 보이니까.”

늙은이가 축배를 기울일 틈도 없이 두드려 칠 것이다. 물론 실의에 빠진 태령을 구원할 사람은 자신이다. 성재는 턱을 쓸었다. 패색에 찌들었던 얼굴에 생기가 살아났다.

“면도부터 해야겠군. 오랜만에 다 같이 사우나에나 가지?”

일개미들은 전투적으로 돌변했다. 초상집 같던 밀실 회담 장소는 활력이 넘쳐났다.

고양이는 죽었다. 과거의 오점을 태우고 새로이 태어났다. 완전무결한 자신만의 힐러이다.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다. 그 노래를 탐하는 새끼는 고막을 도려내 씹어먹겠다. 차명환이 살아났다. 가장 원치 않은 짓을 녀석이 저질렀다. 어쩌면 고양이가 자신의 판단력을 갉아먹었는지 모른다. 녀석이 어떤 힘을 가졌든, 그 힘으로 자신에게 어떤 타격을 입혔든, 어디 갈 데까지 가보자.

“네가 나를 어디까지 데려갈지 나도 궁금하군.”

이석은 담배연기처럼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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