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track 33
“명환이가…뭐 어쨌다고?”
늙은이 목소리는 귀에 거슬릴 만큼 갈라졌다. 차명환의 죽음을 알리는 낭보를 전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양 박사는 빠르게 말했다.
“암세포가 모두 사라졌습니다! 모두! 차 대표의 암이 재발했을 당시 담낭은 물론 폐와 간, 임파선, 주변 장기까지 전이된 말기였습니다. 생존 희망은 길어봐야 두 달이었고 수술은커녕, 항암치료도 시도 못 할 만큼 체력이 떨어졌었죠. 최근 암 수치가 많이 줄었어도 일시적인 현상으로 생각했는데……!”
이석은 정수리에 철퇴를 찍힌 듯 굳었다. 차 회장은 입을 다물었고, 차명환 부인은 양손으로 입을 가린 채 숨을 들이켰다. 호스피스 요양까지 권했던 장본인이다. 이 안에서 양 박사의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차 회장은 억겁의 침묵을 깨부쉈다.
“완치라니, 검사 제대로 한 게 맞는가? 행여 나중에 오진이었다고 말을 바꾸면 이유 불문하고 용서하지 않을 거요.”
“저도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CT, MRI, PET-CT, ERCP, EUS… 빠짐없이 검사했는데 터럭만 한 암 덩어리도 없었습니다. 다른 의사들 소견도 마찬가집니다. 담낭에 결석 몇 개만 제외하면 깨끗했습니다! 차 대표는 완치됐습니다! 이, 이건 기적입니다!!”
양 박사는 흥분해서 손까지 떨었다. 상식을 초월한 결과 앞에 의사로서 권위는 내던진 모습이다. 차 회장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토하며 휘청거렸다. 수행원이 늙은이를 부축하자 조용히 물렸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여자는 자리에 주저앉아 목놓아 울었다. 이석은 눈가를 경련했다. 암세포가 뿌리째 소멸 됐다. 반송장이 기적처럼 회생했다. 이 터무니없는 결과에 피가 머리 꼭대기로 역류했다. 차명환 부인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온몸으로 달려들었다.
“도, 도련님! 제가 잘못 들은 건 아니죠? 꿈꾸는 거 아니죠? 코카인 씨가 해냈어요! 코카인 씨가 그이를 살렸어요!!”
이석은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저도 꿈꾸는 것 같군요.”
그때 차 회장과 시선이 맞부딪쳤다. 위태롭게 당겨진 두 개의 시선이 서로를 겨냥했다. 떠보듯 시험하듯, 늙은이는 자신의 표정 변화를 주시했다. 당장 저 늙은이의 목을 부러트리고 차명환의 숨통을 졸라매, 피를 보지 않으면 꼭지가 돌 지경이다. 아니, 아직 아니지. 아무리 늙은 사자라 해도 백수의 제왕임은 변함없다. 한방에 목덜미를 물어뜯어야 치명상을 입힌다. 이석은 작위적인 미소를 입에 걸었다. 턱뼈가 삐걱거리도록 어금니를 물었다.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그것은 이 순간 마지막으로 긁어 담은 이성이었다.
“그래. 너도 그동안 수고했다.”
차 회장은 퍼석하게 화답했다. 양 박사는 은테 안경을 올리며 감정을 추슬렀다.
“당분간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암이 완치됐다 해도 재발 위험이 있고, 한동안 차 대표가 두통과 환각 등 이상증세를 보여서 심신이 허약한 상태입니다. 아직 원인은 모르지만 찾아내는 것도 시간문제일 겁니다.”
늙은이와 차명환 부인은 주치의의 말에 집중했다. 이석은 자리를 벗어났다. 복도를 뒤흔드는 구두 소리는 환청 같다. 한발 한발 내뻗는 걸음마다 곤두박질하는 기분이다. 엘리베이터에 당도했다.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설 때였다.
“도련님! 잠깐만……!”
차명환 부인이 달려와 앞을 가로막았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기쁨과 서운함이 교차했다.
“벌써 가시게요? 그이 깨어났을 때 도련님이 계시면 좋아할 거에요.”
“이런 날 샴페인이 빠지면 안 되잖습니까.”
“그런 건 비서를 시켜도…….”
“즐거움을 넘겨줄 수야 없죠.”
“도련님! 저기……!”
안으로 들어가는데 여자가 자신의 팔을 붙잡았다. 이석은 몸에 닿은 손을 잡아 뒤로 꺾었다.
“아악……!”
여자는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악랄한 손아귀에 빨래같이 매달렸다. 이석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여자에게 다가갔다.
“나를 보면 아무리 밑이 젖어도 때와 장소는 가려야죠.”
여자는 창백해진 낯짝으로 입술을 떨었다. 이석은 눈을 휘며 달콤하게 웃었다.
“남편한테나 가 봐요. 이제는 만족시켜줄지 모르잖습니까.”
여자를 내팽개치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미끄러져 갔다. 금속 문이 닫히고 시야를 차단했다. 형광등이 매달린 복도 천장도, 얼빠진 여자도.
차에 오르자마자 억눌렀던 분노를 폭발시켰다. 핸들을 후려쳤다. 과격한 반동에 차체가 요동했다. 경적 소리가 주차장을 메웠다. 죽을 날만 받아놓았던 차명환이다. 놈은 무덤 속에 기어들어갔어야 했고, 늙은이는 그 주검 앞에 무너져야 했다. 손이 얼얼하도록 후려쳐도 불덩이가 다스려지지 않는다. 흉폭한 호흡소리가 꼬리 늘어트린 경적음에 뒤섞였다. 이석은 욕을 씹으며 머리카락을 쥐어뜯듯이 넘겼다. 주머니를 더듬어 담배 케이스를 찾았다. 운전석 시트에 몸을 늘어트리고 독한 담배연기를 빨아들였다. 코카인이 차명환을 정식으로 맡은 건 한 달도 채 못 된다. 그 당시 이미 늦어 가망 없다고 코카인 입으로도 단언했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감상용으로 노래하라 했으나 오늘의 결과는 코카인이 그 명령을 거역했다는 의미다.
“깜찍한 녀석이란 말이야.”
이를 갈며 담배 필터를 씹었다. 그때 듣다 만 강기하의 도청 녹음 파일이 떠올랐다. 성재가 와서 듣는 걸 중단한 뒤 잠깐 잊고 살았다. 폰을 꺼냈다. 메일함을 뒤져 녹음 파일을 열었다. 가죽 시트에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앞서 들었던 내용을 되새김질하며 다음 내용으로 넘어갔다. 지긋한 여자 음성이 들렸다.
[텔크시오페를 데리고 있다고 했죠? 그 애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할 거에요. 힐러의 단점은 중독성인데 유형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어요. ‘아그라오페메’는 중독이라기보단 건강식에 길드는 것과 유사한 반응이에요. 몸이 좋은 에너지를 계속 원하는 거죠. 하지만 ‘텔크시오페’는 하나의 목소리에 치유와 살상의 요소가 들어서, 치유와 동시에 중독이 시작되죠. 한번은 말기 암 환자들을 실험한 적 있는데, 텔크시오페의 노래로 한 달 안에 완치됐지만 대신 두통과 이명, 기억력 감퇴와 발작 등 후유증에 시달렸죠. 환자들은 심신의 균형이 망가지는 걸 알면서도 들을 수밖에 없다더군요. 그래서 텔크시오페는 목소리를 발현할 때 정교한 조율이 필요해요. 정제되지 않은 힘을 남발하면…….]
강기하와 여자는 대화를 나눴다. 곧이어 노랫말 같은 시구가 흘러나왔다.
[그들은 암초에 앉아 노래로 혼을 빼앗아요. 아름다운 모습과 노래로 뱃사람을 유혹하지만 암초 아래는 희생자의 뼈와 살이 썩고 있죠. 밀랍으로 귀를 막지 않으면 세이렌의 먹이가 됩니다.]
녹음 내용은 놀라웠다. 그간 몰랐던 힐러의 비밀이 담겨 있었다. 힐러의 유형은 총 세 가지. 아그라오페메 -치유만 가능한 힐러, 텔크시오페 -치유와 살상이 모두 가능한 힐러, 리게이아 -살상만 가능한 힐러. 텔크시오페의 비명 소리에 가공할 살상의 힘이 있으며, 힐러는 힘을 쓸수록 수명이 단축된다는 것. 그리고 죽은 영혼까지 지옥에서 불러오는 완벽한 힐러. 완벽한 힐러는 그 세 가지 유형 중 어디에 속하는지는 정확지 않다. 아니, 존재 자체가 불투명하다. 코카인은 차명환을 완치시켰지만 엄밀히 따지면 완전히 죽은 목숨을 살린 건 아니다. 그렇다면 그는 뛰어난 텔크시오페일 뿐, 완벽한 힐러는 아니란 말인가.
차명환이 며칠간 보였던 고통과 몽유 증세, 자신의 갑작스러운 두통과 이명 증상은 중독 후유증의 하나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예전부터 자신에게 있던 고질적 두통은 오히려 코카인 노래를 들었을 때 가라앉았다. 그렇다면 갑자기 찾아온 이상 증세는 뭐란 말인가. 사고 회로가 뒤엉켰다. 담배를 비벼끄고 새 담배를 꺼내 잇새에 물었다.
코카인의 실체가 뭐든 힘의 한계치가 어디든, 기특한 짓을 했으니 상을 빠트리면 서운하겠지. 얼굴도 반반하고 아직 뒷구멍도 깨끗하니 약물 중독자 소굴에 던져줘 실컷 포식시킬 것이다. 그다음 세 치 혀를 뽑아내고, 성대를 불로 지져 노래는 꿈도 못 꾸게 하겠다. 오장 육부가 뒤집히도록 살기가 뱃속에서 들끓었다. 지금 이 순간 고양이의 골골거림이 있다면 바닥 치는 이 기분에서 해방될 것 같다. 집에 돌아갔을 때 도도한 야묘가 갸르릉거리며 부드러운 머리털을 손바닥에 비벼온다면 금상첨화겠지. 물론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럴 리 만무하지만. 한번 의식하자 입속이 급격하게 메말랐다. 백미러에 비친 자신은 무심코 웃고 있다. 벼랑에 발을 헛디뎌 추락사하기 직전인데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닌가. 그러나 굳이 웃음을 물리진 않았다.
누가 먼저 축배를 기울일지는 끝까지 가봐야 안다. 시나리오 전체가 뒤틀린 게 아니라, 하나의 시나리오가 제외된 것뿐이다. 이제 남은 시나리오 중 어떤 걸 선택하느냐가 관건이다. 성재가 차명환 소식을 들으면 잔소리 꽤나 퍼붓겠군. 그는 혀를 찼다.
차 키를 구멍에 쑤셔 박고 시동을 걸었다. 기어를 움켜잡아 난폭하게 꺾는 찰나였다. 기묘한 위화감에 멈칫했다. 기어에 얹은 손을 들었다. 느릿하게 팔을 폈다가 다시 접었다. 뒤늦게 팔을 압박하는 붕대가 느껴졌다. 셔츠 손목을 올리자 고양이가 감았던 붕대가 어설프게 감겨 있다. 매듭을 풀고 붕대를 풀어헤쳤다. 붕대가 바닥에 떨어지고 팔뚝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싸늘한 기류가 차 내부를 휘돌았다. 백미러에 갇힌 남자의 얼굴은 전에 없이 굳었다.
차이석은 새벽부터 전화를 받고 급히 외출했다. 어디에 간다는 말도, 언제 온다는 말도 없었다. 그러나 어쩐지 기분은 좋아 보였다. 아침을 먹으려고 거실에 나왔다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침실은 물론 거실이며 욕실까지 거울이란 거울이 죄 없어진 것이다. 혹시나 현관 밖을 내다봤는데 역시나 경호원들까지 모조리 갈아치웠다. 행동력 하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걸 다시 한번 입증한 순간이었다. 야바는 홈바에 앉아 늦은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머리 수술 상처가 아물면 불알을 채우러 간다. 가짜가 아니라 진짜를. 이제 진짜 남자가 되는 거다. 물론 인공 고환이지만 노래나 벌레로 채우는 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인터넷으로 알아봤더니 시술 시간도 짧고, 회복기간도 일주일이면 된다고 한다. 세상엔 의외로 비슷한 아픔을 가진 남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자신의 아픔이야말로 진짜이다. 이제 자신도 공중 화장실 변기 앞에서 당당히 지퍼를 내릴 수 있다. 병균이 득실거리고 시끄러운 애들이 짜증날테지만 공중목욕탕에도 꼭 가볼 거다. 음낭에 담아두었던 차이석의 숨결과 혀의 마찰음은 다른 데로 이사시켜야 한다. 바로 옆집인 사타구니나, 겨드랑이가 좋겠다.
심장이 수시로 울렁거려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했고 항우울제로 겨우 진정시켰다. 항우울제 색깔이 바뀌었다. 전엔 와인빛 색깔이었는데 이젠 어두운 물빛이었다. 예전 것보다 좀 더 달달했고 물도 필요 없어 먹기 편했다. 차이석은 브로커가 추천한 신약이라고 했다. 항우울제를 쪽쪽 빨아먹으며 집을 탐방했다. 그가 집을 비우면 하는 유일한 취미활동이었다. 얼마 전 차이석한테 서재에서 놀아도 되냐고 물었더니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서재 문을 열자마자 책 냄새가 콧잔등을 찔렀다. 벽면 전체는 모두 천장까지 뻗은 책장이 자리했고 경제학, 인문학… 눈살이 찌푸려지는 책만 빼곡했다. 채광 좋은 창으로 빛 한 장이 융단같이 깔렸다. 불현듯 책장 한켠에서 은빛 물체가 반짝거렸다.
“아.”
예전에 자신이 빼내온 DVD였다. 이걸 차이석에게 넘겨줬던 날, 머리에 칩이 있다는 걸 확인했고 그가 무너지는 걸 처음으로 보았다. 당연히 버렸을 줄 알았다. 차이석은 이 영상을 확인했을까? 설마 기념으로 간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야바는 책장을 손톱으로 긁으며 DVD를 힐끔거렸다. 딱히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저 반짝거리는 것이 자신에게 윙크를 던지며 유혹했기 때문이다. 그가 오기 전에 살짝만 보는 거다. 살짝만. DVD에 적힌 날짜 중 제일 최근 것을 골라 일어섰다. 문득 책장 아래에 서류 봉투들이 발길을 잡아맸다. 서류 봉투 언저리엔 [파라디소] 로고가 박혀 있었다.
기하는 파라디소 VVIP들한테 고가의 상품권이나 공연 S석 티켓을 보내기도 한다. 차이석도 그간 뻔질나게 출입했으니 받았을 터다. 그러나 VVIP 고객용 봉투는 붉은색에 금박 로고인데 이건 노란색 바탕에 검정 로고만 있는 업무용이었다. 그게 의아해서 쉽사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뭔지만 보려고 하나를 빼내자 서류 더미가 와르르 쏟아졌다. 보낸 사람은 역시 기하였고 받는 사람은 장현식이었다. 장현식이 누구지?
서류봉투는 10년 전부터 해서 최근까지 날짜가 찍혔고 주기적으로 보낸 건지 수십 개에 달했다. 모두 열어보지도 않고, 오랜 세월 방치한 흔적이 역력했다. 그 중 유일하게 열어본 봉투는 10년 전쯤에 보낸 것이다. 벌어진 틈에서 서류가 머리를 삐죽 내밀어 약 올렸다. 아무래도 오늘 일진이 사나운지 가는 곳마다 유혹의 손길이 뻗쳤다. 남의 물건에 함부로 손대는 건 치졸한 짓이지만 하는 수 없다. 이렇게 눈에 띄게 한 게 나쁜 거다. 열려 있는 봉투를 끄집어냈다. 종이 제일 위에서 ‘파라디소 수입 지출 내역’이라는 글씨가 보였다. 그 아래 도식표엔 세금, 여타 경비 내용으로 채워졌다.
왜……. 머리가 멍해졌다. 기하는 분기별로 수입 내역과 업무 현황을 작성해 실소유주한테 보고했다. 그때가 제일 정신 없는 시기라 기하는 가게에 소홀했고, 가수들의 개 목줄이 느슨해지는 기회이기도 했다. 이런 걸 기하가 보냈다면 ‘장현식’이란 사람이 실소유주란 걸까? 그런데 왜 이걸 차이석이 가지고 있지? 뜯지 않은 나머지 봉투도 모두 같은 모양이니 내용물도 그럴 거다. 가파른 심장 고동 소리가 한 곳으로 사고를 몰아갔다. 야바는 머리를 세차게 도리질했다. 남의 비밀을 함부로 캐내면 불행해진다는 걸 10년 전에 깨달아놓고 아직도 정신 못 차렸나 보다. 금기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자에겐 참혹한 화형뿐이다. 침을 삼켰다. 설마 이렇게 되도록 그가 덫을 친 건 아니겠지? 푸른 수염이 아내에게 방을 마음껏 봐도 좋다고 하며 열쇠 꾸러미를 쥐여 줬던 것처럼. 이 방에 있는 비밀은 저 문턱을 넘어가면 안 된다. 다신 이 방에 오면 안 된다. 여긴 푸른 수염의 비밀 방이다.
마음이 급해졌다. 봉투를 제자리에 두었다. 순서는 모르겠다. 매듭 묶는 모양까지 기억했던 반푼이처럼 그도 병적으로 봉투가 놓인 순서를 기억하는 건 아니겠지? DVD도 원래 자리에 놓으려고 몸을 돌릴 때였다. 야바는 벼락을 맞은 양 몸을 떨었다. 환영을 본 줄만 알았다. 어떤 인기척도 없이 서재 문 앞에서 차이석이 서 있었다. 눈을 감았다가 뜨지 않았다면 실물 크기의 입간판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의 코트에 묻어온 찬 기운에 오한이 들었다. 숨을 추스르며 목소리를 밀어냈다.
“왜 인기척도 없이 들어와?”
돌아온 건 침묵이었다. 차이석은 무표정하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그는 막 누군가의 목을 치고 온 눈빛이었다. 혹은 누군가의 멱을 따기 직전인…….
“니가 서재에서 놀아도 된댔잖아. 아무것도 안 만졌어.”
무심결에 눈길을 피했다. 목덜미에 달라붙는 시선은 집요했다. 손끝이 조금 떨렸다. 여차하면 그가 야만인으로 바뀌어 밤마다 자신을 괴롭힌다는 걸 까발릴 작정이다. 그럼 입이 열 개라도 할말 없겠지. 그런데 차이석이 믿을지 의문이다. 유일한 목격자는 요망한 것뿐인데 할 줄 아는 거라곤 혓바닥 날름거리는 것과 발목에 치대다 걷어차이는 것밖엔 없다. 문을 가로막은 존재가 숨줄을 졸랐다. 야바는 아랫입술을 씹으며 차이석의 코트 단추를 노려보았다.
“비켜.”
“차명환이 완치됐어. 암 덩어리가 깨끗이 없어졌다더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누가, 뭐?”
서늘한 시선이 망막에 부대꼈다.
“차명환의 암이 완벽하게 나았어.”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유심히 보았다. 술 냄새도 안 났고, 마약을 한 것 같지도 않았다.
“졸음 운전하다 왔어?”
그는 웃지 않았다. 차명환 일로 농담할 그가 아니다. 그가 얼마나 이 일에 공들였으며 태령을 원하는지, 차명환을 짓밟고 싶어하는지 알고 있다. 심상치 않는 표정은 그 때문이었나 보다.
“……진짜야? 어떻게? 오늘내일 하던 애가 무슨 재주로…….”
그 순간 제 혀를 깨물 뻔했다. 상식적으로 설명 안 되는, 경이로운 기적을 일으킬 사람은 코카인뿐이다. 코카인은 차명환을 힐링 하면서 갖은 모멸을 당했다. 차이석도 예전과는 훨씬 못 미치는 반응을 보였다. 기적의 목소리네 뭐네 하는 칭송에 스스로를 가둬 빛 좋은 개살구라 여겼는데 다 죽어가는 암 환자를 살리다니…. 그 정도로 성장했으리라곤 상상 못 했다. 역시 가증스러운 인간이다. 약한 소릴 해서 미리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고 보란 듯이 고쳤다. 차이석이 뒤에서 칼을 갈아도 현재 실세인 차 회장 쪽에 붙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게 틀림없다. 코카인은 힐러로서 위대한 업적을 남겼으며, 길이 남을 병신 짓을 했다. 차이석이 차명환을 살린 인물을 가만둘 리 없으니까. 그러나 좋은 상황이든 아니든 코카인이 차이석과 엮이는 자체가 시궁창 물을 들이켜는 기분이었다. 이어 뒤늦게 드는 생각은,
“그럼 너는 어떻게 돼?”
“글쎄, 어떻게 될까…….”
그는 중얼거렸다. 자신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외투를 벗었다. 뱀 허물을 닮은 코트가 바닥에 떨어졌다. 일상에서 보는 흔한 행동인데도 까닭 모를 초조함이 몰아닥쳤다.
“그런데 차명환 상태가 썩 좋은 것만은 아니야. 코카인한테 중독돼서 말기 암 환자 못지않은 고통에 시달리고 있으니까. 나 역시 요즘 들어 기현상이 생겼고.”
그래, 바로 이런 것들. 어떤 이유에서건 코카인과 그가 엮이는 치가 떨리도록 싫은 상황. 차이석은 자신의 머리에 박힌 족쇄를 풀어준 대가로 밤마다 저주에 걸린다. 그 저주는 코카인만이 풀 수 있는지 모른다. 머리가 차가워졌다.
“그럼 니들 둘이 손잡고 가서 코카인한테 고쳐 달라면 되겠네.”
“별로 안 내키는군. 천사처럼 달콤하지만 악마도 함께 품은 목소리니까. 뼈와 살이 뜯어먹히는 걸 알면서도 들을 수밖에 없는.”
늪지대의 포식자처럼 그는 소리 없이 미끄러져 왔다.
“너와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 나는군.”
“…….”
“그땐 코카인의 대용품이 필요해서 너를 선택했지. 대용품은 한달 여간 차명환에게 노래해 주다가 가짜라는 걸 들켰어. 그 뒤로도 차명환의 고집으로 일을 계속했고 코카인의 힐링도 병행했지. 덕분에 코카인은 차명환을 완치시켜 내 뒤통수를 후려쳤고. 내심 힐러를 불신했는데 상상을 뛰어넘는 힘이야. 너무 황홀해서 쌀 지경이지.”
질 나쁜 음성은 기계처럼 차가웠다. 야바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제야 기억났다. 그가 처음 연극 놀음을 제의했을 때 일이 틀어지면 파라디소와 연관된 사람은 모조리 보복한다고 경고했다.
“나는 처음에 싫다고 했어. 싫다는 사람 억지로 끌어들인 건 니들이야. 네 입으로 나는 죽은 사람이라고 했잖아. 나는 이제 파라디소하고도 관계없어.”
너는 그때 나를 처음 봤겠지만 나는 훨씬 전부터 너를 보고 있었어! 너는 코카인의 대용품이 필요했겠지만 나는, 그렇게라도 너한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
서러웠다. 그에게 특별한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가 고양이 취급하는 게 싫지만은 않았다. 이제 그마저 위태로운 기로에 놓였다. 거실로 걸어가자 그가 팔을 붙잡았다. 손을 털어내기가 무섭게 다시 옭아매는 악력이었다. 표정없는 냉혈동물의 시선이 관통했다.
“그런데 이상하지? 차명환은 그렇다 치고, 나는 몇 주나 코카인 노래를 멀리했는데 왜 새삼스럽게 없던 증상이 생겼을까? 예전 파라디소에서 코카인 노래를 들었을 때도 이런 후유증은 전혀 없었는데 말이야.”
“차명환이 살아나든 말든, 너희들이 무슨 증상이 있든 말든 따질 거면 코카인한테 가서 따져. 나는 모르니까 니들 셋이 알아서 하란 말야!”
“모르면 곤란해. 차명환의 완치, 놈과 내가 겪는 기현상, 모두 코카인이 중심에 있어. 하지만 사람들은 화려한 빛에 눈이 멀어 다른 게 존재한다는 걸 놓치곤 하지.”
길쭉한 손가락이 총구처럼 자신을 겨냥했다.
“그 뒷면에는 빛만큼 존재감이 뚜렷한 그림자도 있다는 걸 말이야.”
차이석은 눈을 내리깐 채 셔츠 손목의 단추를 풀었다. 셔츠 손목 단을 끌어올리자 붕대 감긴 팔뚝이 드러났다. 어젯밤 그가 샤워 부스를 깨부수다가 다친 자리였다.
“이 상처는 기억하겠지. 너는 내게 약을 발라줬고, 붕대를 감아줬어.”
그의 목소리가 빠르게 물러나 기습처럼 덮쳤다.
“그다음엔 자장가를 불러줬지.”
갑자기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의도를 종잡기 어려웠다. 그는 철저히 감정을 읽히지 않는 심판관의 눈이었다.
“……그 얘기가 지금 왜 나오는데?”
그는 자신의 말이 안 들리는 듯 붕대만 풀어냈다. 나선형으로 돌아가는 움직임은 느렸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치밀하게 단계를 밟아가듯 그는 자신의 숨을 죄며 어딘가로 몰아갔다. 그리고 겹겹이 감겼던 붕대가 바닥에 떨어졌을 때였다.
“아.”
야바는 탄성을 뱉었다. 분명히 오늘 새벽에 찢어졌던 상처가 보이지 않았다. 붕대에 묻은 핏자국만이 유일한 흔적이었다. 어째서…. 미처 답을 내기도 전에, 그는 자신의 손목을 감싸 올렸다. 그제야 자신이 내내 DVD를 들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는 DVD를 가져갔다. 은빛 물체를 반으로 박살 냈다. 날이 곤두선 조각에서 스펙트럼 광선이 반사되어 눈을 찔렀다. 그 흉기를 닮은 눈빛이 날아와 박혔다. 칠흑의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잡설은 걷어치우고 확인해보면 되겠군. 그림자의 진면모를.”
삽시간에 사고가 하얘졌다. 기하와 코카인은 이미 당했을 거다. 그라면 단박에 목숨을 끊어주는 아량은 베풀지 않을 터다. 어서 도망쳐야 한다고 본능이 절규했다. 야바는 그를 밀치고 달아났다. 그는 자신의 팔뚝을 잡아 벽에 고정시켰다. 짐승의 이빨 같은 파편이 직선으로 올라갔다. 추락 직전의 빈사상태처럼, 온몸의 피가 휩쓸려나갔다. 정점에서 멈췄던 잔인무도한 흉기가 거침없이 하강했다. 체온이 고꾸라졌다. 이제 자신 차례가 돌아온 거다. 분명히 그러리라 생각했다. 의식이 따라갈 새도 없었다. 추락하던 흉기는 예상을 깨고 방향을 틀었다. 파고든 곳은 그의 목덜미였다. 스스로의 목에 조각을 찌른 채 그는 눈을 일그러트렸다. 그리고 팽팽하게 이빨을 세운 조각으로 주저 없이 목덜미를 그었다. 꽉 짜인 살점이 아가리를 벌렸다. 피는 무섭도록 뿜어 나왔다. 그의 옷을 적시고 자신의 얼굴에 튀었다. 야바는 피를 뒤집어쓴 채 파랗게 질려 있었다. 기이한 신음을 지르며 그의 목을 눌렀다. 제 손가락 틈에서 피가 울컥울컥 나왔다. 피부를 부식시키는 염산처럼 지독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뜯어내고 벽에 밀어붙였다. 한 마디 한 마디 토막 쳤다.
“노래해.”
“미쳤어?! 너 진짜 미쳤어?!”
속박을 뿌리치고 경호원에게 도움을 청하려 했다. 현관 앞에서 붙잡혀 거실로 끌려왔다. 구급상자를 찾으러 갔다. 그는 상자를 빼앗고 안에 있는 약을 쓰레기통에 쑤셔 넣었다. 다시 자신을 거실로 끌고 왔다. 야바는 손아귀에서 벗어나 전화기 쪽으로 달려갔다. 그는 전화기며 인터폰까지 때려 부쉈다. 헝겊인형 마냥 몸이 들려 벽에 처박혔다. 바닥엔 핏길이 그려졌다. 그의 손은 피범벅이었다.
“다른 건 절대 안 돼. 오직 네 노래로만이야.”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피 나잖아! 이거 놔! 이거 놔! 으읏……!”
차이석은 자신의 양팔을 위로 결박하고 가랑이에 다리를 쑤셔 넣어 하체를 눌렀다. 피가 튄 자신의 입술을 혀로 농염하게 쓸었다. 그의 입술은 피로 번들거렸다.
“어서. 내 피가 곧 바닥나니까.”
“빨리 병원에 가자! 왜 그래? 진짜…! 죽고 싶어?!”
그는 미간을 일그러트리며 굴곡진 숨소리를 토했다. 단단히 틀어쥔 그의 눈은 한발도 물러섬이 없었다. 갈라진 살에서 피가 섬뜩하도록 쏟아졌다. 그가 방금전에 뭘 하라고 했지? 자신이 뭘 해야 한다고 했지? 수위 조절 못 하는 극단적인 행각에 실신할 지경이었다. 야바는 숨을 헐떡였다. 입속으로 짜디짠 수분이 흘러들었다.
“내가… 노래하면…… 병원에 갈 거야? 구급차…부를 거야……?”
머릿속은 만신창이었다. 인지할 수 있는 건 목줄기에서 맹렬히 뿜어내는 핏물뿐이었다. 곧 피가 바닥난다. 모조리 빠져나간다. 자신이 노래해야만 이 끔찍한 상황이 일단락된다면,
“미친놈아! 미친놈아……!!”
쇳가루 같은 음성으로 소리쳤다. 그렇게 눈을 닫아 매고, 팔다리를 결박당한 채 노래 불렀다. 제목은 기억 안 났다. 음정은 어긋났고, 가사는 두서없이 난도질 쳤다. 빨리! 빨리! 최대한 빨리 노래를 씹어 뱉었다. 어서 이 상황을 끝내고 저 미친 남자를 병원에 끌고 가야 한다. 가서 치료만 받고 나면 곧바로 저 목을 졸라 버릴 거다! 절대 가만 안 둘 거다! 온통 피 냄새와 암흑뿐이었다. 제 목소리는 찢겨진 살점처럼 끔찍했다. 영겁 같은 찰나가 지났다. 노래가 막바지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피비린내 나는 손아귀가 자신의 턱을 움켜쥐고 억지로 들어 올렸다. 어깨를 흠칫 떨며 남은 노랫말을 삼켰다. 그 손길에 이끌려 힘겹게 눈을 떴다.
차이석은 이미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숨소리도 사고도 정지된 듯, 그는 미동조차 없었다. 흔들리는 눈빛에 치 떨리는 냉철함은 사라졌다. 다만 경악만이 팽배할 뿐이었다. 기침 소리로도 산산조각 날 듯한 공기였다. 야바는 꾸역꾸역 눈을 내렸다. 차이석의 입술 언저리와 그 아래, 강인한 목선……차례로 더듬어 가는 순간이었다. 숨을 멈추었다. 세상 모든 잡음과 움직임도 정지했다. 피로 낭자한 목덜미… 그곳의 상처는 흔적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