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34화 (34/42)

힐러-track 32

야바가 힐러라고 확신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10년 전 야바가 들려줬던 교회 누나 이야기.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본능적으로 야바가 자신과 동류라고 느꼈다. 노래를 듣고 사라진 두통, 야바의 노래를 찾았던 교회 누나는 자신의 노래에 목메던 마을 주민의 초창기 모습을 닮았었다. 그리고 가수들의 두통과 이명 증상. 야바가 사장에게 끌려 와 조금씩 적응해갈 즈음 노래 연습에 몰두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 무렵 아이들과 레슨 교사는 단체로 심한 두통과 이명에 시달렸는데, 자신의 노래를 듣고 증세가 사라졌다. 자신의 노래는 중독 현상이 있지만 두통과 이명은 없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야바를 의심했다. 야바는 종종 규칙을 어겨 체벌 창고에 끌려갔고 어느 순간 완전히 입을 닫았다. 사람들도 두통을 호소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차명환의 암. 차이석은 자신에게 차명환을 치유 시 감상용으로 노래하길 명령했다. 그러나 누구도 모르는 사실이 있다. 차이석이 그런 요구를 하기 훨씬 이전부터 차명환에게 감상용으로 불러주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힐링용으로 했던 건 차명환을 정식으로 맡았던 첫날뿐이었다. 단 한번의 힐링용 노래로 온몸을 점령한 암 수치를 그만큼 떨어트리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 야바의 힘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비밀리에 이 일을 진행했던 건 야바가 어느 정도인지 시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바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무의식중에 각성했든 어떤 계기가 있었든, 나날이 만개하는 야바를 지켜보는 건 고문이었다.

그런데 사장은 왜 야바가 힐러라는 걸 몰랐을까? 사장이 야바를 테스트했던 건 거세한 뒤였다. 그 무렵 야바는 힐러로서의 힘이 채 개화하지 않은 상태였고, 거세의 트라우마로 힘을 무의식적으로 봉쇄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사장의 레이더망을 피했다고 밖엔 설명할 게 없다. 그 뒤로도 모든 관심은 자신에게 집중됐고 야바는 변방에 처박혔다. 그런 야바를 보며 내심 안도했던 스스로의 모습이 있었다. 기어이 야바의 룸메이트를 자처했던 건 누구도 야바의 능력을 몰랐으면 했던 이유였다.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지금은 떠오르지 않았다. 졸렬한 이 마음을 자비로 위장하면 이 엄청난 비밀이 묻히리라 생각했다. 야바가 차이석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실내 온도는 몹시 낮았다. 시체 부패를 지연하려고 드라이아이스에, 이 추운 날 에어컨까지 가동했기 때문이다. 사장은 새로운 힐러가 존재한다는 사실보다, 저 시체가 야바가 아니란 사실에 충격받은 듯했다. 그는 소싯적 마약 밀매와 살인도 서슴지 않던 밑바닥 인생이었다. 비록 바지사장이지만 누구보다 권력에 대한 포부가 크며 그걸 실현할 배짱도 두둑한 인물이다. 그런 남자가 지금은 연인을 따라 순장도 마다치 않을 몰골이다. 폐인이나 다름없는 꼴을 보니 오랜 세월 가슴에 썩어 있던 체증이 조금 내려가는 기분이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사장이 막다른 골목에 내몰려 자신의 손을 잡기를.

흔들리던 사장의 눈동자는 곧 냉정함을 찾았다.

“방금 뭐라고 했지? 내가 잘못 들었나?”

코카인은 대답했다.

“사장님이 찾는 새로운 힐러가 어딨는지 안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그 힐러는 저를 뛰어넘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는 부와 권력을 사장님께 안겨 주겠죠.”

“전국을 뒤져도 보이지 않았는데 네가 알고 있다고? 그래, 새로운 힐러가 누구지?”

사장은 예상대로 흥미를 보였다. 부와 권력에 눈먼 인간만큼 다루기 쉬운 부류는 없다. 그러나 쉽게 넘겨줄 리 만무하지.

“그 힐러를 손에 넣고 싶다면 제게 약속하셔야 합니다.”

코카인은 손가락으로 제 머리를 가리켰다.

“첫째, 제 머리에 박힌 칩을 제거해 주세요. 둘째, 그 힐러를 넘겨 드리면 제게 영원한 자유를 주세요. 그럼 제가 직접 그 힐러를 배달해 드리죠.”

사장은 자신을 갈아 마실 듯한 눈이다.

“거래의 기본도 모르는 녀석이군. 네가 가진 걸 제값에 팔고 싶으면 혓바닥만 놀릴 게 아니라, 물건을 확인시켜 줘야지. 아니면 그만한 가치가 있는 담보를 내걸던가.”

사장은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와 말했다.

“칩을 제거해? 네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어떻게 믿고? 이 시체 옆에 눕고 싶지 않으면 내 심기를 안 건드리는 게 좋을 거야. 다른 힐러가 어딘가에 있다는 것쯤은 나도 알아. 그동안 네가 거쳤던 사람 중 하나겠지. 그렇다면 뻔한 거 아닌가?”

“사장님은 이미 가수들을 테스트하셨고, 없다는 걸 확인하셨잖습니까? 그럼 제가 만났던 손님 중 하나일까요? 아니면 제가 스쳐 갔던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 확인하실 생각입니까?”

사장은 눈을 부라리며 입을 다물었다. 심장은 진정될 줄 몰랐다.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일이고 기다렸던 순간이건만 사장을 홀로 상대하는 건 벅찬 일이다. 주먹을 움켜쥐었다. 안으로 말린 손톱으로 손바닥을 누르자 차츰 떨림이 잦아들었다.

“역시 리모컨 없이는 저를 상대하기 두려우십니까?”

코카인은 입꼬리를 잡아 비틀었다.

“야바가 살아 있다는 걸 알아낸 건 접니다. 제가 아니었다면 사장님은 언제까지고 이 시체를 끌어안고 폐인이나 다름없이 지내셨겠죠. 아무리 막 다루는 개라도 가끔 적절한 포상을 주지 않으면 주인을 물어뜯습니다.”

사장은 꺼칠한 턱을 쓸었다.

“대체 뭐가 불만이지? 그 나이에 구경 못할 부와 명예를 얻었고 모두 너를 신처럼 떠받들었어. 다른 가수들과는 차원이 다른 대우를 해줬는데 자유를 달라니 섭섭하군. 여긴 천국이야. 바깥세상이 오히려 지옥이라고.”

“저도 여기가 천국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었다. 자신을 향했던 찬양의 목소리는 언제든지 비난의 목소리로 돌변한다는 걸 비로소 알았다. 불개미들은 꿀이 떨어지면 그 꽃마저 물어뜯는다. 사장은 뻔뻔한 감언이설로 포장했지만 이 수렁에서 벗어날 방법은 늙고 병들어 폐기처분 되거나 죽어나가는 것뿐이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야 한다면 기꺼이 그럴 것이다. 그 대가로 친구를 밀고해야 한다고 해도, 그보다 더한 짓이라 해도…….

“기약없는 시간 동안 노예로 살 바엔 차라리 머리통이 날아가는 쪽을 택할 겁니다. 제 목을 긋기엔 손가락만 한 유리 조각이면 충분합니다. 가면 리본으로 목을 매달 수도 있겠죠. 안 되면 혀라도 깨물 겁니다. 담보로 뭐가 있냐고 물으셨습니까? 그나마 사장님이 데리고 있는 힐러라도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일에 제 자존심, 인간으로서의 양심, 모든 패를 걸었습니다.”

코카인은 입술을 떨었다.

“칩이 먼저입니다. 사장님이 패를 받지 않으면 판을 뒤집어엎을 밖에요.”

사장은 쇠 덫의 이빨에 정강이를 물린 짐승의 눈을 했다. 코카인은 일어나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지금은 경황이 없으실 테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시겠죠. 결정 내리시면 언제든지 불러 주세요.”

임수는 문고리를 잡는 코카인을 제지했고, 우직한 표정으로 상사의 용단을 기다렸다. 기하는 그냥 보내라고 눈짓했다. 아직 칩이 박혔으니 꿈틀거려봐야 개천 안이다. 코카인이 나가자 여간해선 당황하지 않는 임수도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이게…야바가 아니라니, 새로운 힐러는 또 누구란 말이죠?”

기하는 시체와 서류를 번갈아 보았다. 처음 이 시체를 야바라고 믿지 않았듯이, 이제는 야바가 아니란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당시 사고 차량, 야바와 똑같은 신체 조건의 시체, 의심할 이유가 없었고 판단력도 상실한 상태였다. 그래,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꾸밀 법한 사고다. 야바의 칩을 없앨 시간이 필요했던 거겠지. 지금껏 엉뚱한 시체를 껴안고 있었다니 헛웃음만 나왔다. 절망이 사라진 대신 분노가 끓어올랐다. 사고를 위장하고 시체를 바꿔치기해? 감히 탈출을 꿈꿔?! 둘 다 가만 안 둔다! 기하는 욕을 씹으며 시체를 걷어찼다.

“미친 새끼!! 죽여버린다!! 반드시 죽여버린다!!”

난폭한 발길질에 썩은 살덩이가 드라이아이스와 뒹굴었다. 야바가 아니란 사실을 받아들이자 썩은 육신과 악취에 속이 뒤집혔다. 임수는 엉망이 된 바닥을 치우며 물었다.

“시체는 처리할까요?”

모든 내막을 알았다는 게 미친 새끼의 귀에 들어가면 더 강도 높여 경계할 게 틀림없다. 지금도 그 대가리에는 오만 가지 대비책이 준비돼 있을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절대 안 당한다. 차 전무, 그 미친 새끼. 반드시 뱃가죽을 갈라 내장을 뜯어먹고 만다. 기하는 안면 근육을 떨며 거친 숨을 골랐다.

“이왕이면 완벽하게 속아주는 게 좋겠지. 장례식 준비해.”

산을 등진 납골당은 죽은 자의 무덤치고 볼만한 경치였다. 평일 오전, 납골당을 찾은 조문객은 기하의 부하들과 가수들이 전부였다. 기하는 검정색 선글라스에, 검정 슈트를 차려입고 입관식을 지켜보았다. 엄숙한 분위기 가운데 가수들의 울음소리가 알음알음 들렸다. 부하들도 착잡한 표정이다. 코카인은 헤쉬쉬의 위로를 받으며 제법 연기를 잘해냈다. 회색빛 관은 닫혔지만 그 안엔 야바가 고이 잠들어 있다. 물론 가짜지만 기분은 꽤 그럴싸했다. 야바가 살았다는 사실을 아는 건 자신과 코카인, 임수가 전부다. 그리고 저기 누워있는 시체.

“사랑하는 친구에게……. 네가 죽고 나서 매일 밤 생각했어. 네게 잘해주지 못했던 장면만 생각나서 많이 울었어. 그곳에선 친구도 많이 사귀고, 외롭지 않게…….”

모르핀이 추모사를 읽다 말고 오열했다. 기하는 선글라스를 통해 코카인을 주시했다. 힐러는 힘을 쓸수록 명이 줄어든다. 코카인도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뜻이다. 스페어가 필요하다. 지분을 넘겨받아 돈은 차고 넘치지만 진정한 상류층으로의 도약을 위해선 권력이 필수다. 오만방자한 권력자의 마음을 빼앗는데 힐러만큼 제격인 건 없다. 그러나 대체 새로운 힐러가 누구란 말인가? 가수들을 다시 테스트했지만 역시 없었다. 이제 남은 건 야바 하나뿐이다. 큰 기대는 없다. 녀석은 이미 어렸을 때 테스트를 마쳤고 별 볼 일 없다는 걸 확인했으니까. 전혀 새로운 인물이라면… 혹시 야바의 형인가? 그러나 코카인만이 그 행방을 알고 있다. 그도 아니면 진짜 손님 중 하나란 건가? 성인임에도 힘을 가졌다는 건 강제든 자연적이든 거세했다는 의미다. 그 많은 손님들의 아랫도리를 까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꼼짝없이 코카인이 넘길 때만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인가. 노래나 부르는 인형이라고 생각했건만 제법 머리를 굴릴 줄 아는 놈이다. 물론 그래 봤자 태엽은 자신의 손에 있다. 칩을 제거해달란 말이지…….

납골당 1층에 화장한 유골을 보관하는 것으로 지루한 장례식이 끝났다. 기하는 차에 올라 담배를 물었다.

“병원 알아봐. 신경외과 쪽으로 잘하는 병원.”

“정말로 코카인의 칩을 제거해 주실 겁니까?”

임수는 무뚝뚝하게 물었다.

“알아봐. 이왕이면 최고 실력을 갖춘 놈으로. 주식명의개서는 오늘 신고한다. 차명환 건강이 악화 돼서인지 태령 주식이 많이 떨어졌더군.”

“알겠습니다.”

야바의 칩 신호가 최종적으로 끊어진 곳은 여기서 멀지 않다. 일단 거기서부터다.

“귀찮아. 귀찮아. 내가 왜 이런 걸 해야 하는 거야? 니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야바는 숨을 몰아쉬면서도 틈틈이 쏘아붙였다. 차이석은 힐끗 시선을 던졌다.

“말을 많이 할수록 네 몸만 힘들어. 입은 쉬게 하고 다리를 움직여 봐. 20분 남았어.”

“누구 맘대로 20분인데? 이젠 그만 할 거야. 기계 끌 거야.”

“손 맴매한다.”

“러닝머신 창밖에다 던져버릴 거야.”

“다리도.”

차이석은 단호히 책에 눈길을 떨어트렸다.

“19분 남았어.”

차이석은 얼마 전 러닝머신을 들여와서 하루 30분씩 걷도록 강요했다. 틈만 나면 보양식을 먹여대며 위장이 쉴 틈을 안 주면서 이 러닝머신은 또 뭔지. 살 빼라는 말을 돌려 말하는 게 틀림없다. 귀찮아. 짜증 나. 야바는 입술을 한 댓발 내밀면서도 다리를 멈추진 않았다. 하지 않으면 할 때까지 차이석이 괴롭히기 때문이다.

요망한 것은 러닝머신 레일 끄트머리에 대가리를 얹고 자신의 발끝을 관찰했다. 야만인한테 당했던 걸 아직 맘에 담아둔 건지, 요망한 것은 차이석 근처엔 얼씬도 안 했다. 요망한데다 속도 뱀 껍질 마냥 얄팍했다. 필름 끊어진 약쟁이에게 그런 시위는 아무짝에도 소용없다는 걸 저 미개한 것이 알 턱이 없다. 그런데 아침까지 홀쭉했던 파충류의 배가 불룩했다. 야바는 눈살을 일그러트렸다.

“저거 배가 왜 저래? 구두 먹은 거 아냐?”

차이석은 요망한 것에게 건성으로 눈길을 던졌다.

“궁금하면 한번 갈라서 확인해 볼까.”

살기를 느낀 뱀은 경계 모드로 돌입했지만 배에 든 구두 때문에 움직임이 둔했다. 차이석은 커다란 베개에 몸을 늘어트리고 책에 무서우리만치 집중했다. 그는 잠자기 전에 필히 책을 읽었다. 오랜 습관인 듯 의식하기 전에 몸이 먼저 가는 것 같았다. 그의 서재에 있는 책은 수천 권은 돼 보였고 받아보는 신문도 엄청났다. 변태 약쟁이가 독서라니 희한한 조합이었다. 야바는 변태 약쟁이의 정수리를 쏘아보며 발판 위를 걸었다.

“하아…하아…….”

이마에 땀이 맺히고 숨이 차올랐다. 워낙 운동과는 담쌓고 살아 그냥 다 귀찮고 힘들었다. 할딱이는 숨소리가 거실 구석구석에 울렸다. 문득 차이석의 시선이 이마에 엉겨붙었다. 그는 물끄러미 자신을 응시하다 책을 덮고 다가왔다. 러닝머신에 올라 뒤에 붙어섰다.

“나도 운동이나 해볼까.”

“내려가. 가서 책이나 마저 읽어.”

“이게 더 재밌어 보이는데.”

“그럼 니가 대신 남은 시간 채워. 책은 내가 대신 읽어 줄 테니까. 됐지?”

아래로 냅다 내려가려 하자 차이석이 손잡이에 양팔을 짚고 탈출로를 봉쇄했다.

“그럼 반반씩 나눠서 10분 어때?”

“…….”

꽤 구미가 당기는 제의였다. 야바는 군말 없이 몸을 돌려 발판을 걸었다. 그는 발이 얽히지 않도록 자신의 걸음에 리듬을 맞췄다. 그가 뒤에서 자신의 등을 손바닥으로 누르고, 양볼을 감싸 올렸다.

“시선은 앞을 향하고, 숨은 코로 들이쉬었다가 입으로 내쉬어. 발바닥 전체를 지면에 붙이면서 걸으면 다리 피로가 훨씬 줄 거야.”

맞은 편 창문에 비친 상반된 두 개의 그림자가 야경 위를 걸었다. 그의 화려한 육체는 게으름을 물리치고 쟁취한 전리품일 터다. 탄력적인 가슴이 자신의 등에 닿았다. 좀 더 앞으로 걸어가자 다시 달라붙었다. 그가 뒤에서 비웃는 것 같아 미칠 지경이었다. 차이석은 기계 손잡이를 양팔로 잡은 채 상체를 기울였다. 젖은 살덩이가 자신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스쳐 갔다.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가 낮게 말했다.

“어깨 힘을 빼.”

그의 입술이 귓불을 덮었다. 푹 퍼진 엉덩이에 그의 하체가 밀착됐다. 차라리 혼자 20분을 걷는 게 더 나았다.

야바는 운동을 마친 뒤 샤워하고 곧장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벽면 전체가 거울로 된 드레스룸을 노려보았다. 차이석의 집에 와서 창백한 남자는 한 번도 안 나타나 완전히 잊고 살았다. 그런데 어제 새벽 잠결에 눈 떴을 때 창백한 남자가 차이석 곁에 누워 있는 것이다. 그땐 너무 놀라 손쓸 틈도 없었다. 지금도 저 거울 뒤에 숨어서 공격할 틈을 노릴 터였다.

붉은 털실 공을 만지며 거울을 힐끔거렸다. 침대 위에는 정체불명의 물건이 굴러다녔다. 모두 차이석이 사온 것들이다. 색깔별로 된 깃털 막대, 방울 소리가 나는 털실 공, 레이저가 나오는 팬, 장난감 쥐……. 대체 용도가 뭔지 모를 것들만 잔뜩 사들였다. 털실 공 안에서 방울 소리가 약 올리듯 딸랑거렸다. 방울을 찾으려고 올을 풀자 침대는 금세 털실투성이가 되었다. 그때 샤워를 마친 차이석이 머리카락에 물기를 매달고 들어왔다. 그는 수건을 바닥에 던지고 침대로 들어왔다. 무게 중심에 침대가 기울었다. 그는 눈가를 일그러트리며 관자놀이를 지압했다. 부쩍 살이 빠진 그의 이목구비는 흡혈귀처럼 날렵했고 차가웠다. 그것이 더 퇴폐적으로 보였다. 야바는 물었다.

“머리 아파?”

“약간.”

그는 침대에 어질러진 털실과 물건을 바닥에 쓸어내렸다. 예고 없이 자신을 눕혀 양팔에 가두고는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가 불쑥 물었다.

“낮에 복도에 나갔다고? 왜지?”

아까 차이석이 오기 직전에 형수란 여자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인터폰으로 보았던 여자는 초췌해 보였지만, 치장에 잔뜩 공들인 듯했다. 여자가 경호원에게 쫓겨난 뒤 밖에 나가보았고, 복도에 경호원들이 4명이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차이석은 파라디소 사람들에게 자신이 죽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인식시키며 세상과의 단절을 강요했다. 자신이 현관만 쳐다봐도 예민해지면서 굳이 전화기를 없애진 않았다. 마치 자신이 어떻게 나오는지 시험하는 것 같았다. 경호원들의 용도는 외부의 침입을 막는 것만은 아닐지 모른다. 야바는 턱을 빳빳이 들었다.

“문이 있으니까 나갔지.”

“용접이라도 해야겠군. 아직 위험하니까 안 된다고 했잖아.”

“싫어. 복도에 나가는 것도 안심 못할 정도면 무능한 경호원부터 갈아치워.”

“나가지 말랬어.”

그의 음성이 낮아졌다. 야바는 눈에 가시를 바짝 세웠다.

“니들은 왜 그렇게 명령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데? 여기에 있는 건 내가 있고 싶으니까 있는 거야. 내가 나가고 싶으면 창문으로 뛰어내려서라도 나갈 거야.”

차이석은 고개를 삐뚜름하게 기울였다. 날 세웠던 눈빛이 뭉근해졌다.

“여기 있고 싶었나?”

눈가가 와락 더워졌다.

“아니.”

차이석은 허점을 잡아채듯 짓궂게 눈을 반짝였다.

“조금 전에 그렇게 말한 것 같은데.”

“내가 언제?”

“그랬어.”

“아니야.”

“그랬어.”

“아니야.”

차이석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았다가 잇새로 씹었다. 타액 같은 음성이 머리카락에 묻어나왔다.

“그랬어. 여기에 있고 싶다고…….”

그는 심을 세운 혀로 자신의 손바닥을 꾹꾹 누르고 치아로 살살 깨물었다. 그는 자신의 손바닥을 고양이 젤리라고 불렀다. 점막의 부대낌에 몸이 더워졌다.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그의 콧날과 눈동자의 열기에 눈이 시큰했다. “아니야.” 야바는 끈질기게 대꾸했지만 그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허벅지를 누르는 것은 발기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뒷목으로 손을 넣고 바지를 끄집어 내렸다. 서로의 성기를 맞잡아 비벼 올리고, 혀를 빼서 자신의 입술이 뭉개지도록 쓸었다.

“으응…….”

숨이 차올랐다. 절정으로 향하는 그의 손은 급박해졌다. 그의 눈빛이 잔혹한 빛으로 번들거렸다. 그는 요즘 예고 없이 차이석과 야만인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요즘 상태가 나쁘다. 그가 야만인으로 변하는 시간은 점점 앞당겨졌고 지속 시간은 길어졌다. 이대로 혼자 안고 가도 되는 비밀일까? 만약 어딘가 아픈 거라면 더 늦기 전에 치료가 우선 아닐까? 아니다. 자신은 잘못되지 않았다.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그가 잘못된 거다. 신음을 터트린 그가 구멍으로 다급하게 성기를 찔렀다. 안으로 토정액이 뿌려졌다. 그는 자신의 쇄골을 깨물며 성기를 물렸다가 부드럽게 삽입하기를 반복했다.

야만인은 오늘 새벽에도 나타났다. 차이석은 두어 시간쯤 잘 자나 싶더니 어김없이 야만인이 되었다. 눈동자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가 아니었다. 야바는 오늘 작심하고 선언했다. 물건을 부수거나 포악하게 굴면 입도 뻥끗하지 않겠다고. 그랬더니 야만인은 곧 얌전해졌다. 기특한 야만인에게 노래를 불러줬고 그는 다시 폭주한 뒤 잠들었다. 정액에 얼룩진 그의 아랫도리를 닦고 바지를 올리려 할 참이었다. 여전히 육중하게 발기한 성기와 음모에 자꾸 눈이 갔다. 그와 수도 없이 몸을 섞었지만 제대로 모양을 갖춘 음낭을 만져 본 적은 없다.

야바는 손을 들어 음모를 만져보았다. 까슬한 감촉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저절로 아래쪽에 시선이 갔다. 단단히 채워진 고환에 손끝을 대자 그의 복근이 꿈틀거렸다. 아, 야바는 손을 떼고 눈을 들었다. 야만인은 깊이 잠들었다. 예민한 감각이 모인 곳이니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 경건한 의식처럼 고환의 주름과 모양을 눈에 새기고 손끝으로 기억했다.

뒷정리를 다 하고 나니 새벽 5시를 훌쩍 넘었다. 욕실 중앙에 자리한 샤워 부스로 들어갔다. 허리 아래는 감각이 떨어져 나가 샤워기 들 여력도 바닥났다. 맞은 편 거울에 제 모습 비쳤다. 그동안 집에서 빈둥거리기만 했는데 살은 더 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피둥피둥한 살 뭉치는 볼 꼴 사나웠다. 물을 틀어 맨살에 밴 땀과 정액을 씻어냈다.

아아아~~~~

보이 소프라노가 물소리에 맞춰 보칼리제를 게워냈다. 저주의 시간이 되면 야만인에게 연거푸 노래해 줘야 했기에 지금 발성법으로는 버티기 힘들었다. 상처는 빠른 속도로 아물어서 어제 붕대를 풀었는데 아직은 수술 부위에 수건을 대고 머리를 감아야 했다. 욕실 벽 한 면이 유리로 되어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마블링 무늬의 대리석 바닥과 연녹색 체크무늬 벽은 차가움과 자유로움이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샤워부스에 김이 찼다. 유리창 너머의 야경과 욕실 풍경이 뿌연 형체로 바뀌자 관 속에 누워 물속을 부유하는 것 같았다. 희미한 도시 불빛은 물속에 사는 생물의 눈알 같다. 야바는 수천 개의 눈알을 마주 째려보았다.

그 순간 밖에서 찰박거리는 소리가 났다. 젖은 바닥을 헤치는 오는 그런 소리. 눈도 깜빡이지 않고 부동자세가 되었다. 차이석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자신을 찾으러 온 거라고 여겼다. 수증기에 시야는 완전히 차단됐다. 환기 팬 돌아가는 소리와 떨어지는 물줄기가 귀청을 때렸다. 숨을 잔뜩 모은 채 샤워기를 잠그려는 찰나였다. 샤워부스 유리에 흐린 상이 아른거렸다. 싸늘한 표정을 한 누군가가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창백한 남자였다. 비명소리도 안 나왔다. 야바는 샤워기를 내던지고 주저앉았다. 샤워기가 뱀 대가리 마냥 발버둥치며 물을 뿜어냈다. 심장이 쏟아질 만치 뛰어댔다. 남자는 눈 깜짝할 새 사라졌다. 발소리가 샤워부스를 빙 돌아갔다. 야바는 문고리를 잠갔다. 달크락! 달크락! 동시에 창백한 남자가 문 손잡이를 잡아 열려 했다.

“으윽! 저리 가! 저리 가!”

야바는 뼈마디가 부서지도록 문을 잡아 버텼다. 창백한 남자는 거울에 숨었다가 자신이 혼자되길 기다린 모양이다. 이제 추운 계절이 얼마 안 남았으니 마음이 급해진 거다. 그럼 차이석은?!!! 정신없이 잠든 차이석을 벌써 처리하고 온 거다. 어서 나가 그를 구해야 하는데 온몸이 마비돼서 의지대로 안됐다. 창백한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잔악한 얼굴이 점차 선명해졌다. 아니야! 아니야! 너 같은 거 한테 넘겨 주지 않을 거야! 당하지 않을 거야! 야바는 부스가 부서지도록 주먹으로 때렸다. 창백한 남자도 반격을 시작했다.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오려 했다. 저리 가! 꺼져! 두려워서 정신이 나갈 것만 같다. 그때 밖에서 엄청난 굉음이 들렸다. 뭐가 먼저인지도 모를 만큼 동시에 샤워 부스가 거칠게 뒤흔들렸다. 희미하게 누군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지독한 공포에 고막이 먹먹해졌다.

“저리 가! 저리 가!”

“……진아!”

“놔! 저리……!!”

퍼억─! 퍼억─! 파열음이 연달아 터졌다. 유리에 균열이 갔다. 검은 그림자가 온몸으로 달려들어 왔다. 몸서리치며 무릎에 머리통을 박고 몸을 웅크렸다. 이제는 죽는다.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세진아!”

그 순간 구부렸던 자신의 상체가 강제로 젖혀졌다. 눈앞이 아득했다. 세진이? 그게 누구지? 낯설고 싫은 이름이다. 그렇지만 부르는 목소리는 너무나 다급하고 뜨거워서 한 번 더 들어보고 싶은 이름이었다. 샤워 부스 문짝이 산산조각 났고, 바닥엔 유리 파편으로 엉망이었다. 흔들리는 시야로 딱딱하게 굳은 차이석이 침범했다.

“왜 그래?”

꽉 닿은 가슴을 통해 울리는 그의 심장 소리는 거칠고 불규칙했다. 그는 야만인도 질 나쁜 변태도 아니었다.

“놀랐잖아. 왜 이렇게 떨고 있어?”

야바는 입술을 달싹이며 숨을 터트렸다.

“그 남자가 왔어! 빨리 문 닫아!”

“그 남자라니?”

“빨리!”

제어 안 될 정도로 몸이 떨렸다. 차이석은 커다란 타올로 자신을 감싸고 안아 들었다. 침대 위에 자신을 올리고 약통을 꺼내왔다. 피부에 유리가 긁혀서 따끔거렸다.

“진정하고 다시 말해 봐. 뭘 봤지?”

“창백한 남자! 그 남자가 나를 노리고 있어! 이 집 거울에 숨어서 지금도 우리를 노려보고 있어!”

야바는 드레스룸 거울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창백한 남자가 아직도 노려보고 있을 것 같다. 차이석은 빠르게 거울을 훑었다가 다시 시선을 회수했다.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창백한 남자라면… 혹시 얼굴이 하얗고 마른 남자 말인가? 붉은 입술에 눈꼬리가 올라가서 성질 나빠 보이는.”

“너도 봤어? 언제? 너한테도 갔었어?”

“조금 전에 알짱거리길래 아파트 아래로 던져줬어. 지금쯤 머리통이고 뼈마디 모두 박살 났을 거야.”

야바는 멍하게 눈을 깜빡였다. 체온은 여간해서 올라오지 않았다.

“그 남자는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않아. 봄이 오기 전에 나를 잡아가야 하니까.”

“왜 너를 잡아가려고 하지?”

“몰라.”

오랫동안 창백한 남자를 봐왔어도 그에 대해 아는 건 하나도 없었다.

“밖에 있는 경호원들 눈까지 속여서 들어왔어. 거울 속에서 숨어 있다가 다시 나타날 거야.”

차이석은 알 수 없는 시선을 얹었다.

“거울부터 모조리 없애야겠군. 무능한 경호원도 해고시키고.”

그리고 나직하게 덧붙였다.

“내가 던져줬으니까 이제 괜찮아.”

진짜 창백한 남자를 죽였어? 그럼 이제 나타나지 않는 거야? 마지막 남은 겨울을 편하게 보내도 되는 거야? 그의 언어는 이상했다. 미끈하게 뽑아내 불순한 냄새를 피웠지만 그가 그렇게 말하니 진짜 그렇게 될 것 같았다. 차이석은 자신의 턱 끝에 매달린 눈물을 핥았다. 유리에 조금 긁히고만 자신에 비해, 그의 팔꿈치는 찢어져 출혈이 심했다. 두꺼운 유리문을 팔꿈치로 깨부수었는데 뼈가 성할 리가 없었다. 그는 야비하게 굴다가도 무대포로 군다. 자신이 실오라기 하나 안 걸쳤다는 것도 잊고 그의 상처부터 소독했다. 연고를 바르고 붕대로 감아 지혈했다. 꽤 아픈지 그는 미간을 구겼다. 응급실에 가자고 했더니 그는 자신을 눕히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번 일 다 마무리되면…….”

그의 손이 허벅지 안쪽으로 주욱 미끄러져 자신의 빈 음낭에 멈췄다. 그는 깊은 시선을 밀어 넣었다.

“여기도 해결해야겠군.”

그것은 엄숙해서 고약한 농담으로 치부할 수가 없었다. 불알은 자신의 미래이고 우주였다. 기하는 자신의 불알을 도려내서 어떻게 했을까? 쓰레기통에 쳐넣었겠지? 자신의 미래가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텅텅 빈 음낭에 뭐라도 집어넣어야 했다. 매일 만지며 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하며 아물지 않은 피딱지를 병적으로 뜯어내듯 비참함을 곱씹었다. 그가 지금 쓰레기통에 버려진 미래를 찾아주겠다고 말하고 있다. 먹먹함이 목구멍을 짓눌렀다.

전엔 자신이 손톱으로 벽지를 뜯은 적 있다. 드레스룸에서 놀다가 정돈된 옷을 몽땅 헝클어놓았다. 그가 즐겨 입는 스웨터 올을 풀어버린 적도 있다. 집안일도 안 했고, 종일 게으름만 피우는데 그는 깡패들 같이 주먹질하지 않았다. 창고에 가두지도 않았다. 대신 손톱을 갈아주고, 기이한 물건을 사왔다. 그를 시험했던 건 정작 자신인지 모른다.

“니가 왜?”

고양이가 눈을 올려 뜨며 물었다. 대가 없이 받는 건 덮어놓고 의심하는 결벽증이 심한 녀석이다. 이석은 수치로 물든 고양이 목덜미를 보며 나른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너한테 자장가를 들을 거니까.”

야바의 고통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었다. 애초에 가약 효과로 뿌리 뽑을 거라 확신했던 자체가 어리석었다. 자신의 고양이는 완전무결해야 한다. 이 머리통이든 몸뚱이든, 자신이 주는 상처만이 녀석을 더럽힐 수 있다. 벌레, 창백한 남자, 거세된 유년시절, 녀석을 좀먹는 과거든 뭐든, 이 손으로 없애면 된다. 이석은 야바의 목덜미에 얼룩진 화상 자국과 손목에 낭자한 칼자국을 잇새로 씹고 혀로 지웠다. 입술을 삼키고 혀를 당겨와 빨자 고양이는 노래를 불렀다. 몽환의 새벽을 닮은 목소리가 이석의 입술을 적셨다. 그리고 바람 소리와 교차하는 첼로 선율…….

Are you going to Scarborough Fair?

스카보로 시장에 가는 거니?

Parsley, sage, rosemary and thyme…….

파슬리, 세이지, 로즈마리와 타임…….

노랫말을 읊조릴 때마다 야바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유연한 곡선을 따라 혀로 덧그렸다. 야바의 목소리가 휘어졌다. 수분에 젖은 회갈색 눈동자는 외설적인 향을 풍겼다. 파괴적인 욕구가 이성을 삼켰다. 붉은 입술과 핏줄이 팔닥거리는 목덜미를 뜯어 먹고 싶다. 살갗 아래 뼈와 내장까지, 이석은 진심으로 야바를 씹어 먹고 싶었다. 도드라진 돌기와 심장 소리를 빨아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어미의 젖줄을 빨 듯 녀석의 유두에 매달렸다. 신음이 젖 물처럼 흘러내린다. 부드럽고 진한 빛깔의 음색이 마주쳐 울렸다.

Remember me to one who lives there, For she once was a true love of mine.

그곳에 사는 어떤 사람에게 안부를 전해 줘. 그녀는 예전의 연인이었으니까….

이석은 오랜만에 듣는 자장가를 폐부 속 깊이 들이마셨다. 내내 술에 덜 깬 것처럼 머릿속이 탁하다. 가끔 꿈을 꾼다. 괴한이 고양이를 먹어치우고 노래를 다그치는 악몽. 이 노래를 들었으니 악몽도 멈출 것이다. 몽환적인 물빛의 목소리에 신경이 마비된 듯 몽롱해졌다. 야바의 목소리는 가장 어두운 곳까지 닿아 정신을 부식시킨다.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세상에 없는 목소리, 천국과 지옥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또 하나의 완벽한 세계이다.

차 회장은 참담한 심경으로 아들을 목도 했다. 명환은 생애 의지를 놓은 듯 천장만 보고 있었다. 초점 풀린 눈은 한곳에 박혔지만 결국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병세가 호전되어 공식 석상에 나갔던 게 불과 일주일 전이다. 누구보다 기뻐했던 아들이 지금은 음식도, 치료도, 힐러의 노래도 거부했다. 제정신이 들면 발작하며 진정제로 버티기를 며칠째다. 며느리는 숨죽여 우는 게 전부였다. 차 회장이 강행했던 며느리와의 혼담을 명환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아비의 말은 법으로 여겼으며 누구에게도 진득이 마음 주지 않던 아들이 반 실성해서 한 사람만 찾고 있다. 고작 천박한 가수 때문에 스스로 죽음으로 한 발씩 걸어가고 있다. 암세포보다 더 지독한 열병에 걸려서…!

“데려와. 그 시체든, 닮은 놈이든 뭐든 좋으니까 샅샅이 뒤져서라도 데려와!”

“아, 알겠습니다…….”

비서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그때 명환이 사지가 분리된 양 경련했다. 뼈만 앙상한 몸이 뻣뻣해지며 낯이 파랗게 변했다. 양 박사는 명환의 눈을 벌려 동공을 체크 했다.

“숨을 안 쉬어!”

체온이 모두 휩쓸려 갔다. 차 회장은 명환에게로 달려갔다. 양 박사는 심폐소생술을 했다. 아들은 어떤 반응도 없었다. 차 회장은 절규했다.

차 대기 시켜! 어서!

혀가 말려가고 있어! 김 간호사! 차 대표 입 벌려!

여보! 여보!

반쯤 열린 명환의 의식으로 작은 불빛이 침범했다. 의식 너머로 일그러진 형상들, 여자의 울부짖음이 오갔다. 무감각했다. 지겨웠다. 눈앞에 있는 그들보다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야바의 모습이 더 선명했다. 가면에 가린 얼굴은 여간해선 보여주지 않았다. 그랬기에 상상을 더욱 부추겼다. 손을 들어 붙잡으려 해도 닿지 않았다. 그래, 이곳이야말로 지옥이다. 그 노래를 한 번만 들을 수 있다면, 한 번만이라도 제발……. 야바가 손을 뻗어 명환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눈을 휘며 노래를 불렀다. 제목 모를 허밍이었다. 녀석은 저렇게 웃지 않는다. 순순히 노래해 주지도 않는다. 이건 환상인가? 꿈인가?

다른 사람들은 나를 암 환자로만 대해. 내가 어떤 모욕을 줘도 눈감아주지. 암 환자니까, 곧 죽을 거니까. 그런데 너를 만나면 내가 암 환자가 아닌 것 같았어. 그냥 나인 것 같았어. 지옥에서든 다른 세상에서든, 다시 만난다면 그렇게 웃어 줘. 다시 노래해 줘…….

신기루 같은 노랫소리가 의식을 무섭게 빨아먹었다.

외모만큼이나 차고 시린 심해를 닮은 목소리, 그 악마처럼 황홀한 노래를…….

사람들의 외침이 멀어졌다. 불빛도 사라졌다.

이석은 건물 한켠에 대충 주차했다. 아침부터 급한 연락이 왔다. 차명환이 전용 병실에 실려갔다는 것이다. 펜트하우스 전용 병실 앞에 도착했을 때 차 회장과 차명환 부인이 복도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수행원들은 멀찍이 물러나 자리를 지켰다. 면회 금지라는 푯말에 불이 켜졌다. 차 회장은 흑색에 가까운 낯으로 병실 문만 응시했다. 미련 맞도록 부정을 갈구했던 딸들에게 빵 부스러기 같은 애정조차 주지 않던 늙은이는 재밌는 얼굴이다. 차명환, 생각보다 꽤 버텼다. 나약하고 쓸모없는 인간이 발붙이기에 이 땅은 너무 비좁다. 이석은 복도를 느릿하게 걸어갔다. 그럼에도 체중이 실린 걸음은 사뭇 가벼웠다. 차명환 부인은 사람들 눈도 의식 않고 자신의 품에 달려들어 젖가슴을 밀어붙였다.

“도련님 어떡해요! 그이가…! 양 박사님이 이제 준비하래요. 어떡해요. 도련님! 흐윽……!”

여자는 밟아 뭉개고 싶도록 애처로웠다. 차 회장의 눈길이 날아들었다. 늙은이는 쥐 한 마리도 사냥 못할 갈기 빠진 사자의 꼴이었다. 쯧쯧, 이석은 혀를 찼다. 늙은이를 직시한 채 여자의 허리를 휘감고 등을 다독였다.

“너무 걱정 마세요. 이러다 형수님부터 쓰러지겠습니다.”

왕좌에서 쫓겨나 죽은 아들 사진이나 붙들고 살기를. 오르가즘이 아랫배를 후려쳤다.

그때 병실 문이 열렸다. 밖으로 걸어나온 양 박사는 귀신을 본 낯빛이었다. 차 회장과 여자는 온몸을 긴장한 채 의사에게 집중했다.

“이걸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양 박사는 반백의 머리를 꽉 움켜쥐었다.

“믿어지지 않는군요. 어떻게 이런…어떻게…….”

차명환에게 어떤 모욕을 당해도 동요하지 않던 양 박사는 횡설수설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차 회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은테 안경 너머로 양 박사의 눈이 흔들렸다. 양 박사는 크게 심호흡하고 시선을 들었다.

“차 대표가…….”

예리한 적막이 공기를 가로질렀다.

“차 대표의…암세포가 깨끗하게 없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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