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track 31
형체 없는 선율이 상처받은 영혼에게 도달했다. 차명환은 천장만 바라보았다. 조금 전 발작과 진정제 투여를 반복하다 결국 탈진했다. 그는 측근을 통해 야바의 죽음을 확인한 뒤 음식도 치료도 거부한 채 악으로만 버텼다. 물론 사장이 시체를 가져가 서류상 기록이 전부였다.
“어디에다 숨겼어. 니들이 걔 숨겼잖아…….”
마른 음성이 아리아를 갈랐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위험한 건 모두 치웠고 고용인들도 대기 중이었다. 그의 부인이 계속하라고 눈짓했다. 코카인은 멈췄던 노래를 다시금 시작했다. 차명환은 침대 시트를 쥐어뜯었다.
“어디 숨겼어?! 서류도 꾸민 거 다 알고 있어! 개새끼들 가만 안 둬! 다 뒤져서라도 찾고 말 거야!! 대체 원하는 게 뭐야?! 다 들어준다고 하잖아!”
차명환은 생떼를 부리다가 애원했다. 힘만 있다면 무릎 꿇고 빌 기색이었다. 이 상태로 힐링은 무리다. 쫓겨나다시피 방을 나오는데 차명환 부인이 따라왔다. 꺼칠한 피부는 화장술로 덮어도 표정만은 가리지 못했다.
“그이가 요즘 이상해요. 진통이 있을 때 말고 저렇게 공격적이진 않았는데 이젠 시도때도없이 발작해요. 밤엔 몽유병 환자같이 돌아다니고 알아듣지 못할 말만 중얼거려요. 그런데 자신이 했던 일을 전혀 기억 못 하는 거에요. 얼마 전에 공식 석상에도 참석해서 한시름 덜었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당신 남편이 싸구려 마약에게 중독된 모양이군요. 코카인은 이 눈치 없는 여자를 씁쓸히 목도 했다.
“오랜 기간 병마와 싸우다 보면 누군가의 죽음에 극도의 불안감을 느낍니다. 더군다나 야바가 대표님을 찾아뵙고 돌아가던 길에 그렇게 됐으니 죄책감이 드셨을 수도 있습니다.”
“야바인지 뭔지 하는 사람 일은 나도 안 됐다고 생각해요. 저이가 냉정한 편이지만 한 번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잔정을 많이 주거든요. 그래도 고작 가수 한 명인데 지나치잖아요. 이럴 때 도련님이라도 계속 곁을 지켜주면 좋을 텐데…….”
정작 차이석이 필요한 건 여자 같았다. 그녀는 남편이 왜 일개 가수의 죽음에 목매는지보다, 시동생의 부재에 더 애태우는 것 같았다. 어쩐지 거슬렸다.
“그래도 어제 도련님이 다녀가셔서 그나마 진정된 거에요. 저이가 유일하게 말 듣는 사람이 도련님이라…….”
뜻밖의 말이었다. 코카인은 눈을 크게 떴다.
“어제…요?”
“네. 도련님도 그동안 연락이 안 돼서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대만에 계셨다가 어제 귀국하셨다지 뭐에요. 도련님은 침착하셨는데 왜 저이만 유난인지 모르겠어요.”
어디선가 술과 마약에 찌들어 있는 줄 알았다. 야바가 죽었다는데 침착했다니. 그가 아무리 차가운 인간이라도 그건…….
여자는 코카인 손을 잡았다.
“저이 목숨은 코카인 씨에게 걸렸으니까 무슨 소리를 해도 포기하지 마세요. 제가 믿는 건 코카인 씨뿐이에요. 그래 주실 수 있죠?”
당신 남편은 시험 도구일 뿐입니다. 결과는 명확해졌으니 그만 이 시험을 끝낼 생각이거든요.
그러나 상심에 빠진 여자를 짓밟는 악취미는 없다.
“대표님도 이 고비만 넘기면 편안해지실 겁니다.”
“그럴까요?”
여자는 눈물을 그렁거리며 물었다.
“네. 분명히 편안해지실 겁니다.”
숙소의 침체된 공기가 어깨를 짓눌렀다. 오는 내내 차명환 부인의 말이 머리를 맴돌았다. 차이석은 아랫도리가 난잡한 만큼 추문도 무성했지만 야바에게 했던 행동은 육체적인 것 이상이었다. 그런데 그의 반응은 의아함을 뛰어넘어 놀랍기까지 했다. 코카인은 방으로 향하던 걸음을 돌려 모르핀 방으로 들어갔다. 모르핀은 말수가 현저히 줄었고 필로폰은 자주 눈물을 훔쳤다. 죽기 전 야바에 대해 묻자 모르핀은 울먹거리며 말했다.
“똘아이 요트에 다녀온 날부터 이상하게 굴긴 했어. 칩 때문에 종양이 생길 거라거나, 숨골에 박혀서 수술도 힘들다면서 이상한 말을 했으니까. 헛소리해도 잘 들어줄걸…믿는 척이라도 해줄걸…….”
“그런 걸 어떻게 알았지?”
“내가 알아? 인터넷 검색을 하거나 어디서 주워들었나 보지. 똘아이 그거 귀만 얇아선…표독스러워도 순진한 구석이 있었는데…….”
“야바가 요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자세히는 말 안 했고?”
“그냥 침대에 누워서 혼자 중얼거리는 것 말고 별다른 소린 없었어. 그런데 너도 참 독하다. 친구가 죽었는데 어째 눈물 한번 안 흘리냐? 혼자 몰래 우는 거야? 뭐야?”
“하지 마. 누구 하나라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지.”
필로폰은 격앙된 모르핀을 가라앉혔다.
“나도 마음 편히 울고 싶다.”
코카인은 방으로 가 의상도 벗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 야바가 죽었다.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만은 애도의 물결에서 역행하고 있다. 아직도 야바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 건 떨쳐지지 않는 의혹 때문이다. 야바 머릿속에 살던 벌레가 자신의 머리를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노트를 펼치고 펜을 들어 벌레들의 궤적을 따라 끄적였다.
야바는 요트에 다녀온 이후부터 병적으로 칩을 신경 썼다. 칩의 위험은 새삼스럽지도 않은데 말이다. 야바는 종종 손님들에게 칩에 관한 얘길 나불거려서 사장과 가수들을 당혹게 했으며, 차이석한테도 말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요트에서 노래 불러준 것 외에 뭔가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사고가 났던 날, 사장은 야바를 벼르고 있었다고 들었다. 그래, 손님들 변태 행각이 담긴 DVD를 훔쳐서라고 했지. 제 목숨을 담보로 위험한 짓을 하다니 야바답지 않은 행동이다. 야바가 그렇게 해줄 사람은 한 명뿐이다. 차 사고도 미심쩍었다. 사장이 벼르던 때 절묘한 타이밍으로 전복사고가 났던 것부터, 보통 차량 사고 가해자는 보험사에 연락해 수습부터 한다. 그런데 타이어 자국 말고 어떤 흔적 없이 증발했다. 야바가 다니는 곳은 외진 길이라 CCTV도 없다고 했다. 시체는 얼굴을 식별 못 할 정도로 훼손됐지만 빈 음낭이나 칩, 신체 특징은 유전자 감식이 필요 없을 만큼 야바와 일치한다. 누군가 의도하지 않고서는 이렇게 깨끗할 수가 없다. 야바는 죽었지만 적어도 이 지옥에서 탈출했다. 보란 듯이 가버렸다. 자신도 죽으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 방법밖엔 없는 걸까? 입술이 찢기도록 물어뜯다가 멈칫했다.
“탈출…….”
만약, 누군가 야바를 탈출시킨 거라면…….
이미 종결된 사건에 경찰들은 시간 투자할 생각이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사장님이 모든 의지를 잃었다. 그렇다면 직접 알아보는 수밖에. 눈물은 그때 흘려도 늦지 않다. 코카인은 폰을 집어들고 빠르게 번호를 눌렀다.
골목에 정차한 검정색 BMW에 다가갔다. 유리문이 내려가자 임 실장이 보였다. 그는 사장의 행방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임 실장은 피묻은 면봉이 든 비닐 봉투를 내밀었다. 피는 사장의 방에 있을 야바의 것이고, 임 실장한테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네가 워낙 막무가내로 우겨서 가져왔지만 어떻게 하려고?”
“실장님은 믿어지십니까? 조금도 의심이 안 드시냐구요.”
“그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지금 사장님은 패닉에 빠지셔서 가장 기본적이고 확실한 검사를 빠트리셨어요.”
“검사해도 별다른 건 없을 거야. 고환이 없고 머리에 칩 박힌 시체는 결코 흔하지 않으니까.”
“그게 더 이상하지 않으세요?”
임 실장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했다. 코카인은 말을 이었다.
“사설 유전자 감식소에 의뢰하면 이틀 안에 결과를 알려준다더군요. 사장님도 실장님도 경황없으실 테니 이번 일은 제게 맡기세요.”
“숙소에서 야바 머리카락이나 칫솔로 비교할 건가?”
“그런 건 필요 없어요.”
곧장 세준의 집으로 갔다. 테이프로 떡칠 된 문을 열자 퀴퀴한 냄새가 났다. 오늘도 세준은 조각상을 껴안고 누워 있었다. 그는 며칠간 일하지도, 씻지도, 먹지도 않았다. 저렇게 누워서 눈물 콧물 흘리는 것이 유일한 신체활동이었다. 다시 10년 전으로 퇴행한 모습이었다. 그는 문가에 서 있던 자신을 바라보았다. 세진이 어딨어요? 세진이한테 데려다 주세요. 그것도 안 된다면 노래해 주세요. 제발 이 고통을 덜어 주세요. 새까만 눈동자가 애원했다. 코카인은 정중하게 말했다.
“형. 정액 좀 주실래요?”
야바의 칫솔, 머리카락, 기준이 될 샘플은 지천에 깔렸다. 굳이 세준의 정액을 요구한 건 자신에 대한 충성심이 수치심을 넘어서는지를 확인키 위함이다. 착하게도 세준은 일어나 바지를 내렸다. 조각상을 한쪽에 세우고 성기를 꺼냈다. 항상 껴안고 있어서 조각상을 제대로 본 건 처음이다. 그건 분명히 야바였다. 멍해진 건 잠시였다. 세준은 페니스를 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눈은 조각상에 향했다. 탁탁탁. 소리는 빨라졌다. 성기는 육중해졌다. 세진아. 세진아……. 안타까운 부름은 교성에 가까웠다. 으윽. 세준은 인상을 쓰며 조각상 얼굴에 정액을 힘차게 뿜었다. 점액이 묻은 조각상 이마와 콧잔등을 세준의 입술이 더듬어갔다. 그는 또 울었다. 동생에게 욕정 하는 행위가 역겹지 않았다. 그건 세준의 충성을 맹세하고 가장 은밀한 비밀을 고백하는 의식이었다. 코카인은 그의 머리를 매만졌다.
“잘했어요.”
그에게 포상으로 ‘Voca me’를 선사했다. 깊고 신비로운 선율이 단절된 세계를 보듬었다. 세준의 눈이 풀리며 찰나의 위안에 빠져들었다.
카페는 한산했다. 테이블을 닦으며, 빈 잔을 수거하며, 종업원들은 곁눈질했다. 종소리를 밀치고 야구모자 쓴 남자가 들어왔다. 남자는 적당히 떨어진 곳에 앉았다.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다. 기하는 식은 커피를 마시며 입구를 주시했다. 며칠간 수염을 깎지 않았고 눈 아래도 꺼졌다. 야바는 지금 자신의 방에서 썩어간다. 어제부터 구더기가 생겼다. 녀석의 벌레 망상이 현실화된 것이다. 녀석에게 저질렀던 짓이 이번엔 자신을 난도질했다. 방치하고 학대하면서 그게 무슨 짓인지 미처 몰랐다. 그러니 야바를 되찾아야 한다. 문득 뒤에서 향수 냄새가 풍겼다.
“혹시… 강기하 씨인가요?”
고개 돌렸을 때 자신과 비슷한 연배의 여자가 서 있었다. 여자는 미인도 세련된 스타일도 아니었다. 그게 모친의 자존심을 건드린 결정적 이유였다. 그녀가 그랬듯이 자신 또한 한눈에 알아보았다. 임진희. 부친의 조수이자 정부였다. 기하는 대답했다.
“맞습니다.”
임진희는 조용한 자리로 안내했다. 구석진 자리에 마주 앉자 종업원이 유자차를 놓고 갔다. 임진희는 손수건으로 입가를 눌렀다. 눈가에 세월의 자국이 남았지만 강단 있는 눈은 여전했다.
“아, 여긴 제 가게예요. 자릴 비우기 그래서 이리 오시라고 했는데…. 처음 전화받았을 때 놀랐어요. 박사님 자제분이라는 것도 믿기지 않았는데 얼굴을 보니 알겠네요.”
그래서 직접 만나자고 한 것이다. 겉보기와 달리 만만한 여자가 아니다. 머리채를 뜯으러 갔던 모친에게 오히려 남편을 괴롭히지 말라는 소리까지 지껄였다. 10년이 지난 번호가 유효하단 걸 알고 앞뒤 잴 것 없이 연락했으나 여자가 연구 내용을 선뜻 알려줄지 불투명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야바는 부패하고 있다. 고루한 과거사는 걷어치우고 본론으로 직진했다.
“우연히 부친의 데이터를 봤습니다. 거기에 죽은 사람도 살리는 힐러가 있다더군요.”
임진희의 눈이 커다래졌다. 찻잔을 쥔 손이 떨렸다.
“완벽한 힐러… 말이군요.”
기하는 혀로 입속을 훔쳤다.
“부친은 완벽한 힐러를 만났습니까? 시체로 실험한 건 맞습니까? 성공했습니까?”
여자는 미소 지었다.
“박사님이 20년간 찾아낸 힐러는 8명이었습니다. 유형이 겹치거나 각각 다른 케이스였죠. 그들에게 온갖 실험을 했고 강도 높은 훈련도 시켰지만 결국 실패했죠. 어떻게 죽은 사람을 살리겠어요? 이미 죽었는데.”
기하는 욕을 씹었다. 당장 테이블을 뒤엎을 지경이다. 정보를 얻으려면 이 분노부터 통제해야 한다.
“지금 힐러 한 명을 데리고 있는데 봐 주실 수 있습니까? 만에 하나 훈련으로 가능하다면…….”
“힐러를 데리고 있다니… 어떤 타입인가요?”
여자는 놀란 눈으로 물었다. 기하는 자세를 고쳐잡고 대답했다.
“치유와 살상이 가능한 녀석입니다.”
“텔크시오페군요. 아, 박사님은 세 가지 유형에 세이렌 자매의 이름을 따서 부르셨죠. ‘아그라오페메’-달콤한 속삭임-치유만 가능한 힐러예요. ‘텔크시오페’-매혹적인 목소리-치유와 살상의 힘을 모두 가진 힐러이고, ‘리게이아’-날카로운 목소리-살상만 가능한 힐러죠.”
여자는 말을 이었다.
“완벽한 힐러가 세 가지 유형 안에서 존재하는지, 또 다른 독립된 객체인지는 모릅니다. 박사님은 완벽한 힐러의 존재유무조차 못 밝히고 돌아가셨으니까요.”
경직됐던 어깨에 힘이 빠졌다. 10여 년 동안 코카인이 시체를 살려낸 걸 본 적은 없다. 완벽한 힐러는 미친 박사의 허상에 불과한가? 이대로 마지막 희망이 사라지는 건가…….
그녀가 물었다.
“그런데 텔크시오페를 데리고 있다고 했죠? 그 애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할 거에요.”
기하는 간신히 임진희와 시선을 맞췄다.
“힐러의 단점은 중독성인데 유형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어요. ‘아그라오페메’는 중독이라기보단 건강식에 길드는 것과 유사한 반응이에요. 몸이 좋은 에너지를 계속 원하는 거죠. 하지만 ‘텔크시오페’는 하나의 목소리에 치유와 살상의 요소가 들어서, 치유와 동시에 중독이 시작되죠. 한번은 말기 암 환자들을 실험한 적 있는데, 텔크시오페의 노래로 한 달 안에 완치됐지만 대신 두통과 이명, 기억력 감퇴와 발작 등 후유증에 시달렸죠. 환자들은 심신의 균형이 망가지는 걸 알면서도 들을 수밖에 없다더군요. 그래서 텔크시오페는 목소리를 발현할 때 정교한 조율이 필요해요. 정제되지 않은 힘을 남발하면…….”
“능숙한 녀석이라 잘 조절하는 중입니다.”
코카인 노래에 폐인이 된 사람도 많지만 대부분 건강해졌다. 녀석이 다년간 쌓은 노하우 덕일 것이다. 그래, 코카인이라면 완벽한 힐러의 경지에 오를지도 모른다. 만약 그게 존재한다면 말이다. 담배가 절실히 필요한 순간이다.
“그들은 암초에 앉아 노래로 혼을 빼앗아요. 아름다운 모습과 노래로 뱃사람을 유혹하지만 암초 아래는 희생자의 뼈와 살이 썩고 있죠. 밀랍으로 귀를 막지 않으면 세이렌의 먹이가 됩니다.”
그녀는 찻잔을 보며 노랫말 같은 것을 읊조렸다.
“박사님은 힐러를 세이렌의 환생이라고 믿으셨어요. 반인 반어의 세이렌은 노래로 사람의 혼을 빼앗았고, 실패하면 암초에 몸을 던져 자살해야 했어요. 힐러들 역시 자신의 노래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죠. 그래서 상대를 매료시키지 못하면 우리가 상상 못할 만큼 좌절감에 빠집니다.”
“힐러를 찾으려면 배부터 사야겠군요.”
기하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부친이 음성학자보다 광신도에 가까웠듯이 여자 또한 신자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녀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내내 피가 끓었다. 미치광이 박사, 그의 조수, 그걸 돈으로 만드는 아들, 이 얼마나 절묘한 궁합인가.
임진희는 울적한 어투로 말했다.
“어쩌면 힐러는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운명을 타고났는지 몰라요. 죽어야 할 사람을 살리는 행위가 자연의 섭리를 거역하는 거니까요. 그래서 대가를 치르는 거겠죠.”
“대가라뇨?”
“모두 서른 살도 안 돼서 요절했어요. 힘을 사용할수록 수명이 단축됐죠.”
그럼 코카인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가. 우려했던 일이 눈앞에 닥쳤다.
“박사님은 당신의 연구가 세상에 알려져 누군가 이어받기를 원하셨죠. 그게 당신의 아들이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유언처럼 되었네요. 아드님이 데리고 있다는 힐러한테…심한 짓은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박사님이 데려온 힐러 대부분이 걸 거리나 보육원에서 살던 아이들이었죠. 그땐 연구를 쫓아가기 바빠서 불쌍한 아이들한테 몹쓸 짓도 많이 했어요. 그래서 매일매일 사죄하는 마음으로 살아요.”
지리멸렬한 고해성사를 들어줄 생각은 없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여자는 고개를 들었다.
“조심하세요. 박사님을 그렇게 만든 건 델크시오페였어요. 그들의 비명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아시겠죠?”
“안됐지만 아버지처럼 멍청하게 보호 장치 없이 상대하진 않습니다.”
“보호 장치라니…어떻게요?”
“그것까지 말할 필요는 못 느끼겠군요.”
“실례인 건 알지만 꼭 알고 싶어서 그래요.”
여자는 귀찮게 물고 늘어졌다.
“말 그대로 보호장칩니다. 그리고 녀석을 만날 땐 이어플러그도 끼니까요.”
“네에?”
조수는 느닷없이 큰소리로 웃었다. 그러다 싸늘한 시선에 표정을 고쳤다.
“아, 미안해요. 이어플러그로 비명을 막겠다니, 그 생각이 재밌어서 나도 모르게……. 힐러들이 노래하거나 비명을 지르면 그들 주변에 소리 영역이 형성돼요. 그 영역 안에 든 사람은 죽은 게 아니고서는 영향을 받아요. 그들의 목소리는 청각 기관뿐만 아니라 피부로, 세포로, 잠재의식까지 점령하니까요. 밀랍이나 이어플러그로는 대항할 수 없어요.”
전혀 소용없다니…. 10년 전 자신과 임수가 살았던 건 이어플러그 때문이라 믿었다.
“힐러의 비명을 듣고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럴 리가…….”
임진희는 탄식했다.
“힐러의 비명을 듣고도 살았다니, 혹시 그 아이는 치유 능력만 있는 게 아닐까요?”
“둘 다 가졌고 증거도 있습니다. 함께 있던 의사 두 명이 눈앞에서 죽었으니까요.”
이어플러그가 무용지물이라니…. 자신과 임수 역시 코카인의 비명에 무방비로 노출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의사 두 명만 죽은 거지? 사고가 뒤엉켰다. 임진희도 혼란스러운 낯빛이다. 그녀는 손수건을 비틀며 기억을 짜냈다.
“잠깐요. 저도 연구에서 손 뗀 지 오래라 머리가 녹슬어서……. 예전에 비슷한 실험을 했던 것 같아요. 자료가 남았을지 모르니 한번 찾아볼게요.”
걱정과 달리 여자는 협조적이었다. 기하는 명함을 건네고 카페를 나섰다.
[방금 전 어떤 여자와 만나 한 시간가량 얘기 나누고 집에 돌아갔습니다. 도청한 녹음 파일은 메일로 보냈습니다.]
이석은 눈썹을 만지며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두었다.
“디저트는요?”
[얌전하게 있습니다. 저쪽에선 아직 눈치 못 챘는지 조용하고요.]
“거칠게 대하지 말아요. 아들 잘못 키운 죄밖에 없잖습니까.”
이석은 심부름꾼과의 통화를 끝내고 메일함을 들췄다. 거실에선 브레인들이 일에 몰두 중이다. 새 숙소는 자신의 아파트 위층이며 밀린 업무가 많아 고양이가 낮잠 자는 사이 올라왔다. 아직 강기하는 주식 명의개서 신고를 하지 않았다. 야바 때문에 지분의 존재조차 망각했을 것이다. 놈이 정신 차릴 때까지 기다려줄 생각은 없다. 작전 세력을 가동해 태령 주가를 폭락시키든, 강기하가 명의개서를 신고하고 지분을 일부 처분하도록 유도한다면 어떨까? 놈이 평생 원했던 것을 미끼로 던지고 말이다. 음성 파일을 열자 강기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잡음이 섞였지만 깨끗한 음질이었다.
[우연히 부친의 데이터를 봤습니다. 거기에 죽은 사람도 살리는 힐러가 있다더군요.]
[완벽한 힐러… 말이군요.]
완벽한 힐러? 이석은 눈썹을 끌어올렸다. 볼륨을 높이고 신경을 집중했다.
[부친은 완벽한 힐러를 만난 적 있습니까? 시체로 실험한 건 맞습니까? 성공했습니까?]
[……그들에게 온갖 실험을 했고 강도 높은 훈련도 시켰지만 결국 실패했죠. 어떻게 죽은 사람을 살리겠어요? 이미 죽었는데.]
[지금 힐러 한 명을 데리고 있는데 봐 주실 수 있습니까? 만에 하나 훈련으로도 가능하다면…….]
[힐러를 데리고 있다니… 어떤 타입인가요?]
완벽한 힐러. 아직 미지수지만 죽은 사람까지 살리는 힐러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건가. 그때 성재가 방에 들어와 서류를 내밀었다. 이석은 음성 파일을 닫고 서류를 집어 들었다. 성재가 말했다.
“네 집 앞에 경호원들 좀 치우면 안 되겠냐? 아까 술 가지러 갔더니 얼씬도 못 하게 하고 말야. 꿀 감춰 놨냐?”
이석은 가죽 의자에 몸을 묻었다.
“요즘 옆구리가 외로워서 입맛에 골라 끼고 자는 중이야.”
“그거 전혀 농담으로 안 들린다면 너도 반성해라. 아래층에 언제 가냐? 내려갈 때 같이 가자.”
“다친 고양이가 있어. 예민하고 신경질적이라 낯선 사람이 오면 물어뜯지.”
고양이는 나날이 살이 올랐다. 그러나 수술 부위는 아물지 않았고 간혹 아침에 일어났을 때 집안 물건이 박살 난 적도 있다. 주치의는 스트레스성 몽유병 때문일 거라고 했다. 수술에 대한 공포심과 그간 쌓였던 긴장이 풀렸으니 무리는 아니다. 당분간 녀석은 거친 정사도, 두성을 사용하는 성악도 금물이다. 두 가지를 한꺼번에 단절시켜서인지 후유증은 지독했다. 두통은 물론 시시각각 근육이 찢기는 통증이 함께 온다. 녀석을 안고 자는 것으로 버티고는 있지만 조만간 인내심도 바닥을 보일 것이다. 이석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주가 등락표를 보았다. 성재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계획은 어떻게 할거냐? 네 입으로 꽃피고 봄이 오면 실행하자고 했잖냐. 네 계획대로 말야.”
성재는 ‘계획’이란 단어를 특히 강조했다. 이석은 콧대를 눌렀다.
“아직 꽃샘추위가 남았어.”
“요새 왜 그래?”
시선을 돌렸을 때 성재는 딱딱한 얼굴이었다.
“명환 형님 요즘 호전됐다는 소식에 주가도 올랐고 언론도 술렁거린다고. 그동안 형님 병환이 들쭉날쭉했지만 이번엔 느낌이 안 좋아.”
“차명환한테 시선이 집중된 지금이 오히려 우리가 움직이기 편해. 지난 1년간 물밑 작업은 충분히 했고, 대선을 시작하는 동시에 터트리면 올해 안에 판가름날 거야. 초조해할 필요 없어. 시기가 늦춰지는 것뿐이니까.”
차명환 자체는 별볼일 없지만 차 회장을 등에 업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차 회장 역시 차명환이 있으면 전투력을 200% 끌어올릴 것이다. 어느 쪽이든 쉬운 상대는 아니다. 성재의 이마가 어두워졌다.
“너 지금 어떤줄 아냐? 뭐한테 홀려서 정신 나간 놈 같다고. 마약할 때도 그 지경은 아니었어.”
“어제 차 회장하고 점심 했다면서?”
기습적인 질문에 성재는 말문을 닫았다. 이석은 상체를 앞으로 당겨가 그를 물끄러미 주시했다. 성재는 경직된 입술을 열었다.
“오해하지 마라. 회장님이 갑자기 호출하셔서 불려 간 거고 별다른 말씀도 없으셨으니까.”
차 회장은 만약을 대비해 차기 대표 이사를 물색 중이다. 이왕이면 혈연으로 얽힌, 꼭두각시가 돼줄 고분고분한 대상 말이다. 적과 동지의 경계도 맹목적인 희생도 없는 세계다. 거추장스러운 감정은 조롱하는 게 이 바닥이다. 예를 들면, 제 목숨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DVD를 훔쳐온다거나 하는…. 이석은 성재의 어깨를 꽉 움켜쥐고 입술을 비틀었다.
“너희를 방치하는 일은 없을 거야. 술, 마약, 여자. 너와 나는 모든 걸 공유한 사이잖아?”
그러나 성재는 얼굴을 풀지 않았다. 성재 일가가 자신에게 지분을 올인했다는 사실을 차 회장이 알면 태령가에서 추방당하는 건 시간문제다. 조카라고 봐줄 위인이 아님을 누구보다 성재가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자신과 손잡았을 땐 신중의 신중을 다했어야 한다. 시간은 오후 5시, 고양이가 깨어날 시간이다. 문으로 걸어가자 성재가 물었다.
“또 어디가?”
낮에는 일, 밤에는 쾌락을 좇았다. 그것만이 공허를 채웠으며, 차 회장의 몰락보다 더 즐거운 건 없으리라 믿었다.
“나비 맘마 먹일 시간이거든.”
야바는 따스한 볕을 이불 삼아 침대에서 뒹굴거렸다. 팬티에 손을 넣고 홀쭉한 음낭을 만졌다. 이렇게 마음 편히 음낭을 만지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깨어보니 차이석은 보이지 않았다. 가끔 그는 불시에 없어졌고 야바는 그 틈을 타 집을 탐방했다. 아까 어떤 방에서 토끼가 우글거리는 유리관을 발견했다. 토끼의 용도는 상상하기도 싫었다. 칩은 없어졌지만 차이석은 칩보다 더 지독했다. 그는 자신을 현관밖엔 한 발자국도 못 나가게 했고 가끔 창밖을 내다봐도 날카로워졌다. 유일한 방문객은 주치의가 전부였다. 대신 수술 부위가 아물면 함께 나가자고 했다. 이 시간의 유효기간이 언제까지일진 몰라도 지금은 안락함을 즐기고 싶었다. 다만 아쉬운 건, 기하를 이 손으로 죽이지 못한다는 것과 드디어 본성을 드러낸 코카인이 자멸하는 꼴을 못 본다는 것이다.
샤워실로 향했다. 주삿바늘을 떼서 혼자 목욕은 가능한데 아직 머리는 감으면 안 된다. 샤워폼을 타월에 쥐어짰다. 시원하고 직선적인 그의 냄새를 몸에 묻혔다. 샤워 부스는 벽면 전체가 거울이다. 그 안에는 살 무더기를 늘어뜨린 못난이가 타월과 씨름 중이었다. 전보다 살은 빠졌어도 평균 체중이 되려면 한참 멀었다. 저주가 풀려도 두꺼비가 왕자로 변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나 보다. 저주! 저주! 저주! 저주! 벌레들이 떼 지어 나와 연호했다. 놈들을 물로 쓸어버렸다.
샤워하고 나오다가 흠칫했다. 욕실 앞에서 요망한 것과 딱 마주친 것이다. 눈에 모서리를 세웠다. 표정도 눈꺼풀도 없어서 자는 건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아니, 저 미개한 것이 생각 같은 걸 할 리 없다. 2M는 훌쩍 넘는 몸통에는 흰 테두리에 싸인 주황빛 무늬가 일렁거렸다. 뱀 비늘과 빨간 눈알을 보자니 평정심이고 뭐고 날아간 지 오래였다. 행여 담요를 가지러 간 사이 도망가면 일이 복잡해진다. 입고 있던 셔츠를 벗고 넓게 펼쳐서 살금살금 다가갔다. 재빨리 셔츠를 던져 빨간 눈부터 가렸다. 뱀의 머리통을 꽉 껴안은 채 아까 봐뒀던 곳으로 질질 끌고 갔다. 목표 지점은 다용도실 세탁기였다.
요망한 것은 식음 전폐했다는 게 무색할 만큼 무겁고 길었다. 할딱이는 숨소리와 샤워폼 냄새가 뱀 대가리에 흩어졌다. 냉혈 동물은 옷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자신을 빤히 보았다. 허를 치는 기습에 저항할 의지를 잃은 거다. 어쩌면 자신은 타고난 사냥꾼인지 모른다. 세탁기 문을 열고 안에 넣으려는 순간 뱀은 턱 근육을 벌렸다. 소스라치며 나앉는 바람에 요망한 것을 놓치고 말았다. 요망한 것은 자신의 허리에 똬리 틀며 사악한 본색을 드러냈다.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포악했고 압력과 무게도 엄청났다. 맨살에 문지르는 감촉이 몸서리쳐졌다. 그 순간 파충류의 배에 틈이 갈라지고, 시뻘건 살덩이 두 개가 튀어나왔다. 바다생물 같기도 한 그것은 기괴하고 징그러웠다. 요망한 것은 요상한 움직임으로 피부에 그것을 비볐다. 만곡하고 지난 자리마다 액체를 토했다.
“저리 가! 이거 놔!”
야바는 바둥거리며 뱀 대가리를 두드려팼지만 꿈쩍하지 않았다. 이상했다. 예전 자신에게 당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기세였다. 이제 당황한 건 자신이었다. 요망한 것은 자신의 머리를 턱으로 누르고, 꼬리를 구부려 바지 속으로 미끄러트렸다. 배에서 튀어나온 흉측한 것이 팬티 쪽으로 돌진했다. 그 순간 뱀 대가리가 떨어져 나갔다. 야바는 할딱이며 상체를 세웠다. 차이석이 으스러트릴 기세로 요망한 것의 목을 움켜잡고 있었다. 뱀 가죽을 벗겨 낼 듯한 눈이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안 그래도 고양이 보양식으로 마땅한 걸 찾는 중이니까.”
뱀은 목이 졸린 채 두꺼운 몸통을 비틀었다. “적당한 짝을 찾아줘야겠어.” 차이석은 중얼거렸다. 제발 수뱀을 붙이든 말든 눈앞에서 치웠으면 했다. 차이석은 뱀을 안쪽 방에 내던지고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잠시 후 성난 표정으로 문을 거칠게 닫았다. 느릿느릿 걸어와 홈바 기둥에 기대섰다. 그는 자신의 맨 상체를 뱀 혓바닥 같은 눈으로 훑었다.
“설마 저 녀석이 벗긴 건 아니겠지?”
야바는 셔츠를 껴입고 야멸치게 노려보았다.
“차라리 깻잎이나 고추를 키워. 먹지도 않을 거면서 저런 걸 왜 키우는 건데?”
“나도 고민 중이야.”
차이석은 자신을 침대에 뉘이고 송로죽을 가져왔다. 죽은 물론 각종 보양식을 자신에게 먹였고, 그는 자신의 몸에 사는 벌레를 먹었다. 오늘 아침에는 배꼽에 사는 벌레를 잡아주었다. 이빨에 이겨진 벌레가 그의 식도를 넘어가는 장면은 아무리 봐도 비위 상했다. 뱀독에 질려서인지 벌레 출몰 횟수와 양이 눈에 띄게 줄었다. 덕분에 목욕 횟수도 줄었다. 공수한 음식을 모두 먹고 나자 차이석이 물었다.
“맛이 어때?”
“죽 맛이 다 그렇지 뭐. 어차피 네 멋대로 먹일 거면서 왜 자꾸 물어?”
“너 말야. 이상한 데서 승부욕을 자극해.”
차이석은 길쭉한 눈을 휘었다. 그리고 물잔과 약을 한 움큼 주었다. 와인빛 항우울제도 함께였다. 며칠 만에 먹는 항우울제는 어떤 보양식보다 달콤했다. 야바는 약을 삼키며 물었다.
“너 회사 안가?”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는 것보다 여기가 더 재밌는데.”
“간병은 간병인이 해야 돼. 회사 일은 회사원이 해야 돼. 간병인 붙여 주고 너는 회사 가.”
“남의 손 타는 건 싫거든.”
그는 자신의 볼을 툭 건드렸다. 야바는 입을 닫아 맸다. 외피는 타락한 귀족 같은 그가 일에 관해선 얼마나 철저한지 알고 있다.
“그러니까 차 회장이 너 싫어하지.”
차이석의 웃음소리가 흩어졌다.
“정확히는 무서워하는 거지. 차 회장과 화해하려면 둘 중 하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어야 돼.”
그에게 중간지대는 없었다. 그는 앞길에 방해되면 동족도 먹어치우는 거대 파충류였다. 어쩌면 차 회장은 본능적으로 아들을 견제하는지도 모른다. 차이석은 상체를 기울여 야바의 뒷머리를 살폈다. 귓전에서 혀차는 소리가 들렸다.
“왜 이렇게 안 아물지? ”
또 붕대에 피가 묻었나 보다. 머리를 몇 날 며칠 감지 않아 그가 만지는 게 거북했다. 셔츠를 당겨도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야바는 말했다.
“베개 모서리를 베서 그런 거야. 내가 잘 때 입 찢어진 여자가 와서 실밥을 하나씩 뜯었어. 베개 중앙을 베고 자면 괜찮아져.”
그는 한쪽 눈썹을 곤두세웠다.
“남의 침실에 멋대로 들어오다니 혼내줘야겠는데.”
차이석은 이상했다. 그는 고자 가수들처럼 자신의 언어를 난도질하지 않았다. 사고방식을 해부하지도, 뜯어고치려 하지도 않았다. 스스로의 모습을 똑바로 보는 건 무슨 의미일까? 똑바로 보면 그는 어떤 상을 줄까? 어릴 적 반푼이를 돌봐도 동정 어린 눈빛이 전부였다. 파라디소에서는 뭘 해도 창고행이었다. 여태껏 자신이 뭔가를 해도 상 준다는 사람은 없었다. 차이석은 자신이 온 힘을 다해 이룩한 세계를 손 하나 대지 않고 뒤바꿔놓았다. 그것은 붕괴와는 달랐다. 야바는 그를 멀거니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왜.”
그가 나직이 물었다.
“그냥.”
야바는 대답했다. 차이석은 눈을 내려뜨며 야바의 입술을 손끝으로 만졌다.
“벌레 잡아야지.”
속삭임 같은 살덩이가 야바의 귓불을 감았다. 어깨를 움츠렸다. 디지털시계가 붉은 눈을 감았다 떴다. 이제 곧 저주의 밤이 찾아온다.
새벽녘, 뭔가 부서지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침대 옆은 비어 있었다. 틈 벌린 문으로 날 짐승의 숨소리가 들렸다. 야바는 밖을 내다보았다. 어두운 거실 바닥은 망가진 물건으로 난장판이었다. 그리고 검은 인영이 홈바에 기댄 채 비틀거리고 있었다. 매일 밤, 이 시간만 되면 나타나는 야만인이었다. 미치광이였다. 야만인은 인기척을 느끼고 등을 돌렸다. 어둠에서 묻힌 눈동자가 악령처럼 번뜩였다. 그는 천천히 거리를 좁혀왔다. 야바는 마비되어 사지를 떠는 게 전부였다. 그때 거대한 뱀이 소리 없이 미끄러져 야만인의 허벅지를 물어뜯었다. 야만인은 팔뚝에 심줄을 세우며 뱀을 반으로 찢을 듯이 비틀었다. 사탄의 파수꾼은 대가리를 치켜들고 야만인에게 반격했다. 그러나 무자비하게 뜯겨져 벽에 머리를 부딪치고 나가떨어졌다. 야만인은 자신을 잡아채 침대에 내던졌다. 자신의 바지를 잡아 뜯고 양다리를 갈랐다. 야만인은 발기된 제 성기를 꺼내더니 인정사정없이 구멍을 헤집었다. 동시에 허리를 휘둘렀다. 격렬한 두드림에 수술 부위가 쓸렸다. 또 붕대에 피가 묻을 거다. 야바는 신음을 깨물었다.
“하앗……! 아파! 아파……!!”
“괜찮아. 금방 끝나.”
부드러운 음성은 야만스러웠다. 그가 입술을 삼키고 혀를 씹었다. 노래하라는 신호였으며, 하지 않으면 혀를 자르겠다는 경고였다. 야바는 미리 생각해두었던 노래를 불렀다. 야만인은 짙게 신음했다. 들락거리던 페니스는 얼마 가지 않아 정액을 쏟아냈다. 야만인은 잘게 피스톤질 하며 식도까지 핥을 기세로 혀를 쑤셔 넣었다. 구토가 나와 노래는 불가능했다. 야만인의 눈빛이 돌변했다. 낙하하는 눈동자는 뜨거운 쇳물 같았다. 교성이든 뭐든, 소리를 내지 않으면 그는 더 미쳐 날뛰었다. 야만인의 성기가 무수히 치대다가 다시금 정액을 뿜어냈다. 야만인은 허벅지에 자신을 앉히고 찔러 올렸다. 광적인 행위에 하염없이 흔들렸다.
“하앗…! 으응…하윽……!”
“헉…하아…….”
야만인은 손가락으로 야바의 입속을 휘저었다. 타액과 목소리 입자가 묻은 그의 손가락을 게걸스럽게 빨았다. 노래해. 멈추지 마. 뭔가에 홀린 눈빛은 악랄한 욕구로 이글거렸다. 우아하고 강인한 육체는 탐욕스러운 본능뿐이었다. 노래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게워냈다. 피스톤 질은 무섭도록 빨라졌다. 흉기가 들고나는 구멍에 거품이 일었다. 비린내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밑바닥에 숨은 쾌감이 후벼 파이자 의식이 흐물거렸다. 야만인은 짐승의 울부짖음처럼 파정했다. 이후로도 야만인은 자신의 성기와 뒷구멍을 빨면서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구멍에 페니스를 꽂기만 하고 노래를 다그치기도 했다. 저주의 시간만 지나면, 야만인은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얼굴로 다시 친절해진다.
야만인은 무장 해제한 채 침대에서 잠들었다. 가까스로 침대에서 일어나 난장판인 거실을 치웠다. 젖은 수건으로 그의 성기를 닦았다. 수건 한 장으론 모자랄 만치 그는 정액 범벅이었다. 땀투성이였다. 움직일 때마다 그가 퍼부은 정액이 꾸역꾸역 나왔다. 샤워하고 수건을 빨고 그의 곁에 누웠다. 허리 아래가 흘러내릴 것 같았다.
이 지경이 된 건 벌써 며칠째였다. 자신의 저주를 풀어준 죄로 그가 대신 저주에 걸려버린 거다. 저주를 풀 방법은 어딘가에 있을 거다. 그렇지만 성질 고약한 왕따 못난이가 왕자의 저주를 풀었다는 동화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지혜롭고 아름다운 사람만이 저주를 풀 수 있다. 그러니 그는 이 사실을 몰라야 했다.
게으른 고양이군. 축축한 것이 입술을 감쌌다. 농도 짙은 운율에 눈을 뜨자 차이석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깐 얼굴도장만 찍고 올 거야.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우면 차 회장이 성가시게 굴거든.”
“…….”
시간은 오전 11시를 향해갔다. 새벽에 소리를 너무 질러 목이 잠겼다. 아래쪽은 감각이 떨어져 나간 듯했다. 그는 잿빛 슈트를 걸치고 트렌치 더블코트 껴입었다. 자신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넥타이를 맸다. 타이 묶는 손놀림은 흠잡을 데 없이 정갈했다. 차이석은 침대 모서리에 팔을 기대고 비스듬히 몸을 기울였다. 시원한 스킨 향이 피부에 감겼다.
“누가 와도 들이지 마. 물론 외출도 안 돼. 먹고 싶은 건?”
그의 눈동자는 점점 메말라갔다. 혈색도 나빠졌다. 아침엔 자신보다 먼저 일어나 끼니마다 약을 챙기고, 틈틈이 서류를 검토하고……. 하루를 바쁘게 지내느라 그런 거라고 믿고 싶었다. 야바는 뻑뻑한 입술을 벌렸다.
“겨자 맛 아이스크림. 벽돌로 만든 초콜렛.”
“지독한데.”
차이석의 눈동자에 짓궂은 빛이 반사됐다. 그는 입술을 깊이 겹치고 야바의 혀와 호흡까지 빨아들였다. 셔츠로 양손을 미끄러트리며 젖꼭지 끝을 쓰다듬었다. 눅진한 감촉에 한숨이 새었다. 그는 출근할 의지를 내던진 사람처럼 아예 침대로 올라왔다. 야바의 볼과 턱 아래, 손가락 마디마디, 빠트리지 않고 그루밍 해줬다. 신음 끝자락에서 그가 눈썹을 찌푸렸다.
“좀 더 자. 최대한 빨리 오지.”
그렇게 말하고도 차이석은 침대에서 나가지 않았다. 죽과 보양식을 가져와 자신이 그릇을 깨끗이 비운 걸 확인하고서야 서류가방을 들었다. 손은 문고리를 돌리면서도 눈길은 자신에게 향했다. 차이석이 나가자 이번엔 요망한 것이 기어왔다. 적이 사라진 걸 탐색하고는 침대로 올라왔다. 게다가 뻔뻔하게 자신의 발목에 머리를 얹었다. 오늘 새벽 차이석에게 반 토막 날뻔해서인지 비실거렸다. 요망한 것은 백마가 아니고 자신은 아름다운 공주가 아니니 하는 수 없는 일이었다. 축축한 뱀 비늘이 질색이지만 걷어찰 힘이 없어서 관두기로 했다. 오늘은 어떤 방을 탐방하나, 요망한 것은 대체 어디에 넣어야 하나, 그가 진짜 겨자 맛 아이스크림과 벽돌로 만든 초콜렛을 구해오면 어쩌나, 뭐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불을 둘둘 말고 잠들었다.
코카인은 서류를 보고 얼어붙었다. 사설 연구소에 웃돈을 찔러준 덕분인지 결과는 다음날에 나왔다. 서류에는 세준과 시신의 가족 감식 결과가 있었다. 몇 번을 확인하고 확인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하하하…….
히스테릭한 웃음소리가 허공에 부서졌다. 싸늘해진 살가죽이 부들부들 떨렸다. 미칠 것 같다. 뭐든 하지 않으면 정신을 놓을 지경이다. 분노와 질투심, 온갖 너저분한 감정이 폭주했다. 그 힘에 떠밀려 연구소 건물을 빠져나왔다.
임 실장에게 사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단번에 거절당했다. 서류를 내밀자 그는 사장의 집으로 인도했다. 방에는 악취가 가득했다. 넓은 원룸 한쪽, 진물에 얼룩진 시체가 누워 있었다. 시체에 깔린 드라이아이스가 부패를 지연시키는 듯했다. 사장은 시신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모던한 인테리어에 어울리지 않은 엽기적인 광경이었다. 코카인은 기하에게 서류를 건넸다. 초점 풀린 눈동자는 서류를 보지 않았다.
“야바의 친형과 그 시신의 유전자를 비교했습니다. 친형을 어떻게 찾았는지는 나중에 말씀드릴 테니 일단 결과부터 보시죠.”
이윽고 사장의 눈길이 서류에 닿았다. 선뜻 알지 못한 눈치였다. 코카인은 소리쳤다.
“무슨 뜻인지 모르시겠어요? 거기 누워 있는 건 야바가 아니라구요! 모두 속았어요!”
사장은 찬물 세례를 맞은 낯빛이었다. 그는 서류가 구겨지도록 움켜쥐었다. 종이에는 항목마다 퍼센티지가 쓰였고 직사각형 모양의 도식표가 있었다. 빠르게 긁어 내리던 눈길이 한 곳에 멈췄다.
[DNA 프로필 검사 결과 99.999…% 불일치. 혈연지간 아님.]
사장은 둔기에 정수리를 찍힌 양 굳었다. 일순, 그의 눈에서 살기가 뿜어졌다.
“노트북 가져 와.”
임 실장은 노트북에 단말기를 연결했다. 사장은 조금 전보다 훨씬 냉철해진 눈으로 화면을 훑었다. 한순간 그의 눈이 커다래졌다. 코카인도 모니터를 보았다. 야바의 마지막 기록은 전복사고 지점이다. 그런데 몇 시간 뒤 다른 곳에서 신호가 기록됐다. 최종 기록은 경찰소도 사장의 집도 아니었다. 코카인은 마디가 부서지도록 손을 움켜쥐었다.
“적어도 제가 아는 한, 이런 짓을 실행에 옮길 사람은 하나밖에 없는데 사장님 생각은 어떠시죠?”
사장은 눈가를 떨며 이를 갈았다.
“씨발. 차 전무!”
차이석이 뒤통수를 거나하게 후려쳤다. 너무나 화려하고 흠잡을 데 없는 쇼여서 박수갈채를 보내고 싶을 지경이다. 지금 이 시간, 야바는 장미꽃에 파묻혀 자신을 비웃고 있겠지. 혼자만 이 지옥에서 빠져나가겠다고? 사과 한마디 없이 혼자만?!!! 밀고자에게 장미꽃이라니, 어림없는 사치다. 자신이 평생 이룩한 위치를 하루아침에 빼앗겼다. 수백 번의 시행착오로 터득한 것을 야바는 단 몇 달 만에 깨우쳤다. 그럼에도 스스로 무슨 짓을 했는지조차 모른다니, 그 목을 비틀고 싶었다. 차이석, 차라리 술과 마약에 절어 여자와 뒹구는 쪽이 나았다. 이제 충분히 놀았으니 자신에게 돌아올 때가 됐다. 코카인은 핏대 세운 눈으로 기하를 응시했다. 맹독이 턱 끝까지 차올라 혓바닥을 조종했다.
“사장님. 또 다른 힐러를 찾고 계신다고 하셨죠.”
이제야 너를 이해하겠어. 그동안 무신경하게 너를 난도질했던 것 정식으로 사과할게.
이 마음만은 진심이야.
“그 힐러를 넘겨주면 저한테 뭘 해주실래요?”